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2권) (6/14)

  들꽃 2권  [폰.공금]

[6]

“토스터 사용할 줄 알아요?”

“아마도?”

“그냥 빵을 넣고 이것만 내리면 돼요. 그럼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빵이 튀어나와요.”

“튀어나와? ……그럼.”

“……잡지 않아도 돼요. 그, 야구공처럼 나온다는 소리가 아니에요.”

머뭇거리는 에드워드의 머릿속이 한순간 보였다. 준영은 그의 의문을 바로 정정해 주었다. 물론 간혹 기계가 너무 강하면 튀어나가는 경우도 보긴 했지만.

“무슨 말인지 알았어. 여차하면 전화해서 물어보도록 하지.”

“난 신입이라 사적인 걸로 통화하기가 좀 그래요. 크리스나 제라드에게 연락을 해 보는 건 어떨까요?”

노골적으로 싫다는 표정을 보자, 벌써부터 답답해진다. 정말 이 남자는 전문 분야 업무 말고는 아무런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나 보다. 설거지를 한다고 해놓고 그릇만 5개를 깨 먹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옷. 제라드가 준 옷인가 봐?”

“네? 네. 사이즈가 맞아서.”

“그런 옷이 훨씬 더 잘 어울리는군.”

“그런 옷이요?”

너무 어린 티가 나나?

솔직히 제라드가 준 옷은 분명 고급스럽고 디자인도 예뻤다. 하지만 하나같이 너무 세련되고 비싸 보였다. 그나마 준수한 걸 골라서 입은 건데도 눈에 띈다.

“단어 선택이 잘못됐군. 밝은색이 잘 어울린다는 뜻이었어.”

연푸른색의 니트와 흰색의 패딩 점퍼였다. 확실히 늘 어두운 계열만 입다가 이런 걸 입으니 너무 화려하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비꼬는 게 아니었다. 그의 미소는 분명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네, 고마워요.”

“나중에 같이 쇼핑이나 가.”

“딱히 필요한 게 없는데.”

“굳이 옷이 아니라도 내가 뭐라도 사주고 싶어서 그래.”

그가 사준 옷만 해도 엄청나다. 다 입어보지 못하고 옷장에 그대로 있다. 물론 햄턴 가의 본가에 있지만. 하지만 에드워드의 말뜻은 충분히 이해했다.

“네. 너무 비싼 게 아니면 감사히 받을게요. 아, 나 이만 가 봐야 돼요. 굶지 말고! 정 못하겠다 싶으면 나가서 햄버거라도 사 먹어요! 알았죠?”

“그래. 걱정 말고 가. 그런데 정말 배웅 안 가도 돼?”

“얼마나 먼 곳에 간다고 배웅을 가요. 그리고 퇴근하면 돌아올 건데.”

“……그래.”

배웅이란 말에 키득거리며 웃었다. 조금 놀리는 분위기였지만 그럼에도 에드워드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기쁜 듯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막 문이 열리기 전, 볼에 닿는 따뜻한 감촉에 놀라 손바닥으로 볼을 감쌌다.

“조심히 다녀오라고.”

“……네.”

열꽃이 피어오른다. 입술이 닿은 부분에서부터, 차츰차츰 온몸으로. 눈으로 덮인 세상인데도 이상하게 더웠다.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준영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사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저기 부탁하신 자료 가지고 왔는데요.”

“오오. 어서 오게. 이리로 와.”

안으로 들어서자, 사장은 부산스러울 정도로 준영을 반겼다. 너무 과한 환대에 조금 당황했지만, 여기 사장은 처음부터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기에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래그래. 처음인데도 잘 가져왔네.”

“아……, 잘 알려주셔서.”

자료만 전해주면 끝나는 게 아닌가 싶은데 나가란 말을 하지 않았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사장이 자료를 다 훑어보기까지 기다렸다.

혹시 잘못 가져온 게 있으면 다시 시키려고 그런 건가 했지만, 사장은 자료를 반쯤 보고는 대충 덮을 뿐이었다.

급한 일이 아닌가?

“참, 그보다 일은 어렵지 않고?”

“네? 아뇨. 딱히.”

사무보조라 힘들거나 어려운 건 없다. 용어가 생소하지만 경리는 물론 다른 직원들이 잘 알려줘서 괜찮았다.

그런데 볼일이 끝난 게 아닌 건지 사장은 그만 가보라는 말 대신 준영의 팔을 잡아당겨 자리에 앉혔다.

“내 딸이 오메가라서 말이야. 유달리 오메가가 마음이 쓰여.”

손등을 토닥이더니, 이번에는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언뜻 보면 가벼운 스킨십 같지만, 이상하게 손끝이 묘하게 더듬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자네는 정말 말랐군.”

“저기 시킬 일이 없으시면…….”

뭔가 이건 아니다 싶어 일어서려고 할 때, 사장이 먼저 손을 떼었다.

“혹시 어려운 일은 없나 싶어서 물어본 거네. 크게 없다니 다행이군. 어서 가서 일하게.”

“네, 그럼.”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지만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서둘러 꾸벅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네고는 사장실을 나섰다.

그나저나, 아무리 호의라도 원치 않는데 몸을 만지는 건 정말 싫은 거구나.

지금까지, 에드워드나 제라드, 크리스와 가벼운 스킨십을 해 본 적은 있어도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느낌이었다. 낯설고 싫었다.

“준영 씨? 여기 와서 이것 좀 도와줄래요?”

“네!”

저 멀리서 경리가 부르는 소리에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갔다.

깊게 생각하지 말자. 너무 신경이 예민한 것뿐일 거다. 솔직히 아무리 자신이 오메가라 할지라도 이렇게 마르고 볼품없는 남자를 상대로 성적인 욕구를 일으키는 것부터가 무리일 거다.

그래, 에드워드도 첫 사고 이후 준영의 몸을 건드리지 않았다. 알파는 성욕이 강하다고 들었다. 특히나 우성 알파는 그 정도가 심해 매일같이 섹스를 해야 욕구가 겨우 풀릴 정도라 들었다.

과장된 소문일 수도 있겠지만, 일단 중요한 건 에드워드가 준영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는 거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중복돼서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욕구를 가진 눈빛을 보인 적이 없다. 애초에 자신이라도 자기 몸에 욕정을 할 리 없다 싶어 당연하다 생각했다.

서둘러 경리에게 다가가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한아름 서류를 준영에게 건네주었다.

“이거랑 이거, 복사 좀 해 줄래요?”

“마틸다. 보조 생겼다고 너무 부려먹는 거 아니야?”

“애초에 이런 일을 하려고 뽑은 건데 왜들 그렇게 말이 많아요?”

옆자리에 한 남자 직원이 경리에게 장난처럼 나무라자, 그녀가 못마땅한 눈빛으로 쏘아붙였다.

“솔직히 진짜 뽑아야 되는 직원은 아직 안 뽑고 갑자기 경리 보조라니, 사장님 너무하신 거 아니야?”

“경리 보조도 필요했거든요. 그리고 그런 말은 사장님에게 직접 하시죠?”

“네네. 아이코. 일하자고.”

타이밍 좋게 사장실의 문이 열리자 모두가 후딱 자세를 바로 했다. 준영만이 서류를 든 채로 덩그러니 서 있다, 뒤늦게 몸을 돌렸다.

심각한 오류가 발생했다.

에드워드의 인생, 가족사는 엉망이지만 그 외에는 늘 남부럽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늘 완벽했다.

그래서 우습게 생각했다. 에드워드는 처참하게 박살이 난, 한때 주방이라 불렸던 곳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거품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싱크대, 검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는 오븐, 너무 일찍 만들어 녹다시피 한 샐러드. 끓어 넘친 냄비.

이건 도저히 자신의 영역 밖의 일이었다.

결국 에드워드는 결심을 굳혔다.

준영이 퇴근까지 앞으로 3시간, 아직은 충분히 여유가 있다.

정말,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당장 떠오르는 인물은 그밖에 없었다.

에드워드는 핸드폰을 열어 가장 최근에 전화를 한 인물에게 다시 통화를 시도했다.

-네. 이번에는 뭐가 궁금하신가요? 세상에서 가장 쉽다는 스테이크를 태워 먹은 건 아닐 테고.

빌어먹게도 크리스는 제라드의 친구지만, 에드워드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크리스를 높이 산 건 바로 사람을 잘 파악하는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정말로 태운 건가요?

“고기는…… 타면 냄새가 고약하더군.”

-……일단 창문부터 여세요. 마침 근처이니 당장 가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크리스가 구세주였다.

솔직히 각오를 다졌다. 그릇 몇 개쯤 깨져 있을 거고, 집 안이 엉망이 되어있을 수도 있다고. 하지만 의외로 집은 깨끗했다.

“왜 그러고 서 있어? 춥지 않아?”

입구 앞에 서서 멍청히 집 안을 둘러보는 준영을 보고는 에드워드가 나직이 웃는다. 그는 아차 하고는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아 잠갔다.

“배는? 고프지 않고? 아직 저녁 전이지?”

“네. 에드워드는요?”

“나도 아직이야. 혹시나 하고 요리하나 만들어봤는데. 평가 좀 내려주겠어?”

“네? 요리를요? 에드워드가요?”

주방을 박살 낸 게 아닐까 두려워하며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하지만 다행히 주방은 깨끗했다. 심지어 테이블 위 잘 세팅된 요리까지 올려져 있었다.

“이걸 에드워드가 만들었다고요?”

잘 구운 소시지와 샐러드, 철판 접시 위 자글거리는 스테이크까지. 제 눈을 의심하며 에드워드에게 다시 물었다.

에드워드는 준영의 코트를 옷걸이에 잘 걸친 뒤에야 다가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물론. ……소시지만이지만.”

“네?”

“……스테이크는 포장해왔어.”

“…….”

“샐러드도 함께 주더군.”

“…….”

“하지만 토스트는 내가 구운 게 맞아.”

가만히 있으니 줄줄 나온다. 에드워드는 결국 마지막 고해성사까지 했다.

“소시지도…… 구웠다기보다 전자레인지에 데운 거지만.”

“……풋.”

더는 무리다. 준영은 입을 틀어막은 채 소리 내어 웃었다. 에드워드도 창피하긴 한가 보다. 살짝 붉어진 채 볼을 손가락으로 긁적이는 모습에 또 한 번 터졌다.

준영은 아주 눈물이 나올 정도로 웃고서야 겨우 자세를 바로했다. 손가락으로 닦으며 여전히 쑥스러워하고 있는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에드워드. ……고마워요.”

“다음에는 정말로 내가 만들도록 하지.”

“네. 기대할게요. 그래서…… 접시는 몇 개나 깨 먹었어요?”

막 와인 병을 집어 드는 에드워드에게 묻자, 그의 어깨가 움찔거린다. 준영은 결국 또 큰소리로 웃어야 했다.

팔목의 시계를 보고 다시 멀찌감치 떨어진 곳의 문을 보았다. 아직 준영이 퇴근하기까지 멀었지만 그럼에도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문제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근무를 서고 있는 경호원들이었다. 상사인 에드워드가 밖에서 추위에 떨며 서 있으니 영 신경이 쓰이나 보다. 준영의 회사 건물 쪽을 보는 게 아닌 자꾸 에드워드 쪽을 바라본다.

결국 참다못한 에드워드가 차로 다가가 창문을 노크했다.

“일에 집중하셔야지요. 당신들 임무는 내가 아닌 준영 햄턴을 보호하는 거란 걸 잊지 마세요.”

말을 끝낸 에드워드는 마지막으로 싱긋 웃어준 뒤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역시 한번 지적하고 나면 빠릿빠릿해진다. 이제 조금 낫다 싶어 코트 목을 추켜세울 때, 드디어 그리도 기다리던 존재가 건물을 나서는 게 보였다.

오늘은 진한 남색 패딩을 입고 있다. 어딜 봐도 여성용인데 본인은 절대 모르는 눈빛이다.

에드워드는 보는 순간 알았지만 잘 어울려 일부러 모른척했었다.

바로 다가가려 했지만 준영 혼자가 아니라 일부러 도로를 건너지 않은 채 그 뒤를 따랐다. 베타로 보이는 여성과 뭔가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걷는 준영은 평온해 보였다.

분명 리액션이 큰 건 아니지만 준영은 그래도 잘 웃는 편이었다.

햄턴 사에서 일을 할 때도 그랬다. 동료들과 함께 있을 때의 준영은 늘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억지로 어울리기 위해 연기를 하는 게 아닌 정말로 동료의 말에 동감하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올곧다는 표현은 준영을 위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준영은 어디에 있어도 같았다.

싫은 소리를 들어도 상처받는 소리를 들어도, 심지어 기분 좋은 소리를 들어도 그는 늘 한결같았다.

드디어 갈림길에서 동료와 헤어졌다. 손을 흔들고 다시 갈 길을 열심히 가는 준영을 바라보다 핸드폰으로 연락을 취했다.

-네.

“퇴근했어?”

-네. 방금요. 저녁은요?

“먹어야지. 오늘은 좀 일찍 마쳤네?”

-네. 사장님이 일이 있다며 일찍 정리하고 가라고 해서요. 아직 저녁 이른데, 뭐라도 사갈까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달콤하고, 상큼하고, 말랑하고, 부드러운 거.”

-……마시멜로?

“아하하하! 마시멜로와는 좀 다른 느낌인데?”

-응? ……애드워드. 지금 어디예요?

너무 큰소리로 웃었나 보다. 준영이 소리를 들은 건지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후후. 어딜 보는 거야?”

-네? 혹시 근처예요? 어디예요?

그렇게 열심히 돌아보면서 죽어라 뒤는 보지 않는다. 웃음이 다시금 튀어나올 것 같아 서둘러 입을 다물었을 때 드디어 준영이 뒤를 보았다.

-아……! 언제부터?

준영은 서둘러 신호등이 있는 쪽으로 뛰었다. 추워서 바닥이라도 얼어 있으면 어쩌려고 뛰는 건지.

“넘어져. 다치려면 어쩌려고 해. 거기 있어.”

에드워드의 말에 준영이 우뚝 멈춘다.

때마침 신호가 바뀌었다. 에드워드는 곧장 신호등 쪽을 달려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리고 빠르게 다가가 준영의 앞에 섰다.

-엄청…… 빠르네요.

준영은 에드워드가 바로 코앞인데도 핸드폰으로 말을 했다가 에코가 울리고서야 통화를 끝냈다.

“다리가 길어서 빨라 보일 거야. 그보다 춥지 않아?”

“난 괜찮, ……손 따뜻하네요.”

볼이 빨간 게 마음이 걸려 양손으로 준영의 볼을 감쌌다. 역시나 추워서 홍조가 올라온 건가 보다. 준영은 그제야 추운 걸 알았는지 어깨를 움츠린다. 에드워드는 서둘러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준영의 목에 둘둘 감아주었다.

“괜찮은데……. 에드워드도 춥잖아요.”

한사코 거부하려는 준영에게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그의 손을 잡아당겨 코트 안 가슴께에 올렸다.

준영은 당황한 듯했지만 곧 에드워드의 몸이 일반인보다 뜨겁다는 걸 인지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성 알파는 좋겠어요.”

“대신 여름에는 죽어.”

“아하하.”

“겨울에는 내가 재능 기부를 해 주지.”

“네?”

영문을 모르는 준영을 잡아당겨 품에 안고는 코트로 푹 감쌌다. 워낙 약하고 작아서 말 그대로 덮인 꼴이다.

부끄럽다며 거부할 줄 알았는데 준영은 가만히 품에 안겨있었다. 에드워드도 굳이 이렇다저렇다 말하지 않고 그를 더욱 힘주어 안았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 싶을 만큼 행복했다. 자신이 이렇게 순정파구나 싶어 웃음이 절로 흘러나온다.

함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은 뒤 에드워드가 준영을 데리고 간 곳은 뜻밖에도 주얼리 가게였다.

“에드워드? 난 딱히 필요한 게…….”

“정해. 이곳에서 사주는 걸 할 건지. 아니면 나와 같이 백화점을 갈 건지.”

백화점이라는 게 그냥 일반적인 곳이 아닐 게 뻔했다. 아마도 예약제가 아니면 출입도 못 할 곳일 것 같다. 준영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 간판을 보았다. 뉴저지에 가까운 곳이니 그렇게 비싼 곳은 아닐 것이다.

준영은 결국 항복을 외쳤다.

다행히 준영이 들어간 매장은 비싸더라도 서민들이 딱 목돈 모아 살 수 있을 정도의 물건들만 있었다.

에드워드는 더 비싼 걸 해주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준영은 이걸로 만족했다.

솔직히 시계 하나에 몇만 달러나 하는 걸 팔목에 끼고 다니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이곳에서는 가장 비싼 걸 샀다. 만약 에드워드를 못 만났다면 평생 엄두도 못 냈을 가격이다.

“더 좋은 것도 많던데…….”

포기를 모르고 또 아쉬워한다. 에드워드 본인의 기준보다 한참 낮았나 보다. 심지어 다른 것도 사고 싶어 하는 걸 겨우 말리기도 했다.

“이것도 마음에 들어요. 예뻐요.”

심플하고 가볍다. 일상에서 쓰기 딱 좋을 디자인이다.

“잠시 줘봐. 이름 새겨줄게.”

“진짜요? 이름도 새길 수 있어요?”

“원래 아주 비싼 것보다 이런 걸 더 잘 훔쳐. 보통 잃어버리면 신고는커녕 잘 찾지도 않거든.”

“아…….”

“심지어 이름이 새겨져 있으면 마치 주운 척하고 돌려줄 확률도 높지. 보상금을 바라고.”

“그런…….”

“잃어버리면 안 찾을 거야?”

“……찾을 것 같아요.”

결혼식 때 받은 예물보다 이게 더 마음에 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에드워드의 비서가 가져다준 보석 상자 안 물건보다, 지금처럼 함께 고른 이것이 몇 배로 더 좋았다.

“그럼 잠시만 빌려줘. 내일까지는 새겨서 돌려줄게.”

에드워드에게 그런 기술까지 있다고 생각 못 했는데. 신기해하며 에드워드에게 시계를 건네주었다.

에드워드는 잠시 시계를 보다, 주머니에 넣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기술은 언제 배웠어요?”

“뭐가?”

“새기는 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니잖아요.”

“의뢰할 거야. 내가 할 수 있을 리가.”

“……그렇군요.”

“내가 해 줘? 자신은 없지만. 삐뚤어도 괜찮다면.”

장난처럼 말하는 에드워드에게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조금 놀란 듯 되물었다.

“진짜? 엉망일 건데?”

“그래도 괜찮아요. 철자만 틀리지 마요.”

“아하하. 알았어. 그렇게 할게. 힘 한번 써보지.”

진짜 들어줄지는 몰랐는데 막상 한다 하니 기분이 좋다. 준영도 덩달아 헤헤 웃을 때 갑자기 볼이 차가워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와…….”

“눈이군. 올해는 제법 내리는데?”

검은 하늘에 흰색의 눈들이 수를 놓기 시작한다.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은 어느새 펑펑 내린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본격적으로 내렸다.

“백수라는 게 이렇게 좋군.”

“아하하하.”

“정말로 러시아워와 눈이 만나면 최악이거든.”

“난 늘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서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솔직히 눈 오는 게 좋아요.”

“그럼 나도 오늘부터 좋아하는 걸로 하지.”

“그게 뭐야. 하하하.”

나날이 농담이 늘어나는 에드워드가 낯설다. 하지만 분명 따뜻했다.

아……, 즐겁다.

“즐겁네.”

자신의 생각과 거의 동시에 말을 내뱉은 에드워드를 조금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본격적으로 내리자 서서히 두 사람 몸 위에도 쌓여간다.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다 조금 늦은 동의를 표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드워드가 준영을 바라보았다.

“왜?”

에드워드의 질문에 준영은 대답 대신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코코아 엄청 맛있는 곳 알아요. 추우니 한잔 마시고 가요.”

“코코아? ……조, 좋지.”

딱 봐도 단 걸 싫어하는 게 훤히 보인다. 그곳에는 멀드와인(*레드 와인과 사과 오렌지 레몬 계피 등을 넣어 데워 먹는 와인)도 팔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조금은 골탕 먹이고 싶은 심보였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일 층으로 내려가자 역시나였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계속 난다 싶더니 아침을 준비했나 보다.

하지만 냄새만 맡아도 일단 토스트는 못 먹겠구나 싶다.

모른 척 주방으로 가자 막 뭔가를 버리던 에드워드가 화들짝 놀라며 돌아본다.

“일찍 나왔네?”

“마틸다가 연락이 왔어요. 지나가는 길에 태워주겠다고 하네요.”

“좋은 사람이군.”

“네. 안 그래도 하나같이 모두 좋아요.”

오메가라고 차별 같은 건 거의 없었다. 모두 친절하게 잘 대해주었다. 나름대로 차별 없이 대하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보여서 좋았다. 다만 사장은 그 정도가 지나쳤지만.

굳이 이런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 싶어 서둘러 주제를 바꾸었다.

“아침 준비했나 봐요?”

“음……, 시리얼이야.”

“나 시리얼 좋아해요.”

“그……, 토스트 구워줄까?”

“아니요. 얼른 먹고 나가려고요. 곧 도착할 시간이에요. 얻어 타는 주제에 기다리게 할 수는 없죠.”

“그래.”

아주 조금 안도하는 건 모른척해야겠다. 준영은 올라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식탁으로 가 앉았다.

“준영. 이거.”

“네?”

막 목도리를 걸치고 나서려다, 에드워드의 부름에 멈췄다. 에드워드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내밀었다. 시계였다.

“해 줄게.”

“벌써 했어요? 언제요?”

분명 어젯밤에 준 건데 벌써 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새벽에 지인의 작업장에 찾아가서 바로 했어. 얼른 손 내밀어봐.”

작업장이 어디기에 새벽에 갔다 온 걸까.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어지간히 빨리 해 주고 싶었나 보다 싶어 손을 내밀었다.

에드워드는 서둘러 준영의 손목에 시계를 채워준 뒤, 언제 챙긴 건지 장갑까지도 끼워주었다.

“많이 추워. 단단히 입고 가.”

“차 타고 가는 건데요.”

“기다릴 거잖아. ……같이 기다려 줘?”

에드워드의 물음에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일단 외모가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문제는 언론에 너무나도 자주 노출이 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작년에는 모 잡지의 표지에도 나왔다. 결혼하고 싶은 경영인 1위에 당당히 뽑혀서 말이다.

“다음에요.”

에드워드를 본 마틸다의 반응이 감히 상상이 되어 정중히 거절했다. 에드워드는 대답도 듣기 전에 코트를 챙기려다 움직임을 멈췄다.

“그, 그래.”

“에드워드가 너무 잘나서 마틸다가 기절할지도 몰라요.”

“너무 예쁜 거절이라 삐지지도 못하겠군.”

서운함을 한가득 보이던 표정이 이내 사르륵 풀린다. 에드워드의 솔직한 반응에 준영은 참지 못하고 웃었다. 하지만 곧 빵빵 하는 클랙슨 소리에 화들짝 놀라 서둘러 문을 열었다.

“왔나 봐요. 갔다 올게요!”

다급히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섰다. 에드워드가 넘어진다며 조심하라는 외침에 살짝 돌아보고는 손을 흔들며 웃어주었다. 그리고 도로를 건너, 대기 중인 차로 다가갔다.

“자기 애인도 있었어? 아, 맞다. 기혼자라고 했었지?”

이런, 봤나 보다. 뒷문을 열고 올라타자마자 질문을 하는 마틸다에게 준영은 눈을 굴리다 대답했다.

“네.”

“와우. 얼굴은 잘 안 보이는데……. 그래도 딱 봐도 미남삘인데? 머리는? 염색한 거야?”

“……네.”

안 하던 거짓말을 하려니 얼굴 근육이 경련하는 기분이다. 안전벨트를 매는 척하며 일부러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남편은 출근 안 해? 혹시 백수는 아니지?”

“그, 잠시 쉬는 중이에요.”

“그렇구나.”

마틸다의 표정이 순식간에 동정으로 바뀌었다. 딱 봐도 한량 남편을 둔 준영을 안타까워하는 듯했다.

상세하게 설명을 해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적당히 둘러 말하는 재주도 없기에 준영은 서둘러 대화 방향을 틀었다.

“눈이 많이 와서 차가 많이 미끄러울 것 같은데, 괜찮아요?”

“도로는 다 치웠는데 뭘. 인도가 문제지. 어제 나도 친정에서 잤던 거라, 마침 지나가는 길목이거든. 다른 날은 힘들어. 대신 친정 갈 때에는 종종 태워줄게.”

“말만이라도 감사해요. 안 그래도 인도에 눈 많아서 걱정했거든요.”

다행히 마틸다의 주의를 돌리는 데 성공했다. 준영은 힐끔 백미러로 그녀를 보고는 자신의 손목을 보았다. 장갑을 뺀 후, 시계를 풀었다. 그리고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잘했네?”

“응? 뭐라고 했어?”

“아니, 아니에요. 혼잣말이에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걸 마틸다가 들었나 보다. 준영은 슬그머니 손바닥으로 시계를 덮은 뒤 서둘러 해명했다. 마틸다가 다시 운전에 집중하는 걸 본 후 몰래 손목에 다시 찼다.

차가운 금속인데도 이상하게 따뜻하게 느껴진다. 연신 웃음이 나오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마틸다가 기분 좋은 일이 있냐는 질문에 준영은 대답 대신 헤헤 웃기만 했다.

“신혼인가 봐?”

“……네.”

첫 단추가 심하게 잘못 끼워졌지만, 그래서 많이 돌아갔지만, 지금은 나쁘지 않았다.

이대로 쭉 이어지면 분명…….

거기까지 생각하다 급히 고개를 저었다. 성급하게 결론 내리지 말자. 그때의 아픔이 너무 커 아직은 무섭다. 그러니 천천히 나아가자. 조심스럽게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가다 보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일 자체는 힘들지 않지만, 아무래도 한꺼번에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와 복잡하다. 낮에 잘 모르는 용어들을 몰래 메모했다가 핸드폰으로 이리저리 검색을 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에드워드가 안으로 들어왔다.

“바쁜가 보네?”

“아니요. 그냥 내가 하는 쪽의 용어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해서.”

“훌륭한 태도야.”

준영의 말에 에드워드가 자상한 선생님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칭찬을 받은 느낌에 헤헤 웃을 때 그가 무언가를 준영에게 내밀었다.

“뭐예요?”

“사과 주스.”

빈말이라도 주스라고 하기에는 덩어리가 육안으로 보인다.

어떻게 갈면 이렇게 될까. 심히 신기한 기분이다. 하지만, 사과를 직접 갈았다는 사실에 높은 점수를 줬다.

“잘 마실게요.”

“……덩어리가 좀 씹힐 거야. 이상하게 아무리 갈아도 안 되더군.”

“가는 재료마다 쓰는 칼날이 달라서 그래요. 그리고 보통 과일 주스는 채즙기를 많이 사용하죠.”

“그렇군. 어쩐지…….”

“하지만 전 이렇게 씹히는 맛을 좋아해요. 할머니도 일부러 살짝 씹히게 갈아주셨죠. 물론 할머니는 늘 야채를 함께 넣었지만요.”

야채즙을 질색하는 준영을 위해 할머니는 사과나 오렌지 같은 과일도 함께 넣어 갈아 주었다. 그때 당시만 해도 과일이 얼마나 비싼지 잘 몰랐다.

“참고하지.”

“하하하. 부디 셀러리만큼은 참아주세요. 그건 정말 무리더라고요.”

“마찬가지야. 식탁 위에 셀러리가 올라올 때마다 치가 떨려.”

말을 하는 표정이 얼마나 진지한지. 바로 눈앞에서 셀러리를 본 사람처럼 한없이 굳은 표정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풋, 흐흐흐. 진짜네요?”

“뭐가?”

“제라드가 한 말이. 향이 강한 야채는 싫어한다더니.”

“……좋아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일부러 편식은 안 해.”

“아하하하.”

“AP? 매입채무 약자 아닌가?”

신나게 웃다, 에드워드에게서 뜻하지 않은 말이 나와 화들짝 놀라 웃음을 그쳤다. 너무 놀라자 되려 에드워드가 더 당황한다.

“왜 그래?”

왜 미처 깨닫지 못했을까. 바로 눈앞에 전문가를 두고서 말이다.

“ERP는요?”

“통합 시스템을 약칭하는 걸로 아는데?”

준영은 빠르게 인터넷을 쳐보았다. 정답이다. 준영의 두 눈이 반짝거리는 건 어쩜 당연한 일이었다.

“뭔가…… 내가 도움이 되니 다행이군.”

에드워드도 그가 기뻐하는 이유를 깨달았나 보다. 준영은 지체 없이 질문을 하였고 에드워드도 성의껏 알려주었다.

한창 공부하는 듯하더니 잠들었나 보다. 쌕쌕거리는 규칙적인 소리가 듣기 좋다. 침대에 엎드린 채 조금 불편한 자세로 잠든 준영을 바라보다 그가 쥐고 있던 볼펜과 종이를 빼낸 뒤 조심스럽게 똑바로 눕혀주었다.

유산을 한 뒤 바스라질까 겁이 날 정도로 약해졌을 때와 비교하면 요즘은 정말로 혈색이 돌았다.

햄턴 가가 준영에게 독약과도 같은 곳이었단 걸 새삼 깨닫는다.

매일같이 드는 후회, 의문, 그리고 낙담.

조금만 더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졌다면, 욕심을 버렸다면, 너와 나는 달라졌을까.

작은 의문.

지나간 일에 절대 후회하지 않았었다.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자랐다.

후회라는 건 구질구질한 거라고. 자신의 아버지의 한심한 모습을 보며 절대로 자신은 그러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하지만 그건 인력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준영. ……사랑한다.”

그래, 여전히 같은 마음이다. 후회는 어쩔 수 없지만, 그럼에도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몇 번이고 말해 줄 것이다. 몇 번이고 안아주고 보듬어 줄 것이다.

사랑한다 속삭여 줄 것이다.

“믿지 못하겠지만 너만 있으면 돼.”

그 모든 걸 내려놓아도 아깝지 않을 정도의 가치를 이제야 발견해 버렸다. 그리고 언젠가 이 말을 너에게 당당히 할 것이다.

“일단 양치기 소년은 벗어나야겠지만.”

혼잣말에 허탈하게 웃었다. 달빛에 은은히 비친 준영의 얼굴을 안주 삼아, 에드워드는 이미 다 식은 맥주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심장이 아련하다는 표현을 몸소 느끼며, 그렇게 천천히 음미하였다.

세상이 달았다.

아차 그대로 잠들었구나.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가, 자신이 똑바로 누워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했다.

내가 정리하고 잤던가?

잠시 두 눈을 끔뻑이다, 작은 숨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에드워드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다.

왜 여기서 이렇게…….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 멍하니 자신의 침대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는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웃긴 건 이 와중에도 잘생겼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추울 것 같은데…… 헐벗은 상태는 아니지만, 그래도 반팔, 반바지 차림이다. 아무리 우성 알파라 건강함을 타고났다고 해도, 이렇게 잠들면 분명 감기에 걸릴 수도 있다.

준영은 혹시나 깰까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섰다. 하지만 막 엉덩이를 떼려는 순간, 손목이 잡히며 당겨졌다.

“가지 마.”

“저, 저기…….”

순식간에 품에 안기는 꼴이 되어버렸다. 에드워드는 당황하며 버벅거리는 준영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왜 이러나 했는데, 왠지 눈에 초점이 없다.

설마 잠결인 건가?

“준영. 내가 다 안고 갈 테니까. 제발 날 버리지 마…….”

애원하는 작은 속삭임이 또다시 심장을 간지럽힌다. 눈동자가 흐릿해진 건 혹시 눈물 때문일까.

어디 하나 빠질 게 없는 잘난 그가 왜 이리 자신에게 목매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아이조차 없는데.

사랑. 그 단어는 너무나도 아름답지만, 그래서 무섭다.

“준영…….”

“가지 않아요. 안 갈 테니깐.”

당장은. 차마 영원히란 단어는 들려주지 못했다. 준영의 대답에 에드워드가 희미하게 웃는다. 그리고 행여나 준영이 깨질까 조심스레 그러안았다.

누구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시끄럽다. 자신만큼이나 빠르게 뛰고 있는 에드워드의 심장 소리가 또 한 번 심장을 술렁이게 만든다.

“에드워드?”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풀어줄 기미가 없다. 혹시나 싶어 그를 조심히 불렀다. 역시나 대답이 없다. 아까보다 더 규칙적인 숨소리만 들려올 뿐.

어떻게 이런 자세로 잘 수가 있는 걸까, 할 때 몸이 스르륵 옆으로 기운다. 침대 옆 기둥에 삐딱하게 기댄 채로 잠든 그의 옆으로 그제야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맥주와 위스키가 보였다.

“……이러니.”

맥주는 분명 기억상 3병이 다였다. 아마 마시다 모자라 얼마 전 제라드가 사 왔던 그 위스키를 땄나 보다. 심지어, 반 가까이 내용물이 사라진 상태다.

준영은 절로 나오는 신음 소리를 숨기지 않은 채 쿨쿨 잘 자고 있는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허둥지둥거리는 모양새에 웃음이 터져 나올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방금 전, 해가 서서히 들어오는 시간쯤.

준영을 끌어안은 채 쿨쿨 자던 에드워드가 드디어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행여나 준영이 깰라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서고는 후다닥 엉망이 된 바닥부터 치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슬그머니 침대 위로 올라와 뒤에서 준영을 끌어안았다.

완벽하게 증거인멸을 하려면 일단 할머니 방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알고도 이러는 건지, 정말 미처 생각을 못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행동 하나하나가 어린아이 같다 싶어 절로 웃음이 나온다.

“……깼어?”

웃음을 참으려다 그만 몸을 떨었더니, 바로 눈치챈다. 준영은 힐끔 고개를 돌려 에드워드를 보았다.

어디까지 본 거냐? 마치 그런 글자가 얼굴에 새겨진 사람처럼 준영을 바라보는 모습에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끙……. 미안. 마시다 보니.”

“원래 그렇게 술을 좋아했어요?”

“아니.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면 마시지 않아. 기껏해야 와인 한 잔 정도?”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이 마셨어요?”

“안주가 달아서.”

“네?”

어제 안주도 있었던가? 집에 달콤한 안줏거리가 있었던가 하고 생각에 잠길 때, 에드워드가 그런 준영을 잠시 바라보다 냉큼 힘주어 안는다.

“윽……. 답답한데요?”

“잠시만. 잠시만 이렇게 있자. ……하아. 달콤해.”

“제 몸에서 냄새나요? 그리고 보니 제라드도 내 몸에서 냄새가 난다고 하던데.”

자신의 팔을 들어 킁킁거리며 되묻자, 에드워드가 화들짝 놀라며 떨어진다.

“제라드가 네 냄새를 맡았다고?”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에요?”

“아니, 그게 아니라. ……사실 나 말고는 아무도 네 향기를 맡지 못했거든.”

“네?”

“자세히는 모르지만, 제이크 말로는 준영이 너무 약한 것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하던데. 아마 잘 먹고 잘 자고 그래서 정상 체중이 되면 분명 정상적으로 히트 사이클도 돌 거라고 하더군.”

“처음 들어요. 호르몬이 너무 약해서 히트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했거든요.”

“간혹 그런 경우가 있지만, 원래 그런 경우라 해도 단정 짓지 않는 게 이쪽 업계라고 하더군. 성장에 따라, 신체 리듬에 따라 얼마든지 호르몬이 달라질 수 있으니. 그러니 분명 건강해지면 히트가 올 거야.”

걱정 말라며 준영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그런가요. 그래서 제라드도 향을 맡은 걸까?”

“그래. 나아진다는 증거일 거야. 그러니 혹시 모르니깐 억제제는 늘 가지고 다녀. ……나 같은 몹쓸 놈 만나면 안 되니까.”

자기 말에 아파할 거면서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에드워드도 늘 조심해요. 러트 억제제도 가지고 다니고요. 오메가처럼 필수품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 같은 못된 오메가 만날 수도 있으니까.”

준영이 그대로 돌려 말하자, 에드워드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해졌다. 준영에게 화가 난다기보다, 그 말을 한 사실에 기분이 상한 모습이다.

“넌 못된 오메가가 아니야.”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릴게요.”

한 방 먹은 표정의 에드워드의 모습에 준영이 다시 웃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에드워드의 한 손을 조심스럽게 마주 잡았다.

“언제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

“난 사고로 에드워드를 가진 거니까 다른 욕심을 부리지 말자. 배 속의 아이 때문에 얼떨결에 가진 행운이니까 늘 감사히 여기자. ……내 주제를 알자.”

“그……!”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듯 내뱉는 에드워드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에드워드는 채 한마디도 못 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들어봐요. 있죠. 아이가 나한테 마지막 기회를 준 건가 싶어요.”

“…….”

“동등하지 못한 관계에서 시작해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불신하고. ……솔직히 아직 에드워드를 완전히 믿지 못해요. 불안하고, 또 언제 그녀에게 돌아갈까 무섭고.”

그러지 않겠다고 말을 하듯, 에드워드가 마주 잡은 손을 꽉 잡는다.

“그래서 조금 오래 걸릴지도 몰라요.”

“말해. 말해 줘.”

“그……, 이혼. 잠시만 보류해 줄래요?”

“하하하. 물론이지. 영원히. 영원히 보류하라고 해도 해 줄 거야. 아니, 제발 부탁할게.”

감격에 찬 에드워드가 준영을 와락 끌어안았다.

“제발 꿈이 아니라고 해줘. 제발. 밤마다 나타나서 나에게 달콤한 말을 하고 사라지던 그런 악몽이 아니라고 해 줘.”

역시 어제도 꿈인 줄 아는구나.

“현실이에요. 그리고 에드워드. 우리는 지금 중요한 기점에 서 있고요. ……저 지각이에요.”

이대로 가다가는. 준영은 그제야 벽에 있는 시계를 보고는 허옇게 질리며 대답했다. 에드워드는 황당한 표정으로 준영을 보다 이내 크게 웃어젖혔다.

“출근 일주일 만에 지각을 하게 생겼다고요!”

“아하하하! 미안해. 대신 바이크로 태워줄게. 좀 심하게 춥겠지만.”

“바이크?”

“차를 끌고 다닐 능력이 안 돼서. 지금 난 백수잖아.”

침대에서 내려서다 우뚝 멈췄다. 그저 잠시 휴직 상태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어쩜 형편이 자신의 생각보다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돈도 없으면서 이 비싼 시계를 산 거라고?

하지만 그를 탓할 수 없었다. 여태껏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을 테니까.

준영은 어떻게 말을 돌려야 에드워드가 기분이 나쁘지 않을까를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었다.

“그……, 알파는 직장을 구하기 쉬워요.”

“그래?”

“심지어 우성 알파니까 서로 자기 회사로 오라고 할걸요?”

“그, 그렇군.”

“그러니 걱정 말아요! 그리고 에드워드가 준 생활비 아직 고스란히 있으니깐. 그거라면 둘이서 못해도 반년은 견딜 수 있어요!”

의기소침해지지 말라고 더욱 확고히 말을 해 주는데 어쩐지 에드워드의 입가가 실룩거린다.

왜 그러냐고 묻기에는 너무 시간이 촉박하다.

준영은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며 서둘러 욕실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집이 떠나갈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와 크게 놀랐지만, 문제는 그걸 알아볼 시간도 없다는 거였다.

준영을 바이크로 회사까지 데려다준 후 집으로 돌아가다, 걸려온 전화에 일단 갓길에 잠시 멈췄다.

자신이 평소에 쓰던 핸드폰이 아닌, 임시로 가지고 있는 충전식 일회용 폰이었다. 이 전화번호를 아는 이는 몇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 중 한 명인 제이크였다.

문제는 이 핸드폰으로 연락을 한 주제에 에드워드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딴지부터 걸기 바빴다.

-다 죽어 있는 줄 알았는데 기분 무지 좋아 보인다?

“그래 보여?”

방금 전 회사 건물로 들어서던 준영이 갑자기 멈추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생긋이 웃으며 손을 살살 흔들었다.

얼떨결에 덩달아 흔들어주자, 더욱 기분 좋게 웃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거기다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도 힐끔 돌아봐 다시 손을 흔들어주었다.

배시시 웃는 미소가 너무 사랑스러워 지금까지 웃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너는 좀 의기소침해질 필요가 있어.

“왜 시비야? 카밀이랑 싸웠어?”

-넌 돌려 말하는 법을 좀 배워야 해. 언젠가 준영에게도 크게 혼날 거야.

예전 같으면 그럴 일 없다고 큰소리쳤을 에드워드지만, 지금은 차마 당당히 소리치지 못했다. 대꾸를 하지 않자, 이번엔 제이크가 통쾌하다는 듯 웃어젖힌다.

“놀리려고 한 거면 끊어.”

가뜩이나 추운데, 왜 자신이 바이크 위에서 벌벌 떨면서 이놈의 전화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왔어. 검사 결과. 네 예상이 맞아.

“……씨발.”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에드워드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몇 번이고 올라오는 분노를 애써 삼켰다.

-나도 믿기지 않아서 재의뢰까지 했어. 검사 결과 일치하더군. 일단 검사 결과 공증은 썼어. ……터트릴 거야?

아직은, 준영과 오붓이 보내고 싶다. 조금은 귀찮고 복잡하고 힘든 일 모두 미루고 준영과 있고 싶다.

겨우 살짝 마음을 열어주었다. 평생토록 열어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착하디착한 준영은 에드워드에게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미루어서 될 문제가 아니다.

힘들고 괴로워 미루었던 것들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물을 낸 지를 이제는 너무 잘 안다.

결심을 굳힌 에드워드가 깊은 한숨 후 대답했다.

“지금 갈게.”

* ♟ *

한참 일을 하고 있는 바쁜 사무실의 문이 열리며 사장이 들어섰다. 마틸다는 사장을 보자마자 쯧, 하고 혀를 찼다. 아주 작은 소리라 준영에게만 들렸다. 멀뚱히 쳐다보자, 마틸다가 갑자기 키보드를 빠르게 치기 시작했다.

[준영 씨도 일하다 보면 알게 돼. 내가 왜 이러는지.]

준영이 모니터를 보자 2초 만에 싹 지워버리고는 다시 작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뭔가 서로 맞지 않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준영도 다시 일을 하기 위해 자신의 책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자. 다들 고생이 많지? 내가 커피 돌릴 테니 다들 마시면서 해.”

“……웬일이래. 저 스크루지가. 미래라도 갔다 왔나?”

역시나 준영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이던 마틸다는 이어 사장이 바로 코앞으로 오자 표정을 싹 달리했다.

“잘 마실게요.”

“그래그래. 우리 마틸다가 고생이 많아.”

마틸다, 왠지 웃는데 웃는 것 같지가 않았다. 마틸다는 사장의 손에 들려 있는 커피 중 왼손에 있는 것을 집으려 했지만, 우연인지 사장이 쓱 하고 옆으로 몸을 트는 바람에 얼떨결에 오른쪽 커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방금 마틸다가 잡으려 했던 그 커피를 준영에게 내밀었다. 어차피 같은 커피라 별생각 없이 받고는 고맙다 인사를 한 뒤 다시 일에 집중을 하였다.

사장은 모든 직원들에게 커피를 다 돌리고서야, 빈 캐리어를 쓰레기통에 휙 버리고는 사장실로 들어섰다.

모두가 구두쇠가 웬일이냐는 비슷한 말을 하며 조금은 웅성거렸지만 곧 본연의 업무로 돌아가 다시금 연말이 바쁜 사무실의 분위기를 형성했다.

이상하네. 아까부터 열이 자꾸 올랐다. 식은땀이 흘러내려 이마를 손등으로 닦았다가, 자신을 멍한 눈으로 보는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왜 그러세요?”

“네? 아, 아닙니다!”

남자 직원은 준영의 질문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팍 하고 숙였다. 의아하게 쳐다보다 다시 작업을 이어갈 때, 갑자기 마틸다가 다가오더니, 준영의 어깨에 숄을 걸쳐주었다.

“안 추운데…….”

오히려 더웠다. 마틸다는 소리 없이 고개를 저었다.

“몸을 떨잖아요. 한기 들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 일단 탕비실로 가요.”

괜찮은데 싶었지만 마틸다가 재차 권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지러움이 확 하고 올라왔다.

마틸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준영을 꽉 잡으며 그를 부축해 간신히 탕비실 쪽으로 향했다.

“하아, 하아……. 왜 이러지?”

탕비실로 들어가자마자, 구석에 놓인 의자로 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숨이 자꾸 거칠게 토해졌다.

“준영. 혹시 발정기 아니야?”

“네? 그럴 리가…….”

그럴 리 없다 대답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보니 비슷했다. 예전 갑자기 터져버린 히트 사이클 때와 너무나도 비슷했다.

아니, 조금 다른가. 속이 심하게 울렁거린다.

“본인 히트 사이클도 몰라? 그래도 억제제는 있지?”

“네? ……네. 제 가방에…….”

혹시나 하고 그날 이후 늘 가지고 다녔다. 멍청한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니까.

“내가 가지고 올게. 기다려.”

마틸다가 서둘러 탕비실을 나섰다. 점점 더 숨이 가빠 온다. 문제는 그 어떤 증상보다 속이 뒤집힐 것 같다는 거다.

왜 이렇게 속이 안 좋지?

“이거 맞지? 내 언니가 쓰는 거랑 비슷한 것 같은데?”

마틸다가 작은 파우치 안에서 작은 약병과 일회용 주사기를 꺼내 들었다.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약 색깔이…….”

“네?”

“이거 처방받은 거 맞아?”

“네……, 맞아요.”

에드워드의 오랜 친구이자 준영을 담당했던 제이크 존슨이 처방해 준 약이었다.

준영의 대답에 마틸다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준영이 괜찮다 하니 서둘러 주사에 액을 채워주었다.

“익숙하시네요.”

“언니가 오메가거든. 지금은 짝을 만나서 이런 게 필요 없지만.”

“……짝이요? 배우자라는 뜻인가요?”

“아니. 진짜 짝. 목덜미에. 대단하지? 그렇게 서로를 사랑하는 커플을 난 한 번도 보지 못했어.”

마틸다는 황홀한 표정으로 잠시 상념에 젖었다가, 준영의 신음 소리에 아차 했다.

“내 정신 좀 봐. 자, 손 내밀어. 나 주사 잘 놔.”

“다행이네요. 난 주사가 무섭거든요.”

약은 두 가지였다. 혹시나 위급상황이 되면 맞을 수 있는 근육 주사와 저렇게 핏줄을 통해 맞는 주사.

제이크는 이왕이면 두 번째 것을 쓰기를 권고했다. 근육 주사는 효과는 강력하지만 약물 과다 복용 부작용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했다. 보통 사람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준영의 체중이 너무 적은 게 문제라 했다.

그리고 혹시나 근육 주사를 맞게 되면 무조건 911을 불러 병원으로 바로 오라는 말도 덧붙였다.

일반적인 주사니, 아마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바로 집으로 가 쉬면 괜찮아질 것이다.

“내가 사장님한테 잘 말해놓을 테니깐, 얼른 택시 타고 가. 오메가 전용 택시 불러줄게.”

오메가 전용 택시는 많이 비싸다. 평소라면 그러지 말라 하겠지만, 몇 번이고 안 좋은 일을 겪었던 터라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마워요.”

“우리 회사에는 알파는 없지만, 그래도 발정기 때 오메가 향은 베타들도 약하게나마 흥분시키는 경우가 있다고 하니까 일단 뒷문으로 가.”

“네.”

“기다려. 가방 가져올 테니. 움직이지 말고. 내가 배웅해 줄게.”

마틸다의 친절에 한 번 더 감사를 표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마틸다는 다 쓴 주사기와 약통을 쓰레기통에 버린 후, 다시 탕비실을 나섰다.

주사를 맞아서일까. 갑자기 온몸의 기운이 쫙 빠지는 느낌이었다.

한 번도 맞은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원래 이런 건가 하며 힘없이 테이블 위에 늘어졌다. 그때 탕비실이 열리며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윽……! 뭐지 이 향은?”

안으로 들어선 직원이 손바닥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준영을 발견했다.

“준영 씨?”

“……저 나가볼게요.”

베타에게도 향이 날 정도면 위험하다. 곧장 집으로 가야 한다. 일단 복도에서 기다리자. 준영은 힘겹게 탕비실을 나서, 뒷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봐요. 준영 씨. 괜찮아요? ……이건 무슨 냄새지?”

막 뒷문에서 들어온 직원도 같은 반응이었다. 분명 억제제를 맞았는데 아직도 향이 나는 걸까? 아님 근육 주사가 아니라 바로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걸까?

수없이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이 환기 안 되는 탕비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준영은 도망치듯 뒷문으로 나섰다.

갑자기 거래처에서 급한 전화가 오는 바람에 조금 걸렸다. 준영이 걱정됐지만 그래도 억제제를 맞았으니 기운은 없더라도 발정은 진정될 거라 생각했다.

“응? 준영 씨 가방이 안 보이네?”

장장 15분이란 시간 동안 시달리다 겨우 통화를 끝낸 후 준영의 자리로 가 가방을 찾아보지만 보이지가 않았다.

“준영 씨? 아까 퇴근했는데?”

“네? 그래요?”

생각보다 괜찮아진 건가. 그래도 오메가 전용 콜택시라도 부를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더 의아한 건 가방을 가지러 온 걸 보지 못했다는 거다.

“그런데 가방은 언제 가져갔대요?”

“그건 사장님이. 준영 씨가 부탁했다던데. 참, 준영 씨 그 터진 거 맞지? 히트 사이클? 와, 나 처음 본 건데 냄새가 아주…….”

“그러게. 오메가 히트 터진 거 가끔 보기는 해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런 거 아닐까? 우성 오메가 뭐 그런 거.”

“캬. 우성 알파보다 더 적다던? 솔직히 조금 궁금하기는 해. 알파들이 어떤 느낌인 건가 하고.”

“그래? 미약 같은 거 맞은 기분이라던데?”

가만히 두니 대화 꼬라지가 기함할 수준이다. 마틸다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둘을 노려보았다.

“두 사람. 그거 성희롱입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마틸다의 서슬 퍼런 대꾸에 둘은 빠르게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심함에 푹 한숨을 내쉬고는 벽에 있는 시계를 보았다.

벌써 20분. 이미 택시를 타고 갔을지도 모른다. 전화나 해봐야겠다 생각했지만 타이밍 좋게 다시 사무실 가득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 받아요! 받아!”

연말의 사무실은 말 그대로 헬이다. 준영에게는 미안하지만 전화는 이따 퇴근 후에나 해야겠다 생각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답답하다. 숨을 쉬는 게 힘들 정도다. 거칠게 몰아쉰 채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암흑, 눈을 가린 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여긴 어딜까.

분명 복도를 나선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아니,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떠올랐다.

‘준영 씨 괜찮아? ……저런. 효과가 너무 잘 듣나 보군.’

사장이 한 말이 연이어 떠올랐다. 너무 놀라 튀어나오려는 신음에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양손이 뒤로 묶인 상태라 그럴 수가 없었다.

입술을 말아 물고 겁에 질려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그때, 끼익하는 거친 문소리와 함께 빛이 새어 들어왔다.

“일어났어? 와……, 씨발. 냄새 봐라.”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준영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지만, 의미가 없었다. 빛이 들어오고서야 자신이 갇힌 곳이 작은 창고란 걸 알았다. 물러서 본들, 딱 거기까지였다.

“누구……세요.”

“너무 말라서 안 꼴리려나 했는데 나쁘지 않은걸?”

“누구시냐고요.”

“나? 난 뭐, 알 필요 없고. 너와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서.”

남자는 대답을 하다 말고 성큼성큼 다가와 준영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아픔에 절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두피가 통째로 뽑히는 고통에 괴로워하는 준영을 무시한 채 남자는 준영을 질질 끌어 밖으로 나섰다.

“너무 심하게 대하지 말랬잖아.”

익숙한 목소리였다. 준영은 아픔도 잊은 채 번쩍 고개를 들었다.

“잭……?”

“여. 오랜만이네? 그나저나, 우성 알파가 좋긴 한가 봐? 신수가 훤한 게?”

할머니의 유일한 핏줄, 할머니의 유일한 아픈 손가락.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망할 손자라 한숨을 내쉬며 안쓰러움을 감추지 못하셨다.

그리고 그 아픈 손가락은 끝까지 할머니를 찾지 않았다.

심지어 할머니의 유산까지 모두 매각해버리기까지 했다. 앞으로 영원히 만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가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다.

“당신이 왜 여길…….”

겁에 질린 준영을 보며 잭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한참을 킬킬거렸다.

“인생은 참 모를 일이야. 그렇지 않아?”

마치 독사가 이럴까. 준영은 두려움에 또다시 멋대로 튀어나올 뻔한 신음을 간신히 참았다.

사무실로 들어서자, 제이크가 기다렸다는 듯 책상 서랍에서 봉투를 꺼내었다. 에드워드는 봉투 속 서류를 보고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제이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 막 가자는 거군.”

“어떻게 안 거야? 그 둘.”

“……짐작도 못 했어. 처음에는. 너도 알잖아. 내가 오랜 시간 두 사람을 각각 조사했던 거.”

서류를 다시 봉투에 넣고는 씁쓸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보니, 넌 예전부터 제시카가 레이첼에게 사주받은 사람 같다고 생각했잖아. 그건 어떻게 안 거야?”

“난 애초에 나한테 접근하는 사람은 모두 감시해.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그건 아마 나와 비슷한 상황이면 대부분 할 거야. 적들이 많다면 더더욱.”

“너도 참 피곤한 삶이구나.”

제이크가 상상만으로도 무섭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처음에는 위치 추적으로 둘의 동선이 겹치는 걸로 눈여겨봤지. 그런데 아무리 제시카와 레베카의 과거를 탈탈 털어도 접점이 없으니 그냥 단순히 내가 거래처 딸과 맺어지게 하는 걸 막기 위해 제시카를 나에게 노출시킨 거라고만 생각했어. 그러다 얼마 전에 제시카가 나에게 보인 그 표정. ……문득 누군가가 떠오르는 거야. 처음으로 닮았다란 생각이 들었어.”

“겨우 그 정도로 눈치를 챘다고?”

허풍이 심하다며 제이크가 어이없어했지만 에드워드는 한없이 진지했다.

“원래 난 직감을 그냥 넘기지 않아.”

오랜 시간 사방의 적들에게 노출당한 후유증처럼 에드워드는 의심을 절대로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남들은 우연이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치울 것을 에드워드는 수없이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정말로 피곤하고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버릇이지만, 그런 예리함을 키웠기 때문에 지금까지 굳건히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거였다.

“결론은 레베카가 널 너무 얕잡아 본 거군. 하긴 자기가 소개한 여자에게 푹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솔직히 난 네가 러트하지 않은 것만 봐도 눈치를 챘지만. 사랑하는 오메가 상대로 러트를 하지 않는 건, 네가 고자란 소리와 같거든. 그들은 네가 우성 알파라 다르다고만 생각하겠지만……, 우성이 원래 더 동물적이란 걸 몰라서 하는 소리지.”

딱 의사다운 소견을 보이는 제이크의 말에 쓰게 웃으며 그가 내민 커피를 받아 쥐었다.

“어쩔 거야?”

“들춘다고 해도…… 이걸로는 법적으로 어떻게 하지 못해.”

에드워드는 커피를 받기만 하고 마시지도 않은 채 가만히 내용물만 들여다보았다. 짙은 흑갈색 속 자신의 얼굴이 일렁인다.

“하지만 사무엘이 레베카의 편을 드는 건 멈출 수 있잖아.”

“레베카? 아니, 아버지는 셀린느를 돕는 거야. 그는 레베카 따위 얼마든지 버려. 그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녀는 늘 밑 작업만 하는 거고.”

제이크의 말에 에드워드가 입꼬리를 비튼다. 얼마나 아버지를 미워하고 싫어하는지가 훤히 보이는 표정에 제이크는 씁쓸함을 감추지 않은 한숨을 내쉬고는 커피를 마셨다.

에드워드도 그제야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쓰군.”

향도 커피도 일품이다. 그럼에도 입안이 씁쓸했다. 그 원인을 알기에 제이크도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제라드 때문이야?”

“…….”

“넌 싫다 밉다 하면서 은근히 챙기더라.”

제이크 말이 맞다. 에드워드는 이상하게 어릴 때부터 제라드에게 약했다.

물론 아주 어린 시절에는 제라드가 미웠다.

사사건건 아버지의 뒤에 숨어 착한 어머니인 척 연기하며, 에드워드를 밀어내려 애를 쓰던 레베카였다. 그런 그녀의 아들인 제라드에게 정이 갈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셀린느와는 달랐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에게 똑같이 사랑받지 못하는 건 같은 신세다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셀린느보다는 제라드에게 더 마음이 갔다.

그런데 만약 이 사실을 퍼트리게 된다면…?

“……모르겠다.”

“넌 착한지, 착한 척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도 몰라. ……지긋지긋해. 이제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길만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어머니도 그렇게 죽은 마당에 자신도 언제든지 내쳐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아무리 자신이 우성 알파라 할지라도, 아버지 눈에 차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미친 듯이 공부하고 미친 듯이 노력했다.

모두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구에 싫은 사람 앞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그런 완벽한 성인이 되었다.

그 모든 게 얼마나 어리석고 멍청한 짓인지를 이제야 알게 된 거였다.

“제라드는 알아줄 거야.”

“……그 녀석 은근히 마마보이다.”

제라드가 아무리 레베카를 밉다 밉다 해도 그에게는 피붙이다. 피가 통한 어머니였다.

그것 때문에 제라드는 늘 에드워드에게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에도 레베카에게 등을 돌리지도 못했다.

늘 중립적인 입장에서 불구경하던 제라드가 미웠지만 이해도 되었다. 사랑에 굶주렸기 때문에 그것이 형식적인 가짜 사랑이라 할지라도 목매게 되는 건 누구보다 에드워드가 더 잘 안다.

자신이 아버지에게 그랬으니까.

“그리고 보니 유달리 준영에게는 잘해 주는 것 같던데? ……혹시 제라드가?”

“나도 몰라. 하지만 본인 말로는 연애 감정 같은 건 아니라더군.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다고 하던데 그 이상은 말해 주지 않았어.”

“흠, 과거의 인연인가? 형수와?”

제이크의 되물음에 제라드는 굳이 대꾸하지 않고 커피를 머금었다.

“전화 소리 아니야?”

잠시 딴생각을 한다고 벨 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다. 제이크의 지적에서야 핸드폰을 꺼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일회용 핸드폰에서 연락이 온 거다. 제이크, 톰슨 외에 연락이 올 사람이라면 경호팀장 마커스와 준영을 담당하는 경호원들뿐이다.

단번에 심각한 일인 것을 깨달았다.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경호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에드워드는 마치 넋을 놓은 사람처럼 숨을 들이켠 채 간신히 대답을 하였다.

“……바로 가지.”

“뭐야? 무슨 일이야? 심각한 일 맞지?”

“가야…….”

가야 돼. 일어섦과 동시에 비틀거리자 놀란 제이크가 다급히 에드워드를 부축했다. 충격을 뛰어넘어 공포가 몰려왔다.

“뭐야! 무슨 일인데!”

정신 차려. 에드워드 햄턴. 지금 네가 감정에 놀아날 때야?

주먹을 아플 정도로 부여잡은 채 걱정스럽게 자신을 보고 있는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차, 빌려줘. 그리고 이 서류. 네가 일단 보관하고 있어 줘.”

“뭐? 그거야 뭐, 일단 이거 차 키. 지하 2층에……, 제길.”

제이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개인 사무실을 박차고 나섰다. 복도 중간중간 환자와 간호사들이 놀란 눈으로 보았지만 아랑곳 않고 뛰었다. 엘리베이터가 더뎌 비상구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경호팀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당장 CCTV 돌리세요! 위치 추적기가 마지막으로 끝난 장소도 파악하란 말입니다! 당장…… 준영을……, 내 아내를 찾아!”

부디…… 준영! 부디!

준영에게 준 시계를 찾은 곳은 그의 회사 뒷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신호가 나오는 곳을 추적해 도착하자마자 발길에 챈 듯 밟힌 채로 구석에 떨어져 있는 시계를 발견했다.

심장이 다시금 쿵 하고 내려앉았다.

“지문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막 손으로 집으려 할 때 경호팀장, 마커스가 에드워드를 저지시켰다. 시계 바로 앞까지 뻗었던 손길이 그의 말에 멈췄다. 손가락이 허공에서 허무하게 맴돌 때, 마커스가 손수건으로 시계를 집어 부하 경호원에게 건네었다.

경호원은 서둘러 작은 봉투에 시계를 넣었다.

“준영이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이 정도 떨어진 곳이라면…… 분명 근처일 확률이 높습니다.”

위로한답시고 한 말에 화가 났다. 이 순간에도 준영은 두려움에 떨고 있을 것이다. 자신은 도대체 뭘 하고 있단 말인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며 감정을 다스릴 때 한 경호원이 빠르게 달려왔다.

“CCTV 감식 결과 약품에 손댄 자를 발견했습니다!”

“……누굽니까.”

“지금 경찰에…….”

“경찰? 장난합니까? 그들에게 넘겨 어느 세월에 자백을 받아낸다는 겁니까? 당장 그놈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세요!”

에드워드의 서슬 퍼런 외침에 경호원이 당황하다, 마커스의 끄덕임에 서둘러 몸을 돌렸다.

에드워드도 바로 그 뒤를 쫓아, 대기 중인 차에 올라탔다. 시동이 걸린 터라 차는 곧장 출발했다. 에드워드는 최대한 이성을 잃지 않게 감정을 억누르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었다.

“나야. 제시카의 최근 통화 내용 뒤져. 사소한 거 하나라도 놓치지 마. 톰슨! 셀린느의 통화 기록도 찾아봐. 혹시라도 서로 연락을 취한 적이 있는지 알아내.”

톰슨에게 명령을 하고는 신경질적으로 통화를 끊었다. 초조함이 극을 달한다.

“더 밟으란 말입니다! 지금 교통법규 준수하게 생겼습니까! 모든 책임은 나 에드워드 햄턴이 질 테니……. 법 따위 무시하라고!”

빨간불이란 이유로 멈추는 경호원에게 모든 분노가 쏟아졌다. 애꿎은 경호원은 호통을 듣자마자 다급히 액셀을 밟아 속도를 내었다. 양손을 마주 잡고 고개를 숙이자 마치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모습 같았다.

신 따위는 믿지 않지만 지금은 악신이라도 믿고 싶다.

부디, 부디 준영이 무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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