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왜……, 당신이…….”
“글쎄 나도 몰라. 나도 여기저기 의뢰받고 일하는 건데. 메시지가 하나 왔더라고. 엄청난 돈과 함께. 내용이 뭔 줄 알아? 널 잡아서 재미 좀 보면 보낸 선금만큼 더 준다네? 얼씨구? 나야 엄청 좋지. 안 그래?”
“……도대체 누가.”
“그러니까. 나도 모른다고. 사실 난 말이야. 위험한 일은 잘 안 하는 주의거든? 나름 안전 제일주의라서 말이야. 그런데 넌 좀 괘씸하잖아? 내가 내 권리를 찾은 것뿐인데……. 씨발, 왜 소송을 하고 지랄이냐고.”
고개가 돌아가서야 자신이 맞은 걸 깨달았다. 몸에 열이 워낙 올라 아픈지도 몰랐다. 하지만 입안에 피가 고이는 걸 보면 꽤 세게 맞았나 보다.
“하, 소송? 내 권리를 내가 쓰는데 소송? 짜증 나지 않아? 내가 울 할망구 재산 쓰는데. 내가 친손주인데. 너 같은 어디 핏줄인지도 모를 동양인 새끼 때문에 소송을 당해. 장난하나…….”
“넌 할머니 손주 운운할 자격 없어.”
똑바로 노려보며 대꾸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셔도 장례식장 한번 오지 않은 주제에 친손주 운운할 수 있을까.
“요거 봐라? 제법 강단 있다 이거야? 아님. 남편 놈 믿는다는 거야? 하, 씨발.”
다시 손을 번쩍 든다. 준영은 질끈 두 눈을 감았다. 하지만 손바닥은 날아오지 않았다.
“아까는 욱해서 때렸는데, 상품을 흠집 내서 되겠냐. 안 그래?”
올라갔던 손바닥이 준영의 뺨을 가볍게 툭툭 쳤다. 두려움에 굳어있는 준영을 요리조리 보다니 이번에는 감탄사를 내뱉는다.
“그나저나……. 씹, 졸라 꼴리네. 나 베타인데도 이 정도로 냄새가 나다니. 막 달짝지근한 게 죽이는데? 이래서 오메가 맛본 손님은 오메가만 찾는 걸까?”
잭이 이번에는 준영의 머리채를 잡아 강제로 들어 올렸다. 아픔에 다시금 비명을 지르자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불며 킬킬거린다.
“내가 돈 굴리는 데 한 재주 하거든.”
“큭……!”
“네가 남자와 뒹구는 거 사진 몇 장만 찍으면 된다는 의뢰지만. 그럼 재미없잖아. 그래서 내가 특별 쇼까지 준비했지. 그러니, 예쁘게 잘해야 한다. 응?”
손바닥으로 준영의 볼을 툭툭 치며, 잭이 다시금 야비하게 킬킬거린다. 놈에게 욕이라도 날리고 싶지만 아픔에 신음 소리만이 튀어나온다. 준영은 머리채를 잡힌 상태로 질질 어딘가로 끌려갔다.
“나보고는 살살 다루라 해놓고.”
“응? 아 참. 그랬지? ……뭐 어때? 저기 놈들이야 구멍만 쓸 수 있으면 다 오케이일 건데.”
부하로 보이는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지적하자, 잭이 보란 듯이 킬킬 웃는다.
사무실을 나서 복도를 지나 당도한 곳은 작은 연회 홀 같은 공간이었다. 중앙에 단상이 있고, 그 단상 위 병원 침대 같은 것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얼굴을 반 이상 가린 오페라 가면을 쓰고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각각의 소파에 앉아 느긋이 침대 위 준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잭은 본능적으로 발버둥 치는 준영의 뺨을 한 번 더 후려치고는 그 위에 강제로 올려놓았다.
부하들이 달라붙어 준영의 양팔에 수갑을 채웠다.
두려움에 온몸이 미친 듯이 떨렸다.
무서워……. 무서워……. 할머니…….
“……에드워드.”
“응? 남편 찾는 거야? 걱정 마. 다 끝나고 남편한테 고이 보내줄게. 그게 의뢰 내용이니까.”
악마가 있다면 저렇게 웃을까 싶을 정도로 잭은 공포에 질린 준영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준영이 다니고 있는 사무실에 오자마자, 에드워드는 사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이미 근처에 있던 경호원이 이곳 사장을 잡아놓았던 상황이었다.
에드워드는 의자에 묶인 채 앉아 있는 사장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발로 복부를 찍듯이 후려 찼다.
신음도 못 지르며 괴로워하는 놈에게 다가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바로 검지를 꺾었다.
찢어질 듯한 비명이 사장실 안을 가득 메웠다.
“아아아악!”
작다면 작은 사장실에 중년 남자가 눈물 콧물 뽑으며 울부짖는다.
마커스는 감시 카메라를 미리 꺼놓은 일에 안도했다.
에드워드 햄턴의 곁을 지킨 지 어언 14년. 그가 십 대 때부터 그의 곁을 지켰다.
나름 에드워드에 대해서는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의 기간이다. 하지만 지금은 감히 그를 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마커스는 저런 에드워드를 모른다.
그는 지금까지 실수란 걸 한 적이 없다. 최근 들어 준영과 엮이며 그답지 않게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것도 알파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알파지만,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은 도저히 이성을 가지고 견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었던 거다. 마커스는 자신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예측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어쩜 준영은 에드워드의 운명의 짝인지도 모른다. 마커스는 그제야 자신의 주인이 완전히 바뀐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요!”
“잘 들어. 딱 세 번만 묻겠어.”
“무슨! 무슨 소리요!”
“준영 어딨어.”
“준영? 우, 우리 경리 보조로 뽑혀……, 크아아악!”
이번에는 가운뎃손가락을 부러뜨렸다. 두 개의 손가락이 자연스럽지 않은 방향으로 꺾였다.
“두 번째야. 잘 들어. 세 번째는 네놈이 한 모든 비리와 역겨운 짓들을 네놈의 자식과 부인에게 먼저 뿌리도록 하지.”
“무, 무슨……!”
“너 같은 녀석들은 털면 늘 비슷하게 나오더군. ……딸이 어리군. 한창 예민할 때고.”
에드워드는 책상 위에 쓰러진 액자를 들어 남자의 바로 코앞에 내려놓은 뒤 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난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내 신조야.”
“무슨……?”
“네놈이 준영에게 바꿔치기한 그 약을……, 네 딸이 맞는 걸 원치는 않겠지?”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방금 전까지 아픔에 떨었다면 지금은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고, 고소하겠소! 다짜고짜 날 이 꼴로 만들고! 내 기필코 고소하겠소!”
“그렇다면 난 기필코 네 딸을 같은 꼴로 만들어주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준영이 당한 만큼.”
싸늘한 음성이 남자의 목을 조르기라도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남자는 제대로 숨도 못 쉰 채로 헐떡이다 다시 온몸을 벌벌 떨었다.
“세 번째야. 나 에드워드 햄턴의 이름을 걸고…… 똑같이 만들어줄 테다. 내가 설령, 지옥 바닥에 떨어진다 할지라도 너와 네 핏줄과 네 마누라는 함께 끌고 가도록 하지.”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건 머저리 등신이 봐도 알 것이다. 저 사장이 머저리보다 더 바닥이라면 무리겠지만.
다행히 사장도 이것이 과장된 협박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나 보다.
자신의 아픔도 잊은 채 벌벌 떨던 사장이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하, 한 여자가…… 나에게 일회용 핸드폰을 줬소.”
“그건 나중에 밝히도록 해. 지금 내가 필요한 정보는 준영이 어딨느냐야. 준영을 누구에게 넘겼어. 누가…… 준영을 데려갔는지를 말해.”
“갱이라고 들었소. 오메가를 거래하는……. 그 외에는 모르오.”
아마 거짓은 아닐 거다. 사장은 모든 걸 포기한 듯한 표정으로 이내 흐느꼈다. 제발 딸과 아내만은 건들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보자 역겨움이 물씬 올라왔다. 마커스 본인이 이 자리에서 이자의 목을 꺾어버리고 싶었다. 자신도 이러한데 싶어 에드워드를 보았다.
역시나 에드워드는 치솟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알파인데도 두렵게 느껴질 정도의 페로몬에 숨조차 막히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사장은 꺽꺽거리며 바닥에 엎드린 채 괴로워했다.
이것이…… 우성 알파군.
처음으로 몸소 느낀 육체적 우위에 식은땀까지 흘리며 긴장할 때, 에드워드의 눈빛이 바뀌었다.
“……손주.”
“네?”
“잭 모던. 찾아. 당장! 그놈의 아지트! 아니, 그놈의 핸드폰으로 위치 추적해! 분명……, 준영과 동선이 겹쳤을 거야……. 분명!”
어디서 직감을 얻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진지한 에드워드의 말에 반박을 할 수도 없었다. 마커스는 곧장 부하에게 무전을 쳐 지시했다.
“사장은 어찌할까요?”
막 사장실을 나서려던 에드워드에게 질문을 하였다. 에드워드는 대답조차 하기 역겨운 듯 미간을 찌푸리다 차갑게 사장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일단 가둬놔. ……준영이 어찌 되냐에 따라 달라질 거니까.”
“무슨? 우리 딸은 건드리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소!”
새파랗게 질린 상태에서도 사장이 기를 쓰며 소리쳤다. 발길을 돌렸던 에드워드가 다시 몸을 돌려 사장에게로 다가갔다.
공포에 질린 사장이 본능적으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어지간히 무서운지 다친 손으로 바닥을 끌고 있는데도 아픈지 모르는 모양새다. 분노한 사자 앞 쥐새끼가 저럴까 싶다.
“딸이 소중한가? 나에게 준영 또한 소중하지. 내 목숨보다 더. ……너는 신에게 빌어야 할 거야. 신을 믿지 않는 날 대신해 빌어. 준영이 부디, 손끝 하나 다치지 않기를. 그가 온전하기를. 빌어.”
서리가 내리듯 사장실 안에 차가운 냉기가 흘렀다. 마치 그런 느낌이었다.
옆에 서서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마커스조차도 온몸에 소름이 돋아날 정도의 살기였다.
에드워드는 말없이 겁에 질린 사장을 시리게 내려다보다 휙 하고 몸을 돌려 빠르게 사장실을 빠져나갔다.
문득 두려워졌다.
분노한 우성 알파의 짝이 만에 하나 잘못되었다면?
자신은 사무엘이 한때 어떤 모습으로 지냈는지를 너무나도 잘 안다.
마커스는 저도 모르게 올라오는 공포에 다급히 고개를 젓고는 대기 중인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잘 묶어놔. 시끄러울 테니 입도 틀어막고.”
만약 예전의 에드워드라면 겁만 주는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설마하니 죄 없는 딸에게까지 손을 대겠나 싶지만, 지금 에드워드는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마커스도 빌 수밖에 없었다. 부디, 준영이 무사하기를 말이다.
옷이 완전히 찢겨 나갔다. 치부를 만지고 목덜미를 빨아댔다. 낯선 남자들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끔찍함이 남았다.
본능적으로 혀를 물려고 했지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에 찢긴 천 뭉치를 밀어 넣었다.
흐흐. 군침을 흘리며 다가오는 남자들의 모습에 준영은 죽을힘을 다해 반항했다.
온몸을 흔들며 거부했다. 수갑으로 묶인 부위에 피가 흐를 정도로 반항을 하자, 잭이 욕설을 내뱉더니 준영에게 다시금 무언가를 강제로 주사했다. 직감적으로 사무실에서 맞았던 그 약과 같다는 걸 알았다.
마틸다가 약이 좀 다르다 할 때, 의심을 했어야 했다.
도대체 언제 약이 바뀐 거지? 도대체 누가, 무엇 때문에…….
사시나무 떨듯 떨리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주사를 맞은 부위부터 서서히 뻐근한 기운이 퍼져 흐른다. 눈동자의 초점이 흐릿하게 바뀌었다.
소리가 윙윙 퍼져 흐른다. 누군가가 준영의 앞에 손바닥을 휘젓는다.
자기들끼리 뭔가 대화를 하더니 다시 준영의 몸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양다리가 허공에 들어 올려졌다.
괴물이다. 괴물이 자신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끔찍한 괴물이 닿는 부분이 썩어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싫어……. 싫어……. 제발, 도와줘요. 에드워드…….
갑자기 심장에서부터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올라왔다. 마치 심장이 한없이 쪼그라드는 기분이다.
“끅……! 흡……!”
동공이 축소됐다, 늘어졌다를 반복한다.
컥 하고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셨다. 입을 막고 있는 천 뭉치로 인해 숨을 쉴 수가 없다. 들썩거리자, 그제야 한 남자가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지 황급히 천 뭉치를 빼주었다.
“끅…… 끅!”
그럼에도 숨을 못 쉬며 벌벌 떠는 준영의 심장 부분을 누군가가 주먹으로 내리쳤다.
“……콜록, 콜록! 우웩!”
“뭐야? 왜 이래?!”
구역질이 마구 올라왔다. 토사물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서야 그나마 숨이 쉬어졌다. 하지만 한없이 모자란다.
“왜 갑자기 발작이냐고?! 이거 부작용 아냐? 그러게 적당히 맞히라고 했잖아!”
누군가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하자 잭이 짜증을 내며 소리친다.
“야! 씹! 내가 알았냐! 원래 감기약도 부작용이 있다고 씨발!”
점심을 먹은 후 아무것도 먹은 게 없는데도 토사물이 계속해서 올라왔다. 제대로 엎드리고 싶지만, 몸이 제압당한 상태라 그저 고개를 돌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없었다.
구경 중이던 사람들이 신경질을 내며 일어섰다.
잭이 당황하며 홀을 나가려는 남자들을 말려보지만, 오히려 화를 내며 잭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이딴 거 보려고 비싼 돈을 준 줄 알아?!”
“금방 씻기고 다시 시작할 테니깐…….”
“잭! 이 녀석 상태가 이상해!”
컥, ……쿡!
온몸이 뒤틀렸다.
“이거 발작 아냐?!”
“제길! 뭐 이래?!”
사람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서는 모습에 잭이 다시금 욕설을 내뱉는다. 부하 한 명이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 싶은지 서둘러 준영에게 다가가 그의 수갑을 풀었다.
“야! 왜 풀고 지랄이야?!”
“발작 증세잖아! 이대로 두면 죽어!”
부하의 대꾸에 잭이 신경질적으로 소파를 후려쳤다. 준영은 수갑이 풀리자마자 온몸을 굽혔다. 다시금 토기가 올라온다. 하지만 구역질만 몇 번 할 뿐, 더는 올라오는 게 없다.
점점 숨이 막힌다. 숨쉬기가 어렵다.
“숨을 못 쉬는 것 같은데?”
“야, 인공호흡 좀 해봐.”
“싫어! 토했잖아. 더럽게.”
“헉…… 헉…… 사, 살려…….”
의식이 흐릿해진다. 눈앞이 서서히 어두워진다. 암전됐다 밝아졌다가 반복되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대로 있으면 죽는다는 걸.
쾅!
“모두 손들고 엎드려!”
사방에서 고함 소리와 욕설이 들려왔다. 경찰이 들이닥치자 사방에서 도망치기 바쁘다. 누군가는 칼을 휘두르다, 경찰의 총을 맞기도 한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아비규환. 말 그대로 전쟁이 이러할까 싶을 정도다.
“준영!”
서서히 가라앉는 의식 속, 그리도 그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드워드……. 흐릿한 시야가 그의 얼굴로 가득 찼다. 웃기게도 이 순간에도 예쁘다 싶었다.
제이크가 응급실에서 나옴과 동시에 달려들었다.
“왜 벌써 나와! 포기하지 마. 살려내. 살려내라고. 제이크!”
다짜고짜 멱살부터 잡았다. 간호사가 꺅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제이크는 이성을 잃기 일보 직전의 에드워드를 가만히 쳐다보다, 그대로 뺨을 후려쳤다.
간호사는 물론 복도의 경호원들도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정신줄 잡아.”
“…….”
“네가 무너져서 어쩌겠다는 거야. 잘 들어. 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서 최선을 다할 거야. 그러니 넌 지금이라도 증거를 인멸하려고 하는 그들을 잡아 족쳐. 그게 네가 할 일이야.”
제이크의 말에 그제서야 에드워드가 힘없이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준영은…… 무사하겠지?”
질문을 하고도 대답을 들을 자신이 없다. 에드워드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길게 내뱉었다. 제이크는 그런 에드워드를 말없이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의사로서의 소견으로는 모른다야.”
“…….”
“약이 독해. 일반 건강한 사람이 맞았어도 위험할 정도로 치사량을 맞았어. 먹은 것이 아니라 위벽이 녹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신장과 간 기능이…….”
“살아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말해.”
“60%야.”
“……사는 쪽?”
“미안.”
제이크의 말에도 에드워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고개를 돌려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는 준영을 바라보았다. 응급실 안, 산소마스크에 호흡을 의지한 채 외로이 혼자 누워있는 준영의 옆모습이 커다란 유리창 너머 보인다.
홀린 듯 다가가 유리창에 손바닥을 댄 채 바라보다 이마를 쿵 하고 부딪쳤다.
이대로 무너져 울고 싶다. 그가 깨어나게 해달라고 믿지도 않는 신에게 빌고 싶다. 그 어디도 가지 않고 준영이 눈뜨기만을 기다리며 곁을 지키고 싶다.
하지만 안 된다.
차가운 유리가 에드워드에게 경고한다.
지금 자신이 흐트러질 때가 아니라고.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라고.
이성이 에드워드 햄턴에게 무너지지 말라고 그렇게 지시한다.
“톰슨.”
자세를 바르게 하고 대기 중이던 톰슨을 바라보았다.
“네.”
“제라드는 지금 어딨지?”
“오고 계시는 걸로 압니다. 비행기 안이라 연락이…….”
“연락이 닿는 대로 나에게 오라고 하세요. 그리고, 터트립니다.”
“네?”
“언론화하세요. 햄턴 사의 민낯. 이런 제목도 괜찮겠군요. 현존하는 모든 언론사에 투고하세요.”
에드워드의 말에 톰슨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일에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제이크가 나섰다.
“햄턴 사에 큰 타격이 될 수 있어.”
“돼야지. 그러라고 하는 건데.”
“뭐?”
“그딴 햄턴 사, 그게 그렇게 가지고 싶어서 감히 내 아이를 해치고, 감히 내 아내가…… 눈도 뜨지 못하게 됐어. 그러니 나도 똑같이 해 줘야지. 그렇게 가지고 싶은 햄턴 사를 흔들어야지.”
“너…… 그럼? 햄턴 사의 부속 회사들은? 그 수많은 죄 없는 사람들은! 대기업이 하나 무너지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는지 아냔 말이야!”
이번에는 제이크가 에드워드의 멱살을 잡아챘다. 누굴 향한 분노인지 모르게 화가 치밀어 에드워드를 닦달하지만, 사실 제이크 역시도 혼란스럽다.
안타까움이 더 클 것이다. 가장 힘든 건 에드워드인 걸 알면서도 그의 편이 되어 주지 못해 미안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제이크. 준영이 다시 마음을 열어주었을 때 결심한 게 있어.”
“…….”
“준영이 가장 힘들 때, 나 자신의 체면과 고집과 어리석음 때문에 그를 홀로 외로이 두었어. 내가. ……준영보다, 다른 것들을 더 중요시했어. ……그 결과가 어떻지?”
멱살을 쥐고 있던 제이크가 힘없이 손을 풀었다. 무슨 말을 하랴. 어떤 말로 포장할 수 있을까.
“최대한 조용히 일 처리를 하는 게, 피해를 줄이는 거라 생각했어. 그래서 무기를 들고 있으면서도 휘두르지 않았어. 아니었어. 그저 핑계였지. 가슴속 한편에는 여전히…… 이 위치가 중요한가 봐.”
에드워드는 말을 하다 말고 자신의 손바닥을 보았다. 분노를 삭이기 위해 몇 번이고 쥐었던 손바닥이 피와 딱지로 얼룩져있다. 에드워드는 별 감흥 없이 그 손바닥을 내려다보다 주먹을 다시 쥐었다.
“그래서 준영이 저 지경이 되었지. 두 번 다시 두 마리 토끼를 쫓지 않겠다고 해놓고……, 나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또다시 두 마리 토끼를 쫓은 거야. 그 결과가 이렇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커튼이 쳐져 준영이 보이지 않는다. 홀로 외로이 싸우고 있을 준영을 생각하자 다시금 심장이 관통되듯 아파진다.
“그러니, 더는 지킬 수 없도록 만들 거야. 더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을 거야. 하나만 지킬 거다. 설령 바닥에 내려앉더라도…… 이제는 아니까.”
준영과 함께한 일주일, 에드워드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행복을 맛보았다. 소소한 대화. 소소한 일상. 그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준영은, 설령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에드워드라 할지라도 곁에 있어 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런 에드워드를 더 바랄 것이다.
“에드워드…….”
“걱정 마. 아무리 그래도 준영이 싫어할 만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착한 준영이 자신 때문이라고 양심의 가책을 받을 만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이들 때문이 아닌 오롯이 준영을 위해서.
에드워드의 말에 제이크는 안타까워서일까. 한없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웃으라며 한마디 더 붙였다.
“준영이 그러더라. 우성 알파는 직업 구하기도 쉽다더군.”
“그……!”
황당함을 뛰어넘어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 제이크의 어깨를 강하게 쥐었다.
“난 내 분야에서 뛰고 올게. 그러니 부디, 부디…… 부탁한다.”
어깨를 잡은 손아귀에 더욱 힘이 실렸다. 제이크는 지긋이 퍼지는 통증에 집중하다 다시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그래. ……너 바뀌었구나.”
“바뀌어야지. 하지만 아직 멀었어.”
에드워드는 힘없는 미소를 흘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빛을 하더니 자세를 바로 하고 똑바로 복도를 걸어간다.
늘 정도를 걷던 에드워드는 멋있었다. 멋진 친구라 생각했다. 부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감히 그 어떤 순간보다 처음으로 탈선을 하는 친구의 뒷모습이 가장 멋졌다.
“빌어먹을……. 졸라 멋진 척하네.”
졌다. 평생을 저놈에게 질 것 같다. 준영이란 배우자를 만난 후, 너무 한심한 모습을 보여 한편으로는 꼴좋다고 생각했더니, 이제는 감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버렸다.
“질 수 없지.”
에드워드의 말이 맞다. 그는 그의 영역에서, 자신은 자신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할 것은 이준영, 아니 준영 햄턴을 최고의 의료진과 의료 장비를 동원해 살려내는 것, 그것이었다.
로즈 윈터는 뛰어난 비서였다. 그녀는 비서로서의 자부심 또한 남달랐다. 무려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대기업 햄턴 사의 상임 이사 에드워드 햄턴의 비서이니까.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그녀의 자부심이 흔들렸다.
지금껏 일 처리만큼은 완벽하다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지금은 도저히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나의 전화를 끊으면 세 군데서 또다시 전화가 울렸다. 보조 비서들이 두 명이나 있는데 역부족이다. 전화란 전화는, 내선이란 내선은 죄다 돌아가면서 울려 퍼졌다.
정작 중요한 건 에드워드 햄턴은 휴직 중이라, 출근도 하지 않는데 사방에서 그를 찾는 전화로 비서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때, 한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고위 임원에게 욕을 신나게 듣고 있던 로즈의 전화기를 뺏어 들었다.
“죄 없는 제 비서들 그만 괴롭히고, 회의장에서 직접적으로 하시죠. 그럼.”
일주일 동안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에드워드였다. 그가 돌아온 거였다. 로즈는 물론 다른 비서들도 전화를 받다 말고 멍한 눈으로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끊어요. 욕은 제가 먹을 테니까.”
“하, 하지만 주주 중 한 분이시라…….”
수화기를 손으로 가린 채 겨우 대답한 보조 비서가 우물쭈물 어쩔 줄 몰라 하자 에드워드는 역시나 그녀에게 가 수화기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방금 전과 비슷한 대답을 한 후 끊고는 곧장 전화선을 빼버렸다.
“다 빼버리세요.”
“네?”
너무 황당해 되묻자, 이번엔 옆에 있던 내선 전용 전화기의 선을 빼버린다. 그 모습을 잠시 멀뚱히 보던 로즈도 다급히 에드워드가 한 것처럼 빠르게 울려대고 있는 전화기를 무시하고 선을 뺐다. 보조 비서들도 덩달아 전화기 코드를 모두 뺐고 그제야 비서실에 고요함이 찾아왔다.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에드워드는 여전히 들고 있는 전화선을 조금 만지작거리다, 내려놓고는 비서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어쩜 전, 이번 일로 정식으로 해임이 될지도 모릅니다.”
“헉!”
놀란 비서 한 명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뱉다,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에드워드는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보았다 다시 말을 이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저와 오랫동안 함께 해왔던 비서팀에는 정식으로 인사를 하는 게 맞다 싶어 미리 인사를 드릴게요. 지금까지 수고하셨습니다.”
“아직 단정 짓지 마세요!”
“Miss. 로즈.”
“전 누가 뭐래도 에드워드 이사님을 믿어요. 그 어떤 구설수에 휩싸인다고 해도…… 분명 에드워드 이사님처럼 뛰어난 인재는 없으니까요. 그러니 그딴 구설수에 지지 마세요.”
로즈는 양손을 꽉 쥔 채 에드워드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녀의 말에 다른 비서들도 비슷한 모습으로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에드워드는 그런 그녀들을 찬찬히 둘러보다 미소를 지었다.
“네.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을 보니 제가 아주 헛 산 건 아닌 것 같군요. ……네. 맞아요. 아직 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방금 전의 그 인사는 보류하는 걸로 하죠.”
에드워드의 대답에 모두가 안도하듯 환하게 미소 지었다.
“제가 그다지 재주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돕고 싶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을까요?”
막 이사실로 들어서려던 에드워드를 불러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었다. 에드워드는 우뚝 자리에 멈춘 채 뭔가 고심하는 듯하다 고개를 돌렸다.
“메일 전송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그 정도야…….”
“많습니다. 사방으로 전부 뿌리세요. 어디든 좋아요. 아시는 기자들도 좋고, SNS를 잘하는 친구도 좋습니다. 사방 천지에 죄다 전송해 주세요. 물론, 제 메일을 이용해서요.”
“도대체 어떤 거길래.”
“바로 메일 하나 보내드릴 테니, 최대한 많이 널리 널리 퍼트려주세요.”
영문을 모르는 로즈에게 부탁한다 말한 뒤 곧장 안으로 들어섰다. 로즈는 여전히 이해를 못 했지만 일단 자리에 앉아 메일이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통의 메일이 날아왔다. 별생각 없이 내용을 확인했다가, 흘러나오는 신음에 한 손으로 입을 막아야 했다.
“로즈. 이거…….”
“일단 하자. 이유가 있으시겠지.”
동료의 물음에 로즈는 곧장 작업에 착수했다. 에드워드는 자신의 이름을 팔라고 했지만, 어차피 일이 잘못돼 컴퓨터를 통째로 뺏긴다면 들통날 일이다. 로즈는 빠르게 지인들에게 메일을 배포하기 시작했다.
밑도 끝도 없는 주주총회가 열렸다.
최소 한 달 전부터 고지하던 총회가 당장 3일 만에 열린 것이다.
갑작스러운 주주총회의 이유는 바로 에드워드 햄턴 때문이었다.
에드워드가 한 기자회견은 물론 그가 퍼트린 햄턴 가의 사생활에 대한 내용에 사무엘은 극노했다. 회장의 사생활적 치부를 정확한 증거 없이 기사화한 건 회사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그는 곧장 임원들에게 연락을 취해, 자신의 아들이자, 상무이사 에드워드 햄턴의 사임을 위한 주주총회를 열라고 명했다.
아무리 사무엘이 현직에서 물러나 있다고 할지라도, 그와 함께 뛰었던 동료들이, 그리고 그의 부하들이 아직 멀쩡히 살아있는 상태이다. 그는 아직 이빨이 빠진 호랑이가 아니었다.
“그 멍청한 놈이.”
바로 비행기를 타고 넘어온 사무엘은 주주총회가 열릴 회의실에 미리 당도했다. 아직 1시간 가까이 남았지만 분노와 조바심에 다른 곳에서 기다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주주의 자격으로 함께 온 레베카는 그런 사무엘을 보고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제가 그랬잖아요. 에드워드는 예전의 그가 아니라고.”
“그 얘기는 그만하시오. 남자는 누구나 한때의 치기가 있는 법이오.”
순간 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하지만 십수 년 사무엘이란 남자의 곁에서 레베카라는 여성을 연기하며 살아왔었다. 이 정도로 표정이 흔들릴 자신이 아니었다.
레베카는 이해한다는 듯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고충이 많겠어요. 여보.”
정말 어리석지 아니한가. 똑똑한 만큼 자신의 잣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 그렇게 한심해 보인다.
하긴 그런 허점이 있기에 자신이 접근할 틈이 있던 것도 사실이다.
사무엘 햄턴이란 남자를 마주하게 된 건 그녀가 막 전 남편의 집에서 도망을 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정확히는 보스턴에 있는 햄턴 가의 고용인으로 일을 할 때였다.
후에 알았는데 마거릿이 행여나 남편이 눈을 돌릴까 봐 못생긴 여자를 뽑아서 조이가 면접에서 통과된 거라고 했다.
이유야 어쨌든 그때의 그녀는 몸을 숨기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그런 사정을 알았어도 분노할 정신이 없었다.
혹시라도 전 남편이 지금이라도 칼이라도 들고 찾아올까 봐 자신의 얼굴을 필사적으로 숨겼으니까.
일부러 염색을 하고 컬러렌즈를 꼈다. 필요 없는 교정기를 끼고, 진한 화장을 하였다.
누가 봐도 조이 미샤트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더는 도망칠 곳도 없었다. 이곳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을 해서일까.
안주인이자, 사무엘의 두 번째 부인인 마거릿이 그녀에게 호감을 보였다.
인기는 없지만 극단 배우 출신이었던 조이는 단 한 번도 이런 허드렛일을 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다만 쫓겨나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일을 했을 뿐이었다. 심지어 혹시나 목소리라도 들킬까 봐 말을 아꼈던 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나쁜 쪽보다는 좋은 쪽으로 비쳤나 보다.
어느샌가 마거릿은 조이에게 이런저런 속 얘기까지 털어놓기 시작했다.
심지어 마거릿은 갓 태어난 셀린느의 유모로 조이를 적극 추천했다. 다른 전문 유모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처음에는 시급을 더 많이 쳐준다는 게 끌려 흔쾌히 맡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푸념을 늘어놓는 마거릿이 미워졌다.
모든 걸 다 가진 주제에…….
심지어 자신은 목숨이 위태로워 아이까지 떼놓고 도망쳐왔는데, 마거릿은 늘 셀린느를 품에 안은 채로 자신의 현 상황을 푸념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부러움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증오로 바뀌어 갔다.
잘생기고 멋진, 알파 사무엘의 옆에 서 있는 마거릿이 미치도록 부러웠다.
같은 오메가인데 나는 왜 이 모양이지?
뺏고 싶다.
그 옆에 서고 싶다.
멍청하고 어리석고 형편없는 조이 미샤트가 아닌, 새로운 인생으로 살고 싶었다.
문득, 자신이 예전에 본 각본이 떠올랐다.
시궁창에서 태어나, 자신을 갈고닦아 남자들을 유혹, 그리고 남자들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선 악녀 레베카.
아아……. 그래, 이름은 레베카가 좋겠어.
극단 쪽의 여배우들은 여러 가지 불법 약물이 어디서 유통되는지를 잘 안다.
조이는 모은 월급으로, 히트 발정제를 샀다. 마거릿의 고민을 해결해 줄 아주 착한 마음으로.
그 후 마거릿이 사라지고 얼마 되지 않아 레베카라는 이름으로 조이는 당당히 사무엘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거릿을 통해 들은 사무엘을 유혹하는 건 쉬웠다. 그 후 운명이 짝인 마거릿이 도망간 후 정신조차 온전치 못한 늙은이를 오랜 시간 옆에서 보조하였다.
그렇게 오랫동안 차츰차츰 단계를 밟아 당당히 햄턴이란 성을 손이 넣었다.
참…… 길었지.
“내 얘기 듣고 있소?”
“네, 말해요. 듣고 있어요.”
“제라드에게 가급적 빨리 뉴욕으로 오라 전하시오.”
드디어. 레베카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출 수가 없었다. 일부러 태연한 척 물을 마시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신이 부르는 목적이 그런 것 때문이라면 직접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알다시피 제라드는 내 말을 잘 듣지 않아요.”
사무엘은 레베카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뭐라고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녀의 말처럼 제라드는 이미 레베카의 손을 떠난 지 오래다.
“짐. 자네가 좀 하도록 하게.”
“그럴 필요 없습니다.”
옆에 서서 대기 중이던 보좌관에게 명령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전혀 다른 곳에서였다. 멋대로 회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에드워드와 제라드였다.
사무엘의 미간이 팍 하고 찌푸려졌다. 레베카도 어이없다는 듯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넌 어떻게 된 게 연락도 없이 이곳으로 온 거니.”
“집안이 난리가 났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어야지요.”
레베카의 나무람에 제라드는 특유의 표정을 지으며 빈정거렸다. 그의 태도에도 레베카는 딱히 불쾌한 티를 내지 않았다.
제라드는 예전부터 그녀의 일에 사사건건 대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쭙잖은 형제애에 푹 빠진 자신의 아들에 대해 레베카는 애초에 마음을 비웠었다.
이번에는 제라드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응시하던 사무엘이 입을 뗐다.
“넌 이곳에 왜 왔느냐.”
“말했잖아요. 이제 내 회사가 될 수도 있는데, 남 일 같지 않더라고요.”
사무엘의 질문에 제라드는 또다시 비아냥거리며 대답했다. 그는 노골적인 노기를 드러내는 사무엘을 무시하고는 적당히 빈자리로 가 앉았다.
“제라드. 거긴 네 자리가 아니야.”
그런 제라드를 가만히 지켜보던 에드워드가 지적했다. 제라드가 앉은 곳은 주주들이 앉는 자리였다. 제라드는 의아해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되물었다.
“응? 그럼 어딘데?”
“넌, ……여기.”
에드워드는 천천히 어딘가로 걸어간 뒤에서야 의자를 잡으며 대꾸했다. 사무엘은 물론 레베카의 눈도 커졌다.
“여기, 에드워드 햄턴이라고 적혀있는데?”
“회사에서 가장 큰 주주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따로 좌석이 있지. 내 자리라기보다 내 지분만큼의 자리인 거야.”
“아. 그렇군.”
납득했다는 듯 제라드가 털썩 의자에 몸을 눕히듯 앉았다.
“와우. 자리 좋은데?”
“무슨 해괴한 짓들이냐.”
사무엘이 표정을 애써 감추며 물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 분노가 들끓는 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보다.
“제라드!”
결국 레베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만히 있어도 에드워드의 자리가 제라드에게 넘어갈 건데, 왜 저리도 멍청하게 구는지 알 길이 없다. 괜스레 사무엘의 눈 밖에 나면 안 된다 싶어 레베카가 먼저 선수 쳐 소리를 질렀다.
“장난을 칠 거면 당장 나가렴!”
제라드가 에드워드를 잘 따르는 건 안다. 하지만 더는 어린애가 아니다. 이제 어린 치기의 형제 놀음은 그만둘 때도 되었건만, 제라드는 끝까지 레베카의 속을 뒤집어 놓는다.
“누가 장난이라고 했습니까?”
대답은 에드워드가 했다. 그는 입구에 서서 대기 중이던 톰슨을 향해 고갯짓을 하였다. 톰슨은 빠르게 다가와 제라드의 앞에 선 뒤 서류 가방에서 고급스러운 재질의 검은색 바인더를 꺼내 들었다.
사무엘과 레베카는 미간을 좁힌 채 그들의 이상한 행태를 지켜보았다.
“여기다 쓰면 돼?”
“네. 임시 서류이긴 하지만, 법적 효력은 있습니다.”
“진짜 괜찮겠어? 정말로 너 빈털터리가 된다고.”
막 사인을 하기 직전 제라드가 물었다. 그의 말에 사무엘과 레베카의 표정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무언가 짐작이 가지만, 감히 말도 안 되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져서일까, 둘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둘을 가만히 응시하던 에드워드가 입꼬리를 올렸다.
“괜찮아. 우성 알파는 직업 구하기 쉽대.”
제라드는 큰소리로 웃고는 단 한 번도 주저함도 없이 사인을 했다. 톰슨은 짧은 한숨을 내쉰 뒤 서류를 들어 꼼꼼히 살핀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에드워드 햄턴이 가진 햄턴 사의 주식 전부를 제라드 햄턴에게 인수합니다.”
사무엘은 물론 레베카도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미친 거냐……, 에드워드.”
사무엘의 노기 서린 질문에 에드워드가 담담히 대꾸했다.
“네. 사랑에 미쳤지요.”
휘파람을 불며 참관하던 제라드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 미안.”
제라드는 흠흠 헛기침을 하고는 표정을 추슬렀지만, 그뿐이었다. 이어지는 에드워드의 말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제라드는 진심으로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까지 깨물었다.
“아버지 말대로더군요. 운명에 휩쓸리면 사리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된다고. 맞는 말입니다. 충분히 공감 갑니다.”
“너…….”
“그나저나,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지금은 저에게 감정적으로 화를 내기보다, 제가 왜 이런 정신 나간 짓을 한 건지에 대해 의아해해야지요.”
에드워드의 지적이 맞다. 그가 왜 갑자기 모든 권리를 제라드에게 양도한 것인지가 먼저였다. 애초에 에드워드를 쫓아내려 연 주주총회가 맞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그를 완전히 매장시킬 생각은 아니었다.
저번처럼 솜방망이가 아닌, 제대로 된 매질을 좀 할 생각이었다. 바닥까지 한번 떨어져 봐야, 에드워드가 자신이 가진 게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게 될 거라 생각하고 겁을 조금 주려던 것뿐이다.
에드워드는 완벽했다. 설령 셀린느가 남자로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에드워드의 자리에 앉히지 않았을지 모른다.
햄턴 가의 모든 장점을 가지고 태어난 우성 알파는 신이 준 자격과도 같았다.
“네가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은데…….”
“겁만 줄 생각이었다? 슬쩍 제라드에게 모두 줄 것처럼 연기만 할 생각이었다? ……이 말씀을 하시려고 한 건가요?”
“에드워드.”
“하지만 어쩌죠? 전 연기가 아닌데. 아버지 말대로, 운명의 앞에 서면 모든 게 뒤바뀌는 게 맞았습니다. 그래서 알았죠. 아……, 내가 양손에 쥐고 있는 게 얼마나 어리석고 하찮은 것인지를. 햄턴이라는 허울보다, 더 소중한 걸 깨닫게 되었단 말입니다.”
“그거야말로…… 네가 미쳤다는 증거다. 그래, 보아하니 준영이란 자가 너에게 꽤 소중했던 것 같구나. 그럼 잘 데리고 있으렴. 그러면 되지 않느냐.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느냔 말이다!”
“노망난 아버지께서 자꾸 절 절벽 끝으로 미니까요.”
“……뭐?”
“자신의 등 뒤에 어떤 악귀가 붙었는지 모르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는 바람에 당신이 그리 귀하게 여기는 아들이 벼랑까지 밀렸단 말입니다.”
사무엘의 미간이 다시 좁혀진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잠시 혼란스러워할 때, 에드워드가 다시 톰슨에게 눈빛을 보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주주총회의 시간이 벌써 지났는데도 주주라고는 저, 아니 이제는 제라드군요. 제라드와 레베카밖에 오지 않는 게?”
사무엘은 그제야, 이미 주주총회 시작 시간이 한참 지났다는 걸 알았다.
“무슨 짓이냐.”
“이곳 회의에 참가할 임원들은 바쁠 겁니다. 자기들이 싼 똥 치운다고요.”
“뭐? ……너 도대체.”
“그리고 주주들은 제가 개인적으로 연락했습니다. 스스로 내려갈 거니 굳이 오실 필요 없다고. 그리고 현명하다면, 주식을 파시는 게 옳다고.”
“너, 서, 설마.”
드디어 무언가 감을 잡은 사무엘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허옇게 질려갔다.
에드워드는 양 손바닥을 모아 공 모양처럼 오므렸다가, 이어 공중으로 날리는 제스처를 취했다.
“펑.”
사무엘의 한쪽 눈썹이 다시 꿈틀거렸다.
“대가인 셈이죠. 나의 소중한 걸 건드렸으니. 그자가 평생을 쫓아가던 걸 종이 쪼가리로 만들었을 뿐입니다. 아마 내일쯤이면 주가가 아주 보기 좋게 하락하겠지요. 아니, 지금도 하락 중인가?”
톰슨이 일부러 타이밍을 맞춰 빔을 쏘았다. 화이트보드가 실시간으로 주식 현황을 보여 주었다.
설령 주식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실시간으로 금액이 떨어지는 것이 보일 정도로 빠르게 하락세를 치고 있었다.
“네 이놈!”
“그러게. 적당히 했어야지.”
분노해 소리를 지르던 사무엘이 목덜미를 잡든 말든, 에드워드는 한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허옇게 질리다 못해 부들부들 떨고 있는 레베카는 어느샌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에드워드를 노려보았다.
“소중한 게 눈앞에서 망쳐지는 걸 보니 기분이 어때?”
“……비록 주가가 일시적으로 떨어졌다고 해도 이 정도로 무너질 햄턴 사가 아니야.”
이를 꽉 깨문 채 어쨌든지 태연한 척 노력하는 레베카의 말에 에드워드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맞아. 당연하지. 햄턴 사의 밑으로 자회사들이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든 햄턴 사는 일어나. 햄턴 사는 무너지면 안 돼. 그 밑으로 있는 수많은 서민들이 덩달아 무너질 테니.”
에드워드는 손을 뻗어 노트북을 잠시 조작했다. 이어 화이트보드의 화면이 바뀌었다.
“이참에 새로운 햄턴 사로 거듭나면 돼. 더러운 개새끼들 죄다 몰아내고, 깨끗하고 투명한 이미지를 노려야지. 제라드는 경영 쪽으로 공부는 안 했지만, 분명 열심히만 한다면 뛰어난 경영인이 될 수 있을 거야. 이제 곧 물러날 늙은 간부들을 대신해 깨끗하고 성실한 젊은이들을 뽑으면 돼. 레베카 햄턴의…… 아니, 조이 미샤트의 말에 놀아나지 않을 그런 올곧은 자들로.”
에드워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레베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두 눈에 경악이 차올랐다.
“들여보내요. 오래 기다렸을 건데.”
에드워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톰슨이 빠르게 회의실 입구로 다가갔다.
레베카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는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에드워드는 자신의 패배를 직감한 듯 떨기 시작하는 레베카를 조금은 무료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왜 당신을 봐줬을 것 같아? 당신이 불쌍해서? 바르고 곧은 경영인의 이미지가 하락할까 봐? 아니면 제라드가 충격을 받을까 봐? ……맞아. 모든 이유가 다 맞아. 그래서 참았지. 옆에서 깐죽거리는 게 꼴 보기 싫었지만, 그래도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아버지만 돌아가시면 아무것도 쥔 게 없는 꼴이 될 테니 조금만 참자고 생각했지.”
“……너, ……너.”
“그런데 레베카. 당신 너무 갔어. 설마하니 당신이 제시카를 일부러 내 앞에 데려온 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벽에 막혀 더는 물러설 곳이 없어진 레베카의 두 눈이 더욱 커졌다.
사무엘은 보좌관의 도움을 받은 채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금시초문의 말에 그는 한없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 난……! 모르는 일이야!”
“왜? 딸을 두 번 버리려고?”
“…….”
레베카의 입이 딱하고 다물어졌다.
에드워드는 말 그대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레베카를 무심히 보다 슬쩍 제라드를 돌아보았다.
방금 전까지 입꼬리를 올린 채 상황을 방관하던 제라드는 어느샌가 무표정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있었다.
이미 에드워드에게 들어 알고 있고, 각오를 다졌다 할지라도 눈앞에서 직접 당하는 건 다를 것이다.
그때 제라드가 시선을 돌려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진행해.’
작은 입 모양에 에드워드는 다시 노트북을 조작했다. 화면이 바뀌었다. 지금까지 모아놓았던 모든 자료들이 한 장 한 장 자동으로 바뀌며 화이트보드에 모습을 드러냈다.
레베카가 지금까지 저지른 비리와 청탁에 대한 증거가 쉴 새 없이 화면에 비쳤다.
사무엘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화면을 응시하다 참담함을 금치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경찰과 함께 FBI가 안으로 들이닥쳤다.
“조이 미샤트, 당신을 살인 교사, 마약 소지 및 유통죄, 횡령죄, 사기죄 등으로 특수 고발하겠습니다.”
한 FBI의 가 자신의 신분증을 보여 준 후, 간략한 죄목을 늘어놓았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찰들이 그녀에게 수갑을 채웠다.
“여, 여보…….”
레베카가 경찰에게 잡혀 끌려가며 사무엘을 불러보지만, 그는 두 눈을 감은 채 돌아보지도 않았다. 낙담한 채 끌려가던 레베카의 뒤로 에드워드의 목소리가 꽂혔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당신 딸도 곧 갈 테니, 외롭지는 않을 겁니다.”
레베카는 당황하며 몸을 틀어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차디찬 에드워드의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깨달았다. 그가 이미 모든 비밀은 물론 증거까지 확보했다는 것을.
“그 애는! ……내 딸이 아니야.”
그럼에도 우겨본다. 의미 없는 짓인 걸 알면서도 레베카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외쳤다.
“우긴다고 해서 되는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지요. ……상대방을 믿게 하고 싶다면 애초에 증거를 보이세요. 저처럼.”
일부러 연출을 노렸어도 어려울 정도로 완벽한 타이밍에 화이트보드의 화면이 바뀌었다.
제이크를 통해 확인한 레베카와 제시카의 친자확인 결과서가 커다랗게 떠오름과 동시에 그녀의 얼굴에 절망이 서렸다.
“끌고 가세요.”
에드워드의 말이 떨어지고서야 FBI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경찰과 함께 레베카를 끌고 회의실을 나섰다.
절망에 빠진 사람은 레베카뿐만이 아니었다.
운명이라 여겼던 마거릿이 자신을 떠난 후 낙담에 빠져있던 사무엘을 곁에서 지지해 주고 다독여주었던 레베카였다.
그런 그녀가 애초에 작정을 하고 자신의 곁에 온 거란 사실이 사무엘에게는 큰 충격일 것이다.
“이렇게까지 해야 했느냐…….”
회사까지 떠들썩하게 만들어서 꼭 일을 키워야 했냐는 사무엘의 말에 에드워드는 무심히 대꾸했다.
“당신이 그런 사람이니까요.”
“…….”
“분명 당신에게 모든 증거를 보여줬다면, 당신은 어떻게든 덮고 쉬쉬하려 했겠지. 누군가가 희생을 당해 피눈물을 흘리든 말든 당신에게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 어떠한 것보다 회사의 안위가 더 우선인 사람이니까.”
“에드워드. ……네 어미 일로 아직도 나에게 화가 난 거냐?”
이건 조금 화가 난다. 에드워드는 허탈하게 웃음을 흘렸다. 마지막 증거만은 보이지 않으려 했다. 나름의 아버지에 대한 예의였다.
“그 말은 꺼내지 마십시오.”
“네 어미 일은 내가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미안? 미안하다? ……그래서, 그녀에게서 유일한 희망인 절 뺏은 겁니까?”
“애초에 당연한 일이다. 넌 햄턴 가를 이을 유일한 내 아들이었으니까.”
에드워드가 우성 알파라고 밝혀짐과 동시에, 사무엘이 오랫동안 버려놨던 본가를 찾았다. 그리고 피눈물을 흘리며 매달리던 어머니를 냉정히 뿌리치고, 에드워드를 데려가 버렸다. 그날 이후,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어머니는 눈을 감았다.
어찌 그 날을 잊으랴.
마를 대로 말라버린 모습을. 약해지다 약해지다 못해 해골이 이러하랴 싶을 정도로 말라 버린 나의 어머니.
어찌 그날의 비통함을 잊으랴.
가장 슬프고 괴로운 건, 그런 어머니의 한보다 아버지의 눈에 차기 위해 노력했던 자신이었다.
잠시 눈을 감았던 에드워드가 다시 눈을 떴다.
“우성 알파. ……그게 대단한 건 줄 알았습니다.”
그래, 착각에 빠졌었다. 우성 알파라 버림받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그의 운명의 짝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도, 그 뒤를 이어 알파 남동생이 태어나도, 자신이 우성 알파라 이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애초에 자신이 우성 알파였기 때문에, 어머니와 생이별을 해야 했던 거였다.
“우성 알파 따위, 직업 구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이점이 없더군요.”
그딴 거, 개나 줘버리라지.
에드워드는 결국 사무엘에게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자료를 하나 더 보여 준 뒤 발걸음을 옮겼다.
마거릿이 왜 이혼을 요구했는지, 낱낱이 조사된 보고서가 화면에 뜨는 것을 끝으로 에드워드는 회의실을 나섰다.
“톰슨, 의사를 불러요. 정신이 나가는 건 상관없지만, 아직은 죽으면 곤란하니까요.”
앞으로 크게 용트림하며 흔들릴 햄턴 사에 회장의 부고까지 알려지면 큰일이다. 그때가 되면 정말로 이 큰 회사가 휘청일 수도 있다.
“제라드. 당분간은 너에게 맡기마. 톰슨이 널 보좌해 줄 거다.”
뒤를 따른 제라드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우뚝 걸음을 멈춘 걸 알았지만 역시나 돌아보지 않았다.
“하나만 알아줘.”
“…….”
“난 생각보다 테드를 좋아해.”
“……그래. 고맙다.”
잠시 눈을 감은 뜨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제 마지막 남은 하나만 처리하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준영의 곁으로 갈 수 있다. 에드워드는 더욱 걸음을 빨리했다.
준영……, 기다려.
미국은 물론 세계적인 언론들이 햄턴 사의 민낯에 집중했다.
모든 고위 간부들이 파문에 휩싸였다. 작게는 음주운전, 폭행. 크게는 성폭행, 매춘, 미성년자 성매매, 마약 거래 등등.
하나만 터져도 매장당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심지어 경찰과 FBI, 혹은 기자로 인해 밝혀진 것도 아니었다. 일반인들 사이에서 퍼져 흐른 것들이 순식간에 SNS를 통해 떠돌았다.
그저 의혹성 추측 글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파장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증거와 함께 제시된 동영상, 사진, 녹음 파일 등. 빼도 박도 못할 자료들이 세상에 떠돌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세간의 관심이 햄턴 사, 그리고 에드워드 햄턴과 그의 비운의 아내에게 몰렸다.
대법원 건물을 나서자마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대기 중인 차로 가는 데까지도 난관이었다. 기자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어 단 하나의 답변이라도 더 듣고 싶어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경호원들이 애초에 이럴 줄 알고 에드워드를 둘러싸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물불 가리지 않는 기자들로 인해 금세 대열이 흐트러져 버렸다.
결국 차를 지키고 있던 경호원들까지 합세하고서야 에드워드는 간신히 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난리군요.”
마커스의 중얼거림에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그를 응시했다. 에드워드의 눈빛을 알아챈 마커스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또다시 매크로 같은 대답이 이어졌다.
“죄송합니다.”
“마커스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죠.”
준영이 기절한 지 벌써 일주일. 그는 아직 눈을 뜨지 않았다.
“병원으로 갈까요?”
“셀린느에게 가도록 하죠.”
에드워드의 대답에 마커스는 조금 안타까운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곧 자세를 바로 한 뒤 기사에게 명령했다.
차가 출발하자, 차를 두드리며 질문을 퍼붓던 기자들이 이내 하나둘씩 나가떨어진다. 마커스는 그런 기자들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찼지만, 정작 에드워드는 애초에 신경도 쓰지 않았었다.
그저 움직이기 시작하는 창문 너머 배경을 바라보며 지금도 혼자 잠들어 있을 준영을 떠올렸다.
그의 곁을 지키고 싶다. 이 순간에라도 눈을 떠 에드워드를 부를 것만 같다. 모든 걸 멈추고 그저 준영의 곁을 지키고 싶다.
하지만, 아직은 할 일이 남았다.
“셀린느 상태는 어떻죠?”
“자살을 시도했다고 합니다.”
“놔두지 그랬어요?”
“네?”
그만 실수로 본심을 내뱉었다. 에드워드는 씩 입꼬리를 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농담입니다.”
아마도 본심이란 걸 마커스도 알 거다. 굳이 지적하지 않는 걸 해명할 필요도 없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되물었다.
“그래서. 약입니까? 아님 칼?”
“……혀를 물었다고 들었습니다.”
“쯧. 겨우?”
“…….”
마커스는 이번엔 되묻지도 않았다. 에드워드는 시린 눈동자로 먼발치를 바라보며 본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아직 멀었군.”
만약 마커스가 들었다면 이번에야말로 경악했을지 모르지만, 듣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더는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은 착한 아이로 살 생각은 추호도 없다.
방으로 들어가자, 침대에 누워있던 셀린느가 고개를 돌렸다. 자해까지 했다던데 크게 이상은 없어 보였다. 링거를 굳이 왜 맞나 싶을 정도로 안색이 좋았다.
“에드워드. 나는 정말 몰랐어. 정말이야. 제시카가, 세상에! 그런 약이 실존하는 줄도 몰랐어. 어쩐지 이상했다니까! 난 그저 살짝 겁만 주려고 한 건데! 그렇게 페로몬이 많이 나올 거라고는……! 그래! 다 그년 때문이라고! 세상에! 심지어 레베카의 딸이라니! 작정하고 에드워드에게 붙은 거잖아! 날 애초에 속인 거야! 믿어줘!”
추하다. 충격에 몸져누운 사무엘보다 더 추했다.
어쩜 저렇게 못났을까. 나름 사랑을 받고 자랐는데, 왜 저런 모습으로 자란 걸까.
에드워드는 계속해서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셀린느를 말없이 응시했다. 드디어 한 발짝 떼자, 그때까지도 변명을 하던 셀린느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왜? 더 해.”
“……뭘?”
“변명. 구질구질한 게 보기 좋네.”
에드워드의 말에 셀린느가 입술을 꽉 하고 깨문다. 움찔거리는 입술이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는 게 뻔히 보였다.
에드워드는 침대 옆에 놓여있는 의자로 가 털썩 앉았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경계하는 셀린느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혀 물었다며?”
“그, 안느가 말려서.”
“안느? 아, 그 늙은 베타 여인?”
“…….”
“너도 어지간히 굶었나 봐? 베타 여인도 못 이길 정도인 걸 보면.”
셀린느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팍 고개를 숙인 그녀의 양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부끄럼 때문이라기보단, 치욕이 더 강할 것이다.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정말로 내가 죽기를 바라는 거야?”
“응.”
“……!”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에드워드의 반응에 셀린느는 충격을 먹은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그를 응시했다.
“닮았네.”
“뭐?”
“네 아버지와. 그 늙은이도 사실을 알았을 때 딱 그런 표정이더라고.”
“왜 그렇게 말을 해. ……그렇게 중요해? 그깟 오메가가! 그깟 남ㅊ…….”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다, 아차 하고는 입술을 말아 문다.
생각보다 크게 화가 나지 않았다. 심장은 조금 저릿하게 아프지만, 그래.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셀린느의 안색이 영 나쁘다. 아까처럼 아픈 척할 때와는 달랐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다 못해 링거가 꽂힌 것도 까먹은 사람처럼 물러서더니, 기어코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왜 저러나 하다, 뒤늦게 자신의 상태를 인지했다.
“이런, 페로몬이. 미안. 이렇게 많이 나올 줄 몰랐어.”
대수롭지 않게 사과하며 페로몬을 걷었다. 그럼에도 셀린느는 바닥에 쓰러진 상태에서 일어서지를 못했다. 강력한 우성 알파의 페로몬을 직통으로 맞아서일 거다.
같은 알파끼리는 페로몬의 영향을 그다지 받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처럼 살기에 가까운 페로몬은 다르다.
그녀는 아마도 육식동물 앞에 내몰린 초식동물의 심정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역시나, 그녀는 얼마 가지 못해 그대로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우웩! 켁켁……! 욱!”
딱히 굶은 건 아니군.
더러운 토사물을 보고는 창가로 가 창문을 열었다. 역한 냄새가 조금 빠져나가자 살 것 같았다. 셀린느도 에드워드의 페로몬이 나가서인지 안색이 서서히 돌아왔다.
“흑…….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흐으흑! 나도 속은 건데!”
“사무엘은 그래도 반성이라도 하더군.”
“……뭐?”
“다 자기가 멍청해서 생긴 일이라고. 그러니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결정의 권한을 나에게 넘기겠다고 하더군.”
“무슨 말이야.”
“멍청한 셀린느. 햄턴 사뿐만이 아닌, 햄턴 가의 일도 내가 모두 주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리야. 즉, 난 너에게서 햄턴이란 성을 뺏을 수도 있어.”
드디어 현실을 깨달은 셀린느가 입도 다물지 못한 채 에드워드를 올려다보았다.
“생각해 봤어. 어떤 게…… 셀린느 네가 가장 괴로운 일일까 하고.”
“……에드워드.”
“그런데 생각하다 보니 화가 나더라고. 왜 내가 너 따위에게 아까운 내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거지? 라는 의문이 들더군. 그래서 그냥 다 밝히려고.”
“뭘? 뭘 밝힌다는 거야?”
제시카 일 말고도 아직 남은 거냐는 의문이 얼굴에 떠올랐다.
본능적으로 들으면 안 된다 싶어서일까, 그녀는 양 귀를 막은 채 벌벌 떨기 시작했다.
손이 워낙 떨려, 귀를 막는 의미가 없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귀를 막아댔다.
“뭐부터 얘기할까. 아, 그래. 네 어머니가 사실은 널 버린 게 아니라, 레베카에게 당한 거라는 부분부터 말해줘야 하나?”
“……뭐?”
역시나 잘 들리나 보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나오자 번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레베카가 네 어머니에게 오메가 발정제를 먹여 남자들과 뒹굴게 만든 후 그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유포한다고 협박했지. 네 어머니는 너라도 지켜야 한다는 마음에 널 두고 떠난 거더군.”
“……무슨.”
“불쌍한 마가렛. 딸아이 지키겠다고, 모든 걸 희생하고 나갔는데 딸이 그다지 예쁘지 않게 컸군. 어찌 보면 가장 큰 피해자 중 한 명인데 말이야. ……신문 기사를 보면 참 가슴이 아프겠어?”
“무슨 소리야. 내 엄마가……, 뭐?”
“그거 알아? 네가 사주했던 그 약.”
“…….”
“네가, 네 전남편의 거래처 사장에게 바꿔치기해달라 의뢰했던 그 약. 그게 바로 네 어머니가 당했던 약이야. 강력한 오메가 발정제.”
“나는……, 나는…….”
“그리고 준영이 그 약을 먹고 아직까지 의식불명이지.”
“그, 그냥 단순한 발정 유도제라고만.”
“마가렛도 그렇게 알았지.”
“…….”
“출산 직후 아무리 기다려도 히트가 오지 않아서 걱정하던 마가렛에게 레베카가 이런 말을 하고 건네줬다고 하더군. 안전하지만, 알파들을 홀릴 수 있기 때문에 정부에서 허가하지 않았던 것뿐이라고. 한 알만 먹으면 히트가 올 거라고. 그러면 사무엘도 분명 기뻐할 거라고.”
“그런……, 하하……. 하…….”
에드워드는 넋이 나간 듯 웃기 시작하는 셀린느를 무료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다양하게 바뀌었다. 처음에는 허탈해하더니 이어 화를 낸다. 하지만 곧 어쩔 줄 몰라 하며 흐느낀다.
우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사랑하는 준영이라면 몰라도, 이따위 소리로 고막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끝내고 싶었다. 더는 그녀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흐느끼고 있는 셀린느의 앞으로 가 섰다.
“넌 내 아이를 뺏어갔지. 그러고도 양심의 가책 하나 느끼지 못하고 뻔뻔하게 모든 책임을 준영에게 돌렸어. 할머니에게 약 사 줄 돈이 없어 자신의 억제제조차도 아꼈던 그 착한 녀석이, 그만 사고로 히트 사이클이 돌았다. ……넌 그것 또한 죄라고 말할 거니?”
“…….”
“할머니조차 잃고. 남편인 나에게 업신여김당하고 모두에게 업신여김당해도 준영이 견뎠던 건, 배 속의 아기 때문이었지. ……그리고 넌 그런 준영의 유일한 희망을 앗아갔어.”
셀린느가 비틀거리다 허물어졌다. 토사물이 널브러진 곳에 엎드린 채 그녀는 소리도 없이 오열했다.
“겨우……, 겨우……. 겨우! 살아가려고 발버둥 치던 그 아이를 넌 기어코 절벽에서 밀어버렸지.”
“나는……, 나는……. 크흐흑, 나는!”
“울지 마!”
“……흑.”
“명심해. 울지 마. 넌 절대로, 절대로 울 자격 없어.”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끅끅거리는 셀린느를 무섭게 노려보다 몸을 돌렸다.
“너에게 양심이란 게 있다면 얌전히 죗값을 받아. 부디 두 번은 마주치지 말자.”
에드워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문이 닫히고도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다지 감흥은 없었다.
하나도 후련하지도 않았다. 그저, 준영을 보고 싶을 뿐이다.
* ♟ *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잠깐 잠들었었나 보다. 자세를 바로 하자, 문이 열리며 잘 차려입은 제라드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와. 상임 이사.”
“……진심이라면 화낼 거야.”
제라드의 대꾸에 싱겁게 웃었다. 물론 제라드는 상임 이사가 아니다. 잠시 대행을 할 뿐. 길어봐야 한 달 정도 에드워드의 빈자리를 메울 뿐이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더는 햄턴 사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
아니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10일째인가?”
준영의 앞으로 다가가 선 제라드의 질문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 벌써 10일이 흘렀다. 준영은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제라드는 조용히 준영을 응시하다 손을 뻗어 그의 한 가닥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주었다.
“바로 알아보지 못했어.”
“……뭘?”
“기억 나? 내가 13살 때, 가출했던 거.”
“그래.”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레베카는 아들을 찾으라 닦달했고 셀린느는 영원히 안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비웃다가 그녀에게 뺨까지 맞았다. 물론 셀린느의 뺨을 때린 일로 대노한 사무엘에 의해 레베카가 사과까지도 해야 했지만. 생각해 보면 셀린느는 그때부터 남다르긴 했었다.
“그때, 충동적으로 나간 거라, 돈도 없었지.”
“그런 것치고는 오래 있지 않았어?”
에드워드의 기억상, 대략 일주일 정도 행방불명되었던 것 같다. 웬만하면 찾아냈을 텐데도 찾지 못해, 결국 미아 신고를 냈었다. 현상금까지 붙여 방송까지 탄 그 날 저녁 제라드는 스스로 돌아왔다.
“내가 왜 이 말을 갑자기 할까?”
“………설마?”
“빙고.”
설마 하는 에드워드에게 제라드가 피식 웃었다.
그는 잠든 준영을 가만히 바라보다 몸을 돌려 소파 쪽으로 와 앉았다.
“배도 고프고, 마침 비도 오고. 절대 그냥 돌아가기는 싫고. 만만해 보이는 놈들 삥이나 뜯을까 생각하고 골목으로 들어갔는데, 웬 아이가 할머니 등을 두드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거야.”
“……그게.”
“응. 준영이었어.”
“나야 뭐 2차 성장기 이후 급변해서 몰라봤겠지만 나도 준영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어. 그냥 불쌍한 놈, 하필 여기에 시집오다니 운 없는 놈이군 하고, 유심히 보다가 왠지 어디서 봤는데 정도였지.”
“어릴 때와 많이 달랐나?”
“아니 똑같아. 일단 외모는. 분위기가 다른 거지. 햄턴 가에 오고 얼마 안 돼서야. 언제더라……, 갑자기 내 눈앞에서 활짝 웃었는데, 계속 찝찝하더니 그날 밤에 갑자기 생각이 나는 거야.”
이어지는 말은 알 것 같았다. 준영은 에드워드와 결혼을 하고부터 달라졌다.
물론 햄턴 사에서 일할 때도 표정이 잘 드러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 웃을 때에는 사심 없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랬던 준영이 웃지 않은 걸 그저 단순히 다른 이유 때문이라 생각했다.
처음에는 가족이 죽고, 혼자 남은 데다, 갑작스럽게 환경이 바뀌어 주눅이 들어 그런 거라고 그저 당연하게만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준영에게 웃음을 앗아간 주범은 바로 자신이었던 거다.
“말 안 해도 아는 것 같네. 맞아. 내 기억 속 그 꼬마는 정말 잘 웃었거든. 나보다 세 살 적은데, 덩치는 꼬꼬마인 게……. 그렇게 잘 웃더라.”
잠시 기억을 더듬듯 제라드는 상념에 젖었다. 문득 그 어린 시절의 준영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워 씁쓸함을 삼켰지만.
“여튼 사레가 심하게 들린 할머니 등 좀 두드려 주고, 집까지 업어주니, 고맙다고 사례를 해 주고 싶어 하길래 가출했으니 며칠만 재워달라 했지.”
“배짱 좋군.”
“햄턴 가 핏줄이 어디 가겠어?”
“하하.”
너무 정곡을 찔러서 허탈하게 웃을 뿐이다.
“그랬더니, 딱 일주일만 재워 주겠다고 하더라고. 나야 땡큐였지. 그래서 그 집에서 머물렀어. 처음에는 그냥, 소파에서 주야장천 자다가 TV나 보다가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꼬맹이가 다른 아이들과 뭔가 다르다는 걸 느꼈지. 이질적이라고 해야 하나? 동양인 꼬마라서라기보다, 그냥 막연히 뭔가 달랐어. ……그게 뭔 줄 알아? 그 녀석은 할머니에게 떼 한 번 안 쓰더라.”
“…….”
“겨우 10살짜리가, 혼자서 집안일을 척척 하고, 할머니 아파하면 등 두드려 드리고. 어찌나 빠릿한지. 거기다 할머니만 보면 웃더라고. 그래서 처음에는 참 교육을 잘 받았구나. 우리 집 그년과는 다르구나, 정도로만 생각했어. 그런데 언제더라, 준영이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안절부절못하는 거야. 왜 저러나 하고 봤더니, 볼에 멍이 들어있더군.”
“……!”
“테드. 지나간 일이야.”
저도 모르게 까득 이를 갈자, 제라드가 당황하며 에드워드를 저지시켰다. 에드워드는 그제야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
“그냥 싸운 걸로 왜 저러나 했지. 그리고 그날 저녁에 준영이 할머니를 보자마자 처음으로 미소가 아닌 다른 표정을 짓더라. 다짜고짜 엉엉 울더라고. 할머니 미안해요. 안 싸우려고 했는데 할머니 욕해서 싸웠어요. 미안해요. 옷 찢어서 미안해요. 그러니 날 센터로 돌려보내지 말아요. 할머니 곁에 있고 싶어요. ……그때 알았어. 혼혈아가 아닌, 고아였다는걸.”
목이 마르다. 지금의 준영을 보면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다. 고아치고 그런 과거 없는 이는 없을 거다. 그럼에도, 뇌와 다르게 가슴은 먹먹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준영이지만,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예전 에드워드에게 화라고 할 수도 없는 화를 내며 울던 준영이 떠올랐다. 고작 화내는 것도 못 했던 착해 빠진 녀석의 어린 시절이니 뻔히 보였다.
“그런 준영을 안으면서 할머니가 그렇게 말하더라고. 넌 내 보물이다. 넌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이다. 넌 네 보물이 조금 더러워졌다고 버리니? 그러니 울지 말렴. 사랑한다고, 그러니 울지 말라고……. 그렇게 달랬어. 준영은 한참을 더 할머니 품에서 울다가 잠들었지. 그 생수, 마신 거야?”
“아니.”
제라드가 목이 타는지 아까 마시려고 꺼냈다가 내려놨던 생수병을 보고는 손을 내밀었다. 에드워드는 생수병을 집어 던져주고는 그제야 반대편 소파로 가 힘없이 앉았다. 다리가 뻐근한지 몰랐는데, 꽤 오래 서 있었나 보다.
“……미지근해.”
한 병을 한 번에 다 마시고 난 뒤 투덜거리던 제라드가 생수병을 닫고는 휙 하고 어딘가로 던졌다. 큰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생수병이 단번에 쓰레기통으로 골인했다.
“준영이 잠들고 난 뒤에 할머니가 그러더라고. 이 아이는 태어나서 한 번도 자기 것을 가져본 적 없다고. 그래서 처음으로 내 거란 걸 가져서 서툰 거라고. 만약 웃지 않으면 할머니가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힘들어도 웃고, 괴로워도 웃은 거라고.”
“준영답네.”
너무나도 준영다워서, 쓰라리다. 막연히 준영이 어릴 때니 사랑스럽겠거니 생각한 좀 전의 자신이 부끄럽다.
“그 말을 듣는데, 처음으로 부끄럽더라. 난 정말로 많은 걸 가졌잖아. 밉다고 해도 부모님이 있고,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많은 것들을 양손에 쥐고 있었어. 그걸 난 단 한 번도 소중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어.”
“그래서 돌아온 거야?”
“욕심에는 더 있고 싶었어. 어리고 사랑스럽던 준영은 정말로 날 잘 따랐거든.”
일부러 말을 하다 말고 씩 입꼬리를 올린다. 제라드의 속셈이 뻔히 보여 얄밉지만, 분명 부러운 건 사실이었다. 어린 시절의 준영이 활짝 웃으며 졸졸 따르던 모습이 한없이 상상되지만 말 그대로 상상일 뿐이라 허무했다.
만약 아이가 있다면 준영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었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다 급히 삼켰다.
과한 욕심이다. 더는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다 필요 없으니, 모두 다 가져가도 되니, 부디 준영만 자신에게 돌려달라 신에게 빌고 또 빌었다.
그러니 아이 따위 필요 없다.
“그날 이후, 준영이 억지로 웃지 않기로 한 것 같았어. 그제야 무언가 어색하던 분위기가 풀리더라고. 그래도 다른 아이들처럼 까불거나 활기찬 건 없었어. 하지만 더 부드럽게 웃더군. 그 미소 본 적 있어?”
제라드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에드워드는 눈을 감았다.
본 적 있다.
어찌 잊으랴.
엉터리 아침을 준비했던 날 짓던 미소를.
접시가 깨진 걸 몰래 치우다 걸렸을 때 짓던 미소를.
얼마 하지도 않는 시계를 사줬을 때 환히 웃던 미소를.
준영은 애초에 큰 것에 웃지 않았다. 그는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큰 사람이었다.
그렇게 쉬운 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표정을 보니 아는구나.”
“겨우. ……겨우 보았어. 드디어 나에게 미소를 지어주기 시작했어. 나에게 농담을 건네주기 시작했어. 처음으로 나에게 밉다고 말을 했어. 그가 감정이란 걸 드디어 보여 주었다고.”
울컥.
다시금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올라온다.
에드워드는 마른세수를 연거푸 하다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한다고 속삭여줘.”
“…….”
“곁에 있어 달라고 속삭여줘. 매일같이 목소리를 쉬지 않고 들려줘. 준영이 길을 헤매지 않게.”
“그래. 그럴게.”
이미 그러고 있지만, 에드워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봐야겠어. 누구 씨가 나에게 엄청난 일을 던져줘서 내일도 새벽같이 일어나야 해. ……지금까지 어떻게 그런 일을 한 거야?”
“그러게.”
제라드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드워드는 허탈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만 가보겠다던 제라드가 준영의 이마에 살짝 입맞춤을 하고는 속삭였다.
“자주 못 오겠지만, 넌 나보다 에드워드가 더 낫겠지. 그래도 자주 오라고? 알았어. 그럴게.”
마치 대화를 하듯 중얼거린 후 준영의 머리를 한 번 더 쓸고서야 제라드는 병실을 나섰다.
에드워드는 엘리베이터까지 그를 배웅한 후 다시 병실로 발길을 돌렸다.
어떻게 그런 걸 할 수 있었냐고?
당연히 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보스턴으로 갔을 때부터 철저하게 교육을 받아서 가능한 것뿐이다.
늘 울고 있는 어머니와 항상 엄격한 아버지의 그늘에서 에드워드의 어린 시절은 애초에 없었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굳이 곱씹고 싶지 않아 서둘러 머릿속에서 지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아가 아니면서도 고아처럼 자란 자신과, 고아였던 준영이 어릴 때 느끼지 못했던 한없는 내리사랑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입양도 괜찮겠어.”
예전에는 조바심을 내는 제시카를 달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었다. 물론 정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면 입양을 할 의향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간절하고 풋풋한 감정이 아니었다.
준영과 함께 고아원을 돌아보자.
그리고 그와 자신의 심장을 설레게 하는 아이들을 모두 입양하자.
인종 상관없이 많은 아이들을 키우자. 돈은 썩어 나도록 넘치니 돈 걱정 없이 많이, 많이 입양을 할 것이다.
그럼 분명 준영은 지금보다 더 많이 웃을 것이다.
“준영.”
병실로 들어섰다.
침대에 앉아 있던 준영이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활짝 웃는다.
‘에드워드.’
하지만 곧 그 신기루는 사라진다.
수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일이라 이제는 리얼하기까지 하다.
천천히 다가가 링거를 너무 맞아 멍투성이인 손목을 잠시 보다 부드럽게 쥐었다.
너무 약해 힘주면 부러질 것 같아 안쓰럽다.
“일어나. 미슐랭 맛집을 많이 찾아놨어. 미안, 너의 버킷 리스트를 봤어. ……하자. 같이. 네가 원하는 곳 어디든 함께 가 줄 테니. 같이 가자. 그러니 준영.”
살짝 틀어진 산소 호흡기의 위치를 제대로 맞춘 후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랑해.”
그러니 일어나 줘.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