Chapter 10
“아, 진짜 유정현 나랑 안 맞아.”
느지막한 오전 시간, 한적한 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한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연신 23년 지기인 정현에 대한 불만을 쏟아 냈다.
“그 자식, 너 보면 내 욕만 할 텐데. 입을 막을 수도 없고, 아주 귀찮아.”
“안 그래. 그냥 오랜만에 얼굴 보자는 거야. 그간 바빠서 전화만 했지 얼굴 본 지 오래됐거든.”
“그러니까 같이 보면 얼마나 좋냐고?”
“너도 오늘 부지 나가 봐야 한다며.”
“그건 그렇지만…….”
신우의 외출에 맞춰 인재의 일정을 받기로 한 것이니 막상 같이 보자고 해도 곤란한 상황이긴 했다.
“설마 유정현하고 서인재랑 서로 짜고 나 멕이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 녀석들이면 가능해. 인재는 어떻게든 나 출근시키려 하고 정현이 자식은 어떻게든 날 물 먹이고 싶어 하니 손발이 착착 잘 맞을 거야. 그러니까, 절대 두 사람을 만나게 하면 안 되겠어.”
“둘이 본 적 없어?”
정현이와 한은 23년 지기 친구고, 인재는 대학에서 만나 10년을 알아 왔는데 그사이 만난 적 없냐는 말에 막 우회전을 한 한이 무심히 답해 준다.
“우리 집에서 두어 번 본 적은 있는데…… 애초에 카테고리가 다르니까. 대학 친구는 대학 친구, 고등학교 친구는 고등학교 친구, 소꿉친구는 소꿉친구잖아.”
“인재 씨, 잘은 모르지만 정현이랑 잘 맞을 것 같던데.”
“잘 맞는 정도가 아니라 서로 영혼의 쌍둥이를 찾았다고 느낄걸. 하는 짓이며 기본 기질이 아주 똑같아.”
그러고 보니 좀 그런 느낌이 있다고 고개를 끄덕이던 신우는 멀리 보이는 건물을 확인하곤 말을 돌렸다.
“한아, 나 저 앞에서 내려 주면 돼.”
“왜? 아직 더 가야 되는데.”
“걔네 회사 앞에서 차 돌리기 힘들어. 여기서 그냥 곧장 가면 되잖아.”
정현의 회사 건물 앞까지 들어가면 건물 지하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아 나오거나 한참을 더 돌아가야 한다고, 신우가 차 돌리기 편한 자리에서 내려 달라고 하자 한이 다시 속도를 높인다.
“싫어. 앞까지 데려다주고 갈게. 차 돌리기 힘들어도 돌리면 그만이야.”
“시간 없잖아.”
“괜찮아. 일찍 나와서 여유 있어.”
“하지만…….”
괜히 빙빙 돌아갈 것 없다고 신우가 뭐라 하려던 찰나 한이 신우를 힐끔 돌아보며 넌지시 묻는다.
“넌 나랑 1초라도 더 같이 있고 싶지 않냐?”
“응?”
“난 1초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일부러 멀리 돌아서 온 건데, 그렇게 빨리 내리고 싶냐고. 너, 아무리 내가 먼저 반하고 좋아한다지만 그렇게 방목하면 나 삐뚤어진다?”
말 안 듣는 아이 같은 투정에 신우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삐뚤어지게?”
“자꾸 나 섭섭하게 하면 아예 일 안 하고 집에서 노는 수가 있어. 인재가 아무리 들들 볶아도 회사에 안 나가고 일도 다 내팽개치고 집 안에 드러누워서 네 옆에서 안 떨어질 거야.”
“그건 좀…… 인간쓰레기 같지 않아?”
“쓰레기라니? 난 건물주라고.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 재산 다 내 거야.”
“동생들 있다며?”
어제 얼핏 남동생만 둘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어 확인하듯 묻자 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응, 있지. 시끄러운 놈 하나랑 과묵한 놈 하나.”
“너랑 닮았어?”
“얼굴은 닮았는데, 시끄러운 놈은 크고 마르고, 과묵한 놈은 거대해. 시끄러운 놈은 엄청 시끄럽고 신경질적인데 정현이한테는 꼼짝도 못 해. 둘이 있는 거 보면 커다란 시베리안 허스키가 치와와한테 얻어터지는 것 같다니까.”
정현이 보통 성질이 아니라 그 녀석도 꼼짝 못 한다며 한이 웃음을 터트리자 신우가 신기하다는 듯 눈을 껌뻑인다.
“네 동생이 신경질적이라니 잘 안 믿겨.”
“걔는 아빠 닮았어. 우리 아버지가 좀 예민하시거든. 어머니는 무던하시고. 재미있는 거 가르쳐 줄까?”
“뭐?”
“우리 집 아들들 평균 키가 195인데 아버지는 177이다? 어머니는 160 조금 안 되시고.”
한의 부모님도 당연히 엄청 클 것이라 짐작했던 신우는 그 말에 신기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진짜? 너희 할아버지 엄청 크시잖아.”
“그러니까 그게 재밌다니까. 이걸 격세유전이라고 하나? 우리 할머니가 무지 아담하셨거든. 삼촌하고 고모들은 할머니 닮아서 다 작아. 그런데 우리 형제랑 사촌들은 다 커. 여자들은 평균 175 남자들은 평균 190이야.”
한이 194쯤 된다고 했으니 동생이나 사촌들도 크겠지만 평균 190이라면 너무 크다. 그 정도면 배구팀이나 농구팀을 만들어도 될 정도였다.
“동생들도 다 커?”
“응.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게 시끄러운 놈이 186, 과묵한 놈이 195였으니까. 남자들은 23살까지 크기도 하니 그 뒤로 더 컸으면 지금쯤 어마어마하겠지.”
“동생들은 뭐 해?”
한의 동생이면 그다지 나이 차가 나지 않을 텐데 그 덩치라면 운동을 하지 않을까 싶어 묻자, 한이 시원하게 대꾸한다.
“몰라.”
“……동생들이 뭘 하는지 몰라?”
“뭐, 잘 살겠지. 아직 죽었다는 소식은 못 들었으니까.”
형제지만 걔들 진로 같은 건 관심 없다고 한이 솔직하게 말하자 신우는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얼굴로 한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넌 이럴 때 보면 되게 무심한 것 같아.”
“할아버지는 귀찮다고 자식들도 다 내쫓았는데, 뭐. 할아버지나 나나 하나에만 집중하는 타입이라서, 사람도 한 사람한테만 집중해. 자식이고 가족이고 뭐고 없어. 무심한 건 인정하지만 어쩔 수 없지, 뭐. 타고난 게 그러니까.”
“난 동생 있다면 뭐든 다 챙겨 주고 싶을 것 같은데.”
순간 아차 싶은 기분에 신우는 자신의 입을 손으로 가렸다. 동생이 있다고 해 놓고 동생이 있다면, 이라고 가정법을 써 버렸다. 워낙에 눈치가 빠른 녀석이라 한이 뭔가를 캐물을까 싶어 눈치를 살피자 한이 자연스럽게 대화의 방향을 튼다.
“그런데 너도 그건 알아야 돼. 동생도 동생 나름이야. 내 동생들은 별로 귀엽지 않아. 내가 뭘 챙겨 줄 필요도 없고. 일단 자기 일들은 다 알아서 잘하고 누가 간섭하는 것도 싫어해. 우리 집 사람들 기질이 좀 그래. 독립성이 강한 편이라 오히려 너무 간섭하면 싫어하거든.”
“그래도 보고 싶지 않아?”
“난 너만 보면 되는데?”
장난기 섞인 그 말에 신우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뜨거운 햇살이 도시 위를 비추고 있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강한 그 빛에 모든 사물이 생생히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와 함께 오래된 기억들 역시도 하나씩 되살아났다.
“동생 몇 살이야?”
“시끄러운 놈은 세 살 아래. 그리고 과묵한 놈은 네 살 차이. 둘이 연년생이야.”
“그럼 지금 스물여덟이겠구나.”
“응. 아……그럼 유학 갔나? 아, 아니겠다, 그건. 걔가 회계학과였나? 사학과였나?”
동생 일임에도 마치 남 이야기하듯 말하는 한에게 신우는 조심스레 말을 더했다.
“볼 수 있을 때 자주 봐 둬. 그러다 보고 싶어질 때 못 보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때, 자신이 그랬었다. 그 아이를 영원히, 보고 싶을 때면 언제나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하루쯤은 안 봐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간혹 그 하루가 영원을 앗아 가기도 한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 고모의 말대로 자신이 팔자가 센 탓에 지독한 악운을 달고 다니는 건지도 모르지만 ‘오늘 하루 정도는’이라고 하는 날이 가끔은 운명을 뒤바꾸기도 한다.
“뭐, 나도 안 본 지 오래되긴 했으니 한 번 보긴 해야 하는데…… 너도 같이 볼래?”
“응?”
“할아버지 허락받았으면 다른 가족들은 무조건 통과니까 이제 안면 트고 지내야지. 보면 재미있을 거야. 형제인데 저렇게까지 다를 수 있구나 하고 신기할걸.”
유전자의 미스터리를 경험하게 될 거라는 한의 농담 같은 말에 신우는 이번엔 조금 망설이다 긍정의 답을 내주었다.
“……그래. 한번 보고 싶다.”
한 번쯤은 그의 동생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신우가 고개를 순순히 끄덕이자, 오히려 한이 놀란 듯 휙 하고 신우를 돌아봤다.
“웬일이야? 순순히 그러자고 하고. 또 대답 안 하고 질질 끌면 길거리에서 키스해 버리려고 했는데?”
“길거리에서 키스를 왜 해?”
“협박. 넌 진짜 말 안 들으니까.”
“그렇다고 사람들 앞에서 키스를 해?”
“못 할 것도 없지. 애인인데. 난 너랑 사귄다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다고.”
다른 사람이 저런다면 그냥 웃어넘기겠지만 한이라면 진짜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신우는 헛웃음을 흘렸다.
“요즘은 그것도 공연 음란죄야. 아, 다 왔다. 여기 세워 줘.”
정현과의 약속이 있는 가게 건물을 신우가 가리키자 한이 천천히 속도를 줄여 인도 옆에 차를 댄다.
“점심 맛있게 먹고 둘이 신나게 내 욕 한 뒤에 헤어지면 전화해. 오늘 측량만 하면 되니까 나도 빨리 들어올 거야. 저녁은 집에 가서 먹어야겠지만 그전까지 데이트하자고.”
“알았어.”
안전띠를 푼 신우가 차 문을 열고 내려서자 한이 손을 휘휘 젓는다. 볕에 탈까 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라는 한의 손짓에 신우는 뒤를 돌아보곤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완연한 여름이다. 아스팔트를 녹일 듯 강한 열기와 눈 부신 빛을 피해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선 신우는 뒤를 돌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한에게 어서 가라는 듯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그제야 한의 차가 서서히 움직였다.
천천히 건물에서 멀어진 한의 차가 이내 회차하기 위해 건물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신우는 걸음을 서둘러 언제나 정현과 만나던 가게를 찾았다.
‘Plate’라고 쓰인 입간판이 놓인 가게 안으로 들어선 신우는 쾌적한 실내를 가로질러 늘 둘이 앉던 안쪽의 자리를 찾았다. 그러자 역시나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정현이 손을 흔들었다.
“빨리 왔네.”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정현의 앞자리에 앉아 인사를 건네자 정현 역시 웃으며 인사를 받는다.
“오전에 외근 갔다 일이 빨리 끝나서 먼저 왔어. 뭐 먹을래?”
“늘 먹던 거.”
“그럼 나도 늘 먹던 거 주문해야겠다.”
호출 벨을 누른 정현은 물을 가져온 직원에게 주문을 마친 뒤 신우를 돌아봤다.
“너, 얼굴 좋아 보인다? 한이가 잘해 줘?”
정현다웠다. 주문이 끝나자마자 직진으로 달려드는 정현을 보며 신우는 머쓱한 듯 웃었다.
“잘해 줘.”
“한이네 집에서 지낸다며? 그 집 재미있지?”
“응. 할아버지도 좋으시고 집도 예쁘고 좋더라. 개들도 귀엽고.”
그 커다란 덩치들이 포위하듯 몰려들면 조금 무섭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젠 제법 자신을 잘 따르는 편이었다. 물론, 몇 번 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낯선 이를 경계하는 느낌은 아니라고 하자 정현이 눈을 휘둥그레 뜬다.
“할아버지가 너한테 개 보여 주셨어?”
“응. 엄청 커서 처음엔 좀 무서웠는데 사람을 좋아하나 봐.”
“와, 할아버지가 진짜 너 마음에 들어 하시나 보네?”
“응?”
“걔네 할아버지, 개들은 다른 사람이 절대 못 만지게 하시거든. 워낙 드물고 귀한 종이라 나도 가끔 가서 찝쩍거렸는데 손도 못 대게 하셨어.”
“그래? 가끔 산책시켜 주라고 하셨는데?”
순간 정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너 마음에 들어 하실 줄 알았어. 개밥하고 산책은 전문 사육사 아니면 못 맡긴다고 하셔서 한이도 그건 못 해. 그 개들이 한이를 별로 안 좋아하기도 하지만.”
“어…… 좀 그런 것 같더라.”
한이 해외에 있다 오랜만에 돌아와서 그런 건지 확실히 한과 개들은 데면데면한 눈치였다. 그러니까 처음 보는 사람처럼 경계하거나 으르렁거리지는 않는데, 부딪치면 서로 다른 데를 쳐다보며 모르는 척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바로 어제도 저녁 식사 후 산책하다 잠깐 개들과 마주쳤는데 노골적으로 한을 무시하는 기색에 개들도 저런 반응을 보이나 하고 웃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때 개들 표정이 진짜 사람 같았다.
“자기네들 패거리가 아니라는 거야. 너 따르는 거면 넌 자기들 무리로 인식한 거고.”
“할아버지도 그러시던데 신기하네. 그런 걸로 인식한다니.”
“응. 하는 짓은 안 그런데 종 자체가 늑대개라 야생성이 많이 남아 있더라고. 할아버지가 주에 한 번 한우 갈비를 통으로 주시는데 그걸 날것으로 먹어. 뼈를 아작하고 씹어 먹는데 보면 좀 무섭더라. 거기다 1견 1닭이야. 간식으로 두당 닭 한 마리를 그냥 먹어.”
아직 개들에게 먹이를 줘 본 적은 없어서 모르지만 덩치나 이빨 상태로 봐선 작은 동물들은 산 채로도 먹을 것 같긴 했다.
그렇게 잠시 맥락 없는 대화를 나누던 사이 주문한 파스타가 나왔다. 각자의 앞에 놓인 그릇을 보고 신우가 먼저 포크를 들자 앞에 있던 정현도 손을 움직이며 슬쩍 신우의 눈치를 살핀다.
“한이가 별말 안 해?”
“무슨 말?”
“나 만나고 가서 죽는소리 안 했냐고.”
“네가 갈아 버린다고 했다고는 했어.”
“갈아 버리기만 해? 갈아 마셔야지. 그래도 네 덕에 좋은 구경 했다.”
“무슨 구경?”
“내가 만나기 싫다니까, 싸대기 맞아 준다고 나오라더라. 걔, 그럴 녀석이 아니거든. 내가 말장난으로 죽여 버리고 싶다고 하면 진지하게 ‘그 전에 네가 죽을걸’ 이러는 놈이잖아. 그게 다 맞는 말이라 얼마나 얄미운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본 지는 오래됐지만 둘의 대화 패턴은 여전한 듯했다. 어디서든 눈에 띌 정도로 큰 한과 보통보다 조금 작은 체구의 정현은 평화롭게 대화를 하려 해도 채 열 마디를 넘기지 못했다.
소소한, 진짜 별거 아닌 일로 티격태격하다 이내 정현이 ‘너 때문에 되는 일이 없어!’라고 화를 내면 한은 심드렁한 얼굴로 그러든가 말든가 마음대로 하라는 듯 무시하고, 그러다 결국 정현의 욕 퍼레이드가 시작되는 게 그들의 대화 수순이었다.
“친하니까 그런 거지.”
“친해서가 아니라, 그냥 걔 성질이 더러운 거야. 지가 덩치 크고 힘 좋으니 오히려 누가 힘으로 압박하는 거 진짜 싫어해. 걔 팔 근육을 봐. 어릴 때부터 별 운동 다 해서 사람도 맨손으로 죽일 수 있을걸. 거기다 태권도 검도 특공 무술 유단자야. 걔가 작정하고 한 대 치면 난 사망이야.”
그건 그렇다고 신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덩치 차도 크지만 근육이나 완력의 차이는 더 클 것이다.
순간 한에 의해 휙 하니 저 멀리 날아가는 정현이 상상돼 신우가 낮은 웃음을 흘리자 정현이 신이 나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간다.
“그런 놈이 맞아 준다니 얼마나 기뻐? 내 평생소원이 정한 한 대 후려갈기는 거였는데. 솔직히 걔 인성에 문제 많잖아. 그런 놈이 인생 잘 풀리는 꼴 보면 가끔 살인 욕구가 인다고.”
“좀 그럴 때도 있긴 하지.”
“그치? 그러니까 난 네가 걔 좀 부려 먹었으면 좋겠어.”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 대화에 신우는 당황했지만 정현은 여전히 신난 채였다.
“난 못 하니 네가 대신해 줘. 새벽에 갑자기 뭐 먹고 싶다고도 하고 영하 17도 눈 오는 날 밖에서 한 3시간 세워 둬 봐. 서울에서 부산으로 뺑뺑이도 돌리고.”
부려 먹는 수준을 넘어 학대를 하라는 정현의 말에 신우는 그건 아니라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건 좀…….”
“좀, 뭐? 재밌잖아.”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는 듯 정현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아무래도 그게 정현의 진심인 듯했다.
그걸 눈치챈 신우가 곤란해하는 미소를 짓자 정현이 그런 마음의 소리를 읽은 듯 포크를 내려 두곤 테이블 위로 몸을 기댄다.
“야, 너 생각을 해 봐. 그런 놈 옆에서 20년 넘게 친구 한 내 심정이 어떨지. 나니까 그놈 옆에 있어 준 거야. 다른 사람이면 걔랑 그렇게 오래 친구 못 해.”
내가 언젠가 이런 날이 오길 꿈꾸며 버텼던 거라고 너스레를 떠는 정현을 보며 신우는 재미있다는 듯 웃어 보였다.
자신에겐 그렇게 오래된 친구가 없어 잘 모르지만 어린 시절부터 알던 친구라는 게 원래 이런 느낌일까 싶어 얼굴이 느슨하게 풀렸다.
기분 좋아 보이는 그 미소에 정현이 신우를 빤히 바라본다. 그 시선에 신우가 왜 그러냐는 듯 정현을 마주 보자 정현이 진지하게 중얼거린다.
“너, 그렇게 웃으니까 보기 좋아서.”
“……내가 그렇게 안 웃었어?”
“응. 하여간 그 자식이 나쁜 놈이긴 해도 너 진짜 많이 좋아하나 보다. 이렇게 사람 웃게도 만들어 주고.”
“한이는 다정하니까…….”
“다정하긴 개뿔. 다정한 놈이 5년 동안 연락 없다 갑자기 새벽 2시에 전화해서는 ‘나 지금 귀국한다. 내일 오후 5시에 공항으로 데리러 와.’ 이러고 전화를 끊냐? 열 받아서 안 나가려다 아구창 한 대 날리러 갔는데 그 김에 짐꾼에 운전기사 노릇만 했지, 뭐. 진짜 재수 없어.”
“너랑 진짜 친하니까 그렇지. 5년 동안 연락 안 해도 나와 줄 거 알았을 거야.”
“그러니까 더 열 받는다고. 내가 호구냐? 그 자식 은근히 사람 부려 먹는 데 뭐 있다니까. 그리고 나 최근에야 알았는데 너 고등학교 때 그놈이 나 막판에 무지 괴롭힌 거 알아?”
“……응?”
“내가 저번에 한이 만나고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고3 때 일이 기억나더라고. 그때 그 자식이 날 엄청 긁어서 내가 저놈을 언젠가 죽여 버리겠다고 벼르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그놈이 결국 이실직고하더라. 너랑 나랑 같이 다녀서 열 받았었다고. 그래서 너 무시하고 나한테는 온갖 심술 다 부린 거고. 그 덕에 고3 때는 거의 같이 안 다녔었지. 졸업한 뒤에는 가끔 연락해도 욕만 하고.”
그러고 보니 한에게도 그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정현과 함께 다녀서 홧김에 무시했었다는.
“걔 보기보다 엄청 유치하고 쪼잔한 것 같지 않냐? 멍청한 새끼가 지가 하는 게 연애인지 뭔지도 모르고 말야.”
“응?”
“하긴, 너도 몰랐겠다. 너희 둘, 그때 연애한 거 모르지?”
신우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정현을 바라보자 정현이 음흉하게 웃는다.
“그때, 너희 둘이 한 건 연애였어. 그런 건 주변 사람들의 눈이 더 정확하거든. 혹시나 해서 며칠 전에 동창들한테 은근히 떠보니까 그러더라. 그렇지 않아도 그때 너희 둘이 사귄다고 학교에 소문 다 났었다고. 그러다 한이랑 너랑 같이 안 다니니 내가 너 뺏은 거라고 애증의 삼각관계 어쩌고 하고 지들끼리 난리도 아니었나 봐. 당사자인 우리만 몰랐지.”
세 사람의 출신고는 남학교였고 그러다 보니 심심한 학생들끼리 온갖 이상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 퍼트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화제의 중심에 자신이 있었다는 사실에 신우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다 좋은데, 애증의 삼각관계는 또 뭐야?”
“걔들 눈에 그냥 그렇게 보인 거지. 지금 생각하니 말도 안 되는데 그땐 다들 심각했다고 지들도 미친 듯이 웃더라. 정한은 아직도 모를 거야. 우리가 진창에서 뒹구는 호모 치정극의 주인공이었다는 걸.”
호모 치정극이라는 말에서 이번엔 그냥 허탈한 듯 웃고 말았다.
“진짜 상상력들도 대단하다.”
“치정극은 상상도 아닌 망상이지만, 너희 연애는 상상이 아닐걸. 너희 둘 그런 분위기였어. 한이처럼 눈에 띄는 녀석이 쉬는 시간마다 가서 확인하고 체크하고 예쁘다 예쁘다 하면서 붙어 다니는데 애들이야 당연히 알아채지. 그놈이 원래 좀 화려하잖아.”
“그래도 좀 어이없는데?”
“어이없을 거 없어. 내가 보기에도 너희들 서로가 첫사랑이었으니까. 그리고 재미있는 거 하나 가르쳐 줄까?”
“또 뭔데?”
문득 정현의 오지랖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지나 전 우주적인 스케일을 자랑한다던 한의 투덜거림이 떠올랐다. 그 말에 공감하며 정현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자 정현이 눈을 반짝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동안 정한 사귄 애인들 다 너 닮았다? 아마 한이도 몰랐을 거야. 그 취향의 시작점이 너라는 건.”
뜻밖의 말에 신우가 고개를 갸웃하자 정현이 재빨리 설명을 덧붙였다.
“걔 대학 다닐 때 유명했어. 작업할 때 무조건 커피 한 잔 손에 쥐여 놓고 시작한다고. 그래서 왜 그러냐니까 커피를 예쁘게 마시는 사람이 좋대. 그런데 그거 기억하지? 한이 너 만날 때마다 커피 사 준 거. 그것도 꼭 자판기 커피.”
“……아…….”
“그 변덕스러운 놈이 13년 동안 너 품고 있던 거면 믿어 봐도 좋을 거야. 걔네 할아버지가 바로 그놈 롤 모델이니 그것도 똑 닮았겠지. 그러니까, 마음껏 어리광부려. 칭얼거리고 투정도 부려. 못되게 굴면 싸대기 한 대 날리고 열 받으면 손도 못 대게 해 봐.”
이번에도 역시 정현은 진심인 듯했다. 하지만 그건 자신에겐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괜히 파스타를 뒤적거리자 정현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인다.
“넌 그래도 돼. 내가 아는 한 한이한테 넌 가장 특별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져도 돼.”
순간 파스타를 뒤적이던 손이 멈췄다.
정현은 마치 자신의 불안을 그대로 읽기라도 한 듯 자신이 가장 듣고 싶어 하던 말을 해 주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어딘지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오늘 굳이 정현과 둘이 만나자고 했던 건 한과의 관계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13년간 늘 자신의 곁에 있어 준 정현에게 위로받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말로 하지 않아도 정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뭘 무서워하는지, 그리고 뭘 고민하고 있는지…….
그러고 보면 항상 자신이 가장 힘들고 외로울 때 곁에 있어 준 게 정현이었다. 졸업 후 아버지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정신이 없을 때도,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조용하지만 묵묵히 옆자리를 지켜 주었다.
“고마워.”
문득, 터져 나간 진심에 정현이 의아한 눈빛을 보낸다.
“뭐가?”
“그냥, 전부.”
“진짜 고마우면 한이 한 대만 치게 해 줘.”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제안에 신우가 웃음으로 무마하자 정현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입술을 삐죽인다.
“둘이 사귀더니 아주 가지가지 한다. 잘 놀아라, 바퀴벌레들아.”
언제나와 같은 정현의 투덜거림에 신우는 웃으며 다시 포크를 움직였다. 그리고 정현 역시 식사를 계속하며 소소한 일상사를 떠들어 댔다.
지난 13년과 별 다를 바 없는 식사 자리였지만, 아주 조금 특별하게 느껴지던 건 다른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실감하게 된 탓이었다.
그간 머리로는 알아도 체감은 못 했는데 지금은 알 것 같았다.
자신을 아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모처럼 맛있게 먹었다.”
후식으로 나온 커피까지 마신 뒤 가게를 나온 정현은 기분 좋은 듯 기지개를 쭉 켰다. 모처럼 좋아하는 가게에서 느긋하게 점심을 먹어 만족스러워하는 정현의 옆에서 신우 역시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듯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넌 이제 회사 들어가는 거야?”
“응. 이제 들어가 봐야지. 넌? 곧장 집에 들어갈 거야?”
“잠깐 볼일 보고 한이 기다리려고. 한이도 오늘 부지 보러 가서 금방 온다고 같이 들어가자고 해서.”
마침 시간이 빈 김에 전에 살던 집에 들러서 우편물도 챙기고 부동산에 방도 내놓을 생각이었다. 지하철로 움직이며 대충 일을 정리하면 한과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와, 정한 웃기네? 그 새끼 툭 하면 사람 버리고 다니기로 유명한 놈인데 넌 잘 모시고 다니나 봐?”
“응?”
“내가 그 자식 인성에 문제 있다고 했잖아. 돈은 벌면 되지만 시간은 흘러가면 다시는 안 돌아온다고 뭘 복잡하게 시간 맞춰 오고 가고 하냐고 사람 아무 데나 막 버리고 다니는 물건이야, 그게.”
“……그랬어?”
“그랬어. 나도 몇 번 흘리고 다닌 적 있어. 동생들은 말로 할 것도 없고.”
한이라면 어쩐지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아 반박할 수 없었다. 애인의 특별 대우에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애인의 인간성에 슬퍼해야 할지 애매한 상황에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데 하늘이 어두웠다.
습도와 온도는 여전히 높은데,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낀 채였다.
“하늘 왜 저래? 소나기 쏟아지려고 하나?”
방금 가게에서 봤을 때와 또 달라진 하늘빛에 정현이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리자 신우가 그대로 말을 받는다.
“이제 장마철이잖아.”
“오후에 외근 없어서 다행이다. 날씨가 왜 이렇게 변덕스러워?”
“이 시기엔 늘 그렇지, 뭐. 너, 비 오기 전에 사무실에 들어가려면 빨리 가야겠다.”
하늘색이 바뀌는 게 심상치 않았다. 당장이라도 소나기가 쏟아질 듯했다.
“그럼, 너도 빨리 가. 지하철역 갈 거지?”
“응. 갈게, 그럼.”
비가 곧 내릴 것 같은 날씨에 서둘러 건물을 나와 각자 갈 방향으로 흩어지려는데 정현이 문득 용건이 생각난 듯 돌아선다.
“신우야.”
갑작스러운 부름에 신우가 뒤돌자 정현이 다시 다가와 말을 건넸다.
“내가 이거 말하는 거 까먹었는데…….”
“뭐?”
“내가 한이 때문에 너랑 친해진 건 사실인데 지금은 한이보다 네가 더 좋아. 그러니까, 만약에 앞으로 무슨 일이 생겨서 그 새끼랑은 인연 끊게 돼도 너랑은 안 끊을 거야. 평생, 친구 할 거야.”
예고 없는 우정 고백에 당황한 듯 눈을 껌뻑이던 신우는 이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신우 역시 어렴풋하게나마 자신의 미래에 끝까지 남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정현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명진과 정현만큼은 자신의 옆에 있어 줄 거라는 막연한 예감이 있었다.
언제나 곁을 지키진 못하더라도, 1년이 아니라 5년 만에 연락해도 웃으면서 만날 수 있는 친구.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달려와 도와줄 수 있는 사람.
그게 정현이었다.
마침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정현이 직접 그렇게까지 말해 주는 게 기뻤다. 어쩐지 마음이 벅차올라 머뭇거리자 정현이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러니까 너도 그래야 돼. 한이랑은 어떻게 돼도 나랑은 친구 해야 돼.”
“지금까지도 그랬잖아.”
“그러니까 앞으로도 말야.”
다른 사람들보다 배는 까다롭고 예민하지만 정현은 원체 사람을 좋아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다 퍼부어 주는 타입이었다.
신우 역시 그런 정현이 좋았다. 그간은 늘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로 돌려 말했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너 많이 좋아해.”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그 말에 신우 본인도 조금 놀라 아차 하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정현은 아주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래. 그러니까 그 새끼는 일단 따돌리고 보자고. 아, 비 오겠다. 빨리 가라. 나도 빨리 들어가야겠다.”
“응.”
“가.”
한 번 더 반복된 인사에 신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현이 그제야 다시 돌아서 걸음을 옮긴다.
습한 공기에 어두운 하늘은 당장이라도 빗줄기를 흩뿌릴 것 같았지만 그 풍경 아래 놓인 자신의 기분은 가벼웠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정현의 등을 봐도 그다지 마음이 시리지 않았다.
지금은 잠깐 돌아서지만, 언제고 부르면 자신을 향해 달려와 줄 걸 알고 있기에 그 뒷모습이 아프지 않다.
어쩐지 홀가분해진 기분에 다시 지하철역을 향해 돌아서는데 가방 안에 있던 휴대폰이 울려 왔다. 한인가 해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들자 낯선 번호가 떠 있었다.
고모도 원혁도 아니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에 잠시 전화를 받을까 말까 망설였지만 일 관계일 수도 있어 일단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에 걸음을 서두르며 답하는데 수화부는 조용했다.
“……여보세요?”
소리가 안 들리나 싶어 다시 한번 받았다는 신호를 보낸 뒤, 번호를 확인하려는데 나지막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저…… 연신우 씨 휴대폰 맞나요?
“네, 맞습니다. 그런데, 어디시죠?”
- 갑자기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강혜진이라고 합니다.
조심조심, 굉장히 어려운 사람을 대하는 듯 자신 없는 그녀의 음성에 신우는 방금 들은 이름을 되새겨 봤지만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보통 일을 할 때는 회사명이나 프로젝트명을 언급하며 통화하기 때문에 담당자의 이름 같은 건 시간이 지나면 잊는다.
“죄송하지만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업체명을 알려 주시면 알 것 같습니다만…….”
친한 사람이 아닌 건 분명하니 업무 연락일 거라 생각해 되묻자 그녀가 떨리는 숨을 천천히 내쉰다. 그러고는 겨우겨우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건네 왔다.
- 저, 혹시 이영혜 씨라고 아시나요?
“이영혜 씨요? 누구……. 아…….”
한발 늦게 떠오른 그 이름에 신우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이젠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기억 속에 묻어 둔 아주 오래된 기억과 감각들이…….
무서울 정도로 강하게 내리쬐던 햇볕이 가시고,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소나기가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빗줄기에 나무의 위치와 뿌리가 이어진 곳을 확인하기 위해 열심히 여기저기 땅을 파고 다니던 한은 서둘러 차로 돌아와 비를 피하며 혀를 내둘렀다.
“뭐, 이렇게 갑자기 쏟아져?”
날씨에 민감한 한조차도 눈치챌 틈 없이 기습적으로 쏟아진 폭우였다.
한이 어이없다는 듯 손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아 내는 사이 같이 도망 온 후배인 영민 역시 당황한 얼굴로 양복의 물기를 털어 낸다.
“갑자기 웬 비래요? 오늘 비 소식 없었는데.”
망할 기상청, 이라는 영민의 투덜거림에 한 역시 이상하다는 듯 하늘을 바라본다.
“비 올 날씨가 아니었는데.”
“그러니까요. 요즘 날씨 진짜 이상해. 이제 여름인가 하면 갑자기 추워지고, 이제 좀 시원하다 싶으면 바로 한파가 오고 그러다 또 며칠 덥고. 이래서는 오늘 중에 확인을 못 하겠는데요?”
다행히 드론 촬영은 금방 끝났고, 측량도 대충 끝난 상태이긴 한데…… 땅속이 문제다.
오늘 온 김에 대충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만 파 보려고 했는데 그건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쉽사리 그칠 비가 아니다.
신우와 한강에서 데이트를 할 생각이었는데 오늘은 글렀다. 야심차게 준비한 계획이 무산된 탓에 못마땅한 얼굴을 한 한은 곧 시동을 켰다. 그러곤 뚝 떨어진 기온에 맞춰 히터를 틀자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쪽으로 몸을 숙인 영민이 한의 눈치를 살피며 묻는다.
“선배는, 여전히 비 싫어하시나 봐요?”
“응?”
“비 오자마자 짜증 내셔서요.”
“뭐…….”
대학 시절부터 한이 비 오는 날을 질색한다는 건 유명했기에 그의 직속 후배였던 영민도 그 소문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지금 화가 난 건 좀 다른 이유였지만 굳이 변명할 필요가 없기에 한이 대충 그렇게 얼버무리고 있자 창밖을 살피던 영민이 심각한 얼굴을 한다.
“쉽게 그칠 비가 아닌 것 같은데, 그냥 가시죠. 너무 내리는데요?”
“조금 기다려 보고.”
“그냥 나무 다 뽑아 버리면 안 돼요? 주인도 그래도 된다고 했잖아요.”
“저 사이즈 나무가 얼만 줄 알아? 인위적으로 키운 것도 아니라 몇십 년을 지형에 맞춰 자란 나무가 있는데 아깝게 왜 뽑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건 살려야지.”
유독 눈에 밟히던 거대한 사이프러스 나무는 그 존재 자체가 너무 장관이라 그곳을 중심으로 건물 내에 실외 정원을 꾸밀 생각이었다. 그럴 거면 조금 디자인을 수정해야겠지만 60년은 족히 넘었을 나이의 나무를 베고 싶지는 않았다.
가능하면 최대한 자연적인 환경에는 손대지 않는다는 게 한의 신조였다.
“그래도 전혀 손 안 대고 집을 지을 수는 없잖아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내가 짓는 거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한의 선언에 영민이 입을 딱 닫는다. 귀찮으니 꺼지라는 타박에도 굳이 자청해서 쫓아 나온 거라, 더는 불만을 말할 수 없었다.
그사이 차창 너머로 김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습도가 높은데 숲속이라서인지 기온 하강이 더 빠른 느낌이었다.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 빗줄기에 한은 휴대폰을 꺼내 신우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금 이 시각이면 정현과는 헤어졌을 터라, 오른손을 핸들 위에 올린 채 손끝으로 두드리는데 얼마 걸리지 않아 통화가 연결되었다.
“지금 거기도 비 와?”
신우가 혹시 비를 맞았을까 걱정돼 그렇게 물었지만 답이 없다. 전화가 끊긴 건가 생각했지만 그렇다기엔 빗소리는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통화는 아직 끊기지 않았다.
“신우야? 소리 안 들려?”
혹시 연결 상태가 안 좋은가 해 다시 한번 확인하듯 묻자 잠시 후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니. 들려.
답은 했지만 목소리가 좋지 않다. 희미하게 꺼져 가는 듯 축 처진 그 목소리에 그냥 느낌이 왔다.
무슨 일이 있는 거다, 라고.
“무슨 일 있었어? 정현이가 뭐라고 해?”
- 아냐……. 나, 여기 밖인데…… 나 좀 데리러 올래?
지친 듯 쳐진 그 목소리에 한은 재빨리 안전띠를 맸다.
“갈게. 어딘데?”
- 압구정역 근처인데…… 어딘지는 잘 모르겠어. 백화점 근처인 것 같아.
“알았어. 지금 갈게. 거기서 기다려.”
- 응.
빗소리에 묻힐 듯 사그라드는 신우의 목소리를 들은 뒤 한은 그대로 기어를 바꾸곤 영민에게 말을 건넸다.
“벨트 해.”
“네?”
“벨트 하라고.”
그 말에 영민이 허겁지겁 안전띠를 매는 걸 확인한 뒤, 한은 곧장 차를 출발시켜 산길을 내려갔다. 장대처럼 내리꽂히는 빗줄기 속에서 구불구불한 산길을 간신히 내려온 한은 이내 버스 정류장 앞에서 차를 멈췄다. 그러곤 방금 안전띠를 맨 영민에게 고갯짓했다.
“너, 내려.”
“네?”
“내리라고. 택시 타고 회사로 가.”
“여기 택시가 어디 있어요?”
이 날씨에, 그것도 인적이 드문 경기도 외곽의 한산한 도로에서 어떻게 택시를 잡느냐는 영민의 물음을 한은 깨끗하게 무시했다.
“스마트폰 뒀다 뭐에 쓸 건데? 택시 불러서 서울로 가. 영수증 챙기고. 내려.”
“이런 데는 택시 자체가 잘 안 다닌다고요!”
“그럼 콜택시 불러.”
안 내리면 강제로 걷어차서라도 내리게 할 것 같은 한의 기세에 영민이 결국 차 문을 열었다. 이런 게 세상에 어디 있냐고 구시렁거리며 차에서 내린 그가 재빨리 버스 정류장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걸 확인한 한은 망설임 없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갑작스러운 폭우에 도로는 아비규환이었다. 정체된 도로에 갇힌 차 안에서 한은 초조한 듯 계속해서 내비게이션 위의 시계를 확인했다. 서울이 아닌 경기도 안쪽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던 터라 출발한 후 꽤 시간이 지나 있었다. 국도를 타고 올 때는 빨랐지만 막상 서울로 들어서자 차가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이놈의 차들.”
그나마 퇴근 시간 전이라 이 정도지 곧 러시아워에 들어가면 아예 도로가 주차장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한은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4시가 조금 지나고 있었다.
여전히 비는 장대처럼 쏟아지고 기온은 뚝 떨어진 채였다. 더운 날씨에 맞춰 반소매에 얇은 옷차림으로 나온 사람들의 입술에서는 연신 입김이 터지고 있었고 차창에는 계속해서 김이 서려 히터를 틀어야 했다. 그나마 사이드 미러는 열선 덕에 겨우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었지만 비가 몰아쳐 시야 확보가 힘들었다.
초조함에 핸들을 두드리자 슬슬 앞의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겨우 풀린 정체에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천천히 그 차를 따라가며 한은 창밖을 확인했다. 혹시나 신우가 밖에 나와서 기다릴까 주변을 돌아보며 천천히 차를 몰던 한은 더는 참지 못하고 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네 번째의 신호음이 울렸을 때 드디어 통화가 연결되었다.
“나 지금 역 근처인데, 어디야?”
- ……역 근처에 있는 가겐데…….
“어디?”
- ……4번 출구로 나온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
“앞에 뭐가 보여?”
- 백화점하고 샌드위치 가게.
“알았어. 지금 갈게.”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생각에 곧장 방향을 틀어 백화점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 차를 세워 둔 채 우산을 사 들고 백화점 정문 쪽으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넜다.
한 시간이 넘게 쏟아진 비 탓에 바닥 역시 물바다였다. 갑작스러운 폭우로 인해 곳곳에 침수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던 뉴스의 내용 그대로였다.
발목까지 차오른 빗물에 바지 자락이 젖어 들었지만 한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갑작스러운 비 덕에 거리는 다행히도 한산했다. 그러고 보니 그날도 그랬다.
8년 전 그날도 이렇게 갑작스러운 폭우가 쏟아졌고 사람들이 비를 피해 건물 안으로 몸을 숨긴 덕에 거리는 한산했다.
차이라면 그때는 밤이었고 지금은 낮이라는 것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시기도 딱 이맘때였던 것 같다.
마치 8년 전의 그날이 조금 다르게 재현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기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백화점 뒷골목 쪽으로 들어서 신우가 말한 샌드위치 가게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의외로 복잡한 길에 두리번거리던 한은 마침 지나가던 한 사람에게 조심스레 길을 물어봤다.
“저, 죄송한데 여기 샌드위치 가게가 어디 있나요?”
“샌드위치요? 어…… 글쎄요. 저도 여기 길은 잘 몰라서.”
한의 물음에 상대가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한은 서둘러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남겼다.
“네, 감사합니다.”
이렇게 된 이상 이 일대를 다 뒤져 볼 생각으로 우산을 든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데 금방 갈림길에 다다랐다. 양쪽으로 나뉜 길목에서 주변을 둘러보니 오른쪽 길에서는 각도 상 백화점이 정면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걸 확인한 순간 곧장 왼쪽 길로 들어섰다.
빗줄기와 물안개 탓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그냥, 그런 느낌이 있었다.
빨리 그 녀석을 찾아야겠구나, 하는.
지금 그 녀석을 찾지 못하면 무언가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때도 그랬다.
처음 본 순간에도 내가 빨리 저 녀석을 잡아 줘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마음이 더욱더 조급해졌다.
비는 질색이다. 8년 전 그날 이후 비가 오는 날에는 유독 예민해지곤 했다. 이 습도와 열기, 그리고 옷자락을 적시는 느낌이 싫었다.
아니, 사실 싫었던 건 빗속에 혼자 조용히 앉아 있던 그 녀석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싫었던 건 먼저 다가서지 못했던 자신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질척거리는 길을 걸으며 사방을 살피던 중 어떤 건물 앞에 시선이 닿았다.
슬슬 해가 져 가는 시간이라 날이 어두워지는 가운데 그 위로 빗줄기까지 더해져 눈앞이 침침했지만, 이상하게도 그곳만은 선명했다.
낮은 건물의 안쪽 계단, 어두운 그 구석에 선 신우는 멍하니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여전히 위태롭고 아슬아슬해 보였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땅만 내려다보는 그 모습에 한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그 건물 쪽으로 다가섰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도로에 차오른 빗물이 구두와 바짓단을 적셔 왔지만 더는 그 느낌이 불쾌하지 않았다.
거의 달리는 듯한 걸음으로 건물 앞에 다다른 한은 우산을 접은 뒤 조용히 서 있던 신우에게 다가섰다.
그러곤 부드럽게 말을 건다.
“내가 그랬지? 다 찾는 방법이 있다고.”
장난스럽게, 한이 가벼운 투로 말을 걸자 그 순간 신우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러고는 그의 앞에 선 한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어 보인다.
“진짜 잘 찾네? 한참 걸릴 줄 알았는데.”
“나 신기 있다니까.”
“너 박수 해라, 그냥.”
“전업도 고려해 봐야지. 자, 가자. 비가 너무 많이 온다.”
그만 돌아가자고 한이 손을 뻗자 신우가 말없이 그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차분한 시선으로 다시 한을 올려다보며 작게 속삭였다.
“지금 나 좀 안아 줄래?”
“응?”
“추워서.”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손을 뻗는 신우를 잠시 내려다보던 한은 우산을 옆으로 던져둔 채 신우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조용히 신우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마치 우는 아이를 달래는 듯 상냥한 그 손길에 신우가 한의 허리를 안으며 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간절한 그 몸짓에 한이 신우의 등을 토닥였다.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아니, 안 울어. 슬프지 않아.”
신우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담담했다. 그가 말한 그대로 슬퍼하거나 절망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데, 왜 난 네가 우는 것 같을까?”
“안 울어. 별로 안 슬퍼. 그냥 조금 지친 기분이 들어서 그래. 그리고, 네가 보고 싶었어.”
어리광을 부리듯 한의 품으로 파고드는 신우의 무게감에 한은 조금 놀라 당황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봤다.
“……이런 상황에서 말하기는 뭐하지만 기분 좋은데? 정현이가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네가 어리광을 다 부리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한은 신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머리카락에 입을 맞춰 주었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한의 음성과 손길에는 기쁨과 걱정이 반반 섞여 있었다. 그걸 알아챈 듯 신우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작게 중얼거렸다.
“너랑 있으면 행복해. 따뜻한 볕 아래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기분 좋아. 그래서 무서웠어. 널 잃고 혼자가 되면 다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거든.”
불시에 받게 된 고백에 한이 멈칫하자 신우가 천천히 한의 어깨를 밀어 낸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한과 시선을 마주한다. 그렇게 잠시 한의 눈을 응시하던 신우는 마침내 떨리는 숨결을 내뱉으며 속삭였다.
“거기까지 생각하다 결론을 내렸어. 너와 헤어지는 게 무섭다는 건 그만큼 내가 너랑 같이 있고 싶어 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함께 있고 싶어.”
순간 빗소리가 잦아들었다. 비가 그친 게 아니라, 다른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놀라고, 또 기뻐서 그냥 멍한 느낌이었다.
지금 설마 신우가 저런 식의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아니, 신우의 입에서 저렇게까지 긍정적인 말이 나올 거라고는 예상치 못 했다.
“진짜, 이게 무슨 일이야? 나 그냥 순수하게 기뻐해도 되는 거야?”
“응.”
살짝 시선을 내리깐 채 미소 짓는 그 얼굴에 한이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작은 표정의 변화였지만 마치 꽃이 피는 듯 아름다운 미소였다. 경계심을 완전히 푼 채 웃고 있는 그 얼굴에 한 역시 기쁜 듯 미소 지었다. 그러곤 온 힘을 다해 신우를 끌어안았다.
여전히 비는 미친 듯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이젠 비가 불쾌하지 않았다.
시원하게 내리꽂히는 그 빗줄기에 과거의 상처들 역시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아주 멀리, 멀리로.
해가 지자 도심의 기온은 뚝 떨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비가 와 떨어진 기온이 더 하강하자 입김이 쉼 없이 터질 정도였다. 그리고, 비는 여전히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신우는 이미 꽤 젖은 채라, 한은 백화점으로 돌아가길 포기했다. 그 대신 마침 눈에 보인 호텔에 룸을 잡았다.
도심 한복판에 있음에도 호텔은 여유로웠다. 그 덕에 손쉽게 스위트룸에 체크인을 한 한은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신우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당연한 듯 본인도 곧 쳐들어왔다.
아주 당당하게 욕실로 따라 들어온 한의 행동에 신우가 당황할 틈도 없이 한은 일단 신우에게 달려들었다.
“너, 욕실에서 뭐 하는 거야?”
“뭐긴 씻는 거지.”
먼저 씻으라며 욕실에 얌전히 넣어 주던 녀석이 갑자기 달려드는 통에 신우는 필사적으로 수건을 들어 몸을 가리려 했지만 그보다는 한이 더 빨랐다. 등 뒤에 선 채 손을 뻗어 가슴을 더듬는 그 손길에 반사적으로 허리를 뒤로 빼는 순간 엉덩이가 한의 사타구니 쪽에 닿아 버렸다.
순간 허리 쪽에 닿는 딱딱한 무언가에 신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욕실에서 하려고?”
“네가 어리광부렸으니 나도 좀 부리려고.”
마음껏 어리광부려도 된다고 한 주제에 왜 말이 달라지는 거냐고 신우가 반박하려는 순간 목덜미에 입술이 닿아 왔다. 그와 동시에 유두를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헉 하니 숨이 멈췄다.
“잠깐, 잠깐만…….”
당혹스러움에 신우는 온 힘을 다해 한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힘으로 한을 이긴다는 건 무리였다. 가슴과 허리를 잡힌 채 꼼짝도 못 하는 사이 한이 귓불을 물며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을 내려 아래쪽에 손을 댔다.
“아.”
아무렇지 않게 신우의 성기를 손에 쥔 한은 천천히 표면을 쓸어내렸다. 그 감촉에 신우의 허리가 떨려 오기 시작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한은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바로 뒤에서 단단하게 선 페니스가 살을 누르며 비벼 대자 신우의 몸 전체가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오른다.
“힘 빼.”
마음이 급한 듯 서둘러 신우의 엉덩이에 손을 뻗은 한은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넣고는 조심스레 안쪽을 휘저었다. 좁은 구멍을 벌리며 내벽을 밀어 내는 그 손길에 신우가 작게 신음하자 한이 귓가에 속삭인다.
“다리 벌려 봐. 선 채로 하려면 힘들 거야.”
귓가에서 울리는 한의 목소리에 아찔한 듯 눈을 질끈 감은 신우는 한의 말대로 다리를 벌린 채 앞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목덜미에 닿는 호흡과 뜨거운 혀, 그리고 몸을 더듬는 그의 손길에 신우의 숨소리 역시 서서히 거칠어져 가고 있었다.
“잠깐, 천천히…….”
천천히 해 달라는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내벽을 헤집던 손가락이 예민한 부위를 긁어냈다. 겨우 한 번이었지만 이미 자신이 느끼는 곳을 다 안다는 듯 집요하게 그 부분만을 문질러 대는 손길에 신우의 허리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웃, 거기…… 이상해. 그만……. 아!”
의식이 날아가 버릴 듯 강렬한 쾌감에 신우가 전신에 힘을 준 채 짤막한 비명을 토해 내자 오히려 한의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오늘은 내 어리광도 받아 줘.”
장난치듯 가볍게 말을 걸며 귓불을 세게 문 한은 한 번 더 그 부분을 손끝으로 긁어내렸다.
“……그만!”
예민한 부분을 자극당한 신우가 날카로운 신음을 쏟아 내자 한 역시 낮게 억누른 숨을 토했다. 목덜미에 닿는 뜨거운 숨결과 함께 손가락을 늘려 다시 내벽을 넓히는 손길에 신우가 안달하기 시작했다.
숨이 차오르고, 전신이 저릿거리며 머릿속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아랫배 쪽에 묵직하고 뜨거운 뭔가가 내려앉는 듯한 감각에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한아, 그만…….”
“쉿, 아직 덜 풀렸어. 조금만 더…….”
이대로는 다칠 수도 있다며 정성스레 구멍을 넓히던 한이 한 번 더 그 부분을 짓누른다.
세게 긁어 댄 것도 아닌 그저 부드럽게 누른 것뿐이었지만 몸은 정확하게 반응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경련하듯 몸을 떨던 신우는 힘겹게 목소리를 끌어냈다.
“……빨리…… 넣어 줘.”
이미 이성이나 수치심은 다 사라진 후였다.
뭐든 좋으니 빨리 이 간질간질한 감각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신우의 간절한 호소에 한의 손가락이 빠져나간다. 그리고 곧 손가락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고 단단한 살덩어리가 입구에 닿아 왔다.
기억하고 있는 그 부피감에 신우는 숨을 삼켰다. 그 커다란 게 몸에 들어온다는 건 무섭지만 그 성기가 주던 쾌감을 몸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두려움을 뒤덮는 기대감에 한이 어서 넣어 주길 바라며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버티는데, 이윽고 한의 손이 엉덩이를 벌리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곧 그 안으로 선단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좁은 내벽을 밀고 들어오는 성기에 신우가 숨을 멈춘 채 벽에 손톱을 세우자 한이 다정하게 신우를 달래 준다.
“천천히 숨을 내쉬어.”
상냥한 음성으로 신우의 귓가에서 속삭이며 한은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꽉 조여 오는 내벽의 감촉에 한 역시 낮은 숨을 토해 냈다.
신우의 안은 아직 좁았다. 조금 더 풀어 줬어야 한다는 후회가 들긴 했지만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감각에 단숨에 깊은 곳까지 성기를 박아 넣자 신우가 날카로운 교성을 내뱉는다. 그리고 곧 성기를 빨아들이는 듯 조이는 내벽에 그나마 남아 있던 이성이 끊겨 버렸다.
“젠장…….”
원래는 느긋하고 상냥하게 할 생각이었는데 완전히 틀어져 버린 계획에 살짝 욕설을 내뱉은 한은 이성을 내던진 채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르게 안을 찌르곤 다시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다시 내벽을 쳐올리는 성기에 신우는 연신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떨었다.
선 자세 때문인지 움직일 때마다 예민한 부위를 긁어 대며 안쪽 깊숙이까지 박혀 오는 성기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미칠 것만 같은 심정에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서 수치도 모른 채 연신 교성을 내지르며 허리를 흔드는데, 또다시 빠져나갔던 성기가 세게 안으로 박혀 왔다.
“윽!”
아픔인지 쾌감인지 모를 격한 감각에 신우가 높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틀자 한이 신우의 허리를 안은 채 안쪽 깊은 곳을 찔러 올렸다.
아랫배가 아플 정도로 깊이 박혀 온 성기가 몸 안에 정액을 내뿜는 순간 내벽이 경련하며 신우 역시 사정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몸이 무너져 내렸다.
다리에도 허리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아 신우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려 하자 한이 허리를 잡아 몸을 지탱해 준다. 그러곤 곧 몸 전체를 끌어안아 주자 신우가 안도한 듯 몸에서 힘을 뺀다.
마치 쓰러지듯 품에 안겨 오는 신우의 몸을 안은 한은 신우의 이마 위로 입을 맞췄다.
“괜찮아. 이제 푹 쉬어도 돼.”
상냥한 한의 속삭임에 신우는 그에게 자신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
뜨거운 물과 한의 체온, 그리고 그의 피부. 그 모든 게 자신을 감싸고 있었다.
그 따뜻한 손길과 체온에 녹아들며 비로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아니, 그간 자신이 보지 않으려 했을 뿐 늘 사랑받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사실이 새삼 사무쳐 왔다.
‘연신우 씨 맞으신가요?’
초조해하며 연신 카페의 문과 창 너머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돌아보던 중 테이블 앞으로 다가선 그녀가 그렇게 말을 건네 왔다.
기온이 떨어진 탓인지 화사한 노란색의 원피스 위로 하얀 카디건을 걸친, 딱 보기에도 곱게 자란 듯한 그녀는 마치 신우를 잘 알고 있다는 듯 먼저 그렇게 인사를 건네 왔다. 갑작스러운 소나기 탓에 만원이 된 카페 내에서도 곧장 자신을 찾아낸 그녀에게 신우 역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그녀가 앞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불안한 듯 손끝을 매만지던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까 전화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강혜진이라고 합니다. 이영혜 씨가 저희 새어머니세요.’
그 말에 신우는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을 꼭 마주 쥐었다. 그녀의 전화를 받고 약속 장소까지 오는 내내 계속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갑자기 자신에게 연락을 할 만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고모인데…… 백화점에서 고모와 마주쳤을 때 함께 있었다던 딸이 이 사람이었던 걸까 하는 생각에 자꾸만 손에 힘이 들어갔다.
딸이 자신을 찾아올 정도라면 뭔가 큰일이 생긴 건 아닐까? 자식이 없다고 하고 재혼했다고 들었는데 고모와의 일로 집안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또 나 때문에 엄마가 불행해지는 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걱정과 그로 인한 막연한 두려움에 초조한 듯 두 손을 세게 쥔 순간, 혜진 씨가 말을 건넸다.
‘갑자기 연락드리는 게 무례하다는 건 알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꼭 봬야 할 것 같아서요.’
‘그건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신데요?’
마음이 급해 용건을 재촉하자 그녀가 길게 숨을 내뱉고는 시선을 맞춘다. 그러곤 진지한 얼굴로 묻는다.
‘혹시, 그쪽 고모님께 백화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들으셨나요?’
역시나 하는 생각에 신우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혜진이 재빨리 설명을 덧붙인다.
‘어머니한테 아들이 있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아버지도 알고 계셨고요. 어머니 지갑 속에 든 사진을 제가 우연히 봤거든요.’
뜻밖의 말에 신우가 놀란 듯 보자 혜진이 서글프게 웃는다.
‘자식을 두고 온 부모는 어떻게든 티가 나니까요. 어머니랑 아버지가 재혼하셨을 때 전 고등학생이었는데 가끔 어머니가 혼자 우는 걸 봤거든요. 새벽에 혼자 베란다로 나가셔서 사진을 보면서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우시곤 했어요. 그래서 몰래 어머니 지갑을 열어 보고 아들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 말에 신우가 반사적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컵을 두 손으로 쥐자 그녀가 잠시 숨을 고를 틈을 준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비밀로 할 생각이었는데 아버지께서도 눈치채신 모양이에요. 우리 아버지가 나쁜 분은 아닌데…… 조금 고지식하세요. 진짜 앞뒤가 꽉 막힌 분이라 아들이 있다는 걸 아셨을 때 어머니께 배신감을 느끼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한동안 힘들어하셨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요. 속인 건 과거의 일이니 어쩔 수 없지만 속였다면 끝까지 속여야 한다고요. 그게 속아 준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니, 아들이 죽었다고 했으면 그렇게 생각하고 살라고 어머니께 말씀하시는 걸 우연히 들었어요.’
그녀의 차분한 설명에 신우는 컵을 두 손으로 꽉 쥔 채 고통스러운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어머니가 한 번도 자신을 찾지 않았던 이유나, 외가에서조차 아무도 그녀의 연락처를 알려 주지 않았던 이유를 대강 눈치채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들으니 새삼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헤어진 뒤에도 나는 엄마의 삶에 큰 걸림돌이었구나, 하고.
‘어머니는 지금도 가끔 새벽에 주무시다 가슴을 치시면서 깨어나세요. 그리고 혼자 정원을 계속 도시다가 갑자기 울기도 하시고 어느 날은 새벽에 사라지셔서 온 가족이 찾으러 다닌 적도 있었고요. 온갖 병원에 다 다녀 봤지만 육체적인 문제가 아닌 정신적인 문제라고만 하더라고요. 우울증과 불면증, 그리고 가끔 일어나는 공황 장애로 계속해서 약을 드시고 상담을 받으셔도 안 나으셨어요. 그래도 언젠가 나아지겠지, 곧 좋아지시겠지 했는데 20년을 그렇게 사시더라고요. 자식 버린 부모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봐요.’
거기까지 말한 뒤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감정을 삭이기 힘든지 몇 번인가 길게 숨을 내뱉은 그녀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날 백화점에서 돌아오신 뒤 어머니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지셨어요. 계속해서 혼절하셨다 깨어나셨다 반복하시는데 눈을 뜨실 때마다 다 자기 때문이라고, 신우 씨 동생이 죽은 것도 신우 씨가 힘겹게 사는 것도 모두 자기가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스스로를 많이 책망하고 계세요. 그날 어머니가 병원에만 가지 않았어도 그 아이는 죽지 않았을 텐데 어머니 잘못으로 아이를 그렇게 허망하게 보내고 너무 힘들어서 혼자만 도망쳐 버렸다고, 그래서 더 신우 씨를 만날 수가 없었다고, 신우 씨가 어머니를 얼마나 원망할까, 얼마나 미워할까, 그렇게 생각하니 용기를 낼 수가 없었다고, 계속해서 미안하다고만 하셨어요.’
감정이 격해진 듯 울컥하는 그녀의 음성에 컵을 쥔 손의 떨림이 멈췄다.
엄마가 그렇게 자책하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아니, 상상도 하지 못했다.
모든 사람이 네 잘못이라고, 네 엄마도 그래서 널 버리고 간 거라고, 널 보면 신영이가 떠올라 슬프고 고통스러워서 떠난 거라고들 하기에, 막연히 그럴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래서 아이가 없다고 하고 재혼을 하고, 연락처도 알려 주지 않는 거라고 믿고 살아왔다. 엄마에게도 너무 아픈 기억이라 조금도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린 거라고 생각했다.
나 때문에 신영이가 죽었으니까, 내가 잘못했으니까 어머니가 내게 진저리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고, 그래서 연락도 하기 싫어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도 어머니를 찾으면 안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녀도 그 긴 시간 스스로를 원망하며 살아왔던 거다. 자신이 그날 집을 비우지만 않았다면, 그날 그렇게 병원에 오래 있지 않았다면 그런 비극은 없었을 거라고 그녀 역시 자책하고 있었던 거다.
마치 자신처럼, 그녀도 스스로가 만든 감옥 속에서 살아온 거다.
끔찍하다면 끔찍한 이 상황에 신우는 울먹이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렇게 잠시 숨을 삼키다 간신히 목소리를 끌어냈다.
‘그 일은…… 어머니 잘못이 아니었어요. 그건…….’
내 잘못이었다고 하려던 순간 말을 멈췄다.
자신이 엄마가 자책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엄마도 자신이 평생을 자책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게 된다면 또 한 번 큰 상처를 받을 것 같아서였다.
모든 게 자기 잘못이라고 탓하며 상대가 자신을 원망하고 미워할까 고민하다 여기까지 왔으면서 또 같은 실수를 할 뻔했다.
그 깨달음과 동시에 탄식이 터졌다.
그간 자기 연민에 빠져 스스로를 탓하는 게 결국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에게도 상처가 된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건, 이미 과거의 일이에요. 그리고 그 일로 단 한 번도 엄마 원망해 본 적 없어요. 엄마가 떠나신 것도……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해요. 그때 엄마라도 도망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엄마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어린 시절이라 희미하긴 하지만 분명 남아 있는 기억들이 있다.
할머니와 고모는 절대 상냥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천성이 그런 건지 환경이 그렇게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가족이라는 핑계로 아무렇지 않게 상처를 주고 용서를 강요했다. 그렇게 사는 게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당한 사람은 평생 그들의 말이 만든 지옥을 경험해야 함에도 그들은 잘못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폭언에 아프다고 하면 상대방을 예민하고 약한 사람으로 몰아갔다.
그래서 엄마가 떠났을 때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엄마라도 그곳에서 벗어나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녀 역시 그다지 행복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죄송해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문득 그녀가 사과를 건넸다. 영문을 몰라 시선을 들자 그녀가 고개를 숙여 사죄한다.
‘죄송해요. 우리만 행복해서 죄송해요. 어머니는 저희에게 최선을 다해 주셨어요. 친자식들에게보다 더 헌신적이셨어요. 언젠가 어머니께 왜 그렇게 우리한테 잘해 주냐고 물으니, 어머니가 아들한테 하지 못했던 걸 다 해 주고 싶으시다고 하셨어요. 그래야 그 아이도 행복할 것 같다고요. 그때는 어머니한테 신우 씨가 있다는 걸 몰라서 죽은 아들 이야기를 하시는구나 했는데 나중에야 알았어요. 어머니가 우리한테 하듯 누군가 신우 씨를 돌봐 주길 바라셨다는 걸요.’
‘…….’
‘아버지도 많이 후회하고 계세요. 그때 그냥 신우 씨를 데리고 올걸, 하다못해 만나게라도 해 주실 걸 하고요. 어머니가 거짓말을 하셨다는 사실에 너무 모질게 대했다고 정말 많이 후회하고 계세요. 저도, 죄송해요. 알면서도 모른 척해서 죄송해요. 신우 씨도 어머니가 많이 보고 싶었을 텐데.’
계속되는 그녀의 사과에 신우는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연락하셨다 해도 저희 집에서 만나지 못하게 했을 거예요.’
어떻게든 엄마가 자신을 데려가려 애를 썼다는 건 기억한다. 그걸 막은 건 엄마에 대한 복수심에 들끓던 아버지와 할머니였다.
너 혼자 가서 잘 살 수 있을 것 같냐고, 갈 거면 애는 두고 가라던 할머니의 저주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어머니께 전해 주세요. 저 어머니가 생각하시는 것만큼 불행하지는 않았어요. 언제나 절 돌봐 주는 사람이 있었고 지금도 충분히 사랑과 보살핌을 받고 있어요. 그러니까…….’
거기까지 말한 뒤 신우는 다시 한번 커피 잔을 내려다보곤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다시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까, 어머니도 이제 그만 행복해지셨으면 좋겠다고 전해 주세요. 그리고 더 아프지 마시라고요.’
‘어머니, 안 만나실 건가요?’
‘곧 뵈러 갈게요. 하지만 지금은 천천히 서로 마음을 다잡아야 할 것 같아요.’
그간 못 본 세월이 길기도 하고, 아직은 자신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 서두르고 싶지 않다고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자 그때까지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혜진이 왈칵 눈물을 쏟아 낸다.
‘다행이에요, 진짜 다행이에요.’
‘연락 주셔서 고마워요. 그리고 고모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그분이 원래 그러세요. 생각나는 대로 전부 다 퍼붓는 분이시니까 혜진 씨도 신경 쓰지 마세요. 처음이라 당황하셨겠지만 고모가 말한 것만큼 전 불행하지 않았으니까요.’
어쩌면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해 본 적이 없어서 불행하다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신우는 적어도 자신이 불행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자신이 꽤 낙천적인 성격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신우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자 눈물을 쏟아 내던 혜진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고마워요.’
‘…….’
‘진짜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반복되는 사과에 신우는 겨우 알아챘다.
고모를 만난 이후 그녀 역시 힘든 시간을 보낸 모양이었다. 엄마와 자신이 그러했듯 자신의 존재를 알면서도 무시했던 과거의 스스로를 탓하며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이 습도에도 그녀의 입술이 버석거리는 데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선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혜진 씨에게 연락이 와서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오늘 연락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그동안 어머니 옆에 있어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어머니 잘 부탁드릴게요.’
따뜻한 커피를 손에 쥔 채 신우가 마지막 인사말을 마치자 그녀가 오열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우는 그다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슬프지는 않았다. 그저 가슴이 아릿하고 쿡쿡 쑤셔 올 뿐이다.
이기적이지만 적어도 자신이 완전히 버림받은 건 아니었다는 사실에 서늘하고 공허했던 마음이 서서히 따뜻해지는 듯했다.
그 순간 불현듯 한이 보고 싶어졌다.
너무나 간절하게도 한이 보고 싶었다.
마치 혼절하듯 의식을 잃었다 다시 눈을 뜬 순간,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어둠이었다.
방 안 깊이 깔린 어둠에 몇 번인가 눈을 껌뻑이던 신우는 그제야 시야에 든 낯선 천장에 잠시 여기가 어디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 이내 빗속에서 자신을 찾아온 한과 함께 가까운 호텔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곤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호텔로 와 젖은 옷을 벗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다 한에게 안기고, 그러다 곧 기절했던 것 같은데 방 안이 너무 어두웠다. 꽤 늦은 시간인 듯했다. 그리고 여전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잠시 창밖을 내다보다 다시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한이 편안히 잠들어 있는 게 보였다. 자신을 끌어안은 채 잠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
혜진 씨를 만난 직후 이 녀석이 너무 보고 싶다고 생각한 찰나 전화가 걸려 왔다. 어쩌면 이 녀석은 이렇게까지나 타이밍이 좋은 걸까 하고 또다시 감탄하며 전화를 받고 저도 모르게 찾아와 달라고 한 건데 진짜 자신을 찾아냈다.
정신이 반쯤 나간 채라 눈앞에 보이는 상호도 제대로 알려 주지 못했는데 찾아와 준 게 고맙고 또 신기했다.
그러고 보니 항상 그랬던 것 같다.
가장 막막하고 절망적인 순간 이 녀석은 항상 자신을 찾아내 주었다. 옥상에서의 첫 만남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렇다.
너무 힘들고 슬퍼 포기하고 도망치고 싶어졌을 때 항상 자신을 붙잡고 새로운 길을 열어 준 게 한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녀석과 함께라면 앞으로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이 깊이 내려앉은, 비가 내리는 이 밤에도 이 녀석의 옆에 있으면 따뜻한 햇볕을 쬐는 기분이었다.
따스하고 행복하고 편안하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좋은 꿈을 꾸며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눈을 떠도 그 꿈이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