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지났다고 하여
늦지는 않았으므로 (외전)
지금 거주지에서는 청소와 빨래를 할 일이 없었다. 일단 청소는 집주인 ‘둘’이 모두 집안을 비웠을 때, 가사 전문가가 방문해 마무리까지 말끔히 해냈다. 세탁 또한 분류만 해두면 사용인이 와서 세탁업체에 맡기고 찾아오고를 반복하는 수고를 들여주었다. 이 과정을 만들어낸 이는, 당연하게도 태환이었다. 처음엔 시온도 적극 목소리를 냈었다. …과하지 않아요?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그렇게 하게 되었으니 알아두라는 통보를 듣고 바로 수긍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권태환은 이시온에게만큼은 너그럽고 느슨하게 굴어주었으나 이런 부분에서만큼은 제 의견을 확실히 밀어붙이는 편이었다. 가게에서 일하고 오면 피곤할 텐데, 졸지 말고 잘 기다리라고 손 덜어주는 거야. 그리 말하니 더는 말릴 수도 없었다. 도톰한 입술이 몇 번 달싹거리다 멈췄다. 알았어요… 결국엔 또 항복이었다. 확실히 사내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시온이 아무리 신체 건장하고 운동 경력도 오래 있었던 청년이라고 한들 한계가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꽤 중노동에 가까운 제과 작업을 하는 것도 버거운데 출퇴근에 걸리는 시간도 제법 되다 보니 돌아와 가사노동까지 하기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 이시온은 끝내, 펜트하우스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앞의 서술만 들으면 권태환이 단칼에 요구 사항을 거절한 듯 보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모든 일은 차례대로 진행되었다. 법원에서 정식으로 태환과 경아의 이혼을 선고 내린 뒤, 마침내 부사장은 한 그룹의 총수가 되었다. 중간에 권재성으로부터 ‘이럴 거면 다시 입양 절차를 밟으면 어떻겠니’라는, 놀라 자빠질 권유를 받기도 했다. 서른 넘은 나이에 입양되는 건 여러모로 좋은 선택이 아닌 듯 보였다.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이었지만… 이시온의 양심과 상식은 아직 틀을 크게 벗어나질 못했다. 그러는 동안 3년이 훌쩍 지나갔다
어느 날, 사내는 청년에게 언제 들어올 거냐고 물었다. 시온은 눈꺼풀을 몇 번 들었다가 놓았다가, 귀를 빨갛게 물들이고 대답했다. 같이 사는 건… 좋아요. 저도 바라요. 포문을 쉽게 열었으면 뭐 하겠는가. 기왕 거주지를 옮기게 된 것, 매장도 넓은 곳으로 옮겨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엔 굳이 그럴 필요도 없거니와 지금 위치가 익숙하다고 바로 거절했다. 그럼 펜트하우스는 성북구, 메종 단 루는 동작구에 있으니 제가 보내준 차량을 타고 다니라니까 그건 또 너무 거창하단다. …협의할 생각이 있긴 한 건가? 남자는 어이없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한쪽 입꼬리를 기분 좋게 올렸다. 예상치 못한 바는 아니었던 덕분이다. 지적을 듣고 제가 너무 완강했나 싶었던, 내심 ‘형’에게만큼은 소심한 이시온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차, 선물 받았잖아요. 그거 타고 다닐게요. A 안은 실패지만, B 안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던가. 태환이 낮게 목을 울리며 웃었다.
20대 끝자락에 서 있던 게 엊그제 같지만, 시온도 이젠 어엿한 서른둘이었다. 펜트하우스에서 산 지는 꼬박 3개월 차가 된 참이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거주 기간이었다. 일상은 지나치게 평범했고 걱정했던 것보다 빠르게 적응을 해 나갔다. 다만 아직도, 도무지 살림살이에 남의 손을 빌린다는 게 익숙해지질 않았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열세 살 때부터 열아홉 살까지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으면서도 말이다. 어쨌든 차차 적응해야만 했다. 일주일 전, 그는 문득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태환의 퇴근이 늦어지는 날이었다. 형하고 계속 살 테니까. 평생 이렇게 지내게 되겠지. …그래. 빨리 익숙해지자. 서른이 넘어도 여전히 말간 낯을 한 청년이 다짐했다. 그랬는데, 그 결심이 8일을 넘기지 못했다. 왜였을까. 원인은 단순하고도… 어이가 없었다. 이시온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자주, 수영장을 이용했다. 특히 정기휴일인 날에는 반나절 동안을 물속에서 보냈을 정도였다. 마침 오늘이 쉬는 날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서랍장을 열었건만. 요새 너무 수영장을 들락날락 거렸던 걸까. 수영복은 있으나 래시가드가 단 한 벌도 없는 게 아닌가. 낭패가 아닐 수 없어 난색을 보이던 그때,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시온은 세탁을 맡아주는 사용인을 ‘손 집사님’이라고 불렀다. 실제로도 권 씨 저택, 즉 권태환의 본가에서 일하는 보조 집사라고 했다. 아무튼, 그 권 집사님이 미리 전해둔 말이 있었다. 업체 일정으로 수영복류는 이틀 뒤 정리해 드릴 수 있을 거 같은데 괜찮을까요? 조심스레 묻는 말에 더 조심스레 대답한 건 분명 자신이었다. 네, 그럼요. 괜찮습니다. 팔을 들어 눈을 비볐다. 아, 이걸 잊어버리고 있었다니. 잠시 자책의 한숨이 흘렀다. 헤엄, 치지 말까. 눈동자가 흔들릴 정도로 고심하는 시온이었다. 입술 사이로 잠시 앓는 소리가 지나갔다. 수영에 큰 감흥은 없었으나 막상 다시 취미 삼아 하기 시작하니 하나의 루틴이 돼버렸다. 여러 의미로 운동이 필요하기도 했고 말이다.
손가락을 수영복 위로 오므렸다가 폈다가 반복하다가, 한참 만에야 잡아들었다. 흉근이 위로 잠깐 부풀었다가 다시금 훅, 꺼졌다. 곧이어 다른 팔로 한 칸 위의 서랍을 열었다. 안에 받쳐 입는 흰 티셔츠를 넣어둔 곳이었다. 곧이어 티셔츠 한 장이 들려 나왔다. 시온이 다른 대안을 찾아낸 것이다. 형의 퇴근 평균 퇴근 시간에 맞춰 빠져나오면 된다. 넓은 라운지 공간에는 비치체어가 갖춰져 있으니 그 위에 두면 재빨리 꾀어 입을 수 있을 터였다. 타월은… 아무리 커다란 수건을 쓴다 한들 완전히 가려내기는 어려울 게 뻔했다. 역시 티셔츠가 제일 좋은 답안이었다.
남들이 봤다면 상의가 뭐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이런 계산까지 하나 싶겠지만, 핑계 없고 이유 없는 무덤은 없는 법이다. 이시온을 골몰하게 한 실질적인 원인은 바로… 상체의 노출 여부였다. 엄밀히 따지면 내부긴 했으나 어떤 의미로는 외부와 바로 맞닿아 있는 공간에서 맨살을 드러낸다는 데 거부감이 든 건 아니었다. 그랬다면 어렸을 때, 처음 수영장을 간 날에 입을 꾹 다물고 나름의 거부 의사를 비치긴 했을 테니까. 정당한 목적이 있다면 윗도리를 벗고 남에게 보이는 정도야 도덕적인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시온이 이런 습관 아닌 습관을 지니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에 생긴 일 때문이었다.
아마 한 달 전인가, 한 달 반 전이었을 거다. 권태환은 웬만하면 시온에게 직접 연락을 취하는 편이었으나 더 높은 자리에 오른 뒤로는 어느 정도 한계가 생긴 것 같았다. 대신 김 비서에게 전달해 연락을 취해왔다. 특히 예기치 않게 늦게 되는 날은 직접 메시지를 보내놓고도 부러 전화까지 하게 만들었다. 기분이 상하거나 섭섭하진 않았다. 그래도 꼬박꼬박 미리 알려준다는 점은 같았기도 했다. 오히려 비서실에 잡일을 늘려준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을 뿐이었다. 쉬는 날이 아니었던 어느 날이었다. 휴대전화에 ‘김 비서님’이라는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태환의 문자는 없었으나 유독 바쁜 날이라 먼저 전화를 드렸다는 비서의 말에 알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한 뒤 바로 끊었다.
퇴근을 하고 현관문을 열었던 게 저녁 9시 정도였다. 태환의 ‘늦은 귀가’는 자정이 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뜻밖의 공백이 생겨버린 것이다. 들어오는 걸 보고 잠들고 싶은데, 집안은 깨끗하고 식료품은 넘칠 정도로 차있었다. 즉, 시간을 때울 소일거리가 하나도 없었다. 뭘 하면서 기다려야 하는 걸까. 청년은 거실에 멀거니 서서 대안을 찾는 데 집중하다가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창 너머로 라운지가 보이는 방향이었다. 풀의 수질관리 또한 업체에서 정기적으로 관리해 주고 있기에 당장 뛰어들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헤엄치고 있으면 시간이 금방 가긴 해. 나름대로 괜찮은 결론이었다. 한 시간 정도는 쉽게 보낼 수 있겠구나 싶어 바로 채비를 마치고 간단히 몸을 푼 뒤 청년의 길고 하얀 몸이 수면을 갈랐다. 위로 솟구치는 물방울이 데크 주변에 설치된 조명을 받으며 잔잔하게 빛나고, 또 부서졌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권태환이 예상보다 빠른, 이시온이 한참 흠뻑 젖어있을 오후 11시에 모습을 드러내지만 않았더라면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
실은 막 사내가 펜트하우스에 도착해 저를 찾았을 때만 해도, 예상 밖의 이른 귀가가 반갑기만 했다. 왔어요? 몸을 끌어올리느라 튀어 오른 물과 함께, 음성도 덩달아 힘이 들어갔다. 태환은 그 꼴을 보고 목을 울리며 웃었다. 물개네. 그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면 올수록, 단단하게 짜 맞춰진 원목 바닥이 탄성을 발휘하며 신음하듯 소리를 냈다. 사다리의 마지막 칸을 밟은 시온이 어서 몸을 닦고 오겠노라 고하며 마주 섰을 때, 그때에 형이 건넨 말이 화근이 되었다. 태환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그리곤 흠뻑 젖은 청년의 상체 쪽으로 팔을 뻗었다. ‘새삼스럽긴 한데 말이야.’ 웃음기를 감추지 않은 음성이 웅, 웅 울렸다. 네? 유순하고 순수한 물음이 끝맺기도 전이었다. 망설임 없는 손끝이 닿았다. 아주, 민감한 부위에. 물기를 가득 머금은 가슴께가 크게 부풀었다.
흡. 먹은 헛숨이 다시금 밖으로 뱉어져 나오는 데 수 초가 걸렸다. ‘핑크여도 너무 핑크네.’ 남자의 검지가 스치듯 누른 부위는… 유두였다. 물이 엉긴 속눈썹이 파드득 떨렸다. 여러 번 눈을 떴다가 감은 탓이었다. 물에 오래 들어갔다가 와서 반고리관에 이상이 생겼나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핑크. 권태환의 입에서 나왔다기엔 너무나 이질적인 단어였다. 간질간질하고 혓바늘이 돋는 음절이 가리키는 게… 머리카락이 아래로 쳐져 흔들렸다. 분홍색이긴, 하네 싶었다. 하지만 점점 선홍색이 되어 갔다. 한참을 정수리만 보여주고 있자니 때를 놓치지 않고 반대편마저 건드려졌다. ‘예뻐.’ 칭찬인지 희롱인지. 그가 어서 닦고 오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온몸이 진한 핑크색이 되어버린 이시온은 한참 만에야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청년은 래시가드를 여러 벌 구비해두게 되었다.
“이편이 훨씬 야한데, 이시온.”
그럼 뭘 하겠는가. 안간힘은 헛수고가 되어버렸다. 반복의 요인은 분명했다. 우선, 태환의 퇴근이 매우 일렀다. 아홉 시는 고사하고 해도 떨어지지 않은 때였다. 겨우 오후 다섯 시가 넘어가고 있었으니 이르다 못해 믿기지 않는 귀가 시간이었다. 일찍 온 게 잘못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미리 연락을 넣지 않은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메시지가 온 줄로 몰랐던 시온의 잘못이라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연락이 올 만한 시간대도 아니었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못한 것뿐이었으니까. ‘지금 바로 들어갈 거니까 알아 둬.’ 한 시간 전에 도착한 문자였다.
뜻밖의 전언을 발견한 건, 적당히 헤엄쳤다 싶었기에 뭍으로 올라와 티셔츠를 막 입고 나서였다. 습관적으로 비치체어에 올려둔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액정을 켰는데 별안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시온.’ 이름 석 자를 불리자마자 환청인가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정말, 실제로 권태환이 샤시를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어? 하도 촘촘해서 아래로 쳐져 버린 속눈썹이 위로 번쩍, 들릴 정도로 커진 눈이 흔들렸다. 심성적인 의미만은 아니었다. 태환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게 보이나 싶더니 이내 아래로 훅, 꺼졌다. 헛디딘 발이 알아서 뒤로 넘어가 버린 것이었다. 그러고는… 풍덩. 뜻하지 않은 다이빙이었다.
“보, 보지 마세요.”
그게 바로 불과 5분 전에 일어난 일이고, 결과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손해를 본 쪽은 시온이었다. 둘 다 잘못은 없지만, 결국에 놀림을 당하고야 말아 곤란한 건 이시온이었으니까 말이다. 물을 흠뻑 머금은 흰 티셔츠는 제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지 오래였다. 너무 불시에 빠진 탓일까. 저항 없이 적셔진 원단 아래는 반투명한 유리처럼, 그 아래에 있는 피부를 비춰내 가릴 길이 없었다. 급하게 대책을 세운다고 한 짓이라곤 겨우 두 팔을 들어 가슴을 가리는 게 최선이었다. 손등 위에 튀어나온 뼈가 움푹 파였다가 드러나길 몇 차례, 다시 한번 입술 사이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보고 있지만 말고, 수건 좀 건네주면 안 돼요?”
팔짱을 낀 채, 청년을 한참 바라보던 사내의 눈길이 아래로 닿았다. 테이블에 놓인 비치타월이 보였다. 수건이 그걸 가리킨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숨이 섞인 웃음을 실소를 뱉어내기만 했다. 아. 순순히 들어주지 않겠구나. 그럴 만도 했다. 저를 제멋대로 귀여워해 줄 기회를 놓칠 형이 아님을, 시온 또한 익히 알고 있었다. 서른이 넘어도 소용이 없구나.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데크의 색이 짙어졌다. 궤적을 따라 점점이 남는 물방울의 흔적은 덤이었다. 태환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가 있었다. 누군가 보면 기분이 상했나 오해하기 딱 좋은 표정이었지만, 시온은 그가 퍽 만족스러워 저런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을 때, 권태환이 넥타이를 끌어내렸다. 단단하게 메어있던 매듭이 맥없이 미끄러졌다. 곧이어 단단한 손끝이 무심하게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하나하나 풀릴 때마다 청년의 발이 덜컥 멈췄다. 나뭇결의 색이 그 자리만 점점 더 짙어져 갔다. 분명히 물을 먹진 않았는데, 왜 이제 와서 기침이 나올 것만 같은 걸까. 사실 원인은 뻔했다. 나이가 들면 뭐 할까. 서른둘의 이시온은 여전히 열아홉의 권시온을 품고 말았다. 예전과는 다르게 애틋하거나 도망가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더는 소년도 아니건만, 귀 끝이 자꾸만 날갯짓했다. 시선을 돌리는 척이라도 해야 할 텐데 눈은 도무지 떨어질 줄 몰랐다. 풀어헤쳐진 앞섶 사이로 보이는 목덜미가 묘하게 더워진 날씨 때문인지 살짝, 아주 조금은 젖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팔을 붙잡은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갔다. 신축성이 있는 수영복이, 어쩐지 갑갑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뭘 보고 흥분을 했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니,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문장을 사람으로 빚어놓았다는 평가를 받는 권태환일지라도, 피가 흐르고 땀이 흐르는 존재라는 걸 잊지 않는 이는 저뿐이라는 우월감에 취하기라도 한 걸지도 몰랐다. 조금은 이상한 관점일지는 모르겠지만, 남이 어떻게 보느냐는 상관하지 않기로 한 시온이었다. …지금은 일단 팔을 내려 아래도 가려야 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게 더 큰 고민거리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권태환은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그는 그새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러더니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고작 수건 하나 집어 드는 과정일 뿐이었는데, 상의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모양이 고스란히 보일 정도였다. 발이 바닥을 짓누르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청년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손바닥이 보였다. 시온은 위에 올려져 있던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며 망설이다 괜히 팔꿈치를 쓰다듬었다. 얌전히 팔을 내리고 제 손을 잡으라는 뜻이 명백했다. 온몸이 흠뻑 젖었는데 입술만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태환이 반대쪽 손에 들린 타월을 흔들었다. 아무튼,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는다. 마침내 팔이 내려가고, 상대의 손 위로 조심스레 손끝이 닿는다. 이제 타월을 주겠거니 하고 눈을 마주치고 있었는데, 물건은 도무지 건네지질 않는다. ‘주세요.’ 라도 해야 하나 싶어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어.”
보송보송한 흰 원단이 펄럭거리며 추락했다. 기껏 세탁해둔 직물이 더럽혀질 걱정을 할 겨를 따윈 없었다. 손이 마주 잡히나 싶었더니 상체가 앞으로 기울여졌다. 끌어당겨지는 힘이 단호하고 갑작스러워서 저항할 새가 없었다. 기다랗고 축축한 몸을 안아 든 사내는 지나치게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리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실컷 놀리려나 했더니 갑자기 이렇게 안아 들 줄이야. 익히 알고 있겠지만, 이시온은 제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갈 때도 허리를 숙여야 할 정도로 큰 키를 가진 성인 남성이었다. 그러나 권태환은 그보다도 키도, 체구도 더 큰 덕분일까. 열여섯의 시온이 마지못해 안기는 척하며 온몸을 내맡기던 때와 달라진 바 없이 굴었다. …그래도 무거울 텐데. 왠지 모를 긴장감에 어깨가 빳빳이 굳어 버렸다.
“옷, 다 젖어요.”
“옷이야 세탁하면 되는 거고.”
사내는 항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향을 틀었다. 다 큰 청년을 안아 들고 옮기는 걸음은 평소보다 느렸으나 불안정하지도 않았다. 라운지와 거실의 경계선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섰다. 공중에 뜬 발꿈치에 맺힌 물이 대리석 바닥 위에 흔적을 남겼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분명 침실로 향하는 걸 테니까. 알아서 걸을 테니 내려달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계속 강조했듯 이시온은 권태환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반항은 부질없는 짓이었고 그는 끝까지 제 맘대로 할 터였다. 딱 좋은 핑계기도 했다. 만약 정말 곤란하다 못해 꺼려졌다면 진작 팔을 뿌리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청년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남자의 품을 밀어내진 않았다.
‘못한 게’ 아니었다. 이쯤 되면 인정해야만 했다.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잊으려고 갖은 노력을 해봤자였던 거다. 실타래가 풀리고 상황이 원만해지고 나서 이시온에게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제가 어릴 때 태환에게 했던 ‘어리광’을 언뜻 내비쳐 보인다는 걸 깨달았을 때였다. 그러니까 이렇게 다뤄지는 게 내심 기꺼웠다는 뜻이다. 아마 형도, 다 알고 있겠지. 다시금 귓불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미약한 반박이라도 하는 척이라도 하면 이 부끄러움이 조금 수그러들까, 시온은 괜한 한마디를 작게 중얼거려 보았다.
“…침대도 젖을 텐데.”
탄탄하게 받쳐져 있던 둔부가 들썩, 가볍게 위로 튀어 올랐다가 내려왔다. 물기가 번져버린 셔츠가 감싼 흉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큽. 이시온의 왼쪽 가슴께에 닿아있던 권태환의 콧대가 가까이 다가와 눌렸다. 자신이 특별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뭐가 그를 웃겼는지 모를 일이다. 잠시 멈췄던 발이 금세 다시 앞으로 향했다.
“사람 쓰잖아.”
그런 문제가 아닌데요. 반박은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뒷정리는 조금도 하지 못한 수영장, 드라이클리닝이 필수일 텐데 아랑곳하지 않고 적셔버린 셔츠, 그거 조금 젖었다고 큰일이 나진 않겠으나 물이 닿는 걸 최대한 피해야 하는데 내버려 둬 놓은 대리석 바닥과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값비싼 토퍼가 얼룩덜룩 해질 가까운 미래. 이 모든 건 사용인들이나 손 집사가 처리해 줄 일이었다.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틀리지는 않았으나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건 확실했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자신이 어쩔 줄 모른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제 손으로 치우면야 마음이 당장 편해질지는 모르지만… 그래 봤자 시온이 그들보다 나을 건 없었다. 전문가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저 대신 케이크를 구워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덧없는 고찰이 이어지는 사이, 벌써 방 앞에 도착해 있었다. 태환의 손이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죄송해요, 손 집사님. 들리지 않을 사과를 속으로 뇌까리는 걸 마지막으로 빠른 체념이 이어졌지만, 태환의 반론은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낮은 음성이 시온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침대는 물이 아니라도… 젖을 거기도 하고. 전에도 많이 적셔보지 않았나?”
‘많이 적셔 보지 않았나.’라니. 듣고 난 직후에는 무슨 뜻인지를 몰라 눈꺼풀을 몇 번 들었다가 내렸다. 그러다 방안으로 들어서며 저를 바라보는 태환의 눈길과 진한 웃음에 힌트를 얻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남자의 손이 시온의 엉덩이를 누르듯 안쪽으로 당겼다. 주인을 배반한 채 수치심도 모르고 잔뜩 서버린 살덩이가 마주 닿은 단단한 복근에 비벼졌다. 세상에. 작고 작은 중얼거림에는 신음인지 놀라움인지 모를 감정이 드러나고야 말았다. 어디 그뿐인가. 웬일로 넘어가 주나 했더니… 몸이 위로 쑥 들린다 싶더니 시온의 몸으로 완전히 시야를 가려버린 태환이 장난질을 쳐댔다. 사내의 날카로운 이가 툭 튀어나온 분홍색 돌기를 긁어내린 것이다.
“…읏, 하지 마세요.”
싫어. 거절은 빨랐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욕망을 과하게 눌러 댔던 데에 대한 반동일까. 이시온은 날이 갈수록 예민해졌다. 요즘 들어 언젠가 ‘형’이 짓궂음을 담아 표현한 대로 ‘분수대’가 된 기분을 맛보아야만 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창피함을 무릅쓰고 이야기를 했더니 다행히 의학적 문제는 아니라는 의사의 소견까지 받아낸 뒤론 더 극성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거부를 표시하지 않는 건… 어리광을 부리고 마는 자신을 인정한 것과 같은 선상에 있었다. 몸이 멀쩡하다면 감정에서 비롯된 현상이 아니겠는가. 그저 속절없이… 닿아버린 체온에 반응하는 걸지도 몰랐다. 아니, 그것이 맞다. 답이 없는 건 내 쪽일지도. 시온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청년이 고민에 잠겨있거나 말거나, 권태환은 ‘핑크색’을 띈 부위를 아프지 않을 만큼 깨물기까지 했다. 아까보단 덜하다 한들 여전히 축축한 원단이 입에 들어갔는데 찝찝하지도 않은 걸까. 사내에게 결벽증이 있는 건 아니었으나 비위생적인 걸 좋아하지도 않았다. 시쳇말로 ‘깔끔을 떤다’는 표현에 더 알맞은 성질을 가지고 있는 걸 익히 알고 있건만 이럴 때는 거리끼지도 않는다. 한 데 붙어버린 두 사람의 몸이 완전히 침실에 들어섰다. 권태환이 팔을 뻗어 대충, 방문을 닫아버렸다.
*
“여기가 더 진한… 읏, 핑크색이라는 거, 알려줬던가?”
“‘핑크’라는, 흐읏, 말… 그만 하, 응, 하면 안 돼요?”
지적하는 게 그 부분이야? 허릿짓을 멈추지 않은 채로 물었다. 군데군데 물에 젖은 걸로도 모자라 온갖 액체로 얼룩덜룩 한 시트는, 그야말로 난장판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상태가 된 지 오래였다. 여기엔 다, 당연하게도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이시온의 고무 막에 대한 고집은 여전했다. 그러나 권태환은 안전을 위해서라도 착용 후에 하는 게 옳다는 의견에 대해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어떨 땐 또 귓등으로 들은 사람처럼 굴었다. 그럴듯한 덕분에 오늘도, 시온의 성기는 헐벗은 채 달달 떨어야만 했다. 반박을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방에 도착한 직후, 사내는 청년의 몸을 침대 위에 내려준 다음, 그대로 뒤로 눕혔다. 곧이어 허리 양옆이 두터운 허벅지 사이에 꼼짝없이 갇혀버렸다. 그는 몸을 기울여 사이드 테이블의 서랍을 열었다. 젤과 콘돔이 들어있는 위치였다. 그런데 막상 사내가 꺼낸 것은 투명하지만 약간 ‘분홍빛’이 도는 젤뿐이었다. 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씌우지 못하게 할 거구나.
그때부터 횡설수설에 가까운 설득이 이어졌다. 위생적으로도 좋지 않은 거 알잖아요. 여러 가지 생각해도, 끼고 하는 편이 형에게 좋을 텐데… 레퍼토리가 발전이 없다는 건 인정하는 바였다. 모든 걸 내키는 대로 이끌어가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인물 아니었던가. 태환은 대꾸 한 번 하지 않았다. 의견을 받아들여 주겠다는 제스처는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하든 말든, 조각처럼 잘 깎여지고 채워진 근육을 감싸고 있던 옷들을 한 벌씩 벗어 내릴 뿐이었다. 그리고 또… 또… 새로운 반박 거리를 찾아야겠다 싶었으나 정작 혀는 자꾸 헛돌기만 했다. 사내는 시온이 하는 말을 가만 듣고만 있다가, 별안간 젖은 티셔츠 밑단을 잡아 올렸다. 흡. 갑자기 입안으로 들어온 원단 때문에 어설프게 호흡을 삼켜버렸다. 시온아. 여상스러운 부름 뒤에 따라붙은 건, 축객령이었다. 네가 여기서 입을 수 있는 건, 상의 하나야.
오로지 형으로서 권태환을 대할 때는 몰랐는데, 조금 달라져 버린 관계 덕분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는 행위 중에도 우위를 점하는 데 능숙한 편이라는 점이었다. 제멋대로인 성격도 훨씬 도드라지는 편이었다. 사내는 허리 근처를 단단히 고정한 벨트를 풀고, 하의를 벗어 내리는 동안 내내 시온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조명은 너른 등 뒤, 천장에 달려있는지라 역광이 들었다. 덕분에 고압적인 인상이 한층 더 두드러졌다. 특히 한껏 올린 한쪽 입꼬리 덕분에 패인 입매에 짙은 그림자가 고여있는 게 눈에 띄었다. 허리를… 이시온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선홍색이 된 유두를 양껏 엄지로 희롱당하는 동안에도, 젖어서 벗기기 까다로운 수영복을 일부러 종아리까지만 내려주고 움직임을 구속당하는 동안에도, 사내가 아래로 제 살 기둥을 삼킬 때마저도.
“그런데, 형… 있잖아, 요.”
고백하자면, 아니. 새삼스러운 고해성사도 아니었다. 옛 저녁에 태환을 상대로 몽정했던 과거도 다 까발려지지 않았던가. 그렇게 생각하면 왠지 머리가 아찔해졌다.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와서, 다른 이와 관계하는 ‘자신의’ 형의 허상을 곱씹자는 말은 아니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를 상대에게 질투하려는 건 더더욱 아니었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궁금해지고 마는 것이다. 젖은 주름이 선단을 핥아 올리듯 조여올 때, 이시온은 어쩔 수 없이 운을 띄우고 말았다. 딱딱하게만 보이는 복근 위가 아주 살짝 부풀어 올랐다가 꺼지길 반복하는 와중이었는데, 묻는 이나 멈추지 않고 허리를 움직이는 이나… 자의적으로든 타의 적으로든 제정신인 사람은 둘 중에 아무도 없었다.
“…혹시, 흡, 내가, 수동, 적으로 구는 게, 응, 취향이에요?”
“허, 아니.”
단칼이었다. 사내의 미간이 좁아지고, 이마에 힘줄 하나가 돋아 있었다. 물음이 뜬금없게 느껴지긴 했나 보다. 잠시 눈동자를 한 바퀴 굴린 태환은 움직임을 멈췄다. 입구가 꽉, 뿌리 끝을 잡고 놔주질 않았다. 매끈한 샅에 굴곡지고 단단한 둔부가 비벼졌다. 골반께가 뭉근히, 느리게 원을 그렸다. 흐으읏… 시온의 성대가 길고 가는, 마치 뭔가를 찾아 헤매는 강아지를 닮은 신음을 흘렸다. 그래서 그건 왜 묻는 건데. 답을 내놓으라 종용하는 대신, 괴롭힐 듯 애를 태우는 데 감히 저항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럼, 왜, 매번 멋대로 굴… 아, 굴어요?”
“글, 쎄. 하, 왤까.”
이시온은 도톰한 아랫입술을 비죽거렸다. 드문 칭얼거림은 잠시뿐이었다. 피동적인 게 취향은 아니란 말이지. 나이의 앞자리가 바뀐 탓일까. 시온은 가끔 제게 태환의 심술이 옮겨붙는 순간이 있다고 느끼는 일이 잦아졌다. 딱 지금처럼. 티셔츠에서 빨아들인 습기와 내부를 적시느라 양껏 짜내버린 탓에 넘치게 흘러버린 윤활제 때문에 찝찝해하면서도, 얌전히 시트에 붙어있던 하얀 엉덩이가 슬그머니 위를 향했다. 한참 동안 시트를 붙잡고만 있던, 가늘진 않아도 곧고 섬세한 조형을 한 한쪽 팔이 궤적을 바꿨다. 손가락이 소지부터 순서대로 엄지까지 닿더니 제 살덩이를 품고 있는 복부 위를 덧그렸다. 소심하다 할 정도로 조심스럽던 움직임이 달라진 건, 골반이 완전히 손바닥 안에 들어찼을 때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남은 다른 쪽 팔꿈치에 힘이 들어갔다. 허. 사내는 기가 차다는 듯 헛숨을 뱉으면서도 청년이 하는 양을 말리지 않았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육중하고 완벽한 상체가 저항 한번 없이 위치를 바꿨다. 날개뼈 위로 느껴지는 감촉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평소라면 당장에 박차고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태환의 목이 한쪽으로 기우뚱, 기울었다. 물기는 증발해버린 지 오래였지만, 설말라 뭉쳐져 버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여전히 수중에 있었다. 언제든 빛을 반사해 내는 수면처럼. 어떤 의미론 일상과는 확연히 다른 모양새를 띄고 있기도 했다. 푸르다기보단, 제 살기둥과 손톱만 하게 툭 튀어나온 부위처럼 붉은빛이 돌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큽, 알다, 하읍, 시피…”
바로 욕망 말이다. 이런 표정을 보여준다면, 제 욕심껏 구는 것 정도야 기꺼이 넘어가 줄 수 있었다. 권태환은 이시온에게만큼은 항상 너그럽고, 다정했지 않은가. 몇 살이 되었든, 시온은 사내에게 있어 항시…
“내 취향 자체가 너, 잖아, 이시온.”
유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있던 치아와 턱에 힘이 풀렸다. 작게 구멍이 난 듯 벌어진 입술이 점점 눈에 보일 정도로 뻐금대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없는걸 알면서도, 얼굴에 열이 몰려 터질 것만 같았다. 비단 안면만 그런 건 아니었지만. 흡. 권태환이 두 다리를 들어 시온의 허리를 옥죄었다. 다 큰 줄 알았는데, 좆은 예외인가. 그런 우스갯소리가 떠올랐으나 굳이 입으로 뱉어내진 않았다. 제 심상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은 건, 이시온도 마찬가지였다. 실은 ‘적응했다’고 언급하긴 했으나 어찌 사람이 한 번에 변할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그는 이따금 혼자 있을 때면 3년 전, 태환이 제게 다시 찾아오기 전의 나날을 떠올리곤 했다. 태환도 그걸 알고서 제 휴일에 맞춰 이른 귀가를 한 것일 테지만, 저는 아직도 제가 늦지 않았는지 한없이 고민하고 마는 것이었다. …달라져야지. 다짐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당장은… 형의 말이 예언이 되어 시트를 더럽히다 못해 엉망으로 만들 각오를 하는 게 우선이었다. …손 집사님께, 정말 죄송하다고 사과를 드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겠는걸. 잡념은 거기까지였다.
“…알, 아요.”
손바닥에 감기는 허벅지의 감촉은 보기보다 부드러웠다. 알고 있다. 오히려 잘 벼려진 근육이 딱딱하지 않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는 자신이었다. 지겹겠지만, 서른둘의 이시온은 더는 소년이 아니었다. 어리지 않았고, 못 이기는 척 저를 내맡길 정도로 미성숙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시온이 태환의 다리를 들어 올려 제 어깨에 걸쳤다. 사내의 단단한 입매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오진 않았으나 발끝이 곱고 떨리는 건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더는 파고들 수 없을 만큼 붙여진 살갗이 마찰 탓에 붉게 달아오른 채였다. 순서와 때는 중요치 않았다. 시온은 드디어, 현실을 살아내는 법을 배웠고 권태환이 그럴 수 있게 하여 주었다는 게 더 중요하고 소중했으니까. 청년이 소곤거리듯 뱉어낸 고백을 신호탄 삼아,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두 사람이 서로에게 녹아들었다.
“나도, 나도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