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우야? 연신우?”
마우스를 손에 쥔 채 멍하니 화면을 들여다보던 신우는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겨우 정신을 차리곤 뒤를 돌아봤다.
“어, 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옆으로 다가선 한이 걱정스러운 듯 묻자 신우가 난감해하며 시선을 떨군다. 존 건 아니고, 분명 딴생각을 한 것 같은데 그걸 말하기 싫어하는 듯한 신우의 기색에 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무슨 걱정 있어?”
“아니. 그런 거 없어.”
“그런데 왜 그래? 요 며칠 계속 휴대폰만 들여다보거나 다른 데 정신 팔려 있고.”
신우의 책상 위에 커피 잔을 놓으며 한이 걱정스러운 듯 묻자 잠시 침묵하던 신우가 커피 잔을 손에 쥐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생활 리듬이 바뀌어서 좀 피곤한가 봐. 매일 마음대로 자고 깨다 규칙적으로 먹고 자고 하니까, 좀 멍해. 서른 넘으니 낮하고 밤이 바뀌는 거 꽤 힘드네.”
신우가 그럴듯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슬쩍 시선을 피하자 한이 미심쩍은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보며 되묻는다.
“……그래?”
“응.”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
한의 음성이 예리해졌다. 자신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한 한의 시선과 그 물음에 신우는 커피를 마시는 척 고개를 숙여 눈을 피했다.
“아냐, 아무 일도 없어. 너, 외근 나간다며? 시간 괜찮아?”
“약속 시간까지는 여유 있어. 그러니까 커피까지 타 왔지.”
“힘들겠네.”
작게 대꾸한 신우는 대화의 아귀가 안 맞는다는 사실도 의식하지 못한 채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아니라고 하지만 근심이 묻어나는 그 모습에 한이 대화의 방향을 돌렸다.
“오늘이 마지막이지?”
“응?”
“출근.”
“아…… 그러네.”
그제야 알아차린 듯 신우는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을 확인했다.
벌써 열흘이 지나 있었다. 마치 하루인 듯 흘러간 시간에 그다지 의식하지 못했지만 벌써 열흘이었다.
“벌써 열흘이네.”
“그래, 벌써야. 그러니까 내일부터는 어떻게 할까?”
“뭘?”
“얼굴 보는 거 말야. 점심시간에 내가 갈까? 출근하기 전하고 점심시간하고 퇴근할 때 들르면 되나? 아, 그런데 그것도 너무 아깝다. 점심 약속 있거나 할 때는 패스해야 되잖아.”
진심으로 아쉽다는 얼굴로 한이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낼 수 있을까 고민하는 모습에 신우는 아차 싶었다. 하루 정도 쉰 뒤에는 곧장 다시 명진의 가게에 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렇게 되면 밤 8시에 출근을 해, 새벽 2시 이후에 퇴근을 하게 된다. 어차피 집에 오자마자 자는 게 아니라 일을 이어서 하다 오전 11시경에야 잠을 자니 아침에 만나는 건 상관없지만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에 만나는 건 무리였다.
지난 열흘 동안 너무 정신이 없어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다. 일도 일이지만 한에게 끌려 맛집 순회를 하고, 또 다른 일로 머리가 복잡해 미처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아, 점심시간은 괜찮은데…… 퇴근 후에는 좀 그래.”
“왜?”
“밤에 일하거든.”
그 말에 한이 고개를 끄덕인다.
“일에 방해 안 되게 할게.”
프리랜서들의 작업 시간이 유동적이라는 건 한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니 얼마든지 신우의 시간에 맞추겠다고 말하자 신우가 어렵사리 입을 연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럼?”
한의 재촉에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신우는 이내 마음을 정한 듯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이 일 말고 밤에 따로 하는 일이 있어. 여기에 출근하는 동안은 쉬었는데 모레부터는 다시 나가야 돼.”
“무슨 일이길래 밤에 나가?”
“……술집.”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던 답에 한이 살짝 인상을 쓴다.
“술집?”
“응.”
“이자카야나 실내 포장마차 같은 데야?”
“아니…….”
“그럼? 클럽? 바?”
어쩐지 신우와 술집은 전혀 안 어울린다는 생각에 한이 구체적으로 묻자 신우가 조금 망설이다 대꾸한다.
“클럽이나 바는 아니고…… 룸살롱이야.”
최근엔 거의 쓰지 않는 그 단어에 한이 놀란 듯 정색한다.
그 시선에 신우가 조금 기가 죽은 듯 어깨를 움츠렸다. 한번도 그곳에서 일하는 게 창피하다고 여긴 적은 없었는데 한이 저런 얼굴로 바라보니 돈 때문에 해선 안 될 일을 하는 건가 싶어졌다.
위축된 신우가 다시 한의 시선을 피하자 한이 길게 한숨을 내쉰다.
“뭐라고 하려는 게 아냐. 위험할 것 같아서 걱정하는 거지.”
“난 카운터 관리랑 청소만 해. 아는 형이 사장이라 위험한 일은 안 해. 오는 손님들도 점잖은 편이고. 문제 생기면 어차피 다른 사람들이 처리하니까.”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다고 신우가 변명처럼 덧붙이자 한이 신우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다시 묻는다.
“무례한 거 알지만 그냥 솔직하게 물을게. 왜 거기서 일해?”
“야간에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고 또 월급이 좋아. 돈을 좀 많이 벌어야 하거든.”
“고정적인 수입이 문제면, 그냥 우리 회사에 취직해. 정우 씨가 그렇지 않아도 너 보조 디자이너로 쓰고 싶다고 했어.”
그렇지 않아도 어제 오후쯤 정우가 그 비슷한 제의를 하긴 했다. 안정적인 일을 원한다면 좋은 제안이지만, 이쪽의 월급만으로는 지금 내는 이자와 생활비를 감당하기 힘들다.
6년 전 간염으로 시작된 부친의 병세는 곧장 간경화로 이어졌고, 그리고 다시 간경화에서 간암으로 진행되었다. 변변한 보험도 없이 2년간 수없이 입원과 퇴원, 그리고 항암 치료와 수술을 반복하다 보니 자연히 경제 사정이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초반에는 그나마 있던 재산을 처분해 버텼지만 1년이 지난 후로는 감당이 안 돼 결국 여기저기 빚을 져야 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쪽 직장은 페이가 너무 적어. 미래를 생각하면 취직이 낫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이 있어.”
도면 작업과 밤 아르바이트를 겸해 겨우 이자를 내고 남은 돈은 최대한 아껴 적금을 든 채였다. 그렇게 돈을 모아 조금씩이나마 빚을 줄여 가는 중이다.
당장 1, 2년 안에 해결될 빚은 아니지만 앞으로 5, 6년 정도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만약 이제 와 취직한다면 말 그대로 평생 월세와 이자만 내다 끝날 수도 있다.
그건 절대 사양하고 싶다고 떠올린 순간 한이 엉뚱한 말을 내뱉었다.
“우리 회사에서, 그 월급 맞춰 준다면?”
“그건 말이 안 되지.”
너랑 나랑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 그런 호의를 받을 수는 없다고 말하려다 신우는 간신히 입을 딱 다물었다.
그러자 한이 다시 묻는다.
“돈, 많이 필요해?”
“응.”
“왜?”
“……빚이 있어.”
“무슨 빚?”
직설적인 한의 질문에 신우는 한의 시선을 피해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아버지의 병원비 때문이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너무 구질구질하다. 다른 사람에겐 몰라도 한에게는 불쌍하다 동정받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에 신우는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한을 보며 농담처럼 말을 흘렸다.
“……도박 빚.”
도박, 이라는 단어에 한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는 걸 본 신우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은 아니고. 그냥 빚.”
“그러니까, 무슨 빚? 얼만데?”
얼마라고 하면 당장 갚아 주기라도 할 것 같은 한의 기세에 신우는 재빨리 방어막을 쳤다.
“그 부분은 내 프라이버시야. 거기까지는 서로 침범하지 말자. 내 빚은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내가 도와줄 수 있어.”
그럴 거다. 한이라면 어떻게든 도와줄 수 있다. 그럴 만한 재력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건 원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 정도 자존심은 지키고 싶다. 무엇보다 헤어진 뒤에 채무 관계로 얽히는 건 최악이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언제든 이별할 것을 각오하고 있다. 그렇다면 헤어질 준비 역시 깔끔하게 해 둬야 한다.
한이 좋아하는 대로 쿨하고 깔끔하게. 미련 없이, 질척거리지 말고. 울고 짜고 매달리며 촌스럽게 헤어지는 건 자신도 싫다. 어차피 그럴 기운도 없었다, 이젠.
“한아, 거긴 내 사적인 영역이라고 했잖아. 거기서 네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어.”
“너…….”
막 한이 뭐라고 하려던 찰나 빠른 걸음으로 이쪽으로 다가선 인재가 한을 불렀다.
“정한, 우리 지금 나가야 돼.”
한의 가방까지 챙겨 들고 온 인재가 어서 나오라는 듯 고갯짓을 하자 한이 그에게 손을 내젓는다.
“주차장에서 기다려. 금방 내려갈게.”
“성우 형 벌써 내려가서 기다리고 있어. 그 형 늦는 거 질색하는 거 몰라? 빨리 나와.”
이미 예정보다 시간이 지체됐다고 인재가 계속해서 한을 재촉하자 신우 역시 한에게 어서 가 보라는 듯 말을 건넸다.
“빨리 가 봐. 약속 시각 안 지키는 사람은 신용 없어.”
거북한 대화를 끝낼 수 있는 기회에 신우가 부드러운 말투로 달래자, 한도 더는 어쩔 수 없는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선다.
“……알았어. 나머지 얘기는 갔다 와서 하자.”
“그래. 가.”
“외근 좀 길어질 거야. 오후에는 들어올 테니까 같이 퇴근해.”
계속되는 재촉에 한은 사무실을 나가 인재가 들고 있던 가방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다소 경직된 그의 움직임을 보아하니 기분이 풀린 건 아닌 듯했다. 그리고 그건 신우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런 자신의 태도가 피곤하다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은 이미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고 있다. 그 이상으로 더 부담을 주거나 동정받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거 아닌 일일지 몰라도 그건 자신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다. 적어도 그 자존심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넝쿨처럼 엉켜 들며 점점 복잡해져 가는 감정에 신우는 고개를 내젓고는 다시 화면을 돌아봤다. 그 순간 옆에 놓인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누가 걸었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난감한 상황에 신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가 아직 하나 더 남아 있다. 한의 지적대로 요 며칠 자신이 간혹 정신을 놓고 있었던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갑작스러운 원혁의 연락이 그렇지 않아도 북적거리는 머릿속을 더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원혁이 처음 연락을 해 온 건 일주일 전쯤이었다.
‘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갑작스러운 그의 전화에 자신이 한 말은 딱 그것뿐이었다. 이미 8년 전에 헤어진 남자가 갑작스레 자신을 찾는 이유보다는 그게 더 궁금했다. 그러자 그가 조금 망설이다 답한다.
- 너, 전에 일하던 회사 사람한테 물어봤어. 아버지 돌아가셨다며?
인테리어와 건축과 가구 업계는 워낙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그 바닥은 의외로 좁다. 그러니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연락처 같은 건 알아낼 수 있다. 하다못해 구직 홈에 들어가 자신의 이름만 쳐도 줄줄이 이력서들이 걸려들 테니 사실 그가 자신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해도 놀랍진 않았다.
‘갑자기 4년 전에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때문에 전화한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이야?’
- ……차갑네? 오랜만인데.
섭섭함이 묻어나는 그의 말투에 순간 실소했다.
차가웠던 건 그였다. 질리고 질척거린다며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은 게 그였다. 그 당시 자신은 왜냐고 묻지도 못한 채 그의 통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자신을 책망하는 모습에 다시 과거의 상처가 떠올라 서둘러 말을 돌렸다.
‘용건 없으면 끊을게.’
- 잠깐만. 나도 많이 망설이다 연락한 거야. 5분만 통화하자.
‘……용건이 뭔데?’
길게 듣지는 않겠다는 듯 짤막하게 본론을 묻자 원혁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곤 곧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 너, 내 작업 도와준 적 있었지? 그 의자 기억해?
‘……그랬었나?’
- 그랬어. 학교에 낼 의자랑 테이블 작업 도와줬잖아. 의자 디자인은 네가 직접 했었고.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다. 그가 도와 달라고 해서 같이 작업을 했었다.
‘그런데?’
- 그 의자를 이번에 잠깐 내놨는데 그걸 사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서. 상품으로 판매를 하려면 디자인한 네 동의가 있어야 돼.
‘마음대로 해. 네 작업을 도와줬던 거지, 내 작업은 아니었으니까.’
- 너, 아버지 병원비 때문에 힘들다며?
‘……그래서?’
- 그쪽에서 꽤 많은 수량을 요구했어. 아직 작업은 안 들어갔는데 하여간 저작권자는 너니까. 너한테 허락받고 우리가 팔고 싶어. 디자이너로 계약하고 일정 금액을 인센티브로 받게 될 거야.
‘돈은 필요하지만 너랑 다시 얼굴 마주하는 건 별로 하고 싶지 않아.’
- 자주 볼 필요 없이 딱 한 번 만나서 사인만 하면 돼. 그럼 서로 다시 볼 일 없어. 이런 건 확실하게 해 두는 편이 좋으니까. 나, 남의 디자인 마음대로 팔아먹는 양심 없는 놈은 아니야.
분명히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곧고 바르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질린다며 돌아설 때의 충격 역시 컸다.
이렇게 좋은 사람에게 버려지다니 난 진짜 구제 불능이구나, 하는 생각에 밤잠을 못 이루며 며칠을 끙끙 앓을 정도로 아팠다.
함께한 시절의 기억은 꽤나 아름답지만 그 마지막이 처참했던 만큼 다시는 그를 회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그와 마주치는 것 역시 사양하고 싶었다.
이 좁은 한국 땅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것까진 그저 악연이려니 하면 되지만 알면서도 굳이 만날 생각은 없다.
‘그냥 알아서 해. 그리고 다시는 연락하지 마. 전화 안 받을 테니까.’
- 신우야…….
‘끊을게.’
그렇게, 뭔가 말을 하려는 그를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던 게 일주일 전 일이었다. 하지만 원혁은 그사이 줄기차게 연락해 오고 있었다. 더는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아 수신 거부를 하자 다른 전화번호로 연락을 해 올 정도였다.
이 번호도 또 수신 거부를 해야 하나 망설이던 사이, 벨 소리가 멈췄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이자 독촉 전화보다도 끈질긴 그의 연락에 신우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아마, 지금 안 받으면 계속해서 전화할 거다.
그건 원혁도, 자신도 못 할 짓이다. 한 사람은 일주일째 이리저리 휴대폰을 빌려 전화를 해 대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전화를 안 받으려 모르는 번호는 모조리 수신 거부 걸어 놓고.
원혁도 어지간히 끈질긴 성격이라는 걸 알기에 이쯤에서 백기를 들기로 했다. 일주일을 했다면 한 달도 할 수 있다. 벨이 울릴 때마다 가슴 철렁하는 건 빚 독촉 전화만으로도 충분하다.
“……네.”
- 너랑 통화하기 진짜 힘들다.
나도 네 전화 피하기 진짜 힘들었다고 하려다 신우는 괜히 쓸데없이 통화 시간만 늘어날까 봐 그 말을 목 안으로 욱여넣었다.
“그 의자 건만 해결하면 되는 거지?”
- 마음 정했어?
“네 연락 받느니 빨리 사인하고 마는 게 나을 것 같아서.”
- 그럼 언제 볼까? 점심시간에 괜찮아?
어지간히 급한 일인지 오늘 당장 만나자는 그의 제안에 신우는 우선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1시가 조금 넘었다. 퇴근은 한과 함께할 테니, 오후 늦게 보는 것보다는 점심시간에 보는 쪽이 낫다.
“어디에서?”
- 어디가 좋은데?
“강남 쪽이면 어디든 상관없어.”
굳이 회사를 알려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적당히 말을 돌리자 원혁이 지하철로 한 정거장 거리에 있는 곳을 지정했다. 어디인지는 잘 몰랐지만 어느 역 근처인지는 아니 알아서 찾아가겠다며 한 시 반으로 약속을 잡은 뒤 재빨리 통화를 마무리했다.
바로 그 직후 이게 과연 잘한 짓인가 하는 의문이 들긴 했지만 계속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는 재빨리 그와의 연결고리를 끊어 내는 쪽이 나을 것 같다고 결론지었다.
이 김에 이 불쾌한 기분을 한 방에 쓸어 낼 생각이었다.
다신 그와 어떤 접점도 남기지 않도록.
“정한, 왜 그래? 차 안 공기 더럽게.”
운전대를 잡은 인재의 옆, 조수석에 앉은 성우가 뒷좌석에 앉은 한을 돌아보곤 퉁명스레 말을 던지자 한이 창가에 기댄 채 상관 말라는 듯 대꾸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또 발작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왜? 너, 요즘 무슨 일 있냐? 왜 이렇게 감정 기복이 심해?”
“신경 쓰지 말라니까요. 그냥 내버려 두면 알아서 돌아옵니다.”
“그럼 신경이나 안 쓰이게 하든가? 뭐가 그렇게 못마땅해서 가는 내내 입술 쑥 내밀고 있는데? 네가 입 내밀고 있는 거 별로 안 귀여워.”
학교 선배이자 사회에서의 선배답게 성우가 이제 심술 좀 그만 부리라고 잔소리를 하자 옆에서 막 차선을 바꾼 인재가 성우에게 작게 속삭인다.
“형, 그냥 두세요. 연애 문제예요.”
“연애? 연신우 씨?”
대번에 나온 그 이름에 인재가 놀란 듯 성우를 바라보자 성우가 그럼 모를 줄 알았냐는 듯 인재와 한을 한심스럽게 돌아본다. 한은 별 관심 없다는 듯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지만 인재는 꽤 놀란 얼굴이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모르면 바보지. 그렇게 티를 내고 다니는데 어떻게 몰라?”
“그렇게 티 났어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겨우 열흘 만에 들킨 한의 행태에 인재가 한숨을 내쉬자 성우가 인재가 아닌 한을 돌아보며 확인하듯 물었다.
“너, 일부러 티 낸 거 아니었냐?”
전 인류에게 다 알리고 싶어서 우리 사귀어요, 라고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며 온갖 닭살 돋는 짓들 다 한 거 아니냐고 성우가 비웃자 한이 심드렁하니 답했다.
“나름 자제한 겁니다, 그게.”
“얼씨구? 네가 ‘자제’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기는 해?”
“‘스스로 제어한다.’”
자제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한이 정확히 내뱉자 성우가 기가 막힌 듯 웃는다.
“네가 그 말 하니까 웃기네? 너도 말해 놓고 보니 웃기지?”
‘자제’와 ‘인내’만큼 너와 안 어울리는 단어도 없다며 성우가 계속해서 이죽거리자 한이 그제야 시선을 돌려 성우를 바라본다. 그러고는 그답지 않게 서늘한 눈초리로 불쾌함을 드러냈다.
“진짜 웃기네요. 아주 더럽게 웃겨요.”
다른 때와 달리 날을 바싹 세운 한의 태도에 성우가 얼굴에서 웃음을 거뒀다. 그러고는 그 역시 기분이 상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너, 왜 그렇게 심각해? 욕구 불만이냐?”
“그럴 수도 있겠네요.”
순순히 인정하는 말과는 달리 한의 말투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평소에는 서글서글하니 어지간한 말에는 다 웃고 넘어가는 녀석이 예민한 반응을 보이자 성우가 조금 당황한 듯 슬쩍 꼬리를 내렸다.
“왜 이렇게 말에 칼을 박아? 너 무섭다, 좀.”
살벌한 차 안의 분위기에 성우가 먼저 기세를 누그러뜨리자 한 역시 조금 전의 무례했던 말을 즉시 사과한다.
“죄송해요, 형. 지금 제 기분이 좀 그래요.”
“방금까지는 기분 좋았잖아.”
오전 내내 화사한 미소를 뿌리며 갑작스레 폭등한 수입 자재 가격 문제로 항의를 하던 클라이언트의 혼까지 쏙 빼놓던 녀석이 왜 10분 만에 저렇게 저기압이 된 거냐고 성우가 의아해하자 한이 그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욕구 불만인가 보죠.”
“욕구 불만이면 풀어라. 그거 오래 가면 안 좋다.”
“……풀게 해 줘야 말이죠.”
라고 한이 작게 중얼거리자 기차게 그 소리를 들은 성우가 목이 꺾여라 뒤를 돌아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야? 너 아직도 신우 씨한테 손 안 댔어?”
흥분한 듯 성우가 목소리를 한껏 높이자 한이 짜증스러운 듯 인상을 쓴다.
“형, 저 형 진짜 좋아하고 존경하지만 가끔 그런 말들은 듣기 거북합니다. 손대고 말고가 어디 있어요? 사람이 물건이에요?”
평소 저질스러운 농담을 즐기는 성우의 단점을 한이 은근히 지적하자 성우 역시 재빨리 그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말실수했어. 정정. 아직 거기까지는 진도 안 나갔냐?”
거기까지는커녕 키스도 아직이라고 한은 작게 한탄했다.
“……손만 잡았어요.”
그 말에 성우가 신이 나 깔깔거리며 웃어 댄다.
“뭐야? 너희가 중학생이냐? 아니지, 요즘 중학생들도 키스는 하더라. 그런데 서른한 살짜리 두 놈이 손만 잡고 다닌다고? 그것도 정한이?”
너 이탈리아에서 머리통에 총 맞고 왔냐며 성우가 연신 낄낄거리며 웃자 한이 팔짱을 끼며 시트에 기대앉는다.
“거북한가 봐요, 그런 거.”
“아, 남자는 네가 처음?”
그건 아닌 것 같았지만 신우까지 굳이 진창으로 끌어들일 필요는 없을 듯해 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봐요…….”
“야, 그럼 안 될 수도 있어. 그거 안 되는 사람은 죽어도 안 된다더라.”
“안 되면 할 수 없죠. 저도 강요하는 건 싫어요.”
“조만간 갈아타려고?”
방금 지적을 받고도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그에게 한이 인상을 쓰자 성우가 이번에도 재빨리 번복했다.
“알았어, 이것도 실수. 그럼 헤어지려고?”
“아니에요. 그냥, 좀 더 여유를 갖고 가는 거죠. 그런데…….”
“그런데 뭐?”
여운이 남는 한의 말투에 성우가 신이 나 그 뒷말을 재촉했다. 과한 성우의 관심에 그때까지 조용히 듣고 있던 인재가 성우를 나무란다.
“그만하세요. 형은 뭐 그렇게 남의 연애에 관심이 많아요?”
“남의 연애보다 재미있는 게 어디 있다고? 세상에 거기에 관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뒤에 있잖아요.”
라며 인재가 진짜 본인의 일 외엔 전혀 관심 없는 한을 턱짓으로 가리키자 성우가 입을 딱 다문다. 분명히 한은 타인의 문제나 기분, 감정을 잘 살피는 편이었지만 그걸 타인에게 떠들어 대거나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 성격 덕에 뒤끝도 없고 참 믿을 만한 친구이긴 한데, 가끔은 그래서 사람이 냉정하다 느껴지기도 했다.
한에게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그 자신이었다. 그 말인즉슨 다른 사람들의 사정은 별 상관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타인은 그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하니 그들과 사사로운 감정을 나누고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듯했다.
어쩌면 한이야말로 극도의 에고를 지닌 나르시시스트인지도 모른다고, 인재는 그렇게 생각을 갈무리했다.
“한아, 빌라 부지에는 우리만 가도 되니까 넌 목공소에만 들렀다 들어가. 점심은 신우 씨랑 같이 먹어. 오늘까지 근무니까.”
한의 기분이 바닥을 긁자 인재는 넌지시 그의 기분을 풀어 주려 비위를 맞췄지만 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 우리 할아버지랑 거래하시는 분이니 내가 가서 인사드려야지.”
“오늘 거기 주인은 안 나온다고 했어.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하니 드론 띄워서 근방 촬영하고 정확히 측량만 해서 올 거야. 가끔 본인이 알고 있는 땅이 그 땅이 아닐 때가 있으니까.”
얼핏 저기부터 여기까지라고는 알고 있지만, 정확히 측량해 보면 내 땅 위에 옆 건물이 넘어와 있다든가, 내가 남의 땅 위로 나무를 심었다든가, 혹은 도로가 땅을 침범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시공 직전에 정확하게 측정을 해 둬야 한다.
주인이 없지만 일단 측량은 해야 할 테니 한에게 일 보고 먼저 돌아가라고 하자 한이 이번엔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럼 나 목공소에 두고 가. 택시 타고 들어가면 되니까. 점심은 먹고들 일해.”
“걱정 마. 너나 들어가서 기분 풀어. 아까 분위기 보니 심각하던데. 네가 잘못했을 테니 무조건 사과해.”
“……내가 잘못한 건 없어.”
“그럼 신우 씨가 잘못했겠냐?”
나름 열흘간 옆에서 지켜본 결과 신우는 절대 타인과 마찰을 일으킬 타입이 아니었다. 내향적인 성향이라는 건 처음부터 알았지만 같이 일을 해 보니 신우는 인간관계 자체를 스스로 거부하는 스타일이었다. 열흘이나 사무실에서 근무하면서도 다른 사원들과 일체의 교류가 없다는 게 그 방증이었다. 식시 시간 때야 한이 끌고 나가 어쩔 수 없었다지만 잠깐 휴식 시간에도 신우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런 성격에 대한 호불호는 둘째치고 그런 타입은 웬만해선 먼저 트러블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걸 피하기 위해 타인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거니까.
“그래, 다 내 잘못이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사실 지금 진짜 문제는 신우라고, 한은 이미 판단 내린 채였다.
물론, 자신의 잘못이 아예 없는 게 아니라는 건 안다. 지나치게 밀어붙였고 타이밍도 좋지 않았다. 그게 신우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과하게 밀어붙였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신우가 지나치게 자신과의 선을 긋는 건 사실이었다. 굳이 이 문제가 아니라도 여러 부분에서 보이지 않는 선이 느껴졌다.
출근할 때까지만 해도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을 친 건, 최근 신우가 정신을 놓고 있는 시간이 많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성우의 말대로 욕구 불만 상태라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결정적인 세 번째 이유가 바로 신우가 그어 놓은 그 선이었다.
프라이버시니, 영역 존중이니 하는 건, 자신도 참 좋아하는 말이다. 아니, 사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게 바로 ‘쿨’하게 ‘존중’할 줄 아는 개인 간의 ‘영역’이었다.
자신이 가장 질색하는 게 바로 영역 침범이었다. 지나치게 파고들고 참견하는 것도, 너를 위해서라며 충고를 빙자한 잔소리를 하는 것도 싫다. 더더구나 애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이 원치 않는 부분들을 건드는 사람은 혐오한다.
사실 지금까지 끝이 좋지 않았던 연애의 대부분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사적인 부분에 과한 호기심을 드러낸다거나,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여기저기 퍼트리고 다닌다거나, 가끔은 자신의 공간에 무단으로 난입한다거나, 혹은 자신의 사생활 안에 본인의 지분을 요구한다거나…….
애인이니 그 정도는 당연히 요구할 수 있지 않냐고 할 수도 있지만, 불행히도 자신에게는 그게 용납되질 않았다.
자신이 원하던 이상적인 연인은 본인의 영역을 굳건히 지키며 과한 간섭은 하지 않고, 약간은 자신에게 무심하게 대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상대가 생기면 일단 온 정신을 집중해 상대를 대하며 관계를 만든다. 그 과정에서 시험을 한다.
아주 가볍게 한마디를 흘리고 그 말이 퍼지는가 지켜보는 거다. 그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어떻게 보면 상대에겐 가장 힘든 난관이었고 지금까지 그 시험에 통과한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시험을 통과했다는 사실이 그리 마음에 들진 않았다. 사실은, 실패해 주길 바랐던 건지도 모른다. 아니, 실패했으면 했다. 그만큼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해 주길 바랐으니까.
오래된,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 순간 한은 탄식했다. 그 시절을 떠올리자 자신의 취향이 언제 결정된 건지, 왜 그렇게 구체적인 이상을 상대들에게 강요했던 건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원하던 사람은 언제나 한 명뿐이었다. 그를 잡기 힘드니까 그와 닮은 누군가를 찾고 있었던 거다.
이제야 자신이 왜 자신의 이야기를 내돌리는 사람들을 참지 못했는지도 이제 알 것 같았다. 아주 사소한 습관 하나라도 그와 다른 모습이 보이면 참을 수가 없었던 거다.
“서인재.”
조용히 오래전의 기억을 더듬어 가던 한은 운전을 하던 인재를 불렀다. 그러자 인재보다 성우가 먼저 이쪽을 돌아봤다. 하지만 한은 성우는 무시한 채 인재에게 말을 건넸다.
“너 나한테 고등학교 때 왜 농구 관뒀냐고 물어봤었지?”
“질려서 관뒀다며?”
백미러로 한을 살피던 인재가 그보다 더 합당한 이유가 있냐며 되묻자 한이 고개를 끄덕인다.
“80%는 맞아.”
“그럼, 나머지 20%는?”
“날 지게 한 강민재한테 엿 먹이려고 그랬어. 내가 관두면 다들 그 녀석을 공격할 테니까. 전교생들에게 욕 좀 먹어 보라고 그만둔 거야. 정신적으로 연약한 녀석이니 스스로 농구를 관두든가 아니면 위장병으로라도 실려 갈 줄 알았거든.”
한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고백에 인재는 놀라 순간 핸들을 잘못 꺾을 뻔했다. 당시 상황을 모르던 성우 역시 적지 않게 놀란 얼굴로 목을 뻣뻣하게 굳힌 채 한을 돌아보았다.
“나 지금 완전 소름 끼친 거 알아? 와, 뭐 저런…….”
진짜 섬뜩했다며 성우가 왼쪽 팔을 오른손으로 문지르며 비난하듯 말을 던지자 한이 순순히 인정했다.
“그때는 좀 그랬어요. 어리기도 했고 자존심도 상하고 오기도 생기고. 그리고 무엇보다, 신우가 처음으로 보러 왔던 경기에서, 그 녀석이 날 지게 만들었거든요. 그래서 굉장히 화가 났었어요.”
“그거, 고등학생치고 너무 유치한 거 아니냐? 아니지, 유치한 것보다 비열하잖아.”
나도 순수하게 사는 편은 아니지만 그건 좀 많이 아니라고 말하며 성우가 질색하자 한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반성하고 있어요.”
“그래도 반성은 한다니 다행이다. 반성 안 했으면 나 너랑 인연 끊으려고 했어. 너처럼 무서운 놈하고 안면 트기 싫어, 난.”
“……제가 무서워요?”
“너라면 안 무섭겠냐?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는데 당연히 소름 끼치지.”
차라리 음습하고 비열하게 생긴 녀석들이 그랬더라면 생긴 대로 논다고 하고 말겠지만 말끔하고 인상 좋은 미청년이 살살 눈웃음을 치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등줄기가 서늘해질 정도로 무섭다고 성우가 요란을 떨자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인재가 한에게 그가 말하려는 바를 명확히 물었다.
“왜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건데?”
자기 인맥이나 이미지 관리에는 철저한 녀석이 13년도 지난 일을 왜 꺼내는 거냐고, 인재가 대화의 의도를 묻자 한이 살짝 비껴간 대화를 원래의 방향으로 되돌렸다.
“신우한테는 얘기했었어, 그거.”
“고등학교 때?”
“응. 그 녀석한테만 말했어. 그 녀석이 얘기를 퍼트리나 안 퍼트리나 보려고. 그리고 날 무서워하며 피할까, 그래도 내 옆에 있으려 할까, 궁금해서.”
그건 딱 한이 할 법한 짓이라 인재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반응이 어땠는데?”
“무서워하더라. 그런데 피하지는 않았어. 소문도 안 냈고. 나보다 친해진 정현이한테도 결국 말 안 했어.”
“그래서 네가 좋아했던 건가 보네. 진짜 네 취향이잖아.”
“아니. 난 소문내 줬으면 했어.”
“왜?”
“좋아서 떠들고 다녔으면 했으니까. 그때도 그 녀석한테서는 선 같은 게 느껴졌거든. 고형물처럼 굳어져 있는 녀석이라 그 틀을 깨는 걸 보고 싶었던 것 같아. 선을 밟고, 흐트러지고, 실수하고, 스스로를 놓는 걸 보고 싶었어. 결국 실패했지만…….”
“그걸 왜 보고 싶었던 건데?”
“……무너졌으면 했으니까.”
“무너뜨려서 뭘 하게?”
“그럼 나한테 매달릴 줄 알았거든.”
처음 한 번이 힘들지 두 번, 세 번은 쉽다. 한 번만 흐트러진다면 그 뒤로는 살짝 건들기만 해도 계속해서 무너져 내릴 게 뻔해 한은 그걸 노렸었다.
하지만 결국 그 시도는 실패했고 그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앞에서 당당하게 ‘프라이버시’와 ‘영역’에 관해 논할 정도로, 신우의 벽은 견고했다.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를 다시 만난 순간부터 느낀 초조함과 불안함은 자신이 절대 그의 영역을 점령할 수 없으리라 느꼈던 경험에 기인한 것이었다. 곁에서 머무르며 웃어 줄지언정 그건 신우가 자신을 그의 세계에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웃음은 그저 웃음일 뿐이다. 자신이 아니라도 신우는 누군가 그를 보살펴 주고 챙겨 준다면 웃어 줄 거다. 그때 그 빗속에서 본 남자를 향해 웃었듯이 환하게, 기쁜 듯 웃어 줄 거다.
“……네 과거 얘기는 그만하자. 얘기 들을수록 너랑 인연 끊고 싶어질 것 같으니까.”
“끊고 싶으면 끊어.”
“누가 진짜 인연을 끊겠대? 말이 그렇다는 거지.”
썩을 놈이라고 인재가 조금 짜증을 내자 한이 조금 목소리를 억누르고 그의 말을 받는다.
“지금 내 기분이 엿 같으니까 네가 좀 이해해. 나중에 제대로 사과할게.”
도저히 더는 뭐라고 할 수 없게 만드는 한의 그 말에 ‘말이나 못 하면 한 대 패 주기라도 하지.’라고 한탄하던 인재는 저 멀리 보이는 간판을 보곤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야, 네 얘기는 이제 끝. 다 왔어. 저기 목수 아저씨 깐깐하니까 너 표정 풀고 웃으면서 아저씨 기분 맞춰 드려. 그러라고 너 데리고 온 거니까 인상 쓰지 말고. 네 설계도에 맞춰서 나무 다룰 수 있는 목수는 우리나라에 다섯 분뿐이고 그 다섯 분 중에 지금 유일하게 시간 나는 분이 저분이시다. 무조건 살살 비위 맞춰. 일은 일이니까 제대로 할 거지?”
“걱정 마. 아무리 기분이 더러워도 OK 사인 나오게 만들 수 있어.”
“그래, 그래야 정한이지. 제대로 안 하면 신우 씨한테 네가 지금 한 말 그대로 다 이를 테니까 알아서 해.”
“일러도 관심 없을걸.”
조금 놀란 척하다 곧 ‘옛날 일이니까.’라고 금세 단념해 버릴 신우의 얼굴이 훤히 보인다며 한이 또 입술을 삐죽 내밀자 차선을 바꿔 목공소 쪽 도로로 진입한 인재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다. 성우 역시 작게 ‘나 방금 또 닭살 돋았어.’라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더는 그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채 다시 업무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에 도착한 신우는 바로 앞 카페의 간판을 확인하곤 안을 살폈다. 대형 프렌차이즈 커피 전문점 안은 점심시간이라서인지 식사 후 음료를 사러 나온 이들로 붐비고 있었다.
카운터에 줄 선 사람들 너머 안쪽 구석에 앉은, 커다란 남자를 눈으로 확인한 신우는 마음을 다지려는 듯 길게 숨을 골랐다.
이 앞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빨리 해치우고 말자는 생각뿐이었는데 막상 그를 보니 가벼운 긴장감이 느껴졌다.
잠시 문 앞에 멈춰 선 채 호흡을 가다듬은 신우는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햇살이 내리쬐는 외부와 달리 카페 내부는 서늘했다. 올해는 유독 겨울과 봄이 길다고 느꼈는데 이젠 제법 여름 같았다.
더위와 함께 몰려오는 오래전 기억에 서둘러 마음을 다진 신우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원혁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곤 가방을 내려 두고 앉으며 툭 하니 말을 내뱉었다.
“서류는?”
갑작스러운 신우의 등장에 서류를 살피던 원혁이 놀라 고개를 들어 올린다. 그사이 자리에 앉은 신우가 가방에서 펜을 꺼내며 어서 서류를 달라는 듯 원혁을 바라보자, 그가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오랜만이네…….”
“……계약서 줘. 어디에 사인하면 돼?”
신우의 재촉에 원혁이 차분하게 말을 붙여 왔다.
“한숨 돌리고 해.”
“그럴 시간 없어.”
“바빠?”
“응.”
짤막한 신우의 답에 원혁은 그가 보고 있던 서류를 신우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 서류를 받아 든 뒤 내용을 대강 눈으로 확인한 신우는 개인 정보란을 채우고 빠르게 서명란에 사인을 마쳤다. 거기까지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신우가 다시 그 계약서를 원혁의 앞으로 밀자 원혁이 서류를 받아 들고 내용을 확인하며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어떻게 지내나 궁금했는데 잘 지낸 것 같아 다행이네.”
“……이제 다 끝났지?”
“커피는 마시고 가지?”
“주문 안 했어. 빨리 사무실 들어가 봐야 돼.”
“그럼, 잠깐 얘기만 하자. 할 얘기가 있어.”
“무슨 얘기?”
우리 사이에 할 이야기가 있냐는 얼굴로 신우가 원혁을 빤히 보자 원혁이 서류를 가방 안에 넣으며 느긋한 투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 집을 옮기려고 창고 정리를 하는데 네 의자가 나오더라고. 잊고 있었는데 그걸 보니까 갑자기 네 생각이 났어.”
“…….”
“그때는 어렸던 것 같아. 넌 아무 잘못도 없는데 나 혼자 열 내고 속 끓이고, 마지막에는 진짜 안 좋았잖아.”
그렇게 말해 봐야 애초에 좋았던 기억이 있었나 싶었다. 불행히도 기억나는 건 마지막 순간 그가 남긴 가혹한 말뿐이었다.
좋지 않았던 끝에 좋았던 기억마저 모두 흐려져 버린 채라, 딱히 과거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런 신우의 생각을 읽은 듯 원혁이 조심스레 덧붙였다.
“널 만나면 꼭 사과하고 싶었어. 그때 일은 미안해. 내가 무책임하고 이기적이었어.”
“……됐어. 이미 지난 일이야. 그리고 나한테도 문제가 있었을 테니까.”
“아니, 넌 아무 잘못 없었어. 나 혼자 너한테 화풀이했던 거야. 네가 겁이 많다는 걸 알면서도 배려하지 않았어. 그래서…… 그냥 한 번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었어. 넌 항상 외로워 보여서 걱정됐거든. 내가 옆에 있어도 넌 늘 혼자 서 있는 것 같았으니까.”
자신을 보면 밥을 먹여 주고 싶다는 한과 외로워 보였다는 원혁까지. 자신이 그렇게나 불쌍해 보이나 싶어져 신우는 살짝 시선을 내리깔았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지만, 그들의 의견은 같았다. 자신이 춥고 외로워 보인다는 것. 그래서 보살펴 주고 싶다는 것.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머리가 복잡한 감정을 따라가지 못해 침묵하던 사이 원혁이 조금 일상적인 주제로 화제를 바꿨다.
“……지금 프리로 일한다고 했지? 일은 괜찮아? 원래 인테리어 쪽이었잖아.”
“요즘은 평면도 작업만 해. 인테리어는 손 뗀 지 오래야.”
원래 희망했던 쪽은 인테리어였지만 그쪽에는 재능이 없어 지금은 단순 캐드 작업만 하고 있다.
애초에 죽어도 인테리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게 아니라, 단순히 예쁜 집에 대한 동경 같은 게 있어 지원했던 과였을 뿐이다. 그러니 별 상관없다는 신우의 답에 원혁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우리 회사에서 일해 볼래?”
그 말에 고개를 든 신우가 인상을 쓰며 원혁을 바라봤다. 거북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 눈빛에 원혁이 겸연쩍은 듯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가구 회사잖아, 우리. 중소 업체이긴 한데 좀 더 사이즈를 키울 거라 디자이너가 필요해서. 넌 도면 작업도 잘하니까.”
“지금 하는 일도 벅차. 그리고 취직할 생각은 없어.”
“그래도 한 번 생각해 봐. 원래 그쪽을 원했잖아.”
“과는 그냥 적당히 맞춰 간 것뿐이야. 재능도 없고 의욕도 없어. 난 그냥 먹고살기만 하면 돼.”
누구처럼 열정과 재능이 넘치지도 않고 그냥 편하게, 흘러가는 대로 왔을 뿐이라고 신우가 조용히 읊조리자 원혁이 입을 다문다.
8년이 지났음에도 연신우는 여전했다. 자존감이 낮고 열등감에 젖어 있다. 그 탓에 사랑을 줘도 그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늘 주저하고 눈치를 보며 항상 거리를 두고 그 이상은 다가오지 않았다. 그게 지나쳐 사람에게 기대란 게 없었다.
지금은 그 무심함이 상처받지 않기 위한 무의식적인 방어 기제라는 걸 알지만, 그때는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무작정 자신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헤어질 때 내가…….”
막 원혁이 오래전 이야기를 꺼내려는 순간 신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 소리에 재빨리 가방에서 휴대폰을 찾아 든 신우가 표정을 굳힌다.
당황한 기색이었다.
“받아.”
원혁이 일단 전화를 받으라고 하곤 입을 다물자 신우가 자리에서 일어서 걸음을 옮기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 어디야?
수화부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을 들으며 북적이는 카페를 가로지른 신우는 곧 문밖으로 나가면서 작게 대꾸했다.
“점심시간이라 잠깐 나왔어. 넌?”
- 너랑 밥 먹으려고 목공소에서 곧장 왔는데, 밥 먹는 중이야? 어디야? 내가 갈게.
“어…… 나 지금 아는 사람 만나는 중인데…….”
카페 문을 피해 선 채 신우가 작게 대꾸하자 한이 빠르게 되물었다.
- 아, 그래? 그럼 점심 먹겠네?
“아냐. 그냥 잠깐 얼굴만 본 거라 곧 들어갈 거야. 점심 전이지? 같이 먹자.”
- 점심시간에 만나는데 같이 점심 먹는 거 아냐?
“아냐. 잠깐 뭐 전해 줄 게 있어서 만나기만 한 거야.”
- 그래? 그럼 내가 근처로 갈게. 어차피 나왔으니 같이 움직이는 게 좋잖아. 나 사무실이야. 어디로 가면 돼?
“……한 정거장 거리인데…… 그냥 내가 갈게. 볼일 다 끝났어. 5분 정도 걸릴 테니 시간 맞춰서 나와.”
- 그래, 알았어. 그럼, 지금 나갈게.
“응.”
마지막 말과 함께 전화를 끊은 신우는 서둘러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찾았다. 그러곤 앉지도 않은 채 곧장 가방을 챙겨 들었다.
“이만 가 볼게.”
인사를 되받기도 전에 바삐 움직이는 신우를 원혁은 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아무 말 없이, 관찰하는 듯한 그 시선을 신우는 불편한 듯 피했다.
더 이상 하고 싶은 말도, 이곳에 있을 이유도 없다는 듯한 신우의 태도에 원혁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같이 나가자. 나도 나가야 돼.”
곧장 일어서서 바로 옆에 선 원혁을 신우가 조금 놀란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원혁이 무덤덤한 얼굴로 묻는다.
“왜?”
“……아니. 키가 크구나 해서.”
“원래 컸잖아.”
“그랬지…….”
자신이 고개를 꺾고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컸었다. 그래, 그랬었다.
아득한 기억을 되새기며 원혁을 잠시 아무 말 없이 바라보던 신우는 다시 가방을 고쳐 메며 걸음을 옮겼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껄끄러우면서 어색하고 동시에 미안한 느낌…….
정체 모를 감정에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어쩐지 너무나도 한이 보고 싶었다.
손목시계로 시각을 확인하며 건물 앞에 서 있던 한은 계속해서 주변을 돌아보며 신우를 눈으로 찾고 있었다. 5분 후에 도착한다고 한 게 3분 전이었다.
아직 2분이 남아 있음에도 날 듯이 사무실에서 내려와 두리번거리는데 그때 막 건물 앞에 멈춘 택시에서 신우가 내리는 게 보였다.
신우를 확인한 한이 한걸음에 그쪽으로 다가서자 막 택시에서 내리던 신우가 한을 발견하곤 어색한 얼굴로 웃었다.
“빨리 나왔네.”
“점심시간이잖아. 멀리 가 있었던 거야? 그냥 내가 데리러 갈걸.”
“아냐. 걸어서 갈 수 있는 데였어. 너 기다릴까 봐 빨리 오느라 택시 탄 거야. 일은 잘됐어?”
“응. 주택 일은 안 하신다고 하셔서 애를 먹긴 했는데 정성껏 설득했지. 설계안 보여 드리고 아저씨 아니면 안 된다고 매달려서 사인받아 왔어. 자, 이제 업무 보고 끝. 점심 먹자. 배고프다.”
바로 옆으로 다가선 한이 신우의 어깨를 잡아끌자 신우가 시선을 돌려 빤히 한을 올려다보았다.
정확히 이 높이였다. 바로 옆에 서는 순간, 이 각도로 시선을 들어 올려다봐야 했다, 원혁도.
이렇게 키가 큰 사람들은 흔하지 않다. 이전에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원혁을 만나고 와서인지 이상하게 그 높이가 신경 쓰였다.
큰 키와 서글서글한 인상. 유난히 사람 챙겨 주길 좋아하는 다정다감한 성품과 커다란 손.
이런 느낌을 원했던 것 같다. 그 비 오던 날 밤처럼 자신의 온몸을 끌어안은 채 비와 어둠을 막아 줄 수 있는, 그런 품…….
문득 그 밤의 기억을 떠올리자 한의 손이 닿은 어깨가 뜨거워져 왔다.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듯 화끈거리는 느낌에 얼굴까지 달아오르는 듯해 서둘러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한이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그런데, 누구 만난 거야?”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려 뺨을 손등으로 문지르던 중 던져진 질문에 신우는 멈칫했다.
한에게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나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미 한에게서 원혁을 본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이라도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불쾌할 것 같다.
“……그냥, 예전에 알던 사람.”
“언제 알던 사람?”
“대학 때 알던 사람이야. 과제로 같이 가구 작업을 한 적이 있는데 내가 의자를 만들었거든. 이번에 창고를 정리하다 그 의자를 내놨는데 누가 사고 싶다고 했나 봐. 그래서 저작권 문제 해결하자고.”
대강, 필요한 최소한의 사실만을 골라 말해 주자 한이 순간 눈을 반짝인다.
“그래? 그럼, 나도 보여 줘.”
“어…… 그 사람 작업을 도와준 거라 나한테는 없어.”
그다지 특별한 디자인도 아니고, 라고 신우는 얼버무리려 했지만 한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의자 생산하면 하나는 보내 줄 거 아냐? 아니다. 같이 보러 가자. 가구 회사지. 어디야?”
“어…… 몰라.”
그러고 보니 회사 이름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사인하기에 바빠 계약 사항도 대강 흘려 봤다.
뭐라도 별 상관없다는 신우의 말에 한이 걸음을 멈추곤 다시 묻는다.
“회사 이름도 모르고 사인한 거야?”
“안 물어봤어. 그냥 계약서만 쓰고 왔어.”
“어딘지도 모르고 네 디자인을 줘?”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한의 반응에 신우는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리고 사실 회사가 어디든 관심 없는 건 사실이다.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던 거야. 관심도 없고. 그냥 확실히 짚어 두고 가자길래 계약서만 쓴 거야.”
“계약서는?”
그제야 신우는 계약서도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두 개에 사인한 것 같긴 한데 급히 나오느라 챙기지 않았고 원혁도 챙겨 주지 않았다.
그제야 자신이 일을 너무 허술하게 처리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 따질 수는 없다.
“……안 챙겨 왔어. 뭐래도 상관없으니까.”
그런 거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라는 신우의 태도에 한이 빤히 신우를 바라봤다. 나무라는 느낌보다는 뭔가를 캐내려는 듯 불편한 그 시선에 신우가 고개를 돌리자 한이 손을 들어 신우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다.
“밥 먹으러 가자, 일단.”
여름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6시가 넘은 시간까지도 햇살이 남아 있었다. 살짝 더운 기운마저 느껴지는 오후, 함께 퇴근하고 저녁 식사까지 한 뒤 신우의 집 앞까지 데려다준 한은 차를 멈춘 채 신우를 보며 은근한 투로 말을 건넸다.
“오늘도 차 안 줄 거야?”
지난 열흘간 매일같이 들은 물음이었다. 그럴 때마다 집이 엉망이기도 하고, 또 차를 세울 만한 공간이 없어 번번이 거절했는데 오늘이 출근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자 신우 역시 한을 그냥 보내기 섭섭했다.
“차는 없는데…… 커피라도 괜찮으면 마시고 갈래?”
소극적인 신우의 초대에 한이 환하게 웃는다.
“응, 상관없어.”
겨우 차 한 잔에 아이처럼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커피 한 잔 줄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차는 저 안쪽에 대면 괜찮을 거야.”
신우가 영업이 끝난 가게 앞의 공간을 가리키자 한이 바로 그쪽으로 가 차를 세운 뒤 시동을 끈다.
“내리자.”
조용한 차 안에서 신우가 먼저 안전띠를 풀고 내려서자 한 역시 따라 내려 신우의 옆으로 다가섰다.
“네가 직접 집에 들어오라고 한 건 이게 처음이야.”
“전에 왔었잖아.”
“그땐 내가 쳐들어온 거고.”
그제야 신우는 그때 한이 어떻게 제집을 찾아온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 앞까지 바래다줬으니 당연히 건물은 알았겠지만 호수까지 정확하게 찾아왔다.
“너, 그때 우리 집 어떻게 찾았어?”
“계약서에서 보고 주소 외우고 있었지.”
“기억력 좋네.”
“좋아하니까.”
말과 함께 한이 눈초리를 휘며 너무나 예쁘게 웃는다. 그 미소에 신우 역시 웃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 계단으로 올라섰다.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다다른 집 앞에서 신우는 키패드에 손을 올린 채로 한에게 먼저 경고했다.
“좀 더러워. 안 치워서 엉망이야.”
그나마 최근 정상적인 생활을 하느라 정리도 좀 하고 냉장고도 채워 놓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수선한 건 마찬가지였다. 집 자체가 낡기도 한 터라 신우가 먼저 양해를 구하자, 한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상관없어. 내 방도 무지 더러워.”
“너 사무실만 봐도 깔끔한 거 다 알아.”
“사무실은 밖에서 보이니까 그런 거고. 내 방은 볼만해. 나도 늘어놓는 타입이거든. 저번에는 하늘색 셔츠를 찾느라 드레스 룸을 전후 폐허로 만들어 놨어. 그거 다시 치우느라 일주일 넘게 걸렸어.”
뭔가 하나를 찾느라 집 안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게 또 너무나 한다워 신우는 웃음을 흘리며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러곤 곧 집 안으로 들어서 조명을 켜고 가방을 책상 옆에 내려놓았다.
그사이 집 안으로 따라 들어온 한은 거실 쪽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 가 앉았다. 입고 있던 양복 재킷의 단추를 풀며 바닥에 앉는 그에게 신우가 손을 내민다.
“재킷 줘. 구겨지겠다.”
“응.”
한이 걸치고 있던 연한 회색의 양복 재킷을 벗어 건네자 신우가 재빨리 방 안쪽에 놓인 옷걸이에 재킷을 걸어 두고 돌아왔다.
“믹스 커피밖에 없는데 괜찮아?”
“응, 나 다방 커피 좋아해.”
“다행이네.”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커피포트에 물을 부은 뒤 전원을 켠 신우는 찬장을 뒤져 컵을 두 개 찾아 싱크대 위에 올려놓았다. 익숙한 듯 바삐 움직이는 그 모습을 보던 한은 시선을 돌려 천천히 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지은 지 꽤 된 듯 허름한 빌라의 내부는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주방과 작은 테이블과 컴퓨터 책상만 놓인 거실 너머로 미닫이문이 보였지만 그 미닫이문 안쪽도 침대와 장 하나만 단출히 놓여 있을 뿐이다.
살기 위한 최소한의 것들만 놓여 있을 뿐 일부러 꾸민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허전하고 외로워 보이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신우와 잘 어울렸다.
마치 신우 그 자체 같은 방 안을 천천히 돌아보던 한은 문득 책상 위에 놓인 사진에서 시선을 멈췄다. 아직 어린 신우와 그보다 작은 아이 하나가 부모님의 품 안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신우에게 동생이 있었던가 떠올려 봤지만 그런 얘기를 들은 기억은 없다. 정현에게서도 전혀 듣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때도 아버지와 둘이 산다고 했던 것 같다.
부모님이 이혼하신 건가, 하고 잠시 생각하는 사이 끓는 물을 컵에 부은 신우가 잔을 두 개 손에 들고는 한의 앞으로 다가왔다.
“여기.”
먼저 한의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 둔 신우가 맞은편 자리에 앉자 한이 잔을 손에 들며 신우에게 묻는다.
“저거, 가족사진?”
손끝으로 책상 위에 있는 액자를 가리키자 신우의 표정이 일순 흐려졌다. 그 얼굴에 스친 우울한 빛에 한이 아차 한 순간 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가족사진.”
“어머니랑 많이 닮았다, 너. 동생은 아버지 닮았고.”
“응, 그런 얘기 자주 들었어.”
현재형이 아닌 과거형의 답에서 ‘역시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 혼자 산 거야?”
“4년 전쯤부터.”
“어쩐지 너무 말랐더라. 혼자 살면 먹는 게 좀 그렇지? 나도 혼자 살 때 직접 해 먹지는 않았거든. 재료비나 들어가는 노동력, 시간 생각하면 사 먹는 게 싸더라고.”
매일 부지런히 해 먹지 않는 이상 재료도 썩혀 버리게 된다며 한이 부드럽게 대화를 이끌자 신우가 그건 그렇다고 작게 대꾸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단정해 보이는 그 모습에서 느껴지는 침울한 느낌에 한은 더는 가족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대화의 방향을 돌렸다.
“아까 오전에 하던 얘기 말인데.”
“……응?”
“새벽에 하는 일.”
다시 꺼내진 그 화제에 신우는 조금 불편해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그 얘기는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난 해야겠어. 근무 시간이 몇 시간이야?”
“……보통 8시부터 새벽 2시까지. 6시간 정도.”
“그럼 그거 그만두고 다른 데 취직해. 하루에 6시간 정도 일해야 하고 일은 좀 까다로워. 근무는 대강 오후 5시부터 10시나 11시까지. 해야 할 일은 바둑, 산책, 잡담 및 장기와 텔레비전 시청. 그리고 가끔 운전도 해야 돼. 멀리 나가야 할 때도 있고. 하지만 4대 보험은 안 돼. 고용 보험도 없고. 대신 페이는 괜찮아.”
어차피 보험 안 되는 건 룸살롱도 마찬가지인 터라 상관없지만 너무나 좋은 근무 환경에 신우는 의아하다는 듯 한을 바라봤다.
“……그 일이 뭔데?”
“우리 할아버지 말 상대 겸 비서.”
상상도 못 했던 그 제안에 신우가 놀라 한을 바라보자 한이 틈을 주지 않은 채 서둘러 말을 이어 간다.
“이번에 고학생으로 우리 집에 있던 애가 취직해서 나가게 됐어. 그래서 할아버지 수발들 사람이 필요해. 일은 아주머니들께서 다 해 주시니까 할아버지 말 상대랑 심부름만 하면 돼.”
“한아, 그건…….”
“할아버지가 사람 찾아보라고 하신 거야. 대신 우리 집에서 살아야 돼. 지금까지는 고아들이나 고학생을 주로 썼는데 지금은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너한테 부탁하는 거야. 나도 우리 할아버지한테 너 소개하는 건 별로 내키지 않지만, 어차피 앞으로 만나게 될 테니까 미리 인사드린다고 생각해.”
일방적인 한의 주장에 신우는 한이 말을 끊은 틈에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제의는 고맙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아.”
“아닐 거 없어. 일단 면접만 봐. 숙소랑 식사 기본 제공에 월급은 500인데, 우리 할아버지 기분에 따라서 더 올라갈 수도 있어.”
지나치게 파격적인 근무 환경에 더해지는 파격적인 월급에 신우는 일단 말을 멈췄다. 한이 무리하고 있다는 게 훤히 보였다.
“한아, 네가 그렇게까지 해 줄 필요는 없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너 도와주려는 거 아냐. 나 도와 달라는 거지. 지금 있는 애도 그 정도 받았어. 무엇보다, 우리 할아버지 까다로운 분이야. 첫 번째로 사주가 좋아야 하고 두 번째로는 관상하고 손금도 좋아야 하고 얼굴도 할아버지 마음에 들어야 돼. 그리고 그 뒤는 성격하고 말투, 행동거지랑 성실함까지 다 보셔. 네 사주는 좋아하시지만 다른 게 성에 안 차면 고용 안 될 수도 있어. 면접은 네 능력껏 봐야 해.”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일만 생각해. 내가 돌아오긴 했지만 앞으로 난 미친 듯이 바빠질 테고 자식들 다 내쫓으신 분이라 말동무가 필요하셔. 그리고 그 일 쉽게 보지 마. 말했다시피 우리 할아버지 괴팍한 분이야.”
이미 결론을 낸 듯한 한의 말투에 신우가 반박하려 했지만 한이 재빨리 그 말을 막는다.
“오후 5시부터는 칼같이 집에 들어와서 할아버지 말 상대해 줘야 하고 딴짓하면 잘려. 휴일은 쉬지만 할아버지 개인적인 약속 날짜나 이런저런 기념일들도 챙겨야 하고. 가끔 낙지 드시고 싶다 하면 목포까지 끌려갈 수도 있어. 그리고 어떨 때는 저녁 먹고 강릉 가서 커피 마셔야 할 때도 있고. 사람에 따라서는 어지간한 회사 업무보다 힘들다고 느낄 수도 있어.”
거기까지 설명을 듣자 꽤 설득력이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 정도로 사람에 까다로우신 분의 옆에 붙어 예상할 수 없는 범위의 일들을 소화해야 한다면, 그 월급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자신의 일이 아니다.
“제의는 고맙지만 사양할게. 그냥 난 내가 하던 일을 하는 쪽이 좋을 것 같아.”
“지금 근무 시간하고 같잖아. 오히려 출퇴근 시간이 주는 건데, 뭐가 문젠데?”
이런저런 걸 다 제쳐 두고서 조건만 보자면 더없이 끌리는 일이었지만 선뜻 하겠다 나설 수는 없었다.
솔직히 그 정도의 월급이라면 아시의 일만 같이 받아도 3년 안에 충분히 빚을 정리하고 어느 정도 돈도 모을 수 있다. 아니, 한의 말대로 입주까지 한다면 2년 안에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지 않아도 생활비 중 가장 부담스러운 부분이 월세였으니까.
현재 자신의 상황만 떠올려 본다면 그 이상 좋은 조건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일은 할 수 없다.
자존심 때문이 아니다. 자존심 정도는 돈 앞에서는 별거 아니다.
마음에 걸리는 건, 만약…… 진짜 만에 하나라도 한의 조부님 아래서 일을 하던 중 한과 헤어지게 된다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찔해졌다.
당장 원혁의 경우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학 시절 공동 작업했던 일로 다시 보게 되어 너무 불편했는데 할아버지 아래서 일을 하다 헤어지게 된다면 서로 너무 불편해진다.
그걸 자신은 감당할 수 없다.
“제의는 고마워. 그리고 마음도 잘 알겠어. 하지만 역시 안 될 것 같아.”
“그러니까, 어째서?”
예리한 눈초리로 답을 추궁하는 한의 시선에 신우는 고개를 떨궜다. 어설프게 말을 돌리면 한은 끝까지 답을 캐내려 할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하자니 자신에게도 데미지가 크다.
생각만 해도 힘겨운 일을 말로 해야 하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다.
“신우야, 솔직히 말해 봐. 뭐가 마음에 걸리는 건데?”
뭐든 들어 줄 테니 이야기를 해 보라고, 한은 이번엔 조금 부드럽게 신우를 달랬다. 마치 아이를 어르는 듯 부드러운 말투와 다감한 눈빛에도 신우가 고집스레 침묵하자 한이 신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응?”
“…….”
“이유를 알아야 나도 받아들이지. 뭔가 다른 사정이 있는 거야?”
“…….”
“신우야?”
마지막 한의 부름에는 엄격함이 묻어났다. 절대 이번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한의 기세에도 신우가 고집스레 답을 하지 않자 한이 이번엔 좀 더 근원적인 문제를 짚었다.
“단지, 이 문제만 갖고 얘기하는 게 아냐. 네 태도가 이상하다는 거, 너도 알고 있지? 항상 뭔가가 걸리는 것처럼 행동하고, 거리를 두고 있잖아. 지금 만나는 사람 가족과 같이 일하는 게 거북할 수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랬다면 그 문제부터 얘기해야 하는데, 넌 그 부분은 말하지 않았어. 그렇다는 건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거지?”
그 말에 신우는 정곡을 찔린 듯 입을 다물었다. 크게 보자면 자신이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한이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애초에 간단히 둘러댔으면 될걸, 이별에 포커스가 맞춰져 생각이 깊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변명하지 못했다.
“신우야, 진짜 이유가 뭔데?”
“…….”
“연신우?”
한이 모처럼 성을 붙여 부른 순간, 몸이 움찔했다.
어떻게 회피하려 해도 쉽사리 넘어가 주지 않을 것 같은 한의 태도에 결국 마음을 돌렸다.
“네가 말한 거랑 비슷한 이유야.”
“어떤 거?”
“네 가족과 일하는 게 불편해.”
“그런 쪽은 확실히 구분해, 우리 집은.”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한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경우는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을 내뱉기 힘들어 망설이던 사이, 한이 조금 목소리를 낮춰 다시 한번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신우야?”
뭐든 말해 보라는 한의 추궁에 입술을 꾹 깨물었던 신우가 결국 진심을 토해 냈다.
“……그러다…… 헤어지면 서로 불편하잖아.”
신우의 짤막한 답에 한의 눈빛이 당혹스러운 듯 흔들렸다. 그 말의 의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듯 처음엔 의아함과 황당함이 뒤섞인 눈빛으로 신우를 바라보던 한은 이내 그게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고는 표정을 굳혔다.
그러곤 황당해하며 되물었다.
“너,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던 거야?”
“…….”
침묵은 긍정이다.
“너…….”
듣던 중 어이없는 이야기에 한이 막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순간 벨 소리가 울렸다. 신우의 가방 안에서 울리는 그 소리에 한은 겨우 화를 억누르며 신우의 가방을 가리켰다.
“일단, 전화부터 받아.”
일단 머리를 식혀야 할 듯해 한이 우선 통화를 하라고 하자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던 신우가 멈칫한다. 그러고는 재빨리 수신을 거부 버튼을 누른다.
그 움직임이 한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 신우는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놀라거나 액정을 보고 곤혹스러워하며 거부 버튼을 누르곤 했다.
오늘 빚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에 그런 쪽 문제인 것 같아 굳이 거론하지 않았는데 문득 그런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촉 전화도 근무 시간에 하는 게 일반적이다. 물론, 일반적인 은행 빚일 경우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사금융이라 해도 그 정도는 지키는 게 보통이다. 무엇보다 신우의 태도가 수상쩍었다. 빚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했으니 그쪽 문제라면 저렇게 당황해하지는 않을 거다.
그러고 보니 오늘 신우는 다른 때보다 부산스럽고 집중을 못 하는 느낌이었다. 특히 점심시간 이후부터는 더 심해져 안 하던 실수까지 할 정도였다.
명확한 시점을 인지한 순간 하나하나 세세한 의문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분명 점심시간부터였다. 점심시간에 사람을 만나 놓고 식사를 안 한다는 것도 이상했는데, 통화하는 내내 신우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고 빨랐다. 마치 전화를 빨리 끊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어수선했다.
당시에는 자신이 외근 나가기 직전의 대화 때문에 어색해서 그런 것이라 넘겼는데, 만나고 보니 더 이상했다. 계약서도 챙기지 않았을뿐더러 계약한 회사의 이름도 모른다는 건 너무 신우답지 않았다. 계약이 일상인 프리랜서가 계약을 그렇게 대충 처리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여러모로 걸리는 단서들에 한이 조용히 신우를 관찰하듯 바라보던 사이 다시 끊어졌던 휴대폰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 안 받아?”
끈질기게 울려 대는 벨 소리에 한이 일부러 전화를 받으라고 종용하자 신우가 다시 통화 거부 버튼을 누르곤 휴대폰을 무음 모드로 바꾼다.
그 반응에 한은 확신했다. 뭔지 알 것 같았다. 지금 순간만큼은 그런 쪽으로 유달리 감이 좋은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전 애인?”
한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신우의 표정이 놀란 듯 굳어진다. 과하게 정직한 그 표정에 한은 자신의 예감이 맞아떨어졌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순간 치밀어 오르는 강렬한 감정에 한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벌레 같은 게 스멀거리며 몸을 기어 다니는 불쾌한 기분이었다.
화나고 짜증 나고 불쾌하고, 제어가 되지 않았다.
“혹시, 오늘 만난 사람이 그 사람이야?”
그 말에 신우가 움찔한다. 그 반응으로 알아챘다.
사실이다.
“아까…… 얘기하려고 했는데 미안해. 들으면 기분 나쁠 것 같아서 얘기 안 했어.”
차분한 신우의 답에 한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럴 수 있다. 그 얘기를 들으면 당연히 자신이 불쾌해했을 테니 아예 말을 안 하는 게 나을 거라 판단했을 수도 있다.
분명 그걸 머리로는 이해한다. 하지만 심장이 머리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의자를 계약했다는 건?”
거짓말이었냐는 한의 물음에 신우가 서둘러 변명했다.
“그건 사실이야. 대학 때 같이 작업한 적이 있어. 난 인테리어 쪽이었고, 그 녀석은 가구 디자인과라 테이블과 의자 세트를 같이 작업했어.”
“대학 때라면, 8년 전?”
“응…….”
순간 어떤 기억이 한의 머릿속을 스쳤다.
8년 전이라면 정확히 기억한다. 검은 우산을 든 덩치 큰 남자.
질투에 머리가 돌아 버릴 정도로, 신우가 행복하게 웃으며 바라보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8년 전이면 내가 본 그 사람이 맞겠네.”
“……아마, 그럴 거야.”
“그 사람하고 계속 연락하고 지냈던 거야?”
분명히 자신은 신우에게 8년 전의 그 일을 먼저 이야기했었다. 그때 자신의 기분이 어땠는지, 왜 신우를 기억에서 지워 버렸는지 전부 토로했다. 그런데 그걸 알고도 그 사람을 만났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했더라도 자신에게 설명은 해 줬어야 한다. 최소한 미리 양해를 구하는 게 맞다.
“너, 나랑 헤어지고 싶어?”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신우가 놀란 듯 고개를 들어 올린다. 조금 겁에 질린 듯한 그 얼굴에 안쓰러움을 느꼈지만 그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내가 성격이 급해서 조금 강압적이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그러니까, 진짜 솔직하게 대답해 줘. 나한테 억지로 끌려오는 거야?”
“그런 건 아냐.”
“그럼 왜 벌써 이별 얘기가 나오는데?”
계속되는 한의 추궁에 잠시 머뭇거린 신우가 겨우 목소리를 끌어낸다.
“……원래 다 헤어지는 거잖아.”
자신 없는 듯 희미한 신우의 목소리에 한은 황당해하는 얼굴로 신우를 바라봤다.
사람이 사귀다 보면 당연히 이별할 수 있다. 자의든 타의든, 친구들끼리도 졸업하며 멀어지는 것처럼 애인도 맞지 않으면 헤어질 수 있다.
하지만 애초에 이별을 당연히 여기며 만나는 사람은 없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자연 소멸되거나 이별을 선택하게 되는 것뿐이지, 처음부터 헤어질 거라고 생각하고 사람을 만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신우는 이미 자신과의 관계의 끝을 이별이라고 정해 둔 채였다. 애초에 신우에게는 이 관계를 영원히 이어 가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이제야 신우를 볼 때마다 느껴지던, 어떻게 해도 손에 잡히지 않을 듯 아슬아슬하고 위태롭고 불안하던 그 감각의 기저가 뭔지, 알 것 같았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이 녀석은 늘 자신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결국 함께하길 원하는 건 자신뿐이고, 이 녀석은 조금 거리가 생긴 순간 미련 없이 자신의 손을 놓을 거라는 걸,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시험하듯 심술을 부리고 자극하고 무너뜨려 자신에게 매달려 주기를 원했던 것 같다. 하지만 끝내 신우는 자신을 잡지 않았고 자존심이 상한 자신 역시 네가 잡지 않으면 나도 널 잡지 않겠다고 오기를 부려 돌아섰던 거다.
모든 게 그때 그대로였다. 차이라면 지금은 자신이 그 감정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뿐이다.
황당함에 화가 나면서도 어이없고 또 서글픈, 복잡한 기분에 한은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며 다시 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데?”
“……늘 그랬으니까.”
“늘 그랬으니까 나와도 헤어질 거라 생각하는 거야?”
“……넌 잘 질리고 난 사람을 질리게 하니까…….”
한은 순간 탄식했다.
“내가 질려서 널 버릴 거라고 생각한 거야?”
“…….”
무언은 긍정이다. 이미 신우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순간 어떤 감정이 울컥거리며 치솟았다.
자신이 잘 질리고 잘 돌아선다는 건, 인정한다. 완벽하게 자기 것이라는 확신이 들기 전에는 한 군데에 정착하지 않고 계속해서 뭔가를 찾고 도전하는 건 타고난 기질이니 어쩔 수 없다. 그에 대해 변명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신우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토록 변덕스럽고 한 번 손에서 놓은 것에 미련 없이 돌아서는 자신이 한 번 손에서 놓은 걸 다시 잡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니, 자신이 말하지 않은 거다. 세 치 혀보다 얄팍한 건 없다. ‘넌 달라. 너만은 특별해.’라는 말처럼 못 믿을 건 없다고 생각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게 낫다고 여겼다.
무엇보다 자신이 다소 강압적으로 밀어붙인 걸 알기에 조심스러웠고, 시간을 두고 느긋하게 진심을 보여 주면 된다 생각했는데, 그게 패착이었다.
신우는 전형적인 현실 회피형이었다. 자존감의 문제인지 혹은 원래 성품이 그런지는 몰라도 문제가 생기면 그걸 해결하기보다는 일단 그 문제에서 벗어나 도망치려 한다. 특히 인간관계에 있어선 그 특징이 더 두드러졌다.
왜 신우가 그런 성향을 갖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부분을 감안한다면 자신의 접근법이 틀렸다.
처음부터 자신답지 않게 여유를 두지 말았어야 했다. 신우 같은 타입은 틈이 보이면 일단 도망치려 한다.
그러니까, 그럴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관계에 대한 확신이나 증명 같은 건 애초에 불가능하지만 정신없이 밀어붙여 도망갈 길을 차단해 버리는 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확인할게.”
그 말에 신우가 겁에 질린 눈으로 이쪽을 바라본다. 그 눈빛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나와 헤어지고 싶은 건 아니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것부터 확실히 해야 했다. 하지만 다행히 신우가 이번엔 적극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냐.”
“그럼, 됐어. 일어나.”
마음을 정하자마자 말을 던진 한은 자리에서 일어서 재킷을 챙겨 들었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신우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한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신우의 팔을 잡아당겼다.
“집 열쇠하고 가방만 챙겨.”
한의 명령에 가까운 그 말에도 신우는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공황 상태가 온 것 같았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눈동자와 하얗게 질린 얼굴에 한은 아무 말 없이 신우를 끌어당긴 뒤 멋대로 신우의 가방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곧 건물을 나서 차에 올라탄 다음 목적지를 알리지 않은 채 시동을 걸었다.
역시 성질에 안 맞는 짓은 하는 게 아니었다.
차로 15분 정도의 거리를 달려 도착한 차고 안에서 드디어 차가 멈췄다. 시동을 끄는 것과 동시에 차체의 진동이 멈추자 신우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주변을 돌아봤다.
한의 손에 이끌려 차를 타고 오긴 했지만 오는 내내 정신이 나가 있던 채라 어딜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보이는 건 깊은 어둠이 깔린, 조경이 잘된 넓은 잔디밭과 저 멀리 보이는 한옥 건물뿐이었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넓은 정원과 한옥 형태의 건물이라니, 언뜻 한정식집인가 싶었지만 들어오는 길에 간판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정집이라기엔 정원이 너무 넓고 집이 너무 크다.
“내리자.”
이곳이 어디인지 설명하지 않은 채 먼저 안전띠를 풀고 차에서 내린 한은 운전석 앞에 선 채 신우를 기다렸다. 어서 내리라고 재촉하는 한의 눈빛에 신우가 더듬거리며 안전띠를 풀고 내려서자 한이 신우의 손목을 잡아끌고 정원을 가로지른다.
본격적인 여름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풀벌레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바람에 풀 내음과 소나무 향이 실려 오고 있었다.
그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풍경에 오히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방금까지는 정신이 나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만 발이 땅에 닿는 순간 현실감이 차오르며 무섭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한은 화가 난 것 같았다. 자신이라도 화가 날 상황이었다.
어쩌면 곧 헤어지자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에 질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한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만 바빴다.
그사이 넓은 정원을 가로지른 한은 한옥 마루 위로 올라서 골마루로 들어섰다. 그러곤 곧 골마루 안쪽의 미닫이문을 열고선 커다란 방 안으로 들어서며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한의 부름에 젊은 청년과 바둑을 두던 노인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한을 바라보았다.
“노크도 없이 무슨 일이냐?”
“죄송합니다. 좀 급해서요.”
“뭐가 그리 급한데?”
의아하다는 듯 한을 바라보던 노인은 이내 한의 뒤에 선 신우를 발견하곤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인사를 시킬 거면 미리 연락했어야지. 그래야 무슨 준비라도 할 거 아니냐.”
“죄송합니다. 갑자기 그렇게 됐어요. 이 녀석, 오늘부터 여기서 살 거예요. 저번에 얘기하신 대로요.”
신우를 제대로 소개하지도 않은 해 한은 제멋대로 신우의 거취를 정해 알렸지만 노인은 그 말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러려무나. 우선, 일단 앉거라.”
조금의 당황한 기색도 없이 어서 와서 앉으라며 노인이 바둑판을 치우려 하자 한이 그를 만류한다.
“계속하세요. 저흰 별채로 가 볼게요.”
“왜? 차라도 마시고 가지.”
“이 녀석이 자꾸 도망치려고 해서 확실히 해 두려고요.”
그 말에 노인이 눈살을 살짝 찌푸린다.
“……범법 행위는 안 된다고 했을 텐데?”
“범법 행위는 안 합니다.”
알아서 하겠다며 한이 멍하니 선 신우의 팔을 다시 잡아끌자 노인이 네 마음대로 하라는 듯 다시 바둑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그럼 얘기는 내일 하자. 둬라.”
노인이 앞에 앉은 청년에게 고갯짓하는 걸 본 한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재빨리 신우의 팔을 잡아끌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비약적인 상황에 정신이 나가 몇 박자 느리게 상황을 파악한 신우는 이내 방금 뵌 분이 한의 조부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경악했다. 그러다 자신의 팔을 붙든 한의 손을 잡으며 ‘설마’ 하면서 물었다.
“한아, 여기 어디야?”
“내 집. 그리고 오늘부터는 우리 집.”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한의 설명에 신우는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 한의 행동은 자신이 예측할 수 있는 범위를 크게 벗어나 대화를 이어 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왜 그의 집으로 자신을 데려온 건지, 그리고 왜 여기가 ‘우리 집’이라고 하는 건지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 멍하니 한에게 끌려가던 사이 저 멀리 작은 한옥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 건물보다는 조금 더 작은 규모였다.
그 건물 앞에서 신우가 멈칫하자 한이 신우의 손목을 더 세게 잡아끈다. 그러곤 곧 나무가 깔린 넓은 대청마루로 올라서더니 툇마루로 들어선다.
아무 말 없이 툇마루를 가로지른 한은 안쪽의 방문 앞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 그리고 곧장 방 안으로 들어서 조명을 켜자 외관과는 달리 현대적으로 꾸며진 넓은 방이 눈에 들어왔다.
격자무늬의 창과 문, 그리고 천장에 남은 서까래에서만 한옥의 느낌이 남아 있을 뿐 전체적으로 세련된 느낌의 방이었다.
“짐은 내일 옮기면 되니까 일단은 대충 내 옷 입고 지내. 식사는 본채까지 가서 해야 하지만 별채에도 따로 주방이 있으니까 본채에 가는 게 불편하면 그쪽을 써도 되고. 아주머니께 냉장고 채워 두라고 할게. 요리 잘하시니까 네 입맛에도 맞을 거야.”
신우의 가방을 의자에 내려 둔 한은 이번에도 역시나 일방적으로 설명을 이어 갔다.
이쯤 되면 바보가 아닌 이상 상황을 눈치챌 수 있겠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한아, 잠깐…….”
정신없이 돌아가는 상황에 신우가 재빨리 한에게 제동을 걸려 했으나 한은 신우의 말을 무시한 채 재킷을 벗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저쪽이 욕실이고 욕실로 가는 복도에 파우더 룸하고 드레스 룸이 있어. 파티션 너머는 서재로 쓰는 공간이니 노트북하고 책들은 그쪽에 두면 돼. 일단 급한 대로 책상은 내 책상을 써. 난 집에서는 거의 안 쓰니까. 그리고 복도 오른쪽 끝 차고는 거의 내 작업실로 쓰는 데니까 편한 대로 써도 돼. 반은 창고라 이것저것 많고 어수선하긴 하지만 시끄러운 작업 하기는 괜찮을 거야.”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한의 설명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재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어 둔 한이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다. 그 모습에 막 입술을 떼려는 순간 일부러 자신의 입을 막으려는 듯 한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집 자체는 지은 지 꽤 됐지만 내가 귀국하기 전에 리모델링해서 딱히 불편할 건 없을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 불편한 건 곧장 얘기해. 그때그때 고치면 되니까. 그리고 청소랑 정리를 도와주시는 분은 낮에 내가 집을 비웠을 때만 들르셔. 마주치는 게 불편하면 따로 시간을 정해도 돼.”
일부러 이쪽이 반박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게 분명한 한의 태도에 신우는 재빨리 그의 팔을 잡았다.
“잠깐!”
그제야 한이 일방적인 선고를 멈췄다. 그러곤 천천히 이쪽을 돌아본다.
할 말 있으면 하라는 듯 태연한 그 표정에 겨우 본론을 꺼냈다.
“우리…… 집이라니, 무슨 뜻이야?”
“들은 대로.”
“그러니까, 왜…….”
뒷말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지만 갑자기 이 집에 왜 데려온 거냐는 신우의 질문을 한은 정확히 알아들었다.
“말했잖아. 못 도망치게 확실하게 해 둘 거라고.”
추상적인 설명이었지만 충분히 그 의미를 이해한 듯 신우가 난감해하자 한이 차분한 시선으로 신우를 내려다본다.
“천천히 가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성질에 안 맞아.”
여전히 뜻 모를 말을 남긴 채 한이 신우의 팔을 잡아당겨 바로 앞에서 시선을 맞춘다. 그러곤 신우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마지막 말을 던진다.
“널 안을 거라고.”
너무나 노골적인 한의 답에 그렇지 않아도 빠르게 뛰던 심장이 미친 듯이 박동하기 시작했다. 심장뿐 아니라 전신의 혈관들이 맥박 치는 느낌에 멍하니 한을 응시하자 한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조금 전과 달리 열기를 띤 그 눈빛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뺨은 뜨거워진 채였다. 귓가도 목덜미도 달아오른 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선택할 기회를 줄게. 하지만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내 결정은 그대로일 거야. 내가 이 집에 교제 중인 사람을 데려온 건 네가 처음이고 할아버지께 인사까지 드린 것도 네가 처음이야. 그걸로 내 의사는 분명히 전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나는 증명과 확신을 원해.”
분명 한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귓가에서 울려 왔지만 그 소리가 정확히 머리에 입력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너무 시끄럽고 어지럽다. 지나치게 몰아치는 상황에 이 모든 게 환상인지 현실인지도 잘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머리가 하얗게 비어 버린 채 두근두근하는 심장 소리를 듣고 있던 사이 달아오른 뺨 위로 손길이 닿았다.
늘 자신보다 따뜻하다 느꼈던 한의 체온이 지금만은 서늘하게 느껴져 움찔했다. 그 순간 뺨을 잡아 고개를 들어 올린 한이 천천히 입술을 겹쳐 왔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당황할 틈도 없이 곧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혀가 입천장을 핥으며 입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너무 깊은 키스에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점점 달아오르는 몸 안의 열기와 요란한 심장 소리에 전신이 진동했다.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 더는 버티고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아니, 의식 자체가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남아 있는 건 뜨겁다는 감각뿐이었다.
시끄럽고 어지럽고 뜨겁다.
모든 감각이 과하게 예민해짐과 동시에 의식은 둔해진 지 오래였다.
천장의 조명이 너무 환해 눈이 아프다든가, 위에서 눌러 오는 무게감에 가슴이 무겁다든가, 아니면 어느새 알몸이 된 상태인 게 수치스럽다든가 하는 생각은 할 겨를도, 여유도 없었다.
한껏 예민해진 피부 위로 느껴지는 감각은 생생했지만 의식은 현실에서 붕 뜬 채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지금 벌어지는 일들 자체가 지나치게 비약적이라 비현실적이었다. 그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자신의 허용 범위를 넘어간 채였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계속되는 키스와, 목덜미와 등 그리고 허리와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는 손길에 연신 입술 사이로 낮은 신음이 터졌다. 그 탓에 숨을 쉬기 힘들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고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어떻게 숨을 내쉬어야 하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숨을 편히 쉬고 싶다는 마음만이 간절했다.
갑갑함에 몸을 뒤틀며 헐떡거리자 그를 눈치챈 듯 한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눈가에 입을 맞춘다.
“괜찮아. 천천히 숨을 내쉬어.”
그 말에 겨우 숨을 고르며 천천히 내뱉으려 했지만 순간 가슴에 닿은 한의 입술에 다시 숨을 멈췄다.
목덜미를 지나 어느새 유두를 부드럽게 빨아들이며 유두 끝을 희롱하는 혀의 감촉에 머릿속이 오싹해졌다.
방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감각에 허리를 비틀며 몸부림을 친 순간 작은 신음이 터져 나갔다.
아주 작지만 확연한 쾌감을 담은 그 소리에 스스로도 놀라 움찔했다. 그러자 한이 더욱 세게 유두를 빨아들였다.
그 힘에 몸을 비틀며 다시 한번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간신히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그러다 이번엔 유두 끝을 깨물렸다.
“웃!”
방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자극에 저도 모르게 높은 신음을 내질렀다.
숨은 더욱 거칠어졌고 전신이 저릿거렸다.
당장이라도 사정할 것 같은 기분에 거친 숨을 토해 내며 겨우 버티고 있자 한의 입술이 유두에서 떨어져 나갔다.
갑자기 멀어진 온기에 저도 모르게 아쉬운 듯 그를 올려다보자 어느새 몸을 일으킨 한이 귀찮다는 듯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던진다.
그 모습에 다시 얼굴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환한 빛 아래에서 다급히 셔츠를 벗어 던진 한의 상체는 운동을 그만둔 지 오래되었음에도 여전히 단단했다. 가끔 그와 스치듯 닿을 때마다 느꼈던 어깨와 팔의 섬세한 근육들이 물결치듯 아름답게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군살 하나 없이, 근육만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몸을 홀린 듯 바라보는 사이 한이 벨트를 푼 뒤 곧 바지의 지퍼를 내렸다. 그러자 그 아래로 선명한 성기의 형태가 드러났다.
속옷 안에서 이미 안달 난 듯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의 형태에 몸이 굳었다.
쓸데없다 싶을 정도로 큰 덩치만큼 성기 역시 거대했다.
적나라한 그 형태를 빤히 보고만 있자 그 시선을 의식한 듯 한이 허리를 숙여 다시 한번 입을 맞춘다.
괜찮다고 달래듯 입을 맞추고 허리와 등을 쓸어 주는 손길에 오히려 더욱 몸에 불이 붙었다.
전신을 감싸는 듯한 그의 피부와 몸 전체를 묵직하게 뒤덮어 오는 무게감, 그리고 그의 체온에 심장이 더욱 빠르게 내달린다.
그리고 자신의 성기 역시 아플 정도로 발기해 갔다.
모든 게 처음이라 생소하고 낯설기만 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마치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처럼 손을 뻗어 한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리곤 어떻게든 해 달라는 듯 허리를 들썩이자 연신 목덜미에 입을 맞추던 한이 손을 뻗어 허벅지 안쪽을 부드럽게 쓸어 올린다.
“윽!”
타인의 손길이 닿은 적 없는 곳을 스치는 커다란 손에 놀라 반사적으로 다리를 오므리려 하자 그가 허벅지 안쪽을 잡아 벌린다.
환한 불빛 아래에서 은밀한 부위를 드러내는 음란한 자세에 얼굴로 피가 몰린다. 수치스러움에 붉어진 얼굴을 손등으로 가리며 작게 속삭였다.
“……불, 꺼 줘…….”
도저히 한을 볼 자신이 없어 그렇게 부탁하자 한이 도리어 다리를 벌린 채 그 사이로 몸을 기대 온다. 그와 함께 바로 자신의 성기 위로 잔뜩 발기한 한의 성기가 닿아 왔다.
너무나 생생한 그 감촉에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보자 이미 단단해진 채 쿠퍼액을 흘리고 있는 한의 성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느새 속옷 밖으로 드러난 한의 성기는 혈관까지 불거진 채 완전히 발기해 있었다.
윤곽으로 드러난 형태보다도 더 크고 흉악해 보이기까지 한 그 성기에 마른침을 삼켰다.
심장이 조금 전보다 더 세게 뛰어 대며 만취한 것처럼 머리까지 어지러워졌다.
눈으로, 그리고 피부 위로 느껴지는 것들에 벌써 기가 질려 바짝 굳어 있자 한이 다시 몸을 숙여 유두를 빨아들인다.
동시에 몸이 튀어 올랐다. 척추를 타고 흐르는 전율 같은 쾌감에 한의 머리카락을 헤집자 한이 유두를 핥다 곧 이를 세운다.
한의 타액으로 젖어 든 유두의 끝을 이로 깨물며 혀끝으로 유두 끝을 핥는 감촉에 짤막한 비명이 터졌다.
“그만……!”
당장이라도 사정할 것 같은 감각이 치밀어, 혀로 희롱하는 그를 필사적으로 밀어 내려 했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힘이 들어간다 해도 애초에 악력 차이가 심하다. 자신이 그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한아…….”
차오르는 숨과 함께 내뱉은 애원에 한이 다정하게 머리를 쓸어 넘겨준다.
“괜찮아. 기분 좋은 거야.”
전혀 이상한 게 아니라는 위로와 함께 자신을 내려다보는 한의 눈빛에는 열기가 담겨 있었다. 노골적인 정욕이 담긴 그 시선에 얼굴 위로 피가 몰려 너무 뜨거웠다.
차마 더는 한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을 수 없어 고개를 돌리자 한이 귓불을 깨문다. 예민해진 귓가를 스치는 뜨겁고 습한 한의 숨결에 몸을 뒤트는 순간 그의 손이 엉덩이골 사이를 더듬기 시작했다.
확연한 의도를 가진 그 손길에 놀라 다시 한을 돌아보자 어느새 손에 든 젤을 손가락 사이로 듬뿍 흘린 한의 손이 뒤에 닿아 왔다.
차가운 그 감촉에 본능적으로 몸을 굳히자 한의 손끝이 달래듯 입구를 매만진다. 그러곤 작게 속삭인다.
“괜찮아.”
“…….”
“아프지 않을 거야.”
말과 동시에 차가운 손끝이 좁은 구멍 사이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며 구멍 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이 내벽을 더듬으며 서서히 안쪽을 벌리자 본능적으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겨우 부드럽게 풀려 가던 몸이 딱딱하게 굳자 한이 왼손으로 다리를 들어 올려 허벅지 안쪽에 입을 맞추었다.
“힘 빼. 안 그러면 상처가 날지도 몰라.”
여전히 빡빡한 안쪽을 손가락으로 휘젓던 한이 작게 속삭이며 계속해서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그 목소리와 그의 손길에 최대한 몸에서 힘을 빼려 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작은 음성으로 속삭이던 한은 겨우 밀어 넣은 손가락 끝으로 내벽을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길을 들이듯, 그의 성기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천천히 뜨거운 내부를 손으로 훑던 한은 잠시 손가락을 빼낸 뒤 단숨에 두 개의 손가락을 그의 안으로 찔러 넣었다.
“흐웃!”
낯선 이물감과 생리적인 거부감에 눈물을 흘리며 작게 신음하자 내벽을 더듬던 손가락이 질척거리는 소음을 내며 안쪽을 휘저어 가기 시작했다.
음란하기 짝이 없는, 젖은 소음이 방 안을 크게 울렸다. 수치심을 부추기는 그 소리와 몸속에서 움직이는 한의 손가락에 이를 악문 채 통증을 삼켰다.
따끔거리고 아프다. 그리고 거북하고 불편하다.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은 감각에 헐떡거리는데 안쪽을 헤집던 손끝이 어딘가에 스쳤다.
순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짜릿한 쾌감에 높은 비명이 터졌다.
“하윽!”
크게 울리는 신음에 한의 손끝이 다시 한번 그 부분을 긁어내린다.
조금 전보다 더 강한 자극에 발버둥을 치듯 몸을 흔들며 허리를 비틀었다.
사정감과는 전혀 다른 쾌감에 몸부림치는 사이 내벽을 매만지던 손가락이 빠져나간다.
순간 저도 모르게 한을 올려다보자 한이 괜찮다는 듯 웃어 보인다.
“괜찮아. 안 멈출 거야.”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안다는 듯 읊조린 한이 손가락 개수를 늘려 다시 한번 구멍을 열었다.
강제로 내벽을 벌린 손가락이 주는 압박감에 숨을 멈췄지만 기대감이 더 컸다. 아직 해소되지 않는 욕망에 어서 다시 한번 그곳을 찔러 주길 기다렸지만 안쪽을 벌리고 들어온 한의 손끝은 이번엔 그 부위를 만지지 않은 채 안을 천천히 넓혀 갈 뿐이었다.
그게, 안타까웠다. 초조하고 아쉬웠다.
한 번만 더 그 부분을 찔러 주면 사정할 것 같은데 그 부근을 스치기만 할 뿐 다시 세게 긁거나 찔러 주지 않아 몸이 절로 달았다.
이미 자신의 성기 역시 발기한 채 쿠퍼액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성기가 젖어 들 정도로 흐르는 액체에 어서 사정하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더 버티다가는 미칠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성기로 손을 뻗는데 한의 손이 손목을 잡아 저지했다.
“쉿, 아직이야. 아래 구멍이 풀리면 더 기분 좋게 해 줄게.”
귓가에 그렇게 속삭인 한이 다시 내벽을 넓히려는 듯 안을 휘적거렸다.
그와 동시에 예민한 부분을 스쳐 짤막한 교성을 토해 내자 한도 더는 참기 힘든지 손놀림이 다급해졌다.
따끔거리는 고통은 여전했지만 그보다는 어서 그곳을 한 번 더 만져 주기를 바라며 교태를 부리듯 한의 목을 끌어안자 한이 귓가에 낮은 신음을 뱉어 낸다.
그와 동시에 한 번 더 안쪽을 세게 찔렀다.
쿨쩍거리는 소음과 함께 완전히 벌어진 내벽에 수치심을 느낄 새도 없이 크게 교성을 내뱉자 손가락이 빠졌다.
조금만 더 하면 닿을 거란 생각에 애가 타 저도 모르게 한의 어깨에 손톱을 세웠다.
“더, 해 줘…….”
가쁜 호흡에 끊어질 듯한 음성으로 그렇게 애원하는데 귓가에서 낮은 신음이 울려 왔다.
“젠장…….”
속을 알 수 없는 욕설과 함께 잔뜩 벌어진 구멍 입구로 단단한 선단이 닿았다. 감촉만으로도 뜨겁고 묵직한 성기가 입구에 닿는 순간 오싹하니 몸이 떨려 왔다.
두려움과 기대감이 교차하는 복잡한 기분이었다. 윤활제로 흠뻑 젖어 벌어진 입구에 닿은 한의 성기가 어서 안으로 들어와 그 부분을 쑤셔 주었으면 하면서도 동시에 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치솟았다.
무지하기에 그 모든 게 어렵고 무서웠다. 한의 성기가 몸 안에 들어올 수나 있을까 하는 걱정에 살짝 몸을 굳히고 있던 중 입구 부분을 맴돌던 한의 성기가 천천히 안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느긋한 몸짓으로, 한은 분명히 자신을 배려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압박감은 어쩔 수 없었다. 손가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부피와 그 뜨거움에 전신이 파르르 떨려 왔다. 그리고 숨이 막혔다.
마치 내장을 밀어 올리는 듯한 느낌에 숨을 멈춘 채 몸을 뒤틀자 한이 입을 맞춰 준다.
괜찮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아이를 어르는 듯한 그 키스에 온몸에 힘을 준 채 버티자 잠시 멈춰 있던 한의 성기가 순식간에 안쪽에 박혀 들었다.
“아읏!”
내벽을 가득 채우다 못해 아랫배까지 들어찬 듯한 착각에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떨자 한이 아랫배를 지그시 누른다.
“들어간 거 느껴져?”
살짝 눌린 것뿐인데도 그에 응하듯 아랫배가 경련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와 함께 탐욕스럽게 한의 성기에 달라붙은 내벽이 수축하고 있었다.
안이 가득 차 숨을 내쉬기도 버거웠지만 그래도 어서 다시 찔러 주길 바라며 먼저 허리를 움직여 한의 성기를 조이자 깊이 박혀 있던 성기가 빠져나간다.
그러곤 빠르게 다시 안쪽으로 박혀 온다.
선단 끝이 한곳만을 노리고 찔러 오자 더는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곳을 찔린 게 너무 좋아 수치도 모른 채 교성을 내지르며 더 해 달라는 듯 허리를 흔들었다.
“거기…… 좋아!”
더는 창피하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남아 있는 건 욕망과 본능뿐이었다.
“네 안 기분 좋아.”
낮은 신음을 토해 내며 한이 기쁜 듯 속삭이는 음성에 절로 그의 성기를 조였다.
그건 본능이었다.
더한 쾌감을 위해 한의 성기를 조이며 어서 더 해 달라고 하자 다시 한번 아슬아슬하게 허리를 빼낸 한이 이번엔 느긋하게 안쪽을 비비듯 내벽을 밀어 올린다.
그 느긋한 움직임에 몸이 달아올랐다. 안을 짓누르며 문지르는 성기의 움직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신우는 아슬아슬한 부분에서 계속해서 지연되는 사정감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한에게 속삭였다.
“가고 싶어. 빨리…….”
차마 다음 말은 이어지지 못한 채 끊겼지만 한은 신우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아들을 듯 이번엔 거칠게 안쪽을 쳐올렸다.
쾌감이 이는 곳을 스치며 안쪽을 깊이 찌르는 움직임에 신우가 짤막한 비명을 흘리며 한의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흔들자 한이 그대로 전신을 뒤덮어 왔다. 그러곤 그대로 몸을 밀어 올렸다.
성기를 가장 깊은 곳까지 박아 넣은 채 몸 전체를 밀어붙이는 힘에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한의 성기가 내벽 안에 가득 차 그 전체를 짓누르고 있어 어디가 좋은 건지도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저 미쳐 버릴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기분이 좋다 못해 가장 근본적인 어딘가가 망가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약을 하면 이러할까 싶을 정도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안에…… 더 찔러 줘……. 윽!”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흘러 나간 그 말에 한의 성기가 드디어 안에서 물러났다. 그러곤 이내 안쪽을 세게 찔러 올린다.
조금 전과는 또 다른 깊은 결합에 숨을 멈춘 채 몸을 굳히자 다시 한번 빠져나간 성기가 이번엔 방향을 바꿔 예민한 곳을 찔러 올린다.
“그만!”
온몸의 신경이 예리하게 곤두선 느낌에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을 치자 기다렸다는 듯 또 한 번 안쪽 깊이까지 박혀 온다.
“아윽!”
아랫배까지 파고든 듯 깊은 결합과 함께 내벽 안으로 정액이 퍼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자신 역시 사정을 했다.
하지만 전신에 쾌감이 번지는 것과 달리 머리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제대로 인지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리고 이내 몸이 축 처진다.
그사이 깊이 입을 맞추던 한이 걱정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괜찮아?”
“…….”
걱정스러운 한의 물음에 답할 정신이 없었다. 너무 노곤했다.
“쉿, 이제 쉬어. 이제 여기가 네 집이니까.”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까무룩 의식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자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너무 피곤했다. 최근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특히 오늘은 모든 일이 마치 꿈을 꾼 듯 비현실적이었던지라 맨정신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지금은 일단 쉬기로 했다.
“이제…… 원히…….”
막 잠에 빠져들려는 순간 귓가에서 한의 음성이 드문드문 들려왔지만 불행히도 그의 말이 머리까지 와 닿지는 않았다.
그저 지금은 자고 싶을 뿐이었다.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건 숙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