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노크를 하자, 그다지 반갑지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바늘 가는 데 실 가는 거라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건 어쩔 수 없다.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기다렸다는 듯이 불쾌한 냄새가 풍겼다.
죽을 날이 다 된 사람들에게서 나는 특유의 냄새. 이 냄새를 자신의 어머니에게서도 맡은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일부러 향수를 가득 뿌려 숨기기는 했지만 죽음의 냄새는 가려지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도 어머니에게 티를 내지 않은 건 스스로도 칭찬을 해줄 만했다.
“이리로 오렴. 그래. 내 아들……, 오랜만이구나.”
노망이 난 늙은이는 죽을 날이 다가오자 점점 피붙이를 찾는다. 하지만 가장 많이 찾는 이는 바로 그를 버리고 간 운명의 짝일 것이다.
“몸은 좀 어떠신가요.”
“여전해. 그래도 이번에는 산책도 잠시 갔다 오셨지. 여보. 그날은 날씨가 참 좋았죠?”
사무엘의 등 뒤에 서 있던 레베카가 기다렸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에드워드는 그런 그녀를 무심하게 보다 다시 사무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좀 어떠세요.”
노골적인 업신여김에 제대로 화가 난 레베카가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듯 에드워드를 노려보았다. 뭐 딱 노려보는 것뿐이지만.
“뭐 비슷비슷하다. 이제 똑같지 뭐. 부인, 테드에게 마실 거라도 좀 가져다주지 그래.”
“네……, 그럴게요.”
딱히 사무엘이 지적하지 않으니 뭐라 할 수도 없어 레베카는 그저 한 번 더 에드워드를 노려보고서야 방을 나섰다.
“그래도 네 어미다. 잘 좀 해주렴.”
그녀가 방을 나서자마자 사무엘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또다시 헛소리를 내뱉는다. 에드워드는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진심이 아니길 바랄게요. 벌써 노망이 났나 싶으니까.”
사무엘은 에드워드의 대답이 못마땅하기는 했지만 딱히 뭐라 뒷말을 잇지는 않았다.
그도 귀가 있고 눈이 있다면 지금 햄턴 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뻔히 봤을 거다.
“셀린느는 어쩌려고 그러니. 적당히 겁을 줬으니 슬슬 그만하거라.”
역시 이것 때문에 부른 거군.
셀린느에게는 겁을 주기 위해 한 말이었다. 사실 그녀는 자신의 친모를 찾을 필요도 없다. 애초에 사무엘은 셀린느에게는 늘 약했다.
레베카가 셀린느를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직접적으로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는 사무엘의 태도 때문이다. 에드워드를 대할 때와 달리 셀린느에 관해서는 절대 빈말이 통하지 않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만?”
에드워드의 대답에 사무엘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무엘에게 한 번 더 확고히 말했다.
“한 번도 아닌 두 번입니다. 그리고 기어코 제 아이를 죽였지요. 명백한 살인죄입니다.”
“에드워드.”
“아버지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전 우성 알파입니다. 제가 자손을 남길 확률은 매우 희박하죠. 그리고 저와 오메가 사이에서 아이가 나온다면 우성 알파일 확률이 높습니다. 아버지가 그리도 그리던 알파 손주보다 더 귀한 유전자를 가진 아이입니다. 그런 아이를 죽인 겁니다.”
알파고 베타고 오메가고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상관없다. 처음에는 알파가 태어나길 바랐다. 아버지의 뒤에서 햄턴 가를 좌지우지하는 레베카의 유일한 힘줄을 끊기 가장 좋은 무기이니, 알파가, 이왕이면 우성 알파가 태어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준영과 만나고 그에 대한 마음이 커져가면서 깨달았다.
설령 베타나 오메가라도 상관없으니 준영을 닮았으면 좋겠다고. 그럼 정말로 사랑스러울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유일한 기회를 셀린느가 막은 거다.
가장 멍청한 건 자신이지만, 그렇다고 셀린느를 용서해 줄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다.
“안타까운 마음은 알겠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야. 미련을 버리렴.”
“아버지는 평생을 이미 지나간 일에 미련을 두었죠. 셀린느가 멍청한 짓을 해 가문에 누가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처벌하지 않았죠.”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그 아이 스스로 잘못을 알고 있었어.”
“다른 곳에서는 사리 판단을 그리 잘하시면서……. 왜 그 여자의 딸 앞에서는 이리도 멍청해지시는 겁니까. 정말 죽을 날이 다가온 겁니까? 하긴 당신은 늘 그랬지. 언제나 운명이란 단어에 얽매여 멍청하고 추하게 살았지.”
“네…… 이놈! 지금 네 아비에게 뭐라 했느냐!”
사무엘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 한껏 눈썹을 찌푸린 채 에드워드를 노려봤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아버지의 말을 거역한 적 없던 에드워드가 이런 식으로 나온 것에 크게 당황스러울 것이다.
“말 그대로입니다. 셀린느에 대해선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아버지는 나서지 마십시오.”
“네 이놈…….”
“거보세요! 내 말이 맞죠? 당신이 알던 그 에드워드가 아니라니까요!”
타이밍 좋게 고용인과 함께 차를 가지고 들어오던 레베카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섰다. 그러든지 말든지 에드워드는 차분히 자신의 말을 이었다.
“제 할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몸 건강히 잘 계십시오. 다음에는 이런 일로 절 부르지 마시고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부릅뜬 채 에드워드를 노려보는 사무엘을 뒤로하며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저, 봐요! 내가 그랬잖아요! 그 남창 같은 게 당신 아들을 제대로 망쳐놨다니까요!”
막 문을 나서려다 우뚝 멈춰 섰다. 분노가 일었다. 대화조차 섞고 싶지 않았다. 쳐다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저 갈가리 찢어발기고 싶다는 욕망이 마구 올라왔다.
레베카는 이내 페로몬을 느끼고는 부들부들 떨며 비틀거리다 주저앉았다.
“지금 뭘 하는 게야!”
분노한 사무엘의 노성이 넓은 침실 안에 퍼졌지만 에드워드는 페로몬을 더욱 분출할 뿐이었다.
힘으로 오메가를 깔아뭉개는 건 짜증 나지만, 이럴 땐 좋은 것 같다. 에드워드는 천천히 몸을 돌려 사무엘과 그의 발치에 엎드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레베카를 보았다.
이번엔 분노만 내비친 게 아니다. 오메가를 유혹할 때 쓰는 페로몬도 함께 내뿜었다. 레베카는 지금 무서워하기보다 발정이 난 것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이런……. 하도 잘 챙기길래, 짝 계약 정도는 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어차피 오늘내일하시는데 짝 계약 정도는 해 주시지 그러세요?”
치욕에 레베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 이놈!”
다시금 아버지가 분노에 차 소리를 내질렀지만 에드워드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여전히 벌벌 떨고 있는 레베카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잘 들으세요. 오메가이신 새어머니. 모든 오메가는 같습니다. 그저 어쩔 수 없는 생리현상인 거지요. 그걸 남창이라고 표현한다면……, 아들에게 발정하는 당신은요? 뭐라고 표현해야 합니까?”
레베카의 말아 문 입술에서 피가 맺혔다. 에드워드는 그제야 페로몬을 걷고는 노기에 사로잡힌 자신의 아버지를 보았다.
“경고할게요. 제 배우자를 건들지 마십시오. 지켜보고 있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이제는 멍청하게 당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자신의 말만 한 뒤 휙 몸을 돌린 후 곧장 방을 나섰다. 막 문을 닫기 전 다시금 분노에 소리치는 사무엘의 노성이 들렸지만 모른 척 문을 닫았다.
빠르게 복도를 지나가자 끝부분에서 대기 중이던 경호팀장이 다가왔다.
“잘 지켜보세요. 특히나 레베카가 누굴 만나는지, 설령 고용인과 단둘이 있더라도 보고하세요. 사소한 거 하나, 놓쳐서는 안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미 보스턴의 경호원들은 모두 자신의 사람으로 바꾼 지 오래다. 아주 예전부터 차츰차츰 절차를 밟았다.
배부른 암사자가 눈앞에 보이는 것에 만족스러워하며 꼬리를 흔들고 있을 때 에드워드는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이 순간을 그리며 준비했었다.
비록 자신이 사랑에 빠지고, 자신의 아이가 유산 당하는 미래는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바로 뉴욕으로 갈 겁니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 지시에 비서가 곧장 어딘가로 연락을 취했다. 에드워드는 피곤함에 시트에 몸을 기대었다.
준영이 이혼을 요구한 지 벌써 이틀째, 이제는 답을 줘야 한다. 하지만 두렵다.
‘이혼해 줘요.’
그런 말을 할 때 본인의 표정이 어떤지는 알까. 그 말보다, 그 말을 내뱉는 준영의 표정에 더 가슴이 아팠다.
그래……. 너는 이런 순간에도 네 감정을 솔직히 표현할 수 없구나.
처음에는 그저 어리석다 싶었다.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준영은 상처를 받는 것이 얼마나 아픈 건지를 아는 거였다. 자신의 행동, 말, 눈빛 하나하나에 다른 사람이 행여나 상처 입을까 늘 조심하는 것뿐이었다.
이유는 하나다. 그가 아프니까. 그가 세상에 모진 말과 행동들에 내몰렸으니까.
자신이 아픈 만큼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 하는 보통 사람들과 달리 준영은 자신이 아프기에 남은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그저 착한 사람일 뿐이었다.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 가식이란 가면을 쓴 자신과는 달랐다.
‘사랑하지 않아요.’
그 말이 거짓인 걸 안다. 처음에는 충격에 머릿속이 백지처럼 바뀌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게 거짓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준영은 그 말을 할 때 에드워드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았다.
“믿지 않아.”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혼잣말을 들은 건지 비서가 되물었지만 에드워드는 침묵했다. 눈치 빠른 비서는 다시 시선을 노트북으로 옮겨 작업을 이었다.
잠시 타닥거리는 키보드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눈을 감았다.
이혼을 요구하던 준영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하지만 절대 그가 원하는 답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준영. 처음으로 돌아가자. 다시 시작하자. 엉망진창의 관계에서 벗어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집에 당도했을 때에는 이미 새벽이었다. 용케 알아챈 크리스가 마중을 나왔다. 준영이 기다렸다는 말에 바로 그의 방으로 들어섰다.
잠이 든 건지 미동이 없었다. 그렇게 각오를 해놓고는 막상 그가 자고 있는 것에 안도했다.
조심스럽게 머리맡으로 가 잠든 준영을 바라보았다.
첫 기억 속 모습보다 훨씬 약해진 게 보여 가슴이 아프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가 작은 숨결에 놀라 손을 거뒀다. 가만히 지켜보다 다시금 내밀었다. 이렇게 말랐으면서도 볼살은 여전히 통통했다. 말랑한 볼살이 사랑스러워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떨린다.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궁금증은 금방 풀렸다.
“아기야……. 할머니…….”
작디작은 소리지만 충분히 누굴 그리워하는지를 알았다. 준영의 눈가에 작은 물기가 맺힌다. 조심스럽게 그 눈물을 엄지로 닦아 주었다. 한번 흘러내린 눈물은 쉼 없이 이어졌다.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을 거두어 강하게 말아 쥐었다.
“미안하다.”
이 말밖에는 해 줄 게 없어서 더 미안했다.
한참 서류를 검토하고 있다, 문득 문밖이 시끄럽다 싶어 고개를 들었다. 뭔가 실랑이를 하는 듯하더니, 곧 문이 벌컥 열렸다.
에드워드의 미간이 팍 하고 좁혀졌다.
“테드! 얘기 좀 해요!”
멋대로 안으로 들어온 제시카를 막으려 비서가 고군분투했다. 에드워드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비서에게 괜찮다고 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라도.”
나서려던 비서가 그래도 손님이 왔다 싶어서인지 조심스럽게 묻는 것에 에드워드가 답했다.
“금방 갈 테니 신경 쓰지 마요.”
“네. 알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서는 비서를 잠시보다 고개를 돌렸다. 사무실 한편에 서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에드워드를 보고 있는 제시카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테드.”
“이제는 그렇게 부를 사이가 아니지 않을까?”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짧게 숨을 내뱉고는 다시 똑바로 바라보았다.
“에드워드.”
현명했던 여성이 왜 이리도 바뀌었을까. 그것 또한 자신의 죄라 제시카를 나무랄 수는 없다. 하지만 이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녀에게 모질게 대할 수밖에 없다.
“말해.”
“연락을 받지 않아서 직접 올 수밖에 없었어요.”
“연락을 받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대화를 섞고 싶지 않다는 뜻인걸 모를 리 없을 건데.”
에드워드의 차가운 대답에 제시카의 표정이 다시 일그러진다. 아무렇지 않다고 하면 거짓일 거다. 그녀에게 한없이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하지만 그 작은 동정 하나로 어떤 결말이 났는지를 온몸으로 느꼈었다. 에드워드는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일로 날 그렇게 찾은 거지?”
“유산 얘기 들었어요.”
반응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단어만으로도 자연스레 심장이 몇 갈래로 찢기는 기분이다.
“안타깝게 생각해요.”
“……그거 알아?”
“네?”
“당신이 나에게 약을 먹인 날 아이가 세상을 떠났어.”
“…….”
“남은 거라고는 아이밖에 남지 않은 준영이 세상에 홀로 남겨질 때 난 곁을 지켜주지 못했어. 아니, 애초에! ……그래, 그 날, 내가 같이 있었더라면, 아니지……. 셀린느를 처음부터 가만히 두지 않았더라면.”
감정이 격해진다. 가슴속에 분노가 다시 들끓는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나타난 결과지만, 그럼에도 아프다.
“당신이 이렇게까지 슬퍼하는 거 처음 봐요.”
“…….”
“아이가 그렇게 소중했나 봐요.”
“틀렸어.”
“네?”
“아이가 소중했냐고? 그래. 소중해. 이 햄턴 가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무기이자 방패막이니까.”
제시카의 눈이 커진다. 처음 듣는 에드워드의 진심에 그녀는 잘못 들었나 싶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아이를 갖지 못해서 결혼을 안 했던 게 아니었나요?”
“아니. 설령 네가 아이를 가지지 못했어도…… 나에게 준영이 없었더라면 난 너와 결혼을 했었을 거야. 넌 완벽한 배우자니까. 분명…… 준영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넌 나에게 최고의 여성이었지.”
제시카의 표정이 더욱 기묘하게 바뀐다. 그녀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마치 그를 사랑하는 것처럼 말을 해요? 아기…… 때문이잖아요.”
“준영을 사랑해서야. 만약 다른 오메가였다면, 사고로 아이를 가졌다면, 난 지우라 했을 거야. 설령 지우지 못했어도 법적으로 확실하게 선을 그었겠지.”
“…….”
“제시카. 난 자상한 남자가 아니야. 자상한 척한 것뿐이지. ……이기적이고 역겨운 놈이야. 그걸 스스로 인정하는 데까지 너무 오래 걸렸지.”
“그렇게 말하지 마요.”
고개를 빠르게 젓더니 어지러운 듯 비틀거리다 책상으로 가 몸을 지탱했다.
“나에게 당신은 완벽한 남자였어.”
“나에게도 그랬어.”
“그럼 날 선택하면 되잖아!”
“준영을 사랑해.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널 선택할 수 없어. 그건 너에게도 못 할 짓이야.”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요! 내가 괜찮다고!”
“……제시카. 지금은 내가 미울 거야. 하지만 분명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널 내 어머니처럼 만들 수 없어.”
자신의 아버지는 분명 에드워드의 어머니를 사랑했다. 늘 완벽한 여성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랬던 그에게 운명이 나타났다. 그녀가 나타남과 동시에 어머니는 버려졌다. 나날이 남편을 그리워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처음 이혼을 요구했을 때 완강히 부인했다고 했다. 정말로 괜찮다고, 스스로 남겠다는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그것이었다.
제시카를 사랑했던 건 맞다. 준영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자신에게 완벽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떠나버렸다. 그러니, 놓아주어야 한다. 제시카가 못난 에드워드 햄턴을 잊어버리고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녀를 끊어내야 했다.
“당신은 늘…… 사무엘과 같은 삶을 살고 싶지 않다고 했었죠.”
“…….”
“하지만 신기하리만치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어요. ……그럼 이제, 운명에게 버림받을 일만 남았겠네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숨을 쉬지도 못한 채 제시카를 응시했다. 가장 두려워하던 결말이었다. 제시카가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언젠가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늘 가슴속 한편에 존재했으니깐.
“처절하게 버림받길 바라요. 당신도 피눈물을 흘리기 바라. 내가 받은 고통만큼 고통스럽기를 바라.”
“…….”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제시카의 저주를 들었다.
“그리고 하나만 더 말해 줄게요.”
“?”
“난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완벽한 여성이 아니야. 아니, 어쩜 당신처럼 나 또한 가면을 쓰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네. ……행복해지지 마. 내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르니까.”
제시카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몸을 돌려 그대로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에드워드는 말없이 닫힌 문을 바라보다, 곧장 핸드폰을 들었다.
“나야. 경호를 늘려. 제시카에게도 사람을 붙여. ……모르겠어. 무슨 짓을 할지. ……하지만 불길해.”
직감이 소리쳤다. 제시카에게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더 남아있다는 것을. 애초에 보통 사람들은 구하기도 어려운 마약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것부터가 의심스러웠다.
통화를 끝낸 후, 곧장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준영이 무사한지를 알고 싶었다. 크리스에게 연락을 취해 그가 괜찮은지 안부를 듣고서야, 안도하며 힘없이 소파로 가 털썩 앉았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다.
셀린느는 아버지를 닦달해, 에드워드를 압박하고 있다. 아직은 세력이 남았다는 걸 보여 주듯 아버지의 측근들이 에드워드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레베카는 그들을 포섭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제라드가 다행히도 준영을 위하는 것 같지만, 사람은 끝까지 믿을 수 없다는 건, 어린 시절부터 온몸으로 깨달은 경험이었다. 그러니 제라드 역시도 완전히 믿지 않을 것이다.
도처에서 에드워드를 향해 가시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전쟁이 더 빨리 터졌다. 빈말이라도 괜찮다 할 수 없다. 하지만 모른 척 덮어놨던 것이 이제야 드러난 것뿐이다. 더 크게 터질 게 조금 더 빨리 터져 다행이라 애써 위안하며 에드워드는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그 어떤 것보다 준영을 지키겠다는 그거 하나만큼은 바뀐 게 없다. 그럼 된 것이다.
준영을 살던 집으로 내보낸 건 현명한 판단이었다. 준영은 저택에 있을 때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얼굴색이 살아났다. 경호원이 시간마다 찍어 보내는 사진만 봐도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돈 게 보일 정도다.
일부러 이웃집 사람에게 부탁한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크리스와 제라드도 준영에게 잘해 주지만, 분명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만큼은 편하지 않을 것이다.
메일로 날아온 준영이 찍힌 사진을 한 장 한 장 바라보다,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여기저기서 날아온 소송 건은 물론, 아버지가 손을 쓴 건지, 갑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추진하던 모든 프로젝트가 엎어진 것 때문에 요즘 에드워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눈이 너무 따가워 잠시 눈을 감았다가 그만 깜빡 잠에 빠졌다.
하지만 채 5분도 지나기 전에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제길.”
이마에 식은땀이 흥건하다. 또다시 같은 꿈을 꿔버렸다.
마른세수를 하며 잊어버리려 애를 쓰지만, 너무나 선명해 도저히 잊히지가 않는다.
‘안녕…… 에드워드.’
강가에 서서 자신을 보며 마지막 인사를 한 뒤 천천히 돌아서는 모습. 예전 준영이 자살을 시도할 때 그 모습을 봐서일까,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선명해서 겁이 난다.
서둘러 핸드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가, 바로 꺼버렸다.
당장이라도 전화를 해 괜찮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준영에게 방해될라, 그러지 못했다. 무엇보다 준영이 자신을 어려워하고 있는 걸 잘 안다. 문자는 주고받아도 전화는 또 다를 것이다.
갈증이 심해, 물을 마시다, 문득 걸려온 전화에 별생각 없이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준영?”
한 번도 전화를 한 적 없던 그가 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멍하니 액정을 들여다보다 아차 하고 서둘러 받았다. 익숙하면서도 통화음은 조금 달랐다.
역시나 준영이 먼저 전화를 한 게 아니었다. 아까 바로 껐는데도 기록이 남은 듯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무시해도 되건만, 해 주었다는 게 중요했다.
준영이 전화가 온 게 기뻐서일까, 답지 않게 횡설수설이다. 어떻게든 기쁘다는 걸 표현하고 싶은데 마치 어린 십 대가 첫사랑 앞에 서면 이러할까 싶을 정도로 엉망진창이다.
“……점심은 먹었어요?”
어지간히 답답했는지 준영이 먼저 말을 건넸다. 에드워드는 그제야, 이렇게까지 겁먹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평소처럼 일상처럼 대화를 하면 되는 거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준영과는 이런 것조차 제대로 해 보지 못했다는 것을…….
“평생 먹을 양파를 오늘 다 먹은 기분이야…….”
홈 파티 요리를 다 먹은 제라드가 총평을 하였다. 진심이 가득 묻어나는.
솔직히 이해는 간다. 크리스가 양파를 죄다 까 버리는 바람에 졸지에 양파가 넘쳐나, 양파 위주의 요리를 해버렸더니, 자신도 물리는 기분이다.
양파 스튜, 양파를 듬뿍 넣은 중화식 볶음밥, 양파를 듬뿍 넣은 퓨전 스타일의 불고기 파이. 양파를 듬뿍 넣은…….
여하튼 양파투성이다. 제라드가 저런 말을 해도 할 말은 없었다.
“넌 예전부터 편식이 문제였어.”
그런데 에드워드가 가만히 듣지 못하고 지적한다. 에드워드의 말에 제라드가 뚱한 표정을 짓더니 본격적으로 싸울 태세를 취했다.
“내가 알기론 테드 너도 만만찮게 편식하지 않나? 유달리 향 강한 재료에 약했지. 카레, 마늘, 양파.”
“응? 양파 싫어했어요?”
금시초문이라 화들짝 놀라 되물었더니, 에드워드가 당황하며 해명했다.
“십 대 때 얘기야. 지금은 그런 거 없어.”
“헤에에. 몰랐네에.”
찌릿. 레이저가 나올까 싶을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제라드를 노려보지만 그는 당당했다. 오히려 한마디 더 할 것처럼 구는 걸 준영이 나섰다.
“제라드. 그만 해요. 어릴 때 얘기로 약점을 잡는 건 나쁜 거예요. 그리고…… 나도 어릴 때에는 편식 심했다고요.”
그런데 어째 모두의 표정이 이상하다. 제라드는 황당한 듯이 바라보았고, 에드워드는 살짝 붉어진 채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크리스는 불구경하는 아이처럼 두 눈을 반짝이기까지 했다.
“네네, 아무리 시동생과 사이가 좋더라도, 딱 거기까지다 이거지.”
“애초에 때려죽이고 싶어도 내 남편이 낫다잖아. 왜 그랬어.”
제라드의 말에 크리스가 키득거리며 어깨를 두드렸다. 에드워드는 할 말이 매우 많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제라드를 쳐다봤지만, 그뿐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준영이 당황했다.
“무슨 말인지……. 그냥 그렇다는 거지 누구 편이랄 게 어딨어요?”
“그렇죠. 맞는 말입니다.”
“너……, 준영이 그렇다잖아. 왜 자꾸 몰아 가.”
이번에도 에드워드가 나서 제라드를 나무란다. 제라드는 짝이 있으면 다냐며 툴툴거렸고, 크리스는 억울하면 너도 짝을 만들라며 위로를 하였다.
낯선 분위기 속에서 준영만이 어디다 장단을 맞춰야 할지 몰라 당황할 뿐이었다.
제라드와 크리스가 볼일이 있다며 도망치듯 가버렸다. 조금 더 느긋하게 있다고 가도 될 텐데 싶지만, 바쁘다고 하니 붙잡지는 못했다.
“에드워드는 안 바빠요?”
끝까지 남아 식탁을 치우고 있던 에드워드가 준영의 질문에 움찔 몸을 굳혔다. 왜 저러나 하고 되물으려 할 때, 초인종 소리에 다급히 대답하며 몸을 돌렸다.
“누구세요?”
“나야! 잊은 게 있어!”
“네?”
제라드의 목소리에 체인을 풀고 서둘러 문을 열었다. 그런데 제라드는 안 보이고 웬 커다란 종이 상자가 보인다. 그리고 그걸 냉큼 준영에게 내밀었다.
“어어……. 어? 이건?”
크기는 엄청난데 무게는 크게 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크기에 비해 가벼운 편이다.
“저번 촬영 때 받은 건데, 애인 주라고 하잖아. 난 애인이 없는데. 누구 염장 지르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가 갑자기 네가 생각났지. 딱 네 체형에 어울릴 것 같아서.”
“네?”
“나도 공짜로 얻은 거니까 막 입으면 돼. 그럼 난 간다. 테드는……, 나중에 보자.”
다시 뭐라 할 틈 없이 일방적으로 말을 하고는 후딱 가버린다. 그리고 도로변에 정차된 차에 냉큼 올라탄 뒤 휭 하고 가버렸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볼 때, 다가온 에드워드가 준영에게서 상자를 건네주었다.
“옷인가 보군.”
“아…….”
그제야 왜 이리 가벼운지 알았다. 준영은 고맙다는 말도 못 한 것이 아쉬웠지만, 나중에 전화를 하면 된다 싶어 서둘러 문을 닫은 뒤 집 안으로 들어섰다.
“도대체 몇 벌이야?”
한두 벌이 아니다. 하나하나 꺼내다 보니 끝이 없다. 그걸 지켜보던 에드워드가 상자를 쥐더니 단숨에 뒤집어엎었다.
말 그대로 옷 비가 내렸다.
“……에드워드.”
“응?”
“어떻게 치우라고. ……아니 그전에 방에 가서 펼쳐도 되는데…….”
“아……, 미안.”
소파를 뒤덮다 못해 바닥까지 흘러내린 옷가지를 보자 헉 소리부터 난다. 아직 설거지가 한가득인데 이것까지 치울 생각을 하니 골치가 아프다. 준영의 투정에 가까운 중얼거림에 에드워드가 뒤늦게 아차 하고는 서둘러 옷가지를 상자에 다시 담기 시작했다.
문제는 잘 개어져 있던 옷들을 마구잡이로 담는다는 거였다.
“자, 잠깐만요! 그렇게 막 담으면!”
“응?”
“아니, 옷들이……. 이 많은 게 옷장에 다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일단은 여기다 보관해야 할 텐데…….”
“옷장이 부족하면 사면 되잖아.”
“……옷장을 둘 곳이 없어요.”
“붙박이? 맞나? 여하튼 사람을 불러서 짜 맞추면 되지 않나?”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말을 하다 보니 뭔가 심하게 핀트가 엇나간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보니 이 남자, 아까 홈 파티 때도 컵이 가지각색인 걸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깨져서 하나씩 산 거라고 하니, 그럼 구색이 맞지 않으니 다 바꿔야 하지 않냐고 말을 해 당황하기도 했었다.
애초에 양손에 쥐고 나온 게 다른 거란 걸 새삼 깨달았다.
“난 모델이 아니에요. 옷이 이렇게까지 많이 필요 없어요. 제라드가 준 옷들은 적당히 보고 내가 입을 만한 것을 뺀 뒤 모두 기부할 생각이에요.”
“……왜?”
“필요 없으니까요. 무엇보다 그런 사치를 부리고 싶지 않아요. 옷은 적당히 누구에게 손가락질받지 않을 정도면 된다고 생각해요.”
고용인 중 한 명이 때가 되면 알아서 옷장을 바꿔주는 에드워드의 입장에서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그는 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살았다.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어쩐지 잔소리처럼 되어버린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이건 일반적인 서민들의 사정이라 말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에드워드가 더 빨랐다.
“무슨 뜻인지 알았어. 즉 이 옷들은 다 필요 없으니, 엉망으로 넣어놓으면 구겨진다는 거지?”
“……네.”
“그럼 개어서 넣도록 하지.”
정말 알아들은 걸까. 에드워드는 본격적으로 옷들을 하나하나 개기 시작했고 준영은 그런 그를 바라보다 다시 말을 건넸다.
“일단…… 놔둬 봐요.”
“응?”
“이왕 꺼낸 거, 지금 작업해요.”
“설거지도 해야 하지 않나?”
“설거지는 내일 해도 돼요. 그릇이 썩는 것도 아닌데요, 뭘.”
“그래. 맞는 말이야.”
준영의 말에 에드워드가 동감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이상할 정도로 와닿았다.
왠지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에드워드를 오랜 시간 멀리서 지켜보았지만 이런 미소를 본 적이 없다. 예전에 종종 짓던 호탕하거나 자신만만한 미소와는 달랐다.
따뜻하고 말랑하고……, 무언가 부드러웠다.
“왜?”
너무 대놓고 쳐다봤나 보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아까보다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볼에 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준영?”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지 에드워드가 어느새 준영의 뒤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빠르게 뛰었던 심장이 이번엔 갑자기 멈춘 것만 같다.
“그…… 옷장!”
“응?”
“옷장 좀 비우고 올게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이 층으로 뛰어 올라가 버렸다.
으아……. 왜 그랬어……. 바보!
분명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부끄럽다. 옷장을 비우는 건지, 휘젓는 건지. 몇 번이고 들었다 내려놨다를 반복하며 자책하고 있을 때, 쨍그랑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뭐지? ……에드워드?”
뭔가 깨트렸나 하고 황급히 방을 나서 일 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주방에서 두 눈을 의심케 할 만한 일을 봐버렸다.
준영은 자신의 앞치마가 그렇게 작은 건지 처음 알았다. 그 큰 덩치의 에드워드가 어떻게 보면 여성용 사이즈인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웃긴 건 그래도 잘생겼다는 거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뭐…… 해요?”
“……설거지 해 보려다가. 미안. 깨트렸어.”
에드워드가 등 뒤로 숨겼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반으로 갈라진 접시가 들려 있었다.
“어떻게 하면 접시가 반으로 갈라져요?”
깨진 게 아닌 딱 봐도 반으로 갈라진 거다.
“그……, 깨끗하게 씻는다고 힘을 줬더니……. 그리고 이건 떨어뜨린 거야.”
에드워드는 이번엔 옆으로 한 발짝 피했다. 바닥에 한때 컵이라 불렸던 것의 잔재가 흩어져 있었다.
아마도 소란스러운 소리가 이거였나 보다.
“치우려고 했는데…….”
“거기 가만히 서 있어요. 움직이지 말고!”
에드워드가 몸을 숙여 깨진 컵을 치우려 하는 모습에 다급히 말리고는 서둘러 다용도실로 들어섰다.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져와 바닥을 쓸고, 티슈를 뜯어 물을 묻힌 후 바닥을 닦아내었다. 두 번이나 바닥을 다 쓸고서야 후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그러고 있어요?”
아까 그 포즈 그대로 서 있는 에드워드의 모습에 의아해 물었다.
“아, 움직여도 돼?”
“……풋!”
어리바리한 모습에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가리며 웃었다. 에드워드는 준영이 갑자기 웃자 놀라기는 했지만, 곧 덩달아 따라 웃었다.
하하 호호. 화기애애하게 웃기를 잠시,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마자 이내 서먹함이 맴돌았다.
“그, 옷 정리를 마저 하러 갈 테니 설거지는……. 음……, 최대한 천천히 하세요.”
“그래. 주의하지.”
하지 말라고 해도 할 것 같아 충고만 하였다. 역시나 에드워드는 기분 좋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거지하는 걸 저렇게 좋아할 줄 몰랐네. ……살림이 처음이라 재밌어서 그런가? 그렇게 에드워드가 알았다면 끙끙 앓았을 만한 생각을 하며 준영은 다시 이 층으로 올라갔다.
어제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쫓아내기가 미안해 자고 가라 했다. 그런데 이 남자 작정을 했나 보다. 집에 들른 것도 아닐 텐데, 갈아입을 옷까지 챙겨왔다. 물론 잠옷은 아니었다. 덕분에 오늘도 헐벗은 에드워드의 품에서 잠들어야 할 것 같다.
에드워드가 씻으러 들어간 사이 침대 시트를 정리하다, 메시지가 오는 소리에 협탁 위에 올려놓은 폰을 집어 들었다.
누구지?
처음 보는 전화번호였다. 별생각 없이 내용을 확인했다.
행복하다. 이런 걸 의도하고 내보낸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준영과 사이가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그를 돕는답시고 했던 행동이 죄다 그를 방해했지만, 그래도 준영은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었다.
에드워드는 심장 위 가슴팍에 손바닥을 얹고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아까부터 터질 듯이 뛰는 심장이 아직도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세상을 일찍 떠나버린 아이에게 미안할 만큼, 행복하다. 그래서 무서웠다.
“후우…….”
다시 심호흡을 하고는 허리에 수건을 걸친 후 밖으로 나섰다. 최대한 태연한 척 머리를 닦으며 욕실을 나서자,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준영의 등이 보였다.
“준영은 안 씻어?”
“에드워드. 미안한데 오늘 그만 가 줄래요?”
“응?”
“가 주세요.”
“준영?”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황급히 다가가 준영의 어깨를 잡았지만, 탁 소리가 나도록 그의 손을 뿌리쳤다.
“……재밌어요?”
“뭐?”
“나…… 놀리는 거 재밌어요?”
준영이 웃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눈물이 한가득이다. 건드리면 툭 하고 떨어질 듯 눈물이 가득 고인 채 준영은 웃고 있었다.
“무슨 소린지…….”
영문을 모르는 에드워드에게 준영은 말없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 쥐여진 핸드폰 액정에 헐벗은 에드워드와 제시카의 모습이 가득 차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조작인가요?”
“……아니.”
“돌아가요.”
“준영. 나는…….”
무슨 말을 할까. 그 날, 제시카에게 갔던 그 날, 약을 먹고 의식을 잃은 날이 분명했다. 하지만, 완전히 의식을 잃은 게 아닌가 보다. 설령 끝까지 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어쩜 유사 행위까지는 갔을지도 모른다.
“돌아가 주세요.”
뻗었던 손을 말아 쥔 채 에드워드는 두 눈을 감았다. 양치기 소년. 언젠가 준영에게 말했던 것처럼 자신은 딱 그거였다.
늑대가 나타났어요. 하염없이 외치는 한심하고 어리석은 양치기 소년, 그것에 바로 에드워드 햄턴이었다.
준영에게 보내졌던 사진은 에드워드에게도 와 있었다. 차 안에서 사진을 들여다보다, 질끈 눈을 감았다.
그녀가 자신을 원망하고 증오하고 불행을 바라는 건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혹시나 하고 그날 피검사를 했던 건 오랜 세월 들여진 습관 같은 거였다. 구설수에 오르기 전 증거부터 모아놓는 건 모든 재벌가 자식들은 다 같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쓸 일이 없기를 바랐다.
다시 눈을 뜬 건 전화가 울려서였다. 수행비서 톰슨이었다.
“무슨 일이지?”
-경호실장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뭔가 이상한 움직임을 포착한듯합니다. 오셔서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내 핸드폰도 도청당했을 수 있으니 거기까지. 바로 가도록 하지.”
서둘러 통화를 끊은 후 시동을 걸었다. 막 차를 출발하기 전 고개를 돌려 준영의 집 쪽을 보았다. 쳐져 있는 커튼 너머 불빛은 없다. 하지만 그가 자고 있지 않다는 건 알 수 있다.
달콤한 행복이 그리 길지도 않았다. 겨우 이틀, 그것도 채 몇 시간도 되지 않는 시간. 그 짧은 달콤함을 맛보여준 뒤 운명의 신은 잔인하게 에드워드를 바닥으로 추락시켰다.
“쓰네.”
괜찮다. 애초에 각오했던 일이다. 언젠가 스스로 먼저 밝힐 일이었다. 에드워드는 다시금 각오를 다진 후, 차를 몰았다.
“오메가는…… 일단 생각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벌써 세 번째다. 오늘 면접을 본 횟수는 세 번, 오메가라서 곤란하다는 말을 들은 횟수도 세 번이다.
이럴 거면 오메가도 된다는 문구를 넣지 말지. 하지만 생각해 보면 회사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요즘 여성 평등만큼이나 회자되는 게 오메가 평등이다. 그러니 그런 문구를 넣지 않으면 회사 이미지상 좋지 않다. 하지만 오메가는 이래저래 불편한 점이 많으니 당연할 거다.
“후우……. 잘 안되네.”
메모지에 다시 X를 긋자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정말 햄턴 가는 꿈의 직장이었다. 청소부에게도 복지가 잘 되어있는 몇 안 되는 곳을 자신의 멍청한 실수로 날려버린 거다.
지금 와서 다시 다니게 해달라는 것도 웃긴 일이지만 마음 같아서는 정말 그러고 싶다.
만약 그 사진을 보지 못했다면 에드워드에게 어쩜 부탁했을 수도 있겠다. 물론 들어줄 리는 없지만.
터덕터덕 힘없이 길을 걷다, 목이 말라 바로 앞에 보이는 편의점 안으로 들어섰다. 생수를 찾다, 문득 병으로 된 사과 주스가 보여 멈췄다.
그 사과 맛있었지.
그날 사과를 한 아름 따던 날, 에드워드가 내년부터는 사과 주스를 만들자고 말했었다.
그 말에 그렇게 기뻤다.
“흠흠!”
멍하니 사과 주스를 쳐다보고 있을 때 들려온 헛기침 소리에 아차 했다.
“죄송합니다.”
냉장고 문을 열어놓고 있었단 사실에 서둘러 물과 사과 주스를 꺼내고는 문을 닫았다.
계산대로 가 물건을 올려놓다 문득 신문이 눈에 들어와 시선을 고정했다.
“신문 사실 겁니까?”
직원의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신문을 들어 펼치고 있었다.
“네.”
신문을 내밀자 직원이 냉큼 바코드를 찍는다. 계산을 하고 물건을 가방에 넣은 뒤 천천히 밖으로 나섰다.
목이 말라 들어가 놓고 그런 건 죄다 까먹은 듯 신문을 펼친 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에드워드 햄턴, 제시카 로웰과 밀애?]
선글라스를 끼고 있지만 분명 에드워드가 맞았다. 준영은 씁쓸히 웃고는 신문을 편의점 밖 쓰레기통에 버린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차 한 잔을 다 마실 때쯤 카페 문이 열리며 선글라스를 낀 여성이 안으로 들어섰다. 밖에 첫눈이 왔나 보다. 어깨에 살짝 쌓인 눈을 툭툭 터는 금발의 그녀는 딱 봐도 알파 같은 느낌이었다. 시원하게 쭉 빠진 팔다리가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제시!”
조용한 카페지만 그럼에도 몇 있는 사람들이 레베카의 큰소리에 몇몇이 돌아보았다.
“쉿. 세리. 여긴 우리만 있는 게 아니야.”
제시카가 손가락을 세우며 싱긋이 웃었다. 레베카는 미안함과 무안함에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다가가 제시카의 맞은편에 앉았다.
“안색이 안 좋아 보여. 너도 고생이 많았나 보네.”
“뭐, 그렇지. 그러는 제시, 넌? ……괜찮아?”
“나야 뭐. 나보다 네가 더 문제지 않아? ……에드워드가 소송 걸었다며.”
제시카의 질문에 레베카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아직도 억울하다는 듯이 이를 갈기 시작했다.
“그 정도로 유산이 될 줄이야. 정말 그렇게 될지 몰랐다고. 정말 이상해. 그날따라 뭐에 씐 것 같았다니깐. 파티장에서도 그렇고, 하아……. 난 정말로 겁만 살짝 줄 생각이었다고.”
“그러게. 여성형 알파는 페로몬이 그렇게 강하지 않은데……. 왜 그럴까.”
제시카가 분노하는 레베카를 위로하듯 그녀의 손등을 살살 매만졌다. 레베카는 당장이라도 울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테드가 그렇게 화를 낼 줄이야. 물론 임신 자체가 어려운 건 맞지만……. 그래도 어떻게 나한테 그래. 어디서 빌어먹다 굴러온 돌인지도 모르고……. 제길.”
“레베카. 네가 화난 건 알아. 하지만 유산을 당한 준영이 가장 슬플 거야.”
“너도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아, 이런…….”
화가 나 버럭 소리를 지르던 레베카가 다시 시선이 몰리자 입을 다물었다.
“왜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했어?”
“알잖아. 투명해 보이려면 이렇게 탁 트인 곳이 좋아. 그리고 네가 소리만 지르지 않으면 옆자리에 들리지 않을 거야”
제시카의 말이 맞다. 괜스레 밀폐된 공간에서 마주했다가 오해를 사면 곤란하다. 어쨌든 레베카는 알파니깐.
“넌 이렇게 신중하고 착하고 상냥한데. 왜 테드는 그런 놈에게……. 하아…….”
레베카가 말을 하다 말고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다는 듯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제시카는 그것도 다 이해한다는 듯이 다시 그녀 위 손등을 만지작거리며 미소를 지어주었다.
“넌 정말 천사야.”
“고마워. 그렇게 말해 줘서.”
“아니야. 빈말이 아니야. 테드가 인생에서 가장 멍청한 짓을 한 거라면 바로 널 두고 그딴 놈을 선택한 거야.”
“그보다 레베카. 소송 건은 어찌 될 것 같아? 듣자 하니 사무엘이 움직였다는데 사실이니?”
“응. 아버지한테 손 벌리기 싫었는데, 너도 알잖아. 이혼한 지 얼마 안 돼서…….”
세 번의 이혼으로 전 재산이 탈탈 털렸다. 오죽하면 출가했던 주제에 본가로 돌아갔을까.
“그래. 알아. 네가 힘든 거 너무 잘 알아. 그나저나 에드워드는 왜 셀린느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뻔히 네 사정 잘 알면서…….”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도대체 이해를 못 하겠어. 그 남창에게 홀리지 않고서야.”
“혹시……. 아, 아니야.”
제시카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젓자, 셀린느가 왜 그러냐며 되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제시카에게 몇 번이고 묻고서야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었다.
“예전에 사고가 나기 전부터 준영이 에드워드 근처에 맴돌았던 건 알지?”
“그래. 네가 말해 줬잖아. 바보 같은 에드워드, 딱 봐도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걸 왜 몰라?”
“좋아. 대신 이건 절대 에드워드에게 말하지 마. 사실 나도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았어.”
“뭘?”
“……하아.”
애만 오만상 태우는 제시카가 답답해하며 되물었다. 결국 셀린느 속이 다 타들어 갈 때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준영은 그쪽에서 유명했다나 봐.”
“뭐?”
“돈이 필요해서 학교에서도 ……음, 몸을 팔았다고.”
“미친! 그딴 새끼가!”
“쉿! 셀린느. 쉿.”
제시카가 서둘러 손가락을 세우며 다시 레베카를 진정시켰다. 셀린느는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쉬더니 단숨에 물을 마시고는 다시 제시카를 바라보았다.
“소문일 뿐이야. 증거는 없어.”
“그럴 만한 짓을 했으니 소문이 나지.”
“그래도 소문이라 그런데 그……, 듣자 하니 보호자였던 할머니의 손주와도 그렇고 그런 사이라 하더라고.”
“뭐? 오, 세상에 불쌍한 에드워드. 그런 것도 모르고…….”
“그러니 알게 해 주자.”
“알게 하다니?”
“우리가 말을 해도 이미 준영에게 홀려있는 에드워드는 믿지 않을 거야.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면 어떨까?”
“방법이 있어?”
“이리로 귀 좀.”
제시카의 속삭임에 셀린느는 서둘러 몸을 숙여 귀를 가져다 댔다.
한참을 속닥거리고 난 뒤, 셀린느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둬. 난 직접적으로 못 움직이지만, 내 전남편은 다르니깐.”
“힘든 건 널 시키네. 미안해. 세리.”
“무슨 소리야. 우리 사이에. 너도 힘들잖아. 그러니 걱정 마.”
둘은 양손을 마주 잡은 채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위로했다.
셀린느가 먼저 자리를 뜬 후, 제시카는 핸드백을 열고는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혹시라도 사진 찍히면 어쩌려고 그래.”
갑자기 다가온 여성이 의사를 묻지도 않고 맞은편에 앉으며 잔소리를 하였다. 제시카도 으레 그녀를 안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담배 피운다고 들킬 일이면 벌써 들켰어요.”
“셀린느는 멍청해서 괜찮지만 에드워드는 달라.”
“그도 그다지 똑똑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레이. 에드워드를 얕잡아 보면 안 돼. 보렴. 네가 과신한 바람에 일을 그르친걸.”
“어머니가 애초에 잘 숨기지 못해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요. ……그러게 애초에 그 파티 장소부터가 말이 안 됐어요.”
“너도 동의한 거잖니.”
“그 얘기는 그만하죠. ……그래서 약은요?”
잔소리 따위 들으려고 온 게 아니다. 제시카의 차가운 음성에 레베카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핸드백을 열어 작은 약통을 건네주었다.
“주기가 짧아지고 있어요.”
“그래도 과다 복용은 안 돼. 네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어.”
“하. 이제 와서 엄마 노릇 해 보려고요?”
제시카의 지적에 레베카는 미간을 찌푸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걱정하는 척하지 마요. 가증스러우니까.”
“요즘 넌 너무 위태해.”
“난 늘 위태위태했어요. 당신이 그런 쓰레기에게 날 혼자 두고 갔을 때부터.”
질끈. 상처를 후벼 파는 듯 날카로운 음성에 레베카는 눈을 감았다, 떴다. 제시카 아니, 레이첼은 차디찬 눈빛으로 레베카를 노려보다 그녀가 내민 약통을 핸드백에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돈 많은 엄마가 계산 좀 해요.”
선글라스를 고쳐 끼고 스카프로 얼굴을 가린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나섰다.
레베카는 한참을 허공을 응시하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네? 정말이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화가 걸려와 당황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는 다급히 감사 인사를 건네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크게 숨을 들이켰다.
“세상에……!”
그리고 길게 내뱉자마자 기쁨에 환호성을 질렀다. 오메가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을 해 전혀 예상치 않았는데 갑자기 출근을 하라니.
“정말 감사합니다! 네! 네! 내일부터요? ……네!”
이미 통화는 끊겼지만, 그럼에도 핸드폰을 내려놓지 못한 채로 멍하니 서 있었다. 너무 기뻤다. 햄턴 사에 취직했을 때만큼 기뻤다. 아니 이건 더 크다.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서일까, 누군가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함께 기뻐해 주면 좋겠다 싶어 통화 버튼을 누르다 우뚝 멈췄다.
“……바보.”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닌 에드워드에게 연락을 하려 했을까. 생각보다 그 짧은 며칠이 너무 달콤했나 보다.
정말로, 가슴이 설레었다. 청혼을 받았을 때보다 몇 배로 더 울렁거렸다. 청혼이라 할 수 없는 청혼을 받았을 때에는 분명 기뻤지만 아팠다. 하지만, 그 날은 따뜻하고 설레고 포근했다.
이 남자와 어쩜 이대로 잘해갈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달콤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내동댕이쳐졌다.
“바보다. 진짜 나…….”
이미 알고 있는 일인데. 모르고 있던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화를 냈을까. 자신이 무슨 화를 낼 자격이 있다고.
취업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쁜 것도 잠시, 다시금 우울함이 바닥을 치기 시작한다.
오래간만에 기쁜 일이 생겼는데 그 감정이 그리 오래가지 않는 현실에 씁쓸히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화장대 거울을 보며 주문처럼 외워본다.
“할머니. 정말 괜찮아지겠지?”
그래, 그 예전 당장 먹고살 일을 걱정해야 했을 때보다는 낫지 않는가. 돈도 사실상 그리 급하지 않다. 두 눈 질끈 감으면 양심 따위 팔아치우면, 평생 넉넉히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
“……할머니 이제는 멍청한 짓 안 할게. 그러니 나 응원 좀 해 줘.”
마치 다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게 잡아달라는 말처럼 들리지만 그걸 지적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좌불안석으로 얼마나 기다렸을까. 드디어 회의라고 부를 수도 없는 회의가 끝나며 임원들 자리에서 일어섰다.
입구 쪽에 서 있던 톰슨은 황급히 뒤로 물러서서 모두가 나가기를 기다렸다. 이어 마지막으로 밖으로 나서던 남성이 막 톰슨을 지나치다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오랜만이구나.”
“네. 회장님.”
사무엘 햄턴. 햄턴 사의 살아있는 거장.
물론 햄턴 사는 예전부터 매년 흑자를 기록하던 우수한 기업이었다. 하지만 이 햄턴 사를 대기업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건 바로 사무엘 때였다. 에드워드도 뛰어나지만, 사무엘이 밑바탕을 깔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경영가로서 이름을 알렸을까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제시될 정도로, 사무엘의 영향력은 아직 건재했다.
그 증거로, 현직에서 물러난 지 3년이 되었는데도 그의 말 한마디에 고위 임원들이 움직인 거다.
“아들이 아직 젊어서 그런지 혈기가 넘쳐. 자네가 잘 보필하길 바라네.”
“네. 최선을 다해 제 할 도리를 하겠습니다.”
톰슨의 확고한 대답에 사무엘이 마음에 든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 너무 오래 지체하셨습니다.”
사무엘의 보좌관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었다. 사무엘은 이 정도쯤 어떠냐며 보좌관에게 깐깐하다 나무란다.
“회장님의 건강에 각별히 유의하라는 사모님의 부탁이 있으셨습니다.”
“레베카는 다 좋은데 너무 걱정이 많아. 그럼 톰슨, 내 아들을 잘 부탁하네.”
만약 톰슨이 신입이었다면 단순히 회장이 아들인 에드워드를 진심으로 걱정하는구나 하고 착각을 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에드워드의 곁을 지켰던 톰슨이었기에 사무엘의 진짜 말뜻을 누구보다 잘 안다.
“네. 염려 마십시오.”
겉으로는 온화한 모습이지만, 말 그대로 살아있는 노장이기에 톰슨은 한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회장까지 회의실에서 멀어져 모습이 보이지 않고서야 톰슨은 서둘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상무님.”
회의실 중앙에 서서 물끄러미 화이트보드 판을 보고 있던 에드워드가 톰슨의 부름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재밌지 않아?”
“…….”
“걱정 마, 톰슨. 애초에 예상했던 일이야.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해. 늙은 아비의 무기들을 내 눈으로 볼 수 있어서 말이야.”
당연히 좌절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늘 회의는 명분이었을 뿐, 말 그대로 에드워드를 찍어누르기 위한 사냥터였다.
주주총회까지는 아니지만, 에드워드가 더이상 물의를 일으킨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강력한 경고였다.
그의 프로젝트를 죄다 엎은 건 물론, 갑자기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기사들까지 들먹였다.
에드워드의 양팔과 양다리를 옥죄어 더이상 설치지 못하게, 다시 말 잘 듣는 꼭두각시를 만들기 위해 사무엘이 만든 무대였다.
자신만만해하던 에드워드였지만 그도 주주들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는지 회의 내도록 굳은 표정으로 침묵을 고수했었다.
에드워드는 그 누가 그 어떤 불쾌한 말을 하더라도 일언도 하지 않은 채 자리만을 지켰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던 톰슨이 에드워드의 패배를 예감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데 에드워드는 웃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자네가 보기에도 내가 아직 어려 보이나 봐.”
“그런. ……그럴 리가.”
“이해해. 20대 초반에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들 때부터 내 곁에 있었으니까. 자네 입장에서는 물가에 내놓은 애 같겠지.”
“그 정도는 아닙니다.”
톰슨의 대답에 에드워드가 풋 하고 큰소리로 웃는다. 그리고 다시 화이트보드를 바라보았다. 에드워드가 추진하던 프로젝트 기획서가 그림처럼 비치고 있었다.
“시시할 정도란 말이야.”
“무슨 뜻인지.”
“너무 생각대로 놀아서 조금은 유치해.”
“그래도 방심은 안 됩니다.”
“당연하지. 방심이라니, 있을 수 없어. 마지막 기회야. 이번에 제대로 꺾지 못하면 난 두 번 다시 회생할 수 없겠지.”
방금 전까지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던 남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무서운 기류가 흘러넘친다. 늘 유한 모습을 유지하던 에드워드였다. 단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설령 그런 모습을 보여도 그것조차 계산을 하던 남자였다.
사무엘은 자신의 아들이 얼마나 철두철미한 남자인지를 모른다. 그렇기에 이렇게 쉽고 단순하게 힘으로 누르려 하는 거겠지만.
그래, 예전이라면 절대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무엘은 대단한 사람이지만, 그보다 머리 위에 서 있는 게 에드워드니깐.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단 한 가지, 걸리는 게 생겨버렸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도 그게 문제야.”
“큰 뜻을 위해서라면…….”
“소를 희생하라고? 톰슨. 틀렸어. 이제 나에게 대가 그야.”
“네?”
“신기할 정도로 말이야.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하찮게 여겨지고 있어. 이번 계획을 추진하면서 느낀 게 뭔 줄 알아?”
“…….”
“까짓것 실패해버리면 오히려 더 후련하겠다, 야.”
에드워드의 말에 톰슨이 잘못 들었나 싶어 두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러니 지켜. 자네 모든 걸 걸고서라도 지켜. 그게 자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야.”
톰슨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듯 쥐었다. 마치 스스로에게 각오를 다지듯 말을 던진 뒤 회의실을 나섰다.
만약 방금 전 나갔던 임원들이 지금의 에드워드를 본다면 뭔가 이상하다고 의심할지도 모를 만큼, 에드워드는 승자의 모습이었다.
첫 출근은 싱거울 정도였다. 경리 보조라 잡다한 업무가 전부였다.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고 사장도 인자한 미소로 준영을 대했다.
이런 곳에서 일을 하고, 스스로 돈을 벌고, 생활하다 보면 분명 에드워드에 대한 생각도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퇴근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우연찮게 신문의 1면을 본 후로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신문 기사가 과장이 심하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는 일을 내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집에 오면서는 물론, 도착해서도 한참을 안절부절못하며 걱정을 했다.
결국 참다못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둘러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웬일이야? 나한테 먼저 연락을 다 해 주고?
“……제라드. 촬영은 잘 되고 있어요?”
-뭐, 눈밭에서 신나게 구르고 있지. 참, 취업했다며? 축하해. 그런데 너무 이른 거 아니야? 쉬엄쉬엄 구해도 늦지 않을 건데.
“고마워요. 저도 그럴 마음으로 면접만 본 건데 갑자기 연락이 와서……. 솔직히 오메가 구하는 곳 잘 없잖아요.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아서요.”
-흠……. 나한테 말하면 얼마든지 구해줄 수 있는데.
“하하. 그건 최후의 보루였어요. 그보다 제라드. 저기 기사…… 봤어요?”
-기사? 아아. 에드워드? 제시카랑 난 거? 설마 그걸 믿어?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되묻는 바람에 당황했다. 하긴 형제라도 모를 수 있을 거다. 아니 형제라 더 모를지도 모른다.
“그것보다…… 오늘 난 기사요.”
-오늘도 기사가 났어? 여긴 캐나다라서……. 잠시만, 누가 오늘치 신문 있는 사람!
갑자기 큰소리에 잠시 핸드폰을 떨어뜨렸다가 다시 가져다 댔다. 이어 부스럭거리는 종이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곧 욕설이 들려왔다. 일을 한다고 미처 보지 못했나 보다.
-미친 영감. 별짓을 다 하네. 하아……. 이 아줌마가 진짜…….
“네? ……네?”
영감은 누구고 아줌마는 누굴까.
-일단 나도 알아봐야 될 것 같아서. 미안, 나중에 전화 줄게.
영문을 모르는 준영에게 제라드가 일방적으로 말을 하고는 끊는다. 문제는 제라드의 반응을 보자 더 걱정이 된다는 거였다.
사실인 걸까? 에드워드가 상무직에서 내려올 수도 있다는 이 기사가? 갑자기 왜? 무엇 때문에?
명색이 회장의 아들인데 도대체 얼마나 큰 잘못을 해 밑도 끝도 없어 사임이라는 말이 나오는 걸까.
걱정스러움에 한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에드워드에게 전화를 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작스러운 초인종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네! 잠시만요!”
서둘러 일 층으로 내려가 체인이 걸린 상태로 문을 열었다.
“아무리 체인이 있더라도 누군지 확인하고 열어야지.”
“에드워드?”
“날이 제법 추워. 들어가도 될까?”
“네? 아! 네. 들어오세요.”
밖에 눈이 왔나 보다. 부르르 몸까지 떨며 추위를 호소하는 에드워드의 모습에 황급히 문을 열어주었다. 에드워드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난로 쪽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는다.
“문 안 닫아?”
“네? 아, 네!”
“하하하! 군인같이 왜 그래.”
얼이 빠진 준영의 반응에 에드워드가 큰소리로 웃는다. 덕분에 준영은 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문을 닫고 잘 잠근 뒤 몸을 돌려 에드워드를 보았다. 그는 얼어붙은 손바닥에 호호 입김을 불며 추위를 녹이다, 준영의 시선에 다시 싱긋 웃었다.
“부탁이 있어.”
“네?”
“회사와 집에서 쫓겨났는데 잠시만 여기서 신세져도 될까?”
너무 달콤한 미소에 그의 말이 조금 늦게 이해했다. 멍하니 홀린 듯 네, 라고 대답했다가 뒤늦게 화들짝 놀랐다.
“네. ……네?”
“고마워.”
거절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에드워드는 바로 대답하는 영악함을 보이며 싱긋 웃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옷은 입는구나.
샤워를 마치고 나온 에드워드는 다행히 실내복을 입은 상태였다. 여전히 물은 뚝뚝 흘린 채지만.
“저기 머리에 물…….”
“응? 아, 미안.”
바닥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지적하자, 서둘러 목에 걸쳐놨던 수건으로 머리를 닦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어 번 터는 게 다였다. 결국 보다 못한 준영이 다가가 그를 데리고 가 화장대 앞에 앉혔다.
“드라이해 줄게요.”
“고마워.”
수건으로 대충 닦아준 뒤 드라이기를 꽂아 머리를 말려주었다. 그냥 물이 떨어지는 게 답답해 말려준 거지만 하다 보니 점점 빠져들었다.
일단 머릿결이 너무 고왔다. 그리고 정말로 황금빛이 이런 거구나 싶을 정도로 색이 예뻤다. 붉은 석양, 딱 그런 느낌이었다. 사실은 염색을 한 게 아닐까 하고 슬쩍 두피를 보았지만, 염색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진짜 내 머리 색인데.”
“그, 그러네요.”
거울을 통해 보고 있었나 보다. 창피함에 얼굴을 붉히자, 에드워드는 그런 준영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계속해 줘. ……손길이 기분 좋아.”
에드워드의 재촉에 준영은 다시 드라이기를 켜 그의 머리카락을 말려주었다. 사실 이미 다 말랐지만, 손에 감기는 감촉이 부드러워 조금 더 드라이기를 돌렸다.
“다 됐어요.”
“준영.”
손을 막 떼려고 할 때, 에드워드가 그의 손을 잡았다. 방금 눈을 뜬 건지, 아님 애초에 뜬 건지, 거울을 통해 똑바로 준영을 바라보는 에드워드의 눈빛이 너무 진중해 제대로 마주치기가 어렵다.
“내가 양치기 소년이라는 걸 잘 알아.”
“……왜 그런 말을 해요.”
“처음부터 내 감정을 제대로 인정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라 나 스스로가 감수해야 하는 것도 잘 알아.”
“…….”
왠지 무거운 말을 할 것 같아 손을 빼자, 에드워드는 이번엔 자리에서 일어나 준영의 양어깨를 잡은 뒤 똑바로 바라보았다.
푸른색 눈동자에 자신이 비쳤다. 이렇게 똑바로 마주하는 게 너무도 어렵다.
“믿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듣기만이라도 해 줘. 진심으로 난 준영 너와 결혼을 한 후부터 단 한 번도 제시카와 몸을 섞지 않았어.”
“네……?”
“네가 믿어 주지 않아도 돼. 그냥 들어만 줘. 난 제시카와 관계를 맺지 않았어.”
“……그 사진은 조작인 건가요?”
“아니. 조작이 아니야. 준영!”
본능적으로 몸을 흔들며 거부했다. 자신을 놀리는 건가 싶어 화가 났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그런 준영을 놔주지 않았다.
“놔요.”
“들어줘. 그 사진은 사실이야. 그날 제시카를 만난 건 맞아. ……우리 아이가 세상을 뜬 날.”
이 모든 게 연기인 걸까. 하지만 왜 저렇게 아픈 표정을 짓는 걸까. 아픈 건 자신인데. 에드워드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에드워드를 믿고 싶다는 욕심이 자꾸만 올라왔다.
저 표정을 믿고 싶다.
“그날 제시카가 마치 자살을 시도할 것처럼 굴었어. 그때만 해도 그녀에게 너무 미안한 감정이 많아서 찾아갔어. 하지만, 날 속인 거더군. ……차에 약을 탔어. 러트 유도제라고, 마약류였지.”
“네? 그런 건 불법이잖아요.”
히트는 물론 러트 유도제가 있다는 건 들었지만, 일종의 마약이라 법적으로 강력히 처벌하는 걸로 알고 있다.
알파도, 오메가도 발정에 돌입하면 이성을 잃는다는 점을 악용해 많은 범죄가 빈번히 이어지자, 정부에서 강력하게 처벌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알파가 정치 쪽과 고위 신분이 많아서일까, 유달리 법이 강했다.
“맞아. 제시카가 설마하니 그런 약을 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
말을 하다 말고 미간을 좁힌다. 그날의 일이 떠올랐나 보다.
배신감일까? 아니면 상실감일까.
“……결국 잔 건 맞잖아요.”
말을 하고도 스스로가 못나 입술을 깨물었다. 엄밀히 자신도 같은 짓을 한 게 아닌가. 비록 약을 쓴 건 아니지만, 에드워드를 발정시킨 건 분명 자신의 실수로 발생한 일이었다. 자신은 제시카를 욕할 자격이 없다.
“아니, 자지 않았어.”
“기억이 나요?”
“나지 않아.”
“……절 놀리는 거예요?”
자꾸만 자신을 흔드는 그가 밉다. 그리고 흔들리는 자신이 한심하다. 준영의 되물음에 에드워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알아. 알 수 있어. 분명, 발정은 했을 거야. 하지만 그날 아침의 감각을 난 분명히 기억해. 절대 제시카를 안지 않았어. ……난 지금까지 첫 러트 이후, 러트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어. 너도 알고 있지? 오메가와 달리 알파는 발정의 주기가 따로 없는걸. 난 그저 내가 컨트롤을 잘한다고만 여겼어. ……그런데 아니더군. 그저 그런 상대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었다. 딱 한 번. 준영 너와 관계를 맺을 때, 그날은 분명 발정을 했다. 달랐어. 널 안았을 때와 달랐어. 확신해. 난 제시카를 안지 않았어.”
허무맹랑한 말이다. 약에 취해 발정을 했다면서, 서로 헐벗고 뒹굴기까지 했다면서. 어떻게 관계를 맺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있단 말인가.
믿을 수 없는 말이다. 또 이 남자가 자신을 놀리는 거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웃긴 건 믿고 싶다는 거였다.
“널 안았을 때…… 처음으로 내 육체가 만족감을 느꼈다. 일반적인 섹스와는 달랐어. 러트를 할 때에는 전혀 달라. 만약 러트 상태에서 사정을 했다면 분명 내가 알았을 거야.”
“억지예요…….”
“알아.”
“그걸 어떻게…… 나보고 믿으란 거예요.”
“알아.”
“순 자기 마음대로야. ……한 번도. 단 한 번도 나한테 제대로 설명 한번 안 해놓고는 처음으로 하는 게…… 이런 거야? 왜 사람이 그렇게 이기적이에요?”
“……알아.”
엉터리다. 말도 안 된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그럼에도 믿고 마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 이게 황당해서인지, 믿어버리는 멍청한 자신이 싫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렇게 자신을 휘두르는 에드워드가 미워서인지 모르겠다.
“나는, 나는…… 아픈데. 정말로 아팠는데. 너무 아팠는데. 당신은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어. 아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걸 알면서도 믿지 못하고……. 끝까지 부정하고 견디고 있을 때. 당신은 다른 여자와 있었어.”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목이 멘다. 할 말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이 말을 했다고 울어버리는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
“천천히 모두 말해. 모두 들어줄 테니까.”
에드워드는 그런 준영을 품에 그러안았다. 미운데, 정말 미운데, 그럼에도 그의 품이 따뜻하다.
“사랑해.”
“……거짓말.”
“사랑해. ……사랑한다. 준영.”
“믿지 않을 거야. 안 믿어. ……내가 어떻게 믿어.”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헤집어 놓고, 그렇게 아프게 만들어 놓고 사랑한다는 말로 끝내버리려는 남자가 야속하다.
“믿지 않아도 돼. 하지만 계속해서 말할 거야. 사랑한다고.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사랑한 적 없어서 몰랐다. 그러니 이제라도 잘못을 고칠 거야. 계속해서 몇 번이고 말할 거야. 그러니 화내. 화내고 울어. 투정하고 요구해. 모두, 모두 들어줄 테니. 모두.”
“으흐흑……. 당신 진짜 싫어! 당신 진짜 밉다고!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밉다. 하지만 가장 미운 건, 이 순간의 에드워드의 온기에 안도하는 자신이었다.
그를 믿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신이었다.
자연스럽게 눈이 떠져,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어제 너무 일찍 잠든 탓인가 보다. 아직 새벽 4시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정신이 맑다. 더 자려고 애를 써보지만, 역시나 잠은 오지 않았다.
결국 잠을 포기하고 일어나 창가로 가 앉았다.
“눈…… 왔네.”
첫눈은 온 줄도 모르고 지나갔었다. 뒤늦게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를 듣고서야 눈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거기다 얼마 내리지 않아서일까, 금방 녹아 눈이 왔다는 느낌도 없었지만, 이번에 내리는 건 제법 흩뿌린다. 아마도 꽤 쌓일 것 같다.
그리고 보니 출근은 안 하겠구나.
다행히 눈으로 인해 고생은 안 하겠다 싶다.
어젯밤 준영은 에드워드의 품에서 한참을 울었다. 뭐 그리 쌓인 게 많다고 울고 또 울었다. 너무 울어 눈이 퉁퉁 부을 때까지 울어, 눈이 따가울 정도였다.
에드워드는 말없이 그런 준영을 한참 안아주었다. 그의 품이 따뜻했다. 그래서 더욱 그를 믿고 싶었다. 아니 어쩜 벌써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무서웠다.
혹시라도 이 믿음이 다시 무너져 내릴까.
그래서 바로 대답을 해 주지 못했다. 감히 정의 내리지도 못했던 감정을 입 밖으로 내뱉기에는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에드워드는 재촉하지 않았다.
‘너에게 그 단어를 평생 듣지 않아도 돼. 설령 애가 타고 갈증에 휩싸인다고 해도. 준영, 나는 괜찮아. 다만 하나만 부탁할게.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어. 부디 내 곁에만 있어 줘. 평생 나에게 화를 내고 투정을 부려도 돼. 나를 버리지만 말아줘.’
달콤하고 달콤해서, 이대로 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
그의 입에서 영원히 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결혼을 약속했을 때, 에드워드가 모든 걸 주겠지만, 사랑만큼은 주지 못한다고 했다. 그랬던 남자였다.
습관적으로 배를 매만졌다. 배 속에 아이가 있는 것 같은 착각보단 그저 이렇게 자신의 배를 만지면 불안함이 조금은 해소가 되어서였다.
“……아기야. 네가 주고 간 기회인 거니?”
만약 아이가 죽지 않았다면 그래도 에드워드가 이렇게 바뀌었을까.
하지만 그날 일을 기억한다. 에드워드가 준영에게 미소를 짓던 일. 사과를 따는 걸 도와주던 일. 데이트 신청을 하던 일. 달콤한 키스를 해 주던 일.
그래 그 모든 일이 아직 배 속에 아이가 있었을 때였다.
그건 분명 아이와는 상관없이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믿고 싶어.”
믿고 싶다. 에드워드 햄턴을 믿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