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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3/23)

Chapter 2

탁탁탁, 하며 규칙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연필 끝으로 계속해서 책상 위를 두드리던 한은 작업 중인 스케치에서 손을 떼곤 책상 위의 휴대폰 액정을 노려봤다.

나흘이다. 벌써 나흘이 흘렀다.

그사이 전화 한 통 정도는 할 법도 한데 신우에게서는 여전히 연락이 없다.

“짜증 나…….”

슬쩍 정우에게 떠보니, 작업은 제대로 진행되고 있었고 그와는 꾸준히 연락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연락이 없다. 그리고 그 덕에 신우를 향한 그 알 듯 말 듯 더러운 기분도 그대로였다.

정현에게 전화를 걸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건 또 자존심이 상해서 싫었다. 왜인지 그놈한테는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어렴풋했던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농구를 관둔 뒤 자신과 붙어 다니던 신우가 어느 날부터인가 정현과 어울리기 시작했던 게, 확실히 기억났다.

입이 험한 것과는 달리 의외로 싹싹하고 세심한 정현은 신우에게 꽤 잘 대해 주었고 신우 역시 그런 정현을 편하게 여겼다. 그럴 걸 알고 소개해 준 것이긴 했지만 예상보다도 둘은 너무 잘 맞았고, 언제부터인가는 자신을 빼고 둘만 다니기 시작했다.

그게 꽤 기분 나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불쾌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을 같이 떠올리자 짜증부터 일었다.

자신은 특별히 사람에게 집착하는 편은 아니라 생각해 왔다. 친구는 친구고 애인은 애인이고 가족은 가족이다. 어떻게 해도 그들은 타인이고 각자의 사정과 기준과 사생활이 있다. 그렇기에 친구가 다른 친구와 더 친하게 지낸다거나, 심지어 애인이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이나 일을 우선순위에 둔다 해도 상관하지 않았다.

타인의 감정이나 사교 관계에까지 간섭하는 건 정서적 폭력이고, 또 비합리적이라는 게 솔직한 자신의 감상이었다.

그런데 왜 신우가 정현이와 친하게 지내는 건 그렇게나 싫었던 걸까? 그때나 지금이나 그 감정의 기저를 알 수가 없었다.

그게 기분 나쁜 거라고 떠올린 한은 열심히 두드리던 연필을 내려놓은 뒤 그리던 스케치를 바라봤다. 작업 중인 건 모교 교수님에게 소개받은 부부의 자택으로, 유럽식의 깔끔하고 고풍스러운 건물을 원해 맡기로 한 건데 재미가 없었다. 그 부부의 분위기가 관심을 끌어 자신이 하겠다 자처했지만, 어쩐지 관심이 흥미로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시시해.”

처음 의뢰를 받았을 때는 분명 재미있다고 느꼈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니 디자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독창적인 건물을 지어 달라는 주문에 신이 났었다. 대리석을 쌓아 좀 더 모던하면서도 무거운 느낌으로 벽면을 세우고, 1층 거실 안에는 천장까지 뚫린 중정을 넣고 건물 내의 구조를 나선형으로 만들어 끊임없이 뭔가가 이어지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입구에 들어서 보이는 홀은 차갑고 화려하게, 하지만 홀 외의 공간들은 좀 더 고풍스럽고 클래식한 느낌의 앤티크 가구들로 채우고 1층 한쪽 귀퉁이의 빛이 가장 많이 들어오는 공간에는 입구를 쉽게 찾을 수 없는 공간을 따로 만들 생각이었다.

오래된 저택들에 남아 있는 숨겨진 방처럼,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휴식 공간으로…….

“재미없어…….”

상상이 이어지질 않는다. 더 이상 뭔가를 상상할 수 없다면 그건 끝낼 때가 다가왔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과 좀 다른 느낌이었다. 앞이 막혔다는 것보다는 다른 쪽으로 관심이 분산되고 있는 듯했다.

“아, 시시하다고…….”

그리고 있던 스케치를 구겨 쓰레기통에 넣은 뒤 한은 짜증스러운 듯 백지를 내려다봤다. 하지만 생각나는 건 역시 신우의 뒷모습뿐이었다. 헤어지던 그 순간 뭐가 그리도 바쁜지 신우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급히 달음박질쳤다.

덕분에 한껏 들떴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아 버렸다. 그러고 보니 언제나 남겨지는 건 자신이었다. 끝까지 지켜보고 있는 것도, 그래도 한 번 돌아봐 주기를 기다리는 것도 자신뿐이었다. 신우는 단 한 번도 자신을 돌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 이제 기억났다. 불쾌하고 짜증 나고 초조했던 그 기분의 정체를, 드디어 알 것 같았다.

신우와 함께 있으면 즐겁고 좋았다. 잘해 주고 싶고 보듬어 주고 싶고 이것저것 챙겨 주고 싶었다. 신우가 반응을 보이면 기분이 좋았고 웃어 주기라도 하면 날아갈 것 같았다. 하지만 돌아서는 건 싫었다. 그렇게 눈으로는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돌아서는 순간 순식간에 식어 버리는 뒷모습이 너무 싫었다.

심장 안쪽이 간질거리면서 불쾌한 뭔가가 몸을 감싼 듯 짜증이 일었다.

“독일에나 갈까…….”

갑자기 나타났다 또다시 사라지면 그 녀석이 내 걱정은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며 연필을 집어 던진 순간 어떤 장면이 머릿속을 휙 하니 스쳐 갔다.

아스라이, 아주 뿌옇게 흐려진 어떤 장면이었다.

어둡고 습하고 차가운…….

역시나 이번에도 떠오를 듯 말 듯 한 느낌에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보던 사이 문이 열리며 인재가 들어섰다.

갑작스러운 그의 방문에 한은 중요한 작업을 방해받았을 때처럼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왜?”

“왜일 것 같냐?”

안으로 들어서며 서류 몇 가지를 툭 하니 책상 위로 내던진 인재가 퉁명스레 답하자 한이 그 서류들을 흘깃 보더니 다시 밀어 냈다.

“네가 처리해. 난 서류 작업은 안 한다고 했잖아.”

“비품이랑 새로 들어온 일들 결재 서류야. 건물 쪽은 네가 해야지.”

그쪽 담당은 네가 하기로 했으니 제대로 처리하라며 인재가 서류를 도로 밀자 한이 혀를 찬다.

“귀찮아. 네가 대강 사인해.”

무성의하기 짝이 없는 한의 태도에 인재가 눈썹을 찌푸렸다.

“또 무슨 일이야? 일단 시작하면 두 달은 가는 녀석이 왜 며칠 만에 벌써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 있어?”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은 인재가 달래듯 말을 걸자 한이 의자에 기대앉아 잠시 서류들을 내려다보더니 한마디 내뱉는다.

“독일이나 갈까?”

갑작스러운 그 말에 인재가 버럭 고함을 내지른다.

“야!”

“아니면 스위스? 러시아도 괜찮고, 프랑스도 괜찮겠네. 건물 예쁜 데로 가서 한 1년 여행이나 하다 올까?”

“누가 독일 가는 걸로 뭐래? 갑자기 왜 그러냐고?”

“갑자기 귀찮아졌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태연하게 하는 한을 보며 인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래도 일이나 학업에 대해서만은 참을성이 있는 녀석이라 설마설마 하고 있었는데 허를 찔렸다. 이건 예상 밖의 상황이었다.

“지랄도 가지가지 한다. 회사 간판 단 지 일주일 만에 때려치운다고?”

“걱정 마. 할아버지가 자금은 안 뺄 거야.”

“자금이 문제야, 지금? 또 무슨 변덕이야?”

갑자기 신의 계시라도 내린 거냐며 인재가 화를 내자 한이 의자에 깊이 기대앉으며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려놓았다. 그러곤 심각한 얼굴로 묻는다.

“너, 당시에는 괜찮았는데 지금 떠올리면 점점 기분 나빠지는 거 있어?”

“그런 기억이 한두 개냐? 그때는 몰랐는데 곱씹을수록 기분 나쁜 기억들은 원래 다들 갖고 있는 거잖아. 오히려 없으면 이상하지. 난 초등학교 4학년 담임 떠올리면 그래. 애들 불러서 사는 아파트 일일이 확인하고 그걸로 애들 차별하던 선생이었거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그런 게 있어서. 잊고 있을 때는 괜찮았는데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하니까, 불쾌해.”

“그럼 생각하지 마. 자기 고문이야, 그런 건.”

“……그런데 자꾸만 생각난단 말이지.”

“연신우 씨 얘기야?”

그 질문에 한은 침묵으로 대꾸했다. 조용한 그의 반응에 인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쉰다.

“연신우 씨가 왜? 아무리 봐도 너랑 트러블 일으켰을 타입은 아니던데?”

“그러니까, 말이지.”

“그럼 이제라도 풀어. 뭘 고민하고 있어? 그것도 10년도 전의 일을.”

“……풀고 싶지만…… 기억이 안 난단 말야. 그래서 더 기분 나빠.”

그러니까, 차라리 기억이 난다면 속이라도 시원하겠는데 기억나는 것 없이 기분만 나쁜 아주 더러운 상황이라는, 한의 답에 인재가 황당하다는 듯 되묻는다.

“기억이 안 나는데 불쾌하다고?”

“그 느낌만 남아 있단 말이지……. 그냥 기억하는 것도 싫은…….”

한이 초조한 듯 입술을 지근지근 깨물고 있자 인재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다.

도저히 한이 이해가 안 간다는 그 태도에 한은 앞에 놓인 서류철을 들고 안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대강 눈으로 수치와 내용을 확인하며 단번에 사인을 한 한이 서류를 앞으로 밀어 내자 인재가 자리에서 일어서 서류를 받아 든다.

“하여간, 다른 데 갈 생각은 하지 마. 일에 집중해.”

제대로 일만 하면 네가 불쾌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말을 마친 인재가 막 돌아서려는 순간 한이 다시 그를 붙들었다.

“너, 나 좋아하지?”

“……어떤 의미로?”

“친구, 사람, 동료.”

물론, 싫지는 않지만 좋다고 말하기는 죽어도 싫다는 생각에 인재는 답을 끌었다. 애인으로서의 한은 최악이지만 친구나 동료로서라면 괜찮다. 저 변덕스러움을 모두 커버할 정도의 능력이 있고 내킬 때는 누구보다도 성실하다. 중심도 제대로 서 있고 욱하는 성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불쾌하지 않게 타인의 단점을 일러 주는 언어 능력도 뛰어나다. 사회성도 좋고 배려심도 깊고 무엇보다 일을 추진하는 능력이 월등했다.

그러니까, 인간 정한은 괜찮은 인간이다. 하지만 거만할 정도로 자신만만한 그에게 ‘널 좋아하긴 해.’라고 맞대꾸해 주기는 죽어도 싫다.

자존심 상한다.

“갑자기 그건 왜 묻는데?”

“날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니, 정정할게. 나와 다른 사람이 동시에 있을 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택할 사람이 있을까?”

절대 누군가 자신을 싫어할 리 없다는 한의 근거 없는 자신감에 인재가 기막히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당연히, 있어. 사람마다 선택 기준이 다르니까.”

모든 사람이 널 일 순위에 두지는 않는다고, 인재가 냉정하게 현실을 알려 주자 한이 못마땅한 얼굴로 휴대폰을 노려본다.

“짜증 나, 그 자식.”

정확히 그 짜증 나는 사람이 누군지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인재는 지금까지의 대화로 ‘그 자식’의 정체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쯤 되니 진심으로 궁금해진다. 연신우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짜증 나면 안 보면 될 거 아냐? 너 쿨하잖아. 쿨하게 잊어.”

쿨하다 못해 냉하기까지 하지만 뭐가 됐든 한이 뒤끝이 없는 건 확실했다. 물론, 그게 성격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아예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성품이라 그렇긴 하지만 인재가 아는 한 한처럼 뒤끝 없는 인간도 없다.

아니, 정확히는 뒤끝이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그쪽에는 그만 신경 끄고 일이나 해. 교수님께서 추천해 준 부부 작업은 어떻게 할 거야? 돈 엄청 쏟아부을 분위기던데.”

“몰라. 여차하면 네가 해.”

“너한테 맡기려고 교수님 연줄까지 동원해서 연락해 온 건데, 그 일을 나더러 하라고?”

처음으로 맡은 일을 파투 낼 셈이냐며 인재가 잔소리를 하자 한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연필을 손에 쥔다. 하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다시 연필을 책상 위로 데구루루 굴리는 모습에 인재가 뭐라고 한 소리 하려다 말을 멈춘다. 이 상태에서 화를 내 봐야 아무 도움도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이럴 때는 채찍보다는 당근이다.

“너, 어디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와라. 이래선 아무것도 안 되겠다.”

이러다 또 휙 하니 날아 버릴까 싶은 걱정에 인재가 더 쌓지 말고 어디든 가서 풀고 오라고 조언하자 연필을 굴리던 한이 작게 중얼거린다.

“생각해 보니까 그 녀석, 졸업식 때도 안 왔었어. 나한테 연락도 없었고”

새삼 분통이 치민다는 듯 한이 이를 악문 채 중얼거린 말에, 인재가 황당해하며 받아쳤다.

“졸업식까지 못 올 정도라면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 왜 네가 열 받는데?”

“그 녀석은 나한테 연락 한 번은 해 줬어야 했어.”

너무나 당당하게 상대의 헌신을 요구하는 한의 태도에 인재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아연한 얼굴을 했다.

“아무래도 나 전 사무실로 돌아가야겠다. 그렇지 않아도 교수님이 너 언제 때려치울지 모르니 언제든지 돌아오고 싶으면 돌아오라고 하시던데, 확실히 교수님 말을 따르는 게 좋겠어. 너랑 일하는 거 불길해.”

“가, 그럼.”

그럼 아예 회사 문 닫고 자기도 다른 데로 가 버리겠다는 한의 심드렁한 반응에 인재는 진저리를 쳤다.

“너 자꾸 이럴래? 우리가 시작한 지 한 달이 됐냐, 일 년이 됐냐? 적당히 좀 해, 이 자식아!”

쌓인 게 많은 듯 버럭 고함을 내지르는 인재를 보며 한도 어느 정도의 가책은 느꼈는지 더는 아무 말 않은 채 다시 시선을 내리고 연필만 데굴데굴 굴렸다.

심통 난 아이 같은 그 모습에 인재가 분노를 참으려는 듯 길게 숨을 내뱉으며 안경을 벗었다 다시 썼다. 그러고는 이번엔 조금 달래듯 말을 건넨다.

“죽어도 안 내키면 스케치만 하고 넘기든가.”

“나, 내 스케치 남한테 안 넘기는 거 알잖아. 됐어. 일단 해 봐야지. 일할 테니 나가 봐.”

“알았다.”

겨우 감정을 잡은 듯 침착해진 한의 태도에 인재가 또 한의 변덕이 발동하기 전에 서둘러 돌아서려다 멈춰 선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린다.

“갑자기 웬 비야?”

창밖에서 쏟아지는 빗줄기에 인재가 ‘올해는 왜 이렇게 비가 잦아.’라며 혀를 차는 순간, 한이 짤막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그 소리에 인재가 재빨리 뒤돌았다.

“또 왜?”

또 하기 싫다고 변덕을 부리려나 싶어 인재가 뭐든 빨리 말하라고 재촉하자 한이 작게 중얼거린다.

“비…….”

“비가 뭐?”

비가 오니 이번엔 파전 가게 하겠다고 나서려는 거면 진짜 가만 안 둘 거라고 말하려던 인재는 순간 한의 습성을 기억해 냈다.

“아, 너 비 오는 거 질색이지?”

그 말에 한의 표정이 험악해진다. 아이처럼 투덜거리던 방금과는 달리 진심으로 불쾌한 듯 싸늘해진 그 표정에 인재가 의외라는 얼굴을 한다.

“왜 그래?”

“……아냐. 나가 봐.”

갑자기 낮아진 음성과 냉랭한 말투에 인재는 잠시 한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이번엔 쉽사리 입을 열 분위기가 아니었다.

한답지 않게 심각해 보이는 그 얼굴에 일단 인재는 자리를 피해 주기로 했다.

“알았다. 일해.”

마지막 말을 마친 뒤 인재가 한의 사무실을 빠져나가자 한은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

어렴풋이 머릿속을 스쳤던 그 장면이 창밖의 풍경과 함께 선명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잊고 있던, 아니 자신이 일부러 기억에서 지웠던 그 기억이었다.

그 순간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어쩔 수가 없어 한은 앞에 놓인 종이 뭉치를 집어 던졌다.

‘나도 오늘에야 알았는데 내가 너 많이 좋아했던 것 같아.’

두 개의 도면을 넘긴 뒤 하나 남은 파일을 열려던 신우는 문득 떠오른 그 말에 겸연쩍은 듯 뺨을 문질렀다.

지난 나흘간 툭하면 그 말이 떠올라 당혹스러웠다.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잠깐 정신을 놓으면 그 기억이 되살아났다.

한은 ‘친구로서’ 좋아했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겠지만 자신의 입장에서는 그렇게만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의 성적 취향상, 그런 말을 들으면 기대를 하게 된다.

설마, 혹시라도 그 녀석이 자신에게 연애 감정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또다시 떠오른 그 생각에 신우는 재빨리 머리를 휘저었다.

아무 의미 없는 말일 것이다. 식사를 하기 전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말을 했었으니 그게 미안해서, 혹은 ‘기억을 되새겨 보니 널 꽤 좋아했었다’라는 의미일 거다.

주제에 맞지 않는 망상에 빠지려는 자신을 질책하며 신우는 재빨리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일하자, 일.”

오후 내로 마지막 작업을 끝낸 뒤 밤에는 아르바이트하는 가게에 나가야 한다. 일이 들어왔다 해도 비정기적인 일이라 아르바이트를 쉴 수는 없다.

빨리 일을 끝내고 잠시라도 자려 손을 움직이는데, 창밖에서 시원한 빗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그 소리에 창밖을 바라보자 역시나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다.

“소나기네…….”

거센 빗줄기에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비가 오면 아무래도 더 일찍 나가 봐야 한다. 알람 시간을 좀 당길 생각으로 다시 휴대폰을 손에 드는 순간 불현듯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아마 고3 때였을 것이다.

3학년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초봄이었다.

막 수업을 마치고 학교를 나가려는데 뜬금없이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전에 하늘이 너무 맑아 비가 올 거라는 일기 예보에도 우산을 챙기지 않았는데, 어쩐 일로 일기 예보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어두운 하늘 아래 시야가 뿌옇게 흐려질 정도로 거세게 쏟아지는 빗줄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던 사이 교내로 우산을 든 사람들과 차들이 들어찼다.

학생들을 마중 나온 이들이었다. 귀한 고3 학생이다 보니 늦은 밤에도 가족들이 우산을 챙겨 들고 나선 듯했다.

운동장 안을 가득 메운 인파와 자동차에 막 학교에서 나온 학생들이 각자 가족들을 찾아 그들의 우산 속으로 들어섰다.

내리는 기세로 봐서는 쉽사리 그칠 비가 아니었다. 우산을 들고 와 줄 가족이 없던 신우는 그냥 뛰어가기로 결심하곤 현관 밖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 순간이었다.

바로 옆에서 우산이 펼쳐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가자, 가자, 가자.’

빠르게 ‘가자’를 반복하며 자신의 어깨를 끌어당기는 커다란 남자의 손에 놀라 옆을 돌아보자 한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비 진짜 많이 온다.’

싱긋 웃는 그의 미소만큼이나 유쾌한 목소리에 신우는 빠르게 그를 따라 움직이면서도 당혹스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그가 자신을 강제로 끌고 가서가 아니었다.

몸에 닿은 그의 피부에 얼굴이 달아오른 탓이었다.

농구 선수였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또래에 비해, 어깨에 닿은 그의 손은 너무 컸고 몸을 당기는 그의 팔은 탄탄한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다.

커다란 그에게 전신을 끌어안긴 덕에 빗방울 하나 튀지 않을 정도였다.

그걸 의식한 순간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 대기 시작했다. 어쩐지 몸이 붕 뜨는 듯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타인의 체온을 느낀 게 오랜만이라서인지 그의 손이 닿은 어깨가 화끈거리고 온몸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숨이 막혀 오는 듯한 그 감각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자 무시무시한 우산의 행렬을 뚫고 교문으로 가던 한이 다시 발랄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아, 다 왔다.’

뭔가를 발견한 한은 그대로 망설임 없이 자신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그리고 그는 곧장 검은색의 승용차 앞으로 가 뒷좌석의 문을 열고 그 안에 먼저 올라타 자신에게 손짓했다.

‘타. 집까지 바래다줄게.’

그제야 신우는 그 차가 한을 데리러 온 것임을 알아챘다. 머리가 멍하고 감각이 둔해져 상황을 빠르게 살피지 못하고 있었다.

‘아저씨, 제 친구 집에 좀 들러 주실 수 있으시죠?’

운전석에 앉은 남자를 향해 한이 묻자 남자가 시원스레 답해 주었다.

‘그럼. 어서 타, 학생.’

자신을 향한 손짓에 그제야 신우는 상황을 파악했다.

하지만 그건 싫었다. 그냥, 그를 자신의 집 근처로 들이는 것 자체가 내키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를 자신의 현실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어…… 아냐. 그냥 갈게.’

‘왜?’

‘우리 집 가깝잖아. 이런 날은 걸어가는 게 빨라. 길 막힐 테니 너 먼저 가. 아, 우산.’

막 우산을 접으려 손을 뻗는 순간 한이 그를 만류한다.

‘우산은 됐어. 난 차고에서 곧장 집으로 들어가면 돼. 내일 갖다줘.’

‘그래도 괜찮아?’

‘응. 빨리 가. 비 많이 온다.’

다정한 그의 인사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응. 우산 고마워.’

마지막 인사를 마친 뒤, 차 문을 닫아 주려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한이 빨리 가라는 듯 손을 내젓는다.

‘빨리 가. 너 추워 보여. 감기 걸리지 않게 빨리 가서 푹 쉬어.’

동갑인데도 형처럼, 엄마처럼 하나하나 보살펴 주는 그의 걱정에 어색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그럴게.’

‘이따 전화할게.’

마지막 인사를 나눈 다음 서둘러 뒤로 물러서 차 문을 닫자 곧 차가 조심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사이에도 비는 정신없이 쏟아져 이미 바지 자락이 흠뻑 젖은 채였지만 당장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아쉬운 듯 멀어져 가는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먼저 돌아서는 걸 보는 건 힘들지만 그 순간만은 그런 감상을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계속해서 심장이 두근거리며 그의 손이 닿은 어깨가 후끈거렸다. 그리고 그 온기와 함께 달콤하고 저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은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오랜만에 떠오른 기억을 곱씹으며 창밖을 내다보던 신우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자세히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희미하게나마 그날의 잔상이 남아 있었다.

그의 손길과 음성, 그리고 팔의 힘. 그리고 해맑던 그의 미소까지.

그와 있을 때면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래서 모두가 그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가 시선을 맞춰 주고, 말을 걸어 주면 어떤지 특별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물론, 그 유희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은 무엇에든 쉽게 질리는 편이었고 자신은 잘 질리는 타입의 인간이었다. 아무리 조심하고 주의해도 타고난 기질은 어쩔 수가 없다.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니까…….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다시 우울함이 돌아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또 이런 생각에 빠져들면 끝이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정신을 차리려 다시 화면을 바라보는데 휴대폰의 벨 소리가 울려 왔다. 액정을 보니 ‘정현’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서로 바빠 최근 연락을 제대로 못 했던 터라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응”

- 와, 오랜만. 살아 있었구나.

언제 들어도 활기차고 기운 넘치는 정현의 음성에 신우는 기분 좋게 대꾸했다.

“죽었으면 연락 갔지.”

- 하긴 무소식이 희소식이긴 하지. 잘 지냈어?

“그런대로. 넌?”

- 뭐, 잘 지냈다면 잘 지낸 거고 못 지냈다면 못 지낸 거지. 빌어먹을 회사가 하도 바빠서. 그러고 보니 너 본 지도 한참 됐다. 작년 추석 때 잠깐 보고 못 봤지?

“바빴잖아, 서로.”

정현은 지난 추석 후로 곧장 감사에 연말 정산으로 바빴고 자신도 밤낮없이 일을 하느라 거의 반년이 넘게 얼굴을 보지 못했다. 일 때문에 소홀한 거야 어쩔 수 없었다. 그에 별거 아니라는 듯 대꾸하자 정현이 천천히 본론을 꺼낸다.

- 그런데, 너 혹시 무슨 일 없냐?

“응? 없는데?”

- 어젯밤 꿈에 갑자기 네가 나와서 말야. 조금 죄책감 느껴서 전화한 거야.

“뭐야, 그게? 노인네처럼?”

간혹 할머니께서 꿈에 자신이 나왔다며 전화를 하신 적은 있지만 또래인 정현이 그러는 건 좀 이상했다. 아니 정확히는 너무 어울리지 않아 신우가 이상하다는 듯 웃자 정현이 ‘역시 그렇지?’ 라고 동의하며 말을 이었다.

- 본의 아니게 한이네 할아버지랑 친하다 보니 그런 게 신경이 쓰이더라고.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하기도 했고. 갑자기 꿈에 보이니 보고 싶기도 해서.

“잘 지내. 일도 꽤 들어와서 좋고. 아, 나 한이 만났다?”

- 어? 한이? 정한?

“응. 프리 일 의뢰 들어와서 가 보니 걔네 회사더라고.”

- 어…… 인사했어?

“응. 밥도 같이 먹고. 걔는 여전하더라.”

- 너 알아봐?

“응. 나도 기억 못 할 줄 알았는데 먼저 알아봐서 놀랐어.”

그 말에 정현이 뚝 하니 말을 멈춘다. 정현도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다 싶어 신우가 잠시 기다리자 잠시 후 냉정을 되찾은 정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 진짜 한국 좁구나. 살다 보니 그렇게도 만나네.

“응. 나도 놀랐어. 밥도 사 주더라? 옛날하고 똑같아. 날 보니 밥 먹여 주고 싶대.”

- 그 자식이 사 준 거면 백반 종류지, 뭐. 걔는 할아버지 손에 커서 그런지 생긴 거랑 안 어울리게 식성이 향토적이야.

그 말에 불현듯 의문이 들어 신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한이한테 부모님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캐물을 이유도 없고 또 자신도 가족 이야기를 하는 게 불편해 말을 아껴 왔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흥미가 생겼다.

“할아버지가 키운 거야?”

- 응. 걔 할아버지 성격 되게 독특하시거든. 한이 사주가 끝내준다나 뭐라나. 어디 가서 신점을 봤는데 한이가 할아버지 숙원을 풀어 줄 애라고 했나 봐. 그래서 다른 자식들하고 손자들 다 내치고 한이만 본가에 두고 키우셨어.

그러고 보니 한이 회사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조부께서 미신을 잘 따른다고 했었다. 큰 사업을 시작하거나 건물을 지을 때 굿을 하거나 점을 보는 경우를 많이 봤기에 그의 조부도 그냥 그런 정도겠거니 했는데, 설마 말 그대로 맹신의 수준일 줄은 몰랐던 터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런 분이 실제로 계시구나.”

- 응. 진짜 특이하셔. 나쁘게 말하면 괴팍하시고.

“그래…….”

- 그러니까 그렇게 성공하신 거겠지. 걔 할아버지가 우리나라 최대 현금 보유자거든. 주로 기업 상대로 대출을 해주시거나 투자하시는데, 그래서 그런지 관상 점 역술 이런 거 되게 중시하셔. 넌 한이 할아버지 본 적 없지?

“응.”

- 옆에서 보기만 하면 재밌는 분이셔. 한이랑 건물 같은 거 걸고 내기 바둑 두다 수세에 몰리면 판 뒤엎으시는 분이야. 둘이 친구처럼 재미있게 지내.

줄줄이 흘러나오는 정현의 설명에 신우는 뭐라고 맞장구도 치지 못한 채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뭔가 굉장히 먼 세계 이야기 같은 느낌이었다. 한의 집안이야 고등학교 때도 워낙에 유명해 대강 들었던 기억은 있지만 한을 잘 아는 정현에게 전해 들으니 새삼 대단하고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가정사도 평범하지는 않지만 한이네는 좀 다른 의미로 독특했다.

- 아, 그렇다고 엄청나게 암울한 가정 환경을 생각하지는 마라. 걔 어릴 때부터 성격이 개 같아서 부모님 나가실 때도 자기 입으로 자긴 안 나간다고 했을 정도니까. 부모님하고도 자주 연락하고 잘 지내. 동생들도 둘이나 있고. 동생들도 그 여우 같은 새끼가 할아버지 살살 꼬셔서 유학도 보내 주고 아쉬운 거 없이 잘 자랐어. 마침 한이 아버지가 지방대에 정교수 자리가 났다고 이사 간 거니까. 그때 한이는 농구 때문에 남은 거고. 아, 농구였나, 야구였나? 아니다, 태권도였나?

하도 하다가 도중에 때려치운 게 많아 그때 뭘 했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며 정현이 너스레를 떨자 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더라. 애가 그늘이 전혀 없어.”

- 할아버지께서 잘 키우셨지. 걔랑 걔 할아버지 둘이 되게 닮았어. 한이 노년이 딱 그럴 것 같아.

그 말에 신우는 신기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잘 상상이 가질 않았다. 한의 노년기 모습이라니…….

“얼굴이 닮은 거야?”

- 외모며 성격이며 빼닮았어. 한이 할아버지 젊은 시절 얘기 들어 보면 한이랑 거의 똑같아. 차이라면 한이는 티를 안 낸다는 거고, 할아버지는 있는 성질 그대로 다 보이신다는 것뿐이야.

“할아버지도 그렇게 변덕스러우셔?”

- 대충 비슷하다고 봐야지? 할아버지도 그냥 이것저것 손을 다 대 보시는 분이니까. 주식이며 부동산이며 투자며 딱 한 종목에 한 번만 하시는데 그게 할 때마다 대박이야. 그리고 한 번 한 건 두 번 안 하시고. 통도 크셔서 나 가끔 놀러 가면 용돈 하라고 백만 원짜리 수표 주시던 분이야.

그렇게 설명을 들으니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아주 많이 닮았다는 사실을.

- 아, 할아버지 너 보면 좋아하겠다. 너처럼 얌전하고 과묵한 사람 좋아해. 말 많고 나대는 애들 질색이라 나 별로 안 좋아하셨거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정현의 목소리는 유쾌하게 들떠 있었다. 아마 한의 할아버지를 꽤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정현의 짐작과 달리 그분도 정현을 아끼시는 듯했다.

“용돈 주실 정도면 널 되게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 뭐, 워낙 어릴 때부터 봤으니까. 그리고 재미있는 건 그렇게 변덕스러우신 분이 의외로 일편단심이다? 그 정도로 돈 있으면 재혼하실 만도 한데, 한이 할머니 아프실 때 10년간 병 수발 다 직접 하시고 돌아가신 뒤로는 수절하고 사셔. 한 번은 어떤 사장이 접대한다고 어린 여자를 들여보낸 적 있는데 그 이후로 할아버지께서 그쪽에 자금 끊으셔서 그 회사 도산했잖아.

한참 이야기를 쏟아 낸 정현이 깔깔거리고 웃는 소리에 문득 한의 회사 이름이 떠올랐다.

‘아시’. 봉황.

회사 로고에 두 마리의 봉황이 그려져 있어 특이하다 해 찾아봤는데, 수컷이 ‘봉(鳳)’, 암컷이 ‘황(凰)’이라고 했다. 한 쌍이 되면 유독 사이가 좋다고 했으니 아마 그래서 그런 이름을 지으신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봉황이 천자(天子)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굳이 두 마리를 로고에 쓴 부분에서 그분의 생각이 읽혔다.

“그래서, 아시구나…….”

저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리자, 정현이 ‘응?’하고 묻는다.

“아냐, 아무것도. 그런데 너 근무 중 아냐?”

- 이제 들어가야지. 그럼, 일 잘하고 한이랑 다 같이 한번 보자.

“그래.”

- 일 잘하고.

“너도.”

정신없이 이어지던 정현과의 수다를 끝내며 다시 작업을 이어 가기 위해 도면을 펼친 신우는 문득 옆에 놓인 ‘아시’의 파일을 바라봤다. 검은색의 바탕 중앙에는 커다란 한글로 ‘아시’라고 적혀 있었고 그 아래쪽에는 두 마리의 새가 얽힌 로고가 박혀 있다. 섬세한 금박으로 수놓인 그 형태가 유난히 마음을 잡아끌었다.

손을 뻗어 그 금빛 새를 더듬으려는 순간 휴대폰의 알림음이 울렸다. 문자 메시지다.

이번 달 이자가 연체되었다는 내용이었다.

혹시나 싶어 휴대폰으로 은행 잔고를 확인하자 ‘0원’이었다. 아마 잔고가 부족했던 모양이다.

프리로 전향한 뒤 입금이 되는 기간이 제각기 달라서인지 이자 날짜와 타이밍이 맞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일을 더 늘려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컴퓨터 옆에 놓인 액자를 바라봤다.

낡은 액자 속에는 13살의 자신과 10살의 신영이 부모님의 품에 안긴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열 개의 촛불이 켜진 케이크를 앞에 둔 채 행복한 듯 웃고 있는 네 사람이, 이제는 아주 낯설게 보였다. 마치 SNS에 올라온, 타인의 단란한 가족사진을 보는 듯 생소했다.

그 안에서 웃고 있는 자신도, 자신과 동생을 안고 있던 어머니와 아버지도 모두 낯설었다. 가슴을 아리게 하는 존재는, 자신의 옆에서 부끄러운 듯 웃고 있는 작은 아이뿐이었다.

신영이는 몹시 작고 약했다. 열 살임에도 일곱 살 정도로 보이는 체구를 가지고, 살짝만 쳐도 부러지고 다치던 너무나 약한 아이였다.

순간 지끈거리는 심장에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 작고 약한 아이를, 자신이 놓아 버렸다.

귀찮고 버거워서, 자신의 발목을 붙드는 그 아이가 너무 미워서 자신에게 매달려 오던 그 손을 놓아 버렸다.

다정한 사람들은 그때 일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해 주었다. 누구나 그럴 수 있고 다만 그날 자신이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살아남은 자를 위한 ‘위로’에 불과했다. 운이 없는 자신이 하필 그날, 그 아이를 혼자 내버려 둔 건 어느 정도 고의성이 있었다는 거니까.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아이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르니까.

결국 모든 불행의 시작은 자신이었다.

자신이 그 아이를 버렸으니 부모님이 날 버린다 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지 말라고 매달릴 수도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 아이를 잃어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은 평생 자신이 짊어져야 할 짐이었다.

아무리 지치고 외롭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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