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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5/23)

Chapter 4

“……우 씨? 신우 씨?”

마우스를 손에 쥔 채 잠시 멍하니 있던 신우는 자신을 부르는 정우의 음성에 놀라 퍼뜩 뒤를 돌아봤다.

“아,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의아해하는 정우의 물음에 신우는 뭐라 답하지도 못한 채 겸연쩍은 듯 목을 긁적거렸다.

어젯밤부터 머리가 멍해 도무지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분명히 차 안에서 한과 대화를 한 기억은 나는데, 그 뒤로 어떻게 집에 들어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고…… 피곤해 보이는데 커피 한잔할래요? 지금 내리려고 하는데.”

“네. 주세요.”

답하자마자 부지런히 캡슐 머신 앞으로 향하는 정우를 보던 신우는 다시 시선을 돌려 한의 사무실 쪽을 눈으로 확인했다.

오늘부터 출근이라 한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난감했는데 다행히 그는 오늘 오전 내내 외근이라고 했다.

당장 얼굴을 보지 않아도 돼 안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남은 시간이 길지는 않다. 오후에는 미팅이 있어 사무실에 들어온다고 했으니 어떻게든 그때까지 결론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내리느냐가 문제다.

그러니까, 어제 분명히…….

‘왜?’

‘나랑 연애할래?’라는 한의 물음에 나간 답이 그거였다. 멍청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게 가장 솔직한 자신의 심경이기도 했다.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에 빤히 답을 재촉하듯 그를 바라보고 있자 한이 대꾸한다.

‘방금 말했잖아. 나 너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한다고.’

‘그러니까 왜 날…….’

왜 하필 나 같은 걸 좋아하냐고, 신우가 묻자 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니까.’

‘……왜, 나 같은 걸 좋아해?’

차마 말하지 못하고 목구멍 뒤로 꾹꾹 담고 있던 말을 그대로 내뱉는 순간 한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 말은 좀 기분 나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같은 거’라고 표현하는 거, 왠지 불쾌한데? 그게 아무리 본인이라도.’

방금과는 달리 낮아진 그의 음성에 신우가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이자 한이 아차 하며 다시 표정을 푼다.

‘오랜만에 만나서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당황스럽겠지만…… 진심이야. 그러니까 너도 진지하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다시 다정해진 한의 목소리에 신우는 잠시 침묵하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내가 거절하면……?’

순간 한은 당황한 듯 눈을 껌벅였다. 거절당할 상황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강요는 안 해. 하지만 아마 승낙할 때까지 고백할 거야. 난 일단 내 거다 싶으면 절대로 안 놓치니까.’

호전적인 성격답게 본인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부딪쳐 오는 그에게 신우는 당혹감을 느꼈다.

이건 너무 빠르다. 한이 사귀자고 해 준 건 기쁘지만, 이 상황은 당황스럽다.

분명 그를 다시 만나고 그와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 역시 지난날 그를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과거의 일이다. 그와의 사이에는 12년이라는 긴 공백의 시간이 있다. 그도 자신도, 그 감정도 그사이 변했다.

‘말은 고맙지만…… 잘 모르겠어. 그건 과거의 일이고…… 우리, 다시 만난 지 얼마 안 됐잖아.’

‘확실히, 오래전 일이고 그사이 많이 변했겠지만…… 그땐 어려서 모르고 지나갔다면, 알게 된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해. 난 지금도 네가 나 말고 다른 사람하고 친하게 지내는 게 싫어. 그 감정이 그대로라면 상관없잖아?’

중요한 건 시간이 아니라 감정이라는 한의 말에도 신우는 그에게 어떤 대답도 해 줄 수 없었다.

지금은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머리가 복잡하다.

‘사귄다고 해도 귀찮게 하지는 않을게. 네가 언제든 시간 날 때 연락하면 돼. 그럼 나도 일이고 뭐고 집어치우고 달려 나갈 테니까. 그리고 네가 싫어지면 헤어지자고 해도 돼. 뭐든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그러니까 일단 만나 보지 않을래?’

‘……잘 모르겠어.’

‘당장 답하기 어렵다면, 천천히 생각해 보고 알려 줘. 보채지 않겠다는 약속은 못 하겠지만 하여간 최선을 다해 기다릴게. 나, 참을성은 꽤 있으니까.’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참을성’이라는 단어에 신우는 쓰게 웃었다. 물론, 흥미를 지닌 대상에 한해서 그는 더없이 성실한 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중고등학교 내내 그 고된 농구부 연습을 즐거운 듯 웃으며 따라갈 수 없었을 거다.

누구나 하는 일탈 행위 한 번 없이, 마치 농구를 하기 위해 사는 듯 혹독한 웨이트로 몸을 만들고 식단에 맞춰 식사하고, 잠드는 시간까지 체크해 가며 단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부터 있는 훈련을 소화해 낸 그의 인내심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가 흥미를 갖고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렇게 좋아하던 농구도 그는 단 하루 만에 깨끗하게 털어 내 버렸다. 그러곤 아무 미련 없다는 듯 다시는 그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때도 그가 참 무섭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한이 지금 자신을 놀린다거나 장난을 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도, 또 사귀고 싶다는 말도 모두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한은 본인의 기분이나 감정에 과하게 솔직한 타입이었다. 절대 마음에 없는 말은 하지 않고 본인의 감정을 갖고 장난치지도 않았다.

분명 그가 하는 모든 말들은 그의 진심일 것이다. 그의 진실함은 믿는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의 변덕은 믿지 못한다.

함께할 때는 누구보다 다정하지만 돌아선 순간에는 누구보다 차가워질 걸 알기에 선뜻 그가 내민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또다시 돌아선 그를 보게 되는 건 사양하고 싶다. 그런 경험은 한 번이면 족했다.

한 번 더 그러면 이번엔 진짜 극복하기 힘들 테니까…….

“신우 씨, 커피요.”

멍하니 책상 앞에 앉아 화면을 바라보던 신우의 옆으로 정우가 다가와 컵을 건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신우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감사합니다.”

그 말과 동시에 막 손을 뻗어 그가 내민 컵을 받아 들려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다른 손이 컵을 채 갔다.

“정우 씨, 땡큐. 이건 내가 마실게.”

바로 눈앞에 있던 컵을 낚아챈 커다란 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편안한 니트 셔츠에 청바지를 걸친 한이 정우가 건넨 컵을 왼손에 든 채 웃고 있었다. 남의 몫을 빼앗아 간 주제에 아주 기분 좋아 보이는 그 얼굴에 정우가 그를 타박했다.

“팀장님, 그건 신우 씨 마시라고…….”

“신우는 이거.”

그 말과 동시에 한은 신우의 책상 위에 1층 카페에서 사 온 커피를 내려놓았다. 순간 그걸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신우가 당황해하자 한이 곧장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커피 잘 마실게요, 정우 씨. 신우도 일 열심히 하고.”

신우가 곤란해하는 걸 눈치챈 한이 재빨리 걸음을 옮겨 그의 사무실로 향하자 신우는 그제야 안도한 듯 긴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한의 등장에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할 정도로 긴장했었다는 사실을.

한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자신 혼자 괜히 신경 쓰고 과하게 반응하는 듯했다.

너무 촌스럽게 굴고 있는 자신이, 신우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되게 친한 친구였나 봐요. 팀장님 개인적으로 누굴 챙기시는 분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한의 태도가 의외인 듯 정우가 은근히 건네는 물음에 신우는 잠시 뭐라고 답할까 망설이다 적당히 말을 골랐다.

“친한 편이었어요.”

“역시 그렇구나. 정 팀장님은 쏠 때는 사무실 전 직원한테 다 쏘거든요. 대학 다닐 때도 그걸로 유명했다던데. 신우 씨는 특별히 따로 챙기시네요.”

특별 대우라는 그 말에 또다시 심장이 두근거려 신우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대꾸했다.

“원래 남을 잘 돌봐 주던 녀석이에요.”

“……그래요? 관심은 많지만 잘 돌봐 주는 편은 아닌 것 같은데……. 뭐, 저도 일한 지 얼마 안 돼서 잘은 모르지만요. 앞으로 천천히 알아 가면 되겠죠. 저 지금 외근 나가거든요. 작업량이 많으니 혹시 저 안 들어오거든 집에 가서 하셔도 돼요. 급한 일은 아니니까요.”

“네.”

정우의 말대로 오늘 내로 끝내기엔 무리인 양이었다. 장수 자체가 많아 그렇게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마지막으로 수고하라는 말을 남긴 정우가 사무실을 나섰다. 그를 뒤로하고 일에 집중하기 위해 마우스를 손에 쥔 신우는 시선을 돌려 마우스 옆의 커다란 종이컵을 쳐다보다, 잠시 손으로 쥐어 보았다.

컵의 온기가 손바닥에 전해졌다.

처음 만났던 그 날 한이 건넸던 그 커피처럼, 따뜻했다.

“지난주 내내 죽상을 하고 있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불길하게, 라며 막 한의 사무실로 들어선 인재가 불만스러운 듯 말을 던지자 한이 어깨를 으쓱하며 그의 자리로 가 앉는다.

“기분 좋은 일이 있으니까.”

“네가 기분 좋으면 불길해.”

굉장히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징조라고, 인상을 쓰는 인재를 보며 한이 웃는다.

“불길할 거 없어. 빌라 건은 어떻게 됐어?”

“뭐, 우리나라 고급 빌라야 다 거기서 거기니까.”

가볍게 대꾸한 인재가 한의 앞으로 다가와 의자를 끌어당기자 한이 인상을 썼다.

“다 거기서 거기라고 거기처럼 만들지 마. 클라이언트 쪽에서 제시한 게 다른 빌라촌과 차별화되는 고급스러운 이미지니까 디자인에 신경 써. 그리고 각층별로 주차장 분리하고, 아예 드라이브 웨이도 따로 설계해.”

“……그럼 평수가 주는데?”

“건평이 200평이면 충분해. 12채, 총 24가구가 들어와서 살 테니 각자의 프라이버시는 보호하되 서로 격식 차리고 웃으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커뮤니티 시설들은 최대한 고급스럽게 제작해. 그리고 집마다 다 다르게 디자인 해.”

“뭐?”

“다 똑같은 게 제일 촌스러워. 스토리가 있게 만들어 봐. 원형으로 집을 지을 테니 그 라인을 따라 디자인을 하라고. 건물들을 다 똑같이 지으면 알아서 해. 그리고 서로 마주 보는 집 생기면 다 짤라 버린다. 그늘지는 것도 안 돼. 일조권과 프라이버시는 완벽하게 보장돼야 돼.”

한마디로 열두 채의 빌라를 전혀 다른 형태로, 하지만 유기성 있게, 동시에 서로의 프라이버시만은 완전히 보호되도록 창의 방향을 바깥쪽으로 틀어 설계하라는 뜻이었다, 그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까다로운 조건에 인재가 빽 하니 소리를 내지른다.

“그건 결국 12채를 디자인하라는 소리잖아?”

“그래.”

“야, 그럼 다시 계약해야지.”

“오픈 기념 대출혈 할인 서비스. 아시의 첫 번째 빌라니 품격을 높여 줘야지. 의뢰 들어온 가게나 다른 주택들도 마찬가지야. ‘아시’ 이름 걸고 다른 거랑 비슷하게 지어 놓으면 다 해고야. 너라도 예외는 없어.”

“야, 그건…….”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인재가 막 고함을 내지르려는 순간 한이 그의 말을 잘랐다.

“있는 대로 머리 쥐어짜 내. 그리고 반드시 나한테 체크받고. 그 건물은 최대한 고풍스럽게 갈 거야. 특히 정원과 나무에 신경 써. 넝쿨 식물도 많이 써서 계절마다 다른 분위기가 나는 영국식 정원을 만들 거야. 건물은 이미 대부분 평준화됐어. 이제, 차이는 환경이야.”

다른 사람에게 일을 떠넘기고도 한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모든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내 인상을 쓰고 앉아 연필만 깎고 굴리고를 반복하더니 갑자기 의욕에 넘쳐 사람을 괴롭히는 한을 보며 인재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진짜 완전 유럽풍으로 가려는 거야?”

“물론. 영국 전원주택 같은 느낌으로. 각 집마다 작은 텃밭 하나씩을 분양해서 원하는 대로 꾸미라고 하는 것도 좋고.”

“……썩을 놈.”

짜증 난다는 듯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인재는 한의 제안을 세세히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클래식하고 품위 있고 시크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의 고급 빌라’를 지어 달라는 말도 안 되는 클라이언트의 제안에 ‘빌어먹을 시크, 클래식’이라고 종일 욕을 하다 한에게 상담하러 왔던 거였는데, 그게 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빌어먹을 놈이지만, 능력만은 인정 안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인재는 결국 한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색채는 어떻게 가? 빨강? 아니면 주황?”

“그건 네가 알아서 해.”

“창은?”

“창은 클수록 좋지. 아, 그리고 욕실 크게 만들어. 욕실과 주방이 쾌청해야 돼. 그리고 내부 정원 쪽에 이불이나 시트를 널 수 있는 빨래걸이를 따로 만들어. 창에 그늘지지 않게 하는 위치에. 이불을 태양에 말리면 기분 좋으니까.”

“아, 그거 괜찮다.”

“내가 안 괜찮은 생각하는 거 봤어?”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한의 말투에 인재는 다시금 짜증 난다는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한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아무래도 한의 기분이 지나치게 좋은 이유가 지금 이 사무실에 있는 한 사람 때문인 것 같긴 한데…….

묘한 기분에 인재는 프리랜서들이 일하는 사무실 쪽을 바라봤다.

차분하게 앉아 손을 움직이는 신우를 보다 다시 한의 사무실로 시선을 돌리자, 한은 연필 끝을 입에 문 채 멍하니 신우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상황이 빠르게, 그리고 예측할 수 없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이 마음만 잡아 준다면 두 사람이 잘되길 정화수라도 떠 놓고 빌겠지만, 한의 변덕을 생각하면 그건 또 신우에게 못 할 짓이다.

아직 두 사람이 어디까지 갔는지도 알 수 없고, 신우의 입장도 모르는 상태다. 애초에 사적인 문제라 끼어들기도 뭐하지만, 그래도 회사의 존폐를 생각하면 모른 척하기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정한, 망할 새끼…….”

한의 사무실을 찌릿하니 노려본 뒤 인재는 터덜터덜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막 점심시간을 맞아 식사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중 걸려 온 전화에 신우는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형.”

- 일은 할 만해?

애도 아닌데 출근이 걱정돼서 전화한 게 분명한 명진의 첫인사에 신우가 웃는다.

“괜찮아요. 매일 하던 일인데요, 뭐. 장소만 바뀐 거지. 디자이너가 붙어 있으니 능률은 더 좋아요.”

- 그거 잘됐네. 나중에 일 끝나면 고기나 사라. 열흘 동안은 다른 녀석이 나오기로 했으니까 여긴 걱정 말고.

어젯밤 일을 하던 중 앞으로 열흘간 회사에 나가서 일을 하게 돼 전처럼 오후에 빨리 출근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양해를 구하자, 명진은 흔쾌히 열흘 정도는 쉬어도 된다고 정리해 줬다. 아무리 그래도 열흘이나 쉴 수는 없어 시간 분배를 하겠다고 했지만 명진의 생각은 확고했다.

“고마워요, 형. 그리고 미안해요.”

- 어차피 주중에는 그렇게 손님이 많지도 않고 농땡이 피우던 놈들 빡세게 굴리면 돼. 아, 그러고 보니…… 사무실이면 그 친구도 같이 일하겠네?

그 말에 신우는 순간 뜨끔해 조금 말을 끌었다.

“네. 같이 일해요.”

- 조심해라. 또 괜히 휘둘리지 말고.

“걱정 마세요.”

- 걱정이 안 되겠냐? 하여간 일 열심히 하고 열흘 뒤에 보자. 난 좀 더 자야겠다.

“네. 푹 쉬세요.”

오래된 야간 근무로 낮에는 정신을 못 차리는 덕에 명진은 조금 전 답이 어설펐음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워낙에 예리한 사람이라 한과의 일을 금세 알아차릴 줄 알았는데 이번엔 잘 넘어갔다. 하지만 다음에도 잘 넘어갈 거란 보장은 없다. 아마, 조만간에 들킬 거다.

그러니 그 전에 어떻게든 답을 내려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았다.

복잡한 생각에 멍하니 앉아 길게 한숨을 내뱉는 순간, 누군가 등을 툭 두들겼다.

“밥 먹자.”

갑작스러운 그 힘에 놀라 돌아보니 한이 의자의 등받이를 짚고 선 채 허리를 구부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밥 먹자고. 점심 먹어야지.”

“……아.”

“일 다 안 끝났어도 먹고 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나가자. 오늘은 네가 밥 사.”

일이 좀 남아 있다고 변명하려 했지만 한은 그럴 틈도 주지 않았다. 우리 회사는 밥을 최우선으로 챙겨 먹는 게 사훈이라는 한의 재촉에 신우는 어쩔 수 없이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던 한이 휴대폰만 챙겨 들고 신우의 옆으로 따라서며 슬쩍 묻는다.

“순두부찌개 안 먹고 싶었어?”

너무나 자연스럽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가서는 한의 태도에 신우는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일단 침착하게 대꾸했다.

“응, 생각나더라.”

“역시 그렇다니까. 지금 감자탕집은 개척 중이야. 조금만 기다려. 대한민국 최고의 감자탕집을 찾아낼 테니까. 아, 간장게장 좋아해? 이번에 괜찮은 집 찾았는데?”

“좋아해. 먹는 건 안 가려.”

“좋아. 그럼, 오늘은 순두부 내일은 게장 먹으러 가자. 차로 10분 거리야.”

천천히 사무실을 가로질러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선 순간,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타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한이 먼저 올라타자 신우가 그 뒤를 따른다. 그리고 막 1층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였다.

“생각해 봤어?”

“응?”

“나랑 연애하는 거.”

살짝 눈꼬리를 휘며 장난스러운 투로, 하지만 더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어 오는 말에 신우는 순간 그의 시선을 피했다. 눈이 마주친다면 그가 자신의 복잡한 감정들을 읽어 낼 것 같아 도저히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대답 대신 신우가 시선을 내리고 침묵하자 한이 손을 뻗어 신우의 머리통 위에 손을 얹고는 장난스레 말을 이었다.

“어차피 거절해도 안 받아들일 테니까…… OK 사인 나올 때까지 아주 천천히 생각하라고. 나 잘하면 스토커 된다? 자질이 보이지 않냐?”

“……네 덩치로 스토킹하면 금방 티 날 텐데?”

눈에 띄는 인간들은 스토킹 못 한다고 신우가 조금 긴장을 푼 듯 대꾸하자 한이 어깨를 으쓱한다.

“뭐든 하면 되지. 난 뭐든 한다면 잘한다고. 먼저 위치 추적부터 시작할까?”

“불법이야, 그거.”

“불법이긴 한데…… 불법이 아닌 그런 게 있어.”

우리 할아버지가 가끔 쓰시는 거, 라고 아주 진지하게 중얼거리는 한을 보며 신우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자 한이 당황한 얼굴을 한다.

“농담 아닌데? 내가 새벽에 너 어디 있는지 위치 확인해 볼까?”

“그럼 신고하면 되지, 뭐.”

금세 1층에 도착하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한이 먼저 나가라는 듯 손짓한다. 그 손짓에 따라 신우가 먼저 로비로 나서자 한이 뒤를 따르며 대화를 이어 간다.

“미리 말해 두자면 그건 경찰들도 못 찾아. 우리 할아버지만 아는 방법이거든.”

‘할아버지’라는 말에 문득 정현과의 대화가 떠올라 그대로 되물었다.

“혹시 무당한테 묻는다거나 하는 거 아냐?”

“어? 어떻게 알았어?”

“할아버지가 그런 거 좋아하신다며?”

“아, 그 표현이 딱이다. 좋아하셔, 진짜. 점 보는 거 엄청 좋아하셔.”

‘그리고 믿기도 참 잘 믿으셔, 단 할아버지한테 유리한 것들만.’이라고 한이 입 안으로 되뇌는 사이 로비를 가로지른 신우가 궁금한 듯 묻는다.

“너도 그래?”

“아니. 보는 건 좋아하는데 난 믿지는 않아.”

“믿지 않으면서 왜 봐?”

“할아버지가 하도 좋아하시니까. 그리고 점 자체보다는 점을 믿는 사람들을 믿는 거지. 무의식은 가끔 무시무시한 일을 벌이니까. 이거 하면 무조건 잘된다 소리 들으면 그거 믿고 자신감이 생기기도 하니까. 일종의 신경 안정제라고나 할까.”

“뭐, 그럴 수도 있긴 하겠다.”

점을 보는 사람들의 절박함이야 이해하지만, 그 점괘를 맹신하는 것까진 이해할 수 없었는데 한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불안감에 휩싸여 안절부절못하느니 그렇게라도 확신을 얻는 편이 정신 건강에는 좋을 수 있다.

“아, 너 태어난 시 알아?”

“오전 6시라고 했던 것 같아. 그런데, 확실하지는 않아.”

“6시면 묘시(卯時)네.”

그렇게까지는 모르겠다는 얼굴로 신우가 빤히 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그건 왜?”

“할아버지가 네 생년월일하고 태어난 시 알아 오래.”

“왜?”

“아마 네 사주랑 나랑 궁합 보시려는 거겠지.”

막 건물을 나서려던 신우는 그 말에 놀라 걸음을 멈췄다.

“뭐?”

“네 얘기 했거든. 그러니까 일단 생년월일하고 생시부터 알아 오래. 네 사주 통과하면 아마 직접 불러 놓고 관상 보실걸.”

“한아…… 그…….”

아직 사귀기로 한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도 아닌 할아버지한테 그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에 신우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그런 신우의 생각을 정확히 읽어 낸 한이 재빨리 신우의 어깨를 잡아끌어 걸음을 옮겼다.

“걱정 마. 괜히 할 일 없어 그러시는 거니까.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는 내가 좋다면 무조건 찬성이니까 걱정할 거 없어.”

“하지만…….”

“우리 할아버지는 당신 돌아가신 뒤의 일은 걱정 안 하시는 분이야. 죽고 나서 제삿밥 얻어먹느니 살아생전 원 없이 산해진미 다 드시고 가신다고 대놓고 말하시는데, 뭐. 그러니까 자식들도 손자들도 별 관심 없으셔. 결혼을 하든 말든 애를 낳든 말든 알 바 아니라고 하시거든.”

“……그래도…….”

“우리 할아버지는 우리 할머니만 사랑하시고 우리 할머니한테만 관심 있어. 할머니 돌아가신 뒤에 임종 못 지킨 아들 손자들 다 내쫓으실 정도로.”

그러고 보니 정현이 그런 말을 하긴 했다. 할머니 임종 후 한만 빼고 가족 전원이 본가에서 쫓겨났다고. 하지만 그 이유가 임종을 지키지 못해서였을 줄은 몰랐다. 놀라 멀뚱하니 한을 바라보던 신우는 순간 저도 모르게 머릿속 의문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너는 왜?”

“할아버지랑 내가 할머니 임종을 지켰거든. 그냥 그런 감이 있더라고. 오늘 학교 가면 할머니를 다시는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학교를 안 갔어. 그날 날씨도 유독 좋아서 마루로 할머니 모시고 나가서 할아버지는 할머니 머리 빗겨 드리고 난 발 씻겨 드리고. 그런데 그날 유독 할아버지가 할머니 머리를 빗겨 드리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방에 들어가서 카메라를 갖고 와서 찍어 놨는데, 바로 그 직후에 바로 돌아가셨어. 햇살 아래에서 할아버지 품에 안긴 채 편하게 웃으면서 가셨지.”

동화같이 슬프면서도 예쁜 이야기에 신우가 말없이 한의 얼굴을 바라보자 한이 목소리 톤을 조금 높였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날 편애하시는 거야. 나한테 신기가 있다나 뭐라나?”

잘하면 박수 될 뻔했다고 웃음을 흘린 한은 천천히 그의 집안 이야기를 이어 갔다.

“우리 삼촌하고 고모들이 합법적으로 매해 유일하게 본가에 들어올 수 있는 날이 할머니 제삿날이야. 진즉에 마음에 안 드는 자식들 내보내고 싶어 하셨지만, 할머니 눈치 보느라 집에 두고 뒤치다꺼리하셨거든. 그러다 할머니 돌아가시니 다 내쫓으시곤 제삿날만 그럴싸하게 모여 할머니한테 보여 주는 거야. 그땐 외국 나가 있는 사람도 다 들어와야 해. 안 그러면 호적 파여. 뭐, 호적 파인다는 게 말뿐이긴 한데, 작은아버지가 제삿날에 해외여행 갔다 의절당하셨어.”

“진짜?”

“응. 애초에 자식들한테 친애의 정이 별로 없으시고, 말릴 사람이 있어야지. 할아버지가 유일하게 꼼짝 못 하는 사람이 할머니의 오빠, 나한테는 진외종조부인데, 할머니 결혼을 목숨 걸고 반대하셨다나. 그래서 아직도 우리 할아버지가 설설 기셔. 그게 보기 싫어서 가끔 진외가 할아버지가 손자들 데리고 오면 은근히 골려 주곤 했는데…… 얘기 들어 보니 그럴 만하더라고.”

한이 그럴 만하다고 할 정도라면 무슨 이유였던 걸까, 하는 의문에 신우는 곧장 되물었다.

“왜?”

“할머니랑 결혼하시려고 그쪽 집안을 파산시켰나 봐, 할아버지가.”

여동생을 안 주면 파멸시켜 주마, 라고 말하곤 결혼을 밀어붙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그 사실을 안 뒤로 진외가 할아버지를 깍듯하게 대했다는 한의 말에 신우는 좀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되게 특이하신 분인 것 같다.”

“특이하신 정도가 아니지. 그 시대에는 얼굴 한두 번 보고 결혼한 경우가 허다하다지만 집안 망하게 하고 위협해 결혼한 건 우리 할아버지뿐일걸? 요즘 세상이면 윤리적으로뿐 아니라 법적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는 사건이야. 공갈 협박, 위협 등등 쪽으로.”

“……그렇긴 하지.”

“그러니까, 네 생년월일하고 태어난 시 보고한다. 안 하면 직접 찾으러 오실 거야. 그리고 장담하는데 넌 우리 할아버지 취향이야.”

“응?”

“우리 할아버지가 딱 좋아할 타입이라고. 그래서 더 보여 주기 싫어. 우리 할아버지랑 나, 외모며 성격까지 완전히 똑같거든.”

그의 말을 따라가지 못한 신우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자, 한이 신우의 어깨를 놓고 싱긋 웃는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응.”

솔직한 답에 한이 다시 손을 뻗어 신우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럼 알아내 봐. 아, 다 왔다. 밥 먹자.”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밥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두 번째로 방문한 허름한 가게의 간판을 확인한 신우는 한이 이끄는 대로 그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그리고 오늘도 역시 순두부찌개 백반 두 개를 주문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곧 나온 먹음직한 음식들을 눈앞에 두고도 손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 정신이 하나도 없는 하루였다.

늦은 오후, 오늘도 강제로 한의 차를 타고 집까지 온 신우는 안전띠를 풀며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셔틀은 대환영이야. 아, 그냥 내일 아침에도 올까? 같이 출근할래?”

기다렸다는 듯 건네 오는 한의 제안을, 신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거절했다.

“아냐, 괜찮아. 바쁘잖아. 아까 들어오는 도안만 봐도 엄청나던데.”

“내가 데려다주고 싶어서 그래. 바쁘다고 하고 싶은 걸 못 하면 오히려 능률이 떨어지는 타입이야, 난.”

난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다른 일도 잘된다는 한의 고집에 신우는 난감한 듯 한을 달랬다.

“집도 먼데 아침저녁으로 네가 오가면 내가 미안하고 신경 쓰일 것 같아서 그래.”

“그래?”

“응. 그럼, 그만 가 봐. 내일 회사에서 보자.”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조금 실망한 기색이긴 했지만 결국 한은 시원하게 신우의 의사를 받아들였다.

흔쾌한 한의 답에 안도하며 신우는 서둘러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려섰다. 그러곤 차 문을 손으로 짚고 선 채 운전석에 앉은 한의 얼굴을 응시하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조심해서 가.”

“응. 너도 빨리 들어가서 쉬어. 그리고 내 생각 많이 해. 계속 생각하다 보고 싶으면 전화하고. 언제든 달려올 테니.”

장난기 가득한 그 말에 신우는 아이를 어르듯 부드럽게 대꾸했다.

“많이 생각할게. 가.”

“응. 잘 쉬어. 내일 보자.”

“응.”

마지막 인사를 마친 뒤, 차 문을 닫고 선 신우에게 한이 먼저 들어가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그 신호에 신우는 잠시 망설이다 먼저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누군가 떠나는 걸 보는 건 어려워 걸음을 서두르는데, 불현듯 걸음을 멈췄다.

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나지 않아서였다.

왜 가지 않는 걸까, 하는 의문에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는데 차 안에 앉아 있던 한과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그가 환하게 웃었다.

아주 환하게, 그리고 아주 기쁜 듯 웃어 보였다. 그 미소가 따뜻하다.

언제나 느끼지만 한을 보고 있으면 환한 햇살 아래 풀잎이 살랑거리는 평화로운 풍경을 보는 기분이 된다.

절로 포근해지는 기분에 어색하게 손을 들어 흔들어 보이자 한 역시 손을 흔든다. 어서 들어가라는 듯한 손짓이었다.

조금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다시 돌아서 어두운 계단으로 향했다.

오늘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두운 방 안으로 돌아와 가방을 내려 둔 채 불을 켜자 엉망이 된 방 안이 눈에 들어왔다.

말은 투 룸 빌라라고 하지만 실상 원룸에 가까운 1.5룸 구조였다. 좁은 방 하나에 미닫이문을 설치해 침실과 거실을 분리한 상태지만 창문이 침실 쪽으로만 나 있어 늘 문을 열어 놓고 있다 보니 원룸보다 좁고 답답해 보였다.

최근 바빠 전혀 정리를 못 한 탓에 정신없는 방을 대강 치우고 냉장고를 열어 보니 역시나 텅 비어 있었다. 냉장고 안에 있는 거라곤 김치 두 종류와 생수, 그리고 카페인 음료 몇 개뿐이었다.

지갑 사정도 좋지 않지만 애초에 집에서 식사할 일도 거의 없으니 냉장고가 이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시간에 나가 장을 볼 의욕도 들지 않아 다시 냉장고 문을 닫고는 커피포트에 생수를 붓고 스위치를 누른 뒤 커피 믹스를 두 개 꺼냈다.

커다란 머그에 커피 믹스 두 개를 한 번에 쏟아부은 다음 물이 끓는 사이 노트북 앞으로 가 전원을 켰다. 그리고 곧 가방에서 작업 중이던 데이터가 담긴 메모리 스틱을 꺼내려는 순간 휴대폰의 벨 소리가 울려 왔다. 가방 안에서 요동을 치는 휴대폰을 서둘러 꺼내 보니 액정 위로 ‘고모’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순간 싫다는 감정이 밀려왔다. 재촉하는 듯 귀를 때려 대는 벨 소리가 심히 거슬렸지만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라면 자신이 전화를 받을 때까지 걸 게 뻔하기에 어쩔 수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

“뭐 좀 하느라고요.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마침 탁, 하며 커피포트가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일단 메모리스틱을 꺼내 USB 포트에 꽂은 신우는 다시 주방으로 가 머그 안에 뜨거운 물을 따랐다.

- 오늘 네 엄마 봤다.

뜻밖의 말에 신우의 손이 멈췄다.

어떻게, 라는 생각에 혼란스러워하고 있는데, 신우의 사정과 관계없이 그녀의 입에서 언제나와 같은 독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아주 잘 살더라. 지 멀쩡한 아들까지 다 죽었다고 거짓말하고 돈 많은 남자하고 재혼하더니 신수가 훤해. 지 친아들은 피죽도 못 먹은 얼굴로 죽어 가는데 백화점에서 의붓딸 팔짱 끼고 사모님 소리 들으면서 아주 신이 났어.

악에 받친 그녀의 말에 신우는 침묵했다. 지금 뭐라 대꾸하면 그녀가 더 심한 말들을 쏟아 낼 거라는 걸,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13년 전에도 그랬었다. 아버지와 이혼 후 재혼한 어머니가 아이가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결혼했다며, 지 새끼도 버리는 독한 년이라고 이제 엄마는 찾지도 말라고 아주 혹독하게 자신의 정신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때 자신이 어머니 편을 들자 지 어미 닮아 독하다느니 너는 네 애비 아프면 당장 버리고 떠날 모진 녀석이라느니 하는 악담을 가차 없이 퍼부어 댔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는 걸 포기했다. 포기하니 편했다. 그녀가 떠들어 대면 그냥 다른 생각을 하면 됐다.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지금은 익숙해졌다.

- 내가 그래서 그 잘난 딸년 있는 데서 뭐라고 했다. 니 아들은 지금 아빠 병원비 때문에 진 빚 갚느라 등골이 휘는데 남의 딸년하고 싸다니니 좋냐고 뭐라고 했어. 그랬더니 뭘 잘했다고 그 자리에서 울더라. 창피한 건 아는 모양이야.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개에 신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고모의 불같은 성미는 알고 있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아니, 이건 말이 안 된다.

“고모, 그걸 다 말했어요?”

- 그래. 그 딸년한테 니 새엄마 사실은 멀쩡히 살아 있는 아들 있는데, 그 아들 죽었다고 거짓말했다고도 했어. 죽은 건 둘째고 첫째는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 엄마 보고 싶다 찾았다고. 근데 어미라는 년이 전화번호도 가르쳐 주지 말라고, 자기 죽은 사람 취급하라고 해서 나도 그러라고 했다고. 그거 아주 독한 년이라고 다 불어 버렸어.

“고모!”

순간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한 채 고함을 내질렀다.

그녀가 어떻게 난장을 만들었을지 훤히 보였다.

모진 사람이었다. 모질고 지독한 사람이었다. 고모라면 세 치 혀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어머니가 떠날 때도 잡지 못했던 거다.

- 백화점에서 아주 내가 사달을 내 놨어. 다신 얼굴 들고 못 다닐 거다. 다들 사모님, 사모님 하면서 굽신거리던데. 그런 인간 말종이 사모님은 무슨 사모님이야.

편협하기 짝이 없는 그녀만의 시각에서, 독설을 정당화하는 그녀에게 신우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왜 그런 말을 해요? 이미 옛날 일인데!”

- 넌 분하지도 않니? 멀쩡한 애새끼를 죽었다고 하고 재혼을 했는데? 짐승도 자기 새끼는 안 버린단다. 내, 이혼할 때 애 떼어 놓고 뒤도 안 돌아보고 갈 때부터 알아봤어.

완벽하게 뒤틀린 인과 관계에 신우 역시 악에 받친 소리를 내뱉었다.

“절 포기 안 하면 이혼을 안 해 준다고 하니까 그랬죠. 대체 왜 그러세요? 엄마한테 그 정도 했으면 됐잖아요. 왜 아빠랑 헤어진 사람을 괴롭히세요?”

- 얘 좀 봐? 내가 뭘 괴롭혀? 비실비실하니 인간 구실도 못 하는 네 엄마 내가 다 거둬 먹였어!

그런 건 거둬 먹이는 게 아니라 학대라고 하는 거다. 아주 어린 시절의 이야기지만 아직도 고모와 할머니가 엄마를 어떻게 대했는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는 어려서 몰랐지만 지금은 당시 그들이 행한 모든 것들이 정서적 폭력이라고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손이나 몽둥이로 때리는 것만이 학대가 아니다. 말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저 어릴 때라도 다 기억나요. 할머니, 고모가 엄마한테 어떻게 했는지 다 기억해요. 아빠가 어떻게 했는지도 기억나요! 엄마, 신영이 때문에 살았어요. 신영이가 아파서, 그 애 두고 가지 못해서 산 거예요. 그래서 나도 엄마 안 잡았어요. 오죽하면 절 떼어 놓고 갔겠어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모친과 그런 모친을 그대로 닮은 동생. 약하디약한 몸으로 그 모진 시집살이를 견디던 어머니가 얼마나 도망치고 싶었을지, 이제는 안다. 그리고 이해한다. 심장이 약해 달리지도 못하던 신영이 때문에 버텼지만 신영이는 결국 죽었고 그녀는 그제야 자유로워진 듯 도망쳐 버렸다.

그래서 자신을 버린 그녀를 탓할 수도 잡을 수도 없었다. 그녀를 원망하기엔 그녀의 삶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신영이를 죽인 건 자신이니까…… 그러니까 그녀를 원망할 수 없었다.

그녀도 자신에게 진저리를 쳤을 테니까. 그 어린 동생을, 그 연약하고 작은 아이를 떼어 놓고 나간 지독한 인간이니까. 그 동생이 자신을 따라 달리다 쓰러져 그 작은 심장이 견디지 못하고 터진 마당에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있던 이기적인 놈이니까.

전부 내 잘못이니까…….

순식간에 되살아나는 과거의 기억에 신우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날은 11월 8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일이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무도 챙겨 주지 않았지만, 분명 그날은 자신의 생일이었다.

그래서 나가고 싶었다. 아무도 그 아이를 봐 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너무나 나가고 싶어서, 그 아이를 두고 나가 버렸다.

그리고, 자신이 돌아왔을 때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옆집 아주머니의 손에 이끌려 간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보게 된 신영이의 얼굴은, 퍼렇게 질려 있었다.

숨을 쉬지 않고 눈도 깜빡이지 않고 심장도 뛰지 않았다. 그 작던 아이가 푸른빛을 띤 채 굳어 있었다.

그 너머로 기억나는 건 매서운 눈빛으로 자신을 힐난하던 아버지와 벽에 기대앉아 허망하게 천장을 바라보던 어머니의 그 눈뿐이었다.

이번에도 그때와 같은 얼굴을 했을까.

머릿속이 아찔해지는 광경에 신우는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숙였다. 잠시간의 침묵 후 수화부에서 조금 당황한 듯 낮아진 여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 아이구, 세상에.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그래도 난 지 생각해서 그 난리쳤구만, 지 애미라고 편드는 것 봐? 널 누가 키웠는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혼몽한 정신을 가다듬은 신우는 부탁한 적 없는 친절로 공치사를 하는 그녀에게 그동안 쌓여 있던 감정을 그대로 털어놓았다.

“고모가 저한테 해 주신 거 평생 저 상처 준 것밖에 없으세요. 저 때문에 신영이 죽었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죽인 거라고 하셨잖아요. 독하고 이기적인 놈이라 제 동생 잡아먹었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엄마가 저 버리고 간 거라고요. 엄마도 독하고 저도 독해서 독한 것들이 서로 등 돌린 거라고요. 네, 맞아요. 제가 신영이 죽였어요. 그래서 엄마도 도망쳤고 아빠도 결국 그렇게 가셨어요. 그러니까 제가 다 책임진다고 했잖아요. 저만 책임지면 되잖아요. 그런데 왜 엄마한테 그러세요?”

정신없이, 빠르게 내뱉어지는 그 말에 여자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 얘가 그걸…… 벌써 몇 년 전 얘기를…….

“생각나는 대로 내뱉지 마세요. 고모는 그냥 한마디 하는 거지만 듣는 사람은 죽도록 아파요. 아니, 죽는 것보다 아프다고요.”

빠지지도 않는 커다란 가시에 심장이 찔린 듯 아프고 고통스럽다고 신우가 피를 토해 내듯 호소하자 그녀의 기세가 완전히 꺾였다. 그래도 미안한 건 아는지 머뭇거리는 그녀의 태도에 신우는 눈을 질끈 감고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계속해서 복잡하게 얽히는 격렬한 감정을 겨우 다스린 신우는 다시 차분해진 목소리로 그녀에게 마지막 말을 건넸다.

“다신 전화하지 마세요. 이제 고모 전화 안 받을 거예요.”

- 얘, 신우야. 얘!

그녀가 더 말할 기회를 주지 않은 채 휴대폰을 끈 신우는 갑작스러운 현기증에 싱크대에 두 손을 짚고 겨우 기대섰다.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어머니에 대한 미련은 이미 떨쳐 냈다. 죄책감은 여전하지만, 상처도 그리움도 그대로였지만 이젠 절실하진 않았다. 어느 정도 무덤덤해진 채였다.

자신은 동생도 제대로 돌보지 못한 못된 아이니까. 애초에 사랑받지도 못했지만 사랑받을 자격도 없는 아이니까.

그러니 미련도 아쉬움도 그리움도 모두 덮어 둘 생각이었다. 어머니가 자신의 존재를 지웠다는 그 이야기에 서러워 울고 또 울었지만, 덕분에 그녀에 대한 미련은 완전히 떨쳐 낼 수 있었다.

기대하지 않으면 원망할 것도 없다. 미움과 원망은 사랑하고 믿고 기대던 이에게 느끼는 감정이기에 모든 기대를 버리자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저 그녀라도 행복하길 바랐을 뿐이다.

그런데 왜 지금, 그 상처를 또 후벼 파는 걸까?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지만, 충분히 감출 수 있는 일들을 왜 굳이 겉으로 드러내게 만드는 걸까?

그냥 모두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잊어버리고 싶다.

그게 안 된다면, 영원히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

삽시간에 몰려오는 강렬한 충동에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사이, 다시 벨 소리가 울려왔다.

신경을 긁어 내리는 그 소리에 전원을 끄려 휴대폰을 손에 든 순간 액정에 뜬 이름이 보였다.

한이었다.

그 이름에 저도 모르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잘 들어갔어?

수화부 너머에서 들려온 그의 음성이 귓가에 울린 순간 입을 틀어막았다.

말을 하면 울어 버릴 것 같아서, 겨우 입을 틀어막고 있자 그가 의심스러운 듯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 ……신우야?

순간, 이 녀석은 왜 매번 이럴 때마다 연락을 해 오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3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쩌면 이렇게 사람의 온기가 간절해지는 순간 기가 막히게 손을 내미는 걸까?

어머니가 떠나고 나서 누군가, 누구라도 좋으니 어머니처럼 상냥하게, 그녀가 자신을 사랑했을 때처럼 따뜻하게 이름을 불러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얼마나 바라고 또 바랐는지 모른다.

그리고 가장 간절한 순간 다가와 준 게 이 녀석이었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 가장 절실한 순간에는 항상 이 녀석이 다가왔다.

- 다시 갈게. 기다려.

이번에도 역시 그는 다시 돌아온다고 해 주었다. 슬프다고 아파 죽겠다고 말하지 않아도, 한은 늘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좋았다. 무서워서 감히 입으로 꺼낼 수 없는 것들을 그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게 해 주었으니까.

끊어진 휴대폰을 손에 든 채 신우는 그 자리에 선 채 울음을 삼켰다. 지옥으로 떨어지던 순간, 구원을 받은 기분이었다.

이제 울어도 될 것 같았다.

전화를 한 뒤 10분, 혹은 15분.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도 느끼지 못한 채 멍하니 방 안 구석에 앉아 있던 신우는 쿵쾅거리는 문소리에 서둘러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신우야! 연신우!”

벨을 누를 여유도 없는 듯 문을 두드리며 고함을 치는 한의 목소리에 신우 역시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진이 빠진 듯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겨우 힘을 짜내 현관으로 다가서 떨리는 손을 뻗어 잠금장치를 풀었다.

순간 탁 하며 잠금장치가 풀리자 기다렸다는 듯 바깥에서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틈으로 한의 얼굴이 보였다.

“너, 괜찮…….”

급히 달려온 듯 거친 호흡을 쏟아 내며 그렇게 묻던 한이 다음 말을 채 다 잇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어두운 복도에 선 그가 놀란 듯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일순 긴장이 풀렸다. 그리고 전신에서 힘이 빠졌다.

그를 보자 드디어 지긋지긋하던 악몽이 끝난 기분이었다.

안도감에 젖어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성큼 현관 안으로 들어선다. 그러곤 말없이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준다.

“괜찮아, 신우야. 괜찮아.”

“…….”

“다 괜찮아질 거야.”

“…….”

“괜찮아.”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은 채, 한은 그렇게 말하며 말없이 등을 다독여 주었다.

그 손길이 좋았다.

아니, 따뜻하고 큰 그의 손도, 넓고 편안한 그의 품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는 그의 음성도, 모두 좋았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다.

그와 있으면 사랑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도 사랑받을 수 있고, 그럴 자격이 있는 인간이라고, 그가 말해 주는 듯했다.

그래서 그의 곁이 좋았다. 허락된다면 지금도, 앞으로도 그의 곁에 있고 싶다.

따뜻하고 포근한 그의 곁에서 그의 사랑을 받고 싶다. 아주 잠깐이라 해도 좋다.

사랑받고 싶다. 너무나 간절하게도…….

신우는 꿈을 꾸고 있었다. 언제나 꾸던 그 악몽이었다.

꿈속에서, 집을 나서려는 자신에게 동생이 매달려 왔고 그 손을 뿌리친 자신은 오늘도 꿈속에서 내달리고 있었다.

친구들이 먼저 돌아갈까, 마음이 초조해져 운동화를 꺾어 신은 채 앞만 보고 달리던 중 문득 걸음이 멈췄다.

어쩐지 전과 다른 전개였다.

오늘은 꿈속에서 처음으로 걸음을 멈춘 채 뒤를 돌아봤다.

그 아이를 두고 가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 아이를 두고 가면 다시는 그 아이를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에 다시 돌아서 집으로 향해 뛰었다.

방금 빠져나온 좁은 골목길을 지나 달려가자 작은 아이가 골목에 우뚝 선 채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가슴 시린 그 모습에 서둘러 아이에게 다가가 꼭 끌어안아 주었다. 그러곤 야윈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신영아. 울지 마.’

‘형, 가지 마.’

‘안 갈게. 그러니까 울지 마.’

자신보다 한참은 작은, 병약한 아이의 등을 쓸어 주고 있자 아이가 차츰 울음을 그쳐 간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눈물을 멈춘 아이가 눈물 자국이 그득한 얼굴을 들어 웃는다.

‘이제 안 울어.’

‘그래, 착하다. 집에 돌아가자.’

‘응.’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 낸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잡아 온다. 작디작은 그 손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저 멀리 노란 지붕의 아담한 벽돌집이 보였다.

엄마가 있고, 아빠가 있는, 우리 집이었다. 아이가 아픈 탓에 늘 웃음꽃이 피는 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집이 자신의 집이었다.

‘가자.’

‘응.’

고개를 끄덕이며 얌전히 자신을 따르는 아이의 손을 쥔 채 신우는 그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낮고 창백한 초겨울의 햇살이 길가를 환하게 비추었다. 그 투명한 빛 아래에서 아이는 즐거운 듯 웃었다.

아주, 환하고 예쁘게. 그리고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최후로 보았던 그 창백한 얼굴이 아닌 해사하기 짝이 없는 생기 있는 얼굴이었다.

“신영이는 어디 사는 놈팽이야?”

온몸을 감싼 따뜻한 온기에 눈을 뜨자 바로 머리 위에서 장난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귀에 익은 그 음성에 고개를 들자 한 남자가 비스듬히 누운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아는 사람이긴 한데 선뜻 그가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멍하니 그를 보고 있자 그가 눈을 휘며 웃는다.

“이걸로 넌 내가 침 발랐다?”

“……응?”

“밤을 함께 보냈으니 결혼해야지.”

한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내뱉은 순간, 신우의 눈동자에 초점이 잡혔다. 그제야 잠에서 제대로 깬 듯 또렷해진 신우의 눈동자 위로 당혹감이 스쳤다. 그걸 본 한은 툭 치듯 신우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밤을 함께 보냈으니 책임지라고요, 연신우 씨.”

그 말에 신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시계를 찾았다.

오전 7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창으로는 벌써 환한 햇살이 들어오고 있다.

“어…….”

“너 꽤 열정적이더라? 아주 필사적으로 들러붙어서 애먹었어. 그렇게 나랑 같이 자고 싶었어?”

한이 능글거리는 말투로, 은근슬쩍 농담을 건네자 신우는 재빨리 지난밤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되돌려 보기 시작했다.

어젯밤 한의 배웅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온 뒤 고모의 전화를 받았다. 통화 중 어머니 얘기가 나와 안 좋게 통화를 끊었는데 곧 한에게서 전화가 왔고…….

그리고 한이 집으로 다시 와서 문을 열어 준 뒤에…….

생생히 떠오르는 간밤의 추태에 신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중간중간 기억은 끊겨 있지만 가지 말라며 그를 붙잡고 계속해서 울었던 건 기억한다. 그때마다 한은 안 간다고 하며 자신을 안고 계속 달래 주었다.

순간 신우는 튕기듯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한에게 사과했다.

“……미안. 미안해.”

“미안하면 책임지면 돼. 이제 좀 괜찮아?”

“……응.”

“됐어, 그럼. 같이 출근하고 싶은데…… 어제랑 같은 옷 입고 너랑 같이 가면 인재가 난리 칠 테니 집에 갔다 올게. 씻고 아침 먹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내가 데리러 올 테니까.”

천천히 몸을 일으킨 한은 그렇게 말하며 뻐근한 듯 기지개를 켰다. 한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했지만 신우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젯밤 보인 추태도 추태지만 그를 번거롭게 해 버렸다. 또 멍청한 짓을 했다고 자책하며 신우는 한에게 연신 사과의 말을 반복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미안하면 책임지라니까.”

기지개를 켠 한은 침대에서 내려서며 책임지라는 말만 거듭했다. 장난을 치듯 가벼운 그의 태도에도 신우는 혼이 난 아이처럼 고개를 숙인 채 그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는 사과의 말도 할 수 없어 신우가 입술을 꾹 다물고 있자 한이 그를 부른다.

“신우야?”

“…….”

“연신우?”

“…….”

“고개 좀 들어 봐.”

마지막 그의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신우는 떨어질 듯 무거운 고개를 간신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바로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다소 겁에 질린 듯한 신우의 눈빛에 한이 괜찮다는 듯 미소 짓고는 신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그렇게 미안해할 것 없어. 내가 오고 싶었던 거고 올 수 없었으면 더 힘들었을 거야. 아마, 어제 일을 몰랐다면 더 마음 아팠을 거고.”

“…….”

“언제든지 필요할 때면 시간 따지지 말고 전화해. 보고 싶을 때나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나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나. 그럼 언제든 달려와 줄게.”

시선을 맞추며 마치 주문을 외듯 한은 그렇게 속삭였다. 마치 자신을 세뇌하려는 듯한 그 속삭임을 머릿속으로 되뇌는 사이 한이 머리를 끌어안으며 이마에 입을 맞춘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절대 혼자 앓지 마. 무슨 일이 있든 내가 곁에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내가 가진 운이 엄청나니까.”

보기 드물게 진지한 눈초리로 한은 마지막 말이 끝난 뒤 다시 한번 신우의 머리카락 위에 입을 맞추며 장난스럽게 한마디를 더했다.

“내 사주가 황제상이거든.”

이어지는 가벼운 그의 농담에 신우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풀리자 한이 어쭈, 하는 얼굴로 신우를 보았다.

“너, 사주 우습게 보지 마. 사주는 일종의 통계야. 우리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내 사주는 황제상이고, 전생은 나라를 구한 명장이래. 그 복을 받아 이생에선 뭘 하든 최고가 될 거라 하셨어. 쉽게 말해 난 뭘 해도 될 놈이라는 거지.”

살짝 고개를 쳐든 채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한을 보며 신우가 웃음을 흘린다.

“그건 부럽다.”

“네 사주도 좋아. 우리 할아버지께서 어제 당장 아저씨 불러서 네 사주 봤는데 사주가 끝내준대. 서른하나에 서쪽에서 귀인이 나타나 네 인생이 완전히 꽃밭으로 바뀔 거라던데? 그리고 남편 복이 끝내준대.”

“처복이 아니라?”

“아니, 남편 복. 그러니까 날 잡으라고. 거기다 너랑 내 궁합도 환상적이래. 속궁합도 대박이고. 덕분에 할아버지께서 당장 네 관상 보자고 하시기는 했지만…… 일단, 그건 좀 미루기로 했어.”

자신의 사주가 그리 좋을 리 없다. 아니, 좋다 해도 믿을 수 없겠지만 한이 일부러 자신을 웃게 하려고 하는 말인 것 같아 더는 표정을 굳히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언제 점을 보신 거야? 난 어제 알려 줬는데?”

“어제 점심 먹고 바로 네 생년월일하고 생시 보고했거든. 집에 도착하자마자 할아버지께서 잔뜩 흥분하셔서 사주 얘기만 하시길래, 그 얘기 하려고 전화했던 거야. 너랑 나랑 천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인연이라나 뭐라나. 할머니랑 할아버지 궁합보다 더 잘 나왔대.”

사주랑 궁합은 내가 할아버지를 이겼어, 라며 호쾌하게 웃는 한의 모습에 신우도 이번엔 자연스럽게 미소 지었다.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인 신점이나 사주 같은 건 믿지 않았지만 자신의 미래가 괜찮고, 한과의 궁합도 좋다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이 끔찍한 시간이 언젠가는 끝날 거라 생각하니 기분 좋기까지 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점을 보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러다 점에 중독될 것 같아.”

“점도 나름 괜찮다니까. 정신 건강에 좋아. 맹신하는 건 안 좋지만 적당히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건 괜찮아. 뭐든,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한 거니까.”

결국 믿는 것이 스스로를 만든다, 라는 한의 말에 신우는 동의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신우의 얼굴은 어젯밤보다 훨씬 홀가분해 보였다. 혈색도 좋고 간혹 짓는 미소도 편안해 보였다.

“이제 괜찮지?”

“응.”

“그럼 됐어. 앞으로는 더 괜찮아질 거야.”

대책 없을 정도로 긍정적인, 너무나 한다운 그 말에 신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질 거야. 그리고 고마워.”

처음으로, 한에게 ‘미안해’라는 말 대신 ‘고맙다’는 말을 전하자 한이 커다란 손으로 신우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흐트러트린다.

“‘미안해’보다는 훨씬 듣기 좋다.”

다정한 그의 한마디와 그의 손길에 따뜻한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봄햇살같이 따뜻한 녀석이었다.

이 따뜻함을 잃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에게 사랑받고 싶다.

여전히 그의 변덕은 믿을 수 없고, 그와 헤어진 후에 대한 두려움은 남아 있지만 어차피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언젠가는 모든 게 끝난다.

끝이 난다면 끝을 내고 그 뒤에는 추억으로 살아가면 된다.

고등학교 시절 그와의 시간을 추억하며 십여 년을 살아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러면 된다.

그 생각과 함께 결심을 굳힌 신우는 한의 얼굴을 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한아.”

“응?”

자그마한 부름에 바로 응답해 오는 그의 앞에서 신우는 짤막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조금 긴장한 듯 두 주먹을 꽉 쥐고선 그와 시선을 맞췄다.

그렇게 잠시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던 신우는 그제 그가 한 제의에 대한 답을 내뱉었다.

“나랑 연애하자.”

―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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