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4)

[13]

<외전 1 신혼여행>

준영은 눈을 뜬 지 한참 전이지만, 도저히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엉덩이 사이로 선명하게 느껴지는 이물감은 몇 번을 경험해도 익숙해 지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제발 이러지 말라니까……

후유증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부끄러웠다.

이틀 전에는 멋도 모르고 빼려다가 에드워드를 깨워 아침부터 진탕 뒹굴어야 했다. 오늘도 그럴 것 같은 불길함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민 중이다.

벌써 아침 8시가 훨씬 넘었다. 배고픔도 배고픔이지만 문제는 슬슬 작은 볼일이 보고 싶어졌다. 결국 견디다 견디다, 조심스럽게 이어진 부분을 빼려 했지만 어젯밤부터 연결된 건지, 정액이 말라붙어 쓰라림이 느껴질 정도였다.

조심조심…….

에드워드가 깨지 않게, 아주 천천히 연결을 빼려는 그때, 준영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에드워드의 팔에 힘이 들어간다 싶더니 깊숙한 곳까지 단숨에 파고들었다.

“힉……!”

밤새도록 자극을 받은 탓에 조금만 건드려도 너무 예민하게 느껴졌다. 파르르 떠는 준영을 잠시 보던 에드워드가 목덜미를 깨물듯이 빤다 싶더니 다시 끝까지 빼내고는 퍽 하고 쳐올렸다.

“앙! 흣……! 그만, 나, 나……, 급해요……!”

“나도 급해. 금방 해결해 줄 테니까.”

“아니, 아니, 그게 아, 힉! 아니라구요!”

고개를 마구 저으며 이제 그만하라고 거부해도 요지부동이다. 에드워드는 아주 본격적으로 준영의 안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깊숙이 쑤셔 박고는 허리를 크게 돌려 예민한 부위를 짓누른다. 눈앞이 번쩍번쩍 섬멸했지만, 문제는 자극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위급해진다는 거였다.

“그만!”

퍽!

결국 더는 한계인 준영은 온 힘을 다해 에드워드를 밀치고는 빠르게 침대를 벗어났다.

“준영?”

놀란 에드워드에게 상황 설명을 할 정신도 없었다. 정말 한계의 한계였다. 집도 아니고, 아니 집이어도 문제지만, 여하튼 호텔에서 이런 추태를 보일 수는 없다. 준영은 황급히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문제는 놀란 에드워드는 영문도 모른 채 뒤따라왔다는 거다.

“나가요! 나가, 흑…….”

결국 실수를 해 버리고야 말았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창피함에 준영은 그 자리에 서서 엉엉 소리 내어 울어버렸다.

솔직히 화가 났다기보다는 창피함이 더 컸다. 준영은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작은 방에 들어가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곳은 영국이다. 런던에 당도한 지 벌써 2일째건만, 준영은 호텔에 들어온 뒤에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중이다.

첫날은 자그마치 반나절 동안이나 발정 난 에드워드에게 시달려서였고, 지금은 실수로 인해 창피해 방 안에 처박혀 있기 때문이었다.

“준영. ……그래도 점심은 먹어야지.”

장장 두 시간 동안 문밖에서 준영을 부르며 사과하는 에드워드의 목소리가 조금 기운이 없어 보였다.

설마 너무 오랫동안 삐져 있어서 오히려 에드워드가 더 크게 삐진 건가 싶어 덜컥 겁이 올라왔다. 에드워드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래도 걱정이 살짝 되어 침대에서 내려와 문 앞으로 걸어갔다.

슬쩍 문을 열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에드워드가 보였다.

“드디어 문 열어주는구나.”

안도한 건지 후 하고 한숨을 내쉬는 에드워드를 보자 되려 미안함이 올라왔다. 생각해 보면 에드워드도 몰라서 그런 것뿐인데 자신이 너무 심했던 것 같다.

“아직 화났어?”

준영이 말없이 고개를 젓자 에드워드가 다시금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이어 활짝 문을 열었다.

“정말 미안해. 알았다면 그렇게 안 했을 거야. 그리고 창피해하지 마.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는 거니까. 오히려 귀여웠다니까. 실수했다고 얼굴이 완전히 붉어진 준영의 표정이 얼마나……, 아.”

뒤늦게 준영의 분위기를 눈치챈 에드워드의 얼굴이 다시 사색이 되어갔다. 당황한 그가 황급히 사과를 하려 했지만 준영이 더 빨랐다.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가 쾅 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다시금 에드워드의 사과가 이어졌지만 준영은 무선이어폰을 귀에 꽂고는 음악을 틀어 소리까지 단절시켰다.

이번엔 절대로 용서 안 해 줄 거야!

준영답지 않게 꽤 제대로 삐져 버렸다.

정말 오고 싶지 않았지만, 거의 하루 꼬박 침묵시위를 하는 준영에게 결국 에드워드가 져버렸다.

어떻게 하면 준영의 화가 풀릴까 고민하다가 떠오른 생각을 미루다 미루다 결국 항복했다. 함께 침묵이 감도는 저녁을 먹던 중 슬쩍 떠보았다.

“이 근처에 꽤 괜찮은 클럽이 있다고 하던데…….”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준영의 두 눈이 동그랗게 바뀌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에드워드를 노골적으로 쳐다보았다.

하긴 이해는 간다. 한국에서는 물론 호주에서도 클럽을 가 보고 싶어 하는 준영의 말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최근 준영의 몸에서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한 향이 뿜어져 나왔다.

제이크 말로는 준영이 걸음마를 배우듯 페로몬을 자연스럽게 조절할 수 있는 시기를 놓쳤기 때문이라고 했다. 더 쉽게 설명한다면 14살쯤 발현되는 페로몬의 양은 작아 어린 나이에 자연스럽게 조절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지만 준영은 갑자기 성인 페로몬을 맞은 어린아이와 같다고 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결국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법을 배우겠지만 문제는 지금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즉, 결론은 달콤하고도 유혹적인 향을 항시 뿜어대는 준영을 늑대 무리에 던져 놓는 꼴이란 거다.

물론 처음에는 준영에게 지금 향이 너무 많이 나와서 안 된다고 말을 할까 싶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여리고 소심한 준영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창피함에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갈 게 뻔했다.

준영도 자신의 몸에서 페로몬이 뿜어져 나오는 건 대충은 알지만, 그는 정말 잘 모르고 있다. 실제로 사람들이 많이 모인 거리를 걸어가면 알파들이 노골적으로 준영을 쳐다보았다. 준영은 그들이 에드워드를 쳐다본다고 착각했지만 말이다.

“에디! 이건 어때요?”

걱정스러운 에드워드와 달리 준영은 신이 났다. 아까까지만 해도 눈도 마주치지 않던 준영은 신이 나서 입고 갈 옷을 고르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심란한 기분을 차마 표정에 드러내지 못한 채 미소를 지으며 준영이 가져온 옷을 보았다.

“안 돼.”

“네? 왜요?”

“너무 붙어. 그렇게 딱 붙는 옷을 입어서 어쩌려고. 그 바지도 그래. 여자들이 입는 스키니보다 더 붙잖아. 안 돼.”

“……어디가요?”

준영이 황당하다는 듯이 자신의 바지를 내려다보았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그저 평범한 청바지지만 에드워드의 눈에는 살짝 선이 드러나는 것조차 신경이 쓰인다.

“여하튼 안 돼.”

“……이것도 저것도 안 된다고만 하고.”

벌써 세 번째 퇴짜를 놨더니 결국 준영이 다시금 삐졌다. 에드워드는 결국 또 한 번 한 발짝 물러서야 했다.

도대체 어디가 야하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저 평범한 남색 셔츠에 진청바지인데 말이다. 사실 자신보다 에드워드가 반칙이다. 대충 셔츠 하나를 꺼내 입고 슬랙스 바지를 입었을 뿐인데, 몸이 좋아서일까. 마치 톱모델 같은 느낌이다.

실제로 클럽 밖에서 기다리는 내내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고 난리다.

준영은 사람들의 시선을 쫓아 다시금 에드워드를 보았다. 회사에 출근할 때와 다르게 자연스럽게 내려온 반곱슬 머리카락 때문일까, 평소보다 10살은 더 어려 보였다. 20대 후반이라고 해도 믿겠다.

“왜? 이상해?”

“아니요.”

준영의 시선을 눈치챈 에드워드의 질문에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언제 들어가는 거지? 귀찮군.”

“그러게요. 앞에서 검사하는 게 오래 걸리네요.”

생각해 보니 에드워드는 이런 곳에서 기다릴 리 없을 것 같다. 애초에 모범생 이미지가 커서일까. 클럽도 안 갔을 것 같은 분위기다.

“에디는 클럽 와 본 적 있어요?”

“대학교 때에는 종종 갔었지.”

“정말?”

“내가 그렇게 루저로 보여?”

너무 노골적으로 놀라서인지 에드워드가 조금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설마요. 루저가 아니고……. 음……, 워낙 모범생 느낌이라…….”

“공부만 했을 것 같아? 뭐, 틀린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학생 때에는 나름 즐겼어. 매일같이 노는 놈들만큼은 아닐지라도.”

“그렇구나…….”

“갑자기 그건 왜?”

“응? 아……. 클럽 줄을 기다리는 걸 엄청 지루해하길래요.”

“그거야 늘 바로 들어갔으니까.”

“왜요?”

“내 입으로 말하기 좀 그렇지만 이상하게 늘 직원이 먼저 들여보내 주던데?”

“아. ……과연.”

이곳은 모르겠지만 미국의 클럽은 간혹 엄청 잘난 사람들은 프리 패스로 입장을 시키기는 했다. 빽이 있거나, 연예인이거나, 미남미녀거나.

에드워드는 연예인은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TV에 종종 모습을 보였으니 거의 연예인급이다. 즉 세 가지 조건을 다 갖춘 셈이니 당연히 프리 패스일 거다.

“그렇게 따지면 준영은 클럽에 자주 와 봤어?”

“아니요? 전혀.”

클럽은커녕 작은 바도 제대로 못 갔다. 일단 돈보다 시간이 없었다.

“오히려 나보다 준영이 익숙해 보이는데?”

“그건 클럽을 매일같이 가던 녀석이 수다쟁이라서요. ……그래서 꼭 한 번 와 보고 싶었어요.”

대충 어떤 곳인지는 안다. TV에서도 종종 보여주는 데다, 햄턴 사에서 일할 때 같은 동료가 주야장천 말해 주는 바람에 가지 않아도 간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꼭 와보고 싶었다.

“그렇군.”

에드워드는 더는 질문을 하지 않았지만 준영의 어깨를 잡아당겨 품 안에 오도록 만들었다.

“오고 싶으면 말해. ……단 무조건 같이지만.”

“네!”

그렇게 오는 걸 싫어하더니 갑자기 왜 저런 태도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기쁜 것도 사실이라 준영은 사심 없이 활짝 웃었다.

그때 직원들로 보이는 남자들이 천천히 줄 서 있는 사람들을 살피며 걸어온다 싶더니 역시나 에드워드 앞에서 멈춰 섰다.

직원은 에드워드를 빠르게 훑어보더니 고갯짓으로 또 다른 입구를 가리켰다.

“당신 혼자면 바로 들어가도 되는데.”

남자의 말에 왠지 모르게 얼굴에 열이 올랐다. 준영은 팍 소리가 나도록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왜 그래야 합니까?”

에드워드의 목소리가 차갑다. 이러다 싸움이라도 날까 싶어 다시 고개를 들어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싸우지 말라는 준영의 뜻을 알아차린 건지 에드워드는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한없이 차가운 표정으로 직원들을 응시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고 하던 일 하시죠.”

분명 웃고 있지만, 제대로 화가 난 걸 알 수 있었다. 준영과 다르게 직원들은 에드워드의 심정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분위기다. 하긴 겉만 보면 온화하게 웃고 있으니 모를 수밖에. 하지만 준영은 안다. 지금 에드워드가 그 어느 때보다 화가 나 있다는 걸 말이다.

“뭐, 맘대로 하시든지.”

다행히 직원들은 별다른 말없이 그들을 지나쳤다. 준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다른가 보다. 여전히 못마땅한 눈빛으로 이미 멀어진 직원들을 무섭게 쳐다보고 있었다. 준영은 에드워드의 손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저었다.

“무시해요. 네?”

자신도 화가 난다. 솔직히 노골적으로 이런 취급을 받았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 때문에 언성을 올려 기껏 좋은 날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신혼여행을 시작한 지 벌써 20일이 지났다. 지금까지 한국, 일본, 호주 많은 곳을 보고 다녔다.

이제 남은 10일 정도, 가급적 좋은 추억만 남기고 싶다. 준영은 잠깐의 불쾌감을 쿨하게 털어버렸다.

에드워드도 준영의 생각을 파악한 건지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어 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었다.

“그래.”

“고마워요. 나 때문에. 아, 줄 움직인다.”

또 한 팀이 들어갔나 보다. 줄이 당겨져 한걸음 옮겼다. 런던에서도 가장 핫하다는 클럽이라 그런지 확실히 사람들이 많았다. 조금 일찍 온 편이라 그래도 줄이 길지 않았지만, 뒤를 보니 엄청나다. 저 사람들은 문 닫기 전에 들어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테드?”

익숙한 호칭에 고개를 돌렸다. 막 준영의 옆을 지나치다 걸음을 멈춘 걸로 보이는 한 남자가 놀란 눈으로 에드워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드워드, 제라드와 맞먹을 정도로 잘생겼다 싶은 남자의 외모에 감탄을 하는 것도 잠시, 이어지는 행동에 정말로 크게 놀랐다.

“세상에! 테드!”

갑자기 에드워드를 와락 끌어안는다 싶더니 그대로 양 볼에 키스를 퍼부었다.

에드워드는 질색하며 남자를 밀어내며 짜증을 내었다.

“그만해.”

“하하. 너무 반가워서 말이야.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다니. 정말로 반가워. 테드!”

“훗. 그러게.”

친구가 제이크만 있는 게 아니구나.

에드워드가 들었다면 상처를 입었을 만한 생각을 하며 준영은 남자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찡긋.

준영의 시선을 눈치챈 남자가 느닷없이 에드워드의 어깨너머로 준영에게 윙크를 하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미소를 보는 순간 알았다. 그가 그렇게 준영을 반기는 게 아니라는 걸.

에드워드의 지인과 함께 예상보다 훨씬 빨리 안으로 들어온 건 좋았지만,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준영은 말없이 칵테일을 홀짝거리며 힐끔 에드워드를 보았다. 대학교 친구라며 처음에 인사를 시켜준 걸 빼고는 주야장천 다니엘이란 남자와 대화를 나누기 바빴다. 준영은 다시 한번 홀짝 칵테일을 마시고는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VIP석이라 그런지 화려하기 짝이 없다. 일 층의 무대는 물론 분위기도 앉아서 훤히 보일 정도로 좋은 위치였다. 음악도 신나고 물오른 사람들과 댄서들의 춤사위도 신났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가슴 한켠이 가라앉았다.

아마도 간간이 준영을 보며 싱긋이 웃는 다니엘의 태도 때문일 거다.

분명 웃는데 웃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워낙 잘난 에드워드의 옆에 있다 보니 얼떨결에 많이 봐 온 눈빛이다.

‘뭐야? 별거 아니네?’

거의 대다수가 그런 눈으로 준영을 보았다. 그리고 다니엘은 명백히 준영에게 눈빛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주제에 감히 에드워드 옆에 서 있어? 라고 말이다.

“에디. 나 밑에 내려가 볼게요.”

“뭐? ……그래.”

당연히 같이 가자고 할 줄 알았다. 에드워드는 잠시 어쩔까 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을 해주었다. 그리고 다시 다니엘과 대화를 이어갔다. 준영은 멍하니 에드워드를 바라보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같이 가요. 나도 심심하니까. 대니. 나 갔다 올게.”

“다른 놈에게 한눈팔지 마.”

“뭐래.”

다니엘의 파트너라고 밝힌 케빈은 한눈에 봐도 오메가였다.

자신과 다르게 엄청나게 예쁜.

누가 봐도 오메가라고 인정할 만큼 가늘고 여려 보이고 보호본능이 물씬 피어오를 것 같은 느낌이다.

“준영, 가요.”

케빈은 준영의 손목을 잡고는 성큼성큼 빠르게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떨결에 끌려가다시피 일 층으로 내려왔다.

계단 옆의 스피커 소리에 귀가 아플 지경이다. 빛도 너무 화려했다. 어두운데도 눈이 부셔 고개를 숙인 채 스피커에서 최대한 멀어졌다. 이제야 조금 살겠다 싶어 고개를 들었다.

사람……, 진짜 많네.

아까보다 더 많은 것 같다. 하긴 오늘이 금요일이니 당연한 일일 거다.

준영은 멍하니 음악과 술에 취해 몸을 흔드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뭐가 그렇게 신나는 걸까. 하나같이 즐거운 미소를 연신 짓고 있었다.

“헤이! 혼자야?”

갑자기 누군가가 준영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노골적으로 상체를 비벼댔다. 놀란 준영이 황급히 뒤로 물러서자, 남자가 킬킬거리며 웃는다.

준영은 서둘러 남자를 피해 조금 더 바깥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후우…….”

테이블이 있는 외곽 쪽으로 가자 그나마 살 것 같다.

“준영! 왜 이러고 있어?”

언제 따라붙은 건지 케빈이 몸을 흔들며 다가왔다. 대답을 해봐도 음악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아 어깨만 으쓱거리자, 케빈이 잠시 멀뚱히 준영을 보다 그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사람이 없는 벽 쪽으로 가 멈춰 섰다.

“여기는 그나마 조용할 거야.”

“그러네요.”

여전히 음악 소리는 컸지만,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귀가 왠지 멍한 것 같다며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가 떼기를 반복할 때 케빈이 준영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맥주?”

“마셔. 목 안 말라?”

“아, 저기…….”

분명 남이 뚜껑을 열어주는 거 절대로 먹는 거 아니라고 했지? 예전 클럽광 녀석이 해준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엄밀히 남은 아니었다. 비록 다니엘이 노골적으로 준영에게 이상한 눈빛을 보냈다고 해도 케빈까지 싸잡아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준영은 잠시 고민하다 맥주병을 건네받고는 고맙다 웃었다.

“마시고 기분 나면 추러 와. 난 거의 중앙에서 노니까.”

케빈은 손을 휙휙 흔들며 다시 안으로 들어섰다. 준영은 케빈이 멀어지는 걸 잠시 보다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시원한 맥주가 칵테일의 단맛을 가라앉혀 주었다.

시원하네.

생각보다 칵테일이 달았나 보다. 준영은 깔끔한 맥주 맛에 반해 다시금 들이켰다.

“생각지도 못했어. 네가 이곳에 올 줄은.”

“비밀리에 여행 중이라.”

매스컴이 떠드는 게 싫어 가급적 조심하는 편이었다. 다니엘 로스키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은 건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여왕의 외손주 다니엘 로스키는 직계 왕자들만큼이나 인기가 뛰어났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는 영국에 내로라하는 기업의 사장이니 더하다. 그와 만나면 싫어도 언론에 노출이 된다.

“그래도 나한테도 연락을 안 주다니. ……결혼식 때 부르지 않은 것도 슬펐다고 친구.”

“미안. 이래저래…… 이유가 좀 많았어.”

말 그대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다시금 올라오는 과거에 착잡함을 숨길 수 없어 얼음이 거의 다 녹은 위스키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다니엘이 넌지시 물었다.

“결혼 생활은 행복해?”

“……응.”

이것만은 자신 있었다. 에드워드는 절로 지어지는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다니엘은 이번에도 뜻 모를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곧 미소를 만면에 띠며 기뻐했다.

“네가 행복해 보이니 정말 다행이야.”

“그러는 넌? 잘 지내?”

“나야 늘 변함없지.”

“여전히 그림 그리고?”

“뭐, 취미생활로. 그보다 테드. 영국에는 언제까지 머무를 거야?”

“이제 막 왔으니 3일 정도?”

“구체적인 계획이 아닌가 봐?”

“생각나는 대로 다니는 편이야. 아이슬란드도 가 볼까 생각 중이고.”

“와우. 고생할 텐데?”

“준영이 오로라를 꼭 눈으로 보고 싶다고 해서. 나도 간만에 가 볼까 싶어. 그때 꽤 괜찮았거든.”

빈 컵에 다니엘이 다시 얼음과 위스키를 채워 주었다. 에드워드는 천천히 컵을 흔들어 적당히 녹인 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꽤 괜찮은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맞아. 꽤 괜찮았지.”

자신의 잔에도 위스키를 채운 후 다니엘이 컵을 들어 올렸다. 에드워드는 가볍게 컵을 부딪치고는 싱긋이 웃으며 위스키를 마시다 문득 시야에 들어온 광경에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

“내려갔다 올게.”

분명 벽에 기댄 채 서 있는 사람은 준영이다. 춤을 추러 내려간 줄 알았는데, 구석의 벽에서 저렇게 서 있다. 경호원이 주변에서 준영을 지키고 있어 위험하지는 않겠다 싶어 따라가고 싶은 걸 꾹 참았는데, 왜 혼자 저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무슨 일 생겼어?”

다급히 룸을 나서려 하자 다니엘이 당황하며 묻는다. 에드워드는 막 문을 열려다,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니야. 나 안 올라올지도 몰라. 기다리지 마.”

“서운하네. 몇 년 만에 만났는데. 그럼 영국 떠나기 전에 한번 와. 저녁이나 같이 먹자. 물론 네 부인도 함께.”

“음……. 알았어. 준영에게 물어볼게. 아마 좋아할 거야. 그럼.”

지금까지 준영은 에드워드의 지인들에게 늘 호감 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러니 아마 대학교 동창인 다니엘의 초대를 흔쾌히 받아 줄 것이다.

에드워드는 서둘러 복도를 따라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막 계단을 올라오던 다니엘의 애인과 마주쳤다.

“춤추러 가시나 봐요?”

“네.”

“준영은 춤 생각은 별로 없어 보이더라구요. 저기 동쪽 벽 근처에서 구경하고 있던데…….”

“알아요. 봤습니다. 그럼.”

조금은 따분한 표정으로 설명해 주는 케빈에게 고맙다 말하고는 다시 발길을 재촉했다. 중간중간 노골적으로 달라붙는 사람들을 물리며 준영이 있던 곳으로 다가갔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유달리 많군.

생각해 보니 자신이 클럽을 잘 가지 않았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 사람이 많았다. 평일에 가도 유달리 에드워드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잘 알아 클럽을 어느 순간부터 끊었다.

가뜩이나 사람도 많은데 준영도 체격이 작은 편이라 잘 보이지 않는다. 경호원이 서 있는 곳을 보자 그가 눈짓으로 위치를 알려주었다.

사람들 벽을 헤치고 나가자, 드디어 시야에 준영이 들어왔다.

한 손에 맥주병을 들고 벽에 기댄 채 멍하니 사람들을 보고 있는 준영의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가 기대섰다.

지독한 향수 냄새들과 시끄러운 음악 소리 때문인지 준영은 에드워드를 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그나저나 준영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다. 조금 기운 없는 표정에 왜 그러나 하고 덩달아 멀뚱히 바라볼 때, 준영이 드디어 고개를 돌렸다.

“엇? 에디! ……언제.”

놀란 준영이 두 눈을 크게 뜨고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왜 이러고 있어.”

“그게. 음……. 그러게요.”

뭔가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이어 배시시 웃는다. 준영을 오래 만난 건 아니지만 그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한 가지뿐이라는 걸 안다.

에드워드는 준영의 손에 있는 맥주병을 뺏듯이 들어 근처의 웨이터에게 건네주고는 사람들 틈새로 파고들었다.

“에, 에디!”

“어려울 거 없어. 그냥 나만 보고 즐겨.”

준영의 허리와 엉덩이를 양손으로 꽉 잡은 채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준영의 얼굴이 보란 듯이 붉어졌다.

“따라 해 봐. 이렇게. 그래. 잘하네.”

천천히, 에드워드가 시키는 대로 다리와 팔을 흔들기 시작했다. 어설픈 행동이 어찌나 귀여운지. 솔직히 빈말로도 춤에 재능이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에드워드의 눈에는 한없이 사랑스러워 보이니 된 거다.

에드워드는 정말 간만에 노골적으로 춤을 추었다. 예전 자신을 꼬시기 위해 여자들이 달라붙어 추었던 끈적한 춤사위를 본의 아니게 기억하고 있어 어렵지는 않았다.

에드워드의 춤에 준영의 얼굴은 더할 것 없이 달아올랐다. 안절부절못하는 준영에게 더욱 허리를 붙여 일부러 비벼대자 이대로 펑 하고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붉게 타올랐다. 붉은 조명에도 훤히 보일 정도로 말이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자 자꾸만 가학심이 올랐다. 이대로 이곳에서 준영을 끌어안고 키스를 퍼붓고 밀어뜨려 그를 범하고 싶다. 이 사랑스러운 생물이 얼마나 예쁘게 우는지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다. 하지만 반대로 그 모습을 자신이 아는 다른 이가 본다고 생각하자 질투심이 들끓는다.

본인이 생각해도 우스운 감정 변화에 허탈한 웃음이 멋대로 튀어나왔다.

……응?

잠시 상념에 젖어 있느라 미처 준영의 상태를 살피지 못했다.

달콤한 냄새.

익숙하지만 평소보다 훨씬 짙다. 부끄러워 자신도 모르게 페로몬을 방출하는 건가 했지만 아니다. 틀렸다. 준영의 입에서 거친 숨이 튀어나오더니 이어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달콤한 향이 그를 중심으로 퍼져 흐르기 시작했다.

주변에 춤을 추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점차 둔해졌다. 대부분은 낯선 향에 의아해했지만, 몇몇은 노골적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준영을 응시하였다.

“제길!”

설마, 발정기가 갑자기 온 건가?! 에드워드는 서둘러 준영을 안아 들고는 빠르게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따르는 경호원에게 다급히 외쳤다. 입구를 나서, 복도에 기대섰다. 심장 박동수가 점점 빨라지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곳이 어딘지 따위는 상관없이 당장 이 자리에서 준영을 범하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기 시작했다. 이런 곳에서 자신마저 이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 싶어 서둘러 외쳤다.

“억제제! ……알파 억제제를.”

“놓겠습니다.”

눈치 빠른 경호원이 어느새 준비한 주사위를 가져와 에드워드의 팔에 놓아주었다. 맞은 곳을 따라 근육이 뻐근하게 굳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약효도 빠르게 퍼져 흘렀다.

심장박동이 잦아들고 숨이 고루 쉬어지고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호텔로 바로 돌아갑시다.”

품 안에서 힘겨워하고 있는 준영을 힐끔 보고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베타 경호원으로 배치하기를 진심으로 잘한 것 같다고 다시 한번 스스로를 칭찬하며 말이다.

타액으로 잔뜩 젖은 입구가 음란하게 번들거렸다. 이미 몇 번이고 사정했기에 풀어줄 필요 없는 안으로 거침없이 성기를 박아넣었다.

“하읏……! 앙! 더는……! 흐흐흑……. 무리, 무리예요. 에디. 제발…….”

더는 한계라며 고개를 젓는 준영의 상체를 그러안아 당겨 다시금 키스를 퍼부었다. 입 안에서 음란하고도 음란한 정사의 맛이 느껴졌다. 그 맛과 향에 욕정이 더욱 치솟는다.

준영을 다시 침대에 눕히고는 양 손목을 잡아 더욱 깊게 삽입을 시도했다.

사정도 못 할 정도로 쥐어 짜내어서인지 묽은 물만 성기에서 뚝뚝 흐르고 있었다. 퍽 하고 안을 쑤실 때마다 물이 뚝뚝 흘러 배 위에 흔적을 남겼다.

“제발, 제발……! 앙! 힉! 아, 아, 에디……! 히익!”

마구 고개를 젓더니 이내 경련하듯 몸을 크게 떤다. 성기는 여전히 꼿꼿이 서 있지만 새로운 사정의 흔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에드워드의 성기를 품고 있는 내벽은 요동치듯 꿈틀거렸다.

“뒤로만 갔구나.”

눈물로 엉망이 된 눈가를 혀로 길게 쓸어올리자 다시금 나직한 신음을 흘린다. 어디든 성감대가 된 모양새다. 어떤 곳을 만지고 자극해도 반응이 돌아왔다. 사랑스러워 미칠 것만 같다.

삽입된 성기를 빼내자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백탁액이 주룩 하고 딸려 나와 시트 위를 적셨다.

잠시 그 모습을 황홀하게 바라보다 고개를 아래로 내려 봉긋하게 서 있는 젖꼭지를 한아름 입에 머금었다.

사정의 여파로 축 처져 있던 준영이 화들짝 놀라며 상체를 일으켰다.

“정말 더는 무리예요. 에디. 나 힘들, 흣…….”

입 안 가득 돌기를 강하게 빨아당기자 거부하던 몸짓이 금세 잦아들었다. 파르르 떨며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준영을 잠시 살피다 이번엔 반대쪽 가슴을 빨았다.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다시금 몸을 꿈틀거린다. 애처로운 몸짓이 안쓰럽지만 그 이상으로 유혹적이다.

준영을 등 뒤에서 꽉 끌어안고는 다시 삽입을 시도했다.

“에디. 나……, 더는…….”

헐떡이며 눈물을 흘리는 준영의 애원에 드디어 에드워드의 행동이 멈추었다. 잠시 숨을 크게 두어 번 몰아쉬고는 조심스레 빠져나갔다.

“미안. 내가 너무 흥분했나 봐.”

이미 준영이 정상적으로 돌아온 걸 알았다. 그럼에도 욕정에 가득 차 계속해서 준영을 탐해버렸다. 살짝 겁먹은 듯 몸을 굳히고 있는 준영의 가녀린 어깨 위에 도장을 찍듯 입맞춤을 하고는 상체를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괜찮아. 더는 안 할 테니까.”

에드워드의 대답을 듣고서야 안도했는지 준영의 몸에 힘이 빠졌다. 축 처진 준영이 너무 조용해 잠들었나 싶어 안색을 살피려 할 때 그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나 어떻게 된 거예요?”

“갑자기 발정이 왔더라고.”

“……정말 민폐네요.”

“아니야. 이런 건 불가항력이잖아. 아직 발정기가 규칙적이지 않으니.”

더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기다렸다 상체를 세워 준영의 얼굴을 살폈다. 쌕쌕거리며 정신없이 잠든 준영의 얼굴에 허탈하게 웃음을 흘렸다. 문제는 여전히 성난 자신의 아랫도리였다.

억제제를 맞았는데도 이 정도로 흥분하다니……. 이쯤 되자 준영은 물론 지인들이 에드워드에게 짐승이라고 한 말에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일단 준영을 씻기자 싶어 침대에서 내려선 뒤 이불을 덮어주었다. 자신의 몸은 대충 티슈로 닦은 뒤 욕실로 들어서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자리에 멈춰 섰다.

원래……, 히트가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 건가?

지금까지 준영이 히트가 온 건 몇 번 되지 않는다.

그것도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하지만 그것도 제이크 말로는 제대로 히트 사이클이 온 게 아니라고 했다.

거기까지 생각을 하자 꺼림칙한 감정이 물씬 올라왔다. 에드워드는 일단 욕조에 물을 틀어놓고는 곧장 밖으로 나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제이크의 번호를 찾아 연락을 취했다. 일하는 중이라 바쁜지 거의 끊어질 때쯤에서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 신혼여행은 어때?

“좋아. 아주.”

-그래. 정말 좋아 보이네. 듣자 하니 너 퇴원하자마자 그대로 도망쳤다며?

“들었어?”

-너 검진 날짜 돼서 크리스가 연락 와서 들었어. 제라드가 길길이 날뛰고 있는 중이라고. 설마하니 퇴원하자마자 짐도 없이……. 대단하다 너.

“하하하. 하루라도 지체하면 제라드에게 잡힐 게 뻔하니까.”

-굉장한 형제애군.

“칭찬 고마워. 그보다 제이크.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뻐근한 몸을 일으킨 뒤 눈을 비비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에드워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준영은 침대에서 내려서 의자 위에 걸쳐 놓은 가운을 걸치고는 객실을 둘러보았다.

목이 아파 큰 소리로 부르지 못해 일단 욕실 쪽으로 향했다. 욕실 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밖으로 나와 이번엔 빈방을 살폈다. 워낙 큰 객실이라 방마다 살피는 데도 오래 걸렸다. 결국 두 번째 방까지 열어보고서야 에드워드가 객실 안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준영은 조금 힘없는 다리를 끌어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어 다시 거실로 나왔다. 문제는 생수병을 열지 못할 정도로 힘이 없다는 거다.

“으…….”

아무리 용을 써도 무리다. 결국 기운이 쫙 빠진 채 힘없이 소파에 늘어졌다.

“에디……, 빨리 와요.”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다. 어딜 간 걸까. 보통 메모라도 해 놓고 가는데. 늘어져 있기를 잠시 준영은 갈증을 못 참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장 객실 현관문으로 가 문을 열었다. 역시나 문 앞에 경호원 두 명이 서 있었다.

“저기 정말 미안한데……. 이 생수 좀 따주실래요?”

“네. 이리 주십시오.”

말하고 보니 더 부끄럽다. 준영을 붉어진 얼굴을 어찌하지 못한 채 슬그머니 경호원에게 생수병을 건네었다.

끙끙거리며 힘겨워한 게 무안할 정도로 경호원은 손쉽게 생수병을 땄다.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며 안으로 들어서려 할 때 익숙한 목소리가 준영을 불렀다.

“준영? 왜 밖에 나와 있어.”

“에디. 어디 갔었어요?”

“잠시 볼 일이 있어서. 들어가. 춥지 않아?”

“괜찮은데…….”

에드워드가 빠르게 다가와 준영을 냉큼 옆으로 안아 들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이런저런 감정에 얼굴이 다시금 붉게 달아올랐다.

“왜 그래? 설마 열이라도?”

“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제발 에디. 아무 데서나 그렇게 안지 말라니까요.”

“금슬이 좋구나 하겠지, 뭐. 나도 누차 말하지만 이제 익숙해지라니까.”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하는 에디가 얄미워 그의 팔뚝을 꼬집었다.

아프라고 했는데 좋다고 웃는다. 결국 이번에도 준영이 포기했다.

준영은 에드워드가 소파에 앉혀주고서야 생수병을 열어 물을 마셨다.

“설마…….”

“누구 덕분에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어서요.”

“이런. 미안.”

하나도 미안해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웃지 말라고 하고 싶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싫은 기분이 아니라 준영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몸은 괜찮고?”

“네? ……네.”

에드워드의 질문에 조금 당황했지만 급히 태연한 척 웃었다. 그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찝찝한 구석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다만 딱히 증거도 없는데 뭐라고 하기가 그래 준영은 침묵을 고수했다.

“그럼 조금 이르지만 저녁이나 먹으러 갈까? 많이 힘들면 룸서비스 시켜도 되고.”

“네? ……저녁?”

“그래. 아직 5시지만.”

세상에……. 하루 반나절이 다 가버렸어.

준영은 황당함에 고개를 돌려 거실의 시계를 보았다. 그제야 시간이 눈에 들어왔다. 영국에 온 지 삼 일째.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시간이 훌쩍 가버렸다는 사실에 좌절하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서 먹어요!”

“하하. 그래.”

기껏 여행을 왔는데, 런던시를 제대로 구경도 못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준영은 생수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서둘러 드레스 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녁을 먹고 런던시를 돌아다니는 건 좋지만, 문제는 준영의 체력이었다. 한눈에도 피곤한 게 눈에 보일 정도인데도 준영은 걷기를 고집했다.

“무리하지 말라니까.”

“그치만 언제 이렇게 오겠어요. 괜찮아요.”

“오고 싶으면 언제든 오면 되지.”

에드워드의 말에 준영이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슬그머니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여행은 처음이고 무엇보다 신혼여행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잖아요.”

아차.

에드워드는 절로 나오는 신음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왜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자신과 다르게 준영은 어렵게 자라왔다. 자신에게 해외여행은 시간의 문제지 금전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준영은 다를 것이다.

평생 살아왔던 생활 습관과 사고방식이 한 번에 바뀌지 않듯이 준영에게 다음에 또 오면 된다는 말은 그다지 와닿지 않는 말일 것이다.

“그러게. 내가 생각이 짧았어. 신혼여행인데 일 분 일 초도 아깝지. 좋아 그럼. 이렇게 해. 산책은 내일로 미루자. 대신 오늘은 타워 브릿지 근방의 카페에서 야경을 보는 거야. 어때?”

“좋은 생각이에요!”

에드워드의 대답에 준영의 얼굴이 서서히 풀린다 싶더니 어느새 함박웃음을 지었다.

저 미소를 볼 때마다 가슴속이 울렁거린다. 늘 무표정에 가깝던 준영이었다. 결혼을 하고도 한참 동안은 얼굴에 그늘이 가시지 않았다. 그랬던 준영이 이렇게 솔직하게 미소를 짓는다는 건 신뢰의 증거이기도 했다.

“자, 그럼 장소를 옮기도록 해. 지금쯤이면 야경이 볼 만 할 거야. 그러니 함께 차를 마시며 야경과 음악을 감상하도록 해.”

“네!”

준영의 활기찬 대답에 에드워드는 튀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고 큰 소리로 웃었고, 덕분에 준영이 조금 토라진 에피소드를 제외하고는 별 탈 없이 영국에서의 세 번째 밤을 보내었다.

며칠 무리를 시켰더니 역시나 눕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졌다. 푹 자라는 의미로 와인 한 잔 마신 게 효과가 더 도나 보다. 잠든 준영의 머리를 잠시 쓸어주다 침대에서 내려와 핸드폰을 들고 침실을 나섰다.

혹시나 준영이 들으면 안 된다 싶어 가운을 걸치고 테라스로 가 연락을 취했다.

-이게 누구십니까. 존경해 마지않는 망할 형님 아니십니까.

얼마 가지 않아 가시를 가득 세운 제라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부러 연락을 받지 않았던지라 아마 몇 배로 더 열이 받은 상태일 거다.

“별일은 없고?”

-별일? ……어떻게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양심이 있다면 당신이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죠.

사사건건 극존칭을 쓰는 태도에 웃음이 멋대로 튀어나왔다. 웃음소리를 들은 건지 아주 이까지 빠득빠득 가는 제라드에게 미안하다 용서를 빌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조사 좀 해 줘.”

-네? 아니, 뭐?

“다니엘 애인.”

-……다니엘? 다니엘 로스키? 그 씨발 놈?!

아, 잊어버리고 있었다. 다니엘과 제라드가 앙숙이었다는 걸. 엄밀히 앙숙은 아니다. 다니엘은 제라드를 매우 좋아하는 편이다. ……놀려먹기를. 제라드가 말로 밀리는 존재가 있다면 바로 다니엘이었다. 늘 씩씩거리며 열 받아 하는 제라드를 다니엘은 사사건건 놀리기 바빴다.

“맞아. 우연히 만났어.”

-영국이군. 도대체 얼마나 돌아다녀야 직성이 풀릴 거야? 저번에는 한국이었잖아!

“그래. 소포는 잘 받았어?”

-마치 테드가 한 것처럼 말하지 말아 주겠어? 어딜 봐도 준영이 보낸 거잖아.

“부부는 일심동체니까.”

-돌아오면 각오해. 주먹부터 날려줄 테니까. 하아……. 그래서. 다니엘 애인을 왜?

“뭔가 꺼림직해. 설명하자면 긴데, 뭐랄까…….”

-제시카 같다고?

제라드는 어떤 표현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에드워드의 말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래.”

조금 늦은 대답에도 제라드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뭔가 생각하는 듯 침묵하더니 곧 답이 돌아왔다.

-무슨 말인지 알았어. 알아볼게.

“고맙다.”

제이크처럼 자주 볼 수 있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대학교 시절 나름 친했던 녀석이었다. 몰랐으면 몰라도 알게 된 이상 그 녀석이 자신과 같은 과오를 저지를지도 모르는데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말이야. ……다니엘이 준영에게 뭐라 하지 않았어?

“다니엘이?”

-그 녀석 너 엄청 좋아했잖아. 뭐, 러브는 아니라도 조금 집착이랄까……. 여튼, 다니엘 놈이 준영에게 나한테 대하듯 하면 그 녀석 못 견뎌.

“그렇군. 무슨 말인지 알았어. 주의할게.”

제라드의 말대로다. 제라드야 다니엘의 어떻게 보면 악질적인 장난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되받아쳤지만 준영은 다를 거다. 생각해 보니 대학교 시절 에드워드에게 다가온 사람들 대부분 다니엘의 싸가지없는 말에 눈물을 쏟았던 기억이 났다.

딱 한 명 다니엘이 함부로 대하지 않은 게 제시카였고, 그런 모습만 봐도 다니엘은 자신만큼이나 사람 보는 눈이 최저란 소리다.

통화를 마친 에드워드는 잠시 저 멀리 빛나는 야경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영국의 유명한 관광지는 에드워드의 입장에서는 익숙했다. 대학교 시절 여름방학 때 다니엘에게 초대받아 영국에 와서 본의 아니게 살다시피 하다 보니 솔직히 관광지라기보다 옆 동네에 온 느낌이었다.

하지만 준영이 함께여서일까. 거기다 기사 딸린 고급 승용차가 아닌, 택시와 버스를 이용해 돌아다녀 더욱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에디. 저것 봐요. 와……. 멋지다. 진짜 중세시대에 온 것 같아요!”

이 층 버스를 타고 런던 시가지의 건물을 구경하는 내도록 준영은 감탄사를 연신 내뱉었다. 덕분에 심드렁하게 구경하고 있던 다른 관광객들도 덩달아 분위기에 물들어 버렸다. 버스에서 내릴 때쯤에는 좋았던 곳을 공유하는 수준까지 와 있었다. 헤어질 때 어찌나 아쉬워하는지 어떤 의미로 보면 신기한 정도였다.

“왜 그렇게 봐요?”

“음……. 굉장하다 싶어서?”

“네?”

“준영이 이렇게 친화력이 좋은지 몰랐거든.”

말을 하고 보니 조금 비꼰 것 같았다. 서둘러 해명하려 했지만 준영은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도 내가 이렇게 밝아질 줄 몰랐어요. 늘 땅만 보고 다녔거든요.”

“땅?”

“네. ……이상하게 시비가 자주 걸려서. 아마 내가 작고 동양인이라 그런가 봐요. 그래서 그런가……, 친구는커녕 마을에서도 친한 사람이 별로 없었죠. 그런데 요즘은 달라요. 그 말이 맞나 봐요. 밝은 사람에게 끌리는 거. 내가 웃어서 그런 거겠죠?”

준영은 착하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어리석다 손가락질받을 정도지만, 에드워드는 준영이 그런 착한 심성을 가졌기 때문에 지금 웃을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래……. 심성 자체가 다를 것이다. 제시카도 분명 어려운 집안 환경에서 외롭고 힘겹게 자랐다. 하지만 역시나 외롭고 힘들게 자란 준영과 달랐다. 제시카는 모든 불행을 남의 탓만 하며 타인의 행복을 뺏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준영은 자신이 가진 것이 얼마나 크고 멋진 것인지를 알았다.

물론 준영의 곁에 할머니가 있었던 것과 달리 제시카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 차이라고 하기에는 잭 역시도 자신의 불행만을 탓하며 남의 것을 탐하는 길로 들어섰다.

그 길이 훨씬 더 쉬우니까.

그래서 에드워드는 확신할 수 있다. 준영은 설령 할머니가 없이 홀로 자랐다고 해도 남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준영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 그런 것 같아.”

준영은 쭉 웃고 싶었던 건지 모른다. 웃을 수 없는 환경이라 침묵하고 고개를 숙이고 남이 다가오는 걸 겁을 먹었지만, 이제는 그를 억압하는 게 없다.

다시 한번 그것이 준영이 자신에게 보이는 신뢰라는 걸 알 수 있어 뿌듯했다.

“그럼 이제 슬슬 배고파지는데 뭐라도 먹을까?”

“에디만 괜찮다면, 나 대성당 근처에 있는 식당에 가 보고 싶어요. 인터넷에 후기 글을 봤는데 영국 전통 스타일이래요.”

“그래? 가 보자.”

“그만두는 게 좋아. 거기 셰프가 바뀌어서 별로거든.”

“?!”

“?!”

에드워드는 물론 준영도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붙은 건지 다니엘이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다니엘. ……도대체 언제?”

“이걸 두고 운명이라고 하는 거겠지? 마침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네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걸 보았지.”

“정말이지. 네 그 버릇은 여전하구나.”

대학교 때도 틈만 나면 뒤에 몰래 따라와 에드워드를 놀라게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 30대 중반이건만 언제까지 이런 장난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데이트 중이었어? 내가 방해한 건가요?”

다니엘이 에드워드에게서 자연스럽게 준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아…….”

“방해야.”

절대 아니라고 못 할 준영을 대신해 에드워드가 대꾸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다니엘은 여전히 준영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질문을 이었다.

“내 저택의 셰프가 미슐랭 쓰리 스타 레스토랑을 전담했었지요. 괜찮다면 내가 영국 가정식을 대접해 주고 싶은데 어려울까요?”

작정을 했군. 에드워드는 더 골치가 아파지기 전에 다니엘에게 거부를 표했다.

“아니. 네 말대로 데이트 방해야.”

“네. 괜찮다면 그렇게 할게요.”

생각지도 못하게 준영이 나서서 의미가 없어져 버렸지만 말이다.

대충 각오는 했지만 컸다. 준영은 엄청난 크기의 저택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감히 궁전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커다란 입구를 지나, 넓은 정원을 가로지르는 동안 준영은 계속해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모습을 본 다니엘이 언뜻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역사가 깊은 곳이지요. 명색이 영국 역사상 여왕을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이니까요. 심지어 우리 로스키 가문은 대대로…….”

끝도 없는 설명이 이어졌다. 준영은 마치 소설 한 편을 듣는 기분을 맛보며 다니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여왕과 기사라는 단어만으로도 이미 판타지였다. 하지만 처음 듣는 준영과 다르게 에드워드는 아닌가 보다.

“그만해. 지겨워. 이제 외울 지경이야.”

참다 참다 폭발한 에드워드의 지적에 다니엘이 아쉬움을 뒤로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중에 따로 얘기하도록 하죠.”

준영을 향해 또다시 윙크를 찡긋하는 다니엘에게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워드는 그것조차 못마땅한 듯 준영의 머리를 강제로 돌려 시선을 차단시켰다. 다니엘이 그런 에드워드의 모습에 어린애라 놀리자 자연스럽게 언성이 높아졌다. 싸운다는 느낌보다 장난을 치고 있는 게 뻔히 보였다.

준영은 멀뚱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에드워드가 저렇게 허물없는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이 조금 신기했다. 지금까지 에드워드가 대외적인 겉모습을 보이지 않은 사람은 가족과 제이크뿐이었으니 준영의 입장에서는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새삼 두 사람이 정말 친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도착했군.”

차가 멈추고서야 드디어 두 사람의 투닥거림이 끝났다. 고용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빠르게 다가와 차 문을 열어 주었다. 다니엘도 에드워드도 이런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사실 준영은 지금도 누군가가 차 문을 열어 주는 일에 거부감이 들었다. 특히나 나이가 있는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하면 더욱더 곤혹스러웠다.

쭈뼛거리며 차에서 내려선 뒤 준영은 다시금 감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와……, 진짜 멋지다.”

말 그대로 중세시대의 고딕 양식의 궁전이었다. 그렇다고 낡은 느낌이 드는 건 아니었다. 여기저기 정성 들여 보수한 느낌이 제대로 보였다.

“마음에 드니 다행이군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다니엘의 말에 준영은 그제야 에드워드와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화려한 현대식이었다. 순간 과거에서 현대로 시간여행을 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짐. 이분들을 손님방으로 안내해 주세요.”

딱 봐도 집사로 보이는 노신사에게 다니엘이 부탁하자 그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었다.

“어서 오십시오. 로스키 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자, 이쪽으로.”

생각해보니 준영이 햄턴 가에 처음 왔을 때도 집사는 저렇게 나이가 지긋한 분이었다. 자신이 들어오는 바람에 새삼 모든 이들이 물갈이되다시피 했다는 게 떠올랐다. 기분이 잠시 가라앉았지만 급히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떨쳐냈다.

에디가 그랬어.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다고. 그러니 절대 마음 쓰지 말라고.

에드워드의 말대로 준영이 그 일로 자꾸 신경을 쓰게 되면 그가 더욱 미안해할 것을 안다. 그래서 준영은 끊어내는 법을 배우려 했다. 이미 벌어진 일을 끊어내지 못하고 질질 끌었기 때문에 발생한 모든 일은 자신의 죄니까. 더는 자신으로 인해 에드워드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다치거나 상처 입는 걸 바라지 않았다.

“이곳입니다. 시간이 되면 모시러 올 테니 쉬고 계시면 됩니다. 그럼.”

영어에도 저런 표현이 있나 싶을 정도로 극도로 정중한 태도를 취한 뒤 집사는 방을 나섰다. 에드워드는 익숙하게 소파로 가 털썩 앉았지만 준영은 두리번거리며 고풍스러운 방 안 디자인을 구경하기 바빴다.

“이런 스타일이 마음에 들어? 리모델링해 줄까?”

“네? ……아니요. 그냥 낯설고 신기해서요. 난 내 방이 더 좋아요.”

“우리들의 방이지.”

“네. 우리 방이 더 좋아요.”

에드워드의 지적에 빠르게 정정했다. 준영의 빠른 태세 전환에 에드워드가 기분 좋다는 듯 활짝 웃었다. 그리고는 양팔을 펼치는 모습에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옆자리에 앉으려 했지만 에드워드가 그런 준영을 눈치챈 듯 냉큼 손목을 잡아 자신의 다리 위에 앉혔다.

부끄럽지만 누가 보는 것도 아니다 싶어 몸에 힘을 빼 얌전히 에드워드의 품에 안겼다. 에드워드는 그런 준영의 머리와 등을 부드럽게 한 손으로 쓸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니엘이 빈말로라도 좋은 놈이라고 하지는 못해.”

“네?”

친구를 험담하다니. 무엇보다 아까 전 모습이 떠올라 더욱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내 친구야. ……유일하게 내가 친구라고 할 수 있는 녀석들은 딱 둘이야. 제이크와 다니엘. 빈말로도 다니엘과 절친이다, 뭐 이런 간지러운 말을 할 수 있지는 않아. 하지만 굳이 다니엘과의 관계를 단어로 설명하자면 친구라고 할 수 있겠지. 제이크와는 다르지만.”

“……사이 좋아 보이던데.”

“그놈이나 나나 처세술은 좋으니까. 뭐, 불편하거나 그런 게 없는 것도 맞고.”

“그렇구나.”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말을 자신에게 하는 걸까.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생각에 잠겼지만 궁금증은 금세 풀어졌다.

“사실 무시하려고 했어. 하지만 언젠가는 부딪힐 놈이니 싶어서 이왕 이렇게 된 거 싶었어.”

“무슨 말인지…….”

“다니엘은 자신의 기준에 차지 않으면 사람을 아래로 보는 나쁜 버릇이 있지.”

“…….”

역시, 중간중간 보이던 그 눈빛이 그런 뜻이구나.

분명 친절하고 상냥하게 행동하는데도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었다.

“분명 너에게 눈치를 줄 거야. 준영의 태도를 보니 벌써 눈치를 줬나 보군.”

“그……. 잘 모르겠어요.”

“이해해. 원체 교묘한 놈이니까. 그래도 나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나서서 도와줄 놈이란 건 알아.”

“……그럼 내가 잘할게요.”

에드워드의 친한 친구니까. 제이크만큼 소중한 친구라는 말이니, 자신이 잘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납득하며 대답했지만 정답이 아니었나 보다. 에드워드는 준영의 대답에 조금 의외라는 듯 쳐다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실수라도 한 건가 싶어 눈치를 보고 있을 때 그가 갑자기 준영을 답답할 정도로 와락 끌어안았다.

“나도 주의하겠지만 준영도 마찬가지야. 고쳐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야.”

“네?”

“일단 내가 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 설령 그런 뜻으로 한 말이라고 해도 이 상황에서는 준영이 화를 내야 해.”

“화를 내다니……. 에디는 잘못한 게 없잖아요.”

“아니. 했어. 준영이 이해한 대로라면 이런 뜻이지? 내 친구니까 좀 기분 나쁘더라도 웬만하면 맞춰주길 바라. 이렇게 이해한 거잖아. 그렇지?”

“……네.”

그게 아닌가? 그럼 뭐지?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라니 혼란스럽다. 에드워드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준영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다시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아서 준영이 오해했을 수도 있는데……. 내 말은 이런 뜻이야. 다니엘이 설령 내 친구라고 해도 준영을 기분 나쁘게 만든다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마. ……이 말을 해주고 싶었던 거야.”

“네?”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까보다 더 혼란스러워하는 준영의 반응에 에드워드가 허탈하게 웃었다.

“화법이 정치인과 경영인들을 상대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서술이 길어져. 내 주변에 준영처럼 착하고 곧이곧대로 듣는 이들이 하나도 없어서. ……나도 바꾸는 데 오래 걸리겠지만. 그러니 준영도 날 좀 도와줘. 내 말이 부당하다 싶으면 확실하게 나에게 되물어줘. 화를 내고, 네 권리를 당당히 지켰으면 좋겠어. ……준영은 내 배우자이자 평생의 파트너라는 걸 잊지 말아줘.”

에드워드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심장에 직접적으로 와닿는 느낌이었다.

“믿어줘. 나에게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준영 네가 소중하다는 걸.”

“……네.”

이 큰 마음에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던 사람이다. 언감생심 그의 옆자리를 차지했지만 절대로 더이상은 바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사랑을 얻고, 그의 믿음을 얻었다.

보잘것없는 자신을 마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보석처럼 대해 주었다.

“노력……할게요.”

그러니 그 마음에 부응하고 싶다. 바로는 힘들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조금씩이라도 바꾸고 싶었다. 준영의 대답에 에드워드가 그제야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 새끼가 마음에 안 들면 급소를 무릎으로 찍어버려도 돼.”

“……네?”

잘못 들은 건가?

당황하며 되물었지만 에드워드는 웃기만 할 뿐 대답은 돌려주지 않았다. 대신 준영의 허리와 머리를 양손으로 각각 받쳐 당기고는 키스를 퍼부었다.

부드럽게 혀를 휘감는 에드워드의 혀를 반겼다. 얽히고설키는 부드럽지만 난잡한 키스가 이어졌다. 어느새 소파 위에 뉘어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준영의 몸을 매만지며 키스가 더욱 농염해지는 그때, 노크 소리가 두 사람의 이성을 깨웠다.

“이런. 아쉽군.”

“……나중에.”

“응?”

너무 작게 말한 바람에 제대로 듣지 못했나 보다. 옷가지를 추스르던 에드워드가 고개를 돌리며 되물었다. 준영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런 에드워드의 귀에다 대고 작게 속삭였다.

“나중에 해요. ……뒤는.”

“끙……. 잔인하네.”

“잔인?”

“그래. 잔인. 이제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됐어.”

“아하하.”

툴툴거리는 에드워드의 모습에 준영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 ♟ *

다니엘은 저녁을 먹고 난 뒤 호텔로 돌아가려는 에드워드를 노골적으로 유혹했다.

바로 데낄라 레이. 925(Tequila Ley. 925)였다.

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쿨하게 돌아가려던 에드워드의 눈빛이 흔들린 걸 그만 봐 버렸다.

물론 자신은 괜찮으니 하루 묵었다가 가자고 말을 해도 극구 사양하던 에드워드였다.

“에디. 나도 맛보고 싶어요.”

이 한마디에 끝났지만 말이다.

그렇게 다니엘과 에드워드의 술판이 벌어졌다. 한 모금 마실 때마다 감격하며, 도대체 이걸 어떻게 구했냐며 억울해하기까지 했다.

준영이 마셔 봐도 확실히 향이 좋았다. 목 넘김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독했다. 준영은 두 모금 정도 마시고는 포기했다.

“준영이 마실 만한 칵테일을 만들어 줄까?”

멀뚱히 앉아서 우유만 홀짝이는 모습을 본 다니엘의 권유에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술을 많이 마시면 안 좋다고 제이크가 자제하라고 했거든요.”

“제이크? 아아. 그립군. 제이크 놈은 여전하고? 여전히 부인에게 잡혀 살아?”

“뭐, 그렇지. 남자가 져 줘야 집안이 평화롭다던데?”

“알파 권위 떨어지게. 알파로써 오메가에게 그런 얕보이는 태도라니. 그런 멍청이는 갖다버리랬잖아. 테드.”

생각지도 못한 말에 조금 당황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다니엘은 신랄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고 에드워드는 묵묵히 들어주기만 했다.

그렇구나. 에디와 친하다고 해서 제이크와도 친한 건 아니구나.

문제는 정작 친구인 에드워드가 가만히 듣고 있는데 자신이 나설 수 없다는 거다. 준영은 더 듣기가 곤란해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서 쉬고 있을게요. 에디는 천천히 놀다가 와요.”

“이것만 다 마시면 갈 거야. 자지 말고 기다려.”

준영의 어깨를 살짝 잡아당겨 볼에 입맞춤을 하고는 작게 속삭였다. 아까 전 약속을 잊지 않았나 보다.

“그리고 저놈……, 말은 저렇게 해도 제이크 놈 엄청 좋아해. 자존심상 티를 안 내는 거지.”

“다 들려. 누가 누굴 좋아한다는 거야? 그런 머저리 같은 알파 놈을!”

“너 말고는 다 알지.”

“웃기지 마. 그런 놈과 날 엮지 말아 주겠어?”

용케도 알아들은 다니엘이 버럭버럭 화를 낸다. 에드워드는 그래그래,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는 준영을 돌아보며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어서 들어가서 쉬고 있어.”

“네. 두 분도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요. 그럼.”

꾸벅 인사를 하고는 발길을 돌려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오래된 건물답지 않게 방음이 잘되어 있나 보다. 문을 닫자 고요함이 금방 찾아왔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계단만 올라가면 바로던데요. 혼자 갈 수 있습니다.”

입구에 대기 중이던 집사가 친절한 미소를 띠며 다가오는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준영은 거절해도 따라올까 봐 발걸음을 빨리 해 복도를 빠져나갔다.

현관문 앞 넓은 홀을 가로질러 계단 쪽으로 가려 할 때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와 멈춰 섰다.

“응? ……맞다. 이름이 준영이었던가? 여긴 웬일이야?”

한눈에도 뭘 하고 돌아온 건지 뻔히 보이는 모습이었다. 케빈의 뒤로 꽤 많은 수행원들의 양손에 각각 엄청난 양의 종이가방과 고급스러운 박스가 들려있었다. 쇼핑이라도 하고 왔나 보다.

“그……. 우연찮게 다니엘 씨와 마주쳐서.”

“대니가 이름을 부르라고 했던가?”

“네?”

“허락받고 이름 부르냐고.”

“아니요.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네요. 미안해요.”

“그럼 됐고. 그래서, 우리 대니가 당신을 불렀다? 왜?”

“……정확히는 에드워드와 함께.”

“그럼 당신은 돌아가면 되겠네.”

“네?”

“대니가 당신을 초대했을 리가 없잖아. 그렇게 눈치가 없어? 딱 보면 몰라? 대니가 당신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는 거? 기사한테 말해서 태워주라고 할 테니 먼저 호텔로 돌아가 있어.”

당당하다 못해 거만하기까지 한 모습에 준영은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멀뚱히 쳐다보았다. 첫 만남에 부끄럽다는 듯이 배시시 웃던 모습이 떠올랐다. 상류층 사람들은 다 저런가 싶을 정도로 이중적인 모습에 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웃어?”

“네.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전 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럼.”

이런 사람과 싸워본들 머리만 아플 뿐이라는 걸 이제는 너무나 잘 안다. 실제로 도저히 따라가지 못할 사고방식과 개념에 오히려 준영만 혼란스러워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준영은 일방적으로 인사를 하고는 발길을 돌려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야.”

“…….”

“너 안 서?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어떻게 해야 할까. 대꾸를 하려니 자신의 입만 아플 것 같았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성질을 부리는 모습을 보니 벌써 골치가 아파졌다. 준영은 역시나 상대하지 말자 싶어 계단을 올라가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우뚝 자리에서 멈춰 섰다.

몸을 살짝 돌려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씩씩거리고 있는 케빈을 내려다보았다. 케빈은 준영이 드디어 자신의 말을 듣는가 하고 오해를 한 게 뻔히 보이는 모습으로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딱히 지적해 줄 필요를 못 느꼈기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 맥주 안에 뭘 넣었나요?”

“뭐?”

“어쩌다 보니 내가 이상한 약에 몇 번 당했어요. 그래서 후유증이랄까. 그런 게 이제 익숙하더라고요.”

물론 예전에 당한 약에 비하면 후유증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어떻게 보면 숙취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미미했다. 실제로 약도 효과가 미묘하게 달랐다. 정확히는 발정 유도제가 아닌, 일반적으로 쓰는 미약에 더 가까울 것이다.

“뭐야? 익숙한가 보네? 그런 약?”

“역시 당신이 넣었군요. 왜 그랬어요?”

“야. 내가 물었잖아.”

“내가 먼저 물었어요. 왜 그런 걸 멋대로 타서 나에게 줬냐구요.”

“내가 마시려다가, 좀생이처럼 내숭 떨고 있길래 준 건데?”

“……네?”

“클럽에 와서, 오만상 고귀한 척 내숭 떠는 너한테 제대로 놀아보라고 준 거라고. 덕분에 남편과 제대로 즐기지 않았어?”

미안해하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이 정도 일로 왜 그런 반응이냐는 듯 굴어 준영은 더 황당함을 느꼈다. 역시나 대화를 한다고 뭔가 풀릴 상대가 아니라는 게 확실했다.

화는 나지만, 이런 사람과 언성을 올리며 싸우고 싶지 않아 준영은 입을 닫고는 몸을 돌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뭐야? 왜 그냥 가? 야!”

“하아. 하나 궁금해서 그러는데……. 그런 짓을 하면 다음에 어떻게 된다는 그런 걱정은 없는 건가요?”

이것만큼은 도저히 궁금해서 못 넘어갈 것 같아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뭐?”

“이번 일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에드워드에게 말할 거예요.”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시겠다.”

“무슨.”

“그렇잖아. 나한테 말로 질 것 같으니 네 애인한테 다 일러바치겠다는 소리 아냐.”

아무리 적게 잡아도 자신보다 두 살 정도 많아 보이는 남자였다. 그런데 저런 말이라니. 잘못 들었다고 하기에는 이어지는 말이 너무 유치하다. 더는 들어주지 못하겠다 싶어 휙 하고 몸을 돌리고는 자신의 방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갑자기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발자국 소리에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멈춰서야 했다.

“무슨…….”

순식간에 바로 앞까지 뛰어 올라온 케빈이 씩씩거리며 당장이라도 준영을 물어뜯을 듯 앙칼진 눈빛으로 소리쳤다.

“야! 너는 그럼 뭔데. 너나 나나 똑같은 처지인데 왜 그딴 눈으로 날 보냐고! 그 표정 뭐냐고!”

“표정이라니요?”

“마치 날 하찮은 것 보듯이 쳐다봤잖아! 나랑은 말도 섞기 싫다는 듯이!”

“그건 당신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기 때문이에요. 하찮다니. 전 사람을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어요.”

“얼씨구. 고귀하시네. 잘난 남편 두고 있으니 너도 덩달아 고귀해지는 것 같아? 그래 봤자 너도 남자 오메가잖아. 하찮은 동양인에 남자 오메가 주제에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고개를 빳빳하게 들어서 날 쳐다봐?!”

무슨 말을 해도 배배 꼬는 모양새가 싸움닭이 따로 없다. 그렇다고 가만히 듣고 있자니 준영도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도대체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예전 같으면 참았을 거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도저히 준영이라도 참을 수가 없었다.

“우성 알파도 결국은 아랫도리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잖아? 고작 발정기 페로몬 하나 못 다뤄서……. 악!”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케빈의 뺨을 후려친 뒤였다. 손바닥이 얼얼하다 못해 화끈할 정도니 맞은 케빈은 더 아플 게 뻔했다. 솔직히 때린 준영이 더 놀라는 중이다. 그런데도 미안하기는커녕 화가 났다.

“사과해요.”

“뭐? 야……. 네가 날 때려놓고는 무슨 헛소리야?!”

“때린 건 과했지만 난 사과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나만 모욕한 게 아니니까. 당신이 뭘 안다고 나에 대해서, 에디에 대해서 험담을 하는 거죠? 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만 걸고넘어지면 될 텐데 왜 에드워드까지 나쁘게 말하는 거죠?”

“너…….”

“당신도 로스키 씨의 애인이면 알 거잖아요. 로스키 씨와 에드워드가 얼마나 친한 친구 사이인지. 그런데 애인의 친구를 이렇게 험담하다니.”

“대니의 친구든 말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 대니의 말이 맞았어. 에드워드가 바뀐 건 너 같은 하찮은 오메가 때문이었어. 너 같은 남창이 에드워드를 망쳤다는 게 맞았다고!”

“에디가 허락을 했던가요?”

“뭐?”

“누구 마음대로 에디의 이름을 불러요?”

준영의 지적에 잠시 멍해진다 싶더니 이내 붉으락푸르락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뭐라 할 틈 없이 그대로 돌진해 준영에게 달려들었다.

준영을 넘어뜨리고 그 위에 올라탄 케빈은 다짜고짜 준영의 얼굴을 할퀴고 물었다. 뒤늦게 소란스러운 소리에 고용인들이 달려와 두 사람을 떼어놓았지만 케빈은 그럼에도 화가 풀리지 않는 것처럼 씩씩대며 준영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에드워드와 다니엘이 계단을 다급하게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준영! 이게 도대체!”

놀란 에드워드가 황급히 다가와 준영의 얼굴을 살폈다. 거울이 없어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볼에 선명하게 느껴지는 피가 흐르는 감각에 어지간히 뜯겼구나 싶었다. 무엇보다 에드워드의 살기가 무시무시했다.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엄청난 마찰음에 할 말이 쑥 들어갔다.

놀란 건 에드워드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울면서 다니엘에게 파고들던 케빈이 구석에 내동댕이쳐진 모습에 두 사람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무슨 짓이지?”

싸늘하다 못해 느껴지는 살기에 준영이 꿀꺽 침을 삼켰다. 정말로 애인을 대하는 태도가 맞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간신히 상체를 일으킨 케빈도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그는 애인의 살기에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 애가 나한테 먼저 시비를……. 악!”

다니엘은 뭐라 할 틈 없이 케빈의 뺨을 다시 후려쳤다. 어찌나 강하게 때린 건지 또다시 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에 준영이 되레 경악했다.

“감히 내 손님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도 정도가 있는 거다. 케빈.”

“그만하세요.”

“…….”

“그만하세요. ……너무 심하세요. 피가 나잖아요.”

얼마나 세게 때린 건지 입가에 피까지 맺힌 모습에 준영이 결국 나섰다. 에드워드가 그런 준영의 손을 잡아당겨 뒤로 물렸다.

“다니엘. 설령 화를 내도 나와 준영이 내야 한다는 걸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그리고…….”

말을 하다 말고 천천히 다니엘에게 다가가더니 그대로 주먹을 내질렀다. 퍽 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다니엘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너보다 약한 자에게 폭력 쓰지 말라고, ……했지.”

“하하……. 그게 네가 할 말이냐.”

제대로 맞은 건지 입가로 피가 새어 나왔다. 다니엘은 꽤 아픈지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런 다니엘을 가만히 쳐다보던 에드워드가 다시 주먹을 꽉 쥐며 들어올렸다.

“하지 마! 당신이 뭔데 대니를 때려?! 대니를 왜 때리는 건데!”

어느새 달려간 케빈이 다니엘을 보호하듯 양팔을 벌린 채 그의 앞에 섰다. 에드워드의 살기에 준영조차도 떨릴 지경인데 무섭지도 않은지 케빈은 시선조차 피하지 않은 채 무섭게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무서워하고 있었다. 실제로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겁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다니엘 앞에 서서 그를 보호하는 모습에 에드워드도 결국 쥐고 있던 주먹을 내려놓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일단 준영의 얼굴 상처를 치료하는 게 먼저인 것 같은데. 구급약을…….”

“구급약 통만 가져다 줘. 내가 할 테니. 그리고……, 나중에 보자.”

다니엘이 침묵을 깨트리며 말을 하고서야 팽팽하던 공기가 풀렸다. 에드워드는 다니엘을 차갑게 응수한 뒤 몸을 돌려 준영에게 다가와 그를 안아 들었다.

“괜찮은데.”

“내가 괜찮지 않아.”

꽤 화가 나 보이는 모습에 더는 내려달라 말하지 못한 채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막 두 사람이 묵고 있는 방으로 들어서려던 순간 들려온 소리에 기분이 찹찹해졌다.

“나가.”

“대니!”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띄지 마.”

“그런. 나는……, 대니를 위해.”

“내가 누차 말했지. ……주제를 알라고.”

“……흑.”

“이 정도에서 끝나는 걸 고맙게 여겨. 해가 뜨는 대로 나가도록 해.”

대화라고 할 수 없는 일방적인 말이 더 이어졌지만 문이 닫히자 더는 들리지 않았다.

간만에 이렇게 화가 난 에드워드를 본 것 같다. 에드워드는 아까부터 싸늘한 표정으로 준영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준영의 얼굴에 난 생채기지만.

“에디…….”

“준영이 설령 말려도 이번 일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겠어.”

괜찮다고 말하려고 그를 부른 건데, 다르게 받아들였나 보다. 올라오는 화를 어떻게 하지 못한 채 에드워드는 깊게 숨을 몰아쉬며 방안을 서성였다.

준영은 그런 에드워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왜 그런 표정이야?”

“네?”

“누구는 울화통이 터지는데……. 왜 실실 웃고 있냐고.”

이런 표정 관리를 못 했다. 준영은 황급히 양손으로 볼을 감쌌다. 그럼에도 자꾸 튀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길이 없었다.

“머리를 잘못 맞은 건…….”

“아니에요. 그냥 에드워드가 날 대신해 화내준 게 좋아서요.”

준영의 대답에 에드워드는 더 황당해하더니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화를 내놓고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나 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에드워드는 준영에게 다가와 온몸으로 감싸듯 끌어안고는 다시금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어찌 이길까.”

“우리가 싸웠어요?”

“아니. 아니야. 후후.”

“왠지 놀리는 것 같은데요?”

“눈치 챘어?”

장난스레 대답하는 에드워드의 태도에 이번에는 준영이 허탈하게 웃었다.

“졸려요. 이만 자요.”

“호텔로 안 돌아가도 되겠어?”

“벌써 시간이 새벽 2시예요. 그냥 자고 아침 먹고 느긋하게 있다가 가요. ……내가 죄를 지은 게 아니니까.”

준영의 대답에 에드워드는 그제야 자세를 바로 하였다. 이번에는 무릎으로 서고는 준영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극진한 대접을 받고 돌아가자.”

“네.”

그렇지 않아도 꽤 졸렸다. 굳이 에드워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졸려서 한 말이었다.

에드워드의 품 안에 파고들자마자 수마가 찾아왔다. 딱히 뒤척임도 없이 빠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잠결에 에드워드가 침대에서 내려서는 걸 알았지만 눈을 뜨거나 부를 기운도 없었다.

정원 뒤쪽 후원으로 나서자 역시나 서성이고 있던 다니엘이 보였다.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다니엘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꽤 마음에 든 파트너 아니었어?”

“머리가 비어서 말을 잘 들어 데리고 있었던 것뿐이야.”

“그래?”

돌아보지도 않고 있으면서도 에드워드가 비웃는 걸 눈치 챘나 보다. 다니엘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이내 욱하며 몸을 돌렸다.

“뭐야? 그 비웃음은?”

“이유를 알면서 왜 묻지? 오랜만에 만나니 너도 참 많이 바뀌었군.”

“고작 오메가야.”

“나도 한때 그랬지. 고작 오메가라고. 마음 따위야 시간이 흐르면 바뀔 거라고. 그러니 멍청한 짓 하지 말자고.”

“잘 알면서 왜 바뀐 거야!”

“왜 그런 것 같아?”

“…….”

“방금 전 일부러 네가 나선 거지?”

아까 전 준영은 몰랐겠지만 에드워드는 진심으로 분노했었다. 그 짧은 순간 케빈을 어떻게 하면 처절하게 후회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결론은 일단 뼈부터 몇 군데 부러뜨리자였다.

하지만 다니엘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 얄팍한 수가 뻔히 보여 괘씸해서 주먹을 날렸더니, 케빈은 죽다 살아난지도 모르게 덤벼들어 허탈함을 낳았다.

“네 타입은 아니던데?”

돌려 말했지만 바로 알아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케빈은 다니엘의 취향과 거리가 멀었다. 욕심 많고 제멋대로고 이기적이기까지 하다. 심지어 머리까지 아둔해 보였다. 대학교 때의 다니엘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방금 전 연락 온 제라드의 보고를 들으니 더 확신할 수 있었다. 케빈의 개인정보를 캐낼 수가 없다는 탐정의 대답이 돌아왔다는 말에 말이다.

탐정의 말에 의하면 누군가가 케빈을 지켜주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런 짓을 할 사람은 한 사람뿐이며, 그 이유는 충분히 추리가 가능했다.

“……알아.”

하지만 그렇기에 이해가 되었다. 자신도 그러하니까.

준영은 자신이 예전부터 생각했던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다. 에드워드가 다니엘을 잘 알듯, 그도 에드워드를 잘 안다.

“웬일로 준영에게 시비를 안 건다 싶었다.”

물론 준영의 입장에서는 지금의 다니엘의 태도도 충분히 무례하지만, 안하무인이었던 그 옛날을 생각하면 꽤나 예의를 지키는 중인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무례한 건 무례한 거니 이 건에 대해서는 나중에 철저하게 보복할 거지만 말이다.

“나도 내가 미친 것 같아.”

“네가 먼저 진심으로 다가가지 않으면 상대방은 절대로 바뀌지 않아. ……너부터 바꿔.”

“…….”

“그래서 도대체 어떤 부분이 그렇게 마음에 든 거야?”

“……그놈은 나만 봐. 멍청해 보일 정도로 단순하고 어리석지만……. 늘 내가 먼저야. 피를 이은 가족조차도 그러지 못하는데.”

“그렇군.”

“웃긴 건 말이야. 신나게 돈 쓰러 다니면서…… 자기 건 하나도 사지 않아. 늘 내 것을 사러 다니지. 오늘도 내 옷들을 사가지고 왔더라고. ……멍청하게. 입지도 않는걸.”

“입어 줘.”

“그딴 걸 어떻게 입어? 내가 나이가 몇인데.”

“그럼 같이 사러 가.”

“…….”

“그리고 법에 걸리지 않을 선의 미약이라도 상대방의 의사 없이 먹이는 거 아니라고 전해 줘.”

“뭐? ……제길. 그딴 약 그만 먹으라니까!”

“내쫓아놓고는 뭘 화를 내?”

애초에 내쫓을 생각도 없었을 거다. 그 정도로 해야 에드워드의 화가 풀릴 걸 알고 한 행동이다. 너무 잘 알아 더 괘씸했다.

“그보다 준영은 괜찮아? ……너무 여리던데. 우리 집 고양이는 앙칼지기라도 하지.”

“그래. 어디 가서 안 지게 생겼더군.”

“하아……. 우리 부모님에게도 덤벼들어서 문제지만.”

다니엘의 부모님도 사무엘과 비슷한 성격이다. 이런 천방지축의 철없는 오메가인데도 지금까지 쫓아내지 못한 건 분명 다니엘이 막아주고 있어서가 분명할 거다.

“하지만 준영도 만만치 않아. ……다른 의미로 강하지. 더는 억누르는 사람이 없으니 아마 이제는 괜찮을 거야.”

솔직히 준영이 케빈의 뺨을 때렸다는 사실에 상당히 놀랐다. 예전의 준영이라면 아무리 화가 나도 손을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별거 아니라고 해도 폭력을 휘둘렀다는 말에 심란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져서 기쁘지만 반대로 순결하다시피 한 착한 성격도 바뀌는 건가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평생 그 착한 성격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싶은 욕심도 든다.

하지만 그건 준영이 선택할 문제다. 에드워드의 뒤에서 보호를 받는 것이 가장 바라는 일이지만, 준영이 싫다면 그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울 거다.

“너나 나나. 많이 바뀌었네.”

“그러게. ……넌 더 바뀌어야겠지만.”

“어이.”

“철 좀 들어. 아무리 그래도 애인한테 손찌검이 뭐냐.”

“팔이라도 하나 부러뜨리려고 덤벼들었을 거면서. 내 딴에는 최선이었다고.”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럼 난 자러 가련다. 내일 점심까지 먹고 갈 거니 거하게 준비해.”

에드워드의 말에 다니엘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막 발길을 돌려 몇 걸음 옮겼을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멈춰 섰다.

“아, 잊을 뻔했다.”

“뭐? 윽!”

돌아보는 순간 주먹을 휘둘렀다. 정통으로 볼을 맞은 다니엘은 그대로 뒤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윽……. 이게 갑자기 무슨 짓이야!”

꽤 아픈지 한 손으로 볼을 감싼 채 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든지 말든지. 에드워드는 제대로 들어가 욱신거리는 손을 흔들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러게 멋대로 남의 부인 훔쳐보지 말랬잖아.”

“뭐? ……무슨! 그냥 본 것뿐이라고!”

상당히 억울하긴 한가 보다. 실제로 에드워드가 봐도 다니엘의 성격상 그 정도면 꽤 얌전하게 군 것이다.

“내가 배운 게 있어. 내 아내에게.”

“뭐?”

“가해자 기준이 아닌 피해자 기준으로 보라더군.”

“…….”

“준영은 딱히 별말은 안 했지만 바로 알 수 있어. 아니 준영을 떠나서 내가 싫어. 내 아내 함부로 쳐다보지 마. 그리고 윙크 날리지 마. 기분 나쁘니까.”

“하. ……하하하. 천하의 에드워드 햄턴이…….”

“천하의 다니엘 로스키가 말이지?”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하자 결국 항복을 표하듯 양손을 들어올린다.

“졌어. 졌다고. 내가 사과하지.”

“나한테 하지 마. 내 아내에게 해.”

“알았어. 알았어.”

허탈해하는 다니엘을 뒤로하고 발길을 다시 돌렸다. 슬슬 피곤해진다. 몇 시간 못 자겠지만 괜찮다. 준영을 안고 자면 한 시간을 눈을 붙여도 피곤이 싹 가시니까.

역시. 안 되겠어.

준영은 자신의 배를 감싸고 있는 에드워드의 팔을 조심스럽게 치우고는 침대에서 내려섰다. 어제 다니엘이 케빈을 내쫓았다. 해 뜨는 대로 나가라 했으니 지금쯤 나서려고 할지 모른다.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 또 멍청한 짓을 한다고 뭐라 하겠지만, 그래도 영 찝찝했다.

그를 동정한다는 게 아니다. 자업자득인 걸 안다. 하지만 이 찝찝함을 풀려면 일단 만나야 했다.

준영은 가운을 대충 어깨에 걸치고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문제는 케빈의 방이 어딘지 모른다는 거다. 지나가는 고용인이라도 잡아서 물어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끼익하는 작은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행여나 놓칠세라 소리가 나는 쪽으로 뛰다시피 걸어갔다.

“……뭐야.”

역시 맞나 보다. 작은 여행용 가방을 등에 메며 복도를 걸어오던 케빈과 마주쳤다. 케빈은 준영을 보자마자 바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이를 세웠다.

“사과하세요.”

“뭐?”

“그것부터예요.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거죠.”

“야…….”

“나에게, 에드워드에게 함부로 말한 거 사과하세요.”

“너 바보야? 내 꼴 안 보여? 나 지금 너 때문에 쫓겨나는 거 안 보이냐고.”

그가 소리를 지르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또다시 다니엘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일 거다. 연인이면서, 3년이나 함께했다면서 눈치를 보고 있는 모습이 예전 자신의 모습과 겹쳤다.

아……. 그래서 내가 이상하게 자꾸 답답했구나.

준영은 영문 모를 이유를 깨달았지만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그건 케빈 씨가 무례하게 군 것 때문에 다니엘 씨가 화가 나서 그런 거니까 날 탓하지 말아요.”

“잇……!”

소란을 떨고 싶지 않아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하는 건 준영에게 큰 이득이다. 준영은 거침없이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내뱉었다.

“아무리 독한 약이 아니라도 나에게 그런 약이 든 술을 준 거. 사과하세요. 에드워드를 알지도 못하면서 마치 아는 척하며 그런 무례한 언사를 한 거 사과하세요. 그리고 내 얼굴 이렇게 만든 것도요.”

“……하. 하아……. 진짜. 그래. 사과할게. 됐지? 이제 나 좀 그만 놔줄래? 가뜩이나 기분 엿 같은데 너까지 나 긁지 말고.”

정말로 기가 팍 죽었나 보다. 어제 그 앙칼진 삵 같던 느낌이 이제는 버림받은 고양이같이 보였다. 안쓰러움이 물씬 올라왔다.

아마 이 모습을 본다면 에드워드는 물론 제라드나 크리스도 어이없어할 거다.

하지만 이게 나라는 사람이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 없다. 무엇보다 바뀌고 싶지 않다.

물론 답답하게 혼자 땅 파는 그런 궁상맞은 성격은 버리고 싶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왜 그런지 고민하는 이런 성격은 버리고 싶지 않다.

할머니가 그랬으니까. 그게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어야 사회를 이루고 사는 사람인 거라고. 그리고 그 말에 지금도 동의한다.

막 준영을 스쳐 지나가던 케빈의 옷을 잡아 강제로 세워 물었다. 케빈은 우뚝 멈춰 서고는 자신의 옷가지를 잡고 있는 준영을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다니엘 씨에게 왜 따지지 않아요?”

“……뭐?”

“당신은 다니엘 씨의 아랫사람이 아니잖아요.”

“무슨 말이야.”

“평등한 관계잖아요. 다니엘 씨의 연인이라면서요. 3년이나 사귀었다면서요. 함께 산 것도 3년이 다 되어간다면서요. ……이미 사실혼과 마찬가지인데 왜 나가란다고 일방적으로 나가요?”

준영의 말에 케빈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준영의 말에 동의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너무 어이가 없어서 저런 표정을 짓는 건지 모른다.

중요한 건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라도 속에 있는 말을 모두 하고 싶다는 거였다. 에드워드의 말처럼 더는 가슴속에 담아두고 삭히지 않을 거다.

“다니엘 씨를 사랑하잖아요. 분노한 알파에게 덤벼들 만큼. ……당신 방법은 분명 잘못되었어요. 아마도 케빈 씨 딴에는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에 앞서간 거겠지요. 다니엘 씨가 날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말이죠. 하지만…… 그런 잘못을 했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당신을 내치다니. 주종관계가 아니잖아요. 그러니 가서 당당하게 말하라구요.”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내가 그랬으니까.”

“…….”

“사랑하지만 너무 멀었으니까요. 그저 옆에만 있는 걸로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순응하며 사는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하면 에드워드의 눈밖에 벗어나지 않을까만 생각했어요. ……하지만 결국 내가 잘못한 거더라구요.”

“…….”

“있죠. 지금도 생각해요. 내가 당당했더라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

“달라질 리가 없잖아. 그는 날 사랑하지 않아.”

그렇게 표독스럽게 굴더니 지금은 또 다른 사람 같다. 커다란 쌍꺼풀이 있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갔다.

이 사람 정말 날 닮았구나.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한 걸음 내밀지 않았어요. 무서웠거든요. 하지만 설령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최악의 상황이 된다고 할지라도……. 포기하거나 외면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

“다니엘을 두 번 다시 못 보는 게 더 괴로운걸.”

눈물을 후두둑 떨구는 모습이 안쓰럽다. 준영은 소매 속으로 손을 넣어 잡은 뒤 손등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하지만 케빈 씨가 괴롭잖아요.”

“흑…….”

“여기가 많이 아프잖아요. 자신이 아프면…… 결국 틀어지더라구요. 그러니 더 아프지 않게, 더 곪지 않게 지금이라도 당당하게 말해요. 가서 따지고 화내요.”

“……그래도 될까? 정말로?”

“네. 만에 하나 정말로 만에 하나 잘못되더라도…… 이 속에 담은 말을 다 내뱉고 나면 분명 덜 아플 테니까.”

케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다시금 눈물이 흘렀지만 이번엔 스스로 팔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내 기분이 안 좋은 걸로 너에게 화풀이를 한 거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네. 그럼 됐어요.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요. 다른 사람들에게도요.”

“응.”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로 발길을 돌렸다. 아마도 다니엘의 방이 저쪽인가 보다. 하지만 굳이 방까지 갈 필요가 없어 보였다. 언제 온 건지 다니엘이 복도 끝부분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나……, 나! 안 나갈 거야!”

“……그래.”

“내가 잘못한 건 맞지만 대니도 잘한 거 없잖아! 왜 내 편을 안 들어주는 거야. 내가 잘못했어도……, 나중에 혼낼지라도……. 내 편을 들어줬어야지.”

아마도 다니엘은 이미 용서를 다 했나 보다. 역시 예상대로 다니엘도 케빈을 생각 이상으로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다니엘은 결국 고개를 떨군 채로 아이처럼 엉엉 우는 케빈에게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준영도 어느 샌가 뒤로 다가온 에드워드를 돌아보며 생긋이 웃어주었다.

“산책 갈래요?”

“좋지. 하지만 겉옷 제대로 입고 난 뒤에.”

“이제 더운 편인데.”

“안 돼. 그런 투정은 정상체중이 된 뒤에 해야지.”

마치 아이 대하듯 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소라면 네, 하고 순순히 따랐을 준영이지만 더는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내가 정상체중이 되기를 바라면 에디부터 밤일을 자중해 주세요.”

“…….”

“제이크도 그랬잖아요. 잘 먹고 잘 자는 것만큼 적당히 하라고.”

“……노력하지.”

에드워드가 제대로 한 방 먹은 표정을 짓는 바람에 결국 웃음이 튀어나왔다. 한없이 진지한 두 사람 앞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다. 준영은 에드워드의 손을 잡고는 그대로 계단 쪽으로 내달렸다.

“위험해! 넘어지면 어쩌려고!”

역시나 잔소리 연발이다. 에드워드는 정말로 준영을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쯤으로 보나 보다.

“에디가 잡아주면 되죠.”

계단에 내려서자마자 돌아보며 대답했다. 에드워드의 눈이 조금 커지더니 이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래. 맞아. 네 말대로야.”

마치 몰랐던 걸 안 것처럼 후련한 미소를 짓는 에드워드의 태도가 의아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왠지 모르게 알 것 같으니까.

다니엘의 저택을 나서기 전, 마중을 나왔던 케빈이 준영의 손에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이거 너 줄게. 사과의 의미로.”

얼떨결에 받은 물건은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예쁘게 포장된 박스였다.

옷인가? 옷치고는 조금 무겁나?

내용물이 궁금했지만 이제 나서야 하는데 이 자리에서 뜯을 수 없는지라 일단 감사 인사부터 했다.

“고마워. 생각지도 못했는데……. 난 준비한 것도 없고.”

“아, 그렇게 안 고마워해도 돼. 사실 너 주려고 산 거 아니야.”

“응? 그럼 굳이 안 줘도…….”

“아니야. 내가 보니까 너한테 꼭 필요한 것 같아. 네 성격에 분명 누워만 있겠지.”

“누워만 있다니?”

무슨 말이지?

케빈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있으면 조금 더 능동적일 수 있겠지.”

“능동적? 아……! 운동기구구나!”

드디어 납득이 됐다. 준영은 후련함까지 느끼며 기뻐했다.

“고마워. 잘 쓸게. 이 크기 보니까 손으로 잡아서 할 수 있는 종류구나?”

“응? 생각보다 반응이 쿨하네?”

케빈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다니엘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왜 저런 반응인 건가 싶어 뒤쪽에 서 있던 에드워드를 돌아보았다.

에드워드는 입으로 손을 막은 채로 몸을 떨고 있다 준영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빠르게 자세를 바로 했다.

왜…… 웃는 거지? 뭔가 이것도 놀리는 건가?

하지만 케빈의 표정은 진지했다. 딱히 놀리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슬슬 가. 언제까지 여기 서 있을 거야? 나 다리 아프다고. 어제 다니엘이 하도 괴롭혀서.”

“윽! 아, 알았어!”

멀뚱히 서 있기만 하자 답답했는지 케빈이 투덜거린다. 그의 말에 준영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새삼 정말 솔직하다고 생각하며 다니엘과 케빈에게 한 번 더 인사를 한 뒤 대기 중인 차에 올라탔다.

차가 완전히 멀어지는 순간까지 자리에 서서 배웅하는 둘을 잠시 돌아보다,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런데 에디. 아까 왜 웃었어요?”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물어보자 에드워드가 다시 입을 틀어막고 몸을 떨기 시작했다. 왜 저러나 하고 가만히 쳐다보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아주 눈물까지 손가락으로 닦으며 자세를 바로 한 에드워드가 드디어 준영을 바라보았다.

“케빈이 센스가 있구나 한 것뿐이야.”

전혀 아닌 것 같은데…….

저런 말을 하면서도 눈이 웃고 있다. 뭔가 장난기 가득한 표정이 생소하면서도 예쁘지만, 이상하게 불안감이 점점 치솟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케빈이 무례하게 한 것이 한 번에 사라질 만큼 선물은 마음에 들었다. 물론 준영은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딱 봐도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추리가 가능했지만, 순진한 준영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케빈도 당연히 알 거라 생각했나 보다. 둘의 대화가 묘하게 핀트가 어긋나 정말 한참을 웃어버렸다.

그런 에드워드의 모습에 다니엘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사실대로 준영에게 설명해 주지 않았으니 그도 엄밀히 공범이다.

준영은 객실로 들어오자마자 흥얼거리며 케빈이 준 상자의 포장지부터 뜯었다. 꽤 기대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미안할 지경이다.

그리고 예상했던 반응을 보였다.

“헉!”

어찌나 놀라는지.

뚜껑을 열자마자 후다닥 닫은 준영은 제 눈을 의심하는 듯 한참을 상자를 경악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 그래?”

에드워드는 일부러 모른 척 되물었다.

“아, 아니에요.”

“케빈이 준 선물 아니야? 뭐가 들어있었어? 운동기구?”

모른 척하려는데 자꾸만 웃음이 멋대로 튀어나왔다. 결국 참지 못하고 입가를 실룩대자 준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진다.

“에디! 알고 있었죠!”

“뭘?”

“케, 케빈이 준 선물……. 설마! 에디가?”

“아니야. 맹세코 절대로 난 아무런 부탁도, 지시도 하지 않았어. 그리고 케빈 성격 대충 보면 알잖아. 단순한 거. 말 그대로 호의로 준 걸 거야.”

솔직하게, 그리고 틀린 말 하나 없이 대답하자 화까지 내려던 준영이 이어 울먹거린다. 에드워드의 말을 믿는 건지 아니면 못 믿지만 증거가 없어 뭐라 못하는 건지. 준영은 더는 따지지 않고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듯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일단 꺼내라도 봐야지.”

“그런! 이런 거 필요 없어요!”

“맞아. 나도 필요 없어. 벌써 도구의 도움을 받을 만큼 준영과의 섹스가 지겨워질 리가 없잖아?”

“그, 그…….”

직선적인 표현에 준영의 얼굴이 다시금 달아오른다. 준영은 잠시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다 이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버릴게요.”

“그러니까 구경이라도 해야지. 나중에 케빈이 어떻더냐고 물으면? 버렸다고 대답할 거야?”

“윽! 그…….”

에드워드의 말에 준영은 이번에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봐온 케빈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며칠 뒤쯤 연락이 와 준영에게 노골적으로 감상평을 들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뭘 줬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

“…….”

머뭇거리는 준영에게서 상자를 뺏어 화장대 위에 올린 뒤 뚜껑을 열었다. 돌려달라는 준영의 말을 못 들은 척 가장 눈에 띄는 디자인의 물건을 집어 올렸다.

“휘익. 리얼한데?”

에드워드도 지금까지 성인용 장난감을 크게 사용한 적은 없었다. 우성 알파다 보니 성욕이 왕성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성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어떤 의미로 보면 가진 성욕에 비해 담백하게 논 편이었다.

잠시 이리저리 형태를 살펴보았다. 스위치가 있어 켜보았다. 보란 듯이 딜도가 빠르게 진동했다.

“이것 봐. 준영. 꽤 사실적이…….”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자랑하듯 앞으로 내밀며 몸을 돌렸지만 이미 준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딜 간 거지?

황당해하기를 잠시, 작은 소리가 현관문 쪽에서 들려와 빠르게 방을 나섰다. 역시나 준영이 현관문 앞에서 신발로 갈아 신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허?”

어이가 없어 절로 허탈한 한숨이 튀어나왔다. 준영이 에드워드의 반응에 움찔 몸을 굳혔다.

“준영?”

“그……, 그냥 잠시 산책……. 힉! 에, 에디?!”

저렇게 기겁하는데 사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냥 준영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조금 놀리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도망까지 치려고 하다니 왠지 부아가 치민 에드워드는 그대로 준영을 어깨에 걸쳐 매고는 침실로 돌아갔다.

놀라 바둥거리는 준영을 침대 위에 눕히고는 순식간에 그의 옷가지를 벗겨내었다. 나름 반항을 해본다고 애쓰는 듯했지만 체격도 힘도 차이가 너무 났다.

에드워드에게 있어 준영의 반항이란 열 살도 안 된 어린아이를 제압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그렇게 준영은 순식간에 알몸이 되어버렸다.

“에디! 난 싫어요! 그런 변태적인 걸……!”

“그건 준영이 몰라서야. 대부분의 부부들은 이런 걸로 건전한 성관계를 즐긴다고.”

“그런!”

“당장 준영이 아는 지인들에게 물어봐.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당연히 거짓말이다. 그들이 이런 도구를 이용하는지 아닌지 에드워드가 알 턱이 없다. 그럼에도 당당한 건 준영이 절대로 그들에게 물을 리 없는 걸 알기 때문이다.

“생각해 봐. 케빈이 줄 때 뭐라고 그랬어? 정말 자연스럽게 자기가 쓰려고 샀다고 말하지 않았어?”

“그런…….”

사실이라 그런지 준영의 반항도 점점 잦아들었다. 그리고 사색에 빠져드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였다.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을 구경하는 것도 즐겁지만, 이쯤 되자 준영의 색다른 모습을 보고 싶은 욕심이 더 커졌다.

에드워드는 준영이 생각을 정리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의 양다리를 잡아 들어올렸다.

“에디!”

“조금만. 정말 싫으면 안 할 테니까. 응?”

“그, 그런…….”

“이것 봐. 내 것보다 작잖아. 크게 부담스럽지 않을 거야.”

아까보다 더 굳어졌지만 에드워드는 자신의 욕심에 모른 척 은밀한 골짜기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움찔거리고 있던 구멍이 축축한 혀가 닿자 깜짝 놀란 듯 꽉 닫혔다. 빽빽한 주름 위를 혀로 문지르다, 콕콕 찌르기를 반복했다.

꽉 닫힌 입구가 서서히 풀린다. 마치 어서 들어오라는 듯 수줍게 움찔거리는 구멍 안으로 혀를 밀어 넣자, 준영의 입에서 달콤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하아……. 에디…….”

허벅지 안쪽 근육이 파르르 떨리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조금 더, 조금 더 안쪽으로 밀어 넣자 음란한 맛과 함께 물씬 달콤한 향이 퍼져 나왔다.

본격적으로 흥분하기 시작하는 준영에게서 나오는 오메가 페로몬이었다.

이제는 제법 향이 음란하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이 향을 맡으면 이성을 유지하는 게 몇 배로 힘들었다.

평소 같으면 더 취하고 싶은 욕심에 파고들었겠지만 지금은 목적이 있어 일단 물러섰다.

“에디?”

평소와 다른 에드워드의 행동에 의아한 듯 준영이 작게 숨을 헐떡이며 그를 불렀다. 상기된 볼이 서서히 흥분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조금 더 괴롭히면 어떨까?

또다시 겁 없는 욕정이 물씬 피어올랐다.

에드워드는 옆에 던져놨던 딜도를 쥐어들었다. 준영의 눈이 단번에 커지더니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정말 싫어?”

일부러 나긋한 어조로 물어보자, 도망치려던 준영의 행동이 우뚝 멈추었다.

“아프지 않아. 분명 기분 좋을 거야.”

에드워드의 속삭임에 준영의 반항은 멈추었지만 여전히 겁을 먹은 채였다. 에드워드는 일부러 딜도를 길게 혀로 핥아 올렸다.

“절대로 아프게 하지 않아. ……나 믿지?”

만약 에드워드의 지인들이 이런 그의 모습을 봤다면 분명 사기꾼이라며 욕을 한 다발 날렸겠지만 문제는 지금은 순진한 준영밖에는 없다는 거다.

준영은 잠시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에드워드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결국 항복을 표했다.

“아, 아프면……, 안 할 거예요.”

“걱정 마.”

에드워드는 진심을 다해 미소를 지었지만, 어쩐지 준영은 더 사색이 될 뿐이었다.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내벽에서 약하게 흔들리며 진동하는 딜도는 솔직하게 말해서 감각적으로 쾌감을 끌어올리기는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묘하게 평소와 달랐다. 흥분은 하지만 그럼에도 에드워드의 성기를 받아들였을 때와는 달랐다. 무언가 부족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흔들자, 에드워드가 낮게 신음을 흘렸다.

“준영. ……괜찮아?”

더는 못 참겠는지, 에드워드가 준영의 볼을 감싸더니 자신을 보도록 당겼다. 뭐가 괜찮냐는 뜻인지는 바로 알았다. 에드워드의 손길은 준영을 돌려세운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일부러 사타구니 쪽으로 당겨지는 손길에 준영은 잠시 머뭇거렸다.

커도 너무 컸다. 제대로 흥분한 알파의 성기는 말 그대로 흉기다. 거기다 우성 알파인 에드워드는 더할 것이다.

“준영?”

에드워드가 다시 그를 불렀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마치 명령처럼 준영의 뇌리에 박히는 기분이다. 준영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가 천천히 입을 벌려 에드워드의 성기를 삼켜갔다. 반은커녕 머리 부분만 넣어도 빠듯하다.

이런 굵기와 길이가 자신의 배 속을 가득 차지한다고 생각하자 등골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다. 하지만 묘한 흥분도 함께 올라왔다.

“혀를 써 봐. 그래. 혀로 긁듯이……. 하아…….”

꽤 기분이 좋은지 지시하는 중간중간 긴 숨을 내뱉었다. 준영은 에드워드가 자신에게 해 주었던 걸 떠올리며 최대한 비슷하게 하려 노력했다.

어느 샌가 입을 다문 채 숨만 고르고 있는 에드워드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눈을 감은 채 준영의 애무에 집중하는 모습이 정말로 야했다.

붉게 달아오른 볼과 중간중간 혀로 입술을 축이는 모습은 그 어떤 포르노보다 더 야한 것 같았다. 물론 본 적은 없지만.

잠시 멍하니 쳐다본다고 멈춰서인지 에드워드의 눈이 떠졌다. 시선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휘어진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저렇게 잘생겼을까 하고 생각하는 그 순간, 딸칵하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내벽을 꽉 채운 채 미세한 진동의 강도가 갑자기 바뀌었다.

“아……! 아, 아! 그만……. 힉!”

배 속이 요동친다. 예민해진 부위를 몇 번이고 휘저었다. 에드워드의 성기에서 입을 떼고는 시트에 엎드린 채 폭력을 닮은 쾌감에 그저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느끼는 거 아니야?”

에드워드가 준영의 양팔을 잡아 강제로 세우더니 자신의 다리 위로 잡아당겼다. 앉을 수 없기에 무릎으로 어중간한 자세로 서야 했다. 아주 잠시 진동이 멈춘 걸 안도하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지만 그뿐이었다. 다시금 내벽이 뒤흔들렸다.

에드워드의 목을 감싸며 주저앉는 걸 간신히 막았다. 바들바들 떨면서 제발 빼달라고 애원했다.

다행히 그의 손이 아래로 향해 안도했지만 준영의 착각이었다. 에드워드는 딜도 끝을 잡아 빼낸다 싶더니 다시금 단숨에 내벽에 박아 넣었다.

등이 크게 휘어졌다. 에드워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준영의 허리를 감싸고 있어 넘어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도 고맙지 않다.

“그만해요. 이제, 흣……! 빼요! 빼달라고요!”

어느 샌가 차오른 눈물이 다시금 볼을 축축이 적시기 시작했다. 에드워드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훌쩍였다.

“기분 좋지 않아? 이렇게…… 여길 누르면.”

“힉! 아아……. 하읏……!”

에드워드가 일부러 딜도를 이용해 어느 지점을 꽉 짓눌렀다. 눈앞에 검게 바뀌며 온몸이 용수철처럼 멋대로 튀어올랐다. 근육이 퍼득거린다. 전기라도 통한 듯 달달 떨며 다시금 흐느꼈다.

“그치만……, 에디가 좋아요. 에디 게……. 제발…… ”

“……제길.”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은지도 모르겠다. 뭐라고 애원하자 에드워드가 짧게 욕설을 내뱉더니 단숨에 딜도를 빼내었다. 빠져나가는 감각에 또 한 번 크게 몸을 틀었다.

파르르 경련하는 준영을 앞으로 돌아 앉힌다 싶더니 단숨에 뜨거운 것이 배 속을 꿰뚫었다.

고개가 젖혀졌다. 다물지 못한 턱이 달달 떨린다. 채 적응을 하기도 전 몸이 멋대로 떠오르더니 또다시 퍽 하고 파고들었다.

배 속이 징징거린다. 아니 온몸이 다 떨리는 기분이다.

“간 거야?”

에드워드가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무의식중에 고개를 숙여 자신의 아래를 보았다. 그때 또 한 번 준영의 몸이 들린다 싶더니 푹 하고 박힌다. 그와 동시에 정액이라 할 수 없는 묽은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마치 오줌 같은 모양에 또 한 번 엉엉 아이처럼 울었다.

“걱정 마. 너무 느껴서 그런 거니까.”

이제 그만하라는 준영의 말을 들어줄 생각은 하나도 없나 보다. 에드워드는 상냥하게 어르고 달랬지만 그건 준영의 울음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준영의 엉덩이를 잡은 양손에 다시금 힘이 들어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렇지만 역시나 의미는 없다. 쑥 하고 올라갔던 성기가 선단만 머금은 채로 잠시 멈췄다.

“아아……. 흑…….”

다시금 느껴질 쾌감에 벌써부터 두렵다. 저도 모르게 낭패라는 듯 신음을 흘릴 때, 다시금 한 번에 꿰뚫는다.

마치 뇌까지 들어온 듯 꽉 차는 감각에 헛구역질까지 올라왔다. 잠시 기침과 옅은 구역질을 하는 준영을 살피더니 키스를 퍼붓는다. 고개가 강제로 젖혀진 상태라 혀만 교류하는 폼이다. 혀가 사탕이라도 되듯 빨아 당기며 키스라 할 수 없는 행위를 이어가더니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아, 아, 흡……! 아!”

“준영. 준영. 미안……, 미안.”

미안하다면 그만해야 되지 않는가. 차라리 그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준영은 에드워드로 인해 한없이 흔들리며 다짐했다. 이번만큼은 절대로,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신혼여행의 수많은 밤 중 하루가 또다시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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