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벌써 3일째, 에드워드가 준영을 찾지 않았다. 오히려 요즘은 준영이 그를 더 찾는 중이다. 에드워드는 그 날 이후 집에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제시카를 만난다는 느낌보다, 피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에드워드는요?”
혹시 새벽에라도 들어온 건가 싶어 물어보지만 크리스도 뭔가 들은 것이 있는지 머뭇거리며 대답을 기피했다.
“아……. 어제 집으로는 오시지 않았습니다. 아마 바쁘시지 않을까요? 그보다 오늘은 조개 수프입니다. 소화가 잘 될 거라 속에 부담도 덜할 겁니다. 물론 요리사가 심혈을 다해…….”
“크리스. 에드워드는요?”
어제까지만 해도 알고도 모른척했지만 더는 그럴 수가 없었다. 시간을 끈다고 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마음을 먹었을 때 행하고 싶다. 결심이 흔들리기 전에.
“어제는 새벽에 잠깐 들렀다가 바로 가셨습니다.”
“내가 만나고 싶어 한다는 걸 전했나요? 아니 그전에 몇 시라도 상관없으니 깨워달라 부탁했었잖아요.”
“죄송합니다. 에드워드 씨는 정말 오자마자 옷만 갈아입고 바로 나가셨습니다.”
곤혹스러워하는 크리스를 보다 다시 질문했다. 엄밀히 남인데 괜히 가운데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게 미안했다. 에드워드가 작정했다면 분명 크리스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거란 걸 잘 알고 있다.
“……그럼 오늘은요?”
“아마도 오늘 늦으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회사로 갈게요.”
“네?”
“직접 만나러 간다고요.”
크리스가 당황하든 말든 준영은 침대에서 일어나 섰다. 어지러움이 살짝 느껴졌지만 견딜 정도는 되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그러니 이걸 드십시오.”
“지금은 입맛이…….”
“비틀거리는 주제에 회사까지 가겠다고요? 당장 정원도 혼자 제대로 못 걸으시면서?”
크리스의 일침에 준영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먹으세요. 이왕 싸울 거 먹고 제대로 힘내서 싸우십시오.”
싸운다고 한 적은 없는데……. 하지만 크리스의 말대로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약해진 건 맞다. 대화를 하든, 싸움을 하든 힘이 있어야 하는 거니깐.
준영은 결국 발걸음을 돌려 테이블로 가 의자에 앉았다. 크리스는 빠르게 세팅을 하였고 준영은 정말로 오래간만에 제대로 배가 부르도록 식사를 하였다.
회사는 퇴사 이후 처음이었다. 문제는 에드워드를 만난다는 목적에 사로잡혀 자신의 처지를 깜빡했다는 거였다.
차는 이미 정문 앞 대로변에 도착했지만, 준영은 차마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함께 따라온 크리스가 왜 그러냐는 질문에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예전에 이곳에서 청소부 일을 했어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너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해 오히려 준영이 당황했다. 그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다 제대로 다시 설명을 하였다.
“소문이 났을 거예요. 제가 퇴사 당한 것도 그것 때문이고요. 에드워드를 일부러 꼬셨다는 소문…….”
“흠, 소문은 사실이 아니지만, 그래도 준영의 얼굴을 알고 있는 자를 만나면 껄끄럽다 이건가요?”
어딘가 애매한 말에 당황했다. 하지만 설명을 하는 것도 웃겼다. 구구절절 따지고 들면 준영에게는 사고였지만, 엄밀히 말해 세간에서 떠드는 말처럼 억제제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사실 저라면 뭐가 어떠냐고 당당히 사랑하는 남편인 에드워드를 만나러 가겠지만 준영은 저와 달리 여리니까. 네, 알겠습니다.”
어떤 부분에서 정정을 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 거기다 크리스는 이미 준영의 얼굴은 보지 않고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있다. 준영은 당혹스러운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못 알아보게만 하면 되는 거지요?”
“네?”
씩 웃는 미소가 왠지 걸리지만, 틀린 말이 아니라 고개를 끄덕였다.
“뭘 그리 우물쭈물하십니까? 걱정 마십시오. 아무도 못 알아봅니다.”
우물쭈물 걷는 준영의 등을 크리스가 뭐 하냐며 툭 친다. 준영은 그제야 구부정한 허리를 폈다.
확실히 누구도 못 알아보겠지만 너무 튄다. 차분한 코트를 입었던 준영에게 화려한 붉은색 스카프는 물론 얼굴 반을 가리는 선글라스까지 껴야 했다. 말 그대로 얼굴을 죄다 가린 상태이기는 했다.
일단 로비만 지나면 된다 싶어 최대한 빠르게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다 우뚝 멈췄다.
이쯤 되면 악연이 아닐까. 아니 이미 악연이지만.
제시카가 힘없이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그녀는 준영을 알아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갔다.
“왜 그러고 서 있어요?”
의아해하는 크리스의 질문에 답하는 것도 잊은 채 정문으로 사라지는 제시카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크리스, 에드워드는 내가 오는 걸 아나요?”
“말하지 말라고 해서 알리지 않았습니다.”
“돌아가죠.”
“네? 여기까지 와놓고요?”
“오늘은 왠지 보고 싶지 않네요.”
웃기게도 이혼까지 결심한 주제에, 심지어 이미 제시카와 만나고 있는 걸 아는 주제에 실제로 보게 되자 가슴이 답답해진다는 거였다.
질투할 자격도 되지 않으면서.
“혹시 방금 전에 지나간 여성과 아는 사이인가요?”
“아니요.”
천천히 고개를 젓고는 몸을 돌렸다. 크리스가 답답함에 뭔가 말을 하고 싶어 했지만 끝까지 모른 척 걸음을 옮겼다.
에드워드를 다시 만난 건 이혼을 요구하고 난 뒤 일주일 만이었다.
다시 만난 그는 한눈에도 초췌해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의 얼굴에 이렇게 근심 걱정이 많을까.
궁금했지만 물을 자격이 되지 않기에 가만히 다가오는 에드워드를 바라보기만 했다.
“오랜만이네.”
언제나처럼 침대 언저리에 앉아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 안색이 좋지 않았다. 어두운 조명 아래에도 이 정도면 환한 낮에는 어떨까.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
“저기…….”
두 사람이 동시에 말을 하며 침묵이 깨졌다. 다시 입을 다문 둘은 서로의 눈치를 보았고 이번엔 에드워드가 더 빨랐다.
“급하지 않다면 내가 먼저 말해도 될까?”
급한 건 아니다. 다만 자신도 모르게 에드워드에게 안부를 물을뻔했었다. 준영이 고개를 젓자, 그는 짧게 숨을 들이켠 후 내뱉었다. 어떤 말을 하려고 저렇게 긴장을 하는 걸까.
드디어 결심이 선 걸까. 잘된 일인데 왜 심장이 저려오는 걸까.
“당신이 전에 했던 말. 역시나 난 받아들일 수 없어.”
“네?”
“이기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 난 널 놓아주지 않을 거야.”
“왜…….”
이유를 모르겠다.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 아직도 제시카를 만나면서 왜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걸까. 이제 아이도 가지지 못하는 몸인데 굳이 자신을 놓지 않는 이유가 뭘까.
회사에서 제시카와 마주친 후, 마음을 다잡았던 준영으로서는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네가 날 거부하는 건 당연하겠지. 그러니 네 마음이 안정되기까지 원하는 곳에서 지내도록 해.”
에드워드의 말은 끝났지만 준영은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굳이 왜 그렇게 번거롭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예전에 할머니와 살던 집. 기억해?”
“네?”
“원한다면 그곳에서 지내도 돼. 네가 자라온 곳일 테니 이곳보다 훨씬 안정이 되겠지.”
“하지만 거긴…….”
할머니의 손자가 팔아버리지 않았나?
“솔직히 그냥 돈 주고 사 오는 게 편하겠지만 누구 좋으라고 싶어서 소송을 걸었어.”
“소송요?”
“친손주에게서 네 할머니의 모든 재산을 가져오기 위해. 일단 집은 다시 되찾았지만, 그 외에 제법 많은 것들이 그 손주에게 갔어. 법을 잘 모르는 너와 네 할머니를 교묘하게 속여놨더군.”
“많은 것?”
“나라에서 나오는 양육 수당 같은 것들. 심지어 널 키우고 있어 내려오는 교육 수당도 모두 그 손자가 가로챘었어. 표정을 보아하니 역시 몰랐던 것 같군.”
“그런……. 할머니가 준 건 아니고요?”
“네 할머니가 그런 사람인 것 같아?”
오히려 에드워드가 되묻는 것에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가 자신 몰래 손주에게? 아니, 그런 짓을 할 거면 애초에 손주가 있는데 자신을 입양할 리가 없다. 무엇보다 할머니가 준영에게 줬던 애정은 진심이었다.
“조금만 조사해도 알 수 있어. 평생 허투루 살던 분이 아니라는 거. 그러니 되찾아야지. 네 권리.”
“그렇게 되면 그 손주는…….”
갑자기 소송에 걸리면 금전적으로 어려워지지 않을까. 할머니가 아무리 손주와 인연을 끊었다고 해도 그걸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걱정 마. 딱 그놈이 뱉어낼 수 있는 수준으로 피해 보상금을 청구할 거니까. 그나저나 말이 갑자기 옆으로 새버렸군. 그래서 그곳에서 잠시 지내겠어?”
갑자기 너무 많은 얘기가 이어져 혼란스럽다. 하지만 에드워드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욕구가 치솟아 올랐다.
“네. ……돌아갈래요.”
준영의 대답에 에드워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슬퍼 보인다. 자신이 말을 해놓고는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준영. 그곳은 잠시 쉬러 가는 곳이야. ……돌아올 곳은 이곳이야.”
이번에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이곳에는 내가 설 자리가 없는걸요.
굳이 묻지 않아도 아는 듯 보였다. 에드워드가 더 아파하는 걸 보고 싶지 않다. 아직은 그가 자신에게 너무 컸다.
언젠가 완전히 잊을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럼 이렇게 아픈 것도 나아질까.
에드워드가 제시카와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수많은 의문이 떠올랐지만 하나도 알 길이 없다.
짐은 단출했다. 온 날처럼 나가는 날도 가방 하나가 다였다. 에드워드는 그곳에 대부분 다 있으니 몸만 가면 된다고 설명해 주었다.
에드워드는 배웅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침실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는 건 알 수 있다.
말없이 그쪽을 바라보기를 잠시, 크리스의 부름에 몸을 돌렸다.
차에 올라타려다 들려온 소리에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막 정문 쪽으로 달려오는 한 대의 스포츠카가 보여서였다.
제라드였다.
그는 삐딱하게 차를 세우고는 곧장 차에서 내려섰다. 표정만 봐도 얼마나 화가 났는지 훤히 보였다.
“사실이야? 나간다는 게?”
에드워드가 말을 꺼내자마자 떠날 준비를 했다. 그도 이렇게 빨리 갈지 몰랐다는 듯 당황했지만 본인이 꺼낸 말이라 그런지 말리지는 않았다.
지금 준영은 어젯밤에 제안을 받자마자 바로 다음 날 이렇게 떠나는 거였다.
제라드가 화를 내는 게 이해는 갔다.
“살던 집으로요.”
“설마 멍청한 테드가 이혼하자고 한 건 아니지?”
“그러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지네요.”
“이혼을 바랄 리가 없잖아. 넌 내 소중한 가족이야.”
아주 조금, 아니 많이 기분이 좋았다.
“웃음이 나와 지금?”
“미안해요. 가족……이라. 그 말이 생각보다 기분이 좋네요.”
“…….”
“차 마시러 오세요. 요리를 썩 잘하는 건 아니지만, 언제든 먹으러 와요. 그리고 나중에 들려줘요.”
“뭘?”
“당신이 말했던 그 빚이란 거. ……궁금하네요.”
준영의 말에 제라드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별건 아니지만.”
“별거고 아니고는 듣는 사람이 판단하는 거예요.”
“그렇지. 참, 테드는?”
“아마 보고 있을……. 어, 제라드.”
갑자기 와락 끌어안는 바람에 제법 당황했다. 옆에 서 있던 크리스도 꽤 놀란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충격요법. 정신 좀 차리라는 뜻이지.”
도대체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더는 기사와 크리스를 기다리게 할 수 없어 차에 올라탔다. 차 문이 닫히기 전 한 번 더 창가 쪽을 보았다. 방금 전까지 없던 커튼이 쳐져 있었다.
“이제 가요.”
크리스까지 조수석에 타는 걸 보고는 기사에게 출발을 부탁했다. 제라드의 자주 연락하라는 외침에 손을 흔들어 답해 준 후 몸을 시트에 뉘었다.
피곤하다. 하지만 이제 편하게 쉴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 조금은 설레게 만들었다.
집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다만 아쉬운 건 중간에 다른 사람들이 살았던 만큼 예전 모습이 많이 사라졌다는 거다.
“포근한 느낌이네요. 전체적으로.”
이 층으로 올라갔던 크리스가 다시 내려오며 한 말에 미소로 답했다. 그런데 표정이 묘하다.
“왜요? 내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난로를 들여다봤는데 그때 재라도 묻은 건가 싶어 손등으로 닦으며 되물었다. 크리스는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확실히 집이 편한 거구나 해서요. 그런데 준영이 웃는 거 거의 처음 봅니다.”
“네? 제가 웃지 않았나요?”
유산을 하기 전에는 그래도 좀 웃었던 것 같은데…….
“웃었죠. 억지로. 아, 웃어야 되겠다, 란 뇌 명령을 근육들이 억지로 수행하는 느낌이었죠.”
“그게 뭐예요.”
황당한 말에 이번엔 허탈함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 크리스도 덩달아 한껏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준영의 앞에 섰다.
“한 번만 안아봐도 될까요?”
“……네.”
낮에 제라드도 그렇고 크리스도 그렇고 왜 갑자기 이러는 걸까. 아니 생각해 보면 이들은 늘 친절했었다. 다만 자신이 그걸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뿐.
크리스는 행여나 준영이 깨질까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덩치 차이가 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제 같다 싶어 남모르게 웃었다.
“이것만 기억해요. 의외로 준영의 편은 많아요. 그중 나도 있고요.”
가슴이 따뜻해지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는 마치 격려하듯 등을 두어 번 툭툭 치고는 떨어졌다.
“자, 그럼 정리 좀 해볼까요?”
“네.”
팔을 걷어붙이는 크리스를 따라 준영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혼자 있어도 괜찮냐고 몇 번이고 묻는 크리스를 거의 쫓아내다시피 내보냈었다. 차가 멀어지는 걸 보고서야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읽을 책과 데운 우유를 가지고 이 층으로 올라갔다.
침대 옆 협탁에 컵을 내려놓고 침대에 앉으려다, 핸드폰 액정이 깜빡거리는 탓에 무심코 들어 올려 확인을 했다.
에드워드였다.
[잘 들어갔어?]
이번에는 자신의 번호를 저장한 걸까. 아주 조금 얄밉지만, 이제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준영은 애써 감정을 삼킨 후 답장을 보내었다.
[네. 이제 조금 쉬다 자려고요.]
[힘들지 않아? 정리 같은 건 크리스를 시키지 그랬어.]
채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기도 전에 답이 와 당황했다. 핸드폰을 보고 있었나? 왠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바로 답장을 보내었다.
[거의 크리스가 했어요. 난 말로만 했고요.]
[잘했어. 힘들지는 않고? 혼자라 무섭거나 하지는 않아?]
왜 이러는 걸까. 또다시 쓸모없는 희망에 심장이 떨린다. 준영은 한참을 더 메시지를 바라보다, 침대에 앉아 조금 늦은 답을 주었다.
[11살 때부터 살던 곳이에요. 무서울 리가.]
역시나 자신의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읽음 표시로 바뀌었다.
[그럼 다행이지만.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사람을 보내 줄게.]
사람이라면 누굴 보내 준다는 걸까. 누굴 보내도 그리 편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나는 싫을 테니.]
“……응?”
연이어 날아온 메시지에 당황했다. 잠시 두 눈을 껌뻑이며 고심했다. 마치 메시지만 보면 에드워드는 준영이 그를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싫어할 리가 없지 않은가. 분명, 유산을 당한 순간에는 그가 미웠다. 곁에 있어 주지 않고 제시카와 함께 있었던 게 너무나도 미웠다.
하지만, 한걸음 뒤에 떨어져서 보니 그것조차 말도 안 되는 투정이란 걸 알았다.
자신은 질투할 자격도 되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스레 에드워드에 대한 미움도 사그라들었다.
오해를 남겨두고 싶지 않아 일단 답장을 보냈다.
[싫지 않아요. 전 에드워드를 싫어하지 않아요.]
답장은 바로 오지 않았다. 메시지는 읽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준영은 조금 더 기다리다, 이미 식었을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아직은 따뜻한 우유가 목구멍을 넘어가자, 신기하게도 졸음이 솔솔 몰려왔다.
양치도 해야 하는데……. 생각은 하면서도 베개에 얼굴을 묻자,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준영은 그렇게 몇 달 만에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내가 말이야.”
갑자기 울린 벨 소리가 마치 구세주 같았다. 준영을 몇 분째 세워놓고 수다를 떨던 아주머니가 그제야 그를 놓아주었다.
“어서 전화 받아. 나도 이제 빨래나 좀 널어야겠네.”
“네. 미트볼 고마워요.”?
“맛있게 먹음 돼. 많이 먹어. 살 좀 찌워야겠어!”
손을 흔들며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는 아주머니에게 고맙다 한 번 더 말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참 좋은 아주머니지만, 수다가 끝나지를 않는다. 오죽하면 수다떨기를 좋아했던 할머니도, 옆집 수잔 아주머니를 두고 먹은 에너지가 모두 말로 나갈 것 같다고 평할 정도였다.
“네네. 가요.”
서둘러 식탁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 쪽으로 뛰다시피 다가갔다. 거의 아슬아슬하게 끝나기 전에 간신히 전화를 받았다. 제라드였다.
-뭐야? 왜 이제 받아?
바로 받지 않았다고 툴툴거리는 제라드의 말투에 허탈하게 웃었다.
“아, 옆집 아주머니가 찾아와서……. 그보다 무슨 일이에요?”
-일? 일이 있어야 전화를 해? 그냥 한 거지.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준영이 이상하다는 듯이 군다. 당황했지만, 제라드의 말이 틀린 것도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네가 전화를 잘 안 하는 이유를 알겠네. 그냥 보고 싶거나, 뭐 하나 궁금하면 하는 거야. 알겠어? 친구란 그런 거야.
“……그런가요?”
친구란 건 그런 걸까. 그래서 에드워드도 쉴 틈 없이 문자가 오는 걸까?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삼 일째. 함께 살던 때보다 더 많이 안부를 묻고 있는 걸 깨달았다. 정말 하루에 온 메시지만 해도 수십 통이다.
-밥은? 좀 먹었어? 설마 굶고 다니는 거 아니지?
“아니요. 잘 먹고 있어요. 옆집 아주머니 덕분에.”
-옆집 사람이? 친했어?
“친한 것도 있는데 내가 어지간히 안돼 보였나 봐요. 요즘 들어 엄청 챙겨주세요.”
그래. 준영을 보자마자 왜 이리 말랐냐며 안쓰러워하시더니 매끼 먹을 걸 가져와 건네준다. 그리고 다 먹은 게 맞는지 확인까지 해서 당혹스러웠다.
원래도 정은 많은 사람이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저 자신이 그렇게 안쓰러워 보이는구나 싶었다.
-……지랄한다.
“네?”
-응? 아, 아니야. 혼잣말이야. 들렸나 보네. 절대 너보고 한 거 아니야. 좀, 멍청한 새끼가 생각나서.
왠지 그 멍청한 새끼라는 게 에드워드를 지칭하는 것 같은데. 그가 갑자기 왜 그런지를 몰라 모른 척 넘겼다.
-그래서 언제 초대해?
“네?”
-차든 밥이든 먹으러 오라며. 언제 되냐고. 나 다음 주부터는 연말 시즌이라 바빠. 캐나다에 가서 눈밭에 뒹굴어야 한다고.
“스키 타러 가요?”
-끙……. 겨울 촬영하러 가지. 겨울옷들. ……아, 그래. 그러면 되겠다. 일단 언제 초대할 건데?
집요하다. 준영은 TV 옆에 놔둔 탁상용 달력을 들여다보고는 대답했다.
“내일은 난방 고치러 사람이 오니까, 모레부터는 괜찮아요.”
-난방도 안 돼? 고장 났어? 춥지 않아?
“아아, 벽난로가 있어서 따뜻해요. 난방은 작년 이후에 손댄 적이 없어서 혹시나 하고 점검차 부르는 거예요.”
-그래. 그럼 됐고. 그리고 하나 더 말하는데…… 직업이고 뭐고 그건 나중 문제야. 지금은 쉬어. 무조건. 안 그럼 혼낼 거다. 알았지?
순간 뜨끔했다. 사실 내일 점검도 점검이지만 면접을 보러 가려고 했었다. 작은 사무실에 보조 경리를 구한다는 글을 봤었다. 오메가도 된다는 곳은 드무니 되든 안 되든 면접은 보고 싶었다.
“네. 걱정 마요.”
에드워드가 건네준 통장에는 상상도 못 한 액수가 찍혀있었다. 그게 한 달 생활비란다. 부담스러운 금액에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이걸 받지 않으면 절대로 보내 줄 수 없다는 엄포에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했다.
일 년 치 생활비도 아니고 한 달이 그 정도이니……. 매달 쌓이는 금액만 해도 엄청나다 싶다.
하지만 가급적 그 돈을 쓰지 않을 생각이다. 직업을 구하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꼭 돌려주고 싶다.
더는 에드워드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 더는 그의 애물단지가 되고 싶지 않았다.
-듣고 있어?
“네? 아, 미안해요. 뭐라고요?”
-나 참. 모레 저녁에 갈 테니까 그리 알라고. 아, 그리고 그날 홈 파티할 거야. 미리 음식 다 해놓지 마. 나도 먹을 거 가져갈 테니 딱 한 개만 해. 알았어?
홈 파티? 초대하라 해놓고는……. 하지만 그게 제라드가 준영을 걱정해서라는 걸 알아 그러겠다 대답했다. 잠시 싱거운 대화를 나누다, 제라드가 촬영에 들어가야 된다는 말에 통화를 끝냈다. 벌써 30분이 흘렀다.
아주머니가 준 미트볼로 스파게티나 만들어 먹자 싶어 별생각 없이 핸드폰 액정을 끄려다, 알림이 온 걸 깨닫고는 내용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표시였다.
잠시 가만히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처음 에드워드에게서 메시지가 왔을 때에도 이런 느낌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전화를 할 이유가 없을 건데 싶으면서도 방금 전 제라드가 한 말이 떠올랐다.
조금 용기를 내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역시나 신호음이 채 두어 번이 가기도 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준영은 에드워드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푹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인 건지 몰라 당황했다.
아, 아직도 그 날의 일이 머릿속에 남아있구나.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건 날, 기다리던 그의 목소리가 아닌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의 그 일이 생각보다 더 깊이 박혀있었나 보다.
-준영?
“네. 말하세요.”
-……전화가 간 건가? 아, 아니 한 번 누르고 바로 끊었는데……. 혹시 기록이 남은 거야?
그럼 그렇지. 실수로 한 거구나. 난 뭘 기대를 한 걸까. 쓰게 올라오는 웃음을 억지로 삼키며 덤덤히 대답했다.
“실수였다면 끊을게요.”
-아니야! 아, 소리 질러서 미안해. 나……. 그래, 하고 싶었어.
“……네?”
-너에게…… 하고 싶었어. 다만 네가 음……. 그러니까……. 하아…….
이런 에드워드를 본 적이 없다. 왜 이렇게 당황하고 어리바리하게 구는 걸까. 가만히 에드워드의 말을 기다리다 이번엔 준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에드워드. 점심은 먹었어요?”
-……아직. 넌?
“이제 먹으려고요. 옆집 아주머니가 미트볼을 만들어 줬어요.”
-그래? 그런데 소화가…….
“고기를 아주 잘게 다졌대요. 야채도. 그래서 소화가 잘 될 거라고 그랬어요.”
-그래. 잘됐네. 맛있겠는데?
“네. 아주머니 요리 솜씨는 정말 좋아요. 할머니도 종종 재료를 사서 의뢰를 할 정도로요.”
-준영은?
“네?”
-준영은 요리를 할 수 있어?
“음, 몇 가지 안 돼요. 거의 할머니가 다 했지만. 아, 감자 스튜. 그건 자신 있어요. 그리고 칠면조 통구이도. 뭐, 그건 오븐이 다하는 거지만. 하하. 그리고 한식은 몇 가지 해요. 불고기도 하고, 저 떡볶이란 것도 만들 줄 알아요. 할머니는 매워서 잘 못 드셨지만…….”
-……먹어보고 싶네.
순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먹으러 오라는 단순한 말이 목구멍에 걸렸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딱히 대답을 기다린 건 아닌지, 다른 말로 돌아갔다.
-잠은 잘 잤어?
“……네.”
그까짓게 뭐라고. 그냥 빈말이라도 먹어보라고 말해 주면 될 텐데. 그게 그렇게 걸렸다.
어릴 때는 밤이 무서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자던 친구가 갑자기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언제던가, 같은 방을 쓰던 친구 두 명의 침대가 비었던 적이 있었다.
늘 좁다고 생각했던 방이, 그날따라 유달리 넓어 보여 밤새도록 훌쩍였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 할머니의 집으로 오게 된 후 아마 가장 절정에 올랐던 것 같다. 늘 누군가와 같이 방을 쓰다,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되니 그렇게 무서웠다.
그때 할머니가 방으로 들어와 이불을 덮어쓴 채로 훌쩍이고 있던 날 안고 주방으로 내려가셨다.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주고 밤의 정령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밤은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고, 그러니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고.
아마 그 얘기를 들은 후부터 밤이 무섭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도 무섭지는 않다. 다만…….
벌써 다 마신 우유를 물끄러미 보다 그냥 창틀 위에 올려놓고는 먼발치를 바라보았다. 가난한 동네인 이곳은 9시만 되면 대부분 불이 꺼진다. 대신 덕분에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야경은 멋졌다.
허드슨 강 하나 너머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 늘 신기했었다. 나중에 꼭 그곳으로 가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보니 꿈을 이루긴 했구나. 아닌가? 햄턴 가의 본가는 맨해튼이 아닌 뉴욕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 지대에 있으니 완전히 이룬 건 아니구나.
이런저런 쓸데없는 상념에 빠져있다 보니 벌써 12시가 다가온다. 그럼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너무 피곤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오늘 낮, 면접을 보고 오는 길에 장을 봤다. 무거운 것을 들고 한참 걸었더니 팔도 꽤 아프다.
면접은 아마 잘되지 않을 것 같다. 오메가는 괜찮다는 문구는 회사 이미지 때문에 적어놓은 건가 보다. 오메가라는 말에 인상부터 찡그린 걸 보면 말이다.
괜찮다. 이 정도로는 이제 기죽지 않을 거다. 찾다 보면 괜찮은 곳을 꼭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슬슬 자야 하는데 싶어 창틀에서 내려와 욕실로 들어섰다.
그러다 작은 문자 소리에 서둘러 돌아와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오늘 하루 에드워드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애초에 어젯밤에 많이 바빠질 거라고 말은 들었다만, 그래도 이렇게 연락이 없을 줄은 몰랐다.
아예 오지 않았을 때에 비하면 이런 투정도 우습지만.
[자?]
역시나 에드워드였다. 바쁘다고 하더니 이제야 쉴 틈이 생긴 걸까. 그게 아니면 그녀와 막 헤어진 걸까.
“하아……. 나 정말 뭐 하는 건지.”
매 순간 의심이 든다. 그저 자연스럽게 에드워드의 옆에는 제시카가 있을 거라는 의심이 들었다.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는다.
에드워드와의 대화는 즐겁다.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뒤이어 따라오는 생각은 그를 더욱 아프게 했다.
메시지를 찾아 들어가 읽은 게 아니라, 아마도 읽음 표시는 사라지지 않았을 거다. 그러니 이대로 무시해도 잔다고만 생각할 거다.
준영은 핸드폰을 한참 만지작거리다 협탁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더는 아프고 싶지 않았다.
자기 전에 우유를 너무 많이 마셨나 보다. 준영은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볼일을 보고 다시 침대로 향하다, 자신이 커튼을 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창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분명하다. 준영은 서둘러 일 층으로 내려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잘못 본 건가?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가만히 서서 주변을 한참 둘러보다 발길을 돌렸다. 역시 그럴 리가 없지.
허탈하게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몸이 제법 춥다. 으슬으슬하다 싶어 서둘러 벽난로 쪽으로 가다 문득 생각이 나 다시 이 층으로 올라갔다. 일부러 이 층의 불을 켜지 않고 핸드폰을 찾아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살짝 연 창문 너머 벨 소리가 은은히 퍼져 흘렀다.
위치상 건너편 가로수 뒤쪽 같았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준영은 일부러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드디어 연결음이 끊겼다.
-……안 자고 뭐 해.
“내가 할 말이에요.”
고요한 밤이라 작은 목소리도 여실히 들렸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들어와요.”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어.
“들어와요.”
더는 듣지 않겠다는 듯 일방적으로 끊고는 창문을 닫은 뒤 커튼을 쳤다. 일 층으로 서둘러 내려가 문을 열자, 얌전히 문 앞에 서 있는 에드워드가 보였다.
“어서 와요.”
조금 무안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에드워드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안으로 들어선 에드워드는 찬찬히 집 안을 살폈다. 앉으란 말에 조심스럽게 소파로 가 앉는다. 왠지 다소곳해 보이기까지 한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보니 두 번째구나. 이 남자가 이 집에 들어온 건.
처음 왔을 때에는 참 모진 말을 하고 떠났다. 당연한 말이고, 예상했던 말이지만, 그래도 참 아팠다.
“그때도 생각했지만…….”
“네?”
“집이 따뜻해 보여.”
“……아마 좁아서 그럴 거예요.”
“뭐?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집 구석구석에 애정이 서려 있는 게 보여.”
예상치 못한 말에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때와는 전혀 상반되는 말이었다. 이 남자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바뀌었을까 싶다.
한 번의 사고로 자신은 물론 그에게도 큰 변화를 주지 않았을까.
……나는 아니겠구나.
자신은 변한 게 그다지 없다. 늘 제자리걸음. 한심함에 절로 웃음이 올라온다.
“자는데 내가 방해를 한 게 아닌가 싶네.”
“아니요. 자다가 깬 참이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몇 신인데…….”
준영의 질문에 에드워드는 테이블 위 사진에 시선을 두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사진이 마음에 든 건지 아주 액자까지 든 채로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갑자기 일이 터졌다고 해야 하나. 크게 문제는 없는 일이지만, 시간이 이래저래 소요되는 일이라.”
“피곤할 텐데…… 바로 집으로 가지 그랬어요.”
눈 밑의 다크서클이 멀리서 봐도 보일 정도다. 준영의 대답에 에드워드가 왠지 허무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야지. 네 얼굴 봤으니깐 됐어. 이만 가볼게.”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일어서는 에드워드의 태도가 의아했다. 웃고는 있는데 왜 아파 보이는 걸까. 심지어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표정이다 싶었더니 자신이 종종 짓던 미소였다.
왜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짓는 건데?
소파에서 일어나 준영 앞에 선 에드워드는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머뭇거렸지만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한 채 발길을 돌렸다.
준영은 힐끔 거실 한편의 시계를 보았다. 벌써 새벽 4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지금 집으로, 아니 호텔로 간다 해도 그의 평균적인 출근 시간을 생각하면 3시간도 못 잘 것이다.
“에드워드.”
“……응?”
막 문손잡이를 잡는 그를 다급히 불렀다. 가까이에서 본 에드워드는 확실히 피곤해 보였다.
“자고 가요.”
“…….”
“불편하지만 않다면.”
“그래도 될까?”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 미소를 짓는 에드워드를 보자, 다시금 심장이 아련하게 뛰기 시작했다.
왜 이 남자는 이렇게까지 날 흔드는 걸까.
그리고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이 작은 반응에도 기뻐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다만 침대가 오래돼서…….”
“소파도 괜찮아.”
“다리가 종아리 하나가 나올 정도로 작은데요?”
“……앉아서도 잘 자.”
웃기려고 한 말일까. 실제로 상상했다가 웃음이 튀어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할머니 방에 침대가 아직 있어요. ……이번에 혹시나 하고 매트릭스하고 다 바꿔서 깨끗해요. 다만 가구 자체는 오래돼서 끼익거리는 소리는 나겠지만.”
“괜찮아. 생각보다 아무 데서나 잘 자.”
“그럼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옷 입을 만한 게…….”
“어차피 속옷만 입고 자니까 걱정 마.”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워드는 마치 행여나 준영이 마음이라도 바뀔까 봐 걱정하는 사람처럼 벌써 이 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저 남자가 저런 느낌이었던가. 조금 의아했지만,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그래, 남이라도 이런 시간에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딱히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 준영은 스스로에게 변명하듯 생각을 정리하고는 에드워드의 뒤를 따라 이 층으로 향했다.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파고들었다. 이게 온기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뒤이어, 이 온기의 주인이 누군지를 깨달았다.
화들짝 놀라 떨어졌다가, 더 당황했다.
일인용의 좁은 침대다. 뒤로 확 물러섰으니 떨어지는 게 당연한 거다. 하지만, 언제 깬 건지 에드워드가 떨어질 뻔한 준영을 잡아당겨 품에 안는 바람에 꼴사나운 참사는 피했다.
“위험하잖아.”
“고, 고마워요.”
괜찮냐며 이리저리 살피는 에드워드를 멍하니 바라보다 시선을 깔았다.
그래, 어젯밤. 할머니 방에 에드워드를 안내하려 했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건지 문이 열리지 않아 크게 당황했다. 여유분 열쇠를 찾아봤지만, 어디 둔 건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신경 쓰지 말라며 소파에서 잔다고 했지만, 저 큰 덩치로 이인용 소파에 누워 잔다고 생각하니 자신이 더 불편한 느낌이었다. 결국 준영은 같이 잘 것을 권했다.
그때의 에드워드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분명 얼굴을 붉혔지…….
힐끔 고개를 들어 에드워드를 보았다.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어젯밤의 부끄러워하던 이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나 때문에 불편하지 않았어?”
“아니요. 잘 잤어요. 에드워드는요? 많이 좁았을 텐데?”
“나도. 몇 달 만에 푹 잤어.”
거짓은 아닌 것 같다. 그렇게 짙던 눈가의 다크서클이 꽤 옅어졌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의 얼굴을 보는 건 거의 처음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생각하자, 자신이 거의 헐벗은 상태의 에드워드의 품에 안겨있다는 걸 그제야 알아챘다. 다시 당황하며 물러서려 했지만, 에드워드가 워낙 강하게 안고 있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저기 에드워드?”
“잠시만. ……잠시만 이러고 있자.”
출근해야 하지 않나? 벌써 7시가 훌쩍 넘었는데. 아무리 회사에서 이곳이 가깝다 할지라도 뉴욕의 러시아워를 피하려면 지금이라도 일어서야 할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준영도 복잡한 생각을 치워버렸다.
부끄러움에 딱딱하게 굳었던 몸도 어느샌가 편안하게 풀렸다. 준영은 자연스럽게 에드워드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그의 체취에 취한 듯 눈을 감고 가만히 이 순간을 느꼈다.
복잡한 건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 ♟ *
스크램블과 간단한 샐러드. 그리고 토스트와 베이컨 한쪽. 마지막으로 막 추출된 캡슐 커피.
세팅이 끝났을 때 계단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팩하고 돌렸지만.
왜 저 남자는 헐벗고 다니는 걸까.
에드워드는 무려 허리에 수건만 걸친 채였다. 설마 노출증 환자인 걸까.
“일부러 차린 거야? 커피 한 잔이면 되는데.”
준영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지 에드워드는 식탁 위 음식을 보고는 당황하며 다가왔다.
“말을 하지 그랬어. 도와주기라도 했을 텐데…….”
“간단한 거예요. 그다지 손도 많이 안 가고.”
마치 누가 보면 추수감사절 음식이라도 한 줄 알겠다. 오버하는 모습이 당혹스럽기는 해도 분명 기분은 좋았다.
“잘 먹을게. ……준영은?”
“그……, 먹을 거예요.”
그다지 입맛이 없지만 왠지 먹지 않겠다고 말하면 에드워드도 손을 놓을 것 같은 느낌에 군말 없이 맞은편에 앉았다.
그나저나.
“안 추워요?”
“더운데?”
“…….”
또 모르는 거 하나를 알게 되었다. 에드워드는 빙 둘러 말하는 걸 알아듣지 못한다.
그냥 대놓고 남사스러우니 옷을 입으라고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와 자리에서 일어섰다.
“먹고 있어요.”
이런 이른 시간에 누굴까. 수잔 아주머니인가? 그녀라면 또 뭔가를 가지고 왔을 수도 있겠다 싶어 서둘러 문을 열었다가 크게 당황했다.
“크리스?”
“말해두지만 아무리 체인이 있어도 누군지부터 확인해야 해요.”
어릴 때부터 할머니에게 꽤나 자주 듣던 잔소리를 하며 크리스가 안으로 들어섰다.
“네? ……네. 그런데 어쩐 일로…….”
“오늘 이곳에서 홈 파티를 한다고 들었는데요? 제라드가 미리 가서 도와……. 저 말고도 손님이 있는 줄 몰랐군요.”
어느새 등 뒤로 와 선 에드워드가 이게 무슨 뜻이냐는 듯한 눈빛으로 준영을 내려다보았다. 준영은 크리스가 호기심 강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당황하며 상황을 설명하려 했지만 그의 말이 더 빨랐다.
“호오, 호. 그렇군요. 부부 내외가 사이가 좋은 건 부끄러워할 게 아니죠.”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허리에 수건만 두르고 머리카락은 아직 젖은 상태인 에드워드를 보자 어떤 변명을 하든 통하지 않을 거란 건 알 수 있었다.
“일단 들어와요.”
준영은 행여나 누가 볼세라 문부터 닫았다.
“진짜 아무 일도 없었다고요?”
벌써 몇 번째인지. 감자 몇 개를 깎는 동안 몇 번이고 되묻는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흠, 젊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커플이 한 방에서, 그것도 한 침대에서 있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고요?”
“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일부러 그만하라는 뜻으로 한 음절 한 음절 힘주어 말하자, 그제야 입을 다문다. 그런데 감자를 깎다 말고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돌아오는 대답은 더 가관이다.
“이제까지 준영의 건강만 신경 썼는데 이제 보니 에드워드 씨의 건강도 잘 챙겨야겠군요. 설마하니 발기가 안 될 줄이야.”
“크리스. 재미없어요.”
준영의 진지한 대답에 크리스는 그제야 헛소리를 멈추고 감자를 깎는 데 집중했다.
“그래서 에드워드 씨는 저녁에 오신답니까?”
“그게……, 아마도요.”
“아마도? 바쁘답니까?”
“그렇다기보다, 왠지…….”
“왠지?”
“아니에요. 감자나 깎으세요.”
멍하니 중얼거리다, 자기도 모르게 말을 내뱉을 뻔했다. 준영은 크리스에게 다시 엄격하게 말했고 그는 그제야 감자를 깎는 데 집중했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아까 정말로 그래 보였지?
자기가 잘못 본 거라 하기에는 너무 노골적이었다. 그래, 에드워드는 삐졌다. 그것도 제대로.
“파티?”
“네, 홈 파티예요. 그냥 간단하게 저녁만 먹는. 그런 거창한 게 아니에요.”
“흠…….”
“그, 처음에는 제라드만 오기로 한 건데…….”
“남편인 나도 아직 오지 못한 곳에 제라드를?”
“네? 아니, 그러니깐 제라드가 먼저 연락이…….”
묵묵히 옷을 입는데, 뒷모습에서 이상한 오로라가 자꾸 흘러나왔다. 마치 나 삐졌소, 같은 느낌에 당황했다. 설마하니 애처럼 이런 일로 삐질까 했지만, 옷을 다 입은 에드워드를 보니 잘못 본 건 아니었다.
그의 표정은 너무 노골적이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즐거운 시간 보내.”
……엄청 신경 쓰이는데요. 준영은 어떤 대답을 해 줘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고, 그런 준영을 말없이 보던 에드워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싱긋 웃었지만, 하나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딱 봐도 억지로 웃는 게 보였다. 어제오늘, 전혀 몰랐던 모습을 갑자기 보게 돼서 매우 당혹스러웠다.
“그……, 저녁에 오실래요?”
방을 나서는 에드워드를 불렀지만,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미적미적거리는데, 또 문은 열지 않았다. 왠지 옆집의 열 살 어린 동생과 오버랩되는 순간이었다.
“꼭 오세요. 기다릴게요.”
“……바쁘지 않으면.”
그제야 슬쩍 문을 열고는 방을 나섰다. 크리스의 왜 이렇게 늦게 가냐는 타박에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팍팍 내고는 그렇게 심하게 늦은 출근을 하였다.
아침의 일이 떠올라 잠시 손을 놓고 있다, 아차 하고 다시 야채를 다듬었다. 그런데 묘한 시선이 느껴진다 싶어 고개를 들었다.
“왜, 왜요?”
크리스가 어느새 다 깎은 감자를 옆으로 밀어낸 채 대놓고 준영을 쳐다보고 있어 당황했다.
“아니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히죽히죽 웃나 하고요.”
“네? 히죽히죽?”
자신이 정말로 그렇게 웃었던 걸까. 당황하며 양 손바닥으로 볼을 감쌌다. 딱히 웃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싶어 볼을 만지작거리다, 크리스의 묘한 표정에 미간을 찌푸렸다.
“나 놀린 거죠.”
“아니요. 진짜 웃었어요. 이렇게.”
이번엔 손가락으로 입가를 눌러 쭉 들어 올렸다. 마치 스마일 표정처럼. 크리스의 표정을 보니 농담 같지는 않았다. 그는 장난스럽게 굴었지만, 생각해 보면 항상 진실만을 말했다.
“보기 좋네요.”
“……그런가요.”
“사실 준영을 내보낸다 했을 때는 동의했어요. 하지만 난 어디 멀리 휴양을 보낸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보내서 조금 놀랐죠. 하지만 에드워드 씨의 생각이 맞았어요. 불안하고 슬프고 힘들수록 가장 따뜻했던 곳을 찾는다는 게.”
“에드워드가…… 그렇게 말했나요?”
“네. 준영. 당신이 에드워드 씨를 믿지 못하는 건 이해해요. 나도 제라드에게 당신들의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 솔직히 화가 좀 났죠. 애 하나 데려다 놓고 뭐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애.”
“아하하. 준영이 내 동생과 나이가 비슷해 보여서 나도 모르게 자꾸 그렇게 생각하나 봅니다.”
“나이가 비슷해 보이다니요? 동갑인가요?”
별생각 없이 조금 어감이 이상한 부분을 지적했을 뿐이다. 그런데 대답은 안 하고 이미 다 깎은 감자나 툭툭 건드린다. 준영은 가만히 그런 크리스를 바라보다 다시 물었다.
“동생이 몇 살인데요?”
“……화 안 내실 거죠?”
“아마도?”
아주 작게 중얼거렸는데 크리스는 긍정으로 받아들였나 보다.
“아하하. 내년이면 13살이 되죠.”
“…….”
“솔직히 동양인들은 너무 어려 보이는 데다, 그녀석이 유달리 발육이 좋아서……. 알파거든요. 하하하.”
준영은 말없이 몸을 돌려 주방 뒤편의 다용도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상자 하나를 들어 다시 돌아왔다. 제법 무거워 끙끙거리자, 크리스가 빠르게 다가와 준영을 도왔다.
“양파는 갑자기 왜요? 그나저나 양파를 참 많이도 샀네요? 보통 가정집에서 이만큼 먹나?”
“양파가 건강에 좋대요.”
“네?”
“싱싱해서 쟁여놓고 먹으려고 했는데 크리스가 온 김에 작업 좀 해야겠어요.”
“네?”
“까 주실 거죠?”
“설마 이걸 다요?”
빈말로도 적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양이기는 하다. 한 포대이니깐.
“네. 까서 키친타월에 잘 싸서 냉장고에 넣어놓으면 꽤 오래가요. ……까 주실 거죠?”
“……네.”
마지못해 대답하는 걸 모른 척한 준영은 남은 야채를 마저 다듬기 위해 식탁으로 향했다.
“풋, 아하하하하!”
그런데 갑자기 큰소리로 웃는 크리스의 모습에 크게 당황했다. ……그렇게 싫은가? 까기도 전에 실성을 한 걸까?
“저기…….”
“하하하하……. 정말이지. 내가 크게 잘못 생각했네요.”
“네?”
“준영에 대해서. 물론 나뿐만이 아니라……, 아 그래. 어쩜 제라드가 가장 정확하게 준영을 본 것 같네요.”
도대체 무슨 말일까.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줄줄 하던 크리스가 상자를 식탁 옆으로 가져와 놓고는 팔을 거둬 붙였다.
“그럼 힘 좀 써볼까요?”
“……수고해요.”
물론 다 까라고 할 생각은 없다. 다 까 본들 보관도 골치다. 애초에 많이 산 건 야채 가게 아저씨가 농장에서 막 가져온 양파가 싱싱해 보여서 옆집 사람들에게도 나눠줄 생각으로 그렇게 산 것뿐이었다.
그런 걸 알지 못하는 크리스는 정말로 양파를 모두 다 까겠다는 일념에 불타올랐고, 준영은 다시금 키득거리며 웃었다.
“윽! 매워! 뭐야? 무슨 냄새야?”
조금 일찍 도착한 제라드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손으로 코를 틀어막는다.
“아직 나요? 환기하긴 했는데.”
크리스는 정말로 모든 양파를 다 까버렸다. 준영이 이것저것 정신없이 집안일을 하는 사이에 말이다. 덕분에 집 안 가득 양파 냄새가 퍼졌다.
“준영이한테서는 달콤한 꽃 냄새가 나서 좋았는데……. 그걸 기대하고 왔건만.”
“응? 꽃 냄새?”
“향수 뿌려요?”
제라드의 투정에 크리스와 준영이 동시에 되물었다. 제라드는 코트를 옷걸이에 걸며 오히려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뭔가 생각난 듯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그렇군. 크리스 넌 베타였지. 깜빡했네.”
“이봐.”
“하긴, 나도 크리스는 자꾸 알파 같다고 생각했어요.”
“하하. 그랬어요?”
제라드의 말에 이를 드러내다 준영의 말에 활짝 웃는다. 그런 크리스의 모습에 제라드가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데 꽃 냄새는 뭔데? 아……. 그리고 보니 오메가들은 특유의 향기가 난다고 했나?”
“응. 준영은 달콤한 꽃 냄새가 나. 달짝지근한 냄새 말고, 말 그대로 상큼 달큼하다고 해야 하나?”
“내가요?”
제라드의 설명에 팔을 들어 올려 이리저리 킁킁거려 보지만 양파 냄새만 날 뿐이다. 옷에도 배었나 보다.
“자기 냄새 자기가 못 맡지 않아?”
“그런가. 누가 저보고 냄새가 난다고 한 적 없어서요.”
“그래? 에드워드는 멀리서도 네가 지나가면 바로 알던데?”
“…….”
“진짜야. 회사에서도 갑자기 킁킁거리면서 두리번거리면 딱 네가 있더라고. 아! 그건가? 운명의 짝?”
말을 하다 말고 생각났다는 듯 제라드가 흥분하자, 크리스도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준영의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만 해요. 그런 건 없어요.”
운명? 만약 그런 거라면 에드워드가 제시카를 두고 자신에게 흔들렸던 이유가 설명되어버린다. 그런 거라면 자신에게 빠졌다기보다, 운명이라는 단어에 휘둘렸던 것뿐이게 된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애초에 임신 때문에 그렇게 된 것뿐인데. 어차피 똑같은 건데. 생각해 보니 어이가 없다. 무엇보다 에드워드가 자신에게 빠졌다는 게 성립되지 않으니.
“제라드는 그래서 뭘 가져왔어요?”
“응?”
“홈 파티라고 했으니 뭔가 가져왔겠죠?”
“아, 그게……. 이거?”
제라드는 그제야 들어올 때 가져왔던 작은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술이네요.”
“귀한 거지.”
“제라드도 양파 깔래요?”
“응?”
준영의 물음에 크리스만이 배를 잡고 웃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