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4)

[10]

열쇠로 문이 열리는 소리에 하던 행동을 멈추고는 가만히 노려보았다.

“들어가.”

“그래. 내일 보자.

살짝 열린 틈새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안으로 들어오는 비키의 모습을 보고서야 제시카는 몸에 힘을 빼고는 가지고 있던 총을 허리춤 걸이에 꽂았다.

“인기척이라도 해.”

제시카의 차가운 말에 비키가 잔뜩 긴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보라는 건?”

비키가 자신의 가방을 조심스럽게 현관문 옆, 옷걸이에 거는 모습을 지켜보다 물었다. 제시카의 질문에 비키는 여전히 움찔움찔 긴장하며 몸을 돌려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저렇게 겁이 많은 주제에 사람 하나 걸레로 만들어 내보내는 건 참 잘했다 싶다.

“알아는 봤는데……, 요즘 단속이 심해서…….”

짜증스러움에 눈에 힘을 주자, 비키는 손사래까지 치며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진짜야. 나 거짓말 안 했어. 정말이야. 요즘 이상할 정도로 단속이 심하대. 실제로 그쪽 관계자도 여럿 잡혀갔다고 하더라고.”

거짓은 아닐 것이다. 이런 거짓말을 할 정도로 대범하지 못하다. 무엇보다, 비키는 제시카가 한 협박이 진짜인 줄 안다.

등신같이. 쫓기다 쫓겨 이곳까지 온 건데, 그런 협박이 사실일 리 없지 않은가.

“됐어.”

제시카는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비키는 최근 자신의 침대로 사용하고 있는 소파로 슬그머니 가 앉고는 힐끔힐끔 눈치를 보았다.

“왜?”

“아니, 저기……, 우리 가족은…….”

“내 말만 잘 들으면 괜찮아. 말했잖아. 내가 정기적으로 연락하면 손대지 않을 거라고.”

처음에 비키의 집으로 쳐들어와, 그녀를 협박했던 내용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만약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신고를 하거나 엉뚱한 짓을 하면, 자신이 의뢰한 청부업자가 비키의 가족을 모두 죽일 거라는, 말도 안 되는 협박.

평소 영화나 드라마를 그런 장르만 보던 비키답게 현실과 픽션을 구분하지 못하고, 행여나 정말 그렇게 될까 봐 제시카의 말을 정말로 잘 들었다.

덕분에 편한 건 사실이지만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수는 없었다.

“저기……, 배 안 고파?”

“신경 꺼.”

“으응.”

처음에 비키는 제시카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긴 이름도 외모도 완전히 뜯어고쳤으니, 알 리가 없지.

하지만 알고부터는 저렇게 친한 척하기 바빴다. 본인이 밀고를 해 그녀가 죽다 살아날 정도로 끔찍한 짓을 당한 것 따위 기억에서 삭제했나 보다.

뭐 늘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굴었으니 이해도 간다.

“햄버거 사 왔는데 먹을래?”

“왜? 독이라도 탔니?”

“뭐? 그런 걸 탈 리가 없잖아. 네가 잘못되면 우리 가족도 큰일 난다며…….”

당장 그렇게 된 것처럼 울먹이는 게 짜증이나 내놓으라 하자, 서둘러 함께 가져왔던 종이가방에서 작은 햄버거 하나를 꺼내었다.

“이거 우리 가게 맞은편에 그 햄버거집 꺼야. 스미스 아저씨네 꺼.”

“……그래.”

맛은 정말 좋지만, 위치와 대형 체인점에 밀려 말 그대로 구멍가게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가게였다.

햄버거를 건네받고는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양상추는 이미 눅눅해졌지만 그래도 소스 맛은 일품이었다.

“여전히 맛있지?”

“비키.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널 언제 죽여도 이상하지 않아. 그건 알지?”

종알종알 시끄러워 냉랭하게 대꾸하자 다시금 허옇게 질린다. 비키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얌전히 자신의 소파로 가 앉았다.

배가 고프다는 생각을 못 했는데 먹다 보니 꽤 허겁지겁 먹는다. 하나를 순식간에 다 먹고 난 뒤 문득 떠오른 생각에 피식 웃었다.

햄버거가 몇 년 만이지?

에드워드를 만난 이후, 제시카는 햄버거를 끊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불량식품이라 불리는 모든 것들을 끊었다. 아주 가끔 담배만큼은 참지 못해 피웠지만, 그것도 자신의 원룸 다용도실 창문을 열어 피는 게 다였다. 하루 한두 번.

그렇게 철저히 자기 자신을 속이다시피 한 연기를 하였다.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어느 순간 정말로 자신이 완벽한 제시카가 되어간다는 사실이 그녀의 원동력이 되었다.

완벽한 약혼자. 모두가 우러러보는 삶.

정말로 자신이 제시카 로웰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다.

아니, 착각이 아니지. 그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사실이었다. 확실한 미래였다.

에드워드의 아내가 되어, 햄턴 가의 성을 달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럼 레베카와 제라드와 같은 성을 달게 된다.

비록 허울뿐이겠지만, 그럼에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일순간에 산산조각 나 버렸다. 또다시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감정이 솟아올랐다. 신경질적으로 이미 헝클어져 있는 머리를 양손으로 벅벅 긁어내리다, 문득 화장대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이제는 어디에도 어린 시절의 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준영, 그자가 나타나서? 아니, 아니다. 애초에 안다. 그녀가 자신의 손을 뿌리쳤던 바로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잘못된 거였다.

“엄마?”

커다란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는 엄마를 불렀다.

주춤.

발길을 멈춘 엄마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할 뿐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엄마. 다시 올 거지?”

다가가 옷자락을 잡았다. 엄마는 눈을 감았다.

엄마는 참 예뻤다. 늘 지나가는 사람들이 엄마를 보고 예쁘다고 했다. 그리고 레이첼에게 엄마를 닮아 좋겠다고 부러워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예쁘던 엄마도 얼굴을 엉망으로 맞아서일까, 그다지 예쁘지 않았다.

그 예쁘지 않은 얼굴도 좋았다. 하지만 엄마는 끝까지 돌아보지 않았다.

“……응.”

목소리가 떨려서 알았다. 엄마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엄마 옷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엄마는 빠르게 집을 나섰다. 그 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메가가 아니네. 아쉽다.

오메가가 되면 남자를 유혹하기 쉬워진다. 실제로 옆집 언니 라즈는 꽤 부잣집 아저씨를 꼬셔 나름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도 오메가이기를 바랬다.

엄마가 오메가이니, 자신도 오메가가 될 확률이 높을 거라고 믿었지만 불행히도 엄마는 유전자조차도 자신에게 주지 않았다.

“씨발.”

2차 검사 결과지를 구기자, 옆에 앉아 있던 같은 반 녀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 애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괜찮아. 오메가는 절대 죄가 아니야. 난 그래도 늘 네 친구일 거야.’

가만히 그 애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지적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검사지는 담임도 모른다. 학교에서 검사를 한다고 해도 기관에서 각각 봉투에 담아 전해주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 증거품만 사라진다면…….

‘응. 고마워. 정말 큰 힘이 돼.’

지랄. 하지만 소문은 빠르게 퍼질 것이다. 저 애는 정말로 입이 싸니까.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소문이 날 거다. 후에 혹시라도 들통난다면 자신이 낸 소문이 아니니 괜찮을 거다.

내 입으로 말하지 않았으니까 거짓말을 한 건 아니잖아?

더러운 오물 냄새.

또 술을 처먹다, 그대로 질렀나 보다. 미간을 찌푸린 채 집 안으로 가 창문을 열었다.

매서운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었다.

초봄인데도 영하로 내려가는 날씨라고 했다.

문득 고개를 돌렸다.

술에 취한 늙은 아비는 오늘따라 더 많은 술을 마셨나 보다.

오늘은 덜 맞겠구나.

요즘 들어 때리는 빈도가 너무 심하다. 실제로 한 달 전에는 몇 날 며칠 하혈을 할 정도로 복부를 맞아 정말로 고생했었다.

처방전이 없다면 항생제를 구할 수 없어 학교 양호실에서 항생제를 훔쳐 먹어 견뎠었다.

병원에 간다면 가정폭력을 당하고 살아온 것을 모든 친구들이 알게 될 것이다.

모두가 동정의 눈으로 자신을 볼 거라고 생각하자 끔찍하다. 그런 취급을 당할 바에야 죽는 게 낫다.

다시 창문을 보았다.

다시 잠든 늙은이를 보았다.

레이첼은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운 좋으면 살 것이다. 운 나쁘면…….

뭐, 지 운이겠지.

신분을 바꾸고 뉴욕으로 상경했다. 모델 에이전시, 몇 군데를 돌아다녀 봤지만 이 세상은 잘난 것들이 너무 많았다.

오디션도 너무 보니 대충 감이 왔다.

아, 떨어지겠구나 하고.

“합격 되면 따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기계적인 말을 하는 심사의원을 보다 꾸벅 인사를 하고는 발길을 돌렸다.

“정말이지. 아무리 내가 일을 많이 쳐낸다고 해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나도 좀 쉬는 시간을 줘!”

저 멀리서 모델로 보이는 남자가 통화를 하며 빠르게 이쪽으로 걸어왔다.

커다란 키. 화려한 금발. 벌어진 어깨. 한눈에 알파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멀뚱히 쳐다보고 있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가씨, 나 알아요?”

“……아니요.”

“이상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아가씨도 나 낯익어서 본 거죠?”

“그…….”

갑자기 나타난 더티 블론드의 잘생긴 남자가 느닷없이 금발 남자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아픔에 끙끙거리던 남자가 자신을 때린 남자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른다.

“아프잖아, 크리스토퍼!”

“내가 분명 빨리 나오라고 했을 텐데. 누군 시간이 남아서 차 끌고 온 줄 알아? 억지로 사람을 운전사 취급하는 주제에 감히 여자를 꼬셔?”

자기들끼리 투닥거리더니 그대로 가버린다. 황당함에 두 남자를 쳐다보다, 이어 복도에 붙어있는 포스트를 보고는 누군지를 깨달았다.

제라드 햄턴.

어린 시절에 모델을 시작해, 지금은 세계 최고라는 타이틀이 붙을 만큼 유명한 모델이다.

레이첼은 이미 제라드가 사라지고 없는 쪽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았다.

과연 햄턴이란 성이 없었어도 이렇게 성공했을까? 하긴, 알파니까.

어쩌니 해도 불공평한 세상이다. 저 남자는 다 가졌구나. 피식 웃으며 건물을 나섰다.

돈이 떨어지니, 당연히 업소 쪽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사만다. 넌 언제 히트가 오냐? 21살인데 왜 아직도 안 해. 진짜 오메가가 맞긴 해?”

또다. 한 달 주기로 묻던 게 이제는 일주일마다 묻는다. 물론 실제 나이는 25살이지만 동안인 편이라 그럭저럭 나이를 속일 수는 있었다.

문제는 2차 성별이었다.

이곳에 온 지도 벌써 3년. 처음에 18살이라고 속여 그럭저럭 버텼지만 평균 20살이면 대부분 다 온다는 히트 사이클이 돌지 않자 사장이 슬슬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오메가는 돈을 더 준다는 말에 그렇다고 했는데 들켰다가는 골방에 갇혀 몇 시간이고 두들겨 맞은 뒤 저 갱 놈들의 장난감이 될 것이다.

“안 그래도 요즘 몸이 좀 안 좋아서……. 슬슬 오지 않을까 싶어요.”

“오오. 그래? 오게 되면 꼭 말해야 돼. 그럼 비싸게 팔린다니까.”

“당연하죠. 나도 내 몸값 잘 안다니까요.”

걱정 말라며, 사장에게 애교를 섞은 대답을 한 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이제 속이는 것도 한계다. 도망쳐야 한다. 들키면 죽을지도 모른다.

짐 따위는 필요 없다. 몰래 모아놓은 현금만 찾아 이곳을 나갈 생각이다. 하지만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뭐야? 어디 갔어?”

“돈? 이거?”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꽁꽁 굳었다. 같은 방을 쓰는 비키였다.

“너야? 네가 내 돈…….”

따지며 덤벼들었지만, 채 다가가지도 못하고 멈춰 섰다. 사장이 악마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았다.

“사만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난, 다만 살 게 있어서…….”

“너 베타잖아. 내가 아는 지인한테 부탁해서 검사 좀 해봤지.”

비키는 지명순위가 뒤쳐진 후 자신만 보면 이를 갈더니, 기어코 발목을 잡았다. 자신만만하게 웃던 비키는 보란 듯이 손을 흔들고는 방을 나섰고, 그와 동시에 건장한 2명의 갱 놈이 안으로 들어섰다.

아, 그래. 잊고 있었어.

이 세상은 약자에게는 지옥이라는 걸.

죽은 건 아니네.

힘없이 일어나 멍하니 어두운 골목을 바라보았다. 기절한 레이첼이 죽은 거라 생각한 건지 막대기로 쿡쿡 찔러보던 노숙자가 비명을 지르며 저 멀리로 도망갔다.

유령 상태는 아니구나.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래가 빠질 것 같이 아프다. 주룩 흐르는 게 피인지 오물인지 모르겠다.

힘들게 한 발 한 발 걸어 골목을 나섰다.

화려한 네온사인.

하지만 그 어디에도 자신이 설 곳은 없었다.

그냥 정처 없이 걸었다.

나라에서 지원하는 노숙인 전용 쉼터라도 가면 치료를 해 주려나. 며칠 전 우연찮게 본 기억이 나 그곳을 향해 힘없이 걸어가다, 우뚝 섰다.

“……엄마.”

한눈에 알았다. 아름다운 여성은 그 옛날 자신의 기억 속 그 모습 그대로였다.

천천히 유리 벽으로 다가가 조금 더 가까이에서 브라운관을 바라보았다.

“레베카……, 햄턴? ……햄턴? 하하……. 레베카?”

처음 듣는 이름. 그리고 너무나도 익숙한 성. 순식간에 머릿속에 모든 게 정리가 되었다.

“괜찮네. ……햄턴.”

그러고 보니 제라드 햄턴이라고 했던가? 어디서 본 것 같다 했더니만.

왠지 웃음이 튀어나왔다.

같은 여자의 배에서 태어나,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이 웃겼다. 이것보다 더한 희극이 또 있을까.

“기다려 엄마. 내가 갈게.”

가게 주인이 아까부터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경찰이라도 부를 폼이다. 다시 발길을 돌렸다. 일단은 이 너덜해진 몸부터 고치고 싶었다.

햄턴 여사가 자주 간다는 백화점. 거의 정기적으로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시기쯤부터 백화점 주차장 입구에서 그녀의 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기다린 지 정확히 5일째 날, 그녀의 애마인 하얀색 롤스로이스 한 대가 들어서는 걸 발견하고는 곧장 발길을 옮겼다.

일부러 실수인 척 매장으로 올라서는 그녀에게 부딪쳤다. 그리고 소싯적 장난삼아 하나 배운 기술도 써먹었다.

메모지를 그녀의 핸드백이 넣은 뒤, 근처 카페에서 기다렸다.

오려나?

오겠지.

자신의 과거 이름을 아는 것부터가 증거이니까. 분명 올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한 시간 뒤, 식은땀까지 흘리며 그녀가 레이첼의 앞으로 와 섰다.

그녀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의심 가득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레이첼은 그제야 쓰고 있던 가발과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녀를 꼭 닮은 금발과 연두색 눈동자가 드러나고서야 그녀는 비틀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데리러 온다면서요. ……결국 내가 오게 만드네요.”

“레이첼……. 정말로…… 너구나.”

마치, 보고 싶었다는 듯이 바라보는 그녀가 우습다. 지금까지는 완전히 잊고 살았던 주제에.

“됐고. 돈이나 좀 줘요.”

“뭐?”

“생활비가 부족하거든요.”

그녀는 빠르게 핸드백을 열어 무언가를 꺼내어 내밀었다. 카드였다.

“장난해요? 현금으로 줘야죠.”

목소리가 좀 큰 건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본다. 그녀는 그제야 지갑 안에서 지폐를 꺼내 건네주었다.

“지갑 마음에 드네요.”

“사줄까?”

대답 대신 그녀가 쥐고 있는 지갑을 뺏었다. 지갑 안에서 필요 없는 것들을 죄다 빼고는 받은 현금을 다시 넣었다. 그리고 그녀의 핸드백까지 뺏어 쥐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명함으로 연락하면 되죠?”

“……그래.”

“나중에 연락할게요. 그리고…….”

귀에다 대고 작게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요. 엄마.”

그녀의 얼굴이 허옇게 질리는 걸 보니 조금 후련했다. 아니, 많이.

첫눈에 반했다.

신문에 나오는 기사나, TV는 그의 매력을 반감시킨다는 걸 처음 알았다.

연락을 해도 받지 않는 그녀를 찾으러 회사까지 찾아갔다. 일부러 햄턴 사 앞이라 문자를 보냈으니 빠른 시간에 찾아올 것이다.

그렇게 회사 일 층의 커피숍에 앉아 시간을 때우고 있을 때, 여러 명의 남자들이 지나가는 모습에 별생각 없이 보다, 그를 마주했다.

에드워드 햄턴.

너무나도 아름다운 남자. 제라드 햄턴은 에드워드의 옆에 서면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보는 순간 가지고 싶어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햄턴이란 성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너 미친 거니? 여기가 어디라고 온 거야?”

“가죠.”

헐레벌떡 카페로 들어온 레베카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일어섰다. 조용히 그녀의 차로 가, 뒷좌석에 올라탔다. 나와 만나기 때문인지 기사 없이 스스로 운전을 해서 왔나 보다. 운전석에 앉는 레베카를 바라보다 그녀가 차 문을 닫자마자 물었다.

“나한테 미안하죠?”

“……그래.”

“그럼 가지고 싶은 게 생겼으니 들어줘요.”

“뭐? 그게 뭔데?”

“어쩜 당신에게도 도움이 될 거예요. 당신은 당신이 가지고 싶은 걸 가지고 난 그 남자 하나면 되니까.”

“너 설마?”

역시 생각하는 게 비슷한가 보다. 단숨에 알아들은 레베카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돌아보았다.

“왜요? 당신도 했는데, 내가 못 할 게 뭐가 있어?”

“레이첼.”

“그 전에 할 게 있어요. 당신 딸답게 나 역시도 꽤 신중하거든요.”

생긋 웃는 자신에게 레베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 즐거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생각하자 벌써부터 찌릿해지는 기분이었다.

예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오메가 호르몬 수치를 높여주는 약. 그리고 역시, 레베카는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부탁하자, 거절부터 했다.

“넌 방금 수술을 끝냈어. 아직 붕대도 안 풀었는데 그런 약을 먹으면 위험해. 조금 더 나아지거든…….”

마치 자신을 걱정하는 듯한 말에 레이첼은 노골적으로 키득키득 웃었다.

“내 몸이 걱정되면, 그때 날 데리고 갔어야죠.”

그 작은 손으로 어미의 옷가지를 잡았을 때, 뿌리치는 게 아닌 안아 들었어야 했다.

“믿지 못하겠지만……. 안정이 되면 널 데리러 갈 생각이었어.”

“안정이란 기준을 모르겠네요. 솔직히……, 그 어린 나이의 꼬마라면 그 어떤 것보다 엄마의 품이 더 필요한 게 아닌가?”

“……레이첼.”

“날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앞으로 날 제시카라고 부르라니까요. 괜히 비싼 돈 주고 성형을 하고, 신분까지 바꾼 게 아니잖아요.”

레베카 너머 거울 속에 자신이 비쳤다. 아직 붕대로 칭칭 감겨 있지만, 다 낫고 나면 괜찮을 것이다.

“의사가 그러던데……. 너 수술 몇 개나 더 예약했다고 사실이니?”

“난 누구처럼 허점투성이가 아니거든요. 걱정 마세요. 그냥 단순히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니까.”

그래, 몇 년이 걸리든 완벽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에드워드의 어머니와 비슷한 외모로 바꾼 거니까.

제시카 로웰이란 완벽한 이상형으로 거듭난 뒤, 에드워드의 앞에 설 것이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고지가 눈앞이었다. 하지만 결국 모든 건 순간의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꿈은커녕 당장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빠져버린 것이다.

“제길……! 제기랄!”

분노가 다시금 들끓었다. 이 화를 어떻게 꺼뜨려야 할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진짜 문제는 어제 자신을 몰래 돕던 갱 놈이 연락이 와 손을 떼겠다 말한 거였다.

이유가 더 황당하다.

무려 프로 용병들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말에 제시카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결국 에드워드는 자신을 완전히 버린 거였다.

이제 잡히는 건 시간문제다.

양손으로 머리를 미친 듯이 긁어 재끼다, 이어 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한참을 미친년처럼 울고 웃다, 드디어 진정이 됐을 때, 제시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왜……. 왜 그래?”

권총이 잘 있는지 확인하는 모습에 잔뜩 겁먹은 비키가 덜덜 떨며 경계한다. 제시카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도 하지 않은 채 그런 비키를 응시하다 싱긋 웃었다.

“네 거 좀 빌리자.”

“뭐?”

“네 가발, 네 선글라스, 네 옷. 빌리자고. 그러고 보니 그 가방, 내가 쓰던 거네?”

베타인 게 들통난 후, 이곳에서 쫓겨났을 때 제시카는 자신의 짐을 하나도 챙기지 못했다. 손님들 중 그녀를 좋아하는 단골들에게 비싼 명품 선물을 꽤나 받았다. 그런 것들이 죄다 비키에게 갔나 보다.

“그, 그……. 도, 돌려주려고 했어! 진짜야!”

“그래. 그러니까 돌려줘.”

그래. 내 것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됐었을 내 것이었다. 그러니 다시 되찾아야지. 혹시라도 되찾지 못한다면…….

제시카는 얌전히 화장대로 가 앉았다.

머리카락도 엉망이고 얼굴도 엉망이다. 하지만 거울 속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래. 아직 괜찮아.”

아직은 완전히 끝난 게 아니야. 제시카는 환하게 미소 지었고, 그 모습에 비키는 더욱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빈둥대며 놀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에드워드는 출근과 동시에 바빠졌다. 오히려 제라드가 일찍 오는 일이 많아졌다. 제라드는 원래의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이라며 기뻐했지만 준영은 영 미안할 뿐이었다.

무엇보다 늘 잘 가던 시간이 너무 지루하게 느껴졌다.

에드워드가 준 책도 다 봤다. 너무 취향이라 몇 번이고 봤지만, 다른 건 선뜻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새삼 자신의 취향이 확고하구나 하고 웃었다.

“뭐 해요?”

에드워드의 방에서 나서다 막 올라오던 크리스와 마주했다.

“책을 고르려고요.”

“그런 거라면 서재 쪽으로 가요. 거기가 준영이 볼만한 책이 더 많을 거예요. 에드워드 씨 방의 책은 너무 전문서적이라…….”

크리스의 말대로, 에드워드가 추천해 준 것 외에는 너무 어려웠다. 일단 첫 페이지부터 막힌 게 대다수다.

“지루해요?”

“네. 조금. 뭔가 하고 싶은데, 에드워드가 절대로 못 하게 해서요.”

집안일이라도 조금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던 걸 어떻게 안 건지, 출근 전 에드워드가 엄포를 놓는 바람에 시도도 못 하고 있었다. 준영이 오기를 부리면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그 화가 애꿎은 고용인들에게 갈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흠……. 그럼 준영. 나 좀 도와줄래요?”

“네?”

“크게 어려운 건 아니에요. 그리고 준영이 정상 체중으로 돌아오면 애초에 시키려고 했던 거구요.”

도대체 뭐길래?

영문을 몰라 하는 준영에게 따라오라며 크리스가 앞서간 곳은 바로 그의 집무실이었다.

집사의 집무실은 처음 와봤다. 말 그대로 이곳이 집무실이구나 싶을 정도로 딱딱한 분위기지만, 중간중간 액자가 그 분위기를 많이 누그러뜨렸다.

“이건…….”

“내 동생들이에요. 철부지들이죠.”

“귀여워라. 여동생들이 하나같이 귀여워요.”

“아하하하.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저기 가운데 녀석은 남자예요. 오메가이긴 하지만.”

“아…….”

“어릴 땐 절대로 알파가 아니면 베타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바뀌더라구요.”

“예뻐요. 뭔가 사랑스러운 느낌이에요.”

전형적인 오메가 같은 분위기다. 작고 부드러운 느낌. 특히나 미소가 앙증맞다. 무표정에 고목 나무같이 마른 자신과는 너무 대조적인 느낌이라 왠지 웃프기도 했다.

“고마워요. 본인도 기뻐할 거에요. 자. 이거.”

“이게 뭐예요.”

액자를 들여다보다 크리스의 말에 다시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크리스가 내민 서류를 받아 이리저리 뒤척였다.

“이건?”

“네. 이 햄턴 가의 지출 내역서입니다.”

“이걸 왜 저한테…….”

“무슨 말입니까? 지출 내역서는 물론, 앞으로 햄턴 가에 들어오는 수입도 죄다 관리를 하셔야지요.”

“제가 그걸 왜…….”

당황하는 준영에게 크리스가 오히려 더 이상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니, 그럼 남편 월급 관리를 언제까지 다른 사람에게 맡길 생각입니까? 당연히 준영이 관리를 하셔야지요. 어려울 거 없습니다. 제가 기본적인 지출 목록을 정리해서 올리면, 준영이 필요한 만큼 돈을 주거나, 사인을 해 주면 되는 간단한 일입니다.”

절대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준영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지만 크리스는 단호했다.

“하십시오. 아무리 사고로 맺어진 사이라고 해도, 이미 부부가 된 몸. 심지어 지금은 서로 사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당한 부부란 소리입니다. 그럼 배우자로서 가져야 할 특권은 물론, 행해야 할 의무도 하셔야지요. 잊지 마세요. 준영. 이제 이 햄턴 가의 가장 큰 안주인은 바로 준영 햄턴입니다.”

어렴풋이 알고 있던 사실을 크리스는 너무나도 확고하게 지적을 했고, 준영은 일언의 대꾸도 하지 못했다.

준영이 보이지 않아 잠들었나 했다. 하지만 막 이 층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 헐레벌떡 뛰어오는 준영과 마주쳤다.

“위험해!”

에드워드를 보고 마음을 놓는 순간 준영이 그만 발을 잘못 디뎌 휘청 앞으로 기울었다. 에드워드는 양손을 뻗으며 빠르게 달려갔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준영이 스스로 자세를 바로 했다.

“아……. 저기…….”

졸지에 허공에 양손을 뻗은 자세가 된 에드워드는 잠시 눈을 내리깔다 똑바로 준영을 바라보았다.

“준영.”

“미안해요. 마중 가고 싶었는데 놓쳐서, 급하게 오다가…….”

어떻게 화를 낼 수 있을까. 풀죽은 초식동물을 잠시 바라보다 에드워드는 빠르게 다가가 준영을 앞으로 안아 들었다.

“다음에는 맴매를 해 버릴 거야.”

“……? 네?”

조금 늦게 말뜻을 알아들은 준영의 얼굴이 보란 듯이 붉어졌다. 에드워드의 뒤에서 고용인들의 웃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비웃기보단, 사이좋은 부부 내외의 모습에 덩달아 웃은 거란 걸 알아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햄턴 가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기존에 있던 고용인들을 대부분 내보내고 새로 바꾸었다. 인사 결정권은 크리스에게 쥐여 주었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물갈이를 한다 싶더니, 몇 달 만에 새로운 햄턴 가가 되었고 에드워드도 꽤 만족하는 중이다.

안팎으로 햄턴 가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그 원인이 된 당사자인 준영은 전혀 모르고 있지만.

“뭘 그렇게 열심히 했길래, 헐레벌떡 온 거였어?”

“그……. 크리스가 숙제를 내줬어요.”

“크리스가?”

영문을 몰라 고개를 돌리자, 크리스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자신의 방으로 먼저 가려다, 크리스에게 가방을 부탁한 후 곧장 준영의 방으로 들어섰다.

살짝 열린 창문 너머 차가운 바람이 솔솔 들어오고 있어 미간을 찌푸렸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아직 3월이야. 지금은 저녁이고.”

“하지만 너무 더운걸요. ……에드워드. 제발 난방 좀 낮춰요. 여기 고용인들은 반팔을 입고 일한다니까요? 이건 전력 낭비예요.”

“응?”

예상치 못한 반박에 당황했다. 준영은 빠르게 에드워드의 품에서 내려와 쪼르륵 어딘가로 달려가더니, 서류로 보이는 바인드를 가져와 그의 앞에 펼쳐 들었다.

“봐요. 저번 달 난방비가 작년 대비 30%나 더 나갔다고요.”

“그건 특별한 경우라서…….”

“옷을 더 입으면 돼요. 그리고 에드워드도 제이크에게 들었잖아요. 이렇게 더우면 감기에 더 잘 걸린다고.”

“그거야 온도 차이가 심할 때 얘기고 준영은 집에만 있는데…….”

아차.

뒤늦게 말실수를 깨달았지만, 준영의 굳어진 표정은 풀릴 줄을 몰랐다.

“내 말은 준영이 집에만 있다고 비꼬는 게 아니라, 지금은 몸이 성치 않으니까 그렇게 말한 거야.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니야.”

“아니요. 에드워드 말이 맞아요. 어차피 몸이 좋아져도 난 집에만 있을 건데……. 괜찮아요.”

언제 화났냐는 듯이 축 처지는 준영의 모습에 에드워드는 크게 당황했다. 아니라고, 그런 뜻이 아니라고 계속해서 설명을 해도 이미 서운한 마음은 어찌 되는 게 아닌가 보다.

몸을 돌린 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준영에게 미안하고도 안타까워 풀어주려 노력하다 보니 헛말이 튀어나왔다.

“그래, 이참에 외출이라도 하는 건 어때?”

“정말로요?”

“그, ……그래.”

아직은 위험해서 안 돼, 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도저히 실수라고 하지 못해 긍정을 하자, 준영은 정말로 뛸 듯이 기뻐했다. 당장이라도 외투만 하나 걸치고 나갈 기세다. 이런 준영에게,

사실은 안 돼. 아직은 제시카를 잡지 못한 상황이라서 위험할 수도 있어.

라는 말을 어찌 하겠는가.

실제로 준영은 제시카가 잡히지 않은 것도 모르고 있는데 말이다.

“단, 경호원들과 함께.”

“경호원들과요?”

“그럼? 햄턴 가의 아내가 혼자 돌아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에드워드의 대답에 준영이 혼란스러운 듯 두 눈을 굴렸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늘 있었어. 준영이 몰라서 그렇지.”

“진짜요?”

“처음부터. ……준영이 내 성을 다는 순간부터 경호원은 늘 있었어.”

전혀 몰랐나 보다. 준영은 뜻 모를 표정으로 뭔가 생각하는 듯하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요. 그럴게요.”

“시계도 꼭 차고 가고.”

에드워드의 이어지는 말에 준영은 이번에는 자신의 손목을 보았다. 말끔하게 고친 시계가 가는 손목에 둘려 있었다. 시계 디자인 자체가 가는 편인데도 준영의 손목이 더 애처로워 보일 정도다.

“이 시계에 혹시…….”

“그래. 위치 추적기가 내장되어 있어. 그 외에 준영이 가지고 다니는 물건에도. 무슨 뜻인지 알겠지?”

“나 위험해요?”

“햄턴 이라는 성이 그래. 도처에 적이지. 준영은 적들에게 정말 맛있는 먹잇감이고. 그러니 부디 내가 마음이 놓일 수 있게 싫더라도 해 주길 바라.”

준영의 내밀어진 손을 양손으로 잡아당겨 조심스레 손등에 입을 맞췄다. 준영의 얼굴이 다시금 보란 듯이 붉어진다.

“응. 그럴게요. 그래야 에드워드 마음이 놓인다면 그렇게 할게요.”

충분히 싫을 수도 있을 텐데, 준영은 별다른 거부 없이 납득을 해주었다. 그조차도 착하고 성실하다 싶었다. 더는 견디지 못하고 잡은 준영의 손을 당겨 품 안에 그를 가두었다.

제이크의 말이 맞나 보다. 준영은 건강을 되찾아 가는 것과 비례하게 호르몬 수치도 높아졌다.

즉, 그의 달콤한 향이 더 많이 뿜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불안하다.

설령 경호원을 열댓 명을 붙인다고 해도 불안했다. 제시카의 문제가 아니었다.

준영의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지, 모든 이들이 다 알아버릴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에드워드를 자꾸 두렵게 만들었다.

“에디?”

부드럽고 앙증맞은 목소리가 다시금 심장을 애타게 만든다.

“아니야. 그냥 잠시만 이렇게 있어 줘.”

영문 모를 불안감이 행여나 얼굴로 나타날까. 에드워드는 준영을 끌어안은 채 한참 동안 그의 머리와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드디어 감정이 갈무리되어 자세를 바로 하자, 감정 변화에 예민한 준영답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올려다본다.

“내가 나가는 게 그렇게 걱정되면 안 가도 돼요.”

“아니야. 내가 너무 겁이 많아서 그래. 예쁜 내 마누라 누가 잡아갈까 봐.”

“그게 뭐야. ……에드워드 아니면 그렇게 보지도 않아요.”

“우리 준영이 얼마나 예쁜데. 지금은 비록 아파서 살이 좀 빠지고 너무 약해 보여서 그렇지만 잘 먹고 잘 자면, 그래 지금처럼만 하면 누구나 돌아볼 만큼 예뻐질 거야.”

“바보. 그럴 리가요. 난 제시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문다. 금기어 같은 단어다. 에드워드가 준영을 생각해 침묵했던 만큼 그도 마찬가지였나보다.

“미안해요. ……그냥 내가 아는 오메가가 그 사람밖에 없어서.”

“왜 미안하다는 거지?”

자세히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다.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알듯 말듯 수위를 넘나들었다.

에드워드의 질문에 준영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제시카가 그런 짓을 한 건 분명 나쁘지만 그래도 에드워드의 마음은…….”

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아 준영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은 뒤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잘 들어. 준영. 나에게 그녀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다면 하나뿐이야. ……증오.”

“네?”

“냉정하다 욕해도 어쩔 수 없어. 이제 나에게 제시카는 그저 증오스러운 존재일 뿐이야.”

혼란스러운지 준영의 두 눈이 흔들렸다.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게 확실했다. 에드워드는 더는 준영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걸 미뤄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준영을 데려와 침대에 앉히고는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준영의 손을 잡고 그 위에 또다시 자신의 손바닥으로 덮은 후, 조금은 길어질 수 있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준영은 긴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인터폴에 협조요청을 해서 찾고 있는 중이야.”

“그럼 제 아이가 죽은 것도……, 제시카가 중간에서…….”

“그래. 셀린느를 교묘하게 이용한 거라 하더군. 알파들 중에서도 열성 알파를 위한 약이 있어. 호르몬 조절을 위해 만들어진 약인데……. 그걸 셀린느에게 몰래 먹였고, 셀린느는 자신의 호르몬이 극대화된 걸 전혀 모른 상태로 너에게 페로몬을 퍼부었지. 물론, 아무리 몰랐다고 해도 임산부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한 것부터가 잘못이야. 거기에 대해서는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어.”

“……그랬구나.”

조금 힘없이 대답한 준영은 잠시 말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를 듣고 시간이 흐르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제시카는 왜 그랬을까요.”

“궁금하지 않아.”

“…….”

“내가 냉정해 보여?”

한때 사랑한다 말했던 여성을 대하는 태도가 손바닥 뒤집히듯 바뀌니 혼란스러울 것이다. 준영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다.

“날 위해 화내 줘서 고마워요.”

“아니. 날 위해서야. 나의 준영을 아프게 만든 것에 대해서야.”

에드워드의 대답에 준영은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쌌다.

“응. 알아요.”

검은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못나 보였다. 준영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문득 드는 생각에 허탈하게 웃고는 그를 다시 당겨 품 안에 가두었다.

“많이 혼란스러운 걸 알아. 하지만 명심해. 어떤 이유에서든 죄를 지은 것에 대한 변명은 될 수 없어. 그러니 제시카를 동정하지 마.”

“네.”

어쩜 착한 준영은 자신의 존재가 모든 걸 뒤틀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거다.

그래서 안타까웠다. 타인의 악조차, 감싸려고 하는 그 성실함이 안쓰러웠다.

“에디. 난 괜찮아요. 걱정 말아요.”

부드럽게 웃으며 오히려 에드워드를 위로하는 준영에게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그의 곁에 있어 주는 것.

그래서 미안하다. 그의 아픔을 덜어주지 못해서.

기회는 이때다 하고 외출 허가를 받으려 일부러 삐진 척을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에드워드의 설명에 금방 후회했다.

에드워드는 괜찮다고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감정이 쉽게 바뀌겠는가.

하물며 자신도 잭이 그런 상황인 게 마음이 쓰이는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형량을 줄일 수 있게 무언가 다른 행동을 할 생각은 없다. 그래도 할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무겁기는 했다.

하물며 에드워드는 어떨까.

몇 년을 사귀었던 연인이 애초에 작정하고 모든 걸 속이고 다가온 사람이란 걸 알았다면.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할 것이다.

자신이 겪은 일이 아니라 확실하게 이렇다 할 수는 없지만, 분명 편한 기분은 아닐 거다.

“후우…….”

“12번째입니다.”

“네?”

“한숨요.”

무슨 소린가 하고 크리스를 보았다가, 그의 지적에 무안함에 하하 웃었다.

지금 준영은 어제 받은 서류를 다시 한번 검토하는 중이었다. 중간중간 모르는 게 있어 메시지로 크리스에게 물었더니, 아예 차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현재 준영의 소파에서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어제 분위기도 좋아 보이던데 왜 갑자기 한숨입니까? 외출 허락도 받았다면서요.”

“외출 허락받은 건 어떻게 알아요?”

“에드워드 씨가 직접 저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외출을 하게 되면 가급적 동행해 달라고.”

“크리스에게까지 부탁했어요?”

“난리입니다. 제라드 말로는 경호팀장도 달달 볶는다고 하던데요?”

“경호팀장은 왜요?”

“여자 경호원들 뽑아라. 준영 담당은 베타로 싹 갈아라 등등……. 제라드 말로는 요즘 들어 준영의 향이 강해졌다고 하던데 그게 이유가 아닐까 싶네요.”

크리스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하고는 차를 호록 마셨다. 반대로 준영은 그런 크리스를 멍하니 바라보다, 이어 양손으로 얼굴을 가려야 했다.

왠지 모르게 너무 부끄러웠다.

“당연한 겁니다. 원래 경호원들 중에는 알파가 많지요. 신체 특성상 알파가 육체적으로 뛰어난 건 아시죠?”

“네……. 그건 알아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등급이 높은 경호원들은 대부분 알파고, 이 햄턴 가에 있는 경호원들도 역시나 알파가 더 많습니다.”

“오메가 상대로 베타 경호원을 들이는 게 일반적인 건가요?”

“딱히 그렇지는 않아요. 물론 무조건 알파로만 짜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베타만 배치하는 경우도 드물죠. 대부분 오메가들은 약으로 관리를 잘 하니까요. 다만 에드워드가 걱정하는 건 지금 준영이 특별한 케이스라 그래요.”

“특별한 케이스요?”

“저도 닥터 존슨에게 대충 들었지만……. 준영은 지금 시한폭탄과도 같은 상태예요.”

“시한폭탄요?”

제법 과격한 표현에 눈을 굴리며 되물었지만 크리스는 미안해하기는커녕 당당히 준영을 응시했다.

“네. 시한폭탄. 애초에 호르몬 분비가 약했는데, 충격으로 히트가 왔었죠. 이미 그런 전적이 있는데, 심지어 저번에는 강력한 호르몬 촉진제까지 맞은 상태죠. ……언제 히트가 강제로 발동할지 모른다는 거죠.”

전혀 생각 못 했다. 그저 단순한 이유로 에드워드가 외출을 못 하게 하는 거라 생각했었다.

심지어 어제 제시카에 대한 말을 할 때도 이 이유는 꺼내지 않았다.

“아마 에드워드 씨가 말하지 않은 건 준영이 그것 때문에 못 나간다고 생각할까 봐……, 가 아닐까요.”

“…….”

“표정을 보니 맞나 보네요. 그러지 마세요. 내가 말을 해 준 건, 에드워드 씨와는 반대 입장이라서입니다. 제 동생이 오메가라는 건 말했죠?”

“네.”

“그 애도 성격이 뭐랄까 굉장히 예민하달까? 그래서인지 히트 사이클이 규칙적이지 않더라구요. 그것 때문에 부모님은 걱정이 심해서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대며 동생을 못 나가게 만들었지만, 난 그게 싫었어요. 억제제도 있고, 무엇보다 자신이 자신의 상태를 잘 아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죠. 나가고 안 나가고는 그 후 본인이 선택할 문제니까요. 참고로 제 동생은 뻔질나게 나다니다가, 요즘은 마음 맞는 베타와 잘 지내는 중입니다.”

“베타요?”

“네. ……오메가는 알파와 꼭 맺어져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예전에는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 때문에 싫어도 알파와 맺어져야 했지만 요즘은 아까도 말했다시피 약이 잘 나오잖아요. 무엇보다 둘 다 서로 좋아 죽으니, 반대할 이유가 없죠.”

크리스의 말에 준영도 동감의 의미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틸다의 언니는 짝을, 크리스의 동생은 베타를 만나고 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는 거였다. 에드워드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언감생심 알파를 만날 수는 없을 테고 평생 혼자 살겠구나 했었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를 알 것 같아, 다시금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자기 상태 잘 알고, 억제제 잘 챙기고, 얌전히 저와 같이 데이트하고 온다 생각하면 됩니다.”

“아하하하. 그런가요?”

“에드워드에게 얼마나 잘 놀았는지 사진으로 찍어 실시간으로 보여 주도록 해요.”

“아하하하. 네, 그래요. 하하하.”

크리스의 말이 맞았다. 자신이 자신답게 지내는 거. 어쩜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역시나 그 사진을 보내자는 말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꼭 실행해야지 하고 다짐하며 준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영?”

“가요. 데이트.”

의기소침해 있다면 분명 에드워드도 걱정할 것이다. 준영의 요구에 크리스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들여다보고 있던 서류 바인더를 덮었다.

협상체결이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역시나 할머니의 집이었다.

퇴원 후 계속해서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생각을 굳혔다.

“필요한 게 있으세요?”

“마지막으로 한번 둘러봤어요.”

준영의 대답에 크리스가 영문을 몰라 하며 되물었다. 준영은 대답 대신 생긋 웃어준 뒤 챙겨온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 날 마지막으로 집을 나올 때와 똑같았다. 먼저 주방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어보았다. 다행히 냉장고 안은 깨끗이 비어 있었다. 그래도 전기는 들어오는지, 냉기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일단 전기 코드부터 뺐다.

“준영 혹시…….”

“네.”

준영의 행동에 뭔가 눈치를 챘나 보다. 크리스는 긴가민가한 투로 물었다가, 준영의 깔끔한 인정에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는 싱크대 쪽으로 가 문을 열었다. 그릇은 모두 준영이 잠시 햄턴 가를 나오면서 새로 장만한 것들이었다.

모든 물건들이 다 그렇다. 옆집 아주머니가 혹시나 하고 챙겨 준 할머니의 사진과 액자 정도만이 추억의 물건 전부였다.

심지어 벽지도 바닥도 달랐다. 집이 팔리면서 새로 들어온 집주인이 리모델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억지를 부려 이곳에 왔었다. 이곳 말고는 갈 곳이 없었기에.

준영은 찬찬히 주변을 훑어보다 이 층으로 올라갔다.

웃긴 건, 할머니와의 추억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추억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거였다.

“절대 이곳을 못 팔 거라고 생각했어요.”

“…….”

“하지만 에드워드와 함께 지내면서 깨달았어요. 이곳에 남은 게 그저 미련일 뿐이라는 걸.”

며칠 전 에드워드가 한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햄턴 가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 이유를 말하며, 언젠가 이곳을 정리할 거라고 했었다. 그러지 말라 했지만, 이어지는 에드워드의 말에 준영은 조금 충격까지 받은 기분이었다.

‘어머니의 손길이 하나라도 닿은 물건을 모으고 지키면서 미처 깨닫지 못했어. 어머니는 처음부터 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내가 준 이 책도 준영이 만지는 순간, 이제 나만의 추억이 아니겠지. 이곳에서 준영과 함께 지내다 보면 분명 나만의 추억이 아닌 게 될 거야.’

‘그런. 그럼 이 책이 아니라도…….’

‘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부디 이 책으로 읽어줘. ……준영, 난 이번에 깨달은 거야. ……추억을 추억으로 간직하는 법을 배워버렸다고 해야 할까. 준영과 함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하고, 어머니의 물건을 함께 쓰고……. 그리고 어머니의 추억을 간직한 채 새로운 곳으로 간다면 그곳 역시도 어머니와의 추억이 머무는 거라고 생각해. 나와 너 사이에서.’

‘에드워드…….’

‘물론 바로는 못 해. 아직 숨 쉬고 있는 햄턴 가의 늙은이들이 들고일어나겠지. 그러니…… 천천히 준비를 할 거야. 그전에 너와 내가 다른 곳에서 생활해도 될 거고. 나와 함께 가 줄 거지?’

‘응. 그럴게요.’

밑도 끝도 없이 생긋이 웃자 크리스가 의아하게 바라본다.

“준영?”

“결심했거든요. 이곳엔 이미 할머니가 계시지 않아요. 이곳에 얽매이지 않아도 내가 충분히 할머니를 추억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오히려 아쉬운 건, 에드워드와 크리스와 제라드와 함께 어울렸던 즐거운 추억의 장소가 사라진다는 거지만……. 어디든 함께면 다시 추억할 수 있으니까요.”

준영의 대답에 크리스가 기특하다는 듯 미소를 한껏 지었다. 나이는 크게 차이가 안 나는데도 크리스는 늘 이렇게 준영을 어린아이 대하듯 한다. 엄밀히 말하면 결혼도 하고 비록 출산을 못 했더라도 임신을 했던 자신이 더 어른이라면 어른인데.

“그 전에 한 번 둘러보는 거예요. 혹시 챙길 게 있나 하고.”

“네. 잘했어요. 그럼 팔기 전에 여기서 파티 한 번 해요.”

“파티요?”

“네. 이곳에 이웃 주민들도 불러서. 그분들에게도 감사를 표하고 싶은 거죠?”

크리스의 말에 준영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영은 혹시나 더 챙길 게 있나 하고 두리번거리다, 침대 위 이불 안에 삐죽 나와 있는 네이비 색 천을 보고는 다가가 집었다.

“에드워드 씨 거 아닌가요?”

“……맞아요.”

언젠가 에드워드가 준영에게 씌워주었던 그 머플러였다. 크리스가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다 곧 이해했는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게 왜 침대 위에……. 아.”

“말하지 말아요.”

에드워드의 냄새가 가득 묻어있어, 몰래 끌어안고 잤다는 건 절대 비밀이다. 준영의 부탁에 크리스는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지만 영 믿지를 못하겠다.

“절대 말하면……. 어, 전화.”

“잠시만요.”

크리스는 다급히 몸을 돌리며 전화를 받았다. 힐끔힐끔 준영을 보는 폼이 아무래도 들으면 곤란하구나 싶어 발길을 돌려 침실을 나섰다.

이번에는 할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에드워드에게 쓰라고 내준 방이지만, 처음 이틀 정도 말고는 주야장천 준영의 방에서 머물러 의미가 없어진 곳이었다.

방도 무미건조하게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의 물건도 죄다 가지고 간 건지 옷장 안도 텅텅 비어 있었다.

찬찬히 둘러보다 다시 방을 나왔다. 크리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언성이 조금 높아지는 게 아무래도 싸우나 보다.

“난 그날 일에 대해 아무런 할 말 없어. ……그만해. 잊자고 했잖아. 제발. 그저 단순한 사고일 뿐이야. 그냥 교통사고 같은 거야.”

무슨 일일까. 혹시 연인?

의문을 느끼며 귀를 기울였지만, 눈치챈 건지 크리스가 윙크를 하더니 그대로 침실 문을 닫아 버렸다.

무안함에 흠흠 헛기침을 하며 발길을 돌렸다.

날도 추운데, 경호원들 들어오라 해서 커피나 타줘야겠다 생각하며 일 층으로 내려가다 심각한 오류를 깨달았다.

“아……. 커피가 없지. 참.”

일단 커피부터 얻자. 준영은 옆집 아주머니가 있기를 바라며 집 밖으로 나섰다. 막 문을 닫기 전 크리스의 욕설 섞인 외침에 움찔 당황했다.

“제기랄!”

왠지 못 들은 척하는 게 낫다 싶어 준영은 최대한 조용히 집을 빠져나왔다.

* ♟ *

옆집 아주머니와 반가움에 잠시 수다를 떨다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이미 거실로 내려와 있던 크리스가 문 열리는 소리를 들어서인지 소파에 앉아 있다 고개를 돌렸다.

표정이 좋지 않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지만 크리스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는데 아는 척하기가 걸려 모르는 척 넘겼다.

“커피 얻으러 갔었어요.”

“커피 가급적 안 마시는 게…….”

“나 말고 크리스랑 경호원들요. 추운데 고생하시잖아요.”

준영의 대답에 크리스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 경호 중에는 가급적 먹지 않는 게 보통이죠.”

“아……. 그럼 내가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걸까요?”

“고용주가 주는 거니 크게 상관없을 겁니다. 내가 데리러 갔다 올게요.”

안 된다 할 줄 알았는데 다행히 크리스는 별로 반대하지 않고 곧장 밖으로 나섰다. 준영은 닫힌 문을 잠시 보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핸드폰을 힐끔 보았다.

안돼. 안돼. 나쁜 짓이야.

호기심에 핸드폰으로 손을 뻗다, 아차 하고는 고개를 팍팍 저었다.

그리고는 후다닥 주방으로 향하였다. 커피도 커피지만 아주머니가 마셔보라던 밀크티를 맛보고 싶은 욕심에 서둘러 차를 우려낼 준비를 하였고 얼마 가지 않아 경호원들이 안으로 들어와 활짝 웃으며 그들을 반겼다.

“편히들 앉으세요.”

준영의 말에 경호원들은 조금 당황은 했지만 곧 미소로 답하며 소파로 가 앉았다. 크리스는 허둥지둥한 준영을 돕기 위해 다가왔다.

작은 집에 사람들이 복작거리니 나쁘지 않다. 새삼 새로운 추억을 하나 또 만드는구나 싶어 기분 좋게 미소지었다.

하루가 어찌나 금방 가는지. 특별한 것을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해가 저물고 있었다.

경호원들과 티 타임 후, 크리스가 갑자기 찻잔을 사고 싶다고 해 함께 백화점을 갔다.

진열된 그릇들을 고르다, 문득 에드워드와 함께 차를 마실 때 쓰면 좋겠다 싶은 디자인의 찻잔을 발견해 충동구매를 했다.

꽃 시장에 들러 정원에 키워보고 싶은 꽃과 텃밭을 만들어보자는 크리스의 의견을 수용, 야채 씨앗도 좀 샀다.

그리고 우연찮게 발견한 햇빛이 잘 드는 카페에서 크리스와 함께 차와 케이크를 먹었다. 그러다 준영이 옷들이 하나같이 커졌다고 푸념을 하자 크리스가 반강제로 준영을 데리고 아웃렛 쇼핑몰로 향했다.

자신의 몸이 너무 약해 여성복으로도 모자라, 주니어 사이즈가 맞을 것 같다는 직원의 말에 상심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크리스가 추천해 전체적으로 괜찮은 옷들을 몇 가지 샀다.

어느덧 해가 느릿느릿 저물고 있었다.

에드워드보다 더 일찍 도착하고 싶어, 저녁을 먹고 가자는 크리스의 제안을 거부하고 바로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몸에는 무리가 갔나 보다. 차 안에서 꾸벅꾸벅 졸아버렸다. 집에 도착해서, 에드워드가 오면 잘 거라고 애쓰며 견뎌보지만 결국 잠에 졌다.

어……? 나…….

멍하니 어두운 방 천장을 바라보다, 무게감에 고개를 돌렸다. 에드워드가 어느새 준영을 끌어안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도대체 언제 자신이 이곳으로 온 건지도 기억이 안 난다.

분명 차에서 졸았던 것 같은데 그다음은 기억이 없다. 고작 그거 좀 돌아다녔다고 이렇게 천근만근인 몸도 불만이다.

언제 체력이 돌아오려는지…….

트레이너를 붙여주겠다는 크리스의 말에 괜찮다 했던 게 후회되는 순간이다. 내일 크리스를 만나면 꼭 부탁해야겠다 다짐했다.

그나저나 옷은 갈아입어도 왠지 씻지 않은 느낌이다. 아마 자신이 깰까 봐 잠옷으로만 갈아입힌 것 같다.

씻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한없이 찝찝해지기 시작했다. 준영은 자신의 배를 감싸고 있는 에드워드의 팔을 잡아 아주 천천히 옆으로 옮기고는 그가 깰까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섰다.

아차.

침대 밑으로 발을 내리다, 실수로 에드워드의 팔을 손으로 눌렀다. 조용히 고개를 돌려 에드워드를 보았다. 미동도 없는 게 아직 깬 건 아닌가 보다.

휴…….

소리 없는 안도를 하며 속옷과 갈아입을 잠옷을 챙긴 후 욕실로 들어섰다.

옷을 벗고 샤워 부스 쪽으로 걸어가다, 문득 세면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퀭하니 마르다 못해 기아 난민 같다.

보고 있으니 가슴이 답답하다. 정말 열심히 노력을 하는데도 이상하게 살이 잘 찌지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게 살 찌는 거라고 하는 사람들이 부러울 지경이다.

이런 몸을 얼마 전에 사랑스럽다고 빨고 만졌던 에드워드의 심미안이 의심스럽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가지는 않았었다.

말 그대로 준영이 너무 안쓰러워 위로 차원에서 스킨십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봐도 혐오스러울 정도로 마른 몸이다. 욕정을 느끼는 게 더 이상한 일일 거다.

“자꾸 거울 보면서 한숨 쉬면 집 안에 거울 모두 치우라고 시킬 거야.”

“으악!”

정말로 놀랐다. 일단, 에드워드가 홀딱 벗고 들어와 놀랐다면 이어 자신도 홀딱 벗고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준영은 쥐고 있던 수건으로 아래를 가렸지만, 이내 자신의 몸을 떠올리고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퀭하게 드러난 갈비뼈를 가리는 게 먼저지 않을까 싶다.

“씻는 것 같아서 도와주려고 왔더니……. 이러고 땅 파고 있었던 거야?”

준영의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긴 다리로 성큼 걸어 다가온 에드워드가 냉큼 준영을 끌어안았다.

그가 안고서야, 자신의 몸이 싸늘하게 식은 걸 깨달았다.

“이럴 줄 알았어. 들어간 지 한참인데도 물소리가 안 난다 싶더니만.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에드워드는 잔소리를 퍼부으며 준영을 마주 안은 자세로 안아 들었다. 한 손으로 엉덩이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 등을 누르는, 마치 준영이 아기라도 되는 듯한 자세로 안아 들었다.

“에, 에디. 내려줘요.”

맞닿은 피부에서부터 열이 올라온다. 창피함에 바둥거려 보지만 에드워드는 가만히 있으라는 듯 짝 소리가 나도록 준영의 엉덩이를 때릴 뿐이다.

덕분에 얼굴에 열이 더 몰렸다.

에드워드는 곧장 부스로 가 샤워기부터 틀었다. 손바닥으로 물 온도를 체크한 후에야 준영에게 물줄기를 맞추었다.

“뜨거워…….”

“네 몸이 차가워서야. 이렇게 되도록 추운지도 모르다니.”

목소리가 어지간히 화난 듯했다. 조금 기가 죽은 준영이 말없이 에드워드의 목에 팔을 두른 채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화난 거 아니야.”

“응. 알아요.”

오히려 반대로 준영이 우울해한다고 생각하나 보다. 사실 우울한 건 맞다. 다른 이유지만.

“거울 보고 어떻게 하면 에드워드를 꼬실 수 있을까 연구한 게 아니라면 머릿속에서 지워버려.”

“큭큭.”

“난 진심이라고.”

너무 어이가 없어 소리 죽여 웃는데 또다시 엉덩이를 짝 소리가 나도록 때린다. 이번에는 물기가 있어 조금 더 아프다.

“아파요.”

“아프라고 때린 거야. 그러게 왜 그러고 있었어.”

“그냥 에디가 어떻게 하면 반할까 하고 연구했어요.”

딱히 둘러댈 말이 없어 반농담식으로 대답했다. 준영의 대답에 에드워드는 가만히 그의 등을 쓰다듬더니 이어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렸다.

“씻겨줄게.”

그러고는 별다른 말 없이 준영이 씻는 걸 도와줄 뿐이었다.

화르륵 열이 오른다. 샤워기 물이 뜨거워서 다행이다 싶었다. 창피함에 열이 오른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준영이 다 씻자마자 에드워드는 도망치듯 욕실을 나섰다.

준영은 그런 에드워드를 가만히 바라보다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원망은 하지 않는다. 미울 리가 없다. 그가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건 충분히 안다. 다만 그 의미가 연인으로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살이 찌고 다시 예전 몸을 찾으면 자신을 봐줄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히트 사이클이 돌았기에 자신을 안아준 것뿐이었다.

끝 모를 자괴감이 바닥을 치고 있을 때 다시 욕실 문이 열리며 에드워드가 안으로 들어섰다.

“에디……?”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왠지 화가 나 보이기도 했다. 자신 때문에 화가 난 건가 했지만 곧 빠르게 다가온 에드워드를 보는 순간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동공이 세워지고 벌려진 입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에드워드의 아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다.

가정학과 시간에 배웠던 러트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갑자기?

“준영. 이런, 내가 왜……?”

갑자기 찬물을 맞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더니 빠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세워졌던 동공이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설마 아까 도망치듯 나간 게 너무 흥분해서?

“미안. 내가 이성을 잃으면 안 되는데……. 지금 향이…….”

동공이 다시금 바뀌어갔다. 에드워드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물러섰다.

“러트 억제제가 내 방 서랍에……. 좀 가져다……. 제길.”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젓는 에드워드를 멍하니 바라보다 천천히 다가갔다.

놀라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그의 양팔을 양손으로 잡았다.

욕심이 났다.

자신으로 인해 발정한 이 우성 알파를 가지고 싶었다.

“맞지 않아도 돼요.”

“안 돼. 하아, 하아. 네가 다칠 수도……. 준영?”

에드워드를 강하게 밀쳤다. 방심하고 있어서인지, 몸이 정상이 아니라 그런 건지 싱거울 정도로 쉽게 밀려졌다.

“괜찮아요. 안아줘요.”

아까부터 아래가 저려 온다. 앞이 아닌 뒤였다. 욱신대는 부분이 아플 지경이다.

주룩 무언가가 엉덩이 사이로 흘러내렸다. 그와 동시에 에드워드의 눈동자가 완전히 바뀌었다.

준영을 밀친다 싶더니 이번에는 반대 자세가 되었다. 샤워기에서 계속해서 뜨거운 물이 흘러나와 바닥이 차갑지 않았다.

입술이 겹쳐진다.

키스라 말하기 무서울 정도로 잡아먹을 듯 헤집어졌다.

혀가 빨리고 물렸다. 너무 강해 아픔에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준영의 신음에 에드워드의 행동이 더욱 거칠어진다.

물줄기가 바닥을 치는 소리보다, 음란하게 이어지는 키스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기분이었다.

준영의 가슴과 배를 만지작거리던 에드워드의 손이 빠르게 밑으로 훑고 내려간다. 이어 엉덩이 사이에 큰 손을 넣어 부드럽게 쓸기 시작했다.

이미 단단해진 성기와 고환에 에드워드의 손길이 닿자, 부르르 근육이 멋대로 떨린다.

큰 손바닥으로 준영의 성기를 잡아 부드럽게 훑는다 싶더니 조금 더 밑으로 내려가 꽉 닫힌 작은 입구 부근을 맴돈다.

“준영…….”

짐승이 이러할까.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마치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것 같다. 축소된 동공과 마주해서일까 더 오싹하다.

마치 허락을 얻듯 다시금 애처로이 준영을 부른다. 하지만 대답도 하기 전, 구멍에서 울컥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제길……!”

그와 동시에 에드워드가 어지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남은 이성 한 조각마저 날아간 듯한 얼굴에 전율이 일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온몸에 열이 오른다. 벌어진 입 사이로 자꾸만 숨이 멋대로 흘러나온다.

깨달았다. 그때와 같다는 걸.

모든 이성을 다 불태우고, 육체적 욕망만 남았던 그 순간과 같다는 걸.

에드워드에 의해 다리가 벌려졌다. 그는 준영의 엉덩이에서 나온 액체를 손바닥으로 받아 기이한 형태로 바뀐 성기 위에 바르듯 훑었다.

그리고 커다란 흉기 같은 성기를 준영의 입구 위에 문질렀다.

하아…….

작은 날숨과 함께, 에드워드가 침입을 시도했다.

“하읏!”

굵은 선단이 제대로 풀리지 않은 입구를 무자비하게 벌리며 들어찼다. 오메가 특성상 아래가 젖어 찢어지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분명 아픔은 있었다.

고통에 온몸을 떨자, 에드워드의 입술이 겹쳐진다. 방금 전과는 달리 부드러운 키스가 이어졌다. 마치 위로하듯, 혀가 혀를 어루만진다.

달콤함에 젖어 낮게 신음하는 그때, 퍽 하고 단숨에 깊숙이 쑤셔 박는다.

준영의 등이 멋대로 허공에 떠오른다. 벌려진 입술 너머 신음도 흘러나오지 못했다.

커다란 불쏘시개가 자신의 배 속을 터트릴 것만 같은 두려움이 올라왔다.

“준영…….”

황홀함에 젖은 에드워드의 음성이, 마치 마약이라도 되듯 준영의 고통을 앗아가기 시작했다. 양팔을 벌리자, 기다렸다는 듯 준영의 겨드랑이를 잡아 그대로 들어 올렸다.

연결된 상태로 에드워드의 다리 위에 올라앉았다.

그사이 짓으깨진 내벽이 멋대로 꿈틀거린다. 틈 없이 맞물린 성기의 핏줄까지도 여실히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채 적응을 하기도 전, 에드워드가 준영의 허리를 잡고는 강하게 내리눌렀다.

더없이 깊숙한 곳까지 침범한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헐떡였다.

한 번, 두 번,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빠르게 짓누른다. 절로 살려달라는 말이 나올 정도지만 준영의 머릿속과 달리 육체는 더 원하듯 재촉을 할 뿐이다.

스스로 엉덩이를 흔들다, 허리를 틀다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에드워드의 입에서 거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자신으로 인해 흥분하고 이성을 놓은 에드워드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황홀했다.

“에드워드……. 더……, 더…….”

모자란다. 이걸로는 모자랐다. 그때처럼 자신을 몰아붙이기를 원한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안고 또 안아주기를 바랐다.

준영은 그렇게 겁도 없이 목줄 놓친 짐승을 유혹했다.

침을 삼킬 때마다 목이 아팠다. 제대로 감기가 왔다. 당연하겠지. 그냥도 아닌 욕실에서 젖은 채로 했는데. 멀쩡한 게 더 이상할 거다.

“준영. 아직 자나요?”

“콜록! 아뇨. 깼어요.”

말을 하는데 목이 찢어질 것 같았다. 콜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크리스가 빠르게 다가와 도왔다.

친절하지만 표정이 험악하다. 아직도 화났나 보다.

하긴 그 사달을 냈으니…….

4일 전, 뒤늦게 이 사태를 알게 된 크리스가 방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거의 시체처럼 널브러진 준영을 탐하던 에드워드를 발견한 크리스는 재빨리 챙겨온 억제제를 그에게 놓았다.

처음에는 반항하던 에드워드도, 약효가 돌자 드디어 사태를 깨달았다.

허옇게 질린 에드워드를 닦달해, 준영을 안아 들고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거의 꼬박 하루를 링거를 맞은 상태로 기절하듯 잠만 자다가 드디어 퇴원한 거였다.

그런데 그걸로 크리스가 화가 난 게 아니다. 바로 준영의 태도였다.

퇴근하고 돌아온 에드워드에게 잔소리를 쏘아붙이는 크리스에게 준영이 대들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침실을 나와, 자신이 알고 유혹한 거라고 혼내지 말라며 에드워드를 두둔했고, 그 날 이후 크리스는 저런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크리스……. 아직 화났어요?”

“아니요. 안 났습니다만?”

“……미안해요.”

“뭐가 미안합니까. 부부 사이 문제를 잘 알지도 못하고 오지랖을 부린 건 전데요.”

역시 아직 안 풀렸구나.

준영은 미안함에 크리스를 힐끔힐끔 보다 푹 고개를 숙였다.

“나한테 미안하면 열심히 약 먹고 밥 먹고, 얼른 나아요. 자, 모과차.”

크리스의 말에 얼른 고개를 들었다. 크리스는 여전히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를 준영에게 건네주고는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힐끔 눈치를 보다 향긋하게 올라오는 모과차를 한 모금 맛보았다. 맛도 맛이지만 뜨거운 게 들어가자 목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다.

“화났다기보다 삐졌다가 더 맞겠네요.”

“……크리스.”

“나도 모르게 준영을 내 동생처럼 생각했나 봅니다. 부부 사이의 일까지 내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절대 아닌데 그걸 알아도 뭐, 일단 나도 사람이라 바로는 서운함이 안 풀리네요.”

“나 크리스 동생하고 싶은데……. 안 돼요?”

행여나 이제는 남처럼 대할 거라는 말이 나올 것 같아 얼른 선수를 쳤다. 크리스는 물끄러미 준영을 바라보다 푹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면, 내 동생 녀석도 자기 애인과 관련되면 나한테 바락바락 대들더군요.”

만약 눈앞에 있으면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듯이 주먹까지 들어 올리는 모양새에 덩달아 준영도 긴장했다.

“이미 준영을 동생처럼 생각하고 있는가 봅니다. 그때와 감정이 비슷한 걸 보면 말이에요.”

“헤헤.”

“웃으라고 한 말 아닙니다만?”

“헤헤헤.”

“하아…….”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는 한숨 소리인데도 불구하고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정기 검진을 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병실이 지루해 휴게실로 향했다.

여러 가지 차가 준비되어있는 곳으로 가 마음에 드는 차를 하나 골라 따뜻한 물을 붓고 있을 때, 사라가 안으로 들어왔다.

“웬일로 혼자예요?”

“크리스는 병실에서 통화 중이에요.”

“아아. 경호원들……이 있구나. 여자 경호원이네요?”

“네.”

에드워드는 기어코 준영의 담당 경호원을 베타 여성들로 바꾸었다. 딱히 싫은 건 아니다. 익숙해지면 괜찮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여자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어렵다.

“차 드실래요?”

“아니요. 그보다 닥터 존슨이 지금 급한 환자가 응급으로 와서 조금 늦어질 것 같다고 하네요.”

“네. 알겠어요.”

“한숨 주무셔도 돼요. 제 느낌에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네요.”

“아하하. 네.”

에드워드에게 간단히 검사만 하는데 굳이 비싼 병실을 빌릴 필요가 뭐가 있냐고 아침에 투덜거렸던 게 생각이 나 허탈하게 웃었다. 설마하니 병실이 필요해질 줄이야.

준영은 방금 우린 차와 크리스에게 줄 커피를 들고 다시 병실로 향했다.

닫힌 문 너머 크리스의 목소리가 언뜻 들렸다. 아직 통화 중인가 보다. 차로 인해 손을 못 쓰는 준영을 대신해 경호원이 센스 있게 문을 열어주었다.

경호원의 도움을 받아 안으로 들어가자, 크리스가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끊으라 한 뒤 냉큼 꺼버렸다.

요즘 들어 종종 저런 통화를 많이 한다.

“미안해요. 신경 쓰이죠?”

“음……. 궁금하기는 하지만 크리스가 싫다면 굳이 말 안 해도 돼요.”

크리스 몫 커피를 내밀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크리스가 고맙다 대답하고는 이내 허탈하게 웃었다.

“준영은 첫눈에 반한다는 거 알겠네요?”

“……뭐. 그렇죠.”

나름 에드워드를 보는 순간 첫눈에 반했다. 처음에는 그저 심장이 고장 난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면 그를 보고 있는 순간에만 뛰었었다. 첫사랑이라는 뚜렷한 개념은 조금 더 뒤에 깨달았지만.

“에드워드 씨가 역시 첫사랑?”

“네.”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 헤헤 웃으며 대답하자, 크리스는 뜻 모를 눈빛으로 바라본다.

“에드워드 씨가 준영을 왜 사랑하는지 알 것 같아요.”

“왜……, 그런 것 같아요?”

“작고 사랑스럽고 상냥하고 상대방을 먼저 생각해주는 마음 씀씀이도 어여쁘고.”

“아하하. 그만 해요. 크리스. 비행기 그만 태워요.”

아무리 립 서비스라는 걸 알아도 대놓고 들으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준영은 창피함을 감추려 호록호록 차만 마셔댔다.

“진심이에요. 누구든 준영을 알게 되면 반할 거라고 생각해요. ……나와는 다르게.”

“네? 다르다니요?”

“아, 혼잣말이에요. 신경 쓰지 마요.”

마지막 말은 작게 중얼거린 거지만, 준영의 귀에는 분명히 들렸다. 나와는 다르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뭔가 자격지심 같은 분위기라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크리스는 정말 멋져요! 잘생기고! 든든하고! 자상하고! 크리스가 베타라고 했을 때 정말로 놀랐다니까요. 사실은 알파인 줄 알았거든요!”

“……고마워요.”

왜 고맙다고 말을 하는데 아파 보이는 걸까. 평소와 같은 미소지만, 준영은 알 수 있었다. 그 옛날 오메가라도 괜찮다는 사람들의 위로 섞인 말을 들을 때, 준영이 딱 저런 표정을 지었던 게 떠올랐다.

“크리스는 자신이 베타인 게 싫어요?”

살짝 떨리는 눈동자가 정답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알파가 되고 싶은 거예요?”

“……네.”

힘없이 대답하는 크리스를 보는 순간 준영은 알았다. 크리스가 오메가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리고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이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크리스가 오랜 시간 짝사랑했다는 사람이 알파구나 하고.

“준영은 둔한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예리해요. 그만큼 남 기분을 잘 파악한다는 거겠지요.”

준영의 태도에 덩달아 크리스도 눈치를 챘나 보다. 크리스가 씁쓸히 웃으며 한 말에 준영은 미안함에 고개를 떨구었다.

“미안해요. 어, 전화.”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서둘러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내었다. 제라드였다. 별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다.

-준영. 미안한데, 지금 옆에 크리스 있어?

“네? 아, 네.”

-좀 바꿔…….

제라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크리스가 준영의 핸드폰을 뺏어 들었다.

“분명히 내가 말했지. 난 너와 할 말이 없다고.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영원히 너와 인연을 끊을 거야. 그리 알아.”

불행히도 이번에도 바로 깨달아버렸다. 지금까지 크리스가 언성을 높이며 통화를 한 상대가 누구였는지를. 생각해 보면 어느 순간부터 제라드와 크리스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 같았다.

이번에도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린 크리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멍하니 쳐다보는 준영을 보고는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크리스…….”

“준영. 정말 미안한데, 모른척해 줄래요?”

“……네.”

“고마워요. ……그리고 하나만 더.”

크리스는 준영의 곁으로 와 그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크리스도 제라드 만큼이나 키와 덩치가 좋아 준영이 품에 폭 감싸이는 상태가 되었다.

“잠시만 이렇게 있어 줘요. 준영을 이렇게 안고 있으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거든요.”

“얼마든지요.”

자세한 건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 수 있었다. 크리스는 제라드를 싫어하는 게 아니다. 어쩜 너무 좋아해서 힘들지도 모른다.

혼자 삭히는 사랑이 얼마나 가슴 아픈지 안다. 준영은 가만히 크리스의 품에서 그가 빨리 이 아픔이 낫기를 바랐다.

-응. 나 2파운드 가까이 쪘어요. 거기다 호르몬 수치도 거의 정상이래요!

들뜬 준영이 눈에 보이는 느낌이다. 아이처럼 기뻐하는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하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호르몬 수치가 정상이 되어간다는 건 정말로 기뻐할 일이지만, 문제는 아직 준영의 몸무게가 한참 정상에서 미달이라는 거다.

그런 에드워드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준영은 그저 신났을 뿐이다.

“정말 잘됐네. 그래. 물론이야. 하하하. 그래도 된대? 흠……. 알았어. 저번처럼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뻗을 만큼은 놀지 말고. ……그래. 사랑해.”

조잘거리는 준영이 에드워드의 마지막 말에 딱하고 입을 멈췄다.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에 전화가 끊겼나 라고 생각했다.

-나도 사랑해요.

개미 기어가는 소리도 이보다 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작디작은 목소리가 심장을 울렁이게 만든다.

“그래. 사랑해.”

평생토록 용서를 받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감히 과분하게 저 단어를 들을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준영은 자신과 다르게 그렇게 속 좁은 남자가 아니었다. 준영의 최고의 장점은 아픔과 슬픔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털어낼 줄 안다는 거였다.

짧은 통화를 끝낸 후에도 에드워드는 핸드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달콤함에 흠뻑 젖은 채 눈을 감고 이 감정을 즐기다, 자연스레 몸을 돌렸다. 그리고 굳었다.

“좋네. 신혼. 아니지. 돌아온 신혼인가.”

언제 들어온 건지 제라드가 소파에 앉은 채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무섭게 제라드를 노려보았지만 그가 언제 그런 눈치를 봤던가. 당당히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오더니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지?”

“사직서.”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군.”

“그래? 이거 안 내도 돼?”

“요즘은 전산으로 다 돼.”

“아하. 몰랐네.”

물론 아직 사원들은 사직서를 정식으로 내는 걸로 알지만, 굳이 뒷말은 붙이지 않았다.

“너 제법 이 일에 적응 잘하던데……. 더 전문적으로 해 볼 생각은 없는 거야?”

질문과 동시에 대답을 들었다. 노골적으로 싫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는 제라드를 보고는 허탈하게 웃었다.

“내일부터 당장 안 나와도 되지?”

“절차란 게 있어.”

“애초에 그 절차 깡그리 무시하신 분이 할 말은 아닌데.”

정말 할 말 없게 만드는군.

예전부터 제라드는 그랬다. 에드워드의 말에 절대로 지지 않았다. 웃기게도 조그마한 게 바락바락 대들면서도 에드워드가 좋다고 졸졸 따라다녔고, 정작 그도 그런 제라드가 그리 싫지 않았다.

“그렇게 싫어?”

“응. 지긋지긋해. 모델 쪽도 사람 속 모른다 싶지만……. 그래도 거긴 내 편이 있잖아. 나만 보면 좋아 죽는 귀여운 것들이 있는데……, 이곳은 삭막해. 죽을 것 같아. 내 미모가 통하지 않아.”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되지 않는 대답을 하던 제라드가 갑자기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테드에게 이런 걸 물을 날이 올지 몰랐는데…….”

“?”

제라드가 준 봉투를 챙겨 서랍에 넣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말을 꺼냈으면 끝까지 할 것이지, 혼자 허공을 노려보고 있다.

때 되면 말하겠지 하고 이미 다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돌릴 때 제라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크리스랑 잤다.”

“풉.”

하마터면 죄다 내뱉을 뻔했다. 에드워드는 티슈를 빠르게 뽑아 입을 닦았다.

“……뭐?”

“사고로 저질렀어. ……어떻게 해야 될까.”

정말 살다 살다, 제라드의 연애상담을 듣게 될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것도 상대가 남자다. 오메가는 어머니 영향으로 꺼리는 편이라 베타를 대체로 상대하는 걸 알지만, 무조건 여성인 것만은 확실했다.

준영은 제라드가 신사인 줄 알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카사노바가 저러할까 싶을 정도로 옆의 여자가 허구한 날 바뀐다. 그나마 양다리 안 걸치는 게 어딘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취향이 바뀐 거냐?”

여자를 하도 많이 사귀어서 흥미가 떨어진 건가. 충분히 일리 있는 이유지만 제라드는 그렇지 않나 보다.

매우 못마땅한 표정으로 에드워드를 응시하더니 푹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표정도 말투도 덤덤했지만 그럼에도 제라드의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 자신이 그런 상태였으니까.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빌어.”

“……안 해봤을 거라 생각해?”

“했겠지. 하나만 충고할게. 네 자신을 바꾸지 않는 한……, 절대 통하지 않을 거야.”

스스로를 바꾸지 않고 상대방이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는 건 이기적인 욕심이다.

그것을 깨닫는 데까지 너무 많은 걸 잃은 에드워드였다.

“넌 나보다는 낫겠지.”

땅을 치고 후회할 만큼 잘못은 저지르지 않았을 거란 뜻으로 한 말이지만, 제라드의 표정을 보니 이미 늦은 듯했다.

“……힘내.”

딱히 무슨 위로를 해야 할까.

에드워드의 진심 섞인 충고에 제라드는 긴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에드워드를 마중 보낸 후, 준영은 운동을 하기 위해 곧장 헬스장으로 향했다.

집 안에 헬스장이 있다니……. 그것도 두 군데나.

경호원들과 고용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곳과 에드워드나 제라드가 사용하는 고용주 전용 헬스장이 따로 있었다.

처음에는 준영도 그곳을 사용했지만, 이틀 정도 지나자 너무 심심한 데다 무엇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오늘은 고용인들이 사용하는 헬스장을 가볼 생각이었다.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뒤 일 층으로 빠르게 내려갔다. 에드워드가 봤다면 경악하며 조심하라 할 만한 모습이지만, 지금은 그를 지적할 사람이 없다.

“조심하세요. 그러다가 넘어져요.”

있구나.

어느새 계단 앞으로 온 크리스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준영을 올려다보았다.

“조심하고 있어요.”

“저번에도 넘어질 뻔한 걸 잊었나요?”

“그건…….”

딱 한 번 그랬는데, 두고두고 회자된다. 그래도 넘어질 뻔한 건 사실이라 반박을 할 수가 없다.

“표정이 왜 그래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듣고 싶지는 않다…… 이런 표정이죠.”

“하하하.”

솔직한 준영의 대답에 크리스가 못 말리겠다며 웃는다. 그러고 보니 최근 그가 이렇게 환하게 웃는 걸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저번 주 병원에서 이후 처음인 것 같다. 너무 멀뚱히 쳐다봤나 보다. 크리스가 급하게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흠흠 헛기침을 하였다.

“잘 해결됐어요?”

“……모른척해 주기로 한 거 아닙니까?”

“이것도 안 돼요?”

일주일 동안 얼마나 궁금했는데.

크리스를 볼 때마다, 제라드를 볼 때마다 어떻게 됐냐고 묻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었다. 그 공로는 정말 인정해줘야 한다.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조금 지켜봐야겠지만.”

“그게 좋은 신호에요! 나도 그랬거든요! ……지켜보자는 게 이미 허락을 한 것과 같더라구요.”

준영의 말을 잠시 곱씹던 크리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준영의 말대로네요.”

“잘 되길 바라요.”

“네. 고마워요.”

아직도 표정이 애매하다. 하지만 분명 한없이 슬퍼 보였을 때보다는 희소식이 분명했다. 준영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헤헤 웃었다.

“왜 준영이 그렇게 기뻐해요?”

“그치만……, 잘되면 크리스가 내 가족이 되는 거잖아요!”

“……준영, 알다시피 오메가와 알파만이 1차 성별을 따지지 않고 결혼이 되는 겁니다. 베타와 알파는 1차 성별이 같으면 결혼이 성립되지 않아요.”

크리스가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는다. 준영은 알 수 없는 답답함에 그게 아니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크리스의 공허한 눈빛을 보니 차마 뭐라고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크리스의 동생도 오메가인데 베타와 맺어졌다면서요.”

“네. 그렇죠. 그래도 법적으로는 남이죠.”

“하지만 아니잖아요. 그 둘은 그렇게 생각 안 하잖아요. 법이 그렇게 중요해요?”

왠지 모를 안타까움에 크리스의 팔을 잡아 그를 마주 보았다. 크리스는 준영을 한참 응시하다 부드럽게 눈을 휘었지만, 그 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크리스는 주제를 바꾸고 싶은지 곧바로 말을 돌렸다.

“그래서 어디 가는 건데요? 그렇게 입고?”

“운동요.”

“조깅?”

“음……. 조깅도 좋지만, 전문가분들 있는 곳에 가서 해 보려구요.”

“전문가?”

“네! 경호원들이 하고 있는……. 응? 크리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크리스가 준영의 어깨를 잡더니 냉큼 돌려세운다. 그리고 곧장 계단 쪽으로 밀기 시작한다.

“정말이지……. 준영은 본인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좀 인지해야 합니다.”

“네? 하지만 운동을 하는 건데…….”

“밀폐된 공간. 알파 다수. 심지어 오메가이면서 페로몬도 조절 못 하죠. 그런 와중에 땀을 흘리겠다구요? 설령 무슨 일이 생기지 않더라도, 경호원들은 무슨 죄입니까?”

“……죄송합니다.”

태어나 한 번도 넘치는 페로몬으로 고민한 적 없던지라, 미처 생각지 못했다.

“내가 먼저 발견했으니 망정이지……. 정말이지. 제발, 본인이 오메가라는 인지를 좀 하세요.”

“네…….”

그렇게 준영은 에드워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잔소리를 듣는 경험을 해야 했다. 솔직히 크리스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아니라 준영은 한마디 대꾸도 못 한 채 얌전히 고용주 전용 헬스장으로 향하였다.

크리스의 코치 아래 한바탕 땀을 빼며 운동을 마쳤다. 준영은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두드리며 욕실로 곧장 들어가, 샤워를 했다.

크리스가 왜 준영의 전담 하녀인 클로이에게 미리 따뜻한 물을 받아두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대충 몸을 헹군 뒤 욕조로 들어가자, 뻐근했던 근육이 그나마 풀리는 기분이었다.

“아아……. 좋다.”

머리를 욕조 헤드에 기댄 채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보통 가정집이라면 절대 없을 화려한 그림이 천장을 장식하고 있는 게 보였다.

화가 이름을 들었는데, 까먹었다.

들었을 때는 알았지만, 딱히 흥미 있던 분야가 아니어서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중에 혹시라도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 꼭 별자리로 바꿔 달라고 해야겠다.

밤하늘을 수놓는 별자리 모양을 보고 있으면 지루한지 모를 것 같다.

이리저리 몸을 만지작거리다, 열이 꽤 올라 슬슬 나가자 싶어 몸을 일으켰다. 물속에 있어 몰랐는데, 근육통이 장난이 아니다. 내일이면 훨씬 더 아프겠구나 싶다.

목욕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가자, 마침 클로이가 안으로 들어선다.

딱히 옷 갈아입는 시중 같은 건 시키지 않는데 왜 들어온 건가 하고 쳐다보는데 그녀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가 않다.

“클로이? 왜 그래요?”

“저기……. 이거.”

“네?”

밑도 끝도 없이 쪽지를 준영에게 건네주었다. 안색이 창백했다. 바로 눈치를 챌 수 있었다.

협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한 사람이 떠올랐다. 준영은 가만히 클로이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이는 준영에게 얼른 쪽지를 건네주고는 후다닥 침실을 나갔다.

준영은 옷을 입을 생각도 못 한 채 소파 쪽으로 가 앉아 잘게 접혀있는 쪽지를 풀었다.

[여기 메모지에 있는 번호로 일회용 폰으로 연락해줘요. 당연하겠지만, 이 일을 누설한다면 난 쪽지를 전해준 여성의 가족을 해칠 수밖에 없어요. 당신도 그건 싫겠죠? 그러니 조용히 해결하죠.

추신. 임신을 했어요. 아이 아빠가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 생각해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할머니 묘지?”

“네. 이맘때쯤에 피는 꽃을 할머니가 좋아해서……. 갑자기 할머니 생각이 나더라구요.”

넥타이를 벗으며 되묻자, 준영이 그 넥타이를 건네받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해도 되는데.”

“아니에요. 내가 하고 싶어요.”

돌려달라고 손을 뻗어보지만, 준영이 뺏길라 냉큼 뒤로 넥타이를 숨겼다. 못 말리겠다 웃으며 이번에는 셔츠를 벗으며 대답했다.

“뭐 언제든 가도 돼. 단…….”

“경호원은 데리고요?”

준영이 에드워드의 말을 자르며 선수 쳤다. 조금 장난스런 표정의 준영을 멍하니 보다 허탈히 웃으며 그를 냉큼 안아 들었다.

허벅지와 엉덩이를 받쳐 높이 들어 올리고는 침대로 가 쓰러트리듯 눕혔다.

허공에서 한참 떨어져서일까 놀란 준영의 입에서 끼악거리는 소리가 나와 에드워드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었다.

창피함에 입을 가리고 있던 준영의 눈초리가 게슴츠레해진다.

그리고 얄밉다는 듯 에드워드의 등을 마구 꼬집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뾰족 튀어나와 있는 입술을 맛보고 싶은 욕심에 키스부터 퍼부었다.

비록 준영이 그런 뜻으로 입술을 내민 건 아니지만, 애초에 에드워드의 앞에서 이런 귀여운 짓을 해서는 안 되는 거다.

“흐음……. 에디…….”

에드워드의 등을 꼬집던 준영의 손이 어느샌가 부드럽게 감싼다.

이제 제법 감미롭게 혀를 감아올 수 있게 된 준영이, 빠져나가려는 에드워드의 혀를 쫓아와 감싼다.

조금 몰아붙이자, 비음이 연신 흘러나온다. 키스에 흠뻑 취해서일까 다시금 준영의 몸에서 달콤한 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찌나 단지, 저도 모르게 잡아먹고 싶다는 욕구에 휘말려버렸다.

게걸스럽다 싶을 정도로 준영의 입술을 탐했다. 준영도 같은 기분인 걸까. 애처로이 허리를 들썩인다. 에드워드의 허벅지에 사타구니를 비벼대는 몸짓이 사랑스럽다.

끙끙댄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귀여운 생명체의 재롱에 푹 빠져있을 때, 시원스러운 노크 소리와 동시에 문이 쾅 하고 열렸다.

화들짝 놀란 준영이 그대로 에드워드를 밀치고는 이불로 몸을 푹 감쌌다.

“크리스 자네…….”

“죄송합니다. 저도 주치의의 부탁을 받은지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의사 말을 잘 들어야 착한 아이지요.

크리스의 조금은 능글맞은 이어지는 말에 에드워드의 표정은 보란 듯이 험악하게 바뀌었다.

“제라드와 잘되지 않은 걸 왜 여기서 푸는지 모르겠군.”

이번에는 반대로 크리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정확히는 웃는데 웃는 게 아닌 것에 더 가까웠지만.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내 일은 내가 잘 알아서 할 테니 그만 가보도록.”

“잘 하시는 분이……, 사람을 실려갈 정도로 안으셨습니까?”

한 치도 지지 않는 살벌한 분위기가 이어질 때, 결국 참다못한 준영이 나섰다.

“그만 해요! 왜 둘이서 싸우는 건데요! 그리고 에드워드, 크리스가 저렇게 행동하는 건 날 생각해서라구요. 그런데 거기서 제라드가 왜 나와요!”

에드워드는 이 방에서 자신의 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소외감은 자연스럽게 감정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었다.

“준영의 말이 맞아. 조금 머리를 식히고 오도록 하지.”

“어……. 에디. 삐졌어요?”

준영은 모른다. 원래 그 말을 하면 안 삐졌던 것도 삐지게 된다는 것을. 에드워드는 대답도 하지 않고 침실을 나와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개인 방으로 들어간 김에 가져온 서류를 검토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준영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저 귀여운 생물은 뭘까.

에드워드가 감정을 추스르려 저도 모르게 미간을 팍 찌푸리자, 준영은 다르게 받아들였나 보다.

“아직 화났어요?”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화가 날 리가 없잖아.”

“……그치만 안 돌아와서.”

저번에는 억지로 화해하러 온 느낌이 강했는데, 이번에는 정말로 기가 죽은 모습이다. 에드워드는 아차 하고는 서둘러 다가가 준영을 끌어안았다.

“절대로 그런 거 아니야. 방에 온 김에 서류를 좀 본다는 게……, 이런 벌써 2시간이나 흘렀군. 미안.”

“그랬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에디가 화난 줄 알고…….”

“왜 내가 화를 낸다고 생각하지? 내가 화를 낼 리가 없잖아.”

솔직히 살짝 서운하기는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오히려 준영이 자신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게 즐거울 정도다. 에드워드는 오해하지 말라며 준영을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에디. 사랑해요.”

다음부터는 주의를 해야겠구나 싶었다. 이렇게 오해를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에드워드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풀 죽은 준영을 달래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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