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연신우라…….”
느긋한 오후, 오랜만에 돌아온 집을 뒤져 서재에 있던 고등학교 졸업 앨범을 꺼내 든 한은 맨 뒷장의 연락처가 적힌 명단을 열람한 뒤 다시 앞으로 돌아가 3학년 5반 학생의 사진을 일일이 확인했다.
“신우…… 연신우…….”
알싸하니 입 안에 감겨 오는 그 이름을 반복하며 졸업생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해 가던 한은 ‘연신우’라는 이름이 써진 곳을 손으로 짚고는 작게 탄식했다.
얼굴을 보니 어렴풋하게나마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아주 오래전 일이고, 또 자신은 과거를 오래 담아 두는 성격이 아닌 터라 구체적인 것들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가 자신과 꽤 친했다는 사실은 알 것 같았다.
하얗고 창백하고 여린 아이. 굉장히 가늘고 연약해 보이는 아이였다.
하지만 여전히 자세한 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그 이미지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게 이상하기는 했다. 정현의 반응을 보면 꽤 친했던 것 같은데…….
자신이 지금까지 사람을 완전하게 기억에서 지운 건 끝이 아주 더러웠거나 기억할 필요도 없는 인간이라 판단되었을 때뿐이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좀 다르다. 끝이 더러웠다는 느낌도 아니고 기억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라는 느낌도 아니다. 그랬다면 자신을 잘 아는 정현이 굳이 먼저 언급하지 않았을 거다.
기억을 더듬으며 앨범 속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져라 보는 사이 휴대폰의 벨 소리가 울려 왔다. 지금 전화를 걸어 올 사람은 뻔하다. 혹시나 해 액정 화면을 봐도 역시나다.
서인재다.
“응.”
- 사무실 리모델링은 끝난 거야?
역시나 깐깐한 성격답게 일일이 확인을 해야만 성이 차는 그에게 한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끝날 거야, 곧. 층 전체를 뜯어고치는데 그게 쉽겠냐?”
- 그러게 왜 그걸 다른 데 맡겨? 차라리 우리가 하지.
“다들 전 회사에서 프로젝트 하던 거 끝내고 와야 한다며? 프로젝트 끝내고 퇴사 신고하고 그때부터 리모델링해서 어느 세월에 문 열게? 2주 정도면 될 거야.”
- 뭐, 네가 하는 거니 확실하겠지만……. 하여간 성우 형이랑 재명 형도 그쪽에서 다 손 놓고 오는 거니까 알아서 해. 그 형들이 인테리어 디자이너랑 조경 팀까지 다 데려오는 거라고.
한의 성격을 잘 아는 인재가 이번엔 제대로 하라고 은근한 압박을 가하자 한이 웃는다.
“일이니 제대로 하겠지. 캐드 쪽은 어떻게 됐어?”
-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거야. 고용하는 것보다 그냥 급할 때만 프리랜서들 몇 쓰는 게 어떨까 하는데? 캐드야 어지간한 사람들 다 하는 거고, 꼭 본인 손으로 해야 하는 사람도 있는데 따로 직원 두는 것도 좀 그렇잖아. 맡겨 봐야 평면도 정도니까.
“그럼 그건 네가 알아서 해. 한국 쪽은 나보다야 네가 더 잘 아니까. 아, 그리고 우리 개업하자마자 일할 거 많다? 지금 나한테만 들어온 게 네 건 정도 돼. 단독 주택 하나는 내가 할 거고, 고급 빌라 하나랑 교외 레스토랑 두 개는 알아서 해.”
난 찍어 내는 다가구 주택은 안 지어, 라며 한이 재빨리 일을 떠넘기자 인재가 혀를 찬다.
- 네가 그렇지, 뭐. 그럼, 우선 프리랜서들 포트폴리오 모아서 보냈으니까 보고 인터뷰할 사람들 골라 봐.
“그런 건 네가 알아서 하라니까.”
- 나 아직 바빠. 노는 네가 해. 메일로 이력서 보낼 테니 일일이 확인하고 네가 골라. 난 그 안에서 인터뷰만 할 테니까.
그러고 보니 인재는 아직 회사의 노예였다. 그렇다면 귀찮아도 자신이 하는 게 맞다.
“알았어. 구직 사이트에서 고른 거야?”
- 형들이 같이 일했던 사람들하고 나랑 같이 일했던 사람 중에 추린 거야. 실력은 다들 괜찮아.
보고 있던 앨범을 덮어 밀어 둔 뒤 노트북을 끌어당긴 한은 곧장 전원을 켜고 인재가 보낸 메일을 확인했다.
“몇 명이야?”
- 10명 정도. 그중에 5명 정도 먼저 골라서 인터뷰하려고. 프리랜서긴 해도 일 잘하면 꾸준히 맡길 수도 있으니까.
“알았어, 일단 볼게.”
- 그래.
인재가 보낸 메일에는 프리랜서들의 이름과 이메일주소, 그리고 포트폴리오용으로 사용하는 웹사이트와 SNS 주소가 간단히 적혀 있었다. 별생각 없이 쭈욱 이력서들을 확인하던 한은 그중 눈에 띈 한 이름에서 시선을 멈췄다.
“연신우…….”
그 이름을 곱씹으며 한은 헛웃음을 흘렸다. 대체 무슨 인연이길래 돌아오자마자 이렇게나 급속도로 그에 관해 듣게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악연이야, 인연이야?”
어느 쪽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연이 닿는다면 한 번 그 인연을 끌어당겨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일에는 분명 그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그렇게 마음을 정한 한은 노트북 옆에 둔 휴대폰을 손에 들곤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왜?
“연신우 씨 먼저 인터뷰해.”
- 응?
“나머지는 천천히 하기로 하고 일단 연신우 씨 인터뷰부터 해. 일은 미친 듯이 들어올 테니까.”
- 연신우 씨? 그 사람 포트폴리오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벌써 다 본 거야?
아주 상식적인 인재의 질문에 한은 차마 ‘아직 보지도 않았어’라고는 답하지 못한 채 대강 말을 흐렸다.
“일단 인터뷰 날짜부터 잡아.”
- 아, 그러니까 왜…….
“나머지는 인터뷰 후에 알려 줄게. 끊는다.”
- 야, 정한…….
더는 할 말 없다는 듯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한은 이번엔 ‘연신우’란 이름 옆에 적힌 웹사이트로 들어가 그가 한 작업 내용들을 훑어봤다. 건물보다 인테리어 위주의 작업물들을 돌아보던 한은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실력은 괜찮다. 섬세한 작업들을 깔끔하게 잘 해냈다. 이 정도라면 불순한 의도로 일을 맡긴다 해도 문제없을 실력이다.
자꾸 얼굴을 부딪치다 보면 뭔가가 기억나겠지, 라는 느긋한 생각을 하며 한은 다시 이메일로 돌아가 명단을 확인했다.
어서 그를 만나 이 찝찝한 기분이 사라지길 기대하며.
아르바이트를 끝낸 뒤, 이른 아침이 다 되어 집으로 들어와 컴퓨터를 켠 신우는 그대로 쉬지도 않은 채 곧장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은 노곤하지만 어차피 잠도 오지 않아 맡은 작업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그나마 간단한 작업이라 빠르게 도면 위를 채우는 사이 휴대폰이 울렸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낯선 번호에 조금 긴장이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기에 통화 버튼을 누르자 수화부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연신우 씨 휴대폰이죠?
“네. 맞는데요.”
또 내가 모르던 이자 재촉인가 싶어 신우가 조금 신경을 곤두세우자 남자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 한성우 씨 소개로 연락드렸는데요. 여긴 건축 디자인 회사 ‘아시’입니다. 지금 통화 괜찮으신가요?
“……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 이번에 저희 사무실이 오픈하면서 캐드 작업을 해 주실 분들이 필요해서요. 프리로 일을 맡기고 싶은데, 일정 괜찮으신가요?
순간 신우는 안도했다. 한성우라면 서너 번 같이 일을 했던 건축가였다. 그와 특별한 친분이 있는 건 아니라 그가 일을 소개해 줬다는 건 의외였지만 어쨌든 일이 들어오는 건 반가운 상황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빚 독촉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네, 괜찮습니다.”
- 괜찮으시다면 내일 중에 한 번 사무실로 나와 주실 수 있나요? 간단한 인터뷰를 좀 할까 하는데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몇 시쯤 가면 되나요?”
- 오후 3시쯤 괜찮으신가요?
“네, 괜찮습니다.”
- 회사가 아직 간판을 안 건 상태라 조금 헷갈리실 수도 있으니 주소와 약도 메시지로 보내 드릴게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네.”
지극히 사무적인 통화를 끝낸 후, 신우는 휴대폰을 두 손으로 든 채 긴 한숨을 내뱉었다.
사람이 당장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안 그래도 얼마 전까지 일을 주던 업체가 도산해 앞이 막막했는데 의외의 부분에서 일이 풀렸다.
다행이었다. 항상 안 좋은 일들만 일어난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아주 가끔은 좋은 일도 찾아오는 모양이었다. 아니, 자신의 인생도 따져 보면 내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와 동시에 문득 아주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억이라기보다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정한. 유난히도 덩치가 크고 다정했던 친구. 이젠 거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되었지만 지금도 가끔 그가 떠오르곤 했다.
이상하게도 그와 함께할 때는 모든 게 좋았다. 마치 그가 행운을 몰고 온 듯, 즐거운 일들만 가득했다.
그러자 한은 잘 지내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의 오랜 친구였던 정현이를 통해 간혹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정현 역시 최근 5년간은 연락이 안 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과는 연락이 끊긴 지 10년도 더 되었다.
아직도 왜 멀어졌는지는 모른다.
갑작스럽게 친해진 만큼 멀어지는 것 역시 순식간이었지만 자신은 그 변화를 담담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조심한다고 했지만 자신의 무언가가 그를 질리게 만들었을 테니까.
이젠 어렴풋한 잔상만 남은 그를 떠올리자 문득 사람의 체온이 너무나 그리워졌다. 사람의 목소리가, 손길이, 그리고 체온이 그리웠다.
“연신우 씨 포트폴리오는 잘 봤습니다. 이쪽에서는 몇 년 정도 일하셨죠?”
3시보다 조금 이른 시간, 메시지로 온 약도를 보고 찾아온 사무실 안에서 신우는 은테 안경을 쓴 남자의 앞에 앉은 채 그가 묻는 질문에 착실하게 답하고 있었다.
“7년간 일했습니다.”
신우가 했던 작업물들을 한 번 더 쭈욱 훑어본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질문을 이어 갔다.
“계속 디자인 팀에서 일하셨네요?”
“네. 인테리어 쪽 일을 했었거든요.”
“저희 회사에서는 주로 평면도 작업을 하시게 될 겁니다. 실내 인테리어 쪽을 맡기고 싶은데, 그쪽 디자이너가 꽤 까다롭거든요.”
나름 인테리어 디자이너인데 남의 도면 작업만 할 수 있냐고 묻는 그의 질문에 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의 종류는 상관없습니다. 일만 할 수 있으면 됩니다.”
다소 절실하기까지 한 신우의 답에 남자는 신우를 빤히 보았다. 그 답이 의외라는 얼굴이었다.
“솔직하시네요?”
“…….”
“뭐, 좋습니다. 그럼 다음 주 월요일에 방문 가능하신가요? 주말에 오픈할 예정이라, 월요일부터 작업에 들어갈 겁니다. 사실은 이미 일이 들어와서 다들 집에서 작업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가끔 바쁠 때는 사무실에 나와서 일을 해 주셔야 할 때도 있을 거예요. 보통은 메일로 소통하지만 저희 디자이너 중 까다로운 분들이 직접 와서 설명을 듣기를 바라거든요.”
“괜찮습니다. 디자이너분과 직접 소통이 되면 능률이 좋으니까요.”
“답이 빨라서 좋네요. 그럼, 계약서는 월요일에 쓰기로 하고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네. 그럼.”
자리에서 일어선 남자가 악수를 청하자 신우 역시 일어나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너무나 순식간에 계약이 성사되어 얼떨떨했으나 아직 공사 중이긴 해도 회사의 규모나 분위기로 봐서는 일감이 꽤 들어올 것 같았다.
조금 고되더라도 일은 많은 쪽이 좋다. 상황이 모처럼 좋게 돌아가는 듯한 기분이 들어 신우는 속 시원해하는 얼굴로 천천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연신우…….”
흰색의 어지러운 문자가 얽혀 있는 유리 벽 너머를 바라보던 한은 자리에서 일어서 악수를 하는 남자의 옆모습을 보며 기억을 되짚었다.
직접 보면 금세 생각날 줄 알았는데 불행히도, 아직은 아니다.
옆모습을 보니 뭔가 떠오를 것 같기도 한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첫인상만으로도 자신의 취향이라는 게 느껴지는데 정작 지난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는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신우, 연신우…….”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던 사이 인사를 마친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옆 사무실에서 빠져나갔다. 무심한 그 모습에 조금 신경이 곤두섰다.
면접 내내 그는 이 유리 벽 너머를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물론, 개인 면접 중에 사방을 돌아보는 정신 빠진 녀석은 이쪽에서 사양이지만 그걸 차치하고서도 지독히도 집중력이 좋은 녀석 같았다. 나갈 때라도 한 번쯤은 돌아볼 만한데 끝까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 덕에 질릴 정도로 옆얼굴만 봐야 했다.
왜인지 초조하고 짜증스러운 마음이 들어 그의 등을 바라보는 사이 사무실 문이 열리며 안으로 인재가 들어섰다.
“네 말대로 일단 계약하기로 했어.”
“수고했어.”
“뭐, 수고랄 건 없는데…… 그냥 네가 면접 보지? 왜 나한테 시킨 거야?”
갑자기 연신우 씨만 먼저 면접을 보라며 사람을 불러내 앉혀 놓고는 정작 들어와 보지도 않은 한에게 인재가 이상하다는 듯 묻자 한이 조금 말을 끌다 답한다.
“그게…… 저쪽은 날 알지도 모르거든.”
“널 알면 안 돼?”
“그건 아닌데…… 난 기억이 안 나서 말야.”
“아는 사이야?”
“응, 고등학교 때.”
아는 사이였대, 라고 한이 남의 이야기를 하듯 말을 흘리자 인재가 못 말린다는 양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사무실 벽 쪽에 놓인 커피 메이커 쪽으로 다가섰다.
“자기 EX도 기억 못 하냐? 무심한 새끼.”
대번에 나온 인재의 말에 한은 눈을 껌뻑였다.
“EX?”
“맞잖아. 그러니까 네가 그렇게까지 신경 쓰는 거 아냐? 면접까지 직접 안 본 거 보니 딱이네.”
확실히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고 한은 인정했다. 공적인 일에는 절대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는 자신이 무조건 합격시키라며 인재에게 개인 면접을 보게 했으니 이상해 보일 만하다.
하지만 분명 그건 아니다.
“확실히, 그런 건 아냐. 난 기억 안 난다니까, 저 녀석.”
“네가 사귄 그 수많은 사람을 다 기억이나 하긴 하냐?”
엑셀 파일로 저장이라도 해 두는 거냐며 인재가 짓궂게 말을 던지자 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불행히도 그 정도로까지 머리가 나쁘진 않아. 난 한 번 사귄 사람은 반드시 기억해. 아무리 더럽게 깨졌어도. 그래야 까먹고 또 사귀지 않을 테니까.”
내 취향은 확고하니까 잊으면 또 작업 걸지도 모르거든, 이라는 한의 답에 커피를 따른 종이컵을 손에 든 인재가 뒤돌아서 의외라는 얼굴을 한다.
“신기하네. 완전 네 스트라이크존이던데? 외모며 성격이며 말투며.”
단아한 얼굴이나 조용조용한 말투나, 약간 신랄하기까지 한 쿨한 성격까지. 거기다 이름까지 네 취향이라며 인재가 덧붙이자 한도 이상하다는 듯 신우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말야. 내가 봐도 완전 내 취향인데 왜 기억이 안 나는 거지?”
“그때 취향은 확고하지 않았나 보지.”
“글쎄…….”
“취향은 자라면서 바뀌니까. 특히 너처럼 변덕스러운 놈이라면 더 자주 바뀌지 않냐?”
“아냐. 난 취향은 확고해. 잘 질려서 그렇지.”
본인의 입으로 태연하게 변덕스럽다는 말을 하는 한을 인재는 한심하다는 듯 바라봤다. 저 정도면 정떨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정도 붙이기 싫다.
“하여간 더럽게 깨진 애인은 아니라니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회사 내에서 문제는 일으키지 마라. 넌 헤어질 때 너무 지저분해.”
“내가?”
“인정하기 싫겠지만 너 연애 상대로는 최악이야. 혼자 미쳐서 달려들다 뭐든 하나 꼬투리 잡으면 질렸다고 사람 차는 거 끔찍해.”
“그럼 꼬투리를 잡히지 말았어야지.”
“그 꼬투리가 어지간해야지. 너 상대방 되게 피곤하게 하는 타입인 거 알지? 내가 보기에 넌 이런 타입 같았는데 이제 보니 다르네? 난 그런 거 싫어. 피곤해. 그럼, 이만. 이게 무슨 이기적인 짓이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너무나 확고한 이상형의 기준이 있는 탓인지 한은 그가 사귄 사람들에게 그의 이상에 완벽하게 부합해 주길 요구했다. 그리고 상대가 그 바람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금세 식어 버렸다. 그가 원하는 것과 다른 모습이 보이는 순간 질리는 거다.
취향의 영역으로 보기엔 인성이 너무 쓰레기다.
서로에 대해 존중하고 맞출 여유도 없이, 한은 상대방에게서 마음에 안 드는 점을 찾으면 참지 못한다. 그때마다 더러운 성격이라고 인재는 되뇌었지만 한은 그 부분에 있어서만은 타협하지 않았다.
“어차피 연애는 한때잖아. 뭐든 오래 하면 질리고 싫증 나는데 그걸 참고 유지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냐?”
“넌 그 속도가 빠르잖아.”
인재의 타박에 낮게 웃음을 흘리던 한은 다시 시선을 돌려 인재를 바라봤다. 그것도 타고난 거라 어쩔 수 없다는 뻔뻔스러운 눈빛에 인재는 혀를 차며 다 마신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내일부터 비품 좀 채워야겠다. 종이컵 싫어. 커피 맛 버린다.”
“컵은 각자 챙겨. 난 종이컵도 나쁘지 않지만…… 아…….”
그 순간 어떤 기억이 한의 머릿속을 스쳤다.
종이컵, 겨울, 옥상, 그리고 소년.
그래, 연신우였다. 하얗고 가느다란 아이. 손을 대면 부서질 듯 위태로워 보이던 그 창백한 옆얼굴이 드디어 선명히 떠올랐다.
한이 놀란 얼굴로 작게 탄성을 토해 내자 인재가 빤히 한을 바라본다. 그러자 잠시 후 한이 작게 중얼거렸다.
“기억났다.”
“……응?”
“맞아, 연신우. 기억났어.”
“오, 드디어 기억나셨어? 그래, 몇 달짜리였냐?”
로또라도 당첨된 듯한 한의 반응에 인재가 심드렁한 얼굴로 되묻자 한이 혀를 찬다.
“아니라니까, 그런 거.”
“그럼 며칠?”
네놈이 연 단위로 사귀었을 리는 없으니 몇 달 아니면 며칠인 거 아니냐는 시니컬한 인재의 물음에 한은 확실하게 그 말을 부정했다.
“쟤는 고등학교 친구야. 내가 남자랑도 연애가 가능하다는 걸 안 건 군대에서였어. 그전에는 난 완전한 이성애자였고. 맞아. 연신우, 아주 예뻤어. 맞아.”
“뭐, 미인이긴 하더라.”
특히나 눈이 아주 차분하고 담담해 보인다고 인재가 개인적인 소견을 덧붙이자 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엄청 조용한 녀석이었어. 내가 왜 걔한테 흥미를 느꼈는지도 기억났어. 질척거리지 않을 것 같았거든. 매달리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미련도 갖지 않고.”
“……완전 네 취향이네.”
“응.”
그러니까 작업해 볼까, 라는 듯 한이 눈을 반짝거리자 인재가 질색한다.
“제발 관둬라.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건드려? 너 좋다고 달려드는 사람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조용히 사는 사람 건드리는 건 범죄야. 게다가 너야 남녀 안 가리지만 저쪽도 그렇다는 보장 있어? 괜히 건드렸다 쓸데없는 트러블 일으키지 말고 제발 얌전히 좀 살아.”
“아냐. 저 녀석은 괜찮을 거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방금까지 기억도 못 하던 녀석이.”
그 말에 한은 다시 한번 기억을 더듬었다. 확실하게 떠오르는 기억은 더 없었지만, 느낌이 그랬다. 막연히 그냥 그럴 것 같았다.
“정한, 제발 아서라. 일만 하자, 좀.”
“걱정 마. 일은 제대로 할 테니.”
“너, 사무실에 네 이름 안 거는 거 사실은 싫증 나면 언제든 튀려고 그러는 거 아냐?”
이미 한이 한국에서 사무실을 연다는 소문은 다 퍼졌지만, 굳이 한이 본인의 이름을 대표로 내걸지 않은 이유를 인재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여러 사람이 여는 공동 사무실이니 누구 하나의 이름을 내걸 수 없다 했지만, 그 말을 믿기엔 인재는 너무 오랫동안 한을 알아 왔다.
한은 그저 책임을 지기 싫은 거다. 본인의 이름을 건 사무실을 운영하면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미리 방어막을 친 거다.
언제든 버리고 떠날 수 있게.
“이런 들켰네, 벌써.”
막 자리에서 일어서던 한의 넉살 좋은 답에 인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너, 네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 일이잖아.”
“날 책임지게 만들고 싶으면 계속해서 날 타오르게 해 봐. 그럼 끝까지 책임져 줄게.”
“차라리 용광로에서 수영을 하라고 해라.”
인재의 기가 막힌 비유에 한이 크게 웃는다.
“해 봐. 그럼 네 용기를 가상히 여겨 책임져 줄 테니.”
“내가 미쳤냐? 하여간 넌 이상한 데서 꼬였어.”
“그럴지도 모르지. 이 세상이 나한테는 너무 쉽거든. 뭐든 타오를까 하면 시시해져 버려. 농구든 사람이든 다 마찬가지야. 너무 지루해.”
“그래서 네가 친구들한테 재수 없다는 말을 듣는 거야.”
“알아. 그래서 안 친한 사람들 앞에서는 그런 말 안 하잖아. 나가자. 페인트 냄새가 진동한다. 빨리 마무리 작업해야 일 시작하지.”
그렇게 말을 마친 한이 먼저 사무실을 빠져나가자 인재도 더는 아무 말 않고 그의 뒤를 따랐다.
어차피 자신은 한의 변덕을 막을 수 없다. 저 녀석을 휘어잡을 수 있는 건 본인의 말대로 계속해서 그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어떤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없을 거라고, 인재는 이미 결론을 내린 후였다.
그러니까 저건 평생 못 고칠 지병이다. 한은 죽는 순간까지도 저 모양일 거다.
그의 인생에 아주 획기적인 어떤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은 말이다.
오전 11시가 되기 전, 세명 빌딩의 1층 로비로 들어선 신우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연락을 받고 첫 일을 의뢰받으러 도착한 건물 안에서 신우는 조용히 엘리베이터 옆에 걸린 건물 내의 입주사 상호를 눈으로 훑어봤다.
“아시.”
깔끔한 필체로 쓰인 ‘아시’ 옆에는 화려한 영문체로 ‘Ashi’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는 작은 글씨로 ‘鳳凰’라고 적혀 있었다.
“봉…….”
더듬거리며 한문을 읽으려는 순간 바로 뒤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봉황. 순우리말로는 아시. 영문으로 하자면 The Chinese Phoenix.”
바로 뒤에서 들려온, 어쩐지 귀에 익은 그 음성에 신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상대를 본 순간 숨을 멈췄다.
정한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이젠 얼굴도 희미해져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보는 순간 알아볼 수 있었다.
아니, 그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불시에 닥친 꿈같은 상황에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사이, 세미 정장을 입은 채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있던 한은 그 상호를 바라보며 태연하게 말을 이어 갔다.
“……라고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피닉스는 주작이지. 봉황은 Fabulous Bird라고 표현하는 게 맞아. 하지만 난 두 개 다 맘에 안 들어서 말야. 동양권의 섬세한 문화와 사상을, 서양인들의 둔탁한 사고로는 표현할 수가 없나 봐. 그럼 차라리 있는 그대로 명사 표기를 하는 쪽이 더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
말을 마친 뒤 한은 그제야 신우를 마주 보았다.
눈꼬리를 휘고 웃으며, 마치 어제 만났다 헤어진 친구를 대하듯 자연스러운 그의 태도에도 신우는 여전히 멍한 얼굴을 한 채였다.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너무 오랜만이라, 그리고 다시는 그를 못 만날 거라 생각해 왔기에 뭐라고 인사를 건네야 할지, 아니, 그 전에 아는 척을 해도 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복잡하게 얽혀 드는 수많은 생각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얼어붙어 있자 한이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오랜만이다, 연신우.”
탁탁, 하는 소리가 가볍게 울려 왔다.
사무실 안에 서류를 펼쳐 놓고 앉아 계속해서 펜 끝으로 종이 위를 두드리면서도 한의 시선은 유리 벽 너머의 사무실을 향한 채였다.
투명한 벽 너머에서 실내 디자인 담당인 정우가 신우에게 도안을 설명하고 있었다. 디자이너로서의 실력은 좋지만 캐드 작업 속도가 느린 게 단점이라, 정우가 하는 작업들의 평면도는 처음부터 아예 다 외주를 주기로 결정 내렸고, 그 일을 맡을 사람으로 결정된 게 신우였다.
자신의 사무실에 앉아 서류를 확인하는 척하면서도 한은 계속해서 그쪽을 힐끔거렸다. 다른 사무실을 관찰하려고 사무실 벽을 유리로 만든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꽤 유용했다.
뭔가 떠오를 듯 말 듯 한 느낌에 계속해서 그쪽을 훔쳐봤지만, 역시나 신우는 이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꽤 그럴듯하고 인상적인 만남을 연출했음에도 신우는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아주 잠깐 놀란 듯 멍한 얼굴을 하다 곧 평정을 되찾았다.
‘오랜만이네.’
태연한 얼굴로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그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아니, 솔직히 기분이 굉장히 더러웠다.
아무래도, 예상과 달리 자신이 그를 잊은 데에는 어떤 기분 나쁜 이유가 있는 듯했다. 마음에 드는 얼굴이었지만 그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껄끄럽고 불편했다.
기저를 알 수 없는 불쾌함을 간신히 억누르며 한은 오랜만에 만난 동창을 만난 듯 반갑게, 다른 이들에게도 모두 보여 주는 가식 어린 미소를 띤 채 신우와의 대화를 이어 갔다.
‘여전하구나. 멀리서도 금방 알아보겠어. 하나도 안 변했네?’
한이 자연스러운 인사말을 건네며 손을 내밀자 신우 역시 자연스럽게 그 손을 마주 쥐었다.
‘너도 그대로야. 금방 알아보겠어.’
‘그래? 난 꽤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그대로야.’
‘그거 좋은 건가? 아, 올라가자. 일 받으러 왔지?’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먼저 올라탄 한이 그렇게 묻자 그제야 신우가 당황한 듯 한을 바라본다.
‘응?’
‘아시. 우리 할아버지께서 지어 주신 이름이야. 저 이름 꽤 비싸. 잘나가는 무당 아줌마한테 1억이나 주고 받은 이름인데 마음에 들어?’
한이 웃으며 힌트를 주자 그제야 신우는 ‘아시’가 한의 사무실임을 눈치채곤 표정을 굳혔다. 어느 정도 눈치가 있다면 이름을 그렇게 상세히 설명할 때 알아챘을 법도 한데, 빠르게 알아차리지 못한 건 신우가 조금이나마 동요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그나마 한에게 위안이 되었다.
‘이 녀석도 나를 보고 놀라긴 했구나’하고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괜찮아졌다.
순식간에 좋아진 기분에 한은 부드럽게 신우의 팔을 당겨 엘리베이터로 끌어들이며 서먹한 분위기를 깨뜨리려는 듯 가볍게 대화를 이어 갔다.
‘얼마 전 신내림을 받은 무당이 남산을 중심으로 남동쪽에 있는 서향 건물의 10층에 사무실을 내라고 했거든. 위치까지 정확히 알려 주고는 거기에 ‘아시’라는 이름으로 사무실을 내면 대박 날 거라고 했나 봐. 난 그런 건 안 믿지만 우리 할아버지는 그쪽을 맹신하시거든. 덕분에 웃돈까지 얹어 주고 이 건물을 매입하셨더라고. 손해 보는 장사를 하느니 한 번에 제대로 투자하자는 게 우리 할아버지 신조니까.’
남들에게는 절대 알리지 않으려 했던, 이 건물의 소유주와 매입 과정을 한은 일부러 과시하듯 신우에게 털어놓았다. 왜인지 그에게 허세를 부리고 싶었다. 어쩌면 조금은 그를 기죽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의 찬사를 듣고 싶었다.
‘너, 성공했구나.’ 내지 ‘대단하구나.’ 또는 ‘와, 그럼 할아버지가 건물주야?’ 등등. 어떻게든 그의 입에서 칭찬을 듣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선망하듯 자신을 봐 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신우의 반응은 예상보다도 담담했다.
‘그렇구나.’
일감을 주는 이에게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도 없는 듯 맥 빠지는 말을 하는 신우를 본 순간 가라앉았던 짜증이 다시 일었다.
그래, 원래 이런 성격이었던 것 같다. 여전히 기억은 희미하지만 예전에도 이런 느낌이었다. 세상만사 관심도 없고 뭐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굴었다.
아마 그래서 위태로워 보였던 것 같다. 땅에 착 달라붙어 사는 자신과 달리 신우는 늘 땅 위에 붕 뜬 채 사는 듯했다. 그날 옥상에서 처음 봤을 때처럼, 당장이라도 저 아래로 떨어져 내릴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있었다.
괜히 자신의 꼴만 우스워진 것 같은 기분에 한은 서둘러 10층 버튼을 누르며 그에게 주저리주저리 말을 덧붙였다.
‘우리 좀 바빠. 벌써 일이 쌓였거든. 아마 너도 죽어 나갈 거야. 그러니까, 힘들다고 도망치면 안 된다?’
‘일이니까, 그런 건 상관없어.’
‘그럼 다행이지만. 아, 미리 말해 두는데 우리 사무실 빡세. 다들 까칠하고 성질도 있고. 마음에 안 들면 수없이 수정 부탁할 거야. 프리랜서 많이 고용한 게 다들 도면에 까칠한 편이라 그런 거니까. 너도 각오해야 할걸.’
침묵이 싫어 괜히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떠들어 댔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우는 여전히 무심한 태도로 대꾸해 왔다.
‘돈 받고 일하는 거니까 당연히 클라이언트 마음에 들어야지. 그런 건 미리 걱정하지 않아도 돼. 최대한 납기일 맞춰서 깔끔하게 처리할게.’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10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 문으로 신우가 먼저 내리자 엘리베이터 안에 남겨진 한은 쓴웃음을 지은 채 신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모든 게 기억난 건 아니지만 일단 자신이 기억해 낸 연신우는 과거나 지금이나 별 다를 바 없는 듯했다.
그게 기쁘고 반가우면서도 이상하게 불쾌했다. 그리고 여전히 그 불쾌함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더 기분이 나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라는 물음이 입가에서 계속해서 맴돌았다.
불과 30분 전의 기억을 떠올린 한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정우와 대화 중인 신우를 쳐다봤다. 싸늘한 시선으로 그쪽을 한 번 바라본 뒤 한은 전화기를 들고 내선 3번을 눌렀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 정우가 서둘러 전화를 받는다.
- 네.
“미팅 끝나면 연신우 씨한테 제 사무실에 들르라고 전해 주세요.”
- 어…… 신우 씨한테요?
“네. 몇 가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요.”
- 알겠습니다.
인재의 강력 추천으로 입사한 젊은 인테리어 디자이너와의 통화를 끝낸 뒤 한은 전화기를 놓으며 다시 서류를 바라봤다. 그 와중에도 자꾸 시선이 저쪽으로 넘어갔다.
자존심 상하고 짜증 나지만 본능이 움직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 팀장님이 잠깐 들러 달라시는데요.”
짧은 통화를 마친 정우의 전언에 신우의 얼굴이 조금 긴장으로 굳었다.
“정한 팀장님이요?”
“네. 그러고 보니 아까 같이 들어오시던데, 아는 사이신가 봐요?”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아하~ 그렇구나.”
여러 사람이 모여서 만든 회사이긴 하지만 아시의 실질적인 대표는 어디까지나 한이었다. 한의 조부님 자본이 들어갔다는 것보다는 그를 대하는 직원들의 태도에서 그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한을 향한 직원들의 시선 속에는 친근함과 동시에 어려운 상사를 대할 때의 꺼림칙한 감정 역시 담겨 있었다. 평생 눈칫밥을 먹고 산 덕인지 주변 분위기나 사람들의 시선에 민감해 그 정도는 빠르게 눈치챌 수 있었다.
“자, 오늘은 우선 여기까지 하죠. 팀장님이 부르시니 들어가 보세요.”
도면은 이메일로 보내겠다는 정우의 안내를 들으며 신우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을 본 이후부터 정신이 나간 느낌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그가 의식돼 정우와 미팅을 하는 도중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부산스럽고 들뜨고 어지럽고 굉장히 산만했다.
오랜만에 그를 떠올리자마자 현실에서 다시 마주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반가우면서도 어쩐지 어색했다.
그는 여전했다. 나이가 들어 성숙한 인상이 풍기긴 했지만 다른 부분들은 전과 같았다. 무엇보다 목소리가 여전했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는 그 다정한 목소리와 상냥한 말투는 그대로였다.
그래서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마치 13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자신을 기억해 주는 게 기뻤다. 자신이야 그를 기억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 반대는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해 주어서 기뻤다.
신우가 한 시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머뭇거리는 모습에 정우가 이상한 듯 다시 신우를 불렀다.
“신우 씨?”
그의 부름에 신우가 서둘러 고개를 든다.
“네? 아…… 네. 그만, 들어가 볼게요. 그럼 이건 언제까지 끝내면 되나요?”
“빠를수록 좋죠.”
“그럼 기초 작업 끝나는 대로 메일 보낼게요. 단계마다 꼼꼼하게 체크하는 게 시간이 절약될 테니까요.”
“그래 주시면 저야 고맙죠.”
정우의 빠른 동의에 용건을 마친 신우는 서둘러 가방을 정리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다음에 또 뵐게요.”
“네. 또 봬요. 정 팀장님 사무실은 저기 왼쪽 끝이에요.”
그렇게 정우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신우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직은 다소 어수선한 느낌의 사무실을 가로질러 ‘정한 팀장’이라는 팻말이 붙은 사무실 앞에 멈춰 안을 바라보자 유리 벽 너머로 창가 쪽에 선 한의 뒷모습이 보였다.
입고 있던 재킷은 벗어 놓은 채 가느다란 회색 줄무늬가 들어간 흰색 셔츠와 검은색의 면바지를 걸친 한의 뒷모습은 모델처럼 근사해 보였다. 큰 키도 키지만 농구 선수 출신다운 근육질의 몸이 고급스러운 옷감 아래에서 그 선을 선명하게 드러내어 서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한 장의 화보 같았다.
서글서글하니 보는 사람을 미소 짓게 하는 얼굴도 얼굴이지만 워낙에 체격이 좋아 어디서나 눈에 띄는 녀석이었다.
학창 시절에도 그랬었다. 어딜 가든, 어디에 섞여 있든 한만은 바로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잠시 그리운 듯 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신우는 이내 긴장을 풀려 길게 심호흡을 한 뒤 투명한 유리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이쪽으로 등을 지고 서 있던 한이 돌아서며 들어오라는 듯 손짓했다.
그 제스처에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한이 종이컵 두 개를 든 채 신우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곤 왼손에 들고 있던 컵을 내밀었다.
“미팅 다 끝났어?”
“응.”
얼결에 컵을 받아 들며 답하자 한이 사무실 안에 놓인 테이블 앞으로 다가서며 가볍게 대화를 이끌었다.
“밀크커피 괜찮지?”
자신의 커피 기호에 대한 한의 질문에 잠시 잔을 내려다본 신우는 문득 떠오른 기억에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도 한은 종종 자신에게 커피를 사 주었다. 아니, 만날 때마다 그랬다. 자신의 손이 너무 차다며, 손을 녹이라고 따뜻하게 데운 캔 커피나 자판기 커피를 뽑아 줬다.
그러고 보니 새삼 그가 자신을 꽤 열심히 돌봐 줬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엄마가 아이를 돌보듯 세세하게 챙겨 주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떠올려 보니 엄마가 떠난 뒤 그는 유일하게 자신을 돌봐 주었던 사람이었다.
아득하면서도 애틋한 그 기억에 잠시 커피를 내려다보는 사이 한이 먼저 작은 소파에 앉으며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앉아.”
“응.”
그의 손짓을 따라 바로 맞은편의 소파에 앉자 커피를 한 모금 넘긴 한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졸업 후 처음이지?”
“응.”
“사실대로 말할게. 나, 너 잘 기억 안 나. 이름 보고 혹시나 하다 얼굴 보고 겨우 기억해 냈어.”
“그럴 수도 있지. 벌써 10년이 넘었으니.”
한의 솔직한 고백에 신우는 조금 실망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자신 역시 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한과 정현 외에는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그다지 친한 친구가 없기도 했지만 시간이 너무 흘러 얼굴을 보거나 이름을 들어도 누구인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니, 한이 자신을 기억 못 하는 것도 당연하다. 졸업 이후엔 간간이 정현을 통해 소식만 들었고 자신도 굳이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으니 섭섭해할 자격도 없다.
“언제 돌아온 거야? 이탈리아에 있다는 얘긴 들었는데.”
최근 정현과도 서로 바쁜 탓에 연락을 하지 않아 한이 귀국했다는 소식도 듣지 못했다. 자신이 상관할 부분이 아니라 여기면서도 조심스레 묻자 한이 종이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 두며 대꾸했다.
“얼마 전에. 넌 이쪽 일 오래 한 거야?”
“응. 졸업하고 곧장 일 시작했으니까.”
“내가 한국에 있었으면 더 빨리 만날 수 있었겠네.”
“좁다면 좁은 바닥이니까.”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 사이에 오갈 법한 그렇고 그런 대화가 흐른 뒤 곧 침묵이 흘렀다. 일 때문에 다시 만난 상황이라 더는 할 이야기가 없었다.
사무실에서 만나 다른 잡담을 하는 건 좀 불편하고, 그렇다고 최근 어떻게 지냈냐, 회사는 어떻게 된 거냐 같은 대화를 나누기엔 자신의 사교성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어쩐지 숨이 막히는 듯한 분위기에 말없이 입술을 잘근거리며 손에 든 종이컵만 내려다보고 있는데 한의 시선이 느껴졌다. 마치 뭔가를 탐색하는 듯한 그의 눈초리에 더 불편해져 애꿎은 잔을 흔들자 한이 문득 말을 건넨다.
“확실히 여전한 것 같아. 거의 안 변했어.”
“나보다는 네가 더 그대로인 것 같은데?”
“뭐, 성격은 그대로지. 정현이가 질색하더라고.”
드디어 나온 두 사람의 공통 화제에 신우는 겨우 안도하며 대화를 이어 갔다.
“정현이도 요즘 바쁜 것 같더라. 통 연락 못 했어.”
“그 녀석이야 여기저기 간섭하고 다니느라 늘 바쁘잖아. 오지랖만 넓어서.”
“말은 거칠게 해도 착하고 다정하잖아. 그러고 보니 네 덕에 친해진 거였는데 정현이랑 더 많이 붙어 다닌 것 같아. 지금까지도 친구로 지내고 있고.”
인연이라는 게 참 우습다며 신우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순간 한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쾌감이 한층 거세졌다. 그러고 보니 정현도 그 비슷한 말을 했었다. 자신 때문에 신우와 친해진 거였다고. 그런데 우습게도 자신과 신우는 끊기고 정현과 신우는 아직까지도 관계를 이어 가고 있다고.
그게, 굉장히 마음에 안 들었다.
이런 기분을 과거에도 느꼈던 것 같다. 껄끄럽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끈적거리는 뭔가가 몸에 붙어 떼어 내고 싶은데 그게 손에 잡히질 않아 짜증 나고 거슬리는, 딱 그런 기분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무너지려는 표정을 간신히 유지한 채 일부러 시선을 내려 손목시계로 시각을 확인했다.
“나 1시부터 점심시간인데 아래에서 기다릴래? 같이 점심 먹자. 너 보니까 밥 먹여 주고 싶어.”
“어…… 바쁘지 않아?”
“아무리 바빠도 난 사무실에 앉아서 라면이나 빵 조각으로 점심 때우는 짓은 안 해. 나름 식도락가거든.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못 먹어 가면서 일하면 억울하잖아? 입과 눈이 즐겁지 않으면 작업도 안 풀리고.”
한다운 그 말에 신우는 잠시 어떻게 할까 망설였다. 오늘 밤에도 출근해야 하니 곧장 집으로 돌아가 조금이라도 더 자는 쪽이 좋겠지만,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럼, 1층에서 기다릴게.”
“그래.”
이미 미팅은 끝난 후라 신우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역시 신우를 따라 일어서며 인사를 건넸다.
“그럼 좀 이따 보자.”
“응. 커피 잘 마실게.”
종이컵을 든 채 신우가 문으로 향하자 한이 그보다 먼저 문 쪽으로 다가가 문을 열어 준다.
“1층 로비에서 봐.”
문을 잡고 선 한이 확인하듯 건넨 말에 신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응.”
답하자마자 문을 나서 천천히 사무실을 가로지르는 신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한은 신우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순간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앉으며 심각한 얼굴로 턱을 괬다.
일단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하니, 이런저런 것들이 떠오르는 것 같기는 한데…… 여전히 아리송했다. 기억은 애매한데 감정은 선명하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 감정이 그다지 좋은 느낌의 것들은 아니었다. 밝고 선명하고 예쁜 게 아니라 어둡고 불쾌하고 칙칙한 정체불명의 감정들이었다.
뱃속이 끓어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짜증이 나는 것 같기도 한 그 기분에 초조해하며 입술을 살짝 깨무는데 한의 사무실 문이 열렸다.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에 한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문을 돌아봤다.
“뭐야? 노크도 할 줄 몰라?”
그다지 기분이 좋은 상태가 아니라 한이 조금 목소리를 높이자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선 인재가 방금 신우가 앉았던 의자에 가 앉는다.
“너 하는 꼴 지켜보다 보니 노크는 까먹었다. 대체 무슨 짓이야? 그 정도로 설명을 했으면 알아먹어야지.”
“뭘?”
“조용히 살자고 했잖아. 그런데 만나자마자 작업을 거냐?”
“무슨 소리야? 작업은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웃기시네. 내가 널 하루 이틀 알았냐? 너, 작업할 때 시작이 늘 그거잖아. 커피 타 주기.”
뜻밖의 지적에 한은 한 방 먹은 듯 멍한 얼굴을 했다.
“……내가?”
“몰랐냐?”
“……전혀.”
“진짜 몰랐다고?”
“처음 들어.”
“그야 다들 말은 안 했겠지만 너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로 커피 안 타 주잖아. 커피 타 주면 네가 작업하겠다는 신호야. 네 주변 사람들 다 알아.”
처음 알게 된 자신의 습성에, 한은 차분히 자신의 과거를 돌아봤다.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다. 항상 그랬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은 커피를 쥐여 줬던 것 같다.
타 주거나, 사 주거나. 늘 그랬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네 말대로라고 한이 순순히 인정하자 인재가 눈을 껌뻑인다.
“진짜 전혀 의식 못 했던 거야?”
“응.”
“첫사랑이 카페인 중독자였냐?”
“……세정이가 커피 좋아했나?”
중고등학교 때는 운동하느라 바빴고, 농구를 관둔 후에는 공부를 따라가느라 바빠 대학 때 처음으로 사귀었던 동기 여학생의 이름을 거론하자 인재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다.
“커피는 웬만하면 다 좋아하지 않아?”
“그래?”
“하루에 서너 잔은 평균적으로 마시잖아. 아, 아니다. 세정이 커피 안 좋아할걸. 카페인 안 맞는다고 했던 것 같아.”
시험 기간에도 커피는커녕 홍차도 마시지 않는 게 신기해서 기억한다는 인재의 말에 한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한답지 않은 심각한 그 표정에 인재는 이상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뭐가 그렇게 심각해?”
“아니, 그냥 뭔가 떠올라서.”
“뭐가?”
“커피를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이 예쁜 사람이 좋다는 거.”
볼품없는 종이컵에 든 싸구려 커피를 내려다보는 긴 속눈썹 아래의 눈빛도, 종이컵을 감싸 쥔 하얀 손도, 커피와 어울리는 그 우울해 보이는 얼굴도 모두 예뻤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늘 차갑게 식어 있던 그 손이 커피 잔을 든 채 서서히 온기를 되찾는 걸 보는 게 좋았다.
그냥, 그 녀석을 따뜻하게 해 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 그랬었다.
아득히 떠오른 기억에 한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자 인재가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별다방 컵도 아니라 그 멋대가리 없는 종이컵을 든 모습이?”
“……예뻤어, 그게. 그리고 손이 너무 차서, 따뜻하게 해 주고 싶었던 것 같아.”
겨우 싸구려 커피 한 잔에 감격하고, 이름을 부르면 애달픈 얼굴을 하던 그가 사랑스러웠던 것 같다. 이제야 알았지만 그런 감각이었던 것 같다.
“설명이 되게 구체적이다?”
“……그 녀석이 그랬던 것 같아.”
“그 녀석이 누군데?”
“연신우.”
“사귄 거 아니라며?”
사귄 건 아니다.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사귀고 싶었을 수는 있다. 방식을 몰랐을 뿐.
“글쎄…….”
“무슨 말이 그래? 사귄 거면 사귄 거고 아닌 거면 아닌 거지?”
“나도 잘 몰라. 사귄 건 아닌데…… 아니, 분명히 그때는 아니었는데…… 내 입장에서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앞뒤가 맞지 않은 한의 말에 인재가 어이없다는 듯 받아치자 한이 재빨리 말을 돌렸다.
“헛소리. 자, 일하자.”
“일하는 건 좋다만, 제발 문제는 일으키지 마라. 네 치정 사건은 이제 지긋지긋해.”
“걱정 말라니까. 문제 일으키면 깨끗이 사라져 줄 테니까.”
자신이 벌인 일은 몸소 책임지겠다는 한의 태도는 칭찬할 만했지만, 평소 그의 무책임하고 변덕스러운 태도를 고려해 볼 때 이건 좀 핀트가 어긋났다.
“누가 사라지래?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거지.”
“노력해 볼 테니 이제 그만 좀 나가 주지? 난 1시까지 도면 확인을 끝내고 점심을 먹을 거거든. 우아하게.”
곧 죽어도 식사는 제때 제대로, 잠잘 시간은 없어도 샤워는 해야 하고, 옷은 반드시 보기 좋게 골라 입어야 하고, 지저분하고 흐트러진 건 질색하는 한의 성격을 알기에 인재는 이만 물러서기로 했다.
하여간 일만 제대로 하면 된다.
“알았다. 그럼 수고해라.”
“너도 수고.”
자리에서 일어서 손만 휘휘 흔들어 보이며 사무실을 나서는 인재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한은 빠르게 하던 일을 진행해 나갔다. 조금이라도 점심시간을 앞당기기 위해, 한은 온 신경을 도면에 집중했다.
건물 로비 1층에 놓인 의자에 앉은 채 태블릿으로 도면을 확인하던 신우는 문득 태블릿 상단의 시계를 바라봤다.
12시 40분. 방금 시각을 확인했을 때보다 겨우 2분 지나 있었다.
2분마다 시간을 확인하고 있다는 생각에 신우는 쓰게 웃었다.
이상하게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기분이었다. 보통 때는 뭔가를 할 틈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흘러 매일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바빴는데, 유독 오늘은 시간이 느리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랬던 것 같다. 가끔이긴 했지만 한과의 약속이 있는 날이면 늘 초조한 듯 시간을 자주 확인했었다. 왜 이렇게 시간이 가지 않을까, 하면서.
그때는 한을 만나는 게 기쁘고 즐거워 그랬다지만 지금도 이럴 줄은 몰랐다. 첫사랑을 만나는 듯 초조하고 긴장되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발이 땅에서 붕 뜬 듯한 기분도 좋았다.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한 신우는 작게 중얼거렸다.
“……15분…….”
버스를 타고 이제 네 정거장, 세 정거장, 하고 남은 정차역을 세듯 시간을 확인하는 사이 로비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다섯 번째 열리는 엘리베이터였다. 아직 한이 내려올 시간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그쪽을 바라보니 막 엘리베이터에서 나선 한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신우는 뜻밖의 상황에 당황해하면서도 서둘러 가방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찍 나왔네?”
“배고파서. 나가자. 가까운 데로 갈 거니까 걸어서 움직이자.”
휴대폰과 지갑만 챙겨 든 채 다가오는 한을 본 신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오전에는 너무 놀라 잘 의식하지 못했지만 막상 그의 옆에 서니 그와의 키 차이가 새삼 크게 느껴졌다. 자신이 그다지 작지 않은 편임에도 그의 옆에 서니 머리 하나가 차이 났다.
“너, 키 더 큰 거 같다?”
“응? 아, 그렇지 않아도 걱정이야. 190에서 멈출 줄 알았는데 스물두 살까지 크더라고.”
“지금 몇인데?”
“194 정도?”
농구 선수로서라면 큰 게 좋지만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너무 큰 것도 곤란하다. 확실히 한은 여기저기에서 많이 부딪칠 상이긴 했다.
“뭐든 표준 규격이 좋아. 너무 커도 안 좋더라고. 옷 사는 것도 힘들고, 저번에는 버스 타다 머리 박았다니까. 버스 타고 오는 내내 허리 숙이고 있느라 죽을 뻔했어.”
그 얘기를 들으니 문득 어딜 가든 한은 한 번은 반드시 허리를 숙여야 했던 게 떠올랐다. 지금은 많이 좋아진 편이지만 10년 전만 해도 가게 입구의 높이가 다 낮은 편이어서 지나치게 큰 사람들은 고생이 많았다.
그러고 보니 운동화나 옷을 사기 힘들다고 한이 투덜거렸던 것도 기억났다. 마음에 들어 입어 보면 대부분 미묘하게 짧다고 했던 것 같다.
“키 큰 것도 고생이네. 난 크면 무조건 좋을 줄 알았는데.”
“뭐, 그래도 작은 것보다는 낫긴 해. 일단 멀리 보이니까.”
건물 출입구에 도착한 한이 문을 잡고 선 사이 먼저 문을 나선 신우는 슬쩍 뒤를 따라오는 한을 돌아봤다. 그러곤 궁금한 듯 물었다.
“……농구 안 아까워?”
타고난 재능뿐 아니라 체력 조건과 환경, 그리고 성격과 멘탈까지 완벽했던 그가 농구를 관둔 게 아깝다는 듯 신우가 묻자 한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다.
“뭐야, 너? 그걸 지금 물어봐?”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뭐, 아까울 거야 없지. 벌써 13년? 12년 전인가? 농구야 가끔 몸풀기 정도로만 하면 돼. 아, 넌 모르겠구나. 내가 농구 말고 하다가 때려치운 게 얼마나 많은지.”
때려치운 운동뿐 아니라 때려치운 연애도 엄청나다고, 신우 역시 정현에게 전해 듣기는 했다. 아니, 그 정도의 연애는 누구나 하지만 한은 유난히 요란하게 사귀고 요란하게 헤어져 그 파장이 컸다. 자신에게까지 얘기가 들려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정현이한테 대강 얘기는 들었어.”
“피아노도 했었고 바이올린도 했었고, 아, 나 야구도 했었다. 초등학교 때 잠깐이지만, 그때 투수였어. 그리고 아이스하키도 잠깐 했었고, 태권도 선수도 했었고, 검도도 했었고. 중학교 때는 태권도 선수랑 검도 선수로 전국 체전도 나갔었어. 그런데 다 오래가지는 못했지.”
그것 역시 전해 들었다. 뭐든 시작만 하면 무섭게 레벨이 올라가 가르치던 강사며 사범들이 넌 타고났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고. 그럼에도 한은 뭐든 2년을 넘기지 못했다고 했다. 그나마 오래 한 게 태권도와 피아노, 농구였다고 들었다.
“시작할 때는 다 재미있는데 이상하게 어느 수준에 오르면 재미가 없어져. 도전 정신이 안 생긴다고나 할까. 아, 더 열심히 해야지. 더 잘해야지. 하는 생각이 안 드니까 순식간에 식어 버리더라고.”
큰길을 따라 걷던 한이 ‘이쪽이야.’라며 왼쪽 코너를 가리키자 그의 안내대로 걸음을 옮긴 신우가 무난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건축은 재미있어?”
“아직은 재밌어.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웨이트 하고 훈련만 하면 되는 게 아니니까. 이 나라 저 나라 여행도 많이 다니고 배울 것도 많고. 자재며 디자인이며 계속 새로운 게 나오니까 여기저기 쑤셔 보는 재미도 있어. 결정적으로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게 좋아. 집은 사람이 사는 곳이니까 사는 사람들에게서 영감을 받아야 하거든. 그 안에 살 사람들을 보고 관계성이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게 꽤 재밌더라고.”
가족이 사는 집과 노부부가 사는 집, 그리고 싱글이 사는 집은 구조나 이미지가 전혀 다르니까, 라는 한의 말에 신우는 그럴듯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건물 몇 개 봤어. 잡지에 실린 거.”
“아, 그래? 어떤 게 제일 좋았어? 에스타테(Estate)? 론도(Rondo)?”
신이 나 달려드는 한의 태도에 신우는 조금 당황해 눈을 껌뻑였다. 한의 작품이니 눈여겨보긴 했지만 그렇다고 건물 이름까지 외울 정도로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전체적으로 선은 시원하면서도 색이나 디테일들이 따뜻한 느낌이 드는 건물이라 ‘아, 한이답다.’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어…… 이름은 잘 기억 안 나. 그냥 스치듯 본 거라.”
그 말 뒤에 작게 미안, 이라고 덧붙이자 한이 어깨를 으쓱한다.
“미안할 게 뭐 있어? 관심 없으면 원래 그런 거지. 그럼, 나중에 내 건물 스크랩 보여 줄까?”
“응.”
“도면도 보여 줄게. 원래는 안 보여 주는 건데 넌 괜찮아.”
본다고 뭘 알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보여 준다는데 됐다고 하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목적지에 도착한 듯 한이 걸음을 멈췄다.
“여기야.”
골목 사이에 있는 작은 백반 가게 문을 연 한이 어서 들어가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그 신호에 천천히 안으로 들어선 신우는 10평 남짓한 작은 가게 안을 돌아봤다. 낡은 간판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오래된 노포점인 듯한 가게 안에는 다섯 개의 작은 테이블만이 간소하게 놓여 있었다.
“사무실 공사 들어가자마자 이 동네 다 돌면서 밥집 찾아 놨거든. 여기 맛있어. 너도 집에 가면 여기 순두부랑 된장 생각날걸?”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허름한 가게의 한구석에 자리하고 앉은 한은 손을 들어 주방 쪽을 오가는 아주머니를 불렀다.
“이모, 여기 순두부 백반 두 개요.”
한의 부름에 나이가 지긋한 여인이 화답한다.
“잘생긴 총각, 오늘은 일찍 왔네?”
“사람들 몰리기 전에 오려고요. 오늘은 중요한 손님과 왔으니 특별히 맛있게 해 주세요.”
“우리 집 밥이 맛없는 날 봤어?”
시원스레 답하는 아주머니에게 ‘그렇긴 하죠.’라고 맞장구친 한은 다시 시선을 돌려 그의 맞은편에 앉은 신우를 바라봤다.
“이거 스페셜이다?”
“응?”
“이 가게는 아직 우리 직원들한테도 안 가르쳐 줬거든. 끝내주는 집이라 아무나 안 데려와.”
네가 특별한 경우라고 강조하는 말에 신우는 수줍은 듯 미소 지었다. 특별하다는 말이 기분 좋기도 했고, 또 이런 점은 너무 어린 시절 그대로라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화려한 걸 좋아할 것 같은 외형과 달리 전형적인 한국식 백반에, 저렴하지만 맛있는 맛집들을 찾아다니던 녀석이었다. 먹는 것에 별 관심이 없던 자신으로서는 몇 시간이 걸릴지언정 꼭 맛집을 고집하는 한이 신기했었다. 그것도 양식이나 일식이 아니라 꼭 한식, 그것도 백반이나 부침개, 전골 같은 종류로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너 이탈리아에서는 어떻게 지냈어? 넌 국이나 찌개 없으면 밥 못 먹는다고 했잖아.”
국이나 찌개, 그리고 김치는 한의 기본 식단이었다. 밥을 안 먹으면 먹은 것 같지 않다고 투덜거리던 게 기억나 그렇게 묻자 한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 그래서 죽을 뻔했지. 한국 식당이 많다고는 해도 한국에서 먹는 거랑은 재료가 다르잖아. 그래서 나중에는 한 가지 비책을 발견했지.”
“비책?”
“고춧가루랑 고추장 통을 아예 들고 다녔어. 피자에다 고춧가루 뿌려 먹어 봤어? 그거 오묘하다?”
“……그건, 별로 먹고 싶지 않은데?”
“아냐, 괜찮아. 의외로. 그런데 오묘해.”
나중에 정통 화덕 피자 위에 고춧가루를 잔뜩 뿌려 주겠다는 한의 말에 신우는 그냥 웃고 말았다. 고춧가루 뿌린 피자라니, 과연 먹을 수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 한이 괜찮다니 또 호기심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잠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밑반찬들이 나왔다. 이모, 이모 하면서 아주머니와 수다를 떨던 한이 신우에게 어서 먹으라고 젓가락을 쥐여 주다 불시에 물어 왔다.
“맞다, 너. 애인은 있어?”
“응?”
“애인.”
갑작스러운 그 질문에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한 신우는 이내 젓가락을 바로 쥐며 무심히 대꾸했다.
“없어. 사는 게 바빠서. 그러는 넌 없어? 정현이한테 전해 들은 걸로는 꽤 연애사가 화려하던데.”
신우가 던진 가벼운 농담에 한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정현이가 그런 얘기까지 했어?”
“그냥 가끔 이런저런 얘기 하다가. 이탈리아 간 뒤로는 못 들었지만.”
유정현, 너 죽었어, 라는 말을 목구멍으로 꾹꾹 누르며 한은 싱긋 웃어 보였다.
“없어, 지금은.”
“하긴, 이탈리아에서 온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두 사람이 먼저 나온 밑반찬을 먹고 있는 사이 주문한 식사가 나왔다. 뚝배기 가득 담긴 순두부찌개와 새하얀 쌀밥이 테이블에 놓이자 갑자기 신우는 시장기를 느꼈다. 한의 말대로 굉장히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냄새도 냄새지만 순두부찌개의 색이 식욕을 자극했다.
“맛있겠다.”
“순두부는 여기가 최고라니까. 먹자.”
한이 먼저 숟가락을 들자 신우 역시 모처럼 바삐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맛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 가게에서 나오며 터진 한의 소감에 신우 역시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진짜 맛있더라. 네 말대로 집에서도 생각날 것 같아.”
“그렇지? 처음 여기서 밥 먹고 집에 가서도 계속 생각나서 다음 날 내가 이모한테 물어봤다니까. 찌개에 마약이라도 넣은 거 아니냐고.”
장난스러운 그 말에 신우가 기분 좋은 듯 웃는다. 한이라면 진짜 그러고도 남았을 것 같았다.
모처럼 기분 좋게, 살짝 과식을 해 버릴 정도로 즐거웠던 식사에 가벼운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오자 큰길가에 선 한이 먼저 말을 건네 왔다.
“지하철? 버스?”
뭘 타고 가냐는 한의 물음에 신우는 한의 사무실과 반대인 지하철역 쪽을 가리켰다.
“지하철.”
“시간 있으면 내가 데려다주고 싶은데 2시 반에 미팅이 있어서. 다음에는 꼭 바래다줄게.”
“괜찮아. 근무 시간이잖아. 오늘 고마웠어. 밥도 잘 먹었고.”
“오늘은 내가 샀으니 다음엔 네가 사는 거야. 너 나한테 빚진 거다?”
“알았어. 다음엔 내가 살게.”
이 정도의 가격대라면 한 번이 아니라 열 번이라도 살 수 있다고 신우가 웃자 잠시 신우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한이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오랜만에 보니까 좋다.”
“나도 좋았어. 반가웠고.”
“반갑기만?”
“응?”
“오랜만에 동창생 만나서 반가운 기분뿐이었냐고.”
한이 묻는 바를 선뜻 이해하지 못한 신우가 눈만 끔뻑이자, 한이 섭섭하다는 듯 쓰게 웃는다.
“난 그거랑은 좀 다른 의미로 좋았는데?”
바로 앞에서 신우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띤 한이 흘리는 말에 신우는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그 얼굴에 한이 싱긋 웃으며 말을 더한다.
“나도 오늘에야 알았는데 내가 너 많이 좋아했던 것 같아.”
갑작스러운 고백에 신우의 표정이 당황한 듯 굳어졌다.
한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그저 충동적으로 던진 농담 같은 말이었을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그 말의 의미가 무겁게 다가왔다.
얼굴에 열이 오르며 심장이 너무나 크게 울려 댔다. 그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걱정이 된 나머지 뒷걸음질 치며 떠오르는 바를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좋아해 줬다니…… 고마워.”
붉어진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숙인 신우가 자신 없이 답하자, 환하게 웃고 있던 한이 정색한다.
“……그것뿐?”
계속되는 추궁과 같은 질문에 위화감을 느낀 신우는 다시 한을 올려다봤다. 순간 한이 다시 표정을 풀고 웃는다.
“이제 가 봐야겠다. 다음에 나오면 그때는 네가 밥 사는 거다? 뭐, 내일 당장 나오고 싶어지겠지만. 일단 오늘은 여기서 그만.”
“그래. 오늘 고마웠어.”
“응. 먼저 내려가. 내가 가까우니 너 가는 거 보고 갈게.”
그러고 보니 고등학생 때도 그랬다. 항상 만났다 헤어질 때면 자신이 차를 타고 갈 때까지 기다려 주던 한이었기에 신우는 이번에도 먼저 돌아서기로 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누군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그래서 오늘도 먼저 돌아섰다.
“그럼, 먼저 갈게.”
마지막 인사를 마친 뒤 신우는 천천히 지하철역 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자신의 뒤에 따라붙는 한의 시선을 느끼긴 했지만 뒤돌아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돌아보는 순간 한의 뒷모습을 보게 될까 봐,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