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 1권 [폰.공금]
[1]
지금까지 준영은 드라마에서 간혹 보이던 상류층의 집 구조는 조금 과장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보니 오히려 과소평가된 게 아닌가 싶다.
준영이 화려한 방에 질려 머뭇거리고 있을 때, 짐을 대신 들어준 고용인이 적당한 곳에 짐 가방을 내려놓고는 물러섰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집사가 드디어 준영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방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에드워드 씨는.”
“근무 중이십니다. 누구와 달리.”
집사의 말투는 정중하지만, 말 속에 가시가 박혀있었다. 하긴 당연하다. 반대의 입장이라도 그라는 존재가 그다지 반갑지 않았을 것이다.
“쉬십시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부르십시오.”
이 넓은 저택에서, 고작 방 하나 안내해 준 뒤 집사는 나가버렸다.
준영은 잠시 그 모습을 보다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각오했잖아.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는 발코니 쪽으로 걸어갔다. 커다란 커튼을 치자, 아름다운 정원과 함께 높은 산 전경이 펼쳐졌다.
분명 그다지 좋은 방을 안내한 게 아닐 텐데도, 이 정도라니.
아름다움에 잠시 빠져있다, 다시금 올라오는 답답함에 준영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걸…… 원한 건 아닌데.”
믿기지 않지만, 모든 건 우연이었다.
에드워드에게는 지독한 불운, 그리고 자신에게는 천운.
……정말로 천운인 걸까.
원한 건 맞지만, 이런 건 아니었다.
감히 네 주제에.
“하! 정말로 왔네?”
갑자기 벌컥 문 열리는 소리에 놀라 몸을 돌렸다. 한눈에도 에드워드의 동생인 게 뻔히 보이는 붉은 금발의 아름다운 여성이 하찮다는 듯한 눈빛으로 준영을 노려보았다.
준영은 서둘러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지만, 그녀는 그의 인사 따위는 받고 싶지 않다는 듯 차갑게 말을 던졌다.
“하나만 말할게.”
“……말씀하세요.”
“이 방에서 가급적 나오지 마. 오라버니는 착해서 너 같은 걸 받아줬을지 모르지만 난, 아니 우리 모두는 아니니까. 더러운 시궁창의 쥐가 운 좋게 범을 물었을지 몰라도 거기까지야. 더 많은 걸 바라지마.”
욱신. 상처가 아프게 그를 찌른다.
각오했던 일이라 애써 담담히 삼키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네. 아가씨.”
“날 그따위로 부르지 마. 성으로 불러.”
그녀는 대답 따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일방적으로 말을 던지고는 휙 하고 몸을 돌려 방을 나가버렸다.
문이 닫힌 지 조금 지났지만, 준영은 여전히 문만 바라보다 힘없이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늘 하던 주문을 외우고는 천천히 걸음을 떼어 침대로 가 앉았다.
일단 침대는 푹신하다. 잠이 잘 올 것이다.
“아가야. 네 덕분에 호강하네.”
아직도 뱃속에 생명체가 있다는 게 잘 와 닿지 않는다. 태동은 5개월은 되어야 느낄 수 있다고 들었다. 얼른 아이와 교감하고 싶다.
천천히 옆으로 누운 채 배를 살살 매만졌다.
아직 하루의 반도 지나지 않았음에도 피곤하다.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건만, 벌써부터 힘들다. 무섭다. 두렵다.
그럼에도 힘낼 것이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니깐.
“아가야……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원해서 가진 아기는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아이가 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을 거란 걸 안다.
소중한 생명은, 이미 나의 전부였다.
에드워드는 한낱 건물 청소부인 준영에게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미국인이라면, 아니 전 세계의 경영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만한 존재였다.
뉴스나 잡지, 신문, 인터넷에 심심치 않게 올라오는 남자, 에드워드 햄턴.
영국계 미국인으로,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경제를 좌지우지한다는 세계적인 기업 회장의 손자이다.
그리고 알파들 중에서도 뛰어나다는 우성 알파인 남자.
우성 알파답게 그는 아름답고 화려했으며 찬란하기까지 했다.
금발의 푸른 눈, 마치 사자를 연상시키는 그를 보는 순간 매료되었다. 건물 1층 한켠의 전신거울을 닦고 있던 준영은 거울에 비친 남자를 보고는 그대로 반해버렸다.
두 번째로 그를 마주한 건, 일주일쯤이 지나서였다.
거미를 발견했다는 신고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고층으로 간 준영은 그곳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에드워드와 다시 마주했다.
상대는 보는 순간 누군지 알았다. 에드워드의 약혼녀 제시카였다.
알파에게 우성 알파가 있다면, 오메가에게도 우성이 있다. 우성 알파가 1% 라면 우성 오메가는 고작 0.3%도 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런 여성이었다. 사자를 연상시키는 에드워드와는 또 다른 고귀한 여신 같은 아름다움이 그녀에게 있었다.
올해 초, 그녀와 정식으로 약혼을 했었다. 아마도 내년이면 결혼을 할 거라고 들었다.
눈빛만으로도 에드워드가 제시카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느껴졌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커플,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두 사람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자신의 첫사랑은 말 그대로 브라운관 속 스타를 연모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걸, 너무나도 절실히 말이다.
그렇게, 에드워드는 자신만의 꿈속의 연인일 뿐이었다. 절대로 맺어질 수 없는, 맺어져서도 안 되는 사람, 그것이 에드워드 햄턴이었다.
잠들었었구나…….
이미 어두워진 방안을 둘러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배고프네.
누군가를 불러서 먹을 거라도 달라고 해볼까 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저녁때가 되면 부르겠거니 하다, 핸드폰의 시간이 벌써 11시를 넘어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오후부터 잤으니, 반나절을 꼬박 잔 셈이다.
조금 참았다가 아침을 먹어도 된다 싶었지만, 배 속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예전엔 하루 한 끼만 먹어도 잘 견뎠는데, 임신을 해서 그런 걸까.
조용한 방안에 시끄럽게 울리는 소리에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내려섰다.
간단하게 빵과 우유라도 얻자. 그 정도는 크게 민폐가 아닐 거야.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준영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밖으로 나섰다.
들어올 때도 생각했지만 정말로 저택이 컸다.
뉴욕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라고는 상상도 되지 않을 정도의 크기다. 듣자 하니 미국과 그 역사를 함께 할 정도로 오래된 곳이라 들었다.
“진짜 넓구나.”
오래된 곳이지만 낡거나 후줄근하지 않았다. 오히려 중후한 외관과 달리 내관은 세련된 현대식이었다. 복도는 쓸데없이 길지만.
이 층의 복도를 한참 걸어, 드디어 모퉁이를 돌다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어둠 속에서 번뜩거리는 황금색 눈동자와 마주했다.
“……도둑고양이처럼 다니는군.”
에드워드였다. 그는 계단을 올라오다, 못마땅하다는 듯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준영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는 저렇게 눈이 빛나는구나. 신기해서 멍하니 쳐다보다, 그의 표정이 더욱 날카롭게 바뀌고서야 아차하고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난방이 된다고 하지만 그렇게 얇게 입고 다니면 어쩌자는 거지?”
날…… 걱정해 주는 걸까? 생각지 못한 말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원하지 않았을지라도 네 배 속의 아이는 내 아이라는 걸 명심해. 아이에게 해가 될 만한 짓은 하지 마.”
그럼 그렇지. 잠깐이라도 기대를 한 게 너무 창피하다.
“……네, 조심할게요.”
겨우 목소리를 짜내어 용서를 빌었다. 준영의 사과에도 에드워드의 표정은 풀릴 줄을 몰랐다. 그는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준영을 한참을 노려보다 휙 하고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명색이 첫날인데, 불편한 곳은 없는지 물어는 보지.
그만하자. 기대하지도 원치도 않겠다고 다짐했잖아. 고개를 휙휙 저어 그 생각을 한 자신을 탓한 뒤 다시 걸음을 걸었다.
거의 계단 아래에 당도했을 때, 다시금 배 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펴젔다.
설마 들었으려나. 창피함에 얼른 배를 양손으로 가린 채 주방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너……!”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는 돌아봤다. 벌써 들어간 줄 알았던 에드워드가 다시 계단을 반쯤 내려와 준영을 내려다보았다.
“네?”
“설마 배가 고파서 내려온 건가?”
“아, 저기……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있을까 하고요.”
“저녁을 먹었는데도 배가 고픈 건가?”
“…….”
뭔가 사실대로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라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윌리엄!”
고막을 쩌렁 쩌렁 울리는 엄청난 소리에 화들짝 놀라 더욱 몸을 웅크렸다.
1분, 2분? 지났을까, 순식간에 1층 홀이 밝아지며 우르르 고용인들이 뛰어나왔다.
이 저택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구나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홀에 모였다.
“부르셨습니까. 오셨으면 절 부르시지…….”
아마도 에드워드는 늦은 시간이라 조용히 들어왔던 건가 보다. 그런데 왜 갑자기 모두를 깨우면서까지 불러 모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아이를 가진 오메가다.”
지끈. 그 말이 심장을 찌른다.
그는 단 한 번도 준영의 이름을 불러준 적이 없다. 본의 아니게 부부의 연을 맺게 된 지금도.
“아무리, 그대들이 바라던 안주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내 아이를 가졌지.”
에드워드의 서슬 퍼런 말에 집사의 안색도 덩달아 어두워져갔다.
“솔직히 말해 봐. 왜 그에게 저녁을 주지 않았지?”
“식사 시간이 되어 부르러 갔지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만약, 셀린느가 잔다고 끼니를 놓쳤다면?”
“………간단히 드실 수 있게 요깃거리를 챙겨드렸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쳐 생각이 짧았습니다.”
준영은 그제야 왜 에드워드가 저리도 화를 냈는지를 알았다.
“작은 부인. 들어가시면, 저희가 저녁을 준비해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 네.”
여기서 그냥 빵과 우유를 달라고 할 분위기는 아니다 싶어, 대답을 하고는 발길을 옮겼다. 시선이 날카롭다. 원망이 더 커져가는 기분이다. 이곳 사람들에게 인정은 못 받아도 척을 지고 살고 싶지는 않았는데, 첫날부터 꼬여버린 것 같다.
“다음부터는 당당히 자신의 권리를 말하도록 해.”
막 계단을 올라가는 준영에게 퉁명스럽게 말을 던지고는 휙 하고 몸을 돌렸다.
준영은 착잡함에 쓰게 웃었다.
에드워드……, 있죠. 사실 날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건 당신인걸요.
과연 이름을 기억은 하고 있을까. 감히 무서워 묻지도 못한 채, 준영은 조용히 제가 머무는 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자신이 오메가라는 걸 알게 된 건, 14살이 되면 누구나 다하는 2차 성별 검사를 통해서였다.
오메가.
그저 떨떠름한 감정만 느껴질 뿐이었다.
당연히 베타겠거니 했다.
오메가만큼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오메가였다.
“너무 걱정 마. 요즘은 약이 잘 나와서 오메가도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래.”
준영이 멍하니 통지서만 보고 있자, 옆에 앉은 아이가 엿본 것이다. 그 아이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차라리 침묵해 주지. 하긴, 오메가가 되면 학교에서도 따로 관리를 한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니, 침묵은 시간 끌기용 밖에는 되지 않는다. 하지만 묻고 싶었다.
그 약이 얼만지 아니? 그 약은 미성년자 때까지만 무료로 나눠 주는 거야. 성인이 되면 돈을 주고 사야 해. 한 알에 천 원이야. 그 약을 평생 먹어야 해. 한 달에 일주일은…… 쭉.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을 억지로 삼키고 싱긋 웃어 주었다.
“응. 고마워.”
짝꿍은 아마 친절을 베풀어서 뿌듯할 것이다. 그러면 된다. 굳이 불화를 만들 필요는 없다.
차라리 오메가가 됐으면 히트라도 할 것이지.
준영이 22살이 되는 순간까지도 첫 히트가 오지 않았다. 어릴 때에는 학교에서 무상으로 나눠 주는 억제제를 먹어 괜찮았지만, 성인이 되자, 그것 또한 너무나도 큰 부담이었다.
월급의 80%는 할머니의 치료비로 들어갔다.
자신의 이 의미 없는 오메가 약을 먹는 것보다, 할머니가 약을 먹고 짧은 순간이라도 아프지 않은 게 나았다.
그래서 약을 끊었다.
처음에는 걱정이 되었다. 자신도 인간이니 당연히 불안했다. 행여라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히트가 올까 봐, 늘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하지만, 일 년이 지나도 히트는 오지 않았다.
이유는 얼마 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오메가라면 일 년에 한 번 해 주는 무료 검진을 받아본 뒤 말이다.
그래서 알았다. 오메가는 맞지만, 일반적인 오메가들보다 호르몬이 약하다고. 아마도 히트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다행인가 싶으면서도 그저 웃음밖에 안 나왔다.
아아, 오메가도 선택받은 자들의 특권인 거구나.
하지만 괜찮다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것이 마음이 편했다.
꿈인가…….
눈을 뜬 지도 한참이 지났지만,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섰다.
발코니로 나가 현관문 쪽을 보았다.
익숙한 차였다. 에드워드가 회사에 당도할 때마다 저 차에서 내렸다. 언젠가 누군가가, 대갑부치고는 검소하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일 년이 멀다하고 차를 바꾸는 임원들과 달리, 에드워드는 늘 같은 차였다.
그래서 더 끌렸지.
에드워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집사에게 뭔가를 지시하며 기사가 열어준 차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준영은 말없이 지켜만 보았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저 남자가 자신을 안고, 그리고 생명이 잉태되었다는 게.
반쪽짜리 오메가. 임신은커녕 첫 히트도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준영은 자신을 따라다니는 꼬리표를 알고 있다.
일부러 약을 먹지 않고 에드워드를 꼬셨다는 소문.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해 본들, 들어줄 리 없어 그냥 침묵을 선택했다. 어릴 때부터 부당한 대우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침묵이었다.
그건 매우 답답하지만,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에드워드가 탄 차가 큰 정원의 도로를 지나 정문을 나설 때까지 지켜보다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는 전날 준영을 찾지 않았다.
아마도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찾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지 않은가.
아이만을 원할 줄 알았지만, 에드워드는 준영에게 결혼을 요구했다.
절대 진심이라고 할 수 없는 청혼을 받았을 때, 인생 처음으로 행복이란 걸 느꼈다.
물론, 아주 짧지만.
노크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나, 들어오라 대답했다. 고용인 두 명이 안으로 들어와 꾸벅 인사를 건넸다. 둘은 빠르게 흐트러진 침구를 치웠다. 시트를 매일 가나 보다. 마치 호텔처럼 시트를 새로 교체하고서야 한 명이 다시 준영에게 질문을 하였다.
“식사는 어찌할까요?”
“혹시 여기서 먹을 수 있을까요?”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삭막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그럼에도 공손했다. 그 정도는 이해한다. 얼마나 하찮고 우스울까. 오메가란 이유로,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당당히 박힌 돌을 빼버린 나란 존재가.
“네. ……저기.”
막 나서려던 그들을 불렀다. 부르고 나서 아차 했다. 별것도 아닌데, 침구를 한아름 든 두 사람을 불러 세운 실수를 깨달았다.
“무슨 일이신가요?”
“저기……, 이제 자주 봐야 할 것 같은데 이름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둘은 잠시 뜻 모를 표정으로 준영을 보다,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멜다 로입니다.”
“소피아 체스트입니다.”
마지못해 대답하는 게 뻔히 보였지만, 그래도 대답을 해 준 게 기뻐, 준영은 환하게 웃으며 제 이름도 밝혔다.
“이준영이라고 합니다. 그냥 준영이라고…….”
“감히 부인을 그렇게 호칭할 수 없습니다. 저희들은 바빠서 이만.”
너무 앞서갔나 보다. 이름을 알려준 게 마음을 터놓는다는 뜻도 아닐 것인데. 소피아의 대답에 무안해졌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은 또 붙잡힐까 싶어 빠르게 방을 나섰고, 준영은 잠시 멀뚱히 문 쪽을 바라보다 힘없이 침대로 가 앉았다.
“할머니. 좀 어렵다.”
이렇게 말하면, 늘 한결같은 대답을 해 주던 할머니는 이제 없다.
“괜찮아. 하고 또 하다 보면 꼭 될 거란다.”
그 말을 대신 해본다.
말은 힘없이 허공으로 흩어질 뿐, 아무런 것도 남지 않았다.
늘 어릴 때부터 바쁘게 살아서인지, 가만히 있는 게 너무 곤혹이었다. 결국 산책이라도 하자 싶어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섰다.
문득 어제, 얇게 입고 나섰다면서 화를 냈던 에드워드가 떠올랐다.
발길을 돌려 고급스러운 옷장을 열어 걸려있는 옷들을 살펴보았다. 아마도, 옷 한 벌, 한 벌이 내가 지금까지 입었던 옷들을 전부 합한 것보다 비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언뜻 손이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또 한소리를 듣는 것보다 낫다 싶어 가장 수수한 스타일의 카디건을 꺼내어 걸쳤다.
따가운 햇살과 달리 바람은 찼다. 뭐라도 걸치길 잘했네. 해가 지면 더 추울 것이다. 그전에 빨리 구경하자.
이리저리 목적 없이 정원을 돌아다니다, 하얀 꽃밭에 당도했다.
국화 같이 생겼지만, 자신이 알던 국화와는 모양이 조금 달랐다.
“이건 무슨 꽃이지?”
“흔한 꽃인데? 데이지. 몰라?”
“누구!”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아 당황했다. 이제 하다하다 헛것을 들은 건가 할 때, 무언가가 머리 위에 툭 하고 떨어졌다.
손을 올려 머리 위에 올려져 있는 걸 집었다.
나뭇잎……?
이제 서서히 색이 바래고 있는 나뭇잎을 보다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사람 몸통만한 굵은 나뭇가지에 늘어진 채 앉아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에드워드와 같은 금발을 가진 남자는 굳이 소개를 하지 않아도 누군지를 알았다.
제라드 햄턴. 에드워드의 동생이자, 미국을 대표하는 모델.
프랑스에 가 있었던 게 아니었나 보다.
“내가 누군지 아나 보네?”
“네. TV에서 가끔 봤어요.”
“흠, 하긴. 내가 생각해도 내가 좀 잘나긴 하지.”
너무 당당해 오히려 준영이 당황했다. 하긴 저런 외모면 나르시시즘에 걸려도 이상할 건 없을 것 같다.
꿀이 떨어진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것 같은 황금빛 머리카락은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만 같았다.
에드워드도 그런 의미로는 같지만, 제라드와는 다르게 그는 살짝 적색이 돌았다.
아, 그래 에드워드는 굳이 표현하자면 태양에 더 가까웠다.
“형 생각해?”
화끈. 정곡을 찔리고 나니, 뭐라 할 틈 없이 열이 올랐다. 창피함이 몰려와 고개를 푹 숙이는데, 누군 재밌다고 웃는다.
“귀엽네? 누가 감히 천하의 제시카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독차지했나…… 했더니만.”
굳이 그 이름은 여기서 꺼내야 하나?
조금은 얄미워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언제 내려온 건지 바로 코앞에 서서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미안. 임산부인 걸 깜빡했네.”
너무 놀라 가슴께를 잡은 채 숨을 몰아쉬자, 제라드가 그제서야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였다.
“그거 알아?”
“네?”
“알파는 힘도 보통 사람보다 센 거.”
“네?”
어쩌라는 거지?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영문을 몰라 할 때, 제라드가 몸을 돌리더니 아름답게 피어있는 데이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베타들이 보면, 마치 초능력같이 보일 정도래.”
“……그런가요.”
알파들이 신체능력이 베타들보다 발달된 건 익히 한다. 그래서 전 세계에 신기록들의 90%는 알파들이 낸 기록들이었다.
“그래서 자꾸 까먹어. 내가 일반 사람들과 조금 다르다는걸. 자, 사과의 의미.”
제라드는 어느새 한아름 꺾은 데이지를 모아 준영에게 내밀었다. 얼떨결에 잡고는 양손 가득한 꽃다발을 내려다보았다.
예쁘다.
흰색의 꽃들이 모여 있어서일까, 마치 구름 같다 싶었다.
“원래 파종 시기인데, 바닥에 열선을 넣어서 식물들을 착각하게 만들지. 그래서 봄에 피는 것들이 자꾸 계절을 까먹고 피어재끼는 거야. 지금이 따뜻한 봄인 줄 알고. 참 불쌍한 것들이지.”
설명을 하는데 부정적인 게 느껴지는 건 너무 신경과민인 걸까.
“그래도 꽃말은 너에게 어울리니까.”
“꽃말이 뭔데요?”
“인터넷 찾아봐. 그런 친절까지 보여 줘야 해?”
말은 매우 공격적인데, 표정은 웃는다. 어디다 장단을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
“넌 진짜 그 꽃말이랑 어울리네.”
“네?”
“맹해 보이는 게.”
“…….”
“내 조카가 널 닮으면 조금 예뻐해 줄 수 있을 것 같긴 해. 제시카 그년보다는 나아.”
어떤 답을 돌려줘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다행히 제라드는 대답을 바란 건 아닌지, 손을 흔들며 멀어질 뿐이었다.
준영은 멀뚱히 제라드를 바라보다 다시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꽃다발을 보았다.
“예쁘다.”
다른 건 모르겠고, 꽃은 참 예뻤다.
그리고 보니, 저 남자는 똑바로 말해 주는구나.
뒤에서 눈치만 주는 이들과 다르게, 제라드는 대놓고 굴러온 돌이라는 표현을 써댔다.
에드워드처럼, 직설적인 화법이지만 차라리 그래서 나았다.
준영은 한 번 더 꽃향기를 듬뿍 맡고는 발길을 돌렸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어 슬슬 추워지기 시작했다. 감기라도 걸리면 정말로 불같이 화낼지도 모른다 싶어 발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꽃향기를 맡으며 저택 안으로 들어서던 준영은 그만 누군가와 마주쳤다.
하필이면 이 집안에서 그에게 가장 적대심을 보이는 셀린느였다.
올해 28살이라고 했던 그녀는 이미 결혼을 했지만 성격 차이로 이혼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고 들었다. 그리고 에드워드의 전 약혼녀인 제시카와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유달리 준영을 싫어했다.
셀린느는 준영을 보자마자 인상부터 찡그렸다. 그리고 시선이 자연스레 그가 들고 있는 꽃다발로 향했다.
아차. 서둘러 뒤로 숨겼지만 오히려 그 행동이 그녀를 더 자극했나 보다.
“데이지 꽃은…… 큰어머니가 좋아해서 특별히 심은 꽃이지.”
큰어머니?
그리고 보니 이 집의 3남매는 각각 어머니가 달랐다. 처를 여러 명 두었다기보다, 한 명은 죽고 다른 한 명은 이혼을 했다고 들었다.
“그…….”
“나조차도 귀해서 함부로 꺾지 않아. 그 정원의 꽃은.”
무슨 말을 해 줘야 할까. 사실대로 제라드가 꺾은 거라고 말을 하려니 왠지 고자질을 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잘해 준 일로 남매들이 불화가 일어나는 원치 않았다.
“미안해요. 다음부터는 아…….”
사과를 하고 있는데 성큼성큼 다가와 냉큼 준영에게서 꽃다발을 뺏는다. 당황한 준영이 어떻게든 사수하려 했지만 작정한 그녀를 이길 수가 없었다.
셀린느는 뺏은 꽃다발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그대로 바닥에 떨어뜨렸다.
뭘 하려나 하는 순간, 그녀는 실내화를 신은 발로 꽃을 보란 듯이 밟았다.
송이가 낱낱이 떨어지고 즙이 배어 나와 러그를 물들인다.
마지막 한 송이까지 기어코 짓밟고서야 셀린느는 후련하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겨우 꽃송이가 붙어있는 데이지 한 송이를 집어올리고는 준영의 머리 위에 툭 하고 떨어뜨렸다.
“너랑 어울리네. 이 꽃.”
안 돼. 참아. 울지 마.
입술을 말아 물었다. 분노인지 서글픔인지 모를 감정이 자꾸만 그를 뒤흔들었다.
그런 준영의 모습을 보며 셀린느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다 휙 하고 발길을 돌렸다.
“……꽃이 무슨 죄람.”
꺾인 것도 억울할 건데, 하필이면 주인도 잘못 만나 이 고생을 하는구나.
준영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이제는 예쁘다고 할 수 없는 모양의 꽃들을 하나하나 품에 주워 담았다.
정말로 닮았네.
엉망진창 밟힌 모습이, 꼭 자신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만 같아 더 그냥 둘 수가 없었다.
“부인. 저희가 치우겠습니다.”
가만히 지켜보던 집사가 그제야 다가왔다. 안쓰럽다기보다, 이 일로 또 에드워드에게 한소리 듣고 싶지 않아서가 명백히 보였다.
“아뇨. 받은 꽃이에요. 버리기 아깝네요. 심지어 비싼 거라는데.”
혼자 하겠다 말한 뒤 한 송이 한 송이, 떨어진 꽃잎까지 죄다 주웠다. 으깨진 것들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놔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래 쪼그리고 앉았다가 일어나서일까.
어지럽다.
잠시 두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집사가 괜찮냐고 물었지만, 그 친절이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자신은 고아였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버림을 받았다. 이름이 적힌 명찰만이 전부라 했다. 동양인인데다 원채 약하고 왜소해, 입양도 잘되지 않았다.
그런 준영을 입양한 건 바로 길가에서 신문을 팔던 할머니였다.
늘 혼자 쓸쓸히 고아원으로 걸어가는 어린 준영을 눈여겨봤다가, 그를 입양하였다.
할머니가 첫날 그녀의 집으로 준영을 데리고 가며 한 말이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좁아서 미안하다. 너도 좋은 집에 입양 가고 싶었을 건데…….”
그 말이, 그렇게 와 닿았다. 그렇게 감사하고 행복할 수 없었다.
자신을 태어나게 만든 이들은 그를 버렸지만, 괜찮았다. 그들 때문에 이런 천사 같은 할머니를 만난 거라고, 준영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했다.
“괜찮아. 하고 또 하고 하다 보면…… 될 거야.”
아파 보이는 꽃들을 위로하듯 말을 던지고는 혼잣말에 피식 웃었다. 꽃병에도 넣지 못할 정도로 부러진 꽃들은 진열하듯 올려놓았다.
“그래도 예쁘네.”
비록 엉망진창으로 꽃잎이 떨어져, 안쓰러워 보일 정도지만, 그럼에도 꽃은 예뻤다.
아마 할머니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받아서 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준영은 한참을 그렇게 창가에 앉아 꽃병에 꽂아놓은 꽃과, 바닥의 꽃송이들을 바라만 보았다.
하루 종일 핸드폰만 하는 것도 정도껏이다.
너무나도 지겨웠다. 애초에 늘 몸을 움직이는 일을 했던 준영에게 이런 생활은 없던 병도 키울 정도로 답답했다.
벌써 이 집에 온 지도 일주일째다. 더는 한계였다.
집안일이라도 돕자. 간단한 것 정도는 괜찮을 거야. 운동이라고 말하면 되겠지.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고는 방을 나섰다.
아까, 셀린느가 차를 타고 어딘가로 가는 걸 우연찮게 보았다. 그러니 그녀의 눈에 띄지는 않을 것이다.
일 층으로 내려간 준영은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고용인 문이 있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얼마 전 에드워드가 집사를 불렀을 때, 고용인들이 모두 이곳에서 달려 나왔었다.
그리고 역시나 조금 걷지 않아 인기척이 느껴졌다. 소리가 들려오는 문 쪽에 서서 노크를 하려다 움찔 멈춰 섰다.
“아, 진짜 재수가 없으려니깐. 너무 당당하지 않니?”
“놔 둬. 쥐 죽은 듯 있잖아.”
“그렇지만. 오메가가 무슨 대수라고. 보면 볼수록 재수가 없어서.”
“배 아프구나? 솔직히 너도 오메가면 주인님 유혹해 볼 거면서.”
“어머, 들켰나? 꺄르르.”
다음에 오자. 왠지 지금 끼어들 게 아니다 싶어 몸을 돌렸다가,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언제 다가온 건지 제라드가 바로 준영의 뒤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
제라드는 준영을 그대로 스쳐 지나가 곧장 문을 열어버렸다. 예상치 못한 제라드의 행동에 준영은 크게 당황했다. 그리고 준영만큼이나 놀란 고용인들이 다급히 제라드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준영은 차마 뒤도 돌아보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말 그대로 쥐새끼처럼 숨어서 엿들은 꼴이 아닌가.
“네가 오메가라서, 발정이 난다고 해도 에드워드는 물론, 나도 쳐다도 보지 않아. 너희들 같은 것들이 어디 한두 명이라고 생각해?”
말이 너무 심하다. 실제로 한 여성은 소리 죽여 흐느끼기까지 했다. 준영은 서둘러 제라드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라는 뜻인데 제라드는 준영을 힐끔 보고는 다시 무서운 눈빛으로 그녀들을 보았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저희들이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흑흑……. 농담이었어요. 절대 그런 생각한 적 없습니다.”
“짐 싸는 게 좋을 거야. 윗사람을 욕하는 건 너희들 마음이지만, 사과조차 하지 않는 이들을 이 집에 두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런 게 어딨어요? 사과했잖아요!”
한 명이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다른 한 명은 놀라며 그런 친구를 말렸다. 둘의 모습을 뚱하니 보던 제라드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왜 나한테 사과를 하지? 이 저택의 안주인인 햄턴 부인에게 하지 않고?”
“아…….”
“저기…….”
“스스로 나가는 게 좋을 거야. 쫓겨나고 싶지 않다면. 퇴직금이라도 챙겨야 하지 않겠어? 베. 타. 들?”
두 여성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준영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문을 닫고 돌아선 제라드가 그런 그를 보고는 쯧, 하고 혀를 찼다.
“고개 들어.”
제라드의 말에도 가만히 있자, 이번에는 준영의 턱을 손가락으로 잡아 강제로 들어 올렸다.
“왜 죄인처럼 고개를 숙여? 당당해져.”
“……방금은 너무 심한 처사였어요.”
“저런 자들은 자신이 뭘 잘못한 건지 몰라. 그리고 저런 자들을 용서해 주면, 그걸 지켜본 자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어오르겠지. 그게 베타들의 습성이거든.”
“베타, 알파, 그런 건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그들도 분명 누군가의 가족이에요. 누군가를 욕하는 건 잘못이지만, 그에 합당한 처분이면 된다고 생각해요. 이 정도로 자른다면 아무도 이곳에서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을 거예요.”
“아니, 할 거야. 이곳은 꿀이 뚝뚝 떨어진다는 표현이 있을 만큼 대우가 좋거든. 그들은 해고당하는 순간에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널 탓하겠지. 그리고 설령 가만히 둬도 널 원망할 거야. 너 때문에 들켰다고.”
맞는 말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 반박할 수가 없었다. 나라도 더럽고 치사해도, 돈을 잘 주는 곳에 남고 싶어 할 거다. 하루하루 벌어 먹고살아야 하는 하층민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저들의 마음이 지금 어떠할까도 잘 안다. 어쩜 나처럼 아픈 가족을 부양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더욱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벌도…… 내가 내려요.”
“…….”
“당신 말대로 내가 이곳의 최고 책임자라면서요. 그럼…… 내가 내릴 거예요.”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준영,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왜 이 남자가 내 이름을 불러 줄까.
서류상 배우자가 된 남자는 한 번도 불러 주지 않았던 이름이다.
왠지 모를 처량함에 쓰게 웃자, 제라드가 그런 준영의 머리를 쓱 쓱 쓰다듬는다.
마치 어린 동생을 대하는 듯한 손길에 당황했지만, 나쁘진 않았다. 할머니가 아프기 전까지, 종종 이렇게 준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손길도 다르고, 느낌도 다르다. 그럼에도 할머니가 떠올라,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그 감촉을 느꼈다.
“뭐 하는 짓이지?”
서리가 내린 것 같은 차가운 음성이 귀를 때렸다. 준영은 차마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못 박힌 듯 굳었다.
“보다시피. 외로운 형수를 위로해 주고 있었는데?”
“무슨? 그런, 아니잖아요! 왜 그런 오해받을 말을……!”
당황해 말도 어눌하다. 준영이 아니라고 절대 아니라고 에드워드를 바라보며 호소했지만, 그의 눈빛은 더욱 냉랭해질 뿐이었다.
“잘들 노는군.”
그것뿐이었다. 에드워드는 싸늘한 시선으로 준영을 한 번 노려본 후 발길을 돌릴 뿐이었다.
할머니는 원래 기관지 쪽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도로의 매연을 맡으며 신문을 파셨기 때문일까. 늘 기침을 달고 사셨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그 생각뿐이었다.
자신이 크면 꼭 할머니를 잘 모시겠다는 생각.
더는 추운 날, 더운 날에 몇 장 팔리지 않는 신문을 팔기 위해 길가에 있지 않아도 되도록, 그렇게 마음먹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오메가에게 제대로 된 직장은 애초에 꿈같은 말이었다.
아르바이트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범죄자가 직장을 더 구하기 쉽다고 할 정도였다.
그나마 나쁜 쪽으로 빠지지 않은 건, 할머니가 하루에도 몇 번이고 자신에게 절대 안 된다며 사정을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햄턴 사에 입사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고수입이라는 사실에 흔들려, 면접을 가기 위해 골목을 걸어가다 취업 전문 사이트에 올라온 글을 보고는 바로 발길을 돌렸다.
오메가 환영.
그 글귀가 준영을 멈춰 세웠다. 그렇게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이력서를 보내었다.
합격.
면접은 단순했다. 청소를 하는 일이라 특별히 지병이 있는지 정도만 알아보는 게 다였다.
오메가인지, 약은 잘 먹고 있는지 같은 단순한 질문조차도 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이런 곳도 있구나 싶었다.
“그거? 이사님이 본사에 취업하고 나서부터야. 그분은 오메가에게 정말 너그러우신 분이거든.”
그때 처음 그 이름을 접했다.
에드워드 햄턴. 34살의 뛰어난 경영인. 그리고 우성 알파.
그때만 해도 그저 대단한 사람이 착한 일도 하는구나, 라고만 생각했었다.
일찍 와서일까, 처음으로 함께 저녁을 먹자는 말을 들었지만 그다지 기쁘지는 않았다.
낮에 그 일로 추궁을 당할 것 같아서였다.
사실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걸 설명하기 위해 이러쿵저러쿵 모든 일을 다 말하는 것도 곤혹스러웠다.
고용인들의 일은 가급적 덮어두고 싶었다.
“제라드와 꽤 가까워졌더군.”
겨우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으려다 멈췄다. 왠지 이걸 지금 입에 넣었다가는 체할 것 같아 다시 내려놓고는 고개를 들어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산책을 나갔다가 우연히 마주쳤어요.”
“그 녀석과 친하든 말든, 그건 나와 상관이 없어. 하지만, 그런 짓은 가급적 둘만 있을 때 하지 그래?”
“……무슨 뜻인가요?”
말하는 의도가 혼란스러워 되물었다. 에드워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스테이크를 적당히 씹다, 따라놓은 와인을 한 모금 삼키고서야 아주 천천히 대답을 해 주었다.
“그걸 왜 나에게 묻는 거지?”
“그럼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요.”
“그대가 더 잘 아는 게 아닌가?”
에드워드가 하는 행동, 말, 눈빛. 그 어떤 것에도 상처받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었다. 그런 주제에 늘 이렇게 아프다.
준영은 절로 나오는 웃음을 쓰게 삼켰다.
“왜 웃지? 내 말이 우스운가?”
“……어떤 이유로든, 그런 오해가 생기도록 행동한 내 잘못이겠죠. 죄송합니다.”
그래,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라 할지라도 외간 남자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에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 것이다. 분명 구설수에도 오를 수 있을 거다.
반대로 에드워드가 다른 여성과 신체 접촉을 했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아프도록 저렸다. 준영은 또 한 번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했다.
“다음부터는 주의할게요.”
에드워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비어버린 와인 잔을 살짝 흔들었고, 대기 중이던 고용인 다가와 빈 잔을 채웠다. 에드워드는 이번에도 단숨에 술을 마시고는 냅킨으로 입을 닦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다 먹었으니, 당신은 천천히 먹고 나오도록 해.”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식당을 나섰다. 이미 식어버린 스테이크만을 멍하니 쳐다보다 준영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사는 더 안 하시고요?”
“……괜찮다면 빵과 우유 정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고기는 영 당기지 않네요.”
예전 같으면 먹는 걸 남긴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저 고기를 먹었다가는 분명 탈이 날 것 같았다.
“네, 금방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누군가를 부려먹는 건 여전히 어색하다. 하지만 여기서 자신이 가지고 간다고 해 본들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걸 이제는 잘 안다. 자신의 부탁을 들은 고용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잠시 지켜본 후 발길을 돌렸다.
평화롭다기보다는 지루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나날이 이어졌다. 준영이 이곳에 온 지도 벌써 2주가 흘렀지만, 지금까지 에드워드와 대화를 나눈 건 손에 꼽는다.
그날 제라드 일로 함께 저녁을 먹은 그날 이후로는 얼굴도 마주치지 못했다.
오늘은 보려나.
일부러 그가 오는 시간쯤에 정원을 산책했다. 셀린느와 마주치는 것은 껄끄러웠지만, 그녀는 2시간 전쯤 화려하게 치장하고는 외출을 했다. 그래서 조금 더 느긋하게 에드워드를 기다릴 수 있었다.
오늘은 늦게 오려나 보네.
이미 해가 지고, 평소 오는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더 흘렀는데도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발길을 돌리려 할 때, 환한 불빛이 저 멀리서 보이는 것에 반색하며 정문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에드워드의 차가 아니었다. 화려한 스포츠카는 제라드의 것이었다.
조금 실망했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차에서 내리는 제라드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제라드는 마치 화라도 난 사람처럼 준영을 무섭게 노려보다 다짜고짜 질문부터 던졌다.
“슈트 있어?”
“……네?”
“슈트. 당장 입을만한 거.”
“그, 결혼식 때 맞춘 게 있어요.”
“그래? 그럼 가자.”
“어딜 말이에요?”
영문을 몰라 물었지만, 제라드는 대답 대신 준영의 팔을 잡고는 빠르게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머리하고는 내가 가는 길에 대충이라도 손질해 줄 테니, 옷만 갈아입고 나와.”
“왜요?”
“이유는 가면서 말해 줄 테니깐. 어서.”
싫다고 해도 강제로 끌고 갈 분위기였다. 제라드와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말라던 에드워드의 말을 들은지라 머뭇거리기만 하자, 그가 다시 한 번 다급히 말한다.
“눈뜨고 네 남편 뺏길래?”
“네?”
“시키는 대로 해. 망할 형님 녀석 골탕 좀 먹일 생각이니까. 물론 널 위해서도 좋은 거야.”
“도대체 무슨 말인지…….”
제라드는 준영의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고 정말 속 터진다는 듯한 답답한 표정으로 잠시 쳐다보았다. 왜 저러나란 의문이 다시 들 때쯤 그가 준영의 귀에다 대고 작게 속삭였다.
“당장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지 않으면, 여기서 키스해 버릴 거야.”
“……!”
농담이지? 당황하며 입을 가린 채 물러섰다. 정말 하는지 안 하는지 볼까? 마치 그렇게 말하는 제라드의 눈빛에 결국 준영은 항복하고 서둘러 방안으로 들어섰다.
타고 온 스포츠카가 아닌, 또 다른 고급 승용차를 타고 어딘가로 향했다. 운전은 기사에게 시키고 제라드는 차를 타고 가는 내도록 준영의 얼굴에 뭔가를 바르고,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꾸미기 시작했다.
“혹시 파티장 같은 델 가나요?”
“맞아.”
“갑자기 왜…….”
“그놈이 주최하는 파티야. 파트너 동반 파티.”
“…….”
“대충 감이 와?”
그제야 셀린느가 곱게 차려입고 나섰던 게 떠올랐다. 왜 미처 생각을 못 했을까. 연회장용 차림이라는 걸
“그냥 내가 갈만한 곳이 아니라서 아얏! ……아파요.”
머리카락을 만지던 손이 냉큼 뭉텅이로 잡아 확 하고 잡아당겼다.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당해서 놀란 게 더 가까웠다.
“네 권리야.”
“…….”
“넌 네가 에드워드를 유혹했다고 자꾸 죄인처럼 구는데 그런 걸로 절대 죄책감 느낄 필요 없어.”
“하지만 사실이잖아요.”
그래, 죄인처럼 구는 게 아니라, 죄인이다. 만약 그때, 자신이 실수만 하지 않았다면 에드워드는 아름다운 약혼녀와 지금쯤 결혼식을 했을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하는 결혼식이 아닌, 전 세계인들에게 축복과 부러움이라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말이다.
그래 오롯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에드워드의 인생이 바뀌어 버린 거였다.
가슴속 한편에, 할머니와의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고층을 담당하던 동료가 몸이 좋지 않아 빠진 날이었다. 임원진이 많은 층수들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중 상임 이사인 에드워드의 사무실도 있었다.
쓰레기통을 비우기 위해 안으로 들어섰다. 점심시간대라 그런지 비서가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쓰레기통을 비우려 할 때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일부러 받지 않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또 전화가 걸려왔다. 세 번째가 되어서야 어쩔 수 없이 구석으로 가 작은 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죄송한데 제가 지금 전화를……. 네?”
-안나 모던 씨의 손주 되시는 분이시지요? 여기 병원입니다. ……모던 씨께서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뺑소니세요. ……저기? Mr. Lee? 듣고 계시나요?
이명이 들렸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 그대로 주저앉았다.
일어나야 돼……, 할머니가…….
숨이 가팔라졌다. 호흡이 불안정해 힘겹게 몰아쉬다 보니, 몸이 뜨거울 정도로 열이 오르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뭐지? 왜 이렇게…… 몸이…….
본능적으로 알았다. 히트 사이클이 찾아왔다는 것을. 한 번도, 비슷한 증상도 일어나지 않았던 주제에, 하필이면 지금 호르몬이 작동했다.
안 돼……. 가야 돼. 할머니……, 할머니한테…….
얼마나 아프실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하아…….”
너무나도 황홀한 감각이 온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알 수 있었다. 그리도 원하고 원하던 존재가 다가온 것을. 멍한 눈으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프도록 뛰던 심장은, 뜨겁도록 오르던 열은, 몸속에 빠르게 퍼진 호르몬은 모두 한 가지만을 원하기 시작했다.
끼익하는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역시나 그가 안으로 들어섰다.
아름다운 남자다.
태양을 닮은 남자는 저를 보자마자 크게 놀라며 주춤 물러섰다. 황급히 발길을 돌리려는 남자를 불렀다.
“에드워드…….”
“넌…….”
문손잡이를 잡던 남자의 행동이 멈췄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그의 볼이 상기되기 시작한다. 꽤 더운 건지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느슨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러면……, 제길……!”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고 있는 에드워드에게 다시 손을 뻗었다. 에드워드는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눈을 뜨니, 자신이 있는 곳이 호텔 방 같은 곳이라는 걸 깨달았다.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가 흠칫 당황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감각. 그리고 이어지는 기억들.
준영은 믿기지 않는 현실에 바들바들 떨며 이불을 들어 올려 제 몸을 살폈다. 아무리 성적으로 무지해도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바로 알았다.
하지만 그것에 당황할 새도 없이 뒤이어 들어온 기억에 준영은 곧장 침대에서 내려섰다.
“할머니…….”
어떻게, 할머니를 잊어버릴 수가 있는 거지?
서서히 돌아온 기억들 속 자신은 쾌감에 취했고, 흥분에 잠식된 채 울부짖었었다. 에드워드의 몸에 매달린 채 흐느끼다, 기뻐했다. 슬픔도 고통도 괴로움도 모두 망각한 사람처럼 그저 헐떡이기만 했다.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다. 아무리 히트 사이클이 갑자기 터졌다고 해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는데 모든 걸 망각하고 알파를 구걸했었다.
이것이…… 오메가구나.
우습게 생각했었다. 만약 억제제를 가지고 다녔다면?
질끈 눈을 감았다.
지금은 책망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준영은 다시 눈을 뜨고는 옷장 안에 반듯하게 걸려있는 자신의 옷을 꺼내어 서둘러 입었다.
여전히 아래가 빠질 듯, 아팠다. 심지어 속옷을 막 올려 입을 때 울컥하고 무언가가 흘러내려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속옷을 내려 확인할 시간도 없었다. 바지까지 껴입고, 카디건을 허리에 두르고는 서둘러 밖으로 빠져나갔다.
“쥐새끼처럼 도망치려고?”
막 객실 문을 열려고 할 때 들려온 소리에 우뚝 멈춰 섰다. 에드워드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준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뛰쳐나갔다.
그를 감히 쳐다볼 자신도, 그에게 변명을 할 자격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미안해요. 할머니.
마음속으로 사과하고 또 사과하며 그렇게 도망치듯 호텔을 나섰다.
* ♟ *
이곳은 TV에서도 가끔 본 적 있는 곳이었다. 기억이 맞다면 뉴욕에서 아니, 미국에서 가장 비싼 룸을 자랑하는 5성급 호텔이다.
절대 이런 곳에 올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온다고 해도 기껏 1층의 커피숍에서 차 한 잔 마시는 게 다일 거라고.
“긴장돼?”
“……조금요.”
사실 아까부터 땀이 자꾸 흥건히 나 몇 번이나 바지에 닦았는지 모른다. 워낙 비싼 슈트라 처음 받았을 때 조심히 입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걸 완전히 망각한 채 말이다.
“긴장할 것 없어. 잘 명심해. 저 안에 있는 사람 중에 네가 눈치를 볼 사람은 아무도 없어.”
“네?”
“넌 햄턴 사의 안주인이야. 이제 곧 현장에서 물러날 아버지의 뒤를 이을 에드워드 햄턴의 정식 부인이자 그의 아이를 가지고 있는 존재지.”
왜 이 말을 이 남자가 해 주는 걸까. 에드워드에게서는 한 번도 듣지 못한 말을. 하지만 안심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그 말을 듣자 아주 조금 아프도록 뛰던 심장이 나아지는 것 같다.
“왜 저한테 이렇게 잘해 주세요?”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다,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제라드는 버튼을 누르고 가만히 기다리는 동안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빚을 갚는다고 하는 게 맞으려나?”
“네?”
“넌 별거 아니지만, 그 별거 아닌 게 사람을 움직이게 만들 때도 있거든.”
“……절 어디서 만난 적이 있었나요?”
준영의 질문과 동시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뭔가 대답을 하려던 제라드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대신 마치 안내원처럼 살짝 옆으로 비켜서 팔을 내밀고는 안으로 들어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마치 높은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이 이래서 권력과 돈을 바라겠다는 생각이 살짝 들어 짧게 웃었다.
“웃으니 좋네.”
“네?”
“종종 웃어. 특히 그 망할 테드에게.”
테드는 에드워드의 애칭이다. 제시카는 늘 에드워드를 애칭으로 불렀다.
언젠가 나도 그렇게 부를 수 있을까.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 미소에 이번엔 쓰게 웃었다. 제라드는 무슨 말을 하려다 이번에도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나만큼 말을 아끼는 타입이구나. 그런 생각을 할 때쯤 드디어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잠시 진정되었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걸 눈치챈 듯 제라드가 준영의 등을 살짝 밀었다.
“재수 없게 구는 게 있으면…….”
일러바치라는 걸까?
“배 아픈 척하고 쓰러져 버려.”
“…….”
아니 그건 좀……. 아무리 그래도 배 속 아기를 핑계 삼고 싶지는 않았다.
당황하는 준영에게 제라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괜찮아. 아이도 이해할 거야.”
전혀 과학적 근거가 없는 말이지만, 이상하게도 든든해졌다. 물론 정말로 아기 핑계를 댈 생각은 없지만, 세상에서 제일 강한 아군이 자신의 배 속에 있다는 게 큰 힘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고마워요.”
“천만에. 정말 고마우면 가서 그 테드와 셀린느 년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려.”
연회장 문 앞에 당도한 제라드는 입구를 지키고 있던 직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라면 신분 확인을 했겠지만 제라드 햄턴을 모르는 자가 몇이나 될까.
세계가 사랑하는 모델을 말이다. 실제로 이 호텔 맞은편 빌딩의 광고판에도 그의 얼굴이 당당히 찍혀있었다.
연회장 문이 열리자, 제라드가 잡으라는 듯 팔을 굽힌 채 내밀었다. 정말 그래도 되나 싶지만 여기서 따로 나란히 걷는 것도 모르는 자신이 봐도 이상할 것 같았다. 팔을 잡자, 제라드가 마치 잘했다는 듯 싱긋 웃는다.
정말 잘생겼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정면을 보았다.
벌써 단상 부근에 서 있던 남자가 보였다.
놀란 듯한 눈빛, 그리고 곧이어 불쾌한 듯 눈매가 좁혀졌다.
나 정말 잘한 걸까. 심장이 다시 무섭도록 뛰기 시작했다.
일방적인 통보가 날아왔다. 해고됐다는 통보.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급하게 사고 수습을 하자마자, 장례식을 치렀다. 이웃 주민 몇몇이 참가한 초라한 장례식.
이웃 아주머니가 많은 걸 도와주지 않았다면 장례식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공동묘지에 묻힌 할머니를 몇 번이고 돌아보며 차마 발길을 못 뗀 그런 허무하고 허망한 장례식.
정신을 채 차리기도 전 경찰이 조서를 꾸미고, 해고 통지를 받고, 그렇게 정신을 다시 차렸을 때 어느덧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오늘도 멍하니 텅 빈 집 안을 둘러보았다. 아직도 일 층으로 내려가면 할머니가 토스트를 굽고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계단을 반쯤 내려가다 서서 멍하니 주방 쪽만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언뜻 할머니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잘못 들은 걸 안다. 환청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도 몸은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현관문을 활짝 열었지만 할머니는 당연하게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남자가 서 있었다.
“햄턴 ……씨?”
“날 기억하는군. 그럼 대화하기도 편하겠군.”
이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에드워드 햄턴이 왜 자신의 집을 찾아온 걸까.
그리고 바로 답은 나왔다.
“각인은 하지 않으셨어요.”
“……뭐?”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목덜미…… 물지 않으셨어요.”
걱정 말라며 어서 보라는 뜻으로 몸을 살짝 틀어 살짝 자란 뒷머리를 올렸다.
에드워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이유가 아닌가? 무안함에 손을 내려 머뭇거리고 있자,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들어가도 될까?”
“네? 아, 네. 들어오세요! 많이 누추하지…….”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에드워드는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짧게 집 안을 둘러보다 소파로 가 앉았다. 집의 소파가 작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에드워드가 앉으니 한없이 작아 보인다.
하긴 키가 6'2"(약 190cm)이니 웬만한 물건은 다 작아 보일 것이다.
“저기 차라도…….”
“됐어. 앉도록 해.”
목소리와 표정만으로도 그가 좋은 일로 찾아오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떤 말을 듣더라도 절대 아파하지 말자, 각오를 다지며 그의 옆에 떨어진 일인용 소파에 앉았다.
에드워드는 준영이 앉은 뒤에도 바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뭔가 고심하는 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듯 보여 이번에도 준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고예요.”
“……뭐?”
“전적으로 제 잘못이고요. 히트 사이클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억제제조차 가지고 다니지 않은 제 잘못입니다. 그러니 햄턴 씨는…….”
“억제제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이 저절로 쥐어졌다. 그가 저 부분에서 왜 저리 놀라는지 잘 안다. 오메가라면 으레 필수품처럼 가지고 다녀야 하는 물건이다.
심지어 베타 여성들도 생리 기간이 다가오면 필수로 가지고 다니는 게 여성 용품인데, 오메가가 그 중요한 걸 애초에 소지하지도 않은 거다.
“하……, 억제제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오메가라. 거기다 원래 내 사무실 담당도 아니었다고 들었는데.”
“그건, 그 날 담당이…….”
“됐군. 자네의 말대로지. 말 그대로 사고. 그러니, 두 번 다시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군.”
변명 따위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에드워드는 준영의 말을 자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큰 다리로 성큼성큼 현관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문손잡이를 잡아 돌리다 말고 다시 준영을 돌아보았다.
“혹시 임신……. 아니, 그럴 리가.”
질문을 하고도 스스로가 한 말이 우스운가 보다. 솔직히 에드워드의 기분은 잘 이해한다. 에드워드 햄턴이 제시카와 약혼을 한 건 그녀를 사랑해서일 수도 있지만, 모델 출신의 그녀를 햄턴 가에서 허락을 한 이유는 모두가 알고 있다.
우성 알파보다 귀하디귀한 우성 오메가라는 이유.
우성 알파는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진 만큼 임신을 시키기 어렵다. 그래서 우성 오메가를 찾았다. 에드워드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우성 알파가 우성 오메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고 들었다.
“전 히트 사이클조차 제대로 오지 않는 열성 오메가예요. ……그런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사실을 알려 주었다. 에드워드는 준영의 말에 더욱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너무 자존심이 없어 보였나?
스스로 반푼이라고 밝히는 꼴이지만, 에드워드가 자신으로 인해 더는 피해를 보지 않았으면 해서 일부러 꺼낸 말이었다.
내 실수로, 얼떨결에 휘말려버렸다. 에드워드는 명백히 피해자다. 심지어 그의 사무실에서.
중간에 호텔로 옮긴 것 같기는 하지만, 분명 소문이 돌았을 거다.
그래서 해고 통지가 일방적으로 날아와도 억울하지 않았던 거다. 물의를 일으킨 오메가. 어떤 구설수에 오를지 뻔히 보였다.
부디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랐다. 제시카란 여자가 에드워드가 바람을 피운 걸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뺑소니 사고를 당한 것처럼, 에드워드도 그저 사고로 생각하고 이 일이 끝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다짜고짜 준영을 데리고 휴게실로 끌고 온 에드워드는 짜증부터 내었다.
“왜 멋대로 이곳에 온 거지?”
“……그게.”
“왜? 내가 다른 오메가와 눈이라도 맞았나 겁이 났나?”
“그런!”
“하긴, 난 전과자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게 충격이었다.
“……그건 사고예요.”
“그럼 내가 사고라면 다른 오메가를 안아도 된다고?”
에드워드의 반박에 또 한 번 입을 다물었다.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가 애초에 먼 사람일 때는 감히 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다른 사람을 안았다는 그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마치 당신이 질투라도 하는 것처럼 보이는군.”
“……그럴 리가요.”
감히 내가 어떻게 질투를 할 수 있을까. 감히 내가. 누구보다 자신의 처지와 입장을 잘 아는 준영이다. 준영은 고개를 힘없이 떨구었다. 침묵이 이어졌지만, 그건 아주 잠시였다. 에드워드의 단호한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돌아가.”
에드워드는 바로 몸을 돌렸다. 그의 곧은 등은, 앞모습만큼이나 멋지다. 하지만 준영은 에드워드의 등이 보이는 뒷모습이 싫다.
“에드워드…….”
“난 분명 돌아가라고 했어.”
더는 듣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뻗었던 손을 말아 쥐고는 다시 거뒀다. 허공에 허무하게 맴돌고 있는 제 손이 마치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 같아 씁쓸했다.
“누구 마음대로? 준영은 내 파트너 자격으로 온 건데?”
휴게실 문이 열리며 제라드가 안으로 들어섰다.
에드워드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하게 바뀌었다.
알 수 있다. 지금 에드워드가 극도로 분노했다는 것을.
하지만 이게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의문은 더욱 준영의 가슴을 답답하게 조이기 시작했다.
“제이.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무려 햄턴 가의 중요한 파티에 홀로 외로이 집을 지키는 형수가 안쓰러워서 데리고 온 것뿐인데?”
“너…….”
분노가 넘실거리며 더욱 무서운 페로몬이 퍼져 흐른다. 준영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 물러섰다. 그제야 에드워드가 아차 하고 페로몬을 거두었지만, 이미 다리에 힘이 풀린 뒤다.
허물어지는 준영을 어느새 달려온 제라드가 부축했다.
“미쳤어? 네놈의 아이를 임신한 오메가 앞에서 진심으로 페로몬을 내뿜다니!”
에드워드에게 차갑게 쏘아붙이고는 준영을 안아 들고는 소파로 가 앉혔다.
에드워드는 그런 준영을 잠시 쳐다보다 몸을 휙 하고 돌려 그대로 휴게실을 나섰다.
“저……!”
제라드는 당장이라도 에드워드를 쫓아갈 듯 몸을 반쯤 일으키다 멈췄다. 준영을 혼자 두는 게 걸려서인 게 뻔히 보였다.
“저 정도로 멍청할 줄이야. 그보다 준영, 괜찮아?”
“네. 괜찮아요. 다만 공기가…….”
막힌 공간이라 그런지 여전히 페로몬이 방안 가득 넘실거렸다. 오메가를 유혹할 때 나오는 페로몬과는 달랐다. 두려움이 물씬 올라오는 감각에 여전히 손발이 떨렸다. 제라드는 그런 준영을 잠시 살펴보다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조금 추울지도 몰라. 그래도 일단 환기부터 시키자.”
“네.”
확실히 찬바람이 안으로 들어오자 조금 나아졌다. 그제야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에드워드가 왜 저렇게 화를 낸다고 생각해?”
“네?”
갑자기 무슨 질문인 걸까. 생뚱맞은 제라드의 질문에 의도를 몰라 머뭇거렸다. 제라드는 어서 생각해 보라는 듯, 가만히 준영을 쳐다만 볼 뿐이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조심스레 추측한 걸 말해보았다.
“중요한 파티에 내가 와서 망칠까 봐요……?”
“하아……, 아직 멀었군. 애초에 둘의 성격부터가 문제야.”
제라드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고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내 대답이 틀린 건가?
“그럼 뭐 때문에 그런 건데요?”
“숙제야.”
“네?”
“내일이면 난 패션쇼 일정 때문에 파리로 가. 2주 정도 집을 비울 거야.”
“아…….”
이 햄턴 가의 유일한 아군인 제라드가 멀리 간다고 생각하자 벌써부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2주 뒤에 그 대답 들을게.”
“네?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 건가요?”
2주나 지난 뒤에도 들을 정도로?
“물론이지. 내 조카가 화목한 부모 밑에서 자랐으면 좋겠거든. ……그러면 나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아.”
뜬구름 잡는 말에 더 혼란스럽다. 하지만 제라드는 더는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이제 일어날 수 있겠어?”
“아, 네.”
아까보다는 한결 낫다. 살짝 메스껍던 속도 가라앉았다.
“그럼 가자.”
“네? 하지만, 에드워드가 저렇게 싫어하는데…….”
“내가 예언 하나 할게.”
“예언요?”
“에드워드는 언젠가 네 앞에 무릎을 꿇을 거야.”
“그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하하.”
너무 허황된 말이라 웃음밖에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제라드는 한없이 진지했다.
“내기할까? 내 예언이 맞게 되면 내 소원 하나 들어줘야 해.”
“그럴 일이 절대로 일어날 리는 없지만, 제라드가 그렇게 바라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 도울게요.”
“정말 매사 너무 진지하다니까. 넌 농담이란 걸 배울 필요가 있어.”
“그러게요.”
딱딱하고 진지하고, 고지식하다. 오메가다운 맛이 없다. 그런 말은 아주 어릴 때부터 들어왔던 말이었다.
“나무라는 게 아니야. 위트를 조금 배운다면, 삶이 더 편안해질 거라서 조언을 하는 것뿐이야. 자, 일어나.”
제라드는 의기소침해진 준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전히 파티장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눈빛과 말투가 너무 단호해 의지가 되었다.
“당당하게 굴어. 고개를 들어. 숙이지 마. 그리고 말했지? 싹수없게 굴면 셀린느라고 할지라도 배를 잡고 쓰러지라고.”
“그러니까 그건 좀…….”
이번에도 제라드는 대답을 듣지 않고 준영을 등 뒤에서부터 밀었다. 준영은 얼떨결에 그에게 떠밀려 그렇게 파티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속이 영 좋지 않았다. 요즘 들어 입맛도 없었다. 뭐라도 챙겨 먹으라며 이웃 아주머니가 주고 간 요리를 한술이라도 뜨려 했지만, 단 한 입에 구역질이 올라와 곧장 싱크대로 가 죄다 토해버렸다.
힘없이 주저앉아 멍하니 싱크대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먹은 게 없고, 외로움과 상념으로 수면이 부족해지자 더더욱 우울해졌다.
벌써 한 달, 어디든 취업을 해 보려 했지만, 오메가라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다. 당장 다음 달 생활비도 없는데 큰일이다.
여차하면 이 집을 팔아야겠지만, 할머니가 남긴 유일한 재산을 팔고 싶지 않았다.
먹어야지. 먹어야 다시 직장을 구하러 갈 수 있어.
준영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말 그대로 쑤셔 넣는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꾸역꾸역 음식을 먹었다.
새삼 오메가가 취업이 힘들구나 싶다. 오늘도 허탕을 치고는 힘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버스비도 아까워, 조금 멀지만 걸어왔더니 다리가 천근만근이었다.
우편함을 습관적으로 열었다. 낯선 모양의 우편이 와 있었다.
이건 뭐지?
처음 받아보는 스타일의 우편 봉투를 열자, 안에는 서류로 보이는 종이가 곱게 접혀 들어가 있었다.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서류부터 확인했다.
그리고 절망에 빠져들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집의 주인은 할머니다. 성은 잇지 않았지만 보호자로 등록되어 있으니 당연히 자신에게 자동으로 상속이 될 거라 생각했다.
집이 넘어간다는 통보가 적힌 서류를 빠르게 읽어내리다 익숙한 이름을 발견하고는 이해를 하였다.
준영은 그제야 할머니에게 손주가 한 명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할머니의 자식이 사고로 죽은 뒤, 손주를 키웠지만, 전 재산을 가지고 도망가 버린 손주가 하나 있었다. 그 손주만 떠올리면 그렇게 힘들어하셔서 입도 벙끗하지 않아 그만 완전히 잊고 살았었다.
법에 무지한 할머니다. 준영 역시도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애초에 할머니 재산의 상속인을 준영에게 돌려야 한다는 걸 생각도 못 했다.
손이 덜덜 떨린다.
일주일 안에 집을 비우라는 통보에 준영은 그저 서류만을 응시한 채 떨기만 했다.
파티장으로 다시 돌아가자, 모든 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준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준영의 옆에 서 있는 제라드에게 시선이 옮겨졌다.
이어지는 쑥덕거림. 무슨 말을 할지 뻔히 보였다.
“배고프지 않아?”
“그다지요.”
“저녁 시간 한참 지났잖아. 비스킷이라도 좀 먹어.”
“괜차……, 이런…….”
제라드는 사람들의 시선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나 보다. 그는 준영의 손을 잡아당겨 곧장 요리들이 진열되어 있는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한 입 사이즈의 화려한 모양의 디저트들이 예쁘게 진열되어 있었다. 제라드는 빈 접시를 하나 들어 몇 가지를 집어 덜고는 준영에게 내밀었다.
“자. 이건 자극적이지 않아서 먹을 만할 거야.”
“고마워요.”
얼떨결에 잡아들고는 접시 위 내용물을 보았다. 하나같이 탐스러운 색을 뽐내고 있었다. 식욕이 돌까 싶었지만 이것들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흠……. 이 근처는 죄다 펀치류 밖에 없네? 있어 봐. 주스라도 얻어올게.”
제라드는 준영이 대답도 하기 전 어딘가로 빠르게 가버렸다. 준영은 당황하며 그를 불렀지만 어찌나 빠른지 벌써 인파들 사이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의식하지 못했던 시선들이 하나둘씩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준영은 접시를 든 채로 최대한 구석으로 가 섰지만 그럼에도 시선은 따라다녔다.
제라드……, 언제 올 거지?
주스 하나 가지러 가는 게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인가.
안절부절못하며 발치만을 보고 있을 때 붉은색의 구두가 바싹 다가온 게 시야에 들어와 고개를 들었다.
“세……, Miss. 햄턴.”
이름을 부르려다 다급히 호칭을 바꾸었다.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했던 그녀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어머. 준영. 남처럼 갑자기 왜 그래요. 언제나처럼 세리라고 불러요.”
응?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했지만 그건 약과였다. 이번에는 팔짱까지 끼고는 친한 척을 하기 시작했다.
“준영, 이런 건 여기서 먹으면 체한다니까요. 보는 시선이 많잖아요. 나랑 같이 발코니로 가서 먹어요.”
일방적으로 준영의 팔을 잡아당기며 걸음을 옮겼다. 당황했지만, 지금 그녀를 뿌리쳤다가는 그녀의 위신에도 좋지 않다 싶어 일단 맞장구를 쳐주었다.
“네, 그래요. 나 혼자 걸을 수 있어요. 그보다 세리. 접시 떨어뜨릴 것 같으니…….”
“이런. 내가 생각이 짧았네. 자, 가요. 준영.”
내 이름 아는구나. 그녀는 결혼식에도 오지 않았다. 제라드는 프랑스에서 패션쇼에 참가 중이라 참석하지 못 했다. 말 그대로 일주일 만에 치러진 결혼식이니 그가 오지 못한 것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셀린느는 집에서 잠을 잤다고 했다. 에드워드의 추궁에 그녀는 그렇게 당당히 대꾸했다.
피곤해서. 그게 셀린느의 대답이었다.
할머니의 손주를 찾으러 가봤지만, 의미는 없었다. 갱에 속해있던 손주는 준영이 찾아가자마자 다짜고짜 뺨부터 때리며 으름장을 놓았다.
소송 걸 생각하지 말고 얌전히 물러서지 않으면 여기 친구들과 함께 찾아갈 거라고. 다들 오메가 맛을 보고 싶어 한다고.
준영은 반항 한번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일주일, 아니 6일이 남았다.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은 할머니 치료비에 들어갔고, 그리고 남은 건 장례식 비용에 쓰였다.
당장 싸구려 호텔에 며칠도 묵지 못할 정도의 금액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보니 갈 곳 없는 오메가를 보살펴 주는 시설이 있다고 했었지.
하지만 핸드폰을 들었다가 힘없이 떨구었다. 요금을 내지 못해 끊겼다는 사실을 까먹었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 힘없이 엎드렸다.
모든 것이 끝난 기분이다.
그리고 그 기분은 준영을 순식간에 수렁으로 빠뜨려갔다.
살 이유가 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이틀을 보냈을 때 준영의 머릿속에 든 생각이었다.
준영은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일 층으로 내려갔다.
잠시 집 안을 둘러보다 할머니의 사진이 있는 벽난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할머니. ……외롭지? 걱정 마. 나도 곧 따라갈게.”
할머니는 아마 자신이 이렇게 따라가는 걸 원치 않을 거다.
하지만 이 세상에 자신을 지탱해 줄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발코니로 나가자, 한두 명의 사람들은 있었지만 다른 이의 소리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왜 이곳으로 데리고 온 건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셀린느는 역시나 발코니로 들어서자마자 커튼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사각으로 준영을 데리고 가 세웠다.
표정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난 말이야. 우연인 줄 알았거든?”
“……무슨 말인지.”
“네가 테드를 꼬신 거. 그런데 이제 보니 네 능력이구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리 아니라고 수백 번 말을 해도 어차피 사람들은 듣고 싶은 소리만 듣는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준영은 다시 침묵을 선택했다. 그리고 셀린느는 준영이 불화를 만들고 싶지 않아 말을 아끼는 걸 다른 식으로 받아들인 건지 기다렸다는 듯 말을 퍼부었다.
“제라드는 어떻게 꼬신 거니? 테드만큼 아니, 테드보다 더 까탈스러운 게 제라드인데. 테드는 오메가에게 너그럽기라도 하지. 제라드는 오메가를 혐오하는 정도인데. 말해 봐. 몸으로?”
제라드에 대한 말이 낯설어 멍하니 듣기만 하다, 한 템포 늦게 반응했다. 준영은 잠시 두 눈을 깜빡이다 입술을 꽉 말아 물었다.
“왜? 주제에 자존심은 상한다는 거니?”
“그 말……, 취소하세요.”
자신만 모욕하는 건 괜찮다. 익숙하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물론, 순수한 의미로 준영을 도와주려던 제라드까지 싸잡아 욕보였다. 심지어 다른 이도 아닌, 그들과 피를 나눈 누이가.
“뭐? 너 지금 뭐라 그랬니?”
“제라드는 이 햄턴 가에서 겉도는 내가 안쓰러워 순수한 의미로 도와줬을 뿐이에요. 정말로 친구 같은 사이일 뿐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하죠? 무엇보다 당신의 동생이잖아요.”
“동생? 누가? 걔가? 하! 난 그딴 자식 동생으로 생각한 적 없어.”
미안해하기는커녕 더욱더 서슬 퍼런 눈빛으로 노려본다. 살짝 언성이 올라가자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이들이 힐끔힐끔 쳐다보기 시작했다. 셀린느는 그런 이들의 시선을 깨달아서인지 다시 온화한 표정으로 바꾸고는 준영을 바라보았다. 무서울 정도다.
“천한 오메가가 페르몬으로 남자 하나 잘 꼬셔서 신분 상승한 주제에…… 감히 날 훈계해?”
이런 사람이구나. 그녀와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힘들지만, 분명 제라드처럼 언젠가는 다가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하긴, 에드워드와의 관계도 어찌 될지 감히 상상조차 못 하는데, 다른 이들과 잘 될 리가 없지 않은가.
제라드가 말했던 그 '빚'이란 게 없다면 그도 준영에게 어쩜 말조차 건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더 먹먹해졌다.
“정말이지. 이런 머저리 같은 것과 대화를 섞고 있는 내가 바보지. 좋아. 일단 너 돌아가.”
“네?”
“돌아가라고. 감히 주제에 햄턴이란 성을 받았다고, 햄턴이 되었다고 착각하지 말고 돌아가라고.”
“……싫어요.”
에드워드가 돌아가라 했을 때에는 각오를 했었다. 그의 성격이라면 그렇게 나올 줄 알아서 차라리 덜 아팠다. 하지만 그의 가족에게까지 이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아니 어쩜 에드워드에게 들은 게 의외로 아팠는지 모르겠다. 그게 상처가 된 줄 모르고 있다가 또 한 번 후벼파여 더 아픈 건지도 모르겠다.
“싫다고 그랬니? 주제에?”
셀린느는 교묘하게 사각지대에서 준영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이를 드러냈다.
“페로몬으로 남자나 꼬시는 더러운 오메가 주제에 감히, 내 말을 무시해?”
“……물론 내가 에드워드를 사고에 휘말리게 한 건 맞아요. 그래서 에드워드가 날 싫어하거나 미워해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당신에게까지, 당신들에게까지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아요. 돌아가지 않아요. 내가, 내가 보기 싫으면 당신이 돌아가세요. ……아니, 당신이 돌아가요. 어쨌든 에드워드의 옆자리는 제 것이니까요.”
잠시 침묵이 이었다. 감정을 쏟아부은 준영은 잠시 무슨 말을 한 건지를 파악하지 못했다. 가만히 준영을 보며 서 있는 셀린느를 마주 보다 그녀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지고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너무 심했다 싶어, 사과를 하려 했지만 그 순간 훅하고 풍겨오는 향기에 주춤 뒤로 물러섰다.
“감히 천한 오메가 주제에 날 무시해?”
“세, 셀린느……, 페로몬을…….”
셀린느는 여성형 알파다. 체형이 여성형이라고 해도 남성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예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걸 몸소 깨달았다.
아무리 야외라 해도 바로 앞에서 무시무시한 페로몬을 직통으로 맞자, 금세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준영은 황급히 양손으로 배를 감싸며 멀어졌다.
방금 전 에드워드의 분노에 찬 페로몬은 설령 기분이 나빠져도 친부라 아기에게는 직접적인 영향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알파는 달랐다.
강력한 페로몬은 이제 몇 개월 되지 않은 태아에게 치명적인 독과도 같았다.
실제로 몇 년 전 어떤 알파가, 임신한 오메가에게 페로몬을 샤워시키다시피 덮어씌워 유산을 시켰다는 기사도 본 적이 있었다.
그 생각에 준영은 더욱 배를 감쌌지만, 그런 걸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페로몬이란 무형의 덩어리가 준영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배가 강하게 조여오기 시작했다. 속이 뒤틀리는 아픔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셀린느는 준영이 바닥에 주저앉고서야, 아차 하고 기운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미 페로몬에 너무 취해버렸다. 헛구역질이 마구 올라왔다. 먹은 게 없어 신물만 조금 올라온다 싶더니, 뒤이어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배 속의 아기가, 다른 알파의 페로몬에 강력히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준영!”
흐릿한 의식 속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제라드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이 순간에도 자신을 찾지 않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에드워드가 조금, 아주 조금 미워졌다.
할머니의 액자를 가슴에 품은 채 집을 나섰다. 문을 잠가야겠지만, 도둑이 들어도 뭘 훔쳐갈 것도 없었다. 아니, 차라리 죄다 훔쳐가 버렸으면 좋겠다는 조금 나쁜 생각을 하며 준영은 걸음을 옮겼다.
걷고 또 걸어, 허드슨 강 하류에 당도했다. 학생 때, 학교를 가기 위해 늘 이 길을 걸었었다. 그때에만 해도 미래를 그나마 꿈꿀 수 있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견디고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착각도 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그 현실을 견뎌야 할 이유조차 사라져 버렸다. 할머니는 말을 듣지 않는 준영에게 매우 실망하겠지만, 그래도 준영을 거부하지는 않을 거다. 분명 못 말리겠다 웃으며 잘 왔다고 반겨줄 거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할머니…….”
강가에 멍하니 서 있기를 잠시, 저 멀리 강 건너편 익숙한 실루엣이 보여 한 걸음 떼었다.
할머니가 멀리서 준영을 불렀다.
손짓을 하는 게 오라는 건지, 오지 말라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설령 오지 말라는 손짓이라 할지라도 모른 척할 것이다. 이제는 편안해지고 싶다는 욕심에 모른 척 발을 떼었다.
두 걸음 세 걸음……. 드디어 마지막 한 걸음을 떼려는 그때, 누군가가 준영의 팔을 잡아 확 하고 강제로 당겼다. 허공에서 크게 뒹굴듯 바닥에 쓰러졌다. 그때 뒤통수를 계단에 부딪쳐 큰 충격에 서서히 의식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봐……! 이봐! ……준영! 이준영!”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에드워드가 준영의 이름을 불렀을 때였다.
꿈과 현실이 혼동된다. 언뜻 에드워드가 준영을 이름으로 불렀던 것 같은데 그것이 꿈이었나 보다. 멍하니 익숙한 병동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 때, 문을 여닫는 작은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머. 제가 깨웠군요.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에드워드가 이름을 불러준 건 꿈이었나 보다. 안으로 들어서던 간호사가 미안하다 사과를 하며 서둘러 다가와 앉으려는 준영을 부축해 주었다.
“여긴 햄턴 가 병원인가요.”
“네. 그때 이후 처음이네요. 준영 씨. 아니, 햄턴 부인.”
“……그러게요. 그리고 예전처럼 불러주세요. 그 호칭은 영 익숙해지지가 않네요.”
준영의 말에 간호사 사라가 그렇겠다며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 자살을 시도하려다, 우연히 지나가던 에드워드에게 저지당했다가 기절해 실려 온 곳이 여기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임신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했다.
“사실 검사 시기와 출산 문제가 아니면 안 만나는 게 좋은데 말이죠.”
사라의 말에 준영 역시도 힘없이 웃었다. 그녀의 말대로 의사와 간호사를 자꾸 만나서는 좋을 건 없으니깐.
“저기, 혹시……”
뒤늦게 자신이 왜 병원에 입원했는지를 떠올려 다급히 물어본 건 좋았지만, 막상 들으려니 겁이 났다. 말끝이 절로 흐려졌지만 다행히 사라는 알아들은 듯 생긋 웃으며 곧장 대답을 해주었다.
“네, 걱정 마세요. 부친인 에드워드 씨를 닮아서 그런지 매우 건강하고 튼튼하니까요. 갖가지 검사를 했는데, 자세한 건 닥터 존슨께서 오셔서 설명하시겠지만, 아기는 정말 건강하답니다.”
“고마워요. 사라.”
“별말씀을요. 혹 더 필요한 건 없으시고요?”
“네.”
아기만 무사하면 된다. 그럼 정말로 아무것도 필요가 없다.
“그럼 닥터 존슨과 함께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사라는 링거를 확인한 후 한 번 더 안부를 묻고서야 병실을 나섰다. 저 극진한 태도는 처음에는 정말 적응이 되지 않았다. 물론 간호사들은 기본적으로 친절하지만, 할머니가 입원했을 때와는 모든 게 달랐다.
처음에는 그 사실조차도 씁쓸하게 받아들였었다. 지금도 사실 그렇게 적응이 되는 건 아니지만.
멍하니 창문 너머를 보다, 메시지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침대에서 살짝 내려서 옷장 옷걸이에 걸려있는 슈트 겉옷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들었다.
“배터리가 다 돼가네.”
읽지 않은 채 계속 깜박여서 그런가 보다. 메시지를 확인하자, 제라드에게서 온 3건과 광고 2건이 와 있었다.
에드워드는 당연하게도 없었다.
씁쓸하게 미소 짓다 제라드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병실을 지켜주고 싶었지만, 파리로 가야 해서 어쩔 수 없이 나왔어. 미안.]
괜찮은데……. 마음만으로도 고맙다.
[지도 양심이 있는지 간병인을 자청하더군. 이참에 제대로 길 잘 들여. 조카와 준영이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그럼 2주 뒤에 대답 잘 해.]
[참 심심하거나 답답하면 전화는 해도 돼. 이 번호로 걸어.]
1시간 단위로 연락을 보낸 게 확인되었다. 자신을 걱정해 주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런 사람이 아직도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런데 간병인을 자청한다는 사람은 누구지?
혹시 셀린느?
절대 그럴 성격으로는 보이지…….
그때 문이 열리며 에드워드가 안으로 들어섰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준영은 가만히 쳐다만 보았다.
에드워드도 준영이 깨어있다는 사실을 몰랐던지, 자리에 멈춰서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이어지다 에드워드로 인해 깨어졌다.
“몸은 좀 어떻지?”
“아, 그……. 네. 감사해요.”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대답이라고 할 수 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할 수만 있다면 방금 전 대답을 주워 담고 싶은 심정이다.
준영의 대답에 에드워드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나 보다.
“뭐가 감사하다는 거지?”
“그게……, 간호해…… 줘서?”
다시금 침묵이 흘렀다. 에드워드의 미간이 좁혀진 걸 본 준영은 자신의 말이 잘못된 건가 싶어 눈치를 봤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딱히 지적할 생각은 없는지 별다른 말 없이 소파로 가 앉았다. 준영도 슬쩍 침대로 가 걸터앉을 때 그가 조금 늦은 대답을 해 주었다.
“간호를 했다기보다, 병실을 지킨 것뿐이야.”
“그래도 곁에 있어 주셨잖아요.”
그래, 얼마든지 간병인을 붙일 수 있었을 건데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정말로 순수하게.
에드워드는 이번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공기가 어색했다. 뭐라도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구세주가 등장했다.
담당 의사 존슨과 간호사 사라였다.
의사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에드워드를 보더니 반가워하며 인사를 건넸다.
예전에 들은 기억이 났다. 둘이 같은 대학 동기 출신이라고 했다. 에드워드도 방금 전까지 냉랭하던 분위기가 한풀 꺾였다.
둘은 오래간만에 만난 건지 사적인 대화까지도 나눴고 준영은 그 모습이 부러워 멀뚱히 쳐다만 보았다.
“혈압 잴게요.”
사라가 다가와 말을 건네고서야 두 사람의 대화가 끊겼다. 언젠가 한잔하자는 존슨의 말에 에드워드가 피식 웃는다.
그래, 원래 에드워드는 저렇게 잘 웃는 남자였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답지 않고 모든 이에게 자상했다. 그래서 일개 청소원들도 그를 좋아했다.
하긴 청소원들에게도 깍듯했으니 누가 그를 싫어할까.
“118에 74. 정상입니다. 온도 잴게요.”
혈압 측정을 끝낸 사라가 이번에는 귀에다 온도계를 가져다 대고는 체온을 측정했다. 의사는 사라가 체온을 말해 주는 걸 듣고는 가져온 차트를 뒤적이며 평상적인 질문을 하였다.
“다 정상입니다. 그리고 두 분께 예전에도 말씀을 드렸다시피……, 오메가는 일반 임산부들보다 유산 확률이 높답니다. 그 이유가 뭔 줄 아십니까?”
존슨의 질문에 에드워드는 침묵을, 준영은 잘 알 수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조심스레 되물었다.
“제가 남성형 오메가라서 그런가요?”
여성형 오메가보다 남성형이 임신 확률이 더 낮고 유산 확률도 높다고 언젠가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내용까지는 볼 시간이 없어 넘겼던 게 기억났다.
“아니라고는 할 수 없죠. 분명 남성체 자궁이 조금 더 약하긴 하지만 좀 더 정확히는 육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이유가 더 큽니다. ……스트레스죠. 아무리 오메가에 대한 시선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나이 지긋한 어른들과 그들의 아래에서 자란 이들은 비슷한 생각을 하죠. 오메가에 대한 차별. 심지어 남성형은 더욱더 임신을 했을 때 비관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그럴수록, 네가 잘해야 돼.”
의사는 말을 하다 말고 에드워드를 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인지 모를 표정으로 의사를 마주 보다 이번에는 준영을 바라보았다.
“스트레스. 그것만 조심하신다면 분명 어여쁜 아기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늘,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고 푹 자고 잘 웃으세요. 엄마가 웃는 게 아기에게 가장 큰 영양소라는 걸 잊지 마시고요.”
웃는다……. 언제 마지막으로 웃었던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번엔 준영이 저도 모르게 에드워드를 보았지만 그는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 의사도 에드워드가 나간 걸 뒤늦게 깨닫고는 허탈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라 씨. 잠시 대화 좀 하게 먼저 나가 줄래요?”
“네. 그럼. 쉬세요. 준영.”
사라는 준영에게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섰고, 존슨은 그녀가 문을 닫고서야 고개를 돌려 준영을 보았다.
“힘드시죠?”
“……무슨 말인지.”
“대충 어떤 일로 온 건지 아니까요.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에게 이런 일을 당했으니. 솔직히 보지 않아도 어떤 대접을 받는지 알 것 같더군요. ……에드워드 녀석은 겉으로는 사람 좋아 보이지만 사실 아니에요. 꽉 막힌 융통성 없는 놈이지요. 아닌 척할 뿐.”
“많이 친하신가 봐요.”
“대학교 때 유일하게 술자리를 가졌던 사이긴 했죠. 뭐, 겨우 일 년에 두세 번이긴 했지만……. 일단 이런 얘기보다, 준영 씨. 에드워드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시나요?”
직접적인 질문에 준영은 당황했다. 어떤 답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정확히는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수위 조절이 어려웠다.
준영이 머뭇거리자 존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에드워드가 당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하시나요?”
“…….”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쓰게 웃었다. 존슨은 그런 준영의 반응을 보더니 푹 한숨을 내쉬었다.
“스트레스의 가장 근본 원인이 뭔지 알겠군요.”
“아니에요. 에드워드는 저에게 정말 잘해 주세요.”
“제가 오메가들을 전담해서 꽤 많은 임신한 오메가들을 봤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가슴속 한가운데에 스스로를 비하하는 나쁜 버릇이 있더군요. 그리고 준영 씨도 제법 그런 편에 속하고요.”
“……한심하죠.”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자신감을 가지란 말입니다. 당신은 결코 죄인이 아닙니다. 준영 씨는 아니, 대부분 모르는 것 같지만 우성 알파는 오메가의 페로몬에 그렇게 잘 흔들리지 않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네?”
“에드워드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당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란 뜻입니다. 어쩌면 호감에 더 가까울 수도 있고요. 그러니 자신감을 가지세요.”
안심을 시켜주려고 한 말이란 걸 안다. 그럼에도 기쁜 건 사실이다. 뻔히 보이는 선의의 거짓말에도 준영은 모른 척 웃어 주었다.
“당분간 셀린느는 저택에 오지 못하게 만들었어.”
퇴원하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에드워드가 한 말이다. 멍하니 차창 밖을 보던 준영은 그의 말에 당황하며 되물었다.
“왜요?”
준영의 반응에 에드워드의 미간이 팍 좁혀졌다. 그는 질문을 한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오히려 준영에게 되물었다.
“좋아할 줄 알았더니?”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전 딱히 처벌이나 보복을 바라지 않았어요. 나 때문이라면 굳이 그러지 마세요.”
에드워드는 진심일까 하는 눈빛으로 준영을 보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다시 단호하게 대답했다.
“햄턴 가의 장남인 내 아이를 가진 오메가에게 그런 짓을 했어. 그 정도면 처벌도 아니지.”
“하지만 당신 동생이잖아요.”
“그게 왜? 셀린느와 내가 핏줄인 것 맞지만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지?”
“……그러네요.”
또 이런 식이다. 준영은 에드워드의 현실적 지적에 그냥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에드워드는 그런 준영을 바라보다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려고 했지만 그때 차가 서서히 멈춰 섰다.
어느새 저택 정문에 당도했다. 거기다 주인 내외가 오기를 기다리던 고용인들이 입구에서 대기 중이었다.
결국 에드워드는 하려던 말을 끝내 하지 않았다.
기어코 퇴원을 하겠다는 준영의 말에 에드워드는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지만, 결국 고집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굳이 억지를 부려 퇴원을 한 의미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사진이라도 들고 나오고 싶은 욕심에 살던 집으로 향했지만, 이미 우편함 색부터 달라져 있었다.
준영은 멍하니 담장 너머 자신의, 아니 할머니와의 집을 쳐다보다 쓸쓸히 발길을 돌렸다.
“왜 들어가지 않지? 또 이상한 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정말로 놀라 소리를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돌아간 줄 알았던 에드워드가 왜 이곳에 있는 걸까. 하지만 곧 그가 준영이 자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거기다 자신의 아이를 가진 오메가였으니 더욱 걱정이 될 것이다.
“절 걱정하셨어요?”
준영의 질문에 에드워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한 한숨을 내뱉었다.
“……정확히는 네 배 속의 내 아이겠지.”
우성 알파는 임신이 어렵다. 실제로 자신의 자손을 가지지 못하고 여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3분의 2라고 들었다.
그런 행운이 자신에게 온 것이 아직도 얼떨떨하다.
“자살, 하지 않아요. 걱정 마세요.”
영원히 혼자가 됐다는 사실이 무서워 그런 짓을 한 거였다. 하지만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준영은 이제 혼자가 아니라 기뻤다. 그리고 그 존재가 에드워드의 피를 이어받은 게 기뻤다.
“병원에서도 말했지만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면 얼마든지 만나게 해드릴 테니…….”
차마 아이를 데려가라고 말은 하지 못하겠다. 이제 자신에게 있어 유일한 생명줄인 아이였다. 빈말로도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자살을 하지 않겠다는 말은 그나마 들어줄 만하군. 그래서, 왜 그냥 다시 나온 거지? 마트라도 갈려고?”
준영은 어떻게 할까 고민했지만 역시 사실대로 말하는 게 아니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먹을 게 하나도 없어서요. 마트에서 뭐라도…….”
“준영이니? 세상에! 너 도대체 어딜 간 거니! 그리고 왜 갑자기 집을 내놨어? 아니 그런 것보다 그 많은 짐들을 죄다 기부해버리다니. 심지어 할머니와의 사진까지! 내가 얼마나 놀라……, 어머, 이분은 누구시니?”
갑자기 준영의 말을 끊으며 옆집 아주머니가 달려 나오셨다. 뒤늦게 에드워드의 존재를 파악하고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중요한 말은 죄다 뱉고 난 뒤였다.
에드워드의 표정은 이미 냉랭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 아주머니. 자세한 건 제가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아, 그래. 혹시나 해서 내가 사진은 일단 빼놨단다. 나한테 이……, 어머?”
아주머니의 말에 채 안도하기도 전, 에드워드에게 팔목이 잡혀 그대로 끌려가 버렸다. 놀란 아주머니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 질문에 다급히 꼭 찾으러 가겠다 말하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기어코 차가 서 있는 곳까지 준영을 데려간 에드워드가 뭐라 할 틈 없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집이 팔렸는데도 나한테 거짓말을 하다니! 솔직히 말해. 아직도 이상한 생각을 하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마치 걱정을 해 주는 것 같다. 준영은 저도 모르게 멍하니 에드워드를 바라보다 조심스레 되물었다.
“왜…… 절 이렇게 걱정하세요?”
아무리 아기가 중요하다고 해도, 왜 이렇게까지 걱정을 하는 걸까. 혹시 아주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어리석은 희망에 아주 잠시 들떴던 것 같다.
혹시……, 혹시…….
“네가 내 아이를 가진 오메가라서야.”
아……, 역시. 준영은 울컥 올라오는 쓴 감정을 애써 삼켰다.
“그럴 리가요. 전 제 주제를 잘 알아요.”
그래. 이번 한 번은 실수이다. 두 번은 멍청한 생각에 현혹되지 않을 거다.
망각하고 있었다. 너무 많은 일이 연달아 일어나 그만, 에드워드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을.
“그거 참 다행이군.”
에드워드의 대답에 쓰게 웃었다.
“타.”
“……네?”
“보아하니 갈 데가 없어 보이는데 그 상태로 돌아다니다 유산이라도 한다면 그땐 어떻게 책임질 거지?”
다정하지만 차가운 말. 상반되는 두 가지가 공존하는 말에 준영은 또 한 번 씁쓸히 미소를 지으며 얌전히 차에 올라탔다.
병원에서 잠을 너무 자서일까. 아무리 자려고 뒤척여도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결국 누운 지 2시간 만에 잠을 포기하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저녁을 먹고 시간이 너무 흘러서 배도 고팠다. 준영은 카디건을 걸치고는 핸드폰을 쥐에 든 채 조심스럽게 방을 나섰다.
늦은 새벽이니, 고용인들도 잠들어 있을 거다. 가급적 깨우고 싶지 않아 최대한 조심스럽게 일 층으로 내려갔다. 다음에 쿠키 같은 거라도 몇 개 챙겨놔야겠다. 간단한 군것질거리 하나 때문에 일일이 일 층으로 내려가려는 게 번거로웠다.
아니, 그건 사실 아무렇지 않다. 웬만하면 방에서 나서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일 층으로 내려가자, 은은한 조명만이 홀을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일 층은 생각보다 밝아 핸드폰의 조명을 끈 뒤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일단 처음부터 고민이다. 대형 식당용이 아닐까 싶은 커다란 냉장고가 무려 3개다.
이렇게 큰 냉장고가 필요할까 싶었지만, 집에 있는 고용인들을 생각하자 금방 납득이 되었다. 하나하나 열었다가, 드디어 먹을 수 있는 과일 같은 것들이 담긴 칸을 찾았다. 토마토와 사과를 하나씩 꺼내어 들었다. 싱싱한 것이 보관상태가 좋아 보였다. 먹을 걸 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꼬르륵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가 본 건 아니겠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피식 웃었다.
그리고 보니 입덧도 어느새 사라졌구나. 처음에는 정말 식겁했는데…….
토마토와 사과를 잘 씻은 후 다시 주방을 나섰다. 바로 방으로 돌아갈까 하다, 커다란 창문 너머 보이는 정원 쪽의 은은한 조명에 이끌려 홀린 듯 밖으로 나섰다.
에드워드가 빌려준 호텔은 혼자 쓰기에는 너무 과분했다. 그냥 호텔도 아니고, 뉴욕의 가장 고급 호텔이라 할 수 있는 곳의 가장 비싼 룸이 분명했다.
열 명도 넉넉히 쓸 수 있는 공간은 너무나도 고급스럽고 럭셔리하지만, 준영에게는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에드워드가 함께 있어 줄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 넓은 곳을 왜 빌려 주었나란 생각에 화들짝 놀랐다.
내가 무슨 생각을…….
임신이 벼슬도 아닌데 자꾸만 못된 마음이 올라온다. 준영은 고개를 휙휙 젓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곳은 일단 임시방편으로 해결됐다. 일자리를 구하자. 정식 직장은 못 구하겠지만, 단기 알바라도 일단 구하자. 정부에서 오메가 임산부에게 주는 혜택이 다양하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그것들도 알아보자.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무기력함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의욕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다시 살아갈 이유는 정말로 큰 거였으니까.
준영은 일단 밖으로 나가자 싶어 드레스 룸으로 가 외투부터 찾았다. 어디서 구한 건지 몰라도 입으라고 가져다 놓은 옷들이 한가득이지만, 준영은 자신의 점퍼를 꺼내었다.
부담도 되지만, 자꾸만 의지했다가는 방금 전처럼 나쁜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싶어서였다.
에드워드가 요금을 내주어 다시 살아난 핸드폰을 쥐고는 서둘러 객실 문 쪽으로 걸어가다, 갑자기 들려온 초인종 소리에 멈춰 섰다.
누구지?
한창 일을 할 시간대이다. 이 시간에 에드워드가 올 리가 없다. 혹시 또 그가 멋대로 무언가를 보낸 건가? 옷들도 호텔 직원들을 시켜 보냈던 게 떠올라 조심스럽게 인터폰으로 가 밖을 확인하였다.
제시카 윈스턴. 전혀 상상치 못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만나야 할 인물이기도 했다. 다만 차마, 무슨 면목으로 그녀를 만날까 싶어 외면하고 있었을 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을 때, 또 한 번 초인종이 눌러졌다. 애초에 이곳에 있는 걸 알고 왔을 것이다.
준영은 다짐을 하듯 숨을 크게 들이켠 후, 도어 벨을 눌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곧 손잡이가 돌아갔다. 그리고 살짝 틈새를 보이는 문.
매 순간순간이 다가올 때마다 심장이 아프도록 저려왔다.
드디어 완전히 문이 열리자, 감히 쳐다보기도 황홀할 만큼 아름답게 생긴 여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이준영 씨?”
“네. ……들어오세요.”
목소리조차 감미롭다. 모델 출신인 그녀는 자세와 걸음걸이조차도 반듯했다. 태어나 한 번도 굴곡진 인생을 살지 않으면 저리 될까. 아니, 자신은 수백 번 환생해도 저런 모습으로 태어나기 힘들 것이다.
그래, 감히 자신은 저런 여성의 연인을 유혹한 것이다. 감히 저런 여성의 연인의 아이를 가져버린 거다.
드디어 지독한 현실이 준영의 뇌리를 치기 시작했다.
행여나, 지우라 하면 어쩌지? 두려움에 양손으로 배를 가렸다. 본능적인 행동이었지만, 제시카는 다르게 받아들였나 보다.
“……에드워드는 정말로 자신의 아이를 가지고 싶어 했어요.”
“…….”
“그와 제가 연인이 된 지도 벌써 3년이에요. 수없이 많은 밤을 보냈지요. 하지만 전 아이를 가지지 못했어요. 그럼에도 에드워드는 절 원망하지 않았어요. 입양까지도 생각했죠. 그러던 중에…… 그의 아이가 생긴 거예요. 어떻게 제가 그의 아이를 해코지할 수 있을까요.”
처연한 표정과 목소리. 준영은 더는 똑바로 그녀를 볼 수 없어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놀란 제시카가 빠르게 다가와 그러지 말라 했지만, 준영은 엎드린 채 눈물을 쏟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무슨 말을 할까. 오로지 자신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생긴 일이다. 사고? 아니,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억제제, 그거 하나 얼마 한다고 그거 하나 주머니에 넣어 다니는 게 무슨 큰 대수라고 구비조차 하지 않았던, 자신의 멍청하고도 멍청한 실수였다.
“부디…… 정말 미안하다면 절 위해…… 일어나 주세요.”
만약, 임신을 하지 못했더라면 감히 에드워드를 쳐다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여성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제시카의 부탁에서야 준영은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섰다. 제시카는 준영을 데리고 소파 쪽으로 가 앉혔다. 그리고 그녀는 맞은편으로 가 앉았다.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우아함이 넘쳤다. 그녀와 에드워드를 닮은 아이가 생겼다면,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오기 전까지 많은 고민을 했어요. 사실. 분노에 더 가깝다는 게 맞을 거예요. 나는 가지지 못했던…… 그 행운이 당신을 택한 것이 슬프고 원망스러웠어요.”
“……죄송합니다.”
“부디, 제 말이 끝나기 전까지…… 사과는 하지 말아 주세요.”
제시카의 언질에 준영은 입술을 말아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짧은 숨을 내뱉고는 유리 벽 넘어 도시의 경관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홀린 듯 구경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지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에드워드도 내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설득시킬 거라고 말했어요.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
숨이 턱하고 막혔다. 지금 당장 사람들이라도 뛰어들어와 준영을 잡아 강제로 병원으로 데리고 가는 게 아닐까 싶은 공포도 함께 올라왔다.
“에드워드가 당신을 만나러 간 것도…… 당신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라고 믿었지요. ……하지만 그는 당신에게 그런 말 한마디 하지 않았겠지요?”
“……네.”
아이를 위해서라며, 갖가지 도움까지 주고 갔다. 에드워드는 운조차 떼지 않았다.
“정말이지. 그깟 아이가 뭐길래. ……하.”
제시카는 허탈하게 웃더니 이번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유리 벽 쪽으로 다가가 손바닥으로 벽을 건드렸다. 그녀는 도시 풍경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오기란 게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지요. 그래서 저도 생기더군요. ……어차피 에드워드와 함께 결혼해 살면서, 만에 하나 40이 넘어가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면 입양을 하기로 생각했었어요. 그 시기가 더 당겨진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그런! 전! ……전, 아이를…….”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으로 배를 감싸고는 최대한 멀찌감치 떨어졌다. 제시카는 벽에 여전히 손을 댄 채로 상체만 돌려 준영을 보았다.
감정이 얼굴에 비치지 않았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에드워드가 그러더군요. 유일한 피붙이까지 죽은 마당에, 어떻게 아이까지 뺏겠냐고. 자신의 아이를 가진 이는…… 대리모가 아니라고. 아무리 사고라 할지라도, 함께 가진 아이라고.”
“…….”
순간적으로 안도감이 올라왔다. 그리고 함께 기쁨이 벅차올랐다. 함께 가진 아이. 그 말에 심장이 뛰었다. 제시카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지는 걸 보고서야, 아차 하고 고개를 숙였다.
“당신은 에드워드를 사랑하는군요. 그렇죠?”
“죄송…….”
말이 끝나기 전까지 사과하지 말라는 말에 다시 입술을 말아 물었다. 제시카는 다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각또각. 규칙적인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 이어 냉장고로 가더니, 생수병 하나를 꺼내 들어 컵에 따르기 시작했다.
고요한 룸 안에 물을 따르는 소리만이 이어졌다. 빈 컵은 이미 물로 가득 찼지만, 제시카는 생수병 하나가 다 비워질 때까지 붓고 또 부었다.
그녀도 절대 평화로운 상태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가슴속 한편, 또 한 번 못된 마음이 올라온다. 제시카, 그녀가 차라리 자신의 몰아붙이고 따지고, 화를 냈다면 아기를 핑계로 에드워드에게 모든 걸 고해바쳤을 거라는, 나쁜 마음.
“이런. ……실수했네요.”
제시카는 이미 빈 생수병 상태에도 한참을 들고 있다가, 뒤늦게 상념에서 벗어났다. 자신이 한 짓을 보고는 허탈하게 웃다, 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
퍽!
바로 옆, 벽에 무언가가 날아와 산산조각이 났다. 무슨 일인지 채 인지도 하기 전, 주룩 볼에서 화끈하게 고통과 함께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뭐……지?
멍하니 손을 올려 화끈거리는 볼을 만졌다. 축축한 것이 손가락에 닿았다. 피였다.
“윈스턴 씨……?”
“감히, 고작 천한 청소부 주제에! 예전부터 테드를 그런 눈으로 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쫓아내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들은 척하지 않았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윈스턴 씨…….”
“지워. 당장 배 속에 그 끔찍한 걸 지워!”
주춤, 주춤 물러섰다. 방금 전까지 없던 증오에 가득 찬 눈빛이 숨조차 쉴 수 없게 만들었다. 제시카는 그런 준영에게 빠르게 다가와 뺨을 후려쳤다. 또다시 화끈한 뜨거움이 남는다.
제시카는 한 번에 끝내지 않고 준영을 때리고 또 때렸다. 마지막에는 주먹으로 마구잡이로 때리다, 힘없이 허물어졌다.
그녀는 바닥에 엎드려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오열했다.
“왜…… 왜! 왜 나한테는……. 나는! 왜!”
아이를 가진 오메가보다, 가지지 못한 오메가가 더 자살률이 높다. 그 사실을 준영은 처음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