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4)

[14]

<외전 2 선물>

길게 기지개를 피며 노곤한 잠을 쫓아내었다. 이리저리 가벼운 스트레칭을 한 뒤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 커튼을 쳤다.

밝다 못해 눈이 따가울 정도의 햇볕에 절로 눈이 감겼다. 잠시 뒤 겨우 빛에 적응이 되고서야 눈을 뜬 뒤 밖을 내다보았다.

정원사가 정원을 손질하는 모습이 보였다. 창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미지근한 바람이 들어왔다.

에어컨 때문에 시원하다 못해 추웠던 실내가 순식간에 눅눅해지는 기분이지만 그래도 자연 바람이라 더 좋았다. 잠시 자연 그대로의 냄새를 길게 들이쉰 뒤 크게 숨을 들이켰다.

“한스 아저씨! 수고하십니다!”

일부러 큰소리로 인사를 하자, 그제야 바닥을 보고 있던 한스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일어난 거야?”

“네! 아침 먹었어요?”

“벌써 먹었지. 준영도 어서 먹도록 해.”

“네!”

해가 뜨기도 전에 일하는 한스의 입장에서는 늦은 편이겠지만 준영의 입장에서는 꽤 빠른 거다. 밤새도록 에드워드에게 시달렸으면서도 꿋꿋하게 8시에는 일어나니까 말이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고용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리스가 사라진 후 임시로 준영의 시중을 담당하고 있는 린지였다.

준영은 그녀에게 설령 8시에 못 일어나도 무조건 깨워 달라 말했었다. 작은 쟁반을 든 채 안으로 들어선 린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준영.”

“린지도요. 아침은 먹었어요?”

“네. 가볍게. 오늘은 빵과 조개 스튜입니다. 조개 스튜 좋아하죠?”

“물론이죠. 씻고 나와서 먹을 테니 린지도 할 일 해요.”

“그럼. 식사하고 나오세요.”

린지와 한 번 더 인사를 한 뒤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새벽에 본의 아니게 샤워를 했기 때문에 간단하게 세안만 한 후 밖으로 나왔다. 곧장 테이블로 가 작은 모닝 빵을 집어 입에 넣으며 스튜 뚜껑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 스튜 향이 모락모락 올라왔지만 평소와 달랐다. 무언가 속이 울렁거린다 싶더니 순식간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욱! ……우욱!”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서둘러 욕실로 달려가 변기 앞에 엎드렸지만 나오는 토사물은 없었다. 씹기만 하고 삼키지도 못했던 빵 조각만 뱉어낸 뒤 한참 동안 헛구역질을 하였다.

“하아하아……. 뭐지?”

가슴팍이 꽉 막힌 느낌에 속도 울렁인다. 뭔가 제대로 체했나 보다. 어제저녁에 먹은 게 잘못된 건가?

생각해 보니 어제저녁,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 나와 평소보다 더 과식했었다.

멍청하게 많이 먹어서 탈이 나다니.

준영은 스스로를 책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전동칫솔을 들고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체했다는 말을 에드워드에게 하지 말랬는데 역시나 그다지 효과는 없나 보다. 점심 조금 먹고 다시 토하고 난 뒤에 힘없이 침대에 누워있을 때 에드워드에게서 연락이 왔다.

빼도 박도 못하게 화상통화다. 준영은 조금 떨어진 화장대의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확인한 후 전화를 받았다.

-체했다며? 아침도 점심도 못 먹었다던데…….

누가 보면 중병에 걸린 거라고 생각하겠다. 걱정스러운 표정에 준영은 애써 괜찮다고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말 그대로 체한 것뿐이에요. 간단하게 죽 먹고 지금 누워있는 중이고요.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요.”

말해 봐야 의미는 없다. 당장이라도 회사 일을 때려치우고 달려오고 싶은 걸 억지로 참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저녁쯤에는 괜찮아질 거다. 아주 못 먹는 건 아니다. 설득을 해봐도 통하지가 않았다.

결국 준영이 졌다.

“네. 병원 가 볼게요. 그러니 너무 걱정 말아요.”

에드워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준영은 기어코 웃어버렸다.

-남은 걱정된다는데 웃다니.

“헤헤. 미안해요. 그치만 저번에 검진 때도 그랬잖아요. 나 정말 많이 좋아졌다고.”

-물론 알아. 정말 기쁜 일이지. 하지만 절대로 안심해서는 안 돼. 많이 좋아졌다지, 완전히 좋아졌다가 아니잖아.

내가 누굴 이겨.

준영은 차마 말로 내뱉지 못한 말을 삼키며 네네, 그저 웃어 주었다.

간단한 검사라 가장 가까운 병원을 찾았다. 그런데 실수였나 보다. 지금까지 크게 기다리지 않고 검사를 받을 수 있었던 게 햄턴 가 후원 병원에 갔었기 때문이었나 보다.

예전 같으면 이런 경우 크리스가 무조건 따라왔었다. 그와 수다를 떨기라도 하면 덜 지루했을 텐데, 오늘따라 유달리 빈자리가 그리웠다.

“……돌아오기만 해 봐.”

마구 부려먹을 거다. 뻔히 제라드를 사랑하면서 왜 도망을 치는 걸까.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준영의 입장에서는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보고 싶네.”

요즘 집안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 않다. 제라드는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크리스가 떠나가고 난 뒤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예전에는 힘든 일이 있어도 억지로 웃던 제라드였지만 그조차도 힘들었나 보다. 그래서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어쩌면 제라드가 억지로라도 감정을 추스르고 웃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자신을 뒤에서 받쳐줄 크리스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준영. 호명되었습니다.”

잠시 멍하니 상념에 젖어 있을 때 누군가가 어깨를 톡톡 두드려 고개를 돌렸다. 경호원의 말에 아차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간호사에게 다가갔다.

“……혹시 안 좋은 일인가요?”

“네? 아, 아니요.”

병원을 나서고도 한참 멍하니 서 있기만 하자, 보다 못한 경호원이 걱정스럽게 말을 건넸다. 준영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고는 다시금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아직 정확한 건 모르니까. 설레발치지 말자.

방금 전 진료를 본 의사가 특별히 소화불량 증상이 없어 보인다며 오메가이니 검사를 해보라고 권했다. 절대로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심장이 두근거리며 희망이 차올랐다. 그럴 때마다 고개를 마구 저었다.

일단 검사부터 해보자.

준영은 병원 근처 약국으로 가 임신 테스트기를 산 뒤 곧장 화장실로 향하였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달래며 검사를 하였다.

“……뭐, 그렇지.”

한 줄의 선을 보고는 피식 웃고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렇게 설레발치지 말자고 각오했으면서도 큰 상실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칸을 나와 세면대 앞으로 가 섰다. 길게 심호흡을 하고는 손과 얼굴을 씻은 뒤 거울 속 자신을 보았다.

“괜찮아. 그렇지?”

그래. 홀로 힘들게 견뎌야 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곁에는 에드워드가 있다. 그 외에도 자신을 걱정해 주는 이들이 있다.

이제는 혼자 멍청하게 무덤을 파지 않을 것이다.

준영은 손을 닦은 후 핸드폰을 꺼내어 곧장 에드워드에게 연락을 취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를 받은 에드워드의 목소리를 듣자, 왠지 울컥 서러움이 올라왔다.

-준영? 왜 그래?

“에디. 있죠……, 나 그쪽으로 가도 돼요?”

-물론이야. 지금 어딘데?

“아마 차로 40분 거리일 거예요.”

-바로 와. 나도 지금 회의 들어가는 중이야. 늦어도 준영이 올 때쯤이면 끝날 거니까. 내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어.

“응. 그럴게요.”

평소라면 에드워드에게 방해가 된다고 절대로 가지 않았을 준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로 에드워드의 품이 그리웠다.

평소와 다른 태도에 겁이 덜컥 났다. 경호원의 말로는 별다른 증상이 없었다고 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햄턴 가 지정 병원이면 곧장 전화해 알아볼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아 답답했다.

슬슬 준영이 올 시간이다 싶어 회의도 대충 상황을 지켜보다, 중간에 빠져나왔다. 어차피 자신이 없어도 될 일이지만 평소의 그답지 않은 행동에 직원들이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든지 말든지 준영이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에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소파에 힘없이 기대고 있던 준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표정이 더 좋지 않아 걱정스럽게 다가가며 그를 불렀다. 준영은 대답 대신 에드워드의 품에 파고들었다.

“정말로 괜찮은 거야?”

“응. 소화불량 같은 증상은 없대요.”

“그런데 왜…….”

“……의사가 오메가니까 혹시 모르니까 검사를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설마?”

“아니에요. 임신. ……기대 안 하려고 했는데. ……그래도 그 말에 꽤 기대했나 봐요.”

말하면서도 계속해서 에드워드의 품에 파고들었다. 에드워드는 그제야 준영이 왜 이렇게 기운이 없는지를 깨달았다.

당연하겠지. 사람인데 기대를 안 할 수가 없을 거다.

아무리 괜찮다 괜찮다 해도 첫 아이를 그렇게 보낸 후, 두 번 다시 임신을 못 할지도 모른다는 판정까지 받았으니 작은 희망에도 얼마나 많은 기대를 했을까. 그리고 그 허무함은 말로 설명하기도 힘들 것이다.

에드워드는 준영의 머리와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준영. 난 괜찮다고 했지만……. 준영만 괜찮으면 우리 해볼까?”

“네?”

“인공수정. 대리모까지는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한 노력해 볼까 해.”

준영이 천천히 자세를 바로 해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준영의 뺨을 한 손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손바닥 안에 착 감겨온다.

“내 생각은 변함없어. 굳이 자식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분명 준영과 나를 닮은 아이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어. 준영은 어때?”

“하지만 베타 여성도 인공수정 성공 확률이 낮다고 했어요. 하물며 남자 오메가는 더더욱…….”

준영의 말대로다. 비용도 베타에 비해 두 배 이상 든다. 착상률도 현저하게 낮다. 하지만…….

“제로는 아니잖아.”

“…….”

“돈이 걱정인 것도 아니고. 물론 준영이 힘들 거야. 오늘보다 몇 배로 더 큰 상실감을 느낄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해. ……해 볼 수 있는 데까지 해 봐야 훗날 늙어서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 왜 시도도 하지 않았냐고.”

그래. 에드워드와 달리 준영은 분명 후회할 것이다. 그게 죄책감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되든 안 되든 최선을 다해보고 싶었다. 더는 미련이라는 걸 가지지 않도록. 물론 이걸 정하는 건 준영의 몫이지만.

준영은 한참 동안 침묵한 채 에드워드를 응시했다. 그리고 조바심이 살짝 들어올 때쯤 그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응. 우리 해 봐요.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볼래요.”

에드워드는 준영의 양손을 모아 잡고는 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그래. 해 보자.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물론. 당장은 아니야.”

“네?”

“준영은 아직 젊어. 지금은 최대한 자연 회임이 되도록 노력부터 해야지. 내일 나와 함께 병원을 가자. 준영도 나도 검진을 받는 거야. 그래서 최대한 몸을 만들고, 노력을 한 뒤에도 되지 않으면 그때 시작하는 거야. 무슨 뜻인지 알겠지?”

준영은 잠시 당황하는 듯했지만 곧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까의 우울함이 꽤 많이 사라졌다. 굳이 지적하지 않고 다시 한번 준영을 강하게 품에 안아 주었다.

잠시 숨 쉴 틈 없이 계속해서 키스가 이어졌다. 에드워드의 다리 위에 앉은 채로 말이다. 아주 잠깐 입술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쫓아와 입술을 덮었다.

혀가 미끄러지듯 들어와 엉킨다. 그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에드워드의 옷을 잡은 채 어떻게든 숨을 쉬려 애를 쓰는 것뿐이었다.

“에, 에디. 이제 그만……. 흐음!”

그저 키스만 할 거라고 해 놓고 도저히 그냥 키스라고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헐떡임이 더 심해졌다. 실제로 엉덩이 부근에 닿는 에드워드의 성기가 딱딱해진 지 오래였다.

내일 검사하러 가자고 해 놓구선……. 예약까지 해 놓구선!

관계를 맺고 난 뒤 검사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준영은 다시금 힘주어 에드워드에게서 떨어지며 거부를 표했다.

하지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뒤로 물러선 준영의 등을 받친 그 상태 그대로 그를 책상 위에 눕혔다.

“어……?”

순식간에 책상에 눕혀진 자세가 된 준영이 상황을 판단하기도 전 에드워드의 몸이 바짝 붙었다. 한 치의 틈 없이 준영을 감싸듯 끌어안고는 노골적으로 귀를 혀로 지분거렸다.

“그러고 보니……, 우리 첫 섹스가 이곳이었지?”

“그, 그런!”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일을 끄집어내다니. 거기다 어쩐지 유달리 흥분한다 싶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나 보다.

“내일 검진 가기로 했잖아요.”

“흔적 안 남길게. 응?”

일부러 코로 준영의 코를 문지르며 또다시 나른한 어조로 묻는다. 준영은 이런 분위기의 에드워드에게 늘 약했다.

“흔적…… 남기면……, 안 돼요.”

안 된다 안 된다 해 놓고 역시나 깜빡 넘어간다. 에드워드가 이런 일로 약속을 잘 지킨 적이 없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물론이지.”

분명 이성이 돌아온 준영은 후회할 것이다. 지금 저런 미소를 짓는 에드워드를 믿은 자신을.

다정한 신사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미 한 차례 절정에 갔는데도 불구하고 에드워드는 만족하지 못한 듯했다. 일부러 빼지 않은 성기는 여전히 단단하게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에디. 나 힘들어요.”

딱딱한 책상 위에서 정사를 나눈 탓인지 온몸이, 특히 허리와 등이 너무 뻐근했다. 준영의 말에 그의 가슴을 빨고 있던 에드워드가 잠시 주춤하더니 그제야 자세를 바로 했다.

이제 그만하자는 뜻이지만 에드워드는 다르게 받아들였나 보다. 그는 준영을 그러안더니 연결된 그대로 책상 위에 앉았다.

“힉……!”

순식간에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왔다. 눈앞이 번쩍거리며 온몸이 전기라도 통한 듯 굳었다. 에드워드의 품에 파고들어 덜덜 떨자 그가 미안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제 그만……. 서, 설마…….”

다정한 손짓에 준영이 다시금 애원했다. 하지만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살짝 바뀐 동공, 그리고 과하다시피 한 알파의 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에드워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준영의 양 허리를 잡고는 강하게 잡아당겼다.

“아흣……! 에디, 에디……, 흣! 아앙!”

다시금 무서울 정도의 속도로 준영의 안을 파고들었다. 가뜩이나 예민해진 내벽이 다시 요동친다. 어딜 닿든 과한 쾌감이 준영을 괴롭혔다. 그만하라던 외침은 어느새 애원으로 바뀌었다.

에드워드의 목덜미를 부여잡은 채 흐느꼈다. 더 해 달라, 무섭다. 스스로 어떤 걸 원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울부짖을 뿐이었다.

“준영. 준영……. 제길!”

키스를 하는 건지 물어뜯는 건지 모를 입맞춤 사이사이 에드워드의 거친 속삭임이 준영을 더욱 부추긴다. 내일 검진이 있다는 것 따위는 뇌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저 이 순간, 이 쾌감을 풀지 못하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본능만이 준영을 움직였다.

하루 종일 먹은 것도 없는 데다, 격렬한 섹스로 인해 결국 준영은 앓아누워버렸다. 열까지 오른 바람에 병원은커녕 침대에서도 한 발짝 나서지 못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거의 하루 종일 침대에서 끙끙 앓으며 보내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하루가 다 갔어.”

얼마나 허탈한지. 이게 다 에드워드 때문이다. 물론 중간부터는 본인도 발정해서 달라붙었지만 시작을 에드워드가 했으니 그의 책임이 더 크다.

“못 고치려나…….”

신혼여행에서도 너무 과한 섹스로 인해 준영이 며칠을 앓아누운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에드워드는 사죄하고 또 사죄하며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 용서를 빌었지만 결국 또 이렇게 되어 버린다.

우성 알파라서 본능에 더 약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 정도가 너무하다.

“크리스……, 왜 없는 거예요.”

크리스라도 있으면 에드워드에게 잔소리라도 신나게 퍼부어줬을 텐데. 제라드도 준영의 편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도 같은 알파에다 형제라 그런지 에드워드를 크게 탓하지 않았다.

돌아오기만 해 봐. 진짜 두고두고 부려먹을 거야.

어느 샌가 에드워드에 대한 분노가 크리스에게로 넘어갔지만 그걸 지적해 줄 이는 없었다.

역시나 제이크는 달랐다. 예약을 해 놓고 왜 오지 않았냐는 제이크의 질문에 준영이 하나도 여과 없이 고해바쳤고, 그 모든 화는 당연하게도 에드워드에게 쏟아졌다.

“우성 알파라는 이유로 모든 게 다 통용될 거라고 생각하지 마! 준영의 몸이 다른 오메가들보다 약하다는 걸 제발 인지 좀 해. 뻑 하면 유혹에 져서 어쩌겠다는 거야? 정말로 준영에게 큰일이 생겨야 정신 차릴 거야? 아니, 후유증도 큰일이라는 걸 왜 몰라?”

엄청난 잔소리에 에드워드는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틀린 말 하나 없는 잔소리지만 이상하게 듣고 있는 내내 준영의 기분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저기……. 제이크. 이제 그만 해요. 에디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예요.”

보다 못한 준영이 제이크를 말려보지만 오히려 더 부추긴 꼴이 되어버렸다.

“애초에 단호하게 끊어내지 못하는 준영의 탓도 있어요. 우성 알파는 말 그대로 섹스에 관해서는 짐승이라고요. 시작하면 못 끊는다 말입니다. 애초에 준영이 먼저 멈췄어야지! 그걸 받아주니 자꾸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거잖아요!”

“왜 준영에게 그래? 준영이 뭘 잘못했다고!”

“에디. 아니에요. 제이크 말이 맞아요. 내 잘못도 커요.”

자기를 탓할 때는 묵묵히 받아주던 에드워드가 준영에게 화살이 향하자 버럭 화를 내며 제이크에게 따져든다.

에드워드의 태도에 어이가 없다는 듯 제이크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 두 번 다시는 너네들 커플에 신경 쓰나 봐라.”

“죄송해요…….”

“죄송할 필요 없어. 저놈이 질투하는 거야.”

준영은 기가 팍 죽어 사과를 하는데 에드워드는 되레 당당하다.

“뭐? 야! 너란 녀석……. 흠흠.”

에드워드의 대답에 욱하고 소리치려던 제이크는 마침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닥터 존슨. 준비 다 되었습니다.”

간호사 사라는 이미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다는 듯 소리죽인 채 키득거리며 준영에게 다가왔다.

“일단 가벼운 초음파 검사부터 할게요.”

“네.”

왠지 이 모든 일의 원흉이 자신인 것 같은 느낌에 준영은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인 채로 사라의 뒤를 따랐다.

초음파 기계가 있는 침대 쪽으로 가 눕자 사라가 준영의 상의를 올린 뒤 그 위에 젤을 짰다. 준비를 끝낸 사라가 이어 제이크를 불렀다.

검사를 할 때마다 살짝 긴장되는 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준영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바로 위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에드워드에게 곁에 있어 달라고 할 걸…….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나가 있으라 한 걸 후회하고 있을 때 제이크가 다가왔다.

자리에 앉은 제이크가 초음파 기계를 들고는 젤이 짜여져 있는 배 위에 가져다 대었다.

차가움에 훕 하고 숨을 들이켤 때, 모니터 화면이 바뀌었다.

“……응?”

이리저리 배를 눌러가며 살펴보던 제이크가 잠시 멈추더니 잔뜩 찌푸린 채 모니터를 응시했다.

“왜요? 뭐가 잘못됐어요?”

“사라. 태낭 검사 준비해 주세요.”

태낭 검사?

그게 뭐냐고 묻기도 전에 사라가 놀란 눈으로 제이크를 보더니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 그러지?

제이크는 일방적으로 지시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검사실을 나갔다. 영문을 몰라 하는 준영을 사라가 불렀다.

“준영. 자리 좀 바꿀게요.”

“네?”

“저쪽으로.”

사라가 가리킨 곳을 본 준영은 다시금 당황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길 왜.”

“닥터 존슨이 검사를 할 필요를 느꼈나 봐요. 걱정 말고, 앉으시면 됩니다. 아, 속옷은 벗으시구요.”

질 안 검사를 위한 검사대라는 건 안다. 준영도 임신 초기에 이곳에서 검사를 했었다.

설마, 설마……. 기대감이 다시금 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했다.

곁에 있어 주고 싶었지만 준영이 필사적으로 나가라고 하는 바람에 에드워드는 어쩔 수 없이 진료실을 나와 밖에서 대기했다.

그저 간단한 초음파 검사인데 꽤 오래 걸린다 싶은 그때, 진료실 문이 열리며 사라가 밖으로 나왔다.

“햄턴 씨. 들어오세요.”

검사가 드디어 끝났구나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로 다가가다, 사라의 표정을 보고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왜 저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보며 웃는 거지?

또 제이크 놈이 자신의 험담을 한 건가 의심하며 진료실로 들어섰다.

하지만 진료실 안은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준영? 왜 울어!”

무려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준영의 모습에 어찌나 놀랐는지 모른다. 준영은 에드워드를 보더니 아까보다 더 큰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에디! 에디……! 흑……!”

어쩌나 서럽게 우는지. 놀란 에드워드가 황급히 달려가 준영을 꽉 끌어안아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으니까.”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최악의 경우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준영이 이렇게 서글프게 울 리가 없을 거다.

에드워드는 떨리는 심정을 숨기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제이크는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순간 혼란함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릴 때, 제이크가 더욱 함박웃음을 지었다.

“축하한다.”

“……뭐?”

준영이 이렇게 펑펑 울고 있는데 축하한다고?

“너와 준영을 보면 우성 알파는 임신이 어렵다는 게 거짓말 같다니까.”

“……무슨.”

“아직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에디! ……아이가. 아이가. ……흑!”

제이크의 말이 끝나기도 전, 준영이 에드워드의 품에서 떨어지며 외쳤지만 울음이 대부분 섞여 있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수준이었다. 말을 하다 말고 다시 엉엉 울기 시작하는 준영의 등을 쓰다듬다 다시 천천히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제이크는 기다렸다는 듯이 작은 사진을 내밀며 미소를 지었다.

“임신 축하해. 이제 3주도 되지 않았지만.”

“……세상에.”

이 세상 그 어떤 말보다 감격스럽고도 따뜻해지는 말이었다. 에드워드는 책상 위에 올려진 작은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저 작은 콩알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진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품안의 준영을 보았다.

작디작은 어깨가 한없이 들썩이고 있었다. 지금 준영이 어떤 감정인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자신보다 더한 감격에 어쩔 줄을 몰라 하겠지. 그 어떤 말로도 이 감정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고마워. 준영.”

간신히 짜낸 말은 상당히 진부했지만 준영은 그럼에도 웃어 주었다.

“네.”

* ♟ *

크리스가 돌아오기를 바란 준영이 엄청난 작전을 제시했다. 준영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어지간히 화가 났구나 싶었다. 조금 무리수가 있지만, 외가가 없는 준영이 마음 편하게 몸조리를 하기 위해서다 싶어 에드워드도 동의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뒤, 크리스가 돌아왔다.

준영의 입덧은 더욱더 심해졌다. 강한 냄새와 강한 향신료가 들어간 음식을 제외하고는 그런대로 먹을 수 있었지만 3개월이 되는 시점부터는 거의 미음 정도밖에는 먹지 못하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뭔가 먹고 싶은 거 없어?”

“딱히. ……과일 정도?”

“원하는 과일은?”

“모르겠어요. 먹고 싶다기보다 그거라면 들어갈 것 같아서요.”

겨우 쪘던 살이 다시금 퀭하니 빠져버렸다. 검진을 갈 때마다 제이크는 걱정 말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나날이 말라가니 에드워드는 애간장이 녹을 지경이다.

“억지로라도 잘 먹을 테니까 걱정 말아요.”

“……그래.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이제 슬슬 나서지 않으면 지각이십니다.”

출근 준비를 하고도 한참 동안 준영의 침대 부근에서 맴돌기만 하자, 보다 못한 크리스가 나섰다.

“아직 괜찮아.”

“준영도 슬슬 일어나서 씻고 가벼운 산책이라도 해야죠.”

“이렇게 기운이 없는데 산책이라니?”

“설마 제가 강행군이라도 시킬까 봐 그러십니까?”

다시 돌아온 크리스는 더욱 강력해졌다. 왜인지 모르지만 준영에 대한 책임감이 더 강해진 듯 보였다. 애초에 에드워드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듣는 경향이 있었지만 요즘 들어 더 심해졌다.

“에디. 크리스 말대로 하는 게 맞아요. 산책을 하고 나면 그래도 조금이라도 먹혀요. 몸이 축축 처지는 것도 좀 낫고요.”

“……그래?”

“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출근해요.”

준영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에드워드는 오늘도 태산 같은 걱정을 한가득 짊어진 채 떨어지지 않는 출근길 걸음을 떼야 했다.

“예상은 했지만 매일 아침 난리네요.”

“제라드는 안 그럴 것 같아요?”

허탈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크리스에게 준영이 팩트를 날렸다. 준영의 지적에 크리스가 입을 딱 다물고는 뚱하니 그를 돌아보았다.

“그놈이 여기서 왜 나옵니까?”

“그치만 제라드와 에디는 핏줄이고 무엇보다 크리스가 오메가니까 영 없는 미래는 아니잖아요.”

준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크리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아직도 오메가가 되어버린 자신이 적응되지 않나 보다.

“그 말을 해 주는 게 아닌데.”

“알았어요. 그만 놀릴게요. 큭큭.”

웃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만 웃음이 튀어나온다. 준영이 소리죽여 웃자 크리스가 도대체 뭐가 재밌냐는 듯 눈빛으로 따지고 들었다.

“그치만 생각만 해도 좋은 걸요? 크리스가 진짜로 가족이 된다는 사실이. 얼른 그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얼마 전 제라드는 정식으로 결혼 발표를 하였다. 덕분에 전국적, 아니 세계적으로 수많은 여성과 오메가들이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실제로 저택 앞까지 찾아와 농성을 벌이다 쫓겨나는 여성들도 몇 있었다. 새삼 제라드의 인기가 대단하구나 싶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하아…….”

결혼식 얘기가 나올 때마다 크리스는 저런 반응이다. 실제로는 좋으면서. 한숨을 쉬더라도 입가가 실룩대는 건 못 숨기면서도 늘 귀찮은 척 아닌 척한다. 저런 걸 일본말로 츤데레라고 했던가? 얼마 전 일본 만화책을 보다가 본 단어가 떠올라 또 혼자 큭큭 소리죽여 웃을 때, 크리스가 준영의 이불을 잡아 휙 하고 치워버렸다.

“자, 이제 침대에서 내려와서 세수하고 오세요!”

“크리스 너무 엄격해요. ……이럴 때만.”

“준영.”

“헤헤. 네.”

더 놀리면 정말로 삐지겠구나 싶어 준영은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짧은 낮잠을 자다가 문득 차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이 시간에 웬 차지?

의아함에 눈을 비비며 창가로 갔지만 이미 주차장으로 가버린 건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후암……. 졸리다.”

한 삼십 분 눈을 붙였나 보다. 더 잘까 하다, 오늘도 밤에 못 자고 뒤척거리면 안 된다 싶어 곧장 침실을 나왔다. 여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시원한 복도를 따라 걸어가기를 잠시, 언뜻 인기척이 에드워드의 서재 쪽에서 들려온다 싶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름용이지 않습니까. 이걸 신을 수 있는 개월 수쯤에는 봄일 텐데, 어떻게 신깁니까.”

“……음.”

“그리고 이 옷도 마찬가지입니다. 긴팔이라도 얇습니다. 어딜 보나 여름용인데 봄에 입기에는 여러모로 춥습니다.”

“고작 한두 달 차이인데 못 입으려나?”

“신생아가 한두 달 만에 몸집이 두 배로 불어난다는 건 모르시나 봅니다?”

“그래? ……그렇게 빨리 자라는 건가?”

“심지어 아직 성별도 모르는데 이런 핑크로만 골라서……. 하아.”

“……다른 걸로 바꾸도록 하지.”

보지 않아도 대충 무슨 일인지 감이 왔다. 얼마 전에도 아기 장난감을 사왔다가 돌 지난 아기가 쓰는 걸 사왔다고 크리스에게 잔소리를 엄청나게 들었는데 또다시 뭔가를 사가지고 왔나보다. 준영은 소리죽여 웃었다. 요즘 들어 이렇게 전전긍긍인 에드워드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사는 건 좋지만 태어나는 시기를 생각했어야지요. 심지어, 우량아로 태어나면 이런 작은 건 입히지도 못합니다. ……뭐 남성 오메가들이 우량아를 낳는 경우는 드물지만. 어쨌든. 아기가 태어나기 한 달 전에 준비해도 늦지 않단 말입니다.”

“명심하겠어.”

혼나는 에드워드는 불쌍하지만, 준영도 크리스와 같은 생각이라 딱히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아니, 자신은 못 할 잔소리를 해 줘서 고마울 지경이다. 솔직히 준영도 에드워드만큼이나 그에게 너무 약했다. 잔소리를 하다가도 풀죽은 에드워드를 보면 말이 쑥 들어간다.

어쨌든 이렇게 혼이 났으니 당분간은 뭔가를 사오지 않을 것이다. 준영은 소리죽여 웃으며 다시 자신의 침실로 돌아갔다.

끔찍한 입덧 기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식욕이 돌아왔다. 불과 일주일 전 만 해도 쳐다보지도 못했던 음식들이 당기기 시작했다.

눈을 뜨면 뭘 먹을까부터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에 당황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크리스는 물론 제이크도 아기가 원하는 거니 마음껏 먹으라고 말해 주었다.

“마음껏 먹고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운동하면 됩니다. 단, 열량 높은 음식은 피하구요.”

그렇게 허락도 받았겠다. 준영은 크리스의 잘 짜인 식단에 무럭무럭 살이 붙어, 한 달 만에 임신 초기 몸무게로 돌아왔다.

“배가 좀 나왔나?”

오늘도 출근을 미루며 준영의 배를 살살 매만지며 늦장을 부리는 에드워드의 모습에 준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살이 찐 게 아닐까요? 못해도 5개월은 넘어야 배가 좀 나온다던데.”

“아니야. 분명 아랫배가 살짝 나왔어. 예전 완전히 말랑했을 때와는 다르다고.”

“……남의 콤플렉스를 그렇게 집어대지 말아요.”

“왜 그게 콤플렉스야. 오메가는 당연한 일인데. 아기집을 위해 배에 근육이 덜 붙는 건 어쩔 수 없어. 그리고 난 그래서 더 좋은 거고. 너도 그렇지, 아가야?”

얼마 전, 제이크에게 손가락 발가락은 물론, 뇌 귀, 코 등등의 모든 부위가 다 만들어졌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 에드워드는 이렇게 매일같이 준영의 배에다 대고 속삭였다. 아직 작으니 소리도 잘 안 들릴 거라며 배에 바싹 입을 가져다 댄 뒤 말을 하는 에드워드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리만치 가슴 한켠이 간지러웠다.

“자식에게 규칙적이고 부지런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

대답은 불행히도 사랑스러운 아기가 아닌, 크리스가 돌려주었다. 오늘도 영락없이 제시간에 찾아와 늦장을 부리는 에드워드를 잡아 내쫓아버렸다.

에드워드는 차마 욕은 못 하지만 하고 싶다는 티를 팍팍 내며 침실을 나섰고, 준영은 오늘도 웃음소리로 아침을 맞이했다.

아침을 먹고 산책을 위해 밖으로 나섰다. 이제는 제법 더워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날 지경이지만, 그래도 에어컨 바람 앞에 계속 있는 것보다 나았다.

이리저리 산책을 하다, 커다란 정원수 아래의 벤치로 가 잠시 몸을 쉬었다. 커다란 그늘 아래 앉아 있어도 아직 낮이라 더웠다.

그럼에도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바람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고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고 있기를 잠시, 무언가가 툭 하고 머리 위에 떨어지는 느낌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딜 보는 거야.”

“……응?”

그제야 소리가 나는 곳을 올려다보았다. 너무나도 익숙한 남자가 나뭇가지에 늘어진 채 누워있다 상체를 일으켰다.

“하이.”

“하이. 거기서 뭐 해요.”

“더워서.”

“에어컨 바람이 더 좋다면서요.”

“정확히는 크리스가 무서워서 도망치는 중.”

“아하하. 왜요?”

“……묻지 마.”

나뭇가지를 잡아 휙 한 바퀴 돌듯 아래로 내려온 제라드가 힘없이 다가와 준영의 옆에 앉았다.

“잘못했으면 빌어요.”

“빌었는데 쫓겨났다니까.”

“아하하하.”

“그나저나. 우리 오랜만에 보네? 이 주 만인가?”

“그러게요. 촬영은 어땠어요?”

“모피코트를 원 없이 입었지.”

“저런.”

“실신까지 할 뻔했다니까.”

“고생이네요.”

“뭐, 그게 내 일이니까. 그나저나…… 우리 조카님은 이제 몇 개월이지?”

“4개월 조금 넘었어요.”

“헤에. ……그러고 보니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맘때쯤이지 않았어?”

제라드의 말에 준영은 그제야 두 사람이 처음 마주쳤던 게 바로 이곳이자,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라는 걸 떠올렸다.

에드워드와는 사이가 나빴고, 다른 가족은 물론 고용인들까지도 냉랭했던 그때 유일하게 친절하게 다가온 게 바로 제라드였다.

“……새삼 고마워요. 제라드.”

“갑자기? ……정 고마우면 크리스 좀 달래게 도와줘.”

“아하하하. 그럴게요.”

그러고 보면 에드워드와 자신 외에 제라드도 꽤 많이 바뀐 것 같다. 이런 팔불출 느낌은 아니었는데. 하긴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바뀌는 게 당연한 거니 어쩜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참, 임부복은 준비했어?”

“에디가 하도 많이 사줘서…….”

“또 크리스에게 엄청 혼났겠군.”

“말도 말아요. 여름용으로만 죄다 몇 벌을 산 건지. 배가 완전히 부를 때에는 추운 계절일 텐데…….”

“하하하. 천하의 테드가!”

솔직히 제라드도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훗날 정말로 크리스가 임신을 하게 되면 그때 실컷 놀릴 계획이다. 형과 너무 닮은 제라드의 모습을 말이다.

배가 제법 불러 이제는 산책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시기가 빠르게 다가왔다. 배 속의 아기는 무럭무럭 자랐다. 초반에는 너무 작은데다 준영의 자궁도 약한 편이라 걱정했지만 그 걱정이 무색하리만치 아기는 매우 건강하게 쑥쑥 성장하였다.

문제는 너무 커버렸다는 거다.

마지막으로 한 검진에서 제이크가 심각한 어투로 제시를 하였다. 이 주 뒤, 출산을 유도해 잘 되지 않는다면 제왕절개를 하자고. 여성 오메가도 아닌, 하물며 남자에다 자궁이 약한 준영에게 무리가 갈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말을 듣자, 슬쩍 겁이 났다. 괜찮다고 아무리 애를 써도 혼자 이렇게 멍하니 있을 때면 두려움이 준영을 사로잡았다.

괜찮을 거야. 아기도 나도 무사할 거야.

제이크가 절대 안전하다고 말해 줬어도 한번 올라온 두려움은 잘 사그라들지 않았다.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기 위해 준영은 침대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친 뒤 밖으로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다 막 거실을 가로지르던 크리스와 마주쳤다. 꽤 바쁜지 빠르게 걷던 크리스가 멈춰선 뒤 준영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준영? 추운데 어딜 가요?”

“답답해서. 온실이나 가 보려고요.”

“같이 갈까요?”

“아니요. 정말 잠시만 있다가 올 거예요.”

평소 같으면 거부해도 따라붙을 크리스지만, 정말로 바쁜 건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온실까지는 꼭 외투 걸치고! 조금만 있다가 돌아오깁니다!”

“네에.”

씩씩하게 대답하는 준영의 모습에 크리스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바쁘기는 어지간히 바빴나 보다. 크리스는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라는 잔소리까지 하고서야 발길을 돌렸다.

진짜 엄마 같다니까.

어린 동생을 키우다시피 한 경험이 많아서일까. 유달리 엄마 같다 생각하며 저택을 나섰다.

“어……. 눈이다.”

이제 3월 끝자락인데 눈이라니. 예상치도 못한 선물 같은 날씨에 감탄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작게 조금씩 내리던 눈발은 순식간에 굵어졌다. 이대로 가다간 한 시간도 안 돼서 제법 쌓이겠구나 하며 온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살얼음이 껴 있는 연못 위에는 벌써 하얗게 색이 덮여 있었다. 꽤 예쁜 광경에 넋을 놓고 쳐다보며 서 있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뜨끔한 통증과 함께 다리 사이로 뜨거운 액체가 느껴져 꽁꽁 굳었다.

……어?

익숙한 감각이었다. 그 예전, 첫 아이를 잃기 전에 딱 이런 감각을 맛보았다. 덜덜 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며 준영은 핸드폰을 꺼내기 위해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하필이면…….”

낭패다. 핸드폰을 침대 위에 그대로 올려놨던 게 떠올랐다. 준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도……, 도와줘요!”

“무슨 일이십니까!”

다행히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경호원인 것 같았다. 힘주어 소리를 내서일까, 다시금 울컥 아래에서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주룩 멋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빠르게 다가온 경호원이 덜덜 떨며 겁먹은 준영을 보더니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깨달았나 보다. 다급히 무전기로 연락을 취한 후 준영을 앞으로 안아 들었다.

준영을 안자마자 경호원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애써 태연한 척 미소를 지었지만 준영은 그 표정을 이미 한차례 본 적이 있었다.

“괘, 괜찮을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때도 그랬다. 그때도 크리스가 괜찮을 거라고 했다. 딱 지금처럼 저렇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다시금 두려움이 온몸을 휩쓸었다.

제발……. 하느님. 제발 이번에는 데려가지 마세요. 첫 아이도 그렇게 데려가 놓고……. 두 번째 아이도 데려가면. 나는……, 나는…….

에디. ……에드워드……. 나는……!

헐레벌떡 뛰어 응급실에 당도한 에드워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크리스와 제라드가 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에드워드를 발견한 크리스와 제라드가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두려움이 에드워드를 휩쌌다.

본능적으로 응급실 입구 쪽으로 다가가자, 제라드가 그런 에드워드를 잡아당기며 말렸다.

“테드. 수술 중이야!”

“준영은!”

“괜찮을 거야. 제이크가 걱정 말라 당부하고 들어갔어.”

연락이 온 지 벌써 30분이 넘었다. 제왕절개 수술이 이렇게까지 오래 걸리는 수술이 아니라는 건 비전문가인 에드워드도 잘 안다.

“곁에…… 있었어야 했어.”

오늘따라 유달리 준영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어젯밤 꿈이 괜스레 이상해 평소보다 더 미적거렸었다. 역시나 출근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전문분야의 최고라 할 수 있는 의사들은 모두 모였어. 그리고 그 때와 달라. ……무슨 뜻인지 알지?”

제라드가 안절부절못하는 에드워드의 어깨를 잡으며 위로했다. 굳은 목소리가 그도 지금 얼마나 걱정을 하고 있는지가 보였다. 크리스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바보같이 가장 이성을 유지해야 할 자신이 가장 멍청하게 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에드워드는 길게 숨을 고루 쉰 뒤 자세를 바로 하였다.

지금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러니 어떻게든 냉정하게 이성을 유지한 채 기다려야 했다.

행여나 가장 최악의 상황이 된다고 할지라도, 준영에게 괜찮다 달래어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니까.

눈을 떴는데도 이상하니 몽롱했다. 준영은 자신이 병실의 침대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멍하니 두 눈을 꿈뻑이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준영!”

익숙한 목소리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눈동자가 빨갛게 충혈된 에드워드가 시야 가득 들어왔다.

“왜 울어요…….”

“준영. 괜찮은 거야?”

“네. ……아기는?”

“알고 있었어?”

준영의 질문에 에드워드가 당황했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양손을 잡아 주었다.

“아기는 건강해. 예정일보다 일찍 나와서 인큐베이터에 들어갔지만, 전체적으로 건강하다고 하더군.”

“아기……, 보고 싶은데.”

“네 품에서 한참 잤었어. ……네가 바로 눈뜨지 못해서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러게요. 아쉽다.”

정말로 아쉬웠다. 꿈속에서 잠시 만나기는 했지만 실제로도 보고 싶었다. 잠시 꿈속에서 만났던 아기를 떠올리다, 언뜻 시선이 느껴져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왜요?”

“아니. 담담해서. ……놀랄 거라고 생각했거든.”

“……꿈을 꿨어요.”

“꿈?”

“응. 할머니가 고생했대요.”

눈을 떴을 때, 할머니가 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축하한다며, 너무 예쁘다며. 아기도 너도 건강해서 기쁘다고. 그렇게 말해 준 뒤 준영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고는 사라졌다.

그리고 가위눌린 것 같은 상태로 자신의 가슴팍 위에 엎드린 채 고롱거리며 잠들어 있는 작디작은 아기를 한참을 바라보았다.

눈을 뜨자마자 안아 줘야지.

사랑한다고, 날 찾아와줘서 고맙다고 속삭여 줄 거라고 다짐했지만 불행히도 마취에서 깨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나 보다.

“그렇구나.”

믿지 못할 말일 텐데도 에드워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준영의 이마에 이마를 가져다 대며 그를 꽉 끌어안았다.

“무사히 눈을 떠 줘서 고마워.”

“네.”

“……사랑해.”

“사랑해요.”

에드워드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제야 그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잠들어 있었던 자신과 달리 에드워드는 기다리는 내내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준영은 링거를 맞지 않은 손을 뻗어 에드워드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에드워드는 준영이 왜 그러는지 아는 것처럼 그를 안고 있던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케이티! 9살 생일을 축하해!”

초대받은 케이티의 친구들이 웃으며 박수를 쳐 주었다.

예쁜 드레스를 입고 한껏 뽐낸 케이티는 환하게 웃으며 친구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너무 과하다시피 한 드레스지만 저렇게 좋아하고 또 잘 어울리니 되었다 싶다.

“엄마. 나도 나도.”

누나의 생일이라고 그렇게 타일러도 의미가 없나 보다. 이제 3살이 된 조쉬는 그저 촛불을 불고 싶은 생각에 만약 안절부절못했다.

그 모습을 본 케이티가 다가와 조쉬를 안아 들었다. 이제 조쉬도 제법 커 안기 힘들 텐데도 케이티는 가녀린 외모와 달리 힘이 장사다. 에드워드는 케이티가 자신의 어릴 때와 너무 비슷하다며 알파가 아닐까 한다.

“자. 조쉬. 하나 둘 셋 하면 부는……. 어, 불었다.”

성격 급한 조쉬는 설명이 끝나기도 전 촛불을 불어버렸다. 황당해하는 케이티와 달리 조쉬는 목적을 달성해서일까 그저 좋다고 웃을 뿐이다.

그 모습에 결국 모두가 환하게 웃었다.

낮잠 잘 시간이라 졸린지 자꾸 떼를 쓰는 조쉬를 안아 들고 크리스에게 뒷일을 부탁하고는 결국 집 안으로 들어왔다.

곧장 조쉬의 방으로 올라가 안으로 들어섰다. 날씨가 좋아 열어놨던 창문 너머 케이티의 밝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에 걸어오는 동안 살짝 잠들었던 조쉬가 다시 꿈틀거렸다.

준영은 서둘러 창문을 닫고는 꼬물꼬물 깨려는 조쉬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 옛날, 밤이 무서워 잠들지 못할 때 할머니가 불러 주었던 자장가를 부르며 방 안을 돌아다니자 얼마 가지 않아 쌕쌕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후후.”

언젠가 크리스가 한 말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의 동생들은 물론 크리스와 제라드의 아들인 피터도 재우는 게 그렇게 힘들다며 케이티와 조쉬가 잘 자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신기해했었다.

잠든 조쉬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힌 후 잠시 토닥여준 뒤 이불을 덮어주었다.

에드워드를 쏙 닮은 케이티와 달리 조쉬는 준영을 꽤 닮았다. 검은 머리카락과 얼굴의 생김새가 전체적으로 준영과 비슷했다. 다만 커다란 눈과 푸른 눈동자는 영락없이 제 아빠였다.

“잠들었어?”

문 열리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언제 온 건지 에드워드가 안으로 들어섰다.

“늦어질 거라고 했잖아요.”

토요일인데도 갑자기 급한 일이 터졌다며 출근을 한 에드워드 때문에 케이티가 얼마나 속상해했는지 모른다.

“대충 급한 불만 끄고 왔어. 금방 돌아가 봐야 돼.”

“그럼 케이티 옆에 있어 주지 그랬어요.”

“선물을 보더니 날 내팽개치더군.”

“저런.”

노골적인 실망을 가득 담은 에드워드의 푸념에 준영이 차마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숨죽여 웃었다. 딸 바보 에드워드는 나날이 커가는 딸의 모습에 요즘 그렇게 서운해한다.

“조쉬는?”

“방금 잠들었어요.”

“촛불시위는 무사히 넘겼고?”

“케이티가 착하게도 조쉬에게 양보했어요.”

“정말 착하군. 누가 내 딸 아니랄까 봐.”

“그렇죠? 후후. ……그래서 말인데요.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얼마 전부터 계속 고심하던 내용을 조심스럽게 꺼내었다. 에드워드도 곧장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먼저 제시한 건 그였으니까.

“두 아이들만 괜찮다면, ……나도 그러고 싶어요.”

입양을 하자는 말은 에드워드가 먼저 꺼내었다. 임신을 하지 못했을 때의 마지막 수단이라 생각했지만 에드워드는 달랐다. 능력이 되는데도 하지 않는 건 아닌 것 같다고. 분명 자신과 연을 이을 아이들이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건 결과적으로 케이티와 조쉬에게도 좋을 거라고.

고아인 자신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인데 에드워드가 먼저 제안을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만약 단둘이었다면 흔쾌히 받아들였겠지만 아이들도 있어 결정을 내리는 데 더 오래 걸려버렸다.

“우리 애들은 괜찮을 거야. 오히려 형제가 생겼다며 좋아할 걸? 물론 싸움도 할 거고 불만도 생길 테지만……. 그건 피를 나누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봐.”

그래도 남은 준영의 작은 두려움까지 읽은 에드워드의 말에 결국 항복했다.

“응. 맞아요.”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아니까. 피가 통하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안다.

잠든 조쉬를 바라보던 에드워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준영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늘 그랬듯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익숙한 그의 품 안에서 눈을 감은 채 감미로운 체향과 체온을 느꼈다.

“우리는 잘해갈 수 있을 거야. 왜냐하면 준영의 사랑을 듬뿍 받을 테니까.”

“에디는요?”

“나도 사랑해 줘야지. 나도 아직은 받고 싶다고.”

“하하. 그게 뭐예요. 그러니 케이티가 아빠는 필요 없다고 하죠.”

딸 바보인데도 불구하고 준영과 케이티 사이에서 늘 준영의 손을 들어 주니 아이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것이다.

덕분에 케이티는 에드워드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아빠와 결혼할래 하는 나이 아니야?”

“그런 말을 하기에는 난 엄마 꺼야 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되죠.”

준영의 일침에 에드워드가 푹 고개를 숙인다. 나날이 아이처럼 바뀌는 남자의 모습에 결국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웃어버렸다.

“……엄마? 아빠? 아빠닷!”

결국 조쉬가 깨버렸다. 아차 하고 입을 틀어막아 보지만 늦었다.

잠은 깼지만 수면 부족 때문인지 이내 울먹이는 조쉬에게 에드워드가 빠르게 다가가 안아 들었다.

“내가 재울게. 나가서 볼일 봐.”

“네.”

아빠의 품에서 칭얼거리는 조쉬의 이마를 쓰다듬은 뒤 에드워드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바로 눈치 챈 에드워드가 자세를 낮추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그의 볼에 입맞춤을 해 주었다.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주문처럼 서로의 입술에 입맞춤을 한 뒤 손을 흔들고는 방을 나섰다. 곧장 일 층으로 내려가자 열린 창문 너머 웃음소리가 왁자지껄하게 들려왔다. 준영은 창가 쪽으로 가 분수대 근처에 있는 파티장을 바라보았다.

입양을 하고 나면 아마 생각도 못 한 일로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걱정은 되지 않는다. 진실되게 대한다면 분명 새로운 가족이 된 아이들도 마음을 열어줄 거다.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린다. 마치 임신을 알았을 때처럼 벅차올랐다.

자신은, 에드워드는, 자신의 가족은 분명 잘해갈 것이다.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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