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차라리 지금까지도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면 아버지가 덜 원망스러웠을까.
운명이란 이름으로 버젓이 있는 부인을 무시하고 아버지를 만나러 온 여성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예쁘긴 했다.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도 그 여성을 보자마자 그렇게 생각했다. 어머니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도 있구나 하고.
에드워드와 고작 17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던 여성은 올해 23살이 된 오메가였다.
그리고 그해 겨울 딸을 낳았다.
달콤한 향기에 이끌리듯 걸음을 옮겼다. 회사 뒤쪽 작은 정원에서 풍겨오는 향은 바람을 타고 솔솔 날아 들어와 에드워드를 유혹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눈앞에 그 청소부가 보였다.
이름은 알고 있다. 이준영.
나이도 알고 있다. 21살이란 어린 나이지만 오메가라 직업을 제대로 구하지 못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싹싹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성실하고 착하다는 평이 있었다.
그런데 어째 모양새가 이상하다. 늘 무던한 그답지 않게 오늘따라 표정에 좋지 않았다. 그리고 곧 그 이유를 알았다.
“감히 오메가 주제에 내 말에 대들어?”
나무에 가려져 한 명이 더 있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꽤 멀찌감치 떨어진 자신에게까지 선명하게 들릴 정도였다. 내용을 들어보니 금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는 걸 지적했나 보다.
하지만 돌아온 건 폭언이었다. 알파인 자신이 듣고 있어도 불쾌해질 만큼 더러운 말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보다 가만히 듣고 있는 그의 태도가 에드워드를 더 불쾌하게 만들었다.
왜 바보같이 가만히 당하고만 있는 거지?
그 옛날 어머니는 오메가란 이유로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해도 처연히 웃으셨다.
어린 나이에도 그것이 그렇게 못마땅했다.
왜? 오메가라는 게 그렇게 잘못인 걸까.
태어나면서 정해진 건 1차나 2차나 똑같건만. 왜 인간들은 그 성별을 구분 지어 하대하고 비난하고 얕잡아 보는 건지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앞으로 처신 잘 해! 내가 지켜볼 테니까!”
남자는 쉬는 시간이 다 되어 멈춘 게 뻔히 보였다. 만약 시간이 넉넉했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저 약한 오메가를 상대로 스트레스를 풀어댔을 것이다.
발길을 돌려 회사로 걸어가던 남자가 뒤늦게 에드워드와 마주쳤다. 붉게 달아올랐던 추한 얼굴이 순식간에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하게 돌아갔다.
“상무님 아니십니까. 이곳에는 어쩐 일로…….”
남자가 인사를 건네 오든 말든 에드워드는 먼발치의 준영을 바라보았다.
조금 힘든 걸까. 그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언제나처럼 덤덤한 표정으로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상무님?”
“내가 당신을 알았던가?”
에드워드의 말에 남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바뀌었다. 같은 붉은색이지만 청소부를 대할 때와는 달랐다. 감히 화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부끄러워하는 남자를 보자 한심하기 짝이 없다.
“부서가?”
“네? 아, 저……, 영업 1과 팀장…….”
대답이 남았지만 에드워드는 끝까지 듣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영업 1과 부장과 오랜만에 면담을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겸사겸사 잘 되었다. 영업 1과는 최근 들어 실적이 저조했다. 팀장이란 자가 담배를 피우며 정원에서 시시덕거리며 시간 따위를 보내니 실적이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눈코 뜰 새 없을 정도로 바쁜 부서로 좌천당한다면 아마도 당분간은 담배를 피우러 갈 시간도, 청소부에게 시간을 쏟을 여유도 없을 것이다.
제시카를 사랑한다. 사랑했다. 사랑하는 걸까.
감정의 변화가 서서히 일어났다.
처음에는 사랑이라 확신했다. 레베카가 일부러 우연을 가장해 제시카와 마주치게 했다는 걸 알았어도 그녀에게 끌렸다.
처음에는 어머니와 분위기가 너무 닮아 눈길이 갔다.
만남이 이어질수록 자신의 이상형에 가깝다는 것도 알았다. 단 하나, 레베카가 무슨 의도로 제시카를 소개해 준 건지를 몰라 결혼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한계인 것 같다. 지금까지는 결혼 문제로 눈치 한 번 준 적 없던 제시카가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
“귀여운 청소부네요.”
방금 전 로비를 지나올 때 자신이 준영을 봤던 건가 했다. 하지만, 일부러 의식하고 보지 않았었던 걸 떠올렸다.
제시카는 일부러 말을 꺼낸 거였다.
“그런가.”
“당신의 취향이 저런 타입인지 몰랐어요. 완벽한 타입을 추구하는 줄 알았는데 말이죠.”
제시카가 힘없이 웃었다. 에드워드는 아무런 대답도 돌려줄 수가 없었다. 대기 중이던 차에 올라타자마자 제시카가 에드워드를 밀어뜨리듯 달라붙었다.
뭐라 할 틈 없이 키스를 퍼붓는다. 키스를 하고서야 알았다. 제시카의 히트 사이클이 곧이란 걸. 예전에는 이 향이 달콤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한 향을 맡고 나면 후각이 둔해지듯, 제시카가 뿜는 향은 키스를 하고서야 눈치를 챌 만큼 약했다.
“아마 오늘 내일…… 할 듯해요.”
“그런가.”
“억제제. 먹지 않고 기다릴게요.”
에드워드는 아이를 원했고, 제시카는 그걸 잘 안다.
아이를 사랑해서라기보다, 아이가 있어야 레베카가 그 어떤 짓을 해도 이겨낼 수 있는 무기가 되기 때문이었다.
제라드가 아무리 레베카를 싫어한다고 할지라도, 어미다. 제라드가 마음을 달리 먹는다면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놓은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뺏길지도 모른다.
늙은 아비는 이미 제대로 된 판단력을 상실했다.
운명을 만나, 부인을 버렸다.
운명인 줄 알았지만, 그 운명에 버림을 받았다.
그리고 모든 걸 내려놓은 그자 앞에 한 여성이 나타났다. 순식간에 햄턴 가를 장악한 그녀는 사사건건 에드워드를 후계자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레베카가 내 건 마지막 수단은 제시카였다. 두 사람이 어떤 모종의 거래를 한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우성 오메가는 귀하고,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수도 있었다.
때마침 제시카는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이상형이었다. 충분히 사랑을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잠시 상념에 빠지자 그조차 눈치채고는 손을 뻗어 에드워드의 뺨을 감쌌다.
“올 거죠?”
“……물론이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제시카에게 그럴 표정 짓지 말라며 다독였다. 흔들리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제시카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 난 절대 아버지 같은 전철을 밟지 않을 거다. 그렇게 혐오하던 아버지를 닮지 않을 것이다.
하필이면 가장 중요한 것을 두고 와버렸다. 이번 기회에 벼르고 벼르던 청혼을 할 생각이었다. 반지는 애초에 주문해놨었다. 레베카가 걸려 미루었을 뿐이었다.
물론 제시카는 레베카의 사람이다. 하지만 절대 에드워드에게 해가 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게 되면 분명 바뀔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시카는 분명 자신을 사랑한다. 그건 정말로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레베카가 아무리 날뛴다고 할지라도, 이제 무기라는 건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아버지뿐이니 더는 깊이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은 제시카를 사랑한다. 에드워드는 마치 세뇌를 시키듯 한 번 더 다짐을 하며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
심장이 아프도록 뛰기 시작했다.
모든 감각이 극도로 예민하게 바뀌었다.
늘 맡던 향기였다. 아니, 달랐다. 더 달콤했다. 더 황홀했다.
자신은 저 존재를 안다.
약하디약한 존재. 가련하디가련한 존재.
저 작디작은 몸으로, 어떻게든 살아보려 악착같이 바르작거리는 불쌍한 존재.
그리고 그만큼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하아…….”
그 존재가 숨을 내뱉었다. 다디단 향이 사무실 안에 진동했다. 심장이 다시금 제 주인을 찾았다고 신호했다.
저자야. 진짜 네 운명의 짝은.
봐……. 이거야.
너도 알 수 있잖아. 애초에 알았잖아. 계속해서 끌렸잖아.
보는 순간 모든 걸 내려놓고 달려가 키스를 퍼붓고 싶었잖아.
거부하지 마. 거부하지 마. 거부하지 마.
본능이 요동친다.
자신을 바라보는 존재를 품으라고. 자신의 씨를 심으라고.
그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도록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라고 소리쳤다.
지금이라면 물러설 수 있다. 지금이라면 사무실을 뛰쳐나갈 수 있다. 바로 밑층에 있는 의무실로 가, 진정제를 맞을 수 있다.
하지만 왜 그래야 하지?
저렇게 사랑스러운데. 어서 날 안아달라는 듯 저렇게 달콤하고 위험한 향을 내뱉는데…….
에드워드는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을 잠가버렸다.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기 위해.
저 사랑스러운 오메가를 품기 위해, 에드워드는 마지막으로 경고하는 이성을 완전히 무시한 채, 바닥에 엎드린 채 떨고 있는 오메가에게 다가갔다.
“하아……, 하아……. 제발…….”
“괜찮아. ……이제 괜찮아질 거야.”
파르르 떠는 몸이 애처롭다. 그만큼 사랑스럽다. 왜 이제야, 왜 이제야…… 이 가련한 존재를 알아봤을까.
날 위해 존재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만의 오메가.
“괜찮아…… 준영.”
“아아……. 몸이, 몸이 너무 뜨거워요. 나는……. 나는, 할머니……. 흡…….”
무슨 말을 할지는 모르지만, 부정적인 말이 나올 것을 알았다.
키스로 말을 막았다. 한참을 입술을 헤집은 뒤 떨어졌다. 더는 예쁘지 않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안아줘요……. 제발…….”
사랑스러운 속삭임을 아는 앵두빛 입술을, 에드워드는 거부하지 않았다.
무엇이 이성이고, 무엇이 본능인지도 모른 채, 뒹굴고 또 뒹굴었다.
중간에 분명, 기사를 불러 헐벗은 준영을 자신의 옷가지로 감싼 뒤 곧장 호텔로 이동한 것만 봐도 이성이 완전히 날아간 건 아니었다.
호텔 객실로 들어서자마자 또다시 준영을 안았다. 더는 힘들다고 흐느끼는 준영을 달래어, 그를 몇 번이고 안았다.
“……제기랄.”
일부러 차가운 물을 맞으며 스스로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기어코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려 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했다. 멍청하디멍청한 햄턴 가의 핏줄은 어디 간 게 아니었다. 고스란히, 아비의 피가 고스란히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다.
물줄기가 너무 차가워 몸에서 김이 나고 있었다. 하지만 차가운지도 모른 채 한참을 물을 맞고 있을 때, 인기척이 들려와 서둘러 가운을 걸치고 욕실을 나섰다.
달콤한 향기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냄새도 함께 풍기고 있었다.
저자가 억제제만 가지고 있었더라도.
아니 자신의 사무실에서 발정만 나지 않았더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는 어느새 죄 없는 준영에게까지 향했다.
“쥐새끼처럼 도망치려고?”
막 객실을 나서려던 준영이 멈칫하였다. 하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나가 버렸다.
에드워드는 지독한 자기혐오에 비틀거리다 벽에 기대었다.
힘없이 주룩 주저앉았다.
모든 건 본능을 억제하지 못한 자신의 죄였다.
그런 주제에 준영에게 책임 전가를 해버린 자신이 지독하게도 끔찍했다.
에드워드는 한참을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초인종을 몇 번이고 눌러 보지만 반응은 없었다. 비밀번호를 알지만 차마 그 번호를 누르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다섯 번째로 벨을 누르고서야 드디어 인기척이 느껴졌다.
문이 열리고 초췌한 안색의 제시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방이 생각보다 기네요.”
“…….”
“늦게라도 와서 고맙긴 한데, 오늘은 내가 피곤해서 안 되겠어요. 혼자 있게 이만 가줄래요?”
“제시카. 얘기 좀 해.”
막 문을 닫으려던 제시카가 멈추더니 질끈 눈을 감는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최소한 다른 오메가의 향은 묻히지 말아야지요.”
샤워를 했다. 그럼에도 자신의 몸에 여전히 준영의 향이 남아있나 보다. 에드워드는 차마 더 오기를 부리지 못하고 한걸음 떨어졌다.
“그 냄새…… 빠지면 오세요.”
에드워드는 쾅 하고 닫힌 문을 한참을 쳐다보았다.
사고는 둘째치고 억제제를 가지고 다니지 않아 알파를 휘말리게 한 건 명백한 퇴사 사유였다. 분명 자신의 잘못도 있지만 억제제 미소지로 일어난 사고는 오메가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법적으로도 명시된 부분이라 에드워드가 어떻게 나설 수가 없었다.
설령 자신이 나서서 회사에 남긴다 할지라도 이미 소문이 자자하게 난 상태에서 오메가인 준영이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일부러 억제제를 가지고 다니지 않고 알파를 유혹한 오메가라는 꼬리표는 이 세계에서는 엄청난 치부였으니까.
무엇보다 자신이 나선다면,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이다.
자신은 제시카와 결혼을 할 것이다.
사고에 휘말렸지만 그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 가급적 조용히 덮고 싶었다. 그렇게 또 한 번 이기적인 생각으로 침묵을 선택했다.
그렇게 한 달이란 시간 동안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다시 모든 걸 제자리로 돌리겠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준영을 만나야 했다.
뉴저지의 여타 다른 집처럼 작고 낡은 집 앞에 서서 한참을 머뭇거리다 초인종을 눌렀다.
다시 만난 준영은 살아있는 존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창백했다.
괜찮냐는 말을 하려다, 억지로 삼켰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원래의 목적을 잃어버릴 것 같아서였다.
자신이 없었다. 한 달이란 시간은 준영을 잊게 하기는커녕 그에 대한 갈증만이 커질 뿐이었다.
멀리 떨어뜨려 놓을 거다.
두 번 다시 마주치지 않게 하기 위해 모진 말을 할 것이다.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가득 품은지도 모르고 준영은 오히려 에드워드를 걱정했다.
목덜미를 물지 않았으니 괜찮을 거라 했다.
사고이니 에드워드에게는 책임이 없다 했다.
준영은 에드워드와 달리 원망은커녕 그의 탓으로 돌리지도 않았다.
너무나 깨끗하고 맑은 눈동자와 마주하면 마주할수록 약해지는 자신을 깨달았다.
에드워드는 간신히 모진 말을 내뱉고는 도망치듯 집을 나섰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바로 출발하지 못한 채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아프면서도 아프지 않은 척 짓는 미소가 마치 망령처럼 에드워드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지독한 열상이라도 당한 것처럼 에드워드는 아픈 가슴을 오랫동안 움켜쥔 채 망부석마냥 준영의 집을 바라만 보았다.
두 번 다시 마주치지 않기 위해 모진 말을 한 거라는 위안이 우스워질 정도로 에드워드는 틈만 나면 준영의 집으로 가 그를 먼발치에서 지켜보았다.
갈 때마다 본 것도 아니다. 거의 보지 못한 적이 더 많다. 가끔은 운 좋게 창문에 비친 그를 본 적도 있었다.
너무 멀어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애처로웠다. 마치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약해진 걸 알 수 있었다.
차라리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면 당당히 자신의 곁에 두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때마침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시카였다. 그녀는 사고이니 넘어가겠다고 했다. 그러니 결혼을 해 달라 요구했다.
웃기게도 몇 번이고 결혼을 생각해놓고 그녀의 요구에 바로 답하지 못했다.
내가 이렇게 못난 놈이었구나.
허탈하게 웃으며 멍하니 핸드폰 액정의 제시카의 이름을 바라보다, 문득 준영의 집 현관문이 열리는 모습에 자세를 바로 했다.
날이 제법 싸늘해지고 있는데 준영은 실내복으로 보이는 얇은 옷만 입은 채 어딘가로 빠르게 걸어갔다. 마트라도 가는 걸까. 별거 아닐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상하게 시선이 자꾸 갔다.
다시 벨이 울렸다. 액정을 들여다보다 차를 몰았다. 조금 떨어진 채 계속해서 그 뒤를 쫓았다. 준영은 홀린 사람처럼 앞만 본 채로 하염없이 걸었다. 드디어 멈춘 그의 앞에는 드넓은 허드슨 강이 펼쳐져 있었다.
직감이 에드워드에게 경고했다. 주차장을 찾고 말고도 할 새 없이 차를 세우고는 달려갔다. 그리고 정말로 아슬아슬한 순간, 준영의 손을 잡아 강하게 당겼다.
생각 이상으로 너무 약해 거의 날다시피 당겨진 준영은 계단에 머리를 부딪치고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심장이 또 한 번 덜컹 내려앉았다.
결국 밤을 새웠다. 억지로라도 자려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아주 작은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며 발코니로 달려갔다가 실망하기를 반복했다.
새벽녘쯤에는 아예 발코니에 서서 먼발치만을 바라보았다. 해가 어느새 완전히 떠오르고서야 준영은 힘없이 웃었다.
달콤한 꿈을 꾼 대가가 이렇게 아프구나.
그렇게 스스로에게 달콤함에 취하지 말라고 각오를 다져놓고는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구나.
허탈하게 웃으며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힘없이 앉았다.
“배가…….”
너무 서 있어서일까. 아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일까. 왠지 모르게 배가 너무 아파 잠시 침대에 누운 채 엎드렸다.
몸이 너무 차가워서일지도 모른다. 서둘러 이불을 덮고 몸을 따뜻하게 만들려 애를 썼다.
얼마나 흘렀을까.
다행히 뭉쳤던 배가 풀려 안도했다.
배는 고프지 않지만, 뭐라도 먹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축축 처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침대에서 일어섰다.
멍한 정신을 가다듬고 방을 나섰다. 힘없이 복도를 지나, 계단에 당도했을 때 들려온 소란스러운 소리에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혹시 그사이 에드워드가 왔을지도 모른다 싶었지만, 불행히도 셀린느였다.
“뭐야? 있잖아! 왜 거짓말을 해!”
막아서고 있던 크리스를 밀치며 셀린느는 다짜고짜 달려와 준영의 앞에 섰다. 당장 뺨이라도 때릴 듯 무서운 눈빛으로 준영을 노려보았다.
“무슨…… 일인지…….”
“무슨 일이냐고? 몰라서 물어? 감히…… 네 주제에 우리 집을 이 꼴로 만들어?”
“네?”
“네가 뭐라고 했으니깐 테드가 윌리엄을 쫓아냈을 거 아니야!”
“윌리엄 씨가 퇴직을 한 건 전적으로 에드워드 씨의 결정입니다.”
뒤를 따라온 크리스가 서둘러 준영의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셀린느는 그런 크리스를 다시 밀치며 준영의 멱살을 잡았다.
“네가 아니면 테드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윌리엄은 테드가 태어날 때부터 있던 집사라고! 그 어떤 잘못을 해도 그냥 뒀었던 윌리엄을 고작 그따위 일로 쫓아냈다고?”
크리스가 다시 셀린느를 강제로 떼어놓으며 외쳤다.
“고작 그따위 일이라니요! 임신한 임산부입니다! 임산부가, 그것도 이 집 주인의 부인이 그런 험한 꼴을 당했는데 아무도 말리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책임을 져야…….”
짝, 소리와 함께 크리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감히 주제도 파악 못 하는 것들이……. 하! 너 이 베타도 꼬신 거니? 정말 대단하구나?”
셀린느의 혐오스러울 정도로 더러운 말에 몸이 멋대로 떨렸다. 크리스 역시도 기분이 상당히 나쁜 건지 무서울 정도로 셀린느를 노려보았다.
“……모욕적인 언사입니다. 사죄하십시오.”
“뭐야?”
크리스의 말에 셀린느의 표정이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 일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에드워드 씨에게 모두 있는 그대로 전해 줄 테니, 그리 아십시오.”
“하! 너 내가 누군지 모르는 모양인데! 난 에드워드의 동생이거든?”
“네, 잘 압니다. 그런데 그게 어떻단 말입니까? ……당신 말대로 가족 같던 윌리엄도 고작 그런 일로 내쫓으셨는데 배다른 동생이라고 다를까요?”
“너……, 너…… 감히!”
흡……! 준영은 본능적으로 배를 움켜잡은 채 물러섰다. 셀린느가 분노에 차 또다시 페로몬을 내뿜기 시작했다. 베타인 크리스는 처음에는 영문도 모른 채 준영을 부축하며 안색만 살폈다.
“왜 그러십니까? 준영 씨? 갑자기 왜……? 의사를 부를까요? 준영 씨?”
처음 파티장에서는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리고 페로몬을 거두었지만, 이번에는 작정을 한 듯했다.
말 그대로 페로몬을 쏟아부었다. 뒤늦게 크리스도 뭔가 이상하다 싶어 셀린느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멀찌감치 떨어뜨렸다.
“뭘 구경합니까! 당장 이 여자를 내쫓고! 의사를 불러요!”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고용인들이 그제야 급히 달려와 셀린느를 잡거나 준영에게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겨우 페로몬은 거두어졌지만 이미 자욱하게 깔린 페로몬은 여전히 준영을, 아이를 위협했다.
“헉, 헉……. 창문……, 공기…….”
“창문을 열어! 제길!”
소리를 지르다 말고 달려와 준영을 앞으로 안아 들었다. 서둘러 현관문 쪽으로 달려가 밖으로 빠져나오자, 그제야 컥 하고 숨을 내뱉었다.
송곳처럼 찌르던 감각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뱃속을 뒤집어놓는 것처럼 괴로웠다. 어떻게든 깨끗한 산소를 들이쉬려고 뻐끔거리며 힘겨워할 때, 무언가 축축하고 뜨거운 것이 아래를 적셨다. 공포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크리스……. 아래, 에서…….”
두려움에 차마 고개를 내리지도 못한 채 벌벌 떨며 자신의 상태를 알렸다. 크리스를 뒤따라온 고용인이 걸치고 있던 카디건을 벗어 황급히 준영의 배와 아래가 가리도록 덮어 주었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병원으로 갈 겁니다. 아시겠지요? 마음 편히 먹고, 당황하지 말아요. 제가 최대한 빨리 갈 테니깐.”
크리스는 준영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인지 몇 번이고 차분하게 말을 하고 또 하였다.
그래서 알았다.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병원에…… 흣, 가면 괜찮겠죠?”
“물론입니다.”
크리스가 안심하라며 다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너무나도 무섭게 다가왔다.
에드워드……, 왜 내 곁에 없는 건데요.
처음으로, 처음으로 에드워드가 미웠다.
임신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 또 한 번 자신이 얼마나 비겁한 존재인지를 깨달았다.
준영을 자신의 곁에 둘 이유가 생긴 것에 기뻤다.
수없이 못난 생각이 줄줄이 에드워드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끔찍해, 구역질이 올라올 정도로 자기 자신이 싫어졌다.
“몸이 너무 약해. 솔직히 오메가 호르몬이 너무 약한 이유도 영양실조 때문이지 않을까 해.”
“영양실조?”
다른 곳도 아닌 미국의 그것도 나름 발달된 도시에 살면서 영양실조라는 소리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저체중에, 당연히 영양소가 심하게 결핍되어 있어. 그런데 임신이라니. 심지어 첫 히트 사이클 이후에 말이야. ……무슨 뜻인지 알아? 베타 여성으로 치면 첫 생리 후 임신을 한 것과 같은 상황이란 말이야. 언제 유산이 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란 말이지.”
제이크가 차트를 뒤적거리며 듣기에도 힘겨운 말을 술술 내뱉었다. 결국 마지막 부분에서는 손바닥을 내밀며 그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가슴께가 답답하다. 원인을 알 수 없다. 아니 안다.
“나 착각하는 것 같아서 묻는데…… 저 오메가 사랑해?”
“……모르겠어.”
그래 모르겠다. 분명 제시카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내 인생에 이준영이란 자가 나타나기 전이었다면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없다.
에드워드의 대답에 제이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보고 있던 차트를 덮어 바로 쥐고는 에드워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대충 네가 어떤 상태인지 알 것 같기는 한데, 하나만 충고하마. 제시카를 네 어머니처럼 만들고 싶지 않아서 선택이 쉽지 않은 건 알지만…… 네가 미적거릴수록 네가 가장 바라지 않는 결과가 될 거야. 그건 너도 알지?”
제이크의 말대로다. 이미 알고 있다. 알면서도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며 시간이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버지의 가장 혐오스럽던 모습이 결국 자신에게도 있었던 거다.
“결정을 내려. 에드워드. 두 마리 토끼를 쫓을 수 없어.”
“……그럼 도대체 누굴 선택해야 하다는 거지?”
“답은 네가 알아. 네 체면, 아버지, 어머니. 모든 걸 다 잊고 단 하나만을 생각해. 네가 누굴 더 원하는지.”
“그게 말이 돼? 어떻게 그것들을 떼 놓을 수 있지? 그게 날 지탱하던 전부인데.”
“그런 대답을 하는 걸 보니 이미 답은 나와 있구나.”
제이크의 지적에 에드워드는 입을 딱하고 다물었다. 그의 말이 맞다. 이미 자신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정해버린 거다.
“그럼 하나만 더 묻자. 역으로 그것들을 생각해서 제시카를 선택한다면? ……널 사랑하는 제시카가 과연 지금처럼 행복할까? 넌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 만약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벌써 그녀를 네 짝으로 만들었겠지. 그렇지 않았다는 건 완벽한 파트너로 볼 뿐. 그녀도 알아. 알지만 그럼에도 네 곁에 있고 싶어 모든 걸 참는 거야. 자, 네 어머니와 뭐가 다르지?”
더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답은 정해져 있었다.
갈 곳이 없어진 걸 뒤늦게 알았다. 만약 내려만 주고 가버렸다면 임신한 오메가 몸으로, 단 한 푼 없는 상태로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
늘 혼자 어떻게든 참으려 하는 그 태도가 못마땅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믿음직스럽지도 편하지도 않다는 소리였다.
최대한 들끓는 감정을 자제하려 노력했지만 그것이 준영에게 더 좋지 않다는 걸 그때에는 몰랐다.
자신의 감정에 전전긍긍해 준영이 얼마나 힘들게 이 순간을 견디고 있는지를 미처 몰랐다. 조금만 더 상냥하게 말을 해 줄 것을. 후회해 본들 이미 지나간 일일 뿐이었다.
준영이 호텔에서 생활한 지 이틀째, 퇴근을 하자마자 그가 걱정되어 곧장 호텔로 향했다. 그리고 객실 한편에 넋 놓고 앉아 있는 준영을 보고 깨달았다. 드디어 곪은 게 터진 거라고.
볼에 난 상처가 안타깝다. 자신의 못난 선택에, 둘 다 상처 입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스스로를 욕했다.
더는 끌 수가 없었다. 에드워드는 쓸쓸히 방으로 들어가는 준영을 부를 수 없었다. 그럴 자격이 되지 않았다. 제시카와 끝을 내기 전에는 어설픈 위로를 할 수가 없었다.
그게 준영을 아프게 만드는 거란 걸 역시나 알지 못했다.
제시카는 에드워드를 만나 주지 않았다. 그녀는 에드워드가 결심한 것을 마치 눈치라도 챈 듯이 행동했다. 일주일이란 시간 동안 피해 다녀 결국 탐정까지 고용해 그녀가 있는 곳을 찾아내었다. 뉴욕에서 벗어난 곳의 허름한 호텔에서 제시카를 찾았다.
일주일 동안 객실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은 채 머물렀단 소리에 가슴이 아팠다.
“기어코…… 찾아왔네요.”
“제시카.”
“……듣고 싶지 않아요. 지금 당신이 하려는 말, 난 듣지 않을 거예요. 그 아이 우리가 입양해요. 잘 키워 줄 수 있어요. 오메가와 알파 사이의 아이들은 90프로 알파를 닮는대요. 그러니…… 당신을 닮았을 테니, 난 사랑해 줄 수 있어요.”
“제시.”
“테드. 걱정 말아요. 난 완벽한 아내가 될 수 있어요. 당신 어머니와 닮았다고 나도 같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요. 난, 충분히 아이를 사랑해 주고 완벽한 어머니가 될 수 있어요. 그러니…… 그 하려던 말을 접어요.”
겹친다. 이혼을 요구한 아버지에게 매달리던 어머니의 모습과 겹쳤다. 아버지는 결국 이혼을 하지 못했다. 어머니를 본가에 두고 셀린느의 어머니와 함께 다른 곳으로 가 살림을 차렸다.
아버지는 그 후 에드워드의 생일 같은 큰일이 아니고는 본가를 찾지 않았다.
괜찮다 하시던 어머니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정원의 나무처럼, 서서히 말라갔다.
늘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언제나 고가품으로 쇼핑을 해도 어머니의 욕구는 채워지지 않았다.
어머니가 진정으로 원했던 건 영원히 가질 수 없었다. 결국 어머니는 그렇게 시름시름 앓다 가셨다.
처음부터 아버지는 어머니를 끊어내야 했다. 이 정원과 맞지 않다고 판단했을 때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그 사과나무가 완전히 시들어 죽기 전에.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제시카. ……넌 완벽한 여자야.”
“…….”
“마치 나에게 맞춘 것처럼 완벽한 여자였지. 사랑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왜 말을 그렇게 해요.”
제시카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불길함을 느낀 듯했다. 에드워드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한 듯 그녀의 떨림은 점점 더 심해졌다.
에드워드는 제시카를 조심스레 안았다. 품에 쏙 들어오는 가냘픈 체형이다. 그럼에도 준영과는 달랐다. 품에 넣어도 바스라질 것 같던 그와 달랐다.
제시카는 분명, 당당히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놓아줘야 했다.
“넌 나의 완벽한 이상형이지만 내 심장은 널 향해 뛰지 않았어.”
제시카가 크게 몸부림쳤다. 에드워드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바둥거리는 것을,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미안하다. 날 원망해. 평생토록 날 원망해. 하지만 나에게 미련을 가지지 마. ……잊어버려. 날 잊어버려. 부디.”
“나쁜 놈.”
온 힘을 다해 바둥거리던 움직임이 서서히 멈췄다. 그리고 온몸의 힘을 모두 다 빼더니 허탈함이 가득 담긴 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당신이 나한테 이래.”
“…….”
“어떻게…… 운명 따위 믿지 않는다며. 아버지 같은 전철을 밟지 않을 거라며. 날 행복하게 해 줄 거라며!”
“미안하다.”
에드워드의 품에서 빠져나온 제시카는 그 작은 주먹으로 그를 때리고 또 때렸다. 때리다, 때리다 힘이 빠져 서서히 바닥으로 주저앉은 제시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니, 애초에 알았어.”
“…….”
“내가 아무리 발정 나도 당신은 늘 차분했지. 단 한 번도 나한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 그래서…… 알고 있었어.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빈말이라도 그녀를 위로하지 못해 아팠다. 미안했다.
그녀를 위로한답시고 어떤 말을 할지라도 지금 그녀에게는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한다는 걸 잘 안다.
“그자가 그렇게 좋아요?”
“…….”
“행복해지지 마.”
“…….”
“감히 내가 행복해지기 전까지. 내가 당신을 잊기 전까지, 나한테 다른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 절대로 행복해지지 마. 감히 웃지 마. 감히 날 부르던 입으로 ……그자를 다정하게 부르지 마.”
제시카는 저주와도 같은 말을 쏟아냈지만 에드워드는 그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요? 내가 당신을 잊을 때까지니 충분하죠? 아니, 그래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나도 내가 어떻게 바뀌게 될지 몰라.”
“그래. 그래서 네 마음이 편해지겠다면…… 그렇게 할게.”
그녀가 어떤 짓을 할지가 두렵다기보다, 그녀에게 그것이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죄의 길이란 걸 알아 에드워드는 그러겠다 대답했다.
아주 잠시만 준영에게 거리를 둔다면, 분명 제시카도 다시 일어설 것이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여성이니 그리 길지 않는 시간에 에드워드 햄턴이란 멍청한 작자를 잊고 일어설 것이다.
“나가요. 꼴 보기 싫으니까.”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제시카를 부축하려 했지만,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손길을 뿌리치고는 몸을 돌렸다. 차가운 음성에, 에드워드는 한 번 더 사과를 하고서야 몸을 돌려 객실을 나섰다.
셀린느가 감히 파티장에서 자신의 아이를 밴 준영에게 페로몬을 씌웠다는 사실에 불같이 화를 낼 때 그녀가 한 말이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어차피 아이 때문이잖아! 아이만 낳으면 버릴 거면서 뭐 하러 그렇게 잘해 주는 건데?”
“……뭐?”
“에드워드 네 태도가 그렇잖아. 아기 때문에 결혼한 게 아니면 뭔데?”
“그렇게 보였단 말이야?”
비록 자신은 다정하게 대해 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다른 이들은 햄턴 가의 안주인으로 대해 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저, 제시카에게 미안해, 그녀가 마음을 추스를 때까지만이라도 준영과 거리를 둘 거라고 생각했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준영에게는 최대한의 대접을 해 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일부러 집사와 고용인들을 불러 각별히 잘해 줄 것을 명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다. 주인인 자신이 안주인을 멀리하는데, 고용인들이 어찌 그를 안주인으로 대할까. 심지어 가깝다면 가까운 여동생조차 저런 태도인데.
“뭔가 착각하는군.”
“뭐?”
“단 한 번도 준영을 버리려고 생각한 적 없어. 셀린느. 너에게 내가 제대로 말을 하지 않은 것 같구나. 잘 들으렴.”
“……테드?”
“두 번 다시 준영에게 함부로 대하지 마. 그는 내 오메가다. ……곧 내 짝이 될 사람이야.”
“뭐? 짝? 지금 짝을 하겠다고? 미친 거야? 테드?”
오메가와 알파가 결혼을 해도, 짝을 이루는 경우는 드물다. 한번 맺게 되면 절대로 해제할 수가 없다. 한쪽이 죽지 않는 한.
예전엔 오메가가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하고, 짝을 강제로 해제당했다. 오메가를 죽인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며 오메가의 인권에 대한 것이 재조명되며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 예로 가장 대표적인 게 바로 짝 시스템이었다. 결혼을 해도, 짝을 강제로 하지 않는 것. 어느샌가 짝을 이루지 않는 이들이 더 많아졌다.
설령 제시카와 결혼을 했더라도 에드워드는 짝을 할 생각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랬던 자신이 스스로 먼저 짝을 하겠다 말하고 있다. 말 그대로다. 셀린느가 말한 것이 맞다. 자신은…….
“준영을 만나는 순간부터 미쳤을지도 모르지.”
“테드.”
“다시 한번 말해 주지. 준영에게 함부로 대하지 마. 두 번은 용납지 않아. 혹시라도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나와의 인연을 끊을 각오를 하는 게 좋을 거야.”
서슬 퍼런 에드워드의 협박에 셀린느는 입술에 피가 맺히도록 물며 분노했다. 그 분노가 누굴 향한 건지 뻔히 보였다. 최대한 셀린느를 준영에게서 떨어뜨려 놔야겠다 생각하며 에드워드는 몸을 돌렸다.
레베카가 본가에 찾아왔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무도 에드워드에게 알리지 않았다.
분명 셀린느 일 이후, 제대로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준영이 그런 일을 당하는 동안 그 누구도 말리거나, 연락을 취해 주는 이가 없었다고 했다.
분노는 자기 자신에게 돌아왔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누구도 상처 입히지 않기 위해서란 허울 좋은 말로 결국 준영을 벼랑 끝으로 내밀었다.
“할머니…….”
의식을 잃은 준영이 찾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다. 부부의 연을 맺어도 애드워드는 준영에게 의지가 되는 이가 아니었다.
서로에게 끌리고 있음에도 그뿐이라는 걸 잘 안다.
“미안하다. ……준영.”
손을 뻗어 뺨을 쓰다듬었다. 열이 올라 피부가 거칠다. 안쓰러움에 몇 번이고 매만졌다.
“그 말을 정정하지.”
이제는 더는 멍청한 짓을 하지 않을 거라는 각오였다. 준영은 에드워드의 말에 오해를 한 듯 안색이 나빠졌지만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았다. 더는 구차하게 변명을 하는 게 아닌 행동으로 달라진 자신을 보여 주고 싶었다.
가장 먼저 아직 보스턴으로 돌아가지 않은 레베카를 찾았다.
객실의 소파에 앉아 유유히 커피를 마시는 레베카에게 다가가자 그녀가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에드워드를 반겼다.
“결혼식 이후 처음이구나. 웬일로 날 찾아왔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요.”
“뭘 말이니?”
“지금까지 당신이 어떤 짓을 하든 가만히 둔 건 당신이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레베카의 미간이 꿈틀 떨렸다. 노골적인 노기가 서서히 표정에 드러났다.
“제라드 때문도 아닙니다.”
“뭐?”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전 당신의 약점을 많이 압니다. 하지만 굳이,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귀찮아서였죠.”
“에드워드……, 너.”
“아버지의 주식이 당신 앞으로 갈 것 같습니까?”
레베카의 눈이 노골적으로 커졌다. 부릅뜬 눈은 여전히 꺾이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아버지의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 준 내 어머니도 아니고 운명의 짝도 아닌, 그저 빈자리를 채우던 허수아비에게 그런 큰 권력을 쥐여 줄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드디어 현실이 조금씩 인지가 되어가나 보다. 조금 보기 좋게 일그러진다.
“제시카. 내가 정말로 몰랐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무슨!”
벌떡 일어서는 레베카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강제로 눌렀다. 그녀의 비서실장이 놀라 다가왔지만 에드워드의 차가운 눈빛에 주춤 당황하며 멈춰 섰다.
“뭐 하는 짓이야! 난 네……, 컥!”
에드워드는 오메가를 힘으로 억누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오메가든 어머니가 떠올랐고 그래서 냉정하게 굴지 못했다.
레베카에게 모질게 대하지 못한 건 그녀가 오메가여서도 있었다.
노골적인 페로몬 개방에 레베카는 숨조차 쉬지 못한 채 괴로워했다.
“너……, 이 무슨……. 난 네 어미……, 크윽……!”
주저앉다 못해 소파 밑으로 내려앉는다. 소파를 벅벅 긁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더럽다. 차라리 이 여자가 오메가가 아니었다면 제라드의 어미라 할지라도 벌써 햄턴 가에서 내쫓았을 것이다.
에드워드는 개방했던 페로몬을 끊었다.
“너…… 사무엘이 널 가만히 둘 것 같아? 난 네 아버지의 오메가야!”
“세 번째지만요.”
“너……, 너! 에드워드 햄턴!”
“그래. 당신 말대로 난 에드워드 햄턴이지. ……잘 들어 레베카. 당신이 지금까지 햄턴 가의 안주인으로 살 수 있었던 건 내가 용납해서야. 그러니 햄턴이란 성을 떼고 싶지 않다면 두 번 다시 나의 준영에게 손대지 마. 명심해. 마지막 경고야.”
허옇게 질린 레베카에게 차갑게 경고를 한 뒤 몸을 돌렸다.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는 레베카를 무시한 채 객실을 나섰다.
에드워드가 다음으로 한 건 레베카의 눈과 귀가 되어 주었던 고용인들을 모두 물갈이하는 거였다. 윌리엄은 중립이지만 집사로서 중립이 아닌 감정적으로 움직였기에 가장 먼저 해고했다.
젊은 시절부터 이 저택을 담당했던 집사를 해고시킨 일에 고용인들이 크게 당황했다.
지금까지는 큰 잘못을 하지 않는 한 가급적 좋게 넘어가던 주인이 처음으로 냉정하게 그들을 대했다.
“네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하나야. 내 아내를 보필하는 거.”
“제가 우선적으로 명령을 들어야 하는 이가 누구입니까?”
눈치 빠른 크리스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에드워드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답했다.
“준영. 나의 오메가이자 내 아내. 앞으로 모든 햄턴 가의 대소사는 안주인인 준영이 할 테니깐.”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당장은 무리겠지만 훗날 준영이 아이의 어머니로서 당당히 서기 위해서는 힘을 가져야 했다. 만약 준영이 원하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에드워드는 그가 당당히 자신의 옆에 서기를 바랐다.
허수아비가 되어 서서히 죽어간 어머니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도 안다.
애정해 주는 것. 사랑해 주는 것. 에드워드 햄턴이 준영의 것이란 걸 깨닫게 하는 거였다.
“가장 중요시할 건 준영이지만, 난 그 사람이 떳떳한 햄턴 가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 자네의 역할이 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라드의 코치를 받아 데이트 신청을 하였다. 준영은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그것도 잠시 함께하는 내내 기분이 좋은지 연신 미소를 지었다.
저렇게 잘 웃는구나.
늘 딱딱하게 굳어 감정 표현이 서툰 줄 알았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물론 키스만큼이나 서툴기는 했다. 하지만 분명 익숙해질 것이다.
“무슨 생각 하세요?”
함께 저녁을 먹는 와중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 준영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준영의 표정이 이상하다. 어쩔 줄 모르는 분위기에 왜 저러나 했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물어도 돼.”
“…….”
처음 결혼을 했을 때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부인으로, 안주인으로, 아이의 어머니로 대접을 해 주겠지만 자신의 사랑은 바라지 말라 했다.
오만 핑계를 다 가져다가, 결국 준영에게 오롯이 전가한 거였다.
그가 받은 상처 역시 제시카만큼이나 클 것인데도 에드워드는 그것을 챙기지 못했다. 말 그대로 이제는 일평생을 함께할 아내인데도 말이다.
“넌 자격이 있어. 해도 돼.”
눈동자가 하염없이 떨렸다. 그가 혼란스러워하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이 남자가 왜 이러나 싶은가 보다. 이해가 가서 더 아팠다.
“앞으로는 내가 앞에 있는데 왜 다른 생각을 하냐며 화를 내.”
“……그런.”
어떻게 화를 낼 수 있냐는 듯이 어색하게 웃는다.
“그리고 당신 생각을 했어. 키스, 한 거.”
에드워드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준영의 얼굴이 붉어진다.
행여나 누가 들었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행동에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준영은 그런 에드워드에게 그만 웃으란 말도 못 한 채 부끄러워했고 덕분에 정말 오래간만에 시원하게 웃어버렸다.
바로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는 게 보여 일부러 강가를 산책했다. 공원처럼 잘 닦인 허드슨 강가를 나란히 걸어갈 때 갑자기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 평화로움이 깨졌다.
제시카였다. 무시하려 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으면 준영이 더 의아하게 생각할 것 같아 서둘러 멀어지며 전화를 받았다.
다행히 준영은 회사 일로 전화를 받는지 아는 듯했다.
-오랜만이네요.
“다음엔 받지 않을 거야.”
-……요즘 잘 지낸다고 들었어요. 행복한가요?
역시 아직 저택에 레베카의 사람이 있나 보다.
“……그래. 행복해.”
-하! 난 아직도 아픈데 당신은 웃는군요.
“미안. 하지만 제시카. ……이건 아닌 것 같아. 애초에 모두 내 잘못이야. 준영은 아무런 잘못이 없어. 그건 너도 잘 알잖아.”
-몰라요. 절대 몰라. 뭐가 당신만의 잘못이라는 거야? 애초에 억제제를 가지고 다니지 않은 건 그자잖아! 왜 당신이 죄인처럼 구냐고!
“……피할 수 있었어. 그런데도 피하지 않았다. 피하고 싶지 않았어.”
침묵이 이어졌다.
준영은 저 멀리서 유모차를 끌고 있는 가족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였다. 저런 사소한 행복을 바라는 남자였다.
그 행복을 이루게 해 주고 싶다.
-방금 먹었어요.
“제시카?”
-뭔지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 생각해요. ……우리가 첫날밤을 보낸 그곳에 있어요.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설마 아닐 것이다. 그저 협박을 하는 걸 거다. 하지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 가서 괜찮은지 확인만 하자. 그리고 바로 돌아오자.
준영에게 최대한 평온한 척 행동한 후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제시카의 이름을 대자 바로 안내를 해 주었다. 아마도 그녀가 미리 언질을 해 놨나 보다.
객실에 당도하자마자 벨을 눌렀다. 얼마 가지 않아 문이 열렸다.
너무나도 평온한 표정의 제시카가 에드워드를 맞이했다.
“이 무슨……!”
“들어오지 그래요?”
“제시카!”
팁을 받은 직원이 화들짝 놀라며 둘을 번갈아 보았다.
“그만 가보세요. 수고했어요.”
에드워드의 분노에도 제시카는 태연스레 직원을 돌려보낼 뿐이었다.
“돌아가겠어.”
몸을 돌리자마자, 우뚝 멈췄다.
제시카가 등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힘주어 안은 제시카의 행동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제시카.”
떨어지라는 의미로 불렀지만 더욱 달라붙는다. 결국 힘주어 그녀를 떨어뜨렸다.
“눈치도 못 채네요. ……히트 사이클, 이제 곧인데.”
힘없이 웃는 제시카를 씁쓸히 쳐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준영과 함께 있었다. 그가 평소에 내뿜는 달콤한 향은 제시카가 히트 때 뿜어 나오는 향보다 강했다.
“미안. 억제제를 먹도록 해. 난 더이상 너에게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어.”
“이대로 밖으로 나갈까요?”
“…….”
“이 야한 잠옷 차림으로 밖을 돌아다니면…… 알파들이 좋다고 달려들겠죠? 그럼 나도 임신을 하려나?”
제시카는 보란 듯이 가운의 끈을 풀어헤쳤다. 야스러운 속옷에 에드워드는 다시 그녀의 가운을 추슬러주었다.
“스스로를 내려놓지 마. 그리고 내 사람을 모욕하지 마.”
제시카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잘못 들었나 싶은 표정을 짓더니 이어 분노했다.
“어떻게 내 앞에서 그 남자 편을 들 수가 있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그래서는 안 돼!”
악을 쓰고 달라붙는 제시카를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어떻게 그런 남창을……!”
손을 뻗어 제시카의 입을 가로막았다.
“더는 내 아내를 욕보이지 마. 그리고 제시카. 내가 널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게 해 줘. 내가 아는 제시카는 현명하고 올곧은 여성이었어. 부디 나 같은 놈 때문에……, 추하게 무너지지 마.”
손을 치우자 제시카는 더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무언가 포기한 듯 허탈하게 웃다 몸을 돌렸다.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당신이 나에게 줬던 반지 다시 가져가요. 내 손으로는 도저히 버릴 수 없으니.”
따라 들어오라는 듯 안으로 들어서는 제시카를 바라보다 짧은 한숨을 내쉰 뒤 발을 떼었다.
“……!”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낯선 방안 침대 위에 누워있는 것도 당황스러운데, 바로 옆에 헐벗은 제시카가 자신의 품에 안긴 채 잠들어 있었다.
황급히 일어나 침대에서 일어섰다. 간밤의 기억이 전혀 없다.
어느새 눈을 뜬 제시카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에드워드를 가만히 바라보다 일어나 앉았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내 히트 사이클에 발정했죠.”
“내가 그럴 리가! 설마, 너…….”
어젯밤 반지를 찾아와 건네주려던 제시카가 차를 한 잔만 같이 마시자고 요구했다. 거절했어야 했지만 모든 걸 포기한 듯한 표정이 마음에 걸려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그 차를 마시고 외투를 걸치고 바로 객실을 나서려 했지만, 갑자기 세상이 빙글 하고 돌았다.
그 후로 기억이 없다.
“알파가 발정 나게 하는 방법은 다양해요. ……내 히트 사이클에 반응했다면 그런 약 따위 먹이지 않았을 텐데 덕분에 처음 봤어요. 당신이 러트한 모습. ……그 남자는 그런 모습으로 안나 봐요?”
충격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제시카가 자신을 이렇게 속였다는 생각에 당황했다.
하지만 가장 먼저 눈앞에 떠오른 건, 또다시 준영을 아프게 만들 거라는 사실이었다.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다, 간신히 멈춰 섰다.
“간밤에 당신을 찾는 전화가 많이 오더군요. 목소리가 준영 씨인 것 같던데.”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에드워드의 질문에 제시카가 침대에서 내려섰다.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와 에드워드의 바로 앞에 섰다.
웃긴 건 그녀의 그런 모습에도 전혀 성적인 욕망이 일지 않는다는 거였다.
“당신 옆은 내 자리니깐.”
“아니, 틀렸어. 내 옆은 이미 주인이 있어.”
잘 개어진 옷을 쥐어 서둘러 입었다. 제시카는 말없이 그런 에드워드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알고 싶지 않다.
“……임신하면 연락할게요.”
막 객실 문을 열려고 할 때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멈춰 섰다. 그렇게 가지려 해도 생기지 않던 아이가 이 한 번으로 생길 리 없다. 무엇보다 자신은 발정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점점 이성이 돌아오자 상황이 판단되기 시작했다. 자신이 발정을 했다면 으레 느껴질 감각과는 달랐다. 절대로 그녀를 안았을 리가 없다는 걸 확신했다.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우성 알파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을 말로 설명해줘도 그녀를 납득시킬 수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다른 방법으로 그녀를 포기시키는 게 나았다.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에드워드는 천천히 상체를 돌려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제시카를 마주 보았다. 저로 인해 망가진 여성이 안쓰럽지만, 이제는 더 질질 끌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그리고 준영을 위해서도 바른길이라는 걸 잘 안다.
“만약 생긴다면…… 얌전히 지우도록 해.”
“……네?”
“생길 리도 없지만.”
의기양양하던 그녀의 표정이 달라졌다. 잘못 들었나,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한 그녀에게 더욱 확실히 돌려주었다.
내 마음은 이미 떠났다고.
“네 피를 이은 아이라면 필요 없어.”
“테드!”
“앞으로 날 그렇게 부르지 마. ……넌 내 마지막 호의를 철저히 짓밟았어. 나에게 더는 너그러움을 바라지 마.”
다시금 애절하게 에드워드를 불렀다. 당당하던 그녀가 저렇게 약해진 건 미안하지만 더는 그녀의 목소리가 자신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지 않았다.
미친 듯이 뛰어 곧장 병실로 향했다. 꺼져있는 핸드폰을 켜자마자 연이어 날아온 메시지에 에드워드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자신이 자리를 비웠을 때.
아니 애초에 제시카에게 찾아가서는 안 되는 거였다.
걱정이 되었다면 사람을 보내면 되는 거였다.
결국 또다시 자신의 멍청한 실수에 이 큰 사달이 나버렸다.
쾅 하고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링거를 맞은 채 누워 창밖을 보고 있던 준영이 시야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잠든 건가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준영은 잠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떤 말로 그를 위로해야 할까.
에드워드는 천천히 다가가 침대 앞에 섰다. 하지만 준영은 끝까지 돌아보지 않았다.
“……준영.”
흠칫.
몸이 크게 굳더니 이어 눈에 띄도록 떨렸다. 추위에 내몰린 사람처럼 떠는 준영의 손을 다급히 잡았다.
탁!
온 힘을 다해 에드워드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 덕분에 링거가 강제로 뽑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준영!”
“내 이름!”
준영에 비명 같은 외침에 뻗었던 손을 거뒀다. 준영은 비틀거리며 침대에 일어나 앉아 힘겹게 일어나 섰다.
“준영…….”
“부르지 마요.”
“…….”
“늘, ……이런 상황에서만 불렀죠.”
태어나 저런 미소를 딱 한 번 본 적 있다. 어머니가 저런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다정하게 한번 불러주지 않았으면서…….”
“미안하다.”
“왜…… 왜……. 지금에서야…… 내 이름을 부르는 건데요. 왜 내 아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부르는 건데! 왜!”
처절한 비명 소리에 에드워드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그 날 어머니가 이렇게 우셨다. 날 아버지에게 뺏기던 날, 어머니가 이렇게 우셨다.
자신은 결국 준영에게조차 평생에 남을 상처를 남긴 거였다.
“……내 아이 돌려내요. 살려내. 돌려줘. 이제 태동을 했어요. 이제. 나 여기 있다고…… 발길질을 했어. 그 작은 게…… 살아있다고, 나한테. 그런데…… 지키지 못했어. 지키지 못했어. 나는…….”
에드워드는 침대를 돌아와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준영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준영은 아무런 말조차 하지 않았다. 가만히 고개 숙인 에드워드를 바라보기만 했다.
“우리 애초에 잘못된 만남이었을까요.”
“아니야.”
“많은 사람들을 상처 입히고 그래서, 아무도 원하지 않던 아이를 가지게 돼서…….”
“아니야!”
에드워드는 빠르게 일어나 준영을 끌어안았다. 온 힘을 다해 으스러지듯 그러안았다. 이대로 품 안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두렵다.
“내가 원했어. 준영.”
“거짓말.”
무슨 변명을 할 것인가. 준영에게 있어 자신은 가장 끔찍한 거짓말쟁이인 것을.
“믿지 않아도 좋아. 준영 이것만은 알아줘. 처음부터 너에게 반했어. 다만 운명이라는 덫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서 알량한 자존심에 널 모른 척 한 거야. ……준영아. 준영아.”
준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에드워드를 밀쳐내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석상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알았다. 준영의 마음이 이미 멀리 가버렸다는 것을. 이제 두 번 다시는 에드워드를 애정 가득한 눈으로 보지 않을 거란 것을.
멍청하게도 말이다. 에드워드 햄턴이란 머저리는 결국 두 마리 토끼를 놓친 거였다.
그리고 그 두 마리 토끼 모두에게 크나큰 상처만을 남긴 채로, 그렇게 가장 지독한 결말을 내고야 만 것이었다.
병실을 나서자, 서성이던 셀린느가 보였다. 그녀는 에드워드를 보자마자 반색하며 달려왔다.
“에드워드! 난 정말로 그럴 생각이 아니어……!”
볼을 때렸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소리와 함께 셀린느가 구석으로 가 처박혔다. 여자를, 그것도 여동생을 주먹으로 때렸다는 사실에 근처에 서 있던 경호원과 크리스, 그리고 제이크가 경악스러운 눈으로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테드.”
“날 그렇게 부르지 마.”
“나는…….”
“셀린느.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권력을 총동원해.”
“뭐?”
영문을 모르는 셀린느에게 천천히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눈높이를 맞추었다. 예전부터 늘 제멋대로에 고집불통이었던 셀린느에게 제발 알아들으란 심정으로 이렇게 바라보며 말을 했었다. 그래서일까. 셀린느는 에드워드가 눈을 맞추며 한 말에 약했다.
아무리 멍청한 그녀라 할지라도 이것이 진심이란 걸 알 것이다.
“네 친모를 찾아서, 망령이 난 아버지라도 움직이게 하는 것도 좋겠지.”
“무슨…… 말이야?”
셀린느는 친모를 증오한다. 자신을 낳자마자, 버리고 떠나버린 친모를 증오했다.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에드워드를 사랑해 주었던 그의 어머니를 부러워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주제에 큰어머니라 부르며 그리워했다. 그래서 굳이 셀린느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큰어머니는 널 끔찍이도 싫어하니, 부디 그 애정을 멈춰달라는 잔인한 말을 해 주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후회한다. 진즉에 모든 사실을 말해 주고 그녀를 멀리해야 했다고.
“에드워드.”
“소송할 테니 그렇게 알아.”
“뭐? 에드워드!”
셀린느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에드워드의 바지를 잡고 늘어졌다. 에드워드는 차갑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써서, 너에게 가장 긴 형량을 때릴 거야.”
“왜, 왜 그래. 무섭게. 나, 네 여동생이잖아. 아무리 피가 반만 섞였어도……. 나, 나 너와 아버지가 같은…….”
거짓말이라는 말을 듣고 싶은 걸까. 아직도 에드워드의 기분을 파악하지 못한 셀린느가 어떻게든지 그의 기분을 가라앉히고 싶은 듯 벌벌 떨며 애원했다.
더럽다. 하지만 가장 더러운 건 자신일 것이다. 셀린느와 자신이 뭐가 다를까.
“내 아이를 죽인 네가 왜 내 여동생이라는 거지?”
“테…….”
“가,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동원해서 막아. 그 정도는 봐주지. ……넌 내 여동생이니까.”
드디어 장난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건지 셀린느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비서가 황급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에드워드는 그런 그녀를 차갑게 응시하다 몸을 돌렸다.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소리를 못 들은 척 제이크에게 다가갔다.
“피검사 좀 해 줘.”
“뭐?”
“소송을 걸어야 할지도 몰라.”
“뭔데 도대체.”
“너트 발정제라고 들었어. 실존한다면 불법이겠지. 마약류에 분류된다고 하던데 맞아?”
“너…….”
“설명할 시간 없어. 검사부터 해 줘.”
제이크는 답답하다는 듯 에드워드를 몇 번이고 부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에드워드는 제이크를 뒤따르기 전, 간호사 사라에게 준영의 상처를 봐달라 부탁한 뒤 이번엔 크리스를 불렀다.
“기자들이 진을 치게 될 거야. 소식이 원체 빨라서. ……가급적 뉴스나 언론을 접하지 못하게 해야 돼.”
“핸드폰이라도 박살 내란 말인가요?”
“그것도 좋지. 책이라도 좀 사 줘. 영화도 좋고.”
“……네.”
크리스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워드는 한 번 더 준영이 잠들어 있는 병실을 바라보다 발길을 옮겼다.
가슴이 답답하다. 하지만 하소연하지 않을 것이다. 아프다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제는 자신이 준영의 모든 투정을 받아줘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죗값이었다.
* ♟ *
몸을 어느 정도 추스르고 퇴원 후 집으로 돌아왔지만, 준영이 하는 건 그저 누워만 있는 거였다.
때마다 크리스가 들어와 끼니를 챙겨주었지만 정말로 죽지 않을 정도만 먹었다.
일부러가 아니라 먹는 족족 토해버려 먹지 못한 것이 더 맞았다.
끼니때가 가장 곤혹스러웠다. 차라리 아무것도 먹지 않고 이대로 쭉 눈을 감았으면 좋겠다.
이제 자신이 악착같이 살아가야 할 이유는 없다.
“준영. ……자는 거니?”
노크 소리와 함께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에드워드였다. 그렇게 이름을 불러주기를 기다렸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름을 불러주지만, 지금은 듣고 싶지 않았다.
대답을 하지 않아서일까. 최대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집으로 오자마자 바로 이곳이 들렀나 보다.
예전이었다면 그렇게 기뻐했을 일이지만 지금은 너무나 부담스럽다. 가급적 부딪치고 싶지 않은 준영의 마음과 다르게 에드워드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이 방에 들렀다.
“안 잤네.”
목소리가 기운이 없어 보인다. 그날 이후 그는 늘 자신을 아픈 듯이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싫다. 준영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에드워드는 요즘 늘 그랬듯 다가와 머리맡에 앉았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준영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지만, 그 손길이 싫어 고개를 돌렸다.
그럼 아픈 듯이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가 더욱 준영을 아프게 만들었다.
“크리스에게 들었어. 오늘 두 번이나 토했다던데……. 배고프지는 않고?”
“그다지…….”
“나도 저녁 아직 못 먹었는데, 같이 먹을까?”
늘, 매번 거절을 당하면서도 에드워드는 오늘도 같은 질문을 했다. 준영은 가만히 에드워드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요.”
“괜찮아. 그보다…… 이거.”
에드워드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준영의 손에 쥐여 주었다. 사과였다.
“이게 마지막으로 열린 거라고 하더군. 너무 오랫동안 달려있어서 너무 익었지만, 그래도 먹을 만할 거야.”
붉다 못해, 색이 바래지려는 사과를 바라보다 한입 물었다. 달콤한 과육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건더기를 삼키지 못해 결국 내려놓았다.
“갈아 줄까?”
그다지 먹고 싶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에드워드는 한없이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이번에는 그를 이불째 안아 들었다.
“저기…….”
“수프라도 먹자. 죽이든 뭐든. ……제발. 먹어 줘.”
먹어도 토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준영의 이마에 이마를 얹으며 애원하는 에드워드를 모른척할 수가 없었다.
대답을 하지 않자, 에드워드는 기다렸다는 듯 준영을 안은 채로 침실을 나섰다.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던지 크리스가 에드워드와 준영을 보자마자 빠르게 일 층으로 내려갔다.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별다른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침묵이 무겁다. 하지만 입도 벙긋하고 싶지 않다. 눈을 감자, 온몸이 두둥실 떠다니는 감각이다. 졸음이 몰려왔다. 모든 걸 뒤로하고 그저 자고 싶을 뿐이다.
“준영? ……준영…….”
에드워드가 애타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대답해 줄 기력이 없었다.
잠결에 들려온 노크 소리에 힘없이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링거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보니 뭔가 먹으러 가겠다고 식당으로 가다가 잠들었던 게 떠올랐다.
“내가 깨운 거야?”
“……제라드.”
다정한 목소리에 시선을 옮기자, 외투를 팔에 걸친 채 안으로 들어서는 제라드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 스타일이 달라졌다. 그러고 보니 파리로 간 다음 날 헤어 디자이너가 머리를 이 모양으로 잘랐다며 투덜거리며 사진을 찍어 보냈던 게 기억났다.
“머리 스타일 잘 어울리는데요?”
사진보다 훨씬 낫다. 준영의 말에 제라드가 작게 미소 짓는다.
몸을 일으키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몸에 힘이 없다. 제라드가 빠르게 다가와 그런 준영을 도왔다. 커다란 베개를 등에 대 주어 기대자, 조금 낫다.
“혼자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약해져 있다니……. 바보야?”
“하하. 그러게요.”
역시나 적나라하다. 다른 이들은 전전긍긍하기 바빴지만 제라드는 첫 만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거짓 없이 곧장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래서 그가 몇 번 만나지 않았으면서도 이렇게 편한가 보다.
“소식 들었어.”
“……네.”
제라드는 말없이 손을 뻗어 준영의 손을 잡아주었다. 남자답지 않게 손이 부드럽다.
“내 멍청한 가족 때문에 애꿎은 네가 아프구나. ……미안하다.”
“왜 제라드가 사과를 해요. 그러지 마요.”
피를 나눴다는 이유로 죄를 뒤집어씌울 생각은 없다. 아이를 떠나보내게 만든 그녀는 밉지만, 그뿐이다. 그 죄를 제라드에게, 에드워드에게 떠넘기고 싶지 않다.
“아기가…… 너무 예뻐서 하느님이 먼저 보고 싶었나 보다.”
“……응.”
“또 가지면 돼.”
“…….”
그 말에는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애초에 가진 것부터 기 기적이라 불렸던 아이였다. 그날, 충격으로 히트 사이클이 터진 이후 한 번도 히트가 온 적이 없다.
임신을 하더라도 오메가는 주기적으로 히트 사이클이 온다고 들었다. 준영은 5개월 동안 히트 사이클이 오지 않았다. 임신을 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그러게요.”
가망 없는 말이지만, 굳이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아 그냥 형식적인 대답을 하였다. 제라드는 살짝 눈가를 찌푸렸지만, 딱히 뭐라 지적하지는 않았다.
“내가 너에게 뭘 해 줄 수 있을까?”
“……아무것도.”
준영의 대답에 제라드가 눈을 감았다 떴다.
“준영. 넌 혼자가 아니야.”
준영은 이번에도 대답을 하였다.
“네…….”
표정과 전혀 상반되는 대답이라 그런지 제라드도 눈치를 챈듯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지적도 하지 못했다.
“쉬고 싶어요.”
“……그래. 한동안 본가에 있을 거야. 자주 올게.”
“네.”
솔직히 귀찮다. 혼자 그냥 계속해서 자고 싶을 뿐이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게 싫었다. 제라드에게는 고맙지만, 관심을 꺼주었으면 좋겠다.
에드워드는…….
질끈 눈을 감았다. 제라드는 그런 준영을 바로 눕도록 도와준 후 방을 나섰다.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눈을 떴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 자신이 우는지도 모른 채, 준영은 또다시 그렇게 소리 죽여 울었다.
준영은 나날이 메말라갔다. 먹는 걸 아주 거부하는 것도 아니었다. 한 입 먹고 토하기를 반복했다. 에드워드를 보기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다. 에드워드가 방으로 들어서면 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채색.
딱 그 말이 어울릴 정도로 준영은 나날이 그렇게 바래어갔다.
오늘은 제이크를 집으로 불렀다. 간호사와 함께 찾아온 제이크는 준영을 보자마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최대한 태연한 척 행동하며 방안으로 들어섰지만, 제이크가 방문 앞에 서서 준영을 보자마자 한바탕 욕설을 내 뱉는걸 들은 에드워드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몸무게 재 봤어?”
준영을 진찰한 후 밖으로 나온 제이크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에드워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대략.”
“퇴원일보다 10lb(5kg) 가까이 더 빠졌어. 그것도 2주 만에. ……가뜩이나 저체중인데 말이야. 이대로라면 목숨이 위험해질지도 몰라. 입원시켜.”
각오했던 말이지만 막상 말로 듣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입원은 안 돼.”
대답은 에드워드가 아닌,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복도 끝에 기대서 있던 제라드에게서 나왔다.
“병원이 싫다면 휴양이라도 보내. 한동안은 혼자 있게…….”
“그건 제이크가 준영을 몰라서 하는 말이고.”
“넌 잘 안다는 거냐?”
제이크의 말에 딴죽을 거는 제라드의 행동에 에드워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제라드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세를 바로 해 그들의 앞으로 와 섰다.
“너보다는?”
“……그럼 어떤 게 준영을 위하는 거지?”
“나도 몰라.”
장난스러운 제라드의 태도에 에드워드는 다시금 올라오는 화를 간신히 참아내었다.
“장난칠 거라면 저리로 가. 그럴 기분 아니니까.”
“물어봤어?”
“뭐?”
“준영에게 물어봤냐고. ……준영이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게 뭔지, 물어는 봤냐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물어봤어.”
하루에도 몇 번이고 찾아가 준영의 기분을 달래려 애를 썼다. 하지만 닫힌 마음은 열리지 않았다. 그 방법을 알 수 있다면 악마와 거래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을 할 때는 그렇게 잘하면서 왜 준영 앞에서는 바보가 돼?”
“무슨 뜻이지?”
“상대방을 알아야 백전백승이라고 나한테 그렇게 잘난 척해놓고 왜 준영에게는 그러지 않냐고. ……테드, 준영에 대해 아는 게 뭐지? 심지어 그가 좋아하는 음식, 색, 동물. 그런 사소한 것이라도 아는 게 있어?”
제라드의 지적에 에드워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준영에 대해 알려고 노력부터 해. 지금 준영은 상처받아 웅크리고 있는 동물이야. 어설픈 노력은 그에게 더 나쁘게 작용할 뿐이야.”
“제라드의 말에 나도 동감. 준영이 가장 원하는 게 뭔지부터 알아야 해. ……어쩜 본인도 잘 모를 거야.”
준영이 가장 원하는 것?
“어쩌면 ……내가 가장 보기 싫을지도 모르겠지.”
“하. 미치겠군. 갈 길이 멀어. 하아…….”
제라드는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그대로 에드워드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주먹이지만, 일부러 피하지 않았다.
알파 남자라고 제법 아프다. 반동에 바닥에 주저앉은 에드워드는 화끈거리는 볼이 고통을 맛보며 쓰게 웃었다.
어쩜 자신은 이렇게 맞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맞고 웃다니. 테드, 변태인 줄 몰랐네.”
“다 좋은데 왜 여기서 이러냐고. 준영에게 들키고 싶어서 그래? 가뜩이나 심란한데 형제들이 자기 때문에 싸우면 기분이 어떻겠어.”
제이크의 지적에 그제야 둘은 이곳에 준영의 방앞이란 걸 깨달았다. 에드워드는 자리에서 빠르게 일어나 혹시나 준영이 깼을까 문 너머 소리에 집중했지만 별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일단 내려가자. 나와 얘기 좀 해.”
“……뭔가 방법이 있는 거야?”
“그러니까 그 방법 찾기 위해 대화 좀 하자고 이 못난이 형님아.”
한 대 더 칠 듯 으르렁거리고는 몸을 돌려 일 층으로 향하였다. 에드워드는 한 번 더 문을 바라보다 그 뒤를 따랐다.
요즘 인터넷에서는 늘 햄턴 가에 대한 일로 시끄러웠다. 가장 놀랐던 건 에드워드가 셀린느에게 소송을 건 일이었다. 천문학적인 피해 보상 금액에 셀린느도 변호사를 사 법정 분쟁에 대응하는 듯했다.
한 기사에서 진흙탕 싸움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게 걸렸다. 일각에서는 셀린느에게 햄턴 가 주식이 일부 넘어가는 것에 대해 에드워드가 견제하는 게 아닐까 하는 추측도 나왔다.
지금까지 잘 지내던 남매가 갑자기 철천지원수가 된 이유에 대한 수많은 추측이 나돌았지만, 그 누구도 에드워드가 진실되게 한 기자회견을 믿지 않았다.
'내 아이를 떠나게 하고, 내 파트너를 두 번이나 위협한 일, 그리고 아직까지 내 파트너 앞에 진심으로 사죄하지 않은 괘씸함을 난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솔직히 준영조차도 그 기사를 완벽하게 믿지 않았다. 아이를 떠나보내게 만든 건 알겠지만, 자신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나 싶다. 덕분에 희대의 불륜에서 희대의 로맨스가 되어버렸다.
하나도 기쁘지는 않지만.
“뉴스 보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트니까 나왔어요.”
크리스가 언제 들어온 건지 들어와 준영에게서 리모컨을 뺏는다. TV를 끄는가 했더니 화면을 돌려 노래가 나오는 채널에서 멈춘 뒤 리모컨을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제라드가 점심을 함께 먹자고 하더군요.”
“…….”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함께하도록 해요. 아셨죠?”
“……네.”
싫다고 거부해본들, 크리스도 제라드도 막무가내라 어쩔 수가 없었다. 크리스는 준영에게 가져온 책 몇 개를 건네주고는 창문 쪽으로 가 커튼을 쳤다. 책 제목을 하나하나 보고 있을 때 밝은 빛이 침대까지 들어와 준영을 비췄다.
“눈부셔요.”
“밝은 겁니다. 준영은 햇빛을 좀 쬘 필요가 있어요. 그래, 오늘은 온실에서 점심을 먹도록 하죠.”
그냥 식당에서 간단히 먹으면 되는데 또 이렇게 결론이 나와버린다. 준영은 거절할 기운도 없었기에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에드워드 씨는 오늘 조금 늦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제목이 마음에 드는 책을 막 펼치려다 그대로 굳었다. ……무슨 일 때문에? 또 그녀를 만나는 걸까.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날의 일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준영?”
“……아, 아니에요. 알았어요.”
태연한 척하지만, 손끝이 떨리는 걸 막을 길이 없었다. 그때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귓가에 맴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 자신은 에드워드에게 딱 그 정도 존재였던 거였다.
계속해서 귓가에서 울려대는 소리가 거슬러 고개를 마구 저었다. 환기 후 다시 발코니 문을 닫던 크리스가 의아하다는 듯이 다가왔다.
“왜 그러십니까? 준영?”
“괜찮아요. 그냥…… 조금 기분이 안 좋을 뿐이에요.”
심장이 저릿하게 조였다. 가슴께를 부여잡은 채 숨을 몰아쉬자, 놀란 크리스가 다가와 준영의 안색을 살폈다.
“의사를 부를까요? 아니, 지금 당장 병원으로…….”
“아니요. 아니요. 그냥 조금 쉬고 싶어요. 제라드에게는 미안하지만 다음으로 미루자고 해 줘요.”
일방적으로 말을 하고는 이불을 덮어쓰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크리스는 잠시 주변을 서성이며 뭐라고 말을 건네려 했지만, 결국 포기하고는 방을 나섰다.
몸을 더욱 웅크렸다.
반사적으로 자신의 배를 움켜쥐었다. 말랑했다.
다시금 슬픔이 물밀듯이 올라온다.
에드워드가 제시카를 만나러 간다고 해도 괜찮았다. 그가 원래 사랑했던 건 자신이 아니니 이해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견딜 수 있었던 건, 자신의 배 속에 있던 새 생명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자신을 위로해 줄 존재는 없다.
이제는 정말로 혼자가 되어버린 거였다.
“아가야……. 할머니…….”
그립다. 그립다. 그립고 그리워, 가슴이 아프다. 자신을 버리고 먼저 가버린 그들이 너무나도 그립다.
준영은 오늘도 부디 자신을 이 고통 속에서 해방시켜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중간에 제라드가 찾아왔지만, 준영이 누워만 있는 모습에 결국 포기하고 나가버렸다. 중간중간 크리스가 먹을 걸 가지고 와 억지로 한술 떴지만, 딱 그뿐이었다.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냉정하게 생각해 봐도 자신이 먹은 걸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게 신기할 정도다. 거의 까무룩 기절을 했다가 정신이 들면 꽂혀있는 링거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먹은 게 없으니 기운이 없다.
뭐라도 먹어야 한다는 건 안다. 하지만 지금도 생각뿐이었다. 두 눈을 껌뻑거리며 침대에서 누워만 있기를 얼마나 흘렀을까.
낮의 환했던 빛은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고 어둠만이 자욱할 때, 익숙한 차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외박하지 않았구나.
문득 들어온 생각에 허탈하게 웃었다.
당당히 외박해도 되는데……. 어차피 이제 의리를 지킬 필요도 없을 텐데.
그러니 먼저 말할 것이다. 에드워드는 너무 착해서 차마 먼저 말을 할 수 없을 뿐일 거다.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행여나 준영이 깰까 조심스러운 발자국 소리에 자상함이 묻어있다.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그 소망을 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안 자고 있었군.”
문을 열고 들어온 에드워드가 문 쪽을 보고 있는 준영을 보고는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요즘 에드워드는 늘 지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준영을 향해서는 억지로라도 웃는 게 보였지만, 그래서 더 안돼 보였다.
정말로 태양 같은 남자였다. 자신감이 넘치고 자상하고 멋진 상관에, 멋진 동료였던 남자다.
그런 남자가 이렇게나 어두워진 게 마음에 걸렸다.
“에드워드.”
“……응?”
정말 오래간만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드워드도 조금 당황한 듯 준영을 바라보다, 이어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었다. 남자임에도 아름답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예뻤다.
“부탁이 있어요.”
“부탁? 그래, 말해. 뭐든지 들어줄게.”
에드워드가 정말로 기뻐하며 다가와 준영의 양손을 잡았다. 거친 일 한번 하지 않았을 텐데도 에드워드의 손을 조금 두꺼운 편이다. 어릴 때 수많은 운동을 했었다고 들었다. 두텁고 남자다운 손으로 연신 준영의 손을 매만졌다. 행여나 깨질까 조심스러운 손길을 가만히 쳐다보다, 각오를 다졌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내었다.
“……이혼해 주세요.”
만지작거리던 손이 멈췄다. 숨은 쉬고 있는가 싶을 정도로 굳은 채 준영을 바라보았다.
“뭐?”
“이혼해 주세요.”
“왜 갑자기…….”
충격을 받은듯한 눈빛이 걸렸다. 에드워드는 하염없이 떨리는 눈동자로 준영을 바라보다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유산한 것 때문에 그런 거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마. 준영. 절대로, 절대로 아이 때문에 너와 결혼을 한 게 아니야.”
말하는 내내 목소리가 떨린다. 어떻게든 감정을 죽이려 애를 쓰는 게 보였다. 착한 남자. 준영은 에드워드를 가만히 바라보다, 그에게서 손을 빼내었다.
“아이 때문에 결혼을 한 거란 거 잘 알아요.”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알아. 네가 네 말을 믿지 못하는 건 이해해. 하지만……, 하지만 믿어줘. 준영. 제발, 아니야.”
왜 저렇게 열을 내는 걸까. 그저 기회는 이때다 하고 마지못해 허락하면 될 건데. 멍하니 에드워드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난 열성 오메가예요. 에드워드도 알다시피 그날 이후 히트 한번 오지 않았어요. 난 임신을 하지 못해요.”
가뜩이나 약한 자궁이었다. 이번 유산으로 그 기능을 상실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에드워드에게 다른 기회를 주어야 할 것이다. 제시카는 아직 그를 사랑할 테니,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뿐이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나는…….”
“중요해요. 나는.”
“……뭐?”
“아이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도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예요.”
감히 한 번의 사고로 결혼을 생각이나 했을까. 아이를 아버지 없이 키우고 싶지 않아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걸 알아도 받아들인 거였다.
하지만 아이는 이제 사라졌으니, 모든 걸 원래대로 할 순간이 온 거다.
“…….”
에드워드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한참을 버벅거렸다.
“날 사랑하잖아.”
“아니요.”
에드워드의 눈이 커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준영을 바라보았다. 그가 왜 이리도 놀라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말을 해야 했다. 이 착한 남자가, 동정심 때문에 자신의 곁에 남아있는 건 싫었다.
그의 과거를 제라드를 통해 듣고 더욱 확신했다. 상처 입은 오메가를 혼자 둘 만큼 모질지 못한 남자라는 걸.
“동경했어요. 너무나도 멋진 남자라, 나도 모르게 눈이 갔어요. 그게 사랑이라고 착각한 거예요. 하지만 이젠 알아요. 나도 꿈을 좇았던 거란 걸.”
“그러지 마. 준영. 제발……, 내가 잘못했으니까. 처음부터 널 택해야 했다. 내가 가진 모든 걸 놓지 않으려 욕심을 부렸던 내 죄야. 그러니…… 제발 나에게 사죄할 기회를 줘.”
에드워드가 다시 준영의 손을 잡아 쥐었다. 양손으로 마치 기도하듯 잡은 에드워드의 손끝이 한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가 약해진 모습조차 자신 때문인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다시 아름답고 화려했던 에드워드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만약 조금이라도 나에게 미안하다 싶으면 이혼해 주세요.”
생각보다 목소리가 더 담담하다. 다행이다. 진심이 통했을 것이다.
에드워드는 조금 힘들겠지만, 그의 곁에는 제시카가 있으니 금방 털고 일어날 것이다.
“준영.”
“아이…… 분명히 가질 수 있을 거예요.”
생각해 봤다. 그래서 알았다. 당연한 결과인데 자기 자신의 슬픔에 빠져 미처 에드워드의 아픔을 깨닫지 못했다. 자신만큼이나 아이를 원했던 그도 많이 힘들었을 거란 걸.
“아이 따위 바라지 않아.”
“왜 그렇게 말해요.”
“한 가지는 알겠어. ……너에게 난 양치기 소년이라는걸.”
“…….”
“이혼은 하지 않아. 그렇게 알아. 쉬도록 해.”
에드워드는 몸을 돌려 마치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멍하니 문을 바라보다, 문득 자신의 손등에 축축한 것이 묻어있어 손가락으로 훔쳤다.
물기였다. 준영은 그 한 방울의 물기를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