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4)

[9]

준영은 나아가는 듯하면서도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처음 발작을 일으켰을 때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잠을 자고 싶어 하지 않는 건 늘 똑같았다.

그나마 에드워드가 책을 읽어주면 멍한 눈으로 듣다가 잠을 잔다는 거지만, 그것도 이제는 소용이 없었다.

제라드와 한참 이런저런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던 준영이 길게 하품을 하였다. 눈을 깜빡이는 모습에 그가 어서 자라고 권했지만, 눈을 비비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더…….”

발작이나 남자들을 보고 무서워하는 건 조금 나아졌지만, 반대로 꿈을 꾸는 횟수가 늘어났다.

좋아진 건지 나빠진 건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래. 졸리면 자도록 해.”

억지로 자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방금 전 제라드가 오기 전까지 봤던 영화를 틀어주고는 쉬고 있으라 말한 뒤 병실을 나섰다.

“호전된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네.”

“정신과 의사 말로는 ……괜찮다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는 중일 거라고 하더라.”

“…….”

“준영의 특기를 발휘하는 거지.”

“그런.”

“그 녀석이 강한 거라고 생각했어. 대단한 거라고 생각했어. ……아니, 분명 준영은 강해. 하지만 미처 몰랐던 거야. 강하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게 아니란 걸.”

에드워드의 말에 제라드가 말없이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아프다는 것부터 인지해야 한다고 하더라. 그러니 초조해하지 말라고.”

“그래? 하지만 저렇게 잠을 못 자서야.”

“일단 이번 주 상태보고……, 정 안되면 수면제를 조금 먹이는 걸로 하자고 하더군.”

“그래도 돼? 위험하지 않아?”

“유아에게 쓰는 최대한 후유증이 작은 걸로 쓸 거지만, 들을지 안 들을지는 모르겠다더군.”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뒤 내려가는 버튼을 누를 때, 제라드가 조금 곤혹스런 표정으로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왜?”

“레베카가 만나 주지를 않아.”

“뭐?”

“한사코 거부한대. 나 만나는 거.”

“강제로는 안 돼?”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자살 시도를 해서, 안 되겠다고. 아마 얼굴 보는 게 무리일 것 같아.”

그 딴거 무시하고 만나라고 하고 싶지만, 에드워드와 다르게 제라드에게는 친모였다. 그렇게까지 잔인한 말을 할 수는 없어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시카. 이미 이 정도면 타국으로 넘어간 게 아닐까? 인터폴에 의뢰할 수도 없고.”

차라리 증거가 확실해 가해자인 게 확정된다면 인터폴에 요청하겠지만, 말 그대로 피의자 상태라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용병이라도 써야지.”

“……그래.”

에드워드의 말에 제라드가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용병은 말 그대로 무법자이다. 법에 얽매이지 않는 자들이다. 만약 비싼 돈을 주고 의뢰를 한다면 제시카를 빠르게 찾아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범죄자와 종이 한 장 차이의 존재들이다.

용병들을 쓴다면, 제시카가 어떤 상태로 잡혀 올지 모른다. 아무리 인도적으로 행하라 해도, 그들에게는 그런 게 통하지 않는다.

“메시지라도 적어서 전달해.”

“뭐? ……아.”

“그래. 에드워드가 용병을 알아보고 있다고. 제시카가 만신창이가 되는 게 싫다면, 일단 널 만나달라고. 대화를 하자고.”

에드워드의 제안에 제라드가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쁘지 않은 방법이야. 바로 시도해 볼게.”

“이번에도 안 되면……, 정말로 용병을 쓸 거야. 난 절대로 제시카를 용서할 수 없어.”

“그래. ……알아.”

제라드는 고개를 끄덕이다,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준영 잘 돌보고.”

“조심해. 그리고 미안하다. 힘든 일을 너에게만 시켜서.”

“뭐라는 거야. 나 참.”

뭔가 뒷말을 더 한 것 같은데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바람에 듣지 못했다. 하지만 곧 메시지가 날아왔다.

[가장 큰 의무야. 준영을 빨리 낫게 해. 그게 테드 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 방법이야.]

피식. 씁쓸히 웃고는 발길을 돌렸다. 제라드의 말이 맞다. 자신은 속죄 중인 거다. 다만, 이런 상황이 아니어도 속죄는 충분히 할 텐데, 왜 신은 준영까지 아프게 만드는 건가, 야속하기만 했다.

이제 슬슬 괜찮은 것 같은데도 퇴원을 시켜주지 않는다. 첫 발작 후 9일이 지났다. 답답함에 퇴원을 하고 싶다고 말해 보지만 에드워드는 물론 제이크도 거부한다. 정말 이젠 괜찮은데도 말이다.

이제는 남자들을 봐도 겁을 먹지 않는다.

물론 긴장은 되지만 괜찮았다. 견딜 수 있었다.

준영은 증거를 보여 주고 싶은 욕심에 에드워드가 화장실에 간 사이 냉큼 침대에서 일어섰다.

수면은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먹었더니 마구잡이로 어지럽지는 않았다. 링거대를 지팡이 삼아 문 쪽으로 걸어가 조심스럽게 열었다.

역시나 경호원 두 명이 양옆으로 서 있었다.

건장한 남자를 보자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괜찮으십니까? 준영?”

경호원 한 명이 걱정스럽게 안부를 살폈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괜찮다는 증명을 해야 하는데. 조바심이 들었다.

준영이 숨을 크게 들이쉰 후 정신을 집중하니 덜덜 떨리던 몸이 나아졌다.

봐. 괜찮잖아.

하지만 순식간에 다리에 힘이 빠졌다.

“준영!”

바로 앞에 서 있던 경호원이 놀라 양손을 뻗어 무너지는 준영을 받쳐주었다.

눈앞이 순식간에 흐려진다.

눈을 뜨자 에드워드의 품이었다. 헉헉, 왜인지 모르겠지만 숨이 거칠게 나왔다.

에드워드가 한없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본다 싶더니 입술을 겹쳤다.

놀란 준영의 몸이 크게 굳었다.

혀가 매끄럽게 들어왔다. 굳은 준영을 달래기라도 하듯 입안을 부드럽게 헤집었다. 치열을 헤아리듯 훑는다.

잇몸을 긁는듯한 혀 놀림에 몸이 멋대로 움찔 떨렸다. 마지막으로 입천장을 살살 매만지던 혀가 천천히 도망치듯 나선다. 저도 모르게 그 혀를 쫓다 아차 하고 입을 다물었다.

“……날 알아보겠어?”

끄덕끄덕.

차마 말로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상태로 끄덕였다. 에드워드가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준영을 품에 안아 들었다.

에드워드의 옷에서 그다지 좋지 않은 냄새가 올라왔다. 뭔가 했다가 뒤늦게 준영은 자신이 모두 토해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토했는데 키스를 했다고?

부끄럽고 창피하고 미안하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영원히 나오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 에드워드는 준영을 소파에 앉힌 후 서둘러 병실 문을 열고는 사라를 불렀다.

간호사들이 빠르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들은 익숙하게 준영의 옷을 벗기고 토사물로 더러워진 몸을 닦아 주었다.

“닦아서 안 될 것 같은데.”

사라가 머리카락에도 묻은 토사물을 발견하고는 에드워드를 불렀다.

“그럼 씻을 테니, 손목에 물이 안 들어가게 좀 해 주세요.”

에드워드의 부탁에 사라가 서둘러 링거 바늘을 뺐다. 반창고를 붙이고, 비닐을 감은 뒤 다시 반창고를 붙이고는 이어 손목 밴드까지 채워 줬다.

“웬만해서는 안 들어가겠지만, 가급적이면 직접적으로 닿지 않게 하시구요. 다 되시면 부르세요. 그럼.”

사라는 주의사항을 몇 가지 얘기해 준 뒤 병실을 나갔다. 준영은 씻어야겠다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지만 어느새 다가온 에드워드에 의해 들어 올려졌다.

“에드워드?”

“설마. 제대로 서지도 못하면서 혼자 샤워를 하겠다고?”

의심에 가득 찬 준영을 본 에드워드가 오히려 믿을 수 없다며 대꾸한다.

“그, 혼자 할 수……, 헉!”

불행히도 에드워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준영을 안은 그대로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에드워드는 욕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샤워 부스로 가 샤워기를 틀었다. 가장 뜨거운 물이 나오도록 바꾸자, 곧 욕실 안에 수증기가 가득 끼며 온도가 후끈 달아올랐다.

어느 정도 욕실이 훈훈해지고서야, 온도를 맞추고는 훌러덩 옷을 벗어갔다.

헉, 하고 고개를 돌렸다.

부부이고, 임신까지 한 사이지만, 엄밀히 서로 맨정신에 몸을 마주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호기심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준영은 처음으로 에드워드의 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조각상이 이럴까 싶을 정도로 완벽한 근육이 탄탄하게 짜여 있었다.

그리고 바지와 속옷까지 벗는 모습에 다시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준영?”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더욱 힘주어 당겼다. 왠지 모르게 창피했다. 너무 비교되는 몸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 상황 자체가 부끄러운 건지도 모르겠다.

“우린 부부야. 부끄러워할 거 없어.”

그건 알지만. 엄밀히 부부다운 짓을 한 적이 없지 않나? 아니구나 했구나.

얼마 전, 발작하던 준영을 에드워드가 페로몬으로 진정시켰던 게 떠올랐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그것 또한 엄밀히 거의 치료의 목적이었다.

“너무 부끄러워하지 마. 잡아먹고 싶어지니까.”

“……식용이 취미인지 몰랐네요.”

“나도 몰랐어.”

분위기 풀어보자고 농담을 하는데, 진담으로 돌아온다.

아니, 농담인 건가? 상대방의 농담도 구분 못 할 정도로 자신이 긴장한 걸 알 수 있었다.

“씻자. 그러고 있다가 감기 걸려.”

부끄러워했던 게 무안할 만큼 에드워드는 준영에게서 이불을 뺏어 휙 하고 구석에 버리듯 던졌다. 혼자 할 수 있다는 준영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속옷까지 단숨에 내려 버렸다.

에드워드는 정말로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로 준영의 몸을 씻겨주었다. 준영에게 칫솔을 쥐여 주고는 그의 몸을 거품이 가득한 바스 타월로 꼼꼼히 문질러 주었다.

굳이 거기까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곳까지 기어코 모두 씻겨주고서야, 샤워기를 들어 준영의 몸을 헹궈주었다.

준영은 힐끔 뿌예진 거울을 바라보았다. 수증기로 인해 하얗게 바랜 바람에 에드워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체온 떨어지면 안 되니까. 양치 서둘러.”

부끄러워했던 게 점점 바보 같아지는 기분이다. 준영은 마치 혼자 샤워하지 못하는 아이가 된 기분으로 쓱쓱 양치에 집중했다.

준영의 머리까지 모두 말려주고서야, 속옷을 건네주었다. 이것도 입혀주려나 했지만, 그냥 손에 쥐여 줄 뿐이었다.

“미안. 한계다. 속옷은 혼자 좀 입어줘.”

“네?”

뭐가 한계라는 거지? 영문을 몰라 하다, 에드워드의 가운이 조금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에드워드는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고, 준영은 다시금 열이 활활 오르는 것을 느꼈다.

손부채질로 열이 오르는 걸 애써 진정시키며, 속옷을 입고는 침대로 갔다. 잘 개어진 환자복을 입고, 침대 위로 올라가 앉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마치 들리는 기분이었다. 신경을 꺼야지 하면서도 모든 신경이 자꾸만 욕실 쪽으로 향했다.

왜 이래, 정말.

준영은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저 안에서 에드워드가 뭘 하고 있는지를 알아서 몇 배로 더 곤혹스러웠다.

에드워드의 얼굴을 어떻게 보란 말인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드디어 욕실의 문이 열렸다.

확 하고 풍겨오는 향에 몸이 멋대로 굳었다.

언뜻 짙고 무거운 것 같으면서도 시원스러웠다. 어디서도 맡아본 적 없는 특유의 향을 준영은 기억한다.

어렴풋하지만 분명 발작을 일으킬 때, 이 향을 맡았었다. 점차 경련하던 몸이 멈추고 서서히 진정이 된 건 분명 이 향 때문이었다

“이런. 미안. 이불 덮고 있어.”

에드워드가 아차 하며 서둘러 창가로 가 창문을 열었다.

예전 고등학교 때 딱 한 번 오메가로 인해 러트를 일으킨 알파의 향을 맡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무섭고 역겹고 끔찍한 느낌이 더 강했다.

하지만 에드워드여서일까. 이 향이 열린 창문 너머 사라지는 것조차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이불을 덮고 있어 다행이다. 이불 때문에 에드워드의 각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준영은 어서 빨리 붉어졌을 볼이 가라앉기를 바랬다.

“준영?”

에드워드가 어느새 다가와 이불을 치운다. 가뜩이나 큰 눈이 더 커진 채로 준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에드워드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아니, 좁혀졌다. 마치 표범처럼 가늘어지는 눈동자에 홀리기 직전, 쾅 하고 문이 열리며 제이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부의 건강한 성생활에 끼어들 생각은 없다만. 지금은 아니지 않나? 친구?”

거의 키스를 하기 일보 직전, 행동이 멈춘 둘은 물끄러미 제이크를 바라보았다가 급하게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준영은 창피함에 다시 이불을 푹 하고 덮었고 에드워드는 그대로 병실을 나갔다.

“젊고 건강한 건 참 좋군. 그나저나 환기를 좀 시켜주겠어? 사라?”

“네. 잠시만요.”

왜 갑자기 환기를 시키는지를 알아 준영은 더욱더 이불에서 나오지 못했다.

언제나처럼 검사를 끝낸 후, 병실로 돌아가던 중 전화가 온 에드워드가 옆에 있던 준영을 간호사에게 부탁하고는 서둘러 어딘가로 향하였다.

잠시 에드워드가 사라진 쪽을 보던 간호사가 준영을 보며 생긋 웃었다.

“병실로 바로 갈게요.”

“네.”

간호사가 휠체어를 미는 걸 도와주었지만 마음은 걷고 싶었다. 그래, 에드워드가 없는 지금이 기회다 싶어 간호사를 불렀다.

“걷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이제 링거도 안 하잖아요.”

실제로 어제저녁부터 링거를 맞지 않았다. 빠른 회복은 아니지만 이제 음식물로 어느 정도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다고 판단, 링거를 빼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분명 링거를 빼니 어지러움이 자주 찾아오는 건 맞다. 부족한 영양분을 링거가 대신해주다 빼서 그런 걸까. 기운이 많이 빠졌지만 그래도 제이크는 이제 몸에 이상도 크게 없으니 가급적 스스로 먹고 움직이며 회복하자고 했다.

에드워드는 매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의사로서의 소견을 본인이 뭐라 할 수 없었는지 딱히 부정은 하지 않았다.

다만, 준영에게 심할 정도로 과보호였다.

그러니 그가 없는 틈이라도 노리고 싶은 심정이다.

사라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 같아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다른 간호사에게 부탁을 하였고 그녀는 흔쾌히 들어주었다.

한 발 한 발 걸음을 뗐다. 몇 발짝 걸으니 숨은 조금 찼지만 괜찮았다.

후, 하고 숨을 몰아쉰 후 복도 코너를 돌다 카페로 보이는 곳을 보고는 멈춰 섰다. 넓은 유리문 너머 공간이 꽤 멋졌다.

“여기는…….”

“휴게실이에요. 잠시 들르실래요?”

널따란 공간이 마음에 든다. 준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스스로 걸음을 옮겨 휴게 공간으로 들어섰다.

가끔 에드워드가 휴게실에 잠시 갔다 오겠다 한 곳이 여기구나 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몇몇 환자와 보호자로 보이는 이들이 커다란 화면의 TV를 보고 있었다.

뉴스였다. 세상이 시끄럽다며 에드워드가 준영에게서 언론매체를 단절시킨 지도 어언 3주였다.

준영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소파로 가 TV에 집중했다.

대통령이, 어쩌고 상원의원이 어쩌고. 하원의원이 어쩌고. 인종차별이 어쩌고. 알파가 어쩌고 오메가가 어쩌고. 늘 보던 뉴스들이 줄을 이었다.

잠시 속세에 벗어나 있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같구나 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할 때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준영! ……제길.”

거의 뉴스가 하나 다 끝나갈 때쯤에서야 에드워드가 휴게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준영은 이미 다른 주제로 넘어간 화면을 멀뚱히 보다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아까 저 남자. ……맞죠?”

“…….”

“잭……, 맞죠?”

대답을 해 주지 않아 다시 물어보았다. 에드워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잭이 왜…….”

뭔가 어렴풋이 작은 기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에드워드가 황급히 다가와 준영을 품에 안아 들었다.

“내가 있어. 준영. 날 봐. 날 봐. 내가 옆에 있어.”

에드워드의 팔을 꽉 잡고는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간호사에게 의사를 불러오라 외친 후 서둘러 병실로 뛰어갔다. 준영은 에드워드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밀물이 밀려오듯 기억이 순식간에 돌아오고 있었다.

중간에 텅 비어 있던 기억이 차곡차곡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준영은 무서운 속도로 돌아오는 기억의 쓰나미에 이대로 자신까지 휩쓸릴까 봐 에드워드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준영은 뭔가 생각하는 듯 계속 창밖만을 바라보았다. 중간중간 부르면 돌아보며 미소는 짓지만, 그 순간뿐 다시 멍하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벌써 4시간째. 제라드가 보내준 서류를 검토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준영을 부르려 할 때 그가 고개를 돌렸다.

“에드워드. 나 부탁이 있어요.”

“그래. 말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준영에게로 다가갔다. 준영은 에드워드가 침대 바로 앞 의자에 앉는 것까지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잭을 만나보고 싶어요.”

“……!”

순간 너무 당황해 팍 인상을 찌푸렸다. 분노와 황당함이 동시에 마구 들끓었다. 뒤늦게 자신이 너무 노골적으로 화를 냈다는 걸 인지하고 사과를 하려 했지만, 의외로 준영은 무덤덤했다.

언제나 겁먹은 초식동물처럼 에드워드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준영이 맞나 싶다.

“왜 화내는지 알아요. 나 때문에 화내는 게 아니라는 거. ……이제는 잘 알아요.”

준영은 마치 손을 잡아달라는 듯 팔을 내밀었다. 에드워드는 서둘러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아 준영의 손을 양손으로 마주 잡았다.

앙상하게 마른 손이 만질 때마다 안쓰럽다. 웃긴 건 이런 아픈 준영을 상대로 발정을 해대는 자신이지만.

“있죠. 많이 생각해 봤어요. 사실 지금도 화가 나고 무섭고 조금 슬프고…….”

준영은 말을 하다 말고 처연하게 웃는다.

“만나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거야. 지금도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들었어. 뻔히 증거가 있는데도 말이야.”

“좋은 소리 못 들을 걸 알아요. 딱히 잭의 사과를 듣고 싶은 것도 아니에요. 나도 알아요. 사과할 사람이었다면……,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왔었겠죠.”

예상은 했지만,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은 손주였구나 싶었다. 이미 핏줄은 의미 없는 삶을 살았던 놈이다. 준영이 그를 만나면 받을 상처가 걱정된다.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요. 전달할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해야 할 말. 그러니 제발, 그가 형량이 확정 나서 교도소로 이송되기 전에 만나고 싶어요.”

싫다. 그 말이 뭔지는 모르지만 전해주지 않아도 된다. 자신의 욕심은 그러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씁쓸하게 감정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에드워드가 그랬잖아요. 내 옆에 함께 있을 거라고. ……나 혼자가 아니니까. 부디, 부탁이에요.”

“난 절대 널 이길 수 없어.”

감히 어찌 널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에드워드는 긴 한숨과 함께 준영의 이마를 콩 하고 박았다. 준영은 아프지도 않으면서 아프다며 헤헤 웃었다.

그래, 에드워드 햄턴은 절대 준영을 이길 수 없었다.

취조실로 들어서자, 초췌한 얼굴을 한 레베카가 똑바로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레베카는 제라드가 들어온 것을 알면서도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저 허공을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할 말이라는 게 뭐니. 빨리 하고 돌아가렴.”

채 엉덩이를 붙이기도 전에 그녀가 한 말에 실소했다.

“간만에 아들을 만났는데, 인사라도 좀 하지 그래요?”

“간만? 일 년 만에 만나도 나에게 인사 한번 제대로 안 한 녀석이 할 말은 아니구나.”

레베카의 대꾸에 할 말이 없어 피식 웃었다. 그녀의 말대로다. 제라드는 가급적 레베카를 피해 다녔다. 전화가 와도 일부러 받지 않았다. 일거리를 최대한 많이 받은 이유는 하나다. 핑계를 댈 수 있어서였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 괜찮으면 잠시만 단둘이 대화 좀 할 수 있을까요?”

“어차피 대화 내용은 기록됩니다.”

“알아요. 그래도 부탁드립니다.”

어차피 벽의 거울 너머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잘 안다. 그래도 기분 차이는 크다. 제라드의 부탁에 요원은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곧 자리를 떴다.

제라드는 그제야 자세를 바로 해 레베카를 가만히 보았다.

“솔직히 말이죠. 이런 미래를 난 조금 예상했어요. 애초에 에드워드가 봐준 걸 알았거든요. 당신이 아무리 설쳐도 에드워드 입장에서는 우스운 애들 장난 같은 거라……. 뭐, 애초에 당신은 에드워드의 손바닥 안이었거든요. 언제든 그가 마음만 먹으면 당신 같은 건 단숨에 뿌리 뽑을 수 있었죠.”

“네 형을 자랑하려고 이곳까지 온 거니?”

레베카는 눈살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어린 시절 제라드가 에드워드를 찬양할 때마다 레베카는 저런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겨우 7살도 안 된 꼬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네 적이 될 사람이란다. 그러니 넌 에드워드와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렴.’

어린 제라드의 눈에도 레베카는 더럽고 추해 보였다. 가만히 있어도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을 텐데 왜, 에드워드에게 척을 지려고 그렇게 안달인 걸까.

하긴, 사람의 욕심은 끝도 없고, 욕심쟁이는 자신의 손에 든 것보다 남의 손에 든 것이 더 커 보인다고 하더라만.

“자랑이라. ……뭐, 엄밀히 말하면 당신을 칭찬해주고 싶어요.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거든요. 세상에. 제시카와 내가 핏줄이라니. 정말이지……, 욕심만 많은 겁쟁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대범하더군요.”

레베카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화장하나 하지 않은 얼굴에 노골적으로 감정이 떠오른다. 늘 웃는 얼굴이었다. 하나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 미소로 늘 웃던 그녀가 저렇게 솔직히 화를 내니 신선할 정도다.

“비꼴 거면 나가렴. 난 너와 더이상 할 말이 없다. 고작 이렇게 비아냥거리기나 하려고 날 부른 거니?”

제라드와의 만남을 계속해서 거부하던 레베카가 마음을 바꾼 건, 그가 제시카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줄 거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거부하지 않을까 했지만, 레베카는 바로 허락을 하였다.

당연히 이 조건을 받아들일 거리고 예상은 했다. 하지만 막상 바로 받아들였다는 말을 전해 듣자 기분이 묘했다.

“장난은 그만 치도록 하죠. 제시카가 온전히 잡히기를 원한다면 협조하세요.”

레베카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무슨 말장난인가 싶을 거다.

“에드워드가 용병을 푼다고 했어요.”

드디어 상황을 판단한 건지 레베카의 표정이 단숨에 바뀌었다. 조금은 충격을 먹은 듯, 제라드를 노려보다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그래, 알겠다. 하고 입을 열 거라고 생각하니?”

“용병의 개념을 잘 모르나 본데……. 에드워드가 용병을 쓴다면, 말 그대로 스페셜 급을 쓰는 겁니다. 사람 목숨을 우습게 아는 녀석들을 모두 사들여 제시카를 쫓을 거란 말입니다. 그들에게 의뢰를 하면, 제시카의 상태는 장담할 수 없어요. 목숨만 붙어있어도 그들에게는 의뢰 완료나 다름이 없으니까.”

태연한 척하지만, 말을 듣는 동안 눈꼬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딸이라고 걱정하나 싶어 우습다.

“그 애가…… 어떻게 되든 나하고는 상관없어.”

“들었어요. 당신 과거. 6살 때라고 하던데요. 제시카를 두고 왔을 때 나이가. 술만 먹으면 폭력을 쓰는 남편을 피해, 도망쳤다고 들었어요. 방패막이 사라진 딸이 어떻게 컸는지는 당신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겠죠. 어쩌면 딸에게…….”

“닥쳐! ……애초에 내가 말렸어! 그러지 말자고! 너무 위험하다고! 내가 어떻게든 한몫 챙겨 줄 테니 그냥 뒤에 빠져있으라고!”

느닷없는 비명 소리에 당황했다. 혹시라도 요원들이 뛰어들어올까 한 손을 살짝 들고는 가만히 숨죽인 채로 레베카의 악에 찬 울분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냥 가만히 있었다면! 모든 게 순탄했을 텐데! 그 애가 내 모든 걸 망쳐놨다고!”

한없이 제시카를 탓하는 말밖에는 하지 않았다. 그나마 그녀는 레베카에게 사랑을 받나 했다. 아니었다. 레베카에게 자식이라는 건,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었다.

“너도 우성 알파로 태어났더라면……, 그랬다면…….”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힘없이 주저앉더니 곧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주룩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한번 흘린 눈물은 쉴 새 없이 이어져 내렸다.

“자리를 잡으면, 레이첼을 찾아갈 생각이었어. 그 애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지금까지 챙겨주지 못한 것만큼 더 잘해 주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지. 그 애는 내가 한 모든 것들을 알고 있었다. 오랜 시간, 내가 햄턴 가를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던 만큼 레이첼도 날 조사했었지. ……난 협조할 수밖에 없었어.”

“제시카가 어머니를 협박했다구요?”

“다른 건 필요 없다며 나에게 요구했어. 오메가 호르몬제와 함께 에드워드와 마주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달라고. 내가 먼저 그 애에게 연락을 취한 적은 없었어. 늘 그 애가 나에게 한 거지. ……난, 레이첼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어버렸다. 제라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흐느끼고 있는 레베카를 잠시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용병을 정말로 쓴다는 거니? 그럼 정말 에드워드는 레이첼, 아니 제시카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다는 거니?”

황급히 제라드의 옷깃을 잡은 레베카가 눈물에 젖은 채 물었다. 욕심과 모성이 공존하기 어려운가 보다. 상반되는 모습이 추한 것보다도 안쓰러울 정도다.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망가졌을까.

“남아있죠.”

“아…….”

“증오만.”

제라드의 말과 동시에 레베카는 힘없이 아래로 무너졌다. 그녀는 더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지금이 더 슬퍼 보였다.

“재판장에서 보도록 해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미 넋이 나간듯한 레베카를 힐끔 보다 발길을 돌려 취조실을 나섰다.

“기분 더럽네.”

간신히 만났음에도 수확이 없어서인지 아님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다. 제라드는 씁쓸함을 애써 쓰게 삼키며 대기 중이던 톰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준영이 긴장하는 걸 눈치챈 건지, 에드워드가 어깨를 잡으며 얼굴을 바라보았다. 괜찮다 괜찮다 주문을 몇 번이고 외워봐도 큰 효력은 없었다.

“힘들면 지금이라도 안 해도 돼.”

준영은 에드워드를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무섭긴 하지만……, 에드워드가 함께잖아요.”

준영의 대답에도 에드워드는 영 마음이 쓰이는가 보다. 그는 당장이라도 이 일을 파투내고 싶은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그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이제는 잘 안다.

무섭고 괴롭고 힘겨울 때, 늘 곁에서 의지가 되어 주었다.

두려움에 두 눈을 감은 채 부들부들 떨다, 눈을 뜨면 늘 에드워드가 함께 있어 주었다.

작은 과정이 쌓이고 쌓여 어느샌가 믿음으로 바뀌고 있었다.

에드워드가 무조건 자신을 지켜줄 거라는 확신이 준영을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다.

“햄턴 씨.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방금 전 FBI라 자신을 소개한 존이 다가와 둘을 안내했다. FBI는 영화에서만 보던 사람들인데, 평생 가도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에서 보니 신기하기까지 하다.

복도를 따라가며 계속해서 힐끔힐끔 보는데, 갑자기 에드워드가 손바닥으로 준영의 눈을 가린다.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져 화들짝 놀라 멈췄다.

“다른 놈 보지 마.”

“…….”

너무 황당해 대꾸도 못 하고 쳐다만 보는데, 앞서가던 존이 돌아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하고는 다시 준영을 돌아보는데, 표정이 완전 다른 사람이다.

“다른 놈 보지 마. 알았어?”

이걸 어떻게 대꾸해야 하나……. 얼척이 없다는 단어를 몸소 느끼며 황당해할 때, 앞서가던 존이 멈춰섰다.

“여기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 이건 불법적인 일입니다. 여기서 일어난 일로 잭 모던이 법적으로 따지고 들면, 이래저래 불리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가급적…….”

“괜찮아요.”

존의 말을 준영이 끊었다. 존은 뭐가 괜찮냐는 듯 조금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준영을 바라보았다. 혐오가 가득한 시선이 충분히 느껴졌다. 동양인에다, 오메가라 이런 시선에 많이 노출되어 익숙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다른가 보다. 에드워드는 준영의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뒤에 보내고는 차갑게 존을 노려보았다.

싸우려고 온 거 아닌데…….

준영은 그러지 말라며 에드워드의 손을 잡아당겼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준영의 만류에 에드워드가 먼저 시선을 치웠다.

“내가 괜찮다고 한 건 법에 대해 잘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잭이 이 일로 소송을 걸지 않을 거라는 뜻이에요.”

“한 끼만 늦어도 법적으로 소송을 거니 마니 하는 놈입니다. 꼴에 법은 좀 안다고, 하아…….”

어지간히 당했나 보다. 존은 진심이 묻어나오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옆으로 비켜줬다.

“여하튼 소송을 하든 말든, 햄턴 씨께서 알아서 하실 거라 믿습니다.”

존이란 남자도 상당히 자존심이 강한가 보다. 일부러 에드워드를 콕 집어 말하는 걸 보면 말이다.

에드워드도 차갑게 존을 마주 노려봤지만, 준영이 그를 불러 어쩔 수 없이 시선을 치우고는 문을 열었다.

“여어. 누가 날 보러 오나 했더니……. 반가워. 삼촌.”

잭이 준영을 보자마자 킬킬거리며 웃었다. 에드워드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살기를 내뿜었지만, 이번에도 준영이 나섰다.

“에드워드. 약속했잖아요.”

대화가 끝나기 전까지 잭이 어떤 말을 하든 나서지 않기로.

“그래. 내가 미쳤지.”

그 약속을 한 것을 노골적으로 후회하며 에드워드는 존과 함께 벽으로 가 섰다. 준영만이 천천히 잭의 맞은편으로 가 앉았다.

며칠 동안 걷는 연습도 좀 하고 나름 체력을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그거 조금 걸었다고 숨이 찬다.

“내가 그 날 미쳤나 봐.”

막 엉덩이를 붙였는데 잭이 먼저 말을 꺼내었다. 조금 당황해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섹시해 보이더라고. 큭큭. 지금 보면 미라 같은데.”

“너!”

“에드워드.”

분노한 에드워드가 뛰어들기 직전, 준영이 고개를 저었다. 잭은 그걸 보고 또 킬킬거리며 비웃는다. 그러든지 말든지 준영은 가만히 잭을 응시했다.

“뭐야. 설교 따위 할 거면 꺼져.”

“안 해요. 해도 소용없는 거 알아요.”

그래, 설교 따위 하지 않을 거다. 할머니는 그렇게도 잭이 마음을 다잡기를 바랐다. 틈만 나면 잭을 찾아가, 제발 돌아오라고 애원했다. 잭은 기어코 할머니에게 폭력까지 썼었다.

그랬기에 준영은 잭에게 더는 회유의 말 따위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할머니를 위해 이렇게 나선 거였다.

“그럼. 뭐? 욕하러? 해. 익숙해. 실컷 속 시원하게 하고 가.”

“그것도 안 해요. 당신이 날 그렇게 한 건 말 그대로 의뢰를 받아서라는 거 알아요. 돈 때문에 움직인 거겠죠.”

“잘 아네.”

“그러니 원망도 그다지 들지 않아요.”

원망? 그보다는 무섭다. 기억이 모두 돌아오고 나자, 더욱더 무섭다. 놈이 자신에게 한 짓이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히 기억이 나 두렵다. 그럼에도 준영은 자신의 등 뒤에 에드워드가 서 있어 견딜 수 있었다.

“그럼 왜 온 건데? 졸라 귀찮게.”

“할머니가 예전에 저한테 부탁한 게 있어요. 잭 당신은 언젠가는 교도소에 갈 거라고. 나쁜 짓만 골라서 하는데 분명 언젠가는 들어갈 거라고. 어쩜 사람을 죽여서 평생 못 나오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 미친 할망구. 아주 기도를 드렸구만.”

“불쌍하지만, 나쁜 짓을 했으니 당연한 거라고. 미래가 보여 안쓰럽다고.”

잭의 미간이 좁혀진다. 당장 이 자리를 뜨고 싶은 걸 참는 게 뻔히 보였다. 잔소리 따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노골적으로 준영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할머니가 나 좀 도와주라디? 응? 아아, 그래. 네 신랑이 그 잘난 햄턴이었지. 야, 잘됐네. 할망구 유언도 좀 들어줄 겸, 나 여기서 좀 빼주라. 난 의뢰를 받았을 뿐이라니까? 그리고 너도 알잖아. 나 끝까지 하지도 못한 거. 씨발, 네가 졸라 토하는 바람에 하기는커녕 나도 역겨워서 죽을 뻔했다니까?”

까득.

등 뒤에서 에드워드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더 끌면 정말로 에드워드에게 못 할 짓이다 싶어서 서둘러 본론을 꺼내었다.

“할머니가 그랬어요. 그놈이 혹시라도 훗날에 변호사 비용이라도 좀 빌려달라고 오면 절대 빌려주지 말라고.”

“뭐?”

“아무리 할머니 이름 대고 사정해도 절대로 동정해 주지 말라고.”

“씹! 미친 할망구가!”

“잭 모던!”

신경질적으로 벌떡 일어선 잭에게 존이 무섭게 소리쳤다. 잭은 욕설을 내뱉고는 다시 털썩 의자에 앉았다.

“대신 하나만 부탁한다고. 설령 사형수가 될지라도 할머니가 죽으면 평생, 평생…… 누구도 당신을 찾지 않게 될 거니까…….”

‘준영아. 죄를 지은 놈이니 당연히 죄를 받아야 돼. 어쩜 그놈은 죽어서도 그 죄를 다 갚지 못할지도 몰라. 하지만 준영아. ……그래도 내가 그놈 할미잖니. 내가 너한테 이런 부탁을 해서는 안 되지만…… 준영아. 하나만 부탁 좀 할게.’

어느 날 갑자기 할머니가 준영을 앉혀놓고 한 말이 떠올랐다. 사고를 당하기 일주일 전쯤이었다. 할머니는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한다는 걸 아셨을까.

“잭이 좋아하는 치즈케이크나 한 번씩 사식으로 넣어주라고 하더라구요.”

“……뭐?”

“많이도 말고. 잭의 생일에. ……치즈케이크. 차마 내가 해 줄 생각은 없지만 사서라도 보내줄게요.”

“야.”

“그게 다예요. 전해줄 말은.”

잭에게 사과를 받을 생각은 없다. 잭에게는 화를 내는 감정도 아깝다. 사실 할머니도 잭이 준영을 겁탈하려고 한 걸 알았다면 절대로 이런 부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가슴 아파하겠지. 영원히 고쳐지지 않는 아픔이니까. 그러니 할머니가 자신을 거둬준 은혜를 갚을 뿐이다.

“뭐야.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잭 모던!”

잭이 다시 벌떡 일어나 팔을 뻗었다. 하지만 책상에 연결되어 있는 수갑으로 인해 준영에게까지는 닿지 않았다.

“말 그대로예요. 할머니의 유언. 할머니가 사고로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에 했던 말이에요. 생일날, 지 좋아하는 건 먹어야 하지 않겠냐고. 십 년을 살든, 평생을 살든…… 그 정도는 해 줄게요. 먹기 싫으면 버려요. 다른 사람을 주든지. 그럼. ……우리 두 번 다시 만나지 마요.”

“뭐……, 잇! 누가 네놈 따위 보고 싶을 거라고 생각해? 그따위 케이크 필요 없어! 넣지 마! 절대 넣지 마!”

잭의 감정이 보인다. 지금은 자존심에 절대 아니라 하겠지만 한 해 두 해 시간이 흐를수록 달라질 거다.

그리고 자신의 생일날마다 오는 케이크를 볼 때마다 깨달을 것이다. 화를 낼지 슬퍼할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할 거다. 잭은 어느 순간 케이크를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쯤이면 준영은 잭을 잊을 수 있을 거다.

“할머니 말이 맞아요. 분노는 단 한 가지밖에 돌려주지 않아요. 오로지 허무와 슬픔만 돌려줄 뿐. ……난 당신을 잊을 겁니다. 머릿속에서 지울 겁니다. 케이크도 다른 사람에게 시킬 겁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러겠죠. 잭이 누구였지? 라고.”

욕을 하던 잭이 일순 멈칫했다. 잊혀지는 두려움을 그는 알지 못할 거다. 하지만 분명 깨닫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니 잊어버릴 것이다.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것이다. 아직은 그가 무섭고 두렵다. 어쩜 당장 오늘 밤 또 꿈에 나타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잊을 것이다. 노력할 것이다.

그것이 잭에게 가장 큰 복수라는 걸 잘 안다.

잭이 다시 욕설을 뱉었지만 준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섰다.

에드워드가 빠르게 뒤따라 나와 준영의 상태를 살폈다. 에드워드는 아무런 말 없이 코트째 준영을 감쌌다. 마치 준영의 눈물을 아무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듯, 감싼 채 가만히 안아만 주었다.

“힘드네요. 왠지…….”

기운도 좀 빠진다고 말을 하려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에드워드가 서둘러 준영을 안아 들었다.

“잘했어. 잘 견뎠어. 조금 자도록 해.”

“……응.”

모처럼의 외출인데, 바깥 구경도 해보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쏟아지는 졸음을 견딜 재간이 없었다. 왠지 지금 잠을 자면 할머니가 나타나서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할 것 같다. 인사를 받기보다, 할머니를 보고 싶었다.

오늘따라 유독 할머니가 그리웠다.

예상치 못한 손님에 당황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여성은 살짝 긴장한 눈으로 에드워드를 보다, 이어 침대 위 준영을 발견하더니 당장이라도 울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틸다.”

“준영. 세상에……, 나는…….”

마틸다는 양손으로 입을 감싸듯 마주 댄 채 울먹였다. 말을 차마 잇지 못한 채 서 있는 마틸다를 지켜보던 에드워드는 준영에게 나가 있겠다 말한 뒤 걸음을 옮겼다.

“대화 나누세요. 그럼.”

에드워드는 마틸다에게 정중하다 싶을 정도로 예를 갖춰 인사를 하고는 방문을 나섰다. 방금 전까지 울먹울먹하던 그녀의 얼굴이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붉어져 있었다.

“마틸다?”

“아, 미안해. ……심장에 그다지 좋지 않은 얼굴이야.”

“아하하하. 그렇긴 하죠. 이리로 와요. 거기 서 있지 말고.”

준영의 말에서야 마틸다가 걸음을 옮겼다. 침대 바로 옆 의자로 와서 조심스럽게 앉은 마틸다는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준영의 안색을 살폈다.

“내가 바로 알아챘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해.”

“무슨 말이에요.”

“하지만 약, 그거 이상하다 싶을 때……. 나는, 정말로 상상도 못 했어. 그 약을 본 지도 너무 오래된 거라.”

“마틸다.”

준영은 엉덩이를 움직여 조금 앞으로 다가간 뒤 그녀의 양손을 마주 잡았다.

“마틸다의 잘못이 절대 아니에요. 만약 알았다면 최선을 다해 날 도왔을 거예요. 그렇죠?”

“당연하지.”

“그럼 된 거예요. 나도 무사하고. 그러니 죄책감 갖지 말아요.”

준영의 대답에 마틸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쳐다보다, 다시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장 새끼가 변태 짓은 좀 해도 설마 이런 짓까지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돈 때문이라고 하던데요.”

“지 딸 명문대 보내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겠지. ……그렇다고 다른 오메가를 팔다니. 씨발, 미친 새끼.”

말을 하다 말고 이를 빠득빠득 간다. 어찌나 갈아대는지, 이 상태가 걱정될 정도다.

“사장은 어떻게 됐어요?”

“못 들었어?”

“제 파트너가 걱정이 심할 정도로 많아서…….”

모든 언론매체가 단절당한 상태라는 걸 차마 말할 수 없어 둘러 말했다. 다행히 마틸다는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런 일을 내 남편이나, 아이들이 당했다면……. 후우……. 상상도 하기 싫다. 자기 얼마나 무서웠어.”

“무섭지만. 혼자가 아닌 걸 알아서…… 이제는 괜찮아요.”

준영의 대답에 마틸다가 크게 동의하며 마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래. 맞아. 준영의 곁에는 준영 혼자가 아니야. 딱 봐도 남편이 얼마나 준영을 사랑하는지 바로 알겠던걸?”

“하하…….”

왠지 모를 무안함에 어색하게 웃기를 잠시, 마틸다가 마주 잡은 두 손을 자연스레 놓고는 다시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사장 그놈 때문에 회사가 난리야.”

“왜요?”

“사장만 바뀌면 되는 문제가 아니더라고. 그 집 아들은 아주 한량이고. 그 집 딸은 남편 하나 잘 만나면 인생 바뀐다고 생각하는 오메가라, 할 줄 아는 건 화장하는 기술이랑 애교 부리는 기술밖에 없더라. 덕분에 톰만 과부하야.”

“톰이라면 부사장인…….”

“그래. 일단 처음에는 회사는 살리자 싶어서 딸이든 아들이든 바지사장이라도 앉히려고 불렀는데……, 하아.”

마틸다는 진심으로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쩜 나이가 몇 살인데 둘 다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지? 자기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라! 세상에! 그 딸이 하는 말이 뭔 줄 알아? 그럼 아버지가 나한테 용돈 못 주는 거냐고 하더라! 21살이! 그게 말이 돼?!”

갑자기 솟아오르는 광분을 주체하지 못한 마틸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버럭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왠지 뻔히 눈앞에서 보이는 듯한 기분에 준영은 진정하라 말도 하지 못한 채 하하 웃을 뿐이었다.

“흠흠. 미안해. 내가 너무 흥분했지.”

“아니요. 괜찮아요. 그냥 고충이 많구나 하고 있어요.”

“노파심에 말하지만, 준영이 미안해할 일 아니야. 알지?”

“네. ……물론이에요.”

일단 대답은 했는데 마틸다의 표정이 영 심상치 않다. 그녀는 의심스런 눈빛으로 준영을 응시하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준영 같은 타입을 잘 아는데 자기 분명 내가 그 회사에 안 들어갔으면…… 하지?”

조금 뜨끔해 아니라는 대답을 바로 하지 못했다. 마틸다의 눈이 보란 듯이 가늘어졌다.

“내 그럴 줄 알았어.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절대 준영의 탓이 아니야. 잘 들어. 애초에 뚜껑을 열어보니, 사장 놈은 법적인 경계선을 이미 한참 전부터 넘었더라고. 유달리 오메가들에게 친절한 이유도 연계해서 팔려고, 씨발. 아, 미안. 나도 모르게 욕이…….”

어쩐지 유달리 챙겨준다 싶더니. 사람이 호의를 보이는 것을 일일이 의심해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게 왠지 씁쓸했다.

“여하튼, 그 일뿐만 아니라, 회사 경영도 지금 개판이더라고. 어쩌니 해도 나름 중소기업치고는 잘해가고 있던 회산데……. 그놈이 지 딸 밀어준다고, 여기저기 과하게 빚을 내는 바람에……. 뭐, 여기까지는 준영은 알 필요 없고. 간단하게 설명하면, 회사는 부도내고 그 알짜배기 아이템으로 팀원들만 고스란히 빠져나와 다른 이름으로 회사를 차릴 예정이야. 그래서, 회사가 다시 차려지기 전까지 난 무직인 상태고.”

“아…….”

“걱정 마. 내 남편이 잘 벌어. 나야 당분간 쉰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뭘. 그러니 준영은 일단 몸 쾌차하는 것만 신경 써. 나 준영 씨 보고 진짜 깜짝 놀랐어. 이렇게 말라서야. 약 부작용이었다며.”

“네. 그런데 이제 괜찮아요.”

“그래. 눈 떠서 정말 다행이야.”

마틸다는 준영에게 오지랖이 넓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정작 그녀도 비슷한 경우인 것 같다. 자신이 제대로 챙겨주지 못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생각에 미안해하고 있는 게 뻔히 보였다.

“마틸다. 걱정해 줘서 고맙고, 자주 연락 줘서 고마워요. 사실 그 회사에서 조금 안 좋은 일을 겪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틸다 같은 좋은 사람도 만날 수 있어서 괜찮아요.”

“너무 착하다. 이 세상 어찌 살아가려고, 아니지, 너무 착해서 저런 멋진 남편을 준 건가? 세상에……. 에드워드 햄턴이라니. 난 그것도 모르고 한량인 줄 알고…….”

“아하하하. 절대로 말하지 않을게요.”

준영의 대답에 마틸다는 양손까지 합장하며 부탁했다.

“응. 절대로 말하지 마. 부끄러우니까.”

준영은 또 한 번 큰소리로 웃어야 했다.

마틸다가 나가자마자 또 다른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낯이 많이 익었는데 하고 바라보다 그의 가슴팍의 브로치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햄턴 사의 표식이자, 경호원들이 늘 달고 있는 브로치였다.

“마커스 씨?”

“네. 기억하시는군요. ……기억이 돌아오셨다고 해서, 안부차 들렀습니다. 아, 그리고 지금 에드워드 씨는 제라드 씨가 오셔서 대화 중이시구요.”

“아……. 네. 고맙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아마도 마커스가 지금에서야 인사를 하러 온 건 준영이 곧 퇴원 얘기가 나올 정도로 호전된 것도 있겠지만 아마도 기억을 대부분 되찾아서일 거다.

마틸다도 그래서 병문안을 허락한 거겠지.

잘린 기억과 연관된 사람을 만났을 때 혹시라도 억지로 떠오르게 되면 안 된다 싶어 에드워드 입장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앉으세요.”

“아닙니다. 서 있는 게 더 익숙합니다.”

“하하…….”

“안정을 찾으셔서 다행입니다.”

인자한 미소를 짓는 마커스의 눈빛이 조금 걸렸다. 뭐랄까. 준영의 건강을 걱정한 것도 있지만, 뭔가 다른 것도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군요.”

“……티가 납니까?”

“네. 에드워드와 관련된 거죠? ……말해 주세요.”

“말하는 순간 저 잘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말하고 싶으시잖아요.”

준영의 대답에 마커스는 이채 서린 눈빛으로 그를 말 없이 응시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다, 마커스의 한숨이 그 침묵을 깨뜨렸다.

“최근의 에드워드 씨는…… 예전 제가 알던 분이 아닙니다.”

“…….”

“그분은 늘 법을 준수하셨습니다.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속도위반 한 번 걸린 적 없는 분이셨지요. 그런 에드워드 씨가 처음으로 법을 연달아 어겼습니다. 물론 도청 같은 것도 엄밀히 위법이라고 치면 위법이지만……. 그것도 악용하지 않는 한, 법에 걸리지는 않지요.”

“어떤 법을 어겼는데요?”

“배우자로서 알고 계시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말씀드립니다. ……사람을 때리셨습니다. 딸을 걸고넘어지며 협박까지 하셨지요. 만약 준영 씨가 잘못되셨다면 에드워드 씨는 어쩜 그 딸을…….”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자신이 아는 에드워드는 분명 법 없이도 산다는 말이 나올 만큼 착실한 남자였다. 그런 사람이 사람을 패고, 심지어 딸을 가지고 협박했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솔직하게 마커스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제가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실제로 준영 씨를 납치하는 데 일조한 사장은 지금 전치 10주의 진단이 나왔지요. 딸은 다행히, 준영 씨께서 깨어나셔서 별일이 없었지만 만약 준영 씨가 잘못되었다면 에드워드 씨는 어쩜…….”

“아니요. 안 했을 거예요.”

“네? 그건 준영 씨가 몰라서 그런 겁니다. 에드워드 씨는 진심이었습니다.”

“네. 화를 낸 건 진심이었을 거에요. 하지만…… 에드워드는 하지 않았을 거예요.”

에드워드는 늘 자신이 위선자라고 말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걸려, 아버지에게 잘 보이고 싶어 발악을 하던 멍청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준영이 보기에는 절대로 아니었다.

에드워드는 그저 착한 것뿐이었다. 착함의 척도와 정도는 주관적이겠지만, 준영의 시선에서는 에드워드는 너무 여릴 정도로 착했다.

분명 순간의 증오로 그런 말을 내뱉었겠지만, 에드워드는 그런 잔혹한 짓을 할 성정이 되지 못한다.

“확신하시는군요.”

“모든 걸 법적으로 처리하는 걸 봐도 그렇지 않을까요?”

한 방 맞았다는 듯 마커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허탈하게 웃었다.

“14년 넘게 옆을 지켰지만 왜 배우자가 다른 건지를 알겠군요.”

“너무 잘 아셔서 그럴 거예요.”

“…….”

“에드워드에 대해 너무 잘 알아서 그래서 그 날 일이 너무 충격이었을 거예요. 나도 어쩜 그 모습을 실제로 보면 달라졌을지도 몰라요. ……그만큼 에드워드를 잘 안다는 뜻인 거죠.”

“당신은 자상하시군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드워드 씨는 정말 좋은 배우자를 만난 것 같습니다.”

왠지 모르게 부끄럽다. 지금까지 어떤 칭찬보다 더 기뻤다. 그건 아마, 에드워드의 가까이에서 그를 보필하던 사람에게 인정을 받아서 그런 게 아닐까.

“그렇군요.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 네, 에드워드 씨는 그러지 않았을 것 같네요.”

“네. 그러니 너무 걱정 마세요.”

“하지만 준영 씨도 안일하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네?”

“언제든, 자신이 혼자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에 하나라도 당신이 잘못되면 정말 에드워드 씨도 망가진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네.”

무거운 충고일 텐데, 왜 기분이 좋을까. 준영은 자꾸만 올라오는 감정을 억지로 누르며 마커스에게 그렇게 하겠다, 진중히 대답을 해주었다.

이어 마커스가 나가고 몇 분쯤 에드워드와 제라드가 안으로 들어섰다.

“준영? 기분 좋은 일 있어?”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었나 보다. 준영은 제라드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그냥 새삼 알게 된 것뿐이에요.”

그래. 새삼스럽게 알게 된 것뿐이다. 자신이 얼마나 에드워드에게 큰 존재인지를.

제이크가 양손 가득 꽃다발 한 아름을 들고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크리스가 깎아주던 사과를 조금씩 먹던 준영은 행동을 멈췄고, 준영의 옆에 앉아 있던 에드워드는 저놈이 미쳤나 하는 눈빛으로 제이크를 보았다.

“퇴원. 축하합니다.”

“……네?”

“뭐?”

“응?”

준영도, 에드워도도 크리스도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제이크만이 통쾌하게 웃어 젖히며 준영에게 다가와 꽃다발을 내밀 뿐이다.

“퇴원요?”

“네. 준영을 담당하던 다른 의사들하고 논의한 결과. 퇴원을 해도 되겠다고 결론이 났습니다.”

“와…….”

“내일 아침에 마지막으로 혈압 같은 기본적인 검사 몇 개만 하고 바로 퇴원하면 됩니다.”

“에드워드!”

너무 기뻐 그를 돌아보았지만, 에드워드는 벌써 준영의 옆으로 와 양팔을 내밀고 있었다. 준영은 환하게 웃으며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드디어! 자유닷!”

어찌나 기쁜지. 준영답지 않게 환호성까지 질렀더니, 모두가 큰 소리로 웃는다.

“이게 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웃어서이니. 퇴원하고도 쭉 그렇게 해야 돼요. 아시죠?”

“네. 그럴게요.”

제이크의 말에 준영은 빠르게 대답했다. 의식불명인 상태에서 3개월, 눈을 뜨고도 벌써 한 달하고 보름이 흘렀다. 이제 슬슬 온몸이 뒤틀릴 지경이다.

제이크는 늘 하듯 기본적인 질문과 가벼운 체크를 한 후, 병실을 나섰다. 사과라도 먹고 가라는 에드워드의 말에도 바쁘다는 대답을 돌려줄 뿐이었다.

“어릴 때 의사가 대단해 보였는데……, 지금 보면 안 하길 잘한 것 같아요. 정말 바쁜 직업이네요.”

크리스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준영과 사적인 친분이 있다고 틈틈이 들른 거지, 다른 의사들은 하루에 한 번 회진시간도 제대로 지키지 못할 만큼 바빴다.

“그만큼 벌잖아.”

“왜 그렇게 부정적이에요. 의사 선생님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는 건데.”

에드워드의 말에 준영이 반박했다. 에드워드는 입을 딱 다물었고, 크리스는 그런 둘을 보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처음 제라드의 추천을 받고 햄턴 가에 왔을 때도 느낀 거지만 솔직히 둘이 헤어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훗날 에드워드가 좀 고생하겠구나, 정도였다. 그런데, 요즘 보면 아주 준영에게 깨갱한다. 말 잘 듣는 사냥개가 저럴까 싶을 정도로.

거기다 어찌나 본능적인지. 크리스가 에드워드를 마음속으로 흉보는 걸 아는 것처럼 가만히 쳐다보는데, 그럴 일도 없건만 괜스레 찔린 크리스가 냉큼 말을 돌렸다.

“그래서. 퇴원하면 어디로 가시나요?”

“뉴저지의…….”

“햄턴 가로…….”

둘이 동시에 대답을 하고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크리스는 어릴 때부터 수많은 형제들과 부모님 그리고 조부모님들에게 치여서 눈치가 빠르다. 그는 치고 빠질 때를 잘 안다. 크리스는 빠르게 과도를 내려놓고는 벌떡 일어났다.

“볼일 좀 보러.”

그렇게 크리스는 불씨를 던진 주제에 유유히 도망쳐 버렸다.

“왜 안 돼요?”

“보안상 이래저래 힘들어.”

“하지만 난 햄턴 가는 그다지……, 미안해요. 난 그곳이 싫어요.”

마음 같아서는 그 저택에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곳에서는 좋은 추억보다 나쁜 기억이 더 많다.

무엇보다 너무 넓다. 준영의 집에서나, 이곳 병실에서 에드워드와 함께 지내다, 갑자기 각자의 방을 사용하게 되면 또다시 우울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더 저조해졌다.

예쁜 꽃다발이 무안해질 정도로 기분이 가라앉는다.

잠시 침묵이 돌았다. 준영은 꽃다발만 보며 만지작거렸고, 에드워드는 말없이 창가에 서서 밖을 보았다.

“너에게…… 할머니의 집이 소중한 만큼 나에게도 햄턴 가는 소중해. 특히나 그곳은.”

침묵을 먼저 깬 건 에드워드였다. 그는 여전히 창밖으로 시선을 둔 채였다.

“그곳에는 어머니의 흔적이 아직 남아있어. 사과나무는 물론 어머니가 직접 가꾸신 데이지 꽃밭도. 네가 묵고 있던 침실도 어머니의 방이지.”

“네?”

“네가 쓴 방. 어머니의 방이었어. 나름 본가에서 가장 따뜻하고 경치가 좋은 방이라 태교에도 좋을까 싶어서……. 준영?”

고개를 들지 않는 준영이 의아했는지, 하던 말을 멈추고 그를 불렀다.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막연히 가장 끝 방이라,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자신에게 그 방을 준건가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하다니.

“내가 뭘 잘못한 건가?”

“왜…… 이제야 말을 해요.”

“뭐?”

“그렇게 소중한 장소라는 걸.”

그랬다면 조금 덜 아팠을까. 그때만 해도 에드워드가 자신을 싫어한다고만 생각했다.

고개를 든 준영을 바라보던 에드워드가 다가와 그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미안하다. 그때의 난, 내가 생각해도 멍청한 새끼였어.”

지금도 크게 바뀐 건 없지만. 이어지는 그의 혼잣말에 고개를 저었다.

“네가 원하면 할머니 집으로 가자.”

“아니요. 괜찮아요. 그곳으로 가요.”

“아니야. 생각해 보면 네 말이 맞아. 너에게 그곳은 그다지 특별한 추억이 없는 게 당연해.”

준영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에드워드가 다시 사과를 한다. 평생 이렇게 사과만 할 것 같아서 싫었다. 자신은 사과를 받고 싶어서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다.

“가요. 햄턴 가로.”

“아니야. 그러지 마. 확실히 보안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네가 정 원한다면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추억 만들어요.”

“…….”

“그리고 생각해 보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에요. 분명 작지만 있어요. 그러니 괜찮을 것 같아요.”

에드워드의 추억이 가득한 곳이라면, 괜찮을 것이다.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말한 것처럼 자신도 그곳에서 많은 추억을 만들면 그만이다.

“그래. 고마워. 그리고……. 아니, 아니야. 이건 나중에 말할게.”

뭔가 더 말을 하려던 에드워드가 고개를 젓는다. 궁금했지만,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니 그런가 보다 하고 그냥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문제가 남았다. 어쩜 가장 큰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준영은 그걸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도저히 자기 입으로 물을 뻔뻔함이 없었다.

혼자 방 쓰기 싫은데……. 이 말을 어찌 한단 말인가.

“저기. 자꾸 너에게 부탁만 해서 정말 미안한데.”

“네?”

“……좋더라고. 나는.”

“뭐가요?”

질문은 해놓고 막상 물으니 무안해한다. 미간을 찌푸렸다가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려다가, 다물기를 반복했다.

슬슬 답답해져 왜 그러냐고 다시 물으려 할 때, 드디어 에드워드가 말을 꺼냈다.

“같은 침실……을 쓰는 건 역시 안 될까?”

“……네?”

“역시, 무리겠지? 이해해. 괜찮아. 자기 공간은 중요한 거니까. 아, 그래. 개인 공간은 따로 있더라도 침실은……, 역시 안 되겠지?”

“풋…….”

역시 무리다. 준영은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스우면서도 무언가 감동이었다. 다만 영문을 모르는 에드워드만이 왜 웃나 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표정이 우스워 더 크게 웃었다. 바로는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한걸음 물러섰으니, 이 정도 재미는 느낄 자격이 되지 않을까 싶다.

퇴원을 하고도 에드워드는 바로 저택으로 가지 않았다. 그는 일부러 뉴욕의 호텔을 빌렸다. 왜 바로 가지 않냐고 물으니 비밀이란다.

그래도 확실히 병원보다는 나았다.

수영장에다 구경할 거리가 많으니 병원 생활보다는 좋았다. 무엇보다 에드워드가 쭉 함께 있어 주니 더없이 행복했다. 그렇게 꿈같은 일주일이 흐르고 드디어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을 나온 건 배 속의 아이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일 거다. 그날 이후, 다시 본 저택은 솔직히 여전히 마음이 가지 않았다.

차 안에 앉아 점점 가까워지는 저택을 보고 있을 때, 문득 준영의 손을 덮고 있던 에드워드의 손길에 더욱 힘이 실렸다.

에드워드와 함께면 괜찮다고 해놓고는 막상 육안으로 보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았고 그건 표정으로 여과 없이 드러났나 보다.

“네가 힘들면 바로 나와도 되니까.”

에드워드는 당장이라도 차를 돌릴 것처럼 물었고, 준영은 괜찮다며 이번에는 자신이 그의 손등을 덮듯이 쥐었다.

“힘들면 말할게요. 그래도 이거 하나는 말할 수 있어요. ……처음보다는 괜찮아요.”

여전히 두려웠지만, 처음엔 혼자였다. 배 속의 아기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애써 태연한 척했을 뿐이다.

지금은 굳이 연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나름 표정을 잘 숨긴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응석받이가 되었나 보다.

준영의 대답에 에드워드는 짧은 한숨을 내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람도 거의 다 바뀌었고, 이제는 크리스와 제라드뿐이니까.”

“응. 괜찮아요.”

너에게 해로운 사람은 없다는 말에 준영은 미소로 답했다.

함께 침대를 쓰자고 말해놓고 에드워드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준영은 하녀의 뒤를 따라 침실로 들어섰다.

침구도 커튼도 모두 바뀌었다. 무엇보다 가장 관심을 끄는 건 열린 발코니 너머로 달콤한 향이 퍼져 흐른다는 거였다.

준영은 이끌리듯 발코니 쪽으로 다가갔다.

“세상에…….”

온 세상이 꽃이었다. 진한 분홍빛의 매화꽃은 물론, 벌써 필 리 없는 색색의 튤립, 그리고 이름은 잘 모르지만, 간혹 꽃집에서 봤던 알록달록한 색깔의 꽃들까지.

너무 예뻐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을 때, 어느새 다가온 에드워드가 등 뒤에서부터 준영을 끌어안았다.

“마음에 들어?”

“설마 이것 때문에?”

‘준영은 뭘 좋아해?’

퇴원을 하던 날, 에드워드가 갑자기 물었었다.

‘네? 어떤 걸요?’

‘뭐든지. 꽃이든 장식품이든……, 그 어떤 거라도. 보고 있으면 즐거운 거.’

갑자기 그건 왜 묻나 하다, 문득 제이크가 주었던 꽃다발을 보고는 대답했다. 정말 별생각 없이.

‘꽃이 좋아요.’

“뭐 아니라고는 못 하겠지만. 추억이 그다지 없는 집이니까 첫인상이라도 좀 바꿔봐야겠다 싶어서.”

왠지 부끄러워하는 것 같다. 준영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려 했지만, 준영의 등 뒤로 고개를 파묻어 숨는다. 반대편으로 돌아보니, 또 다른 쪽으로 고개를 파묻는다. 결국 준영이 항복했다. 준영은 다시 만개한 꽃들을 바라보았다.

“예뻐요.”

언젠가 제라드가 계절을 착각하게 만들어 강제로 꽃을 피우게 한다며 투덜거렸던 게 떠올랐다. 언제 꽃샘추위에 저 불쌍한 꽃들이 얼어붙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 이기적이고 싶다.

“정말로.”

진심으로 다시 속삭이자, 준영의 배를 감싸고 있던 에드워드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준영은 잠시 동안 그렇게 에드워드와 함께 훌쩍 봄이 와버린 햄턴 가의 정원을 감상하였다.

“말도 마. 저거 공사한다고 밤마다 어찌나 시끄러운지.”

“……밤에도요?”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제라드가 곧장 준영의 방으로 와, 다짜고짜 고자질을 하기 바빴다.

에드워드는 그만 닥쳐! 라는 의미의 신호를 계속해서 보냈지만, 제라드에게는 보이지 않나 보다. 아니 보여도 무시하는 게 분명히 보였다.

준영은 그저 말없이 차만 마셨다.

“그나저나 살이 좀 올랐네?”

“그래요? 정말로요?”

요즘 준영의 하루 일과는 체중 재기부터였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체중계에 올라섰다가, 실망하고 내려오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결국 퇴원한 지 4일 만에 에드워드가 준영의 체중계를 숨겨버렸다.

덕분에 자신의 체중이 어찌 되는지 몰라 매우 궁금했는데, 제라드의 말을 들으니 그래도 살이 붙기는 하나 보다.

“그래도 좋기는 하다. 사람들 고생시킨 맛은 있네.”

“보너스 두둑이 줬어. 그들도 불만 없다고. 이제 그만 좀 해.”

참다못한 에드워드가 제라드를 쥐어박았다. 제라드는 더 신이 나 에드워드를 괴롭힌다. 그러든지 말든지, 준영은 다시 정원을 바라보았다.

정원에 은은한 조명이 꽃들을 더 아름답게 비추고 있었다. 만약 이곳이 공공시설이었다면 사람들로 북적였을 거다.

“실례하겠습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크리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이동용 트레이가 들려 있었다.

“뭐지?”

“아, 내 저녁.”

“…….”

너무 당당하게 대답하는 바람에 에드워드는 화조차 내지 못했고 준영은 다시금 키득거리며 웃었다.

“내가 포장해 온 거. 거리가 너무 멀어서 다시 데워야 해서 부탁한 거야. 같이 먹자.

“우리는 저녁 이미 먹었는데.”

“또 먹어. 어차피 콩알만큼 먹었을 거 아니야.”

준영의 말에 제라드가 콧방귀를 낀다. 에드워드는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주억거렸고 준영은 콩알보다는 많았다며 반론했다.

그때 크리스가 가져온 음식을 테이블 위에 올려주었다.

“……이건.”

“먹어봤어? 한국의 불고기라는 건데.”

“네. 할머니가 자주 해줬어요.”

비록 미국에서 태어났어도, 부모 나라의 음식도 먹어보라며 할머니가 가끔 만들어 주셨다. 어디서 구한 요리책으로 만든 불고기는 달콤했다. 고기가 많이 질기기는 했지만.

“미국 소고기로 했으면 좀 질겼을 텐데. 한국처럼 얇게 포 떠주지 않아서. 이건 진짜 한국인이 만든 거라고 하더라고. 자, 먹어봐.”

실제로 할머니가 해 준 불고기는 맛은 있지만 많이 질겨서 한참을 씹어야 했다. 덕분에 만들어 준 할머니는 잘 드시지 못했다.

제라드가 불고기 한 점을 앞접시에 담아 준영에게 내밀었다. 접시를 건네받은 뒤 나무젓가락으로 집어 한 입 입에 넣었다.

“부드러워. ……맛있다.”

“그래?”

스테이크와는 또 다른 부드러움이다. 육즙이 배어 나오는 맛은 없지만 양념이 잘 배어 고기를 씹을수록 달콤하고 고소했다.

“흠……. 괜찮은데?”

준영의 반응에 맛을 본 에드워드도 괜찮다며 주억거렸다. 제라드가 크리스에게 뭐하냐며 앉으라 말한다. 사뿐히 거절하는 크리스에게 준영이 안타까워 재차 권했다.

“그래요. 크리스도 같이 먹어요. 어쨌든 제라드 친구잖아요.”

“이런 놈과 친구 한 적 없습니다만?”

크리스가 무슨 말을 하든 말든 제라드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접시를 그에게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게 된 크리스는 준영의 계속되는 권유에 어쩔 수 없이 빈자리에 앉았고, 준영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어차피 곧 퇴근 시간이잖아. 이 햄턴 가의 가장 큰어른이 허락을 하니까 괜찮아.”

“내가 언제.”

에드워드가 황당하다는 듯이 대꾸했지만, 제라드는 뻔뻔하게 되받아친다.

“누가 테드래? 이 집 가장 높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준영이지. 그치~?”

“응? ……네~.”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건 찬성하지 않지만, 이렇게 해야 크리스가 느긋하게 먹을 것 같아 긍정했다. 크리스는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았고 에드워드는 못 말리겠다며 허탈하게 웃었지만 부정은 하지 않았다.

“설마 와인 한 잔에 저 모양이라니.”

제라드는 이리 비틀, 저리 비틀거리는 준영을 황당하게 바라보았다. 더 정확히는 반 잔이다. 준영의 잔에는 아직 많은 양의 와인이 남아있었다.

“그만큼 몸이 약하다는 뜻이지. 먹이지 말 걸 그랬어.”

자신도 먹어보고 싶다고 하도 졸라서, 딱 한 잔만이다 하고 줬던 게 후회가 된다. 에드워드는 안타까움에 혀를 차고는 골골거리는 준영을 안아 들었다.

“슬슬 방으로 가야겠군.”

“조명도 꺼. 꽃들도 잠들어야지.”

기지개를 피던 제라드가 팔도 내리기도 전, 발코니 쪽으로 다가가는 크리스를 보았다. 시골에서 자라서 그런지, 감수성이 남다르다.

“솔직히 말해. 너 사실은 오메가 아니야?”

“무슨 소리야?”

“예전부터 가끔씩 묘한 위화감이 느껴지거든. 지금도 그렇고.”

감수성이 남다른 크리스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자, 그가 탁 하고 치우고는 차갑게 대꾸했다.

“그거 성차별이야. 꽃 감상에 오메가 베타가 어딨어.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 질 떨어져 보이니까.”

“뭐? 너……, 제길.”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 이곳이 준영의 방이며 그가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이놈은 가끔씩 이런 식이다. 잘 지내는가 싶다가도 종종 이렇게 차갑게 굴 때에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참, 에드워드 씨도 이 방에서 생활하신다고 하셨죠? 일단 필요한 물건만 대충 옮겼는데 혹,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그래. 고마워. 그리고 사이좋은 거 알겠으니 그만 싸워.”

에드워드의 지적에 크리스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그 모습에 제라드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크리스와 알게 된 지 어언 10년. 지금까지 자신에게는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모습에 어이가 없다.

크리스는 빠르게 치운 그릇들을 트레이에 올린 후, 에드워드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고는 방을 나갔다.

제라드도 조금은 성의 없게 인사를 건네고는 그 뒤를 쫓았다.

“야, 크리스. 너 설마……!”

방을 나서자마자 크리스의 어깨를 잡아당겨 돌려세웠다. 크리스는 잔뜩 경계한 표정으로 제라드를 바라보았다.

“왜?”

또 무슨 멍청한 소리를 하려고 그러는 거냐는 표정이 노골적으로 보인다. 욱했지만, 지금은 의문을 푸는 게 먼저였다.

“너 혹시 좋아한다는 사람이…….”

설마설마하고 물어보니, 크리스의 얼굴이 단숨에 붉어진다. 역시구나. 제라드는 자신의 멍청한 실수에 낭패를 맛보았다. 그런 것도 모르고 그에게 이곳 집사 자리를 소개시켜 줬다니.

“하아. 미안해. 네 마음도 모르고.”

“도대체 네가 왜 미안하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해해. 에드워드 녀석이…… 허점이 많기는 해도 잘난 놈이기는 하니까. 하지만 크리스. 이제 포기하느……. 윽!”

아주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제라드의 발등을 밟은 크리스는 한없이 한심한 것을 보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다 휙 몸을 돌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야! 내가 뭘 어쨌다고! 크으……. 아파라.”

“쯧……. 집안 유전인가.”

“뭐? 무슨 소리야?”

언제 나온 건지 에드워드가 방문 앞에 서서 제라드를 한심한 눈으로 보더니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든다. 그리고는 대답도 않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픔에 발등을 주무르고 있던 제라드만이 황망하게 복도에 남겨져 버렸다.

준영이 상황을 설명하면 할수록 제라드의 웃음은 커져만 갔다.

“그렇게 웃겨요?”

질문을 하자 이번엔 아주 눈물까지 뿌린다. 진정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하아……. 정말이지. 테드. 하하하!”

진정되나 했더니 다시 큰소리로 웃는다.

저렇게까지 웃긴가 하면서도 솔직히 이해는 간다. 자신도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 전해 듣는 일이었다면 아마 맘껏 웃었을 것이다.

햄턴 가로 돌아온 지 어언 일주일.

요즘 준영은 병원에서보다 더 심한 참견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정말 에드워드가 저렇게까지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처음에는 그래도 이해를 했다. 아직 자신이 너무 마르고 약하니, 에드워드 눈에는 한없이 걱정스러울 거라고. 거기다 아직 밤에 악몽을 가끔씩이라도 꾸니, 더더욱 걱정이 될 거라고.

그래서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흐를수록 이건 뭔가 아니다 싶다.

일단 침실만 나오면 난리다.

이건 어제의 일이었다. 슬슬 봄이 되어가는 햇살이 너무 좋아 정원이나 산책하자 싶어 방을 나섰다.

그런데 어디 갔는지 잠시 보이지 않던 에드워드가 딱 기똥찬 타이밍에 이 층으로 올라오다 딱 마주쳤다.

“추운데 그렇게 얇게 입고 나오다니!”

난방이 잘 되다 못해 너무 더워 고용인들이 안에서는 반팔을 입고 있었다. 하물며 준영은 에드워드의 잔소리에 여전히 긴팔을 입고 있어서 땀까지 날 지경이었다.

“안 추운데…….”

“안 돼. 밖이 얼마나 추운지 알아?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가뜩이나 면역력도 약하면서!”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결국 에드워드는 본인이 만족하는 수준까지 준영을 껴입히고는 정원으로 내보냈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채 몇 발짝도 걷지 않았는데, 다리 아프지 않냐며 묻더니, 걸은 지 10분도 되지 않아 준영을 안아 들었다. 그렇다고 정원을 조금 더 돌아다녔다면 말이라도 안 한다. 바람 좀 불었다고 정원을 나선 지 15분 만에 돌아와야 했다.

그 정도면 애교다. 이건 불과 3일 전에 안 사실이다.

사실 준영의 위는 아직 정상이 아니다. 애초에 준영은 소식하는 편이었다. 거기다 임신했을 때에는 입덧과 여러 가지 악재로 인해 입맛이 뚝 떨어져 양이 더 심하게 줄었다.

그랬던 준영이 하루아침에 정상적인 양을 먹을 수 있냔 말이다.

그래도 나름 먹으려고 애를 써보지만, 이상하게 나날이 식탁 위에 올라오는 음식의 양이 많아졌다.

결국 준영은 KO를 선언.

소화불량에 걸리면 더 손해다 싶어, 적당히 배가 차면 수저를 내려놓았다.

웬일로 더 먹으라고 난리라도 칠 거라 생각했지만, 에드워드는 딱히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도 준영이 노력하는 걸 알아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준영의 큰 착각이었다.

그날 저녁 뭔가 시원한 음료 같은 게 먹고 싶어 카디건을 걸치고 주방으로 내려갔다가 알게 되었다.

에드워드가 요리사와 주방 보조들을 세워놓고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모습을.

“입에 맞지 않으니 손을 내려놨겠지. 벌써 3일째야. 준영이 음식을 남긴 게. 난 자네를 믿고 고용했는데 아직도 준영의 입맛을 사로잡지 못하다니!”

“에드워드.”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 준영? 왜 내려왔어? 춥지 않아?”

얼마나 환하고 다정하게 웃는지. 만약 방금 전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깜빡 속았을지도 모른다.

“우리 대화 좀 해요.”

준영의 부름에 에드워드는 여전히 상황 판단 못 하고 미소가 만연한 채 뒤를 따랐다. 준영은 방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에드워드에게 차갑게 경고했다.

“내가 음식을 남긴 건,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소화불량에 걸릴까 봐서였어요. 오히려 너무 맛있었다구요.”

“그런……! 하지만 늘 남기잖아. 늘 억지로 먹는 모습이라고. 입맛에 맞지 않는데 억지로 먹지 않아도 돼. 요리사를 바꾸면 그만이야.”

이 남자…….

잊고 있었다. 아무리 어린 시절이 불우했다고 해도 그는 이 세계에 둘도 없을 정도로 풍족한 삶을 살았던 남자라는 걸.

“요리사 바꾸지 마세요. 엄밀히 나에게 뭘 좋아하는지 묻지 않은 에드워드의 잘못이죠.”

“뭐?”

“에드워드는 내가 좋아하는 거 알았어요? 먹는 것만 보고 바로? 가장 옆에서 날 보고 있는 에드워드도 내 식성을 다 파악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얼굴 한 번 마주친 적 없는 요리사에게 내 식성을 알아맞히라고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에드워드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이에요!”

그래. 준영도 잘 안다. 자신이 심했다는 걸. 아마도 너무 오랫동안 과잉보호를 받는 바람에 숨이 막혀서, 자신도 모르게 과하게 반응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걸 뒤늦게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는 제대로 의기소침해진 뒤였다.

“……미안.”

에드워드는 그렇게 자신의 방에 처박혀 나오지 않고 있었다.

* ♟ *

“크흐흐흐흐! 아하하하하!”

크리스는 더하군. 잠시 볼일이 있어 출타했다가 돌아온 크리스가, 제라드가 웃는 모습을 보고는 뭐냐고 물었고, 제라드는 양념까지 더해 설명을 해 주었다.

그 결과 크리스는 아주 배를 잡은 채 식탁에 엎드려 웃었다.

준영은 그가 웃음을 멈출 때까지 덤덤히 로즈마리 차를 호로록 마셨다.

겨우 웃음이 진정된 크리스가 눈물까지 닦으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삐지는 게 풀리냐고 제라드에게 묻는 중인가요?”

“네? 아니요?”

“그냥 준영이 말해 주던데?”

준영과 제라드가 동시에 대답했다. 크리스는 당황하며 되물었다.

“그럼 삐진 거 풀지 않을 겁니까?”

“네?”

풀어야 돼요?

준영은 차마 말로는 못 하고 눈빛으로 물었다.

“놔 둬. 뭐 하러. 덕분에 준영도 자유를 찾았는데.”

“뭐, 준영이 편하다면야 상관없지만…….”

크리스가 말을 하다 말고 노골적으로 끈다. 왜 그러나 하다가, 이어지는 크리스의 말에 준영은 진심으로 골치가 아파 와 이마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며칠 전부터 에드워드 씨가 갑자기 고용인들을 들들 볶는 건 아는지……. 얘기를 들어보니 딱 준영에게 삐진 시점부터군요.”

제라드는 기어코 웃다가 뒤로 쿵 하고 넘어갔다.

노크를 하자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뭡니까.”

대답을 한 사람이 정말로 에드워드가 맞나 싶을 정도다. 어제 준영에게 한마디 들은 후에도 사실 마주치기는 했다.

일단 밥은 늘 같이 먹었다. 거기다 새벽에 자다 보니 옆에 와 있기도 했다. 눈을 마주치면 일단 웃기부터 해서 그의 심기가 어떤지 잘 몰랐다.

“에드워드. 들어가도 돼요?”

“준영?”

화들짝 놀란다 싶더니 갑자기 우당탕거리는 소리도 연이어 들렸다. 소리로 추측건대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다.

설마 의자째 넘어진 건 아니겠지?

잠시 뒤 문이 열렸다. 외견상은 다친 데는 없어 보이는데 들어오라며 옆으로 비켜서면서 절뚝거린다.

역시 의자째 넘어졌나 보다.

괜찮냐고 물으려다, 왠지 에드워드 성격상 절대 아니라고 시치미를 뗄 것 같아 모른 척 넘겼다.

“뭐 했어요?”

“응? 아, 서류 정리를 좀 하고 있었어.”

안으로 들어서며 질문을 하고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생각해 보니 이 방에 온 적이 별로 없다. 그것도 이번에 저택에 와서 처음 구경차 온 게 다였다.

“앉아. 뭐라도 마시겠어?”

허둥지둥 의자를 빼준다. 준영은 자리에 앉고는 다시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때도 생각한 거지만 여긴 책이 참 많네요.”

웃긴 건 서재가 따로 있는데도 이곳도 만만찮게 책이 많다.

“보고 싶은 게 있어? 거의 전공 서적이지만.”

에드워드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부끄럽게도 공부와는 담을 쌓았다. 공부보다는 직업을 구하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자격증도 몇 개 되지만 중요한 건 오메가라는 이유로 그것들은 종이 쪼가리가 되어버린다.

“에드워드가 공부한 것들은 여기 뒀나 봐요?”

“정확히는 어머니가 잘 보던 책들이야. 지식 탐구에 욕심이 많으셨지. 그냥 전문서적이면 다 보신 것 같아. 그것 중에서도 꽤 자주 보신 것들이고.”

말을 하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난 에드워드가 천천히 책장으로 가 무언가를 찾는다 싶더니 곧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천문학책이야. 초보자를 위해 쉽게 풀어놓은 거야. 여러 가지 별자리에 대한 민화나 전설도 적혀있어. 준영이 좋아할 만한 내용이지.”

“고마워요. 잘 읽을게요.”

꽤 자주 읽은 듯, 표지가 살짝 삭아있었다. 그래서 왠지 더 마음에 들었다.

“내 어머니는 그걸 밤에 많이 읽어주셨어. 덕분에 지금도 별자리는 달달 외고 있지. 그래, 언제 아이슬란드에 한 번 가. 하늘이 깨끗해서 별은 물론 오로라도 잘 볼 수 있어.”

“응. 가보고 싶어요.”

상상만으로도 두근거렸다. 오로라라니. 어린 시절 꼭 한번 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였다.

“그래. 꼭. ……그보다 준영. 화난 건 풀렸어?”

“네?”

“나 때문에 화난 거 아니야? 하아……. 내가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일단 인터넷에 알아보니, 화가 풀릴 때까지는 한 발짝 떨어져서 지켜보라고 하더라고.”

이런.

준영은 냉큼 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웃음이 나올 것 같다. 사실 에드워드에게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하러 온 거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준영?”

“화 안 났어요. 그리고 누가 그런 말 한 건지 모르겠지만 난 그런 것보다는…….”

준영은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에드워드 앞으로 바싹 다가갔다.

당황하는 에드워드의 품에 파고들었다. 요즘은 잠을 잘 때도 꼭 안겨 자서일까. 이 품이 너무 익숙하다. 익숙한 만큼 기분이 좋다.

“이렇게 안아주는 게 더 빨리 풀리는 것 같아요.”

체온에 좋다. 온기는 신기하리만치 많은 감정을 바꾸어준다.

슬픔과 화는 누그러뜨리고 기쁨과 포근함은 키운다. 지금처럼.

아, 나는 지금 행복하구나. 기쁨이 더 커지는 걸 보면.

“무슨 뜻인지. 알겠어.”

에드워드는 뛰어난 학생답게 곧장 실천에 옮겼다. 준영을 답답할 정도로 꼭 안아주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요.”

“주의하지.”

“나 이제 환자 아니에요. 에드워드도 알잖아요.”

“에디.”

“네?”

“에디라고 불러주겠어? ……내 애칭.”

“애칭이 테드 아니었어요?”

“유일하게 어머니가 날…… 에디라고 불렀어.”

순간 말문이 막혔다.

“널 만나기 전에는 평생 그 누구도 어머니가 불렀던 애칭으로 날 부르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어. 어머니와의 유일한 추억이 망가지는 기분이었거든. 하지만 준영. 부디 불러주겠어? ……어머니와의 추억을 너와 공유하고 싶다.”

큰일이다. 준영은 와락 에드워드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다. 미치도록 행복해서 무서울 정도다.

“네. ……에디.”

“사랑해.”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에드워드에게…….

“테드. 나 할 말이……, 엇! 미안!”

쾅 하고 열렸다가 쾅 하고 닫혔다.

“방금 제라드…….”

였죠? 뒷말은 굳이 잇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방문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어 답을 알았으니까.

에드워드가 준 책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그를 간신히 깨웠다.

……목 아파. 준영은 들어오라 말을 하고는 이리저리 목을 움직여 스트레칭을 하였다. 안으로 들어온 이는 예상치 못하게 제라드였다.

출근을 한 게 아닌가?

“제라드. 어쩐 일에요?”

“하이. 아침은 먹었어?”

“네. 크리스가 가져다줘서, 간단하게 먹었어요. ……오늘 에드워드가 회사에 간다고 하더니, 교대로 간 건가 봐요?”

정말 회사에서 잘린 건지, 주야장천 준영의 옆에 붙어있던 에드워드가 웬일로 출근을 하였다. 정말로 가기 싫다는 티를 팍팍 내고는 준영을 끌어안은 채 미적거리다, 보다 못한 크리스가 안으로 들어와 강제로 끌고 나가 버렸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차가 출발한 뒤였다. 배웅도 못 하고 헤어져 미안해 전화를 하니, 또 한참을 웅얼거려 덕분에 신나게 웃었다.

“응. 일부러. 겸사겸사 준영과 대화도 좀 할 겸.”

제라드의 말에 준영은 알겠다 대답하고는 보던 책에 책갈피를 꽂아 덮었다. 침대에서 내려서는데, 다가온 제라드가 방금 전 준영이 보던 책을 집어 들더니 부드럽게 웃는다.

“이거 큰어머니 책이구나.”

“어? 알아요?”

하긴 모르는 게 더 이상한가? 가족이니까?

“테드가 늘 이 책을 보길래, 보여달랬더니 절대로 안 된다잖아. 결국 궁금해서 내 돈 주고 샀지. ……나중에 알았어. 이게 어머니가 가장 아끼는 책이었단 걸.”

“그랬구나.”

소중한 건 알았지만, 그 말을 듣고 보니 더 조심해서 읽어야겠구나 싶다. 이런 소중한 책이라면 그냥 제라드 말처럼 같은 책을 사서 봐도 될 텐데 싶었다. 하지만 에드워드의 기분 또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뭐, 예상은 했지만……. 그래서, 내 말이 맞지?”

“네? 뭐가요?”

“내가 말했잖아. 네가 이 집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 기억나요.”

제라드가 언젠가 준영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에드워드가 준영의 앞에 무릎 꿇을 거라고 했었다.

“꿇었어?”

“…….”

비유가 아니었구나.

“아직 안 꿇었어? 오늘 오면 꿇으라고 해.”

그것보다 더한 걸 했지만 에드워드의 체면 때문에 굳이 말을 하지는 않았다. 제라드는 들고 있던 책을 협탁 위에 잘 두고는 소파로 와 맞은편에 앉았다.

“내가 생각이 짧았네. 차라도 가져와야 했었나?”

“아니요. 방금 차 마셨어요. 뭐든 너무 과하게 마시면 안 좋다고 물 마시래요.”

“누가.”

“크리스가요.”

“아하하. 그놈이 좀 걱정이 많아. 동생이 밑으로 5명이라 그런가. 유달리 잘 챙기는 편이고.”

“와……. 5명이라니. 부럽다.”

혼자 자란 준영의 입장에서는 형제가 많다는 게 정말로 부러웠다. 실제로 에드워드와 결혼을 하기 전에는 그에게 동생이 2명이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기도 했었다.

물론 뚜껑을 열어보니 전혀 달랐지만.

“본인은 혼자였으면 하던데?”

“아하하하. 나이 차이가 많이 나나 봐요?”

“바로 밑의 동생이 10살 차이가 난다던가? 여튼 막내가 이제 막 2살이 됐대.”

“……힘들겠네요.”

“그렇지? 아, 그보다. 이런 대화도 즐겁지만, 사실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서 온 거야.”

제라드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어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라드가 한 말 중에 자신에게 해가 되었던 건 없었다. 오히려 큰 도움이 되었다. 그랬기에 어떤 말이라도 들어줄 의향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넌 싫을 수도 있을 것 같아.”

“…….”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혹시 레베카와 셀린느를 용서해주라는 말이 아닐까. 자신도 요즘은 신문과 인터넷을 보고 있어 대충의 상황은 안다. 지금 에드워드가 그 어떤 것보다 총력을 다해 두 사람을 밀어붙이고 있다는 걸.

실제로 셀린느 같은 경우에는 17년이 나왔다고 들었다. 생각보다 적게 나온 거라며 에드워드가 분노하는 것도 봤다.

솔직히 준영도 셀린느는 형량이 적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이기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지금 기분으로는 평생 용서해주고 싶지 않았다.

“표정을 보니 뭔가 다르게 오해한 분위기 같은데, 나도 셀린느의 형량이 적다고 생각하는 중이야. 걱정 마.”

“미안해요. 제라드를 의심했다기보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그럴 수 있어. 나라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그러니 그런 걸로 미안해하지 마.”

생각해 보면 제라드는 늘 이랬다. 이상하리만치 자신에게 잘해 주었다. 에드워드조차 곁에 있어 주지 않았을 때 곁을 지켜주던 사람이었다. 그를 잠시라도 의심해서 미안했다.

“응. 그럴게요. ……그러면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에드워드 문제야. 복귀를 안 하려고 해.”

“네? 잘린 게 아니었어요?”

“끙. 그럴 리가. 햄턴 사의 실세인 녀석이 그 정도 일로 잘릴 리가 없잖아.”

“아…….”

괜히 걱정했구나. 지금까지 에드워드에게 어울릴만한 직업을 고민했던 자신이 왠지 무안해지는 순간이었다. 준영은 아무에게도 그 고민을 털어놓지 않기를 잘했다 생각하며 이어지는 제라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난 사실 경영에 대해 무지해. 물론 공부를 하고 있고 비서실장인 톰슨도 이래저래 도와주지만……, 하면 할수록 깨달아. 아, 여긴 내 자리가 아니라는 걸.”

“하기 싫은 거예요?”

보통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되면 좋아하지 않나? 대기업의 자제들이 서로 한자리 차지하려고 그렇게 재판을 하는 것만 봐도 그렇게 보였다.

“응. 진짜 하기 싫어. 난 모델 일이 좋아. 처음에는 공부를 하기 싫어서, 어머니와 마주치기 싫어서 도망치는 용도로 시작한 거였어. 하지만, 겨우 모델 일의 재미를 알아가는 중이야. 나름의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고. 곧 있으면 거장 앙토니의 패션쇼도 주최될 예정인데……. 난 명단도 못 내밀게 생겼다고!”

찬찬히 말을 잇던 제라드가 어느새 울분을 감치지 못하고 버럭버럭 소리를 내지른다. 준영이 가만히 쳐다보는 시선을 깨닫고서야,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고 생각한 건지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감정을 추슬렀다.

“미안. 나도 모르게.”

“아니요. 계속 말해요.”

“하아……. 말 그대로야. 사실 슬슬 돌아와야 돼. 아니 꼭 필요해. 지금 햄턴 사는 말 그대로 크게 앓이를 하고 난 뒤야. 늙은 주춧돌들이 대거 이탈해버리는 바람에 젊은 경영인들로 채워졌지. 그런데 그런 경영인들을 이끌어갈 우두머리가 없어. 나? 그들이 내 말을 들을 것 같아? 아니, 설령 듣는다고 해도 난 임시야. 절대로 이 일을 끝까지 할 생각이 없어. ……이런 상황이라 난 그들에게 명령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에드워드는 왜 돌아가지 않으려 하는 거죠?”

긴가민가하며 물었지만 대답은 역시나였다.

“너 때문에. 자신이 지금까지 해 주지 못했던 걸 모두 해 주고 싶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나 하고 있다고. ……좋아?”

이런.

준영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고개를 숙였다.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그런 건데 이미 제라드는 아는 것처럼 물었다. 결국 준영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제라드를 보고는 배시시 웃었다.

“미치겠네. 너까지 그러지 말라고.”

“아니요. 아니에요. 제라드. ……물론 기뻐요. 에드워드가 날 위해 모든 걸 포기했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안 기쁠 수가 있겠어요. 하지만 제라드 말이 맞아요. 이제는 슬슬 자기 자리를 찾아가야죠.”

백수 에드워드도 좋지만, 역시나 자신의 일을 긍지 있게 하고 있는 에드워드가 좋다.

“내가 잘 설득해 볼게요.”

“그래. 힘들겠지만, 너 아니면 해 줄 사람이 없어.”

“네. 그럴게요. 그리고 제라드. 이왕 시간 난 거…….”

“응?”

막 일어서려던 제라드가 다시 엉덩이를 붙이며 준영을 바라보았다.

“그때 말해 준다고 했던 거.”

“……아.”

“시간 되면 말해 주세요. 듣고 싶어요. 에드워드 말로는 우리가 어디서 만난 적이 있다고 하던데, 난 기억이 안 나서.”

“하긴, 수년 전 일이고……. 무엇보다 난 이름도 밝히지 않았으니까.”

제라드가 피식 웃더니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말들. 준영은 놀라움 반, 반가움 반의 기분으로 제라드의 말을 경청했다.

이야기는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할머니를 함께 추억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 가장 준영을 들뜨게 만들었다.

“나한테는 급한 볼일이 있다고 회사로 나오라 해놓고 그놈은 여기서 놀았다는 말이지?”

생각보다 조금 일찍 돌아온 에드워드는 오자마자 준영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투덜거렸다. 요즘 들어 이 남자는 점점 어린애가 되어가는 것 같다 싶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싫은 건 아니다.

아니 너무 좋았다.

“에드워드. 나 할 말 있어요.”

“아니. 없어. 난.”

이미 눈치를 챘나 보다. 하긴 에드워드처럼 눈치 빠른 남자가, 제라드와 하루 종일 수다 떨고 놀았다는 대목에서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다.

“들어봐요.”

“싫어. 다른 건 몰라도 그 일은 싫어.”

“있죠. 일 년 전쯤이었어요. 아니다. 일 년이 더 지났구나. 햄턴 사에 출근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어요.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청소일이라, 정말 엉망진창이었는데 결국 클레임이 날아왔죠. 제가 사무실 안 쓰레기통을 제대로 치우지 못했나 봐요. 그래서 부랴부랴 치우러 갔었죠.”

“…….”

“예전부터 가끔씩 보던 한 남자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거예요. 멋진 슈트를 차려입고, 직원들과 전문 용어가 가득 섞인 대화를 나누면서. 어찌나 멋진지. 아……, 저게 알파구나. 어찌나 멋진지…….”

“준영.”

“들어봐요. 아직 얘기 안 끝났어요.”

말을 끊으려던 에드워드를 타박하며 준영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왠지 나 자신이 초라해지는 거예요. 나도 알파로 태어났다면 인생이 달라졌을까? 심지어 그 직원들 무리 중에는 나와 비슷한 나잇대도 있어 보였죠. 이상하게 그날따라 더 초라해져서 움츠러들었는데……. 막 지나가던 우두머리 남자가 갑자기 멈추더니 날 내려다보고는 이렇게 말했어요.”

“…….”

“언제나 수고 많으십니다. 덕분에 회사가 늘 깨끗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건.”

“그때였어요. 제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 게. 그 전까지만 해도 잘생긴 남자다. 아, 멋진 남자다 정도였는데 그 말 한 마디에 그 남자가 너무나 크게 다가왔어요. 그래서 더욱더 눈이 갔죠.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 남자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어요.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얼마나 멋진지 다시 알게 되고 그래서 더 반하게 되고…….”

“그건 연기야. 하나도 잘난 게 없으면서, 남들 눈을 의식해서…….”

“그래도 그건 정말 큰 힘이 되었어요. 설령 가식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큰 힘이 되는 말이었어요. 그전까지만 해도 부끄럽다고 생각했던 일이었는데 어느샌가 뿌듯하고 자긍심 넘치는 일이 되었어요. 에드워드. ……그게 내가 사랑한 남자예요.”

“……다시 말해 줄래?”

여태껏 준영의 등에 얼굴을 묻고 있던 에드워드가 그제야 자세를 바로 해 준영을 마주 본다. 한없이 애틋한 눈빛에, 결국 준영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입을 열었다.

“사랑해요. 에디.”

감히 아름답다고 칭해도 될 정도로 환하게 웃는 남자의 품에 이번에는 준영이 파고들었다.

“당신은 나에게 충분히 사랑을 주었어요. 그리고 이제는 분명하게 알아요. ……당신도 날 사랑한다는 걸.”

“준영.”

준영을 안고 있는 손끝이 떨린다. 그의 감정이 여실히 전해진다.

“그러니 이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요. 내가 사랑했던 에드워드 햄턴으로 돌아와요. 지금도 사랑하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던 그 에드워드 햄턴을 보고 싶어요.”

“누차 말하지만, 난 널 이기지 못해.”

에드워드가 항복을 표했다. 배시시 웃는 준영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에드워드가 느닷없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얼굴이 가까워지는 것에 깨달았다. 준영은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고, 곧 그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았다.

한참을 겹쳤던 입술이 드디어 떨어졌다. 피가 맴돌기 시작하며 입술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통증조차도 묘한 감각을 낳았다.

멍한 눈으로 에드워드를 바라보는 준영에게 그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멋대로 뛰기 시작한다.

쿵쿵 귓가에 그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다.

“아직 무리인 걸 알아.”

“……네?”

“그냥……, 조금만……. 조금만 만지기만 할게.”

무슨 말인가 할 때, 에드워드의 입술이 다시 겹쳐졌다.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 더 농염한 키스가 이어졌다.

이리저리 각도를 바꿔가며 입속을 헤집는다. 숨이 점차 가빠졌다. 언젠가 에드워드가 알려준 대로 코로 숨을 쉬어보려 해도 역부족이다.

결국 숨이 너무 막혀 에드워드의 등을 살짝 두드리듯 때리고서야 그가 떨어졌다.

흠칫.

마주한 눈동자가 너무 강렬해 준영의 몸을 꽁꽁 묶어버리는 착각이 들었다. 옴짝달싹 못 한 채 굳은 준영에게 마치 겁먹지 말라는 듯 에드워드가 혀로 준영의 입술을 할짝였다.

고양잇과 동물처럼 할짝거리는 혀가 간지럽다.

그 혀는 점차 아래로 내려가 준영의 작은 울대까지도 건드렸다. 한아름 입에 머금은 채 강하게 빨았다. 콜록, 작은 기침이 나오자 미안하다며 다시 혀로 핥는다.

에드워드의 입술이 점차 아래로 내려오더니 이어 움푹 팬 쇄골에서 한참 맴돌았다.

도드라진 뼈를 핥고 이로 문다. 아픔과 간지러움 사이에서 감각이 예민해진다.

혀는 조금 더 아래로 내려왔다.

어느샌가 단추를 풀어헤쳤나 보다. 벌려진 잠옷 사이로 부끄럽게 솟은 유두가 드러났다. 창피함에 손으로 가려보려 했지만, 에드워드가 더 빨랐다.

단숨에 입안 가득 유륜째 머금는다.

“흣…….”

강한 흡입력에 절로 허리가 뒤틀렸다.

쪽쪽.

어떻게든 맛보고 싶은 사람처럼 살을 모으며 빨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몸을 틀며 생소한 쾌감에 파르르 떨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감각에 채 적응도 하기 전, 혀로 빠르게 훑거나 이로 긁는다. 심지어 아프도록 이로 깨무는 행위에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떨었다.

“아흑……!”

“아파?”

못 견딜 정도로 아픈 건 아니다. 하지만 창피함에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며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미안.”

말은 미안하다고 해놓고, 하는 행위는 더 음란하게 바뀐다. 이번에는 반대쪽 가슴을 한아름 물고 빨기 시작한다.

흥분이 점점 극대화되어서일까. 아래가 멋대로 들썩인다. 왠지 엉덩이 부분이 축축하게 젖은 느낌이 신경 쓰인다.

에드워드도 마치 그걸 안다는 듯 입을 떼더니 이번엔 단숨에 아래로 내려가 준영의 잠옷을 벗겨버렸다.

이미 제 모양을 갖춘 성기가 속옷 위에 민망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에드워드는 거리낌 없이 그 성기를 입안 가득 머금었다.

“하읏……! 무슨, 에드워드. 그만, 입 떼요……. 어서……. 흣!”

하지 말라며 머리를 밀어내는데, 어쩐지 더 집요해지는 것 같다. 에드워드는 성기를 입에 문 채 강하게 빨기 시작했다. 마치 온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감각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과한 쾌감에 준영은 기어코 얼마 가지 못해 사정을 해버렸다.

에드워드는 준영이 토해낸 정액 한 방울도 흘리기 아깝다는 듯, 입 한 번 떼지 않고 죄다 삼켰고, 그건 성적으로 무지한 준영에게 너무 과한 경험이었다.

오만 감정이 한꺼번에 올라와 준영을 괴롭혔고, 결국 터져버렸다.

“흑……. 그만하라고, 내가 그만하라고, 흐흐흑!”

“이런. 준영.”

놀란 에드워드가 황급히 준영의 눈물을 닦으며 어르고 달랬다. 아이처럼 엉엉 울면서도 슬그머니 이불을 당겨와 자신의 치부를 가렸다.

에드워드는 준영의 그 모습에 아직 갈 길이 한참 멀었구나를 깊이 깨달으며, 오랫동안 준영의 울음을 달래어야 했다.

정작 자신의 아랫도리도 울고 있었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조차 없던 에드워드였다.

물 들어온 김에 노 저으라고 했던가. 에드워드가 설득되자마자 준영은 다음날 그에게 출근할 것을 요구했다.

바로 갈 필요가 없다는 에드워드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제라드에게 끌고 가라고 시켰고,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싫어하는 에드워드를 강제로 끌고 출근을 하였다.

“에드워드 씨는 점점 퇴행하는 것 같네요.”

“……그건 좀.”

순간 네, 그렇죠? 라고 대답할 뻔한 걸 간신히 돌렸다. 크리스만 있는 게 아니라, 주인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애써 참았지만 이미 큰 의미는 없는 것 같다.

함께 배웅을 하던 몇몇의 고용인들이 소리 죽인 채 웃고 있는걸 봤기 때문이다.

“아침 드셔야지요?”

“네. ……그런데 오늘은 날도 좋은데 밖에서 먹어도 될까요?”

“날이 좋기는 하지만, 아직 쌀쌀합니다. 괜히 에드워드 씨에게 혼나기 싫으니, 우리 온실로 타협하죠.”

크리스의 현명한 판단에 준영은 크게 기뻐하며 동의를 표했다.

“그럼 같이 먹어요. 혼자 먹기 너무 적적하니까.”

“이미 커피와 간단한 빵을 먹기는 했지만……. 제 위장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못하니, 그렇게 하도록 하죠.”

“아하하하. 크리스는 너무 재밌어요.”

센스 넘치는 크리스의 대답에 준영은 기분 좋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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