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 3권 [폰.공금]
[11]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그 쪽지에 적힌 임신했다는 말은 분명 거짓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자꾸만 생각이 쏠렸다. 클로이의 가족이 위험하다는 건 어쩜 핑계일지도 모른다. 몇 번이고 에드워드에게 의논을 할까 하다가도 입을 다물었던 건 그 이유만이 아닌 걸 스스로는 잘 안다.
도저히 떨칠 수 없던 작은 의문.
만약……, 아이가 진짜로 생겼다면?
심장이 조이다 못해 그대로 으스러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 제시카가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또 한 번 자신의 죄악을 깨닫는다.
아무리 에드워드는 제시카가 작정을 하고 그에게 접근한 여자라고 했지만, 준영은 알 수 있었다.
제시카는 진심으로 에드워드를 사랑한다는 것을.
이유가 불순했다고 해도 그와 함께하는 세월 동안 계획은 진심이 되어버렸다는 걸, 그 날 제시카의 눈물을 봤기 때문에 알았다.
그랬기에 꼭 그녀를 만나보고 싶었다.
“사람이 있습니다.”
할머니가 있는 공동묘지에 당도하자, 경호원들이 자연스럽게 뒤를 따라오다, 한 여인이 서 있는 모습에 경계를 하였다.
짧은 갈색 머리의 단발 여성을 본 경호원들이 준영을 막아 세웠다.
“그냥……. 저처럼 성묘를 온 것 같은데요?”
“함께하겠습니다.”
“아니요. 저분도 어려워할 것 같으니까 그냥 이쯤에서 기다려 주세요.”
조금 멀기는 하지만, 그래도 충분히 준영이 보이는 위치였다. 경호원들은 어쩔까 고민했지만, 준영은 대답도 듣지 않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이미 알고 있는 준영이 봐도 누군지 모를 정도니, 경호원들도 크게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제시카라는 걸 알았다면 바로 쫓아올 테지만.
“오랜만이네요.”
“……네.”
제시카가 먼저 인사를 건네었다. 한 칸 떨어진 묘지 앞에 서 있던 그녀는 준영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네, 나도 알아요. 조금 못된 마음으로 당신을 괴롭히려고 했던 거. ……셀린느가 그렇게까지 무식하게 일을 키울 줄이야.”
만약 제시카에 대해 듣지 못했다면 또다시 속았을지도 모를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이미 다 알아요. 에드워드가 저에게 모든 걸 말해 주었어요. 그러니……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해요.”
준영의 제제에 제시카는 피식 입꼬리를 틀더니, 이어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쪽지 보고 오셨죠?”
“클라라는 무슨 죄인가요. 왜 그녀를 협박했죠?”
“말 그대로 협박일 뿐이에요. 내가 무슨 돈과 힘이 있어서 사람을 해치겠어요?”
오히려 속는 게 바보가 아니냐며 웃는 제시카를 돌아보았다. 준영은 어느 게 그녀의 진짜 모습인 건가 헷갈려 멍하니 그녀를 보았다.
“그거 알아요? 사람은 정말 어리석다는 걸. 한 가지만 들어맞으면, 다른 건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하게 되죠. 그런 의미에서 에드워드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무슨 뜻이죠?”
“그는 절대로 빈틈을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래도 괜찮았어요. 원하던 결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에드워드의 부인으로서, 레베카의 딸로서 살 수 있으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에드워드의 부인이 되고 싶었던 걸까. 그게 아니면…….
“당신이 나타나면서 모든 게 흐트러져 버렸지. 애초에 에드워드답지 않게 계속해서 눈여겨볼 때 처리했어야 했어. ……말라깽이 꼬맹이 때문에 내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
“……임신, 사실이 아니군요.”
“사실일까. 아닐까. 궁금하지 않아?”
제시카가 준영을 바라보며 싱긋이 웃는다. 천연덕스럽기까지 한 미소를 짓는 그녀가 낯설다. 할리우드 영화분장이 저럴까 싶을 정도로 완벽하게 다른 사람처럼 분장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에드워드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어요.”
“…….”
“그래서 이 자리에 나온 거예요.”
“하. 이 와중에도 착한 척이야? 정말 짜증 나네. 너…….”
“그때 그 눈물은 진심이 아니었나요?”
제 가슴을 쥐어뜯으며, 준영을 때리며 울부짖던 제시카는 분명 진심이었다.
자신도 사랑을 했기에 알 수 있었다.
“진짜 임신이야.”
다시금 심장이 욱신 아파 온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뜬 준영은 조금 처연한 기분을 숨기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수하세요.”
“뭐?”
“아이……. 당신이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 제가 잘 보살필 테니까.”
“하……! 하! 하하하!”
허탈하게 내뱉던 한숨 소리가 이내 웃음으로 이어졌다. 경호원들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건지 경계하며 다가왔다.
제시카는 그런 경호원들을 힐끔 보다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네?”
“복수심에 이러는 거 아닙니다. 아이를 가로챌 생각도 없어요. 다만 에드워드의 아이니까……. 그의 핏줄이 고아원 같은 곳에서 고생하는 걸 볼 수 없어요.”
사랑을 많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미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이는 죄가 없으니까. 설령 에드워드를 닮지 않았다 하지라도 그의 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돌봐 줄 수 있을 것이다.
“다가오지 마.”
갑자기 준영의 이마에 검은 총구가 드리워졌다. 놀란 경호원들이 황급히 총을 빼려 했지만, 제시카가 더 빨랐다.
총소리인가 싶은 낯선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엄청난 고통이 준영을 휘감았다.
고통에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허물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
“고마운 줄 알아. 일부러 빗나가게 한 거니까.”
왼쪽 허벅지에서 뜨거운 피가 흘러내렸다. 그녀의 말대로 살을 통과한 건 아니지만, 분명 고통은 엄청났다.
“허튼짓하지 말고 에드워드를 불러.”
“제시카. 왜 이래요.”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입 다물어. ……모두 나가! 에드워드 말고는 아무도 이곳에 들어오지 마!”
제시카의 외침에 경호원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준영은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그들이 움직이지 않자, 제시카가 다시 한번 외쳤다.
“이번에는 정말로 허벅지를 뚫을 거야! 총알은 충분하다고! 무슨 뜻인지 알겠어?!”
결국 경호원들이 양손을 들어 올린 채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준영 씨. 제가 한 말대로 하십시오. 아시겠습니까?”
언젠가 새로 배치된 여성 베타 경호원인 줄리아의 외침에 준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제시카는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지, 준영의 뒷머리를 권총으로 후려치며 짜증을 냈다.
“무슨 대화를 나눈 거야?! 솔직히 말해!”
“납치를 당했을 때 시키는 대로 하라고 했어요. 자극하지 말라고.”
제시카는 사실일까 라는 눈빛으로 준영을 봤지만 딱히 지적할 게 없다 싶어서인지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 준영을 끌고 비석과 비석 사이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비석으로 가로막힌 곳 외의 드러난 공간은 공터와 산이라 사방이 탁 트여 있었다.
제시카는 이리저리 주변을 훑어보다, 이어 가방에서 수갑을 꺼내어 준영에게 던졌다.
“차. 네 손에.”
철저하게 준비를 했구나 하며 수갑을 쥔 뒤 자신의 한 손에 찼다. 다른 한 손은 자력으로 되지 않아 얌전히 내밀자, 제시카는 주변을 경계하며 서둘러 남은 쪽을 채웠다.
그제야 그녀는 조금 안심한 듯 경계를 풀며 비석에 기대어 앉았다.
총구는 여전히 준영을 가리키고 있지만, 그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런 짓 자체가 처음이라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움직였다고 하기에는 또 이상했다.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으면서, 이렇게 대책 없는 짓이라니. 도대체 그녀가 노리는 게 뭘까.
“그거 알아? 에드워드가 용병을 풀었더군.”
“용병?”
생소한 단어에 되묻자 제시카가 어이없다는 듯 허탈하게 웃음을 흘렸다.
“정말 꼬맹이잖아. 이런 꼬맹이를 상대로……. 하하하.”
총을 잡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살짝 문지른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분장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얼굴을 감싸고 있던 고무 같은 것들이 쭉쭉 뜯겨나갔다.
이어 가발까지 휙 던져버리자, 조금 바랜 금발이 흩어져 내렸다. 자신의 기억 속 금발과 사뭇 달랐다.
“염색을 너무 해서……, 케어를 제대로 안 하면 금방 이렇게 갈라져.”
아름다운 금발이 염색을 해서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 애초에 금발인데, 왜 굳이 염색을 또 했을까 싶었다.
“에드워드의 어머니가 살짝 붉은 빛이 도는 금발이었대.”
“…….”
“원래 어릴 때 어머니를 불우하게 잃은 남자들이 은연중에 어머니를 닮은 사람을 찾아. 평범하게 자란 남자들도 어머니를 닮은 여자에게 빠지는 경우가 많지만 특히나 그런 남자들은 더하지.”
“제시카…….”
“연구하고 또 연구했어. 에드워드 햄턴이 반할 만한 모습으로 치장하고 또 치장했어. 손끝 하나 발걸음 하나 허투루 흘리지 않았어. 매일같이 거울을 보고 내가 제시카 로웰이라고 주문을 외우고 또 외웠지.”
한탄처럼 말을 잇는 제시카를 준영은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그거 알아? 내 아버지도 내가 죽였어.”
“…….”
“영하의 온도인데 술에 취한 그 미친놈이 거실 바닥에 널브러져서 자는 거야. 차가운 맨바닥에. 난로도 켜놓지 않고. 그래서 창문을 죄다 활짝 열어놓고 나왔지.”
자랑처럼 말하는데 왜 슬퍼 보이는 걸까.
“정말 밑바닥까지 갔거든? 정말로 다시는 그 인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그보다 더한 바닥으로 가버리네? 하하하…….”
다시금 한 손으로 입을 가린다. 허공을 바라보는 눈빛이 이미 모든 걸 포기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미 막다른 순간까지 가버린 거다.
“그래도 용병은 아니지 않아?”
“…….”
“참, 용병을 모른댔지. 용병이라는 건 말이야. 사람을 사람 취급을 안 해. 에드워드가 나를 잡아 오라고 그놈들에게 의뢰했다면 내 신상 안전은 포기했다는 소리야. 그 용병 새끼들에게 겁탈을 당하든……, 끔찍한 짓을 당하든 신경 쓰지 않을 테니, 목숨만 살려서 끌고 와라. 이런 뜻이라고.”
이번에는 정말로 놀랐다. 에드워드가 그렇게까지 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그래도 한때 사랑했던 여성이었는데,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왜 놀란 척해? 너도 꼴 좋다고 생각하는 중이잖아.”
“뭔가 잘못 알았을 거예요. ……에드워드가 그렇게 할 리가 없어요. 만약 제시카 씨가 죄가 있다면 당당히 법의 심판을 받게 할 사람이에요.”
“네가 뭘 알아. 이미 용병들이 날 찾고 있는데.”
“아니요. 그럴 리가…….”
피슉거리는 소음총 소리와 함께 화끈한 아픔이 볼에 새겨졌다.
주룩.
사격 연습한 게 도움이 되네. 제시카의 심드렁한 중얼거림과 함께 준영의 볼을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멀리서 준영의 이름을 부르는 경호원들의 소리가 들렸다.
“대답해 줘. 네가 무사하다는 걸.”
“전 괜찮아요!”
준영이 온 힘을 다해 고함을 내지르자, 소란스럽던 소리가 잦아들었다.
그에 비해 준영의 심장 소리는 여전히 터질 듯 빠르게 뛰었다.
다시금 깨달았다. 제시카는 더는 물러설 곳 없는 생쥐라는 것을.
준영은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고 어리석은 짓을 한 건지를 알았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에드워드는 또 한 번 자신의 죄의 결과물과 마주했다.
말리는 경호원과 경찰들을 뒤로하고 양손을 든 채로 천천히 묘지 안으로 들어섰다. 중간쯤 들어서다, 핏자국을 발견했다.
심장이 조여온다.
경호원들에게 상황을 대충 전해 들었지만, 그럼에도 겁이 난다. 혹시라도 과다출혈로 준영이 잘못된 건 아닐까 싶은 두려움이 물씬 올라왔다.
애써 두려움을 삼키며 다시 한 발짝 걸음을 뗐다.
“멈춰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걸음을 멈췄다. 뒤로 돌라는 말에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제시카가 총을 겨눈 채 에드워드를 무심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낯선 여자였다. 자신이 아는 그 제시카가 아니었다. 하긴, 애초에 제시카는 허구의 인물이었다.
“레이첼이라고 했던가?”
제시카의 눈이 단숨에 커졌다. 그리고 이내 가늘어지더니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내었다.
“날 두 번 다시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하지만 제시카는 실존 인물이 아니잖아.”
“내가 제시카야! 내가, 내가 제시카 로웰이야!”
비명같이 소리를 지르더니 다른 한 손까지 총을 잡고는 그대로 겨눈다.
“에디!”
“에디? ……하하. 하하하하!”
놀란 준영의 외침에 제시카가 황당하다는 듯 그를 돌아보다, 이어 웃기 시작한다. 말 그대로 미친 건가 싶을 정도로 깔깔 웃던 것도 잠시일 뿐. 언제 그렇게 웃었냐는 듯 차가운 눈빛으로 에드워드를 노려보았다.
“애초에 날 기만했어.”
“……네가 할 말은 아닌데?”
“난 당신을 사랑했어! 그래서 믿고 기다렸어!”
“제시카 로웰을 사랑했지. 그래, 그것도 분명 사랑이었다. 하지만, 넌 아니야.”
비록 준영을 사랑하는 것처럼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제시카는 에드워드에게 완벽한 여성이었다. 작은 실수를 하는 모습도 오히려 귀엽다 생각하며, 나름 괜찮은 결혼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늘 무언가가 걸렸다.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작은 무언가. 그것이 처음에는 레베카의 술수로 만나게 된 여성이라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 이유를 안다.
“결혼을 하지 못한 이유……. 넌 늘 아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지.”
“그럼 뭐야? 애초에 내가 레베카를 통해 만난 사이라 그랬던 거야? 그렇다면! 왜 애초에 날 거부하지 않은 거야! 왜 나에게 달콤함을 준거야! 처음부터 날 밀어냈다면…….”
“그 이유를 나도 이제야 알았지.”
“뭐?”
“너무 완벽했어. 마치 내 전용으로 만든 사람처럼 너무나도 완벽했지. 늘 한편으로 느꼈던 기묘한 감각이 무엇인지 몰랐어. ……이제는 알아. 난 사람과 연애를 하는 것 같지 않았어. 완벽한 프로그램과 만나는 이질적인 느낌. 그게 날 계속해서 붙잡았다.”
너무 완벽해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제시카는 에드워드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허탈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럼. 내가 너무 완벽하게 굴어서 결혼을 하지 않았다? ……뭐 이런 개 같은.”
“원래 그렇게 입이 험했군.”
“맞아. 더러운 시궁창 인생이다 보니……. 알아서 더러워지더군.”
“왜 당당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
“뭐?”
“차라리, 레이첼의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었다면…….”
“그럼 나와 사귀었겠어? 질색했겠지.”
“네 포기가 빨랐겠지.”
에드워드의 대답에 제시카의 얼굴이 보란 듯이 일그러졌다. 몇 달간 숨어다니며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게 훤히 보였다. 늘 빈틈없이 완벽했던 그녀의 얼굴이 거칠고 투박하며 말라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막연히 돌아가신 어머니와 닮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이 가장 어머니를 닮은 것 같아 안타까웠다.
“일부러 내 어머니를 닮도록 성형을 한 거더군.”
“그래야 꼬시기 편하니까.”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제시카를 보다, 힐끔 준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양손에 수갑을 차고 비석에 기댄 채 숨을 작게 몰아쉬고 있는 그의 모습이, 서서히 몸에 부담이 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상처로 봐서는 아직은 쇼크까지는 아니라도 분명 이대로 시간을 끈다면 위험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준영은 저체중이다. 일단 준영을 내보내야 한다.
“사람을 죽일 생각이 없다면……, 날 인질로 두고 준영은 내보내도록 해.”
“왜 내가 그래야 하지?”
“날 원하니, 날 오라 했겠지.”
“하하!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네? ……내가 널 오라고 한 이유는 너에게 직접 말해 주고 싶어서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는 그녀의 표정을 보는 순간, 무언가 또 야비한 계략을 꾸민다는 걸 깨달았다. 빠르게 머리가 회전되었다. 자신이 제시카라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 당신의 아이를 임신했어.”
에드워드가 낸 결과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대사에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속으로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제시카는 아니, 레이첼은 아직도 그들의 관계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철저하게 그녀의 환상을 깨트리고 싶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 혼자가 아니다. 일단, 준영을 구해야 한다.
“……정말이야?”
조금 놀란 듯, 그리고 당황한 듯. 황급히 준영을 보다 다시 제시카를 바라보았다.
에드워드의 태도에 제시카의 표정이 급변했다. 예상치 못한 듯 놀라면서도 그녀는 정말로 기뻐했다. 오히려 준영이 당황한 표정으로 에드워드를 보았다.
“정말로 내 아이라는 걸 어떻게 믿지?”
제시카는 에드워드가 그렇게 물을 줄 알았다는 듯, 머뭇거림없이 대답했다. 방금 전까지 반말과 욕설을 내뱉던 사람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느새 그녀는 레이첼이 아닌 제시카가 되어 있었다.
“검사해 보면 되잖아요. 아직 너무 태아라 지금은 무리지만……. 조금만 더 크면 검사할 수 있을 거예요. 태어나 보면 알 걸요? 분명 당신을 쏙 닮았을 거예요.”
만약 제시카를 알지 못했다면, 감쪽같이 속았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자신이 제시카를 안았던가 하고 의심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단언컨대 제시카와 자지 않았다는 걸 안다.
준영을 몇 번이고 안아보고서야 알았다. 일반적인 섹스와 러트 상태의 섹스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설령 러트 발정제로 흥분은 했을지언정, 상대가 제시카였기에 분명 그 흥분을 풀지 못했을 것이다.
눈을 뜨고 느껴진 말로 설명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답답함을 확실히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은 장단을 맞춰줘야 할 것이다.
제시카는 이미 정상적인 사고판단이 되지 않는다. 그녀를 자극해서 좋을 건 없다.
“그날……인 건가?”
“네! 맞아요! 임신 4개월이에요. 어쩜…… 당신의 아이가 진짜 엄마를 찾아온 건지도 모르겠네요.”
“흡…….”
꽉. 분노에 주먹이 꽉 쥐어졌다. 하물며 준영도 크게 놀란 듯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고개 숙여 보이지 않지만, 분명 준영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였다. 가슴이 아프다. 끝까지 죄 없는 준영을 끌어들이는 제시카에게 진절머리가 난다.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감정, 안쓰러움까지 사그라들게 만들었다.
“그럼 더더욱 죄를 짓지 마. 제시카. 살인죄까지는 안돼. 다른 건 어떻게든 내가 해결할 수 있지만 살인죄는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심지어…… 경찰까지 저곳에서 대기 중이야. 그러니. 여기까지만 하자. 내가 당신을 어떻게든 지켜줄게.”
넘어와라. 넘어와.
긴가민가한 눈으로 에드워드를 보는 제시카에게 천천히 한 발 다가갔다. 그녀는 여전히 겨누고 있는 총구를 내리지 않은 채 뒷걸음질 쳤다.
“왜 두려워하는 거지? 네 말대로 임신을 했다면……,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어.”
에드워드의 말에 제시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어느샌가 환상 속에 빠진 듯 보였다. 찬란한 미래라도 꿈꾸는 듯 보였다.
“제시카.”
“테드.”
“그래. 내가 네 테드야. 그러니…….”
천천히 손을 뻗었다. 거의 총구에 손이 닿을 듯 말 듯 한 그 상황에 제시카의 표정이 단숨에 바뀌었다.
“연기를 너무 못하잖아요.”
소음총 소리와 함께, 화끈한 고통이 어깨를 관통했다. 주춤 물러서며 어깨를 감쌌다. 뜨거운 피가 손을 순식간에 적셔갔다.
“에디!”
놀란 준영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절뚝거리면서도 아프지도 않은지 달려와 단숨에 에드워드를 온몸으로 덮듯이 끌어안았다.
“죽이려면 날 죽여요! 당신은 에드워드를 사랑하잖아요!”
“……에디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어.”
“네?”
“내가 용기를 내서 에디라고 불렀을 때……. 에드워드, 당신의 표정은 분명히 기억나. 절대 다시는 그 애칭으로 부르지 말라고. ……그런데 준영은 부르네?”
기억 속에 없는 일이다. 기억은 없지만 충분히 있었을 법한 일이다. 에디는 영원히 자신의 어머니에게만 허락된 애칭이었다.
“애초에 넌 날 사랑한 게 아니었어. 옆에 예쁘게 잘 진열시킬 장식품이 필요했을 뿐이었어.”
“당신이 먼저 에디를 그런 취급 했잖아!”
전혀 예상치 못하게 준영이 소리를 내질렀다. 화가 난 듯, 준영이 벌떡 일어나 에드워드를 막아섰다.
“당신이 먼저 에드워드를 장식품 취급했잖아! 당신조차도 사랑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가식으로 에드워드를 대했잖아! 그런 주제에 어떻게 에드워드에게 진심을 바랄 수 있어!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는 주제에!”
“닥쳐……. 닥치라고!”
분노한 제시카가 곧장 준영의 이마에 총구를 들이댔다. 에드워드가 놀라 일어서 막으려 했지만, 제시카의 외침이 그의 몸을 밧줄이라도 된 듯 칭칭 감아버렸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이대로 머리를 날려 버릴 거야!”
“……제시카. 그만해.”
“다시 말해 봐. 나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는 주제에? 아니, 난 사랑했어! 내 자신을 사랑했어!”
“당신은 레이첼이잖아.”
자극하면 안 된다. 더는 안 된다. 일부러 자신에게 관심을 돌리려고 노력했는데, 이제는 모든 관심이 준영에게로 꽂혔다. 이대로라면 준영이 위험하다.
“……난 제시카야.”
“당신은 레이첼이에요. 제시카는 당신이 만든 환상이구요.”
“준영. 그만해.”
진심을 다해 준영을 말려보지만, 준영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 겁쟁이가, 그리도 겁 많은 준영이 지금은 떨지도 않았다. 가슴 뭉클할 정도의 감동이 없다면 거짓이지만, 차리리 지금은 겁을 먹고 뒤에 숨었으면 했다.
“……애초에 알아. 이미 모두 끝난 거.”
침묵하던 제시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맞아. 임신 따위 하지 않았어. ……그날 그렇게 흥분해놓고도 날 안지 않았어. 결국 끝까지 거부하더군. 다만 그냥…… 보고 싶었어. 내가 임신을 했다고 하면 에드워드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고. 딱 내가 상상한 대로라……, 역겹네.”
힘없이 웃던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궁금해졌어. ……한 명만 나와 같이 가자. 누가 같이 갈래?”
“내가!”
“준영!”
빠르게 일어나 준영을 뒤로 내보냈다. 다친 다리 때문에 그대로 쓰러졌지만 돌아볼 여력이 없다. 에드워드는 제시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날 데리고 가.”
“소풍 가자는 게 아니야. ……같이 뒤지자는 얘기라고.”
“에디!”
총구가 더욱 바싹 에드워드를 겨누었다.
아, 준영에게 또다시 거짓말을 하게 되는구나. 이제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고 그렇게 약속을 했건만.
“날 데리고 가.”
“에드워드!”
손을 뻗어 총구를 잡아 심장 바로 위에 가져다 대었다. 제시카가 놀라 총을 빼려 했지만, 에드워드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안 돼! 날, 데려가요! 내가 죽을 거야! 에디가 죽으면 나도 죽을 거야!”
준영이 그대로 달려들어 제시카의 다리를 붙잡았다.
“미친……! 신파극 그마……, 꺅!”
총을 잡고 있는 손을 그대로 당겼다. 제시카는 방심하다 그대로 순식간에 끌려왔다.
또다시 소음총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화끈한 고통과 함께 시야가 흐릿해진다. 그럼에도 에드워드는 제시카를 잡고 있던 손을 놓지 않았다.
“에디!”
준영의 비명 소리가 이명처럼 울려 퍼졌다.
레베카는 간수가 안내해 준 방으로 들어섰다. 조금 넓은 방 안에는 투박한 철제 테이블과 의자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의자에 익숙한 뒷모습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자신을 신기할 정도로 닮지 않은 제라드는 레베카가 들어오는 소리에야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네요.”
“예전보다는 자주 보는 것 같은데.”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했을 때보다는 더 자주 보는 거 아니냐는 비아냥에 제라드가 피식 씁쓸히 웃음을 흘렸다.
“형량 확정됐다고 들었어요.”
“그래. 제대로 거동은 할 수 있을지 모를 나이더구나.”
23년.
자신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70이 다 되어야 나올 수 있다는 소리였다.
“요즘 인생은 60부터니, 몸 관리만 잘하면 거동은 가능할 겁니다.”
“놀리려고 이곳까지 온 거니?”
“……외출. 특별히 허락받아놨어요. 3일 뒤에 외출 될 겁니다.”
“갑자기 왜?”
밑도 끝도 없이 외출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지만 제라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탁탁 테이블을 두드리다, 손으로 입을 만지작거리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제시카. ……아니, 레이첼이 죽었습니다.”
“…….”
“레이첼이 준영을 꾀어 인질범으로 잡고 에드워드를 요구했지요. ……그리고 에드워드와 실랑이를 벌이다, 그녀의 총에 에드워드가 중태. 그녀는 현장에서 경찰들이 쏜 총에 사살당했습니다.”
“……고통스럽게 죽었니?”
“급소를 연이어 맞아……, 아마도 고통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을 겁니다.”
“됐다. 그럼.”
“어머니?”
“외출 취소하렴.”
“무슨?”
레베카는 당황하는 제라드를 무시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상황을 지켜보며 어떻게 해야 하나 머뭇거리는 간수에게 걸어가 요구했다.
“돌아가죠. 할 얘기는 끝났습니다.”
“딸이 죽었는데! 묘지 한 번 안 들를 겁니까? 장례식에 그 누구도 찾아오지 못할 텐데!”
“……무슨 자격으로 갈까. 내가.”
“…….”
“무슨 자격으로…….”
이미 그 작은 손을 뿌리쳤던 주제에.
애초에 잘못된 길의 결말이 어찌 될 것인지 알고도 멈추지 못했던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 아이 마지막 가는 길에 나타날까.
“……준영이 말해줬습니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 제시카가 부른 건 에드워드가 아닌……, 당신이었다구요.”
“…….”
“어머니를 찾았습니다. ……제시카가, 아니 레이첼이 가장 바랐던 건 애초에 어머니였을 겁니다.”
‘엄마. ……어디 가?’
작고 작던 그 아이가 옷가지를 잡았다. 왜 나는 그때 그 아이를 안고 함께 나가지 못했을까.
“……레이……첼.”
나는 왜 그 날, 그 작은 아이를 안고 함께 나오지 않았을까.
레베카는 그대로 바닥에 허물어진 채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오열했다. 모든 게 자신의 죄였다. 모든 게 자신이 만든 결과였다.
“공동묘지에 묻힐 겁니다. ……아무도 오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어머니라도 가서 배웅하세요. 그게 당신이 레이첼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사죄이니까.”
제라드는 꺽꺽거리며 가슴을 두드리는 레베카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발길을 돌렸다. 레베카는 한참을 차디찬 바닥에 엎드린 채 눈물을 흘렸다. 차마, 그 아이의 이름조차 부르지 못한 채.
“준영.”
누군가가 어깨를 잡고서야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제라드였다. 아니 묘지에서부터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 모르겠다.
혼란스러움에 모든 게 다 꿈 같았다.
“네 상처도 제대로 치료해야 돼.”
“아…….”
그러고 보니 나도 다쳤구나.
에드워드와 떨어지고 싶지 않다고 울며불며 달라붙는 바람에 의사가 임시방편으로 상처에 붕대를 감았던 게 떠올랐다.
“상처는 깊지 않지만 제대로 소독하고 해야 돼.”
“에드워드는…….”
“의사 말 들었잖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맞다. 그랬었다. 다행히 총알이 심장을 비껴갔다고 했다. 그래도 가슴에 총을 맞는 심각한 중상이었다.
“나 때문에…….”
멍청하게 스스로 걸어나가 버리는 바람에 이 꼴이 되었다. 어리석은 자신의 멍청한 실수로 에드워드가 저렇게 고통을 받고 있는 거였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이 검붉다. 누구의 피인지 모를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너 때문이 아니야. 그런 협박을 받으면 누구나 판단력을 상실해.”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래도 에드워드에게 말을 했어야 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위하는 게 아니라 에드워드와 자신부터 먼저 챙겨야 했었다.
“자책은 상처부터 치료한 뒤 하도록 해. 그게 먼저야.”
담담한 제라드의 말에 준영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라드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준영을 앞으로 안아 들고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떠오른 생각에 중얼거리듯 말을 뱉었다.
“제시카가…… 죽기 전에 어머니를 찾았어요.”
우뚝.
제라드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잔뜩 구겨진 표정이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제라드는 잠시 동안 크게 숨을 몰아쉬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많이…… 고통스러워했어?”
“모르겠어요. 워낙 정신이 없어서…….”
총소리가 나고, 피가 사방에 튀었다. 본능적으로 제시카의 다리를 움켜잡았다. 에드워드의 피가 준영의 몸 위에 후두둑 떨어졌다. 그럼에도 그는 제시카의 손을 놓지 않고, 그녀를 제압하려 했다.
그리고 연이어 이어진 총소리.
제시카의 다리가 경직된다 싶더니 곧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목과 배,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그녀는 멍한 눈으로 준영을 응시하였다.
그녀는 준영을 보는 게 아니었다. 아주 작은 입 모양. 성대가 총으로 인해 끊겨서인지 바람 새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들었다.
‘엄마…….’
그리고 그녀는 눈조차 감지 못한 상태로 영원한 안식에 빠져들었다.
“준영? 괜찮아?”
양손으로 온몸을 감싼 채 부들부들 떨었다. 갑자기 정체 모를 감정들이 마구 치솟았다. 슬프고 무섭고 두렵다. 끝 모를 죄책감도 한없이 이어졌다.
결국 준영은 솟구치는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병실의 침대였다. 준영은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의자에 앉아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잔뜩 찌푸린 채 보고 있던 크리스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준영!”
“에디는요?”
“준영이 의식을 잃은 지 이제 2시간밖에 안 지났어요. 아직…….”
“에디한테 갈래요.”
“준영도 지금 상태가 말이 아니에요. 피를 너무 흘렸어요. 쇼크까지는 아니라도……. 하아.”
주섬주섬 이불을 치우고 침대에서 일어서려 하자, 크리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려요. 휠체어 가지고 올 테니까.”
결국 항복을 외친 크리스가 준영에게 기다리라 말하고는 서둘러 병실을 나섰다. 채 몇 분도 되지 않아 휠체어를 끌고 들어온 크리스 뒤로 사라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에드워드 햄턴 씨 깨어나셨어요!”
벌떡 침대에서 내려서다 그대로 허물어졌다. 허벅지의 아픔에 잠시 미간을 찌푸릴 때, 크리스가 빠르게 다가와 그런 준영을 안아 들었다.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굴면! 아주 묶어 놓을 겁니다!”
크리스답지 않게 버럭 화를 내는 모습에 살짝 긴장했지만, 지금은 에드워드가 깨어났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에디한테 갈래요.”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에드워드 씨 어디 안 갑니다!”
짜증스럽게 대답하면서도 크리스는 준영을 휠체어에 앉히고는 서둘러 병실을 나섰다. 기다리고 있던 사라가 서둘러 앞서가며 길을 안내했다.
제발. 제발…….
양손으로 손을 마주 잡았다. 유달리 길이 길게 느껴졌다.
내가 살아있구나.
심장 부근에 고통을 느꼈을 때만 해도 이대로 죽는구나 했다.
단 한 가지, 준영이 다치면 안 된다는 의지가 그의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기억나는 건 없었다.
“일어났냐.”
익숙한 목소리에 눈만 간신히 돌려 다가오는 남자를 보았다.
“……준영은?”
“지금 오고 있을 거야. ……몸은?”
“모르겠어. 어지러워.”
“우성 알파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신체적 특성 때문에 운 좋게 목숨을 건졌어. 대신 약이 잘 통하지 않아서……. 일반인보다 두 배는 더 많이 진통제를 쓰는 바람에 아마 어지러울 거야.”
“그렇군.”
어쩐지. 하나도 아프지 않아, 혹시 하는 생각까지도 했다.
“내가 얼마나…… 기절한 거지?”
“반나절 정도? ……이것 또한 미친 거지. 보통 사람이라면 눈을 뜨는 것도 며칠 걸렸을 텐데.”
“좋다는 거냐, 싫다는 거냐.”
“……살아나 줘서 고맙다, 새꺄.”
에드워드의 질문에 제이크가 긴 한숨과 함께 대답을 돌려주었다. 피식 힘없이 웃고 있을 때, 밖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중환자실이라, 여러 명은 면회가 안 돼. 나도 일단 면회차 온 거고. ……나가볼게. 네 아내가 눈 빠질라.”
역시 준영의 목소리였나 보다. 중환자실로 들어오려는 걸 간호사가 막아서서 그답지 않게 버럭버럭 화를 내기까지 했다.
이런. 웃으면 안 되는데.
제이크가 나간 지 좀 되었는데도 들어오지 않는다 싶었더니, 준영을 보고서야 이해가 되었다.
보호복을 입는다고 그랬나 보다. 단순히 모자와 하얀색 가운과 긴 장갑을 낀 게 다인데, 그 모습조차 귀엽다.
“뭐예요. 왜 웃어요. 흑……. 흐흐흑…….”
에드워드가 참지 못하고 웃어버리자, 준영이 황당하다는 듯이 묻더니 이내 엉엉 운다. 정말 아이처럼 엉엉 우는 모습이 못났는데도 사랑스럽다.
“다리. 괜찮아?”
“에디가 물을 게 아니잖아요. 내가 물어야 하는데. 내가……, 흑…….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해서……. 에디가, 에디가…….”
겨우 진정되나 싶더니 또 엉엉 운다. 그러고 보니 준영이 저렇게 크게 감정을 소모하는 모습이 극히 드물다.
웃으면 안 되는데 싶은데도 웃음이 나오려 해 정말 초인적인 힘으로 참았다.
“준영. 언제까지 그렇게 울고만 있을 거야.”
에드워드의 질문에서야 준영이 대성통곡을 멈춘다. 그럼에도 여전히 눈물이 멈추지는 않나 보다. 에드워드가 한 손을 들자, 휠체어에서 조심스럽게 내려 천천히 다가왔다.
“몇 바늘 꿰맸어?”
“그게 지금 에디가 물어보…….”
냉큼 손을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상처 위에 준영이 쓰러지듯 엎어지는 바람에 조금 아프긴 했다. 하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다.
“상처! 미쳤어요?! 터지면 어쩌려고!”
“안 터져. 말했잖아. 우성 알파는 튼튼하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정말이지……, 내가…….”
준영의 말이 자꾸만 멀어진다.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몸은 확실히 무리가 가나 보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준영이 입을 다물더니 상처를 피해 조심스럽게 품에 안겨 왔다.
“푹 자고 얼른 나아요.”
너도.
대답을 한 건지 아닌 건지 잘 모르겠다. 에드워드는 결국 약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당연하게도, 공동묘지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도를 읊어줄 신부와 수녀 두 명, 그리고 장례를 돕는 인부가 다였다.
제라드는 들고 온 꽃을 가지고 관 쪽으로 다가갔다.
“……레이첼이라고 했지?”
진짜 이름이.
가만히 눈감은 채 누워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신부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더는 올 사람이 없다고 판단한 건지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수녀들도 양손을 모은 채 작게 기도를 드린 후에야 신부가 들고 있던 성서를 덮었다.
인부가 다가와 잠시 고인에게 예를 드린 후, 제라드에게 물었다.
“시작할까요?”
“……네.”
끝까지 오지 않을 모양인가. 자신이 오기 전에 한 번 더 연락을 취했지만, 레베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제라드는 쥐고 있던 꽃을 제시카의 몸 위에 살포시 던졌다.
다음에 태어나게 되면…… 부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그래서 부모님 사랑을 듬뿍 받아.
어쩜 지옥이란 게 있어서 그녀가 한 죗값을 치러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부디 그녀가 언젠가는 그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했다.
“누가 오신 듯한데…….”
막 뚜껑을 덮으려 할 때 인기척이 들려와 인부들이 행동을 멈추었다.
레베카가 온 건가 했지만, 예상 밖에도 준영이었다.
“준영? 여길 어떻게.”
크리스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를 타고 다가온 준영이 제라드를 보고는 꾸벅 인사를 하였다.
“그래도…… 왠지 와야 할 것 같아서요.”
“무리하지 않아도 돼.”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 혼자였어요. ……그게 그렇게 슬프더라구요.”
착한 녀석.
자신을 그렇게까지 몰아간 여자의 마지막이 외로울까 온 준영의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로 착했다. 하지만 누가 감히 그를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위선도 가식도 아닌, 진심으로 느낀 것을 그대로 행하는 모습에 누가 감히 어리석다 할까.
“꽃……, 드려도 될까요.”
“그래. 부탁할게.”
준영은 조심스럽게 휠체어에서 내려 크리스가 건네준 꽃다발을 받고는 천천히 관으로 다가갔다.
“예쁘네요.”
방부처리가 되어있어, 마지막 모습과는 다를 것이다.
“레이첼 씨의 사진을 봤어요. ……정말 예쁘던데.”
제시카는 자신이 가진 것이 얼마나 큰 건지를 알지 못했다. 그녀도 충분히 아름답게 빛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원망하기만 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기만 했다. 그것이 이런 비극적 결말을 낳았을 것이다.
“다음 생에는 꼭 가족과 함께하기를 바랄게요.”
준영은 제시카의 손 위에 꽃다발을 올려준 뒤 뒤로 물러섰다. 크리스가 어서 휠체어에 앉으라며 준영을 부를 때, 또 다른 손님이 찾아와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경찰과 함께 당도한 레베카는 입구 앞에서 수갑을 풀었다.
그녀는 손목이 조금 저린지 만지작거리고는 경찰이 챙겨준 꽃다발을 들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레베카는 오로지 관을 바라보며 다가갔다. 준영은 조용히 비켜 준 뒤 크리스의 옆으로 가 섰다.
레베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제시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다음에는…… 꼭 사랑받으렴.”
제라드는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같은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지만, 그 누구에게도 애정 한번 받지 못하고 자란 자신의 배다른 누이가 처음으로 불쌍하게 여겨졌다.
레베카는 꽃다발을 제시카 옆에 고이 두고는 한 번 더 얼굴을 쓰다듬은 뒤에야 몸을 돌렸다.
그리고 역시나 똑바로 정면을 바라본 채로 경찰들에게 돌아갔다.
너무 빨리 돌아오는 레베카의 모습에 경찰들이 당황했지만, 잘못된 것도 아니다 싶었는지 다시 말없이 그녀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레베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동묘지를 빠져나갔다.
준영은 말없이 그런 레베카를 보다 고개를 숙였다. 크리스가 준영을 위로하듯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주었다.
제라드는 묵묵히 레베카가 사라진 쪽을 응시하다 인부들을 돌아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관이 닫혔다. 아파트형 묘지라 장례절차는 간단했다. 구멍 안으로 관을 밀어 넣고, 벽돌로 입구를 막는 모습을 바라보다 발길을 돌렸다.
준영도 휠체어에 다시 탄 뒤 크리스와 함께 그 뒤를 따랐다.
“에드워드는? 용케 허락했다?”
“잔다고 모를걸요.”
“……난 빼줘요.”
준영의 대답에 크리스가 긴 한숨을 내쉬었고, 제라드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오늘따라 유달리 하늘이 청명했다.
“드디어 끝난 건가.”
“그래.”
제라드의 중얼거림에 크리스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골치 아픈 일도, 험난한 일도, 가슴 아픈 일도 드디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미쳤냐? 어? 너야말로 침대에다 묶어 줘?”
잠시 짬이 나 병실로 들어왔던 제이크가 기함했다. 가슴과 어깨에 구멍이 난 주제에 당당히 서서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는 에드워드의 모습에 말이다.
“약을 하도 많이 써서 아픈지도 모르겠어.”
“그래? 그럼 앞으로는 확 줄여야겠군. 아파야 안 돌아다니지.”
씩씩대는 친구의 모습에 에드워드는 피식 웃고는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날이 좋군.”
“들었어?”
“제라드가 말해줬어.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다고.”
“아니, 그거 말고 준영이…….”
“준영이 장례식에 간 걸 알고 있냐고?”
긴가민가하며 되묻는 제이크를 돌아보았다. 에드워드의 질문에 제이크가 조금 당황하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제이크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는 간다. 행여나 누가 채 갈라 걱정투성이였던 주제에 용케 보내줬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준영이…… 제시카가 숨을 거두는 장면을 봐버렸어.”
“…….”
“피투성이가 된 채, 눈도 감지 못하고 죽는 모습을 본 거야. 트라우마가 남을지도 모르니까……. 시신이 안식을 얻어 가는 모습을 보는 게 낫겠다 싶더군.”
비록 거짓투성이 안식이지만.
현장에 있던 경호원의 말에 의하면 제시카는 눈도 감지 못했다고 했다. 그 모습을 준영이 봤으니, 분명 마음 여린 그의 뇌리에 평생 남을 것이다. 억지로는 보내지 못하지만, 그가 스스로 간다고 하니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제시카가 지은 죄는 분명 나쁘지만 어떤 의미로는 참 불쌍하군. 끝까지 너에게 그런 취급이라니.”
“동족인 거지. 그녀나 나나…….”
겉이 화려한 것에 이끌렸다. 가지고 있는 물질적인 것에 동요했다. 모두에게 주목받는 것을 즐겼다.
제시카는 또 다른 자신의 허황된 모습의 단면과도 같았다.
“넌 제시카를 닮지 않았어. 걱정 마. 십년지기 친구로서 보증하는 거야.”
“……알아. 일부분만 그렇다는 거야.”
누구에게나 있는 추한 단면.
“다 좋으니까. 이제 누워. 안 그러면 정말로 네 담당 의사한테 말해서 네 놈을 묶으라 할 거야.”
제이크가 당장 누우라며 잔소리를 하는 바람에 결국 시선을 돌려야 했다. 침대에 앉아 다시 창밖을 보았다.
문득 제시카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날이 왜 이렇게 밝죠? 눈부시게.’
‘좋지 않아? 보고 있으면 정화되는 기분이잖아.’
‘후후. 난 타버리는 기분인데요? 난 이상하게 맑은 날이 싫더라구요. 그날 내 가장 소중한 사람이 떠나서 그런가 봐요. 하고 많은 날 중에 하필이면 이렇게 좋은 날 가버렸어.’
어쩌면 그때 그 모습은 제시카가 아닌 레이첼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에드워드는 그 표정에 처음으로 제시카와 사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얼른 누워라. 준영 찬스 써버리기 전에.”
“그건 뭐야?”
“네가 상처 제대로 치료 안 하고 마구 돌아다닌다고 다 일러바칠 거라는 소리다.”
“……치사한 새끼.”
협박은 완벽했다. 에드워드는 십년지기 친구를 마구 노려보며 침대에 몸을 기대었다.
“매트 세워 줘?”
“아니, 눈 좀 붙일 거야.”
“그래. 네 몸이 네 몸 같지 않지? 얼른 자라. 얼른. 아, 블라인드 쳐줄게.”
잔소리를 퍼붓던 제이크가 창가로 가 블라인드 끈을 잡았다. 차륵 차륵 소리를 내며 서서히 밝게 빛나고 있던 해가 줄어들었다.
레이첼.
죗값을 다 받고 혹시라도 다시 태어난다면 꼭…… 널 진심으로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 아니, 그 전에 너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삶을 살도록 해.
아주 잠시, 먼 길을 떠났을 제시카에게 마음속으로 마지막 인사를 그린 후 눈을 감았다.
이제 더는 그녀를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는 일밖에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준영과 함께.
레베카는 상상도 하지 못한 남자가 면회를 온 것에 당황했다.
처음에는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계속 머리를 떠나지 않던 의문을 풀 기회다 싶어 면회를 수락했다.
면회실로 들어서자 대기 중이던 사무엘이 보였다.
휠체어에 앉은 꼴이 가관이다. 심지어 늙은 남자는 예전보다 더 늙어버린 듯했다.
“몸은 좀 어떻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그의 가식적인 관심 따위에 더는 반응해 줄 필요가 없다. 레베카는 사무엘의 질문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말을 이었다.
“용병 의뢰. 당신이 한 거지요?”
갑자기 도망 다니던 제시카가 모든 걸 자포자기하고 모습을 드러낸 게 자꾸 걸려 제라드에게 물었다. 제라드는 용병 의뢰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에드워드도 차마 그러지 못하고 미루고 있었다고 했다.
그럼 도대체 누가 한 것일까. 자신의 주변에 그 정도 재력이 되는 이 중, 비열하고 잔혹한 이는 딱 한 명뿐이다.
“당신을 위해서였소.”
“……하.”
역시나.
정말 하나도 바뀌지 않은 남자의 모습에 레베카는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구나. 자신도 하나도 바뀌지 않았구나.
“날 위해서?”
“제시카에게 협박을 받았다고 들었소. 그 아이를 잡아서 자백을 받으면 당신의 형량이 줄어드…….”
쾅!
그 작은 몸으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온 건지 모르겠다. 레베카는 온 힘을 다해 철제 테이블을 내려치고는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네놈이 날 위해서였다면 내 아이를 건드리는 게 아니라…… 나에게 면회 와서 차라리 나에게 화를 내야 했어.”
모든 죄를 다 짊어지는 것.
그것이 자신이 제시카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죗값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기회조차 앗아가 버렸다. 이 머저리 같은 남자는.
“네 운명의 짝을 희롱하고, 쫓아낸 게 나야. 그런데 날 위해서? 나에게 차라리 복수를 했다고 해. 당신의 운명의 짝을 그렇게 내쫓은 복수였다고 해.”
“레베카.”
“난! ……조이 미샤트야. 그래. 이제야 깨달았어. 레이첼의 엄마인 조이 미샤트였어. ……사무엘. 당신을 증오해. 내가 지은 죄만큼이나 죄를 짓고도 한 치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당신이……. 부디, 부디 평생을 외롭고 괴롭게 살아가기를 바랄게.”
“…….”
레베카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나 보다. 하긴 함께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대들지 않았던 레베카였다.
“어디 한번 목숨 구질구질하게 늘여서 살아 봐. 자식들도, 아내들도 모두 등 돌린 가운데 외롭고 처량하게 혼자 살아. ……나 역시도 내 죗값 내가 받을 테니까.”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는 사무엘을 잠시 노려보다 몸을 돌렸다. 아직 면회시간이 한참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나가버리는 레베카의 뒤를 간수가 헐레벌떡 따라갔다.
막 복도 모퉁이를 돌 때, 레베카가 간수를 힘없이 바라보며 물었다.
“부탁한 건요?”
“뭘 만들려고 하는 건지 몰라도…… 들켜도 내가 준 걸 절대 말하면 안 됩니다.”
플라스틱으로 된 작은 찰흙용 조각칼.
이거 하나에 자신이 숨겨놓은 모든 재산을 이 간수에게 넘겼다. 혹시라도 레이첼이 외국으로 도망칠 때 도움이 될까 싶어 몰래 빼돌린 계좌지만 이제는 필요가 없어 그냥 죄다 줘 버렸다.
뉴욕에 꽤 넓은 평수의 집을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이 한순간에 어린이용 조각칼로 바뀌었다.
인생이 결국 이런 허무한 거란 걸 새삼 느낀다.
레베카는 몸속에 조각칼을 숨긴 뒤 걸음을 옮겼다. 간수는 도대체 어디다 쓸려고 저러나 하는 눈빛으로 힐끔 보았지만, 지금 당장은 알 길이 없다.
그리고 그다음 날, 레베카의 싸늘한 주검 옆에 반으로 부러진 조각칼을 발견하고서야 그 용도를 알았지만 이미 한참 늦은 뒤였다.
햄턴 사 회장의 부인치고는 너무 조용한 영결식이었다.
아마도 여러 가지 사건에 연루된 것이 가장 컸을 것이다. 조용하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준영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시달렸다.
모든 게 다 자신이 이 햄턴 가문에 나타났기 때문에 발생된 일인 것만 같다.
하지만 곧 똑바로 고개를 들었다.
영결식에 참석하기 전 에드워드가 한 말을 떠올렸다.
절대 준영의 잘못이 아니라고. 어차피 기름이 부어져 있었을 뿐이라고. 시간의 문제일 뿐이고, 차라리 도려낼 수 없을 정도로 썩기 전에 알아내서 다행인 거라고.
‘그리고 부디 날 만난 걸 후회한다는 식으로 말하지 말아줘.’
준영의 뺨을 감싸며 속삭이던 에드워드의 눈빛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드디어 끝났네요.”
함께 영결식에 참석한 크리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준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장 앞쪽에 앉아 있는 제라드를 보았다.
아무리 밉다고 해도 친어머니다.
아무리 레베카가 저지른 일로 인해 벌어진 인과응보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궁지로 몰아넣었다는 죄책감은 클 것이다.
자신조차 이런데.
“준영.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녀석이 빨리 마음을 추스르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크리스의 말에 준영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의 말이 맞다. 지금은 그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가 마음을 다스리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의 도움을 받아 영결식장을 빠져나갔다.
아마 제라드는 바로 뉴욕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의 곁에 남아주고 싶지만, 다친 자신이 곁에 있어 본들 신경만 쓰게 만들 것 같아 조용히 돌아갈 생각이었다.
“크리스. ……난 경호원들도 있고 간호사도 함께니까, 크리스가 제라드 곁에 있어 줘요.”
그리고 가장 필요한 건 자신이 아닐 테니까.
“무슨. 괜찮습니다. 그 녀석과 난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
“왜 아무런 사이가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크리스. 그리고 솔직해져요. ……결과가 어떻게 되든 솔직하지 못하면 나중에 후회하게 되더라구요.”
상체를 돌려 휠체어를 잡은 손을 마주 잡았다.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준영을 말없이 응시하던 크리스는 결국 항복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그럴게요. 그래도 공항까지는…….”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멈춘 크리스를 의아하게 바라보다, 그의 시선이 고정된 곳을 좇았다. 생각지 못한 사람이 다가와 크게 긴장했다.
결혼식 때 딱 한 번 마주친 이후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사무엘이었다.
그는 조금 늦게 영결식에 참석한 모양새였다. 아무리 그래도 부인의 장례식인데 지금에서야 오다니. 레베카가 안쓰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굳은 표정으로 관이 있는 곳으로 향하던 사무엘이 준영을 발견하고는 멈춰 섰다.
준영은 말없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건넸다. 자세를 바로 한 뒤 고개 숙인 채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준영이라고 했지?”
“……네.”
“에드워드는 좀 어떠냐.”
“다행히 순조롭게 낫고 있습니다.”
“남자는 배우자가 어떻게 내조하냐에 따라 다르다. 잘하거라.”
“……네.”
그게 끝이었다.
준영이 다친 것도 분명 알 텐데 그는 일언도 하지 않고 그냥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차라리 친절한 척하며 이런저런 안부를 묻는 것보다 더 낫다 싶었다.
“여전하시네요.”
“크리스도 알아요?”
멀리 멀어진 사무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크리스는 씁쓸함을 숨기지 못했다.
“가끔 제라드 녀석 때문에 집안 파티에 억지로 끌려갔거든요. ……처음 저 사람과 마주쳐서 인사를 했을 때 한 말이 아직도 기억나네요.”
“뭐라고 했는데요?”
“친구는 가려서 사귀거라.”
“면전에서요?”
“네. 뭐, 제라드가 더 가관이었지만.”
“제라드는 뭐라고 했는데요?”
준영의 질문에 다시 휠체어를 밀며 걸음을 옮기던 크리스가 나직이 웃었다. 뭔가 옛날 생각에 혼자 터진 분위기다.
궁금한데…….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다시 물으려던 그때 크리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평생 친구 한 명 사귀지 못한 루저에게 그런 충고는 듣고 싶지 않은데요?’라고 하더군요.”
“진짜요? 아버지 면전에서요?”
“네. 그 말을 들은 사무엘의 측근들이 어찌나 당황하던지. 심지어 레베카가 대신 나서서 제라드를 마구 혼냈죠. 지금 생각해 보면 사무엘의 편을 들었다기보다, 제라드가 그의 눈밖에 날까 봐 걱정한 거겠지만. ……일단 우리 이 얘기는 그만하죠. 에드워드 씨가 기다릴 겁니다. 어서 전화해 주세요.”
“네.”
보통 사람이었다면 약 기운에 취해 자고 있을 테지만, 상대가 에드워드니 악착같이 견디고 있을 것이다. 준영은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어 무음 상태를 풀었다. 그나저나 그사이 참 많이도 연락이 왔구나 싶다. 십 분 단위로 아프지 않냐, 별일 없냐, 혹시 사무엘이 이상한 헛소리를 하지 않았냐는 등등의 메시지가 날아와 있었다.
준영은 하나하나 읽어 내리다 못 말리겠다며 웃었다. 얼른 전화를 해주지 않으면 이 남자 목 빠지겠구나 하며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에디, 나예요. 응. 방금요. 응…….”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에드워드가 병원에 입원한 지도 벌써 2주가 되어간다. 이미 실밥까지도 다 뺀 준영은 당연하게도 바로 퇴원을 했지만, 에드워드가 병원에 있어 본의 아니게 계속 병원에 와야 했다.
물론 에드워드가 한사코 혼자 괜찮다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해서 요즘은 그래도 출퇴근하듯 병원에 오는 편이다.
오늘은 할머니 집이 팔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잠을 청하기 위해 일부러 이곳으로 왔다.
집이 오래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위치가 좋아서인지 내놓자마자 바로 나갔다. 입주하기 전 리모델링을 위해 내일부터는 인부들이 찾아와 물건을 빼거나 작업 준비를 위해 밑 작업을 할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어느새 완연한 봄이다.
하지만 여전히 뉴욕의 밤은 추웠다. 준영은 벽난로에 장작을 몇 개 넣고는 그 앞에 쿠션을 가져와 비스듬히 엎드렸다.
예전 할머니와 종종 이렇게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준영은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할머니는 길가에서 신문을 팔다가 본 특이한 사람들에 대한 것이 주였다.
가끔은 정치인, 가끔은 평론가가 되기도 했다.
남들이 보면 엉터리 같은 대화를 할머니와 준영은 밤을 지새우도록 이어가기도 했었다.
“할머니. ……괜찮다고 해도 가끔은 이곳이 그리워질지도 모르겠다.”
콧잔등이 시큼하다. 괜히 주책맞게 눈물이 나오려 한다. 춥지는 않은데, 왠지 서늘한 느낌에 담요를 가져오자 싶어 막 일어서려 할 때,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구지?
옆집 아주머니가 준영이 온 걸 알고 찾아온 건가 하며 서둘러 현관문 쪽으로 향하였다.
“네. 나가요.”
잠금장치를 풀고, 체인을 건 상태로 문을 열려다가 몇 번이고 들었던 잔소리가 떠올라, 슬쩍 되물었다.
“그런데 누구세요?”
“드디어 학습이 된 거야?”
“설마?”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누군지 알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경악했다. 그가 이 시간에, 아니 시간과 상관없이 왜 환자 주제에 이런 곳에 있냐는 말이다.
놀란 준영은 헐레벌떡 체인을 풀고는 문을 열었다.
역시나 에드워드였다. 심지어, 당당히 외출복을 입은 상태다. 코트를 걸치고 있어, 겉만 보면 환자인지도 모를 모양새였다.
“어떻게…….”
“일단 좀 들어가도 돼?”
“네? 아, 네!”
황급히 옆으로 비켜주자, 에드워드는 부르르 떨며 안으로 들어섰다. 준영은 그제야 비가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에! 환자면서! 우산도 없이!”
“아니야.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비 안 왔어. 택시에서 내리는데 떨어지더라고.”
잔소리를 퍼부으며 다급하게 에드워드의 코트를 벗겨 주었다. 다행히 티셔츠가 젖은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여 수건을 가지러 가기 위해 빠르게 이 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수건을 몇 장 챙겨 다시 일 층으로 내려가자, 에드워드는 방금 전 준영이 앉아 있던 곳에서 몸을 말리고 있었다.
준영은 에드워드에게 다가가 급히 수건으로 젖은 에드워드의 머리를 닦아 주었다. 남은 걱정되어 죽겠건만, 에드워드는 기분 좋다는 듯이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적당히 물기가 없어지도록 닦은 후 수건을 주방에 걸칠 때, 갑자기 울린 전화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에드워드는 빛의 속도로 핸드폰을 꺼버렸고, 준영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설마 가출?”
“외출이라고 해 줘.”
“그런데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죠?”
“……한 번만 봐 줘.”
“에디!”
어찌나 어이가 없는지. 설마 설마 했는데 사실이었다.
가출이라니.
그것도 몸에 구멍이 두 개나 생긴 주제에.
준영은 당장 돌아가라며 자신의 핸드폰을 잡으려 했지만, 에드워드가 더 빨랐다. 그는 준영의 폰을 잡아 높이 들어 올렸고, 준영은 그것을 뺏기 위해 손을 뻗어보지만 역부족이었다.
“에디!”
“아하하하! 귀여워!”
“윽! 너무해요!”
요즘 틈만 나면 이렇게 신체적 차이를 가지고 놀린다. 준영이 제대로 삐져 팩 몸을 돌리자, 뒤늦게 아차 싶었는지 용서를 빌어 왔다.
“준영. 미안해. 준영이 작다는 게 아니…….”
물론 그 정도로 삐질 준영이 아니다. 에드워드가 팔을 내리는 순간을 기다렸다, 냉큼 핸드폰을 뺏었다. 에드워드는 황당함에 준영을 보며 억울해했지만, 준영은 제이크의 번호를 찾는다고 바빴다.
“마지막 날이잖아.”
막 통화 버튼을 누르려고 하던 그때 들려온 말에 우뚝 멈췄다.
“이곳 오늘까지지?”
“……알고 있었어요?”
“저번에 준영이 나 몰래 통화하는 걸 들었지. 그래서 아, 오늘은 집으로 가지 않고 이곳으로 가겠구나 했어. 그나저나 경호원들은 언제 꼬드긴 거야? 왜 사실대로 말해 주지 않는 거지?”
“그들에게 뭐라 하지 마세요. 내가 사정사정한 거라고요.”
서슬 퍼런 에드워드의 목소리에 준영은 당장이라도 그가 경호원들을 자를까 봐, 우물쭈물 변호를 하였다.
그런데 뭔가 변명하다 보니 조금 이상하다. 왜 자신이 에드워드 눈치를 보고 있는 건지를 잘 모르겠다. 준영의 미간이 팍 좁혀지자, 에드워드가 기다렸다는 듯이 큰소리로 웃으며 준영을 그러안았다.
“혼자면 서글프잖아. 함께 있어 주고 싶었어. 그리고 나 역시도 이곳에 추억이 많고.”
“……약았어.”
“미안. 준영을 상대로는 그렇게밖에 안 돼. 자꾸 내가, 내가 아니게 돼. 그래도 준영, 너에게만 그런 거니까……, 봐 줘.”
정말로 약은 남자다. 절대로 미워할 수 없게 만들어 더 미웠다.
준영은 얄미움을 노골적으로 표정에 드러냈지만 그에게 큰 의미는 없어 보였다.
에드워드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준영을 더욱 감싸 안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입술이 겹쳐진다.
두 눈을 감고, 양팔을 뻗어 에드워드의 허리를 감쌌다. 온기가 느껴지고서야 준영은 에드워드의 말이 맞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은 외로웠던 거였다.
예전에 입었던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뒤, 내려오자 막 우유를 데운 준영이 컵 두 개를 양손으로 쥔 채 벽난로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 추워요?”
“전혀.”
겨울에도 이 모습으로 지냈었는데, 볼 때마다 걱정스럽게 묻는다. 에드워드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는 준영의 손에서 자신의 몫으로 보이는 컵 하나를 건네 들었다.
적당히 데워진 우유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예전에는 우유가 이상하게 비려서 싫었다. 유모나, 가정부가 주면 먹기는 했지만 일부러 찾아 먹지는 않았다.
하지만 준영이 매일같이 달고 살아서일까. 요즘은 에드워드도 즐기는 수준이었다.
“꿀 넣어줄까요? 저번처럼?”
“아니. 괜찮아. 꿀 넣은 건 먹을 땐 괜찮던데 다 먹고 나니 힘들더라고.”
너무 달아서.
에드워드가 한동안 고생했던 걸 떠올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준영은 그 모습에 기분 좋게 웃었다.
요즘 준영은 참 잘 웃는다.
기본적으로 조용한 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다.
힘든 시기가 지나고 이제 안정권에 들어서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준영이 에드워드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렇기에 소중히 하고 싶다.
“그래서, 신혼여행은 어디로 갈 건지 생각해봤어?”
“음……. 생각 중이에요. 솔직히 가고 싶은 데가 너무 많아서 못 고르겠어요.”
얼마 전, 에드워드가 준영에게 신혼여행을 가자고 권했었다. 그때의 준영의 표정이 잊히지가 않는다. 놀란 듯이 가만히 쳐다보더니 이어 눈물을 글썽거리기까지 해, 뒤늦게 알아챘었다. 사실은 많이 서운했다는 것을.
“그럼 다 가보면 되지.”
“그렇지만…….”
“하긴 다 가고 싶지만 시간적으로 무리일 걸. 제라드의 인내심은 짧거든.”
어떻게 보면 제라드도 참 불행하다. 모델 일을 다시 하겠다고 에드워드를 회사로 끌고 간 것을 기뻐하기도 잠시, 에드워드가 중상을 입는 바람에 또다시 회사에 얽매여야 했다.
거기다 회장도 사퇴했다.
그래도 회장이라는 명패를 가지고 있던 사무엘은 레베카가 자살을 한 후 사퇴를 선언했다. 그는 회장직에서 내려옴과 동시에 자신의 집에서 은둔한 걸로 알고 있다. 담당의의 말로는 건강상은 크게 문제가 없지만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심하다고 했다.
불효라 하면 할 말이 없겠지만, 딱히 동정심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가 지금까지 지은 크고 많은 죄들에 비하면 그 정도는 참회에 속하지도 않을 테니까.
“에디? 듣고 있어요?”
“응? ……그래.”
“안 들었네.”
또다시 뿌루퉁하게 입술을 내미는 준영의 입술을 냉큼 훔쳤다. 준영이 이렇게 입술을 내밀 때마다 에드워드는 도둑 뽀뽀를 하였다.
준영은 또 당했다는 눈빛으로 냉큼 입술을 한 손으로 막으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누차 말하지만 입술을 내밀 때마다……, 미안합니다. 다시 말해 주세요.”
그 모습도 사랑스러워 눈치 없이 말을 잇다가, 급히 선회했다. 아슬아슬하게 준영이 제대로 삐질 뻔하다가 멈췄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태연한 척 우유를 마셨다. 준영은 알고도 속는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다 푹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한국. ……가보고 싶어요.”
“한국? ……혹시 부모님을 찾고 싶은 거야?”
“에이, 설마요. 태어나는 순간 버려졌는데……. 그리고 정말로 날 찾고 싶었다면, 고아원으로 왔겠죠. 바라지도 않아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속마음은 다를 것이다. 특히나 준영이라면 더욱더.
“그냥 내 이름이 이준영이라서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안 것뿐이에요. 그런 거 있잖아요. 딱히 부모님을 찾고 싶다 이런 생각보다는……. 내가 한국인이니까, 한 번쯤은 가보고 싶다. 뭐, 이런 느낌이에요.”
“그래. 가자. 안 그래도 한국이라는 곳 나도 한 번쯤 가보고 싶었어. 거기에 제주도가 그렇게 좋다더군.”
“네. 나도 좀 찾아봤는데, 한국이 은근히 유네스코에 등재된 곳이 많더라구요. 먹을 것도 많고.”
“다른 곳도 생각해 봐. 한 군데만 굳이 안 가도 돼. 한국과 가까운 일본도 괜찮고 중국도 괜찮아. 아니면 조금 밑으로 내려가서 호주도 나쁘지 않지. 돈은 썩어 문드러질 정도로 많으니까.”
“으아. 에디 방금 멋질 거라고 생각해서 한 말 아니죠?”
“멋지지 않았어?”
“……솔직히 말해도 돼요?”
“들은 걸로 하지.”
빠른 항복에 준영이 다시금 기분 좋게 웃는다. 그의 미소가 예뻐 덩달아 미소 지었다.
그러다 막 우유를 마신 준영의 입술이 하얗게 칠해진 걸 보고는 참지 못하고 풋 하고 웃었다.
우유를 마실 때마다 일어나는 일이라, 준영도 에드워드가 왜 웃는지를 바로 파악하고는 쓱 하고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보지 않고 대충 닦아서인지 흔적이 번지듯 조금 남았다. 손을 뻗어 인중 부근의 흔적을 엄지로 쓱 닦아주다, 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깨달았다.
벽난로의 불꽃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붉다.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로 또다시 달콤한 향이 번져 나온다.
“일부러지?”
“……네?”
에드워드의 지적에 준영의 얼굴이 더할 수 없을 정도로 붉어진다. 살짝 들어 올린 얼굴에 열기가 피어난다. 눈동자에 음욕이 차오른다.
언제나 아이 같기만 하던 준영이 이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배덕감이 들어찬다.
자신으로 인해서 성욕을 알게 되고, 자신으로 하여금 흥분을 하기 시작한 작은 녀석이 미치도록 사랑스럽다.
에드워드는 준영의 손에 들려 있는 컵을 뺏듯이 잡아 자신의 컵과 함께 벽난로 바로 앞 굴곡진 곳에 내려놨다.
굳이 먼 곳으로 컵을 치운 이유를 깨달은 듯 준영은 더욱 얼굴을 붉혔다.
손을 뻗어 준영의 뺨을 감쌌다. 움찔하고 어깨가 떨리는 몸짓이 애처로워 보일 정도다.
아직 처음처럼은 아니지만 제법 살이 올랐다.
다시 볼에 젖살이 붙기 시작했다. 뺨을 만지작거리기를 잠시, 반대 손으로 준영의 허리를 감싸 당겼다.
“에디. ……상처가…….”
그런 말은 이런 야한 표정을 짓고 하는 게 아니다. 정말 걱정이 되었다면, 이런 달콤한 향을 뿜어서는 안 된다.
알파에게, 그것도 운명의 짝인 알파에게 이런 페로몬을 물씬 풍기고는 어떻게 가만히 있으라는 말인가.
쪽, 쪽.
각도를 바꿔가며 준영의 보드라운 입술을 맛보았다. 살짝살짝 닫힌 입술을 혀로 훑자, 속눈썹이 더욱 파르르 떨린다. 속눈썹이 길어서일까. 몇 배로 더 애처로워 보인다.
어서 문을 열어달라는 듯 혀로 닫힌 입술을 쓸었다.
한 번, 두 번.
몇 번인지 모르게 이어가다, 그의 입술이 미세하게 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파고들었다.
작은 비음조차도 삼킬 듯 빨아댔다. 기교도, 여유로움도 없었다.
조금은 거칠다시피 한 에드워드의 행동에 준영은 따라오는 게 전부였다. 에드워드의 옷깃을 양손으로 움켜쥔 채, 흐르는 타액에 부끄러워하며 그를 받아들였다.
모든 행동이, 몸짓이, 에드워드의 심장을 태워버릴 듯 사랑스럽다.
“하아하아……. 에디.”
숨 쉬는 걸 힘들어해 살짝 떨어지자, 힘겹게 숨을 몰아쉰다. 입술이 붉게 부푼 게 마음에 든다. 그사이 더 붉은 혀가 숨을 쉴 때마다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더 맛보고 싶다. 더. 더.
다시금 입술을 겹쳤다. 아까보다 더 강한 페로몬이 에드워드의 몸을 순식간에 휩싸기 시작했다.
심장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뛰기 시작한다.
동공이 수축되는 걸 느낀다. 서서히 러트에 돌입되어 가는 걸 깨달았다.
“에디…….”
너무 달콤해 독약 같은 향이 에드워드의 마지막 이성을 녹여버린다.
준영의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엉덩이가 치솟도록 만들었다. 이미 축축이 젖은 음란한 부분을 노려보다 혀로 길게 핥았다. 혀끝이 아리도록 달다.
에드워드의 행위에 움찔 놀란 준영이 다리를 내리려 했지만, 그의 손힘을 이길 리 만무했다.
부끄럽다는 듯, 눈물을 살짝 글썽인 채로 다시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디……, 그만…….”
언제나 생각하지만, 멈추기 위해서라면 그런 표정을 지어서는 안 되는 거다. 하지만 이 말은 평생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멈추고 싶지 않으니.
이번에는 입을 아주 가져다 댄 채 음란하게 움찔거리고 있는 부분을 빨아댔다.
살이 그나마 오른 허벅지와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며 혀로는 민감한 부분을 계속해서 헤집었다.
허벅지 근육이 간헐적으로 떨린다. 에드워드의 어깨에 걸쳐진 다리가 중간중간 허공에 맴돌다 내려온다.
감당하지 못할 쾌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준영의 모습이 사랑스럽고, 애처롭다.
그러니 그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 줄 생각이다.
자신처럼, 모든 이성을 내려놓고,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게 만들 것이다.
양손으로 엉덩이를 더욱 벌렸다. 살짝 벌어진 구멍 주변을 혀로 넓게 쓸었다.
기껏 열렸던 입구가 또다시 수줍게 꽉 닫힌다. 이번에는 기다리지 않고 혀를 밀어 넣었다.
꽉 닫힌 입구가 감칠맛을 준다. 더 진입하지 말라는 듯 힘주어 닫힌 살들을 혀로 훑으며 더 깊숙이 넣기 위해 힘을 주었다.
더 달콤한 맛을 맛보고 싶다.
파고들수록 떨림은 경련처럼 커져간다.
“흣, 흐음……. 에디. 하응……!”
부끄러운지 음성이 한없이 떨린다. 하지만 반대로 깊숙이 숨어있는 여린 살들은 기대하듯 움찔거렸다.
다시금 울컥 반투명 액체가 혀 위에 닿는다.
동공이 또다시 아프도록 수축된다.
더는 무리였다. 더이상 견디기에는 한계였다.
욕지거리가 나올 정도로 흥분한 자신을 깨달은 에드워드는 황급히 자세를 바로 하였다.
무릎으로 선 채 윗옷을 훌렁 벗었다. 꽉 감은 압박붕대가 거추장스럽다.
욕정에 살짝 젖었던 준영의 눈동자가 에드워드의 상처를 보는 순간 이성을 되찾게 시작했다.
그럼 안 되지.
자신만큼이나 흥분하기를 원한다.
다음날이 어찌 되든 그따위 현실은 죄다 잊고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쾌락에 몸을 맡기기를 바란다.
준영의 양 발목을 잡아당겨 하체를 더욱 밀착했다.
촉촉이 젖은 그의 아래와 성기가 맞닿자 아래가 더욱 저려온다.
더는 한계였다.
준영의 아래에 흐르고 있는 애액을 묻혀 성기에 문지르듯 바르고는 작은 입구에 가져다 대었다.
당황해서 주름에 파묻히도록 입구가 닫혔다.
하지만 애원하듯 성기를 문지르자, 서서히 아주 서서히 입구가 열리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없는 인내심이 더욱더 증발해버리는 기분이다.
조금은 억지로 작은 입구를 비집으며 쑤셔 넣었다.
가장 굵은 부분이 뻐근하게 벌어지더니 단숨에 삼키며 오므린다.
맞닿은 부분이 아프도록 조였다.
입술을 꽉 깨문 채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준영을 발견한 에드워드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본능이 에드워드를 탓한다.
지금 이런 사정을 봐줄 때냐며 화를 내듯 더욱 큰 흥분을 야기했다.
하지만 준영이 괴롭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 역시도 쾌감에 떨기를 바란다.
아프도록 수축된 동공이 서서히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흐르다 턱에서 뚝 하고 떨어졌다.
벌려진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입안이 마른다.
“에디. 괜찮으니까…….”
드디어 준영이 양다리를 들어 올려 에드워드의 허리를 감쌌다.
붉은 불빛에 어른거리는 볼이 아름다워, 이대로 사그라들까 봐 겁이 난다.
“어서…….”
이번에는 양팔을 뻗어 에드워드의 목을 감싼다.
꽉 맞물린 채 더는 벌어지지 않을 것 같던 내벽이 서서히 진입하는 성기를 기다렸다는 듯 반겼다.
더……, 더…….
단숨에 처박고 싶다는 욕구가 다시 머리를 든다. 히트 사이클 때와 다르게 몸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인 준영에게 제 욕심만을 채우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멈추고 싶지도 않다.
깊이, 더 깊이 파고든다. 드디어 한 치의 틈도 없이 하나가 됐을 때, 준영의 눈가에서 주루룩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파……?”
에드워드의 질문에 준영이 해사하게 웃는다.
“아니요. ……너무 좋아서.”
“제길……!”
그러니까. 이런 순간에는 그런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거다.
에드워드는 연결된 그 상태 그대로 허리를 쳐올렸다. 헉, 놀란 준영의 고개가 젖혀진다.
내벽의 살들이 기다렸다는 듯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이 기어코 떠나버렸다.
“준영…… ”
이게 자신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는 것이란 것에 당황스럽다. 하지만 그뿐. 언제 그랬냐는 듯 허리를 길게 뺐다, 단숨에 박아 넣는다.
경련하듯 퍼득거리는 모습이 안쓰럽다. 사랑스럽다.
아아……. 이대로 삼켜버리면 어떻게 될까.
쾌감인지 아픔인지, 아니 둘 다인지. 눈물에 젖은 준영을 황홀하게 바라보다 뺨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여전히 거칠게 아래를 두드리면서 달콤하기 짝이 없는 키스를 퍼붓는다.
숨쉬기 힘든지, 에드워드를 밀어내고는 거칠게 숨을 몰아쉰다. 작고 붉은 입술이 도톰하게 부풀어 잠시도 유혹을 멈추지 않는다.
원인 제공자인 주제에 파렴치하게 또다시 준영에게 탓을 돌리며 달콤한 숨과 함께 입술을 훔친다.
푹 하고 어느 곳을 찌를 때마다 내벽이 경련한다. 꿈틀대는 뜨거운 여린 점막이 생명체처럼 달라붙는다.
사정감이 다가오는지 준영의 숨결이 더욱 다급해진다. 허리를 틀다 스스로 엉덩이를 흔들기도 하였다.
더는 무리인지 손을 아래로 내린다.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성기를 움켜쥔 준영의 손을 덧잡았다.
기교 없이 기둥만 훑는 준영을 대신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선단 끝을 엄지로 꽉 눌렀다.
힉! 놀란 준영이 파득거리는 걸 놓치지 않고 다시 깊숙이 박아 넣었다.
두어 번 더 준영의 앞과 뒤를 동시에 괴롭혔다.
과한 쾌감이 견디기 힘든지 그만하라며 고개를 젓는다.
그럴수록 더욱 몰아붙였다.
쉴 새 없이 꿈틀거리던 내벽이 순간 크게 굳는다 싶더니 연결된 에드워드를 아프도록 옥죈다.
큭! 낮게 신음하며 사정할 뻔한 것을 간신히 견뎠다.
파르르 온몸을 떨며 사정한 준영이 멍한 눈을 깜빡였다.
자신이 사정한지도 모른 채 눈물만 떨구고 있는 모습이 못내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예뻐.”
예뻐서……, 예뻐서. 이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다. 그리고 한없이 맛보고 싶다.
허리를 뒤로 뺐다. 가장 굵은 부분이 걸린다. 준영의 눈에 두려움이 차오를 때, 미안하다 속삭였다.
퍽. 단숨에 깊숙이 쑤셔 박자, 온몸이 경직된다.
“그만, 제발……. 힉!”
무리라고. 방금 사정했다고 애원하는 준영의 입술을 또 한 번 훔친다.
밤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준영은 아직 모른다.
추위에 부르르 떨며 온기를 찾아 더욱 파고들다, 번쩍 눈을 떴다. 멍하니 탄탄한 가슴 근육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언제 다 탄 건지 식어버린 벽난로가 시야에 들어왔다.
맞아. 나 어제…….
뒤늦게 현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준영은 자신을 꽉 끌어안고 있는 에드워드의 팔을 치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경악했다.
누가 봐도 애프터다.
심지어 시간은 벌써 10시를 지나가고 있었다. 11시까지 작업을 하기 위해 인부들이 찾아올 거라 했었다.
“에디.”
“으음. ……그래, 그래.”
눈치 없는 에드워드는 준영을 잡아당겨 품 안에 가두었다. 따뜻한 온기에 부르르 떨었다가 다시 아차 하고는 그를 마구 밀어내며 일어나 앉았다.
끊어질 것 같은 허리와 얼얼한 아래보다 지금은 이 사태를 해결하는 게 먼저다.
“에디! 에디! 큰일 났어요!”
“으음……. 뭐가?”
“곧 있으면 인부들이 올 거라구요!”
그러니 이 난장판을 치워야 한다며 에드워드를 흔들어 보지만 그는 미동도 않는다.
아니, 미동은 했다. 길게 하품을 하고는 주변을 멍한 눈으로 둘러보더니 다시 준영을 끌어안으며 누울 뿐이다.
“사이좋은 부부구나 하겠지. 괜찮아. 괜찮아.”
빠직.
준영은 정말로 태어나 처음으로 이마에 힘줄이 돋는 게 어떤 건지를 몸소 깨달았다.
“일어나라고요! 에디!”
당연하게도 얼마 되지 않아 짝! 하는 시원스런 타격음과 함께 에드워드의 고통 어린 신음이 퍼져 흘렀다.
당연하게도 엄청난 잔소리가 준영과 에드워드를 기다렸다. 왜 자신까지 혼나는 걸까 라는 작은 의문도 들었지만, 에드워드가 찾아왔을 때 돌려보내기는커녕, 부추겨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죄목을 듣는 순간 묘하게 납득 당해버렸다.
그래서 아, 내 잘못이구나 할 때 에드워드가 나섰다.
“그만해. 준영이 뭘 잘못했다고 준영한테 자꾸 그래?”
“그래. 말 한번 잘했다. 준영이 뭔 죄냐고? 바로 네 놈 같은 철없는 남편을 둔 죄지. 남편이 철없는 걸 알면, 본인이라도 처신을 잘해야지. 거의 아물어가던 상처가 새로 터질 때까지 부부관계를 맺다니. 이게 잘한 일이야?”
웬만하면 준영에게 화를 내지 않을 제이크가 상당히 화가 난 듯 보였다. 기가 팍 죽은 준영과 달리 에드워드는 당당했다.
“정작 내 담당의는 가만히 있는데 왜 네가 이래?”
“네 놈 담당의는 후원자에게 큰소리를 칠 만큼 대범하지 못하니까.”
“흥. 됐으니까, 그만하고 가. 난 좀 잘 거야.”
어떻게 보면 멋지기까지 하다.
제이크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짚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괜스레 준영이 다시금 죄인의 기분을 맛보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제이크.”
“아니에요. 사실 준영이 뭔 죄예요. ……아까는 너무 흥분해서. 그래도 다음에는 휘말리지 말고 신고하세요.”
신고……?
“내가 죄인이냐?”
역시나 이 말조차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에드워드가 따지고 든다. 슬슬 피곤해서 쉬고 싶은데, 두 사람의 말싸움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준영은 멀뚱히 둘을 보다 에잇 모르겠다 침대로 올라가 이불을 푹 덮었다. 엄밀히 에드워드의 침대지만 어차피 늘 같이 쓰니 상관은 없다.
어지간히 피곤했나 보다. 둘이 투닥거리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리는 걸 보면 말이다.
따뜻한 햇볕이 이불 같고, 시원한 바람이 다정한 손길 같았다.
포근한 볕 냄새가 너무 좋아 자신도 모르게 배시시 웃을 때, 무언가 아프지는 않지만 잠을 깨우기는 충분한 타격이 머리 위에 이어졌다.
뭐지……?
최선을 다해 때리고 있는 것 같지만, 그다지 아프지는 않다.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해 눈도 못 뜨자, 이번에는 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
이건 조금 아팠다.
준영은 아얏, 소리를 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뭔가 작은 공 같은 것이 데굴 구른다.
초록빛 새싹 잔디 위 동그랗고 하얀 천 뭉치가 두둥실 눈앞에 드러났다. 준영은 이게 도대체 뭔가 하고 멍하니 쳐다보다 슬그머니 손가락을 쿡 하고 찔렀다.
“어마.”
“헉!”
너무 놀라 후다닥 물러섰다. 둥근 천 뭉치는 무려, 아기의 엉덩이였다. 여름인 건지 호박 바지처럼 풍덩한 바지가 기저귀 때문에 더욱 둥글게 보였던 거였다.
이제 막 10개월쯤 되어 보이는 아기는 준영을 보더니 아부부거리며 고사리손을 이용해 앞으로 기어왔다.
검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그리고 곱슬거리는 짧은 머리카락이 유달리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그 어떤 아기도 이렇게 사랑스럽게 생긴 걸 본 적이 없었다.
아기가 다가올수록 쿵쿵 심장이 뛰었다.
“……아기니?”
그럴 리가 없는데. 배 속의 아기는 이미 천사가 데리고 갔다.
그럼에도 그 착각과 망상을 멈출 길이 없었다.
“아부.”
아기가 다가와 여전히 손가락을 내밀고 있는 준영의 손가락을 덥석 잡았다.
작은 온기가 느껴진다.
아아…….
“어마~.”
뭐가 그리 웃긴지 준영의 손가락을 잡았다 놨다 하며 혼자 까륵까륵 웃는다.
행여나 눈을 감았다가 뜨면 사라질까, 눈조차 감지 못한 채 아기를 바라보았다.
“준영? 뭐 해?”
등 뒤에서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에드워드였다. 그의 목 위에 막 6살 7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올라타 있었다. 붉은빛이 살짝 감도는 화려한 금발이 태양에 비쳐 마치 햇살 같다고 생각했다.
“엄마, 운다!”
여자아이로 보이는 금발의 아이가 뭐라 할 틈 없이 껑충 에드워드의 어깨 위에서 뛰어내렸다.
“케이티, 위험하잖니!”
놀란 에드워드가 소리를 지르든 말든 케이티라 불린 여자아이는 쪼르륵 달려와 준영의 앞에 바싹 섰다.
“엄마 왜 울어? 응? 무서운 꿈 꿨어?”
“준영. 울었어? 이런.”
아이의 말에 에드워드도 놀라며 다가와 준영의 안색을 살폈다.
어라? 왠지 에드워드의 얼굴이 조금 이상하다. 뭔가 낯설어 뚫어져라 보다 보니 곧 이유를 깨달았다. 그의 눈가에 처음 보는 옅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마치 나이라도 든 것처럼.
“무서운 꿈이라도 꾼 거야?”
“아니요. 아니……. 아니요.”
혼란스럽다.
덕분에 대답도 이상하게 해버리자, 아이가 까르륵 웃는다. 에드워드도 덩달아 웃음을 흘릴 때 무언가가 쏙 하고 준영의 가슴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마. 맘마. 맘마.”
어느새 품 안으로 기어온 아기가 준영의 가슴을 두드리며 칭얼거린다. 가슴을 때리는 손길이 그다지 강하지도 않은데 아픔에 움찔 몸을 움츠렸다.
어? 아픈가?
아니다. 아프지 않았다. 이건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래서 깨달았다. 지금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아기가 다시 칭얼거리며 준영의 가슴 위에 매달리자 에드워드가 그런 아기의 겨드랑이를 잡아 냉큼 들어 올렸다.
“안 돼. 조쉬. 이제 엄마 맘마는 떼기로 했잖아? 아빠가 맛있는 이유식을 주마.”
“으웩. 이유식 맛없어.”
“케이티.”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헛구역질을 하는 아이를 에드워드가 나무랐다. 아이는 낼름 혓바닥을 내밀고는 빠르게 준영의 몸 뒤로 숨는다.
“아빠 메롱.”
“케이티!”
에드워드가 못 말리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여전히 칭얼거리고 있는 아이를 안아 든 채 발길을 옮겼다. 아이가 자신도 배고프다며 그런 에드워드의 뒤를 쫓았다.
“에디!”
“응?”
저도 모르게 멀어지는 에드워드를 불렀다. 준영의 부름에 에드워드가 멈춰서 상체를 돌렸다. 케이티는 에드워드의 손을, 조쉬라 불린 아기는 에드워드의 팔에 안긴 채 준영을 돌아보았다.
“아…….”
그 뒤로 너무나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환하게 웃는 그녀를 보는 순간 깨달았다. 이것이 앞으로 일어날 수도 있는 수많은 미래 중 하나라는 것을.
“할머니…….”
마치 선물이라도 주듯, 할머니가 인자한 미소를 짓더니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다시금 눈물이 흐른다.
에드워드와 케이티, 그리고 조쉬가 그런 준영을 보고는 미소 지으며 손짓했다.
어서 오라고.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뛰었다. 손을 뻗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을 막 끌어안으려는 그 순간, 세상이 크게 흔들렸다.
“준영? 왜 그래? 왜 갑자기 자다가 울고 그래?”
시야 가득 들어찬 에드워드가 걱정스럽게 준영을 바라보았다. 주름 한 점 없는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그 너머 공간에 시선을 옮겼다.
“병원?”
에드워드의 병실이다.
그래. 애초에 병실에서 잠들었으니, 당연히 눈을 떠도 병실일 거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낯선 느낌일까.
“얼마나 애를 잡았으면……. 쯧쯧.”
혀 차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더니, 막 크리스가 뜨거운 물을 부은 컵을 잡으며 제라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라드? 크리스……? 언제 왔어요?”
“준영이 잠들었을 때. 그런데 무슨 꿈을 꿨길래 바보처럼 웃다가 울다가 그래?”
“바보 같지는 않았어. 걱정 마.”
하나도 도움 되지 않는 추임새를 넣어주는 에드워드를 보다 다시 제라드를 보았다.
“모르겠어요. ……뭔가 굉장히 행복한 꿈을 꿨는데.”
“신혼여행 가는 꿈?”
“그런가.”
아니, 그보다 더 행복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신혼여행보다 더 행복한 게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에드워드와 여행을 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심장이 쿵쿵 뛸 만큼 떨리는데.
“꿈에서 보고 싶은 사람이라도 봤어? 음……. 할머니?”
“……그런가.”
역시나 모르겠다. 준영의 영혼없는 대답에 제라드는 어깨를 으쓱거리다 다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준영. 우유 데워 줄까요?”
크리스의 질문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수 좀 하고 올게요.”
양 볼을 감싸며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욕실로 들어섰다. 등 뒤로 제라드와 크리스가 투닥거리는 소리와 에드워드의 시끄럽다는 타박이 연이어 들렀다.
키득거리며 세면대로 가 선 뒤 거울을 바라보았다.
분명 울었던 게 맞나 보다.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눈가에는 하얗게 마른 눈물 자국도 보였다.
하지만 무서운 꿈을 꾼 건 아닌 것 같다. 분명 너무 행복해서 울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심장 위 옷가지를 움켜잡은 채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다, 금세 고개를 휙휙 저었다.
어떤 꿈인지는 모르겠지만, 되었다.
울만큼 기쁜 꿈을 꿨다는 건 앞으로도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거라는 징조다. 어릴 때 할머니가 종종 해 준 말이 떠올랐다.
‘나쁜 꿈은 미리 꿈을 꿔서 날려버리는 거고, 좋은 꿈은 그 일이 일어나기 위해 노력하면 되는 거란다.’
“할머니. 좋은 일이 생기려고 하는 거겠지?”
혼잣말에 혼자 배시시 웃고는 수도꼭지를 돌렸다. 조금은 차가운 물에 세수를 한 뒤 얼굴을 닦았다. 세면대 옆 화장대에 여러 개의 로션 중, 준영이 자주 쓰는 베이비 겸용 바디 로션을 들어 올렸다. 원래 얼굴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던 준영이었지만, 모두가 합심해 돌아가며 잔소리를 해, 그나마 이것만은 발랐다.
욕실을 나오자, 한참 심각한 대화를 하는 제라드와 크리스가 보였다.
“그러니까, 네가 몰라서 그렇지. 회는 숙성이 더 좋다니까.”
“무슨. 네가 갓 잡은 활어회를 몰라서 그래.”
아니, 심각한 척만 하나 보다. 내용이 전혀 그렇지 않다. 준영만큼이나 어이없는지, 에드워드가 노골적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런 그의 옆으로 다가가자, 냉큼 준영을 잡아당겨 품에 끌어안았다.
“음……. 아기 냄새.”
에드워드는 유달리 이 로션을 바르면 이렇게 킁킁 냄새를 맡았다.
뭐라더라? 준영의 몸에서 나오는 페르몬 냄새와 닮았다나?
그럼 내 몸에서 아기 냄새가 난다는 건가?
“그래서 준영. 준영은 어떻게 생각해?”
“활어회죠? 회는 맛도 맛이지만, 쫄깃한 식감이죠.”
제라드와 크리스가 동시에 질문을 던지는 것에 준영이 솔직히 답했다.
“회 싫어하는데요.”
조용…….
고요한 침묵이 이어지더니, 이어 에드워드가 먼저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크게 웃어 어깨가 아픈지, 상처 부위를 잡으면서도 멈출 줄을 몰랐다.
반대로 당혹감에 침묵하던 두 사람은 아까보다 더 심각하게 바뀌었다.
“차라리 잘 되었을지도?”
“뭐가?”
“생각해 봐. 회에 대한 선입견이 없다는 소리잖아.”
“그렇군.”
“……미리 말해 두지만 저 안 먹어요.”
뭔가 불길함에 서둘러 대답을 해보지만 이미 둘은 둘만의 세계에 빠져든 지 오래다.
“준영이 맛있는 회를 먹을 기회가 없어서 그래.”
“이참에 내가 맛보여 줄게.”
“무슨 소리야. 나라고. 회는 자고로 숙성이야. 그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는 맛을 맛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된다니까!”
“그러니까. 네놈이 낚시란 걸 해보지 못해서 그렇다고. 선상에서 갓 잡은 횟감을 그 자리에서 회 쳐서 먹어보지를 못해서 그런 거라니까?”
또다시 원점이다.
일단 자기에게 화살만 돌리지 않으면 된다 싶은데, 둘이 또다시 준영을 끌어들인다.
“지금 당장 사 올 테니까 딱 한 점만 맛봐!”
“그건 반칙이지! 제길, 미국은 왜 수산시장이 없는 거야! 죄다 죽은 생선만 팔다니!”
준영은 슬그머니 에드워드의 등 뒤로 몸을 숨겼고, 그는 긴 한숨 후 둘을 나직이 불렀다.
“꺼져.”
그렇게 둘을 쫓아내고서야 병실에 평화가 찾아왔다. 웃긴 건 복도에서도 싸우고 있다는 거다.
“정말이지……, 나이가 몇 살인데.”
아까 전 제이크와 비슷하게 싸운 에드워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일단은 도와줬기에 침묵했다.
“한국도 회를 이용한 요리가 많다던데?”
“진짜요?”
어쩌지. 회는 딱 싫은데…….
어릴 때 멋모르고 한 점 입안에 넣었다가 비린 맛에 정말 괴로워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하하하. 싫으면 먹지 않아도 돼. 억지로 먹을 필요가 뭐가 있어. 세상에 맛난 음식이 얼마나 많은데. 일단, 다음 주는 퇴원하니까……, 바로 도망치자.”
“네? 도망요?”
“응. 다음 주 퇴원인 걸 알게 되면 제라드가 날 끌고 바로 회사로 갈 기세더라고. 오늘도 제이크에게 언제 퇴원하는지 묻던데.”
“그래도 돼요?”
다음 주라니. 하나도 준비도 안 했는데.
“물론. 차라리 준비하지 마. 딱 몸과 돈만 가지고 가면 돼. 준비했다가 들키면 곤란해.”
언젠가 마틸다가 돈 많고 잘생긴 남편을 뒀다며 부러워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처음으로 돈 많은 남편을 둔 것에 대한 뿌듯함이 생겼다.
“네. 헤헤.”
“그 나라 여행을 가서, 그 나라 분위기에 맞는 옷을 입고, 그 나라 물건을 쓰는 거지. 그리고 다 쓴 물건은 햄턴 가로 보낸 뒤, 다른 나라에서 또 다른 문화를 경험하는 거야.”
“멋져요.”
“그렇지? 그러니,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고, 어디 가고 싶은지를 고민해. 일단 시작은 한국이지?”
“……네!”
“에췻! ……누가 내 욕해?”
준영의 대답과 동시에 병실로 들릴 정도로 제라드가 크게 재채기를 하였다. 동그래진 눈으로 문을 보다 에드워드를 보았다. 에드워드도 비슷한 심정인지 문을 보다가 준영을 돌아보고는 허탈하게 웃는다.
“무서운 놈.”
“아하하하.”
결국 참지 못하고 준영이 큰소리로 웃었다. 에드워드는 그런 준영을 냉큼 당겨 품 안에 오도록 만들고는 곰 인형을 안듯 꼭 끌어안는다.
“행복하다.”
“나도요.”
작은 중얼거림 같은 에드워드의 속삭임에 준영도 솔직하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래서 무슨 꿈을 꾼 건지 기억이 아주 안 나?”
“네. ……그치만 분명 행복한 꿈일 거예요.”
“내가 나오는?”
“아마도?”
못마땅하다는 듯 이마로 이마를 콩콩 찍는다. 그 모습에 또 한 번 웃었다.
행복하다. 그리고 분명…….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