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이런 적이 있었다. 눈을 뜨니 커다란 병실이고 링거액이 뚝뚝 떨어졌던 적이 있었다.
아니, 꽤 많았던가. 다른 게 있다면, 코에 꽂혀있는 산소 호흡기였다. 이런 걸 쓸 만큼 내가 아팠던가, 조금 의아했지만 머리가 멍한 게 영 사고가 잘 되지 않는다.
멍한 눈으로 규칙적으로 떨어지고 있는 링거를 바라보다 언뜻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등이었다.
넓은 등은 근육이 다부진 것에 비해, 선이 예뻐서일까 굵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예전 햄턴 사의 청소부로 일을 할 때, 동료 아주머니가 마침 지나가던 에드워드를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잘생긴 남자는 뒷모습도 미남이라고.
그 말에 그때도 지금도 동의한다.
셔츠 하나 걸치고 있을 뿐인데도 마치 모델이 서 있는 것 같이 반듯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살짝 그림자가 지는 등이 예뻐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에드워드가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저렇게 한숨을 쉴까.
에드워드 햄턴의 인생에, 무슨 힘든 일이 있다고 저렇게 답답해하는 걸까.
멀뚱히 바라보다 그를 막 부르려 할 때, 진동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에드워드는 빠르게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전화를 받았다.
“아니. 괜찮아. 그래. 하. 어미는 어미라는 건가? 자꾸 그런 식으로 나가면, 제라드에게 참고인으로 가라 해. 잔인? 알아. 하지만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야. 제라드도 더는 어린애가 아니야. 그래. 부탁할게.”
“제라드한테……, 큼큼.”
별생각 없이 되물었다가 당황했다. 목이 너무 갈라져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헛기침을 하다가 에드워드의 몸이 크게 떨리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미세한 떨림은 보란 듯이 커졌다. 왜 저러나 하고 다시 그를 불렀다.
“에드워드……?”
드디어 몸이 천천히 돌려졌다. 이번엔 준영이 당황했다.
가장 먼저 수염에 당황했다.
물론 함께 잠을 자고 난 아침에 살짝 수염이 돋아난 건 보기는 했다. 하지만, 저렇게 덥수룩한 수염은 정말 처음이었다.
하지만 더 놀란 건 다음이었다.
“……왜 울어요?”
에드워드는 넋 나간 사람처럼 준영을 바라보더니 이어 눈물을 뚝 뚝 흘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준영이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상체를 일으키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조금 힘을 줬다고 팔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준영! 가만히 있어!”
에드워드가 빠르게 준영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감싸듯 안고는 다시 바로 눕혔다.
“몸이……, 왜 이렇게…….”
마치 백 미터 달리기를 하면 이럴까, 숨이 가빴다.
“가만히 있어. 괜찮아. ……괜찮아. ……그래. 이제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 걸까. 괜찮다고 하려면 그 전에 눈물부터 거둬야 하지 않을까.
에드워드는 괜찮다고 말을 하면서 흐느끼며 울음을 터트렸다.
영문도 모른 채 준영은 에드워드의 등을 토닥였다.
“뭔지 모르지만……, 네. 알겠어요. 그러니 울지 마요.”
언뜻 등을 토닥이는 자신의 손이 낯설었다. 분명 의지대로 움직이는데, 퀭한 해골 같다 싶었다.
손이 왜 이럴까 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사라가 안으로 들어섰다.
“햄턴 씨. 혈압 좀……. 세상에…….”
“사라 씨. 오래……, 응?”
왜 저렇게 유령을 보는 듯한 표정인 거지? 왜 그러냐 묻기도 전, 사라는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병실을 뛰어나갔다.
“닥터 존슨!”
“에드워드. ……내가 뭘 잘못했나요?”
어리둥절해서 에드워드를 불러보지만, 그는 여전히 눈물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준영의 의문이 풀리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하나 보다.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가장 놀란 건 잠깐 자다 일어난 것 같은데 두 달이 흘렀다는 거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수많은 일들. 심지어 에드워드가 진정한 백수가 되었다는 부분에서도 당황했다.
그럼 원래는 백수가 아니었던 거구나.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지만 말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냥 가만히 경청하다 드디어 말이 끝났을 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되물었다.
“그런데……, 나는 왜 병원에 입원한 거예요?”
준영의 되물음에 에드워드의 표정이 굳는다. 뭔가 잘못된 건가 했다.
에드워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준영의 뺨을 손등으로 훑었다.
“사고가 있었어. 갑자기 히트가 돌아서 약을 맞았는데 그게 몸에 맞지 않았나 봐.”
“……아. 맞다. 나 히트가 왔었다.”
마틸다가 주사를 놓아준 게 어렴풋이 떠올랐다. 준영은 그제야 이해가 가 고개를 끄덕였다.
“큰일이네요. 지금까지는 히트 사이클이 돌지 않아서 몰랐는데……, 약이 맞지 않는다면…….”
“걱정할 필요 없어. 방법이 있으니까.”
“방법?”
“짝 성립을 하면 되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해 바로 반응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짝 성립이라니. 요즘은 법으로도 제재하자는 말이 돌 만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본다.
짝 성립의 로맨스는 소설에서나 있는 거였다.
“강제는 절대로 아니야. 그리고 말 그대로 준영의 몸이 너무 약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어. 잘 먹고 얼른 건강을 회복하면 어쩌면 약 부작용이 생기지 않을 수도 있어. 내가 말한 건 방법 중 하나를 제시한 거야.”
“……네.”
왠지 모를 떨떠름한 기분을 삼키며 대답을 했지만 에드워드는 여전히 준영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안쓰러움이 물씬 묻어나는 눈빛이 부담스럽다.
자신은 하나도 아프지 않은데, 엄청난 환자 취급을 하는 것도 곤혹스러웠다.
“짝. ……난 하고 싶어.”
“…….”
“설령 우리가 늙어 죽기 전이라도 상관없으니. ……언젠가는 꼭 하고 싶어.”
“에드워드. 늙어 죽을 정도면 일단 사이클이 돌지 않을 건데요.”
심각한 오류를 지적하자 에드워드가 허탈하게 웃는다. 딱히 웃으라 한 말이 아닌데도 뭐가 그리 웃긴지 웃음을 이어가던 에드워드가 갑자기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준영의 두 눈을 응시한다.
링거 바늘이 꽂혀있지 않은 손을 양손으로 잡더니 손가락에 입을 맞춘다.
“아…….”
하나하나 경건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준영은 그저 숨을 죽인 채 에드워드의 행동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드는 기어코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다.
“깨어나 줘서 고마워.”
처음으로 깨달았다.
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에드워드가 얼마나 자신이 눈뜨기를 바라고 또 바란 건지를.
한줄기 흘러내린 눈물이 모든 걸 다 설명해 주는 듯했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그 말을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젓더니 그대로 준영의 손을 잡아당겨 넓은 가슴으로 감싼다.
“사랑한다. ……사랑해. 이 말을 눈뜬 너에게 할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
‘사랑한다.’
‘사랑해. 준영.’
‘날씨가 너무 좋아. 너와 산책을 나가 보고 싶어.’
‘일주일째 눈이야.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동영상을 남겨놓을게’
‘준영. 수염을 깎지 않아도 되는 게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어. 정말 편해.’
‘그, 불고기라는 걸 먹어보고 싶어. 빵 사이에 넣어서 먹어도 맛있다고 하던데…….’
작은 단어에서부터, 시작된 기억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환청처럼 들려 온 소리가 실제로 들은 거란 걸 알 수 있었다.
“준영?”
두 달 동안, 자신을 걱정하고 곁에서 지켜줬다는 생각에 고맙기 이전에 가슴이 아팠다.
자신은 단편적인 단어를 기억하는 게 전부지만, 분명 더 많은 말들을 속삭여 주었을 것이다.
늘 단정하던, 그가 수염이 덥수룩하고 머리가 길어 지저분해 보이는 데도 정리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해가 되어 쓰라렸다.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아파? 제이크를 부를까?”
고개를 숙인 채 들지 않는 준영의 태도에 에드워드가 마치 준영이 당장 어떻게 될 것처럼 겁을 낸다.
준영은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막 응급 벨을 누르려던 에드워드를 저지시켰다.
“괜찮아요. 그냥. ……그냥. 조금.”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에드워드는 여전히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런 준영의 안색을 살피다, 이어 그의 머리를 조심스레 그러안았다.
“난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 그러니 그런 표정 짓지 마.”
어떻게 힘들지 않았겠는가.
할머니가 일주일만 병원에 입원해도, 밥이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걱정이 되었었다.
하물며 의식조차 잃은 채, 링거로만 생명을 유지했다는데, 어떻게 무섭지 않았을까.
“이제 끝났어. 모두 보상받았어. 그러니 괜찮아.”
위로를 해 줘야 할 사람은 자신인데, 에드워드는 오히려 그런 준영을 다독인다.
이번에는 준영의 눈물이 그치기까지 조금 오래 걸렸다.
노크 소리와 함께 헐레벌떡 제라드가 들어왔다. 에드워드는 제라드가 들어옴과 동시에 손가락을 세웠다.
“쉿. 방금 잠들었어.”
“이런. 준영은? 괜찮아? 의식은? 말은 잘하고?”
“응. 마치 조금 오래 자다 깬 사람처럼 행동하더라. ……다행이지.”
제라드는 서둘러 잠든 준영의 곁으로 가 그의 안색을 살폈다.
“인공호흡기 뺐네?”
“제이크 말로는 호흡도 정상적으로 잘 쉬고 전체적으로 안정적이라고 하더라. 다만 먹은 게 없어서 당분간은 잠을 많이 잘 거라고 하더군. 체력을 회복해야지.”
“하하. 그렇구나.”
“미음 조금 먹자마자 잠들더라. 완전히 체력이 회복되려면, 사람마다 다르지만, 못해도 2주는 더 병원에서 지켜보자고 하더라고.”
말라도 너무 말랐다.
사실 불과 어젯밤에도 공포를 느꼈었다.
문득 준영과 돌아가신 어머니가 겹쳐 보여, 두려움에 한참을 떨었었다. 준영의 양손을 잡고 애원했다. 제발 돌아오라 마음속으로 수십, 수백 번 애원했다.
그리고 속삭였다. 언제나처럼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준영에게 들려주었다.
다짐했다. 자신이 절대 약해지지 않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곁을 지키기를 몇 번이고 다짐했었다.
그럼에도 두려움이 너무 커져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했었다.
그리고 준영이, 기적처럼 자신을 불렀다.
늘 그렸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일상처럼 자신에게 질문을 했었다.
“이제 잘 먹고 잘 자고 얼른 회복하는 일만 남은 거군.”
제라드가 쌕쌕거리며 잠든 준영을 바라보며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가 있어.”
“응?”
“……준영이 기억을 못 해. 자신이 왜 잠든지를.”
“뭐? 그거 다행인 거 아니야?”
자신도 그 사실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무섭고 끔찍한 기억이니 잊으면 된다고.
하지만, 제이크는 부정적이었다.
너무 오래 잠들어 있어 기억에 잠시 장애가 올 뿐, 기억을 할 확률이 높다고 했다.
다른 전문 의사의 소견을 들어봐야 알겠지만, 무작정 안도할 일은 아니라고.
에드워드의 설명에 제라드의 안색도 어두워졌다.
제라드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잠든 준영을 보다 다시 에드워드를 보았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건 에드워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랬으니까.
준영은 대부분 잠을 잤다. 육체가 회복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증상이라며 제이크가 위로를 했지만, 그럼에도 겁은 난다.
지금도 에드워드는 잠든 준영을 마음 졸이며 보고 있었다.
두 시간 전, 겨우 유동식으로 바뀐 점심을 조금 먹고는 30분도 채 되지 않아 졸리다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 사이, 에드워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준영의 곁에서 한순간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다고, 이제는 일어날 거라고 아침에도 그러지 않았냐고 스스로를 다독여봐도 마음은 오히려 더 불안해질 뿐이었다.
이대로 눈 뜨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그런 불안감이 점점 에드워드를 감싸가고 있을 때, 미동도 없던 눈동자가 드디어 천천히 움직였다.
기적처럼 불안감도 함께 사라졌다.
“으음……, 지금 몇 시예요?”
“3시쯤 됐어. 잘 잤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 주었다.
“와……, 나 완전 잠꾸러기 다 됐다. 낮잠을 두 시간이나 자다니.”
“몸이 회복하려면 어쩔 수 없어. 먹은 게 적으니. 에너지도 부족하고.”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먹은 건데.”
에드워드의 설명에 준영이 납득이 안 된다며 중얼거린다.
점심을 먹을 때 준영은 정말로 최선을 다했다. 겨우 다섯 스푼 뜨고 배부르다고 말해서 문제였지만.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유제품 말고는 먹어도 된대.”
“우……, 아뇨.”
아마도 우유라고 대답하려고 했나 보다. 생각해 보면 준영은 늘 우유를 달고 살았다.
밤에 잘 때도 따뜻한 우유 한 잔은 늘 마시고 잤다.
그래서 가끔 그의 몸에서 아기 냄새처럼 난 건가. 그리고 보면 준영의 향기가 살짝 아기 분 냄새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이런 생각을 했다는 걸 알면 삐지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삐지는 것도 귀엽겠구나 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가 싶어 피식 웃었다.
그런데 준영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에드워드를 본다.
“왜? 얼굴에 뭐 묻었어? 아……, 간만에 면도했어. 수염 싫어하는 것 같아서.”
“음. 싫어한다기보다, 수염으로 에드워드의 잘생긴 얼굴이 가려지는 게 싫은 거예요.”
“내 얼굴이 잘생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건 네가 처음이야.”
솔직한 준영의 대답에 에드워드도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준영이 못 말린다며 키득거리며 웃었다.
“머리카락은 왜 안 깎았어요? 답답해 보여요.”
“깎아야 하는데…….”
잠시라도 널 떠나기가 싫어서. 그 대답을 삼키며 대충 둘러대었다.
“추워서. 나가기가 귀찮네. 요즘 겨울이 다시 오려나 해.”
“그러고 보니 나 잠든 사이에 연말이 지났구나. ……나 한 살 더 먹은 거네요. 이제 23살인 건가.”
크리스마스도, 연말도 지나가 버렸다. 잠들었던 준영도, 뜬 눈으로 보낸 에드워드도.
“올 연말은 함께 보내자. 크리스마스도.”
“……네.”
대답에 자신감이 없다. 순간 준영의 머릿속이 보였다. 아마도 내년에도 함께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게 뻔하다.
준영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러니 구차한 변명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올 연말에 준영에게 말해 줄 것이다.
봐, 내 말대로지? 그리고 내년에도 난 네 옆에 있다는 걸 꼭 증명해 보일 거라고. 그렇게 자랑스레 말해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준영도 분명 에드워드에 대한 신뢰가 쌓일 것이다. 그게 몇 년이 흐르든, 에드워드는 자신이 있었다. 끈기와 인내는 자신의 큰 장점 중 하나니까.
“퇴원하면 같이 가 줘.”
“어디를요?”
“헤어숍에. 준영의 집 근처에도 몇 군데 있던데. 준영이 가는 곳 없어?”
“상관은 없지만, 에드워드가 가는 곳에 비하면…….”
“준영이 머리 스타일 사랑스럽다고 생각했어. 그러니 마음에 들 거야.”
에드워드의 대답에 준영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대답에 마음에 들었나 보다.
헤헤거리며 작게 미소를 짓는 걸 보니 가슴이 그렇게 따뜻해졌다.
“준영도 머리카락이 많이 자랐어.”
비록 2개월이나 기른 머리치고는 그리 길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설프게 자라나 귀찮아 보였다.
무엇보다 준영의 희고 샤프한 목덜미를 덮고 있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안 그래도 조금 귀찮다 싶었어요. 네. 그렇게 해요. ……제나 아주머니 많이 놀라시겠다. 에드워드 같은 미남이 와서.”
“하하하. 정말 내가 미남이라 다행이야. 새삼 어머니에게 감사하군.”
“에드워드는 어머니를 닮았어요? 그, 아버님은 크게 안 닮은 것 같던데.”
준영에게는 그리 상세하게 알려주지 않았다. 남사스러울 만큼 엉망진창인 집안 사정이 부끄러운 것도 있지만, 이제 막 깨어난 준영에게 충격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더는 미룰 수 없다 싶어 말을 꺼냈다. 최대한 기억을 잃은 부분은 뺐다.
연계된 내용이라, 분명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그 과거까지 떠올릴 수도 있어, 일부러 둘러 설명했다.
사무엘은 병세가 나빠져서 은퇴를 한 거고, 셀린느는 소송에서 져서 감옥을 갈 거라고. 그리고 레베카는 횡령죄로 검찰에서 조사 중이라는 정도만 알려주었다.
많은 정보를 갑자기 들어서일까. 준영은 혼란스러워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착해빠진 준영은 갑자기 자신이 아는 사람들에게 안 좋은 일이 터지는 것이 안타까울 것이다. 설령 자신에게 해가 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준영은 그런 사람이니까.
“셀린느는…… 몇 년형인가요?”
“아직. 재판을 해야 알겠지만, 그 외에도 다른 죄가 많아서. 못해도 15년 이상은 나오지 않을까 해.”
유산시켰단 이유로 15년까지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준영은 셀린느가 납치의 주범이라는 걸 모르니 아마 형량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싶었다.
에드워드는 어떻게 설득을 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튀어나오는 말은 전혀 달랐다.
“고작요?”
“…….”
“내가 못된 건가요? ……빛도 보지 못한 내 아이 생각하면 그것도 작다 싶은데. 역시 배 속의 아이라 크게 못 받나 봐요.”
준영이 쓰게 웃는다. 미소가 아파 보였다. 준영의 생각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양심과 복수심 사이에서 힘들어하는 게 분명했다.
“더 받게 할 거야.”
“아니요. 그러지 마요. 판사님이 알아서 해 줄 거에요.”
“아니. 네 말이 맞아. 우리 아이가 빛도 보지 못하게 만든 죄. 절대로 허투루 넘어가지 않게 할 거야. 그러니 준영, 절대 네가 못된 게 아니야. 난…… 그 애가 영원히 감옥에서 나오지 않기를 바라.”
“평생은 너무했다.”
준영이 허탈하게 웃는다. 에드워드는 말없이 그런 준영을 안아주었다. 그의 품 안에서 준영은 잠시 동안 눈을 감았다. 조용한 숨소리만이 병실을 채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준영이 눈을 떴다.
“법대로 해요. 일부러 더 주려고 노력하지 말고. ……그냥 증거대로. 법대로.”
“네 마음이 풀리지 않으면?”
준영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에드워드의 품에서도 나가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머리를 기댄 채 허공을 응시하다 나직이 미소를 머금었다.
“할머니가 그랬어요. 죄는 분명 돌아가게 되어있다고. 설령 그 사람이 살아생전 그 죄를 다 받지 못해도, 분명 죽어서라도 받게 된다고. 그러니 일부러 내 감정 때문에 형량을 더 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 일에 매달려서 감정을 소모한다면 너무 일찍 간 아기가 안타까워할 것 같아요. 할머니는 물론이구요. ……나라면 그랬을 테니까.”
누가 준영을 어리석다 할 수 있을까. 누가 감히 준영을 답답하다 할 수 있을까. 그는 바보같이 착한 게 아니었다. 그는 다만 순리대로 살아갈 뿐인 거였다.
큰소리를 치고, 자신의 권리를 지켜내는 것만이 강한 건 아니라는 걸 보여 주듯 준영은 늘 제자리를 지킬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 맞아. 네 말이 맞아. 셀린느 같은 사람에게 아까운 시간과 감정을 쏟을 바에야 한시라도 빨리 행복해지자.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아프지 않은 건 아닐 거다. 분명 고통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준영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 눈물이 분노가 아닌, 아이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걸 안다.
그렇기에 에드워드는 말없이 그런 준영을 보듬어 줄 뿐이었다.
온기만이, 가장 큰 치료제라는 건 이제 에드워드도 잘 안다.
“자. 소화가 잘되는 산양 젖으로 만든 우유 대령입니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크리스의 양손에는 커다란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게 다요?”
많아도 너무 많은데.
용케도 종이봉투가 찢어지지 않았다 싶었다. 다행히 내용물은 우유만 담긴 건 아니었다.
크리스는 테이블 위에 종이봉투를 올린 후, 하나하나 진열하듯 꺼내어 들었다.
“그것들은 다 뭐예요?”
“말 그대로 우유도 있고, 산양 우유로 만든 영양제도 있고. 아, 이건 분말 가루라더군요. 차처럼 타서 마시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건, 우유로 만든 영양 젤리.”
“너무 많아요.”
“한꺼번에는 다 못 먹죠. 하지만, 생우유 말고는 유통기한이 기니까 두고두고 먹으면 돼요.”
크리스가 젤리 하나를 까 내밀었다. 하얀색 고체 덩어리를 말없이 쳐다보다 조심스럽게 입에 물었다. 달콤함 뒤에 오는 담백함은 우유 캬라멜과는 또 달랐다.
“맛있어요. 많이 달지도 않고.”
“그렇죠? 몽땅 수제예요.”
“크리스가 만든 거예요?”
“정확히는 우리 아버지가 키운 산양의 젖을 내 바로 밑의 동생이 가공한 거지만요. 그쪽으로는 꽤 잘나가는 것 같더라구요.”
“확실히 이건 종종 사 먹고 싶어질 것 같아요.”
“영광입니다. 자, 이것도 먹어봐요.”
크리스는 뜨거운 정수기 물을 받은 후, 분말 가루까지 타서 준영에게 내밀었다.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아 후후 불어 한 모금 마셨다. 확실히 생우유를 데운 것과는 달랐지만, 구수함은 오히려 더 깊은 것 같았다.
“맛있다.”
“다행이네요. 그래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지는 말아요. 칼슘을 갑자기 너무 많이 섭취하면 변비 온다더군요.”
“진짜요? 몰랐다.”
“물론 엄청 많이 먹었을 때 얘기고. 준영은 지금 먹는 게 많이 부족하니까 상대적으로 너무 많이 먹지는 말라는 거죠. 골고루 다양하게 먹으면 괜찮아요.”
즉, 밥 많이 먹으란 소리다. 그것만큼 곤혹이 없다.
실제로 오늘도 아침 먹는 걸로 진을 다 뺐다. 어떻게든 한 스푼이라도 더 먹이려고 하는 에드워드를 거절하지 못해 억지로라도 먹으면, 그게 마지막이 아니라는 거다.
한 번만 더 먹자, 한 번만 더. 그렇게 속여 몇 숟가락이라도 더 먹고 나면 정말 숨을 쉬지도 못할 정도로 힘들었다.
“그래도 에드워드가 노력한 보람이 있네요.”
먹은 건 자신인데, 칭찬은 늘 에드워드가 듣는다. 하긴, 그가 아니었다면 마지막 한 숟가락은 결국 먹지 않았을 테니 노력은 분명 꽤 한 게 맞다.
“살 좀 올랐어요?”
“아니요.”
“…….”
“안색이 좋아졌어요. 아직 살이 좀 올랐다는 표현까지는 멀었네요. 더 드세요.”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욱여넣는단 말이에요.”
아무도 자기 편은 없다. 준영이 뾰로통하게 대답하자, 막 정리를 끝낸 크리스가 하하 큰소리로 웃는다.
“그래요. 준영 정말 고생했어요. 그러니 조금만 더 해요.”
“……후.”
그냥 말을 말자.
준영은 후후, 불어 조금 식은 우유를 다시 마셨다.
크리스는 창가로 가, 쳐져 있던 커튼을 걷었다. 아까 준영이 낮잠을 잔다고 에드워드가 쳤나 보다. 그런데 커튼을 걷었는데도 그리 환하지 않다.
왜 그러나 했더니, 한 송이 두 송이,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눈이다.”
“지하철에서 올라오니 내리고 있더라구요. 이번 겨울은 정말 지긋지긋하게 내리네요.”
“하지만 난 많이 못 봤어요. 운전하는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눈이 많이 내려서 전 좋아요.”
인도를 걷는 게 불편해지고, 교통이 마비되기는 하지만, 아직은 철이 없는지 눈이 오는 게 좋았다.
세상이 하얗게 덮이는 걸 보면 그렇게 예쁘고 두근거렸다.
“좋네요. 감수성이 풍부해서. 그러고 보니 눈이나 비가 오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상상력이 뛰어난 편이라고 하더라구요.”
“정말요?”
“모두가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다고 하던데……. 준영도 상상력이 뛰어나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릴 땐 동화 속에서 사는 걸 좋아했어요.”
할머니가 해 준 옛날얘기를 들으면 늘 잠들기 전에 많은 상상에 빠졌다. 가슴이 뭉클해질 만큼 기분 좋은 상상을 하고 나면, 그 밤이 무섭지 않았다.
“동화라……. 동화책 한번 써봐요.”
“음? 하하하. 난 글 잘 못써요. 알파벳 겨우 뗀 걸요.”
진학도 겨우 했다. 공부는 애초에 손을 놨다. 크리스가 공부와 글 쓰는 게 무슨 상관이냐며 자꾸만 살살 꼬신다.
준영은 다 먹은 컵을 내밀고는 더는 허튼소리 못하게 냉큼 못박았다.
“크리스가 좋아한다는 그 사람이 누군지 말해 주면 나도 도전해 볼게요.”
“……강력한 거절이군요.”
“뭐, 그렇죠.”
이틀 전 병원에서 심심해하던 찰나, 크리스가 온 김에 첫사랑 얘기나 해달라고 졸랐었다.
대화를 하다 보니 어째, 그에게 짝사랑 상대가 있다는 것까지도 알아버렸다. 누구인지는 절대 알려주지 않아 살짝 부아가 치밀었는데, 잘됐다 싶다.
크리스는 더는 놀리지 않겠다며 항복했고 준영은 통쾌해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의문이었다. 그리도 알려주기 힘든가 하고.
“아직도?”
-네. 계속 발뺌하고 있다고 합니다. 애초에 제시카가 자신의 소재를 밝힌 적도 없다고.
“뻔뻔하군.”
-일단 계속 취조 중이지만, 이 정도라면 레베카를 털어도 제시카에 대해서 나올 건 없을 것 같다고.
“딴에는 어미란 소리군.”
제시카가 사라졌다.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무리 찾아도 오리무중이다. 공권력을 동원해 봐도 마찬가지다. 다른 주와 협의까지 해, 전국을 다 뒤지는 중인데도 제시카는 연기처럼 사라진 상태다.
“설마 벌써.”
국경을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도망칠 때를 대비해 신분을 세탁하고, 출국 금지를 비웃듯 유유히 타국으로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치가 떨렸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몇 년을 에드워드 옆에서 감정을 죽인 채, 연기를 했던 그녀였다. 철두철미하게 미리 모든 가능성을 다 준비했을지도 모른다.
레베카가 에드워드를 얕잡아 봤다면, 에드워드도 제시카를 얕보고 있었던 거다.
“내가 가볼까?”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 온 건지 제라드가 휴게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톰슨. 일단 끊어. 나중에 다시 통화하지.”
“……어머니가 입을 열지 않는다는 소리지?”
“넌 신경 쓸 일 아니야. 회사 일로도 바쁠 텐데.”
“내 어머니 일이야. 왜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내가 왜 이러는지 알잖아.”
제라드의 말처럼 친어머니의 일이다. 제라드를 믿지 못하기보단, 그가 받을 아픔이 걱정되었다. 이미 너덜너덜해졌을 텐데.
에드워드는 아직도, 그때의 제라드의 표정을 잊지 못했다.
제시카가 사실은 이복동생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짓던 표정을. 아직도 분명 그 생각만으로도 쓰게 아플 것이다.
낫지 않은 상처 위에 또다시 소금을 끼얹을 수는 없었다.
“늘 생각하지만 테드. 난 이제 어린애가 아니야.”
“제라드. 널 어린애 취급하는 게 아니잖아.”
“아니. 테드는 날 늘 아이 취급했어. ……나도 알아. 나이 차이가 이렇게 많이 나는데 어설퍼 보이겠지.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말할 수 있어. 난 뭐가 더 중요한지는 잘 알아.”
순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침묵하는 에드워드의 어깨를 강하게 잡으며 제라드는 확고히 말했다.
“애초에 각오했던 일이야. 이렇게 될 거라는 것조차 예상했었어. 이 모든 걸 감수하고, 테드 네 제안을 받아들였던 거고. 그러니, 내가 가게 해 줘.”
제라드의 말이 맞았다. 그는 더이상 그 작던 아이가 아니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이를 악물며 분노하던 철없던 꼬마가 아니었다.
제라드는 에드워드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어른이 되어있었다.
“그래. 그러자.”
“테드.”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그때, 휴게실의 문이 열리며 크리스가 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둘이 뭘 그렇게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는 겁니까?”
“애틋…….”
제라드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에드워드는 피식 웃으며 그런 제라드의 등을 팍 친 후 걸음을 옮겼다.
“준영이 보러 왔으면 얼른 보고 가. 눈 깜짝할 새에 잠들어.”
“말하다가도 졸던데 뭘.”
“그래서 내가 늘 눈 뜬 얼굴을 못 보는 거군.”
크리스의 중얼거림에 제라드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제로 준영이 눈 뜬 지 일주일 동안 제라드는 거의 매일같이 찾아왔지만, 늘 타이밍이 나빴다. 전화로 통화는 했지만, 그래도 실제로 눈 뜬 모습을 보지 못하니 답답했나 보다.
아마 오늘 이렇게 일찍 온 것도 준영의 눈 뜬 얼굴을 보자는 심보일 거다.
“또 잠들지도 몰라. 방금 따뜻한 우유를 마셨거든.”
“이런. 그럼 일단 준영부터 보고 나중에 얘기해.”
제라드는 정말로 이 짧은 틈에 잠들라 서둘러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크리스는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 있다, 역시나 휴게실을 나서려던 에드워드를 불러 세웠다.
“준영의 기억이 조금 이상한 건 알죠?”
“그래. 납치됐던 일을 아직 기억하지 못해. 그런데 그건 왜? 설마?”
크리스는 화들짝 놀라는 에드워드를 다급히 진정시켰다.
“아니,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다만 갑자기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크리스의 말대로다. 준영은 종종 허공을 멍하니 바라볼 때가 있었다. 뭔가 겁에 질린 듯한 눈빛이 걸려 다급히 부르면, 자신이 그랬던 것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준영을 상담했던 정신과 의사의 말로는 무의식적으로 기억을 되찾는 걸 거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두렵고 무섭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기억을 지우려고 한다는 뜻이었다.
“모른 척해. ……언젠가는 기억이 날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모른척해 줘.”
크리스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라 침묵을 택했다.
에드워드도 그 기분을 잘 알기 때문에 어깨를 잡아 쥐고는 고개를 끄덕여 준 뒤 휴게실을 나섰다. 지금은 준영의 건강을 되찾는 게 먼저다.
그래, 기억이 돌아오는 게 시간문제라면 조금이라도 더 회복을 한 뒤였으면 싶었다.
“자. 준영. 부탁했던 책이에요.”
“아, 고마워요. 심심했던 차였는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TV는 물론 언론매체도 접하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간호사에게 부탁을 했다.
사라에게 감사를 표한 뒤 책을 펼쳐보았다. 며칠 전 크리스와 동화책에 대한 대화를 하고 난 뒤 괜스레 생각이 났다. 그 옛날 할머니가 읽어주던 바로 그 동화책이었다.
요정에 대한 내용은, 어른이 읽기에는 확실히 유치했지만 그럼에도 자꾸 생각이 났다.
새삼 할머니가 참 많이 각색했구나 생각하며 혼자 흐뭇하게 얼마나 보았을까. 자꾸 두통이 몰려와 결국 책을 덮었다.
설마 아무리 책과 담을 쌓고 살았다고 해도 겨우 10분 조금 읽었다고 후유증이 온 것 같지는 않고, 뭔가 다른 이유다 싶어 일단 침대에 몸을 뉘었다.
지끈, 지끈.
두통은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졌다.
휴게실에서 톰슨과 통화를 하다, 우연찮게 간호사들이 하는 대화를 들은 에드워드는 곧장 병원을 나섰다.
거리상은 병원 바로 건너편이지만, 신호등까지 거리가 꽤 멀다. 별생각 없이 급하게 나온지라 외투도 걸치지 않은 게 후회되었다.
아무리 우성 알파라도 한겨울에 코트도 입지 않은 건 조금 심하다 싶다.
실제로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도 부담스럽다.
그럼에도 에드워드는 걸음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간신히 목적지에 당도한 후, 간호사들이 말한 사과 파이 코너부터 찾아갔다.
이런. 하필이면 품절인가 보다. 준영이 잘 먹을 것 같은데.
“사과 파이 필요하세요?”
여점원이 다가와 묻는다. 그녀는 몸을 배배 꼬다 못해 머리카락도 손가락으로 열심히 감으며 성적 어필을 했지만 불행히도 에드워드의 눈에는 지나가는 엑스트라쯤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사과 파이 있습니까?”
여점원은 자신을 투명 인간쯤으로 무시한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남자의 태도가 불쾌했지만 그럼에도 티를 낼 수 없었다.
신이 만든 뛰어난 작품인가 싶을 정도로 잘생긴 남자는, 분명 본능이 말해 주고 있었다.
알파, 아니 우성 알파라고.
자신은 베타지만 오메가가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외모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여점원은 용기를 내어 이번엔 아주 노골적으로 몸을 살짝 붙인 채 대답했다.
“막 나온 게 있느…….”
남자는 여점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계산대로 뛰다시피 다가갔다.
“사과 파이 나온 게 있다면 다 사겠습니다.”
여직원은 상처 입은 자존심에 부들부들 떨었고, 카운터의 남직원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막 나와 따끈따끈한 파이를 포장했다.
에드워드는 기분이 좋았다.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닌, 막 구운 사과 파이를 준영이 먹을 걸 생각하자 벌써 입안까지 달콤해지는 기분이다.
행여나 식을라, 서둘러 병실로 향했다.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시끄러운 소란에 불길함이 치솟았다.
경호원이 서 있는 병실의 문이 열려있었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이어졌다. 직감적으로 뭔가를 깨달은 에드워드가 빠르게 병실로 뛰어들었다.
“큽……! 끗……! 흡!”
준영이 침대 위에서 꿈틀거렸다. 처음 보는 여의사는 물론 세 명의 간호사들이 발작하듯 몸을 틀고 있는 준영을 막았다.
그중 한 명은 준영에게 뭔가를 입히려 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제길! 테드! 나가 있어!”
병실 한켠에 서 있던 제이크가 뛰어드는 에드워드를 막으며 소리쳤다. 그런 제이크를 뿌리치고는 다시 다가가려 했지만 이번엔 사라가 막아섰다.
“안 됩니다. 지금 남자만 보면 경기를 일으켜요! 그러니 물러서세요!”
“뭐?”
사라의 외침에 주춤 물러섰다. 눈물, 콧물, 침으로 엉망이 된 준영은 초점 없는 눈으로 계속해서 발작을 일으켰다.
“진정이 안 됩니다. 진정제 투여하겠습니다.”
여의사의 말에 제이크가 낮게 신음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투여하자마자 응급실로……. 에드워드.”
“저체중이라 약물 잘못 쓰면 죽을지도 모른다며.”
제이크의 멱살을 잡아 쥐었다. 제이크는 잔뜩 일그러진 채로 에드워드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저러다 쇼크가 올 수도 있어. 의사인 내가 판단해. 물러서. 에드워드.”
멱살을 놓고는 곧장 침대로 다가갔다. 간호사들 사이를 뚫고 다가가 준영을 끌어안았다.
그의 몸이 더욱 크게 틀렸다.
“준영! 나야! 에드워드! 준영!”
“보호자 분,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러면……, 헛!”
아마도 여의사가 오메가인가 보다. 놀란 여의사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에드워드의 시야에는 오로지 준영밖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나야. 괜찮아. ……기억하지? 내 향기. ……준영. 나야.”
서서히. 아주 서서히. 준영의 떨림이 잦아들어 갔다.
방 안 가득 자욱하게 퍼진 에드워드의 페로몬에 오메가 의사와 간호사는 피신한 지 오래였다.
“……에드워드.”
제이크와 베타인 사라와 또 다른 간호사 한 명이 혹시나 하는 염려에 지켜보다, 이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나야. 나 알아보겠어?”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다시 물었다. 준영은 대답할 기운도 없는지 그저 두 눈만 끔뻑였다.
“하아…….”
낮은 신음을 뱉은 입술 사이로 달큰한 향이 퍼져 흘렀다.
준영을 안정시키기 위해 퍼트렸던 페로몬의 후유증이 나타나나 보다. 어쨌든 오메가를 유혹하는 페로몬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일단 너에게 맡기마. 무리시키지 말고. 혹시라도 문제 생기면 바로 부르고.”
제이크가 에드워드에게 주의사항 몇 가지를 더 말해 주고는 서둘러 병실을 나갔다.
축 처진 상태에서도 잔뜩 흥분한 준영이 안쓰러웠다.
안쓰러운 만큼 욕정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욕설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옆으로 돌아누운 채 힘없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준영을 감싸듯 끌어안았다. 몸이 닿자, 흠칫 떨린다. 혹시라도 또 경기라도 할까 끌어안은 상태로 기다렸다.
1분, 2분.
아래가 욱신하게 아팠지만 에드워드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며, 준영의 긴장이 풀리기를 바랐다.
하아…….
작은 숨소리가 들린다. 그제야 알았다. 준영은 지금 다른 의미로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파르르 떨리고 있는 가녀린 몸이 행여나 부서질까. 조심스럽게 품에 더욱 당겼다.
에드워드의 팔을 베고 누운 준영의 어깨와 팔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긴장을 풀라는 의미로 몇 번이고 쓰다듬자, 드디어 준영의 몸에 떨림이 잦아든다. 하지만 간헐적으로 떨리던 하체의 간격은 오히려 줄어들어 갔다.
팔을 천천히 굽혀 그의 가슴을 감싸듯 끌어안았다.
그리고 자유로운 손을 준영의 사타구니 아래로 내렸다.
어느새 제 모양을 갖춰 봉긋하게 솟은 성기를 부드럽게 감쌌다. 다시금 흠칫 몸이 떨린다.
“괜찮아. 아프지 않아. 무섭게 하지 않을 테니까.”
“흣……. 에드워드……, 내 몸이 이상해요.”
본인이 발작을 한 걸 기억하는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태도만 보면 기억을 못 하는 것처럼 보인다. 괜찮다는 듯, 가슴을 감싼 팔에 힘을 줘 더욱 당겼다. 성기를 감싸고 있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채 몇 번 훑지 않았는데 온몸을 굳힌다. 에드워드의 팔을 양손으로 쥔 채 안타까운 몸짓으로 헐떡인다.
“왜……, 왜……?”
사정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단단한 성기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준영이 안절부절못했다.
“괜찮아. 우성 알파의 페르몬을 그대로 맞아서 그래.”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유혹한 페르몬은 그 어떤 미약보다 독할 것이다. 혼란스러워하는 준영을 다독이듯 정수리에 깊게 입을 맞추어주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나와 이번에는 똑바로 눕혔다. 정액으로 젖은 바지와 속옷을 단숨에 벗겨 침대 아래로 버리듯 던졌다.
당황한 준영이 양손으로 자신의 아래를 가렸다.
바지를 벗기자, 준영의 향이 더욱 진해진다. 저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켰다. 길게 내뱉었을 때는 이미 준영의 향이 전신에 독약처럼 퍼져 흘러 있었다.
잃지 마. 절대로.
스스로에게 다그친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준영을 지금, 이성을 잃고 안게 된다면 절대로 안 된다. 본능에 충실한 알파의 욕정에 내몰린 오메가가 죽는 일도 허다하다.
절대로, 절대로 이성을 잃어선 안 된다.
에드워드는 다시 굳게 다짐한 후, 준영을 바라보았다.
애처로운 몸짓으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준영을 잠시 바라보다, 미안하다 작게 속삭인 후 그의 양손을 잡아 강제로 벌렸다.
드러난 성기의 선단에서 하염없이 물이 흐르고 있었다.
혀를 내밀어 길게 핥아 보았다. 달아. 미치도록 달아서 혀가 마비될 정도였다.
“하읏……, 흣…….”
작은 자극에도 파르르 몸을 떤다. 사랑스럽다. 아아……. 그래, 너무너무 사랑스러워 이대로 먹어버리면 좋을 것 같다.
한입 가득 준영의 성기를 머금었다. 등이 크게 떠오른다.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튼다.
강하게, 마치 이대로 먹어 치울 듯 준영의 성기를 빨았다.
헐떡이다 못해 히끅거리며 울먹인다. 사정까지는 허무할 정도로 빨랐다.
달콤한 액이 모자라, 마치 더 먹고 싶다는 듯 계속해서 빨아대자 준영이 자지러진다.
“그만 해요. 제발……. 흣……! 아아……. 힘드, 흣……!”
순간,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듯 지독할 정도의 단 향이 퍼졌다. 에드워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했다.
정액과는 다른 시트를 흥건하게 적신 액체의 정체를 안다. 자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증거다. 이번엔 준영을 엎드리게 했다.
그렇게 말랐음에도 통통하게 살 오른 엉덩이를 한아름 깨물었다. 흠칫 다시금 몸이 크게 떨렸다.
저도 모르게 힘주어 깨물었다. 잇자국이 만족스럽다. 그 위를 또 한 번 강하게 깨물자, 다시금 울컥 반투명 액체가 은밀한 곳에서 흘러나왔다.
혀로 길게 핥아 올렸다.
꽉 닫힌 구멍이 더욱 움츠러든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주름 속에 숨은 작은 입구를 혀로 찾아내듯 헤집었다.
준영의 상체가 크게 들썩이기 시작한다. 한계치를 넘은 쾌감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게 보였다. 안타깝지만, 아직 그를 더 맛보고 싶다.
“제발. 에드워드……. 이제 그만, 괜찮으니까……, 흣!”
침대에서 그런 말은 상대방을 더욱 부추긴다는 걸 모를 만큼 준영은 순결함 그 자체였다. 그래서 더욱 사랑스럽다.
이번엔 엉덩이를 좌우로 벌려 노골적으로 빨아댔다.
다시금 발작이 일어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준영의 몸이 경련하듯 떨린다. 그럴수록 에드워드의 욕정은 더욱 커져만 갔다.
핥고 빨고, 기어코 준영의 입에서 울음이 튀어나온다. 마치 사과하듯 손을 뻗어 준영의 성기를 움켜쥐었다.
“흣……! 아아, 흣, 하앙……!”
도망치듯 움직이던 몸짓은 어느샌가 스스로 엉덩이를 흔들고 있었다.
혀로, 자신을 받아들일 작은 입구를 괴롭히며, 준영의 성기를 빠르게 훑었다. 허벅지 근육이 파득거리며 떨리는 게 안쓰럽다. 사랑스럽다.
일부러 허벅지 안쪽을 강하게 물자, 흠칫 몸을 굳히더니, 파르르 떨린다.
다시 벌름거리고 있는 입구로 입을 가져다 댔다. 방금 전까지 닫힌 채 자신을 거부하던 곳은 이제는 더 넣어달라는 듯 스스로 벌름거리며 유혹하고 있었다.
원하는 대로 혀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마치 성교를 하듯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자, 준영의 입에서 또 한 번 흐느낌이 이어진다.
“하응……! 그런! 시, 싫어요. 이제는 제발, 흣……! 하읏!”
두 번 연속 사정을 한 뒤라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걸리는 듯했다. 덕분에 준영만 죽어난다. 두꺼운 환자복이 땀으로 흥건히 젖을 정도다.
이대로 쭉 준영을 맛보고 싶지만,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된다 싶었다. 그나마 살짝 돌아온 이성이 에드워드에게 경고했다.
에드워드는 노골적으로 준영의 성감대를 물고 빨았다. 엄지로 선단을 꽉 누르고 길게 훑다, 빠르게 훑다를 반복했다. 준영의 허릿짓이 점점 빨라진다. 절정이 다다른 듯, 하얗던 온몸이 붉게 물든다.
“아아……, 힉……!”
드디어 그 작은 몸의 떨림이 멈췄다. 온몸을 빳빳하게 굳히며, 이제는 정액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의 묽은 액을 토해냈다.
절정을 맞이한 후 한차례 여운이 지나갔다. 숨을 몰아쉰다고 벌려진 준영의 입 사이로 달큰한 향이 진동했다. 아찔할 정도로 단 향이 에드워드의 이성까지 마비시키는 듯했다.
상큼하고 달콤? 얼마나 멍청한 소리였던가.
다디달아, 뇌까지 녹을 정도다.
다시금 동공이 수축되기 시작한 시야 너머 하얗고 가녀린 목덜미가 보인다.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린다. 크고 가지런한 치아가 얼마나 큰지, 준영의 가녀린 목덜미가 안쓰러울 정도다.
“에드워드…….”
준영의 작고 힘없는 속삭임에 수축됐던 동공이 순식간에 풀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 ……괜찮아.”
간신히 돌아온 이성을 단단히 부여잡은 채, 최대한 태연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대답해 주었다. 그럼에도 진정이 되지 않나 보다. 준영은 온몸을 웅크린 채로 작게 흐느꼈다.
상처받은 동물이 이러할까. 작은 초식동물 같은 몸짓이 안타까워, 조심스레 안아 들어 자신의 다리 위에 앉혔다.
준영의 얼굴이 붉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준영은 이 행위가 싫거나 역겨웠던 게 아니었다.
그는 그저 한계치를 넘은 부끄러움에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이불을 잡아 폭 감쌌다. 땀으로 몸이 젖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혀야 한다.
“저기……, 에드워드는요?”
에드워드의 다리 위에 올라앉은 자세라 그의 상태를 바로 알았나 보다. 아래가 아플 정도로 부풀어 있었다.
지금 남 사정까지 신경 쓸 일이냐고 타박하고 싶다.
하지만 간신히 버럭 올라오던 소리를 참고는 준영의 이마에 입맞춤을 한 뒤 속삭여 주었다.
“내가 알아서 할게. 훌륭한 반찬이 있으니, 금방 해결될 거야.”
잠시 두 눈을 꿈뻑이던 준영의 얼굴이 다시금 펑 소리가 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붉어지기 시작했다.
더 놀리고 싶지만, 정말로 감기가 걸리면 안 된다 싶다. 이미 열기가 사라진 준영의 몸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드워드는 준영의 몸에 이불을 푹 덮은 채로 안아 들고는 서둘러 소파로 옮겼다. 최대한 편한 자세를 만들어 준 후, 자신의 흐트러진 옷가지도 정리하였다.
준영이 추울까, 자신의 외투까지 그에게 덮어 주고는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적당히 냄새가 빠진 후에야 창문을 닫은 뒤 문 쪽으로 향했다. 막 문을 열기 전, 준영을 돌아보았다.
이미 정신없이 잠에 빠져있는 준영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다, 긴 숨을 내쉰 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대기 중이던 제이크가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뒤를 좀 부탁할게.”
“뭐? 아……, 그래.”
같은 남자에, 알파이니 지금 에드워드가 얼마나 급한 상황인지를 알 것이다. 제이크는 두 번 묻지 않고 대기 중이던 간호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준영의 곁을 지키고 싶지만, 이성과 본능을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라 서둘러 욕정을 해결하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솔직히 에드워드를 아는 이들이라면 경악할 만한 상황일 거다.
그럼에도 에드워드는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욕정을 참아낸 스스로를 칭찬했다. 평온한 표정으로 잠든 준영이 그에게는 포상과도 같았다.
준영은 발작 이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꼬박 하루를 지새우다, 결국 기절하듯 잠들면 채 두 시간도 못 자고 식은땀에 젖은 채 눈을 떴다.
에드워드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불을 푹 덮은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준영을 안아주는 것 말고는 없었다.
잠을 못 자니, 식욕이 달아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수면제라도 먹여 재우고 싶지만, 준영의 몸이 너무 약해 제이크는 가급적 쓰지 않는 게 좋다고 했다.
견디다 견디다 못해 다시 잠든 준영을 안아주었다. 너무 피곤해서인지 처음에는 그럭저럭 깊게 잠들어 괜찮은가 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감긴 눈꺼풀 안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평온했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막힌 듯한 신음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준영. 괜찮아. 준영아……. 내가 여기 있어. 그러니…….”
제발 무서워하지 마.
페로몬을 쓰는 것도 한두 번이다. 몸이 약한 준영에겐 성욕 처리도 과할 때는 독이었다. 에드워드는 그를 안은 채 진정이 될 때까지 불러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이름을 불러주는 것 말고는 말이다.
* ♟ *
“전형적인 증상입니다. 일단, 가장 문제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다는 거죠.”
준영을 담당했던 정신과 의사가, 차트를 훑어보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더 쉽게 말해서 지금 준영은 등껍질 안으로 머리를 밀어 넣은 거북이와 다를 바 없어요. 이 세상에 자기 혼자뿐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마음을 기댈 곳이 없다는 건, 꽤 힘든 일이죠.”
알고는 있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의사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바늘이 되어, 송곳이 되어 에드워드를 아프게 찔러댔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빙 둘러 묻기 싫었다. 시간이 아깝다. 지금도 준영은 홀로 공포와 싸우고 있었다.
의사는 잠시 에드워드를 바라보다 짧게 숨을 내뱉었다.
“표현하세요.”
“이미…….”
“아니요. 더 하세요. 유치하다 싶을 정도로 하고 또 하세요. 안아주세요. 그게 유일한 치료 방법이랍니다.”
“…….”
“일단 준영과 상담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야 해요. 몸도 마찬가지죠. 어디가 아픈지 말을 해 주지 않으면 의사가 아무리 뛰어나도 진찰을 하지 못하죠. 그나마 몸은 여러 가지 첨단 기계로 어떻게든 알아낼 수는 있지만……, 마음은 아니에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추측뿐이죠. 정확한 상태를 아는 게 먼저입니다. 그러니 배우자 분께서 포기하지 않고 곁을 지키고 다독여주세요. ……그것부터입니다.”
의사의 말에 에드워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잠시 침묵한 채 허공을 응시하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담은 매일 할 겁니다. 하지만 저보다 배우자의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걸 명심하세요.”
“네.”
짧게 대답 후 진료실을 나섰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답답함이 몰려왔다. 앞으로 해나가야 할 건 어렵지 않다. 지금처럼, 그리고 지금보다 더 많이 사랑한다 표현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뚜렷한 대책 없이 준영이 나아지기를 곁에서 지켜만 봐야 한다는 사실이 아팠다.
자신이 지금 아픈 것보다 몇 배로 더 힘들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준영이 안쓰러워 괴로웠다.
준영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온 에드워드는 길게 한숨을 내쉰 뒤 최대한 표정을 가다듬었다. 모퉁이를 돌아서, 병실로 다가가는데, 경호원 한 명이 서둘러 다가왔다.
“제라드 씨가 오셨습니다. 그런데…….”
“왜? 무슨 일이 있습니까?”
대답은 막 문이 열린 제라드가 하였다.
“테드. 들어가 봐. 어서.”
그의 말과 동시에 서둘러 병실로 뛰어 들어갔다. 침대 헤드 끝에 웅크린 채 벌벌 떨고 있는 준영이 보였다. 황급히 다가가 준영을 품에 안아 들었다.
준영이 기다렸다는 듯 에드워드의 품에 파고들었다.
“또 꿈을 꾼 거야?”
고개를 젓는 준영의 표정도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준영을 안은 그 상태로 한참 동안 그가 진정되도록 토닥여 주었다.
간호사 사라를 불러, 조금 진정된 준영을 맡긴 후 병실을 나서 휴게실로 향했다.
소파에 앉아, 조금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던 제라드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준영은?”
“진정됐어. 지금 사라에게 맡기고 오는 길이야. ……무슨 일이야?”
“모르겠어. 분명 노크를 하고 문을 열 때까지만 해도 활짝 웃었는데…….”
“아마 남자라서 그럴 거야.”
제라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제이크가 안으로 들어오며 대답을 하였다. 다른 담당 환자 진료를 보고 바로 이곳으로 온 모양새였다. 제이크가 소파로 와 빈자리에 앉고는 조금 피곤한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무슨 일 있었어?”
“오메가 한 명이 죽었어.”
“……!”
“…….”
“강간이 원인 같아. 거의 막달 아기가 있는데도……,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했지만 결국 엄마를 따라가 버렸어.”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다. 언론화가 된다고 해도 그때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보호받지 못하는 오메가는 아직도 너무나 많다.
“준영이 강하다고 생각해?”
갑자기 제라드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준영은 강해질 수밖에 없었던 거야. 무서워도 무섭다 하면 안 되고, 울고 싶어도 울면 안 되는 삶을 살았어. 생각해 봐. 고아에다, 동양인이야. 심지어 오메가지. ……아픈 할머니를 혼자 돌봐야 했어. 자기 몸도 못 돌보는 어린 오메가가. ……투정이라는 걸 과연 부릴 수 있을까?”
그 누구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상담이 끝난 후, 정신과 의사가 병실을 나가자, 곧 에드워드가 안으로 들어섰다.
수염을 제때 깎지 못해 덥수룩하다. 그만큼 신경 쓸 일이 많다는 걸 거다. 그리고 그게 자신 때문이라는 걸 잘 안다.
“왜 그런 표정이야? 의사가 뭐라 그랬어?”
준영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걸 오해한 듯 에드워드가 빠르게 다가와 그의 안색을 살폈다. 의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런저런 상태를 물을 뿐이었다.
“아니요. 그냥…….”
내가 너무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요. 그 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 그럼에도 에드워드는 그 말을 들은 사람처럼 준영을 품에 그러안고는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잘 들어 준영. 몸이 아프듯, 마음도 아픈 거야. 그것뿐이야.”
잘못 이해했나 보다. 아까부터 헛다리를 짚는 에드워드가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는 완벽한 남자였었다. 하지만 자신의 앞에서 자꾸만 뭔가 부족한 모습을 보였고, 그건 조금 특권 같은 느낌이었다.
“응. 알아요.”
“모르는 것 같은데?”
“진짜 알아요. 내가 기억이 온전치 못하다고 들었어요. 무의식적으로 기억이 돌아오는 걸 누르고 있다고. ……그래서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킨다고.”
그래서 무섭다. 도대체 어떤 기억을 잃은 거길래, 이렇게 발작까지 일으키는 걸까.
준영을 안고 있던 에드워드가 그를 살짝 밀어 얼굴을 마주 보았다.
“준영. 난 전문가가 아니야. 하지만 이건 알 것 같아.”
“뭘요?”
한없이 깊은 눈빛이 너무 진중하다. 푸른색 눈동자가 자신을 비춘다. 언뜻 보아도 자신이 겁먹은 게 보였다.
“준영이 몰라서 그래.”
“네?”
“준영이 더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
“내가 있고, 제라드가 있고, 크리스가 있지. 제이크도 사라도 널 걱정하지. 마틸다도 네가 걱정돼서 매일 같이 연락이 오지?”
“…….”
“준영. 더는 혼자 견디지 않아도 돼. 무서우면 무섭다고 해. 괴로우면 괴롭다고 해. 그런 걸로 널 버리지 않아. 널 떠날 리 없어.”
가슴 언저리가 울렁인다. 이 감정이 뭔지를 모르겠다.
딱 한 번 느껴본 적이 있었다. 그때가 언제인지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괜찮아. 하지만 명심해. 괜찮다는 건 절대 혼자 견디라는 뜻이 아니라는 걸.”
‘준영아. 괜찮단다. 울지 마렴. 넌 혼자가 아니야. 넌 모르겠지만, 이 세상에는 널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단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없을 것 같아도. 명심하렴. 꼭, 꼭 기필코 나타날 거야. 널 사랑해 줄 사람. 너에게 괜찮다고 등을 두드려 줄 사람. 그러니 괜찮단다. 괜찮아. 그리고 지금은 내가 있잖니.’
기억났다. 할머니가 말해 주었던 그 주문의 진짜 뜻이.
“준영?”
“괜찮다 해 줘요.”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흑……! 사실은……, 무서워요. 무서워!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아! 꿈에서 계속 나타나! 누군지 모를 사람이 계속해서 나타나. 내 옷을 찢고 이상한 짓을 해……. 흐읏! 더럽고 역겹고 무서워서……, 나는! 나는……!”
무서워. 무서워서 미칠 것 같다. 하지만 가장 무서운 건 이대로 영영 이렇게 못난 모습으로 있다, 에드워드에게 버림받는 것이었다.
그에게 버림받게 되면 영원히 회생하지 못할까 두려웠다.
“당연한 거야. 무서운 건 당연한 거야. 하지만 명심해. 내가 있어. 무조건 내가 있어. 네 곁에는 내가 있어.”
세뇌라도 시킬 것처럼 속삭여 주고 또 속삭여 준다.
웃기게도 정말로 세뇌가 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불안감이 사그라들었다.
“책 읽어줘요.”
느닷없는 주문에 잠시 당황했다.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뭐?”
“요즘 못 자서 그런지 눈이 침침해서 잘 집중이 안 돼요. 이거요.”
잘못 들은 게 아닌가 보다. 준영은 베게 밑에 두었던 책을 집어 에드워드에게 건네주었다. 일단 주길래 책을 받기는 했다.
표지부터가 동화책이었다.
“숲속 정령들의 밤.”
아직 대답을 하지도 않았는데 준영은 베개에 몸을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에드워드는 곤란한 표정으로 준영을 보다 다시 책을 보았다.
한 장을 펼쳐보았다. 생각보다 글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완전히 아이들을 위한 책은 아닌 것 같았다. 문구 자체는 조금 어려운 편이다.
아마 어른들을 위한 동화책이라고 나오는 그런 종류들인가보다.
“힘들면 안 해도 돼요.”
“잠시만. 물을 좀.”
너무 지체했더니 준영이 눈을 떴다. 에드워드는 서둘러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의자에 몸을 편히 기대어 앉았다.
“힐라는 어두운 밤이 무서웠습니다. 낮에는 너무나 신나게 놀았지만, 밤만 되면 세상이 마치 암흑에 잠기는 듯해서 두려웠습니다.”
“에드워드.”
“응? 아, 목소리가 너무 작은가?”
“아니요. ……이리로 올래요?”
이번에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준영이 옆으로 옮겨 앉아 손바닥으로 바닥을 툭툭 치고서야 뒤늦게 이해했다.
“괜찮아? 좁고 불편할 텐데.”
“괜찮아요. 그냥, 할머니가 늘 안고 읽어주셔서…….”
“그래.”
에드워드는 서둘러 침대 위로 올라가, 준영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를 들어 자신의 다리 사이에 앉혔다.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곧 몸에 힘을 빼고는 에드워드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었다.
준영이 자세를 잡자 다시 찬찬히 책을 읽어내려갔다.
너무 크지도 않게, 그리고 너무 작지도 않게. 마치 속삭이듯 하지만 또박또박. 에드워드는 생애 처음으로 독서를 소리 내어 해보았지만, 그건 꽤 괜찮은 경험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가 아차 하고 기우는 준영의 머리를 받쳤다. 침대에 머리가 고꾸라지기 전에 간신히 받아냈다.
에드워드는 조심스럽게 준영을 베개에 눕히고는 행여나 그가 깰까 싶어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섰다. 리모컨을 조작해 매트를 바로 한 뒤 준영을 똑바로 눕혔다.
생각보다 시간이 꽤 지났다. 책을 읽어주다 준영이 잠들었던 걸 확인하고는 잠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던 건 기억난다. 아마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들었나 보다.
불편한 자세로 자서 어깨는 결렸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다. 에드워드는 준영의 가슴팍까지 이불을 덮어 준 뒤, 보조 침대로 가 앉았다.
쌕쌕 작은 숨소리가 규칙적이다. 보통 3시간 조금 자고 나면 꿈을 꾸는 듯 가위가 눌리던데, 오늘은 벌써 4시간이 흘렀는데도 괜찮아 보였다.
안도하며 긴 한숨을 내쉰 뒤, 에드워드도 다시 눈을 붙였다.
한 시간 정도 더 눈을 붙이다, 작게 뒤척이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혹시나 또 악몽을 꾼 건가 했지만, 다행히 여전히 숨소리는 규칙적이었다.
보조 침대에서 내려서 준영의 옆으로 가 머리맡에 앉았다. 은은한 새벽빛에 준영의 얼굴이 비쳤다. 피부가 희고 머리카락이 검은 데다, 심지어 꽤 자라 단발처럼 되어버린 바람에 백설 공주가 이럴까 싶다.
독사과를 먹은 백설 공주가 영원히 잠드는 저주에 빠지고, 지나가던 왕자가 그 모습에 반해 키스를 하자, 눈을 떴다.
아주 어릴 때에는 무슨 허무맹랑한 내용인가 했었다.
셀린느가 왕자님을 만나면 좋겠다고 흥얼거리는 걸 보고는 바보 같다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던 게 떠올랐다. 저리 한심하니, 허구한 날 남자들에게 차이지, 하고 비웃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그 왕자의 기분을 알 것 같다.
자신도 처음 만난 사람이 준영이라면, 한눈에 반해 키스를 했을지 모르겠다.
설령 현실은 추행범으로 잡혀가겠지만.
자신의 생각에 웃겨 피식 웃고는 손을 뻗어 준영의 뺨을 감쌌다. 적당한 온기가 마음에 든다. 하지만 아무리 말랐어도 포동하던 볼의 살이 빠져 가슴이 아프다.
영양소가 부족해 자연스레 거칠어진 머리카락도 안쓰럽다. 숱이 많이 빠졌나 보다.
안쓰러움에 계속 만지작거려서일까.
결국 준영을 깨우고 말았다.
두 눈을 꿈뻑이는 준영에게, 아직 밤이라고 자라고 해보지만, 이미 잠이 다 깼나 보다. 미안함에 솔직하게 사과했다.
“미안. ……잠든 모습이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만졌어.”
“만……져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쳐다보더니 이내 얼굴이 붉어진다. 은은한 달빛에도 붉어진 게 보일 정도였다. 그와 동시에 달콤한 향이 팍 하고 뿜어 나왔다.
에드워드는 손바닥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으며 한걸음 물러섰다.
“준영. ……페로몬이.”
“네? 페로몬이요? ……냄새나요?”
다행히 뿜어 나오던 향이 멈췄다. 스스로 컨트롤을 했다기보다, 생각이 다른 곳으로 가 멈춘 게 분명했다. 에드워드는 그제야 준영이 지금까지 제대로 히트가 돌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자신은 2차 성장기 이후, 자연스레 나타나는 증상이었지만, 준영은 갑자기 모든 단계를 한꺼번에 뛰어넘은 상태였다.
심지어 첫 히트 사이클 때 임신까지 했으니 그에게 2차 성별에 대한 컨트롤은 전무할 것이다.
일단 준영이 왜 갑자기 페로몬을 뿌리기 시작한 건지 고민했다. 답은 곧 나왔다.
“부디 이상한 오해 하지 말아줘. 머리와 볼을 조금 만진 거야.”
아마도 만진다라는 소리를 다르게 받아들였나 보다. 이해는 한다. 불과 이틀 전에 준영의 몸을 난잡할 정도로 만져댔으니 그가 오해를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어째 준영의 얼굴이 더 붉어진다.
“그런 오해 안 했어요!”
그러고는 팩 소리를 지르더니 휙 하고 이불을 덮어써 버렸다. 에드워드는 크게 당황하며 준영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어째 더 화를 낼 뿐이다.
겨우 기분이 풀린 준영에게 가루우유를 타서 내밀었다. 딱 먹기 좋은 온도를 맞췄지만, 준영은 습관적으로 입으로 후후 불어 조금씩 마셨다.
이틀 전 발작 이후, 그나마 돌아왔던 식욕이 다시 감퇴했다. 요즘 먹는 거라고는 크리스가 고향에서 공수해 온 산양 우유 정도뿐이다.
이거라도 먹으니 다행이지만.
“사과…… 먹고 싶다.”
“사 올까?”
행여나 마음이 바뀔라 빠르게 묻자, 준영이 가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 사과. 정원에. ……정말 달았거든요.”
“영국에서 종자가 같은 사과로 일단 최대한 알아볼게.”
“하하하. 에드워드. 그러지 말아요. ……난 그 날 그 사과가 맛있었다고 말하는 거예요.”
준영은 행여나 에드워드가 정말로 당장이라도 사과를 수소문하러 달려나갈 거라 생각했는지 서둘러 말렸다. 물론 정말로 반쯤 나가려고 엉덩이를 들썩이기는 했지만.
“가을에 사과가 열리면 많이 많이 따서 보관해놓자.”
“하지만 제철에 먹는 게 맛있을 것 같아요.”
“그럼 그 사과로 잼을 좀 만들어 놓을까? 말려도 되고. 그래, 사과 차도 나쁘지 않겠군.”
에드워드의 제안에 드디어 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 파이가…… 맛있대. 맞은편의 베이커리 가게에.”
사 왔다가 죄다 버렸다는 굳이 말은 하지 않았다. 사과 파이라는 말에 마음이 동했는지 준영의 눈이 반짝였다.
“먹어보고 싶어요. 그래도 혼자서는…….”
“같이 먹어 줘. 나도 먹어보고 싶어. 하지만 너무 달아서 많이 못 먹을 것 같아.”
준영의 말을 빠르게 잘랐다. 준영은 에드워드의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새벽에 문을 열던데. 나가볼래?”
“그래도 돼요?”
“아마 지금쯤이면 문을 열었을 거야. 바게트나, 모닝빵 정도는 팔 것 같은데.”
준영의 눈이 살짝 빛난다. 하지만 곧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치만……, 나가면 혼나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 내가 납치할 거니까.”
“……네?”
무슨 말인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준영에게 말로 설명 대신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옷장의 문을 열어, 자신의 여유분 옷을 꺼내었다.
일단 링거가 문제다. 에드워드는 조심스럽게 바늘을 뺀 후, 링거대에 올려져 있던 반창고와 거즈를 이용해 상처를 덮었다.
“링거 함부로 빼도 돼요?”
“물론 안 되지. 말했잖아. 납치라고.”
영양제이니, 잠깐 빼는 건 문제없을 거다. 하지만 착한 아이는 따라하면 안 된다며 준영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게 뭐냐고 웃는 준영에게 만세를 요구했다. 얼떨결에 만세를 한 준영의 머리 위부터 푹 하고 윗옷을 씌워주었다.
“음…….”
“너무 커요.”
정말로 아빠의 옷을 뺏어 입은 아들 모습이다. 소매를 두 번이나 접었는데도 크다. 퇴원 때까지 나갈 일이 없다 싶어 굳이 준영의 옷을 가져다 놓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옷을 입혔는데, 럭키다.
“제길.”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신음을 숨기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은 채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준영은 에드워드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나 보다. 어떻게든 소매를 접어보려고 난리다.
“티는 원피스처럼 입는다고 해도 바지는…….”
이건 기장의 문제가 아니다. 일단 허리에서부터 흘러내릴 것이다.
“바지는 포기하자.”
양말을 신기고, 자신의 여유분 점퍼를 꺼내어 준영에게 입혔다. 제라드가 날도 추운데 얇은 코트를 입고 다닌다며 멋대로 가져다 놓은 롱패딩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발목은 조금 나오지만, 준영의 몸을 거의 감쌌다. 도톰한 겨울 실내화를 신겨준 뒤 준영을 침대에서 내려줬다.
“…….”
준영은 선 채로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코트를 걸친다고 미처 보지 못했던 에드워드는 조금 늦게 그 모습을 보고는 왜 그러냐고 물었다.
“……치.”
“응?”
잘못 들었나?
너무 작아 제대로 듣지 못했는데 분명 못마땅함이 가득 묻어 나오는 효과음을 들은 건 확실했다.
“……키 차이 때문에 그래?”
“좋겠네요. 우성 알파는 커서.”
“아하하하.”
뜻하지 않은 준영의 반응에 에드워드는 배를 잡고 웃었다. 박장대소를 하다못해 아주 침대에 엎드린 채로 웃자, 어지간히 부아가 치민 건지 그런 에드워드의 등을 툭툭 때린다.
“그만 웃어요. 가뜩이나 콤플렉슨데.”
“미안, 미안. 하지만 준영. ……크흐흐흐. 아, 미안해. 난 이래서 더 좋은데?”
“뭐가요.”
준영에게 마지막으로 목도리까지 돌돌 감고는 냉큼 앞으로 안아 들었다.
“품에 쏙 들어와서 좋아.”
“그게 뭐야. 남은 콤플렉스라고 하는데.”
“그래도 사실인걸?”
“내가 컸으면 나 안 좋아했겠네요?”
또다시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와 걸음을 옮기다 멈췄다. 준영은 말을 하고도 아차 하는 표정이었다. 난처해하는 준영과 달리 에드워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대로 돌려주지. 준영은 내가 못생겼으면 나 안 좋아했겠네?”
“……그럴지도.”
이건 좀 충격이다. 에드워드는 다시 한번 자신이 잘생겨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괘씸한 건 괘씸한 거기에, 준영의 이마를 이마로 콩 박으며 대꾸했다.
“그럴 땐 아니요, 해야지.”
“잘생겨서 시선이 간 건 맞다구요. ……하지만, 아마 에드워드가 훗날 외모가 바뀐다고 해도 같을 것 같아요.”
심장이 두근댄다. 뭐가 같을 것 같냐고 묻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 에드워드는 질문 대신 준영의 뺨에 쪽 하고 입맞춤을 해주었다.
“자, 탈출 시도야.”
“납치라면서요.”
“그랬지, 참. 납치 시도야. 그러니 조용히 있어야 돼. 말하면 혼난다.”
“풋. 그게 뭐야.”
키득거리며 웃는 준영에게 한 번 더 쉿 하고 경고한 뒤 병실을 나섰다.
일단 경호원들부터 난관이다. 당황하던 그들은 잠시 멍하니 복도를 걷던 주인 내외를 보다 그 뒤를 따랐다. 에드워드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가출 중이니까 따라오지 마시죠?”
“네?”
“아니다. 따라오세요. 대신 멀리서. ……더, 더. ……더.”
아주 목소리도 안 들리는 곳까지 떨어뜨리고서야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악덕 주인.”
“원래 세상은 불공평한 거야.”
“못 말려.”
“쉿. 조용히 하라니까. 자꾸 떠들면 혼난다.”
“푸흐흐흐.”
남은 진지한데 준영은 웃기 바쁘다. 중간중간 간호사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에드워드를 보았다가 품에 안긴 준영을 보았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에드워드는 당당히 출입증을 사용해 문을 열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 층으로 향하였다.
“……햄턴 씨?”
막 로비를 지나는데, 역시나 간호사 한 명이 알아보고 이름을 부른다. 에드워드는 들은 척도 않고 더 빠른 걸음으로 후다닥 병원을 탈출했다.
운 좋게 새벽인데도 사과 파이가 구워져 있었다. 준영은 소리 없이 기뻐했고 에드워드도 두 번 고민하지 않고 사과 파이를 선택했다.
갓구운 사과 파이는 꽤 괜찮았다. 달콤한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인 에드워드가 먹어도 꽤 맛이 좋았다.
준영도 입에 맞는지 조금씩이라도 계속 먹었다.
“손님 커피 한 잔 드릴까요?”
베이커리 가게인데 커피 서비스까지 받나 싶었지만,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한 잔만요.”
“저기…… 일행분은?”
여점원이 이쪽을 보고 있는 준영을 힐끔 보며 묻자 고개를 저었다.
“커피는 한 잔만 주시면 됩니다.”
“……나도 커피.”
“카페인 들어간 거 먹지 말랬잖아. 안 돼.”
“맞아요. 미성년자는 안 마시는 게 좋아요.”
여점원의 말에 에드워드가 크게 헛기침을 하였다. 웃음이 나올 뻔한 걸 간신히 돌린 거지만, 준영은 이미 눈치챈 분위기다.
이대로 두면 토라지겠다 싶어 서둘러 달래줄 겸 변명을 했다.
“미성년자 아닙니다. 제 아내입니다.”
여점원의 눈이 하염없이 커지더니 이어 푹 고개를 숙이고는 힘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뭐라 하기도 전에 주방으로 보이는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에드워드는…… 역시 인기 좋네요.”
“뭐?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오는 거지?”
정말로 영문을 몰라 되묻는데 준영의 반응은 영 싸늘하다. 자신이 뭘 잘못한 건가 행동을 되새겨봐도 딱히 걸릴만한 짓은 한 적 없는데 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젊은 남자 세 명이 추위에 부르르 떨며 안으로 들어섰다. 아차 하고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준영의 안색이 허옇게 질려가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테이블 위에 값을 치르고도 남을 지폐를 올려둔 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준영을 빠르게 품에 안고는 빵집을 도망치듯 나섰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나야말로 미안해. 새벽이라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미안. 기분전환 겸 나와 보자 싶어서 온 건데.”
준영이 사과하지 말라는 듯 에드워드의 코트를 잡아당기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알아들었으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자신이 사과를 할수록 준영이 더 미안해한다는 걸 이제는 잘 안다. 에드워드는 사과 대신 말을 돌렸다.
“새벽 6시가 넘었는데도 어둡네.”
“겨울이니까요.”
“그래도 확실히 추위는 한풀 꺾인 것 같아.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꽤 추웠는데.”
“그래도 3월 말까지는 추울걸요?”
“그런가. 하지만 그건 시간 문제야. ……지금은 추워도, 분명 시간이 흐르면 나아질 거야.”
에드워드의 말뜻을 알아들었나 보다. 준영은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다 다시 품 안에 얼굴을 넣었다.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게 사랑스럽다. 이 모습이 예뻐 조금 더 밖에서 서성일까 하는 못된 마음이 살그머니 들어왔지만, 불행히도 계획은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무산되었다.
“이제 그만 들어오지?”
“망할 놈.”
“풋.”
저놈은 집에도 안 들어가는 건가 보다. 병원 입구에서 팔짱을 낀 채로 무서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제이크를 힐끔 보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준영은 뭐가 그리 웃긴지 키득거리기 바빴다.
그래도 다행인 건,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발작을 보이는 증세가 줄어들었다는 거다. 여전히 낯선 남자들, 특히나 젊은 남자들을 보면 겁에 질려 했지만.
“너란 녀석은. 지금 준영이 상태가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제이크. 아니에요.”
“뭐가 아니라는 거야? 준영도 감싸 줄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에드워드를 납치한 거예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제이크는 이 장단에 맞춰줘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다 푹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뭘 바라겠어.”
제이크의 반응에 준영은 미안해하면서도 키득거리며 웃었다. 에드워드는 말할 것도 없이 기분 좋게 큰소리로 웃다, 제이크에게 발차기를 당해버렸다. 그 모습에 준영이 또 한참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