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화창한 햇살이 내려오고 있었다.
유난히도 햇살이 좋은 오전, 한과 함께 출근 중인 신우는 계속해서 입을 다문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한은 그의 말대로 집으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빌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함께 출근한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막상 차 안에 단둘이 있으려니 쑥스럽고 어색해 제대로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오늘 날씨 너무 좋네. 놀러 나가면 딱이겠는데?”
“……응.”
한의 말에 작게 맞장구치면서도 신우는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과감하게 그에게 ‘연애하자.’라고 선언한 건 자신이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고 제정신이 돌아오자 내가 왜 그랬을까, 라는 생각에 자괴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 순간 뭔가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 오늘은 종일 사무실에 있을 거야. 점심은 간장게장이고 저녁은 감자탕. 오늘부터 저녁도 나랑 같이 먹는 거다? 내가 예약.”
식사 때마다 맛집을 순회할 것 같은 한의 기세에 신우는 순간 저도 모르게 어이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어색함을 황당함이 이겼다.
“넌 먹는 데에 너무 집착하는 것 같아.”
“우리 집안은 원래 먹는 데 집착해. 식도락이야말로 인간이 느끼는 가장 원초적인 즐거움이니까. 입이 즐거워야 마음도 즐겁지. 피곤하고 슬플 때 맛있는 음식 먹으면 우울함이 싹 사라지거든.”
“미식가의 소견이야?”
“미식가라곤 생각 안 해. 그냥 맛있는 걸 좋아하는 거지. 굳이 까다롭게 따져서 먹지는 않거든.”
그건 그렇다고 신우도 인정했다. 한은 그다지 까다로운 편은 아니었다. 까다롭다기보다는 제대로 즐겁게 먹자는 주의일 뿐이지, 재료나 양념 같은 걸 섬세하게 따지고 골라 먹는 편은 아니었다. 그냥 그의 입맛에 맞으면 되는 듯했다. 어떻게 보면 그저 맛집을 찾아다니는 과정을 즐기는 것도 같았다.
결국 한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즐거움’이었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건,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질척거리는 것도 질질 짜고 매달리는 것도 미련을 갖고 귀찮게 하는 것도 안 된다.
절대 어리광부리지 말자고 신우가 속으로 다짐하던 사이, 차는 어느새 세명 빌딩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두운 길을 돌아 엘리베이터 입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주차한 한은 이내 시동을 끄곤 안전띠를 풀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신우 역시 안전띠를 풀고 차에서 내려서자 먼저 내린 한이 신우의 옆으로 다가와 신우의 손을 잡는다.
“연애의 시작은 손잡기.”
싱긋 웃으며 아예 깍지를 끼곤 손을 잡아 흔드는 한을 신우는 당황한 얼굴로 쳐다봤다.
“여기 회산데…….”
“괜찮아. 이 바쁜 출근 시간에 남자 둘이 손을 잡고 가든 팔짱을 끼고 가든 신경 쓰는 사람 없어. 당당하게 굴면 아무도 이상한 걸 몰라.”
“……하지만…….”
“엘리베이터 내려온다.”
신우가 뭐라 하려는 순간 한은 재빨리 신우를 잡아끌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섰다. 강한 그의 힘에 끌려가면서도 신우는 불안한 듯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출근 시간이다 보니 누가 보지 않을까, 아는 사람이 보면 어떻게 하나, 부산스레 사방을 돌아보는 신우의 시선에 한이 걱정 말라는 듯 웃는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출근 시간에는 다들 남의 일엔 관심 없다니까? 그리고 있어도 어쩔 거야?”
그건 너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라고 말하려는 순간 막 주차장에 들어온 차에서 내리는 인재가 보였다. 예상했던 것 중 가장 최악의 상황에 신우가 황급히 손을 빼려 하자 한이 더 세게 손을 쥐며 보란 듯이 마주 잡은 손을 들어 올린다.
“일찍 오네?”
“뭐가 일찍이야? 정시 출…….”
딱 맞게 왔다고 하려던 인재는 두 손을 꼬옥 마주 쥔 채 흔들흔들하고 있는 한과 신우를 보곤 말을 멈췄다. 그러곤 잠시 인상을 찡그렸다 다시 표정을 풀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신우에게 인사를 건넸다.
“일찍 오셨네요. 한이랑 같이 오셨나 봐요.”
“네. 안녕하세요?”
“네. 일단 안녕합니다, 아직까지는요. 엘리베이터 왔는데, 타죠.”
두 사람이 손을 꼭 잡고 있는 광경에도 인재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먼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 두 사람에게 손짓해 보였다. 너무나 평온한 그의 태도에 신우는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올라가자.’라며 신우를 이끌었다.
한에게 끌려 엘리베이터에 타면서도 신우는 계속해서 앞에 선 인재의 눈치를 살폈다.
한이나, 앞에 선 인재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신우는 굉장히 이 상황이 신경 쓰였다. 1층에 도착하면 사람들이 더 탈 게 뻔해 은근슬쩍 손을 빼려 하자 한이 더 세게 손을 잡아 온다.
그사이 10층 버튼을 누른 인재가 태연하게 한에게 말을 건넸다.
“너, 그 집 스케치는 끝났어?”
“응.”
“벌써?”
“그 부부 특이하다고 했잖아. 독특해서 금방 이미지가 잡혔어. 재미있을 거야.”
한이 자신만만하게 답하는 것과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멈추며 곧 문이 열렸다. 순간 신우가 손을 움찔하자 인재가 옆으로 살짝 비켜서 한과 신우가 마주 잡은 손을 가려 줬다.
인재의 친절에 신우는 안도했지만 한은 조금 못마땅한 얼굴로 인재를 내려다봤다.
“너 너무 우리 앞에 선 것 같다?”
한이 은근슬쩍 인재에게 옆으로 비켜서라는 말을 건넨 순간 인재가 아예 살짝 다리를 더 벌려 못 박힌 듯 그 앞을 사수한다.
“사람이 많을 때는 매너지.”
“옆으로 좀 비켜서도 될 것 같은데?”
“응, 안 돼.”
인재가 단호히 답하는 사이 열린 문 안으로 우르르 사람이 몰려들었다. 금세 만원이 된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이 신우의 손을 더욱 세게 쥐며 옆 공간으로 이동하려 하자 인재가 재빨리 그 앞을 마크한다.
“야…….”
너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따지는 듯한 한의 음성에도 인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살짝 흘러내린 안경을 올려 쓸 뿐이다.
“내부는 어떻게 할 거야?”
한의 불만을 무시한 채 인재가 대화의 방향을 돌리자 한이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대꾸한다.
“화려하게.”
“네가 화려하다고 할 정도면 어느 정도길래?”
“소파와 의자는 박스터(Baxter), 침대와 큰 가구들은 포라다(Porada) 선반과 테이블은 리바(Riva) 1920.”
인테리어 전공자들이라면 들어 봤을 법한 하이엔드 브랜드의 나열에 신우는 눈을 크게 떴다. 어마어마한 가격대도 가격대지만 한국에 수입사들도 드문 브랜드라 카피 제품이나 수없이 봤지 진품은 본 적이 없었다.
그걸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데에 신우가 놀라는 사이 인재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컨펌 나오길 기대할게.”
나도 보고 싶기는 하니까, 라는 인재의 답과 동시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며 우르르 탔던 사람들이 내렸다. 그 뒤로도 층층마다 사람이 내리며 내부가 꽤 한산해졌다. 드디어 숨통이 트이는 기분에 신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사이 여전히 두 사람 앞에서 버티고 서 있던 인재가 은근히 말을 돌렸다.
“오늘 바쁠 거야.”
“알아.”
“신우 씨도 바쁠 거예요.”
한과 대화를 나누던 인재가 갑자기 신우를 향해 말을 걸자 신우가 당황해 인재를 바라보았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나 의아했지만 일단 알겠다고 대꾸했다.
“……네.”
“그리고 오늘도 바쁘지만 앞으로 더 바빠질 거예요. 일이 없으면 만들어 드릴 테니까요.”
인재의 말은 언뜻 듣기엔 바쁠 테니 각오하라는 의미 같았지만, 신우에게는 쓸데없는 짓 하면 딴생각 못 하게 바쁘게 만들어 주겠다는 경고로 여겨졌다.
그리고 한도 그걸 알아들은 듯했다.
“지금 나 협박하냐?”
“알아들었다니 다행이네.”
인재가 순순히 수긍하며 눈짓한 순간 10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내려서며 인재가 한에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정한, 넌 오전 미팅 끝나고 나 좀 보자.”
한과 함께 출근한 뒤 컴퓨터 앞에 앉아 어제 못 끝낸 일들을 이어 가려던 신우는 갑자기 들려온 알림음에 서둘러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커피 타 줄게. 내 사무실로 와.]
짤막한 그 메시지에 시선을 돌려 한의 사무실 쪽을 바라보자 한이 커피를 내리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미 근무 시간이 시작된 후라 조금 망설이며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다행히 아무도 이쪽으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유리 벽 덕에 사무실 전체가 지나치게 오픈되어 있는 만큼 오히려 주변 상황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남에게 무관심한 그 분위기에 용기를 얻은 신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그러곤 천천히 복도를 가로질러 한의 사무실로 가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한이 어서 들어오라는 듯 손목을 까닥인다.
그를 보자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연애를 안 해 본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기분이 붕 떴다.
절제되지 않는 감정에 자꾸만 떠오르는 미소를 억누르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새하얀 자기로 만든 머그를 양손에 든 한이 웃으며 자신을 바라본다.
“우유 거품 듬뿍에 시럽 잔뜩 넣은 라떼, 괜찮지?”
“너, 바리스타 같아.”
오늘따라 유독 포멀한 차림이라서인지 진짜 바리스타 같다는 생각에 장난하듯 말을 던지자 한이 유쾌하게 받아쳤다.
“이탈리아에 간 김에 좀 배웠거든. 앉아.”
테이블 위에 커피를 한 잔 내려 두곤 작은 소파에 앉은 한은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신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한의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환한 미소와 강렬한 시선에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던 신우가 겸연쩍은 듯 말을 건넸다.
“왜?”
“예뻐서.”
아이처럼 해사한 얼굴로 민망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한 탓에 신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녀석은 어쩌면 저렇게도 당당한 얼굴로 창피한 말을 하는 걸까, 하는 생각에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손에 든 컵만 빤히 내려다보자 한이 슬슬 눈웃음을 흘렸다.
“네가 커피 잔 들고 있는 게 참 좋아. 예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고, 굉장히 따뜻해 보이거든.”
계속되는 노골적인 한의 언어 공격에 신우는 당황해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다.
“……너, 너무 립 서비스 심한 거 아냐?”
“립 서비스라니, 완전 진심인데? 넌 늘 추워 보였거든. 그래서 너만 보면 커피를 쥐여 주고 싶었나 봐. 커피를 들고 있으면 따뜻해 보여서 좋거든. 살짝 눈을 내리까는 건 더 좋고.”
조금의 과장도 없는 한의 진심이었다. 신우도 그건 알아들었다. 그래서인지 얼굴이 더 화끈거렸다.
“더 할 말 없으면 나 일하러 갈게.”
그렇지 않아도 들떠 있는데 한과 계속 대화를 하다가는 정신이 나가 종일 아무 일도 못 할 것 같았다. 그 생각에 신우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한이 그를 만류했다.
“딱 5분만 더 있다 가. 네 얼굴 봐야 일도 더 잘될 것 같아.”
“……같이 출근했잖아.”
“그땐 옆얼굴만 봤잖아.”
그건 그렇지만……, 하고 신우가 머뭇거렸다. 한의 당당한 대꾸에 말문이 막혔다.
“너, 회사에서 막 이래도 돼?”
“응. 안 된다면 때려치울 거니까.”
어차피 내 회사야, 라고 중얼거린 한이 싱글벙글 웃으며 신우에게 커피를 권한다.
“마셔 봐. 맛은 괜찮을 거야. 다들 괜찮다고 했어. 내가 의외로 재능이 많더라고.”
자신감 넘치는 한의 권유에 신우는 웃으며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한 모금 마신 순간 느껴지는 알싸하고 부드러운 커피 맛에 신우는 행복한 듯 웃었다.
그 표정에 한이 테이블 위로 몸을 숙이며 되물었다.
“어때? 맛있지?”
“응.”
“그러니까, 네 커피는 내 거.”
“응?”
“아침 점심으로 커피 타 줄게. 다른 사람이 주는 커피는 마시지 마.”
“뭐야, 그건?”
“하여간 넌 내 거, 난 네 거. 그러니까 네 커피도 내 거, 밥도 내 거.”
“애 같아.”
“자주 들어, 그런 말.”
마냥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그의 얼굴에 신우는 조금 의외라는 듯 한을 바라봤다. 연애를 하자 했더니 한은 마음껏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장난도 잘 치고 웃기도 잘하고. 원래도 그런 녀석이긴 했지만 체감되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괜스레 가슴 안이 간질거리는 기분에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넘기자 미소를 머금은 한이 감상하듯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다.
“역시, 매일 보니까 좋다.”
“그러게.”
“우리 회사에 취직할래, 아예?”
뜻밖의 제의에 커피를 마시던 신우가 잠시 머뭇거리다 웃으며 그 제안을 거절했다.
“미안하지만 사양할게. 캐드 박봉이야. 프리가 훨씬 나아.”
“한국은 그래?”
“응.”
프리 일은 건당으로 치기 때문에 꽤 수입이 되지만 취직을 할 경우엔 말 그대로 노가다에 박봉이다. 밤샘은 기본이고 휴일까지 포기해야 할 때도 많다. 그러면서도 월급은 적다. 취직을 하면 안정감은 들겠지만 그 월급으로는 자기 한 몸 살기도 버겁다.
전 직장이 도산한 후 협력사에서 취직 제의가 몇 번 오긴 했지만 거절한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지금 일하는 업소는 꽤 페이가 좋은 편이었고 거기에 프리 일까지 더해진다면 이자 정도는 충분히 낼 수 있으니까.
씁쓸한 현실을 되새기던 신우가 조용히 잔을 내려다보자 한이 커피 잔을 들며 진지한 얼굴로 말을 건넨다.
“그럼 같이 살까?”
그 말에 막 커피를 한 모금 더 삼키려던 신우는 사레에 걸려 콜록거렸다.
한이 성질이 급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그 예상을 훨씬 벗어난 일이었다.
“너, 지금 우리 사귀기로 하고 세 시간밖에 안 지난 거 알고 있어?”
3일도, 3개월도 아니라 3시간이라고 신우가 기가 막힌 얼굴로 되묻자 한이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같이 밤을 보냈으면 책임져야지.”
“넌 하룻밤 같이 보낸 사람 다 책임졌어?”
네 과거를 떠올려 보고 그런 말을 하라고, 신우가 지적하자 한이 고개를 내젓는다.
“네가 나에 대해서 잘못 아는 게 있는데, 내가 하룻밤을 꼬박 같이 보낸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뜻밖의 말에 신우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진짜?”
“난 사람하고 들러붙어 있는 거 싫어해. 그래서 어지간해서는 같이 안 자.”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다고, 신우는 한의 과거 습성을 떠올렸다. 사교적인 성격에 퍼스널 스페이스는 좁은 듯했지만, 그렇다고 누군가와 붙어 다니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옆에서 사람들이 거치적거리는 걸 싫어하는 편 같았다.
“하여간, 그건 아닌 것 같아. 너무 빨라.”
“그럼 언제쯤이면 돼?”
내일이면 되냐며 한이 눈을 반짝인다. 그 모습이 마치 말 안 듣는 어린아이 같아 신우는 기이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어른스럽고 냉정한 듯하다가도 한순간에 장난스럽고 천진해진다.
어쩌면 그래서 그가 잔인한 건지도 모른다. 한은 갖고 싶은 건 반드시 갖고, 그걸 갖고 놀다 질리면 미련 없이 버렸다. 호기심과 본능에 솔직한, 악동 같았다.
“……같이 사는 건 좀 천천히 생각해 보자. 난 너랑 달리 느려. 그렇게 빠르면 못 따라가.”
신우가 솔직하게 지금도 너무 버겁다는 말을 돌려 하자 한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듯 커피를 홀짝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빨리 침 발라 놔야 하는데…….”
“……응?”
“우리 할아버지가 내 거다 싶으면 무조건 잡아서 결혼부터 하라고 했거든. 할아버지도 그렇게 결혼하셨어. 길 가다 첫눈에 할머니한테 반해서 그대로 찾아가서 청혼하고 거절당하니 그 집 파산시키고 강제로 결혼하신 거야.”
태연한 얼굴로 그의 조부의 범법 행위에 가까운 과거사를 고백하는 한을 본 신우는 이번에는 진심으로 경악했다.
“처음 만난 여자를 따라가서 청혼하셨다고?”
“응. 그 시절에는 사실 연애고 뭐고 없었으니까. 뭐, 할아버지는 그때도 꽤 유명한 난봉꾼이셨다는데 할머니를 보시는 순간 ‘이 사람이다.’하셨대.”
너무나 한의 조부다운 그 행동에 신우는 질린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희 할아버지 되게 무섭고 재미있을 것 같아.”
“타인에겐 무서운 게 99%, 재미있는 게 1%겠지만 나한테는 재미있는 게 100%야. 난 할아버지가 이해되거든. 무섭지는 않아, 전혀. 의외로 속이 훤히 보이시니까.”
“너랑 많이 닮으셨나 봐.”
“나랑 똑같다니까. 그러니까, 넌 할아버지가 보면 안 돼.”
그러고 보니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 기억에, 신우가 의아한 듯 한을 바라본다. 그게 무슨 의미냐는 신우의 눈빛에 한이 그런 신우가 귀엽다는 듯 웃는다.
“아직도 모르겠어, 그걸?”
“응.”
“내가 좋아하면 우리 할아버지도 엄청 좋아할 게 뻔하거든. 지기 싫어하는 것도 똑같은 데다, 마음에 드는 건 서로 가지려고 자주 싸워. 널 마음에 들어 하시면 귀찮게 구실지도 몰라.”
꽤 자세한 한의 설명에도 신우가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표정을 내비치자 한이 친절히 설명을 계속했다.
“할아버지나 나나, 둘 다 좋아하는 건 절대 공유 안 해. 내 거는 내 거. 죽어도 내 거. 절대로 내 거. 자식이고 가족이고 건들면 죽어.”
딱 한다운 그 말에 신우는 웃으며 시선을 내렸다. 동생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한은 장남보다는 외동의 성향이 강했다. 할아버지 아래서 외동처럼 자라서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타고난 기질이 그런 듯했다.
어쩌면 사람의 성격은 이미 타고난 게 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던 신우는 이내 휴대폰으로 시각을 확인하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5분 지났어. 그만 가 볼게.”
“그래. 뭐, 여기서도 보이니까. 점심 같이 먹는 거다?”
“응. 커피 잘 마실게.”
“더 마시고 싶으면 와. 얼마든지 타 줄게.”
“그래.”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띤 채 마지막 인사를 마친 신우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행복한데, 분명히 과분하다 싶을 정도로 행복한데 가슴 한쪽이 어쩐지 서늘한 느낌이었다.
자리로 돌아와 분주히 손을 움직이던 신우는 대충 일을 마무리하곤 겨우 숨을 돌렸다. 이제 최종 확인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검수를 위해 화면을 확대하는데, 문득 휴대폰의 벨 소리가 울려 왔다.
정현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누르자 역시나 수화부에서 가벼운 음성이 툭 튀어 오른다.
- 깨어 있었네?
“응.”
- 야, 잘됐다. 나 외근 나와서 시간 좀 남는데 같이 밥 먹자.
그 말에 그제야 정현에게 출근하게 됐단 이야기를 안 한 게 떠올랐다. 한의 문제로 정신이 없어 정현에게 연락할 여유가 없었다.
“어…… 그런데, 나 지금 회산데…….”
- 회사? 일 받으러 간 거야?
“아니. 일이 바빠서 열흘간 근무하기로 했어. 당분간은 사무실에 나와서 일할 거야.”
- 어? 프리도 그래?
“가끔 그럴 때 있어.”
- 아, 그럼 한이도 같이 있겠네? 그럼 같이 점심 먹자.
갑작스러운 정현의 제안에 신우는 고개를 돌려 한의 사무실을 바라봤다. 투명한 유리 벽 너머에서 한은 팀장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슬쩍 그의 눈치를 살핀 뒤 다시 시선을 돌린 신우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잠시 망설였다. 지금 한의 기세로 봐서는 정현과 만나면 그 즉시 다 불어 버릴 거다. 급작스러운 이 전개를 정현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잠시 망설이던 신우는 이내 마음을 정한 듯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그 전에 할 말이 있는데…….”
- 해.
“……저기…….”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신우가 말을 질질 끌자 정현이 채근한다.
- 뭔데 그렇게 말을 끌어? 옥장판이야, 화장품이야?
장난스러운 정현의 질문에 신우는 쓰게 웃었다. 아마 정현에게는 자신이 다단계를 한다는 것보다 더한 일일 거다.
정현이 놀랄 게 뻔해 어떻게 말을 꺼낼까 망설이다 결국 정공법을 택하기로 했다.
“한이랑 나 사귀기로 했어.”
혹여나 누가 들을까 작게, 속삭이는 듯한 음성으로 말하자 정현이 화통하게 웃는다.
- 뭐야, 그거 별거 아니…….
잖아, 라고 하려던 정현의 말이 불시에 뚝 끊겼다. 그러고는 잠시간의 침묵 후 다시 묻는다.
- ……뭐라고?
“사귄다고.”
- 아, 친구로 사귄다고?
“아니.”
현실 도피를 하는 게 분명한 정현의 헛발질에 신우가 단호히 답하자 정현이 잠시 말을 끊었다, 잇는다.
- ……잠깐만.
이라고 하더니 잠시 뭔가를 삑삑거리며 누르던 정현이 다시 말을 건다.
- 아, 서로 엇갈리고 지나가기로 했다고?
그사이 사전을 뒤져 ‘사귀다’의 다른 사전적 의미를 찾아낸 듯 정현은 제발 그 뜻이라고 말해 달라고 애원했다.
예상치 못한 그 반응에 신우가 입술을 깨물다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 연애하기로 했어.”
- ……너랑 정한이?
“응.”
- ……언제부터?
“오늘 아침부터.”
취조에 가까운 정현의 물음에 신우가 최대한의 성의를 다해 대답하자 한순간 대화가 끊겼다. 그리고 잠시 후 정현에게서 고함이 터졌다.
- 야! 너 미쳤어?
예상했던 반응이라 신우는 그 말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런 것 같아.”
- 야, 이 세상에 사람이 얼마나 많고 많은데 왜 하필 정한이야? 그 새끼는 연애 대상으로는 못 쓸 인종이야.
“그냥 그렇게 됐어.”
- 정한 개새끼, 네 이름도 기억 안 난다더니 언제 그렇게 작업을 한 거야?
“작업한 거 아냐. 그냥, 내가 좋아서 사귀기로 한 거야.”
분명히 먼저 대시를 한 건 한이었지만 그에게 마음이 있었던 건 자신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랬었다.
비가 내리던 밤, 그의 품에 안겼던 그 순간부터 그렇게 되어 버렸다.
- 야, 그……. 아, 한이 그 새끼 존나 손 빠른 건 알았는데…… 아, 망할 새끼. 어떻게 너한테 손을 대냐?
“그런 거 아니라니까.”
- 그런 게 아니긴 뭐가 아냐? 내가 그 새끼를 몰라? 내가 그 새끼랑 23년을 알고 지냈어. 걔가 나쁜 놈인 건 아닌데, 아니, 친구로서는 괜찮은데 연애 대상으로는 아니라고. 걔는 연애를 게임으로 아는 놈이야. 재밌을 것 같으면 스타트 해서 레벨 클리어 하면 끝내는 놈이란 말야.
그건 신우도 알고 있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전해 들었던 이야기라, 한이 어떤 식으로 연애를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정현의 표현대로 한은 흥미가 생기면 일단 시작하고 빠르게 퀘스트를 깨고 레벨을 올린 다음 정점에 서는 순간 끝내 버린다. 굳이 최고 레벨까지 가지 않더라도 새롭고 흥미로운 과제가 없으면 식어 버린다.
그게 무서워 망설였지만, 결국 알면서도 하겠다고 덤빈 건 자신이었다.
“……그건 나도 알아. 아니까, 사귀기로 한 거야.”
- 알면서 사귄다고?
“응. 뭐든 끝은 있으니까. 걔는 조금 빠른 것뿐이잖아.”
변명하듯 중얼거린 그 말은 자신을 다독이는 말이었다. 한은 보통 사람보다 모든 게 빠를 뿐이니 각오하고 있는 게 좋다고.
그걸 알아들은 듯 정현이 길게 숨을 내쉰다. 그러곤 길길이 날뛰던 기세를 가라앉히곤 다시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 그래, 뭐 네 연애 문제에 내가 이래라저래라할 자격은 없지만……. 난 솔직히 너 많이 걱정돼. 그 새끼가 나쁜 놈은 아닌데…… 너랑 많이 달라. 난 사람 만날 때 성향도 중요하다고 보는데 너흰 너무 달라.
“알아.”
- 알긴 뭘 알아? 그 자식, 너랑 헤어진 후에도 다시 마주치면 방긋방긋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인사할 거라고. 너, 그게 얼마나 황당한 줄 알아? 헤어지고 나서 쿨하게 친구처럼 지내는 것도 아니라, 그냥 몇 번 얼굴 보고 스쳐 간 사람처럼 대한다고.
“그래도 잊어버리지는 않잖아.”
- 그거야 헤어진 사람 또 사귈까 봐 기억해 두는 거지.
“그거면 됐어. 잊혀지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엄마처럼, 적어도 자신을 완전히 지우지는 않을 테니까, 라고 신우는 안도했다. 이번에는 헤어진다 해도 한이 자신을 완전히 잊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이름을 들어도 모르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동창보다는 다시는 사귀기 싫은 인물로서라도 기억되는 편이 낫다.
신우의 마음의 소리를 들은 듯 정현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다. 그러곤 이를 갈듯 내뱉었다.
- 정한, 개새끼.
“내가 좋아서 사귀는 거야.”
- 네 성격에 먼저 매달렸을 리는 없으니 정한이 한 짓이지. 그 새끼는 5년이 지나도 여전하네. 역시 사람 안 바뀌어.
“그래도, 잘해 줘. 지금 행복한 것 같아, 나.”
그래서 더 불안하고 언젠가 다가올 끝을 생각하면 눈물이 날 정도로 무섭지만 지금은 행복하다. 이래서 사람들이 연애를 하는구나, 싶었다. 연애를 시작한 지 겨우 5시간밖에 안 지났지만 연애의 필요성을 시시각각 깨우치는 중이었다.
그간 연애를 안 해 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충만한 감정을 주지는 못했었다. 문득 그들과의 관계가 틀어졌던 것이 이런 자신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에 진심을 다하지 못했다.
사실 행복해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들이 지치고 질릴 만하다.
- 모르겠다. 뭐, 연애라는 게 원래 그런 기분 때문에 하는 거긴 한데…… 하여간 그렇다……. 나 지금 기분 좀 더러워.
“걱정하지 마. 내가 잘 알아서 추스를게.”
- 그게 문제라고. 넌 벌써 헤어질 때를 생각하고 있잖아. 헤어질 때를 기다리면서 하는 연애 같은 건, 좀 이상해. 한이가 상대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좀 그래. 하여간…… 난 좀 많이 그래.
정현의 말대로다. 헤어짐을 전제로 둔 연애라니 이상했다. 그리고 서글펐다.
어떤 관계든 끝이 있기 마련이지만 사람들은 그 끝이 오지 않도록 서로 노력한다. 약속을 하고 서로를 믿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자신은 애초에 모든 관계의 끝을 염두에 두고 시작하는 타입이었다. 딱히 한이 상대라서가 아니라, 늘 그래 왔다. 자신이 사랑한 사람들은 지금까지 모두 떠났으니까 당연히 헤어짐을 대비할 수밖에 없다.
- 점심은 나중에 하자. 나도 머리 좀 정리해야겠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사무실로 쳐들어가서 걔 싸대기 날리고 싶긴 한데…… 그랬다간 나만 입원할 테니 머리 좀 식히고 보자.
키랑 덩치 차이도 어마어마한 데다 각종 격투기까지 했던 놈이라 한이 한 대 치면 본인은 장렬하게 사망할 거라고 정현이 너스레를 떨자 신우도 조금 기분을 풀며 가볍게 대꾸했다.
“그래.”
- ……너…… 아니다. 아냐. 하여간 나중에 보자.
“응.”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통화를 끝낸 신우는 씁쓸한 미소를 띤 채 다시 손을 움직여 최종 수정본을 저장하곤 의자에 기대앉았다.
정현은 우선 이렇게 넘어갔지만 아직 명진이 남아 있다. 명진의 반응은 아마 정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다.
이번에야말로 오만 정 다 떨어졌다고 다신 안 본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신우는 설핏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까지 모두가 반대하는 연애라니. 한도 자신도 어지간히 신용이 없구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흘렀다.
씁쓸한 미소였지만 들뜬 마음은 그대로였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과 불안뿐이던 인생에 다른 불안이 하나 더 추가된다고 다를 건 없다. 대신 그 덕에 기쁨 하나가 더해진다면, 자신에게는 이득인 셈이니까.
점심시간 전까지 구체적인 현상 설계안을 그리기 위해 스케치북 위에서 빠르게 손을 움직이던 한은 유리 벽 너머로 보이는 신우의 뒷모습을 보곤 들고 있던 연필 끝을 질근질근 씹었다.
오전 내내 정확히 두 번 돌아봤다, 신우는.
의식하고 있는 건 분명한데 도무지 뒤를 돌아보질 않는다.
고집스러운 그 뒷모습에 조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늘 이랬던 것 같다. 예전에도, 신우가 자신을 돌아보지 않거나 의식해 주지 않으면 안달이 났었다. 다시 만난 후로도 초조해지는 건 마찬가지라 사귀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그를 잡았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분명, 이 사람은 내 거다 싶었다. 의심할 바도 없이, 그냥 이건 내 거다, 내 사람이다, 하는 느낌이 왔다.
할아버지도 아마 이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는 남자인 그를 연애의 범주에 두지 않아 몰랐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있다.
바로 어젯밤, 창백한 얼굴을 한 채 무너져 내린 신우를 본 순간 직감했다. 앞으로 평생, 죽는 그 날까지 자신이 곁에 있어 주고 싶단 마음이 들었으니 이 녀석이 내 사람임이 분명하다고.
그래서 잡아챘다. 그런데 왜 아직도 아슬아슬한 느낌일까?
여전히 신우는 위태로워 보였고 그 모습이 초조함을 부추겼다. 어쩐지 신기루를 잡으려 허우적거리는 기분이었다.
신우와 마주하고 있을 때는 즐겁지만 겨우 10m가량만 떨어져도 불안해진다. 회사에 같이 나와 있는 데도 이런데, 이 일을 끝낸 뒤 과연 신우를 종일 안 보고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역시, 빨리 같이 살아야겠어.”
매일매일 얼굴을 볼 수 있도록 집에서라도 같이 있어야 안심이 될 것 같다. 적어도 신우의 소재지를 알고 있어야 일을 하든, 밥을 먹든 할 수 있을 듯했다.
결국 어떻게 신우를 자신의 굴속으로 끌어들이느냐가 문제인데……. 불행히도 자신의 굴에는 할아버지가 계신다. 물론 집은 넓고 자신이 쓰는 건 별채이니 자주 마주칠 일은 없겠지만 할아버지라면 그냥 본채에 신우를 두자고 하실 가능성이 높다. 일단 지켜보겠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그건 곤란하다. 아무리 봐도 신우는 할아버지께서 마음에 들어 할 타입이다. 물론, 할아버지 마음에만 든다면 다른 문제는 전혀 걸릴 게 없으니 편하긴 하지만 너무 마음에 들어 하시면 그건 그거대로 곤란하다. 그렇지 않아도 신우의 사주에 홀딱 반하셨는데 실제로 보면 더 좋아하실 거다.
너무 할아버지 취향이다.
“골치야…….”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따로 집을 준비할 상황도 아니었다. 집을 나간다고 하면 당장 할아버지께서 뭔가 있다고 눈치채실 거다.
이를 어쩐다, 하고 입 안으로 중얼거리던 한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문 앞에 선 인재의 얼굴에 역시나, 라는 얼굴로 손가락을 까닥였다.
오전 미팅 끝나고 보자고 했으니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어 연필을 손에서 놓고 기다리자 문을 밀어 연 인재가 전투적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그 모습에 한이 앞에 놓인 의자를 권하자 인재가 책상 앞으로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은 뒤 심각한 얼굴로 한을 응시했다.
그가 뭐라 할지 뻔히 보여, 한은 먼저 선수를 쳤다.
“신우랑 사귀냐고?”
한의 빠른 자백에 인재는 실소했다. 그 반응을 확인한 한은 곧장 다음 말을 이었다.
“네가 예상한 대로 사귀기로 했어. 언제부터냐면 오늘 아침부터고 사무실에서 문제 일으킬 일은 없을 거야. 안 헤어질 거니까.”
정확히 인재가 하려는 질문을 요약 정리해 단번에 잔소리를 차단한 한이, 그 외에 물어볼 거 있으면 물어보라는 듯 바라보자, 인재가 혀를 찬다.
“네가 잘도 안 헤어지겠다. 길어 봤자 두 달이지.”
“안 헤어져. 이번엔 감이 왔어.”
“무슨 감?”
“이 녀석이 내 인연이라고.”
손에 든 연필을 자기 머리 위에 세우곤 더듬이가 찌릿찌릿 한다며 한이 장난스레 굴자 인재가 인상을 쓴다.
“넌 늘 그렇지 않냐?”
“지금까지 내가 사람 사귀기 전에 그 사람이 내 인연이라고 한 적 있어?”
한의 질문에 인재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5년 전까지 한은 꽤 많은 사람을 사귀었지만 그때마다 한이 했던 말은 한결같았다.
‘일단 지켜볼래.’ 내지 ‘흥미 있어.’ 그뿐이었다. 확실히 그가 직접 인연이라고 말한 적은, 분명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연애하면서 인연이니 뭐니를 떠드는 사람들은 없다. 한이 이상한 거다.
“그런 적은 분명히, 없었지. 하지만…….”
그래도 널 믿을 수는 없다며 인재가 말을 더하려는 순간 한이 그의 말을 잘라 냈다.
“저 녀석은 확실히 내 사람이야. 그런 생각이 들어.”
단호한 한의 답에 인재는 입을 딱 다물었다. 한이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더는 뭐라 말할 수도 없다. 변덕이 죽 끓듯 하긴 하지만, 본능과 감정에 솔직해서 이런저런 이유로 말을 돌린다거나 후회할 말은 내뱉지 않는 녀석이다.
그러니까 한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한의 판단력과 기준은 명확하다. 그리고 그의 의지와 열정은 더 무시무시하다.
“진심이냐?”
“응.”
“……괜찮겠냐? 너희 부모님들 꽤 고지식하시지 않아?”
물론 한을 키운 건 조부님이시고 부모님들은 간혹 연락하는 정도라고는 들었지만 하여간 부모님은 부모님이다. 몇 번인가 뵌 한의 부모님들은 꽤 깐깐하고 보수적이라는 인상을 풍겼던 터라, 인재가 걱정하자 한이 어깨를 으쓱한다.
“상관없어. 최종 보스는 우리 할아버지니까. 우리 할아버지만 마음에 들어 하시면 끝이야. 아무도 이의 제기 못 해. 반대하면 호적 파일걸.”
“할아버지는 마음에 들어 하시겠냐?”
“응. 굉장히. 사주가 좋대. 나랑 궁합도 좋고.”
대체 사주랑 궁합은 언제 본 거냐고 하려던 인재는 어제 오전에 한이 신우의 계약서를 보여 달라고 했던 걸 기억해 내곤 혹시나 해 물었다.
“……너, 어제 그래서 신우 씨 계약서 보여 달라고 한 거야?”
“응.”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한의 표정에 인재는 진력이 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뭐, 네 연애야 내 알 바 아니지만…… 하여간 일은 열심히 해라. 너 오전 내내 신우 씨 훔쳐보느라 정신없더라.”
한의 일방적인 화법에 휘둘리던 인재가 이제야 제대로 된 본론을 꺼내자 한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인재를 그의 쪽으로 부른다. 그 신호에 인재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묻는다.
“왜?”
“와서 봐.”
자신감 넘치는 한의 음성에 ‘이 자식이 또 무슨 짓을 한 건가?’ 불안해하는 얼굴로 한의 옆으로 다가선 인재는, 한의 앞에 놓인 스케치북에 그려진 건물의 설계안을 보곤 입을 쩌억 벌렸다.
“벌써 끝난 거야?”
“응. 벽면과 바닥은 전부 대리석으로 지을 거야. 안쪽에 오솔길 쪽으로 난 방향엔 전면이 창으로 된, 차를 마실 수 있는 좌식 다도 룸도 만들 거고. 이건 집 안에 있는 인공 정원. 내부의 기둥과 계단은 나무로 디자인할 거야. 가구들도 이번엔 내가 직접 만들 거고.”
설계안의 부분부분을 연필 끝으로 짚으며 한은 아주 상세하게 설명을 이어 갔다. 하지만 인재의 귀에는 그 설명이 들리지 않았다. 인공 정원과 수목림을 낀 초호화 저택의 외관에 인재는 차마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건물의 설계안만을 들여다봤다.
화려하고 대담하면서도 고풍스럽다. 그조차도 너무 ‘정한’ 같았다.
재수 없지만 근사하다.
“……일은 잘해…….”
스케치와 설계안만으로도 이 정도인데 실제 도면으로는 또 얼마나 사람을 기함시킬까 싶어 인재가 부러움과 질투의 감정을 담아 중얼거리자 한이 작게 웃는다.
“신우 덕이지.”
내가 지금 기분이 굉장히 좋거든, 이라는 한의 말에 인재는 아주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보통 때도 자신감만은 넘쳐흘렀지만, 지금은 얄미울 정도로 패기가 넘쳐 아주 재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일은 잘한다.
“이거 주인이 보면 뒤로 넘어가겠다. 일단 완공만 하면 해외에서도 인터뷰 많이 들어오겠어. 그런데 이렇게 지을 수는 있어?”
2층의 창이 더 밖으로 나온 데다 천창이 물결무늬를 이루도록 설계된 디자인에 인재가 실제 시공이 가능하냐고 묻자 한이 어깨를 으쓱한다.
“기하학적으로 전혀 문제 될 거 없어. 이 각도는 아래에서 힘을 잡아 주면 되니까. 그리고 천창은 아예 수십 개의 유리를 이어서 만들 거야. 이 창을 통해서 빛이 내려오면 이 안의 인공 정원 안 연못이 빛을 받아 일렁거리게. 오전에는 빛이 주방 쪽으로 들고 정오에는 거실로, 그리고 오후가 되면 호수로 들게 되겠지.”
정교하게 빛의 방향까지 잡아냈다. 이미 부지를 보고 왔으니 더는 말할 것도 없다. 어쩐지 지금 그 부지 안에 있는 나무들을 절대 베지 말라고 하더니 빛이 드는 방향까지 다 체크해 온 거다.
“괜찮은 거 하나 나오겠네.”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하는 내 첫 작품이니까. 자, 어서 날 찬양해.”
두 팔을 쭈욱 벌린 한이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으스대자 인재가 한의 펼쳐 든 손가락을 살짝 꺾는다.
“아, 왜?”
“그러게 미리미리 하면 얼마나 좋아? 죽어라 연필만 깎아 대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너, 내 연필까지 다 깎아 놨더라?”
그것도 예비 비품으로 숨겨 놓은 것까지 다 깎아서 지금 자신의 책상에 날카롭게 깎인 연필만 30개가 굴러다닌다고 인재가 쓴소리를 하자 한이 두 손을 내리며 그럴듯한 변명을 한다.
“원래 일이 안 될 때는 연장을 다듬는 거야. 그 부부 이미지가 안 잡혔다고.”
“하여간, 넌 그놈의 기분이 문제야.”
느낌만 왔다 하면 누구보다 빠르게 작업물을 줄줄 쏟아 내지만, 기분이 한번 다운되면 죽어라 연필만 깎고 굴려 댄다. 인재의 이어지는 잔소리에 시끄럽다는 듯 한이 재빨리 인재의 말을 막았다.
“하여간 할 때는 잘하잖아. 자, 내 설계안에는 그만 감탄하고 이젠 네 설계안을 보여 줘. 나도 감탄하게 해 달라고.”
한이 설계안이 아직이면 스케치라도 보여 달라고 하자 인재가 조금 부루퉁한 얼굴을 한다.
“이런 걸 보고 다른 걸 내놓으라는 게 말이 되냐?”
벌써부터 기죽는다며 인재가 짜증스레 말하자 한이 그런 인재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봤다.
“무슨 소리야? 넌 나랑은 달라. 섬세한 수묵화풍이잖아. 난 네 디자인 좋아. 그러니까 어서 나도 놀라게 해 줘.”
눈앞에서 당근을 흔들며 엉덩이를 툭툭 두들기는 듯한 한의 표정에도 인재는 담담하게 반응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설계가 하루 만에 나오진 않아.”
“해 봐. 왜 못 해?”
“그건 너 같은 기분파나 하는 얘기고. 그제까지만 해도 끙끙대던 주제에, 자기 일 풀린다고 남의 일도 다 잘 풀리는 줄 알아?”
“그러니까 연애를 하라고. 어서 네 인연을 찾아서 덥석 잡아 버려. 그럼, 일도 사생활도 모두 잘 풀릴 테니까.”
바로 오늘 아침부터 연애를 시작한 놈이 누구 앞에서 자랑질을 하냐며 인재가 짜증을 냈다.
“나 결혼할 애인 있거든?”
“요즘 못 만났잖아. 오늘은 일찍 퇴근해서 애인 만나. 애인이 옆에 있으면 안 되는 일도 돼.”
“아무래도 그래야겠다. 네 꼴 보기 싫어서라도 예은이 만나야겠어.”
“연애란 좋은 거야.”
“제발 그 좋은 걸 꾸준히 좀 해라. 응?”
“죽을 때까지 할 거라니까.”
생글거리는 한의 얼굴에 인재는 여전히 미심쩍은 듯 ‘그건 두고 볼 일이고.’라고 대화를 마무리한 뒤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그건 그렇고, 너 회사에서 신우 씨랑 사귀는 거 너무 티 내지 마.”
“왜?”
“여기 너 모르는 사람 없어. 너야 갑자기 신의 계시가 내려왔다며 사무실 안에서 뱀하고 닭을 같이 키워도 다들 그러려니 하겠지만 신우 씨는 다르잖아. 신우 씨 출근하는 동안만은 그쪽 입장 좀 배려해 줘. 그냥 친한 친구처럼만 보이라고.”
“싫은데?”
“야!”
“내가 좋은데 왜 아닌 척해야 돼?”
“그건 네 생각이라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너처럼 뻔뻔하지는 않아.”
“난 뻔뻔한 게 아니라 솔직하고 당당한 거야.”
“보통의 일반적인 성인들은 너처럼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좋은 거 다 티 내고 살지 않아. 넌 몰라도 신우 씨의 사회적 입장을 고려해서 배려라는 걸 좀 해 봐.”
너야 다 포기했지만 신우는 전혀 다르다고 인재가 다시 한번 ‘배려’라는 걸 강조하자 한이 눈을 가늘게 뜬다.
“넌, 왜 그렇게 신우를 걱정해?”
“저 까다로운 정우 씨가 마음에 든다는데 될 수 있는 한 오래 일하고 싶어서 그래.”
“그것뿐이야?”
혹시 다른 속셈이 있는 거 아니냐고 한이 미심쩍은 눈으로 인재를 노려보자 인재가 기가 막힌다는 듯 목소리를 높인다.
“나, 결혼할 애인 있다고 했지? 그것도 10년을 사귄 애인이야! 내가 너 같은 줄 알아?”
심지어 자신과 결혼할 여자가 바로 우리 대학 동기라고 인재가 버럭 화를 내자 한이 여전히 뚱한 얼굴로 시선을 돌린다.
“뭐, 한 번 믿어 보지.”
“네가 믿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내 걸 빼앗는 놈은 파멸시켜 줄 거거든.”
한이 싱긋 웃으며 농담처럼 던진 말에는 어쩐지 진심이 그득했다. 인재는 이번엔 다른 의미로 입을 쩌억 벌렸다.
“이런, 미친…….”
뭐 이딴 인간이 다 있냐며 분하다는 듯 파르르 떨고 있자 한이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곤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만 가서 일해. 그리고 오늘 내로 스케치 보여 줘. 클라이언트 마음에 들어도 내 눈에 안 차면 빠꾸야. 처음부터 다시.”
마치 개라도 내쫓는 듯한 그 손길에 인재는 이를 갈며 그의 옆에서 돌아 나왔다.
“일한다, 해. 망할 자식.”
아주 질리는 놈이라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한 인재가 사무실에서 빠져나가자 한은 슬쩍 손목시계로 시각을 확인한 뒤 재빨리 신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막 새로운 도면을 받고 작업에 들어가려는 순간 울린 메시지음에 휴대폰을 확인하자 한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점심 먹자.]
짤막한 그 문자에 뒤를 돌아보자 한이 유리 벽 너머에서 손을 흔들며 웃고 있다. 시간을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워낙에 불규칙적인 생활을 했던 터라 점심시간이라고 해도 시장기를 느끼진 못했지만 한에게는 이 시간을 지키는 게 아주 중요한 모양이었다.
[아직 10분 남았어.]
정확히는 8분이지만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고, 신우가 서두르지 말라고 문자를 보내고 다시 한을 돌아보자 메시지를 확인한 한이 신우를 향해 불쌍한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린다. 지나치게 어리광을 부리는 그 모습에 신우는 자연스레 미소를 띠곤 화면을 돌아봤다.
그러자 곧 다시 휴대폰이 울려 온다. 이번에도 역시나, 한의 메시지다.
[이제 7분이야.]
앞으로 7분 동안 매 분마다 카운트다운을 할 것 같은 한의 기세에 신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여전히 불안은 남아 있고 무섭기도 하지만 이 순간만은 행복하다.
지금은 이 순간을 즐기자고 다짐하며 신우는 휴대폰을 든 채 빠르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은 스테이크나 근사한 걸로 대접할게.”
점심은 간장게장, 저녁은 감자탕. 아침에 선포한 대로 경기도 외곽 지역까지 찾아가 맛있는 점심과 저녁을 사 준 한이 집 앞에 차를 세우며 내일을 기약하자 신우는 목 안으로 웃음을 삼켰다.
간지러운 듯한 그 미소에 한이 차를 멈추곤 이상하다는 듯 신우를 쳐다봤다.
“왜 웃어?”
“너랑 연애하면 살찔 것 같아서.”
“그럼 좋지. 넌 이상하게 먹여 주고 싶어.”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도 이 비슷한 말을 했다. 자신이 추워 보여서 따뜻한 걸 주고 싶었다고.
순간 자신이 추워 보인 게 아니라 불쌍해 보였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랬을 수도 있다. 애정에 굶주린 자신이 불쌍해 보였을 수도 있다.
순식간에 가라앉은 기분에 신우가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자, 한이 뭔가 떠오른 듯 핸들에 몸을 기댄다.
“아, 맞다. 내일 점심은 같이 못 먹겠다. 의뢰인이랑 약속이 있어. 설계안 보여 주고 OK 사인 받으면 도면 작업 들어가야 되거든.”
“괜찮아. 당연히 일이 먼저지.”
그 정도는 충분히 이해한다며 신우가 웃자 한이 잠시 뚫어져라 신우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핸들 위에 왼쪽 팔을 얹은 채 한이 꿰뚫어 보듯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자 신우가 조금 불편한 듯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왜?”
“……아무것도 아냐. 나, 차 한 잔만 줘라.”
“왜?”
“헤어지기 싫어서.”
“일 많잖아. 오늘은 그냥 가. 어제도 외박했잖아.”
퇴근 후 경기도 외곽 지역까지 갔다 돌아온 터라 이미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자신도 오늘 내로 끝내야 하는 일이 있고 한도 어젯밤부터 먼 길을 오가느라 피곤했을 테니 이만 돌아가라고 하자 한이 또 말을 끊고 빤히 이쪽을 본다.
기분을 상하게 한 건가 싶어 신우가 조금 어깨를 움츠리자 한이 이내 표정을 푼다.
“그래, 너도 피곤하겠다. 집에 도착하면 전화할게.”
한의 그 말에 신우는 그제야 자신이 아직 안전띠도 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로는 가라고 해 놓고 집 앞에 도착해서도 내리기 싫다는 듯, 미적거린 건 자신이었다.
질척거리지 말고 어리광부리지도 말자고 수없이 다짐하고도 자꾸만 한에게 어리광을 부리게 된다. 이건 아주 안 좋은 버릇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한에게는 유독 마음을 놓아 버린다.
그런 자신을 탓하며 신우는 안전띠를 풀고 서둘러 뒷좌석에 둔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러곤 막 조수석의 문을 열려는데 한이 신우의 손을 잡아 말린다.
“잠깐만.”
“왜?”
“인사.”
“응?”
이미 인사는 했는데 또, 라는 생각에 신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한을 돌아보자 한이 그 손을 들어 가볍게 손끝에 입을 맞춘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신우는 당황해 눈을 껌벅였다. 그 반응에 한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다.
“시작은 손끝부터. 아까우니까 손끝부터 야금야금 먹어 치울 거야.”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한의 눈빛에 신우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장난스러운 말투에 표정 역시 더없이 해맑았지만 그 시선에 들어 있는 감정은 분명한 정욕이었다.
그 눈빛이 의미하는 바를 알기에 당황스러웠다.
한과는 사귄다 해도, 손을 잡고 밥집을 찾으러 다니거나 가벼운 스킨십이나 할 거라 생각했다. 고등학교 시절 그대로의, 친구 같은 느낌일 거라 막연히 상상했기에 이 상황이 굉장히 난감했다.
이런 건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신우의 표정에 한이 씁쓸한 얼굴로 웃는다.
“넌, 가끔 날 그렇게 무서운 듯이 보더라?”
“…….”
“옛날에도 그랬었지?”
“……미안.”
“미안해할 건 없어. 너한테는 내가 좀 무서워 보였을 수도 있으니까.”
거기까지 말한 뒤 한은 신우의 손을 놓고는 차분한 시선으로 다시 신우의 눈을 응시했다.
“부담은 갖지 마. 네가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릴게. 하나씩, 천천히 가면 되니까.”
하나씩 천천히 가다 어딘가에 다다르면 끝나는 거냐고, 자기도 모르게 물으려던 신우는 재빨리 그 말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지나치게 부정적인 자신의 사고에 진저리가 나 시선을 돌리며 차 문을 열었다.
“나 내릴게. 어서 가라. 늦겠다.”
더 있다가는 엉뚱한 이야기를 내뱉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서둘러 차에서 내려선 뒤 차 문을 닫기 전에 억지로 웃으며 한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운전 조심해. 그럼, 내일 보자.”
“그래. 잘 자. 괜히 일 끝낸다고 늦게까지 깨어 있지 말고. 푹 자고, 푹 쉬고 내일 아침에 또 봐.”
“응.”
짤막한 답을 한 뒤 신우가 차 문을 닫고 물러서자 한이 어서 들어가라는 듯 손짓한다. 하지만 신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늘 먼저 돌아서던 건 자신이었다. 오늘만은 그가 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신우가 한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한이 조금 난감한 얼굴을 한다. 하지만 이내 신우의 생각을 이해한 듯 핸들을 돌린다. 서서히 움직여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한의 차를 바라보며 신우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아직도 그가 먼저 떠나는 모습을 보는 건 힘들지만 이렇게 조금씩 익숙해져야 한다.
매일매일 조금씩 연습해 두면 현실에서 떠나보내야 할 때도 편안하게 웃으며 보낼 수 있을 거다.
대신 그와 함께할 때만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즐겁게 보내면 된다.
무엇에든 익숙해지는 게 사람이니까.
한의 차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걸 확인한 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현관 조명이 켜진다.
환해진 현관 안에서 우편함을 확인해 보니 안이 가득 차 있었다. 그와 함께 깊은 한숨이 가라앉는다. 자신에게 오는 우편물의 대부분은 세금 용지 아니면 독촉장이다. 우편함이 가득 차 있다는 건 그만큼 내야 할 돈이 많다는 의미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명진의 가게에서 나올 이번 달 급료와 18일에 입금될 돈을 계산하면 그럭저럭 연체된 이자들은 메울 수 있을 것 같다는 것뿐이었다.
“……진짜, 사람 죽으라는 법은 없나 봐…….”
한이 가져다준 행운인지 생각 외로 일이 꽤 잘 풀리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해하며 우편물들을 챙겨 막 계단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휴대폰이 울려 왔다. 우편물을 오른손에 든 채 왼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든 신우는 계단으로 올라서며 무심히 답했다.
“여보세요?”
- …….
“여보세요?”
두 번이나 물었는데도 상대에게선 아무런 답이 없었다. 전화가 끊겼나 싶어 휴대폰 액정을 확인했지만 통화 중으로 뜬다. 하지만 함께 뜬 번호는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일 관련인가 해 거듭해 물었지만 여전히 답이 없다. 밤 9시를 넘어 10시가 되어 가는 시간에 웬 장난 전화인가 해 막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이었다.
- 여보세요?
그제야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신우는 다시 휴대폰을 고쳐 쥐었다.
“네, 누구시죠?”
- ……오랜만이다.
나지막한 남자의 음성은 굉장히 귀에 설었다. 아무래도 잘못 걸린 전화구나 싶어 신우는 막 현관문 앞에 닿아 키패드에 비밀번호를 누르며 대꾸했다.
“전화 잘못 거신 것 같은데요. 4247로 하신 거 맞으신가요?”
문을 열고 들어서며 신우가 그렇게 묻자 상대방이 말을 끌다 답한다.
- 그 번호, 맞아. 내 목소리도 기억 못 하나 보네.
약간의 섭섭함을 담은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신우는 떠올리지 못했다. 그래서 막 누구시죠, 라고 물으려던 순간 불현듯 걸음이 멈췄다.
설마 하는 생각에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되물었다.
“……지원혁?”
- 이제 기억나? 오랜만이다, 연신우.
막 집으로 들어와 본채의 차고에 차를 세운 한은 곧장 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에 돌아왔다고 보고를 하려고 한 건데, 통화 중이었다.
이 밤중에 누구랑 통화를 하나 싶어 일단 전화를 끊은 뒤 다시 통화 버튼을 누르며 막 차고를 나오는데 앞에서 기다리던 아주머니가 자신을 찾는다.
“할아버지께서 기다려.”
집에 상주하시는 아주머니께서 그렇게 이르는 순간, 다시 수화부에서 들려오는 통화 중 알림음에 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할아버지는 어디 계세요?”
“안방에.”
“네. 아주머니는 그만 들어가 쉬세요. 저 저녁 먹었고 차도 필요 없어요.”
“그래. 들어가서 쉬어.”
“네.”
깍듯하게 인사를 마친 뒤 마당을 가로질러 본채 안으로 들어선 한은 구두를 벗고 마루를 지나 안방 쪽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닫힌 안방 문을 두드렸다.
“할아버지, 한입니다.”
“들어와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그 답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고운 금침 위에 앉아 신문을 보시던 조부께서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한을 바라본다.
“왜 이리 늦누, 요새?”
어젠 평생 안 하던 외박까지 하더니 오늘도 늦게 들어온 한에게 조부께서 조금 안 좋은 소리를 하자 한이 그의 앞에 앉으며 차분히 설명했다.
“연애 중이라서요. 죄송합니다.”
“연애?”
“오늘 아침부터 시작했어요.”
“누구랑?”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사주랑요.”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냐며 한이 빙긋 웃자 노인의 안광이 예리해진다.
“……그럼, 구름 위를 떠다녀야지 왜 이리 죽상을 하고 다녀?”
정곡을 찌르는 조부의 지적에 한이 씁쓸하게 웃는다.
“아시겠어요?”
“내가 네놈을 몇 년을 봤는데 네 기분을 몰라?”
얼굴은 웃고 있어도 신경이 곤두선 게 빤히 보인다며 노인이 혀를 차자 한이 한숨과 함께 작게 중얼거렸다.
“할아버지 말고 그 녀석이 좀 그렇게 알아봐 줬으면 좋겠네요.”
“왜?”
“그냥요. 전 저만 좋으면 좋다는 타입인데…… 걔한테는 그게 좀 힘들어요. 그 녀석도 제가 좋아하는 만큼 절 좋아해 줬으면 좋겠는데 반응이 뚱해요. 난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은데, 그 녀석은 계속 빨리 보내려 하고, 항상 나보다 일이 먼저라 좀 기분이 안 좋아요.”
“네놈이 너무 빨라서 그런 게 아니고?”
한번 시작하면 앞만 보고 경주마처럼 달려가는 한의 성품을 잘 알기에 또 혼자 신나 내달린 거 아니냐는 조부의 물음에 한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기도 하지만…… 거리가 좁혀지지 않아요. 난 좀 더 달라붙는 쪽이 좋은데, 그 녀석은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웃기만 해서요. 좋다 싫다 말도 없고 그냥 강제로 끌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지나치게 깍듯하고 주변 시선을 의식하는 신우의 태도가 못내 불안하다고 한이 토로하자 조부께서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띤다.
“원래 그런 성격들이 있지.”
“어젯밤에 그 녀석이랑 있었어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참 많이 울더라고요. 그리고 많이 약해져 있었고요.”
“그래서, 그때를 잡았구나.”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그래야 내 손자지.”
“그거, 별로 기쁘진 않네요.”
기회가 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하고야 마는 핏줄임이 확인된 순간 한은 탄식했다. 할아버지와 닮았다는 걸 자랑스러워했지만 지금은 그런 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 원하는 대로 되긴 했는데 마음이 복잡했다.
분명 저녁을 먹을 때까지는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신우를 집에 데려다주고 혼자가 되자 머리가 복잡해졌다.
신우가 약해진 순간을 이용해 파고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하다. 얼굴을 보고 있을 때는 좋지만 조금만 거리가 멀어지면 조급해진다.
그 기분이 너무 싫었다.
“뭐든 기회를 잡는 게 힘든 거야. 일단 잡았으면 밀어붙이면 돼. 그보다, 그 애 한번 데리고 와라.”
하여간 다른 놈한테 안 빼앗기고 잡았으니 된 거라고, 당신의 성격대로 결론을 내린 노인이 우선 신우 관상부터 보자고 말을 돌리자 한이 딱 잘라 말한다.
“안 돼요, 그건.”
“왜?”
“할아버지께서 보시면 당장에 집에 들이라고 하실 것 같아서 안 됩니다.”
“그래 보이니?”
“일단, 사주가 할아버지 취향이잖아요. 그게 할아버지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의 80%는 먹고 들어가고요.”
그건 인정한다는 듯 노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한이 덧붙이자 노인도 납득했다. 방금 한에게 너무 급하게 내달렸다고 지적하고는 본인도 너무 성마르게 굴었다는 걸 자각한 듯했다.
“그럼, 그 애는 천천히 보기로 하고…… 사람 하나 구해야겠다.”
“사람이요?”
“성진이가 이번에 취직이 됐단다. 취직했으니 슬슬 나가 봐야지. 작은 오피스텔 하나 구해서 내보낼 테니 적당한 애 하나 구해 봐라.”
6년 전부터 이 집에 기거하며 조부의 비서 겸 말 상대를 하던 성진이 드디어 취직해 집을 나간다는 소식에 한은 조금이나마 뚱하던 표정을 풀고 웃어 보였다.
“아, 축하해야겠네요. 원하던 데로 됐대요?”
“그래. 그러니 내보내야지. 새 사람도 들여야 하고.”
워낙에 사람에 까다로운 분이라 잠시 고민하던 한은 일단 찾아보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고학생으로요?”
“상관없으니 네 마음에 드는 놈으로 골라 와. 네 마음에 들면 내 마음에도 들 테니.”
“월급은요?”
“음, 올려 줘야 하나?”
“할아버지 성질 맞추는 게 보통 일은 아니잖아요.”
성진은 워낙에 순하고 성실해 별문제 없었지만 사실 조부의 성미가 보통은 아닌지라, 어지간한 사람은 상대하기 힘들었다. 성진 역시 대학을 다니면서도 오후 5시에는 칼같이 돌아와 조부를 상대하며 까다로우신 성미를 다 맞춰야 했다.
시험 기간이나 주말은 쉴 수 있었지만 고아인 성진에게 집과 식사, 그리고 대학생에게는 과한 월급을 제공한 만큼, 조부께선 딱 그만큼의 노동력을 요구하셨다. 일자리는 주지만 자선은 안 하신다. 뭐든 공짜로는 안 주시는 분이다.
물론, 가끔 술에 기분 좋게 취하시면 백만 원짜리 수표를 용돈이라고 주셔서 친구들을 기함시켰지만, 기본적으로 이 세상에 공짜란 없다는 게 조부의 인생 철학이었다.
“월급도 네가 알아서 해. 누구든 믿을 만한 놈으로 찾아봐. 이왕이면 바둑도 두면 좋고. 그리고 운전은 꼭 해야 한다.”
“네, 찾아볼게요.”
“그만 가서 쉬거라. 나도 쉬어야겠다.”
“그럼 쉬세요. 저 건너갑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내일 아침에 뵙겠다고 인사를 마친 한은 조부의 방을 나와 마루를 지나 마당 쪽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그 틈에 휴대폰을 찾아 신우의 번호를 눌렀다.
이번엔 다행히 신호음이 이어졌다. 그 소리에 안도하며 곧 마당으로 내려서 별채로 향하는데 바로 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렇지 않아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그래? 방금 계속 통화 중이더라? 누구랑 통화했어?”
- 어? 아…… 좀 아는 사람이랑. 집엔 잘 들어갔어?
“응, 방금 들어와서 할아버지 뵙고 방으로 가던 중이야. 넌 뭐 해?”
- 나도 이제 씻으려고.
“그럼, 내일 몇 시쯤 갈까?”
- 응?
“출근 시간에 맞춰서 데리러 갈게. 같이 출근해야지.”
집에서 식사거리도 챙겨서 간단히 아침도 먹고 같이 커피 마시고 수다 떨면서 출근하자고 말하자 신우가 깊게 한숨을 내뱉는다.
- 그냥 회사에서 봐. 너희 집에서 회사 가까운데 우리 집까지 오려면 돌아가야 하잖아.
또다.
물론 누구나 처음에는 예의상 거절을 하지만, 신우는 진심이었다.
이런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다.
“내가 데리러 가고 싶어서 그래. 그래야 얼굴 1분이라도 더 보지.”
- 그래도 너무 피곤하잖아.
“나 중고등학교 내내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오후 8시까지 종일 운동했던 사람이야. 그래도 기운 남아서 주말에는 도장에 나가서 또 운동하고.”
- 그건 어릴 때 얘기지.
“그때랑 다를 거 없어. 내가 하고 싶으니까 하게 해 줘. 하고 싶은 거 못하면 나 병나.”
피곤해도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은 애초에 그런 일에는 피곤을 못 느낀다고 한이 계속해서 설득하자 신우도 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적당한 타협점을 제시해 왔다.
- ……그럼, 역까지만. 너 역에 도착하기 전에 연락하면 역으로 나가 있을게.
역까지가 얼마냐 싶어 한은 재빨리 신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 그럼 역까지만.”
- 응. 그럼 자.
“너도.”
밤 인사를 끝낸 뒤 잠시 기다리자 신우가 먼저 뚝 하니 전화를 끊는다. 그래도 조금 머뭇거려 주길 바랐는데 칼같이 종료 버튼을 누르는 신우가 조금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자라.”
아쉬운 인사말을 남긴 채 한은 그답지 않게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일단 사귀면 다 좋아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사귀기 전에는 초조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불안에 섭섭함까지 더해졌다.
사귀기 전보다 더 사정이 안 좋아진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쁘지 않다.
잡지도 못해 안달하던 것보다는 낫다.
이 답답함은 앞으로 서서히 극복하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