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과가 막 딴 것처럼 싱싱하다 싶었더니, 사과나무가 있었다.
사과가 너무 달아 하나 더 먹고 싶어 주방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발견했다. 빨갛게 잘 익은 사과가 참으로 탐스럽게 생겼다.
손이 닿는 부분은 이미 다 땄는지 딸만 한 게 없었다.
주변을 살피자 역시나 근처에 사다리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서둘러 사다리를 가져와 잘 고정한 후 계단을 올라갔다.
중간 정도 올라가 손을 뻗자 다행히 닿는다. 한 개만 따려고 마음먹었지만 어느샌가 2개 3개가 되어버렸다. 결국 양손 가득 딴 뒤, 흐뭇해하며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어째 흔들린다. 흠칫. 당황하기 무섭게 사다리가 옆으로 통째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바닥으로 추락하겠다 싶은 그때, 누군가가 준영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감사합……, 에드워드.”
안도하며 뒤를 돌아보다 더욱 놀랐다. 왜 에드워드가 이 시간에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의 표정이 매우 화가 나 있다는 거였다.
“도대체 제정신이야! 이 야밤에 혼자 다니는 것도 위험한데! 이런 위험한 짓을! 사과가 먹고 싶다면 사람을……!”
끝없는 잔소리가 이어졌다. 준영은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드디어 잔소리가 멈췄을 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준영의 사과에 에드워드의 표정이 굳어진다. 마치 허를 찔린 사람처럼. 에드워드는 준영을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주고서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가 왜 갑자기 저런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다. 그전에 왜 이곳에 나와 있는지 모르겠다.
멀어지는 넓은 등을 가만히 바라보다, 왠지 모르게 올라오는 감정에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고마워요!”
우뚝 멈춰 선 에드워드에게 다시금 외쳤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에드워드는 기어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자신의 말이 그에게 전해졌다는 것, 그거 하나에 만족하며 준영도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결국 늦잠을 자버렸다. 더 잘 것을 시끌시끌한 소리에 깨어났다. 길게 하품을 하며 침대에서 내려와 여전히 소란스러운 발코니로 가 밖을 내다보았다. 마침 처음 보는 고급 승용차가 멈춰 서는 게 보였다.
누구지? 이른 아침부터 손님이 오신 건가? 의아해할 때, 문이 열리며 내려선 인물에 당황했다.
에드워드의 어머니, 정확히는 제라드의 친모, 레베카였다. 놀란 준영은 그제야 헐레벌떡 겉옷을 걸치고는 방을 나섰다.
갑자기 온 걸까? 고용인들이 저렇게 나갈 시간이 있었다면 분명 미리 전언을 해 주었단 말일 거다.
왜 자신에게는 미리 언질을 해 주지 않았을까. 아주 조금 원망이 들었다.
“이제야 어슬렁거리며 내려오다니. 이젠 햄턴 가의 사람이다…… 이거니?”
계단을 채 내려가기도 전, 들려온 목소리에 멈춰 섰다. 차가운 음성에 절로 몸이 떨렸다. 보스턴에 살고 있는 그녀가 왜 이곳에 갑자기 찾아온 건지는 모르겠다. 에드워드의 말에 의하면 특별한 행사가 아니면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했었다.
그만큼 왕래가 거의 없다시피 한 사이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알려드리지 못했습니다.”
윌리엄이 나서자, 레베카의 표정이 더욱 싸늘하게 바뀐다.
“그럼 말을 바꾸죠. 도대체 지금이 몇 시길래 아직도 자고 있었지? 애초에 집안일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누가 온다는 것쯤은 바로 알지 않았을까?”
“……죄송합니다.”
구구절절 상황을 설명해본들, 애초에 그 말을 듣고 싶었던 건 아닐 거다. 준영의 빠른 사과에 레베카는 콧방귀를 끼며 발길을 돌렸다.
“목 아프니 그만 내려오지?”
그녀의 말에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홀 한편 소파에 앉은 레베카의 맞은편으로 가 섰다. 그녀는 앉으란 말도 하지 않은 채 다리를 꼬며 느긋하게 자세를 잡았다.
“일이 있었다지?”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내가 모르고 온 것 같아?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불화나 일으키다니. 너 참 대단하구나?”
다소곳하게 모은 양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정리되어갔다. 셀린느 일로 찾아온 게 분명했다.
레베카가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하는 준영을 불렀다.
“넌 손님이 왔는데 차도 내주지 않을 거니? 내가 가서 직접 가져올까?”
“……네?”
자신에게 한 말인가? 당황하며 주변을 살폈다. 고용인들도 의아해하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다시 윌리엄이 나섰다.
“커피로 가져올까요?”
“내가 윌리엄에게 말했던가요?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이 집안사람을 쫓아내기나 하는 식충이에게 한 말이지.”
“부, 부인.”
윌리엄이 당황하며 레베카를 말렸지만, 그녀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은 채 준영을 똑바로 응시할 뿐이었다.
“내가 틀린 말 했니?”
“……아닙니다. 커피 가져올까요?”
“네가 타와.”
“네.”
준영은 꾸벅 인사를 한 뒤 서둘러 주방으로 향했다. 고용인 한 명이 뒤를 쫓았지만, 레베카는 그조차 저지시켰다. 결국 준영은 혼자 주방 안으로 들어섰다.
제시카가 돌아가고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다. 다만 어느 순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되어 시간이 꽤 지났다는 걸 인지할 뿐이었다. 일어서야 하는데, 엉망이 된 걸 치워야 하는데. 하지만 머릿속 생각과 달리 몸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또 얼마나 흘렀을까. 어두운 객실 안의 불이 팟 하고 켜지고서야, 준영은 그제야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는 걸 깨달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놀란 에드워드의 음성이 들렸다. 준영은 그럼에도 일어서지 못한 채 가만히 그를 올려다만 보았다. 에드워드는 빠르게 다가오다 주춤 멈춰 섰다.
“피……, 얼굴이…….”
미간을 팍 찌푸리더니, 마치 화가 난 사람처럼 인상을 썼다. 아니, 아픈 사람같이 보이기도 했다. 에드워드는 질끈 두 눈을 감고는 침묵했다. 잠시 뒤 눈을 뜬 뒤 다가와 준영을 안아 들었다.
“일어설 수 있…….”
혼자 일어서려 했지만 에드워드가 더 빨랐다. 그는 준영을 데리고 소파 쪽으로 가 앉힌 후 이리저리 상태를 살폈다.
“의사를 부르지.”
“별거 아니에요. 스친 것뿐이고요.”
“흉이 질지도 몰라.”
“괜찮아요.”
이런 평범한 얼굴 누가 그랬는지 묻는 게 먼저일 건데 에드워드는 상처 치료가 끝날 때까지 묻지 않았다.
아마도 눈치를 챘나 보다. 서로에게 껄끄러운 말일 테니 침묵하는 것 같았다.
서운한 마음 반, 미안한 마음 반. 자신이 이렇게 이기적이라는 걸 다시 깨닫기도 한다.
감히 서운하다 느끼는 것부터가 제시카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몸이 차갑군. 옷이 젖었었나?”
“조금요.“
“……밥은? 보아하니 먹은 것도 없어 보이는데.”
“지우지 ……않을 거예요.”
“…….”
“만약 걸리적거린다면…… 멀리 갈 테니까. 제시카 씨 눈에 띄지 않게 멀리멀리 갈 테니까……. 지우라고만 하지 말아 줘요.”
아이를 원했으니, 차마 자신에게 지우라 하지 못한 걸 거다. 하지만 제시카가 강경하게 나간다면 분명 에드워드도 질 수밖에 없을 거다.
“하지 않아.”
“…….”
“멀리 갈 필요도 없어. 그러니 그냥 여기 있어.”
“제가 제시카 씨라면 정말로 싫을 거예요. 저라면…….”
그래, 자신이 제시카의 입장이라면 바람 상대가 얼마나 미웠을까. 단 한 번의 실수도 사고라는 이유로 덮어야 하는데다, 아이까지 가져버렸다. 상상만으로도 미울 것이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문제야.”
“……그러네요.”
단호한 말에 준영은 이번에도 씁쓸히 웃었다. 에드워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협탁 위 전화를 이용해 룸서비스와 청소 직원을 불렀다. 준영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으로 들어섰다. 에드워드는 준영을 부르지 않았다. 등 뒤로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는 끝까지 가만히 있었다.
그날 이후, 일주일 동안 에드워드는 준영을 찾아오지 않았다.
“너무 쓰네.”
벌써 일곱 번째. 레베카는 입은 댄 건가 싶은 커피 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다시 타 오렴.”
“부인…… 이건 좀…….”
“이건 좀?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러는 거죠? 윌리엄? 내 며느리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게 그렇게 잘못된 건가요?”
보다 못한 윌리엄이 나섰지만, 작정을 한 건가 보다. 레베카는 차갑게 응수하고는 다시 준영을 바라보았다.
“뭐 하니? 아님, 내가 직접 가서 타 와야 한다는 거니?”
“……아닙니다.”
입조차 대지 않는 커피 잔을 쟁반에 담아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기계를 쓰지 말라는 말에 다시 원두를 갈고, 뜨거운 물을 내렸다. 잘 우러난 커피를 쟁반에 받쳐 다시 거실로 나섰다.
“너무 뜨겁네. 이렇게 뜨거운 물에 우려내니, 커피에서 쓴맛이 올라오는 거지. 다시 타렴. 이런 건 식어도 먹지 못해.”
“…….”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고용인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 저택을 책임지는 집사 윌리엄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레베카에게 그 누구도 한마디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왜? 싫으니?”
“……아니요.”
다시 커피 잔을 쥐어 들었다. 벌써 1시간 가까이 반복하고 있자, 별거 아닌 일도 점점 힘에 부쳤다. 하긴, 청소 일을 할 때에 비하면 힘든 것도 아니다 싶다. 준영은 이번에도 별말 없이 주방으로 들어섰다.
정확하게 스물 한 번째가 돼서야 레베카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가만히 서 있는데도 몸이 덜덜 떨렸다. 손목이 욱신거린다. 아까부터 흘러내린 땀으로 한기가 들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나. 그만 가서 쉬렴.”
대수롭지 않게 물러가라는 손짓을 하는 레베카의 행동에 준영은 당황했다.
“하실 말씀이 있어서 절 부른 게…….”
“아니? 난 다만 커피를 마시고 싶었을 뿐인데.”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애초에 준영에게 무슨 말을 할 생각 따위는 없었던 거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준영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셀린느는 애교로 보일 정도로.
“올라가라는 말 안 들리니? 널 보고 있으니 겨우 입에 맞는 커피 맛이 떨어지는 기분이구나.”
아님 다시 타 오려고? 레베카의 비아냥에 결국 준영은 꾸벅 인사를 한 뒤 몸을 돌렸다.
한 발 한 발 걷는데 힘들다. 계단 하나 올라가는데도 몸이 덜덜 떨렸다. 아까보다 몸이 더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하루 종일 서 있거나 허리를 숙이는 일을 반복했더니 아래가 빠질 듯이 당겼다.
뜨거운 물에 몸을 좀 담그자. 그럼 나아질 거야. 하지만, 방에 당도하자마자 침대로 가 그대로 쓰러지듯 누웠다.
눈앞이 가물가물하다. 몸이 아픈 것도 있지만 긴장이 풀려서일까, 기다렸다는 듯 잠이 쏟아졌다. 식은땀에 옷이 젖어서일까, 축축하다.
갈아입어야 하는데……, 이불이라도 덮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만 할 뿐, 결국 몰려드는 잠을 이기지 못했다.
일주일 만에 찾아온 에드워드가 다짜고짜 준영에게 한 말은 바로 청혼이었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오지 않는 에드워드를 기다리는 것에 지쳐, 이제 이 호텔에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입고 왔을 때의 옷으로 갈아입은 뒤 밖으로 나서려다 마주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더 믿기지가 않았다.
“……네?”
“결혼식은 하겠지만, 불행히도 TV에서 보던 그런 화려한 건 할 수 없을 거야. 기자들은 물론 가까운 친척들 말고는 지인들은 몇 부르지도 않을 생각이지. 어쨌든 약혼녀와 파혼하자마자 하는 결혼식이니…… 그다지 좋게 보는 눈들이 없을 테니까.”
잠시 두 눈을 깜빡였다. 여전히 뇌가 아니, 심장이 받아들이지 못한 듯했다.
“에드워드. 저기 그러니까…….”
“난 지금 청혼을 하고 있는 중이지. ……나와 결혼해 주겠어?”
형식적인 멘트와 함께 가슴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어 뚜껑을 열었다. 설마 했지만 역시나 보석 상자였다. 에드워드는 반지가 담긴 상자를 준영이 보이도록 내밀었다.
심플한 디자인의 반지 위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먼저 눈에 띄었다.
“난 아마…… 사랑을 해 줄 수는 없을 테지. 하지만 이것만은 약속하겠어. 내 아이를 사랑해 줄 것이고…… 아이의 어미인 널, 평생토록 배우자로 인정하고 살겠다고.”
형편없는 청혼. 그럼에도 눈물이 흘러나왔다. 벅차올랐다. 에드워드의 옆에 평생 있어도 된다는 말은 그 어떤 청혼보다 달콤하고 감미로웠다.
그래서 감히, 누군가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걸 알면서도 준영은 그 반지를 받아들였다.
“네.”
그렇게 2주 뒤, 준영의 이름 뒤에는 햄턴이란 성이 쓰이게 되었다.
이마를 짚는 손길이 차갑다. 넓고 따뜻한, 그리고 투박한 손이 마치 할머니 같다. 눈을 뜨고 싶지만 역시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가버릴 것만 같아 온 힘을 다해 소리 내어 보았다.
“할머니…….”
준영의 작은 소리를 들었나 보다. 할머니가 괜찮다며, 이제 아프지 않을 거라며 웃으셨다.
이번에는 가슴팍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토닥이던 손길이 떠나가는 게 너무 슬퍼 저도 모르게 울먹였다.
“할머니……, 가지 마. 가지 마…….”
내기 다 해 줄게. 할머니 병수발 내가 다 받아줄게. 절대 힘들다고 투정하지 않을게. 그러니깐 제발……, 날 혼자 두고 가지 마.
이미 돌아가신 할머니가 자신의 침실을 찾아올 리 없다는 걸 알지만, 이 모든 게 꿈인 걸 알지만 그래서 더욱 깨고 싶지 않았다.
익숙한 벨 소리에 눈을 떴다. 멍하니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다, 다시금 귓가에 퍼지는 벨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충전 중인 핸드폰이 협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아보지만, 금방 꺼졌다.
……제라드?
한창 쇼 준비로 바쁘다고 하던데 왜 전화를 한 걸까. 의아해할 때 손안의 핸드폰이 다시금 켜지며 울려 퍼졌다.
-이제야 받는 거야? 설마 아직도 아픈 거야? 아기는? 내 조카는? 별일 없지?
“제라드?”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하다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달라 당황했다. 큼큼 기침을 할 때 다시 들려온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미친 여자가 널 찾아갔다며? 저택이 아주 난리가 났다던데. 맞아?
“난……리요?”
커피를 무한으로 탄 건 맞다. 하지만 그게 왜 난리라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목소리 보니 아직 몸이 안 좋은가 보네. 제길 미친년. 거기가 어디라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혹시 말 중에 미친년이라는 게 제라드의 어머니를 지칭하는 건가 싶어 의아해할 때 갑자기 귓가의 폰이 공중에 두둥실 떠올랐다.
“네 말대로 아직 환자야. 끊어.”
에드워드였다. 도대체 언제 안으로 들어온 건지 일방적으로 통보 후 전화를 끊어버렸다.
에드워드가 자신의 방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야 하는 건지, 아니면 한낮인 것 같은데도 그가 출근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당황해야 할지 모르겠다.
에드워드는 핸드폰을 아주 꺼버리고는 다시 협탁 위에 올려둔 뒤 준영을 돌아보았다.
뜻 모를 표정으로 준영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지은 죄도 없는데, 괜스레 찔려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이번에도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미안해요.”
고개를 숙이고 있어 에드워드의 표정을 읽을 길이 없지만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레베카 씨에게 제대로 대접을 못 해 드리고……, 그…….”
“그때도 말했을 텐데.”
“네?”
“그녀에 대한 건 그냥 무시해버리라고. 왜 멍청하게 시키는 대로 한 거지? 장장 몇 시간 동안 커피를 몇 번이고 타 오라고 시키는 짓을 그냥 군소리 없이 한 이유가 도대체 뭐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되묻는 에드워드의 질문에 준영은 입을 열려다, 결국 다물었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일단 스스로가 몰랐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했다. 나중에는 오기로 했다. 마지막에는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아 슬퍼서 했다.
그 누구도 그만하라 말해 주지 않았다. 집사도 두어 번 말을 건네다 다물었다.
이해는 한다. 누가 봐도 위치는 회장의 부인인 레베카가 더 높다.
어찌 굴러들어온 돌 따위인 준영에게 신경을 쓸까.
어찌 언제 쫓겨날지 모를 청소부 출신 오메가의 편을 들까.
원망치 않는다면 거짓이지만 이해는 갔다.
“또 혼자 생각을 하고 결론을 내는군.”
에드워드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당황했다. 예상치 못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드워드를 가만히 바라보다, 결국 의문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대답은 바로 하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말없이 준영을 응시하다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쌌다.
움찔.
따뜻한 온기에 한 번 놀랐다.
생각 이상으로 손이 크고 투박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손으로 뺨을 감싼 채 엄지로 눈 바로 밑 피부를 살살 훑었다. 예전 제시카가 던진 유리컵에 스쳐 다쳤던 그 상처 부근이란 건 조금 늦게 깨달았다.
준영은 그저 밀랍이라도 부어진 것처럼 굳은 채 에드워드의 행동을 지켜만 보았다.
“예전, 너에게 청혼할 때 그랬지.”
“…….”
“널 내 부인으로서, 네 아이의 어미로서…… 최고의 대우를 해 주겠다고.”
어찌 잃을까. 평생을 곁에 두겠다 말해 준 건 준영에게 가장 큰 선물과도 같았다.
“그 말을 정정하지.”
“네?”
무슨 말인가 할 때, 에드워드의 손이 치워졌다. 따뜻했던 손길이 떨어지자, 허전함까지 느껴졌다. 에드워드는 쉬라는 말과 함께 방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레베카를 처음 만난 건, 급하게 치른 결혼식장에서였다. 정말로 채 50명도 되지 않는 작은 수의 지인만 모은 채 결혼식을 치렀다.
그럼에도 준영에 눈에는 모든 게 크고 화려하게만 느껴졌다. 무엇보다 사람 키만 한 3단 케이크는 아직도 잊히지가 않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결혼식이 끝난 후, 화장을 지우기 위해 대기실로 향하였다.
신부 도우미 두 명이 준영에게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시간이 촉박해서 아쉽다. 제대로 준비했다면 정말 화려하게 할 수 있었을 건데, 등등. 정말로 정신없이 말들을 쏟아내었다.
“그래도 햄턴 가는 햄턴 가네요. 아무리 급하게 해도 죄다 최고급이니. 지금 입고 계신 턱시도도 유명 디자이너를 닦달해서 급하게 만든 거라고 하던데. 참, 카라에 그 보석, 진짜 다이아래요.”
“그것만이야? 여기 결혼식장도 사실 예약 안 하면 절대로 대여 안 해 주는 곳인데 햄턴 가라서 해 준 거라잖아.”
전혀 몰랐는데, 듣고 나니 갑자기 옷이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다행히 턱시도 상의부터 벗겨 주어 안도했다. 그렇게 도우미에게 그다지 원치 않는 정보까지 전해 듣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잠시만요.”
도우미가 알아보겠다며 문 쪽으로 갔지만 그보다 먼저 문이 열렸다.
“이봐요! 옷 갈아입는 중이면 어…….”
일방적으로 신부대기실 문을 연 행동에 도우미가 화들짝 놀라며 따지려 들다 헉하고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잠시 할 얘기가 있으니 나가 있도록 해요.”
안으로 멋대로 들어선 레베카는 일방적으로 도우미들을 쫓아낸 후 천천히 준영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일어서려는 준영의 어깨를 꽉 잡아 눌렀다.
준영의 어깨를 잡고 있는 손아귀에 압력이 가해졌다. 얇은 셔츠 위로 긴 손톱이 여실히 느껴졌다.
“얼마나 대단한 상판이기에 감히 제시카를 밀어냈나 했는데…… 결론은 하나구나.”
“네? 윽……!”
손아귀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압력보다 화려한 네일아트가 되어있는 날카로운 손톱이 눌러 살을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보는 눈빛이 그다지 호의를 담고 있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적의에 가득 찬 줄은 예상치 못했다.
“에드워드 그놈이 드디어 나에게 칼을 내밀었다는 거.”
“그만…….”
언뜻 셔츠 너머 피가 비친다 싶은 그때, 쾅 하고 문이 열리며 에드워드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와 동시에 레베카가 빠르게 떨어져 자세를 바로 했다.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왜라니? 섭섭하구나. 보다시피 내 며느리에게 인사를 한 것뿐이란다.”
에드워드의 눈빛이 더욱 날카롭게 바뀌었다. 흉흉한 페로몬에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준영이 몸을 웅크리자, 빠르게 걷어졌다.
“그래도 네 새끼를 밴 오메가라고 어지간히 챙기는구나.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하는 거라고 하지 않았니?”
“당신 말대로…… 내 아이를 가진 오메가이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시어머니를 편히 여길 며느리는 없지요. 나가십시오.”
어서 나가라는 듯 옆으로 비켜서는 에드워드를 가만히 보던 레베카는 고개를 돌려 준영을 바라보았다.
“그럼, 또 보자꾸나.”
그녀는 준영에게 싱긋이 웃어준 뒤에야 발길을 돌렸다.
레베카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에드워드에게 들킬까 서둘러 걸치고 있던 가운의 옷매무새를 바로 했다. 아슬아슬하게 살짝 비치던 피가 가려져, 에드워드는 미처 보지 못했다.
“그녀가 너에게 뭐라고 했지?”
“아무것도…….”
행여나 가운이 내려갈라 더욱 꽉 쥐며 고개를 저었다. 에드워드는 말없이 준영을 지켜보다 다가와 걸치고 있던 가운을 잡아 옷매무새를 잡아주었다. 잠시 당황했지만 상처를 눈치 채고 한 행동은 아닌 듯 보였다.
“큰 행사가 아니면 마주칠 일은 없을 거야. 그래도 혹시나 미리 말해 주지. 레베카 그녀가 찾아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더라도 무시해. 넌 그래도 돼.”
“……네.”
어떤 의의도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된다는 말은 기뻤다.
“서둘러 끝내라고 해야겠군. 슬슬 피곤해질 테니. 그럼. 호텔에서 만나도록 하지.”
에드워드는 무심한 말투로 인사를 건넨 후 대기실을 나섰다. 이어 도우미들이 돌아와 다시 준영의 정신을 쏙 빼놓을 때까지 거울을 통해 에드워드의 뒷모습을 그렸다.
웬일로 연락이 온 제이크를 만나기 위해 회사를 벗어날 때였다. 일 층 로비를 가로지르다, 왠지 달콤한 향이 풍겨와 우뚝 멈췄다.
마치 은은한 꽃향기 같았다. 너무 달지도, 그렇다고 약하지도 않았다.
하루 종일 이 향기만 맡아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방향제를 바꾼 건가?”
잘 가던 에드워드가 갑자기 멈춰 서서 늘어놓는 소리에 수행비서 팀버가 당황했다.
“네?”
“아니, 향이 좋아서.”
“향이요?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요?”
“안 난다고? 이렇게 짙은데?”
에드워드의 되물음에 팀버는 아주 대놓고 코까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지만, 역시나 나지 않는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아차 했다. 어디선가 히트가 온 오메가가 생긴 거구나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로비는 너무 한가로웠다.
자신이 알기로는 이 회사의 간부들 대부분이 알파다. 자신뿐만 아니라, 입구 쪽에서 들어서고 있는 저 남자도 알파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유유히 통화를 하며 걸을 뿐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저기…… 상무님. 이제 슬슬 가셔야 합니다만…….”
“아, 그러지.”
자신만이 맡은 달콤한 향기가 의문스러웠지만, 일단 약속이 먼저였다. 팀버의 말대로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 뭐, 제이크야 조금 늦어도 괜찮지만, 그로 인해 약속들이 미뤄지게 된다면 깐깐하기로 소문난 자신의 수행비서에게 하루 종일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 에드워드는 발길을 더 빨리했다.
또다. 달콤한 향.
출근길, 또다시 느껴지는 향기에 멈춰 섰다. 또냐는 듯한 표정을 짓는 팀버를 무시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은은하다시피 한 향이 자욱하게 깔린 게 시야에 보일 정도다. 물론 그럴 리는 없지만, 그만큼 에드워드에게는 강렬했다.
도대체 이건 뭐지? …… 페로몬의 일종인가? 하지만 만약 오메가의 페로몬이라면 분명 다른 알파들도 맡았을 텐데…….
영문을 몰라 하는 그때, 한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청소부였다. 빗자루를 들고 로비를 쓸고 있는 청소부는 체격만 봐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정도로 왜소했다. 가슴이 없어서 그나마 남자일 거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노크 소리가 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언제 들어온 건지 바로 코앞에 서서 다시 책상 위에 노크를 하는 제시카의 모습에 피식 힘없이 웃었다.
“언제 왔어?”
“방금요. 무슨 생각을 한다고 이렇게 진지해요? 무서울 정도네?”
“아, 회의 건 때문에.”
“정말 재미없어라. 그럴 때는 날 생각했다고 해야죠.”
제시카의 지적에, 에드워드는 피식 웃었다.
“정정하지. 당신 생각을 하느라 바빴어.”
“정말이지, 말이나 못 하면. 그래서 언제 끝나요? 오늘 저녁 나와 약속한 걸 잊은 건 아니겠죠?”
에드워드의 다리 위로 올라와 앉으며 제시카가 요염한 표정을 지은 채 질문을 던졌다. 그럴 리가 있겠냐며, 오늘따라 퇴근이 늦어질 뿐이라고 대답하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아름다운 여성이다.
물결치는 금발, 성숙해 보이는 외모. 자신의 분수를 잘 알고 또한 강단이 있을 때에는 한없이 카리스마를 보일 때도 있었다.
재색겸비란 게 어떤 건지 보여 주는 여성이었다. 비록 레베카의 술수인 걸 알면서도 선택을 하게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여성이었다.
“그럼 퇴근 시간까지 한 시간 남은 거니까, 난 방해하지 않도록 할게요. 커피숍에서 기다릴 테니, 늦으면 안 돼요.”
에드워드의 볼에 입맞춤을 한 뒤 제시카는 손을 흔들며 상무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서야 에드워드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듯이 매만졌다.
낮에 본 그 청소부가 자꾸 어른거렸다. 못생겼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뛰어난 미색을 겸비한 것도 아니다.
그 상태에서 살이 조금 더 찐다면 꽤 미인 축에 속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말라도 너무 말라 오히려 안쓰러운 느낌이었다.
심지어 청소를 하다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움찔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이곳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보였다.
혹시…… 오메가일까. 작디작고,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생물 같은 느낌을 보면 분명 오메가일 것 같기는 했다. 오메가라면 으레 억제제를 먹을 것이다. 냄새가 진하게 날 정도라면 특히나 더. 그저 단순히 히트가 오기 전의 미세한 향을 자신이 먼저 맡았을 거다. 다른 알파들과 달리 우성 알파는 후각도 몇 배로 더 예민하니까.
그래, 그것뿐일 거다.
한 달 정도 마주치면서 깨달은 건, 그 청소부의 몸에서 늘 같은 향이 난다는 거였다. 특별히 더 강하거나 더 약해지지도 않고 늘 일정하게 향이 묻어 나왔다.
그래서, 무언가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모니터를 보는 내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탁탁 타다닥.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 손가락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서야, 자세를 바로 하고 마우스를 잡았다. 막 화면을 전환하려다 다시 멈췄다.
운명의 짝.
그 옛날, 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분노에 차 소리를 지르는 에드워드에게 아버지는 그렇게 말을 했었다. 운명의 짝을 만나는 순간, 그 모든 이성이 마비가 될 거라고. 그저 알아볼 수 있게 될 거라고.
하지만 운명의 짝은 몇몇에게 내려진 축복일 뿐이라고. 어쩜 평생 누군지도 모른 채 살아갈 수도 있을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여겼다. 그 어린 시절에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저 구차한 변명일 뿐이라고 치부했다.
“상무님?”
오늘 일정을 보고하던 비서가 대답을 하지 않는 에드워드의 상태를 눈치채고는 의아해하며 불렀다. 그럼에도 에드워드는 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아, 그래요. 그렇게 진행하도록 해요.”
뒤늦게 대답을 한 후 비서를 내보내자마자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였다. 연거푸 얼굴을 비비다시피 한 뒤 이마를 짚었다.
두통이 일기 시작한다. 자신의 육체가 원하는 게 뭔지를 안다. 그럼에도 차마 엉덩이를 떼지 못했다.
어찌 그러겠는가. 감히 어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이…….
일각에서는 에드워드의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뜬 거라고 안다. 하지만 쉬쉬할 뿐 가까운 이들은 모두 안다.
어머니는 슬픔과 우울증으로 세상을 떴다는 걸.
어머니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새벽빛이란 표현이 어울릴 것 같은 붉은 금발과 하늘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꽃향기를 맡으며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한숨이 절로 나올 만큼 미인이었다.
하지만, 돌아가시기 직전 어머니는 두 번 다시 떠올리기 싫을 만큼 바뀌어 있었다.
미라가 저러할까.
방금 눈을 감은 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마르고 말랐다. 보지 말라는 집사의 말을 무시하고 뛰어들어갔다가, 그대로 주저앉았었다.
자신의 기억 속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래서 인정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사실 진짜 어머니는 따로 다른 곳에 있을 거라고, 멍청하게도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정말로 돌아가신 걸 인정하게 된 건, 일 년 정도 더 지나서였다.
“레베카가 나보고 뭐라고 한 줄 알아? 하! 한번 뗀 성인데 왜 굳이 다시 다냐잖아! 그게 말이 돼?!”
오래간만에 모인 가족 모임. 정확히는 형제들의 모임이다.
하지만 늘 그랬듯 셀린느의 투덜거림으로 시작되었다. 제라드에게 들으란 듯이 일부러 레베카를 걸고넘어지며 짜증을 내어보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에드워드가 금지했기 때문에 핸드폰을 보지는 못했지만, 음악만은 여전히 키워놓고 있어 그저 흥얼거리며 음식을 먹을 뿐이었다.
“야! 내가 말하잖아!”
“그래서 듣고 있잖아. 잘 씹으면서.”
“이게!”
또다시 언성이 올라갔다. 어릴 때에는 그래도 계속해서 지적했지만, 이제는 자신도 지쳤다. 에드워드는 둘이 어떤 말을 주고받든 신경을 끊은 채 묵묵히 음식을 먹을 뿐이었다.
“하나 질문.”
“……뭐지?”
씩씩거리며 열심히 시비를 거는 셀린느를 무시하며 제라드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저런 과장된 몸짓은 어린 시절부터 셀린느와 부딪치며 스스로 터득한 방법 중 하나였다.
이런 식으로 굴면 셀린느가 치를 떨 정도로 싫어하는 걸 제라드는 너무나 잘 안다.
“이렇게 지지고 볶고 싸우는데 굳이 다 모여서 밥을 먹어야 하는 이유는?”
“그래! 테드! 나도 이해가 안 돼! 저런 녀석과 언제까지 계속 밥을 먹어야 하냐고!”
“나 역시도 그대로 돌려주지. ……싫으면 햄턴이란 성을 떼면 된다고.”
이 집안의 규칙과 규율을 무시하고 싶다면, 그 성을 떼고 나가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둘은 역시나 침묵으로 답할 뿐이었다.
에드워드는 조금 남은 스테이크를 마저 입에 넣은 뒤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런 에드워드를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보던 셀린느가 뭔가 생각이 난 것처럼 되물었다.
“참, 제시카와 둘이 언제 결혼해? 제시가 서운해하는 것 같던데.”
막 한 모금 더 마시려던 와인 잔을 천천히 내려놓고는 가만히 셀린느를 보았다.
“킥킥킥. 졸라게 멍청하다니까.”
에드워드의 심정을 대변하듯 제라드가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셀린느는 또 불같이 화를 냈지만, 그녀가 만약 모든 사실을 안다면 경악하다 못해 목덜미를 잡고 쓰러질지도 모르겠다.
제시카가 누구의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면 말이다.
“아마도 곧…… 하겠지.”
“그 말만 벌써 몇 번째야. 제시카 같은 여자 없어. 솔직히 내가 탐날 정도인데. 테드가 싫으면 내가 데려갈까?”
“이혼 경력 더 쌓으려고?”
“야…….”
“너와 결혼했던 오메가들이 어찌나 불쌍한지……. 저런 여자 비위 맞추기가 쉽지가 않았을 건데.”
“야!”
“그만. ……이제 그만해.”
비아냥거리는 제라드에게 다시 덤벼들려는 셀린느를 저지시켰다. 셀린느는 한없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에드워드를 노려보았다.
“저놈은 왜 혼내지 않는 건데? 테드는 늘 그랬어!”
“그만하자. 셀린느.”
“…….”
여전히 못마땅하지만, 그럼에도 셀린느는 늘 에드워드의 말을 잘 따랐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에드워드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모르면서, 그녀는 늘 에드워드를 졸졸 따라다녔다.
자신에게서 부모님을 뺏어간 그 여자를 꼭 닮은 얼굴로 말이다.
* ♟ *
이제는 몸이 어느 정도 나아져 산책 겸 일부러 일 층으로 내려갔다. 아래로 내려가자, 마침 홀을 청소하던 고용인들이 갑자기 행동을 멈추더니 꾸벅 90도로 인사를 건네어왔다.
“기침하셨습니까? 햄턴 부인.”
“네? 아, 네.”
얼떨결에 받은 인사에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은 준영의 대답을 듣고서야 다시 청소를 이어갔다.
예전에는 준영이 오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일을 이어갔던 이들이 갑자기 왜 인사를 하나 싶었지만, 기분 나쁜 행동은 아니라 깊게 생각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등 뒤에서 들려온 인사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당황했다. 처음 보는 훤칠하고 준수하게 생긴 미남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인사를 돌려주는 것도 잊은 채 되물었다.
“누구신지…….”
“오늘부터 이곳 저택을 총괄 책임지게 된 크리스토퍼 모리슨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크리스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네? 저택을 책임? ……윌리엄 씨는요?”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총괄 책임자는 윌리엄이었다. 왜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뀐 건지 모르겠다.
“윌리엄은 내일모레면 일흔이지. 이제 은퇴를 할 때가 되었을 뿐이야.”
대답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놀라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이제 출근하세요?”
“이것저것 처리할 문제가 많아서 조금 늦어졌어. ……아침을 지금 먹으러 내려온 건가? 왜 사람을 부르지 않고?”
시간이 벌써 11시다. 아침을 거르게 된 걸로 또 잔소리를 할까 했지만, 전혀 생각지 않은 말이 나왔다.
“배가 많이 고픈 게 아니라면…… 배웅, 해 주지 않겠어?”
잘못 들은 건가 했다. 이 저택에 와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굳이 배웅 따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에드워드의 말이 마치 배웅을 받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들려, 두 번 되묻지 않았다.
“싫으면 괴…….”
“아니요! 할래요! ……배웅.”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가 아차 했다. 구석에서 청소를 하던 고용인들도 행동을 멈춘 채 멀뚱히 준영을 바라보았다. 창피함에 고개를 푹 숙였다.
“주인 내외가 대화 중인데 급한 게 아니라면 자리를 비켜 주는 게 센스가 아닐까요?”
크리스의 지적에 고용인들이 황급히 도구를 쥐고는 후다닥 어딘가로 사라졌다. 크리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곳 분위기 뜯어고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군요.”
“잘 부탁하지. ……그럼.”
크리스의 말에 대답 후 준영은 에드워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뜻을 몰라 멀뚱히 바라보자, 반대 손으로 준영의 손을 잡아 펼쳐진 손 위에 올렸다.
“가지.”
얼떨결에 에드워드와 손을 잡은 채 밖으로 향했다.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한다. 너무 긴장해서일까. 손에 땀이 차기까지 했다.
현관문을 나서, 대기 중인 차 앞까지 걸어간 에드워드는 차마 고개도 제대로 들고 있지 못하고 있는 준영을 나직이 불렀다.
“저녁, 별일이 없다면 외식이나 할까 하는데 괜찮을까?”
“네? ……네?”
얼떨결에 되묻었다가 더 이해가 되지 않아 다시 되물었다. 한걸음 뒤에 서 있던 크리스가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데이트 신청이지 않습니까.”
“데이트? ……데이트요?”
크리스의 말에 말도 안 된다며 웃다가, 여전히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에 이번에는 에드워드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에드워드는 감정을 알아볼 수 없는 눈빛으로 준영을 마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명칭을 붙이자면 그런 거겠지. ……데이트하겠어?”
“……네.”
“그럼, 저녁 시간쯤 되면 데리러 올 테니, 준비하고 있도록 해.”
이번에도 멍하니 쳐다보다가 한 템포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보 같은 행동이지만, 에드워드는 비웃지 않았다. 오히려 희미하지만 분명 미소를 띠고 있었다.
에드워드가 탄 차가 멀어지는 내도록 준영은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 뒤에서 여전히 대기 중이던 크리스가 그를 부를 때까지 말이다.
“햄턴 부인? 바람도 찬데 이만 들어가시죠. 그리고 아기씨를 위해서라도 식사를 하셔야지요.”
“저기 크리스 씨. ……이름 부르셔도 돼요.”
“영광입니다. 그럼 준영, 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네.”
“한국 이름이군요. 대학교 때 한국어를 제2 외국어로 배운 적이 있답니다. 그때도 한국어 발음이 참 예쁘다 생각했었죠. 준영이란 이름은 뭔가 부드러운 느낌이군요.”
“그런가요. 그냥 고아원에 버려졌을 때, 유일하게 제 신분을 알려 주던 이름이래요. 그래서 뜻은 잘 몰라요. 한국 이름은 한자로 보통 쓰는 편인데 그 뜻이 정말 많더라고요.”
대답을 해 주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 고개를 돌렸다가 아차 했다. 별생각 없이 고아 출신이라고 말해버렸다. 할머니가 어릴 때부터 고아란 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교육한 덕분에, 당당히 말을 했더니 습관이 된 탓이다.
셀린느가 고아인 게 자랑이냐며, 햄턴 가의 안주인이 되었으면 부끄러운 줄 알라며 윽박을 지른 후에는 굳이 소개에서 뺐었다. 하긴, 그날 이후 누군가에게 자신을 소개할 일도 없었지만.
“고아원에서는 발견된 날을 생일로 한다고 들었습니다. 맞나요?”
“……네.”
“그럼, 준영이란 이름의 뜻 역시도 마음에 드는 걸로 지으면 되는 게 아닐까요?”
“그러게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멍하니 대답하다, 이내 웃었다. 크리스의 말이 맞다. 그런 룰 따위 있지도 않은데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이왕이면 에드워드 씨에게 지어 달라 해보십시오. 아마 최선을 다해 고르지 않을까 싶군요.”
“네.”
감히 그런 부탁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굳이 이런 말을 할 이유가 없어 준영은 그러겠다 답하고는 크리스와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에드워드가 곧 올 시간이 다가와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섰다. 하루 종일 시간이 그렇게 안 갔는데, 결국 이 시간이 오기는 왔다.
서둘러 샤워를 마친 후 수건을 꺼내려다 언뜻 하얗게 색이 입혀진 거울이 시야에 들어와 행동을 멈추었다.
수증기로 인해 뿌옇게 바래진 거울을 손바닥으로 닦았다. 순식간에 다시 습기가 차올랐지만 그래도 방금 전보다는 잘 비쳤다.
배가…… 그래도 조금 나왔네.
어느새 임신 17주였다. 옆으로 서서 보자, 확실히 살짝 배가 튀어나왔다. 옷으로 덮으면 전혀 티가 나지 않아, 아직도 낯설다.
“조금…… 딱딱한가?”
예전 자신의 기억 속 배와는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뭔가 배 근육이 뭉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딱딱한 배를 살살 만지다, 조금 춥다 싶어 서둘러 가운을 걸쳤다.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밖으로 나오다, 우뚝 멈추었다.
어……?
가만히 서서 집중해 보지만,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 역시 잘못 느낀 거구나 하고 발을 다시 옮겼다가 다시 굳었다.
확실했다. 이번에는 분명히 깨달았다.
준영은 서둘러 침대로 가 앉아 자신의 배에 손바닥을 얹었다.
꿈틀, 꿈틀.
미세한 움직임이 열심히 이어졌다. 너무 약해, 손바닥에 느껴지기보다 배 속이라 알아챈 것에 더 가깝다.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더 느껴보려 양손바닥으로 배를 천천히 매만졌다.
“아하하. 세상에……, 안녕. 혹시 나한테 인사해 주는 거니?”
아주 작은 움직임. 꾹 하고 눌러대는 느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각.
처음 아기를 가졌다는 걸 알았을 때보다, 더 크고 벅찬 감동에 휩싸였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에드워드가 안으로 들어섰다. 준영은 그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찼어요!”
“……뭐?”
“아기가! 그러니깐! 발을! 아……, 그러니까…….”
너무 기뻐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다, 에드워드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황급히 가운을 여몄다.
사고로 관계를 맺기는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잘 기억도 나지 않는 그 날 이후 서로의 몸을 보거나 보인 적이 없었다.
말 그대로 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결혼이었다.
만에 하나 혹시라도 불규칙적인 히트 사이클이 온다면 약은 태아에게 해로우니 치료 차원에서 부부관계를 맺을지는 몰라도 멀쩡한 상태가 이어져 그날 이후 한 침대를 쓴 적은 없었다.
언감생심 바랄 수도 없었다.
너무 마른 상체가 부끄러워 가운을 여미고는 무안함에 멋쩍게 시선을 돌렸다.
“일찍…… 오셨…….”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에드워드의 신발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손이 준영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 살며시 들어 올려지는 그때, 에드워드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부드러운 촉감이 먼저 입술 끝에 닿았다.
쪽, 하고 입술을 쪼는 듯한 입맞춤이 몇 번이고 이어졌다. 살짝 벌려진 입술 틈새, 혀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너무 놀라, 주춤 물러서려 했지만, 에드워드의 팔이 어느샌가 준영의 허리를 감싸고 있어 저지당했다.
잔뜩 굳은 준영을 달래듯, 부드럽게 입속을 헤집는다. 치열을 훑고 입천장을 긁고, 느껴보지 못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헐떡였다.
숨을 꼭 참고 있던지라, 어느새 숨이 가빠졌다. 어느 타이밍에 숨을 쉬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드디어 에드워드의 입술이 떨어졌다.
“……키스. 해 본 적 없나 보군.”
이 나이가 되도록 키스 한 번 못 해봤냐는 말처럼 들려 얼굴을 붉혔다.
“영광이군.”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다른 의미로 얼굴을 붉혔다.
“코로 숨을 쉬면 돼. ……천천히.”
다시 입술이 겹쳐진다. 이번엔 무서워 도망가는 준영의 혀를 어르듯 엉켜든다. 코로 숨을 쉬면 된다고 하지만, 이어지는 농염한 키스는 그 간단한 일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준영이 익숙해질 때까지 키스는 이어졌다.
푸아그라를 처음 먹은 느낌은, 부드럽다였다. 담백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에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맛있어.”
“마음에 드니 다행이군.”
준영의 반응에 에드워드가 작게 입꼬리를 올렸다. 마치 미소를 짓는 것처럼.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오기 전 한 키스로 자꾸만 자기 좋은 쪽으로 해석을 해버리고 있었다.
이러다 실망하면 정말로 아파할 거면서도 생각을 멈출 길이 없다.
“와인은 안 될 거고…… 무알코올 칵테일이라도 시킬까?”
“그냥 주스면 돼요.”
“생과일 주스로 하지. 사과를 좋아했던가?”
놀리는 건지 그냥 한 말인지 모르겠다. 에드워드는 표정이 진중하기는 해도 잘 드러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자신과 있을 때에는 늘 저렇게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웨이터를 불러 사과 주스를 주문한 에드워드가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꺼내었다.
“어머니가 사과를 좋아하셨지.”
“네?”
“날 임신했을 때, 어머니가 고향에 있는 사과를 먹고 싶다고 하자마자, 외할아버지가 나무를 보내 주었어.”
“네? 나무요?”
사과를 보내 준 게 아니고, 나무? 뭔가 스케일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원래는 세 그루였는데 나머지 두 개는 시름시름 마르더니 결국 죽어버리더군. 그래도 하나는 아직 싱싱하게 잘 버티고 있어.”
“귀……한 사과네요.”
그런 귀한 걸 멋대로 땄었다니. 물어라도 볼걸.
“미…….”
“어머니가 기뻐하실 것 같아.”
“네?”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던 준영보다 에드워드의 말이 더 빨랐다.
“사과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거든. 늘 남아돌아서, 요리에 쓰다 쓰다 고용인들이 나눠 가진 걸로 알아. 그랬는데 자신의 손주를 임신한 네가 잘 먹는다는 걸 알면 정말로 좋아했을 거야.”
더는 한계였다. 준영은 급히 고개를 푹 숙였다. 눈물이 멋대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모처럼 좋은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갑자기 왜 이렇게 다르게 행동하는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 달콤함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울고 싶지 않았다.
“주문하신 사과 주스를 가져왔습니다.”
다행히 직원이 다가와 묘하게 적막하던 분위기가 풀렸다. 준영은 거의 물을 마시듯 주스를 마셨다가, 다시 놀랐다. 자신이 알던 사과 주스란 건 마트에서 파는 가공된 음료가 다였다.
벌컥벌컥 마신 게 아까울 정도라 이미 반이나 사라진 주스를 보며 아쉬워할 때 에드워드가 다시 웨이터를 불러 하나를 더 시켰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하는 걸 눈치챈 건지 에드워드는 산책을 할 것을 권해왔다.
오늘이 정말 내 생일이었던가 할 만큼 좋은 일이 연속으로 이어져 너무나 행복했다. 그러다 뒤늦게 자신이 태동을 느꼈던 걸 떠올리고는 나란히 걷고 있던 에드워드를 돌아보았다.
“저기…….”
타이밍이 어찌나 좋은지. 아까부터 말을 꺼내려고 할 때마다 일이 생겼다. 조용한 강가에 울려 퍼지는 벨 소리에 에드워드가 미안하다 말하고는 핸드폰을 들고 구석으로 향했다.
적당히 떨어진 곳에 서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데 너무 진지하다.
준영은 멀뚱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저 멀리서 걸어오는 한 가족을 보았다.
이제 5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와 손을 잡은 아빠, 그리고 유모차를 미는 엄마. 단란한 가족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언젠가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에드워드와 함께 아이와 손을 잡고 산책을 나오는 모습을 그리다 괜스레 부끄러워 고개를 휙휙 저었다.
“미안한데 가봐야 할 것 같아.”
통화가 끝난 건지 에드워드가 다급히 다가와 사과를 했다. 정말로 괜찮다는 준영을 말없이 바라보다, 어딘가로 연락을 취했다.
곧 얼마 가지 않아 익숙한 차가 강가 도로에 정차했다.
“타고 집으로 먼저 가도록 해.”
“택시 타면 되는데…….”
“임신한 오메가가 혼자 택시를 탄다고? 세상이 얼마나 험악한지 알아? 잔말 말고 차를 타고 가도록 해.”
다그치듯 버럭 소리를 지르는 에드워드의 말에 준영은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져 고개를 숙였다.
“……화내는 게 아니야. 미안. 소리 질러서.”
어깨를 잡은 손길이 부드럽다. 준영은 자신의 어깨를 잡은 손을 보다, 다시 에드워드를 보았다. 곤혹스럽다는 듯, 그리고 미안하다는 듯 당황하고 있는 에드워드를 보자 방금 전 작은 서운함이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나도 생각이 짧았어요. 에드워드의 말이 맞아요. 오메가 혼자 밤에 택시를 타고 가는 건 위험한데……, 맞아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오늘 아침에도 오메가가 강간을 당한 일로 소송을 걸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오메가는, 히트 사이클이 생긴다는 이유로 늘 유혹한다는 오해를 받는다. 히트 때 발생하는 페로몬에 알파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으니 자연스레 사람들의 인식도 그렇게 바뀌었다.
오메가도 엄밀히 사고이지만.
그러고 보면 자신은 운이 좋은 케이스다. 그 일로 에드워드가 소송을 건다고 해도 준영은 이길 수 없다. 심지어 아이까지 원했다면 눈뜨고 아이까지 뺏겼을 것이다. 그럼에도 에드워드는 오히려 청혼까지 하였다.
그가 사소한 일로 차갑고 냉정하게 말을 한다고 해도 당연한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무려 이런 호사까지 누린다.
“날씨가 점점 차가워지는군. 어서 들어가. 집에서 보도록 해.”
에드워드의 안내를 받아 차까지 온 준영은 한 번 더 그에게 고맙다, 말을 하고서야 차에 올라탔다. 기사가 문을 닫아 주고는 운전석으로 가는 동안 창문을 내려 에드워드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하려고 한 말이 뭐였지?”
“……집에 가서 말해 줄게요.”
사실 중요한 말도 아니다. 하지만 쫓기듯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준영의 대답에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서 창문을 닫으라 말한 뒤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부인. 안전벨트 매십시오.”
“네.”
기사의 말에 서둘러 안전벨트를 맨 후 창문을 닫았다. 창이 완전히 닫히기 전, 무언가 심각한 표정을 짓는 에드워드가 시야에 들어왔다.
회사 일일까.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네.
조금 걱정스럽게 백미러를 통해 작아지는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아, 또…….”
“네? 무슨 말씀 하셨습니까?”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기사가 되묻어 고개를 저었다.
준영은 말없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배를 만졌다. 기사가 그런 준영을 본 건지 넌지시 물었다.
“추우시면 히터를 켤까요?”
“아니요. 추우면 말할게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괜찮다 대답한 뒤 화려한 야경이 빛나기 시작하는 길가를 바라보았다.
도시 풍경은 늘 무감각했다. 딱히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유달리 예쁘게 반짝인다 싶었다.
벌써 새벽 1시가 되어가도록 에드워드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쩜 근처 호텔에서 자고 바로 출근할지도 모른다. 가끔 그랬으니까.
다만 오늘은 왠지 연락이라도 줄 것 같아 기다렸었다. 하지만 에드워드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내가 해볼까?
잠깐 든 생각에 급히 고개를 저었다. 혹 아직 일을 한다면 방해일 거고, 자고 있다면 더더욱 방해일 거다.
그때 문자 하나가 날아와 다급히 확인했다.
“제라드구나.”
실망을 해버려 미안하다 생각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전화가 걸려왔다. 아마도 메시지를 읽은 걸 봤나 보다.
-자고 있는 줄 알았더니? 또 낮잠 잔 거야? 밤낮 바뀌면 좋지 않아.
“그건 아니에요. 그보다 제라드도 피곤할 텐데 안 자고 뭐 해요?”
-데이트한다고 나한테는 관심도 없지? 오늘 마지막 피날레 공연 서고 뒤풀이 파티했어.
“그, 그런데 그건 어떻게…….”
불과 몇 시간 전 일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에드워드와 사사로이 연락을 할 만큼 사이가 좋아 보이지도 않은데 말이다.
-다 아는 수가 있지.
“설마 감시 카메라?”
-날 뭘로 보고. 크리스, 내 동기야. 마침 쓸 만한 집사가 필요하다길래 적극 추천해 줬지.
“아아, 친구였군요.”
“친구라기보다는 악연이지. 그보다 데이트는 어땠어? 네 분위기 보니 꽤 좋았다던데. 그래서 설레서 못 잔 거야?”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려 줬나 보다. 그래도 싫은 기분은 아니기에 준영은 솔직히 대답해 주었다.
“잠도 안 오고 에드워드가 오면 마중이라도 나가고 싶어서요. 하고 싶은 말도 있고.”
얼렁뚱땅 넘어간 태동에 대한 걸 제대로 말해 주고 싶었다. 아이를 누구보다 원했던 에드워드이니 분명 들으면 좋아할 것이다.
-이 시간이면 안 오는 거 아니야?
“안 그래도 그럴 것 같아 그냥 자려고요.”
-전화해.
“네? 그런. 자면 방해라서…….”
-숙제 내 준 거 답 찾았어? 네 성격에 정답을 내지는 못했을 거고 슬슬 감은 잡지 않았어?
뜬금없는 숙제 타령에 무슨 말인가 했다가 뒤늦게 기억을 떠올렸다. 제라드는 에드워드의 태도에 대해 준영에게 왜 그런 것 같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에는 전혀 감을 잡지도 못했다. 하지만 요즘은, 아주 조금 설마 하는 희망이 생겨나는 중이었다.
그래 설마하니 자신이 태동에 대한 걸 알려 주기 위해 기다리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해. 에드워드는 화내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 이유는 이미 아는 것 같네.
“희망을 가졌다가 틀리면요? 다시는……,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지도 몰라요.”
무섭다. 이런 근거 없는 희망에 가득 찼다가 한없이 추락할까 봐. 그럴 바에야 지금처럼 이 감정을 소중히 여기고 지내도 된다 싶었다. 굳이 억지로 확인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우성 알파는 평범한 알파와 달라. 그리 쉽게 오메가의 페로몬에 현혹되지 않아. 만약 발정 난 오메가와 단둘이 방안에 갇혀있어도, 그럴 마음이 없다면 에드워드는 그 오메가에게 절대 손대지 않아. 그 정도로 에드워드의 정신력은 상상을 초월해.
“무슨…….”
-그런데 넌 충분히 피해갈 수 있는 상황인데도, 피하지 않았지. 왜 그랬을 것 같아?
심장이 바보처럼 두근거린다. 설마설마하는 희망이 자꾸 수면 위로 올라온다.
-해. 준영. 넌 절대 죄인이 아니야.
제라드는 한 번 더 준영의 등을 떠밀고는 전화를 끊었다. 준영은 창가로 다가가 환하게 비치는 달을 바라보다 핸드폰을 보았다.
손끝이 떨린다. 하지만 자신감이 점점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아직도 느껴지는 키스의 감촉을 믿으며 준영은 단 한 번도 눌러 본 적 없던 번호를 눌렀다.
연결음이 조용한 방안에 울려 퍼졌다. 설마 바쁜가. 설마 정말 자는 건가 싶어 끊으려 하는 그때 연결음이 끊겼다.
통화가 연결되었단 사실에 안도하며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익숙한 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 에드워드의 전화입니다. 누구신지요.
준영은 전화를 끊지도 말을 하지도 못한 채로 그대로 굳어버렸다.
-……저기, 번호가 저장이 안 되어 있어서 누군지 모르겠는데 말씀하시면 전해드릴게요.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아프게 뛰었다.
-잘못 걸었나?
통화가 끊기며 뚜 뚜 거리는 신호음만이 이어졌지만 준영은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