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7 (8/23)

Chapter 7

무겁게 가라앉은 의식 너머에서 이상한 소음이 울려 왔다.

진동 같은 그 울림에 잠에서 깬 한은 눈살을 찌푸린 채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몸을 뒤척이려 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왼팔이 무거웠다.

무언가에 눌린 듯 묵직한 느낌에 눈을 뜬 순간 자신의 품에 안긴 채 잠든 신우의 얼굴이 보였다.

그제야 지난밤의 일을 떠올린 한은 신우가 깨지 않게 조심스레 팔을 빼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그러곤 테이블 위에서 울려 대는 자신의 휴대폰을 챙겨 들고 조용히 방을 나서 툇마루를 가로질렀다.

그사이 휴대폰의 액정을 확인하자 역시나 할아버지다.

확실히, 새벽 5시에 전화할 사람은 할아버지뿐이라 전혀 놀랍지 않았다.

“새벽잠이 없어도 너무 없으신 거 아니에요?”

부탁한 적 없는 새벽 5시 모닝콜에 한이 인사 대신 불만을 쏟아 내자 수화부 너머에서 걸걸한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용케 전화는 받는구나?

“안 받으면 받을 때까지 하실 거잖아요. 편히 주무셨어요?”

- 잘 잤지. 그런데, 무슨 일이냐?

당신이 전화하고는 무슨 일이냐 묻는 게 우습긴 했지만 한편으론 너무 할아버지다워 한은 대청마루의 문을 열고 나서 문 앞에 주저앉으며 무심히 답했다.

“말씀드렸잖아요. 확실히 해 둘 거라고.”

- 그런 걸 세간에서는 납치, 감금이라고 하지.

“자기 발로 왔어요.”

- 그런 건 유인이라고 하는 거고.

어떻게 해도 범죄 아니냐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신우가 직접 걸어온 건 맞지만 자신이 어느 정도 유인을 한 건 맞다.

- 그래서 다른 범법 행위는 없었고?

설마 벌써 한 건 아니겠지, 라는 할아버지의 물음에 한은 순간 뜨끔한 듯 말을 돌렸다.

“……그 얘기는 됐고, 별채 쪽에 사람이나 좀 보내 주세요.”

- 사람?

“식사 준비해 주실 분하고 집 좀 지켜 줄 분이요. 그리고 개도 보내 주세요.”

한이 원하는 건 전부 오냐, 오냐 하던 노인이 마지막 말에는 딱 잘라 거절의 의사를 표한다.

- 개는 안 된다.

“그러지 마시고 두 마리만 보내 주세요.”

- 차라리 돈을 달라고 해? 개들은 안 돼.

“누가 된장 바른대요? 신우가 좋아할 것 같으니 잠깐만 보내 달라고요.”

- 그런 건 순한 녀석으로 구해. 내 새끼들은 늑대개들이야.

“그 녀석들이 어딜 봐서 늑대개예요? 집도 못 지킬 것 같은 녀석들이.”

도둑이 들면 좋다고 꼬리를 흔들어 댈 것 같은 녀석들이 어딜 봐서 늑대개냐고 한이 혀를 차자 이번엔 조부가 말을 돌렸다.

- 그래도 안 돼. 너라도 내 새끼들은 못 준다. 자꾸 이러면 너도 내쫓을 테니 알아서 해.

자기가 좋아하는 걸 남한테 자랑은 해도 절대 손은 못 대게 하는 조부의 성미를 잘 알기에 한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건 진짜 싫을 정도로 닮았다.

“알았어요. 대신 오늘 신우네로 사람 보내서 짐 좀 옮겨 주세요. 주소랑 열쇠 드릴 테니 있는 대로 싹 빼 오라고 하시면 돼요.”

- 니 할애비, 이삿짐센터 일은 아직 안 한다.

“그냥 사람 좀 보내 주세요. 어차피 요즘 하실 일도 없으시잖아요.”

노느니 도와 달라는 말에 노인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도 그러마 답해 왔다.

- 망할 놈. 그런데 왜 이리 조용해? 그 애는?

“아직 자요. 어제는 좀 무리해서 오늘 아침에는 못 보실 거예요.”

혹시라도 자신이 잠깐 방에서 나온 사이 도망칠까 문 앞에 주저앉아 대기 중이라고 한이 설명하자 노인이 혀를 찬다.

- 그렇게 자신이 없어 어쩔 생각이냐?

유쾌한 목소리로 정곡을 찌르는 그 말에 한이 삐죽거린다.

“자꾸 아픈 데 찌르지 마세요. 그렇지 않아도 자기 비하 중이라고요.”

- 왜?

“도망칠 것 같아요, 자꾸. 겨우 집까지 끌고 왔는데도 별 효과가 없네요.”

그 덕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겨우 새벽녘에야 잠이 든 차였다. 신우를 꼭 품에 안고 잤는데도 이상하게도 마음은 안정되지 않았다.

일단 집으로 끌고 와 할아버지께 인사시키고 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신우를 안은 직후에는 충족감에 싸였지만 진짜 딱 그 순간뿐이었다.

일단 사귀고 나면, 일단 안고 나면, 자신의 사람이란 확신이 더해져 마음이 편해질 줄 알았는데 편해지기는커녕 점점 불안해지기만 한다.

그게 불만스러웠다.

신우와 연애를 하면 행복하고 편안하고 구름 위를 둥둥 날아다니고 일도 잘되고 마냥 즐거울 줄 알았다. 아니, 지금까지 자신이 한 연애들은 대부분이 그랬다. 일단 시작하고 나면 즐겁다. 사랑하고 말고의 문제보다는 연애라는 행위 자체가 주는 만족감 같은 게 있었다.

상대를 관찰하고, 그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찾으며 기뻐하고, 또 가끔은 실망하는 그 과정 자체가 자신에겐 일종의 즐거운 놀이 같은 거였다. 물론, 워낙에 빠르게 타오르는 탓에 그 기간이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그 순간만은 즐거웠다.

하지만 신우와의 연애는 마냥 즐겁기만 하지 않았다. 사실 즐거울 때보다는 화나고 짜증 나고, 또 초조할 때가 많은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이 기분이 나아질까 떠올려 봐도 방법이 없었다. 나름 열심히 궁리해 낸 게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게 퇴로를 차단하는 거였는데 그래도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는 않으니 말이다.

집 안에 둬도 결국 도망쳐 버릴 것 같았다. 여기를 막으면 저기가 터지고, 저기를 막으면 또 다른 게 걸린다. 그렇다고 문 잠그고 창문을 막고 쇠사슬로 묶어 놓을 수도 없다.

아니, 그렇게 해도 달라지는 건 없으리라 장담할 수 있었다. 자신의 굴로 끌고 와서도 여전히 이런 기분이라면 뭘 해도 마찬가지일 거다.

항상 신우를 보면 그런 기분이 들곤 했다.

아슬아슬한, 당장이라도 높은 곳에서 땅바닥으로 내리꽂힐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잠깐만 손을 놓아도 멀리 사라지거나 흩어져 버릴 것 같다.

태어나서 이렇게 자신이 없는 건 처음이라고 한이 토로하자 노인이 껄껄거리며 웃는다.

- 네가 진짜 임자를 만난 모양이구나.

“할아버지, 이거 재미있어 하실 일 아니에요.”

손자는 지금 애간장이 다 타 죽을 것 같은데 너무 즐기시는 거 아니냐고 한이 불만을 토해 내자 노인이 웃음을 그친다.

- 네놈에게는 좋은 일이야. 그런 것도 알아야 세상 무서운 걸 알지. 내 손자지만 넌 인생을 너무 편하게 살았어.

“할아버지까지 그러지 마세요. 전 최선을 다했어요, 늘.”

모두가 자신에게 ‘너에게는 모든 일이 쉽고 간단한 것 같다’라고 하지만 자신이라고 다 쉽기만 했던 건 아니다. 자신 역시 남들처럼 희생도 하고 고생도 했다. 다른 게 있다면, 흥미가 동반되면 무엇이든 즐길 줄 아는 낙천적인 성격과 열정을 가졌다는 것뿐이다.

그것만은 인정해 줘야 한다고 한은 주장했지만 노인은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하지도 말라는 웃음이었다.

- 사람 보낼 테니 애 놀라지 않게 네가 미리 얘기해 둬라. 그리고 아침은 거기서 하고, 오늘 밤에 정식으로 인사시키고.

“그럴게요. 이제 산책하실 시간이죠?”

전화기 너머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걸로 봐선 막 정원으로 나서신 듯해 묻자 조부께서 느긋하게 답하신다.

- 그래. 벌써 다들 신이 났구나.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그 녀석들은 기운만 넘치니 가끔은 다른 사람한테 맡기세요.”

- 내 새끼들을 누구한테 맡겨. 이 예쁜 것들을.

누가 훔쳐 갈까 무섭다는 조부의 말에 한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 녀석들을 누가 훔쳐 가요?”

조모가 작고하신 뒤 자식들을 다 내쫓으신 할아버지는 할머니께서 개털 알레르기가 있으셔서 그간 못 키우셨던 개에게 흥미를 보이시더니 샤를로스 울프 독 한 쌍을 입양하셨고 그 뒤로 그 녀석들은 줄줄이 가족을 늘여 현재 집 안에 있는 녀석들만 여섯 마리였다.

세계적으로 공인받은 단 두 종의 늑대개 중 하나인 터라 처음엔 자신도 흥미를 보였지만 원래 이 종 자체가 그런 건지, 이 녀석들만 특이한 건지 몰라도 험악한 얼굴의 녀석들이 애교만은 넘쳐흘러, 좋다고 달려들 때는 사실 좀 무서웠다.

자기들은 신이 나 놀자는 거겠지만 30kg이 넘는 거구의 늑대개들이 달려드는 것 자체가 보통 이들에겐 공포였다.

그런 녀석들을 세상 누가 훔쳐 갈까?

당신 자식들에게도 ‘넌 돈 버는 재주는 없으니 회사나 죽어라 다녀라.’라고 하실 정도로 객관적이고 엄격한 할아버지께서 그런 걸 모르실 리 없으니 저건 그냥 억지다.

자기가 좋아하는 건 절대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는 기질의 문제다. 만지면 닳기라도 할까, 진짜 자랑만 하고 다니실 뿐 절대 남의 손에 닿게는 하지 않는다.

“난 역시, 할아버지를 너무 많이 닮았어.”

어쩌면 성격까지 이렇게 판박이일까 싶어 한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멍하니 문 앞에 앉아 저 멀리 동이 터 오는 광경을 바라보던 한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서 조심스레 마루 위로 올라섰다. 그러곤 이내 소리를 내지 않고 툇마루를 걸어 손님용 욕실로 향했다.

더는 잠도 오지 않아 샤워를 하고 나오니, 이미 해가 떠 있었다. 이제 겨우 5시를 조금 넘겼을 뿐인데 대청마루 안쪽까지 햇살이 깊숙이 들어와 있다.

불볕더위의 시작을 알리는 듯한 햇살에 한숨을 쉬며 최대한 조용히 침실 문을 열자 역시나 방 안에도 햇살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신우는 햇살에 개의치 않고 정신없이 잠든 채였다.

그래도 혹시 신우가 깰까 최대한 조용히 방 안을 가로질러 드레스 룸 쪽으로 향하는데 바닥에 떨어진 신우의 휴대폰이 눈에 들어왔다. 그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려 막 손에 드는데 전원 버튼을 잘못 눌렀는지 화면이 켜지며 메인 잠금 화면 위로 팝업 알림창이 떴다.

[계약서 보내 줄게. 연락 줘.]

저장되지 않은 번호인지 발신자가 휴대폰 번호로 되어 있었는데, 그걸 본 순간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채고 말았다.

보낸 시간이 어제 신우의 집에 있었던 시간인 걸로 봐서는 확인할 것도 없다.

조금 짜증이 나는 바람에 괜히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한은 서둘러 그 번호를 자신의 휴대폰에 저장했다. 그러곤 아무 말 없이 신우의 휴대폰을 침대 옆의 사이드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뒤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피곤하다. 그리고 몸이 무겁다.

암전되듯 까맣게 가라앉아 있던 의식이 깨는 순간 신우가 가장 먼저 떠올린 감상이었다.

분명 의식은 깨어났는데 몸은 잠든 채였다.

전신이 물을 먹은 듯 침대 아래로 푹 가라앉은 듯했고 눈꺼풀 역시 천근같이 무거워 눈을 뜰 수 없었다.

마치 일주일간 철야를 한 느낌이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자고 싶다는 간절함에 다시 의식을 놓으려는데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몸은 움직일 수 없었지만 감각은 선명했다.

따뜻한 손길에 기분이 좋아져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바로 위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내려앉았다.

“아직 자?”

조심스러운 그 음성에 천천히 눈을 뜨자 한이 걱정스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한이 내 방에 있는 거지, 라고 떠올린 순간 낯선 방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집이 아니다. 높은 서까래 아래의 조명과 격자무늬의 문, 그리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낯설다.

여기가 어디지, 라고 떠올린 순간 지난밤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몰려든 기억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창피해진 나머지 뺨을 가린 채 몸을 뒤척이려는데 허리와 허벅지 뒤쪽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살짝 움직인 것뿐인데도 지독한 통증이 일었다.

몸의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온몸의 근육이 굳은 느낌이었다.

“움직이지 마. 어제 무리해서 아플 거야.”

걱정이 잔뜩 밴 한의 목소리에 식은땀까지 흘리며 겨우 통증을 참고 있자 한이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준다.

“근육통이 좀 있을 거야. 약 갖다줄까?”

“……아니, 괜…….”

괜찮다고 하고 싶었지만 심하게 갈라진 음성과 함께 목이 너무 아파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목 안이 심하게 마르고 까끌거렸다.

모래를 삼킨 기분이었다.

잔뜩 마른 목에 밭은기침을 내뱉자 한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말과 동시에 허리를 숙여 침대 옆의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낸 한이 물병을 열어 건넸다.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켜 순식간에 물병을 비우자 겨우 갈증이 가셨다. 이제 드디어 숨을 편히 내쉴 수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괜찮아?”

우려 섞인 그 음성에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방금보다는 나은 음성으로 답하고 나니 어색한 침묵이 맴돌기 시작했다.

지난밤의 기억 탓에 함부로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 한은 아무렇지 않은데 자신이 촌스럽게 구는 건지는 몰라도 그냥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다시 누워. 오늘은 움직이기 힘들 거야.”

베개를 정리한 뒤 부드럽게 어깨를 내리누르는 한의 손에 밀려 다시 침대에 누웠다. 눕는 순간에도 등과 종아리가 욱신거렸다. 하지만 조금 전보다는 나아진 채라 천천히 숨을 몰아쉬는데 한이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건드려 왔다.

그 손길에 순간 몸이 움찔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한의 손이 몸을 매만지던 기억 탓에 괜히 당황해 시선을 피하게 됐다. 그걸 눈치챘는지 한이 서둘러 손을 떼곤 다시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 줬다.

“뭐 먹을 수 있겠어? 식사 준비해 줄까?”

“아니, 지금은 생각 없어.”

“그럼 나중에 먹을래?”

“응.”

“그럼, 더 자. 아무도 근처에 오지 말라고 말해 둘 테니 푹 쉬어. 오전에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 출근해야 하는데 오후에는 돌아올 거야.”

그러고 보니 평소에는 캐주얼한 차림으로 출근을 하는데 오늘은 정장이었다. 아마 중요한 미팅일 거라는 생각에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자 한이 다시 한번 조심스레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오늘 너희 집에서 짐 빼 올 거야. 옆방으로 일단 옮겨 둘 테니 정리는 시간 날 때 천천히 해.”

아주 조심스럽게, 소중한 것을 다루듯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는 손길에 순식간에 수마가 몰려왔다.

한이 출근 준비를 할 시간이면 자신도 일어나야 하는데 너무 노곤하다. 무겁게 내리깔리는 눈꺼풀에 저항하지 못한 채 그대로 눈을 감자 다시 의식이 가라앉았다.

가볍게, 그리고 포근하게.

“오늘, 뭐야?”

고객과의 미팅을 마친 뒤 사무실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운전 중이던 인재가 제일 먼저 내뱉은 말이 그거였다.

맥락 없는 그 질문에 조수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한이 의아한 듯 인재를 돌아본다.

“무슨 소리야?”

“속일 사람을 속여라. 정신이 반쯤 다른 데 가 있잖아, 오늘.”

미팅 내내 이상했다고 인재가 중얼거리자 한이 살짝 인상을 쓰며 되묻는다.

“……내가 뭐 실수한 거 있어?”

“아니, 실수한 건 없는데 태도가 눈에 보였어. 물론, 고객들이야 평소의 널 잘 모르니 눈치 못 챘겠지만 내 눈에는 보이지. 뭔데 또? 어제는 기분 좋게 퇴근하더니.”

예리한 인재의 지적에 한이 입을 꾹 다문다. 확실히 다른 때보다 집중을 하지 못했던 건 사실이었다. 보통 고객과의 미팅 때는 상대의 표정이나 미묘한 제스처의 변화 하나까지 예민하게 캐치하는데 오늘은 다소 건성이었다.

“무슨 일인데? 신우 씨랑 무슨 일 있었어?”

어제 분위기가 롤러코스터를 타더니 무슨 일 있었냐는 인재의 질문에 다시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던 한이 작게 한숨을 내뱉는다.

심상치 않은 그 분위기에 인재가 재차 물었다.

“싸웠냐?”

“…….”

한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맞다는 거다. 역시나, 란 생각에 정지 신호를 본 인재는 서둘러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멈췄다. 그러곤 무심히 내뱉었다.

“싸운 거라면 싹싹 빌어.”

신우 씨 성격에 싸운 거라면 무조건 네가 잘못했을 테니, 라는 어제와 같은 인재의 타박에 한이 진지한 얼굴로 인재를 돌아본다. 그리고 잠시 후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너, 예은이랑 몇 년 만났지?”

“몇 번 말하냐? 10년 만났고 곧 결혼할 거라고.”

그놈의 전세 자금만 해결되면, 이라고 인재가 덧붙이며 혀를 차는 소리에 한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다시 묻는다.

“예은이랑 헤어질 뻔한 적 있어?”

계속되는 자신의 연애사에 대한 질문에 인재는 뭔가 있구나라고 짐작했다. 그래서 솔직하게 답해 줬다.

“뭐, 장기 연애 커플 중에 그런 일 없는 커플들이 더 희귀하지 않아? 한 번 대판 싸우거나 섭섭한 일이 쌓이면 헤어지니 마니 하다가도, 또 얘만 한 애 없다, 보고 싶다, 옆에 없으니 허전하다 싶으면 다시 만나는 거고.”

“처음부터 헤어질 걸 염두에 두고 만나는 사람도 있을까?”

여전히 난해한 한의 질문에 막 바뀐 신호를 보곤 브레이크에서 발을 뗀 인재가 천천히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혀를 찬다.

“어차피 헤어질 생각이면 뭐 하러 만나? 헤어질 것 같아도 헤어지지 않게 노력하고 맞춰 가는 것도 연애의 과정이잖아.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이제 본론을 말해 달라던 인재가 문득 뭔가 떠오른 듯 놀라 한을 힐끔거린다.

“설마, 신우 씨가 헤어지재?”

사귄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라는 인재의 반문을 무시한 한이 작게 중얼거렸다.

“차라리 그게 낫지…….”

헤어지자고 한 거라면 원인을 찾아 해결하면 되니까, 라는 한의 답에 인재가 그제야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 신우 씨가 그렇게 경솔한 타입은 아니지. 그럼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는데?”

“다른 문제로 얘기하는데…… 언젠가 헤어질 테니 복잡해지는 거 싫다고 하더라.”

깊은 한숨이 밴 한의 설명에 인재가 놀란 듯 눈을 껌뻑이다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그건, 너에 대해 아주 잘 파악하고 하는 말 같은데……?”

악의 없이, 인재는 한의 가장 아픈 부분을 정확히 찔렀다. 분명 한도 신우의 사고에 자신의 과거가 큰 지분을 차지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렇다 해도 신우는 과하게 방어적이었다.

사실 오늘 오전 내내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어느 정도 머리가 식고 이성을 되찾자 더욱더 꺼림칙해졌다.

어젯밤에는 일단 이 녀석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몸부터 움직였지만 그게 옳은 방법이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치졸하고 비열했다.

애초에 신우가 절대 자신을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밀어붙인 관계였기에 그 뒤끝이 좋을 수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화가 났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그렇게까지 밀어붙인 후에도 여전히 초조함은 그대로라는 사실이었다. 무엇 하나 나아진 게 없었다.

여전히 신우가 위태로워 보였다.

바로 오늘만 해도 집으로 돌아가면 신우가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다른 일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지금 자신은 명백한 정서 불안 상태였다. 아니, 정확히는 분리 불안이다.

“사람들이 이래서 미치나 보네…….”

탄식 같은 한의 중얼거림에 막 좌회전을 하던 인재가 흘깃 한을 곁눈질했다.

“너답지 않게 웬 약한 소리야?”

“……자신이 없어. 난 나 잘난 맛으로 사는 타입인데 그 녀석한테는 자신감이 안 생겨.”

“네 사람이라고 확신했다며?”

“그건 확신이지 자신감은 아니지.”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렇다고 인재는 순순히 인정했다.

“……뭐, 너한테는 인생에 시련이 필요하긴 하니…… 나쁘진 않네.”

이래서 사람은 오래 살고 봐야 한다는 인재의 말에 한이 원망스러운 듯 인재를 돌아본다.

“서인재, 나 심각해.”

“원래 연애할 때는 다들 심각하잖아. 내 사랑은 운명이고 비극이고 상대는 내 세계고 우주이자 모든 것이고. 이별은 세계의 종말이고. 뭐, 그러다 정신 차리면 이불 킥 하는 거지만.”

“이랬던 적 없었다고, 지금까지.”

혈기 왕성하다 못해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착각하던 20대 시절에도 연애에 대해서만은 더없이 쿨했다는 한의 탄식에 인재가 바로 그게 문제라며 지적했다.

“그러니까, 너한테 시련이 필요하다는 거야. 신우 씨가 아예 널 모르는 것도 아니고 고등학교 시절에 네가 한 짓도 다 알고 있으면 신뢰도 바닥인 게 당연한 거 아니냐? 언제라도 네가 먼저 돌아설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니 결국 이것도 네 잘못이라는 한결같은 인재의 태도에 한이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린다.

“……먼저 돌아선 건 그 녀석이야.”

한숨을 담은 한의 음성에 막 차선을 바꾸던 인재가 되묻는다.

“……뭐?”

“고등학교 때도 그랬어. 그때도 그 녀석은 내가 있든 없든 상관없다는 태도였어. 내가 조금만 멀어지면 그냥 손을 놔 버려.”

그때는 단순히 무심한 성격이라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 나니 단지 무관심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이젠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복잡해졌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느꼈지만 신우는 타인과의 관계에 소극적이며 회피적이다. 그러니 이 관계는 신우가 바뀌지 않는 한 영원히 제자리를 맴돌 수밖에 없다.

신우는 늘 이별을 대비하고, 자신은 그런 신우를 보며 불안해하고…….

어쩐지 숨통이 막혀 와 길게 한숨을 내뱉자 사무실 근처에 다다라 오른쪽 도로로 차선을 변경하던 인재가 툭 하니 말을 던진다.

“내가 신우 씨를 오래 안 건 아니라 잘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지금까지 본 바로는 신우 씨는 기본적으로 수동적이고 자기 평가가 낮은 타입이야. 어려운 작업을 손쉽게 하길래 대단하다고 해도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지를 못하더라고. 우리 외주 작업자 중에서도 제일 실력은 좋은데 단가는 제일 낮게 불러서 솔직히 좀 의외였으니까.”

거기까지 말한 뒤 지하 주차장으로 차를 몬 인재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원래 그런 성격이기도 하겠지만 그런 식의 칭찬을 받은 적이 없는 거겠지. 그리고 불행히도 그런 타입은 너랑은 상극이야. 넌 신우 씨가 먼저 돌아섰다고 하지만 그건 네 시점의 이야기지 신우 씨의 시점은 모르잖아? 고등학교 때 넌 자극을 주려고 했다지만 신우 씨 같은 타입에게는 그 자극 자체가 거절로 느껴졌을 가능성이 커. 그런 성격들은 한 번 거부당했다고 생각하면 자기가 뭔가를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상대한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니까.”

지하 2층 주차장으로 들어서 주차할 곳을 찾던 인재의 제삼자로서의 소견에 한의 머릿속에 어젯밤 신우가 건넨 말이 스쳤다.

‘넌 잘 질리고 난 사람을 질리게 하니까.’

그 순간에는 신우가 잘 질려 하는 자신을 탓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인재의 말을 듣고 나니 그게 자신을 탓하는 말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아니다. 그건 신우 본인을 탓하는 말이었다.

“젠장…….”

다른 사람들의 속내는 그렇게 잘만 알아채면서 신우의 진짜 감정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리 감정적인 상태였다고 해도 멍청했다. 감정에 취해 시야가 좁아진 거다.

왜 그 말을 그냥 흘려 넘겼을까?

“너 혼자 올라가. 난 조퇴할게.”

멈춰 선 차 안에서 먼저 내려서며 한이 던진 말에 인재가 놀라 서둘러 운전석 문을 열고 나섰다.

“갑자기 왜?”

“잠깐 볼일이 생겼어.”

어차피 오늘은 오전 근무만 하겠다고 했던 터라 인재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말해도 들을 녀석이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알기에 포기하는 게 빨랐다.

인재가 돌아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는 걸 본 한은 곧장 자신의 차가 있는 쪽으로 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러고 나서 정현에게 먼저 전화를 걸고,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막 시동이 걸린 순간 수화부에서 굉장히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왜?

짜증이 가득 밴 정현의 음성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한은 재빨리 말을 건넸다.

“잠깐 나 좀 봐.”

- 안 봐. 나 당분간 너 보기 싫어.

“왜 보기 싫은데?

- 그걸 몰라서 묻냐?

“모르니까 묻지.”

- 신우가 얘기 안 해?

“뭘?”

- 너 신우랑 사귀기로 했다며? 그 얘기 듣고 너 보면 욕 한 바가지 퍼붓고 싸대기 왕복으로 날릴 텐데 그랬다간 너한테 역으로 얻어맞고 실려 갈 게 뻔하잖아. 그래서 아예 꼴 보기도 싫다고 했는데, 신우가 얘기 안 해 주디?

원래 자신에게 말이 험한 편이긴 했지만 유독 날카로운 정현의 반응에서 한은 상대를 제대로 골랐음을 직감했다.

정현은 뭔가 아는 거다.

“내가 연신우랑 사귀는 게 왜 싸대기를 왕복으로 맞을 짓인데?”

- 그걸 말이라고 하냐? 네가…….

한바탕 퍼부을 듯 목소리를 높이던 정현이 순간 말을 끊고는 한숨을 내쉰다.

- 아니다, 됐다. 말이 통해야 말을 하지. 하여간 너 당분간 얼굴 보이지 마.

“왜 연신우는 안 되는데?”

- 됐다고. 말하기 싫다고.

말하기 싫다는 건 말할 게 있긴 있다는 거다. 하지만 자신은 그 말을 들어야 하기에 곧장 안전띠를 매며 말을 돌렸다.

“보기 싫어도 내 얼굴 봐. 나와서 싸대기 날려도 맞아 줄 테니 나와.”

- 싫어. 네 얼굴 보면 나 혈압 올라서 뒤로 넘어갈 거야. 싸대기는 신우랑 끝난 뒤에 이자까지 합쳐서 갚아 줄 테니 그때 맞아.

“유정현, 너 지금 나 봐야 돼. 곧 점심시간이지? 내가 너희 회사 근처로 내가 갈 테니까 주소 보내.”

- 아, 싫다고!

“조금 이따 봐.”

- 야!

정현의 고함을 뒤로한 채 한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말은 싫다고 하지만 신우 문제라면 결국 정현은 주소를 보낼 거다.

기본적으로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했고, 특히나 신우 일에 있어선 과보호를 하는 편이라 나오지 않고 못 배길 거다.

그렇게 확신한 순간 한은 곧장 기어를 바꿨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따뜻한 공기와 적당히 기분 좋은 바람, 그리고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에 정신없이 단잠에 빠져 있던 중 멀리서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귀에 익지 않은 소음에 두어 번 눈을 껌뻑이던 사이 멀리서 들리던 소음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건 개가 짖는 소리였다.

처음엔 잘못 들은 건가 했는데 아니었다. 컹컹거리며 여러 마리가 동시에 짖는 소리가 창밖에서 들려왔다. 그것도 왈왈거리는 소형견의 짖음이 아닌, 공기가 울리는 듯 쩌렁쩌렁한 대형견들의 소리였다.

왜 개가 짖는 소리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들리는 걸까 하며 주변을 돌아봤다. 그러다 낯선 방안의 정경을 확인하고 나서야 여기가 한의 방이란 사실을 깨닫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윽…….”

몸을 움직인 순간 허리와 다리에 스치는 근육통에 신우는 작은 신음을 흘렸다. 지독하다 싶을 정도의 통증에 몸을 숙이고 끙끙거리는 사이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온다.

누가 여기로 오는 걸까 당황해 자신의 옷매무새부터 살폈다. 다행히 옷은 입고 있었다. 사이즈가 커 헐렁거리는 것으로 보아 한의 옷인 것 같았다.

그 사실에 안도하는 사이 개가 짖는 소리가 바로 문밖에서 들려왔다.

지나치게 가까운 소리에 간신히 침대에서 내려서는데 바짓단을 밟아 휘청였다. 한이 큰 건 알았지만 막상 옷을 빌려 입고 보니 자신과의 체격 차이가 새삼 실감되었다.

팔꿈치까지 내려오는 반소매 상의와 바닥에 질질 끌리는 하의.

일단 걸어야 하기에 바짓단을 접어 올리느라 낑낑거리며 겨우 길이를 맞추자 이번엔 허리가 흘러내려 바지춤을 몇 번이나 끌어 올려야 했다.

“이 녀석들아! 시끄럽다. 오늘따라 왜 이리 짖어 대누?”

옷을 고쳐 입고 나니 문 앞에서 컹컹거리는 개들을 나무라는 우렁찬 노인의 고함이 들려왔다. 말투는 거칠지만 화를 내는 음성은 아니었다.

애정이 듬뿍 담긴 그 음성에 어젯밤의 기억을 하나씩 되짚던 신우는 비로소 그게 한의 조부의 목소리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어쩌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신우는 나가서 인사를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에 빠졌다.

어젯밤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신세를 졌다. 게다가 늦은 시간까지 침대에서 뒹굴기까지 했다. 근처에 오신 거라면 지금이라도 나가서 제대로 인사를 드리는 게 예의일지, 한이 올 때를 기다려야 할지 난감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몸이 아픈 것도 잊고 방 안을 서성거리던 중 바로 문 앞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꽂혀 들었다.

“잠깐 쉬었다 가자.”

그 말에 신우는 결심을 굳히곤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바로 앞까지 오셨으니 꼴은 이래도 일단 인사를 드려야 한다.

두근두근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옷매무새를 다듬은 신우는 다리를 질질 끌며 문 앞으로 다가서서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을 들어 문을 밀어 열었다.

신우가 문을 열고 나서자 마당 쪽에서 뛰어놀던 여섯 마리 개들의 기세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조금 전까지 컹컹거리며 신이 나 날뛰던 녀석들이 입을 딱 닫고 멈춰 선 채 자신을 경계하는 모습에 신우는 순간 멈칫했다.

늑대처럼 쫑긋 선 귀와 사나운 눈매, 그리고 반짝이는 갈색과 검은색이 섞인 털을 지닌 거대한 녀석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혀 있었다. 그 흉흉한 기세에 기가 죽어 움찔하자 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백발노인이 웃음을 흘리며 그중 가장 큰 녀석의 머리를 툭 때린다.

“이 녀석들아, 가족이다. 털을 뭘 그리 세워? 도둑놈이 들어와도 안 짖는 놈들이.”

노인의 타박에 그제야 녀석들의 기세가 누그러진다. 순식간에 경계심을 풀고 다시 꼬리를 흔들며 주인에게 매달리는 녀석들을 신우가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자, 노인이 부드러운 투로 말을 붙였다.

“가까이 와도 괜찮다. 내가 대장이니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물지 않아.”

신우는, 처음엔 그게 누구를 향해 하는 말인지 몰랐다. 그러다 잠시 후 그게 자신에게 건 말이었단 걸 깨닫고는 조심스레 그의 옆으로 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젯밤엔 죄송했습니다.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리고…….”

“됐다. 내가 내 손자 놈 성미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놈이 가끔 못돼 먹은 짓을 해 대니 네가 이해해라. 지가 하고 싶으면 다 되는 줄 아는 놈이니.”

내가 그렇게 키웠지만 가끔은 진짜 못됐어, 라고 노인이 혀를 차는 모습에 그제야 신우는 제대로 고개를 들어 노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새하얀 오후의 햇살이 노인의 백발 위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선이 굵고 남자다운, 호탕해 보이는 인상에 유난히도 서글서글해 보이는 눈매, 그리고 그 나이 때의 어르신치고는 커다란 체구까지. 일어섰을 때는 모르지만 앉아 있을 때는 한보다 조금 작거나 비슷한 듯했다.

순간, 한의 조부가 한의 미래의 모습일 거라는 정현의 말이 떠올랐다.

확실히 많이 닮았다. 외모도 체형도 느낌도 비슷하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와 아주 먼 미래의 한을 본 듯한 기분에 신우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있자, 노인이 그윽한 시선으로 신우를 돌아본다. 그러고는 뚫어질 듯 강한 시선으로 신우의 눈을 마주했다.

마치 자신의 속을 샅샅이 꿰뚫어 보는 듯한 그 눈빛에 신우는 서둘러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노인은 그 후로도 아무 말 없이 신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바라보기를 수 분, 드디어 시선을 돌린 노인이 입고 있던 한복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러곤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신우에게 건넸다.

“먹어라.”

라는 말에 노인의 손을 내려다보니 예쁜 포장지에 싸인 작은 알사탕이 네 개 보였다. 이걸 받아도 되나 하는 생각에 신우가 머뭇거리자 노인이 어서 받으라는 듯 손을 움직인다.

“내가 제일 아끼는 사탕이다. 한이에게는 말하지 말아라. 이거 달라고 쫓아다녀서 그놈을 별채로 내쫓은 거니. 내가 사탕 준 거 알면 자기한테도 내놓으라고 석 달 열흘을 쫓아다닐 테니 너 혼자 먹어라.”

대체 이 사탕이 뭐길래 한이 사탕을 달라고 쫓아다닌 건가 의아하긴 했지만 더는 멀뚱히 있을 수 없어 신우는 일단 두 손으로 그가 내민 사탕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조심스레 사탕을 받아 든 신우가 감사의 인사를 건네자 노인이 자기 앞에서 재롱을 부리는 개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오냐, 오냐.’ 하며 웃었다. 그러다 다시 신우를 바라보며 묻는다.

“오늘 날이 좋지?”

“네.”

“저녁은 뭘로 할까.”

“예?”

“칼칼한 전복탕이 좋겠는데…… 싫어하니?”

“아뇨. 아닙니다.”

“그래. 그럼 그걸로 해야겠다. 한이 놈은 점심시간에 들어온다더니 늦는구나.”

“예…….”

사방으로 튀는 대화에 신우가 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순간순간 떠오르는 대로 답하는데, 노인이 다시 신우에게 물었다.

“개 싫어하니?”

갈색 털을 지닌 커다란 개를 쓰다듬던 노인의 물음에 신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좋아합니다. 그냥, 키워 본 적이 없어서요.”

“그래? 잘됐구나. 그럼 이제부터 이놈들하고 친해져 보렴. 이놈이 내 아래 서열이다. 만져 봐라.”

우글거리는 개 중 가장 큰 녀석의 목줄을 잡아끌고는 어서 만져 보라고 노인이 눈짓하자, 신우가 조금 겁먹은 얼굴로 개를 쳐다본다.

개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들은 딱 보기에도 사냥개 종류였다. 눈빛도 이빨도 날카로웠다. 개를 키우기는커녕 가까이에서 본 적도 없던 터라 신우가 차마 손을 뻗지 못하고 있자 노인이 어서 만지라는 듯 고갯짓을 한다.

그 신호에 마지못해 손을 내밀어 개를 쓰다듬자 손바닥에 푸근하고 폭신한 털의 감촉이 느껴졌다.

상상 이상으로 부드러운 결에 상당히 놀라고 말았다. 거칠어 보이는 외관과 달리 보드라운 털을 가진 녀석들이었다.

“내가 대장이고 이 녀석이 두 번째야. 이 녀석들은 늑대의 습성이 많이 남아서 꼭 무리를 이루고 그중 대장을 두거든.”

나직한 노인의 설명에 신우는 긴장을 풀곤 궁금하던 바를 내뱉었다.

“한이는요?”

“그놈은 개과보다는 고양이과라 별로 안 좋아해.”

“……네?”

“같은 종이 아닌 거지. 그놈은 제멋대로 사는 놈인데, 이 녀석들은 규율과 규칙이 있거든. 훈련시키기는 힘들지만 한 번 길들이면 대장만 따르고 그 규율에 맞춰서 살아가지.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녀석들은 다른 무리라 경계하거든.”

“네…….”

신기한 이야기에 신우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개들이 놀자고 수선을 피우기 시작했다. 낑낑거리며 이제 그만 가자고 떼를 쓰는 듯한 그 움직임에 노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 녀석들이 몸이 근질거리나 보다. 너도 그만 가서 쉬어라. 몸도 안 좋은 것 같은데 푹 쉬고 저녁 때 보자. 오늘은 건너와서 식사할 거지?”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신우 역시 재빨리 일어나 마루 아래로 내려서려 했다. 하지만 아래에 신발이 없었다. 어젯밤 자신이 신고 온 신발도 보이지 않아 신우가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자 노인이 신우를 한 번 보고 땅을 한 번 내려다보더니 껄껄거리며 웃는다.

“그놈이 말이다…….”

“네?”

“한이가 어릴 때 제일 좋아하던 동화가 뭔지 아니?”

“……모르는데요.”

“선녀와 나무꾼이다.”

“네?”

“어릴 때부터 제 각시 찾으면 옷이며 신발이며 다 태워 버린다고 했었지. 나무꾼이 멍청하게 태워 버리지 않고 숨겨 놔서 선녀가 돌아간 거라고 말야.”

거기까지 말한 뒤 마당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호쾌한 웃음을 내뱉은 노인은 이내 개들을 이끌고 뒤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당신의 말대로 개들을 이끄는 대장처럼 절도 있는 그 모습에 신우는 한 대 요란하게 얻어맞은 기분으로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폭풍 같은 사람이었다. 순식간에 불어닥쳤다 사라지는 그의 존재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유난히 좋은 햇살도, 그리고 푹신하고 부드러운 털을 가진 무서운 얼굴의 개들도, 그리고 툭툭 다정한 말을 건네던 노인도, 그리고 손안에 남은 이 사탕도 모두가 꿈결 같았다.

마치 동화 속에 들어온, 이상한 기분이었다.

외근 중이라 조금 늦어진다는 정현의 전화에 그의 회사 근처 음식점에 와 먼저 기다리던 한은 연신 초조한 듯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어?”

1시 15분까지는 온다던 녀석이 30분이 넘어가는데도 오지 않고 있었다. 미리 요리를 주문해 달라는 문자 뒤로 연락이 없는 상황에, 한이 결국 참지 못하고 막 전화를 걸려는 순간 가게 문이 열리며 재킷과 가방을 손에 든 정현이 들어섰다.

“여기.”

급한 마음에 손을 들어 정현을 부르자 그렇지 않아도 뚱한 표정의 정현이 인상을 확 구긴다. 감정이 아주 많이 들어간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이쪽이 급한 터라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자리 잡고 앉길 기다렸다.

“정한, 인내심 많아졌네. 15분이나 사람을 기다리고.”

비아냥과 함께 여전히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을 한 정현이 자리에 앉아 물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곤 곧 잔을 내려 둔 뒤 덥다며 손으로 부채질을 시작했다.

“더럽게 덥네.”

“여름이니까.”

습도까지 높아 외근 중에 죽을 뻔했다며 정현이 대화를 시작한 순간 미리 주문해 뒀던 식사가 나왔다. 앞에 놓이는 파스타 접시에 곧장 포크를 손에 든 정현이 식사를 시작하며 무심히 말을 던진다.

“신우는?”

“잘 지내. 지금은 우리 집에 있고.”

그 답에 막 식사를 시작하려던 정현이 움직임을 멈추곤 눈을 껌뻑인다.

“걔가 너희 집에 왜?”

“앞으로 우리 집에서 지낼 거야.”

“그러니까 왜?”

“혼자 두기 싫어서.”

그냥 두면 어딘가로 가 버릴 것 같아서 그랬다고 한이 솔직하게 말하자 정현이 대놓고 한을 비웃는다.

“그 변덕이 얼마나 갈 건데? 열흘? 아니지, 열흘은 지났으니 한 달? 두 달?”

얼굴을 보자마자 가차 없이 시작된 공격에 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히 대꾸했다.

“유정현, 네 독침은 나중에 얼마든지 맞아 줄 테니 우선 내 얘기부터 들어.”

“이번엔 진짜라느니 운명이라느니 인연이라느니 하는 말 하지 마. 내가 널 모르면 몰라도 오래 봐 온 이상 너 안 믿어.”

포크를 들어 한을 가리킨 정현이 내뱉은 단호한 선언에 한이 살짝 인상을 찌푸린다.

“내가 그렇게 신용이 없냐?”

“말이라고 하냐? 너를 믿느니 지구 평면설을 믿겠다.”

“그건 지능 문제고.”

“그러니까 널 믿는 게 지능이 없는 거라고.”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것 같은 완고한 정현의 태도에 한은 정현을 설득하길 포기하고 재빨리 손을 들어 보였다.

“알았어. 그건 일단 그렇다고 치고……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너 과민한 거 알지?”

그 말에 막 다시 파스타를 뜨려던 정현이 손을 멈춘 채 인상을 쓰며 한을 노려본다.

“진심으로 내가 과민하다고 생각하는 거면 넌 진짜 개새끼야.”

“그래, 나 개새끼야. 그러니까 그 개새끼가 이해하게 설명해 봐. 뭐가 문젠데?”

“그걸 몰라서 물어? 항상 문제는 너야.”

“내가 왜?”

여전히 모르겠다는 한의 반문에 정현이 입맛 떨어졌다는 듯 포크를 내려 둔다. 그러곤 테이블에 몸을 기댄 채 짜증스러운 얼굴로 줄줄이 말을 이어 간다.

“너, 고등학교 때 네가 신우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하기나 해? 게다가 얼마 전까지 이름도 기억 안 난다더니 갑자기 사귄다고? 난, 네가 애 다섯 딸린 유부녀나 유부남을 사귄다고 해도 뭐라고 안 해. 그건 네 일이지, 내 일 아니니까. 그런데 왜 하필 신우야? 그렇게 상처 주고 이제 와서 또 왜 건드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줄줄이 내뱉는 정현을 향해 한이 인상을 썼다.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는 바이지만, 저렇게까지 신우를 싸고도는 정현 역시 이상하다. 솔직히 과하다.

“내가 잘못한 건 인정해. 하지만, 너도 과해. 그러니까 그 이유를 말해 달라고. 대체 왜 신우는 안 되는데?”

“말 못 해, 그건.”

“왜?”

“그건 신우 사생활이야.”

“내 사생활도 전부 신우한테 떠벌렸잖아.”

그동안 내 사생활 신우한테 다 까발린 거 너 아니냐고 한이 은근히 돌려 책망하자 정현이 코웃음을 친다.

“네 사생활이 어디 사생활이냐? 거의 가십 수준이지?”

“유정현, 나 진짜 진지해. 신우한테 진지하다고. 그 애가 내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고, 평생 같이 있고 싶어. 그러니까, 말해. 뭐라도 알아야 조심을 하지.”

그것 때문에 한달음에 여기까지 날아온 거라고 한은 뭐든 이야기를 해 달라 재촉했지만 정현은 완강했다.

“난, 너 못 믿어.”

“……너 나 몇 년 알았냐?”

“…….”

“23년이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날 알잖아. 내가 시답잖게 운명이니 인연이니 함부로 내뱉는 사람이야?”

확실히 그건 아니라고, 정현도 인정했다. 한은 본인이 변덕스럽다는 걸 잘 알기에 오히려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적당히 웃음으로 넘겼으면 넘겼지 진심이 아닌 빈말은 내뱉지 않았다.

그래서 더 재수 없었다.

“……그건, 아니지.”

“난 장난은 내 입으로 장난이라고 말하는 사람이야. 놀이는 놀이고, 게임은 게임이야. 즐길 거라면 대놓고 상대한테도 난 즐기는 거라고 말해. 그런 내가 네 앞에서 속 터놓고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그런데도 안 믿을래?”

드물게도 진지한 한의 눈빛에 정현도 조금 화를 누그러뜨린 듯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신에 찬 눈빛은 여전했다.

“그래도 여전히 신우 문제에 한해서는 신뢰가 안 가. 걔 이름도 기억 안 난다던 놈이 만나자마자 밥 사 주고, 아는 체하고 수작 걸고. 그럼 당연히 의심하게 되잖아. 이 자식이 또 사람 갖고 노는구나, 하고.”

“왜 갖고 노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너 그때도 신우 엄청 좋아했어. 의식하고 한 게 아닐지 몰라도 내가 보기엔 유사 연애였다고. 네가 사람한테 그렇게까지 하는 건 처음이라, 나도 신우가 네 인연이구나 하고 친하게 지냈고. 그런데, 결국 넌 신우 버렸잖아. 걔도 성격이 그래서 티는 안 냈지만 그때 얼마나 힘들어했는데? 그걸 내가 다 봤는데, 이제 와서 다시 작업 거는 놈을 어떻게 믿어?”

자신이 신우를 다시 기억해 낸 순간에야 비로소 인정한 감정을 그 당시 포착한 정현에게 한은 솔직히 감탄했다.

자신은 자각도 못 하고 있을 때 정현은 이미 눈치챘던 거다. 태평양을 지나 우주로까지 뻗어 가는 그의 오지랖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토록 예리하게 사람들을 지켜보는 줄은 몰랐다.

“그때는…… 맞아. 그때 나 진짜 나쁜 놈이었어. 그런데 그게 전부는 아니잖아. 넌 신우의 뭐가 그렇게 불쌍하고 신경 쓰이는 건데?”

“…….”

“유정현, 난 꼭 알아야 돼. 그 정도로 절박해.”

정중한 애원에도 불신이 가시지 않는 정현의 눈빛에 한은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할아버지께도 이미 말씀드렸고 어제 인사도 드렸어. 나, 한번 정한 건 안 바꿔. 그건 너도 알잖아.”

“……네가 뭘 정한 걸 못 봐서 모르겠는데?”

“그 애는 내 사람이야. 그 사실은 바뀌지 않아.”

어느 때보다 단호한 한의 태도에 정현은 잠시 관찰하듯 한을 뜯어봤다. 변덕스럽기는 하지만, 대신 하나에 꽂히면 일변도로 달려간다는 것 역시 잘 알았다. 그게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할아버지께 인사까지 드린 거면 평생을 갈 각오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니라면 할아버지께서 처리하실 테니.

“여전히 너는 못 믿지만…… 너희 할아버지는 믿어 볼게.”

거기까지 말한 뒤 드디어 다시 포크를 든 정현은 식사를 시작하며 천천히 한이 궁금해하던 이야기를 꺼냈다.

“너, 신우 가족 얘기 모르지?”

“자세한 건 몰라. 부모님이 이혼하셨다는 거랑 동생이 있다는 거, 그리고 지금은 혼자 산다는 거. 그 정도만 알아.”

“빚 있는 건 알아?”

“알아.”

“그 빚이 왜 생긴 건 줄은 알아?”

“말 안 해. 내가 도와주고 싶다고 해도 선을 그어. 그러니까 너한테 묻는 거잖아.”

확실히 신우라면 그럴 거라고 정현은 수긍했다. 신우라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느니 목매 죽을 거다.

“사실은, 나도 신우한테 직접 들은 건 아냐. 그냥 여기저기서 주워 들은 정보랑 눈치로 알아챈 거야. 그러니까 조금 틀린 부분이 있을지도 몰라.”

“아는 만큼만 얘기해.”

실마리만 있어도 된다고 한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차피 돈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는 세상이라 신우의 과거 정도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었다. 다만 포인트를 잘못 잡았다가 괜히 신우의 사생활만 캐내게 될 것 같아 거기까지는 안 가려고 한 것뿐이다.

그런 한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접시 위의 파스타를 휘저으며 생각을 정리하던 정현이 느긋하게 대화의 물꼬를 튼다.

“신우네 어릴 때 평택에 살았나 봐. 그 평택에서 알고 지냈다던 옆집 형한테 얼핏 들은 건데 신우한테 세 살 터울인 동생이 있었대.”

“그건 알아.”

“그런데, 그 애가 심장이 안 좋았대. 그렇다 보니 부모님이 신우는 거의 손에서 놔 버렸다나 봐. 그런 거 있잖아. 집안에 아픈 애 하나 있으면 건강한 아이는 방치되는 거.”

“……뭔지 알겠어.”

한 아이가 너무 뛰어나거나, 혹은 부족할 경우 부모의 편애가 한쪽에 집중된다. 그리고 그런 경우 남겨진 쪽은 자연스럽게 방치당한다.

그 비슷한 경우를 꽤 많이 보았기에 한이 대강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정현이 다음 말을 이었다.

“하여간 어릴 때부터 신우는 거의 혼자 컸고 부모님은 동생한테만 붙어 있었나 봐. 게다가 어머니도 몸이 안 좋으셔서, 신우까지 학교 다녀오면 학원이고 뭐고 없이 동생한테 내내 붙어 있어야 했고. 그러다, 신우가 13살 때 사달이 난 거야.”

‘사달’이라는 말에 한은 안 좋은 예감을 받았다. 어쩐지 굉장히 싫은 유형의 스토리가 전개될 것 같다는 생각에 한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자 정현이 도저히 식사할 생각이 안 드는지 포크를 손에서 놓고 길게 한숨을 내쉰다.

“그날, 아버지는 출근하시고 어머니는 병원에 가셨는데 친구들 재촉에 신우가 어머니 다 오셨다는 전화 받고 급히 나갔나 봐. 그런데 동생이 신우를 따라 나가다 사고가 난 거야. 실상 큰 사고는 아니었는데 심장이 안 좋아서, 병원으로 실려 간 뒤 얼마 후에 죽었다고 들었어.”

상상 이상의 이야기에 한은 잠시 말을 멈춘 정현을 가만히 바라봤다. 최대한 담담하게 표정을 관리하려 해도 잘되지 않았다.

표정이 자꾸 일그러지려 했다.

“진짜 문제는 그 뒤야. 사고 난 걸 모르고 있던 신우가 뒤늦게 귀가했길래 그 형네 어머니랑 그 형이랑 신우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었나 봐. 동생을 영안실로 옮기기 직전에 신우가 도착했나 본데, 그 옆집 형 말로 그러더라. 신우가 병실로 들어선 순간 진짜 그 가족들이 애를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다고. 놀란 애를 붙잡고 네가 동생 죽였다고, 네가 죽지, 왜 불쌍한 애를 죽이냐고 애를 잡았나 봐. 해도 해도 너무해서 그 형하고 그 형 어머니가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화내고 애를 데리고 나갔대. 그런데 어이없는 게 뭔지 알아?”

정현이 담담히 풀어내는 이야기에 한은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말을 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날이 신우 생일이었대. 생일이라 친구들이 생일 축하해 준다고 나오라고 한 건데 왜 네가 안 죽은 거냐고 애를 잡은 거야.”

거기까지 들은 한은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태연하게, 될 수 있는 한 침착하게 이야기를 들으려 감정을 컨트롤하고 있었지만 그건 불가능한 듯했다.

이건, 전혀 모르는 타인의 이야기라도 듣기 괴로운 수준이었다.

“그 일만으로도 힘들었을 텐데…… 부모님 이혼까지 겹쳐서 더 힘들어졌나 봐. 애가 아프면 부부 사이가 소홀해지기 마련인데, 거기다 그 아버지 쪽 사람들이 또 보통이 아니었나 봐. 그나마 동생 때문에 참고 산 신우네 엄마가 동생 죽고 나서 신우 데리고 나간다 하니까, 아버지 쪽에서 난리를 쳤대. 그래서 결국 신우 두고 가고 그 뒤로 연락 끊겼다고 했나.”

거기까지 이야기하다 ‘아, 소주 생각난다.’라고 중얼거린 정현은 빈 잔에 물을 따라 마신 뒤 다시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그 뒤로 신우랑 아버지랑 둘이 서울로 이사 온 건가 봐. 그런데 서울로 온 뒤 아버지가 여기저기 여자들이랑 살림 차리고 사느라 신우만 집에 혼자 두고 거의 얼굴도 안 보고 살았대. 가끔 동생 기일 되면 집에 돌아와 뒤집어엎고 나가고. 그러다 신우 대학 가고 군대까지 다녀온 뒤에 간경화 판정받으셨어. 그전까지 경제 사정은 제법 괜찮았다고 들었는데, 그사이 재산을 다 처분했다나. 결국 신우가 자기 명의로 대출받아서 아버지 수술비 보태고 겨우 퇴원시키면 또 술 마시다 입원하시고. 그거 반복하다 결국 간암으로 가셨지. 나도 모르고 있다가 아버지 돌아가신 뒤에 빈소 가서 알았어. 빈소 차린 것도 걔네 회사 사람들한테 우연히 전해 들은 거야. 가 보니까 혼자 빈소 지키고 앉아 있는데…… 끝까지 안 울더라.”

“…….”

“그림처럼 가만히 앉아서 아버지 사진만 보는데 뭐라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나왔어. 그런데 나중에 신우가 웃으면서 나한테 묻더라. ‘나 질리지? 독하고 모질어서 질리지?’ 하고.”

정현이 전하는 말과 함께 바로 어제 신우가 했던 말이 귓가에 생생히 되살아났다.

나는 잘 질리니까, 라는…….

그 말 자체가 신우에게는 생살을 베어 내는 듯 고통스러운 말이라는 것 역시, 알 것 같았다.

“걔 연애 두어 번 했을걸. 그런데 다들 오래 못 갔어. 연애하다 끝난 눈치라 왜 끝났냐고 물으면 ‘내가 못돼서. 질리는 애니까.’라고 하더라. 두 번 다 똑같이.”

“…….”

“그때 알았어. 아, 얘가 트라우마가 있구나, 하고. 신우, 사람하고 헤어질 때 절대로 끝까지 배웅 안 해. 늘 자기가 먼저 돌아서. 걔는 사람 등을 못 봐. 그리고 헤어지면 늘 자기 탓을 하는 거야. 내가 못된 애라서, 내가 잘못했으니까, 내가 질리니까.”

너무나 신우가 했을 법한 그 말에 한은 긴 한숨과 함께 안타까운 듯 중얼거렸다.

“그건, 몰랐어.”

“그러니까 너한테 말조심하라고 한 거야. 넌 툭하면 ‘질린다.’ ‘지겹다.’ ‘싫증 났어.’ ‘재미없어.’가 줄줄이 나오니까. 걔한테 그건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야.”

아무 의미 없이 툭 내던지는 그 말들이 그 아이에겐 비수가 될 수도 있다고, 정현이 정확히 짚어 주자 한은 참담한 듯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진짜, 몰랐어.”

“그걸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

거기까지 말한 뒤 입 안이 쓴 듯 다시 물을 마신 정현이 의자에 기대앉으며 한숨처럼 내뱉는다.

“가족사도 가족산데 돈 문제가 더 잔인하더라. 아버지 병원비 때문에 받은 대출 갚느라 회사까지 때려치우고 밤에는 술집에서, 낮에는 프리로 일하는데 보기 좀 그래.”

“……빚이 얼마나 되는데?”

“나도 거기까지는 몰라. 꽤 된다는 것밖에는. 그래도 다 자기 잘못이니까 자기가 전부 지고 간다는데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기분이 그래.”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때문에 생긴 불행이라고 세뇌된 듯하다고 정현이 못을 박자 한은 그 순간 어이없다는 듯 내뱉었다.

“왜 가족이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정상적인 가족이 아니니까. 걔 고모랑 할머니 전에 한 번씩 본 적 있는데 보통 사람들은 아냐. 내가 말에 칼침 박는 건 댈 것도 못 돼. 그날 장례식장 갔다가 대화하는 거 들었는데 신우보고 팔자가 사나워서 자기 동생에 아비까지 잡아먹는 놈이라느니, 너 때문에 자기도 일찍 죽을까 겁난다 어쩐다, 하는데 내가 다 머리에 피가 끓더라. 근데 걔는 그걸 가만히 듣고만 있어. 화도 안 내고, 울지도 않고…… 그게 또 처연하고 불쌍한 거야.”

조용히 그 자리에 앉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독설들을 당연하다는 듯 듣고 있는 신우의 모습을 상상한 순간 기억 속의 한 장면이 한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당장이라도 저 아래로 떨어져 내릴 듯 아슬아슬해 보이던 소년.

멀리서도 그가 너무 절박해 보여서 연습까지 빠지고 옥상으로 올라갔던 때가 떠올랐다. 감독님의 개인 사무실에서 몰래 커피까지 타 들고 빠져나갈 정도로 그 순간의 신우는 너무 춥고 위태로워 보였다.

그때는 저 애를 살려야 하는데, 하는 생각뿐이었던 것 같다. 진짜 그 애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 순간에 했던 것 같다.

그래, 그랬었다.

“네 전우주적인 오지랖이 오늘처럼 감사한 적은 처음이야.”

대충 상황 파악을 마친 한이 분위기를 바꾸려 가볍게 말을 던지자 정현 역시 재빨리 그에 장단을 맞춰 줬다.

“죽고 싶냐?”

“하여간 고마워. 뭐가 문제인지 이제 알겠어.”

신우의 지나치게 소극적인 태도나 타인에게 선명히 그어 놓는 선, 그리고 불쾌할 정도로 견고한 벽이 어디서 기인한 건지 이제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자신처럼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치는 인간도 문제지만 신우처럼 지나치게 자존감이 낮은 경우도 분명 문제는 문제였다.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그거였다.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못된 아이니까, 내가 나쁘니까, 라고 몰아가는 자학. 그게 신우의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였다. 그리고 그를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건 이기적인 어른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섬세하고 연약한 녀석을 그들의 세 치 혀로 세뇌해 놓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그 상처를 고쳐 줄 수 있을까, 한이 고민하는 사이 정현이 조금 가라앉은 얼굴로 묻는다.

“신우는 어쩌고 있는데?”

“자는 거 보고 나왔어.”

“나도 이런 말 하는 건 좀 그런데…… 일단 걔 살리고 싶으면 빚부터 어떻게 좀 해 줘. 하여간 너희 집 현금은 끝내주게 많잖아.”

신우 빚이 아무리 많아도 그 집에선 생일에 주는 용돈 정도밖에는 안 될 테니 일단 애부터 살려 놓으라고 정현이 부탁하자 한이 그 선은 자신이 직접 건들 생각이 없다고 말을 잘랐다.

“그건 걱정 마. 우리 할아버지가 알아서 하실 거야.”

자신이 손을 대 봤자 새로 빚을 진 양 안절부절못할 테니, 그건 조부께 맡길 생각이었다.

할아버지라면 빚이 얼마인지 금세 알아내 그에 맞춰 월급을 올려 주시든, 용돈을 주시든 어떻게든 알아서 하실 거다.

“할아버지가 신우 마음에 들어 하셔?”

“응. 곤란할 정도로 마음에 들어 하셔.”

“역시 그럴 것 같더라. 내가 신우 보는 순간, ‘어라?’ 했던 게, 걔 너희 할머니랑 은근히 닮았어.”

“……응?”

“외모가 아니라, 분위기가 많이 닮았어. 곱고 여리고 가늘고, 그런데 고고하고 자존심 강한, 딱 난초 같은 이미지잖아.”

단 한 번도 떠올려 본 적이 없는 생각에 한은 좀 놀란 얼굴을 했다.

“그래?”

“그래. 네가 유독 머리 자주 만질 때 알아봤어. 너 방 안에 할머니 머리 빗겨 주시는 할아버지 사진 걸어 두고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했었잖아.”

“내가?”

“그래. 하도 어릴 때라 기억도 못 하나 본데? 너 검도 할 때 그랬어.”

“아…….”

“그래서 이 자식이 내 친구 천생연분인가 보다, 하고 사근사근 대하는데 네가 갑자기 쌩하고 돌아서니 어리둥절했지. 그러다 정한이 그럼 그렇지 하고 포기하고 말았는데 이제 와 또 작업한다니 내 눈에 네가 곱게 보이겠냐?”

그제야 잠시 잊고 있던 원한이 생각난 듯 눈을 부릅뜨는 정현에게 한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반성하고 있어, 그건. 그런데 내가 신우한테 쌩해진 결정적인 원인은 너였어.”

“내가 왜?”

“둘이 너무 친하게 지냈잖아. 둘이 매일 붙어 다니니 당연히 난 화나지.”

“네가 애냐? 그딴 걸로 화를 내게? 그럼 네가 좀 잘하든가!”

“난 잘했어.”

“지랄하시네. 너, 내가 왜 신우가 난초 같다고 한 건지 아직도 모르는구나?”

“……할머니 닮아서?”

그런 의미 아니었냐는 한의 반문에 정현이 살벌하게 대꾸한다.

“그냥 콘크리트에 코 박고 뒈져.”

더는 힌트도 주지 않겠다는 듯 결연한 정현의 말투에 한이 눈을 껌뻑이다 다시 몸을 앞으로 숙인다.

“내가 콘크리트에 코 박고 뒈지기 전에 걔가 먼저 죽게 생겼으니 뭔가 길을 내 줘야 할 거 아냐? 그게 무슨 소린데?”

“그냥 뒈지라니까.”

슬슬 다시 기가 산 듯 가차 없는 말을 내뱉는 정현을 보며 한은 순식간에 표정을 바꿔 영업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유정현 씨, 그것만 알려 주시면 자체 제작을 제외한 아시에서 하는 프로젝트의 모든 벽지는 너희 회사에서만 들여오겠습니다. 그것도 전부 네 담당으로.”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에 정현이 의심스러운 듯 한을 바라본다. 그러자 한이 그 제안을 거절할 거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응?”

절대 인맥으로 거래 업체를 정하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그 신념을 깨겠다는 한의 간절한 태도에 정현이 기가 찬다는 얼굴로 웃는다.

“너도 참 징그럽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원래 징그러워.”

그러니까 빨리 말하라는 듯 한이 눈빛으로 재촉하자 정현이 ‘썩을 놈’이라면서도 결국 풀어 설명을 해 준다.

“걔는 난초 다루듯 돌봐 줘야 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물을 주고 늘 빛을 가려 주면서 정성스레 잎을 닦고 말을 걸고 사랑을 줘야 한다고. 애정이 과하면 그게 무서워서 속이 썩어 들어가고, 모자라면 팍팍하게 말라 죽어. 아주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키워야 돼.”

기가 막힌 정현의 비유에 한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 알겠어.”

“그래, 제발 알아들었길 바란다.”

“진짜 알아들었어.”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그리고 오늘 한 얘기 내가 말했다고는 하지 마. 신우도 내가 아는 줄 모르니까. 나도 이 얘기 다 신우네 그 옆집 형한테 들은 거야. 나라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해 주는 거라고 빈소에서 얘기해 주더라.”

모든 정보의 근원인 ‘옆집 형’이라는 남자의 존재에 한은 재빨리 정현에게 그 ‘형’에 대해 물었다.

“그 형이 혹시 룸살롱 한다는 사람이야?”

“응.”

“연락처 알아?”

“그건 나도 몰라. 아, 그 룸살롱 이름은 알아. 논현동에 있는 가겐데…… 번디? 번데기? 뭐 그런 데야.”

“그 사람 이름은?”

“성은 모르고 병진이라는 이름만 알아. 신우가 ‘병진 형’이라고 부르는 거 자주 들었거든. 바지사장일 거야, 아마.”

정현에게서 얻어 낼 수 있는 정보를 모두 얻어 낸 한은 이젠 볼일 없다는 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았어. 고마워, 오늘.”

제 볼일 끝났다고 점심시간을 겨우 낸 친우를 망설임 없이 팽개치는 한을 보며 정현은 ‘그래, 네가 그럼 그렇지.’란 얼굴로 짐을 챙겨 따라 일어섰다.

“고마우면 이번엔 좀 잘해. 너, 나한테 이런 얘기까지 하게 해 놓고 신우랑 헤어지면 그땐 싸대기를 왕복으로 날리는 정도가 아니라 얼굴을 갈아 버릴 거야.”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야.”

“퍽이나.”

“진심이야. 앞으로 꽃길만 걷게 해 줄 거야.”

카운터로 가 계산을 마친 한이 진지하게 던진 말에 정현이 여전히 못마땅한 눈빛으로 한을 훑어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지구 평면설을 믿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도 한번 뇌 빼고 믿는 척해 볼게.”

“뇌까지 안 빼도 돼.”

“그건 네 생각이고.”

내 생각은 달라, 라고 말을 끝맺은 정현은 막 가게를 나서 엘리베이터 앞에 서며 일상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난 1층으로 가서 회사 들어갈 거야. 넌?”

“난 주차장. 곧장 집에 갈 거야.”

“팔자 좋네. 이 시간에 퇴근이라니.”

“능력이 있으니까.”

“……재수 없어.”

여지없이 시작된 한의 자기 자랑에 언제나와 같이 정현이 욕설을 내뱉는 순간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서서히 열리는 문을 본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면서도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러곤 계속해서 장난 같은 말싸움을 하던 중 1층에 도착해 정현이 먼저 내려섰다.

“간다.”

지긋지긋하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는 정현이 곧장 걸음을 옮기자 한이 정현을 부른다.

“유정현.”

“왜?”

“오늘, 진짜 고마웠어. 신우랑 같이 한번 보자.”

마지막으로 나온 한답지 않은 인사에 정현은 별로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손만 내저으며 로비를 가로질렀다.

예상했던 정현의 반응에 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곧 자신의 차로 향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혔다.

그동안 무심히 내뱉은 자신의 말과 행동들이 신우에게는 어떤 의미였을지, 그리고 신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제야 눈에 보였다.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대해야 한다. 정현의 말대로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물과 양분을 주고 잎을 닦고 강한 빛을 가려 주고 그가 포근하다는 온도에 맞춰 주고.

정성과 마음을 다해 그를 쓰다듬고 사랑해 줘야 한다. 의심하지 말고 불안하게 하지 말고, 절대 무섭게 만들지 말고.

그렇지 않으면 말라 죽을지도 모르니까.

그런 생각을 하자 다시 마음이 급해졌다. 이미 시간은 오후 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초조함에 서둘러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이상하게 신우를 빨리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 그 녀석을 보고 싶었다.

오후로 넘어가자 살인적인 햇볕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제 완연한 여름이었다.

길이 막히지 않아 예상보다 이른 시각에 집으로 돌아온 한은 뜨거운 햇살 아래를 빠르게 가로질러 별채로 향했다.

이상하게 신우가 너무 보고 싶었다. 이렇게 초조해할 필요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이 멋대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른 더위에 땀까지 흘리며 단숨에 별채까지 달려온 한은 별채의 마당에서 문득 걸음을 멈췄다.

나른한 오후의 햇살 아래 신우가 있었다. 무릎을 끌어안은 채 활짝 열린 문에 기대앉은 그는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더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장면이었지만 이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도 이상하게 신우는 추워 보였다.

처음 만났던 그 순간처럼.

잠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한은 조용히 신우의 옆으로 가 마루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말없이 잠든 신우의 얼굴을 꼼꼼히 관찰했다.

살짝 눈가를 가린 검은 머리카락과 눈 아래 음영이 질 정도로 긴 속눈썹, 그리고 조금 파리한 입술.

13년 전과 비교해도 그다지 달라진 게 없는 얼굴이었다.

“심술부리지 말 걸 그랬어.”

이미 지난 과거의 일을 후회해 봤자 소용없지만, 계속 미련이 남았다. 미리 알았더라면, 아니 몰랐더라도 그렇게 돌아서지 말걸.

그럼 그렇게나 버림받길 무서워하는 녀석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을 텐데…….

“미안.”

잠든 신우의 옆에서 한은 아주 작게, 마치 중얼거리듯 속삭이며 신우의 머리 위로 내려오는 햇살을 손으로 가려 주었다.

햇살에 녹아 사라질까, 여린 피부가 빛에 다칠까 손으로 그늘을 만들며 신우의 잠든 얼굴을 바라봤다.

어서 이 창백한 얼굴 위로 따뜻한 온기가 감돌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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