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11월의 새벽은 어둡고 차가우며 몹시 위태로웠다.
서리가 온 세계를 하얗게 물들이며 칼날 같은 바람이 불어오는 새벽, 난간 앞에 선 신우는 멍하니 저 아래의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벽 5시, 도저히 잠들 수 없던 밤.
불면의 밤을 보낸 뒤 마치 뭔가에 떠밀리듯 일어나 집을 나섰다. 하지만 역시나 시간은 너무 일렀고, 자신에게는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도망치듯 학교로 왔고 폐교인 양 고요한 건물로 들어서자마자 옥상으로 향했다.
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냥 그런 날이었다, 그날은.
마치 발이 바닥에서 붕 뜬 듯 현실감이 없었다.
그 이른 시간에 학교에 간 것도, 평소라면 절대 갈 일 없는 옥상으로 향한 것도,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굳게 잠겨 있어야 할 옥상 문이 열려 있던 것도, 모든 것들이 우연을 가장한 필연 같았다.
보이지 않는 뭔가에 홀린 듯 옥상 밖으로 나와 서서히 검푸른 빛으로 변하기 시작하는 하늘을 바라보다 난간 아래로 시선을 내리자 새하얀 안개가 낀 텅 빈 교정이 보였다. 이미 초록빛은 사라진 지 오래인 땅은 차고 무겁고 딱딱해 보였다.
문득, 여기서 떨어지면 아플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죽을 생각인 건 아니다. 단 한 번도 죽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죽으면 편해질까 하는 의문을 가져 본 적은 있지만 맹세코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꽤 강렬한 자살에의 욕구를 느끼고 있었다.
순간, 자살이라는 거 생각보다 꽤 충동적인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삶이 너무 힘겨워 죽는 게 낫다 여긴 것도 아닌데 막상 옥상에 서니 죽음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 일었다.
진심으로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죽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자신이 죽고 그 애가 살았어야 하는 거 아닐까?
10년 전 오늘, 자신이 죽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랬다면, 다들 행복하지 않았을까…….
지난밤 밤이 새도록 자신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그 의문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멍하니 난간 밖의 세계를 내려다보는 사이 바로 뒤에서 탕 하는 소음이 들려왔다.
두꺼운 철제문이 닫히는 그 소음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트레이닝복을 걸친 커다란 녀석이 종이컵을 입에 문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곤 낭패라는 듯 작은 소리를 냈다.
“이런…….”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그가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곤 안도했다.
어차피 이 시간에 등교하는 이들은 농구부와 야구부들뿐이지만 그게 아니라도, 그가 누구인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같은 학년인 데다 유난히 키가 크고, 또 눈에 띄는 녀석이라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수위 아저씨나 선생님이라면 질책을 받겠지만 같은 학생이라면 상관없다는 생각에 그를 무시한 채 돌아섰다.
그리고 다시 난간 너머를 바라보는데 그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느긋하게, 버석거리며 울려 오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어느새 옆에 다가선 그가 입에 물고 있던 종이컵과 손에 든 종이컵 두 개를 난간 위에 올려 둔 채 말을 건네 왔다.
“너, 8반이지? 몇 번 봤는데…….”
“…….”
“나 정한.”
“…….”
“넌 연신우, 맞지?”
갑작스러운 호명에 몸이 움찔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 그를 힐끔거리자 그가 말을 돌린다.
“날씨 춥네.”
“…….”
“이 시간에 웬 등교야? 나야 농구부라 일찍 왔다지만 이 추위에 용케 일찍 나왔네?”
“…….”
공허하게 허공을 맴돌다 사라지는 그의 음성에 그 역시 곧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점점 분홍빛으로 변해 가는 하늘 아래 무거운 적막이 가라앉던 중 문득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시선을 돌리자 종이컵을 손에 든 그가 자신의 손에 컵을 쥐여 줬다.
“추워 보여서. 아, 입 안 댄 거야. 내가 물고 온 건 이거.”
그 말과 함께 녀석이 난간 위에 둔 종이컵을 들어 올리는 걸 본 뒤, 자신의 손을 바라보자 컵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손이 얼어붙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끝에서부터 서서히 퍼져 가는 그 온기에 가슴속에서 뭔가 울컥 차올랐다.
어떤 격렬한 감정을 느낀 건 아니다.
그냥, 따뜻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손 얼었겠다. 잘못하면 동상 걸릴 수도 있어.”
“…….”
“11월 초라도 새벽은 추워.”
“…….”
“신우야?”
또다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얼어붙어 있던 손이 가볍게 떨려 왔다.
이름이 불린 게 너무 오랜만이라, 가슴이 술렁였다.
어쩐지 입을 열면 눈물이 터질 것 같은 기분에 빨갛게 얼어붙은 손으로 컵만 꽉 쥐고 있자, 그가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줬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그리고 다정하게…….
그가 뭔가를 알 리도 없는데, 그냥 그렇게 해 주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아. 괜찮을 거야.”
담담한 그의 음성에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간신히 삼켰다. 지금 자신이 그렇게나 절박해 보이나 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 아무것도 묻지 않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위로하는 그의 손이 다정해서, 그리고 그가 건넨 커피가 따뜻해서 그대로 울 것 같았다.
슬퍼서는 아니다. 서러운 것도 아니다. 그저,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던 것 같다.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괜찮다는 그 한마디가 너무 그리웠던 건지도 모른다.
다 괜찮다고, 그러니 살아도 괜찮다고, 그가 허락해 준 것 같았다.
11월 8일 새벽. 그에게는 늘 있는, 흔하디흔한 새벽 훈련 중, 아주 잠깐 스쳐 간 순간일 테지만 자신에게 그날은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다.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었던 순간,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사람을 만난 그날을…….
* * *
11월 중순의 오후, 갑작스러운 한파로 기온은 뚝 떨어진 채였지만 체육관 안의 공기는 뜨거웠다.
서울 지역에서 치러지는 전국 체전의 19세 이하 농구부 준결승전, 마침 오늘 붙는 두 학교가 모두 서울 소재의 고교라 각 학교에서 차출된 관중들의 응원은 시합 전부터 격렬했다.
체육관 안이 울려 대는 클래퍼 소리와 육성 응원으로 요란한 가운데, 신우는 조용히 코트를 바라보았다.
농구로 유명한 체육계 명문고를 다니는 탓에 응원이 교외 활동 봉사 점수로 들어가 체육관에 끌려오긴 했지만 농구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사실, 농구의 룰도 잘 몰랐다. 애초에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코트 안을 뚫어져라 보는 건 그 안에 선 한 사람 때문이었다.
등 번호 9번. ‘정한’
강렬하게 뇌리에 남은 그 이름을 확인한 뒤 그에게 집중하고 있자 코트에서 점프볼 준비를 하던 그가 이쪽의 시선을 의식한 듯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웃는다.
아직 고등학교 2학년임에도 이미 190cm를 넘긴 커다란 덩치에, 그와 대비되는 아이처럼 해사한 얼굴을 한 그가 눈꼬리를 휘며 예쁘게 미소 짓는 모습에 조금 붉어진 얼굴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최근 몇 번인가 인사를 나누며 제법 친해졌는데도 아직도 어색하다.
해사하고 서글서글한 인상만큼이나 과하다 싶을 정도로 사교성이 좋은 녀석이라 방심한 순간 훅 하고 치고 들어오는데 낯을 가리는 자신에게는 너무 속도가 빨랐다.
당혹감과 함께 느껴지는 약간의 부끄러움과 부담감에 한의 시선을 피하려 고개를 돌린 순간 휘슬 소리와 함께 시합이 시작되었다.
시합은 이쪽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준결승전이라고는 하지만 올해는 워낙에 전력 차이가 심해 모두가 이 시합에서의 승리를 당연한 듯 여기며 마음 편히 응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예상한 대로 전반전은 더블 스코어로 마무리되었다. 충분히 가비지(Garbage) 게임을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문제가 생긴 건 후반이었다. 3쿼터가 시작된 후 계속되는 턴 오버(turn over)로 미스가 나더니 갑작스러운 상대 팀의 스틸과 빠른 속공으로 점점 점수 차가 줄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체육관 안의 학생들은 동요했다.
순식간에 패기를 잃고 웅성거리는 이들 사이에서 신우는 코트 안에 선 무기력한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등 번호 12번을 단 그에겐 의욕이 보이지 않았다. 전반전에 보이던 활발한 모습은 오간 데 없고, 지친 듯 발을 끌며 겨우 흐름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를 향하는 패스는 모조리 끊겨 버렸고, 그는 다른 선수들보다 한 박자씩 늦었다. 그 분위기를 상대도 알아챘는지 그 소년을 새깅(Sagging)하며 수비수들이 에이스인 한에게 몰려 들었다.
응원석 역시 12번이 흐름을 끊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곤 연신 그에게 비난을 퍼부어 댔다. 관중석에서 울리는 야유에 그의 움직임은 점점 둔해져 갔다.
24점을 리드하던 전반전과 달리 3쿼터가 끝날 때의 점수 차는 겨우 6점이었다.
그사이 전반전에만 28점을 넣은 한이 3쿼터에도 17점을 쏟아부었지만, 흐름을 되찾아 오는 건 요원해 보였다. 그를 제외한 다른 선수들이 너무 무기력했다.
그렇게 위태로운 분위기 속에서 다시 4쿼터가 시작되었다. 한은 계속해서 점수를 쏟아 냈지만 상대 역시 계속되는 속공으로 몰아치며 경기는 결국 1점 차 패배로 종료됐다.
긴 휘슬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사방에서 들려오는 탄식에 신우는 오늘 시합 최고 스타로 등극할 12번을 응시했다.
시합이 끝나자 축 처진 채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소년의 등은 처량해 보였다. 체육계 명문인 만큼 오늘 시합이 끝난 직후, 그에게 쏟아질 비난과 질타가 선연히 그려졌다.
너무나 뻔히 보이는 미래에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를 좇는데 이내 터덜터덜 걷는 소년의 뒤로 한이 다가서는 게 보였다. 가볍게 12번의 어깨를 두드리며 스쳐 가는 그의 모습에 웅성거리던 관중석이 그나마 고요해졌지만, 볼멘소리는 여전했다.
“아, 강민재 짜증 나.”
도망치듯 서둘러 코트 안을 빠져나가는 소년의 이름과 그에 붙은 말에 조금 움찔한 순간, 옆에 있던 다른 녀석의 목소리가 울려 왔다.
“한이는 왜 저런 자식을 감싸 주는 거야?”
다른 선수가 그랬더라면 같이 죽으라고 야유를 퍼부었겠지만, 다들 한에게만은 뭐라 하지 못한 채 목소리를 죽였다. 그 이유의 반은 한이 수시로 농구 잡지에 등장하는 미래의 슈퍼스타였기 때문이었고, 나머지 반은 그라는 존재에 대한 학생들의 선망과 믿음 때문이었다.
정한은 입학함과 동시에 춘계 연맹전에 주전으로 참가해 우승 트로피를 안고 돌아왔고 그 후로도 연맹전을 비롯해 대통령배 전국 대회에서까지 우승을 휩쓸었다. 그와 함께 유례없는 1학년생 MVP 타이틀로 고교 농구팀에서는 독보적인 실력을 가진 선수임을 입증해 냈다.
슈팅 능력은 물론이고 이미 완성된 체격에서 나오는 파워, 그리고 장신 선수에게서는 보기 힘든 스피드와 리딩 능력까지 갖추고 있어, 원래 포지션은 파워 포워드지만 청소년 대표팀에서는 간혹 포인트 가드로 뛸 정도로 재능의 폭이 넓었다. 그 탓에 그가 대학에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얼리 드래프트에 나오길 희망한다는 전문가들의 기고가 간혹 농구 전문지에 실릴 정도였다.
재능뿐 아니라 그의 성실함과 열정 역시 높이 사, 워크 에식(Work ethic)뿐 아니라 인성도 좋은 천재라는 면이 더욱 그의 가치를 높였다.
보통 고교 운동부 내에 빈번한 폭력 사건이나 괴롭힘 문제에도 전혀 관여되지 않았고 일탈도 없었으며 오히려 부내의 악습을 뿌리 뽑으려 힘쓰는 편이라,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을 종합하자면 착하고 성실하고 성격까지 좋은 털털한 천재였다. 그리고 신우 역시 그 평판에 동의했다.
첫인상대로 그는 따뜻하고 다정해, 같이 있으면 양지에 앉아 햇볕을 쬐는 듯 기분 좋은 에너지를 가진 친구였다.
아주 가끔을 제외한다면…….
조용히 앉은 채 한을 눈으로 좇던 신우는 막 코트를 나가 라커 룸으로 들어서려던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자신을 보며 손을 흔드는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환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얼핏 보기엔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시렸다. 그가 굉장히 화가 난 상태라는 걸, 신우만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평소엔 더없이 다정하지만 아주 가끔 그가 아버지처럼 차가운 눈빛을 보일 때가 있었다.
모든 게 다 귀찮고 짜증 난다는 듯 조금 서늘하고 무기력한 그 눈빛…….
그를 좋아하지만 그런 눈빛을 할 때의 그는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자신을 그런 눈빛으로 볼 것 같아, 아주 조금 무서웠다.
마지막 수업만을 남겨 둔 쉬는 시간, 교실 안은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삼삼오오 모여 조잘거리는 무리 사이의 화젯거리는 역시나 어제 있었던 농구 시합이었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농구에 대해 잘 아는 학생들은 감독의 경기 운영뿐 아니라 심판들의 행태에 대해 지적하며 떠들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끝은 모두 같았다.
‘강민재’
작년에 이어 올해까지 전승을 거둘 수 있었는데 그가 경기를 망쳤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대화들로 웅성거리는 교실 안에서 책상에 엎어진 채 눈을 감고 있던 신우는 문득 멀리서 들려온 소리에 눈을 떴다.
“한아, 왜?”
귓가를 파고드는 그 이름에 신우가 몸을 일으키자 뒷문 쪽에서 방금 들려온 그 목소리가 이번엔 자신을 불러 왔다.
“연신우 면회.”
짤막한 그 말에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자 복도 쪽에 서 있던 한이 손을 흔들었다. 교복이 아닌 운동복을 입은 채, 커다란 덩치로 문틀을 꽉 채우고 선 한의 부름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젠가부터 한은 교실로 찾아와 종종 자신을 불러냈다.
그의 이름을 알고 겨우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이 흘렀을 뿐이지만 하도 자주 찾아오다 보니 그의 방문에도 익숙해졌다.
처음에 무슨 의도인지 몰라 얼떨떨했지만, 그의 앞에 선 순간 그가 내뱉은 말로 그가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날 한은 웃으며 물었다.
‘괜찮아?’
라고.
마치 걱정했다는 듯 그렇게 물었다.
“웬일이야?”
아직 운동복 차림인 그를 보며 뒷문으로 다가간 신우가 묻자 한이 싱긋 웃는다.
“오늘 일찍 끝나는데 같이 집에 갈래?”
“……연습 없어?”
“없어. 오늘은 일찍 쉬래.”
“어제…….”
시합 안 됐다고 말하려는 순간 막 그의 뒤를 스치던 학생 하나가 한에게 말을 걸었다.
“야, 어제 아깝다. 이번에도 우승하면 2년 연속 우승컵 휩쓰는 건데.”
자신이 하려던 말을 그대로 건넨 그가 한의 어깨를 툭 치는 모습에 신우는 입을 다물었다. 아마, 한은 오늘 똑같은 말을 수십 번은 들었을 거다. 거기에 자신까지 더해 줄 필요는 없을 듯해 침묵하던 사이 한이 그를 돌아보며 쾌활하게 대꾸했다.
“괜찮아. 살다 보면 지는 날도 있는 거지.”
“그래도 아깝잖아.”
“우승이야 질리도록 해 봤는데, 뭐.”
손을 휘휘 내저으며 쿨하게, 한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을 건넸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쉽다며 말을 섞던 학생이 한의 등을 툭 두드리며 지나간 순간 다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아, 어제 시합 안 됐다. 그래도 MVP는 괜찮을 거야.”
이번엔 교실 앞을 지나가던 수학 선생이 그렇게 말을 붙이자 한이 싱긋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상관없어요, 그런 거. 재미있어서 하는 거지 이기려고 하는 건 아니에요.”
한은 상쾌하게 웃으며 더없이 완벽한 답을 내뱉고 있었지만 신우는 괜스레 몸을 움찔했다. 본능적으로 그가 조금 짜증이 난 상태라는 게 느껴졌다. 부드럽게 웃고 있었지만 눈매가 굳은 게 그 증거였다. 그리고 그의 눈빛이 너무 차가웠다. 하지만 수학 선생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답을 믿으며 대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해라. 한 번쯤 지는 것도 괜찮아. 아직 고2니까, 내년 준비하면 되지, 뭐.”
“전 지난 일은 신경 안 써요.”
“그래, 하여간 그간 고생했다. 민재도 잘 다독거려 주고.”
“네.”
수학 선생과의 짤막한 대화가 끝나자 그제야 한은 다시 신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할래? 같이 갈래?”
“……응.”
“그럼 데리러 올게. 난 가서 마지막 정리하고 옷만 갈아입으면 돼.”
“알았어.”
“교실로 올 테니까 기다려.”
“그래.”
그렇게 인사를 마친 한은 곧 복도를 지나 그의 교실로 향해 갔다. 느긋하게 걸어가는 그에게 몇몇 학생이 위로의 말을 던졌지만 한은 역시나 그들에게 그럴듯한 답변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조금의 불쾌한 기색도 내비치지 않은 채, 언제나처럼 웃음 띤 얼굴로.
한은 겉으로는 그가 말한 그대로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신우가 보기엔 아니었다.
한은 상당히 짜증이 난 채였다. 그리고 머릿속이 복잡해 보였다.
하지만 눈치채 봤자 그 부분은 자신이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에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그건 자신이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었다.
“아, 재미있게 놀았다.”
모처럼 정시에 하교한 한이 신우를 이끌고 가장 먼저 간 곳은 근처의 패스트푸드점이었다. 그 뒤엔 PC방으로 가려 했지만, 신우가 게임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는 곧 노래방으로 목적지를 바꿨다.
그렇게 해가 진 후에야 노래방을 나온 한은 속 시원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신나게 소리를 내질러서인지, 아니면 복잡했던 머릿속이 정리된 건지 기분이 나아진 듯했다.
한결 편해진 그의 얼굴에 다행이라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던 신우는 문득 울리는 문자음에 휴대폰을 확인하다 당황했다. 꽤 늦은 시각이었다.
어둡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정확히는 시간 감각을 잠시 잃었던 것 같다. 늘 그랬듯 한과 함께 있으면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 그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아쉽긴 했으나 슬슬 돌아가야 할 때라 신우가 먼저 그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은 차 안 오나 보네?”
매일 그가 등하교할 때마다 보이던 무시무시한 대형차를 떠올리며 묻자 한이 담담하게 답했다.
“친구랑 놀다 들어간다고 했어. 할아버지는 그런 건 걱정 안 하시니까. 너, 집 어디야? 바래다줄게.”
“아냐. 괜찮아. 가까워.”
“그래? 그럼, 빨리 들어가. 아, 이제 밤에는 진짜 춥다. 나 추위 안 타는 편인데.”
등하교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교복을 입고 하는 한은 진한 감청색의 교복 위로 커다란 스포츠 백과 농구화가 든 가방을 멘 채였다. 웬만한 성인 남자보다도 더 커다란 덩치로 교복 위에 스포츠 백을 걸친 모습은 다소 부자연스러울 만했지만 이상하게도 한과는 잘 어울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농구 선순가 봐.”라고 수군거릴 정도로.
“난 저기서 버스 타야 하는데 넌?”
버스 정류장을 가리키며 한이 던진 질문에 신우는 그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난 저쪽. 그냥 걸어서 가도 돼. 바로 근처야.”
“그럼, 먼저 가. 난 버스 기다려야 하니까.”
“응. 어제 시합은 잊고 오늘은 푹 쉬어.”
오늘 종일 그가 들었을 인사를, 신우 역시 그대로 반복했지만 이번에는 한의 답이 달랐다.
“……글쎄……. 잊을 수 있을까, 그걸?”
예상치 못한 답에 신우는 당황한 듯 잠시 말을 멈췄다. 하지만 어쩐지 그게 한의 진심일 것 같다는 생각에 이내 차분하게 그를 위로했다.
“겨우 한 번이니까 마음에 두지 마.”
2년간 있었던 10개의 대회 중 겨우 우승컵 하나를 못 딴 거니 개의치 말라고 덧붙이자 한이 싱긋 미소 지었다.
“벌써 한 번이지.”
같은 ‘한 번’이지만, 앞에 붙은 ‘겨우’와 ‘벌써’가 주는 어감의 차이는 컸다. 대강 예상은 했지만 한의 승부욕은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그것과는 수준이 달랐다.
물론, 운동선수가 승부욕이 강한 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한은 개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승부욕이 강한 타입이었다.
남이 지는 건 ‘그럴 수도 있어’라고 곧잘 위로하지만 본인이 지는 건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아니, 지는 일 따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간 어렴풋하게 느껴지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챈 신우가 입을 다문 채 시선을 내리자 한이 살짝 허리를 숙여 신우와 눈을 맞춘다. 그러곤 눈웃음을 흘린다.
“넌 가끔 날 무섭다는 듯이 보더라?”
“…….”
“나 무서운 사람 아닌데.”
한은 언제나처럼 인상 좋은 얼굴로 아주 착하게 웃고 있었다. 아이처럼 천진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그의 미소는 보는 사람을 더없이 기분 좋게 만들어 주지만 신우는 사실 이런 게 무서웠다.
한이 진심으로 즐거워서 웃는 건지 아니면 그의 속내를 감추려 웃음으로 무마하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네가 왜 웃는 건지, 잘 이해가 안 갈 때가 있어.”
“언제?”
그 물음에 차마 ‘지금’이라는 답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자 한이 묘한 미소를 짓는다.
“……예리하네?”
“…….”
“뭐, 그래서 좋아. 넌 선을 잘 지키는 것 같으니까. 먼저 가. 너 가는 거 보고 갈게.”
“조심해서 가.”
“그래. 너도. 전화할게.”
마지막 인사 후 신우는 고개를 끄덕인 뒤 재빨리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조금 전과 달리 이상하게 가방이 무겁게 느껴졌다.
어쩐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것 같아, 조금 의기소침한 기분이었다.
완전히 해가 저문 밤, 학교 근방의 주택가로 들어서자 싸늘한 바람이 휘몰아쳐 왔다.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에 몸을 움츠린 신우는 빠른 걸음으로 골목 안쪽의 빌라 건물로 향했다. 하지만 집에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이 느려졌다.
지독히도 추웠지만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느릿느릿 걸으며 시간을 끌어 보았으나 워낙에 가까운 거리였다.
어느새 도착한 건물 앞에서 2층의 오른쪽 창을 올려다봤다.
불빛이 보이지 않은 걸 보니 아버지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그 사실에 안도하며 천천히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곤 묵직한 다리를 질질 끌며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느릿하게 하나하나 계단을 밟아 막 2층에 다다른 찰나, 문 앞에 서 있는 어두운 형체가 길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오니?”
귀에 익은 여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곱게 차려입은 중년의 여성이 보였다.
고모였다.
“오셨어요?”
“왜 이렇게 늦게 와?”
“……웬일이세요?”
“웬일은. 남자만 둘 사니 들여다보러 왔지. 춥다. 빨리 문 열어.”
춥다는 듯 몸을 움츠린 그녀의 말에 신우는 느릿하게 문 앞으로 다가가 키패드에 비밀번호를 눌렀다.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리자마자 뭔가를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고모가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어유, 집 안은 더 춥네. 보일러 좀 틀어라.”
“네.”
짐을 들고 주방으로 향하는 그녀를 보며 서둘러 보일러를 켜고 자신의 방에 가방을 내려놓고 나오자 그새 텅 빈 냉장고 안을 가득 채운 그녀가 여전히 외투를 걸친 채 신우에게 손짓했다.
“너, 이리 와 앉아 봐.”
뭔가 할 말이 잔뜩 쌓인 듯 재촉하는 그녀의 부름대로 좁은 거실로 가 그녀의 앞에 앉자 그녀가 외투를 벗어 내려놓았다.
그리고 곧 언제나처럼 그녀의 난도질이 시작되었다.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가혹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폭언에 난사 당한 신우는 그녀가 돌아간 뒤에도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 시간 내내 매서운 매질을 당한 기분이었다. 이젠 상처받는 것도 이골이 나 더는 아프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번 건 꽤 아팠다. 그리고 지독히도 피곤했다.
이럴 때면 누군가 옆에 있어 줬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상냥하게 이름을 불러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위로해 주었으면 좋겠다.
괜찮다고, 다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 줬으면 좋겠다.
절박하기까지 한 그 바람에 신우는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찾아 들었다. 그러고는 전화번호부를 열어 그 안에 등록된 이름을 찾았다.
그간 메시지만 몇 번 오갔을 뿐 단 한 번도 통화한 적은 없었는데 지금은 한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충동적으로 그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자 신호음이 울려 왔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째.
- 응.
네 번째 신호음이 울리기 직전 수화부에서 들려오는 경쾌한 목소리에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뜨거운 덩어리가 목에 걸린 듯 울렁이는 감정에 말을 잇지 못하자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신우야?
부드럽고 다정한 울림이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의 그 어감이 너무 좋았다.
다정하고 상냥하다.
- 무슨 일 있어?
“……아무것도 아냐. 그냥…… 집에 잘 들어갔나 해서.”
- ……너 집이지?
“응.”
- 기다려. 내가 지금 갈 테니까…… 아니, 집은 모르니까. 학교 아래쪽에 공원 있지? 거기로 나와. 지금 나가면 10분 정도 걸릴 거야.
“아냐. 괜찮아. 그냥 잘 들어갔나 전화해 본 거야.”
- 갈게.
인사와 함께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갑작스러운 통보에 당황한 신우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 횡설수설하며 주변을 돌아봤다. 그러다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나섰다.
밤이라 날씨가 꽤 추웠지만 겉옷을 걸칠 생각도 못 한 채였다.
그저 마음이 급했다. 빨리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냥 한이 보고 싶었다.
겨우 밤 10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도 거리는 어두웠다. 원래 인적이 드문 곳인 데다 학교 앞에 위치한 가게들 모두 문을 닫은 후라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을 숨이 찰 정도로 달려 목적지에 도착한 신우는 텅 빈 공원을 보곤 허탈한 듯 숨을 내뱉었다.
한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했다. 그가 먼저 와 기다리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에 길게 숨을 내뱉는 순간 바로 뒤에서 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럴 줄 알았다.”
작게 혀를 차는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편안한 트레이닝복 바지에 후드 저지를 걸친 한이 후드를 뒤집어쓴 채 왼손에 종이컵을 들고 서 있었다.
“받아. 손 얼겠다.”
처음 만난 그날처럼, 왼손에 들고 있던 컵을 건네준 한이 한숨을 쉬었다.
“캔 커피가 더 오래 가는데 벌써 가게가 다 문을 닫았네?”
다정한 음성을 들으며 따뜻한 잔을 받아 들자 비로소 지금 얼마나 추운지 깨닫게 되었다.
진짜 겨울이다.
“빨리 왔네.”
“할아버지한테 차 내 달래서 달려왔어. 기사 아저씨 저 밖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한이 공원의 반대쪽을 가리키며 말하자 신우는 아차 싶은 얼굴로 신음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미안.”
“밤에 운동하러 자주 다니니까 그런 걸로 걱정하지 마. 그보다, 너 괜찮아?”
무작정, 한은 그렇게 물었다. 처음으로 교실을 찾아왔던 그날처럼 무슨 일이 있었냐고는 묻지 않고 그냥 ‘괜찮아?’라고만 물었다.
별거 아닌 듯 그냥 툭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 말의 어감이 너무나 상냥했다.
이상한 녀석이었다. 그저 한마디, 아무렇지 않게 툭툭 내던지는 말들이 사람의 폐부를 찔러 온다. 어쩌면 이렇게나 예리할까 싶을 정도로, 한은 타인의 약한 면을 파고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런 게 무서우면서도 좋았다. 자신의 내부를 훤히 꿰뚫어 보는 듯한 그가 좋았다. 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자신의 흉측한 내부를 말로 하지 않아도 되니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잔을 든 신우가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서 있자 한이 신우를 달래 주었다.
“안 괜찮아도 곧 괜찮아질 거야. 걱정하지 마.”
부드럽게 자신을 달래는 그 음성에 신우는 시선을 내려 연한 갈색의 커피를 내려다봤다. 겨우 커피 한 잔이 주는 온기였지만 차갑게 식어 있던 가슴까지 그 온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괜찮아.”
그렇게 말을 건넨 한이 터억 하니 커다란 손을 신우의 머리에 얹었다. 그러곤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린다.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혼자서 울지 말고.”
그 순간 신우는 한이 던지는 말의 의미보다도 한의 목소리가 너무 좋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렇게나 차가운 눈을 한 녀석이 어떻게 이렇게 다정한 목소리를 내는 걸까?
그의 손이 주는 온기도, 목소리도 너무나 따뜻했다.
그의 따뜻함이 좋다. 아니, 그가 좋다.
동정이든 뭐든, 자신을 챙겨 주고 필요한 순간에 나타나 상냥하게 말을 건네주는 그가 좋다.
그와 함께 있으면 비로소 자신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도 존재를 모르는, 차가운 바닥에 붙은 그림자 같던 자신이 숨을 쉬고 피가 도는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요동치는 감정에 눈을 질끈 감았다.
메마르고 차갑게 식어 있던 심장이 따뜻한 물에 젖어 드는 듯한 기분에 신우는 겨우 웃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괜찮아졌어, 이젠.”
“…….”
“정말 괜찮아졌어. 너 보니까 좋아졌어.”
누군가 자신을 이렇게나 다정하게 대해 주는 것은 꿈으로도 꾸지 못했던 호사였다.
그러니까 더는 어리광 부려선 안 된다.
매달리고 어리광 부리고 징징대면 싫증 낼 테니까. 그럼 그도 귀찮다고 자신을 버릴 테니까.
그 가능성을 떠올린 순간 머릿속이 아찔해졌지만, 겨우 정신을 다잡고 그를 보았다. 그러자 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전화해도 돼.”
“응, 고마워. 이제 가 봐. 오늘 춥다.”
인사와 동시에 후드를 뒤집어쓴 한의 머리카락이 젖어 있는 게 보였다. 샤워하자마자 다시 나온 모양이었다.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이 돼 한을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자 한이 그 생각을 눈치챈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들어가. 아, 집까지 태워다 줄까?”
“아냐. 우리 집 여기서 가까워.”
“그래. 아, 맞다. 내일부터는 같이 하교할 수 있을 거야.”
“응?”
“내일 되면 알게 돼. 어서 가.”
싱긋 웃으며 한 번 더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는 그의 눈을 보며 신우는 마지막 인사를 마친 뒤 천천히 돌아섰다.
왠지 먼저 돌아서야 할 것 같았다. 이 밤중에 멀리까지 와 준 그에게 미안하지만 그의 등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재빨리 돌아서 방금 걸어왔던 길을 거슬러 가기 시작했다.
아직 식지 않은 커피를 손에 들고는 천천히, 두근거리는 심장을 끌어안은 채 다리를 움직였다.
뒤에 서 있는 그의 존재가 못내 마음이 쓰이긴 했지만 괜히 돌아봤다 그의 뒷모습을 보게 될 것 같아, 정면만을 응시하며 걸었다.
그리고 그날은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었다.
“야, 그거 진짜야?”
1교시 수업이 끝난 뒤부터 계속해서 교실 안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모처럼 숙면을 취했음에도 이상하게 나른하고 졸려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책상에 엎어져 자던 신우는 부산스러운 그 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바로 앞자리에 옹기종기 모인 녀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 졌다고 농구부 탈퇴하는 거야? 오늘 새벽 훈련은 나왔다며?”
“혹시 뻥 아냐? 새벽 훈련 다 하고는 갑자기 관두겠다니 말이 안 되잖아.”
“그러니까.”
수군수군대는 소리에 혹시 강민재가 농구부를 그만두는 건가 싶어 신우가 고개를 들자 앞에서 웅성거리던 녀석들이 흘깃 신우를 돌아보았다.
“야, 너 아는 거 없냐?”
“응?”
“정한 농구부 관둔대. 이제 공부한다는데 들은 거 없어? 너랑 요즘 붙어 다녔잖아.”
그 말에 신우는 잠이 확 달아난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한이가 농구를 그만둔다고?”
“그래. 그래서 지금 난리야. 뭐, 어차피 얼마 못 가 다시 들어가긴 하겠지만…….”
처음 듣는 그 이야기에 신우는 빠르게 눈을 껌벅거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한이 농구를 그만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간혹 체육관 앞을 지나갈 때나, 새벽 일찍 등교할 때 농구장에서 훈련 중인 그를 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늘 웃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웨이트를 할 때든, 강도 높은 체력 훈련을 할 때든, 손바닥이 갈라질 것 같은 슛 연습을 할 때든.
그게 참 부럽다는 생각을 했었다. 저렇게나 좋아하는 운동을 늘 할 수 있다니, 그리고 그 분야에 재능도 있고 모두에게 인정까지 받는다니. 그는 극소수에 속하는 축복받은 인간이었다.
그런 그가 농구를 그만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뭔가 소문이 와전된 거 아닐까 하던 중 순간 어젯밤 한이 한 말이 떠올랐다.
오늘부터 같이 하교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한이. 처음엔 그게 무슨 뜻인가 했는데 농구부를 관둘 생각이었다면 말이 된다.
한은 바로 어제 마음을 굳힌 거다. 하지만 여전히 그 인과 관계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모든 게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어떤 계기가 있었던 건가, 하며 어제 있던 일들을 되짚어 보던 사이 뒷문 쪽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연신우, 면회.”
한이 왔나 싶어 뒤를 돌아보니 자그마한 학생이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엄청나게 작고 귀여운, 하지만 낯선 얼굴을 한 소년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에 자신을 부른 게 맞냐는 듯 신우가 스스로를 손으로 가리키자 그가 맞다는 듯 손목을 까닥였다. 어서 나오라고 재촉하는 듯한 손짓에 일단 자리에서 일어서 뒷문으로 향해 갔다. 그리고 잠시 후 문 앞에 서자 작은 학생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갑자기 미안. 나 한이 친구. 정현이.”
생글생글 웃으며 자기 자신을 정현이라 소개한 그와 달리, 신우는 여전히 얼떨떨한 채였다. 왜 그가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 수 없어 약간 경계하듯 바라보자 정현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갑자기 미안한데, 한이가 농구 관둔다는데 뭐 아는 거 없나 해서.”
그가 한 말 그대로 갑작스러운 질문에 신우는 이번엔 진심으로 당황했다. 그건 오히려 신우가 묻고 싶은 바였다.
“……나는 잘 모르는데…….”
“그래? 요즘 너한테 열 올리길래 너라면 알 줄 알았는데……. 뭐, 그 자식 변덕이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까.”
“…….”
“아, 나는 3반. 한이랑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동창이야. 걔 친구면 내 친구이기도 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자. 하여간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 그럼 난 간다.”
“…….”
“아, 한이한테 내가 왔었다는 말은 하지 마. 내가 간섭하는 거 싫어하거든.”
그걸 알면서 왜 간섭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긴 했지만 정현의 태도가 워낙에 자연스러워 신우는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오늘 처음 봤지만 정현은 한과는 다른 의미로 경쾌한 느낌이었다. 심각한 일이라곤 전혀 없는 듯한 그의 태도에 압도당한 신우는 멀뚱히 서 있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원인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이 농구를 그만두는 건 사실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두고 자신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기분이 이상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학교 안은 부산스러워졌다. 원래도 그랬지만 오늘따라 특히 웅성거림이 심하다는 생각이 든 건, 한의 갑작스러운 퇴부 선언으로 농구부뿐 아니라 학교 전체가 우왕좌왕 정신없이 날뛰는 탓이었다.
농구부 코치와 감독, 담임까지 동원돼 오전 내내 그를 찾아다니며 설득하려 했지만 한의 의지는 확고했다. 한의 집안에서까지 더 이상 그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학교 측에 당부했다고 할 정도니 이미 끝난 게임이었다.
세상사에 관심 없는 신우도 근래 그와 다니며 이런저런 소식을 귀에 담은 터라 그의 집안에 대해 대강은 알고 있었다.
한의 조부가 굉장한 자산가이고 그 덕에 그가 활약하던 중학교 농구부뿐 아니라 이 학교의 농구부 역시 엄청난 원조를 받고 있다고 들었다. 실질적으로 한의 조부가 농구부 전체를 먹여 살렸다는 말도 있었다.
전지훈련지를 직접 정한 뒤 훈련소까지 초호화 차량을 제공하고, 원정 경기가 있을 경우에는 농구부 숙소로 고급 펜션이나 호텔 한 층을 통째로 빌려줬다고 할 정도니, 한의 퇴부 소식에 농구부가 공황 상태에 빠진 것도 당연하다.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가야 하지만 어쩐지 귀찮아져 느릿하게 움직이던 신우는 등을 툭툭 두드리는 힘에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억센 팔이 자신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할 틈도 없이 얼결에 교실을 빠져나가며 앞을 보자 한이었다.
“좀 조용한 데로 가자.”
여느 때처럼 평온한 말투였으나 그의 눈에는 아주 진저리가 난다는 듯 짜증스러움이 가득 배어 있었다. 한이 화가 많이 난 상태임을 짐작한 신우는 입을 다문 채 그가 이끄는 방향으로 향해 갔다.
한이 신우를 이끌고 온 곳은 점심시간 중 가장 조용한 별관이었다. 특별 활동 교실들이 몰려 있어 고요한 건물로 들어선 한은 1층 복도 안쪽의 음악실 앞으로 가 능숙하게 잠겨 있던 문을 열었다.
“문 잘 여네?”
클립 두 개로 간단히 문을 따는 모습에 신우가 의혹이 담긴 목소리로 묻자 한이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우리 할아버지 신조가 뭐든 잘해야 한다는 거거든. 열쇠 따는 것도 사는 지혜 중 하나라고 따로 배웠어.”
문고리를 돌려 조용히 문을 연 한은 신우에게 어서 안으로 들어가라는 듯 눈짓을 해 보였다. 그 신호에 신우가 먼저 음악실 안으로 들어서자 찬 공기가 피부에 닿아 왔다.
“춥다. 히터 좀 켜야겠다.”
음악실로 들어서 안쪽에서 문을 걸어 잠근 한은 익숙한 움직임으로 음악실의 히터를 켰다. 그러고는 느긋하게 가장 앞자리에 앉아 옆자리를 툭툭 두드린다. 어서 옆에 앉으라는 그 손짓에 신우는 그가 이르는 대로 그의 옆으로 가 앉았다.
바로 앞에 놓인 히터에서 나오는 따뜻한 공기 덕에 앞자리는 금세 따뜻해졌다. 차가운 몸을 녹이는 온기에 신우가 어깨에서 힘을 빼자 한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끄럽고 귀찮아.”
문득 던진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에 신우는 잠시 그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물었다.
“농구부 관둔다며?”
“응.”
“왜?”
“시시해졌어.”
“……재미없어?”
“응. 이젠 재미도 없고 시시해. 질렸어.”
그건, 중학교 시절부터 계속해 온 농구를 그만두는 이유로는 어쩐지 부족했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말이 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싫어지면 할 수 없다. 그래, 그런 거다.
그저 그게 너무 갑작스러웠을 뿐이다.
“이번에 진 것 때문에 시시해진 거야?”
혹시나 하는 생각에, 신우가 그렇게 묻자 한이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신우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잠시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고 있다 천천히 답했다.
“그러고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네. 난 지는 건 질색이거든. 그리고 누구 아래 서는 것도 싫고.”
거기까지 말한 뒤 한은 잠시 말을 끊었다, 다시 이었다.
“하지만 더 싫은 건 이미 싫증 난 걸 억지로 하는 거야. 미련 갖고 질질 끄는 건 질색이야. 질척거리는 건 싫어. 오래 갖고 논 장난감은 원래 질리는 거잖아.”
투덜투덜, 그는 또래다운 말투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지만 그 내용은 꽤 가혹했다. 오래 갖고 논 것에 질리고 싫증이 나는 건 당연하지만 그걸 손쉽게 버리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질리고 지겨워져도 오래 함께한 것에 대한 미련을 갖기 마련이다. 그걸 소중하다고 느낀 기억이 있기에 아무리 싫증이 났다 해도 쉽사리 쓰레기통에 처박지는 못한다.
하지만 한에게는 버리는 것도 쉬운 모양이었다. 쉽게 얻고 쉽게 버리고, 쉽게 잊고. 질척거리는 것도 미련을 갖는 것도 질색인 듯했다.
그런 성격이라는 건 대강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의 입을 통해 들으니 조금 충격적이었다.
어느새 후끈해진 음악실 안에서 신우가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자 한이 재빨리 화제를 바꾼다.
“애들이 너한테 물어보지 않아? 내가 왜 관두는 거냐고.”
“조금.”
“뭐라고 했어?”
“……난 너 그만두는 것도 몰랐으니까……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어.”
사실 그대로만 이야기했다고 신우가 작게 중얼거리자 한이 몸을 돌려 앉으며 신우와 눈을 맞춘다.
“내가 왜 그만두는 건지 궁금하지 않아?”
“질렸다며?”
“맞아. 그게 이유의 80%야. 어제 오후에 몸을 푸는데 갑자기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리고 나머지 20%는 뭐일 것 같아?”
“글쎄…….”
“궁금하지 않아?”
“……네가 말하기 싫은 거라면 굳이 알고 싶지 않아.”
그 말에 한이 눈웃음을 흘린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던 한이 조금 뒤 신우의 귓가에 입술을 대곤 작게 속삭인다.
은밀한 밀어를 나누듯 아주 조용히, 그 고요한 음악실 안에서도 울리지 않게, 신우의 귓가에 무언가 속닥거린 한은 이내 말을 마친 듯 신우에게서 멀어졌다. 그러곤 신우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가 생각한 대로 무서운 것 같아, 내가?”
싱긋 웃는, 사람 좋아 보이는 그 얼굴에 신우는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로 대꾸했다.
“……무서운 건 맞지만 아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종류는 아닐 거야.”
“그럼?”
“……그냥 그런 게 있어.”
“어떤 거?”
그 물음에 신우는 침묵을 지켰다.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집스러운 신우의 태도에 한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뭐, 상관없지. 넌 그래서 재미있는 거니까. 아, 너 점심 안 먹었지?”
“응.”
“담 넘을래?”
“응?”
“좀 조용해질 때쯤 나가자. 괜히 식당 가서 먹었다간 토할 것 같아.”
“……그러든가.”
지금 급식소에 들어가면 사방에서 그를 향해 똑같은 질문을 던질 게 분명했다. 보지 않아도 뻔한 상황에 그가 식당을 피하려는 것도 당연하다 싶어 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이 그 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눈꼬리를 휘며 순하게 웃는다.
“후문 쪽에 맛있는 가게들 많아. 그쪽으로 가서 먹자.”
“응.”
“일단 몸 좀 녹이고.”
라며 한은 히터의 온도를 좀 더 높였다.
겨울이었다. 그리고 꼭 겨울을 닮은 눈을 한 그가 다가서고 있었다.
이 겨울의 추위처럼 피할 수 없이, 하지만 아주 깊이 스며들고 있었다.
- 13년 후 -
“썩을 놈.”
북적거리는 게이트 안에서 단출한 가방 하나만 들고 나서는 한을 보며, 정현은 짤막한 한마디로 환영 인사를 대신했다.
“오랜만.”
정현의 사나운 표정에는 전혀 개의치 않은 채 편안한 티셔츠에 청바지를 걸친 한이 태연한 얼굴로 인사를 던지자 정현의 얼굴이 더 험악하게 일그러진다.
“얼굴 치워, 망할 자식. 5년 만에, 그것도 갑자기 새벽에 전화해서 한다는 소리가 나 3시에 도착하니 마중 나와? 그게 다냐?”
“아, 미안. 늦은 시간이라 할아버지한테 전화할 수는 없겠더라고. 거기다 경유지도 없어서 제일 만만한 너한테 했지.”
“내가 만만하냐?”
한의 말에 기함하며 정현이 빽 하니 소리를 내지르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힐끔거렸다. 공항까지 마중 나온 사람이 하는 말치곤 지나치게 험악한 인사말에 다들 놀라는 듯했지만 한은 역시나 이번에도 개의치 않았다.
“짐은 일단 이거 하나야. 나머지는 모두 비행기 편으로 부쳤으니까 우선 이것만 옮겨 줘. 우리 집으로 가면 돼.”
“내가 네 기사냐?”
“친구잖아.”
5년 전 갑자기 연락도 없이 이탈리아로 떠난 뒤, 엽서나 전화 한 통도 없이 지내다 오늘 새벽 ‘나 돌아오니 데리러 나와라’는 말만 남긴 채 전화를 끊은 게 어딜 봐서 친구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정현은 일단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들 눈도 있으니 나머지는 차에 타서 계속하기로 마음먹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먼저 돌아서는데 한이 느긋한 투로 속을 뒤집는다.
“잘 지냈나 보네?”
“잘 지냈는지 궁금은 하냐?”
“궁금은 하지. 바빠서 연락할 틈도 없었으니까.”
순간 정현은 ‘그래, 너 말 잘했다.’라는 듯 한을 돌아봤다.
“연락할 틈이 없기는 개뿔! 아무리 바빠도 메시지 한 줄 보낼 시간이 없냐? 스마트폰 뒀다 뭐에 쓸 건데? 내가 영통을 하재, 장문의 메일을 쓰래? 그냥 메시지로 ‘나 유학 간다!’ 이 한 줄을 못 쓰냐? 내가 너희 할아버지한테 너 이탈리아 갔다는 소식 듣고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뭐, 다 가는 유학 요란하게 알리고 갈 필요는 없잖아.”
지나치게 태평한 그 말에 정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다.
“그래, 네 새끼가 그럼 그렇지, 뭐.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빠른 걸음으로 로비를 벗어나 주차장으로 들어선 정현은 주차해 놓은 그의 차로 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러곤 곧 트렁크를 열자 자그마한 짐 가방을 끌고 뒤로 가 트렁크에 실은 한이 느긋한 걸음으로 다시 조수석으로 와 올라탄다.
그러자 정현이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말을 내쏘기 시작했다.
“진짜 징그럽다, 너. 어떻게 인간이 변하지를 않냐? 변덕스러운 새끼가 이기적이기까지 한 걸로도 모자라 배려도 없고 매너도 없고 싸가지도 없잖아! 게다가 내가 네 호구야? 툭하면 사람 부려 먹고 지랄이야! 나 오늘 월차까지 내고 나왔다고!”
피 같은 내 유급 휴가를 널 위해 썼다면서 정현이 시동 버튼을 사정없이 누르며 포효하자 한이 목 안으로 웃는다. 그러곤 정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준다.
“고마워.”
“당연히 고마워해야지! 내가 왜 너 같은 새끼랑 친구가 돼서 이 나이 먹어서까지 고생이냐고? 우리 엄마가 연희동으로 이사 간다고 할 때 내가 말렸어야 했어! 그 동네가 문제야! 거기 터가 안 좋다고!”
“그래, 연희동 쪽으로는 발도 뻗지 말고 자.”
“걱정 마. 그쪽으로는 재채기도 안 해!”
내가 다신 그 망할 놈의 동네에 가나 봐라, 라고 하면서도 내비게이션 검색창에 ‘연희동’을 입력한 정현은 본인의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르다는 걸 의식하지 못한 채 곧장 차를 출발했다.
실내 주차장을 빠져나와 드디어 도로로 들어서자 그나마 화가 가라앉았는지, 정현이 가장 궁금해하던 바를 한에게 물었다.
“갑자기 이탈리아는 왜 간 거야?”
“가고 싶어서.”
사람을 맥 빠지게 하는 동시에 너무나 한다운 대답이었다. 하지만 짜증이 나는 건 나는 거라 정현은 조금 사납게 내뱉었다.
“그래, 가고 싶어서 갔다 치자. 네 새끼가 다른 계획이 있어서 갔다는 게 더 이상하니까. 그런데 메시지 하나 보내면 안 돼? 이탈리아에서는 메시지 못 보내냐?”
라며 정현이 힐끗 한을 노려보자 한이 어깨를 으쓱한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니까.”
“그래서 그 희소식으로 친구들 모두 잡지에서 네 소식 듣게 하니 기분 찢어지디?”
고등학교 2학년 겨울, 갑자기 농구를 관두고 공부를 시작한 한은 1년 만에 성적을 끌어 올려 명문대 건축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일찍 군대에 다녀온 뒤 무슨 생각인지 미친 듯이 공부를 해 조기 졸업을 하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워낙에 화려한 녀석이라 동창들 사이에서 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되던 녀석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자 친구들은 당황했다.
혹시 죽은 거냐, 아니면 아파 병원에 누워 있는 거 아니냐 등등 온갖 소문이 떠돌던 중 드디어 한 녀석이 잡지에서 한의 소재지를 확인했다.
아마, 작년 딱 이맘때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인테리어 잡지에 ‘밀라노에서 활약 중인 한국인 신예 건축가 10인’이라는 기사에 한의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실린 걸 보곤 모두가 기함했다.
‘대체 이 자식 언제 이탈리아에 간 거야?’라고.
다시 떠올려도 어이없는 그 기억에 정현이 원망을 쏟아 내자 한이 기분 좋은 듯 웃는다.
“뭐, 나름 재미있었어. 그러니까 5년이나 있었지.”
“그 재미있는 곳에서 왜 갑자기 돌아오셨대? 아예 거기서 뼈를 묻으시지?”
“질렸거든.”
짤막하고 단조로운,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너무나 한다운 그 말에 정현이 한심함과 짜증을 담은 얼굴로 한을 돌아본다.
“또 질리셨어?”
“응. 재미있을 줄 알고 갔는데…… 뭐, 재미있긴 했는데 지금은 좀 질렸어.”
“건축은 안 질렸냐?”
“아직은. 뭐, 언젠가는 질릴지도 모르지.”
뭐든 잘 빠지고 또 잘 질리고 질리면 금방 버리는 한의 성격에 그를 오래 알아 온 정현은 진저리가 난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너도 참 대단하다. 농구 때려치울 때도 혹시나 했는데 진짜 관두더니, 이제는 한국을 대표하는 젊은 건축가라니. 짜증 나.”
“내가 많이 잘났거든.”
무심히 답한 뒤 차창 밖을 바라보던 한은 ‘많이 변했네.’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 소리에 정현이 짜증스레 내뱉는다.
“그래서 더 짜증 난다고. 너처럼 끈기 없는 새끼가 왜 다 잘하냐고. 목숨 걸고 덤벼도 될까 말까 한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널렸는데.”
농구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지금쯤 프로 선수로 뛰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정현이 아직도 너무 아깝다고 소리치자 한이 지겹다는 듯 말을 돌린다.
“타고난 복이지.”
“짜증 나. 너 진짜 재수 없어. 뭐든 쉽다는 인간들 밥맛이야.”
“그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거야, 원래.”
“어느 정도는 보통 사람들한테 맞춰서 살아야 하는 거 아니냐? 너, 할아버지도 아직 너 들어오는 거 모르시지?”
“아냐, 알아. 미리 준비해 두고 온 거야.”
“무슨 준비?”
“사업할 거거든.”
“무슨 사업.”
“건축.”
“반도체가 아니라?”
일부러 한의 전공과는 전혀 무관한 분야를 거론하는 게 분명한 정현의 비아냥에 한이 시원스레 웃는다.
“그건 나중에. 이거 질리면.”
“지랄한다.”
한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정현이 반박 대신 욕설을 내뱉자 한이 시트에 기대앉는다.
“다른 애들은 다 잘 있지?”
“잘 있어. 강우는 얼마 전에 속도위반해서 결혼했고 경민이는 회사 잘 다니고 현경이는 대학원 다시 들어갔고. 아, 신우는…… 뭐…….”
줄줄이 고등학교 때 친구들의 이름을 늘어놓던 정현이 잠시 머뭇거리자 한이 이상하다는 듯 정현을 보며 되물었다.
“신우?”
“응, 연신우. 걔도 일단 잘 지내긴 해. 피곤해 보여서 그렇지.”
“……걔가 누군데?”
“야, 썰렁한 농담하지 마. 재미없어.”
“정말 기억 안 나서 그래. 걔가 누군데?”
의문이 가득한 한의 물음에 정현이 놀란 듯 그를 돌아보았다.
“너, 진짜 기억 안 난다고?”
“응.”
“……너, 어디서 머리 다쳤냐? 어떻게 걔를 기억 못 해? 너 때문에 나랑도 친해진 건데.”
“모르겠는데? 고등학교 친구야?”
“너 걔한테 무지 열 올렸었잖아. 죽고 못 살 듯이 굴더니 갑자기 픽 돌아서긴 했지만. 정말 기억이 안 난다고?”
정한이 다른 사람도 아닌 연신우를 기억 못 한다는 말에 정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을 돌아보자 한이 작게 그 이름을 되씹는다.
“……연신우라고?”
“그래. 하얗고 예쁜 애.”
묘하게 구체적인 정현의 설명에 한이 인상을 쓴 채 고개를 갸웃거린다.
뭔가 알 듯 말 듯 떠오를 것 같긴 한데 아련한 잔상만 떠돌 뿐 선명하게 기억나지는 않았다. 왠지 불쾌하면서도 아릿한 감각을 일으키는 이름에 잠시 기억을 더듬던 한은 이내 기억해 내길 포기해 버렸다.
자신처럼 기억력 좋은 사람이 떠올리지 못할 정도면 뭔가 일이 있었다는 거다. 뭐든 안 좋은 일은 기억에서 지워 버리는 성격이다 보니 아마 안 좋게 끝이 났었나 보다, 하고 체념했다.
“뭐, 질렸나 보지.”
“너야말로 질린다. 어떻게 걔를 기억 못 해? 그렇게 죽자 살자 끌고 다니더니.”
“난 금방 질리잖아.”
“그보다는 신우가 너한테 질렸겠지. 네 성질 아주 더러우니까.”
“뭐, 그럴 수도 있고.”
이미 잊은 사람 따위 알 바 아니라는 듯 한은 몸을 숙여 라디오를 틀었다. 무심한 그 태도에 정현이 혀를 찼다.
“그래, 네가 그럼 그렇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는 듯 대화를 마무리한 정현은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그사이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던 한은 태연한 척하면서도 어쩐지 그 이름의 어감이 상당히 입에 걸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묘하게 여운이 남았다.
그 이름 석 자가 입 안에서 모래처럼 껄끄럽게 걸리는, 이상한 느낌이었다.
‘형, 형. 어디 가?’
아주 작고 힘없는 손이 자신의 왼손을 잡고 매달려 왔다.
그 순간 든 생각은 귀찮다는 거였다. 그 아이는 너무 약했다. 그 아이와 함께 나가면 자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물론, 그 아이를 사랑하지만 지금은 나가고 싶다. 오늘만은 나가고 싶었다.
‘금방 올 거야. 넌 따라오면 안 돼.’
‘왜? 혼자 있기 싫어.’
‘넌 집에 있어야 돼. 엄마 곧 오실 테니까 혼자 어디 나가면 안 돼.’
‘어디 가는데?’
‘집 잘 보고 있어.’
‘형!’
또다시 매달리려는 손을 매섭게 뿌리치곤 서둘러 집을 나서 운동화를 꺾어 신은 채 내달렸다.
그 아이가 따라올까 봐. 또 자신에게 따라붙어 집 안으로 들어가게 만들까 봐.
‘형!’
그래서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그 소리에도 일부러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바라보며 달릴 뿐이었다.
어차피 곧 다시 보게 될 테니까, 나갔다 돌아오면 언제나 옆에 있을 테니까…….
시끄러운 벨 소리에 눈을 뜬 신우는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 눈을 부릅뜨고 허공을 노려봤다. 그러곤 잠시 천장을 응시하다 이내 손을 들어 왼손을 바라봤다.
땀이 밴 왼쪽 손바닥에는 작고 서늘한 그 손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18년이 지난 지금도 마치 조금 전의 일인 듯 생생하게.
순식간에 몰려오는 허탈감에 가만히 손을 노려보는 사이 벨 소리가 더욱 커졌다. 서둘러 이불 옆에 둔 휴대폰을 들어 액정을 보자 ‘명진’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네.”
- 일어났어?
“네.”
몸을 일으켜 앉으며 그렇게 답하자 명진이 느긋하게 말을 이어 간다.
- 오늘 좀 일찍 나와야겠다. 어제 누가 깽판을 쳐 놓고 갔어.
“네. 괜찮아요. 몇 시까지 가면 돼요?”
- 7시쯤?
“맞춰서 갈게요.”
- 잠은 좀 잔 거야?
“네. 오늘은 꽤 잤어요.”
- 그래, 그럼 됐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명진의 음성에 신우는 괜찮다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괜찮다는 답과 달리 전화를 끊자마자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머리가 멍하고 몸이 무겁게 늘어지는 듯한 느낌에 미간을 누르다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5시였다. 슬슬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잠을 자기는 했지만 사실 거의 제대로 자지 못했다. 2시간 자다 깨고 다시 3시간 자다 깨고의 반복이었다. 생활이 워낙에 불규칙한 탓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눈을 붙이면 찾아드는 악몽이었다.
어느 날의 꿈은 슬퍼 울다 깨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의 꿈은 가위에 눌리기도 했다. 그럴 때는 항상 꿈에서 깬 뒤에도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다.
이럴 때는 누군가 옆에서 자신을 깨워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들기도 했지만 부질없는 욕심이다.
자신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자신은 늘 혼자일 거다.
그러니 이제 오래된 친구 같은 이 외로움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신우는 피로한 몸을 일으켜 천천히 욕실로 향했다. 사는 게 너무나 피곤하지만 살아야 한다.
아직은,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