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
“서인재, 이 자식 일부러 이러는 거야.”
재택근무 선언을 한 지 하루 만에 출근하게 된 한은 사무실로 향하는 내내 차 안에서 투덜거리고 있었다.
분명히 내가 출근 안 한다고 했는데 일정 잡는 건 무슨 심술이냐며, 이 자리에 없는 인재를 향해 불만을 토해 내는 한을, 신우는 귀엽다는 듯 바라봤다.
바로 어젯밤 식사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한에게는 오늘 목공소에 가 자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인재의 연락이, 그리고 자신에게도 일이 쌓였으니 좀 도와 달라는 정우 씨의 전화가 와 오늘 함께 출근하게 된 건데 한은 그 상황이 아주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내가 재택근무한다니 이 자식이 급하게 일 잡은 거야.”
“설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신우 역시 차마 그럴 리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아니라고 하기엔 타이밍이 너무 기가 막혔다.
동시에 양쪽에서 업무 요청이 왔다는 것부터가 어떻게 봐도 우연은 아니다.
“아니, 내가 재택을 일주일을 했어? 한 달을 했어?”
실상 오늘부터 시작이었다고 오늘 아침에 일어나 끝내주는 특제 소스를 넣은 토스트에 아메리카노를 대접해 주려고 에스프레소 기계에 새벽 배송까지 신청해 놨는데 무슨 방해냐며 한은 분노를 토해 냈다.
이건 한의 계획에 전혀 없는 일이었다. 할아버지께 아침은 별채에서 먹을 거라고 선언까지 해 놨는데 인재가 산통을 다 깼다.
“원두까지 심혈을 기울여 골라 놨다고. 에스프레소 기계까지 급히 들였는데.”
“에스프레소 기계 원래 있던 거 아니었어?”
“아니. 캡슐 머신이 있어서 살까 말까 하다 급히 주문한 건데 서인재 때문에 다 날아갔어.”
“그래도 아침에 커피 잘 마셨잖아.”
“느긋하게 즐기면서 먹는 거랑 출근 준비하느라 시계 보며 먹는 건 다르지. 내 오늘 목표는 오전 9시쯤 프렌치토스트에 당근 글라세랑 구운 마늘하고 과일을 우아하게 먹는 거였다고. 그리고 점심은 열무김치에 시원한 냉콩국수를 먹고 저녁은 해신탕에 파전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인재 때문에 내 완벽한 계획이 다 어그러졌다며 불을 뿜는 한의 모습에 신우는 차분하게 한을 달래 줬다.
“콩국수 먹으면 되잖아.”
목공소에 다녀오면 점심은 밖에서 해결해야 하니 사 먹으면 되지 않나 했지만, 한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인 모양이었다.
“콩국수 맛있는 데를 아직 못 찾았단 말야.”
아직 맛집 지도가 완성 안 됐다고 탄식하면서도 한은 부지런히 운전을 하고 있었다. 이미 러시아워가 지난 탓에 거리도 한산하고 신호에도 걸리지 않아 평소보다 빠른 느낌이었다.
“그럼 빨리 일 정리하고 들어가서 먹어.”
“오가는 시간 때문에 안 되니 문제지. 미리 맛집 지도를 업데이트해 뒀어야 하는데.”
“인터넷에 많잖아.”
“나는 주로 노포 위주로 찾아가는 편이라 인터넷 검색은 잘 안 해.”
“그럼 어디서 찾는데?”
“우리 할아버지 데이터.”
“아…….”
할아버지의 정보라면 확실하다는 느낌이었다. 잠깐 뵌 것뿐이지만 그간 한이 전해 준 정보만 더해 봐도 굉장한 미식가라는 인상이었다. 할아버지께서 맛집이라고 하면 반박의 여지가 없을 것 같았다.
“콩국수 집은 안 알려 주셨어?”
“하나 있었는데 원래 주인이 은퇴하고 아들이 물려받은 뒤로 그 맛이 아냐. 나도 초등학교 때부터 다니던 집인데 이젠 안 가.”
“초등학교 때부터?”
“응.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 할아버지 손잡고 전국 팔도 다 돌아다녔거든. 맛집 소리 나온 곳 중에 내가 안 가 본 곳이 없을걸. 아, 맞다. 너랑 전국 맛집 투어도 해 보려고 했는데…… 망할 서인재.”
무슨 대화를 해도 인재에 대한 원망으로 끝나는 한의 화법에 신우는 웃으며 창밖을 내다봤다. 열흘간 출퇴근을 해서인지 제법 눈에 익은 건물들을 바라보던 사이 차가 목적지에 도착해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해가 비치지 않는 지하는 외부보다는 시원했다. 서늘한 주차장 내를 돌며 빈 공간을 찾아 차를 몰던 한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눈을 빛냈다.
“그럼, 차라리 목공소 갈 때 같이 갈래? 거기서 오는 길에 맛있는 만둣집 있는데. 아, 해물 칼국숫집도 있어. 거기 겉절이가 진짜 맛있는데.”
마침 주차할 곳을 찾아 차를 멈춘 그가 기어를 바꾸는 사이 신우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한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나, 일 급하다고 해서 출근한 거야.”
신우가 바로 내 옆에서 통화하는 거 듣지 않았냐고 하자, 한이 입술을 삐죽인다.
“그제까지만 출근하기로 합의 본 게 언젠데 바로 또 출근을 하래? 정우 씨 일 처리 못 하는 거 아냐?”
본인이 출근할 적에는 신우에게 취직하라 난리더니 재택근무 선언을 하자마자 무서운 태세 전환을 보이는 한을 신우는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원래도 그런 기미가 있긴 했지만, 할아버지께 한이 애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인지 한의 행동 하나하나가 유독 어리게 느껴졌다.
좋게 말하자면 솔직하고 천진한 거고 나쁘게 말하자면 진짜 너무 철이 없다.
“프리랜서 한 분이 갑자기 수술하느라 회사 쪽에 연락도 못 하고 작업을 하나도 못 했대. 그 사람이 맡은 작업들 마감이 급해서 부탁한 거야.”
“수술이 끝난 후에라도 빨리 연락했어야지.”
“회복이 더뎠나 봐. 혼자 사는 사람들은 그런 게 힘들어.”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해서 갑작스러운 변수 발생 시 대처가 쉽지 않다는 신우의 말에 한도 본인의 유학 시절을 떠올려 봤지만…… 늘 왁자지껄하게 사람들이 주변에 있어 쓰러지거나 아프더라도 다들 대신 일을 처리해 줬을 거라 공감은 힘들었다.
하지만 신우가 그렇다면 그런 거라고 납득했다. 자신과 성격도 환경도 전부 다른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나도 너 혼자 살지 말라고 데려온 거야.”
그런 일을 예견해 너 일하다 쓰러지면 내가 대신 연락해 주고 병원에도 가 주고 간호도 해 주려고 했다는 한의 말에 신우가 웃으며 안전띠를 푼다.
그게 막 지어낸 변명이라는 게 훤히 보였지만 말이라도 기뻤다.
한 역시 그런 신우의 기분을 눈치챈 듯 안전띠를 풀며 무심한 척 물었다.
“작업은 얼마나 걸릴 것 같아?”
“가서 봐야지. 내가 처음부터 다 작업하는 게 좋긴 한데 거의 완성된 상태면 마무리만 하려고.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가던 신우가 다시 휴대폰을 꺼내 도면을 확인하는 모습에 한이 신우의 뒤에서 그의 목을 끌어안는다.
“그럼, 점심은 나가서 먹을까?”
“목공소 간다며?”
“자재 관련으로 얘기만 할 거라 금방 올 거야. 거래처 사람하고는 술이나 식사 같이 안 하시더라고. 술자리에서 이런저런 일 부탁하거나 견적 깎거나 자재 싼 걸로 써 달라고 하는데 그런 거 듣기 싫으시대.”
“아…….”
대충 그것만으로도 상대의 성정이 짐작되었다. 고집스럽고 자존심 강하고 타협을 모르는 외골수의 명인 같은 분이신 듯했다.
“까다로우신 분 같은데 용케 작업 의뢰받으셨네.”
그런 사람들은 작업 같이하기 힘들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기에 신우가 대단하다는 듯 치켜세워 주자 한이 신우의 목을 더 당겨 안았다.
“당연히 받아야지. 나도 아주 유명한 사람이야. 해외에서도 의뢰가 들어오는 한국을 이끄는 신예 건축가, 슈퍼 루키라고. 돈도 안 아끼고 이렇게 유명한 내가 아주 근사한 건물을 짓는다는데 같이 작업을 안 할 수 있겠어?”
종목만 달라졌지 농구 선수 시절 붙던 수식어들이 그대로 붙은 채라며, 한이 자화자찬하는 모습에 신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 저러면 저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싶었겠지만 한이라면 납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뭐든 잘하고 말하는 이상의 결과를 보여 주는 녀석이니까.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이미 출근 시간은 한참 지나 텅 빈 엘리베이터 안으로 막 올라타려 하자 한이 팔을 잡아 말렸다.
“잠깐.”
팔을 잡아끄는 힘에 멈춰 선 채 뒤를 돌아본 순간 한이 입을 맞추었다.
아이에게 하는 인사 같은 가벼운 입맞춤이었지만 사람들이 언제든 지나다닐 수 있는 바깥이었다. 순간 놀란 신우가 사방을 돌아보는 모습에 한이 신우의 손을 꼭 잡고 흔들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선다. 다행히 본 사람은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나쁜 짓을 한 것 같은 기분에 신우는 조금 붉어진 얼굴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한의 스킨십에는 어느 정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불시에 당하면 여전히 당황스럽다. 특히나 외부에서는 더욱.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하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열렸다.
순간 놀라 한과 맞잡은 손을 놓으려 하는데 그걸 눈치챈 한이 되레 손을 세게 쥐었다.
1층에서 올라탄 사람들을 의식한 신우가 손을 놓으라는 듯 흔들자 한이 자유로운 오른손을 들어 휴대폰을 꺼낸다. 그러곤 빠르게 키보드를 쳤다. 그리고 잠시 후 자신의 휴대폰 알람음이 울렸다.
왼손에 있던 휴대폰을 들어 보자 잠금 화면 위로 한의 메시지가 떠 있다.
[손 빼면 키스한다.]
거의 협박 같은 한의 메시지에 어이가 없어져 한을 바라보자 한이 슬쩍 말을 돌린다.
“아, 그리고 너 알림 팝업 간략히 보기로 해 놔. 자세히 보기로 체크해 놔서 내용 다 보이더라. 혼자 일할 때는 몰라도 사무실 나올 때는 꺼 놓는 게 좋아.”
지나가다가도 시선이 갈 수 있다는 한의 설명에 그제야 신우는 아차 했다. 늘 집에서 혼자 작업을 하는 편이라 작업 중에 손을 떼기도 귀찮아 팝업에 모든 내용이 노출되게 설정해 놨는데 외부에서 일을 할 때는 또 다르다는 걸 깜박했다.
“수정할게.”
“그래.”
짤막한 대화 후 서둘러 잠금을 푼 뒤 설정 화면을 여는데 한이 마주 쥔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혼란을 틈타 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한을 책망하듯 바라보는데 다행히 앞에 선 사람들이 4층에서 내렸다. 다시 둘만 남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신우가 길게 한숨을 내쉰다.
“사람 있는 데서는 조심해 줬으면 좋겠는데…….”
“왜?”
“사람들이 보잖아.”
“우리나라 사람들 남한테 그 정도로 관심 없어.”
“티를 안 내는 거지 관심 많아.”
체면상 노골적으로 쳐다보지 않을 뿐이지 힐끔거리듯 관찰하며 평가해 이야깃거리를 만든다고 신우가 지적하자 한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인정한다.
“그래도, 그 사람들이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건 아니잖아?”
다시 볼지 안 볼지도 모르는데 내가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하냐는 태도가 너무 한다웠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정론이다.
하지만 요즘은 세상이 달라졌다.
“휴대폰으로 촬영해서 우리 동네 남남 커플, 이런 거 올리는 사람들도 많아.”
물론, 드문 경우겠지만 그런 몰지각한 사람들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세상이라 신우는 조심해 달라고 한을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한은 생각보다 강적이었다.
“그럼 더 좋지.”
“뭐가?”
“그렇지 않아도 너 내 거라고 이마에 써 놓고 싶었는데 대신 인터넷에까지 올려 준다면 나야 기쁘지. 물론, 범죄는 범죄니 민사, 형사 양쪽으로 소송 들어가 다시는 사회에 복귀하지 못하도록 멘탈을 밟아 주긴 하겠지만.”
기가 막힌 발언에 할 말을 잃은 채 그를 바라보자, 한이 다시 가볍게 키스를 해 왔다.
바로 방금 조심해 달라고 했는데 그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은 듯한 태도에 뭐라고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일단 내려야 하긴 하는데 얼굴이 타오르는 것 같아 발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바로 사무실 입구라 그 전에 얼굴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꼭 잡고 있는 한의 손도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멈춰 선 채 일단 손을 놔 달라고 하려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한은 멋대로 손을 잡아끌었다.
“자, 출근하자!”
“이거는 오후까지 정리돼야 하고 나머지 두 장은 내일까지 마무리돼야 하는데 괜찮을까요?”
얼굴을 식힐 새도 없이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다행히도 한은 인재에게 끌려 나갔다. 오늘만은 그런 인재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언제나 작업을 하던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러자 정우가 추가로 작업할 도면들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다행히 그렇게 많은 양은 아니었다.
“작업을 거의 다 해 두셔서 제가 확인하면서 작업하면 이건 오늘 내로 마무리될 것 같아요. 나머지 두 장은 일단 확인하고 오래 걸리겠다 싶으면 처음부터 다시 작업 시작할게요.”
오히려 새로 작업을 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작업물을 확인하면서 잇는 게 더 오래 걸릴 수도 있다. 그러니 일단 확인 후 작업을 시작하겠다고 하자 정우가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쉰다.
“죄송해요. 마감이 급해서 부탁드린 거기는 한데 남의 작업 손대는 거 기분 나쁘실 텐데…….”
“괜찮아요. 사정이 있으신 거니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며 신우는 도면을 세세히 살폈다. 그런 신우를 옆에서 바라보던 정우가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그런데, 진짜 정식으로 들어올 생각 없으세요? 제가 좀 까다로운 편이라 다른 사람하고 일을 같이 못 하는데, 신우 씨랑은 괜찮을 것 같거든요.”
지난번에도 몇 번 이야기가 나왔던 화제에 신우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개인 사정 때문에 취직은 좀 그래서요…….”
이 정도 규모의 회사에, 그것도 최고의 엘리트들만 스카우트해 놓은 디자인팀에 합류한다는 건 자신의 경력에 큰 도움이 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사정도 있지만 이 회사의 투자자와 실질적인 대표가 한인 이상은, 자신이 마음 놓고 일할 곳은 못 되었다.
“사정이 있는 거겠지만, 그래도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세요. 신우 씨 색감이나 센스도 좋아서 보조 디자이너로 같이 하면 어떨까 하거든요. 제가 잘 못 하는 걸 신우 씨는 곧잘 하시니까 같이 일하면 시너지가 많이 날 것 같아요. 연봉은 최대한 맞춰 달라고 제가 요청해 볼게요. 여기 연봉은 꽤 후해요. 뭐, 그만큼 일도 시키지만요.”
대표가 돈이 많아서요, 라는 정우의 말에 신우는 웃음으로 대충 얼버무렸다. 그 대표에 대해 아는 척하는 것도 그렇고 모르는 척하기도 모호해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신우 씨 지금 하시는 작업들은 납기 마감이 여유 있긴 한데 이 작업들 끝내신 뒤에는 로열 펠리체부터…….”
다시 업무로 돌아가 정우가 스케줄을 정리해 주려는데 사무실 유리창 너머에서 호쾌한 음성이 울려 왔다.
“정우 씨, 영성 건설에서 오신 분이 기다려요.”
유리문에 기댄 남자가 그렇게 말을 전하자 정우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인다.
“네, 지금 가요. 신우 씨, 그럼 일단 이것부터 빨리 부탁드릴게요.”
“네.”
바쁜 듯 정우가 사무실을 나서자 신우는 화면을 바라봤다.
갑자기 출근을 하게 되긴 했지만 집 안에만 있기 아까울 정도로 날씨가 좋았고, 작업한 만큼 수당도 늘어나기에 일이 싫지는 않았다. 일이 끊기는 게 문제지 일이 넘치는 건 언제나 좋은 일이다.
어쩐지 기분 좋은 하루였다.
그 순간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예상보다 작업 속도는 빨랐다. 워낙 전임자가 꼼꼼하게 작업을 해 놓은 덕에 순식간에 도면 하나를 처리한 신우는 마지막 검수를 마친 뒤 시계를 확인했다.
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한은 어떻게든 점심시간까지는 들어오겠다고 했지만 오가는 시간이 있어 확신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 혼자 점심을 먹어야 하나, 고민하는데 기다렸다는 듯 벨이 울려 왔다.
역시나 한이다.
“응.”
- 나 5분 후에 도착해. 내려와. 밥 먹으러 가자.
“일 다 끝났어?”
- 응. 그쪽이 원하던 자재 전부 오케이했더니 시원하게 도장 찍으셨어. 아, 그런데 오늘 너무 덥다. 그런 의미로 점심 냉면 괜찮아?
벌써 기온이 30도가 넘어 야외 주차장에 둔 차에 올라탈 때 구워지는 줄 알았다는 한의 한탄을 들으며 신우는 재빨리 책상 위를 정리했다.
“괜찮아. 냉면 좋아해.”
- 좋아. 그럼 냉면 먹으러 가자. 근처에 냉면 맛있게 하는 데 있어.
“또 노포야?”
- 아니, 거긴 유명한 맛집이야. 오늘 날씨가 더워서 사람이 많기는 하겠지만 맛있으니까. 건물 앞에 차 세워 둘게. 내려와.
“응. 지금 나갈게.”
전화를 끊은 동시에 노트북 전원을 끈 신우는 가방을 챙겨 들고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역시나 점심시간이 되어서인지 사무실은 반쯤 빈 채였다.
한산한 내부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자 사무실 사람들이 그 앞에 다 모인 듯 만원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네 대이길래 망정이지, 하나로는 어림도 없을 듯한 머릿수에 가장 사람이 적은 쪽으로 가려는데 안쪽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정우가 아는 척을 했다.
“신우 씨, 정 팀장님 들어오신대요?”
“네. 이 앞이래요.”
“오늘은 어디 가신대요? 정 팀장님 식도락가라 이 주변 맛집 꿰고 있다던데?”
“어…… 냉면 먹는다는데요.”
정우에게 오늘 점심은 한과 먹을 거라고 말한 기억이 없는데 그는 이미 한과 자신이 함께 점심을 하는 걸 당연하다 여기고 있었다.
그걸로 겨우 알아챘다. 이 사무실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과 한의 관계를 눈치채고 있다는 걸.
하긴, 한이 그렇게 티를 내고 다니는데 못 알아챘으면 바보다. 오늘 오전에 사무실에 올 때도 두 손 맞잡고 들어온 데다, 인재에게 끌려가는 순간까지도 전화하겠다고 난리를 쳤으니까.
사방팔방에 우리 지금 사귀어요, 라고 자랑하고 다닌 듯한 기분에 민망한 듯 목을 긁적거리며 옆으로 돌아서는데 정우의 옆에 있던 남자가 정우에게 작게 말을 건넸다.
“정한 선배님이요?”
사무실에서는 보통 ‘정 팀장님’이라고 불리는지라 낯설게 들려오는 지칭에 신우가 그쪽을 보며 의아해하자 정우가 뭔가 알겠다는 얼굴을 한다.
“아, 맞다. 진성 씨 정 팀장님 후배라고 하셨죠? 이쪽은 연신우 씨요. 신우 씨, 이쪽은 이진성 씨 영성 건설 분이세요.”
정우의 소개에 신우가 가볍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자 그쪽 역시 묵례로 답한다. 그러곤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 갔다.
“그 형은 여전하나 보네요. 매일 맛있고 좋은 것만 찾아다니고 싫어하는 건 안 하고.”
“정 팀장님 대학교 때도 그랬어요?”
“정한 선배야 유명하죠. 뭐든 잘하고 잘 놀고 돈 많고. 매너 좋고. 그러면서 아주 변덕스럽고요.”
어쩐지 그의 말투에서 가시가 느껴졌다. 칭찬이라기보다는 비웃는 듯한 느낌에 신우가 그를 슬쩍 다시 바라보자 정우가 중간에서 대화를 이어 간다.
“뭐, 그럴 것 같았어요. 여유가 몸에 밴 분이니. 아, 신우 씨는 정 팀장님 고등학교 동창이래요. 두 분이 오랜 친구.”
막 정우의 소개가 끝난 순간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어쩐지 껄끄러운 분위기에 그를 피하려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데 엘리베이터 안쪽에 있던 키가 큰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한이다.
“왜 올라왔어? 차에서 기다리지.”
“너무 더워서 지하에 차 세워 놨어. 빨리 타. 아래층 사람들 기다리겠다.”
어서 들어오라는 듯 까닥거리는 한의 손짓에 신우가 재빨리 그 안으로 들어서자 그 뒤로 사무실 사람들이 우르르 따라 탔다. 금세 만원이 된 엘리베이터 안에서 신우가 치이자 한이 그를 끌어당겨 옆에 세웠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말을 붙였다.
“작업은 다 끝났어?”
“두 개 남았어. 넌?”
“내 일은 끝났어. 점심 먹고 들어가면 되는데…… 네가 사무실에 남아 있으면 나도 남아 있어야겠지?”
아무래도 인재의 전략이 성공한 것 같다며 한이 삐죽이던 중 그들의 앞에 서서 타이밍을 보던 진성이 한을 돌아보며 인사를 건네 왔다.
“선배, 오랜만이네요.”
딱딱한 표정의, 그다지 반가운 기색 없는 진성의 인사에 신우의 옆에 바짝 붙어 있던 한이 ‘누구지?’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 이내 그를 알아본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진성, 맞지?”
“네.”
“그런데 네가 여긴 웬일이야?”
“영성 건설에서 나왔어요.”
“아, 너 영성 들어갔어?”
“네.”
“아하~ 거기 우리 동문 많네?”
가볍게 진성과 대화를 나누면서 한이 손을 잡으려 하자 신우가 재빨리 양손을 등 뒤로 숨겼다.
순간 한이 못마땅해하는 기색을 내비쳤지만 신우는 애써 그를 외면한 채 정면을 바라봤다.
“영성은 우리 라인이잖아요. 대표 이사님부터 동문이니까요.”
“아, 그랬지. 그래서 거기 우리 동문이 많지.”
말과 함께 한은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신우의 허리를 안았다. 그러곤 익숙한 움직임으로 그의 머리 위로 턱을 올렸다.
손을 못 잡게 하자 이젠 아예 끌어안고 비비적거리는 꼴이었다. 그런 한을 밀어 내려 신우가 몸을 비틀자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던 진성이 묘한 얼굴로 웃는다.
“……많이 변하셨네요.”
“응?”
“대학 때랑은 다른 것 같아서요.”
“대학 때 그대로면 그게 더 문제 아닌가?”
조금 험악한 느낌마저 드는 진성의 말을 한은 아주 부드럽게 받아쳤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긴장감에 신우는 그쪽의 눈치를 살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고 신우가 고민하던 중 정우가 툭 하니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팀장님, 오늘 뭐 드실 거예요?”
“그건 왜요?”
“맛집 좀 알려 주세요. 이제 도시락, 라면, 돈가스 물려요. 맛있는 백반집 없어요?”
이 근처 밥집은 이제 다 다녀 봤다며 정우가 진짜 맛있는 가게를 추천해 달라고 하자 한이 싱긋 웃어 보인다.
“안 가르쳐 줄래요.”
당당한 한의 거절에 정우가 황당해하는 얼굴을 했다.
“좀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 좋은 건 나누자고요.”
“싫어요. 좋은 건 다 내 거. 내가 좋아하는 건 나만 보고 나만 알아야 돼요.”
“맛집 알려 준다고 닳아요?”
“닳아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면서도 아이처럼 천진하게 웃는 한의 모습에 정우 또한 웃고 말았다. 한이 저렇게 나오면 대부분이 기막혀하면서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주곤 했다.
너무 당당해서 뭐라고 할 수가 없는 거다.
저것도 타고난 복이라고 떠올리며 신우가 바뀌어 가는 층수를 올려다보고 있자 한이 다시 말을 건다.
“할아버지가 오늘 저녁엔 묵은지 고등어조림에 닭곰탕이래. 괜찮아?”
갑작스러운 저녁 메뉴 알림에 신우가 주변에 선 사람들을 의식한 듯 눈치를 살폈다. 다들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분명 소리는 듣고 있을 거다.
그래서 차마 답을 하지 못한 채 망설이는데 속도 모르고 한이 보챘다.
“왜? 싫어? 할아버지한테 전화해서 저녁 메뉴 바꿔 달라고 할까?”
일부러 이러는 게 분명한 한의 태도에 결국 두 손 들고 패배를 외쳤다.
“……아니. 좋아해.”
“후식은 메밀전병하고 감자전. 우리 아주머니 감자전 진짜 잘해. 아, 옹심이도 맛있는데…… 감자옹심이 해 달라고 해야겠다.”
인생 최대의 난제가 ‘오늘은 뭘 먹을까?’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한과 한의 할아버지는 하루하루 그 고민만 하며 사는 듯했다. 덕분에 식사 때마다 메뉴를 바꿔 가며 다양하고도 신기한 요리들을 경험하는 건 참 좋았지만, 이런 데서는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하…….”
한아,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고 하려는 순간 정우가 끼어들었다.
“두 분이 같이 사세요?”
가장 두려워했던 그 반응에 한에게 말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이 정도는 충분히 잘 빠져나갈 수 있는 녀석이니까 적당히 얼버무리라고 눈빛을 보냈지만 한은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경악할 말을 내뱉었다.
“같이 살아요. 보쌈했지, 내가.”
“아, 그래요? 어쩐지.”
라며 정우는 태연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신우는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할아버지께서 한이 하는 대로 다 받아 주지 말라고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놔두면 저녁 뉴스에까지 나가 떠들어 댈 기세다.
너 이따 나랑 이야기 좀 하자고 신우가 찌릿하며 한을 바라보는데 앞에서 조용히 있던 진성이 싸늘한 어조로 한에게 묻는다.
“……선배, 다른 사람하곤 못 산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랬지. 하지만 신우는 예외. 우리 할아버지도 인정했으니까.”
아예 공인받은 관계임을 한이 떠벌린 순간, 드디어 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멈췄다. 천천히 열리는 문으로 앞에 선 이들이 내리자 한이 그들을 향해 인사를 건넨다.
“다들 점심 맛있게 드세요. 진성이 넌 나중에 모임 때 보자.”
엘리베이터 안에 폭탄을 던져 놓고는 태연한 한의 인사에 신우는 더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수치심에 차마 그들을 볼 수 없어 눈을 가리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악의적인 건 아니지만 어쩐지 따가운 시선에 서서히 닫히는 문틈을 바라보는데 진성과 눈이 마주쳤다.
정우와 나란히 걸음을 옮기던 그가 고개만 돌려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묘한 그의 눈빛에 닫히는 문 너머를 바라보던 신우가 한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한이 ‘응?’하며 신우를 내려다본다.
“왜?”
할 말 있냐는 한의 물음에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갔다.
“……진성 씨랑 친했어?”
“아…… 친하긴 했지. 사귀었거든. 두 달 정도.”
쓸데없다 싶을 정도로 솔직한 한의 답에 ‘역시나’ 싶었다.
유난히 한에게 가시를 세우는 태도가 이상하다 싶더니, 그랬던 거였다.
“……그랬구나…….”
그제야 아까의 분위기가 이해가 되었다.
진성 씨의 입장도 이해가 가 입을 다물고 있던 중 지하 2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서둘러 걸음을 내디디며 한의 차를 찾자 한이 바로 옆으로 다가서며 고개를 숙여 얼굴을 들여다본다.
“질투했어?”
제발 질투해 달라는 듯 반짝거리는 한의 눈빛에 신우는 맥없이 말을 흐렸다.
“글쎄…….”
“답이 뭐 그래? 난 저번에 무지 질투했는데. 너도 해. 안 그러면 내가 너무 속이 좁아 보이잖아.”
한이 원하는 대로 질투를 하기엔 과거 연인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너무 차가웠다. 저 정도로까지 아무렇지 않게 대하면 오히려 상대방을 동정하게 된다. 한이 상대를 머쓱하게 대하거나 눈치를 보며 꺼림칙한 태도를 취했다면 자신이 불편해졌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금의 한은 너무 아무렇지 않았다.
진짜 오랜만에 본 후배를 대하는 듯 스스럼없고 자연스러웠던 나머지, 솔직히 말하자면 진성의 태도가 그렇게 날카롭지 않았다면 전혀 몰랐을 거다.
아마 그래서일 거다. 한의 과거보다 지금의 태도가 마음에 걸리는 건…….
“진짜 질투 안 해?”
갑자기 심장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또다시 움츠러들려는 마음을 간신히 추스르며 주차해 둔 차로 향하는데 옆에서 한이 계속 치근거렸다. 정말 섭섭한 건지 뭐든 반응을 보여 달라는 듯한 한의 태도에 애써 웃어 보였다.
“난 과거 일은 신경 안 써. 흘러간 건 흘러간 거니까.”
“난 신경 써 줬으면 좋겠는데?”
그 말에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연인의 과거에 신경을 쓰는 건 연인이 상대에게 미련을 가질 성격인 경우다. 한처럼 저렇게까지 미련이 없다면 이쪽도 신경을 끊게 된다.
자신이 걱정하는 건 그의 과거보다는 그와의 미래였다.
다시 조금씩 불안이 쌓여 간다. 먼지처럼 조금씩 쌓인 불안감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아슬아슬하게 심장을 억누르고 있다.
여전히 자신은 용기가 없고 겁이 많다.
그걸 알면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게 가장 괴로운 일이었다.
“신우야?”
멍하니 조수석에 앉아 있던 중 들려온 한의 목소리에 신우는 퍼뜩 정신을 차리곤 한을 돌아봤다.
“응?”
“다 왔어.”
차를 멈춘 한이 이제 그만 내려야 한다는 듯 고갯짓을 하자 신우가 그제야 벌써 차고 안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서둘러 안전띠를 푼다.
“어……. 잠깐 멍했나 봐.”
“왜? 피곤해?”
“조금. 오랜만에 급하게 일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정신없이 화면만 본 채 손을 움직인 덕에 간신히 퇴근 시간 직전에 작업을 마무리한 차였다. 아직 마감까지 여유가 있긴 하지만 자신이 맡은 다른 작업도 있는 터라 서두른 덕에 일단 급한 불은 껐다.
“식사 준비 다 됐다니 바로 본채로 가야 하는데 괜찮겠어? 피곤하면 별채 가서 쉬다 올래?”
“아냐. 괜찮아. 배고파.”
오히려 오가는 게 더 피곤할 것 같아 그렇게 답하며 서둘러 차 문을 열자 한 역시 운전석에서 내려선다. 한이 가방과 재킷을 챙겨 드는 걸 보곤 곧장 차고를 나서려 걸음을 옮기는데 한이 바로 옆으로 다가서며 자연스럽게 어깨를 끌어안는다.
“역시 결혼하고 합가하는 건 안 좋은 것 같아.”
“갑자기 그건 왜?”
“끌려 나간 거긴 하지만 모처럼 외출한 김에 데이트하고 들어와도 좋을 텐데 할아버지께서 기다리시니 곧장 귀가해야 하잖아.”
역시 하루빨리 분가하는 게 좋겠다고 한이 투덜거리는 소리에 신우가 이미 해가 저물기 시작해 서늘한 정원을 거닐며 작게 중얼거린다.
“난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집으로 오는 거 좋은데?”
순간 신우의 어깨를 안고 있던 한의 손이 멈칫했다.
이제 신우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아는 척할 수도 없지만 모르는 척할 수도 없었다. 그게 고역이었다.
“……뭐, 넌 혼자 산 지 오래됐으니까.”
가장 무난한 답을 골라 그렇게 넘기자 신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응. 맞아…….”
그렇게 말을 흐리지만 붉은 노을빛을 받은 신우의 얼굴은 우울한 기색을 띤 채였다. 상념에 빠진 듯한 그 모습에 한은 더 말을 걸려다 입을 다물었다.
어설픈 위로는 어울리지 않고, 적당히 말을 돌리기엔 너무 무례한 것 같아 그저 말없이 그의 머리만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저녁 맛있을 거야. 우리 아줌마 묵은지 진짜 맛있는데 거기다 생물 고등어 조합이면 완벽하거든. 비린내 하나도 안 나게 진짜 맛있게 하셔.”
“요리 진짜 잘하시더라. 큰일이야. 이러다 입맛만 까다로워질 것 같아서.”
“당연히 그래야지. 그러라고 데리고 온 건데. 그거 내가 그린 큰 그림이야. 집밥 먹고 싶어서 밖에 못 나가게 하려고.”
돈과 시간이 꽤 많이 들고 복잡한 전략에 신우가 작게 웃는다.
“그게 뭐야?”
“자발적 감금이라고 하지. 혹은 셀프 격리.”
“음식이 미끼야?”
“응. 떡밥.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먹는 거야. 아는 맛이 무섭다는 게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고. 나도 유학하는 동안 먹는 것 때문에 힘들었어.”
“너만 그런 거 아냐?”
한처럼 먹는 것에 집착하는 케이스가 많지는 않을 듯해 신우가 장난하듯 말을 건네자 한이 그 말을 순순히 인정한다.
“뭐, 그럴지도 모르지. 내 인생을 차지하는 것의 30%는 먹는 거니까. 20%는 일이고.”
“50%는?”
“너.”
눈웃음을 흘리며 한이 가볍게 던진 말에 신우의 표정이 흐려진다. 아주 미묘하지만 한의 눈에는 선명히 보이는 변화였다. 그게 마음에 걸린 듯 한이 표정을 굳히자 신우가 아차 한 얼굴로 겨우 웃어 보인다.
“너, 가끔 사기꾼 같아.”
대충 얼버무리려는 기색이었지만 한은 굳이 더 파고들지 않았다.
“우리 엄마랑 아빠도 가끔 그러셔. 넌 한 발자국 잘못 나갔으면 사기꾼이라고.”
“부모님이 상당히 객관적이시네.”
“뭐, 좀 그러시긴 해. 그래서 아들놈 셋 다 쓸모없다고 하시니까.”
“셋?”
“응. 남동생만 둘 있거든.”
그러고 보니 정현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분명 남동생들이 있다고 들었다.
그때 정현이 뭐라고 했더라, 라고 떠올리던 순간 벨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놀라 곧장 휴대폰을 찾아 들자 정현의 이름이 떠 있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눈을 크게 뜬 채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이 볼멘소리를 낸다.
“이 자식은 눈치가 없어.”
왜 단둘이 분위기 좋을 때 전화질이냐 화를 내는 한을 무시한 채 신우는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곧 익숙한 음성이 귀에 울려 온다.
- 뭐 해? 출근하는 중?
자신의 일과를 잘 아는 정현의 인사말에 신우는 그제야 정현에게 새벽일은 관뒀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어…… 아니…… 버디는 이제 안 나가.”
- 응?
“다른 일……하게 돼서…….”
- 다른 일? 또 밤에 일하는 거야?
“아냐. 이젠 밤에는 일 안 해.”
- 그건 잘됐네. 밤에 일하는 거 좀 그랬는데. 잘했어.
“응.”
- 어제 한이 만났는데 한이네 본가로 들어갔다며?
“응.”
- 뭐, 그것도 일단 축하할게. 월세랑 공과금 굳겠네.
지극히 현실적인 정현의 축하에 신우는 맥을 놓았다.
“응. 고마워.”
- 어제 한이 봤으니 이젠 널 봐야 할 것 같은데…… 내일 시간 괜찮아?
일단 한에게 보고 들었으니 이젠 네 차례, 라는 말이었다, 그건.
바쁘다는 핑계로 사귀기로 했다는 이야기만 하고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으니 한 번 만나긴 해야 했다.
“내일 괜찮아. 이제 출근 안 하니까.”
- 그럼, 점심시간에 좀 보자. 아, 한이는 떼어 놓고 나와. 걔 나오면 시끄러워. 난 너랑 얘기할 게 있으니까 그 새끼는 꺼지라고 해.
과격한 표현이긴 했지만, 그의 말대로 내일은 정현과 둘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자신도 정현에게 긴밀히 할 이야기가 있다.
한에게는 할 수 없는…….
“그래. 그럼, 내가 너희 회사 근처로 갈까?”
- 전에 갔던 데 있지? 플레이트. 거기로 와. 1시에 시간 맞춰서 나갈게.
“그래.”
- 그럼 끊는다. 아, 그리고 할아버지께 안부 전해 드려. 나중에 한번 놀러 간다고.
“알았어.”
짤막한 통화를 끝낸 뒤 종료 버튼을 누르자 바로 옆에서 신경을 곤두세운 채 이쪽의 대화 내용을 듣고 있던 한이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다.
“둘이서만 만난다고? 왜?”
“나한테 따로 할 얘기가 있대. 나도 정현이한테 할 얘기가 있고.”
“나도 같이 얘기하면 안 돼?”
“네 얘기 할 거니까.”
정확히는 정현은 한의 욕을 할 거고 자신은 지금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정현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 대충 짤막한 답으로 무마하자 한이 입술을 삐죽인다.
“나 두고 혼자 놀러 나갈 거야?”
“정현이한테는 제대로 설명해야지.”
어쨌든 자신의 곁을 13년이나 지켜 온 친구이기에 그 정도 예의는 지키고 싶다고 하자 한이 영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한 채 결국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과 정현이 애증 어린 신뢰 관계인 것처럼 신우와 정현은 또 다른 관계의 형태였다. 신우가 그 관계를 소중히 한다는 걸 아는 이상,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둘이 만나서 시원하게 내 욕 하고 스트레스나 풀어라. 내일 데려다줄 테니 끝나면 전화해. 들어오는 길에 데이트나 할까? 영화도 보고. 요즘 뭐 개봉한 거 있나?”
계속 대화를 이어 가다 보니 어느새 본채에 다다랐다. 한이 먼저 마루 위로 올라서는 걸 보곤 신우 역시 마루에 앉아 운동화를 벗었다. 그러곤 막 마루 위로 올라서는데 알림음이 울렸다. 그 소리에 다시 휴대폰을 확인하자 짤막한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계약서 보냈어.]
분명 원혁의 번호였다. 따로 번호를 저장해 둔 건 아니지만 문자 내용만 봐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계약서를 보냈다니 어디로, 라고 잠시 고민했지만 아마 계약서에 적은 주소가 있으니 그쪽으로 보낸 듯했다. 어차피 한 번 우편물을 정리하러 가긴 해야 했다. 답장 없이 무시한 채 툇마루를 걷는데 다시 한번 문자음이 울려 왔다.
[다시 한번 사과할게. 그때는 미안했어. 잘 지내.]
‘넌 그래서 질려.’
마치 마지막을 고하는 인사와 같은 문자에 잠시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여전히 자신에게 가장 깊은 상처로 남아 있는 그의 마지막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곤 서둘러 한의 뒤를 따랐다.
자신에겐 트라우마와 같은 그 말을 떨쳐 내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서둘렀다.
하지만 아무리 의식적으로 그 생각을 밀어내려 해도, 머릿속에 달라붙은 채 좀처럼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식사를 하고 별채로 돌아갈 때까지도.
“안 나간다니까. 재택근무한다고.”
식사 후 별채로 돌아온 직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마루에 앉아 인재와 통화를 하던 한은 질리지도 않고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한이 재택근무를 선언한 지 하루도 안 돼 핑계를 만들어 나오게 만든 인재가 내일도 또 나오게 할 이벤트를 만들어 낸 듯했다.
진짜 질겨도 이렇게 질길 수가 없다고, 한은 탄식했다.
무슨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한을 출근하게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서린 인재의 끈질긴 전화에 한은 진심으로 그를 그냥 잘라 버려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그런 한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인재는 꿋꿋하게 그의 계획을 밀어붙였다.
- 그래도 나와야 돼. 내일 부지 보기로 했어.
“그러니까 왜 그걸 네 마음대로 정하냐고? 내 일정은 내가 정해.”
- 디자인 나왔으면 가서 부지 직접 보고 어디부터 시작할지 정해야지. 이미 드론 전문가 불렀어. 이 사람 바쁜 사람이야. 간신히 캐스팅한 거니 잔말 말고 나와.
“누구 마음대로?
- 드론 들고 가서 조감도 촬영하고 측량도 정확하게 다시 해야 된다고 하던 게 누군데?
그건, 분명 자신이었다. 나무를 최대한 잘라 내지 않기 위해서는 조감도가 필요하고 측량도 정확히 해야 한다.
- 어차피 할 거 스케치 나왔으면 빨리빨리 진행해. 이 사람 다시 부르려면 한 달 걸려. 아무나 쓰기 싫다며?
한이 빠져나갈 수 없게끔 드론 장비와 전문가까지 불러 놓은 인재의 치밀함에 새삼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 말도 맞긴 하다.
어차피 스케치도 끝났고 본격적으로 작업을 할 거면 미리미리 측량해 두는 쪽이 좋긴 하다. 그리고 전문가 섭외가 어렵다니 확실히 내일 하는 쪽이 낫긴 한데…….
마침 내일 신우가 정현과 약속이 있다. 그럼 신우와 같이 나갔다가 정현의 회사 쪽에 내려 주고 그쪽 부지에 가 볼까, 고민하던 한은 이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좋아. 그럼, 내일 1시 반에 출발하는 걸로 해.”
어차피 나가는 거 단번에 끝내자는 생각으로 시원스레 답하자 인재가 침묵한다. 그렇게 열심히 나오라고 할 때는 언제고 나간다니, 답이 없다.
“왜? 안 나가도 돼?”
그럼 나야 좋고, 라고 대꾸하자 인재가 재빨리 소리친다.
- 네가 답이 너무 빠르니 당황했잖아. 웬일이야? 한 30분 싸울 각오 했는데.
“아, 신우가 그때 나갈 거거든.”
어차피 신우 데려다줘야 하니까, 라는 말이 생략된 걸 인재는 아주 잘 알아들었다.
- ……진짜, 가지가지 한다.
“부러우면 너도 가지가지 해. 그럼, 끊어.”
- 야, 그리…….
내일 나간 김에 뭔가를 더 시키려 들 것 같은 기세에 일방적으로 종료 버튼을 누른 한은 귀찮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서 작업실에 있는 신우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일 다 했어?”
하지만 답이 없다. 일에 집중한 상태인가 하고 신우에게 다가갔으나 그의 손은 멈춘 채였다.
아까 식사 중에도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역시나 또 안 좋은 생각에 빠진 듯했다.
이제 신우의 머릿속이 대강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기에 될 수 있는 한 신우가 머리를 정리할 때까지 기다려 주려고 했지만, 그러기엔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아 보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일부러 인기척을 내며 뒤로 다가서 어깨를 툭 치자 신우가 그제야 정신이 든 듯 뒤돌았다.
“어? 왜?”
“불러도 모르길래. 무슨 생각 하나 해서.”
그제야 본인이 멍하니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신우가 당황해 부산스레 손을 움직인다.
“아…… 아냐. 아무것도.”
“아무것도가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넋이 나가 있어?”
책상 쪽으로 기대선 한이 아예 취조할 생각으로 자리를 잡자 신우가 슬쩍 시선을 돌려 화면을 본다.
“날이 더운데 오랜만에 나갔더니 좀 지쳤나 봐.”
그럴듯한 변명과 함께 신우가 다시 마우스를 쥔 손을 움직이려 하자 한이 재빨리 물었다.
“혹시, 진성이가 신경 쓰여서 그래?”
혹시나 하는 한의 물음에 신우의 손이 잠시 멈칫한다. 그 반응을 포착한 한이 신우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답을 재촉하자 신우가 한숨과 함께 내뱉는다.
“아냐, 그런 거.”
“그럼?”
그럼 뭐가 문제냐는 물음에 신우가 손을 꼼지락거린다. 답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태도였다.
“……그냥, 좀…… 내가 생각이 많아서 그래.”
“그럼, 그 생각을 말해 줘. 뭐든 같이 대화하고 해결하는 게 좋잖아.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론 내리는 것보단 둘이 대화하는 게 더 좋은 결론이 나오지 않을까?”
“…….”
달래는 듯 조곤조곤한 한의 설득에도 신우는 침묵을 유지했다. 처음에는 신우의 그런 태도가 자신에게 지나치게 선을 긋는 거라고 여겼기에 화를 냈었지만, 지금은 그게 신우의 성향이라는 걸 알기에 한은 최대한 침착하게 다시 말을 건넸다.
“나랑도 상관있는 문제잖아. 아까 진성이 본 이후로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야.”
“…….”
“응?”
“…….”
끈질긴 한의 질문에도 쉽사리 말을 내뱉지 못한 채 시선을 피하는 신우의 태도에 한은 혹시나 싶어 물었다.
“너, 아직도 나랑 헤어질 걸 걱정하는 거야?”
한의 예리한 물음에 신우의 눈썹이 가볍게 떨려 왔다. 그건 긍정의 답이었다.
순간 한숨이 터졌다.
화가 난 건 아니다.
그저, 신우의 트라우마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안타까운 건지, 착잡한 건지 당장의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한이 머뭇거리는 사이, 신우가 아차 한 얼굴로 상황을 수습한다.
“진성 씨 때문에 화가 났다든가, 널 못 믿는다든가 하는 게 아냐. 문제는 나야. 내가 걱정하는 건 네가 생각하는 거랑은 좀 달라.”
“그러니까 난 그 ‘네 생각’이 알고 싶은 거야, 그게 뭐든.”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이야기를 듣겠다고 한이 고집스레 버티고 서 있자 손을 멈추고 있던 신우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입술을 달싹인다.
여전히 난감해하고 있지만 말하고 싶어 하는 의지가 보이는 그 태도에 한은 천천히 어르듯 신우의 이름을 불렀다.
“신우야?”
부드러운 호명에 신우가 주먹을 꼭 쥔 채 작게 떨리는 숨을 내뱉는다. 그 숨에서 불안과 초조함이 묻어났다.
그럼에도 한이 참을성 있게 신우의 답을 기다리고 있자, 이내 그가 뭔가를 결심한 듯 무거운 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걱정하는 건, 헤어지는 게 아냐.”
“그럼?”
“……헤어진 후야.”
“헤어지는 건, 이미 정해진 거야?”
또다시 같은 흐름의 대화가 반복되었다.
이미 그 일로 한바탕 싸운 전적이 있는지라 신우는 조금 긴장했지만, 다행히도 이번엔 한이 화를 내지 않은 채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한의 침착한 태도에 할 말을 고르는 듯 망설이던 신우가 이내 생각 정리를 마쳤는지 입술을 떼었다.
“……난 언제나 끝을 먼저 생각해. 지금까지 헤어지지 않았던 사람이 없었으니까. 엄마도 아빠도 동생도, 피를 나눈 가족이라 해도 결국 전부 헤어졌으니까. 누군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살다 보면 결국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 생기니까.”
짐작하고 있던 고백에 한이 아무 말 없이 신우를 바라보고 있자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신우가 천천히 말을 이어 간다.
“난 누군가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해 본 적이 없어. 정확히는 상상이 가질 않아. 그런 걸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게 존재한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 그래서, 늘 너와 이별한 후를 걱정해. 너와 헤어진 뒤 네가 떠난 빈자리를 어떻게 채우고 네가 없는 시간을 어떻게 견뎌 내야 하나, 그 생각뿐이야. 그리고…….”
거기까지 말한 신우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러곤 곧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오늘 네가 아무렇지 않게 진성 씨에게 인사한 것처럼, 언젠가 내게도 그러면 어떤 기분일까…… 종일 생각했어. 그런 것만 상상하는 내가 싫은데…… 자꾸 머릿속에 떠올라. 그러면, 그런 내가 또 싫어져.”
비로소 터져 나온 신우의 진심에 한은 탄식했다.
지금까지는 신우가 그저 이별을 두려워한다고 여겼는데 신우가 가진 트라우마는 그보다는 좀 더 근원적인 부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신우는 가까운 사람들과 많은 이별을 경험했고, 그 이별의 이유를 본인의 탓으로 끊임없이 주입당하며 자라 왔다.
그 결과 신우는 모든 걸 본인의 잘못이라고 인정하고 작은 일에도 스스로를 탓하게 된 것뿐 아니라, 종래에는 그런 본인을 혐오하는 지경이 이르러 있었다. 그러면서, 또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싫어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며 뿌리 깊은 자기혐오에 빠져 버린 것 같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그리고 무엇부터 손대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당장은 신우를 안아 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왜 그래?”
갑작스러운 포옹에 놀란 신우의 물음에 한이 진지하게 대꾸한다.
“각서 쓸까, 그럼?”
뜬금없이 나온 각서 이야기에 신우가 고개를 들고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는 얼굴로 한을 보았다.
“미국으로 가서 시민권 취득 후에 결혼할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국제 사법상 한국에서는 부부 관계를 인정받기 힘드니까 차라리 각서 쓰고 공증받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정한은 연신우와 헤어지지 않을 것을 약속하며, 그 약속을 이행할 수 없을 경우 전 재산을 연신우에게 양도하겠다고.”
즉, 너랑 나랑 헤어지면 난 거지되는 거라며 한이 웃자 신우가 어이없어하는 얼굴로 되묻는다.
“뭐야, 그건?”
“절대로 너랑 안 헤어질 테지만 그렇게 못 믿겠으면 각서라도 쓰겠다고. 그리고 반대로 네가 날 버려도 전 재산 양도하기. 어때?”
“내 자산은 마이너스인데?”
“그럼 더 좋지. 그럼 빚만 느는 거니까 더 못 헤어지잖아. 아니, 차라리 공동 재산으로 갈까, 전부? 나 할아버지랑 바둑 내기해서 받은 건물하고 땅 꽤 있는데 이참에 공동 명의로 해 둘까? 통장도 같이 쓰고? 아, 회사도 공동 명의로 하자, 차도 그러고. 내 보험 수혜자도 다 너로 돌려놓을까?”
가족들이 들었다면 등짝을 수십 대를 두들겨 맞을 것 같은 한의 발언에 신우는 결국 표정을 풀며 웃고 말았다.
자신을 달래 주려는 건 알겠는데 너무 가 버렸다.
“네가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애 같다고 하는 거야.”
“난 지극히 합리적이고 영리한 사람이야. 공동 재산으로 묶어 두면 세금도 같이 내야 하니 어디에 있든 너 찾을 수 있잖아. 그리고 싫어도 계속 엮여야 하고.”
현대 사회에서 가장 무서운 관계는 금전으로 엮인 관계니까, 라며 한은 가볍게 신우의 머리카락을 톡톡 두드렸다.
약간은 책망하는 듯한 그 손길에 신우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한이 허리를 숙여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러곤 신우를 끌어안은 채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넌, 어리광부리는 법을 배워야 돼.”
“이 나이에 그러면 안 되지.”
“다른 사람들한테 하라는 게 아니라 나한테만 하라고. 마음껏 어리광부리고 짜증 내. 화나면 화내고 질투 나면 질투하고. 불쾌하면 불쾌하다고 말해. 혼자 끙끙대지 마. 뭐든 말로 풀고 나면 좀 나아지니까. 난 응석받아 주는 거 아주 좋아하니까 얼마든지 제멋대로 굴어도 돼.”
“…….”
“네가 뭘 생각하고 무슨 짓을 하든 난 무조건 네 편이니까, 뭐든 말해 줘.”
“……응.”
신우가 이번엔 얌전히 한의 뜻을 따르겠다 답하자 한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신우를 바라보며 속삭인다.
“그리고, 이건 꼭 알아줬으면 좋겠어.”
담담한 한의 음성에 신우가 어서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신호에 한이 천천히 말을 잇는다.
“넌 나한테 아주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야. 그리고 나뿐 아니라 정현이에게도 소중한 친구고. 이 세상에 널 많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꼭 알고 있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가능하면 영원히 네 옆에 있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그건.”
알고는 있지만, 아마 믿지는 못하는 것 같다고 한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우는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저 본인에 대한 자신이 없어 사랑받고 있음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에 가깝다. 그 이야기를 해 봐야 신우는 그조차도 자기 자신을 탓할 거다. 그래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저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마치 난초를 키우듯 애정을 주고 정성껏 쓰다듬어 믿음이 스며들게 만드는 수밖에 없다.
신우가 스스로를 사랑하게 될 수 있을 때까지.
아주 천천히, 젖어 들듯 조심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