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4)

[12]

<스핀오프- 제라드 X 크리스>

빌어먹을 여자가…….

베타라고 속여 놓고는 감쪽같이 당해버렸다.

오늘 바쁘다고 거절해도 자꾸만 부르길래 어쩔 수 없이 나왔더니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어쩐지 오늘따라 유달리 향수를 독하게 뿌리더니만.

뒤늦게 그녀가 히트 사이클이라는 걸 깨닫고는 황급히 가지고 있던 오메가 전용 억제제를 여자에게 썼다.

이런 일을 워낙 많이 당해, 자신이 오메가도 아닌데 가지고 다녔다. 그리고 역시나 이번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오메가 억제제를 맞은 여성은 당혹감과 창피함에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지금 마음 같아서는 사기죄로 고소하고 싶은 심정이다. 정말로 자신이 유명한 모델이라는 게 이럴 때 회의가 든다.

문제는 오메가 억제제를 꺼내다가 그만 실수로 알파용 억제제를 깨트려버렸다는 거였다.

슬슬 오메가 페로몬으로 인해 아래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지고 의식이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여자를 만나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경호원들을 따돌리고 온 게 이런 낭패를 낳았다.

일단 병원에……, 아니지. 그럼 안 돼.

가뜩이나 모든 언론들이 햄턴 사에 촉각을 세우고 있는 상황이다. 어떤 이유로든 이런 일로 병원에 실려 가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결국 선택지는 하나였다.

제라드는 힘겹게 핸드폰을 꺼내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그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야. 왜 집에도 안 오고 전화질이야? 오늘도 외박이야?

늘 그랬든 잔소리부터 늘어놓는다. 준영의 앞에서는 친절한 신사처럼 굴지만, 제라드 앞에서는 늘 이렇게 툴툴댔다.

“킥킥. 나……, 어쩌지.”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나 당했어. 하아……. 알파 억제제 좀…….”

-어디야! 어딘지 말을 해!

“호텔. 후……. 직원에게 말해 둘 테니까…….”

숨쉬기가 힘들다.

어릴 때, 사고로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에 휩싸여 처음으로 러트를 했을 때와 비슷했다. 식은땀인지 몸에 열이 올라서인지, 땀이 이마에서부터 뚝뚝 떨어진다.

-바로 갈게. 바로 갈 테니까. 문 잠가! 밖으로 나오지 마! 듣고 있어?

“……응. 들어. 듣고 있으니까.”

-허벅지라도 꼬집으라고! 이 멍청아!

“하하하. 알았다고. 알았어…….”

전화를 끊고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걸어갔다. 비틀거리다 침대 바로 앞에서 우당탕 넘어졌다.

잠시 웅크리고 있다 그만 깜빡 의식을 잃었다.

‘이 멍청아!’

화들짝 놀라며 의식을 되찾았다가, 이어 자신이 협탁 바로 밑에서 엎드리고 있던 걸 깨달았다.

순간적이나마 이성을 놓았는지, 셔츠가 다 찢어진 상태였다.

제길…….

짧게 욕설을 내뱉고는 서둘러 인터폰으로 로비의 안내데스크로 연락을 취했다. 구차한 설명은 집어치우고 크리스토퍼 모리슨이라는 자가 찾아오면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요구한 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하아, 하아……. 이거 심각한데?”

생각보다 오랫동안 오메가 페로몬에 노출이 됐었나 보다. 이쯤 되자, 억제제를 맞아도 안 되지 않겠다는 걱정이 살짝 들 정도다. 하지만 걱정도 잠시, 더는 이성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제라드는 그대로 의식을 놓쳤다.

뭐지……?

기분 좋아. 미치도록.

“큭, 윽……! 흣! 처, 천천……히……! 악!”

신음이 낮다. 하지만 듣기 좋다. 더 울게 만들고 싶다.

일부러 허리를 더 강하게 쳐올리자, 잘 빠진 등 근육이 뻣뻣하게 굳는다.

어깻죽지의 갈라진 근육이 탐스럽다 싶어 그대로 깨물었다.

아픔 때문인지 다시금 온몸이 굳는다.

아래가 아프도록 조여졌다. 잘라먹을 정도로 강하게 조이는 감각에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문득 아래가 너무 메마르다 싶었다.

베타인가?

홀릴 정도로 기분 좋아 혹시나 오메가인가 했다. 극도로 흥분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순간 거부감이 들었지만 다행히 오메가는 아니었다.

차라리 러트가 온 거, 오메가가 아닌 게 더 나았다.

뭐, 상관없지. 이렇게 기분 좋은데. 2차 성별이 무슨 상관일까.

더욱 속도를 높였다. 고통에 목소리가 갈라진다.

꽤 아픈지 빠져나가려는 듯 앞으로 기어가는 모습에 한 손으로 그의 머리를 짓눌렀다.

……그?

남자?

설령 오메가라고 해도 남성체는 안지 않았던 자신이 남자를 안고 있다는 사실에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무슨 상관이 있으랴.

자신을 받아 줄 구멍이 있는데. 금상첨화, 쫀득하게 감싸주는 내벽은 분명 쾌감이 있었다.

그래, 지금까지 안은 그 어떤 여성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

머리를 짓누르고 있어서일까, 숨이 답답한지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더티 블론드. 연녹빛 눈동자. 오똑한 코. 붉지만 조금은 옅은 입술선. 꽤나 잘생긴 페이스다.

멍하니 쳐다보다 화들짝 놀라며 상체를 떨구었다.

“큿……, 하아하아…….”

제라드의 움직임이 멈추자, 그제야 살 것 같다는 듯 숨을 거칠게 토해낸다.

왜 크리스토퍼가 내 밑에 깔려있는 거지?

그가 오메가였던가?

아니다. 베타다. 자신의 눈으로 확인까지 했었다.

‘뭐야. 너 베타였어? 예쁘장해서 오메가인 줄 알았는데. 아쉽네.’

문득 들어온 생각에 뻣뻣이 굳어있을 때 크리스가 고개를 돌려 제라드를 바라보았다.

“끝……난 거냐?”

상기된 볼. 평소와 다르게 흐트러진 머리카락. 물린 건지 피딱지가 앉은 입술.

그래, 무슨 상관일까.

다시금 욕망이 이성을 억누른다.

날 이렇게나 잘 받아주는 구멍인데.

사악하고 천박한 욕정이 다시금 눈을 뜬다.

“너, 의식……!”

뭐라고 말하는데 더는 들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를 돌려 눕혀 단숨에 박아 넣었다.

고환이 엉덩이에 닿아 짓눌릴 정도로 깊숙이. 단번에.

고통 때문인지 등이 크게 떠오른다. 젖혀진 고개로 인해 샤프한 턱이 치솟았다.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이럴까. 제라드는 주저 없이 목덜미를 물었다.

“미친……새끼……. 핫! 윽! 그, 그마……! 큭!”

막바지 달음박질처럼 박고 또 박았다.

두 번은 없을 정도로 탐하고 또 탐했다.

어느새 크리스가 축 처진 걸 알았지만 그런 걸 의식할 일말의 이성도 남아있지 않았다.

물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앉았다.

멍하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이불을 잡아 확 하고 들어 올렸다.

명백한 애프터였다. 문제는 이 넓은 호텔 객실에 제라드 혼자 덩그러니 있다는 거였다.

꿈이었나?

하지만 희미하게 올라오는 기억들이 절대 꿈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뭐……. 이런.”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신음이 멋대로 튀어나왔다.

햄턴이란 성을 달고 있는 이상, 평생에 한 번 정도는 이런 일을 겪을 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베타 남자와 그것도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와 뒹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제라드는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화를 내야 하는지를 몰랐다.

한참을 굳은 채 허공만 바라보고 있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싶었다.

일단 전화를……!

제라드는 허둥지둥 몸을 움직여 협탁 위에 놓여진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무선 급속 충전기 위라 충전은 되어 있지만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다급히 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벨이 울려 퍼졌다. 누군지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전화를 받은 순간 더욱 당황했다.

-도대체 이틀이나 뭘 하신 겁니까!

이틀?

방금 전은 우습다는 듯, 더 큰 충격에 제라드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몇 번이고 연락을 해도 받지 않는다.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는 게 뻔히 보였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퇴짜에 부아가 치밀어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책상 위에 던지듯 내려놨다.

“제길……. 받으라고 좀.”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찾아가고 싶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산더미같이 쌓인 일거리가 제라드를 상무실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테드. 이런 일을 도대체 어떻게 다 처리한 거야.”

더 무서운 건 이 업무량이 에드워드가 평소 하던 업무량의 반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일 귀신이라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이쯤 되면 병이 아닐까 싶다.

“하긴. ……마음 줄 곳이 없었겠지.”

그나마 일 처리를 잘할 때만큼은 사무엘이 에드워드에게 칭찬이라도 한마디 건네었으니. 자신은 미우나 고우나 어머니라도 있었지만, 에드워드는 정말로 아무도 없었던 거다.

그러니까 진작에 제시카 따위 치우라니까.

말도 안 되는 변명 따위나 해대며 제시카를 옆에 둔 이유는 제라드가 봤을 때에는 단 한 가지였다.

외로움.

그런 의미에서 제시카는 에드워드가 뭘 원하는지 너무나도 잘 아는 여자였다. 비록 작정한 거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내 코가 석 자다. 제라드는 다시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분명 받지 않을 것이다.

준영에게 연락을 취해 볼까?

반짝 떠오른 생각에 스스로 빙고를 외쳤다.

치사하지만, 도망만 다니는 놈에게 딱 어울리는 방법이다.

[만약 지금 전화를 주지 않는다면, 난 준영에게 연락할 거야.]

빙고다.

얼마 되지 않아 곧장 전화가 걸려왔다. 제라드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정말 미친 듯이 일 처리를 했는데도 벌써 11시다. 제라드는 차가 도착하자마자 부랴부랴 내렸다. 늦은 밤이라 조용히 들어온 거라 현관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을 열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크리스가 계단 중간쯤에 서서 내려오는 게 보였다. 제라드가 들어오자 우뚝 멈추더니 그 상태 그대로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바쁜가 보네.”

“이틀…… 빠졌더니.”

“할 얘기 있다며. 와라.”

너무 덤덤한 태도가 걸렸다. 자신은 천지가 개벽할 정도의 일인데, 크리스는 전혀 아닌가 보다.

심지어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정말로 어제까지 함께 뒹군 사람이 맞나 싶었다.

“야, 크리스. 어제…….”

“방에 가서 얘기해.”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갑게 응수하는 크리스의 태도에 제라드는 입을 딱 하고 다물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눈빛에 대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다고.

다시금 가슴이 답답해진다.

천하의 멍청한 제라드 햄턴. 어쩌자고 친구를…….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뭔가 딱히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하긴 나올 답이면, 하루 종일 고민했을 때 나왔을 것이다.

크리스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책 냄새가 제라드를 반겼다. 예전에 크리스가 혼자 살던 원룸에서 딱 이런 냄새가 났다.

호텔경영학과를 나온 주제에 책 보는 수준은 웬만한 학자 수준이다.

에드워드도 그렇고 크리스도 그렇고 이렇게 책을 좋아하는 게 솔직히 제라드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두리번거리며 여전히 적응 안 되는 방 안을 살필 때 짧은 신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읏……!”

테이블 의자에 앉던 크리스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숨을 들이켜고 있었다.

“너 괜찮아?”

“치워.”

황급히 다가가 크리스의 몸을 부축해 주었지만 돌아오는 건 냉랭한 거부뿐이었다. 순간 무안했지만, 자신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불쾌하지는 않았다.

“침대에 가서 눕는 게.”

“괜찮아.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해.”

냉랭하게 대답한 후 크리스는 마치 식은땀이라도 닦듯 이마를 손바닥으로 쓱 쓸었다. 반곱슬인 자신과 다르게 미국인치고는 드문 직모를 가지고 있는 크리스의 앞머리가 찰랑이며 흘러내렸다.

“그……, 억제제가 안 통했어?”

“그런 것 같아.”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역시나다. 제라드는 속으로 한 번 더 낭패를 외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강제……로 당한 거지.”

“…….”

“미안하다. 제길. 알파란 건 정말이지.”

“넌 힘들어 보였고, 가뜩이나 햄턴 가가 구설수로 시끄러운데 여자를 부를 상황도 안 된다 싶었어.”

“……뭐?”

“합의라는 뜻이야. 그깟 거 한 번 대주면 된다 싶어서 내 나름대로 판다……, 뭐야?”

자신도 모르겠다. 왜 크리스의 손목을 잡아당겼는지. 왠지는 모르지만 불쾌한 감정은 확실했다.

“그깟 거라니. 말을 왜 그렇게 해.”

“그럼? 다 큰 성인의 판단하에 뒹군 건데……. 아, 그렇군. 넌 원치 않았겠구나. 내가 강간을 한 셈인가.”

“크리스! 왜 말을 그런 식으로 해!”

“그렇잖아. 넌 애초에 남자 안는 걸 싫어했잖아. 만약 맨정신이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위를 한 거니…….”

“야! 크리스!”

“늦은 밤이야. 조용히 말해.”

“너. 왜 그래. 이건 대화가 아니잖아.”

한 번도 본 적 없는 크리스의 태도에 당혹스러웠다. 지금까지 그와 참 많이도 부딪쳤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계속해서 부딪쳤었다. 하지만 한 번도 이렇게 일방적이지는 않았다.

“부탁 하나만 하자.”

잠시 침묵하던 크리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말해.”

“어제 일……. 제발 묻자.”

“…….”

“난 너와 껄끄러워지고 싶지 않아. 그냥. 사고라고 생각하고……. 제발. 부탁이야.”

저런 건 반칙이다.

도저히 안 된다는 말을 하지 못하게 저딴 표정을 지으면서 부탁을 하다니. 애초에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가.

“넌 사고로 넘어갈 수 있어?”

왜 이렇게 물었는지 모르겠다.

사고가 아니면?

“사고가 아니면?”

금방 떠오르던 생각과 동시에 크리스가 같은 질문을 한다. 이번에는 제라드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고야. ……사고일 뿐이야. 그러니 잊어.”

단호한 크리스의 말이 마치 세뇌 같았다. 그게 자신에게만 하는 말인지, 아니면 본인에게도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나가 줘. 피곤하다.”

침묵하는 사이, 크리스가 다시금 축객령을 내렸다. 제라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다. 막 방문을 열고 나서기 전, 돌아보았지만 크리스는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정면을 응시할 뿐이었다.

제길…….

마구 올라오는 화가 누구를 향한 건지도 모르겠다. 제라드는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왔다.

“뭐야? 너 베타였어?”

멋대로 남의 것을 들여다보고 한 말이 저거다.

“남이 베타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야.”

“아니, 난 네가 너무 예쁘고 귀엽게 생겨서 당연히 오메가인 줄 알았거든. 아쉽네. 네가 오메가였다면 바로 해결인데.”

“무슨 소리야?”

“난 알파거든.”

너무나 대수롭지 않게 쥐고 있던 검사지를 보란 듯이 흔들었다. 그 모습에 대화에 집중하던 반 녀석들이 오오 탄성을 내질렀다. 대부분 역시라는 반응이 더 컸다.

“헤에. 난 네가 오메가인 줄 알았는데.”

“뭐? 우리 집은 대대로 알파 집안이거든?”

“그래서? 유전자에 백 프로가 어디 있어? 솔직히. 너 나보고 예쁘다 귀엽다 하지만……, 너도 만만치 않은 거 알아?”

하나도 지지 않고 그대로 되받아쳤다. 제라드가 분노한 듯 씩씩거리고 있을 때, 어느새 다가온 담임이 그런 제라드를 크게 나무랐다.

“누가 남의 2차 성별을 멋대로 말하고 다니래? 크리스가 정말로 오메가였다면 얼마나 실례니?”

“선생님 말도 실례 아닌가요?”

“뭐?”

“지금 선생님 말도 실례라구요. 오메가가 죄도 아닌데. 왜 숨겨야 하는 거죠?”

제라드의 대꾸에 담임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 바뀌었다. 하지만 다른 애들을 상대하듯 그를 개인 사무실로 부르지 않았다. 그저 잠시 노려보다 휙 몸을 돌릴 뿐이었다.

반 친구들이 환호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권위적이고 학생을 가려 대하는 선생답게 그를 싫어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제라드는 마치 어른이라도 되듯 혀를 쯧쯧 차며 크리스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저런 가증스러운 사람이 제일 짜증 나.”

“난 네 놈이 짜증 나. 손이나 치워.”

신경질적으로 제라드의 팔을 치우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바보냐? 다음 수업 가야지.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 건데.”

“벌써 그렇게 됐어? 아아. 싫다. 째고 싶다아.”

제라드는 투덜거리며 깍지 낀 손을 뒷머리에 댄 채로 크리스를 졸졸 따라왔다. 싫으면 안 나와도 될 텐데 제라드는 늘 성실하게 학교에 나왔다.

언젠가, 싫다 싫다 하면서도 수업을 빠지지 않는 이유를 물었더니 엉뚱한 답이 돌아왔었다.

‘내가 가진 권리를 당당히 쓰려고. 어떤 귀여운 꼬맹이를 보면서 배웠거든. 참, 그 애는 백 프로 오메가일 거야. 나중에 장가가면 꼭 그런 귀엽고 사랑스런 아이에게 가야지. 그런 애라면 오메가라도 상관없을 것 같아.’

뭔 개똥 같은 소린가 하고 반쯤 흘려들었던 게 문득 떠올랐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마침 복도에 붙어있는 커다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제라드는 크리스를 보며 작고 귀여우니 넌 오메가일 거라고 말했었다. 그는 농담이었지만, 크리스는 내심 자신이 오메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보통 오메가가 나오는 집안에 오메가가 많은 편이다.

크리스의 집안은 아버지 쪽이나 어머니 쪽이나 오메가가 많다. 그러니, 자신도 어쩌면 오메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뚜껑을 열자 자신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베타였다.

어제 키를 쟀다.

일주일 만에 1인치 넘게 자랐다.

자신이 오메가가 아니라면 분명 베타인 아버지를 닮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키가 6피트 가까이 되신다.

자신은 분명 아버지를 닮았을 것이다.

“왜? 네가 봐도 네가 귀엽게 생겼냐?”

제라드가 잠시 거울을 본다고 서 있는 크리스를 발견하고는 킬킬거리며 다시 어깨동무를 하였다. 크리스는 무심한 눈으로 제라드를 보다 휙 몸을 돌렸다.

이제 어리석은 단꿈에서 깨어나야 할 차례다.

“……베타?”

오메가인 동생 리암에게 연인이 생겼다. 당연히 알파를 데리고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누가 봐도 난 베타요 할 정도로 평범한 남자였다.

만약 리암이 여성 오메가였다면 웃으며 환영해 줬을까.

남성형 오메가와 베타 사이에서는 임신이 되지 않는다. 즉, 베타 남성끼리 결혼을 하는 것과 진배없다. 실제로 법적으로도 통용되지 않고.

“크리스. 축하해 줄 거지?”

예민한 성격답게 크리스가 떨떠름하게 생각하는 걸 바로 눈치챘나 보다. 리암이 크리스의 손을 양손으로 덮듯이 잡으며 지그시 물었다.

애초에 반대를 어찌하겠는가. 어린애도 아니고 성인인데. 그럼에도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힘들 거야.”

“응.”

이미 다 안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짓는 리암을 보며 크리스는 그저 힘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햄턴 가의 집사로 들어온 건 말 그대로 제라드의 사정을 듣고 임시로 맡은 일이었다. 괜찮으면 쭉 이어갈 테고 아니면 호텔관리 쪽으로 이직해도 되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독하게 후회가 되었다.

그래도 가끔 만날 때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제라드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게 되니 자꾸만 신경에 거슬렸다.

지금처럼 늦은 밤, 집으로 들어올 때 그의 몸에서 낯선 향기가 날 때는 더더욱.

“여자 만나고 온 거야?”

“응? 아. 요즘 못 만나 줬더니 하도 뭐라 해서. 후아아암……. 졸리다.”

제라드는 크리스의 질문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힘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면 될 것을. 무슨 좋은 모습을 보겠다고 제라드의 방으로 뒤따라 들어가는 걸까.

자연스럽게 제라드가 벗은 슈트 상의를 들어주며 다시금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낯선 향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목욕물 받아 놨어.”

“오, 땡큐! 이야, 테드 때문에 널 부른 건데 왠지 내가 호강하는 모양새네?”

얼른 씻고 그 불쾌한 냄새를 지우라는 의미인데, 그런 마음을 알 길이 없는 제라드는 미적대며 크리스의 짜증을 더욱 부추긴다. 언제나처럼 어깨동무를 하며 뭐가 그리 즐거운지 키득거리던 제라드가 이번에는 갑자기 크리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으음. 정말이지 네가 오메가였으면 벌써 잡아갔을 텐데.”

“치워. 씻기나 해. 불쾌해. 냄새.”

“응? 냄새가 많이 나? 하긴 넌 향수 냄새 싫어했지.”

신경질적으로 제라드를 밀쳐냈다. 잠시 당황한 눈으로 봤지만 그 뿐이다. 제라드는 언제나처럼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에게 있어 크리스가 질투를 한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다는 게 보이는 순간이다.

늘 이런 걸로 상처받으면서도 계속해서 그의 곁을 맴도는 자기 자신이 너무 혐오스럽다.

“씻어.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야 한다며.”

“땡큐. 마이 달링.”

“닥쳐.”

오늘도 언제나와 같은 말장난에 심장이 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허망함을 느낀다.

직원의 도움을 받아 객실로 들어왔다.

객실 안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묵직한 공기가 크리스를 덮쳤다.

황급히 뛰어 들어가 두리번거리다, 이어 침실로 향했다. 침대 옆에 엎드린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제라드가 보였다.

“제라드!”

놀란 크리스가 황급히 다가가 제라드의 상태를 살폈다. 힘없이 축 처진 채 숨만 겨우 몰아쉬는 모습이, 정말로 괴로워 보였다. 무엇보다, 반쯤 찢긴 옷가지가 그가 지금 얼마나 힘든지를 알 수 있었다.

억제제. 일단 억제제를.

서둘러 자신의 가방을 찾았다. 방 안에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너무 다급해서 들어오다 떨어뜨렸나 보다. 다시 침실을 나가려 할 때, 제라드의 손이 크리스의 발목을 강하게 잡았다.

압력이 얼마나 강한지, 절로 눈가가 찡그려질 정도였다.

“억제제 가지러 가는 거……. 제라드!”

“하아……, 하아……. 너.”

순식간에 잡아당겨 눕혀졌다. 제라드가 그런 크리스 위에 올라탔다. 뜨거운 열에 한 번 놀라고, 이어 맞닿은 하체에 경악했다.

이게 사람의 크기라고?

언젠가 러트한 알파의 성기가 말 성기와 비슷하다며 한 오메가가 SNS에 남긴 글을 본 게 떠올랐다.

그때에는 과장된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허벅지에 닿는 것을 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하아……. 뜨거워. 내 몸이 타는 것 같아.”

눈동자가 흐릿하다. 초점을 잃은 상태로 크리스를 응시하더니 이어 목덜미에 코를 박고는 킁킁거린다.

사람보다는 개 같다는 생각을 하며 제라드를 달랬다. 제라드를 힘주어 밀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이번에도 저지당했다.

“억제제를 맞으면……. 제라드!”

이번에는 등 뒤에서 겹치듯 몸이 달라붙었다. 한 손으로 크리스의 배를 강하게 잡는 바람에 빠져나가기가 힘들다. 그러다 다른 손을 밑으로 내리더니 크리스의 바지 안으로 쑥 하고 집어넣었다.

“제라드! 정신 차려! 난 베타라고!”

“베타?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렇게…… 멋진 구멍이 있는데.”

이 미친 새끼!

오메가와 달리 전혀 젖지 않는 곳에 손가락을 밀어 넣고는 무자비하게 휘젓는다. 아픔에 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조여. 여기에 넣으면……. 씨발.”

메마르고 빡빡하다고 화를 낼 거라 생각했는데, 제라드는 더 흥분할 뿐이었다.

“……제라드. 나라고. 크리스.”

“크리스? 하아……. 마이 달링.”

정신 차리라고 한 말인데, 오히려 크리스가 순간 정신을 놓아버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었다. 침실 문 앞에 떨어져 있는 가방이 보였다.

무방비로 크리스의 목덜미에 입을 댄 채 욕정을 발산하고 있는 제라드를 돌아보았다.

지금이라면 잠깐이라도 제압이 가능하다. 일단 억제제를 맞으면 조금이라도 이성이 돌아올 거다.

“크리스.”

왜……? 왜 그래야 하지?

내가 베타라서?

‘크리스. 좋아하는데 성별이 무슨 상관이야? 아이 때문에? 일반 부부 사이에도 아이가 없는 경우가 많아. 그건 이유가 되지 않아. 그냥 겁이 날 뿐인 거야. 앞으로 닥칠 일이 겁이 나서 오만 핑계를 다 갖다 대는 거야. 하지만 크리스. ……정말 사랑한다면 그 모든 게 하찮게 느껴지게 될 거야. 지금의 나처럼.’

리암이 행복에 젖어 속삭이듯 말하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아이? 입양을 할 생각이야. 설령 준영이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되더라도 그의 몸에 무리가 가면 절대 가지지 않을 거야. 물론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데는 아이가 중요하지.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잖아?’

에드워드가 제라드의 질문에 대답하며 나직이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에드워드의 아이를 보고 싶기는 해요. 하지만…… 그와 함께라면 설령 그와 전혀 닮지 않은 아이를 입양한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를 사랑하는 만큼, 아이도 사랑해 줄 수 있어요. 제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요.’

제이크가 어쩜 다시는 임신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하자, 준영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했던 대답이 떠올랐다.

그들은 모두 행복했다.

그래. 무슨 상관이야?

“제라드. 넌 분명…….”

후회하겠지. 자신은 제라드를 좋아하지만, 그는 다르니까. 그저 친구일 뿐인 자신과 이런 짓을 한 것을 알게 되면 제라드는 분명 후회하고 또 후회할 것이다.

팔꿈치를 휘둘러 정통으로 제라드의 배를 후려쳤다.

무방비로 당해, 더 고통스러운지 쿨럭거리며 떨어진다. 크리스는 빠르게 그런 제라드를 밀어 눕히고는 그 위에 올라탔다.

“네가 당하는 거야.”

“하아, 하아…….”

“네가 나한테……. 강간당하는 거라고.”

분명 그들처럼 행복해질 수는 없을 거다. 기본적으로 일방통행인 관계이니까.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것도 따지고 싶지 않았다.

제라드의 바지 너클을 풀어 속옷과 함께 단숨에 내렸다.

눈으로 보고도 경악하며 믿지 못할 정도의 사이즈의 성기가 퉁 하고 튀어올랐다.

이미 젖을 대로 젖은 성기에서 줄줄 물이 흐른다.

입을 크게 벌려 삼켜본다. 처음 맛보는 남자의 프리컴은 빈말이라도 맛있다 할 수 없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미친 듯이 빨고 핥았다. 한 손으로 훑으며 잔뜩 올라붙은 고환을 살살 매만졌다.

기분이 좋은지 제라드의 목구멍 너머 그르렁거리는 짐승 소리가 들렸다.

알파는 사자에 비유하더니, 딱 그 짝인가 보다.

펠라 자체가 처음인데, 허리까지 튕겨 쑤셔 넣는 걸 견딜 리 만무했다. 목구멍을 무식하게 두드리는 바람에 구역질이 올라온다.

비린 맛이 프리컴 때문인지, 찢어진 입가에서 새어 나온 피 때문인지 모르겠다.

여린 점막이 두드려져 퉁퉁 부은 게 느껴질 정도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대로 정말 숨 막혀 죽을지도 모르겠다 싶은 그때, 제라드의 움직임이 멈췄다.

목구멍을 타 넘어 위에 차곡차곡 쌓이는 정액에 저절로 구역질이 올라왔다.

드디어 원하는 만큼 사정한 건지 목구멍을 채웠던 성기가 빠져나갔다.

정액과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성기는 여전히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쿨럭쿨럭……. 켁켁……!”

구역질 섞인 기침을 힘겹게 하고는 허탈하게 웃었다.

“야……. 오메가를 상대로는 그렇게 사정을 길게 한다며.”

방금 전도 배가 부를 정도로 정액을 쏟아낸 건 맞지만 분명 일반 성인 남자보다 조금 많은 정도였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갑자기 크리스의 어깨를 밀친다 싶더니 무자비하게 바닥에 눕혔다. 그 과정에서 뒤통수를 바닥에 부딪쳐 눈앞이 번쩍였다.

“……! 이 무식한 새…….”

짜증을 내려다 입을 다물었다. 방금 전 구음을 할 때와 전혀 다른 모양의 성기를 봐 버렸다.

“뭐야. 너 왜 갑자기…….”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진데다, 모양조차도 교과서에서 보던 모양처럼 바뀌었다.

꿀꺽. 침을 삼킬 때, 제라드가 크리스의 바지를 찢듯이 벗겼다. 그리고는 뭐라 할 틈 없이 양다리를 잡아 들어 올렸다.

한기가 쏵 하고 몰려왔다.

“기다려! 그대로 넣으면 나 죽는다고!”

퍽퍽 주먹으로 제라드의 배를 마구 차며 벗어났다. 아픔에 녀석이 다시 화를 내는 걸 무시하고 협탁 쪽으로 네 발로 빠르게 기어가 서랍을 열었다.

역시나 일회용 성인용품이 있는 걸 안도하며 파우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씨발. 내가 이런 짓을……. 씨발.”

누굴 탓하랴. 자신의 욕심에 일어난 일인데. 저놈은 그저, 욕망에 충직할 뿐인데.

크리스는 서둘러 파우치를 찢어 치부에 덕지덕지 발라댔다. 손가락을 넣어 다급하게 풀어보려 했지만, 어느새 다가온 제라드가 그런 크리스의 발목을 잡아 확 하고 당겼다.

“진짜……. 짐승이네.”

이런 짐승 놈하고 교미 한번 해 보겠다고 설친 자신이 등신이지 누굴 탓하랴.

드디어 자세를 잡은 제라드의 성기가 무식하게 작은 구멍을 벌리며 밀고 들어왔다.

놈도 꽉 조여 대는 바람에 아픈지 잠시 주춤하며 힘겨워했다.

“크읏……. 흣…….”

하지만 크리스에 비할까. 크리스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고통 속에서 벌벌 떨기만 했다.

“제발……, 천천히 해.”

알아들을 리 없건만 애원해 본다. 하지만 역시나 무자비하게 치고 들어올 뿐이었다. 컥 하고 멋대로 벌어진 턱에서 침이 줄줄 흐른다.

끝까지 박아 넣은 제라드가 낮게 으르렁거리더니 적응도 되기 전 허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불쏘시개로 배를 묵직하게 두들겨 맞는 느낌이 딱 이럴까 싶다.

중간중간 투둑 하는 소리가 들리는 착각도 들었다.

정말 병원에 실려 가지 않으면 다행이겠구나. 딱 그런 생각을 하며 크리스는 고통에 나오려는 신음을 억지로 삼켰다.

그러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한 자신을 수없이 원망할 것 같았다.

덮자고 해서 쉽게 덮을 수 있는 일이라면 이렇게 고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나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마주하는 사이라면 더더욱. 정말로 하루하루가 신경이 쓰였다.

태연한 표정으로 커피를 따르고 있는 크리스를 가만히 바라보다 그를 막 부르려 할 때, 예상치 못한 사람이 내려오자 입을 다물었다.

“준영? 이렇게 일찍 웬일이에요?”

“이제 슬슬 일찍 일어나려고요. 제이크가 내 생활 습관부터 바꾸래요.”

“늘어지게 자는 게 살찌는 방법 아닌가?”

제라드의 의문에 준영이 키득키득 낮게 웃으며 자리로 와 앉았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오던 에드워드가 제라드의 의문을 대신 풀어주었다.

“나도 딱 그 말을 했다가 혼났어. 살찌우려다가 건강 나빠지게 할 일 있냐고.”

“아.”

제라드의 얼빠진 반응에 준영이 다시 웃었다. 병원에서 퇴원 후 준영은 확실히 많이 나아졌다. 한때에는 기억이 끊겨 걱정을 했지만, 굳은 심지의 준영답게 현명하게 잘 넘어갔다.

제라드는 힐끔 에드워드의 커피 잔을 채우고 있는 크리스를 보았다. 평소라면 형제가 닮았다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띄웠을 크리스가 침묵을 유지했다. 그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정작 덮자고 한 주제에 그 역시도 예민하게 굴고 있다는 것을.

“커피……, 마음에 안 들면 바꿀까?”

“뭐?”

“한 모금 마시고는 입도 안 대서. 혹시 진해?”

“……아니야.”

그러니까 날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이 말하지 말라고!

제라드는 빽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을 억지로 삼켰다.

뉴욕에 있는 매장에 납품을 하러 올라왔다는 리암을 만나기 위해 간만에 외출을 했다. 준영은 걱정 말라며 다녀오라 손을 흔들었지만, 영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다.

아직 제시카가 잡히지 않은 상황이라 걱정이 되지만 집 안에만 있을 거니 크게 걱정할 건 아니다 싶어 서둘러 차를 몰아 시내로 향하였다.

뉴욕에서도 외곽지에 있던 터라 맨해튼까지는 제법 멀었다. 특히나 차를 가지고 간다는 건 그 거리에서 잠시 쉬겠다는 것과 같아 적당한 공영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뒤 버스를 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꺄악. 제라드다.”

순간 낯익은 이름에 고개를 돌렸다. 이십 대 여성 두 명이 높은 곳을 올려다보는 모습에 덩달아 시선을 쫓았다.

커다란 빌딩 전광판에 제라드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햄턴 사에 출근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찍은 향수 광고였다.

오메가로 알려진 여성 배우와 조금은 농염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제라드는 빌어먹게도 잘생겼다.

이미 화면은 다른 광고로 넘어갔지만, 그럼에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어디든 제라드가 있었다.

가장 핫한 남자답게 광고란 광고는 죄다 제라드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덕분에 늘 크리스만 죽을 맛이다.

“제발 이럴 때는 보지 말자.”

심장에 그다지 좋지 않다.

크리스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저 멀리서 오고 있는 버스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리암과 점심을 함께 먹고, 다음에 준영을 소개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한 뒤 헤어졌다. 공영주차장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걸음을 옮기다 우뚝 멈췄다.

제라드였다.

이번에는 광고 따위가 아닌 진짜 제라드 햄턴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다시 모델 일을 시작한다고 했던가. 아직 완전한 복귀는 아니지만, 회사 사정상 미뤄놨던 일은 틈틈이 처리한다고 들었다.

촬영 중인지 스텝과 경호원들이 모여 주변이 분주하다.

화려한 맨해튼 거리만큼이나 구경꾼 숫자도 장난 아니다. 연예인에게 익숙한 뉴요커들이 걸음을 멈춘 채 돌아볼 정도로 제라드의 인지력은 남달랐다.

“둘이 사귄다는 소문 있던데.”

“정말? 하긴, 저런 예쁜 오메가라면 나라도 사귀겠다.”

크리스의 앞에 있던 두 명의 여성이 작게 소근거린다. 그 말에 동감이다. 크리스는 다시 제라드를 바라보았다.

촬영 중이 아닌데도 연신 제라드에게 팔짱을 낀 채로 뭔가 말하고 있는 여자 모델과 그런 그녀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려다보던 제라드.

너무나도 잘 어울려, 카메라가 안 돌아가고 있는데도 촬영 중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다.

문득 자신의 모습이 건너편 매장 전면 유리창에 비치는 게 보였다.

제라드와 비슷할 정도의 키와 덩치.

피식. 웃음이 튀어나왔다. 이런 덩치로 제라드에게 박혀 앙앙대던 자신이 끔찍하다. 제라드가 러트 중이라 제대로 기억을 못 하는 걸 다시 한번 안도하며 걸음을 옮겼다.

“크리스?”

막 버스에 올라타려 할 때 들려온 제라드의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지만 끝내 모른 척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뭘 평소대로 하자야? 대놓고 무시하는구만.

분명 버스에 타기 직전 움찔하는 것을 봤다. 알파의 시력을 무시하면 안 된다. 가끔 안경을 쓰는 건 선글라스 용도로 쓰는 도수 없는 색안경일 뿐이다.

“왜 그렇게 저기압이에요?”

“내가?”

“네. 방금 전까지 기분 좋아 보이던데?”

“……내가?”

그다지 기분 좋다고 생각도 안 했는데?

영문을 몰라 다시 묻자 코디가 되레 의아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린다.

“내가 어떻게 알아요. 제라드가 그저 핸드폰을 보며 실실 쪼개길래 애인이랑 좋은 일이 있구나 했고 지금은 나빠 보이길래 그새 싸웠구나 한 거죠.”

“애당초 애인이 없는데 무슨 소리야.”

오메가인 걸 숨기고 접근한 그녀 이후 누구도 만나고 있지 않았다. 만날 여건도 신경 쓸 시간도 되지 않는다.

“삼 일 밤낮 촬영해도 여자 만나러 가던 분이?”

“…….”

오래된 사이인 만큼 제라드에 대해 너무 잘 안다.

“애인이 아니면 누군데요.”

“뭘?”

“아까, 촬영하기 직전에. 누구와 연락을 했길래, 저 여시가 팔짱을 끼고 살랑살랑 유혹질을 해도 못 알아챌 정도예요?”

“……걔가 그랬어?”

“아이구야. 첫사랑 시작입니까?”

“무슨? 그냥 친구 놈 트위터 올라와서 본 것뿐이야.”

“그래요?”

“그것뿐이야. 좀, 쓸데없이 오지랖 그만 부리고 너야말로 애인이나 사귀어. 내년에 40되지 않아? 이제 슬슬 한 사람에 정착해야 하지 않겠어?”

“흥.”

자신에게 불리한 말이 나오자 그제야 입을 다문다. 게이는 섹스에 자유로워서 좋다고 하면서도 요즘 외로워 보이더니 딱 제대로 약점을 잡았나 보다.

덕분에 분칠을 하는 손길이 거칠다.

그나저나……. 내가 그렇게 웃었나?

방금 전 크리스의 트위터가 올라왔다. 동생과 만난 건지, 리암의 사진이 올라왔다. 뒤이어 리암도 크리스의 사진을 찍어 올렸다. 사이좋은 형제란 건 알지만 질투가 날 정도다 생각하며 리암의 트위터도 시간 난 김에 둘러보았다.

베타 애인을 사귄다고 하더니, 대부분 그 남자 사진이다. 하지만 중간중간 크리스의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 년도 더 된 사진이 올라와 있어 한참 신기해하며 봤었다.

색 바랜 사진을 핸드폰으로 덧찍은 사진은 크리스의 어린 시절을 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크리스가 어릴 때 참 예뻤다. 오메가인 리암보다 더 예뻤다. 갑자기 폭풍 성장기를 거치며 빼도 박도 못하게 남자 몸이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예쁘고 섹시했다.

……제갈 내가 무슨 생각을.

연이어 떠오른 크리스의 뒤태에 화들짝 놀라 손바닥으로 입을 가로막았다.

“앗! 기껏 해놨는데 왜 지우고 그래요!”

립스틱이 손바닥에 묻은 걸 본 코디가 기함하며 땍땍거린다. 그러든지 말든지 제라드는 멋대로 올라오는 상념을 떨치려 한동안 애를 먹어야 했다.

‘제라드……. 네가 나한테 강간당하는 거야.’

“제길…….”

또다. 또 꿈속에서의 그 모습이 떠오른다.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타 앉은 채 한없이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도 웃고 있던 모습.

그리고 아픔 속에서도, 어떻게든 제라드에게 매달리던 모습.

자신의 성기를 입에 문 채 숨도 제대로 못 쉬며 힘들어하던 모습.

처음에는 망상인가 했지만, 빌어먹게도 나날이 선명해지는 기억에 깨닫고 말았다. 그 모든 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긴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씻자.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샤워기 물을 틀었다가 문득 어제 메일 하나를 톰슨에게 보내기로 한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아직 젖지 않았으니 보내고 씻자. 왠지 이대로 씻었다가는 또 까먹을 것 같아 서둘러 욕실을 나섰다.

“어…….”

언제 들어온 걸까. 무엇보다 방금 전 크리스가 한 행동을 분명 놓치지 않았다. 싹 하고 뒤로 숨겼던 걸 말이다.

“뒤에…….”

다시금 몸이 크게 떨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제라드는 빠르게 뛰어 크리스에게 덤벼들다시피 다가갔다. 당황한 크리스가 도망치려는 듯 뒷걸음질 쳤지만 제라드가 더 빨랐다.

끝까지 반항하는 크리스를 단숨에 제압해 그를 침대 위에 쓰러뜨리듯 눕혔다.

드디어 크리스가 쥐고 있던 게 무엇인지를 확인했다.

제라드의 티셔츠였다.

“너…….”

크리스는 제라드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 고개를 팍 하고 돌렸다. 질끈 감은 눈과 입이 명백하게 이번 일에 대해 침묵하겠다는 시위가 확실했다.

문제는 이 와중에 또다시 그 망상이 떠오른다는 거였다.

아니 망상이 아닌 현실이었으니 기억이라 하는 게 옳을 거다.

“너…….”

이번에는 크리스가 놀란 눈으로 제라드를 응시했다. 제라드는 그제야 자신의 앞섶이 단단해진 것을 깨달았다.

당황하며 황급히 떨어졌다. 크리스는 멍한 눈으로 제라드를 보다,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무언가 커다란 벽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은 듯 묘한 침묵이 흘렀다.

“씻어.”

이번에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덮으려는 크리스의 행동에 울컥 부아가 치솟아 올랐다.

“너 나 좋아하지?”

“……!”

등이 다시금 크게 굳는다. 대답을 이미 들은 것과 진배없다. 나 몰라라 내뱉은 제라드가 더 당황했다.

“그럼? 어쩔 건데.”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크리스가 묻는다.

어쩔 거냐고?

그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크리스가 혹시 자신을 좋아하는 걸까 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중요한 건 그 뒤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거다.

“후임 정해지는 대로 나갈게.”

“뭐? 무슨 소리야?”

제라드의 질문에 조금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텅 빈 듯한 크리스의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대로 크리스와 헤어지게 된다면, 두 번 다시는 이 녀석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당연하잖아. 이런 상태로 어떻게 있어. 거기다 애초에 이 집이 안정이 되는 순간까지라고…….”

“사귀자.”

“……뭐?”

자신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오고서야 제라드는 무슨 말을 내뱉은 건지 깨달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한 걸까?

“너 미쳤어?”

“……그래. 차라리 사귀자.”

“야.”

“너 지금 도망치려고 하는 거잖아. ……너 날 잊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 그러지 마.”

“허……. 허허…….”

어이없다며 허탈한 헛웃음을 내뱉던 크리스가 어느새 화를 내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잔소리라도 퍼부을 것처럼 입을 여는 모습에 다시금 크리스의 양손을 잡아 침대에 밀어뜨려 눕혔다.

“무슨! 읍……!”

그대로 키스를 퍼부었다.

혀를 밀어 넣어 녀석의 혀를 감싸며 빨아당겼다. 놀란 크리스가 바둥거리며 밀쳐내려 했지만, 힘으로 제라드를 이길 수는 없었다.

싫으면 물기라도 하면 될 것을.

크리스는 끝까지 제라드를 물지 않았다. 어느 순간엔 그의 양 손목을 잡은 걸 놓아 주었지만, 되려 크리스의 손이 그런 제라드의 팔을 움켜쥐었다.

“헉헉……. 헉…….”

“사귀자.”

“미친 새끼.”

“진작에 이럴 걸 그랬다. 왜 생각을 못 했지.”

“야. 너도 대……, 읍!”

키스는 나쁘지 않다. 아니, 좋았다. 꽤 괜찮다.

마치 첫사랑과 키스를 할 때처럼 설레서 좋았다. 그래, 그러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자신의 첫사랑은 크리스였으니.

한참을 입술을 탐한 뒤에야 떨어졌다. 긴 실타래가 이어지다 툭 하고 끊겼다. 번들거리는 크리스의 입술이 꽤 섹시하다 싶었다.

“사귀는 거지?”

“……도대체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 넌 날 좋아하고, 나도 널 나쁘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지금은 그것만 생각해.”

그때만 해도 몰랐다. 이 말이 얼마나 크리스에게 상처가 되는 건지를.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멍청한 자신의 멱살을 잡아 마구 흔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래를 알지 못하는 제라드는 그저, 골치 아픈 일을 해결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준영이 눈치를 채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털어놓아야 했다. 준영은 가족인 제라드와 크리스가 연인이 되었다는 그 사실 하나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의 진심이 느껴져서 덩달아 기분이 좋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굳이 준영에게 알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겨우 미소를 되찾은 준영에게 작더라도 걱정거리를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이건 스스로 해결할 문제였으니까.

“괜찮은 것 같아요.”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단 하나도.

하루아침에 핏줄을 잃어버렸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누이와 어머니가 연이어 죽은 뒤, 제라드는 한동안 말을 아꼈다.

에드워드와 준영의 앞에서는 언제나처럼 잘 웃고 잘 떠들었지만, 그때뿐이었다.

그래도 며칠 시간이 흐르니 조금 나아지는 듯했지만, 그래도 가끔은 멍하니 허공을 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느낀다. 자신이 정말로 의미 없는 사이라는 것을.

“왜 그러고 있어.”

자신이 먼저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던 주제에 크리스가 멈췄다고 묻는다.

“……많이 힘드냐?”

“뭐가?”

“아무래도 가족이…….”

“그자들은 내 가족이 아니야. 내 가족은 에드워드와 준영이야.”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제시카야 둘째치고 어머니에게는 늘 목말라 했던 주제에, 어떻게 멀쩡할 수 있을까. 하물며 어머니는 제시카에게 미안하다는 유언밖에는 써놓지 않았다.

아들에 대한 건 단 한 줄도 적지 않았다.

잔인한 여자는 죽은 자식 걱정에, 살아있는 자식을 또다시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거였다.

왜 살아 있는 제라드 생각은 해 주지 못하는 걸까.

아무리 제시카가 불우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제라드 역시도 그녀의 자식인 것을.

“제라드. 억지로…….”

“크리스. ……거기까지 하자.”

또다. 또 투명한 막이 생긴다.

차라리 친구였을 땐 느끼지 못했던 게 지금은 너무 선명하게 보였다. 제라드는 조금 피곤한 표정으로 크리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너도 피곤하지?”

제라드는 정말 멋진 연인이었다. 자상하고 다정하고, 잘 챙겨준다.

하지만 왜 수많은 여자들이 제라드의 곁에 그리 오래 있지 못하는지를 깨달아 버렸다.

그는 정말로 완벽한 연인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제라드는 완벽한 연인의 모습을 흉내 내고 있었다. 제라드 본인의 모습은 자연스레 숨긴다.

“제라드.”

“응?”

순간 헤어지자고 말할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이 얼마나 잔인한 인간인가. 지금 제라드가 가장 힘든 순간에 그에게 또다시 아픔을 주려고 한 스스로를 욕했다.

자신을 여전히 바라보고 있는 제라드의 옆으로 다가가 섰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그래.”

아니 넌 모르고 있어. 넌 지금 완벽히 혼자가 되려 해.

차라리 친구 크리스였다면 어땠을까. 이미 알고 있는 답에 혼자 씁쓸히 웃었다.

“미안. 나 요즘 이래저래…….”

“알아. 괜찮아.”

일어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아래에 당황하는 제라드를 오히려 크리스가 다독였다. 작은 애무에도 잔뜩 흥분한 크리스였지만 제라드는 그렇지 않나 보다.

알고 있다. 레베카의 일로 제시카의 일로 이래저래 심란한 것을. 그럼에도 왠지 모를 조바심에 일부러 분위기를 만든 건 자신이었다.

“네가 상대라서 서지 않는다고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날, 첫 섹스라 하기도 웃긴 섹스 이후 3개월이 흘렀지만 제라드와는 그 어떤 성적인 분위기도 나지 않았다. 그저 친구인데 스킨십이 조금 더 많은, 딱 그 정도 선이 다였다.

미안하다며 자꾸만 의기소침해지는 제라드를 가만히 안아 주었다.

그가 사과를 할수록 자신이 더 가슴 아프다는 걸 모르나 보다.

“응. 알아. 괜찮아. 괜찮으니까…….”

제발 용서를 빌지 말아줘. 애초에 알고도 그 손을 잡은 건 나니까.

이제는 결심을 굳혀야 할 때였다.

크리스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에드워드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조금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크리스를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아직 자네가 필요해.”

“감사합니다.”

“……차라리 제라드를 내보내 버리면.”

한낱 쓸 데도 없는 녀석이니까.

작은 중얼거림을 너무 똑똑히 들어 버렸다. 크리스는 피식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도 그 녀석 덕분에 신혼여행도 갔다 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설마 했는데, 에드워드는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준영과 도망을 쳐버렸다. 그것도 무려 한 달이나. 덕분에 제라드는 또다시 꼼짝없이 회사 일을 해야 했다. 한 달 동안 형을 저주하던 제라드는 정말로 웃겼다.

“잘 지내는 것 같더니.”

“친구 사이죠.”

“……혹시.”

“네. 연인이라고 할 만한 행동은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부드러운 키스 정도가 다였다. 그게 유일하게 친구 크리스와 다른 점이었다. 크리스의 담담한 대답에 에드워드는 더욱 골치 아픈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곧 햄턴 가를 처분할 생각이야. 물론 오래 걸리겠지만……. 그때까지 적임자가 필요해.”

“햄턴 가가 사라지면, 저 역시도 갈 곳을 잃어버리는데 미리 그만두는 게 더 맞을 것 같습니다만?”

“물론 보수야 넉넉히 쳐 주지. 그리고 다른 저택에도 소개시켜 줄 수 있어. ……그래도 안 되겠나?”

“죄송합니다.”

“하아. 멍청한 제라드 햄턴.”

“형제가 비슷하신데요, 뭘.”

“…….”

노골적인 크리스의 지적에 에드워드는 한 방 먹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핏 하고 웃었다.

“제라드 놈이…… 왜 자네를 따랐는지 알 것 같기는 해. ……녀석의 주변에는 진실을 말해 주는 친구가 잘 없지.”

그래. 친구.

제라드는 그저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던 거다. 그리고 자신도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제라드가 내미는 손을 마주 잡은 거였다.

“자네가 떠나면 제라드가 많이 힘들 거야.”

“애초에 한 달 전쯤부터 마음을 먹은 거였습니다. 제라드가 힘들까 봐 계속 미뤘던 거구요. 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너무 견디기 힘들다.

심지어 제라드도 한계일 것이다. 어젯밤 제라드가 화장실에서 자위를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깨달았다. 그를 이제는 놓아 줘야 한다는 걸.

“그래. 알겠네. 자네가 그렇게까지 싫다면야 어쩔 수 없지.”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제라드가 다음 주에 독일에 촬영 때문에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비밀로 해 주십시오. 준영에게도.”

“준영에게도? 하긴 준영이 거짓말에는 약하니까.”

에드워드도 준영이 알게 되면 제라드가 아는 게 시간문제라는 걸 잘 알아서인지 별다른 거부는 하지 않았다.

“알겠네. ……크리스.”

감사 인사를 드리고 막 개인 서재를 나서려 할 때, 에드워드가 그를 불렀다.

“제라드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줄 생각은 없고?”

“……제라드가 은근히 형을 닮은 걸 알고 있습니까?”

“할 말 없군.”

착한 놈이라 착하게만 굴려고 할 거다. 끊어낼 때는 확실히 끊어내야 하건만, 제라드는 그런 걸 잘하지 못한다. 아마 레베카 사건 때 평생의 결단력을 다 써버렸을 것이다.

“고향에 내려가려고?”

“아니요. 노코멘트입니다.”

“철저하군.”

제라드가 에드워드를 붙잡고 제발 크리스가 있는 곳을 알려 달라 애원한다면 그는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크리스는 이 형제들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 에드워드는 착잡함을 숨기지 않은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크리스는 미안하다는 말을 아끼며 서재를 나섰다.

흠……. 이 차. 크리스 녀석과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하얀색 람보르기니가 꽤 마음에 든다. 자신의 취향은 아니지만, 크리스가 이 차를 몰 거라고 생각하니 상당히 괜찮은 느낌이다.

“방금 표정 좋았어. 제라드!”

응? 이런, 촬영 중에 무슨 생각을.

제라드는 프로답지 않은 행동에 난감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감독은 마음에 드는지 영상을 확인하며 감탄사를 퍼부었다.

실제로 제라드가 봐도 꽤 괜찮았다.

하얀색 차를 연인 보듯 바라보라는 요구에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그림이 나왔다.

“역시 제라드야. 이번 촬영은 더 빨리 끝나겠는데?”

“그보다 궁금한 게 있는데…….”

“응. 뭔데? 말해 봐.”

태블릿을 보며 건성으로 대답하는 매니저에게 슬쩍 물었다.

“이 차 내가 사면 싸게 살 수 있나?”

“응? 이 디자인 네 취향 아니라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작게 되묻는 매니저에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매니저는 나름 제라드와 오래 일을 한 사람답게 바로 그 뜻을 캐치했다.

“아하. 선물? 알아볼게. 네가 타고 다닌다고 하면 공짜로 줄 테지만 선물이니……. 그래도 최대한 할인해서 줄 거야.”

“괜찮네요. 알아봐 줘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

다가오는 크리스의 생일에 선물로 주고 싶다는 욕심에 서둘러 달라고 대답한 뒤 다시 마지막 촬영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 오래 가네?”

“네?”

“이번 애인. 늘 한두 달 만에 끝나더니. 꽤 좋은가 봐?”

“비밀.”

좋으냐고? 미치도록. 그래서 무서울 정도지.

웃기게도 말이다. 크리스와 연인이 된 순간부터, 어떻게 지금까지 그를 사랑하지 않았는지 신기할 정도로 빠져들었다.

다만 문제는, 자꾸 꿈에 나오는 그 기억이다.

피를 흘리며 아파하고 괴로워하던 크리스가 너무 선명해 도저히 그를 안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욕정은 올라오지만, 아니 나날이 심할 정도로 올라오지만 도저히 요구를 할 수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 크리스가 웬일로 먼저 분위기를 잡기에 응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만 실패를 해버렸다는 거다.

크리스는 이해해 주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접싯물에 코를 박고 죽어도 시원치 않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애초에 크리스에게 사정을 말해야 했는데, 그때는 위로를 받고 싶다는 욕심에 모른 척했었다. 하지만 생각 이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서일까, 심지어 술까지 마신 터라 실패했었다.

크리스가 어쩌면 상처를 많이 받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명예 회복을 하고 싶어도 상황이 제라드를 돕지 않았다. 무려 망할 형님께서 준영과 함께 도망을 쳐 버리는 바람에 제라드는 두 배로 바빠졌다.

다시 복귀한다는 말에 신이 난 매니저가 받아버린 일과 상무 일까지 겹쳐 일주일에 세 번은 회사 옆 호텔에서 잘 만큼 바빴다.

다행히 크리스는 그런 것도 모두 이해해 주는 듯했다.

그래, 크리스는 어릴 때부터 그랬다. 제라드가 조금 짓궂게 굴거나 설령 못되게 굴어도 크리스는 늘 한결같이 제라드를 대해주었다.

왜 그걸 몰랐을까. 지금까지 그 어떤 누구도 크리스만큼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었는데.

“오오, 애인 생각하나? 아주 표정이 좋아!”

이런. 또다. 컨셉이 연인이라 다행이지, 다른 거였다면 정말 곤란할 뻔했다. 제라드가 모델로 데뷔한 지도 어언 십 년 차였지만 이런 실수는 처음이라 그로서는 곤혹스러울 뿐이었다.

주인이 없다는 걸 보여 주듯,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사진까지도 모두 사라졌다.

“내가 알았으면.”

함께 크리스의 방으로 들어선 준영이 축 처진 채 슬퍼했다. 평소 같으면 준영을 위로했을 제라드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테드는 알았어?”

“에디는 알고 있었던 것 같았어요. 난 크리스가 갑자기 짐을 들고 나서는 걸 보고 알았고.”

“씨발! 에드워드 지금 어딨어!”

“제라드, 흣…….”

분노에 버럭 소리를 지르다, 아차 했다. 황급히 기운을 거두고 힘겹게 바닥에 쓰러지는 준영을 안아 들었다.

“미안. 미안……. 미안하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괜찮다고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 몸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해도 아직 가녀린 편인 준영에게 알파의 페로몬은 취약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급한 대로 준영을 크리스가 썼던 침대 위에 눕히고는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힘없이 주저앉았다. 벽에 머리를 댄 채 자꾸만 올라오는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제라드.”

“어떻게 말도 없이.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그 빌어먹을 새끼는 늘 이랬다. 늘 가슴속에 제라드는 절대로 모르게 숨겨놨었다. 그리고 늘 이렇게 폭탄을 터트렸다. 그것이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제라드. ……크리스를 사랑했어요?”

기운을 조금 차린 건지 준영이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며 물어왔다. 제라드는 어이없음을 숨기지 않고 고개를 돌려 준영을 바라보았다.

“당연하잖아.”

“하지만 크리스는 늘 자신이 없어 했어요. 제라드가…… 착해서 자신과 사귀는 거라고.”

“뭐?”

“크리스가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해서 못했는데, 후회되네요. 이렇게 크리스가 떠나갈 줄 알았다면 진즉에 제라드에게 말해 줄 걸.”

준영이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준영의 잘못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말해 주지 않은 그가 야속했다.

그리고 죄 없는 준영에게 야속함을 느끼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애초에 자신이 머저리처럼 굴지 말아야 했다.

어떻게 크리스가 모든 걸 다 이해해 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을 보인 거지?

“혹시 크리스가 갔을 만한 곳…….”

제라드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준영이 고개를 저었다.

“에디와 무슨 대화를 나눈 것 같기는 해요. 일주일 전쯤에, 그러니까 제라드가 독일에 가기 전에 크리스가 에디의 서재를 찾았거든요. 아마 그 때 그만둔다고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테드한테 갈게!”

“네? 하지만 곧 있으면…….”

준영이 다급히 말렸지만 무시하고 곧장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때마침 복도에서 모습을 보이던 에드워드를 발견했다.

“얘기 좀 하자.”

“에디. 일찍 왔네요?”

뒤따라 온 준영의 질문에 에드워드는 짧게 대답하며 이마에 입맞춤을 해 주었다.

“일단 이 녀석과 얘기 좀 하고 올게.”

“네.”

에드워드의 말에 준영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제라드를 보았다.

제라드도 묻고 싶은 말이 많아 곧장 에드워드의 뒤를 쫓았다.

“테드. 크리스가 그만두려고 한 거 알고 있었다며.”

막 자신의 서재로 들어서는 에드워드를 따라 들어가며 물었다. 에드워드는 서재 문을 닫고는 긴 한숨을 내쉬며 제라드를 바라보았다.

“말해 주지 않아서 서운하니?”

서운하다?

아니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리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에드워드가 굳이 알리지 않았다는 건 분명 크리스가 원치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크리스가 어디로 간 건지는 알아?”

“그게 중요한 거니?”

“당연하잖아! 나한테는 중요한 문제야!”

“크리스가 왜 떠났는지부터 물어야 하지 않아?”

꽉 입술을 깨물었다.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라 뭐라 반박조차 하지 못했다.

“예전에 네가 나에게 그랬지.”

“……기억 나.”

“잘 아니 다행이구나. ……꼭꼭 숨을 작정을 한 듯 보였어. 찾기 힘들 거야.”

에드워드의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그조차도 크리스가 어디로 간 건지를 전혀 알아내지 못할 거라는 걸.

에드워드의 말처럼 크리스는 작정을 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의 가족들을 찾아도 말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그들은 크리스가 떠난 걸 모를 수도 있다.

제라드는 한참을 발치를 응시하다 발길을 돌렸다. 에드워드가 제라드를 불렀지만,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정신이 되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게 혼란스럽고 지치는 기분이었다.

“컷!”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실수에 결국 감독이 촬영 시간을 미루었다. 여자 모델과 먼저 촬영을 하는 동안 머리나 식히라 말하는 감독에게 사과를 한 뒤 힘없이 대기실로 향하였다.

매니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제라드의 뒤를 쫓았다.

“도대체 왜 그런지 알고라도 싶은데.”

“그냥 조금 기운이 안 나네요.”

“네가 모델이 된 후 한 번도 없던 일이잖아. ……혹시 실연이라도 당한 거야?”

조심스럽게 묻는 매니저의 질문에 제라드는 힘없이 피식 웃었다.

매니저 옆에서 함께 눈치를 보고 있던 코디도 역시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어도 별다른 대꾸를 할 기운도 나지 않았다.

멍하니 대기실의 거울을 응시했다.

저건 누구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다. 그러고 보니 화장을 하는 내내 피부가 왜 이러냐고 걱정하던 코디의 말이 떠올랐다.

에드워드의 일과 병행할 때에도 모델 일을 할 때는 어떻게든 피부 관리를 해서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기 위해 애를 썼던 자신이, 벌써 한 달 넘게 나 몰라라 내팽개쳤더니 말 그대로 엉망 그 자체였다.

멍하니 힘없이 처진 채 꺼놨던 핸드폰을 켰다. 언제나처럼 혹시라도 크리스에게 연락이라도 왔을까 새로운 메시지를 기대하며 핸드폰이 켜지기를 기다렸다.

딩동.

작은 문자 소리에 서둘러 확인을 하였다.

기다리는 문자는 아니지만, 예상치 못한 문자였다. 제라드는 시간을 확인 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

“아, 형수가 왔다네요.”

“응? 형수? 에드워드 햄턴의 부인?”

곰곰이 생각하던 매니저가 화들짝 놀란다. 그도 그럴 것이 준영만 잘 모를 뿐 그에 대한 건 이미 유명하다.

현대판 신데렐라라 불리지만, 에드워드는 신데렐라가 그다지 좋은 뜻이 아니라고 생각한 건지 준영의 귀에 일절 들어가지 않게 만들었다. 심지어 준영의 폰에도 검색어에 뜨지 않도록 설정하는 치밀함까지 보일 정도다.

아주 가끔은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에드워드의 입장에서는 본인이 지은 죄 때문에 준영이 크게 다쳐 더욱 그러는 게 아닐까 싶다.

“준영!”

“……제라드.”

촬영장 바리케이드 너머 사람들 사이에 준영이 서 있는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제라드의 외침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준영에게 모이자,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오른다.

“왜 말을 안 했어? 부르거나, 매니저에게 연락을 하지 그랬어?”

바리케이드 줄을 들어 올려 준영이 들어오기 쉽게 도와주었다. 준영이 힐끔힐끔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오며 대답했다.

“왠지 일하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아서요.”

“혼자 온 건 아니지?”

“아니에요. 경호원들도 뒤에 있어요.”

그제야 준영이 서 있던 뒤쪽에 베타 여성과 남성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에게 들어와도 된다 말한 뒤 준영과 함께 대기실로 향했다.

“제라드 촬영은…….”

“여자 모델 파트부터 찍는다고 그래서 지금 조금 쉬는……. 혹시 언제부터 본 거야?”

대수롭지 않게 대답해 주다 문득 드는 생각에 슬쩍 떠보았다. 역시나 제라드의 추측이 맞나 보다. 준영이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짓다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1시간 전쯤부터요.”

“하아. 다 봤구나. 그보다 한 시간이나 이런 뙤약볕에 서 있었다고? 테드한테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건 아니지?”

“촬영하는 거 구경한다고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는데……. 미안해요.”

“나뿐만이 아니라고. 일단 준영의 경호원들이 에드워드의 그 성질을 다 견뎌야 할 거 아냐? 다음부턴 윗사람으로서의, ……아니다. 나부터가 제 맘대로인데 뭘. 일단 들어와.”

잔소리를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사실 경호원들이 가장 경호하기 싫은 인물이 바로 자신일 것이다.

셀린느는 경호원의 수가 자신의 체면 수라고 생각하는 건지 늘 4명 이상 끌고 다녔다. 덕분에 차도 늘 두 대나 끌고 다녀 제라드가 한심하게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반면 제라드는 어딜 가더라도 경호원을 따돌리고 가버렸다. 그것 때문에 에드워드에게도 종종 혼나지만, 거추장스럽다 생각되는 건 고쳐지지 않아 지금도 가끔 경호원들을 버리고 다니는 편이다. 그러다 큰코다친 게 얼마 전이고.

문득 생각하다 보니 크리스와 사고 쳤던 그 날 일이 떠올라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매니저, 코디와 인사를 나누던 준영이 제라드의 한숨 소리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저기……. 대화하고 있어. 우리는 나가 있을게.”

“마실 건? 필요 없으세요?”

“아니요. 아까 밖에서 너무 많이 마셔서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코디는 후딱 인사를 하고는 도망쳤고, 매니저는 준영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준영은 괜찮다며 빙긋이 웃으며 답했고, 매니저는 조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련이라도 남은 사람처럼 미적거리며 대기실을 나섰다.

여자 매니저라도 알파라 그런지, 준영에게 호감이 가나 보다. 제라드는 왜 에드워드가 그리 전전긍긍하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살이 오르고 건강을 되찾으면서 준영은 보란 듯이 피어올랐다. 건강해지자 호르몬도 정상 수치가 되어서인지, 정기적인 히트 사이클도 오는 듯했다. 문제는 그게 컨트롤이 잘 되지 않아 준영의 몸에서는 늘 달콤한 냄새가 뿜어져 나온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나도 준영의 향기에 늘 노출되어 있는 편인데…….

한동안은 준영의 냄새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양심에 살짝 찔릴만한 망상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준영의 냄새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게 된 게.

“……생각났다.”

더 좋은 향을 맡았기 때문이다.

페로몬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크리스의 몸을 끌어안을 때마다 느껴지는 그의 살 냄새에 자신이 더 흥분한다는 걸 깨달았다.

“뭐가요?”

준영이 되묻고서야 제라드는 자신이 말로 내뱉은 걸 인지했다. 멍하니 준영을 돌아보다 힘없이 웃었다.

준영도 듣지 않아도 알았는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축 처진 제라드에게 다가와 그를 상냥하게 끌어안았다.

“이러는 걸 테드에게 들키면 죽을지도 몰라.”

“하하하. 걱정 마요. 에디는 은근히 브라콤이니까요. 그리고…… 예전에 내가 힘들 때 제라드가 이렇게 안아 줘서 정말 큰 힘이 됐어요. 그러니 나도 제라드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

준영의 말에 조금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뻥 뚫린 듯한 가슴은 하나도 채워지지 않는다.

잠시 침묵 후 준영이 살짝 떨어져 제라드를 올려다보았다.

“제라드. 크리스 사랑해요?”

“당연하지.”

그래서 화가 난다.

자신에게 투정 한 번 안 부리고 참다가 떠나버린 놈에게 화가 나고, 무엇보다 크리스의 감정보다 자기 감정에 더 충실했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럼…… 해 볼래요?”

“해 보다니?”

“나쁜 짓.”

“……?”

나쁜 짓?

영문을 몰라 갸웃거리는 제라드에게 준영이 조금 굳은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에디도 그냥 두라고 하지만 난 싫어요. 제라드에게 크리스가 소중한 만큼 나 역시도 형태는 달라도 소중한데……. 나에게도 아무런 말조차 하지 않았어요.”

뭔가…… 엄청나게 화난 것 같지?

차마 직접적으로 묻지 못하고 있을 때 잠시 허공을 응시하며 침묵하던 준영이 다시 제라드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나도 조금 복수하려구요.”

“복수?”

“네. 내가 할까도 생각했지만 에디의 심장에도 좋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러니 제라드가 해요.”

그러니까…… 그게 뭔데?

자신도 모르게 준영에게 쫄아 대놓고 묻지 못했다.

하지만 왜 에드워드가 그렇게 순한 준영의 눈치를 보는지는 몸소 깨달아 버렸다.

매장 정리 후 사장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곧장 카페를 나섰다.

처음에는 숙직이 제공된다는 구인 문구에 혹해서 카페에 취업했지만, 하다 보니 후회 중이다.

뉴욕 맨해튼의 카페들처럼 미친 듯이 바쁘지 않고 그럭저럭 조용한 분위기였다. 브런치와 함께 하는데도 말이다.

브리지포트 주의 외진 마을이라 카페 수도 그리 많지 않건만 이래 가지고 수입이 나나 싶을 정도다.

하긴 사람을 구할 정도면 수입이 나기는 하겠지.

살인적인 자릿세를 내는 맨해튼과는 다르니 말이다.

문제는 너무 조용해서 별 잡생각이 다 든다는 거였다. 벌써 한 달이 흘렀음에도 말이다.

일을 하는 중간 중간에도, 이렇게 조용한 평일이라 일찍 마친 날에도.

자꾸만 그 망할 놈이 머릿속에 떠올라 화가 났다.

자신에게.

“언제쯤 사라질 거냐.”

십 년 넘게 짝사랑했다. 중간 중간 포기하기 위해 애인도 사귀어 봤지만, 결국에는 상대방에게 미안해 더는 그 누구도 사귀지 않았다.

너무 심하게 외로워지면 원나잇으로 상대방을 구했지만 그런 다음 날은 더 외롭고 허무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한 남자만이 자신의 가슴 속 한켠에 자리를 차지한 채로 십 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차라리 그놈이 결혼이라도 한다면 포기할 수 있을까.

그래, 예전이었다면 속은 찢어져도 겉으로는 웃으며 그 녀석의 결혼을 축하해 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없다.

더는 바라보며 웃어 줄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집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어 일단 근방의 작은 마트에 들렀다. 이 마을에서는 그럭저럭 큰 편인 대형마트로 막 들어서려고 하는 그 때,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여, 크리스. 혼자야? 우리 지금 한잔하러 갈 건데 같이 가겠어?”

카페 옆 가게의 식당 직원들이었다. 브런치와 커피 때문에 거의 매일같이 들르는 바람에 얼떨결에 친해져 버렸다.

호탕한 성격들답게, 크리스가 어쩔까 고민하는 사이 다가와 그의 양팔을 각각 붙잡는다.

“뭘 망설이시나.”

“어차피 가서 잠밖에 더 자?”

이렇게 강제로 잡아갈 거면 애초에 질문을 왜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의 말대로 이런 기분으로 집으로 가 봐야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만 주야장천 회상할 것이다. 차라리 진탕 놀고 취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 순순히 그들을 뒤따랐다.

식당의 주방장인 재크가 유달리 친근한 척한다 싶었더니, 역시나 게이였나 보다. 바에서도 노골적으로 스킨십을 하더니만, 작정을 한 건지 집으로 가려던 크리스를 뒤따라 나섰다.

“크리스. 너 괜찮아?”

“……응. 괜찮아.”

비틀거리는 크리스의 팔을 잡으며 걱정스럽게 묻는 재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덩치가 딱 이 정도일 거다.

재크도 베타치고는 몸이 다부졌다. 요리사 일을 오래 해서일까. 팔 근육은 더 도드라지게 발달되어 있었다.

“혹시 나한테 관심 있어?”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도 조금 늦게 인지가 되었다. 재크의 두 눈이 커지더니 이내 크리스를 벽으로 밀쳐 키스를 퍼붓는다.

수염 자국이 거슬린다.

방금 전 재크가 뭘 먹은 건지도 여실히 느껴졌다.

아니, 사실 술이 꽤 되어 아무런 맛도 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제라드와 다른 부분을 본능적으로 찾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크리스는 힘없이 재크를 밀쳤다.

“……미안.”

애초에 틈을 보인 건 자신이었다. 노골적으로 대시를 하는 걸 알았음에도 거부하지 않고 가만히 받아 주었다. 재크는 그것에 반응한 것뿐이었다. 불쾌하게 여긴다면 충분히 불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텐데도 재크는 오히려 미안해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해. 술이 좀 됐나 봐. 미안.”

머리까지 긁적이는 재크의 모습을 보면 생긴 것만큼 착실한가 보다. 덩치가 비슷해서일까. 자꾸만 그놈이 떠오르는 게 더는 무리였다.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이상하게 숨을 잘 쉬지 못해 힘들다 싶었는데, 막 집 안으로 들어서고서야 왜 그런지를 알았다.

눈물로 얼굴이 엉망이었다.

이래서 술을 마시면 안 되는 거다. 크리스는 신발장의 거울을 통해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다 힘없이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크흐흐흐…….”

그 녀석이 보고 싶다.

일이 바빠 가끔 오랫동안 보지 못한 경우는 종종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유달리 더 그 녀석이 그리웠다.

차라리 가식적이라 해도 옆에 있을 걸…….

멍청하게 군 자신을 후회한다. 그리고 또 후회하는 자신을 어리석다 타박한다.

크리스는 오랫동안 현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너무나도 서글픈 자신을 다독였다.

오늘따라 지독하게도 제라드 햄턴이 그리웠다.

두 달쯤 되자 슬슬 일도 기분도 적응이 되어갔다. 밤마다 외로움에 뒤척이는 것도 힘들어, 저녁에는 바에서도 아르바이트를 했더니 차라리 몸은 피곤할지언정 정신은 조금 살 것 같았다.

그래도 한계는 있나 보다. 커피를 리필해 주기 위해 포트를 들고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다 갑자기 어지러움이 확 밀려와 자리에 멈춰 섰다.

누군가 빠르게 다가와 크리스를 부축해 빈자리에 앉혔다.

“크리스. 너 괜찮아?”

오늘도 브런치를 먹으러 온 재크였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재크에게 괜찮다 말하려다, 카페 한켠 TV 화면이 바뀌어 멍하니 시선을 고정했다.

“크리스?”

잘못 본 건가 싶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저 기사…….”

재크에게 되물으려다 말고 황급히 리모컨을 들어 다른 뉴스채널을 틀었다. 유명한 만큼 채널마다 그 기사를 다루고 있었다.

“제라드 햄턴, 교통사교로 의식 불명? 중증? 설마 아는 사람이야?”

재크도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지 뉴스를 잠시 보다 크리스에게 되물었다. 그의 질문이 크리스에게 이 상황이 현실이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마스터. 저……, 잠시…….”

손이 떨린다.

벌벌 떨며 어쩔 줄을 몰라 하다, 일단 그에게 물어봐야겠다 싶어 핸드폰을 든 채로 황급히 카페 밖으로 뛰어나갔다.

번호를 기억하고는 있지만 손끝이 떨려 잘 찍히지 않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번호를 찍은 후 핸드폰을 귀에다 가져다 대었다.

잠시 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준영? ……나예요. 크리스.”

-크리스? ……흑. 크리스. 제라드가. 제라드가…….

준영은 채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한 채 울음부터 터트렸다. 다시금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크리스 미안해요. 지금 응급실 앞이라 이제 꺼야 해요. 여기 내가 입원했던 그 병원이에요. 그럼.

뭐라 채 말을 하기도 전, 준영이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끊겼음을 알리는 기계음이 이어지다, 뚝 하고 끊겼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이야?”

“…….”

언제 뒤따라온 건지 재크가 조금 슬픈 듯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마음을 그곳에 두고 온 거라면……, 이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 보아하니 도망친 것 같은데, 확실히 끊어내지 않으면 넌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그런가.”

제대로 차이지 못해서 그런 걸까. 그래서 계속 아프고 슬픈 걸까.

“가 봐. 위급하다잖아. 더 후회하지 말고. 바 사장에게는 내가 대신 말해줄 테니.”

“고마워. 꼭, 꼭 보답할 테니까.”

“보답은 네가 좋은데.”

농담처럼 웃는 재크에게 한 번 더 고맙다 말을 하고는 황급히 카페로 들어섰다.

병원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엄청난 취재진이 진을 치고 있어 주변만 배회했다. 준영에게 다시 연락을 취해 보지만,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에드워드에게 연락을 취하려 할 때, 익숙한 얼굴의 한 남자가 다가와 행동을 멈췄다.

“오랜만입니다.”

“네. 그러네요.”

제라드의 경호원 중 한 명이었다. 종종 마주쳐 이름 정도는 알고 있는 사이였다.

“절 따라오십시오.”

경호원의 말에 크리스는 황급히 그 뒤를 쫓았다. 병원을 빙 둘러 가길래 처음에는 뒷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나 보다 했다. 하지만 경호원은 병원을 지나칠 뿐이었다.

“저기…….”

“제라드 씨는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네?”

응급상황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경호원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다. 경호원은 걸음을 걷다 자리에 멈춰 서고는 가만히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치료가 필요 없는 상태라고 하면 될까요?”

“……네?”

“일단 가시죠.”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치료가 있을 필요가 없는 상태라고?

무언가 자꾸 혼란스러웠다. 절대 아닐 거라고 생각하려 해 봐도 자꾸만 머릿속 생각들이 제멋대로 어지럽게 뒤엉켰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다시 물어도 경호원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병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둔 차로 크리스를 안내한 뒤 뒷문을 열어주었다.

“가 보면 알게 되십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농담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지만 경호원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그래서 묻지 못했다. 지독하게 무서워 묻지 못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아직 그런 뉴스는 뜨지 않았잖아?

하지만 비밀리에 처리하려고 든다면 얼마든지 언론 모르게 치를 수 있다는 걸 잘 안다. 크리스는 아까보다 더 눈에 띄게 몸이 떨리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햄턴 가에 당도했을 때 크리스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을 맛보았다.

“내리십시오.”

“아니죠? ……아니죠?”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에는 마중 나온 고용인들이 하나같이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크리스는 넋을 놓은 채 힘없이 차에서 내려섰다.

“크리스 씨.”

“괜찮습니다. 그보다 제라드는?”

이게 뭘까. 도대체 이게 뭘까.

자신이 원한 건 절대 이런 게 아니었다. 제라드와 인연을 끝내기를 바랐지만 그를 영원히 못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앞서가는 경호원 뒤를 힘없이 뒤따랐다. 이상하게 시야가 자꾸만 뿌옇게 바랬다 흔들렸다를 반복했다.

다시금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왜 멍청하게 솔직해지지 못했을까. 왜 바보같이 알량한 자존심에 솔직하게 굴지 못했을까.

“크리스……. 왔군요.”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역시나 검은 옷을 입은 준영이 슬픈 표정을 지은 채 다가왔다. 두 달 만에 만난 준영은 보기 좋게 살이 올랐지만, 빈말로도 좋아 보인다는 인사를 해 줄 수 없었다.

그럴 정신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제라드……, 보러 온 건가요?”

“그 녀석은…….”

아파했나요? 아니면 고통도 못 느끼고 갔나요?

그 간단한 질문도 하지 못했다. 결국 튀어나오는 신음을 참지 못하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주룩 바닥에 허물어졌다.

“크리스!”

“이런 걸…… 원한 게…….”

이런 걸 원하지 않았다. 자신의 어리석은 잘못으로 인해 이제는 영원히 그 녀석을…….

“그럼 뭘 원했는데?”

“……?”

잘못 들었나 싶어 가만히 귀를 기울일 때 들려온 발자국 소리에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뭘 원했냐고.”

꿈일까. 자신이 너무 바래서 환상이라도 본 걸까.

“넋을 놨네. 쯧.”

제라드가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더니 이어 다가와 그 상태 그대로 크리스를 번쩍 들어 올렸다. 너무 몰라 버둥거리는 크리스에게 가만히 있으라 신경질을 내고는 준영을 바라보았다.

“덕분에 잡았네. 고마워.”

“아니요. 나도 복수할 수 있어서 후련해요.”

“무슨……, 이게 무슨…….”

제라드의 말에 준영이 배시시 웃는다. 도저히 머리가 따라가지 못해 어버버거릴 때 제라드가 휙 몸을 돌려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제라드. 너……, 다친 곳은?”

“멀쩡해. 손끝 하나 안 다쳤어. ……뭐, 다쳤다고 구라쳐서 최소 두 달은 방콕해야 하지만.”

“그럼…….”

“멍청아. 보면 몰라? 너 잡으려고 연기한 거지.”

계단을 올라가던 제라드가 갑자기 멈춰서고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돌아본다 싶더니 그대로 크리스를 강하게 옥죄듯 끌어안았다. 따뜻한 체온과 체취가 물씬 풍겼다. 제라드는 행여나 크리스가 어디 도망이라도 갈까 싶은 사람처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고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드디어…… 잡았다.”

“……큿.”

아직도 혼란스럽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차라리 이 모든 게 장난이라 감사했다.

* ♟ *

제라드의 방 소파에 앉아 가만히 발치만 보기를 얼마나 흘렀을까. 역시나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던 제라드가 먼저 입을 열어 긴 침묵을 깨트렸다.

“많이 놀랐냐?”

“……왜 그런 거짓말을.”

이성이 조금 돌아오자, 창피함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뻔히 보이는 일인데 홀라당 넘어가 버린 자신이 정말로 창피했다.

“놀랐다면 미안하지만 그래도 그 거짓말을 한 건 사과 안 할 거야. ……두 달이야. 미친 듯이 찾아다녔다가 마지막 수단으로 동의한 거야.”

“동의?”

“준영이 하자고 하는 걸 조금 미뤘거든. 너무 극단적이다 싶어서.”

그러니까 이 모든 게 제라드의 생각이 아닌, 준영의 계획이었다는 사실이 더욱더 놀라웠다. 그러고 보니 복수가 어쩌고 했었다. 아직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미간을 찌푸릴 때 제라드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설명을 해 주었다.

“준영도 단단히 삐졌어. 자기한테도 아무런 말 없이 사라졌다고.”

“아…….”

동생이니 뭐니 그런 소리나 해 놓고 갑자기 소리소문없이 사라졌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그렇다고 이런 작전을 꾸미다니.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제라드가 꾸민 일이라면 역시 이놈답다고 생각했을 텐데, 준영이라니.

“그래서. ……소감은?”

“뭐?”

“내가 죽었다 생각했을 때 든 네 머릿속 생각.”

직설적인 질문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방금 전까지 머릿속에 든 생각이라니. 사실 아무런 생각도 못 했다. 그저, 후회만이 가득했을 뿐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생각한 게 맞나 본데. ……후회했어?”

“…….”

“날 살아있을 때 만나지 못해서? 자, 그럼. 살아있을 때 만나서 하고 싶었던 말. 해 봐.”

“뭐?”

“나한테, 숨기지 말고. 똑바로. 말해 줘.”

제라드는 말을 하다 말고 벌떡 일어나 다가와 크리스의 앞에 무릎을 꿇어 시선을 똑바로 맞췄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려 할 때, 제라드가 양손을 뻗어 크리스의 뺨을 잡아 강제로 고정시켰다.

“분명 떠나갔을 때, 네가 숨었을 때 이유가 있었을 거 아니야! ……말해 줘.”

“뭘 말하라는 거야. ……너도 알잖아.”

“아니, 몰라. 도대체 내가 뭘 안다는 거야?! 너에게 줄 선물 한아름 사 들고 왔는데……. 갑자기 소리소문없이 사라졌어. 도대체…… 내가 뭘 알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날 사랑하지 않잖아!”

왜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걸까. 화가 난다.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조금 놀란 표정으로 크리스를 응시하던 제라드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내 표현이 부족했던 거야?”

“왜 끝까지 모른 척해. 너 내 몸에 손도 대지 않았고…….”

“왜……!”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제라드가 버럭 화를 내듯 소리를 내질렀다. 말로 내뱉은 걸 주워 담고 싶을 정도로 창피해하던 크리스는 제라드의 고함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화가 잔뜩 난 제라드의 표정이 너무 낯설다.

“왜 그걸 따지지 않아! 그래, 내가 잘못한 거야. 맞아. 이건 분명 내가 잘못한 거야. 말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네가 언제나 날 이해해 주던 게 습관처럼 됐나 봐. ……힘들었어. 처음 한 달 정도는 내가 너를 강제로 안았을 때의 일이 떠올라서 감히 손대지 못했어.”

“……강제로라니.”

“그날. 러트가 온 날. 네가 아파했던 거……. 서서히 기억이 돌아왔어. 그래서 감히 미안하고 소중하고, 혹시나 또 다치게 할까 봐 겁이 나서 널 못 건드렸어.”

“그런. 강제가 아니잖아. 엄밀히 내가 널…….”

말을 하다 말고 시선을 떨구자 제라드가 다시 크리스의 얼굴을 강제로 들어 올려 바라보게 만들었다.

“말해. 속 시원하게 네 마음속에 있던 얘기를 말하라고.”

창피함과 부끄러움 그리고 두려움에 또다시 감정이 들끓었다. 말을 할 때까지 봐주지 않겠다는 제라드의 눈빛에 결국 크리스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러트 약, 일부러 쓰지 않았어.”

“그렇게 해서라도 나와 인연을 맺고 싶었던 거지?”

화를 낼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와 당황했다. 다시 시선을 맞춘 제라드는 화는커녕 미소를 머금은 채 크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널 강간한 거야.”

지금은 화를 내야 할 대목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따져야 한다. 하지만 이어지는 크리스의 말에도 제라드의 미소는 풀리지 않았다.

“아니, 아니야. 설령 그렇다고 해도…… 괜찮아. 오히려 그래 줘서 고마워. ……그 일이 없었다면 난 널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을 테니까.”

더는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힘없이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감자, 저도 모르게 맺혔던 눈물이 기다렸다는 듯이 흘러내렸다. 눈물이 여전히 크리스의 뺨을 만지고 있던 제라드의 손등에 길을 내었다. 잠시 후 제라드의 손이 치워진다 싶더니 이번에는 양손으로 크리스의 어깨를 잡아 부드럽게 당겼다.

마치 잘했다는 듯이, 그리고 괜찮다는 듯이 제라드의 손이 쉴새 없이 크리스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잠시 동안의 침묵 후, 다시 제라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말을 하다 말고 끊겼네. 그날, 네가 요구했던 날……. 미안해. 그건 정말로 심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네가 힘든 걸 알면서도 초조했어. 내 이기적인 생각에…….”

“그렇지 않아. 반대의 입장이라면 나 역시도 실망하고 아팠을 거야.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네가 날 사랑할 리가…….”

“사랑해.”

“……그런.”

“왜 믿지 못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봤어. 그리고 깨달았어. 내가 널 너무 편하게 대했다는 걸. ……난 숨 쉬는 것만큼이나 네가 편하지만, 반대로 넌 나에게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걸. 멍청하게, 네가 떠난 다음에야 알았다. ……미안하다. 힘들었지?”

제라드가 이번에는 크리스를 살짝 떨어뜨린 후 한 손으로 뺨을 감싼 채 속삭였다. 점점 더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결국 모든 게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감당하지 못해 일어난 결과였다. 두려움에 감히 두드려보지도 못하고 몸을 돌려 도망쳐 버렸다. 정작 제라드에게 한 번도 제대로 물어볼 생각도 못 하고, 혼자만의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그를 상처 주었다.

“네가 날 사랑한다고 한 거…… 그냥 네가 착해서…….“

제라드가 다시 크리스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강하게.

“제대로 말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내가 똑바로 전했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그 손길에 안심이 되었다. 안도감에 다시금 눈물이 흘러내렸다.

“네가 이렇게 마음이 여린 걸 이제야 알다니. 아니, 알고도 멍청하게 인지하지 못했어. ……네가 얼마나 세심하고 부드러운 성격이었는지를.”

“사람을 오메가처럼 대하지 말아 주겠어? 누차 말하지만 난 베타…….”

“그게 무슨 상관이야? 베타고 오메가고, 그 모든 걸 떠나 넌 크리스야.”

어쩌면 2차 성별에 얽매였던 건 자신이 아니었을까. 자신이 오메가가 아니기에 제라드 앞에서 떳떳하지 못했던 건 오롯이 자신의 문제였던 거다.

제라드는 늘 같았다는 걸 바보같이 이제야 알아버렸다.

“크리스. 정식으로 너에게 말할게. 난 널 사랑해. 진심으로. 그 어떤 이들보다 네가 더 소중하다는 걸 네가 떠나고서야 깨달았다. 그러니…… 제발 날 버리지 마.”

행여라도 크리스가 떠나갈까 봐 양손으로 그의 손을 꽉 잡은 채 제라드가 고백했다. 크리스는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제라드 역시도 느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지만, 지금은 이상하리만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간신히 쥐어 짜내듯 대답했다.

“……응.”

이런 단순하고 성의 없는 듯한 대답에도 제라드는 더없이 기뻐하며 크리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자,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었구나 싶다.

그리고 그 심장 소리에 점점 안도하는 자신을 깨달았다.

안도감이 밀려와서일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졸음이 몰려왔다. 힘없이 축 처지자 놀란 제라드가 크리스를 불렀지만 더는 대답할 기운이 남지 않았다.

미안……. 조금만 자고…….

그때 제대로 말해 줄게. 네가 말한 것처럼 내 솔직한 마음을.

자신이 느꼈던 서운함을. 그리고 제러드 역시도 느꼈을 서운함을 들어줄 생각이다.

갑자기 축 처지는 크리스의 행동에 놀라 그의 얼굴을 살폈다.

설마……. 자는 건가?

일단 소파에 눕힌 후 안색을 살폈다. 아까는 크리스가 너무 놀라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다크서클이 너무 심하다.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다시 만난 크리스가 반갑고 또 서운해 그를 살필 정신이 없었다.

심지어 살도 제법 빠졌다. 예민한 성격답게 제라드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힘들게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더욱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일단 재우자 싶어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는 침대로 가 눕혔다. 민감한 녀석이 미동도 하지 않아 다시금 안쓰러움을 느끼며 조금은 낡은 운동화를 벗겨내었다.

양말은 물론 벨트를 풀어 빼고서야 이불을 덮어주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쌕쌕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다.

“이제 안 놓쳐.”

멍청한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다. 에드워드를 보고 그렇게 손가락질해놓고 자신도 비슷한 실수를 했다는 사실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조심스럽게 크리스의 조금 더 자란 더티 블론드 머리를 살짝 쓸어넘긴 후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푹 자.”

내 곁에서……. 이제는 방황하지 말고 쭉 내 곁에 있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뜬 크리스는 이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리저리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 자신이 꿈을 꾼 게 아니라는 걸 인지하고는 허옇게 질려갈 때 문이 열리며 제라드가 안으로 들어섰다.

“깼어? 몸은 좀 어때?”

손에 든 쟁반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스튜 접시가 놓여 있었다. 냄새 또한 일품이다. 크리스가 가장 좋아하는 치킨 토마토 스튜가 확실했다.

“안 그래도 깨우려 했는데 때마침 잘 일어났네.”

“나 얼마나 잔 거야.”

“하루는 안 넘겼어.”

“이런…….”

몇 날 며칠 제대로 못 자서 피곤이 꽤 쌓였나 보다.

“뭐 하는 거야?”

“빈속일 테니 일단 조금이라도 먹어.”

쟁반을 테이블에 놓는 걸 보고 당연히 테이블로 가려던 크리스를 만류하더니 냉큼 침대 테이블을 설치한다. 사지 멀쩡한데 무슨 짓인가 하는데 제라드는 한술 더 뜬다.

“자, 아아아.”

미간을 잔뜩 찌푸리는 크리스의 반응에 제라드가 큰소리로 웃는다.

“뭘 그렇게 정색하고 그래. 가끔은 어리광도 좀 부리고 해. 누가 장남 아니랄까 봐.”

제라드의 말처럼, 자신은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법을 잘 모른다. 불만도 원하는 것도 늘 속으로 꾹 참고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는 게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몸에 박혔다.

어쩌면 준영이 자꾸 마음이 쓰인 것도 자신과 비슷한 느낌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럼 먹여 줘 봐.”

말을 뱉은 크리스도, 들은 제라드도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농담이라고, 이만 이리 내라고 손을 뻗지만 아슬한 타이밍에 피해버렸다.

“자. 아~.”

또다시 스튜를 한 스푼 떠 내민다. 다만 아까처럼 장난스러운 기색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왠지 더 부끄럽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한테는 응석 좀 부려도 돼.”

“…….”

제라드가 머뭇거리는 크리스를 부드럽게 타일렀다. 잠시 자신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는 제라드를 마주 보다, 질끈 두 눈을 감으며 입을 벌렸다.

이미 다 식은 스튜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우물거리며 눈을 뜨자, 제라드가 한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소화가 잘 되도록 푹 삶은 게 분명한 스튜임에도 이상하게 목구멍 너머로 잘 넘어가지 않는다.

간신히 삼키자 또다시 스푼을 내밀었다. 저 접시 안 스튜를 다 먹을 때까지 이 짓을 계속해야 하는 건가 심각하게 고민할 때, 구세주가 등장했다.

“크리스. 깼어요? 나 들어가도 돼요?”

준영의 목소리가 얼마나 감사한지. 반면 제라드는 아쉬움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복수인 건가.”

제라드는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하고는 스푼을 내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고, 크리스는 냉큼 스푼을 잡아, 후룩후룩 국물을 들이켜듯 그대로 먹어 치워 버렸다.

“아침 먹는 중이구나. 다 먹었네요?”

“뭐? 벌써?”

준영에게 문을 열어주고 돌아온 제라드가 황당한 눈으로 빈 접시를 보았지만, 크리스는 모른 척 쟁반째로 들어 그에게 내밀었다.

“자. 됐지?”

“나 참.”

“응? 왜요?”

황당해하는 제라드와 영문을 몰라 하는 준영을 못 본 척, 크리스는 묵묵히 티슈로 입을 닦을 뿐이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웬일이야?”

쟁반을 들어 테이블로 옮긴 후 침대 테이블을 치우며 제라드가 물었다. 준영은 잠시 머뭇거리다 다가와 크리스가 앉은 발치에 걸터앉고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크리스. 나한테 미안하죠?”

“……네.”

동생 운운해놓고, 입도 벙긋하지 않고 도망치듯 가버렸으니 당연히 미안했다. 실제로 친동생들에게도 연락을 취하지는 않았지만, 늘 떨어져 있던 그들과 같을 수 없을 거다.

“뭐, 나름 복수는 했으니까 나도 쌓인 건 없어요.”

“너무 과격했다고. 장례식 연출은 너무 과하지 않았어?”

빈 의자를 하나 가져와 앉으며 제라드가 준영을 나무랐다. 준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일부러 사고가 났다고 한 거잖아요. 애먼 짓 못 하게 경호원들까지 보냈고.”

“애먼 짓?”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결과가 되면 안 되니까?”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무슨 저런 말을……. 일단 자신이 죽었다고 해서 크리스가 따라 죽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지 않냐는 뜻으로 크리스를 돌아봤다가 당황했다. 그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에 제라드는 설마 하고 되물었다.

“너 정말 죽을 생각이었어?”

“그럴 리가 없잖아.”

크리스가 황당해하며 대꾸하고는 냉큼 준영을 바라보았다.

“준영. 나도 앞으로 이런 짓 하지 않을 테니까. 준영도 이런 장난은 이제 치지 마요.”

“죽을 만큼 괴로운 건 맞았죠?”

“…….”

“내가 그랬거든요. 소중한 사람이 사라지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더라구요. 어리석은 생각도 좀 했고. 무엇보다 참 바보 같이 그제야 내가 얼마나 멍청했는지를 깨닫게 되더라구요.”

준영이 말하는 그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단번에 알아버렸다. 왠지 모를 미안함과 무안함에 두 사람 모두 침묵하자, 준영이 미안하다며 하하 웃는다.

“뭔가 나 때문에 분위기가 이상해졌네요. 미안해요. 이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사실, 크리스에게 내가 개인적으로 부탁할 일이 생겨서요.”

“부탁요?”

크리스가 되묻자 준영이 뭔가 부끄러운 듯 볼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저러나 하고 가만히 지켜보다, 결국 답답해진 제라드가 재촉했다.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뭐 어려운 부탁이야?”

“그……. 사람에 따라서는 부담스러워하기도 한다고 하더라구요.”

“도대체 뭐길래.”

“아직 너무 시기상조이긴 하지만……. 그래도 크리스가 또 도망칠까 봐 조금 족쇄 같은 의미도 되려나?”

“이제 도망 안 쳐요. 하늘에 맹세코. 내 부모님을 맹세코. 절대로. 그러니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말해 봐요.”

“그…… 그…… 그. ……어요.”

“뭐?”

“응?”

자신만 듣지 못한 게 아닌가 보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크리스는 물론 제라드도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준영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둘을 번갈아 보다 이어 고개를 푹 숙이더니 아까보다는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대답을 하였다.

“임신. 했어요.”

“……세상에.”

“진짜?”

크리스도 제라드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쩌면 다시 임신을 하지 못하게 될 거라고 제이크가 에드워드에게 당부하던 걸 바로 옆에서 같이 들었던 둘이라 더욱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응. 나도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이 주 전에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어요. 임신이더라구요. 초기라 위험할 수도 있으……. 으악!”

제라드가 더는 견디지 못하고 와락 준영을 끌어안았다. 놀란 준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다 이어 부드럽게 휘어지더니 헤헤 기분 좋다는 듯 웃었다.

“네가 착해서 그래. 너무너무 착해서……. 하나님이 네가 너무 착해서 다시 복을 주신 걸 거야.”

“그런가요?”

“그래. ……조카라니. 세상에……. 축하해. 준영. 정말로 축하해.”

제라드의 축복에 준영의 두 눈이 금세 붉게 바뀌었다. 첫 아이를 허망하게 잃고 누구보다 슬퍼하고 힘들어했던 걸 잘 알아 더욱 애틋했다.

“에드워드 녀석 좋아하겠군.”

“네. 다만…….”

“다만?”

제라드의 말에 순순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푹 한숨을 내쉰다. 왜 그러나 했더니 이어지는 말이 역시나다.

“걱정이 더 심해져서…….”

“저런. 어쩐지.”

요즘 들어 고용인들의 군기가 바싹 들었다 싶었더니 그것 때문이었군.

“여하튼 정말로 축하해요.”

“기특해, 기특해.”

크리스는 다시 한번 준영에게 축하 인사를 보냈고 제라드는 준영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제 일처럼 기뻐했다. 준영은 잠시 크리스와 제라드를 번갈아 보다 자세를 바로 하였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분위기에 둘은 집중하며 준영을 바라보았다.

“내가 크리스에게 부탁할 건……. 바로 이 아이의 대부가 되어 줬으면 해서요.”

“네? 제가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크리스도 제라드도 당황했다. 제라드는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아주 조금 서운했지만, 곧 준영이 왜 굳이 크리스를 지목했는지를 눈치채고는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순진한 토끼인 줄 알았는데.

“제라드도 있는데…….”

“크리스가 좋아요.”

“아니 그러니까……. 제가 하기에는…….”

“크리스가 좋아요.”

몇 번을 거부해도 한결같은 대답만 돌아왔다. 크리스와 준영의 대화에서 크리스가 당황하는 건 거의 처음인지라 색다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크리스가 정말로 곤혹스러워하는 것을 알 수 있어, 결국 제라드가 나섰다.

“준영. 대부라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야. 크리스가 준영이 싫거나 어려워서 그런 거 아니라는 걸 알지?”

“물론이에요. 책임감이 투철한 성격이라 더욱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 나도 잘 알아요. ……그래서 크리스가 해줬으면 좋겠구요. 부담인가요?”

준영이 일부러 한 마디 더 붙인 것을 크리스도 눈치챘는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을 해 볼게요. ……진지하게.”

“네. 그거면 됐어요. 나 크리스가 좋아요. 정말로 내 형이었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그래서 크리스가 부담스러워하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조르는 거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말을 마친 준영이 냉큼 일어나 크리스에게 다가가 그를 와락 끌어안는다.

빼도 박도 못하겠군.

그리고 역시나 크리스 표정만 봐도 이미 반 이상은 넘어간 게 보였다.

고개를 돌려 혼자 소리 없이 키득거리며 웃다, 준영이 가 보겠다 인사를 할 때 크리스에게 양해를 구한 뒤 그를 뒤따라 나섰다.

“제라드는 서운하지 않아요?”

“왜 크리스를 선택했는지를 알아서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야.”

“크리스도 눈치챘을까요?”

“눈치 빠른 녀석이니. 그래서 더 머뭇거리는 걸 수도 있을 거야.”

“나…… 못됐죠?”

“진짜 못된 사람을 그렇게 많이 봐 놓고 아직도 그런 소리야?”

제라드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허탈하게 웃었다. 준영은 그런 제라드의 반응에 배시시 웃었다. 마음 씀씀이 하나하나가 너무 착해, 정말로 하나님이 선물을 주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고맙다.”

“그렇게 말하지 마요. 나도 내 욕심을 챙긴 거라구요. 크리스 같은 사람이 내 아이의 대부가 되면 좋겠다는.”

“그래.”

자꾸 고마워하면 오히려 준영이 미안해할까 봐 웃으며 대답을 해주었다. 곧 준영의 방 앞에 당도한 제라드가 방문을 열어주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물었다.

“축하 선물을 해 주고 싶은데…….”

“안 해 줘도 돼요.”

“아니야. 꼭 해 주고 싶어. ……늘 첫 번째 아이를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했거든. 그러니 하게 해 줘.”

자신이 조금 떨어진 방관자로서 지켜보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그 아이는 살아 있지 않았을까 싶은 의문이 여전히 든다. 이미 새로운 아이가 왔으니 슬픈 생각은 이제 그만 할 거지만 그럼에도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고 싶었다.

“그럼 생각해볼게요.”

준영도 그 뜻을 알아들은 건지 미소로 답하고는 어서 크리스에게 가 보라 말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한번 축하해. 그리고 많이 많이 낳아줘.”

“네!”

자신은 아마 아이가 없을 거다. 그러니 준영이 힘닿는 데까지 낳아줬으면 좋겠다.

방문을 닫고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다 언뜻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원래 우성 알파들이 자손을 가지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준영은 두 번이나 가질 수 있는 거지?

혹시 열성 오메가가 아니라 우성인 건가? 그것도 아니면 둘이 운명의 짝이라 그런 걸까. 뭐, 그게 뭐가 중요할까. 이 삭막한 집에 새로운 식구가 늘어난다는 게 중요한 거다.

제라드는 기분 좋은 미소를 숨기지 못한 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크게 놀라며 방을 나서려는 그때, 욕실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우뚝 멈춰 섰다.

천천히 다가가 욕실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크리스가 샤워를 하고 있는 건지 뿌연 수증기가 자욱하게 욕실에 퍼져 있었다.

제라드 역시도 서둘러 옷을 벗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까지도 눈을 감은 채 물줄기만 맞고 있던 크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물이 너무 뜨거운 거 아니야?”

아닌 게 아니라 크리스의 피부가 조금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온도가 높아 보였다. 서둘러 온도를 조종하고는 다시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부담돼?”

“……준영이 왜 나에게 대부를 해달라고 한 건지 대충은 알아.”

“그게 싫어?”

제라드의 되물음에 크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난 오메가가 아니야.”

“새삼?”

“준영처럼 네 아이를 낳아줄 수 없어.”

“그런 이유로 내 곁을 떠난 거라면 화낼 거야.”

“난 오메가들을 이길 수, ……흐으음.”

예쁘지 않은 말을 더는 들어줄 수가 없어 허리를 와락 끌어당겨 키스를 퍼부었다. 방금 전의 나쁜 말을 죄다 삼켜버리고 싶은 욕망에 가득 차, 조금은 배려 없는 키스를 이어갔다.

그럼에도 크리스는 제라드를 밀치지 않았다.

욕정이 점점 고개를 든다. 붉게 달아오른 볼과 젖은 눈가가 제라드의 음심을 더욱 부추긴다.

“하아하아……. 제라드. 나는…….”

“내가 잘할게.”

“……나야말로 미안해. 난 평생 너만 바라볼 거라 상관없지만, 훗날 네가 나에게 질려서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할지라도……. 난 너 못 보내. 절대로.”

설령 친구로 있을 때에도 크리스토퍼가 자신의 곁에 영원히 있는 게 당연했다. 하물며 지금은 이런 달콤함을 알아버렸다. 오롯이 자신만을 바라보는 나만의 것이란 사실이 제라드를 더욱 흥분케 만들었다.

“널 안고 싶어……. 지금.”

“……응.”

아무리 힘들고 피곤했어도, 어떻게 이런 크리스를 거부할 수 있었을까. 다시 한번 자신의 약한 정신에 욕설을 내뱉고는 크리스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욕심 같아서는 욕실에서 크리스를 눕혀 그를 탐욕스럽게 범하고 싶었다.

하지만 첫 경험도 최악이었는데, 두 번째까지 얼렁뚱땅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잔뜩 흥분한 아랫도리를 무시한 채 크리스를 안아 들자, 그가 노골적으로 불쾌한 티를 낸다.

“너 자꾸 날 오메가 취급하지 말라고 했잖아.”

“좋아하는 사람을 안는 건데 도대체 오메가가 거기서 왜 나와?”

“덩치도 비슷한데 꼴사납잖아.”

“도대체 누가. 그리고 내가 괜찮다는데!”

냉큼 침대로 가 크리스를 눕히고는 그 위에 올라탔다.

“너 예전에 나보고 남의 눈 의식 쓸데없이 많이 한다고 하더니만. 너야말로 왜 자꾸 우리 인생에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할 거야?”

“……넌 사람들 시선을 즐긴 거고.”

“그건 그거고.”

경우가 다르지 않냐는 크리스의 대꾸에 퉁명스럽게 답했다.

당당한 제라드의 반응에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더니 이내 힘없이 웃는다.

“크리스. 네가 불안한 거 잘 알아. 하지만 이것만은 말해 줄게. 네가 언젠가 내가 주는 사랑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 그러니…….”

분위기를 깨는 짓이란 걸 알지만 더는 무리다. 아래가 피가 몰리다 못해 아플 지경이다. 제라드는 일부러 하체를 맞닿는 자세를 취한 뒤 엉덩이를 흔들었다.

이미 단단해진 성기끼리 비벼지며 달콤한 쾌감을 낳았다. 이대로 이 달콤함에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 정도로는 이 욕정이 사그라들지 않을 것 같았다.

행동을 멈추고는 고개를 숙여 크리스의 성기를 입에 머금었다.

생애 처음으로 하는 구음은 솔직히 낯설다. 대충 여자들이 자신에게 해주듯 빨아주자, 입 안에서 점점 더 커지기 시작한다.

기분이 꽤 좋아 보여 더욱 열성적으로 빨자, 크리스가 그런 제라드의 머리를 밀어내며 말린다.

“그만. 쌀 것 같아……. 흣…….”

“싸. 뭐가 문제야.”

“그런! ……너 남자는 처음이잖아.”

“뭐야? 넌 남자에게 안긴 적 있어?”

놀라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되묻자 크리스의 표정이 뚱하게 바뀐다.

“그렇……다면 어쩔래.”

질투가 순식간에 확 하고 올라와 이성을 사로잡는다.

어떤 놈이냐고. 나를 좋아한다고 해 놓고 어떤 놈과 뒹굴었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간신히 참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좋아서든, 호기심이든 여자를 늘 옆에 끼고 살았던 자신에게는 질투를 할 자격도 없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앞으로는 절대 안 돼. 손도 잡지 마. 눈도 마주치지 마.”

겨우겨우 감정을 억눌러 말하는데 어째 크리스의 표정이 이상하다. 울고 싶은 건가? 아니, 이건 웃고 싶은 거다. 뒤늦게 크리스의 상태를 알아챈 제라드가 억울함에 소리쳤다.

“난 죽을 맛인데!”

“너 말고는 없어. ……누굴 사귄 적도 없고 원나잇으로 여자를 몇 번 만나봤지만……. 늘 허무해서 섹스를 안 한 지 5년도 더 넘었어. ……그게 5년 만의 섹스였다고.”

그 엉망진창 섹스가 5년 만의 섹스였다고? 그런데도 화조차 내지 않았다고?

“너……, 도대체 날 얼마나 좋아하는 거냐.”

도대체 내가 어디가 그렇게 좋다고. 제라드의 중얼거림에 크리스의 눈동자가 깊어진다.

“상상 이상일 걸.”

더는 무리다. 그리고 화가 난다. 이 깊은 사랑을 왜 이제야 깨달았는지 모르겠다.

다시 입맞춤을 이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경건하게. 사랑한다고 속삭이듯……. 부드럽고 달콤하게.

크리스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가 자신의 사랑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주름 하나 없이 잔뜩 펴진 내부가 빠듯하게 제라드의 성기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뜨겁고 찰진 내벽이 빠르게 뛰는 제 주인을 따라 꿈틀거리며 기둥을 옥죈다.

당장이라도 날뛸 듯 들어와 놓고는 그 감각에 홀린 듯 젖어만 있자, 결국 크리스가 먼저 움직였다.

스스로 엉덩이를 움직여 길을 트기 시작했다. 한껏 좁혀진 미간이 얼마나 힘든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제라드가 그런 크리스의 양손을 잡아 시트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라드가 허리를 놀렸다.

찰지게 달라붙는 여린 점막에 순간순간 이성을 잃었다.

부드럽고 뜨겁고 촉촉했다. 마치 온몸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감각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남자 오메가를 안아본 적은 없지만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설령 그 어떤 상대를 만나더라도 크리스만큼 자신을 만족시키지 않을 거란 걸.

“아파?”

“괜찮……아. 흣. 하아하아……. 조금, 천, 하읏!”

힘든지 괜찮다 하면서도 자세를 틀더니 일순 파득거리며 멈춘다.

크리스도 제라드도 놀라 잠시 서로를 응시했다. 아차 하고 고개를 젓는 크리스를 보는 제라드의 눈빛이 일순 빛난다. 그리고 방금 전 찔러댄 그 각도로 단숨에 쑤셔 박았다.

크리스의 몸이 크게 뒤틀리더니 벌벌 떨린다. 낯선 감각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그리고 저 밑 깊숙이 숨겨놨던 알파 특유의 본능이 치솟아 오른다.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이고는 다시금 단숨에 그 부분을 짓이기듯 박았다.

경련이라도 하듯 벌벌 떨리는 크리스를 위로하듯 쪽 짧은 입맞춤을 했지만 자상함은 거기까지였다.

거친 움직임을 따라오기 벅찬지 크리스의 입에서 앓는 신음이 간헐적으로 튀어나왔다.

그럼에도 속도를 조절할 수가 없었다.

더 깊숙이. 더 빠르게, 박고 또 박아 그와 하나가 되었으면 하는 음탕한 소망이 제라드를 지배해 갔다.

“하읏, 제, 제라드, 히, 힘들……. 읏……! 악, 악, 제라듯……!”

눈물이 고이다 못해 흘러넘친다.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다, 이번엔 연결된 채로 그를 안아 일으켰다.

“헉!”

단말마 같은 비명이 끊겼다. 체중까지 더해져서인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벌벌 떤다. 바들바들 경련하는 근육이 안쓰럽다. 하지만 잠시일 뿐. 이런 모습이 음심을 더욱 부추긴다는 걸 모르나 보다.

이제 힘들다 그만하라 애원하는 크리스의 허리를 잡고는 그대로 쳐올리듯 짓이겼다. 고개가 젖혀지며 턱이 벌려진다. 샤프하게 치솟은 턱을 아프도록 물고는 다시금 엉덩이를 움직여 그의 안을 파고들었다.

미처 삼키지 못해 흘러내리는 타액이 아까워 길게 핥아 올리자 볼이 더욱 붉어진다. 더한 짓도 하고 있으면서 이 정도로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귀엽다.

“흣, 흣……! 힘들, 어……. 하읏……!”

“미안. 미안해.”

“왜 이렇게 오래……. 너……, 뭔가 이상……. 흣……!”

이미 사정을 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여전히 생생한 모습에 크리스가 점점 질려갔다. 본인도 왜 이러는지 잘 모르지만 중요한 건 이대로 하루 종일도 크리스와 뒹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이 사실을 알면 도망칠 수도 있겠지만.

한참을 힘없이 흔들리던 크리스를 다시 눕혔다. 이어진 부분을 빼내려 하다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성기 모양이……. 설마 이거 러트?

“너 눈동자가…… 어째서…….”

자신의 성기 모양이 변형된 사실에 당황하기도 잠시, 크리스의 지적에야 자신의 시야가 선명하게 바뀌었다는 걸 인지했다.

오메가 페로몬에 노출된 것도 아닌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지만,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다.

제라드는 대답 대신 크리스의 한쪽 다리를 잡아 높이 들어 올리고는 살짝 교차된 각도로 성기를 깊숙이 처박았다.

몸이 크게 꿈틀대던 크리스의 눈동자가 다시금 경악에 차올랐다.

아마도 그 모습에 웃었나 보다. 아까보다 의식이 자기 멋대로다. 크리스의 내벽에 성기가 쥐어 짜일 때마다 번쩍거리는 쾌감처럼 이성도 순간순간 들어왔다 나왔다를 반복했다.

“무리, 무리야. 정말로……. 흣! 힉!”

그래서 안 되는 거다. 무리라고 하면서도 제라드가 주는 쾌감에 착실하게 반응하는 저 몸뚱어리가 잘못된 거다.

그렇게 제라드는 애꿎은 크리스를 탓하며 오랫동안 그를 탐하고 또 탐해갔다.

내 평생 섹스를 하다가 기절이라니. 거기다 섹스를 너무 무리하게 해서 병원 신세라니…….

잠시 링거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진통제 때문인 걸까. 몸은 생각보다 아프지 않지만 천근만근이었다.

이리저리 아픈 곳을 체크하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제라드가 안으로 들어왔다.

“크리스!”

마치 시체라도 본 듯한 표정을 짓더니 냉큼 다가와 크리스를 끌어안는다.

대충 왜 그런지 구도가 잡혀 불쌍해 보이기보다 화가 났다. 크리스는 냉큼 제라드에게 등짝 스매싱부터 날렸다.

제대로 때렸더니 꽤 아픈지 끙끙 난리다. 그리고는 뭐가 그리 좋다고 헤헤 웃는다.

“미안.”

“알면 됐어. 그래서 나 얼마나 잠든 거냐?”

“……24시간.”

“뭐?”

“하고도 반나절?”

“미친……. 어디 가. 한 대 더 맞아.”

말을 하다 말고 슬그머니 사정거리를 벗어나는 제라드가 괘씸해 때릴 생각이 없었는데 바뀌었다. 기필코 한 대, 아니 두 대를 더 때리겠다 마음먹고 있을 때 다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이번에는 제이크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왜 제이크지?

제이크는 2차 성별 전담 의사이다. 즉 베타인 자신과는 인연이 없다.

“제이크 씨?”

“마침 깨셨네요. 오랜만입니다. 크리스 씨.”

“아. 네. 그런데 왜 제이크 씨가 여길…….”

“나도 몰라. 갑자기 너 담당하던 의사가 제이크를 불렀어.”

대답은 제라드가 해 주었지만 의문은 하나도 풀리지 않았다. 제이크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다가와 크리스의 기본적인 몸 상태를 검사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크리스 씨. 언제 마지막으로 2차 성별 검사를 하셨죠?”

“그거야. 8학년 때쯤?”

“역시. 병원에서 개인적으로 검사를 하신 적도 없구요?”

“이 녀석 건강 빼면 시체인데? 베타이면서도 알파인 나만큼 튼튼해.”

“흠……. 정말 특별한 케이스인데. 알파와 섹스를 한 게 이번이 처음입니까?”

왜 이런 것까지 물어보나 싶다. 크리스는 어디까지 대답해야 하나 하고 고민했지만 제라드는 너무나도 쉽게 털어놓았다.

“5개월 전쯤 러트 온 나랑 했는데.”

“러트가 온? ……흠, 가설이 사실인가.”

“그러니까 좀 알아듣게…….”

혼잣말을 이어가는 것이 꽤 답답했는지 제라드가 참지 못하고 질문을 하였다. 제이크는 그제야 팔짱을 풀며 두 사람을 천천히 번갈아 보았다.

“학계에서도 아주 특이한 케이스인데……. 아주 가끔 두 가지 2차 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해. 평생 모르고 지낼 수도 있지만 크리스처럼 특별한 계기로 각성하듯 성별이 두드러지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군. 베타인 줄 알았는데 알파였든가, 오메가였든가……. 이런 경우 가끔 뉴스를 통해 보지?”

크리스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아 멍하니 쳐다만 보는 반면, 제라드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니까. 크리스가 오메가가 되었다고?”

“더 정확히는 오메가 성호르몬이 애초에 있었다가 알파와 관계를 맺으며 촉진이 된 거겠지. ……제라드, 너도 뭔가 느끼는 거 없어? 사소한 거라도.”

“아……. 그러고 보니, 크리스 상대로 러트를 했어. ……거기다 어떤 오메가가 발정을 했는데도 난 이상이 없었어.”

“그게 말이 돼?”

크리스의 황당함을 섞은 되물음에 제라드가 욱하며 반박했다.

“사실이라니까. 촬영 중에 오메가가 히트가 왔는데, 다른 알파들은 모두 억제제 맞거나 먹고 그랬는데 난 휴게실에서 잔다고 미처 몰랐었어. ……그래, 그러고 보니 준영도 향이 굉장히 강해졌다고 했는데 어느 순간 별 느낌이 없더라고. 혹시 그것도 크리스 때문인 거야? 난 짝 성립도 안 했는데?”

말을 하다가도 잘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제이크를 돌아보았다. 제이크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잠시 고민하더니 곧 끄덕였다.

“짝 성립을 목덜미를 무는 걸로 하는 건 일종의 자각을 쉽게 시키기 위한 행위야. 뇌가 확실히 기억하기 위해. 목덜미에 페로몬 분비샘이 있는 건 알지?”

제이크의 되물음에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강제로 오메가가 알파의 짝이 된 경우가 많았어. 알파는 자손을 번창하기 위해 오메가가 필요했고, 오메가는 귀했지. 심지어 2차 성별이 나타나는 순간 부모에 의해 알파에게 팔려 가기도 했으니까. 사설이 길어졌다. 여튼 사랑도 없는 상태에서 주인이라는 인식을 새기기 위해 강제로 세뇌를 시키는 것과 같은 행위였지. 하지만……, 그 바탕에 사랑이 깔리면? 애정과 믿음이 깔리게 되면 뇌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짝을 인지하는 게 아닐까? 실제로 에드워드는 다른 오메가 냄새를 전혀 못 맡고 있어. 제라드 너도 비슷한 경우인 것 같은데?”

제이크의 긴 설명에, 크리스와 제라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둘은 말없이 서로의 손을 강하게 잡을 뿐이었다.

“다른 건 모르겠고……. 내가 크리스를 사랑하는 만큼 크리스도 날 사랑한다는 건 알겠어.”

“그래. 그거면 돼. 일단 링거 아까우니 다 맞고 난 뒤에 퇴원하도록 해. 그럼 난 이만.”

제라드의 결론에 제이크가 호탕하게 웃고는 병실을 나섰다. 크리스는 아직도 맞잡고 있는 손을 물끄러미 보다 제라드를 보았다.

“왜?”

왜 말없이 쳐다보냐며 묻는 제라드에게 크리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오메가가 되어서 기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오메가가 되고 싶어 했는데 그가 그 사실에 기뻐하지 않는다는 게 더 기뻐하는 자신이 왠지 우스웠다.

그리고 그만큼 기쁘다. 그만큼 행복하다.

크리스는 마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제라드가 답하듯 힘을 주었다.

그래, 지금은 이거면 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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