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그날은 제대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막 더위가 시작되던 초여름의 오후, 복학 신청을 위해 들른 학교에서 동기들을 만났고 그들과 가볍게 술 한잔하기로 한 것뿐인데 정신을 차려 보니 대형 술판이 벌어져 있었다.
환영회라는 핑계로 시작된 술자리는 학교 근처에서 시작돼 곧 강남으로 옮겨 갔고 네 명으로 시작돼 서른두 명에서 마무리되었다.
전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한 번에 인사를 한 걸로 치면 싸게 먹힌 셈이었다. 그래서 시원하게 술값을 계산한 뒤 술집을 나왔을 때는 자정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후배들을 먼저 택시에 태워 보낸 뒤 남은 몇 명끼리 새 가게로 옮기려던 찰나,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기습적인 폭우였다.
예고도 없이 쏟아지는 소나기에 거리에는 일대 소란이 일었다. 분명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10년 만의 가장 ‘건조한 여름’이라는 뉴스가 흘러나온 게 무색하리만큼 거센 빗줄기였다.
‘갑자기 웬 비야?’
근처 가게의 천막 아래로 도망쳐 그새 젖은 옷을 터는 사이 인재가 내뱉은 볼멘소리에 한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뭐, 살다 보면 갑자기 비가 올 수도 있고 눈이 올 수도 있지.’
‘오늘 기상청 예보에 강수 확률 20%였다고.’
여름에 강수 확률 20%면 0%에 수렴하는 거라며 짜증을 내던 인재는 옷과 머리카락의 물기를 대강 털어 내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너무 쏟아지는데? 계속 내리는 거 아냐?’
우산을 사야 하나, 하는 인재의 걱정에 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칠 거야. 그냥 지나가는 비야.’
하늘을 올려다본 한이 그렇게 말하자 인재가 웃는다.
‘넌 그런 건 기차게 잘 안다?’
가끔 보면 애늙은이 같다는 인재의 말에 한이 가볍게 대꾸했다.
‘할아버지랑 살다 보면 알게 돼. 노인들의 지혜란 좋은 거야.’
기상청의 슈퍼컴퓨터보다 정확한 감을 지닌 조부의 옆에서 자란 덕에 그런 건 잘 안다며 한이 웃는 사이 한의 말대로 곧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얼마 가지 않아 그칠 것 같은 기세에 한은 시선을 내려 순식간에 고요해진 거리를 바라봤다. 방금까지 인파로 붐비던 거리가 그새 조용해졌다. 마치 비가 사람들을 씻어 낸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네, 라는 생각과 함께 휴대폰을 꺼내 후배들에게 문자를 보내려던 한은 문득 반대쪽의 어두운 건물 입구에서 시선을 멈췄다.
그곳에는, 이 기습적 폭우에 건물 내로 몸을 피한 사람이 서넛 서 있을 뿐이었다. 모두들 휴대폰을 든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게 이쪽과 마찬가지로 기상 정보를 확인하거나, 택시를 부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광경이었다. 특별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선이 간 건 그곳에 선 한 사람이 몹시 눈에 익은 탓이었다. 지친 듯 늘어진 가느다란 어깨와 창백한 얼굴. 그리고 차분해 보이는 그윽한 눈동자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는 설마 했지만 살짝 고개를 든 순간 보인 그 얼굴은 분명히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4년 만이었지만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얼굴도, 분위기도 너무나 여전했다.
눈앞에 있는 그가 연신우라는 걸 인지한 순간 도저히 그로부터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달려가서 말을 걸어야 하는데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시끄럽고 수많은 인사말들이 뒤죽박죽으로 뒤섞였다.
그게 너무 이상했다.
딱히 그가 그리웠던 건 아니다. 만날 생각이 있었더라면 정현이를 통해 충분히 만날 수 있었는데 굳이 그를 찾지 않은 건 그렇게까지 만나고 싶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우연히 본 순간 느낀 감정은 갑자기 쏟아진 폭우처럼 기습적이고 강렬했다. 아니, 벅차다는 표현이 맞을 거다.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몰아치는 감정의 폭풍에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 본능적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막 두 번째 걸음을 내디디려는 순간이었다.
‘신우야!’
텅 빈 거리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왔다. 빗소리에 먹힌 그 소리는 속삭이듯 작게 울렸지만 걸음을 멈추기엔 충분했다.
세 번째 걸음을 내딛지 못한 채 거리를 바라보자 커다란 검은 우산을 든 남자가 신우가 있던 건물로 빠르게 뛰어가는 게 보였다.
‘야, 너 뭐 해?’
갑작스러운 한의 행동에 놀란 인재가 그를 불렀지만 한은 반대편 건물 쪽에 모든 신경을 집중한 채였다.
어느새 검은 우산을 든 남자는 바로 맞은편 건물 앞에 다다라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멈춰 서 있기를 잠시, 쏟아지는 빗속에서 건물을 나선 신우가 자연스럽게 그의 우산 아래로 들어섰다. 그러자 곧 남자가 손을 뻗어 신우의 어깨를 끌어안아 주었다.
그 순간 남자의 어깨 너머로 신우의 옆모습이 보였다.
신우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자신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예쁜 얼굴로, 그가 두르고 있던 모든 방어막을 해제한 채 웃고 있었다.
그게 너무 화가 났다. 미칠 정도로, 짜증이 났다.
그날부터 비 오는 날이 싫어졌던 것 같다.
진짜, 비가 끔찍하게 싫었다.
화창한 일요일 오후 본채의 마루에 앉은 한은 바둑판을 내려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바둑알을 손에 쥔 채 미동도 하지 않는 그 모습에 백발의 노인이 타박한다.
“바둑판을 앞에 놓고 무슨 생각이 그리 많으냐?”
“…….”
하지만 답이 없다. 이상하게도 조용한 한의 모습에 노인이 다시 그를 부른다.
“한아?”
“…….”
이번에도 답이 없자, 노인은 들고 있던 검은 바둑알을 그대로 한의 이마에 집어 던졌다.
“아!”
이마에 튕긴 바둑알에 한이 인상을 찌푸리자 노인이 눈을 부릅뜬 채 한을 노려본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무시무시한 노인의 안광에 한이 그제야 본인이 조부와 바둑을 두던 중임을 기억해 내곤 민망한 듯 눈을 껌뻑였다.
“어…….”
“어?”
본인과 꼭 닮은 조부의 얼굴에 어린 노기를 알아차린 한은 재빨리 그에게 먼저 사과의 말을 건넸다.
“죄송해요. 오늘은 못 하겠네요.”
아무래도 집중이 되지 않는다고 한이 바둑알을 정리하려 하자 노인은 재빨리 바둑판을 끌어당겼다.
“내가 이기고 있으니 못 하는 게 아니고?”
“……그럴 수도 있겠네요.”
유난히 지는 걸 질색하는 손자의 솔직한 답에 노인이 어서 이어 두라는 듯 턱짓을 하자 한이 영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바둑판을 바라보았다.
“……그냥 할아버지가 이긴 걸로 하죠.”
“뭘 이긴 걸로 해? 어차피 내가 이겼어.”
“네, 할아버지가 이겼어요. 그러니 이만 끝내죠.”
더는 할 기분이 아니라며 한이 손에서 굴리던 바둑알을 통에 집어넣자 노인이 못마땅한 얼굴로 한을 흘겨본다.
“또 무슨 일이냐?”
“뭐가요?”
“뭐가 그렇게 짜증 나고 못마땅한 거냐고. 왜, 이제 땅 파는 것도 싫증 났냐?”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뭐가 그리 거슬려 죽상을 하고 앉아 있누?”
거슬린다는 노인의 말에 한이 잠시 뜸을 들이다 답했다.
“……자꾸 생각나는 녀석이 있어서요.”
“마음이 가는 게냐, 거슬리는 게냐?”
“둘 다요.”
“그럼 마음이 가는 거구나. 그런데 그게 왜?”
“그 녀석을 완전히 잊고 살았는데 왜 잊었는지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화가 나요.”
그 말에 노인이 조금 놀란 듯 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돈 빌려주고 못 받았니?”
“그럼 돈이나 받으면 그만이죠.”
“그럼? 여자라도 뺏겼니?”
“할아버지 손자, 자기 사람 뺏기고 다닐 정도로 모자라지는 않습니다.”
“그럼?”
“……그 녀석이…….”
거기까지 내뱉은 한은 뭔가 울컥하는 듯 말을 멈췄다. 순간 노골적으로 드러난 불쾌함에 노인이 살살 달래듯 말을 건넨다.
“그 녀석이?”
“……예전에 그 녀석이 다른 남자랑 있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제 앞에서는 아무리 용을 써도 웃는 일이 없었는데 그 남자를 보면서 웃더라고요.”
그것도 아주 환하고 예쁘게, 라고 한이 씁쓸하게 덧붙이자 노인이 되물었다.
“그래서?”
“그래서, 일부러 잊고 있었는데 다시 떠올라 버렸어요. 자꾸 생각나니 좀 돌아 버릴 것 같더라고요. 아마, 그때도 그랬던 것 같아요. 욱하니 뭐가 치밀어 올라서 미치는 줄 알았거든요. 그대로 있다간 그 남자를 죽일 것 같아서 돌아서 왔던 것 같아요.”
지나치게 솔직한 한의 감정 토로에 노인은 조용히 한의 팔뚝을 확인했다. 저 팔로 힘껏 휘두르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돈에는 액이 꼬이는 법이라, 자기 몸은 스스로 보호하라며 경호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온갖 운동을 다 가르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호신용이었다. 사람을 죽이라고 가르친 게 아니다.
“……내가 언제나 말했듯이 난 네가 뭘 하든 찬성이다. 단 범법 행위는 빼고.”
뭐든 한번 하겠다 결심하면 물불 안 가리고 저지르는 손자의 성미를 알기에 노인이 먼저 경고하자 한이 걱정 말라는 듯 답한다.
“안 그러려고 돌아섰다니까요.”
“그건 잘했다. 그래서 넌 그 애랑 어쩌고 싶은 건데?”
“모르겠어요. 그 녀석을 잡아다 칭칭 옭아매 놓으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고민하는 중이에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범법 행위는 안 된다.”
납치 감금은 절대 반대라고, 노인이 딱 잘라 말하자 한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알아요. 그러니까 고민 중이라고요. 걔가 나한테 푹 빠져서 정신 못 차렸으면 좋겠어요. 나만 보고 나만 생각하게 만들고 싶은데…….”
마지막에 닿아 자신 없는 듯 흐려진 한의 음성에 노인은 웃음을 흘렸다.
“그럼 해 보면 될 거 아니냐.”
“네?”
“너한테 푹 빠지게 해 보라고. 그럼 답이 나오겠지. 왜? 자신 없니?”
자존심을 자극하는 그 말에 한은 정색했다.
“그건 아닙니다.”
“그래, 그럼 일단 해 보거라. 그러고 나면 너도 알게 되겠지.”
“뭘요?”
“넌 아직 한참 멀었다는 거.”
“어떤 면에서요?”
“연애에서 말야.”
작고한 처를 만나기 전까지 난봉꾼으로 온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던 조부의 훈수에 한은 실소를 흘렸다.
“절 난봉꾼의 길로 인도하실 셈인가요?”
“인도할 필요도 없이 넌 이미 훌륭한 난봉꾼이야.”
단수가 낮을 뿐이지, 라며 껄껄거리며 웃던 노인이 곧 흑알을 챙겨 알통에 넣자 한 역시 바둑판 위의 백알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노인이 입을 떼었다.
“그나저나 그 녀석, 눈은 두 개냐?”
“네? 아…… 네. 뭐…….”
“코는 하나에 귀는 두 개, 입술은 하나고?”
“……뭘 묻고 싶으신 건데요?”
“손가락, 발가락은 다섯 개 다 붙어 있고?”
“멀쩡하게 사지육신 오장육부 붙어 있을 거 다 붙어 있습니다.”
그제야 조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다.’라면서.
“생년월일은?”
“할아버지…….”
생년월일 알려 주면 당장 사주와 궁합부터 보려 할 게 분명한 조부의 물음에 한이 한숨을 섞어 제발 참아 달라는 듯 노인을 부르자 그가 웃는다. 그 웃음에 한의 한숨이 더욱 깊어졌다.
“눈, 손가락, 발가락, 생년월일 전에 더 중요한 게 있지 않나요?”
조부 역시 한의 성적 지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일단 성별부터 확인하시는 게 어떻겠냐고 한이 제의하자 노인이 그딴 시시한 건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 무심히 바둑알을 챙겨 넣는다.
“눈코입 제대로 달려 있고 손가락 다섯 개, 발가락 다섯 개면 된 거 아니냐?”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안 궁금하세요?”
“그게 궁금했으면 네가 사내자식이랑 연애질한다고 했을 때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서라도 말렸겠지.”
아니면 호적에서 팠거나, 라고 단언하는 조부를 보며 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네요.”
확실히 반대할 생각이라면 자신이 처음으로 남자와 사귄다고 했던 10년 전에 어떻게든 하셨을 분이다. 하지만 그때도 조부는 의외로 태연하셨다.
오히려 한이 남자와 연애하는 걸 안 순간 세상이 끝난 듯 구는 한의 모친에게 ‘여자랑도 사귀니 여자랑 결혼할 수도 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마라.’라며 위로까지 했었다. 물론, 뒤에 ‘아니면 말고.’라는 말을 덧붙여 어머니를 기함시키긴 했지만 하여간 조부 덕에 자신의 연애 문제에 대해서는 부모님도 더는 관여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따지고 보면 조부의 저런 태도가 자신을 부추긴 건지도 모른다. 고지식한 성품과 달리 노인은 원체 연애의 대상을 좁게 보지 않는 분이었다. 물론, 이왕이면 증손자를 보고 싶다고 슬쩍 말을 흘리긴 했지만 강요하는 투는 아니었다.
아마, 그건 조부께서 못 말리는 로맨티시스트인 탓일 거다. 어울리지 않게 말이다.
“일이든 사람이든 평생이 걸리더라도 내 거다 싶은 걸 찾으면 성공하는 거야. 자기 걸 찾지도 못하고 허송세월하다 죽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세상이니, 이거다 싶으면 일단 달려가서 잡아.”
“알아요, 그런 건.”
뭐든 한 가지를 진득하게 못 하는 성미 때문에 가끔 부모님에게 싫은 소리를 들을 때도 있었지만 조부만은 그런 자신을 전폭적으로 믿고 지지해 주었다.
가장 오래 한 농구를 그만둔다 했을 때도 조부께서는 ‘넌 뭘 하든 재능이 넘치니 하고 싶은 일을 찾아라.’라고 말해 주셨다. 그에 더한 옵션은 ‘되는 놈은 뭘 해도 된다. 그리고 난 되는 놈만 밀어준다.’였다.
확실히 자신은 되는 놈이었고, 조부께서는 수많은 자식과 손자 중 자신만을 믿고 인정해 주었다. 그래서 자신 역시 그에 대해 최대한의 성의를 보였다.
그 정도로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확실한 관계였다, 한과 조부는.
“그 애 한 번 데려와라. 내 관상 좀 보자.”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만 하면 사주에 궁합에 관상에 손금까지 다 봐야 성이 풀리시는 조부의 성품을 잘 알기에 한은 빠르게 거부 의사를 밝혔다.
“아직 안 돼요. 걔는 할아버지 보면 놀라서 도망칠지도 모르니 기다리세요.”
“날 보고 도망칠 정도면 네 상대는 아니다. 그런 놈은 알아서 떼어 내.”
“아직 떼어 내고 말고 할 것도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거기까지 진행이 되면 말이다. 그럼, 다음 판을 해 볼까?”
“다음 판이요?”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지.”
역시나란 생각에 한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웬일로 그렇게 쉽게 포기하시나 했더니, 판을 정리하고 새 판을 두시려는 생각이었던 거다.
할아버지께서 하실 생각이라면 어차피 강제로라도 앉혀 놓고 손을 움직이게 하실 분이라 한은 적당히 포기하고 다시 바둑판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바둑에서의 집은 일종의 포획이다. 상대의 알을 감싸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물론, 단지 집을 만들었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그 집을 또 둘러싸이면 끝장이다.
압박하고 눌러 교묘하게 선을 이어 가는 거다. 상대방이 여유를 가질 수 없도록 기를 눌러야 한다.
백알을 손에 쥔 한이 갑자기 의욕이 넘치는 눈빛으로 알을 쥔 주먹을 앞으로 내밀자 노인이 인상을 쓴다.
“내가 이겼잖아.”
“이긴 걸로 하기로 한 거지, 이긴 건 아니죠.”
게임은 끝까지 해 봐야 아는 거라며 한이 어서 알을 들라는 듯 재촉하자 노인이 인상을 쓴다.
“넌 천성이 사기꾼이야.”
“할아버지한테 배운 거예요.”
어린 시절부터 불같은 성미의 조부와 바둑을 두며 판은 무조건 끝까지 둬 봐야 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우친 한이 어서 하시라고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이 할 수 없다는 듯 흑알 하나를 올린다. 홀수를 선택한 그를 보며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흘린 한은 주먹을 펴 손바닥 안에 있는 두 알의 백알을 보여 주었다.
순간 끄응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한은 그를 무시한 채 흑알이 가득 담긴 통을 자신의 옆으로 끌어당겼다.
요 며칠 그날의 기억 덕에 심란했는데 조부와 대화를 하고 나니 그나마 머리가 정리된 기분이었다.
갖고 싶은 건 가져야 한다. 이거다 싶으면 망설이지 않고 달려가 잡는다. 그게 자신의 방식이었다.
그러니까 움직이면 된다. 오래전의 기억에 사로잡혀 낑낑대는 건 성질에 안 맞는다.
한이 드디어 집중력을 되찾은 듯 호전적인 시선으로 바둑판 위를 노려보자, 노인이 은근히 투로 말을 건넸다.
“그 아이, 생년월일 알아 오너라. 태어난 시까지.”
“룸 어디 어디 남았냐?”
폐점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카운터에서 호출을 기다리고 있던 신우는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에 서둘러 그를 향해 돌아섰다.
“3번하고 8번 룸이요.”
커다란 덩치에 양복을 갖춰 입은 명진에게 신우가 친근히 말을 던지자 그가 혀를 찬다.
“정 사장이지?”
“네.”
짧은 답에 명진은 못마땅한 얼굴로 3번 룸이 있는 복도를 노려보았다.
“마누라는 저 인간이 저러고 다니는 거 아나 몰라.”
애새끼랑 마누라만 불쌍하다며 혀를 찬 명진은 다시 신우를 돌아보며 바깥쪽을 향해 고갯짓했다.
“커피 한잔하고 오자.”
“지금요?”
“그 인간 어지간하면 안 나가. 나와라.”
툭 하니 말을 내뱉은 명진이 어슬렁거리며 걸음을 옮기자 신우가 재빨리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느긋한 걸음으로 룸살롱 뒤쪽에 있는 비상구로 나간 명진은 근처 편의점으로 가 커피 두 캔을 사 들고는 그 앞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곤 신우에게 앞자리를 권하며 캔을 하나 건넸다.
“적당히 돈 모이면 내 가게를 하든가 해야지. 새벽에 나와서 못 할 짓이다.”
피곤한 듯 목을 주무르던 명진이 캔을 따 마시는 걸 보며 신우 역시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캔의 고리를 잡아당겼다.
오너가 따로 있는 가게에서 바지사장 노릇을 하는 명진은 슬슬 가게를 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새벽일이라는 게 체력적으로 꽤 무리가 되는 터라 더는 못 해 먹겠다는 그를 보며 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형 많이 피곤해 보여요.”
벌써 4년이네요, 하고 신우가 작게 속삭이자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명진이 작게 혀를 찼다.
“나보다는 네 얼굴이 더 죽상이다. 네가 하겠다니 그냥 두곤 있는데 일 들어왔으면 그만두지?”
“프리 일이라 언제 끊길지 몰라서요.”
“그렇긴 하다만…… 너 바동거리는 거 보기 그렇다.”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인연으로 그가 맡고 있는 가게에서 웨이터 일까지 하게 해 준 명진이기에, 신우의 사정에는 누구보다 훤했다. 신우의 가정사가 얼마나 복잡한지, 그리고 지금 왜 신우가 빚에 허덕이고 있는지 다 알고 있는 명진은 신우를 늘 안쓰럽게 여겼다.
그리고 신우 역시, 언뜻 보면 사람 하나 잡을 것 같은 험악한 인상이지만 의외로 정이 많은 그를 친형처럼 따르고 좋아했다. 이사한 뒤 처음으로 다시 만났을 때 험한 일을 하는 그를 보고 다소 놀라긴 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가 좋았다.
“하여간, 좀 여유 있게 가. 그렇게 단시간에 갚을 수 있는 빚이 아니니까.”
어차피 평생 갚아야 하는 거면 좀 쉬엄쉬엄하라는 명진의 걱정에 신우가 맥없이 웃는다.
“갚기는커녕 이자 내기도 벅차요.”
“그래, 그게 문제지. 어디서 돈벼락 좀 안 떨어지나? 그래야 나도 이 지긋지긋한 가게 좀 벗어나지.”
커피를 한 모금 넘기며 명진이 신세 한탄을 하는 사이 신우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그 모습에 명진이 이상하다는 듯 신우를 쳐다보았다.
“왜? 누구 연락 기다려?”
평소엔 벨이 울릴 때가 아니면 휴대폰을 잘 보지도 않는 녀석이 오늘따라 왜 그렇게 휴대폰을 들여다보냐는 명진의 물음에 신우가 서둘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아니에요, 그런 거.”
“그런데 왜 자꾸 휴대폰을 봐? 그것도 이 새벽에. 뭐, 너도 토토 같은 거 하냐?”
혹시 인터넷 도박 같은 데 손댄 거냐는 명진의 걱정에 신우가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그런 거 할 돈이 어디 있어요?”
“그럼, 연애하냐?”
반쯤 농담을 담은 명진의 질문에 신우가 정색한다. 그 반응에 명진이 이것 봐라, 하며 몸을 앞으로 숙인다.
“진짜야?”
설마 하는 그 질문에 신우가 서둘러 고개를 내젓는다.
“아니에요. 연애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제가?”
“그럼?”
연애가 아니면 이 새벽에 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냐는 명진의 집요한 물음에 신우는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그냥……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요. 혹시 연락이 왔을까 봐…….”
“친구도 새벽에 일해?”
“그건 아닌데…… 그냥요.”
“어떤 녀석인데?”
두 번의 연애를 지켜본 이후로 자신의 인간관계에까지 간섭하기 시작한 명진을 신우는 난감해하는 얼굴로 바라봤다. 물론, 자신이 지독하게 사람 운이 없는 편인 건 사실이고, 또 그 때문에 본의 아니게 이런 꼴 저런 꼴을 많이 보였으니 명진이 걱정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한은 진짜 아니었다.
“그냥, 고등학교 때 친구예요. 이번에 계약한 회사에 다녀서 우연히 만났어요.”
“건축 회사?”
“네. 원래 농구 하던 앤데 농구 관두고 공부하더니 이쪽에서 성공했더라고요. 원래 뭐든 잘하긴 했어요. 모든 사람에게 상냥하고, 같이 있으면 편안하고 재미있고. 그런데…….”
거기까지 말을 한 뒤 신우가 잠시 말을 끊자 명우가 뒷말을 재촉한다.
“그런데?”
“……좀 변덕스러워요.”
마지막 그 말에 명진이 한숨을 내쉬며 짧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긴다.
“너, 내가 그런 놈들은 관두라고 했지.”
분명 명진은 그간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었다. 8년 전에도, 그리고 4년 전에도, 저놈은 상종 못 할 종자니 끌려가지 말라고, 충고했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한 번도 아니라 두 번이나.
“알아요, 그 정도는.”
“아는데, 제어는 안 된다? 넌 대체 무슨 취향이 그따위냐? 왜 하필 고르고 골라 그런 후레자식들만 좋아해?”
신우의 지독한 남자 취향에 대한 명진의 가차 없는 평에 신우가 재빨리 그의 말을 부정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진짜, 그냥 동창이에요. 걔는 절 기억도 못 했대요.”
절대 그런 거 아니라는, 유독 강한 신우의 부정에 다 마신 캔을 쓰레기통에 던진 명진이 퍽이나, 라는 얼굴로 되물었다.
“덩치 크지, 그 녀석?”
“네?”
“키 말야.”
“……크죠. 농구 했으니까…….”
“그리고 무지 잘나셨고?”
“……네.”
신우의 남자 취향을 속속들이 꿰고 있는 명진의 질문에 신우가 조금 어깨를 움츠리자 명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찬다.
“딱 네 취향이네. 덩치 좋고 잘생기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마초들.”
“…….”
“그런 놈이 변덕스럽기까지 하면 너한테는 최악이야. 그렇게 겪어 보고도 몰라?”
기이하게도 신우는 이상한 놈들을 끌어들이는 재주가 있었다.
예쁘장한 얼굴에 어쩐지 보호해 주고 싶은 느낌의, 연약하고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다 보니 사람이 꼬이는 건 이해하지만 하필 꼬이는 것들이 전부 쓰레기들이었다. 게다가 신우의 남자 취향 역시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라 꼭 그런 쓰레기들과 연애를 하다 상처를 받고 끝나기 일쑤였다.
친구니 뭐니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상처만 남기고 끝날 게 뻔해, 명진이 다소 책망하듯 바라보자 신우가 재빨리 고개를 내젓는다.
“한이는 그냥 동창이에요. 그리고 저한테는 쳐다보지도 못할 나무고요.”
“그 쳐다보지도 못할 나무들이 이상하게 널 좋아하니 문제지. 그리고 너도 좋아하고. 그놈들은 애초에 글러 먹었다 쳐도 너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놈이 왜 그런 놈들한테 빠지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고.”
세상사 전혀 모르는 곱게 자란 도련님도 아니고 어린 시절부터 온갖 험한 꼴 다 보고 자란 녀석이 왜 스스로를 제어 못 하는 거냐고 명진이 타박하자 신우가 쓰게 웃는다.
“제가 못나서요.”
“네가 어디가 못나. 못난 건 그놈들이지.”
“그 애는 못나지 않았어요. 너무 잘나서 문제죠.”
“뭐가 그리 잘났는데?”
“……뭐든 다 잘해요. 잘생기고 집안도 좋고 머리도 좋고, 성격도 좋아요. 다정한 애라 사람을 편하게 해 주고, 주변을 잘 챙기고 늘 신경 써 주고 그래요.”
줄줄이 이어진 신우의 자랑에 명진이 인상을 썼다. 그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아깐 변덕스럽다며?”
“잘할 때는 한없이 잘해 줘요. 항상, 다정하고 따뜻하게요. 그러다 돌아서면 차가워져서 그렇지.”
진짜 다시는 안 돌아보더라고요, 라고 중얼거리던 신우는 다 식은 캔 커피를 가볍게 흔들었다. 처연해 보이는 그 모습에 명진은 한숨을 섞어 다시 한번 충고했다.
“그럼, 그냥 멀리해. 아예 여지를 주지 말라고.”
“그건 아는데…… 그 애가 절 부를 때 목소리가 좋아요. 지금까지 절 보살펴 준 건 그 녀석뿐이었거든요.”
어머니가 떠난 뒤 방치된 자신을 그 녀석만이 곁에서 보살펴 줬다는, 신우의 고백에 명진은 아무 말 없이 신우를 응시했다.
신우에게 있어 가장 큰 결핍은 관심과 애정이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혼자 살기 위해 기를 써 왔다.
그런 신우가 ‘보살펴 줬다’라고 표현했다는 건 신우가 그의 보살핌을 받아 줬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것만으로도 신우에게는 대단한 용기였다. 그리고 그 정도로 그 친구에게는 마음을 열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분명 말려야 하는데, 이 녀석에게도 마음을 터놓을 상대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복잡한 심경으로 신우를 바라보던 명진은 울리는 메시지 알림음에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만 들어가자. 드디어 정 사장 집에 간다네.”
이제 문 닫을 수 있겠다며 명진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신우 역시 서둘러 캔을 손에 든 채 일어났다.
“정리는 우석이가 할 테니 오늘은 곧장 들어가.”
“괜찮아요. 정리하고 갈게요.”
“됐어. 그 인간 또 개판 쳐 놨을 텐데 다 치우려면 오래 걸려. 우석이가 대충 정리할 테니 저녁에 좀 일찍 나와서 정리만 하고,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자. 너, 요즘 잠 못 자지?”
“요즘은 좀 자요.”
한창 불면증이 심했을 때랑 비교하면 꽤 많이 자고 있다고 하자 명진이 신우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는다.
“술이나 약 먹지 말고 그냥 가서 무조건 누워. 또 일한다고 컴퓨터 켜지 말고. 너 그 꼴로 다니는 것도 민폐야. 일 시키는 사람들이 괜히 돈 주고 죄책감 느낀다고.”
원래도 창백해 보이는데 요즘은 다크서클까지 심해졌다는 명진의 걱정에 신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찍 들어갈게요.”
“아, 이놈의 새벽 일 언제 그만하냐.”
이러다 쉰 되기 전에 죽겠다는 명진의 앓는 소리를 들으며 신우는 조용히 다시 가게로 향했다.
새벽이지만 이미 후덥지근하다.
어쩐지 불볕이 내리쬘 것 같은 날씨였다.
느지막한 오후, 보름 만에 세명 빌딩을 찾은 신우는 엘리베이터 앞에 선 채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마지막 도안을 넘긴 뒤 추가 의뢰가 들어와 다시 오긴 했지만 어쩐지 일보다는 다른 쪽에 더 신경이 쓰였다.
아니, 사실은 조금 기대가 된다는 게 정확할 거다.
혹시 오늘도 한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모처럼 나온 거니 얼굴이라도 제대로 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긴 했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면 안 된다. 마지막 도안을 넘겼다는 전화를 할 때 정우 씨가 일이 몰려 정신이 없다고 한 거로 봐서는 아마 한도 바쁠 거다.
그러니까 얼굴도 못 볼 수 있다.
괜한 기대에 실망할까 먼저 자신을 다독인 뒤 막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타려는데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연신우 씨?”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자 은테 안경을 쓴 남자가 두어 걸음 뒤에 서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서인재였던가. 면접을 봤던 사람이었다.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 기억에 남아 인사를 건네자 그 역시 가볍게 묵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일 때문에 오신 거죠?”
“네.”
“그럼, 타시죠.”
엘리베이터가 기다린다는 그의 말에 서둘러 탑승하자 그가 바로 뒤를 따라 선다. 그러곤 곧 10층 버튼을 누른 뒤 뜬금없는 말을 내뱉는다.
“한이는 오늘 좀 늦을 겁니다. 오늘 저택 부지랑 그 주변 돌아보고 온다고 했으니 오후 늦게 들어오거나 아마 곧장 퇴근할 거예요.”
한이 사무실에 없다니 조금 맥이 빠지는 것과 동시에, 왜 이 사람이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가 하는 의문이 일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신우가 조금 경계하듯 그를 바라보자 인재가 그 시선의 의미를 깨달은 듯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한이한테 얘기 들었어요. 고등학교 동창이시라고요?”
“……네.”
하긴 지난번에 한의 사무실에 들르기도 했고 정우 씨에게도 동창이라고 얘기했으니 소문이 났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렇게 납득했다.
“이번에 도면 깔끔하게 잘 쳐 주셨던데요? 덕분에 살았어요. 정우 씨가 디자인 쪽으로는 천재적인데 기계치라 캐드를 좀 못해요. 아무래도 유화 전공이다 보니 기계에는 약하더라고요.”
요즘 디자이너들은 다 잘 다루는데 말이죠, 라는 인재의 중얼거림에 신우가 의외라는 듯 그에게 되물었다.
“유화 전공이세요?”
“네.”
“아, 그래서…….”
“색감이 좋죠. 그만큼 색이나 톤에도 예민하고요. 덕분에 벽지랑 옷감 디자인도 해요. 맘에 드는 옷감 없으면 자기가 직접 염색하거나 다른 나라에서 공수라도 해 오고요. 벽지나 침구 색이 자기가 원하는 거랑 조금이라도 다르면 난리 나거든요. 그래서 남한테 일 맡기는 것도 싫어하는데 신우 씨는 마음에 들었나 봐요.”
그 부분에서는 ‘역시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순해 보이긴 해도 일 처리하는 걸 보면 꽤 세심하고 예리했다.
인재와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10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면접을 포함해 세 번째의 방문이라 이젠 제법 눈에 익은 복도로 한 걸음 내딛자 인재 역시 바로 옆으로 따라 선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었다.
“말 나온 김에 말씀드리는 건데, 시간 괜찮으시면 앞으로 열흘 정도 회사에 나와서 일해 주실 수 있으세요?”
갑작스러운 인재의 제안에 신우가 걸음을 멈추곤 인재를 돌아봤다.
“열흘이나요?”
“네. 말했다시피, 정우가 워낙에 도면을 못 쳐서요. 요즘 일이 쏟아져서 정우 속도로는 감당이 안 되거든요. 당분간 정우 일만 집중적으로 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출퇴근하시게 되면 따로 출퇴근 비용과 식사비 지원해 드릴 거예요.”
마침 그 얘기 때문에 사무실로 나와 달라고 했다고 인재가 덧붙인 순간 신우는 곤란한 듯 말을 끌었다.
“아…….”
“곤란하신가요?”
“그게…… 아니, 괜찮습니다.”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는 일이라 신우는 재빨리 그 제의를 수락했다. 열흘 동안 출근을 해야 할 정도의 일감만 있다면 아마 페이가 좋을 거다. 그리고 회사에 나오는 쪽이 능률도 좋다.
수면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어떻게든 조절하면 되었다. 어차피 잠은 잘 못 잔다.
하루 세 시간 정도 끊어서 자면 될 듯했다.
“그럼, 앞으로 열흘간 잘 부탁드릴게요.”
“네.”
“그럼.”
마지막 인사와 함께 안으로 들어선 인재가 그의 사무실로 향하는 걸 본 신우는 슬쩍 한의 사무실 쪽을 돌아봤다. 하지만, 인재의 말대로 사무실은 텅 빈 채였다.
역시 바쁘구나, 라고 생각하는 순간 신우는 실망하고 있는 자신에게 놀라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정신 차려야 한다. 또 한에게 의존하려 해선 안 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 만나 반가운 마음에 식사 한 번 한 것뿐인데 친한 척 질척거리는 건 좋지 않다.
부담스러울 것이다.
‘넌, 그래서 질려.’
머릿속에 오래전 각인됐던, 원혁의 말이 떠올랐다.
시작하자마자 끝났던 첫 연애와 달리, 두 번째의 연애는 처음에는 순조로웠다. 하지만 결국 끝은 좋지 않았다.
원혁이 다정하고 따뜻해서, 그에게 지나치게 의존했었던 것 같다.
그에게는 가족과 친구가 많았지만 자신에게는 그뿐이라 과도하게 어리광부리며 그의 관심과 애정을 요구했던 건지도 모른다.
최대한 조심한다고 하긴 했지만 그에게는 그것조차 과했던 것 같다.
항상 자신은 그 의존성이 문제였다. 절대 기대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상대를 부담스럽게 만들고 만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조심해야 한다.
또 한이 질리지 않게, 그리고 그가 부담을 느끼지 않게…….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사람처럼 차가워졌던 그를 기억하고 있다. 너무나 다정한 사람이었기에 그의 태도가 변했을 때의 충격 역시 더욱 컸다.
당시에는 왜 그런지 이유를 몰랐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
그때의 그도 자신에게 부담을 느끼고 질렸을 거라는 걸.
그러니까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다.
이번엔 조심해서, 최대한 조심해서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 가야 한다. 미리 전화하고 보채지 말고 지나치게 아는 체도 하지 말고, 어리광도 부리지 말고 기대지도 말고.
그가 원하는 선을 지켜야 한다. 그게 자신이 상처받지 않는 길이니까.
며칠 전 명진 형에게 말한 대로 그는 오랜만에 만난 동창일 뿐이다.
계속해서 자신을 세뇌하듯 그 사실을 되새기던 신우는 한의 사무실에서 시선을 거두곤 미팅 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이런.”
주차장으로 들어서 시간을 확인한 한은 낭패라는 얼굴로 서둘러 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원래는 간단히 저택을 지을 부지와 주변 환경을 확인하러 온 거였는데 부부에게 붙들려 저녁 식사까지 하고 보니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오늘 오후에 신우가 온다고 했는데 아마 이 시간이면 돌아갔을 거다.
서로 시선 한 번 마주치지 않고 시종일관 입가에 형식적인 미소를 매단 채 대화를 나누는 부부의 모습은 꽤 흥미로웠다. 하지만 지나치게 말이 많은 이들이었다. 특히 부인 쪽은 애정 결핍증에라도 걸린 듯 일 이야기를 끝내기 무섭게 사적인 얘기들을 줄줄이 늘어놓으며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고까지 해 거절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 덕에 영양가 없이 시간만 잡아먹어 버렸다.
서둘러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라탄 한은 곧장 신우에게 연락했다. 그러고는 시동을 건 채 잠시 기다리자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 여보세요?
“어, 나. 정한. 지금 어디야?”
- 아…… 아직 너희 사무실이야.
조금 당황한 듯 더듬는 신우의 답에 한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 시각이면 분명히 돌아갔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 사무실에 있다니 운이 좋았다.
“오후 3시 미팅이라길래 벌써 갔을 줄 알았는데.”
- 정우 씨가 가구 배치 좀 부탁한다고 해서. 온 김에 끝내고 가려고.
“와, 잘됐다. 나 지금 들어가는데, 저녁 먹었어?”
- 응. 여기서 먹었어.
“그럼 나 지금 들어가니 얼굴 좀 보자. 오늘은 집까지 바래다줄게.”
- 아냐. 늦었는데 그냥 퇴근해. 나도 곧 나갈 거야.
순간 한의 손이 바빠졌다. 재빨리 안전띠를 매고 휴대폰을 블루투스로 차에 연결한 뒤 기어를 바꾸며 브레이크에서 발을 뗐다.
“금방 가. 20분 정도면 돼. 얼굴 좀 보여 줘.”
- 피곤하지 않아?
“아니, 안 피곤해.”
- ……알았어. 그럼 기다릴게.
“그래. 지금 간다. 꼭 기다려.”
서둘러 전화를 끊은 한은 빠른 속도로 주차장 출구를 향해 차를 몰았다.
분명 신우가 기다린다고 했음에도 그냥 마음이 급했다.
그러고 보니 늘 이랬던 것 같다. 그 녀석을 대할 때면 늘 초조하고 불안했다. 아슬아슬해 보이는 그 녀석 특유의 분위기도 있지만 그보다는 너무 무심한 녀석의 태도에 더 안달했던 것 같다.
요 며칠 열심히 생각하고 또 생각한 결과 그 녀석에 대해 많이 기억해 냈는데, 그 기억의 대부분이 그런 것들이었다.
연신우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건 무심했다. 가끔 말도 안 되는 심술을 부려도 왜 그러냐고 묻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심지어, 화도 내지 않았다.
그때도 그랬다. 고3으로 올라간 직후 정현과 붙어 다니는 그가 못마땅해 조금 차갑게 굴었더니 금세 떨어져 나가 버렸다. 애초에 먼저 연락하거나 같이 하교하자는 소리 한번 한 적 없었지만, 조금 토라진 듯 군다고 그렇게 쉽게 돌아설 줄은 몰랐다.
자신도 어지간하지만 신우도 어지간했다. 사실 그 무심함이 괘씸해서 일부러 말을 더 안 걸고 버텼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연락이 끊길 줄은 몰랐다. 자신이 심술을 부리면 적어도 왜 그러냐고 묻든가 어떤 반응을 보일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그는 거리가 멀어지자 쉽게 자신을 끊어 내고 정현의 친구로만 남아 버렸다.
그 상황이 정말 싫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자신도 아쉬울 거 없다는 듯 오기를 부려 그를 더 멀리했다. 그러다 빗속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날부로 연신우를 완전히 기억에서 밀어 냈던 것 같다. 미친 듯이 공부를 해 조기 졸업을 하고 이탈리아로 도망쳐 버릴 정도로, 그 순간 치밀었던 감정이, 그때의 기억이 싫었다.
차라리 빗속에서 본 두 사람의 관계를 그저 친구나 아는 사람 정도라고 치부할 수 있다면 마음 편했겠으나, 불행히도 자신은 그때 이미 남자들끼리도 연애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 버린 후였다. 무엇보다 그 두 사람의 시선과 분위기는 분명 친구 간에는 나올 수 없는 것들이었다.
주차장을 벗어나 막 어두운 골목 사이로 차를 몰던 한은 다시 떠오른 기억에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기억에 불쾌해지는 건 마찬가지다. 이미 8년 전의 일임에도 뱃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기분 나쁜 벌레들이 피부 위를 기어 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것만으로도 신우를 기억에서 지운 이유는 충분하다.
재미있고 유쾌한 게 좋다. 사람도 일도 즐거워야만 한다. 기분 나쁘고 축 처지는 건 질색이다.
마이너스적인 감정과 상황은 그 자체로 스트레스다. 아마 그래서 그를 잊었을 거다.
하지만 다시 기억난 이상은 어쩔 수 없다. 또다시 잊기엔 이미 모든 결론이 나온 채였다.
그러니까, 잡는 거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내 거다 싶으면 무조건 내 것이 돼야 하니까.
정우가 애를 먹던 커튼과 침구 부분의 작업을 끝내 준 신우는 휴게실에 앉아 종이컵을 손에 든 채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한이 말한 20분까지 3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이제 3분.”
작게 중얼거린 신우는 순간 지금 자신의 모습에 진저리를 쳤다. 이러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게 고작 몇 시간 전인데 기억 상실이라도 걸렸는지 또 멍청한 짓을 반복하고 있다.
헛된 기대는 자신에게도 좋지 않지만 한에게도 부담이 될 수 있는 일이라 조심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는데 이미 다 식어 있었다.
반도 마시지 않았는데 이 상태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습관이다.
잘 마시지도 않으면서 어딜 가든 따뜻한 커피를 사게 된다. 그리고 그 커피를 손에 든 채 식을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다. 마실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 온기를 느끼며 내려다보기만 한다.
특히 따뜻한 캔 커피와 자판기 커피를 유독 많이 샀던 것 같다.
그건 아마…….
“아, 있다.”
조용히 컵을 내려다보는 사이 휴게실 입구에서 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가운 그 음성에 고개를 들자 한이 재킷을 벗어 들고 손으로 부채질까지 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엘리베이터가 안 내려와서 10층까지 뛰어 올라왔어. 나 아직 팔팔한 거 같지 않아? 10층을 2분 만에 주파했다?”
“뭐 하러 뛰어와? 그냥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엘리베이터가 최고층인 30층에 있었다 해도 엘리베이터 내려오는 속도가 더 빨랐을 텐데, 뭐 하러 그런 짓을 하냐고 신우가 눈을 껌뻑거리자 한이 살짝 눈꼬리를 휘며 애교 어린 미소를 짓는다.
“너 빨리 보고 싶어서.”
노골적인 그의 말에 신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한이 별 의미 없이 던지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가 저런 식으로 나오면 설레고 만다.
조금 전의 다짐을 잊고 또다시 두근거리는 심장에 신우는 서둘러 고개를 숙인 채 짐을 챙겨 들었다.
그사이 신우의 앞으로 다가선 한이 신우가 손에 들고 있던 차갑게 식은 커피를 보곤 혀를 찬다.
“커피 다 식었네.”
“어? 응.”
“그럼, 나가자. 나가서 따뜻한 커피 마시자. 아, 커피는 네가 사는 거다? 나 뛰어오게 만들었으니까.”
약간의 장난기를 담은 한의 음성은 신우는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가방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사 줄게. 가자”
아무렇지 않은 듯 걸음을 옮기면서도 선뜻 고개를 들 수는 없었다.
얼굴이 아직 뜨거웠다.
건물 1층에 있는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를 한 잔 마신 후 신우는 한의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커피를 마시는 내내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와 이런저런 일 관련 이야기로 분위기는 부드럽게 풀려 나갔다. 처음에 신우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말과 달리, 한은 꽤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있었고 신우는 그 사실에 기뻐하며 오래된 기억을 반추했다.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절친했던 동창과 어울릴 때처럼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오랜만에 연락해서 얼굴 한번 보자니까, 다들 말도 없이 튀었다고 잡아먹을 기세더라고.”
5년 전 갑자기 떠났다가, 이번에 갑자기 돌아와 연락하니 친구들 반응들이 흉흉하다는 한의 말에 신우는 그들의 입장이 이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들은 화날 수도 있어. 정현이도 많이 화냈어.”
“너도 화났어?”
불쑥 튀어나온 그 질문에 신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럴 게 뭐 있어? 이미 연락이 끊긴 후였는데.”
사실 한이 누구에게도 미리 말하지 않고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내심 안도했다. 한의 그런 변덕스러운 성격이 자신뿐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적용된다는 생각을 하자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당시에도 워낙에 바람 같은 녀석이니까, 하고 그가 멀어진 이유를 정당화하며 스스로를 위로했었다.
어쩌면 조금 창피하고 유치한 그때의 자신을 떠올리는 사이, 천천히 골목길로 차를 몰아가던 한이 슬쩍 신우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할 말이 많은 듯한 그 시선에 신우가 한을 마주 보자 한이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며 어느 쪽 길이냐고 묻는다.
“왼쪽?”
“응.”
“아, 맞다. 나 얼마 전에 기억났는데 졸업 후에 너 본 적 있어. 8년 전인가 7년 전인가?”
“어디서?”
“나 군대 제대하고 술집 앞에서. 강남이었던 것 같아. 나 자원입대라 빨리 간 편이었거든. 할아버지가 어차피 갈 거면 빨리빨리 해치우는 게 좋다고 하셔서.”
“아…… 그랬어?”
“응. 비 오는 날이었는데 그때 어떤 남자랑 같이 있더라?”
그 말에 잠시 과거의 기억을 골똘히 되짚던 신우의 얼굴이 이내 하얗게 질렸다. 그때라면 짚이는 바가 있었다.
자신은 기본적으로 사람하고 같이 다니는 편이 아니었고 유흥가는 더더욱 가지 않았다. 자신이 유흥가에서 어떤 남자와 함께 있었다면 그 상대는 한 명뿐이다.
설마 하며 신우가 침묵하는 사이 한이 재빨리 그날의 기억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그 남자가 굉장히 키가 커서 기억하고 있었어. 나 정도로 키 큰 사람이 흔한 건 아니니까.”
확인 사살이었다. 그 정도로 키가 큰 사람이라면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선 한을 제외하고 한 명뿐이다.
계속되는 신우의 침묵에 한이 차의 속도를 줄이며 느긋하게 말을 더한다.
“나 입대했을 때 말야. 우리 병장이 이병 하나랑 연애를 하더라? 원래 군대에선 그런 거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정말로 연애를 하더라고. 제대하고 나가서도 계속 면회 오고 편지 쓰고. 처음엔 이게 무슨 일인가 했는데 그런 게 있더라고. 그래서 그때 알았어. 남자끼리도 연애가 되는구나, 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야기에 신우가 차마 맞장구도 치지 못한 채 침묵을 고수하자, 좁은 골목길을 느리게 들어서던 한이 다시 말을 이어 간다.
“그래서 한 번 남자를 만나 봤거든. 그리고 결론을 내렸어. 아, 나도 남자랑 연애가 되는 놈이구나, 하고.”
“…….”
“정현이한테 그런 얘기는 못 들었어?”
“듣긴 했어.”
분명히 정현에게 들은 기억은 있다.
‘드디어 남자랑도 사귄다. 그 개새끼가.’라고.
그 말투가 하도 신랄해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지만, 왜 지금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혹시라도 그를 향한 설렘을 눈치챈 걸까, 하는 수치심에 괜히 무릎 위의 두 손을 초조한 듯 마주 쥐자 한이 곧장 다음 말을 잇는다.
“고등학교 때 내가 왜 너랑 멀어졌나 궁금했던 적 없어?”
갑자기 또 다른 방향으로 튄 대화에 긴장한 신우가 양손을 꼭 쥔 순간, 답을 바라고 물은 게 아니라는 듯 한이 알아서 대꾸했다.
“너랑 정현이가 친해진 거 보니까 심술이 났어. 나도 최근에 안 거야. 너희 둘이 붙어 다니는 꼴이 보기 싫었던 것 같아. 그래서 좀 차갑게 굴면 네가 나를 더 신경 쓸까 했는데, 넌 정현이랑만 열심히 붙어 다녀서 더 열 받았었어.”
자연스럽게 웃으며,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예전 이야기를 흘리는 한을 보며 신우는 당황해 입술을 달싹거렸다.
방금도 그랬지만 지금 이 말도 무슨 의도로 꺼낸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그가 하는 이야기들 모두가 맥락을 이해할 수 없어 기괴하다는 느낌마저 들 지경이었다.
“그러다 8년 전에…… 네가 그 남자랑 있는 거 봤을 때는 눈이 확 돌더라. 그래서, 그냥 너에 대한 기억은 다 잊어버리고 싶었던 것 같아. 그래서 내가 생각을 해 봤거든?”
가볍게 말을 잇던 한이 골목 안쪽에 차를 멈췄다. 기어를 파킹으로 바꾼 다음 브레이크에서 발을 뗀 한은 짧게 한숨을 내뱉은 뒤 다시 신우에게 말을 건넸다.
“열심히 생각하고 고민해서 내린 결론이야. 난 네가 다른 놈하고 있는 게 싫어. 친구든 뭐든 나 말고 다른 놈하고 붙어 다니는 꼴은 이제 못 볼 것 같아.”
순간, 한은 말을 멈췄다. 그러곤 아예 조수석 쪽으로 몸을 돌려 진지한 얼굴로 신우를 응시했다.
“그래서 말인데…….”
그리고는 느긋한 호흡과 함께 조용히 내뱉었다.
“나랑 연애할래, 연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