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따뜻한 볕이 피부 위로 쏟아졌다. 그와 함께 불어오는 바람결을 타고 먼 곳에서부터 풍경 소리가 울려 댔고, 시원한 풀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
그게 신기하다고, 신우는 떠올렸다.
분명 자신은 잠들어 있었다. 그걸 신우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감각이 생생했다. 의식이 깨어 있는 채였다.
여기가 한의 집이고, 잠깐 마루에 앉았다 따뜻한 햇살에 졸음이 쏟아져 문틀에 기대 깜빡 잠들었다는 것까지 모두 기억났다.
그리고 오감 중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깨어 있었다. 이제 눈만 뜨면 되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일어나야 하는데, 라고 머릿속으로만 떠올리던 사이 따뜻한 손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익숙한 그 손길에 설핏 눈썹이 흔들린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자 시야에 낯선 풍경이 들어왔다.
하늘은 눈이 아플 정도로 파랗고 땅 위는 생생한 초록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어났어?”
여름이구나, 라고 무의식중에 떠올린 순간 바로 옆에서 들려온 음성에 신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봤다. 그러다 옆에 앉아 있는 한을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어…… 왔어?”
나른하던 정신이 확 깨었다. 당혹감이 묻어나는 그 태도에 한이 느긋하게 묻는다.
“방금. 곤히 자던데, 몸은 괜찮아?”
‘몸이 왜?’라고 반문하려던 신우는 이내 그 물음의 의미를 깨닫고는 얼굴을 붉혔다.
“괜찮아.”
그리 답하며 시선을 피하는 신우의 목덜미는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얼굴도 목도 붉어졌지만 한은 그걸 못 본 척하며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 갔다.
“밥은 먹었어?”
“……아직.”
“그럼 밥부터 먹어야겠다. 아, 맞다. 그리고 네 짐 곧 올 거야.”
“……응?”
“너희 집에서 짐 다 빼 올 거야, 곧. 전부 별채로 옮기라고 했어. 열쇠는 내가 멋대로 꺼냈어. 미안해.”
그러고 보니 아침에도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긴 한데 설마 바로 실행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터라 당황한 신우가 입술을 뻐끔거린다.
“한아, 그건…….”
“일방적이라는 건 아는데, 미안하지만 그건 내 마음대로 할 거야. 너 거기 혼자 두기 싫어. 혼자 두면 집 옮기고 도망칠 거잖아.”
그래서 아예 도망갈 곳을 없애 버리기로 했다는 한의 말에 신우는 그의 조부가 남기고 간 이야기를 떠올리곤 자기도 모르게 실소했다.
한은 상대가 도망갈 것 같으면 신발과 옷은 물론 집도 태워 버릴 것 같았다.
“불행히도, 나한테 그런 능력은 없어. 도망 못 가.”
도주도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이나 하는 거라고 신우가 기막혀하자 한이 어깨를 으쓱한다.
“그래도 만약의 경우라는 게 있으니까. 일단 퇴로 차단. 계약 문제 같은 건 할아버지 비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냥 두면 돼. 어차피 집은 넓고 별채는 나 혼자 쓰니까 신경 쓸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거취가 결정된 상황에 뭔가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딱히 뭐라고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어젯밤부터의 모든 일이 마치 꿈만 같아 현실감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뇌 역시 그걸 현실로 빨리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정상 궤도를 벗어난 상황에 판단력이 떨어진 신우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리는 모습에 한이 재빨리 신우의 말을 막는다.
“같이 살았다가 헤어지면 어쩌냐는 말은 하지 마. 또 한 번 그런 말을 들으면 진짜 화낼지도 몰라.”
더없이 진지한 한의 표정에 신우가 입을 다문다. 정확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자백하는 것과 같은 그 반응에 한은 조금 기운이 빠진 듯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일단, 들어가서 밥부터 먹자. 나도 점심 못 먹어서 배고파.”
“점심 안 먹었어?”
“정현이 만나서 싸대기 맞느라 못 먹었어.”
물론 진짜 맞은 건 아니었지만 그 이상의 충격을 받은 터라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정현이 만났어?”
“응. 잠깐 볼일이 있어서 만났는데 조만간 욕 대백과사전을 편찬할 기세야. 그 녀석 부모님은 아주 점잖으신데 걔는 좀 이상해.”
환경 문제는 아니고 그냥 타고난 게 이상한 것 같다는 한의 투정에 신우는 아차 했다.
그러고 보니 정현에게 사귄다고 얘기했다는 걸 한에게 말하지 않았다. 지난번 통화했을 때 정현의 기세로 봐서는 한에게 있는 대로 퍼부어 댔을 게 뻔해 조심스레 물었다.
“정현이가 뭐라고 해?”
“너랑 사귀다 헤어지면 날 갈아 버리겠대. 그 녀석 기세가 하도 살기등등해서 절대로 헤어지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왔어.”
장난스럽지만 딱 두 사람이 했을 법한 대화 내용에 신우는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정현은 보기와 달리 유독 남을 잘 돌봐 주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간혹 자신을 과보호한다는 걸 잘 알기에 한에게 어떻게 했을지 대강 예상이 갔다.
“내가 좀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정현이가 걱정하는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신경 써야지. 내 가장 오래된 친구의 충고인데. 원래 친구의 말은 무시하면 안 되는 거야.”
너무나도 그답지 않은 말을 흘리며 한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일어나자. 여기 너무 덥다. 다 타겠어.”
마루가 타오르는 것 같다며 한이 구두를 벗고 먼저 그 위로 올라서자 신우 역시 삐걱거리는 몸을 움직여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투둑거리는 소리가 울려 왔다.
바로 가까운 곳에서 울린 그 소리에 무슨 일인가 주변을 돌아보자 신우의 무릎 위에 있던 빨간 사탕들이 마루 위로 흩어져 있었다.
“아…….”
그제야 한의 조부께서 주신 사탕을 손에 쥐고 잠들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차 싶어 서둘러 그 사탕들을 챙겨 들자 한이 의아한 듯 묻는다.
“그 사탕은 뭐야?”
“아…… 아까 할아버지 뵀어. 왔다 가시면서 주셨어.”
“사탕을?”
“응.”
“……이런…….”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한이 작게 혀를 차는 모습에 신우는 자신이 뭔가를 잘못한 건가 하는 생각에 그의 눈치를 살폈다.
“왜? 받으면 안 되는 거야?”
“아니, 그건 상관없는데…… 이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말로는 상관없다면서 한은 분명 기분이 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한의 조부께서 이 사탕을 몰래 먹으라고 한 게 떠올라 신우가 의아한 듯 한에게 물었다.
“이 사탕이 뭔데?”
“그냥 사탕이야. 할머니가 생전에 자주 드시던 건데 할아버지께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절대로 안 주시거든. 그래서 내가 몇 번 훔쳐 먹으려다 걸려서 본채에서 별채로 쫓겨난 거야. 대체 뭐길래 그렇게 고이고이 두고 아무도 못 먹게 하나 궁금해서 하나만 달라고 그렇게 애원해도 안 주시더니. 이거 완전히 반칙이잖아.”
“받으면 안 되는 거야, 그럼?”
“아니. 할아버지께서 주신 거니까 받아. 앞으로도 할아버지가 주시는 건 다 받는 게 좋아. 안 그러면 삐치셔.”
“응?”
“당신이 주시는 거 거절하면 진짜 화내시거든. 뭐든 마음대로 하시는 분이라 누가 거절하는 걸 못 참아. 그럼 불똥이 이상한 데로 튀지.”
즉흥적이고 쾌활하고 제멋대로인 성품이니 최대한 비위를 맞춰야 한다고 한이 거듭 말하자 신우가 대단하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는다.
“……너랑 진짜 성격이 비슷하시구나.”
“내가 그랬잖아. 똑같다고.”
사소한 취향부터 하는 짓들이 똑같아 친척들도 간혹 치를 떨 정도라고 한이 덧붙이며 신우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끈다. 그 손에 이끌려 신우는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그 걸음이 너무 가볍다. 분명 방금 꿈에서 깨어났음에도 여전히 꿈속을 거닐고 있는 기분이었다.
영화 속 한 장면같이 아름답고 고아한 집안 풍경과 이 집 안 특유의 느긋하고 여유로운 분위기 탓인지 도무지 현실감이 돌아오지 않았다. 복잡한 상념들은 조금도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그 분위기에 취한 것 같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모든 상황을 평온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냥, 이 자체가 꿈인 듯 너무나 아름다웠다.
“번데기가 아니라, 버디잖아!”
할아버지의 비서에게 전화해 신우의 아는 형 가게를 찾아낸 한은 정확한 정보를 접한 순간 분한 듯 혀를 찼다.
어떻게 하면 버디가 번데기가 되는 건데? 거기다 사장 이름도 병진이 아니라 명진이었다.
“어쩐지 이름이 이상하더라. 유정현, 너 죽었어. 이름이 병진이 뭐야, 병진이?”
정현의 머리가 새대가리라 제대로 기억 못 한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분명 일부러 저렇게 알려 준 거다. 논현동에 있는 번데기의 사장 모 병진 씨를 찾아 고군분투하는 자신의 꼬라지를 떠올리며 비웃으려고.
괘씸한 소꿉친구의 만행에 고마웠던 마음이 일시에 식어 버렸다. 그래서 약속한 계약 건은 재고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따위 허위 정보를 주고도 대가를 받겠다는 건 사기다.
방 안에 놓인 의자에 기대앉아 통화를 끝낸 한은 짜증스러운 듯 혀를 차며 이번엔 인재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사이 욕실 안에서 나던 물소리가 멈추었다.
통화를 하면서도 욕실 내부의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물소리가 그치고 샤워 부스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순간 통화가 연결됐다.
- 아, 그렇지 않아도 전화하려던 참인데 잘됐다. 내일 스케줄 때문에 그러는데…….
“스케줄 취소해. 그리고 앞으로 어지간한 건 네가 처리해. ‘윤슬’ 건만 내가 할 거야.”
- 윤슬?
“그 집.”
지금 내가 지으려고 하는 거, 라며 한은 슬쩍 욕실 문 쪽을 돌아봤다. 샤워 부스의 문소리는 들렸지만 욕조에 들어간 건지 욕실 안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욕조에 들어갔으면 물을 받아야 할 텐데, 라는 생각을 하며 잠시 기다리자 인재가 의외라는 듯 되묻는다.
- 벌써 이름까지 정했어? 그런데 윤슬이 뭔데?
“빛을 받아 반짝이는 잔물결. 한국 건물에 굳이 외국 이름 붙일 필요 없잖아.”
- 아, 그래서 창을 위로 단 거야?
“응.”
- 그런 거라면 괜찮네. 그럼 프로젝트 이름도 윤슬로 할게.
“그래. 그리고 난 당분간 그 프로젝트에만 집중할 테니까 새로 들어오는 의뢰들은 전부 거절해. 그리고 일 처리하는 동안은 재택 근무할 거야.”
드디어 꺼낸 본론에 인재가 놀라 되묻는다.
- 뭐라고?
“출근 안 한다고, 당분간.”
알아들었으면서 괜히 되묻는다 생각하면서도, 앞으로 고생할 인재를 위해 한은 모처럼 친절히 반복해 답해 주었다. 그리고 역시나 말을 끝맺기 무섭게 인재의 목소리가 커졌다.
- 야!
“뭐라고 해도 소용없어. 워킹맘들 기분이 딱 이럴 거다, 아마.”
그 사람들은 진짜 대단한 사람들이야, 라며 한이 한탄하자 인재가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는 듯 캐물었다.
- 출근 얘기하는데 무슨 헛소리야, 그건?
“그러니까, 난 신우 두고 못 나간다고. 어차피 그 집은 가구랑 내부 디자인도 다 내가 할 거라 다른 사람 손은 필요 없으니 혼자 작업해도 돼. 외근 필요할 때만 나갈 테니 그때만 연락해.”
-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신우 씨를 두고 왜 못 나와? 신우 씨 어디 아파? 다쳤어?
“아니. 멀쩡해.”
- 그럼 왜?
“그냥 내가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
- ……신우 씨랑 있고 싶어서 출근을 못 하겠다고?
“응. 그러니 그쪽 일은 각자 알아서들 하라고.”
-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야, 그럼 그냥 신우 씨 우리 회사로 취직시켜. 같이 출퇴근하라고!
“그것참 괜찮은 생각이긴 한데…….”
- 한데?
“이미 시도했다 거절당했어. 그러니 패스. 당분간 지켜보다 내가 마음이 좀 놓이면 출근할게.”
- 그게 언젠데?
“나도 모르지.”
- 야!
“끊는다. 그 빌라 건은 집에서 직접 보고 받을 테니 되는 대로 스케치 넘겨.”
- 정한, 너…….
인재가 더 뭐라고 하기 전에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한은 휴대폰을 무음 모드로 설정한 뒤 욕실 문 쪽을 돌아봤다. 슬슬 나오려는지 안쪽에서 기척이 났다.
그 소리에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서 파우더룸과 드레스 룸, 그리고 욕실이 이어진 쪽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욕실 문이 열리며 커다란 반소매 티셔츠와 긴 바지를 대충 접어 입은 신우가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아 내며 욕실에서 나왔다.
그 모습이 어쩐지 보기 좋아 한은 웃으며 신우의 앞으로 다가가 수건을 받아 들어 신우의 머리카락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그 손길에 신우가 당황해 다시 수건을 가져가려 했다.
“내가 할게.”
“내가 해 주고 싶어. 역시, 옷은 크네? 짐 빼 오는데 좀 걸리나 본데…… 뭐, 이것도 나쁘지는 않네.”
내 옷 입고 있으니 진짜 내 사람 같다며 한이 부드럽게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 내자 신우가 시선을 내려 입고 있던 한의 옷을 보곤 쑥스러운 듯 웃는다.
이 정도로까지 사이즈 차이가 나기도 쉽지 않은데 한이 워낙에 키고 몸통이고 전부 커 옷이 품이나 길이 모두 많이 남는다.
아버지의 옷을 훔쳐 입은 아이가 된 기분이 들어 신우가 민망한 듯 웃는 사이 계속 머리카락의 물기를 말려 주던 한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몸은 괜찮아? 아픈 데 없어?”
어젯밤 일에 대해서는 최대한 떠올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하고 싶었는데 다시 나온 그 이야기에 신우가 민망해하며 작게 대꾸한다.
“……괜찮아.”
“오랜만이라 많이 힘들 수도 있어. 무리하지 말고 침대에 누워 있지 왜 일어났어?”
지금은 무조건 침대에 누워 푹 쉬어야 한다고 한이 한숨을 내쉬자 신우가 놀라 한을 올려다본다. 당혹감이 담긴 신우의 눈빛에 한이 놀라 손을 멈추곤 눈을 껌뻑인다.
“왜?”
뭐 할 말 있냐는 한의 눈빛에 신우가 차마 얼굴을 보고는 말할 수 없는 듯 다시 시선을 내린다. 그러곤 작게 중얼거린다.
“오랜만…… 아냐.”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워낙에 방 안이 조용해서인지 아주 크게 울려왔다. 그 말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 한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다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그만. 내가 말실수한 것 같아. 과거는 묻지 않는 게 예의지. 저기 드라이어 있어. 머리 제대로 말려. 방금 아주머니한테 식사 준비해 달라고 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과거에 관계를 했느니 마느니 따지고 드는 건 너무 유치하고 찌질해 보이는 것 같아 한이 그만 됐다며 수건을 손에 들고 돌아서려 하자 신우가 한의 옷자락을 잡는다.
그 손길에 한 역시 걸음을 멈추곤 신우를 돌아봤다.
“왜?”
할 말 있으면 뭐든 하라는 듯 한이 다정한 시선을 보내자 머뭇거리던 신우가 어렵사리 입을 연다.
“……처…… 이야.”
드레스 셔츠의 자락을 쥔 채 중얼거리는 신우의 목소리는 꺼질 듯 작아 잘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되물었다.
“……응?”
뭐라고 했냐는 한의 반문에 옷자락을 쥔 신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그 말을 하기 힘든 듯 그의 입술이 연신 달싹거렸다.
그 모습에 한이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인다.
“신우야?”
대체 무슨 문제냐는 한의 재촉에 신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러곤 결심을 굳힌 듯, 이번엔 좀 더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을 건넸다.
“……진짜 한 건 처음이었어.”
“응?”
“……너랑 한 게, 처음이었다고.”
수치심을 꾹 참고 나온 신우의 필사적인 고백에 한이 그제야 그 말의 의미를 알아챈 듯 멍한 얼굴을 한다.
“어…….”
“…….”
“아…….”
“…….”
“……진짜?”
“……응.”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신우의 모습에 한의 얼굴 위로 당혹감이 물든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한의 머릿속으로 ‘낭패’라는 단어가 스쳤다. 당연히 경험이 있었을 거라 생각하고 건너뛴 게 많은데 큰 실수를 했다.
“미안…….”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간 본심에 이번엔 신우가 당황한 얼굴로 한을 올려다본다. 분명 사과의 의미를 오해한 듯한 얼굴에 한이 서둘러 변명을 이어 간다.
“아니, 그게 아니라…… 당연히 경험이 있을 줄 알아서…… 미안해. 더 자상하게 했어야 하는데……. 내 거 버거웠을 텐데…….”
사과까지는 좋았지만 한의 쓸데없는 덧붙임에 신우의 얼굴이 다시 확 타오르듯 붉어졌다. 괜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 말에 신우가 서둘러 한의 옷자락을 두고 물러선다.
“나 머리 제대로 말리고 올게.”
그 핑계로 돌아선 신우가 재빨리 파우더 룸 쪽으로 가려는 걸 본 한이 서둘러 그를 자신의 품에 끌어당겨 안는다.
갑작스러운 그의 포옹에 신우가 당황해 몸을 굳히자 한이 신우의 귓가에 속삭인다.
“잠깐만.”
“…….”
“이대로 잠깐만 있자. 아주 잠깐만.”
너무 세지 않게, 하지만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팔에 힘을 준 채 신우를 뒤에서 끌어안자 익숙한 샴푸 향이 풍겼다.
자신이 사용하는 샴푸 향이었지만, 신우에게서 풍기자 그 향이 평소보다 더 달콤하게 느껴졌다. 한은 깊이 숨을 내쉬며 신우의 머리카락 위로 입을 맞췄다.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를 담아…….
신우의 짐이 별채에 도착한 건 해가 다 저무는 시간이 되어서였다.
얼마 되지 않은 짐들을 옮겨 온 이들을 맞이한 한은 우선 책들은 서재로, 옷들은 드레스 룸으로, 나머지는 모두 침실 옆방에 몰아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만약을 대비해 집에 옵션으로 붙은 가구들을 제외하곤 사소한 집기들까지 전부 챙겨 온 상태라 정리하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침실은 같이 쓸 거니까 상관없고, 드레스 룸도 같이 쓰고, 서재도 같이 쓰고. 뭐, 다 같이 쓸 거니까 별 상관없긴 하네. 아, 방 좁은 것 같으면 서재를 옆방으로 옮길까? 할아버지 마음대로 꾸미신 거라 내가 한 번 손을 보긴 해야 하는데……. 주방도 더 넓히고 다이닝을 따로 빼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어때?”
이 김에 아예 집 리모델링까지 할 것 같은 한의 기세에 별채 안으로 분주히 옮겨지는 자신의 짐을 바라보던 신우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잠깐 정신을 놓고 있는 사이 자신의 거취뿐 아니라 짐 정리까지 모두 끝나 가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한의 추진력과 처리 속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가구들은 어떻게 할래?”
버릴래, 아니면 보관해 둘까, 라고 한이 부지런히 날라지는 짐을 보며 그렇게 묻자 신우가 선뜻 답을 못한 채 망설인다.
“그건…… 좀 나중에 생각하자.”
“그래. 그럼 일단 옆방에 두기로 하고. 앨범하고 액자들은 침실에 놓자. 그리고 또 뭐가 있지?”
대청마루 위에서 세심하게 주변을 돌아보는 한의 옆모습에 신우는 입술을 달싹거리다 다시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뭐라고 하든 자신이 제동을 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미 짐은 모두 이 집으로 들어왔고 한의 말대로 차곡차곡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스톱을 외치는 건, 자신은 못 한다.
“아, 맞다. 너 오늘 일 못 나간다고 전화했어? 오늘부터 쉰다고.”
그 룸살롱 말야, 라고 한이 친절히 설명을 더해 주자 나라 잃은 얼굴로 본인의 이삿짐을 바라보던 신우가 그제야 아차 한 얼굴을 한다.
“아…….”
“일 처리는 확실히 해야 하니까 그 형한테 전화해서 일 그만둔다고 해.”
“그렇게 갑자기 그만둘 수는 없어.”
“그럼 지금 그 몸으로 일을 나간다고? 그것도 새벽일을?”
확실히 여기저기 쑤셔 대고 나른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을 못 할 정도는 아니다.
“일도 못 할 정도는 아냐.”
“내가 장담하는데 절대로 못 해. 그러니까 전화해서 못 나간다고 해. 괜히 고집 피우다 그쪽에 폐 끼치지 말고 하루라도 빨리 다른 직원 구할 수 있게.”
“하지만…….”
“다음 주에 성진이가 이사할 거야. 그때부턴 네가 할아버지 옆에 붙어 있어야 돼. 사탕까지 주신 거 보니 널 완전히 마음에 들어 하시는 거니 그냥 낙점이야. 이제 와 다른 사람 구할 여유도 없고.”
“그래도 오늘은 나가야 돼. 내 사정 때문에 열흘을 쉬었는데 갑자기 일을 관둔다고 할 수는 없어.”
그렇지 않아도 이미 이쪽 사정 때문에 일부러 열흘이나 다른 사람을 쓰게 한 상황에서 이렇게 갑자기 일을 관두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신우가 고개를 내젓자 한이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인상을 쓰다 다시 신우를 돌아봤다.
“……안 된다고?”
“응.”
“거기 룸살롱이랬지?”
“응.”
“좋아. 그럼 나랑 할아버지가 거기 통째로 빌려서 밤새 술이나 마시지, 뭐.”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동시에 너무나 말이 되는 한의 억지에 신우는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했다. 설마, 진심은 아니겠지, 라고.
하지만 한은 진심이었다.
“빨리 전화해. 넌 오늘 쉬고 거긴 내가 통째로 빌린다고.”
“그게 말이 돼?”
“말 안 될 거 없어. 룸살롱은 안 빌려 봤지만 클럽은 많이 빌려 봤어. 하루 매상에 천만 원 정도 더 얹어 주면 돼. 그것도 현금으로 계산하면 안 된다는 데 없을걸.”
구체적인 한의 경험담에 신우는 기함하며 한을 바라봤다. 허세나 농담이 아니다. 한이라면 진짜 하고도 남을 거라는 생각에 신우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만 껌뻑이던 사이 한이 마음을 정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그렇게 하자. 너 오늘 절대로 일 못 해. 지금은 괜찮은 것 같지? 오래 서 있어 봐, 다리 후들거릴걸.”
“진짜 빌리려고?”
“응. 오랜만에 할아버지랑 한잔하지, 뭐. 할아버지한테 전화 드려야겠다.”
말과 함께 휴대폰을 꺼내 드는 한을 보곤, 신우는 재빨리 한의 팔을 잡았다.
“하지 마.”
“왜?”
“뭐 하러 그런 짓을 해?”
“걱정되니까. 난 내 애인 밤에 나가는 거 싫어. 나랑 침대에서 뒹굴뒹굴했으면 한다고. 그러니까 네가 나가겠다면 나도 나갈 거야.”
진심인 듯 막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한을 신우가 간신히 뜯어말렸다.
“잠깐만, 잠깐만 있어 봐.”
“……그럼 안 나갈 거야?”
“……오늘만 나갈게. 오늘은 진짜 곤란해. 갑자기 이러면 그쪽도 당황하잖아.”
“그러니까 빨리 얘기해 두라고. 그래야 그쪽도 안 곤란하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이 생겼을 때 재빨리 연락해 한시라도 빨리 준비할 시간을 주는 거라는 한의 논리에 신우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작게 중얼거린다.
“너랑 있으면 현실감이 없어져.”
“왜?”
“이상하게 그래.”
“현실감 없는 것도 나름 정신 건강에는 좋아. 그러니까 현실로 안착하기 전에 빨리 전화해.”
반강제로 휴대폰을 떠미는 한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쉰 신우는 일단 그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느린 손길로 명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사이 신우의 옆에 선 한은 막 짐을 옮기는 이들의 동선에 일일이 참견하면서도 신우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힐끔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한을 의식하지 못한 채 명진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만 고민하던 신우는 통화가 연결되자 재빨리 휴대폰을 바로잡았다.
“형, 저요.”
- 어? 번호 왜 이래? 번호 바꿨냐?
“아뇨. 그냥, 다른 휴대폰이에요.”
- 왜? 휴대폰 잃어버렸어?
“어…… 아뇨. 제 휴대폰이 방에 있어서요.”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신우가 그렇다니 그런 거라고 납득한 듯 명진이 말을 돌린다.
- 그런데 왜? 급한 일 있어?
“저, 그게…….”
- 그게?
“저…… 오늘 못 나갈 것 같아서요…….”
- 왜?
“그게…….”
명진에게 그간 한과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가는 당장 미쳤냐고 욕을 먹을 게 뻔했다. 그래서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망설이던 사이, 옆에 서 있던 한이 훈수를 둔다.
“오늘 말고 앞으로 계속. 영원히.”
- ……옆에 누구 있어?
한의 작은 속삭임을 어떻게 들었는지 명진이 의아해하며 묻는 말에 신우는 낭패라는 얼굴을 했다. 명진이라면 금방 알아챌 거다. 곤란할 정도로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
- 뭐야? 주변은 왜 이렇게 시끄러워? 밖이야?
역시나 사람들의 소음까지 들은 듯했다.
신우는 더는 피해 갈 수 없음을 실감했다. 그래서 그냥 이실직고하기로 했다.
“저기, 형…….”
- 말해.
“저, 지금 제가요…….”
마음의 결정은 내렸지만 차마 말을 꺼내기 힘든 듯 신우가 대화를 질질 끌고 있자 한이 재빨리 신우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든다.
“어?”
갑작스러운 그 행동에 신우가 휴대폰을 다시 빼앗으려 했지만 늘 그랬듯이 신우보다는 한이 빨랐다.
“전화로 처음 인사드리게 됐네요. 정한이라고 합니다. 신우 애인이자, 어제부터는 동거인이고요.”
- ……뭐?
“신우, 오늘부터 사직합니다. 거기서 일 안 할 거예요.”
한이 빠르게 자기소개를 마친 뒤 용건을 내뱉자 명진이 기가 찬다는 듯 웃는다.
- 넌 또 뭐야?
“들으신 대로 신우 애인입니다. 급료 정산은 정확히 해서 계좌로 넣어 주시고요. 다른 문제가 있다면 이 전화번호로 연락 주시면 됩니다. 혹시 피해가 발생한다면 이쪽에서 최대한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한의 일방적인 리드로 이어지는 대화에 처음에는 조금 당황하는 것 같던 명진이 이내 대충 상황을 알겠다는 듯 물었다.
- 혹시, 네가 그 친구냐? 고등학교 동창?
“……신우가 제 얘길 했나요?”
- 그래.
바로 그 뒤로 혼잣말인 듯 ‘멍청한 자식, 내가 그렇게나 하지 말라고 했는데……’라는 명진의 중얼거림이 선명히 한의 귀에 울려 왔다.
“신우가 뭘 하지 말아야 하는데요?”
들으라고 한 말인 듯해 그대로 받아치자, 다소 공격적인 그 말투에 명진이 말을 뚝 끊는다. 그러다 잠시 후 재미있다는 듯 대화를 이어 간다.
- 내가 뭘 하지 말라고 했는지 너도 눈치채고 있으니, 되묻는 거 아냐?
“눈치는 챘지만 그게 그쪽의 의견이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니까요. 특히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니 말로 명확히 해 주시는 게 서로에게 쓸데없는 오해를 만들지 않을 것 같은데요.”
눈치니, 분위기니, 하는 말로 본론을 흐리는 거 질색이라는 한의 강경한 말투에 명진이 ‘이것 봐라?’라는 투로 그 말을 그대로 받아친다.
- 정확히 네가 이해한 게 맞을걸?
“그걸 설명해 주신다면요?”
- 너 같은 후레자식들은 상대가 만만하고 신기해서 찔러 보는 거니 절대 넘어가지 말라고 했어.
노골적인 그의 단어 선택과 일부러 신경을 긁는 듯한 말투에 조금 기분이 상했지만, 한은 그 부분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방식은 거칠고 말투 역시 투박하지만 그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신우를 지키려 한 거다. 그거면 됐다.
“방금 그 말은 신우를 아껴서 하신 말씀인 걸로 이해하겠습니다. 다만, 아직 절 잘 모르시는 것 같으니 시간 날 때 한 번 뵙고 술 한잔하시죠. 아마 직접 보시면 마음에 들 겁니다.”
보이지도 않는 상대에게 상쾌한 미소를 날리며 한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자신감에 넘치는 대사를 읊어 대자 명진이 헛웃음을 흘린다.
- 이건 또 뭐 하는 새끼야?
“정한입니다. 그냥 한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일단 지금은 신우 출근 문제부터 해결하시죠. 신우, 앞으로 밤에는 일 안 할 겁니다. 오늘뿐 아니라 앞으로 영원히요.”
- 그걸 왜 네가 정해? 네가 그놈 먹여 살리기라도 할 거야?
“네. 그 정도 능력은 있습니다.”
- 그놈 빚 있는 건 알아? 그것도 갚아 줄 거냐?
조금 낮아진 남자의 목소리에 한은 슬쩍 신우를 돌아봤다. 휴대폰을 빼앗긴 뒤부터 신우는 계속해서 안절부절못하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명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둘이 무슨 대화를 하는 건지 몰라 답답해하는 모습에 한은 신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대충 말을 흐렸다.
“신우가 원한다면야, 별거 아니죠. 그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요.”
그 정도는 별문제도 아니라고 한이 대수롭지 않게 답하자 명진이 잠시 침묵한다. 그러고는 미심쩍은 듯 다시 묻는다.
- 너희 집 혹시 연희동이냐?
“맞습니다만…… 그건 어떻게 아셨죠?”
- 연일 정씨냐?
그 말에서 한은 직감했다. 할아버지를 아는구나, 라고.
연희동 연일 정씨라면 알 만한 사람은 안다.
- 너, 언제 시간 되냐?
역시나 재빨리 태세를 전환한 남자의 반응에 한은 순순히 대꾸했다.
“당분간은 제 굴 지키고 있어야 하니 무리지만…… 낮 시간이라면 괜찮습니다.”
- 연락처 이 번호지?
이게 네 휴대폰이냐고 묻는 명진에게 한은 재빨리 답해 주었다.
“네. 이쪽으로 전화 주시면 됩니다.”
- 신우는 지금 뭐 해?
“광합성이요.”
- ……바꿔 봐.
나름 상황을 납득한 듯한 명진의 태도에 한은 다시 휴대폰을 신우에게 건네주었다. 휴대폰을 받아 들며 신우는 난감한 얼굴을 했다.
명진이 한바탕 화를 낼 거라는 예상에 곤혹스러운 얼굴을 한 신우는 가볍게 숨을 내쉰 뒤 통화를 넘겨받았다.
“네, 형.”
- 지금 그놈이 정인택 회장님 손자냐?
“……네?”
- 정인택 회장 말야.
“……그건 잘 모르겠는데…… 할아버지는 계세요. 정씨는 맞고요.”
라고 답한 뒤 신우는 잠시 휴대폰을 내리고 한에게 작게 물었다. 할아버님 존함이 정 인자 택자 맞냐고 확인하자 한이 고개를 끄덕인다.
“맞대요.”
긍정의 답에 명진이 순간 허탈한 듯 한숨을 내쉰다.
- 허…… 그렇지 않아도 정인택 회장이 날 찾는다고 해서 무슨 일인가 했는데…… 그게 그놈 짓이었나 보네.
“네?”
- 그쪽에서 갑자기 청담동에서 번데기라는 술집을 경영하는 병진 사장을 찾는다고 혹시 나 아니냐고 연락이 와서 뭔가 했는데……. 와, 어이없네.
“……번데기요?”
- 그래. 뭘 알긴 알았는데 잘못 아셨던 거지. 이 근방에 번데기 비슷한 이름의 술집에 병진 비슷한 이름의 사장은 나밖에 없으니까. 야, 그런데 병진이 뭐냐, 병진이?
남의 멀쩡한 이름을 왜 병진으로 만드냐며 명진은 울분을 터트렸다. 병진이라는 이름의 어감이 너무 기분 나쁘다고 명진이 짜증을 내는 사이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신우가 그의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다시 묻는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형을 왜 찾아요?”
- 나도 모르지. 그렇지 않아도 그 어르신한테 뭐 잘못한 거 있냐고 사방에서 전화가 와서 무슨 일인가 했는데 손자 놈이 날 찾았나 보네. 그분 손자들 이름이 다 외자라서 혹시나 했는데 맞았네.
말투가 하도 건방지고 자신감이 넘쳐서 이건 또 무슨 종자인가 생각하다, 문득 그 일이 떠올랐다며 명진이 ‘역시 재수 없는 놈들은 어디서든 튀어.’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에 신우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빠르게 질문을 던진다.
“한이 할아버지, 형도 아시는 분이세요?”
- 이 바닥에서 그 어르신 모르면 바보지. 솔직히 그 새끼는 전혀 마음에 안 드는데 그분 손자라면 일단 잡아. 내가 속물 같아 보일지 몰라도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위자료라도 대박으로 받을 수 있는 상대니까 잘 잡아. 정한이 그분 집에 사는 거지?
“……아마도요…….”
- 그럼, 그 후계자라는 놈 맞네. 그 어르신이 유일하게 싸고도는 손자 이름이 정한이라고 얼핏 들었거든. 끔찍하게 사랑하던 부인 이름 따서 한이라고 지었다고. 다른 아들하고 손자들한테는 절대로 그 이름 못 쓰게 하셨다고 해서 기억하고 있었어. 이름도 직접 짓고 그놈한테 재산 다 물려주신다고 했으니까, 뒷일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잡아. 그 집 현금만으로는 어지간한 대기업들 저리 가라야. 그렇다고 재벌들처럼 남의 이목 신경 쓰고 체면 차리고 하는 집도 아니니 조건도 좋은 편이고. 말투나 목소리는 재수 없는데 하여간…… 돈벼락 맞았다고 생각하고 한번 끝까지 가 봐.
본인의 말 그대로 속물스럽고 세속적이기 짝이 없는 명진의 말에 신우는 실소했다.
“저, 솔직히 형이 이렇게 나오실 줄 몰랐거든요.”
또 무슨 멍청한 짓이냐, 왜 참하고 예쁜 여자랑은 연애를 못 하고 고르고 골라 그런 놈들만 사귀는 거냐고 잔소리를 할 줄 알았는데, 돈 많으니 당장 잡으라는 명진의 말에 신우는 적지 않게 놀란 채였다.
사람이 돈 앞에서 이렇게 변하나 하는 생각에 어이없어하니 명진이 말을 돌렸다.
- 똑같은 머저리라도 돈 많은 머저리는 쓸모 있어. 하여간 그건 됐고, 앞으로 출근 안 하는 걸로 해 둘게. 그렇지 않아도 너 밤에 일하는 거 나도 보기 그랬는데 이 김에 그냥 손 놓고 네 일이나 해. 아니, 차라리 취직을 해, 제대로.
“하지만, 형…….”
- 하지만이고 뭐고, 무조건 그놈이 하라는 대로 해. 넌 좀 머리를 비우고 남한테 기댈 필요가 있어.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그놈이 하지 말라면 하지 마. 놀라고 하면 배 깔고 누워서 백수 짓이나 해. 그럼, 끊는다.
말과 함께 매정하게 뚝 하고 끊기는 전화에 신우는 당황한 듯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봤다. 명진이 허락한 이상 더 고집을 피우기도 애매해져 난감해하던 신우가 한을 올려다보았다.
“네가 명진 형 찾았어?”
“응.”
“어떻게?”
“정현이가 힌트를 줘서.”
한의 답에 신우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현이라면 명진과도 안면이 있으니 어느 정도 힌트를 줬을 수는 있다. 한은 자신이 룸살롱에서 일하는 걸 싫어했을 테니 정현이에게 확인했을 거고.
“그런데, 번데기는 뭐야?”
버디의 이명진 사장, 이라고 박힌 명함까지 갖고 있는 정현이 한에게 잘못 알려 줬을 리는 없어 신우가 궁금한 듯 묻자 한이 잊고 있던 그 일이 떠오른 듯 혀를 찬다.
“그 자식이 일부러 잘못 알려 준 거야.”
심술을 부린 게 분명하다는 한의 말에 신우는 납득했다. 정현이라면 그랬을 수 있다.
다만, 신기한 건…….
“정현이 만난 게 언젠데 벌써 찾아?”
분명 점심에 만나고 온 거 아니냐는 말에 한이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우리 할아버지 사람들 꽤 능력 있거든. 또 한국에서 사람 찾는 거 별거 아냐. 이름하고 나이만 알면 돼.”
지문 날인 시스템에 휴대폰 보급률 세계 1위, 거기에 더해 어딜 가든 CCTV가 있고 CCTV가 없는 사각지대에는 주차 중인 차의 블랙박스가 널려 있는 한국에서 아무리 변장하고 도망쳐도 완벽하게 숨는 건 불가능하다고 한은 몰라도 될 정보를 굳이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그 이야기에 신우가 놀란 듯 눈을 껌뻑인다.
“……진짜 돈이면 다 되는구나…….”
비꼬는 게 아닌 진심으로 허탈해하는 듯한 신우의 읊조림에 한이 순순히 인정했다.
“돈만 있으면 한국처럼 치안 좋고 살기 좋은 데도 없지. 참고로, 너 도망쳐도 이틀이면 찾을 수 있어. 멀리 가도 일주일이면 돼. 솔직히 해외 나가면 더 찾기 쉽고. 비행기 탑승자 명단만 확인하면 끝이니까.”
그러니까 아예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한의 경고에 신우는 또다시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떠올렸다.
“너, 무슨 강박 있는 거 아냐? 왜 도망을 가, 내가? 나, 그런 능력 없어.”
신우가 의아하다는 눈초리로 한을 바라보고 있자 한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신우를 내려다봤다.
“……그러게? 그런데 왜 자꾸 난 그런 생각이 들까?”
“…….”
“나 어렸을 때부터 박수 기질 있다는 소리 들을 정도로 감이 좋은 편이었는데…… 이상하게 내 더듬이들이 네가 도망칠 것 같다고 하네, 자꾸.”
입가에는 미소를 띤 채였지만 그 눈빛만큼은 예리했다. 사람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듯한 한의 시선에 신우는 졌다는 듯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너, 진짜 점집 차려라. 끝내주게 장사 잘될 거야.”
사실은 내심 차라리 도망칠까, 끝나기 전에 내가 먼저 끝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터라 솔직히 인정하자 한이 머리를 가만히 쓸어 주었다.
“그러니까, 일단 잡아 두는 거라고.”
의외로 부드러운 그 태도에 신우는 불안한 얼굴로 한을 올려다봤다.
“화 안 내?”
“이젠 화 안 내. 네가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성격이라는 건 충분히 알았으니까. 성격이라는 걸 단숨에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네 그런 성격 형성에 내 지분도 어느 정도는 있을 테니까…… 이젠 그런 걸로 화 안 내기로 했어. 대신 너도 어차피 안 된다는 식으로는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대한민국에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안 되는 것도 되게 만들면 그만이라는 한의 기백에 신우는 설핏 웃음을 흘렸다. 명진이나 정현이 들었다면 역시 재수 없다고 하겠지만 한의 이런 부분을 좋아하는 것 같다.
늘 자신만만하고 느긋하고 여유로운 그가 좋았다. 그의 옆에 있으면 저까지 여유로워져 복잡한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이상할 정도로 느긋한 기분에 멍하니 대청마루 너머의 정원을 바라보던 사이 짐을 옮겨 주시던 분께서 마지막 박스를 방에 넣은 뒤 짐을 모두 옮겨 왔다고 전했다. 그러자 한이 신우를 향해 말했다.
“이제 정리 시작하자.”
짐 정리는 오후 6시를 훌쩍 넘긴 시간까지 이어졌다.
짐을 옮겨 주신 분들이 정리를 잘해 준 데다 또 짐 자체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의외로 작은 소품들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꽤 소요되고 있었다.
다행히 해가 길어져 아직 방 안은 환했고 움직이느라 더워진 공기는 열어 둔 방문을 통해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식혀 주고 있었다.
“……아카시아 향이 나.”
부지런히 짐들을 정리하던 중 바람결에 실려 온 진한 향에 신우가 문득 그렇게 중얼거리자 신우 옆에 앉아 같이 짐을 정리하던 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아, 아까시나무…….”
의외의 이름에 놀라 신우가 한을 돌아보자 한이 천천히 설명해 준다.
“아카시아나무는 오스트레일리아가 원산지인 상록수고, 우리가 아카시아나무라고 하는 건 원래 북아메리카가 원산지인 아까시나무야. 할머니가 좋아하셔서 할아버지가 잔뜩 심어 놓으셨어. 여기선 안 보이는데 본채 쪽에 쭈욱 늘어서 있거든. 거기 나무들 다 40년 넘은 고목들인데 아직도 여름만 되면 꽃이 잔뜩 펴서 바람이 불면 별채까지 아까시나무 향이 나. 그 탓에 여름엔 송충이 때문에 죽을 맛이긴 하지만…… 뭐, 향은 좋으니까.”
그 말에 신우는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다. 아주 어린 시절, 부모님과 동생과 함께 살 때 그 집 근방의 작은 산에 아까시나무가 많았다. 그래서 가끔 산에 올라갈 때면 송충이들이 떨어져 내려 놀라곤 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 그랬던 것 같다. 서울로 이사 온 이후로 아까시나무를 본 기억이 없어 잊고 있었는데 매년 여름 창을 열어 두면 아까시나무 향이 집 안으로 퍼졌었다.
열세 살 이후 처음으로 맡는 듯한 그 향에 신우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근 20년간 본 적이 없는 나무가 이 집 안에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이상한 집이었다. 넓고 거대한 정원과 돌담길, 그리고 한옥과 대청마루, 그리고 아까시나무…… 아주 먼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것들을 모아 둔, 동화 속에 나오는 시간이 멈춰 버린 집 같았다.
가슴 안쪽이 간질간질하며 몽글거리는 기분에 신우가 넋이 나간 채 마당을 내다보고 있자 신우가 들고 있는 액자를 빼앗아 든 한이 침대의 사이드 테이블 위에 올려 두며 묻는다.
“무슨 꽃 좋아해?”
“……응?”
“좋아하는 꽃이나 나무 없어?”
“……글쎄…….”
“좋아하는 나무나 꽃이 있으면 말해. 할아버지가 별채에 내 사람이 들어오면, 그 사람이 좋아하는 나무를 잔뜩 심어 준다고 하셨거든. 묘목을 심어 두고 그 나무가 건물보다도 높이 자랄 때를 기다리는 것도 즐거우니까.”
“그럼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거야?”
꿈같은 한의 말에 신우가 웃으며 그렇게 묻자 한이 말을 끈다.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소 5년 이상이겠지?”
“5년이라…….”
흩어질 것같이 작은 음성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신우는 부드러운 바람결을 따라 풍겨 오는 진한 아까시나무 향에 기분 좋은 듯 미소를 흘렸다. 그 미소 또한 너무 아슬아슬해 보여 한은 서둘러 신우의 뒤로 다가가 신우의 어깨를 꽉 끌어 안아 주었다.
바로 등 뒤에서 몸을 덮쳐 오는 체온에 신우가 의아한 듯 한을 돌아본다.
“왜?”
“그냥. 네가 예뻐서.”
순간 신우가 간지러운 듯 웃는다.
“너, 그런 말 하면 창피하지 않아?”
“예뻐서 예쁘다고 하는데, 그게 왜?”
“넌 괜찮을지 몰라도 난 창피해.”
“창피해할 거 없어. 예쁘면 예쁘다고 하고,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하는 거야. 뭐든 말로 해야 전해지지. 생각만 해서는 전해지지 않잖아. 뭐, 가끔 난 눈치채긴 하지만…….”
역시나 빠지지 않는 본인 자랑에 신우가 또다시 웃음을 흘린 순간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 왔다. 불청객 같은 그 소음에 한이 ‘또 뭐야?’라고 볼멘소리를 내며 신우의 뒤에서 떨어져 침대 위에 던져둔 휴대폰을 손에 든다. 그리고 곧 통화를 시작하더니 ‘네. 지금 갈게요.’라고 하고는 뚝 하니 전화를 끊는다.
툴툴거리던 것과는 달리 짤막하게 통화를 마친 한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밥 먹으러 가자. 저녁 준비 다 됐대.”
“본채로?”
“응. 7시면 칼 같이 식사하시거든.”
그 말에 신우의 어깨가 움찔한다.
분명 한의 할아버지께서 오후에 잠깐 들르셨을 때 저녁은 건너와 먹으라고 하셨다. 하지만 막상 때가 되니 그래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린 데다 분위기에 끌려 계속 무례를 범하는 듯했다.
갑자기 현실감을 되찾은 신우가 혼란스러워하며 머뭇거리고 있자 한이 그걸 눈치챈 듯 손을 뻗는다.
“일어나. 손 씻고 가자.”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는데 괜찮을까?”
“어제 인사드렸잖아. 오후에도 뵀다며?”
“그래도…….”
“신경 쓰지 마. 우리 할아버지 어차피 사람 인사 제대로 안 받으셔. 할아버지 마음에 드느냐 아니냐가 관건이라 일단 마음에 드시면 처음 본 사람도 30년 알고 지낸 사람처럼 대하시고, 마음에 안 들면 30년을 알아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하시거든.”
오후에 직접 오셔서 사탕까지 주고 가신 거면 넌 이미 30년이 아니라 50년은 알고 지낸 사이라며 한이 어서 일어서라는 듯 손을 흔들자 신우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의 손을 잡고 일어선다. 그러곤 아직 정리가 덜 된 짐들을 밀어 둔 채 욕실로 향하자 한 역시 그 뒤를 쪼르르 따른다.
넓은 욕실로 먼저 들어서 차가운 물에 손을 씻은 신우가 수건을 찾자, 옆에 선 한 역시 대강 손을 씻곤 신우와 함께 수건에 물기를 닦았다.
그러다 문득 거울로 제 모습을 살핀 신우가 한을 돌아봤다.
“나, 옷…….”
“괜찮아, 괜찮아. 집 안인데 편한 차림인 게 당연하지.”
“아니, 네 옷이잖아.”
지나치게 편안한 차림인 것도 걸렸지만, 누가 봐도 한의 옷을 빌려 입은 몰골에 민망해졌다. 그런 신우를 위아래로 쭈욱 훑어본 한이 만족스러운 듯 웃는다.
“아주 좋은데?”
“야…….”
지금 그런 농담할 때가 아니라는 신우의 원망 어린 눈빛에 한이 크게 웃는다.
“오늘 짐 빼 오신 것도 할아버진데, 뭐. 짐 지금 들어온 거 아시니까 그런 건 신경 안 쓰셔. 오히려 지금 옷 갈아입는다고 하다 저녁 시간 늦는 걸 더 싫어하실걸.”
그건 또 그렇긴 해 신우는 난감해했다.
본채까지 가는 시간이 있는데 기다리게 하는 건 또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가는 것도 무례한 건 마찬가지일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우의 모습에 한은 무작정 신우의 어깨를 안고 잡아끌었다.
“됐어, 다른 건 신경 쓰지 마. 할아버지한테 제일 중요한 건 저녁 식사야.”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게 바로 먹는 거라는 한의 말에 그에게 이끌려 가던 신우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그런 점까지 닮았구나.”
“많이 닮고 조금 다르지. 내가 할아버지보다는 좀 더 유순하고 착해. 사회화도 잘 돼 있고. 우리 할아버지는 진짜 있는 성질 그대로 다 내보이시거든. 최종 보스시라 다들 설설 기기만 하니 말릴 사람이 없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시지.”
“최종 보스라는 말 너무 어울린다. 아, 내 신발.”
막 대청마루를 나서 마당으로 내려서려던 신우가 자신의 신발이 없는 걸 깨닫고는 한을 돌아보자 한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한다.
“네 신발 내가 태워 버렸는데? 그러니까, 업혀.”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한의 말에 신우가 책망하듯 그를 바라본다. 장난치지 말라는 그 눈빛에 한이 그냥 해 본 말이라며 아래로 내려서 마루 아래쪽의 막힌 부분을 당기자 신발이 나란히 선 서랍이 나왔다.
“이게 신발장이야. 서랍형이라 쭉 끌어당기면 돼. 저기 오른쪽 끝은 신발 건조기.”
“집이 완전 한옥이라 밑에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어.”
“나 들어오기 직전에 리모델링하면서 싹 고쳤어. 겉만 한옥이야. 그냥 슬리퍼 신어.”
한이 신발장에서 슬리퍼 한 켤레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자 신우가 곧장 신었다. 그러곤 둘은 서늘한 바람이 부는 정원을 가로질렀다. 그사이 어둠이 짙어진다.
방금까지만 해도 제법 환하더니 어느새 정원 등의 불빛에 시야를 의지해야 할 정도로 어둑해진 채였다.
연한 주광색의 등불을 따라 주변을 돌아봤지만 낮은 돌담만 주욱 이어져 있을 뿐 딱히 대문이나 다른 건물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모른 것이 푸르렀다.
정원도 나무도…….
“집이 굉장히 넓네.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르겠어.”
“아마 처음 오는 사람은 찾아다니기 힘들 거야. 돌담이 묘하게 얽혀 있어서 시야를 가리거든.”
한의 말 그대로 낮은 돌담이 쭈욱 늘어져 있지만 그 형태가 나선형이라 오히려 더 방향을 잡기 힘들었다. 어디로 가야 뭐가 나올지 알 수 없는 구조에 신우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한이 신우의 어깨를 세게 끌어안으며 이 집의 구조가 이렇게 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원래는 본채만 있었는데 애들이 많아져서 할아버지께서 옆집을 사고, 또 사고, 또 사서 계속 증축하신 거거든. 부채꼴 형태의 두 동네를 합친 거라 평범한 부지는 아냐. 그러니까 그냥 본채로 가는 길만 외워 둬.”
어쩐지 너무 넓다 했더니 두 동네를 합쳤다는 설명에 이해가 갔다. 지역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동네 기준으로는 대충 대형 아파트 단지 정도의 규모가 된다.
그 안에 본채와 별채 두 채, 총 세 채의 건물만 덩그러니 있다면, 넓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넓으면 불편하지 않아?”
“좀 불편하긴 해도 어쩔 수 없지. 일부러 이렇게 지은 거니까.”
“……왜?”
“도둑이나 강도가 들어도 애들이 있는 별채에는 못 가게 할아버지께서 미로처럼 지어 놓으신 거야. 우리 집이 돈이 좀 많거든. 그래서 원한도 많고, 노리는 사람들도 좀 있고.”
한의 설명에 신우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안을 위해서라면 이해가 되었다.
“대문은 어느 쪽이야?”
“안 가르쳐 줄 거야.”
“왜?”
“네가 천천히 쑤시고 다니면서 찾아봐.”
“남의 집을 어떻게 쑤시고 다녀?”
“남의 집이 아니라 너희 집이야. 그러니까 마음껏 쑤시고 다니면서 탐험해 봐. 우리 집에 재미있는 거 많으니까.”
“그래도 대문은 알려 줘. 외출하려다 미아 될 것 같아.”
“당분간은 나갈 일 없을 테니까 천천히 찾아봐. 그리고 한 가지 팁을 주자면 우리 집에 처음 온 사람들은 반드시 길을 잃어버려. 그러니까 휴대폰 꼭 들고 다녀. 돌담 안쪽마다 심은 나무들이 다르니까 가다 길 잃으면 전화해서 무슨 나무 아래인지만 말하면 돼.”
설마 이 집이 그 정도로까지 넓을 줄은 몰랐던 터라 신우는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무가 고유 코드야?”
“정확히는 식별 코드지. 영화 샤이닝에 보면 그 정원 있지? 우리 할아버지가 그걸 되게 마음에 들어 하셨거든. 잘못 들어오면 영원히 갇히는 수가 있어. 매년 할머니 제사 때마다 한두 명이 꼭 길을 잃어서 난리 나거든. 작년에는 우리 아버지가 길을 잃으셨대. 난 작년엔 안 들어와서 몰랐지만.”
아버지도 참 둔하시다니까, 라며 돌담을 끼고 돈 한은 시원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띤 채 신우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그 말에 신우가 문득 한이 했던 얘기를 떠올리곤 되물었다.
“할머니 제사에 빠지면 호적에서 판다고 하지 않았어?”
“아, 난 예외. 나만 예외.”
“할아버지께서 정말 널 아끼시나 보다.”
“뭐, 할머니 임종 지켜 드린 덕 톡톡히 보는 거지. 사진값도 있고.”
“사진값?”
어지러운 돌담을 따라 천천히 걷다 오른쪽으로 코너를 돌자, 이내 커다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어젯밤에는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기억하는 것보다 크고 웅장한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의 머리가 닿지 않은 걸로 봐서는 층고도 상당히 높은 축이었다.
“다 왔다. 먼저 들어가.”
건물 앞에 선 한이 고갯짓하자 신우가 얼떨떨해하며 먼저 대청마루 위로 올라섰다. 그러곤 건물을 천천히 돌아봤다.
별채와 비슷한 형태였지만 좀 더 묵직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이었다. 풀벌레 소리가 다 들릴 정도로 조용한 마루 위에 우뚝 서 있자 바로 뒤따라 올라선 한이 ‘이쪽이야.’라고 왼쪽을 가리키며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툇마루를 가로지르는 한의 뒤를 따르던 신우는 조금 긴장한 듯 어깨에 힘을 줬다.
잠깐 마주쳤을 때는 편안한 느낌이었는데 막상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려 하자 초조해졌다.
어떻게 인사를 드려야 하나, 고민하던 사이 한이 미닫이문 앞에 선 채 작게 묻는다.
“할아버지, 저희 왔어요.”
예의 바른 한의 인사에 안에서 걸걸한 노인의 답이 들려온다.
“들어와라.”
그 말에 한이 신우를 한 번 보고는 망설임 없이 문을 밀어 연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신우의 허리를 민다. 그 힘에 얼결에 방 안에 들어선 신우는 방 안에 앉아 계신 노인을 보곤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하나 망설였다.
‘안녕하세요’는 이상하고 그렇다고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하기도 모호하다. 하지만 인사를 안 할 수도 없어 일단 고개부터 숙이자 노인이 손을 까닥인다. 어서 와 앉으라는 그 신호에 신우가 주춤거리니 한이 신우의 팔을 끌곤 상 앞에 가 앉는다.
“와, 맛있는 거 많네요?”
“오늘은 신경 좀 쓰라고 했다.”
상 위를 꽉 채운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보며 강제로 신우를 옆에 앉힌 한이 조금 불만스러운 소리를 토해 낸다.
“저 올 때도 신경 좀 써 주시지 그러셨어요?”
“네가 뭐 대단한 손님이라고 신경을 써? 군식구 주제에.”
“군식구라뇨? 저 없으면 심심해서 어떻게 사시려고요?”
“너만 없으면 세상이 평화롭지.”
급할 일 없는 내 일상에 문제란 문제는 네놈이 다 일으킨다며 한을 향해 혀를 차던 노인이 시선을 돌려 신우를 바라본다. 그러고는 숟가락을 손에 들며 부드러워진 투로 말을 건넸다.
“들자.”
자신을 향한 그 말에 신우 역시 서둘러 숟가락을 손에 들었다.
“네.”
어색한 얼굴로 신우가 국을 한 숟가락 뜨자 한 역시 숟가락을 들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한다.
“할아버지, 오늘 신우한테 사탕 주셨다면서요?”
갑작스러운 그 말에 신우가 왜 그 이야기를 여기서 하냐고 원망하듯 한을 바라보자 노인이 별일 아니라는 듯 툭 말을 던진다.
“그래, 왜?”
“그럼 저도 주세요.”
“싫다.”
“왜 사람 차별하세요?”
“너 같은 놈한테는 주기 싫어.”
딱 잘라 죽는 날까지 네가 그거 먹을 일은 없을 거라고 단언한 노인이 다시 신우를 바라보며 다정한 투로 묻는다.
“음식이 입맛이 안 맞니? 다른 거 줄까?”
국만 몇 번 뜨곤 다른 반찬에는 손도 안 대는 신우가 걱정스러운 듯 노인이 묻자 신우는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맛있어요.”
식사를 시작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어쩐지 긴장돼 다른 반찬은 손도 대 보지 못한 채였지만 신우는 일단 다 맛있다고 대강 둘러댔다. 입에 안 맞는다고 하면 당장 상을 통째로 물리고 다시 차리라 하실 것 같은 분이라 무조건 맛있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한이 옆에서 신우를 거들었다.
“할아버지께서 자꾸 신경 쓰시니까 못 먹는 거잖아요. 그냥 두세요.”
“내가 왜?”
“너무 간섭이 심하세요. 얘, 뭐든 잘 먹어요. 그리고 아주머니 음식 솜씨야 두말할 거 있나요?”
그러니까 당신부터 드시라고 한이 조부께 어서 식사를 하시라 권했지만 노인은 한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채 계속해서 신우에게 말을 건넸다.
“고기 줄까? 고기 안 좋아하니?”
그렇게 말하며 앞에 놓인 갈비찜을 슬쩍 신우의 앞으로 미는 손길에 신우는 기겁했다.
“아니, 좋아해요. 그런데, 할아버지 드세요.”
멋쩍어하며 신우가 다시 접시를 밀어 내려 하자 한이 재빨리 접시를 잡아 다시 신우의 앞으로 당겨 준다.
“아냐, 이거 다 먹어. 할아버지는 연세가 있으셔서 고기반찬은 좀 그래. 혈압도 그렇고 콜레스테롤 문제도 있으니까, 이렇게 나쁜 건 우리가 다 먹어야 돼.”
그리 말하며 노인 앞에 놓인 전이며 잡채를 줄줄이 앞으로 당기는 한의 옆구리를 신우가 쿡 찔렀다. 하지만 한은 그 정도로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자, 우리 할아버지는 몸에 좋은 녹황색 채소랑 발효 식품 김치, 그리고 담백한 생선조림과 콩조림. 두부 부침. 아, 반찬 좋다. 어서 많이많이 드세요. 그래야 오래오래 사시죠.”
고기반찬들은 줄줄이 신우 쪽으로 당겨 놓은 뒤 시퍼런 풀들만 조부의 앞으로 미는 한의 행동에 신우는 방금보다 더 세게 한의 옆구리를 찔렀지만 한은 꿋꿋했다. 어쩌면 이렇게도 버릇이 없을까 싶을 정도로 뻔뻔하고 제멋대로였다.
그런 한의 행동에 신우가 난감해하던 사이 웃으며 한의 행태를 지켜보던 노인이 ‘너 두고 보자’라는 얼굴로 다시 신우를 향해 말을 건다.
“면허는 있니?”
“……네?”
“운전면허 말이다.”
“……아뇨. 아직.”
주민 등록증 나올 때 운전면허증까지 따는 게 만연한 분위기에 아직까지 면허가 없다는 사실이 갑자기 조금 민망해져 신우가 웅얼거리듯 대꾸했다.
“그래? 그럼 면허부터 따야겠구나. 차는 뭘 좋아하니?”
“아…… 차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잘 모릅니다.”
“그럼 김 비서 부를 테니 같이 나가 골라 봐라. 타고 싶은 차가 있으면 면허도 빨리 딸 테니.”
당장이라도 차를 사 주실 듯한 노인의 그 말에 신우는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뻐끔거렸다. 그러자 이번엔 한이 신우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할아버지가 주시는 거니 그냥 받아. 할아버지 모시고 다니라고 사 주시는 거니까. 그러니까 네 차가 아니라 할아버지 차야.”
한의 그럴듯한 설명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개들도 데리고 나가야 하니 큰 차가 좋겠구나. 공적인 일은 김 비서랑 같이 나가지만 사적인 일을 볼 때는 너랑 다닐 테니까. 차는 네가 편한 걸로 보고 골라 봐라. 가격은 신경 쓰지 말고 무조건 크고 좋은 걸로.”
“벤츠 대형 SUV 잘 나와요. 아, 아우디도 괜찮았던 것 같아요. 제가 알아볼까요?”
눈치 없는 한의 행동에 신우가 제발 그러지 말라는 듯 한을 바라봤다. 하지만 한은 이번에도 그 눈빛을 무시한 채 멋대로 말을 이었다.
“제가 내일 딜러 부를게요. 아, 오늘 전복탕 맛있는데요?”
“그렇지? 칼칼하니 좋구나.”
“내일 점심은 칼국수로 하죠? 저 내일부터 집에서 일할 거예요.”
“왜? 벌써 회사 나가기 질리냐?”
“아뇨. 신우 혼자 두고 나가기 그래서요.”
갑자기 나온 자기 이름에 신우가 움찔하자 노인이 재미있다는 듯 눈을 접으며 웃는다.
“모자란 놈. 그렇게 못 믿어서 어찌 살려고?”
“다른 사람이 그러면 별말 않겠는데 할아버지께는 그런 말 듣기 싫은데요?”
“……하긴, 그도 그렇구나.”
라고 순순히 수긍한 노인이 조기의 살을 발랐다. 그사이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헷갈리는 조손의 대화 장면을 신우는 신기한 듯 바라봤다. 볼수록 너무 닮았고 친근해 대화에도 격이 없다. 조부모님과 본인의 관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편안한, 마치 친구 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이런 관계도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나물에 젓가락을 대는데, 노인이 다 바른 살을 신우의 그릇 위에 얹어 줬다.
“먹어라.”
뜻밖의 상황에 신우가 당황해 젓가락을 손에 든 채로 멈춰 있자, 노인이 어서 먹으라는 듯 손짓한다.
“어서 먹어. 조기가 살이 아주 실해.”
웃어른이 이렇게 챙겨 준 게 처음이라 이걸 먹어도 되나 싶어 신우가 한을 슬쩍 돌아보자 한이 그의 조부를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본다.
“할아버지, 자꾸 이러실 거예요?”
“뭐가?”
“자꾸 이러시면 저 분가합니다.”
“하든가. 신우만 놓고 가면 된다. 내가 고용하기로 했으니.”
짓궂은 조부의 농담에 한은 심통이 난 듯 뭐라 한마디 하려 했지만 노인은 그런 한을 태연하게 무시했다.
“성진이가 다음 주에 나가니 다음 주부터 일하면 된다. 고용 계약서는 내일 작성하고, 근무 시간은 5시부터 11시까지. 자세한 조건은 내일 이야기할 테니 너도 생각하는 조건이 있으면 정리해 둬라.”
“할아버지, 진짜 얘 일 시킬 거예요?”
진짜 신우를 근무하게 만들 생각이냐고 한이 항의하자 노인이 한의 말을 일방적으로 막는다.
“네 입으로 말한 거니 지켜라. 어서 먹자. 밥상머리에서 말 너무 많이 하는 거 아니다.”
“그래도 이건 아니죠!”
“불만 있으면 분가해. 회사도 멀겠다, 혼자 나가 살아 보는 것도 괜찮지. 회사 근처에 아파트 알아봐 주랴?”
난 아쉬울 거 없으니 마음에 안 들면 나가 살라는, 조부의 심술에 한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 이렇게 나오신다 이거죠?”
지금 자신이 도발당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한이 씩씩거리자 그 반응이 마냥 즐겁다는 듯 노인이 웃는다.
언성을 높이고는 있지만 두 사람 모두 진짜 화를 내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렇게 그들의 소소하고 유쾌한 언쟁은 화제를 바꿔 가며 식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차 좀 내와라.”
시끌시끌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마무리한 뒤 수저를 내린 한의 조부는 당연한 듯 한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식사 내내 부루퉁하던 한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거, 꼭 제가 해야 하나요?”
“그럼 내가 하리?”
차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신우를 시킬 수도 없으니 어쩔 거냐는 조부의 반문에 한이 금세 수긍한다.
“……아뇨. 제가 해야죠. 녹차 드시죠?”
“그래. 과일도.”
대놓고 자신을 부려 먹는 조부를 흘깃 바라본 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며 신우에게 물었다.
“신우 넌 뭐 마실래?”
“나도 같이 가.”
“아냐, 나 혼자 움직이면 돼. 차 뭐로 할래? 녹차, 보이차, 생강차, 도라지차, 우슬차 등등 차란 차는 다 있어. 아, 홍차는 없어. 할아버지가 싫어하셔. 그러니까 홍차랑, 밤이니까 커피 빼고 아무거나 주문해.”
“어, 그럼…… 그냥, 녹차.”
“알았어. 금방 올게. 할아버지, 신우 너무 괴롭히지 마세요.”
신우를 두고 자리를 뜨기 영 불안한 듯 조부께 경고한 한은 이내 미닫이문을 밀어 열고는 상을 들고 마루로 나섰다. 한이 사라지자 순식간에 조용해진 방 안에서 신우가 어색한 듯 시선을 피하자 노인이 먼저 대화를 시작한다.
“저놈이 좀 애 같지?”
갑자기 던져진 질문에 ‘저놈’이 누구인가 잠시 고민하던 신우는 이내 ‘저놈’이 한을 가리키는 말이란 걸 알아채고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조금요.”
“어릴 때부터 하도 부족함 없이 자기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자란 놈이라 세상 무서운 줄을 몰라. 거기에 내가 오냐오냐 키워서 철도 없고.”
이미 서른이 넘은 한에게 서슴없이 ‘애’라고 칭하는 노인을 신우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바라봤다. 저분이 보시기엔 아마 자신도 아이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를 떠나 저분의 눈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미숙하고 어린, 어수룩한 꼬마처럼 보일 테니까.
“어릴 때도 뻔뻔하고 능글맞은 놈이라 놀리는 재미는 없었는데 네가 있으니 제법 재미가 있어. 그러니 너무 하자는 대로만 쓸려 가지 말고 적당히 안달복달하게 만들어. 저놈도 세상 무서운 줄도 좀 알아야지.”
“……네?”
“나도 도울 테니 적당히 튕겨 보라는 소리다. 저놈이 끙끙대는 거 지켜보는 건 꽤 재미있거든.”
어린 시절부터 뭐든 쉽게쉽게 하던 녀석이라 죽기 전에 한 번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태우는 모습을 꼭 보고 싶으셨다는 노인의 말에 신우는 놀라 눈을 껌뻑였다. 한이 애를 태우고 끙끙거린다니 솔직히 상상이 가질 않았다.
“한이가, 그럴 때도 있어요?”
“당연하지. 저놈도 사람이니, 그럴 때가 있지. 아까도 내가 너한테 잘해 주니 낑낑대지 않더냐? 놀리는 재미가 있다니까.”
한참이나 어린 손자의 애간장을 태우는 게 재미있어 죽겠다는, 악동 같은 노인의 표정에 신우가 뭔가 알겠다는 듯 작게 ‘아’라고 중얼거린다.
한의 그 퉁명스러운 말투와 못마땅한 표정을 할아버지께서는 낑낑거린다고 표현하신 모양이었다.
“입술 툭 내밀고 분가한다 어쩐다 하는 꼴이 참……. 저 녀석도 나를 너무 닮아서 문제야. 지가 좋아하는 건 남들이 쳐다보는 것도 싫어한다니까.”
닮아도 너무 닮았다면서 웃는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기쁨과 어이없어하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놈도 생긴 건 안 그렇게 생겨서는 날 닮아 마음에 품은 사람에게는 일일이 다 간섭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확인하려 들거든. 밥도 떠먹여 줘야 하고 머리도 내가 빗겨 줘야 하고 신도 내가 신겨 줘야 해. 아니면, 뭔가 성에 안 차.”
그것도 유전이라면 유전이지, 라며 노인은 작게 혀를 찼다. 이번에도 역시나 그래서 걱정스럽다는 건지, 재밌다는 건지 알 수 없는 반응에 신우가 빤히 그를 바라보자 노인이 신우를 보며 귀엽다는 듯 웃는다.
“그러니 저놈이 하는 대로 다 해 주지는 말아라. 그냥 두면 머리끝까지 기어오르는 놈이니까. 먼저 기선 제압을 해 둬야 평생 편해.”
가만히 노인의 말을 듣고 있던 신우는 ‘평생’이라는 단어에 표정을 흐렸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평생’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본 적이 없어서인지 그 말이 너무 생경하게 느껴졌다. 아니,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가 상상하는 미래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인연이 닿는다면 명진이나 정현과는 계속 연락하고 지내겠지만, 자신의 바로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건 잘 상상이 가질 않았다.
혼자였던 시간이 길어서인지, 누군가와 함께하는 미래 같은 걸 떠올리기 힘들었다. 1년 후, 10년 후, 그리고 20년 후, 혹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은 혼자일 것 같았다.
평생이란 말에 신우가 조용히 입을 다문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자 노인이 넌지시 신우에게 말을 건넨다.
“저놈이 못 미더우냐?”
신우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한 노인의 물음에 신우가 재빨리 고개를 내젓는다.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믿지 못할 건 한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안에 있는 트라우마와 공포였다.
언젠가는 한이 자신에게 질리지 않을까, 자신에게서 돌아서지 않을까 의심하고 거리를 두는 자신이 문제였다.
이번뿐 아니라 항상 그게 문제였다.
상대를 믿고 기댔다 버림받는 게 무서워서, 자신은 늘 그 자리에 멈춰서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한 채 모든 것들이 흘러가길 기다리기만 했다.
홀로 남겨지는 게 외롭고 무섭지만 상처받는 건 더 무서워서 도저히 먼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마도 한이 화를 낸 것도 그 부분 때문일 거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자신을 떠나간 이유 역시 자신의 소극적이고 회피적인 성향 때문이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잘 알고 있음에도 변하는 게 어렵다. 용기를 내 한 걸음 다가섰다 거절당했을 때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그건, 너무 무섭다.
죽고 싶을 정도로, 너무 무섭다.
“할아버지, 차 왔어요.”
머릿속을 채운 아찔한 상상에 눈을 질끈 감는 순간 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상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자신을 현실로 끌어내 준 그 목소리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 문을 열자 다과상을 손에 든 한이 방 안으로 들어선다.
“무슨 얘기 하셨어요?”
다과상을 바닥에 놓은 한이 혹시 자기 욕했냐는 듯 두 사람을 돌아보자 노인이 짓궂게 그에 응수한다.
“당연히 네 욕 했지. 세상을 너무 편하게 살아 뻔뻔하고 애 같고 버릇이 없다고.”
“어? 그럼, 저도 할아버지 욕할 거예요. 밤새도록 쌓인 거 다 풀까요? 제가 할아버지 약점 많이 알고 있는 건 아시죠?”
한의 장난스러운 협박에 노인이 기가 찬다는 눈으로 한을 바라본다.
“너야말로 신우가 앞으로 나랑 매일 볼 건 알고 있는 거냐? 너 기저귀 차던 시절부터 쭈욱 읊어 볼까?”
“그래 봤자 30년이죠. 할아버지는 70년이 넘잖아요. 할머니랑 결혼하시기 전부터 시작해 볼까요?”
은근한 조부의 협박에 한이 자기는 구린 구석 없다며 받아치자 결국 노인이 먼저 징글징글하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맹랑한 녀석.”
조부의 타박 뒤로 한이 다관을 들고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절도 있는 자세로 차를 따라 먼저 조부의 앞에 잔을 놓은 뒤, 또 다른 잔을 채워 신우의 앞에도 놓았다. 그때 한이 신우의 얼굴을 보곤 잠시 멈칫거렸다.
“왜?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셨어?”
역시나 눈치 빠른 한이 신우의 표정을 읽은 듯 걱정스레 묻자 신우가 아닌 노인이 대신 대꾸한다.
“네 욕했다니까.”
“뭐라고 하셨길래 애 얼굴색이 이래요? 이러면 저 신우 할아버지한테 못 맡겨요.”
“나한테 뭐라고 할 게 아니라 네 과거를 반성해야지. 네가 얼마나 못된 놈인지 얘기하니 무서워 질린 거 아니냐?”
찻잔을 든 노인의 말에 한이 진짜냐는 듯 신우를 바라보자 신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야. 할아버지가 농담하신 거야. 그냥 좀 속이 안 좋아서 그래. 음식이 맛있어서 과식했나 봐.”
신우가 그럴듯한 변명으로 말을 돌리자 한이 신우의 손을 잡아 손끝을 어루만진다.
“손이 좀 차갑기는 한데…… 소화제 줄까?”
“그 정도는 아냐. 곧 내려갈 거야.”
“안 좋으면 즉시 말해. 우리 집에 소화제 좋은 거 많아.”
“그래.”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하는 한과 순순한 신우를 지켜보던 노인이 흡족한 듯 미소 짓는다.
“아주 보기 좋구나. 한 쌍의 바퀴벌레 같아. 그렇게 연애하고 싶어서 그간 어떻게 참았는지…….”
약간의 비웃음을 담은 노인의 말에 한이 웃으며 그대로 받아쳤다.
“할아버지에 비하겠어요?”
“뭐, 그렇기는 하다만…… 네가 그러니 꼴 보기 싫구나.”
애정이 담긴 유쾌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신우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차를 한 모금 넘겼다.
이 집에 온 뒤 너무나 평온한 분위기에 취해 잠시 잊고 있던 현실들이 비로소 하나둘씩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에게 끌려 여기까지 오기는 했지만 자신의 현실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불완전하고 위태로웠다. 한은 자신이 도망칠까 불안해하고 자신은 여전히 이 관계의 끝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 아슬아슬한 상황이 계속되는 건 좋지 않다.
어떤 방식으로든 결론을 내야 한다.
그래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마음속으로 바랄 뿐이었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자신에게 한 걸음 내디딜 용기가 생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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