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도덕이 접시를 낚아채었다.
데자뷔는, 이런 거구나. 퉁퉁 부은 눈을 뜨지도 못한 채였다. 세수해도 가라앉지 않았다. 혹시 해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아이스 팩이 있었다. 그것도 무려 눈에 댈 수 있을만한 작은 크기였다. 욕실을 썼으니 수건이 어디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처음부터 손쉬운 건 아니었지만. 넓은 내부엔 수납장이 없었다. 걸이는 있었지만, 걸려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청년은 잠깐 주변을 살피다 욕실 문 가까이에 있는, 간단한 경대의 모양새를 한 서랍장을 열어보니 세탁된 타월을 몇 장 발견했다. 한 장은 좀 모자라다 싶었다. 개수를 세보니, 태환의 몸을 닦을 몫까진 충분해 보여 다행이었다. 잘 마른 수건이 금세 냉기를 받아들였다. 척척하게 젖어서인지 닿는 느낌이 그렇게 기껍진 않았으나 크게 거슬리지도 않았다.
이시온은 거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중앙에 있는 널따란 공간과 창틀의 경계에 앉아있었다. 그곳엔 기다란 카우치 형태의 소파가 하나, 1인용이 하나 있었다. 특이한 점은, 거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어딘가 이질적이고 어색한 물건이 하나 있었다는 거다. 등받이가 앞으로 돌려져 있는 리클라이너였다. 권태환은 은근히, 아니. 지나치게 미감이 좋았다. 자신이 일일이 가재를 고르고 의복을 골라 사지는 않더라도, 아랫사람이 갖춰놓은 물건에 심미성이 나쁠 땐 대놓고 눈썹을 구기곤 했다. 이 펜트하우스를 채운 물건들은, 태환이 직접 가재를 골랐을 게 분명했다. 맨정신으로 보니, 처음 방문한 공간인데도 낯익은 구석이 많다는 게 증거였다. 그런데 이 리클라이너만큼은 색상도 형태도, 심지어는 위치마저도 어색했다. 왜 이렇게 뒤로 돌려놨을까? 잘은 알 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거기에 앉고 싶어졌다.
“아…”
조심스레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그제야 이걸 여기에 둔 의도가 보였다. 시선이 낮아져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서 있을 때는 이제 막 해가 떠올라서 어스름한 밖만 보였는데, 몸을 낮추니 풍경이 달라졌다. 수영장. 정확히 말하자면 수영장의 표면이 한눈에 들어왔다. 인위적으로 채워 넣었다 한들, 보기에는 깨끗하기만 하고, 이제 막 떠오른 볕을 반사해 유유히 빛나고 있었다. 제가 보고 있는 이 광경을 보기 전까진 이 집을 정리하러 오는 사용인의 흔적인가 싶기까지 했는데, 아니었다. 여기에 굳이 리클라이너를 둔 건, 분명히 태환이었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웃어야 할 거 같기도 하고, 울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눈가에 다시 열이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시온이 한 번 더 단말마를 내뱉었다. 어느새 아이스 팩을 잡은 손이 허벅지에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랍장 안에는 가운도 있었다. 두 종류로 각 두벌씩. 색상도 재질도 달랐다. 하나는 짙은 색 나이트가운이고 하나는 옅은 하늘색을 띤 샤워가운이었다. 둘 다 접혀있어서 언뜻 비슷한 사이즈처럼 보였지만, 막상 들춰보니 분명히 짙은 쪽이 더 얇은 원단인데도, 훨씬 두꺼웠다. 사이즈 자체가 다르구나. 하늘색이 저를 위해 마련된 것인듯했다.
정답이었다. 어깨가 살짝 끼나 싶었지만, 그래도 얼추 맞았다. 조각조각 흩어져있던 퍼즐들이 알아서 합을 맞추고 있었다. 작은 그림들이 모이고 모여 정답에 다다를 수 있었다. 여긴 완벽하게, 자신과의 재회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정말. 시온이 중얼거렸다. 눈가를 비비진 않았다. 위에 닿은, 팩을 감싼 수건을 꾹 누를 뿐이었다. 저를 위한 물건을 구비하고, 생필품을 채워놓고, 시온이 권 씨 저택에 지냈을 적 방을 구현한듯한 침실을 만들고, 굳이 어울리지도 않는 리클라이너를 둔 채 물로 채워진 게 전부인 수영장을 바라봤을 테다. 청년이 턱을 들었다. 고개를 모로 돌렸더니, 손이 닿는 곳에는 장식장이 있었다. 이동할 수 있도록 작은 바퀴가 달린, 트레이로도 사용할 수 있어 보이는 가재였는데 이제 보니 안에 있는 거라곤 몇 병의 위스키뿐이었다. 이젠 앓는 소리도 내질 못했다. 눈가가 차갑다 못해 얼어버릴 것만 같은데, 이시온은 제 눈두덩이를 누르는 손아귀에 힘을 풀어낼 수조차 없었다. 어깨가 안으로 말려 움츠러들었다.
“…여기 있었네.”
죄스러운 마음인지 뿌듯함인지 모를, 아니. 그렇게 여기기엔 너무도 죄스러운 감정들에 집중한 탓이었을까. 인기척은 느끼지 못했는데. 뒤편에서 뻗어져 온 크고 단단한 손바닥이 제 턱을 쓰다듬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웬일인지 일찍 눈이 떠졌고, 옆에서 저를 감싸 안은 사내는 드물게 단잠에 빠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눈가가 전보다 더 움푹해 보였다. 피곤할 테지. 혹여나 깨울까 봐 조심스레 빠져나왔다. 그러니 당연히, 잠에서 깬 태환 옆의 침대는 식은 지 오래돼서 시온의 온기 한 점 느껴지지 않았을 거다. 보지도 않았는데 본 것만 같이 그려졌다.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옆에서 자고 있던 존재가 사라지진 않았을 것이고, 이전처럼 달아나지도 않았다는 것을. 그런데도 잠깐, 수마에 막 빠져나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턱을 비틀었겠지. 예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
함께 자다가 연습을 나갈 시간보다 훨씬 더 일찍 저택을 나서려고 살금살금 씻고 돌아왔을 때, 제 형은 그걸 꽤 불쾌해했다. 저를 향한 것이 아닌, 자신이 그에게 필연적으로 떨어져 나가야만 하는 상황에 대한 불쾌감이었다. 지금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지 모른다. 왜냐면, 왜냐면… 우리는 둘 다 상실을 경험했으니까. 시온이 마른침을 삼켰다. 역시나 닿는 살은 뜨거웠다.
“…자다가, 눈이 아파서 깼어요.”
“어디 봐.”
목이 한껏 뒤로 젖혀졌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주더니 수건마저 거둬가 버렸다. 시온은 또 몰랐다. 제 눈가가 잔뜩 젖어있단 사실을. 그렇기에 그게 얼음이 녹아 묻어난 물인지, 눈물샘에서 삐져나온 액체인지는 스스로도 알 길이 없었다. 눈 위로 가려진 막이 사라졌다. 아직 온전하진 않더라도, 흐린 눈이 서서히 맑아지고 말았다. 그리고 당연한 절차로, 태환과 눈이 마주쳤다.
그럴 거라 예상은 했건만.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가 훨씬 컸다. 권태환이란 사내는 언제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질 않는다.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럴 리도 없기에. 그래서 그를 익히 아는 누군가가 이 꼴을 목도했다면 제가 본 태환의 모습을 허상이라 여길지도 모르겠다. 머리카락은 정돈하지 못해 잔뜩 처져 있었다. 시온의 까치집과는 대조를 이루듯, 눈가를 가려서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나체는 아니었다. 침실에 딸린 벽장 안에 또 다른 여벌의 가운이 있었는지, 시온이 본 것과는 다른 걸 걸치고 있긴 했으나 그마저도 앞섶이 풀어헤쳐진 채였다. 축약해서 총평하자면, 겨우 황망함에서 벗어난 듯한 얼굴이었다. 그, JL의 부사장이자 일부 선망의 대상, 혹은 겁을 집어먹게 하던 권력자 권태환이 지을 줄 알 거라곤 상상도 못한 낯이었다.
좀 더 명확한 예시를 들어보자. 그나마 그와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공은혁조차, 이 모습을 목도하고 나면 얼이 빠졌는지 턱이 빠진 것인지 가늠을 하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짓고야 말았을 테다. 네가 미친 줄은 알았다만, 진짜 네 양 동생에겐 제대로 미쳤구나 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다. 이 광경을 타인에게 보일 리가 없지 않은가. 거기다 이시온도 권시온일 시절, 은혁을 본 적이 드문드문 있긴 했다. 물론 태환의 동창이라는 꼬리표를 꼭 덧붙였을 때만. 그래서 기억을 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타인에겐 큰 관심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일단 조건 자체가 틀려먹은 비유였다. 누군지도 가물가물한 인물이 알게 무엇이며, 이시온은 이시온이었다. 눈가가 짓무르듯, 물방울이 맺혔다. 아이스 팩이 치워졌으니 물이 묻은 거란 변명도 통하질 않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태환은 다르게 이해한 것 같았다.
“울 정도인가. 안약은 없는데…”
미간이 좁아지고 눈썹 한쪽이 들어 올려진다. 언뜻 보면 심기가 불편해 보였으나 아니었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거다. 액체가 잔뜩 엉긴 속눈썹이 툭, 툭 아래위로 움직여댔다. 아주 자그마한 물보라가 일고 있었다.
“…찜질, 찜질하면 나아질 거예요.”
이시온의 하얀 팔이 제 위를 차지한 태환의 팔꿈치를 감싸 잡으려 위를 향했다. 그러자 사내가 기꺼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주었다. 귓가에 입술이 닿을 만큼 말이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유리창 너머에 닿았다. 아마 정말로 아파서 운 줄 알았나 보다. 작은 헛웃음이 들렸다.
“권시온.”
귓바퀴 뒤에 쪽, 하는 짧은 음색이 들렸다. 귓불과 가까운 부위, 약간 팬 곳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물은 여전히 멈춰있었다. 가볍게 부는 아침 바람에 살랑거리며 빛을 반사해 내긴 해도 애초에 크게 흐를 순 없었다. 가둬져 있었으니까. 두 쌍의 눈이 갇힌 물, 수영장을 향해 있었다. 여전히 낮지만, 어딘지 조금 나긋해진 음색이 시온의 귓바퀴를 타고 흘러들어 갔다. 마치 저 물이 움직이지 못하는 대신, 그의 음성이 물결치는 것만 같았다.
“너하고 내가 같이 살게 되면, 여기가 좋겠지?”
권태환은 물렁물렁해지다 못해 물러서 흘러버린 제 심경을 잘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까 저를 조종할 수도 있었다. 얼마든지 말이다. 당장 보고 싶으니 헤엄을 쳐보라고 할 수도, 가끔 와서 저가 보는 데서 발이라도 담가보라고 명령한다 한들, 시온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형을 맹신하고 싶어 하면서도 끊임없이 흔들렸다. 그러면서도 그의 진심이 보일 때마다 날개가 물에 젖은 새, 또는 비 맞은 개처럼 슬퍼하는 자신을 휘두르라 애원하고 싶어졌다. 권태환은 저를 손가락 하나로도 휘두를 수 있다. 10년 전이든, 재회하고서 자신의 공백기 동안 그의 심상이 어땠는지 깨달은 현재가 됐든.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이율배반적인지. 이시온은 알았다. 지금이 의문을 드러낼 수 있는 적기라는걸. 형, 형은 내가 왜 좋았어요? 만나자마자 그랬나요?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나요? 모든 걸 물어볼 수 있는 절호의 찰나였다. 그래서 막,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떨어졌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인생은 그렇게 쉽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되지도 않는다.
「드드드득.」
기기한 효과음의 정체는, 주방에서부터 들려왔다. 식탁에 대충 던져놓은 휴대전화가 범인이었다. 자신의 것은 코트 안에 잘 잠들어 있을 것이다. 딱히 살펴보진 않았으나 마지막 기억이 그러했다. 태환의 것이었다. 잠시만. 붙어있던 서늘한 체온과 목소리가 멀어졌다. 메시지가 아니었나 보다. 쯧.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이 아침에 전화를 받을 이가 아닌데, 순순히 통화를 수락한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지.”
누굴까. 시온은 저가 물으려던 것도 있었는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 와중에도 권태환은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낯빛이 말해주었나, 상대가 궁금하다는 걸 간파당하고 말았다. 딱 붙어있던 휴대전화를 떨어트리더니 입 모양으로 정체를 알려주었다. 김비서야. 김 비서님이구나. 바로 믿었다.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기도 했으나 의심할 생각조차 못 했다. 믿는 구석은 있었다. 태환이 판단하기에 쓸데없는 인물이 연락을 해왔다면 애초에 받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는 원래부터 저와 있는 시간을 방해받는 걸 질색했고, 그건 여전했다. 업무적인 문제가 있었나 보다. 거슬려 하던 기색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일단, 사무실에서마저 이야기하지. …그래.”
통화시간은 짧았다. 비서의 음성은 전혀 들리지 않는 거리였다. 내부가 워낙 넓은 덕분이었다. 시온은 차마 가까이서 기웃거리지도 못하면서, 주변을 맴돌며 쭈뼛거렸다. 저보단 못해도, 확실히 큰 키건만. 워낙 낯이 오밀조밀하게 생겨서인지, 제법 어린애 같고 어여뻐 보이기만 했다.
“…몇 시인데요? 아직 이른 거 같은데, 출근하려고요?”
“아랫사람 하나가 사고를 쳐서.”
발전했다. 상세하진 못해서 자세한 건 알 수 없었으나, 이번엔 완전히 뭉개지도 않았다. 몸체에 비해 작은 머리가 아래위로 끄덕거렸다. 아쉬움이 역력하긴 했으나 빠르게 받아들였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권태환은 시온을 자신이 있는 쪽으로 불러내지 않았다. 긴 다리를 직접 뻗어 다시금 제 앞에 서주었다. 넌 조금 있다가 가. 그렇게 말하는 동시에, 뺨과 입가에 짧은 입맞춤이 닿았다. 입술이 떨어지고, 권태환은 곧장 욕실로 향했다. 대답은 듣지 않았다. 청년의 표정에서 이미 답을 읽은 탓이었다. 온순하게 낯을 붉히고 있었으니까. 남자가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고 돌리자마자, 매번 작게 말하던 음성이 크기를 키운 채 곧장 저를 향한 말을 뱉고 있었다.
“…나, 여기 비밀번호 기억하고 있어요.”
태환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윽고 피식,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같이 살자고 했더니, 다음에 여기서 보자고 하는 것 봐라. 자신의 권시온, 아니 이시온은 예쁜 짓도 알아서 잘했다. 잠시 애교라면 애교라고 할 수 있는 행동을 곱씹기 위해 멈췄다가 다시 손목이 돌아갔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
“…동생도 개자식이고 남편도 개자식이고.”
아무것도 모르고 듣는다면, 연극 위에서 대사를 뱉는 배우라고 착각할 만한 어조와 발음이었다. 뱉는 장본인은 지나치게 진심이었지만 말이다. 불쌍한 쿠션이 소파 위에 내팽개쳐졌다. 얼마나 거세게 던졌는지 등받이에 맞았다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러고서도 한참 탄성을 못 이겼는지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백경아의 흉통이 들썩거리길 멈추질 못했다. 드문 일이었다. 그는 그다지 흥분하는 법이 없었건만, 그러고도 분노가 가시지 못했다. 하. 심호흡인지 한숨인지 모를, 어쨌든 굉장히 깊은 날숨이 이어졌다. 노란 조명등이 불안하게 깜빡이다 멈췄다. 독일, 드레스덴의 겨울 날씨는 한국보다 따스했다. 경아가 잡은 숙소는 좋게 말하자면 오래되어 정취가 있고, 나쁘게 말하자면 낡았기에 난방이 그렇게 뛰어나진 않았음에도 춥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과연 영상 5도를 웃도는 바깥공기 덕분인지, 그가 씨근덕대느라 인지는 모르겠지만.
몇 달 되지 않은 기간 동안 돌아다닌 궤적은 꽤 화려했다.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건너가, 지금은 독일이었다. 여기서 의문을 가지는 이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도주 중이라고 한들 프랑스에서 더 가까운 곳은 독일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느냐는, 당연한 의구심이 들 만도 했다.
당연하게도, 백경아에겐 목적이 있었다. 프랑스야말로 경유지일 뿐, 차례대로 누군가를 찾아야만 했다. 첫 번째 인물은 에딘버러, 두 번째 인물은 이곳 드레스덴에 있었다. 내일, 그렇게 먼 길을 돌아온 보람을 만나는 날이었다. 그러면 기뻐해야 할 텐데 왜 이렇게 성질을 내고 있을까. 답은 빤했다.
‘누나는, 내가 그렇게 머저리 같나 보지?’
백주영의 음성이 퍼뜩 떠올랐다. 누나. 그는 비꼴 때나 저를 그렇게 부른다. 경아의 눈썹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다시 한번 날숨과 들숨이 지나간다. 가엾은 쿠션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소파에 몸을 구겨 넣었다. 아니꼽게 하는 데는 도가 튼 이복동생이, 끝끝내 제 임시 전화번호를 알아내고야 말았다. 모르는 번호라 받지 않으려고 했으나 사람이 감이라는 게 있지 않나. 그때까진 놀라지도 않았다. 언젠간 저를 추적해 내겠지,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으니. 문제는 그 내용이었다. 제가 왜 굳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는지는 모를 것이 당연했다. 짐작도 하지 못했겠지. 그러니까 굳이 자신을 찾아 잡아 누르는 것이 아닌, 통화를 시도했다는 건 협상을 위한 것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너무 여유를 부렸을까? 그 느글거리는 입에서 의외의 내용이 나왔다. 자신과 태환의, 결혼 전 오갔던 ‘계약’에 관한 것이었다. 거기까지 알아냈구나 하고 내심 감탄하면서도 그게, 무슨 상관인데? 하고 고개를 기울이던 순간이었다. 예전 일이었다. 주영이 경아의 업적을 가로챈 건. 그거 하나로 내가 그렇게나 멍청해 보였어? 라고 말하며 덧붙였다.
‘권태환에겐 너나 나나 멍청한 것들이야. 똑같다고.’
서류상 남편은 제멋대로 구는 서류상 아내를 버린 패로 여긴 모양이었다. CCTV의 장면, 장면을 인화해서 받아봤다니. 그럼 이미 도련님이 될 뻔한 이시온이 USB를 넘겼다는 뜻일 테다. 여기까지는 알고 있었다. 기존에 오갔던 계획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백주영이 그래서, 자신이 태환과 어떤 계약을 했고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조사를 하고 개중에서도 8할은 알아냈다는 사실에 탄식이 절로 나오긴 했다. …이제 자기가 얻을 건 다 얻었다는 뜻이지. 경아가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앉은뱅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서류를 들기 위해. 낡은 서류 봉투에서 꺼내진 빛바랜 종이를 바라보며 다시금 등을 뒤로 묻었다. 결렬이었다. 맞다. 처음엔 자신의 가정환경에 엿을 먹이고 싶은 알량한 복수심이었다. 그래서 권태환이 뭣 때문에 손을 뻗어왔고 무얼 얻으려는 것인지 알면서도, 심지어는 그걸 위한 관계일 걸 뻔히 알면서도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더랬다.
기다란 손끝이 다음 장을 넘겼다. 호치키스로 철이 된 이 서류는 총 5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서류로 모든 것의 전말을 빗대어보자면, 주영은 그래 봤자 이제 3장째 초입을 읽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작고 네모난 액자가 떠올랐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어린 얼굴과 지금보다 훨씬 앳되면서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한 권태환. 말뿐인 부부다. 뭐, 드문 일도 아니었다. 같은 이불도 덮지 않는 혼인 관계는 널리고 널리지 않았는가. 심지어 태환과 경아는 한 이불은 고사하고 같은 방에서 잔 적도 없었다. 새삼 배신감이 들 일도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래도, 이대로 머저리가 되긴 싫은걸. 주영과의 통화를 마치고 신경질적으로 내버렸던 휴대전화를 들어 올렸다. 신호음은 제법 길게 이어졌다. 그쪽은 깊은 밤일 테지. 자고 있을지도 몰랐다. 수신자는 당연히, 제 법적 남편이 아니었다.
「…무슨 일 있어?」
“미안, 급한 용무라.”
아니나 다를까. 수화기 너머로 들린 음성이 잠에 푹 잠겨 있었다. 혜은이었다. 고개를 한껏 젖혔다. 그간 더 길어버린 머리카락이 어깨를 간지럽혔다.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이것 또한 염두에 뒀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망설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네가 만나봐야 할 거 같아서, 권… 아니. 이시온.”
*
아침엔 휴대전화 화면과, 오후엔 체리와. 이시온은 자신이 왜 이러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얼 하고 있길래, 라고 묻는다면 답은 제법 싱겁다.
“…어쩌지.”
눈싸움. 무생물을 두고 뭘 하느냐고 되물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분명히 이건 눈싸움이었다. 한쪽이 끈질기게 물건을 주시할 뿐이긴 했으나 거기에 걸리는 시간이 5분을 넘어가면, 그렇게 표현해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첫 번째는 다, 사연이 있고 이유가 있었다. 뭔들 안 그렇겠느냐마는. 시온이 휴대전화를 오래도록 들여다볼 용건이라곤 오로지 태환뿐이었다. 메시지를 보낸 이가 제 형이든, 그것도 아니면 그에 대해서 뭘 찾아보기 위해 겨우겨우 타자를 쳐대느라 그런 것이든. 오늘은 문자였다. 문장은 앞뒤가 없었다. 큰 용건도 아니었다. 급한 용무가 있어 나갔으니 또 며칠 못 본다는 이야기려나 긴장까지 했건만. 그 걱정이 무색하다 못해 김이 샜다. 파급력은 강했지마는 말이다.
[예전엔 도대체 수납을 어떻게 했던 거야?]
정말…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이런 홍두깨가 없다. 청년은 그 몇 글자와 한참 씨름을 해야만 했다. 실은 조금 순진하게도,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눈치채는 데만 5분 정도 걸렸다. 가만히 둬도 물기가 돌 만큼 큰 눈동자가 몇 번을 꿈뻑댔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난다, 는 관용어적 표현처럼 평평한 평지에 굴러가는 매끈한 조약돌이 구르는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촘촘한 속눈썹이 날갯짓을 하다 돌연 멈췄다. 아. 그러곤 멍청하게도 제 다리 사이에 눈이 닿았다. 도톰한 입술이 갈 곳을 잃고 뻐끔거린 건 당연지사였다.
이래서 어르신들이 못산다,는 세 음절을 입에 달고 사시나. 드디어 체리가 시온의 눈동자를 벗어났다. 하얀 손이 이목구비를 다 가린 채 위아래로 움직였다. 뜻을 알자 별안간 온 메시지를 보내게 된 정황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수영장, 간밤의 정사… 그리고 언젠간 같이 살 거처. 연쇄작용 같은 거다. 권태환은 언제나 치밀했다. 그러나 이따금 그도 사람인지라 의식의 흐름같이 떠오른 생각을 불현듯 뱉어내곤 했다. 오직 권시온 앞에서만 이었으므로, ‘이시온’이 된 지금도 유일한 대상임이 틀림없었다. 답장을 보내고서야 작은 전자기기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수영장에서 헤엄치던 자신, 간밤의 정사에서 저를 파고들던… ‘또 다른 의미’의 작은 이시온과 기약은 없어도 같이 살 곳에서 수영할 날이 올지도 모르는 가깝고도 먼 미래.
[무리하지 마요.]
아마도 태환은 이런저런 흐름에 머리를 내맡기다 문득 허리가 좀, 아프다는 걸 깨달았던 거다. 보지도 않고 묻지도 않았지만, 눈으로 보듯 그려낼 수 있었다. 이걸 알아챈 저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걸까,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걸까. 시온은 빨개진 귀를 감추지 못한 채 손가락을 꼽아보았다. 이내 금세 그만둬 버렸다. 그만. 정신 차려야지. 가볍게 고개를 털고 냉장고를 열었더니… 그렇게 체리와 눈싸움을 했다. 클라푸티를 하고 남은, 이제는 너무 익어버린 과실들은 죄가 없었다.
하아.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다행히 입김이 나오진 않았다. 작업실은 특성상 그렇게 따듯하지 못했지만, 바깥에는 눈이 오고 있었다. 덕분일까. 숨소리는 작고 짧았다. 상태가 투명한 통 밖으로 바로 보여서 알긴 했는데, 역시나. 클라푸티를 만들 때만 해도 적당하게 익었던 체리는 지금 보니 몇 알이 물러터져있었다. 이렇게 되면 상품 가치는 없었다. 이제 와서 콩피나 드라이후르츠를 만들기에도 마땅치 않았다. 물렁물렁한 과육 하나를 손으로 굴리고 있자니 이 체리 낱알이 마치 자신같이 느껴졌다. 정확히 말해선, 익다 못해 물러버려서 돌이킬 수 없는 어떤 관계를 닮았다. …뭐든 나와 형에 빗대지 못해 안달 난 거 같네. 이시온은 그렇게 자책했다. 그렇게 뭘 만들어야 할지 정하지도 못했는데, 바깥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누가 방문한 것이었다.
“이 사장, 우리 안사람이 김치 가져가라던데.”
최 씨였다. 손에 묻은 빨간 물을 닦으며 손님을 맞이하려니 민망해졌다. 그 귓불을 물들인 건 꼭 그런 탓만은 아니었지만. 인사보다 용건이 먼저인 이웃에게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손인사가 돌아왔다.
“바로 말씀이세요? 저번에도 주셨는데…”
“저번은 저번이고. 바로 건너와. 알았지?”
거절은 소용없었다. 최 사장은 그렇게 바로 제 이발소로 돌아가 버렸다. 군말은 듣지 않을 테니 잔말 말고 따라오라는 거다. 청년은 잠시간 멀뚱히 서 있었다. 그러다가 슬쩍, 고개만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작업실의 전경이 보였다. 정확히는 놓고 나온 체리가 신경 쓰여서 그랬다. 다시 정면을 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제 살가울 줄 모르나 마음은 따듯한, 나이 든 이웃은 그리 참을성이 많지 않았다. 웬일로 걸음이 살짝 재빨라졌다.
*
“시온 총각, 왔어? 이거, 이거 가져가. 이 큰 통은 저번에 김장했던 건데 좀 묵혀야 하고, 여기 있는 알타리는 바로 먹어도 돼.”
“매번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최씨의 안사람이 저보다 한참 어린 청년을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시온은 보통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동네 모두가 서로서로 아는 지역의 특성상, 그를 그렇게 불러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보통 아줌마, 조금 공손하다 싶으면 아주머니지. 호칭이 너무 마음에 들었던 걸까. 그는 일련의 사건이 있었음에도 시온 편을 들어주곤 했다. 덕분에 최 사장이 안면 몰수하고 시온에게 가장 먼저 사과를 건넬 수 있었기도 했지만 말이다. 작년부터 꾸준히 뭔가 먹을거리가 생기면, 이렇게 나눔을 받아버리고는 했다. 음식장사하는 집에 뭘 그리 많이 주냐는 남편의 타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지 않고 아니, 케이크로 배를 채워? 저건 간식이고! 하며 목청을 높이면 높였지.
“곧 생신이시죠. 혹시 케이크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김치값 대신…”
“이거 봐, 이거 봐. 아들이 뭐야? 40년을 넘게 산 저 양반보다도 훨씬 나아. 됐으니까, 반찬도 가져가고. 나물인데 빨리 먹어야 해. 키는 큰데 말랐어, 이 사장은. 요새 끼니 잘 챙기고 다니는 거지?”
…네. 대답은 한참 늦었으며 짧고 간결했다. 뭐라고 끼어들 틈이 없는 탓도 있었다. 그렇게 이시온은 양손에 가득 짐을 들어야만 했다. 최 씨는 눈을 가늘게 뜰 뿐, 별말을 더하지는 않았다. 꿍얼거리긴 했지만. 내심 동의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비쩍 바르긴 했지. 그들은 알고 있으면서도 저런다. 저 비쩍 바른 몸은 문짝만 한 키를 가졌고 매일 무거운 밀가루 포대를 번쩍번쩍 들어댄다. 심지어는 저보다 키 큰 사내도 들 수 있었다. 잘하면. 그들은 절대 모를 일이었으며 알아서도 안되는 일이었다.
“아이고, 내 정신 봐. 맞아. 매실액도 들고 가. 내 동생이 시동생네서 얻어왔는데, 주려고 덜어놨거든.”
안 주셔도 되는데. 그런 말이 나오게 두지도 않았다. 가지 말고 기다려! 라고 하던 최 씨의 아내는 말릴 틈도 없이 뒷문을 열고 들어갔다. 단출한 살림살이가 있는, 휴식 공간이었다. 입만 뻐금대고 있었더니, 최 사장이 한 마디 더 거든다. 앉아서 기다려. 그래서 또 얌전히 오래된 소파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버렸다. 긴 세월 동안 한자리를 지켜온 가게 안은, 꼭 옛날로 돌아간 듯한 향수가 있었다. 손님이 앉는 두 개의 의자는 얼마나 닦은 것인지 가죽 부분에 광이 돌 정도였다. 기름이 먹어서 저럴 것이다. 거기다 한쪽 벽면 위쪽에 얼기설기 장을 짜 붙여놓은 TV는, 이제는 다 박물관에 갔을 줄 알았던 작달막한 브라운관 텔레비전이었다. 아직도 작동을 한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틀어져있는 채널은 최 씨의 취향인지, 공중파였고 한창 뉴스가 진행 중이었다. 빛바랜 화면 너머로 아나운서가 소식을 알리느라 바삐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JL의 임원 측에서 나온 양심고백을 토대로, 검찰이 HW 호텔 상무이사인 백주영 씨와 그와 연루된 타사 임원들에 영장을 발부하여…」
어. 시온의 입에서 작은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눈이 동그랗고 크게 벌어졌다. JL이라니. 그때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아랫사람 하나가 사고를 쳐서.’
「JL 측은 물의를 빚은 것에 대해, 책임을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연관 인물인 임원 김 씨 또한 검찰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중간부터 들어서, 더욱더 내용을 다 알 순 없었다. 확실한 건, 태환이 말한 아랫사람이 꽤 큰 잘못을 저질렀나 보다. 형은, 형은 괜찮은 걸까. 불안하고 걱정되었다. 시온의 손이 자꾸만 떨리고 있었다. 그와는 다른 사유 때문이었다. 의심은 사라지지 못했다. 몸을 숨겼을 뿐이지. 잔잔하던 수면에, 검은 물감이 흩뿌려진다. ‘백주영’. 정훈이 거론했던 인물이었다. 백주영, 백경아. 그러고 보니, 경아가 어느 가문에 사생아라고 했지 않았었나. 잊고 있던 사실은 연속해서 모습을 드러냈다.
제 어깨를 다치게 했다는 인물 중 하나가, 어느 집안 아들이었더라. 맞다. 방계긴 했지만, HW와 연관이 있었다. 이 모든 게… 과연 우연이기만 할까? 입술 안쪽이 아팠다. 언제 깨물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이시온은 그렇게 물속으로 떠밀렸다. 최 씨가 그의 파리한 안색을 보고 어깨를 흔들 때까지.
*
열아홉의 권태환은 모든 게 지루했다. 지금 제 시야 앞에 누가 울고 있든 말든, 씩씩거리고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저를 향해 토로하든 간에. 권태는 늘 한결같았다. 삶이 재미있지 않다는 건 아니었다. 논점 자체가 약간 달랐다. 사는 거야, 늘 쉽고 편했다. 제 마음 가는 대로 되지 않는 것도 없으니 오죽했겠는가. 그렇다고 거기서 엔도르핀을 얻는다거나, 아드레날린을 느끼지도 않았다. 당연하게 누릴 뿐. 그런 관점에선 불만이 없었다. 모자란 부분도 없는데, 괜히 힘을 뺄 필요가 없었으니까. 욕심을 가진 적도 없느냐고 묻는다면, 그이의 어리석음을 기꺼이 비웃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욕망이 멈추면, 그게 어디 인간인가.
날이 저물고 있었다. 왜 여기 버티고 서 있어야 하는 걸까. 턱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리 또래보다 크고 강인한 몸을 지녔다 한들, 혈관까지 여물진 못했나 보다. 아직은 무르기만 한 핏줄은 턱 선에 돋아 씰룩였다. …감수성이 약간 부족할 뿐입니다. 질환까지는 아니고요. 주치의는 매년 같은 소견을 낸다. 긴장해서 인지 목덜미에 땀을 죽죽 흘려대는 주제에, 평온한 낯짝을 흉내 내고 있었다. 박사님은 심리 치료를 받으려면 어떻게 하세요? 저와 상담이 끝나면, 뭐든 하셔야겠는데. 그렇게 한 마디 건네고 싶게 만드는 낯짝이었다. 뭐, 그런 흥미도 열넷 때 다 소진한 바가 있지만. 앵무새처럼 엇비슷한 진단만 내놓는데, 어떻게 권위자의 위치까지 올랐는지에 대한 내막이 궁금해져서 이것저것 뒤져보는 것도 몇 개월 가지 못했다.
태환은 애초에 정말 인간에 대한 흥미가 없었을 뿐이다. 넓게는 생물도 포함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줄 존재 또한 없었고. 그런데도 양친은 지치지도 않고 쓸데없는 시도 지속했다. 정확히는 아버지인 권재성이 큰 역할을 했다. 도대체 그가 정의하는 인간성이란 뭘까. 뭐길래 19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포기하지 못하고 제 창조물을 이리도 괴롭히느냐 이 말이다. 글쎄. 청년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이목구비의 소유자가 나른하게 눈썹을 위로 올렸다. 기고만장하게 자유를 찾아 떠났다가 자신이 얼마만큼 많이 누려왔었나를 깨달으며 제 아비 앞에서 무릎을 꿇는 어리석음? 그도 아니면, 계약이라고 한들 엄밀히 말해 처자식이 있으면서도 첫사랑을 잊지 못해 딴살림을 차리고야 만, 미련함에 가까운 집착? 그런 게 인간이 가져야 할 감성이라면, 굳이 필요치는 않았다. 애초에 자신의 부친이 뭘 하고 다니고 어떤 짓을 하는지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내 아버지가 내 어머니를 두고 바람을 피웠네 어쨌네… 신파 드라마도 아니고. 그에게 그런 환경은 주어지고 흘러가는 상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태어나 의식이라는 게 생기고, 자아라는 게 자리를 잡고 나니 막상 궁금해지기는 했다. 도대체 남들이 재잘대는 애정이란 게 뭐길래, 같은 궁금증이 잊을 만하면 불쑥불쑥 고개를 드는 것이다.
‘…왜 나는 안된다는 건데요.’
여기 또 있네. 인생이 신파인 놈. 닿지 않던 시선이 다시 정면을 향해 움직였다. 맞다. 잊고 있었으나 자신은 지금 교정 뒤편, 인적이 드문 소각장 근처에 서 있었다. 정확히 서술하자면 담벼락에 등을 기댄 채 비뚜름한 자세로. 여지를 주긴 했지. 손해 볼 게 없었으니까. 권태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빳빳하고 하얀 교복 상의가 구겨졌다. 여름은 덥고 습했다. 그가 선호할 만한 요소가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이 자리를 박차고 떠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굳이, 왜 지키고 있느냐면… 이 또한 호기심이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 고 하던가. 여기엔 고양이는 없었다. 다만 태환의 궁금증이 누구 하나의 자존심은 죽여 부술 참이기는 했다.
백주영은 한 학년 아래의, 리조트 사업으로 간신히 준재벌 명함을 달고 있는 가문의 장자였다. 맞아들이라고 해봤자 위로 누나가 하나 있던 걸로 기억했다. 아, 배다른 누나도 하나 있고. 과연 그게 끝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또 태환의 남다름이 드러난다. 타인에게 관심 한 가닥 없다면서 뭘 쓸데없는 것까지 다 알고 있고 그러느냐. 누군가 지적을 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하지만 불특정의 인물이 그걸 짚어낸다고 한들, 소용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질문이 틀렸다. 별 상관이 없으니 그 사람에 대해 알 필요도 없다는 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 열아홉의 권력자가 주변인의 인적 사항을 줄줄 읊을 수 있는 건 기억력의 문제다.
남들과는 반대의 지점이 문제였다. 떠올리기 위해 애를 쓰는 게 아니고, 잊기 위해 애를 써야 하는 판이었다. 그런 수고를 들일 바에 머릿속 어딘가에 묻어두는 편이 편했다. 또, 그 덕분에 주변을 잘 휘두를 수 있으니 불만도 없었다. 어쩄든, 다시 제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배신감에 떠는 인물에 대해 이어보자면… 그가 바로 권태환의 호기심의 희생양이었다. 제 어머니, 이름 석 자보다 JL의 사모로 더 많이 불리는 길미영은 늘 자신의 남편을 한심하게 여겼다. 무르고 연약하기 짝이 없다면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혼인 관계를 유지하는 건 득과 실이 분명하기 때문일 뿐인, 철저한 계약 관계라고나 할까.
배 아파 낳은 자식 또한 대를 이어야 하기에, 마치 혼수처럼 의무적으로 군 결과였다. 아들에게 바라는 것도 확실했다. 명석하고 똑 부러지는 후계자. 참으로 단출하지 않은가. 누군가는 무슨 환상 속의 그림이냐고 할 테지만, 결과적으로는 소원은 이룬 셈이었다. 하지만 흔히 그렇듯, 막상 꿈이 이뤄지면 또 다른 욕심이 생겨나는 법이다. 길혜는 혀를 내두르는 쪽이긴 했지만 말이다. 피가 흐르는지 의심이 생기게 하는 창조물은 창조주의 숨을 막히게 했나 보다. 그런 면에서는 차라리, 권재성이 그나마 최소한의 부모 노릇을 하는 걸지도 몰랐다.
‘듣고, 있어요?’
‘반쯤은.’
지나친 솔직함이었다. 그러자 제법 보드랍던 소년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나마 봐줄 만한 건 생김새겠거니 했건만, 그것도 아닌가 보네. 그게 이 광경에 따르는 감상, 전부였다. 주영에 대한 주변의 평가는 다음과 같았다. 집은 그럭저럭 살고, 뛰어나진 않아도 늘 잘 웃는 상에 남의 말을 잘 들어주지만… 어딘가 돈 것 같다. 이곳저곳 널린 조각들을 다 주워 담아 한 줄로 정리하자면, 그랬다. 특히 제 자존심을 뭉갤 때 이를 드러내는 일이 많았다. 대놓고 패악을 부린 건 아니었다. 그런 점이 볼만해서 내버려 두기도 했었지. 태환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였다. 아무나 괜찮다. 연애든, 친구든. 너도 분명 속 끓일 일이 있을 게 아니냐. 곁에 누구라도 좀 둬봐라. 재성은 자신과는 다른 인종 같은 자식에게 간곡히 부탁했더랬다. 한두 번도 아녔다. 그 타령이 벌써 한 6년째던가, 7년째던가.
매번 그 말을 귓등으로 흘리던 태환의 심경이 달라진 건 변덕에 가까웠다. 아비의 간절함 때문은 아니었다. 어느순간 깊은 지루함에 잠겨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게 이유였다. 그래서 제 주변을 알짱거리는 주영을, 가만 관찰하기만 했다. 이따금 관심도 던져주었다. 그래야 어떤 반응을 보일 테니까. 솔직히 터놓고 말하자면, 백주영의 심중과 행동이 궁금한 탓은 아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좀처럼 타인에게 흥미가 생기지 않는 저가 변화할지가 관건이었던 것이지. 아니나 다를까 금세 질리고 말았다. 예견된 결말이었다. 그가 금세 시시해지고 말았다. 처음엔 목적 없이 저를 선망하나 싶기도 했다. 아무리 제가 다니는 학교가 남학교라지만, 사내놈에게 성적인 스킨십까지 해가며 달라붙었으니 그런 의심이 들 만도 하지 않겠는가.
실망스럽진 않았다. 기대가 그리 크지 않기도 했지만 말이다. 주영은 단지 자신이 애매한 배경 하나로 가려지기엔 너무 비범한 인물이라고, 자기애를 가졌던 것뿐이다. 혼자선 타파할 수가 없으니, 저와는 본질이 다른 권태환에게 기대어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곧 졸업인 자신에게 다가와 ‘형은 언제 유학 가요? 저, 아버지가 졸업하자마자 다녀오라는데… 기왕이면 같이 맞춰서 가요, 네?’라는 희망찬 소망을 품길래 통보해 줬을 뿐이다. 내가 왜?라고.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백주영에게 더는 볼일이 없었다. 다른 이들과 똑같아져 버린 실험 대상이 무슨 효용이 있겠나. 쓸모도 없다. 그래서 당연하게 뱉은 선고였고.
‘나는 물이 좋더라. 만져지는데 사실은 만지지 못하는 거나 다름없다는 게.’
슬슬 귀찮아졌다. 권태환의 버릇 중 하나였다. 뭔가 심적으로 심히 권태롭다 못해 지루해지면 마음속에 있는 말을 곧이곧대로 내어 버렸다. 안심될 때도 그런 것 같은데, 심적으로 평온해질 만한 경우의 수가 적어서 정말 그런진 모를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또래보다 훨씬 낮은 저음이 지껄이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 주영의 미간이 한층 더 와락 구겨졌다. 저의 겉모습만 쫓았을 테니 이해력을 기대하긴 힘들었다. 뭐, 그게 이 관계의 종말에 영향을 끼치진 않았다. 결말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 같으니까.
‘네가 날 좋아하는 건 그조차도 불가능한 바람 같은 거고, 나는 실체가 있는 걸 원해.’
참으로 시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없던 감수성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그저 떠오르는 대로, 입을 막지 않았다. 기왕이면 잔잔하고, 흐르지 않는 물이면 좋겠다. 자신에게 이런 취향이 있었나. 벽에서 등이 떨어졌다. 하얀 석회가 묻어난 듯, 먼지가 일었다. 미간이 구겨졌다. 괜히 더러워지기만 했다 싶었다.
‘…애초에 형이, 선배가 그런 상대를 찾을 수 있을 거 같아요? 나 말고?’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귀로 날아드는 말이 들리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대답은 없었다. 네가 아닌 건 확실하고,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를 일이다. 없으면 평생을 지루함 속에 살겠다 싶기도 했다. 겁이 나거나 두렵진 않았다. 아쉬움은, 겪어보지 않았으니 모른다. 작은 실험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이 뒤에 서술할 내용은 열아홉의 권태환이 예상하지 못할 미래다. 그 일이 있고 6년이 흐른 뒤 스물다섯이 된 권태환은 끝내 유일을 찾게 되고 말았다. 10월 28일은 앞으로 그가 길이 길이, 선명하고 명확하게 기억하게 될 날짜였다. 심지어는 월과 일을 뺀 숫자의 조합을 온갖 데 남발하면서까지. 권재성이 급작스레 집안에 낯선 어린애 하나를 들이겠다 말한, 그 몇 주 뒤였다. 제 자식을 두고도 잔뜩 긴장해서 헛기침을 해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나? 그렇지 않았다.
머리마저 굵어져 버린, 20대 청년이 된 남자는 그저 시큰둥할 뿐이었다. 미련이 이리 오래되면, 병일지도 모르겠는데. 그렇게 뇌까렸던 듯도 하다. 이미 후원 재단에서 하나 고른 듯했는데, 일을 저지르고 나니 막상 걱정되었는지 정성스레 영상과 서류를 던져주는 게 아닌가. 맞다. 그날은 그나마 알량한 자식 된 도리를 해보자 싶어 받아든 CD를 플레이어로 돌렸던, 가장 최초의 날이었다.
말갛고 은은한 빛을 내는, 수면과 같은 눈동자에 담긴 물을… 곧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의 모든 비밀번호는 줄곧 1028이라는 네 자리 숫자로 결정지어졌다. 여덟 자리가 필요해지면 실제로 만난 11월 31일을 꼭 곁들여 넣었다. 휴대전화 번호는, 시온이 알 수 있도록 일부러 1131로 정했지만 말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게, 낭만적인 행위였다. 10월 28일과 11월 31일. 태환에게 있어서 평생 간직할 자신만의 기념일이었다. 그랬다. 그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었다. 단 한 사람뿐이지만 말이다.
*
이시온은 사흘 동안, 과장을 조금 더 보태 넋이 나간 사람처럼 지냈다. 움직이고 일을 하기는 했다. 약속된 일정과 찾아올 고객이 드문드문 있는 건 여전했으니까. 육체와 영혼의 분리 같은, 말도 안 되는 현상이 벌어진 건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말이다. 그저 다른 때보다 더 자주 흐트러지는 집중력을 그러모으지 못해 하루에도 열두 번 손이 멈출 뿐. 알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허공을 바라보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마다 되뇌었다. 그저 문서 상이긴 해도, 제 형이었던 권태환은 쉬이 진실을 꺼내놔 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확실히 믿고 있었다. 그러려고 노력하는 부분도 없잖아 있긴 했지만.
뭐가 되었든, 형은 나를 사랑해. 나를 소중히 여기고 있어. 아. 시온은 경직되었던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도돌이표가 따로 없다. 진전은 있었다. 미세하게나마, 잊었던 맹신이 그에게로 돌아왔다. 다시 떠올려보면, 그때엔 정말 절대적인 믿음이란 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건 권태환이 만들어준 것이기도 하고 제가 알아서 만들어낸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떨어진 세월 동안, 시온은 그와 멀어지고자 노력했지 않는가. 의식적으로도 그렇고, 무의식을 가장한 뒤에도. 그렇다면 왜 그런 선택을 해야만 했을까?
일단 단순 명료한 답이 있다. 고작 종이 쪼가리가 증명해 줄 뿐이더라도, 핏줄이 이어지지 않았더라도… 권시온이 그와 똑같은 성을 달고, 제 손윗 형제에게 욕망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용서받기 힘든 죄였다. 적어도 그 당시엔 그걸 변명 삼아 더 겁을 집어먹었다. 자신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더는 형제애가 아님을 알았을 때부터, 태환이 저를 향해 실망을 내비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여린 소년을 짓누르곤 했다. 하루 새에 승모근이 굳어 뭉쳐있었다. 그래, 딱 지금 같은 감촉이 제 생을 누르고 있었더랬다.
그럼 더 복잡한 관점은 또 뭐였을까. 시온의 고개가 천천히 안으로 수그러들었다. 분명 아침에 닦아두었던 바닥인데 못 보던 거스러미가 눈에 띄었다. 평소라면 너무도 공을 들였기에, 진작 사라지고 없을 더러움이. 타일 줄눈에 끼어있었다. 정신이 혼탁하니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놓쳐버렸던 것이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뜨겁지는 않았다. 시온은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고작 막 열아홉에서 스물로 넘어가는, 성인이라고 부르기에도 모호한 시절이었지 않나. 그래서 잊으려고 애를 쓰면서도 한편으론 기대하고 있었던지도 모른다.
아니, 헛된 기대를 붙잡고 있으면서도 아닌 척 위선을 부렸던 것이 맞다. 이렇게 잊은 듯 지내다 어느 날 우연히 라도 마주치면… 파양된 시온과 태환 사이엔 ‘형제’라는 도덕점 관념이 사라진 뒤일 테니까. 그래서 자신은 한결 심상이 가벼워진다. 더는 수중에 갇힌 죄인이 되지 않아도 됐다. 이거야말로 역설, 그 자체이지 않은가. 규범으로 정해진 걸 지키고 싶어 하면서도, 위선적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는 없을 테니까. 태환이 받을 비난을 염려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도 하나의 사유가 될 순 있었다. 그러나 권시온도, 이시온도 잘 알고 있었다. 권태환은 애초에 타인의 손가락질에 구애받지 않는 인물이라는 점을.
…그만하자. 쓸데없이 급류처럼 몰려드는 단상들은, 어떻게 보면 지나친 비약에 지나지 않았다. 시온은 천천히 목을 움직여 원을 그렸다. 뒤 이어 한쪽 팔을 허리에 올리고 흉근을 부풀렸다. 후우. 뱉은 숨이 꽤 컸는지, 덩달아 속눈썹도 나부끼고 있었다.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싶었다. 사내가 일부러 그랬든, 아니면 제가 지나친 추측을 하고 있을 뿐이든 사실로 드러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연결점 또한 추정에 지나지 않았다. 회피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발전이 없었구나, 나.”
속절없는 혼잣말이었다. 그때 물어봤어야 했다. 펜트하우스에서, 어물쩍 넘어가지 말았어야지. 부질없는 자책이었다. 자신은 제 형 앞에만 서면 평정심 따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믿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도 최소한, 권태환은 이시온을… 사랑했다. 사랑해왔고 사랑하고 있었고 사랑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나를 정말 좋아하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을 거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길이 막혔다. 그럼 뭘 물어봐야 하지? 자신은 뭐가 그렇게 두려운 것일까?
당장 떠오르는 건 많지 않았다. 우리의 관계는 이제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하는 걸까? 저의 얄팍하고 위선적인 소원대로 더는 형제라고 증명해 줄 서류도 없으니 떳떳한 연인으로, 둘을 정의하면 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다. 그런 기본적인 고찰도 하지 않은 채였다. 시온의 눈동자가 가라앉는다. 뭘 그렇게 힘들어해? 백주영이 누구든, 정말 백경아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가 무슨 상관이길래? 그토록 갈망한 걸 얻어놓고, 그깟 게 뭐라고? 그러게 말이다. 원론부터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꼴이었다. 그저 막연하게, 여기에 엉켜버린 실타래를 풀게 되면… 특정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잃게 될 것만 같았다.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꼬리조차 잡지 못했으면서.
“엉망진창이네…”
무엇이 자신을 이토록 불안하게 하고, 떨리게 할까. 정리해야만 했다. 그 와중 우스운 점이 하나 있었다. 그러려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는데, 막상 사내에게 만나는 날짜를 좀 더 미루자고 하기는 싫었다. 위선자. 그렇게 불리길 원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제게 제일 적절한 멸칭이었다. 도톰한 아랫입술 사이로 폐에 남았던 숨의 찌꺼기가 느껴졌다.
「띵-」
두 다리를 바닥에 뿌리내린 채, 휴대전화에 손을 뻗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입구에 달려서 오래도록 손님이 왔음을 알려주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던 종이 땡그랑, 몸을 울렸다. 한참 동안 경직되어 있던 두 다리가 움직인다. 예약 손님이 오기로 한 시간은 아니었다. 살갗에 한기가 돌았다. 을씨년스러운 장마철에, 실외 수영장 한복판을 가로지를 때와 엇비슷한 감각이었다. 예감이 좋지 못했다. 그럼에도 몸은 절로 앞을 향하고 있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주제에.
*
부쩍 자세가 구부정해지는 걸 보고 있자니, 허리를 펴라고 한 마디 건네야 하나 싶을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부러 지적하진 않았다. 늘 반듯하게 서서 걸을 줄 알던 어린애가 갑작스레 저런 양상을 보이는 속내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단단한 손끝으로 눈앞의 인영을 가늠해 보았다. 컸다. 마땅한 성장의 과정이었다. 이제 고등학생이니 예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열셋에서 열넷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서 있던 작달막한 아이였는데, 이제는 얼굴만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누가 봐도 성인이라고 착각할 만치 자라버렸다. 성격은 또 신기하리만치 변한 게 없는데 말이지. 회전판이 달린 의자의 앉는 부분이 빙글, 반 바퀴를 돌았다.
그와 동시에 태환의 오른팔에 힘이 들어간다. 웬만한 국산 승용차와 같은 값을 지불해야만 손에 넣을 법한 데스크 체어가 삐걱, 아귀가 맞지 않는 소음을 냈다. 팔꿈치가 거치대를 꽉 누른 탓이었다.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갸웃거린다고 하기엔, 어감이 퍽 둥그스름했다. 권태환의 인상에 비하자면 말이다. 그렇다면 뭐라고 해야 좋을까. 그러나 묘사는 딱히 어떤 단어를 쓰든 상관이 없고, 중요치도 않았다. 집중해야 할 부분은 따로 있었다. 스물아홉이 된 JL의 장남이 뭐 하나에 이리 관심을 쏟은 적이 있던가. 아마 지금도 닫힌 문 너머로 할 일을 하면서도 저들끼리 수군거리느라 숨을 죽이느라 바쁠 사용인들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다. 사내의 관심은 오로지 제 눈앞에 있는 소년에게 쏠려있다.
‘…나, 얼굴에 뭐 묻었어?’
‘예뻐서.’
커다란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던 몸이, 아까보다 더 안으로 굽혀 들어간다. 하얗던 피부가 온통 빨개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제 양 손가락을 마주하고 꼼지락대었다. 내가 애인가, 나도 이제 다 컸어. 권시온은 그런 말은 한 번도 꺼내질 않는다. 이제 막 10대 후반에 들어선 사내놈들이 의례 그렇듯, 어리다는 말에 자존심을 상해할 법도 했다. 하지만 저 표정을 보면 놀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런 말도 못 하면서도, 연신 눈꺼풀을 덮었다 연다. 뺨은 발그레하게 붉힌 채 선홍색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다. 오히려 들떠서 어쩔 줄 몰라한다면 모를까. 태환의 매서운 눈매가 웬일로 호선을 그린다. 잘 무두질 된 가죽 위로 검지가 툭툭 튀었다.
작아 보이고 싶어 한단 건, 진작 눈치챈 바였다. 정확히는 다시 열넷, 열다섯 때처럼 제게 못 이기는 척 안겨도 될 만한 덩치로 돌아가고 싶은 걸 테다. 그러니 어여쁘지 않을 수도 없다. 울릴 듯 말 듯 한, 짧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용건은 딱히 없었고, 그래도 좋았다. 예전보단 확실히 횟수가 줄긴 했다. 그래도 몇 가지 조건이 맞으면 이렇듯 제 방에 찾아오는 시온이었다. 연습이 없는 주말이어야 하고, 해가 떠있는 낯을 선호했으며 제 형에게 아무런 일정이 없는 날이면 조심스레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몇 번이나 너는 알아서 들어와도 돼. 라고 해도 듣질 않았다. 한편으론 잔잔한 눈동자를 굴리며, 보지 않아도 되는 눈치를 보면서 작은 음성으로 형, 들어가도 돼? 라고 묻는 순간이 퍽 마음에 들었기에 부러 언질을 주는 것도 멈췄다. 태환이 그렇게 내도록 한참을, 동그란 눈동자를 몇 번이나 굴리나 감상하고 있으려니, 시온은 침묵이 머쓱했는지 겨우 입을 열었다.
‘또 늘었네, CD.’
딴청은. 탁한 음성에 웃음기가 채 지워지지 못했다. 그래도 성의껏 시선을 돌려봤다. 소년이 가리킨 건 데스크 너머에 벽면을 차지한 커다란 TV와 수납장이었다. 벽면에 아예 붙어 설치된 CD 수납장의 높이는 열일곱이 된 시온의 키만큼이나 컸고, 개수는 총 세 채나 됐다. CD 케이스의 크기가 크면 뭐 얼마나 크겠나. 평균적인 성인 남성의 손만 한 것들이 그 공간을 전부 메꾸고 있었다. 심지어 겉으로 노출된 부분엔 정성스레 라벨도 붙어 있다. 아쉽게도 권태환이 직접 공을 들인 흔적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그렇게 해서 오라 손수 지시했으니 정성은 정성이었다. 등 부분에 날짜와 경기 명이 빼곡히 즐비해 있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봤을 땐, 저 세 번째 맨 위 칸에 제법 빈 곳이 있었건만. 키만 컸지 여전히 무른 입술이 오물거렸다. 제가 말해놓고 제가 민망해졌나 보다. 대꾸는 없었다. 둘 다 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크든 작든, 태환은 시온이 참가하는 모든 경기의 영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그래서 저렇게 커다란 TV도 설치한 거다. 막상 실제로 영상을 틀어보느냐면, 그건 또 아닌 거 같다는 게 의문이었지만.
‘…저걸 다 보긴 해?’
예쁘다고 할 땐 모른 척 입을 다물어놓고. 늦은 투정이었다. 권태환이 소리 내 웃은 것은 당연지사였다. 의자는 그렇게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번에 무게를 온전히 견뎌야 하는 쪽은, 침대가 되었다. 자연스레 소년의 옆자리를 차지한 남자가 팔을 뻗었다. 웅크린 어깨를 감싸 잡더니 제 쪽으로 당겨 품었다. 상체가 더욱더 옹송그려졌다. 무의식적으로 더 작아지고 싶어 하는 티를 내는 것이었다. 그럴 필요가 뭐 있다고. 태환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단지 매끄럽고 보드라운 어깨를 잡고 매만졌다. 이러면 간지러운 척을 하며 빨개진 낯을 감추지 못한 채 부드럽게 펴지는 몸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광대뼈가 있는 부근이 닿은 곳은 깨끗한 향이 나는 정수리 위였다. 두피가 아직 말랑하기만 했다. 자신의 시온이 어떤 걱정을 하든, 그는 저에게 언제나 작고 말랑하고 예쁘기만 할 것이다. 가정이 아니라 확정이었다.
‘실물이 있는데, 뭐 하러.’
…그럴 거면 왜 모아. 또 투덜거렸다. 호흡을 머금은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사내의 콧날이 소년의 앞머리카락을 헤쳐 이마에 닿았다. 그러다 문득 뭔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첫 번째 장, 마지막 칸. 가장 구석진 곳에 숨어 있지만 유일하게 태환이 꺼내 보곤 하는 것이었다. 권태환은 유일하게 라벨이 없는 가장 최초의 영상물이 담긴 물건을 바라보다 시선을 거뒀다. 자신이 영원히 매만지며 보살필 실물, 아니. 실제로 존재하는 권시온을 귀여워해 주기 위함이었다.
*
가게 안으로 들어선 이는 단정하긴 해도 부드럽지는 못한 인상을 주는, 짧은 머리를 한 여성이었다. 시온이 아는 한도 내에서 비교할 인물이 겨우 둘뿐이긴 했지만, 경아의 세련되고 힘 있는 정장 차림과도, 김 비서의 깔끔하고 규격 되어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색감을 가진 옷차림과도 다른 양상이었다. 이시온과 저 낯선 방문객은 서로 처음 조우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쉽게 단정 지을 순 없으나 확실히 손님으로 찾아온 게 아니란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메종 단 루의 오너로서 라면 응당 먼저 말을 건넸어야 했다. 어서 오세요, 같은 상투적인 인사라도 말이다. 그러나 닫힌 입술은 침묵을 고수했다. 굳어서 움직이지 않은 것뿐일지도 몰랐다. 상대도 시온의 속내를 읽어낸 모양이었다.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던 낮에 미소가 띄워졌다. 그다지 반가워 보인다든가, 호감을 띤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쓴웃음에 가까웠다면 모를까.
“…초면에 죄송하게 됐지만, 반갑게 자기소개할 사이는 아닌 거 같네요.”
여성의 눈썹은 곤란한 듯, 약간의 미안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일자로 곧게 뻗어있던 끝이 아래로 쳐졌다. 청년에게선 여전히 아무런 대꾸도 들을 수 없었다. 확실히 디저트 전문점이어서일까. 은은한 단내가 진동했다. 심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공기 중에 부풀린 밀가루의 잔향이 섞여 있고 달큼한 크림의 흔적이 은은하게 후각을 간지럽히는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역설적이게도, 입안은 한없이 쓰기만 했다. 소태라도 물고 있는 듯이. 모순적인 감상임은 진작부터 자각하고 있는바였다. 스물아홉이라고 했던가. 제 눈앞의 얼굴은 그것보다 살짝 어려 보였다.
성인 남성에게 단아하다는 표현을 붙이는 게 과연 옳은가 싶기는 했지만, 정말 말갛고 하얗고 섬세한 이목구비였다. 청년의 단정한 낯은 큰 변화가 없었지만… 눈동자는 달랐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머리가 잘났다고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변호할 의뢰인이 어떤 사람인지, 상대할 상대편은 어떤 인간인지를 알아야 했다. 그러니 감이 좋아야 하는 건 당연지사였다. 자신의 기민한 눈치를 믿고 장담하건대, 그의 눈은 분명 떨리고 있었다. 물론 혜은이 앞에 둔 이는 성인이었다. 다 큰 어른이다 그 말이다. 그러나 그거야 하나의 객체로 두고 봤을 때 아닌가. 저와 터울을 생각하면… 그래 봤자 어린애다. 아직 서른도 되지 못한. 흡. 혜은은 짧게 호흡을 들이켰다. 날숨은 없었다. 법조인은 감정을 추스르고 숨기는 데 익숙해야 했다. 그런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방문객은 키가 크지 않았다. 눈대중으로 짐작하자면, 160cm를 살짝 넘기는 신장이었다. 그런데도 다가오는 속도는 빨랐다. 시원시원한 걸음걸이였다. 눈썹은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오늘은 명함만 전해주러 왔습니다.”
네 면이 유리로 이루어진 진열장이 완충재 역할을 해주었다. 높이가 다가온 여성의 가슴께에서 끝났는데, 그 위로 팔이 뻗어져 왔다. 언제 꺼냈는지, 처음부터 들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명함이었다. 오돌토돌한 재질을 가진 종이에, 로고에만 은박이 입혀져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이었다. 가늘긴 해도 길쭉한 손이 그걸 받아드는 데에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한눈에 봐도 부러 뜸을 들인 건 아닌 것 같았다.
맞다. 실제로도 그랬다. 고의는 한 톨도 없었다. 이시온은 정말 몰랐기 때문이었다. 사지가 자꾸만 느리게 움직였다. 떨림을 감추기 위한 방어기제인지도 모를 일이다. 천천히, 잡아든 명함을 살펴보았다. HW 법무팀 변호사 차혜은. 도저히 움직여지지 않는 머릿속이 답답할 지경이기도 하건만. 시온의 입술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백주영, 그 사람과 관련된 걸까? 형, 태환을 설득하기 위해 보내지기라도 한 걸까? 잡념은 길어지지 못했다. 않은 게 아니라, 그렇게 할 틈이 없었다. 혜은이 먼저 패를 밝힌 탓이었다.
“백경아가 보내서 온 겁니다. 백주영이 아니고.”
숙여져있던 고개가 들렸다. 아까보단 반응이 훨씬 빨랐다. 타인이 보기엔 이전도 그렇게 느리지 않았고, 현재도 그렇게 빠르진 않아 보였으나 확실한 차이가 있었다. 다물려있던 입매 사이가 벌어졌다. 그 입에선 어떠한 문장이나 단어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그 흔한 호흡까지도. 독백뿐이었다. 아, 정말 경아가 그 그룹과 연관이 있는 거구나. 속눈썹 끝이 떨렸다. 혜은은 거기까지 보지는 못했다. 감이 아무리 좋든, 그도 결국 인간이기에 저가 마주한 이의 속내를 다는 알 수 없다. 이시온이 보이는 변화를 유심히 관찰하더니, 용건을 꺼냈다.
“그다지 놀라진 않았나 봐요. 아. 그게 아니라,”
이번엔 음성에도 웃음이 섞여들었다. 기쁨, 환희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측은함과 곤란함이라면 모를까. 나도 나이가 들었네. 차혜은은 자조했다. 시온을 직접 목도하는 건 제 계획에 없었다. 세월이 흐르니 말랑해지기라도 한 걸까. 경아의 갑작스러운 전화와 요청에 대해 즉시 답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걔는, 그저 피해자 아니야? 그러자 익숙한 음성이 말했다. 네가 실형 살게 한 사람들은 다 무고하고? …하긴. 위선이지 여러모로 개운치 못한 일이지만, 본디 인간은 이기적인 생물이지 않는가. 적절한 자기 합리화였다. 많은 걸 해야 하진 않았다.
“…권태환 부사장을 너무 믿는 건가.”
이렇게 들쑤시는 건 좀, 역시 마음이 아프네. 칼 들고 찌르고 난 뒤에 하는 반성이 무슨 소용이겠느냐마는 말이다. 해야만 하는 일이니 이제 와 물러설 마음도 없었다. 나도 참 쓰레기네. 뭐, 이 직종에 뛰어든 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반추한 게 한두 번은 아니었다. 그렇게 혼자 내심 미안해하고 있던 때였다. 스물아홉의 눈동자는 물을 닮았으나 거세게 파도치진 않았다. 주사위, 아니 돌은 이미 던져졌으나 이내 잔잔해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흔들린 채 빛을 쪼개던 눈동자로, 반듯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이 맞닿았다.
“본론만 말씀하시죠.”
음성은 작았다. 격양되어 있지도 않고, 튀는 구석도 없었다. 이 매장 안에 들어서서 처음 듣는 이시온의 목소리는 퍽 조근조근 했다. 혜은의 쌍꺼풀이 없고 옆이 트여있는 눈매가 동그랗게 홉떠졌다. 미간이 들렸다. 이내 제 자리로 내려앉고 말았지만 말이다. 들숨만 있었던 호흡이 한참 만에야 날숨으로 변했다. 허. 모습을 바꾼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헛웃음이 절로 삐져나왔다. 만만치 않네. 혜은은 보란 듯이, 약간은 연극적인 행동을 취했다. 눈에 띄게 양 어깨를 위로 올렸다 내렸다.
“경아가 당신에게 접근한 건, 계획적인 일이었어요.”
본론을 원했더니, 이번엔 아예 앞뒤 설명이 없다. 하지만 청년은 계속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동요는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 혜은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위로 올라가 있었다.
“이게 본론이고, 그다음이 궁금하면 전화 줘요.”
변호사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들어왔던 입구가 출구가 되었다. 문을 닫기 전, 그러니까 종이 명확하게 닫혔음을 알리기 전, 마지막 말을 남긴 채로.
“…이시온 씨에겐 미안합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네요.”
대답을 바라지 않는 사과였다. 그리고 청년 또한, 거기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렇게 못 박힌 채 전면 창 너머를 바라보다가 손아귀에 쥐어진 작은 종잇조각을 바라봤을 뿐이었다.
*
‘계획적인 일이었어요.’ 창밖을 바라보는 동안, 그 몇 음절이 귓가에서 떠나질 않았다. 혜은이라는 변호사의 목소리가 독특했던 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음색이 높았는지, 반대로 낮았는지, 어떤 어투로 말했는지는 조금도 기억에 남지를 않았다. 창밖의 풍경은 시시각각 형태를 바꾼다. 유리를 사이에 두고, 밖에 있는 건물이 몇 층이었는지는 물론이거니와 지나쳐온 가로수가 몇 그루였는지도. 모조리 헤아릴 수가 없었다. 과속이라고 할 만큼 속력을 낸 건 아니었다. 법정 규범 속도는 지키고 있는 듯했다. 그랬다. 시온은 지금 택시 뒷좌석에 앉아있었다. 안전벨트가 살짝 답답하다 싶어 지나온 흔적으로 시선을 돌렸을 뿐.
법. HW의 법무팀에서 일하면서 백경아와 잘 아는 사이인 인물. 그리고 또다시 거론된 백주영의 이름. 벨트가 넓으면 얼마나 넓고 조여오면 얼마나 조이겠는가. 이건 다, 회피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의 속이 울렁거리고 멀미하듯 어지러운 건, 차를 타서가 아니었다. 용건만 전하라는 제 의중은, 중간에 개입한 건 아니었긴 하나 맥락을 끊은 건 확실했다. 그때 제 낯빛이 어땠을까. 손은, 어깨는 떨리지 않았을까? 차혜은이란 인물이 어떻게 봤는지를 신경 쓰는 게 아니었다. 등받이와 거리를 벌리고 있던 등이 뒤로 기울어졌다. 자기도 모르는 새 움츠리고 있던 날개 뼈가 본모습을 되찾았다. 그렇다고 굳어버린 어깨 근육이 곤두서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휙휙 모습을 바꾸던 창가를 바라보는 일을 그만두자 바닥에 깔린 카시트가 보였다. 속도가 살짝 빠르긴 하지만, 내부는 깔끔했고 기사는 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수더분한 성격을 가진 이들이 의례 그러듯 이 밤중에 어딜 가느냐 같은 사적인 부분을 묻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것이 제 유일한 위안이라니. 잠깐 마른 세수를 하던 손바닥이 서서히 허벅지 위로 올라갔다. 그러다 우연하게 미터기가 눈에 들어왔다. 야간 할증이 뭔지는, 사전적으로 알고 있었다. 아까 봤던 길목의 풍경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바뀌는 숫자를 보고 드는 생각이 그것뿐이었다. 평소에는 여유가 있음에도 고집처럼 대중교통을 고수했던 시온이 말이다.
택시를 잡기 전에 문자를 하나 보냈다. 수신자는… 태환은 아니었다. 늦은 밤 막 셔터를 내리려던 최 씨에게 부탁해 김 비서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그는 지나가듯 명함을 받았었다 이야기했을 뿐인데, 저는 어떻게 그걸 떠올려낸 걸까. 보낸 메시지가 한 통, 받은 메시지가 한 통이었다. ‘늦은 밤 죄송합니다. 펜트하우스 주소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괜찮습니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그 두통이 서로 주고받은 연락의 전부였다. 김 비서의 답장은 지나치게 빠르게 날아들었다. 마치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아마 형이 미리 언질을 해뒀을지도 모르겠단 예상이 스쳤다. 그랬더니 이번엔 속이 울렁거리는 게 아니고… 왼쪽 흉근이 따끔했다. 병은 아닐 테다. 위안이 되진 않았다.
답을 찾으려면 길이 필요했다. 반복이다. 정훈이 말한 권태환, 권태환에 대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제 어깨를 다치게 한 백주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권태환과 계약을 기반으로 한 결혼을 감행한 백경아. 인물들의 관계는 망쳐버린 아이싱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지만, 한편으론 설탕으로 뽑아낸 실처럼 가느다란 연관관계를 맺고 있었다. 득과 실을 따질 건 아니지만, 얻은 바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저가 형제라고 묶여있든 아니든, 이시온이든 권시온이든. 자신은 태환에게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형에게 실망할지도 몰라. 그러면 어떡하지? 한 번도 상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담아둔 진심이 다시 가슴께를 돌아다녔다. 금세 어지러워졌다. 결론까지 닿기엔 아직도 갈 길이 아득했다. 그렇다면 디뎌야 했다. 단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모든 걸 알게 되더라도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이 결말만은 아니길 바랐다. 그렇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럼, 그러려면 저는 뭘 해야만 하는 걸까. 택시는 계속 달리고 있었다.
*
비밀번호는 외울 필요가 없었다. 눌러보지도 않았건만, 손가락은 정확히 여덟 자리의 숫자를 짚어냈다. 직후엔 너무 당연하게도, 잠금쇠가 열리는 금속음이 들렸다. 약속도 하지 않고, 소유주에게 이곳에 와도 되는지도 묻지도 않았다. 엄연한 무단 침입이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같이 사는 공동 소유주가 될지 모른다곤 하더라도 이건 분명히 정당하지 못한 방문이었다. 그의 수행비서가 아무런 의문도 없이 주소를 가르쳐준 걸 보면 암묵적인 허락이 있었겠다 싶지만… 이시온의 입장으로선 큰 탈선을 한 거나 다름없었다. 이전처럼 안절부절못하겠다거나, 지나치게 불안하진 않았다. 다른 데에서 기인한 일렁거림이 훨씬 심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이목구비 중 어느 한 군데도 구겨진 곳이 없었다. 그렇게 청년이 주인 없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불, 조명은 켜지 않았다. 어디 있는지도 잘 몰랐다. 처음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 스위치를 누른 건 태환이었으니까. 그는 어딘가에 숨어있을 전원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고, 그저 부지런히 발을 움직일 뿐이었다. 멈춰 선 곳은 리클라이너가 자리한, 유리창 너머로 수영장이 보이는 그 자리였다. 시온은 조용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주변이 온통 고요했다. 밖은 한없이 검정으로 들어차 있었다. 그런데도 수면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지 모를, 작고 연약한 빛을 쪼개고 있었다. 말간 눈동자 위는 그 모든 걸 바라보았다.
무심코 시선을 던진 건 아니었다. 명백한 의지가 있었다. 풀 안에 차있는 물은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맑고 잔잔하게 고여 있다. 그 누구도 담아내지 않은 채로. 속 모르는 이들이 보면 편안해 보이기 짝이 없는 건 낯빛이 전부였다는 듯, 아까부터 쥐고 있던 휴대전화기의 뒷면에 습기가 차있었다. 손아귀에 얼마나 땀이 났는지, 과장을 조금 보태 흥건하다고 해도 될 것 같았다. 사실 시온은 지금, 온전한 이성을 갖춘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차분하게 굴 수 있는 게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혼자 삭이며 순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느라 티를 낼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것처럼.
그러나 한참 후에야 깨우쳤다. 아무리 징그러울 정도로 어른스럽다는 평가를 들으며 자라온 자신도, 다른 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는걸. 되려 외롭다, 힘들다 뱉어냈다가 버려질까 봐 두려워 도망쳤을 뿐. 이제 더는 도주하고 싶지 않아졌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의문은 많았다. 권태환은 이시온을 사랑하는 게 분명하고, 이시온 또한 권태환을 사랑하는 게 분명하다. 이것에 대한 고찰은 끝났다고 여러 번 언급한 바 있을 테다. 무엇이 남았을까? 하나는, 모두가 알다시피 그 사내는 남에게 정을 주는 편이 아니었다. 언제나 특별히 여겨지길 원하던 어린 소년이었던 시온과는 달랐다. 그는 항상 넘쳤고, 필요의 여부로 관계를 정의하는 걸 선호했다.
애초에 태환의 애정이 어떤 형태였길래 처음부터 저를 반겨주었을까. 자신에게 말 한마디 없이 떠나버린 양 동생을, 왜 기다려주었나. 고작 열몇 살이 뭘 안다고 저에게 욕정 하는 것까지 쉬쉬해주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더불어 이 10년 만의 재회는, 어떤 경위로 이루어진 건가. 정말 그저 우연일 뿐이었나. 이 파헤칠 필요가 없는 부분일지도 몰랐다. 확신이 필요하다는, 되풀이는 되풀이되, 이전과 같은 조급함과 불안은 없었다. 중요한 명제는 바뀌지 않을 테니까.
이시온은 순수하게 알고 싶었다. 다시는 회피하지 않기 위해, 태환의 곁에… 이번엔 다시는 떠나지 않고 남기 위해서였다. 어쩐지 손끝이 파랬다. 다른 손으로 만지고 더듬어 체온을 가늠하지 않아도, 절로 찬 기운이 돌았다. 손가락으로 전화번호를 하나하나 눌렀다. 이 펜트하우스 현관문 앞에서 비밀번호를 눌렀을 때처럼. 신호음이 들릴 새도 없었다. 상대는 바로 받았다. 전화할 줄 알았다는 것처럼. 그는, 항시 그랬다.
“…낮에 차혜은이란 변호사가 찾아왔었어요.”
평소와 다른 태도를 보이는 건 시온이었다. 며칠 전이었다면 더듬더듬 바빠요? 시간 좀 내주면 안 돼요? 하며 수그리고 들어갔을지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랬을 거다. 청년의 목소리와 얼굴은 여전히 잔잔하기만 했다. 깜깜한 밤중 아무도 몸을 들이는 이가 없어 미동조차 없이, 오롯이 존재하기만 하는 저 수영장 표면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늘 의식적으로 작게 말하기만 하던 성대가, 높지도 낮지도 않게 평온한 음성을 내보내 주었다. 그래도 살짝 떨렸나? 거기까진 모르겠다. 대신 먹먹한 것은 귀였다. 흠뻑 젖은 것처럼, 그보다는 수중에 가라앉아 꽉 막혀버린 것처럼 먹먹했다.
대뜸 튀어나온 데다 앞뒤 설명도 없으니 뜬금없다 여겨질 법도 한데. 수화기 너머 상대편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놀랐다면 헛숨이라도 들이켰을 텐데. 아, 아닌가. 그랬더라도 사내는 그렇게까지 반응해 주지 않았으려나. 정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건지조차 판단이 서지 않았다. 과연 정말 태환이 대꾸하지 않은 걸까, 제 귀가 고장이라도 난 걸까. 시온의 눈꺼풀이 천천히 닫혔다가 열리길 반복했다.
“형.”
무슨 말이라도 해달라는 요청이 담긴 어투는 아니었다. 목울대가 서서히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럼 그렇지. 정면을 곧게 향하던 시선이 초점을 잃기 시작했다. 목덜미만 그런 게 아니었다. 몸부림치듯 깜빡거리던 눈가가 달아오른다. 그때 알았다. 수화기 너머로 고른 호흡이 들린다. 낮고, 씨근덕거리진 않지만 분명 그건 숨소리였다. 아, 형이 입을 열지 않은 것이 맞구나. 슬프지는 않았다. 전부 알고 있는 게 맞구나, 뭔가를 내게 숨긴 것도 맞겠구나. 그런데도 실망하진 않았다. 시온의 속눈썹에 물기가 얽힌다. 뭉쳐져 버린 단 몇 가닥이 어쩐지 무겁게만 느껴졌다.
“지금 그 사람에게 연락을 해보려고 해요. 그래서, 물어볼 거예요.”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수줍어서도 부끄러워서도 아닌, 울음이 차올라 선홍빛으로 변해버린 뺨이 작게 떨리다 멈췄다. 흡. 등을 기대 편안하게 앉는다는 선택지가 없는 사람처럼, 곧게 지탱되어 있던 척추가 앞으로 몸을 말았다. 수화기를 잡은 손가락, 마지막 마디가 차디차서 추웠다. 실제론 그럴 리가 없는데도.
“형이 백경아 씨와 무슨 거래를 했었는지, 백주영이란 사람은 또 어떻게 얽혀있는지…”
차고 뜨겁고. 신체의 부위가 각각 따로 놀았다. 호흡기와 얼굴, 왼쪽 가슴께는 뜨거운 것인지 따끔한 것인지 구별이 되질 않는데, 정작 피가 몰리기 마련인 손마디 끝과 발가락 끝은 차디차게 식어만 갔다. 빠른 해답이 듣고 싶었던 건 아니다. 권태환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변명하지도, 오해라고 달래주지도 않고 제가 전부 쏟아낼 때까지 기다려줄 뿐이었다. 무턱대고 좋은 쪽으로 해석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실은 더 길게 말하고 싶었다. 당신에게 직접 들으면 더 좋겠지만, 왜 10년 만에 갑자기 날 찾아와 이렇게 혼란스럽게 만드는지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형이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는 알 것 같다고. 그렇지만 더는 묻어두지 않고, 태환과 함께 하기 위해 타인에게라도 물어보겠노라고. 그렇게 꾹꾹 눌러둔 속마음들은 끝끝내 목구멍을 비집고 나오지 못했다.
괜찮다. 상관없다거나 소용없다거나, 그런 부정적 감정이 들지 않는 건 제법 웃긴 일이었다. 그래도 괜찮은 이유는, 다 알아들어 줄 테니까. 시온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다시 수영장이 보인다. 아무것도 모르고, 이 저택에 두 발을 붙이고 살려면 이 수밖에 없다는 듯 관성적으로 수영하던 소년을 반추했다. 현재 이시온으로서 살고 있는 자신이 아닌, 과거의 자신을 말이다. 열넷부터 시작하여 부상을 당하기 전, 운동만 열심히 하면 될 거라고. 그렇게 하면 변해버린 호감의 이름을 형제애라고 속일 수 있을 거라고 믿던, 어리숙한 열아홉 초반의 권시온이 그곳에 있었다. 늘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것도 그래서였다. 타고난 능력만으로 얻어낸 결과가 아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져본 애정의 이유와 이름도 모른 채로, 열심히만 하면 놓지 않아도 될 거라고 맹신했었다. 그러다가 훅, 그 끈이 썩어버리자 사라져놓고 왜 자신을 찾지 않는지 못내 슬퍼하고 아쉬워했다.
“…형.”
태환은 이 자리에 앉아, 그렇게 미숙하던 권시온을 덧그려냈을 거다. 어떻게 변해버렸다고 한들, 다시 제 곁에 데려오려고 했을 테고. 회상으로만 둘 생각은 조금도 없이. 시온은 더더욱, 더는 달아나지 않을 결심을 굳혔다. 눈물이 동그랗게 몸을 말고 턱 선을 지나쳤다. 하의 허벅지 부분에 점점이 자국을 남기며. 어린 권시온이 몸을 돌려 스물아홉의 이시온과 눈을 맞췄다. 그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형’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은데, 버려지고 싶지도 않아서 어쩔 줄 모르고 방황하는 표정이었다. 단순히 외로워서가 아니다. 유일하게 저에게 정을 준 이였기 때문도 아니다. 어린 존재에게 닿은 서늘한 손길이 깊어져 버린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러니까 왜 그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그게 정말로 저가 가지지 못했던 온기를 착각하고 욕정으로 인지하는 것인지는 전부 덧없는 불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시온.」
최초였다. 낮고 탁한 음성이 저를 이시온이라고 부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흐리멍덩하던 청각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뒷말이 무엇일지 예감할 수 있었다. 이시온은 작게, 고개를 반복하듯 아래위로 끄덕였다.
「…사랑한다.」
알아요. 소리 내 답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어느새 어린 시절의 잔상은 온데간데없어져 버렸다. 권시온, 혹은 이시온. 결국엔 시온이란 이름을 가졌다는 것만은 확실한 청년이 울음을 토해냈다. 비탄과 통탄은 없었다.
벅찼다. 이 와중에도 숨을 쉬지 못하고 가슴이 아릴 정도로 벅차올랐다.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어떤 결말을 맞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했다. 그런들 어떠하겠는가. 시온은 세상에 태어나 첫소리를 내뱉는 아이처럼, 간신히 떨리는 입술을 가다듬었다.
“나도…”
여태껏 말 한마디 없다가 뱉어진 단 네 음절은 많은 걸 축약하고 있으리라.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든, 그건 전부 너를 놓지 않기 위함이었다. 너를… 시온을 사랑하기 때문에 감행한 일이다.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굳이 비밀로 숨겨둔 이유는, 또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리라. ‘착하게 지내면, 누구든 너하고 떨어지고 싶지 않아 할 거란다.’ 이 원장의 가르침이었다. 그는 목자 된 입장으로 진실로, 자신이 돌보는 소년이 바르게 자랐으면 좋겠다는 순수한 선의로 건넨 말이었다. 하지만 어린애 앞에선 찬물도 함부로 마시지 말랬다고, 원장은 제 옆에서 쪼그려 앉은 어린애의 갈망이 얼마나 깊은지 몰랐다. 그렇기에 그 호의는 속박이 되었다. 권태환은 그런 시온을 전부 들여다봐 주었다. 최대한 온전히, 망가트리지 않고 저를 사랑해 주고 싶었던 거구나.
“나도 사랑해요…”
10년 전 겨울. 권 씨 저택을 떠나면서, 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쥐어질 유일에게서 도망쳤다. 버려지기는. 기가 찬 헛소리였다. 시온은 웃었다. 누가 보면 미쳤느냐고 손가락질을 할지도 모르지만… 울면서도 머금은 미소를 다시 뱉어낼 수가 없었다.
“…정말 사랑해요.”
*
통화는 끝났다. 휴대전화를 내리지도 못한 채, 한참을 그대로 멈춰있던 팔이 조금씩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투명한 창틀 창에 인영이 비쳤다. 청년은 그걸 가만히 마주 보았다. 엉망진창이었다. 눈물은 여기저기 번지고, 입매는 웃고. 하하. 눈썹이 쳐졌다. 수건이 어디 있는지는 알았다. 세면대의 위치도. 그러나 지체하고 싶지 않았기에, 상의 소매를 빌렸다. 일전이라면 청결하지 못한 짓이라고 자책했을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잘 세탁된 소매 끝이 젖어 얼룩덜룩하게 변했다. 숨을 들이켰다. 호흡을 정돈했다. 명함을 다시 꺼낼 필요는 없었다. 이미 버리기도 했다. 번호는 먼저 외워두었다. 이번만 기억하면 되기에, 11자리의 숫자를 암기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긴 기계음이 들렸다. 자정이 넘은 시각에 오늘, 아니 어제 처음 만난 인물에게 전화를 거는 일은 굉장히 무례한 짓이었다. 심장이 쿵, 쿵 뛰었다. 그래도 멈추진 않았다. 피차 상대도 그런 예의를 염두에 두진 않았나 보다. 들려오는 목소리에서는, 조금의 잠기운도 느낄 수 없었다.
「…이렇게 빨리 전화를 줄 줄은 몰랐는데.」
비웃음은 아니었다. 굳이 판단하자면, 멋쩍음에 가깝달까. 시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느새 다시 차분해진, 작은 음성이 입술 밖으로 새어 나왔다.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굽었던 다리는 길게 뻗어, 멀지 않은 앞으로 향했다. 창틀이 열리고 찬 공기가 들어왔다. 눈으로 볼 땐 몰랐는데, 얕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렇다고 한들 춥진 않았다. 매서웠던 겨울 공기가 제법 온기를 품고 있었다. 봄이 오기 직전이었다. 모든 것이.
“…제가 모르는 사실, 전부. 말씀해 주세요.”
그렇기에 맞이해야만 했다. 시온은 수영장 계단, 그 바로 앞에 섰다. 아까까지, 과거의 자신이 서 있던… 그 자리에.
*
권시온은 중학생이 되었지만, 여전히 사흘에 한 번씩 일기를 썼다. 책상 아래에 딸린 납작한 서랍장에 숨겨둔, 리넨 커버의 탁한 하늘색 노트가 바로 그 일기장이었다. 깊이가 고작해야 15cm 남짓 되는 공간이 깊으면 얼마나 깊겠는가. 서랍장엔 작고 하찮긴 하지만 나름 구실은 제대로 하는 열쇠가 딸려있었다. 그러니 시온이 원한다면 언제든 잠가도 이상할 게 없었다. 비밀스러운 물건을 숨겨놨으면서도 무슨 연유인지, 소년은 그곳을 잠그지 않았다. 마치 언제든 열어보라는 친절을 베풀기라도 하듯이. 틀린 말은 아닌가. 낮은 헛웃음이 들렸다. 남이 보면 은근히 꼼꼼한 듯 허술한 편인가 싶을 뿐이겠지만… 태환은 턱을 매만지던 손을 내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양 동생의 하교가 늦어졌다. 갑작스럽진 않았다. 이제는 일반적이라고, 일상이라고 일컬어도 상관없을 정도니까. 중 3이 되었으니 학업에 집중할 만도 하건만, 그건 어정쩡한 주전 선수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열여섯의 시온은 뛰어난 기량을 가진 선수로 인정을 받았다. 고등학교 진학 후 선수촌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어. 그렇게 겁 없는 기대를 받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연습량은 점점 늘어만 갔다. 줄어들 기미는 조금도 없이.
덕분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라도 된 기분이군. 제 입에 절대 오를 일 없는 관용어구로 여겼건만. 한쪽 입꼬리가 빙그레, 위로 올라갔다. 나쁘진 않았다. 여러모로 지루하지 않은 데다… 그랬다. 불쾌하긴커녕 오히려 기꺼운 쪽에 가까웠다. 한편으론 그래서 더 손쉽게 이런 짓을 지지를 수 있는 거였고. 공책은 A5 규격의 그렇게 작지 않은 크기였는데, 사내의 두껍고 단단한 손바닥에 쥐어지자 갑자기 한없이 자그마해 보이기만 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자. 권태환은 현재 주인인 권시온이 없는 빈방, 무방비한 서랍을 열고 일기장을 꺼내 들었다. 어떤 말로 포장한다고 한들 정당하지도 않은 행위임엔 틀림이 없었다. 뭐, 어떻고 어쩌라고. 남자는 망설임 없이 뭉쳐져 있는 종이 사이를 갈랐다. 그는 자신이 하는 행동이 비난을 받을 수 있는 비도덕적 행위라는 부분을 전혀 걸려 하지 않았다. 타인의 내밀한 사생활을 보는 건, 누가 당해도 불쾌할 일이 분명함에도. 그게 뭐, 라는 태도는 고수된다. 낯빛에는 단 한 점의 부끄러움도, 망설임도, 죄책감도 없었다. 변명도 해명도 아니었으나 여기엔 정당한 사유가 있다.
권시온, 그러니까 자신의 양 동생이 진실로 이 심상의 조각을 내보이기 싫었다면 며칠 전 제 방 문 앞에서 어슬렁거렸을 일이 없다. 그리고 물속에 잠긴 듯 그 도톰한 입술을 뻐끔대다 멈추지도 않았을 테다. 이 서랍은 항시 열려있지 않았다. 이쯤 되면 눈치를 챘으리라. 그렇다. 말이 일기장이지, 어두에 ‘교환’이란 단어가 붙어도 이상할 게 없는 목적을 지닌 노트였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시온은 항시 제 형이 제 사적인 부분을 살펴보는 걸 묵과하는 편이었다. 아닌가. 반대로 시온으로서는 대놓고 봐달라는 청이나 마찬가지일까. 그래서 웃어버렸던 거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되려 방을 비웠을 때 봐주는 게 배려일지도 몰랐다. 남에게 이해를 구할 필요가 없는, 권태환 혼자만의 자기합리화일지는 몰라도. 권태환에게 있어 타인의 허락이 떨어지느냐 마느냐 따윈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 지적을 당해도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응당 비밀스러워야 할 행위는 지나치게 당당했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끝은 서두르지 않았다. 구겨지게 둘 순 없으니까. 양 동생은 제가 늦게 돌아오는 날 중 특정 일은 아닐지라도 언젠간, 태환이 서랍을 열거라 예상했을 것이다. 끝이 구겨지지 않도록 느리게 다음 장을 넘기는 손길은 들키는 데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아껴주기 위함이 담겨있었다. 어쨌든 제 권시온의 소중한, 마음의 기록이 아니던가. 굽어있던 검지 두 번째 마디가 곧게 펴졌다. 또렷한 정자 체이긴 하나 어딘가 끝이 동글동글한 글씨로 날짜가 적혀있었다. 쓰인 숫자 중에 가장 최근 날짜에 가까운 일자였다.
이거로군. 짙은 눈썹 한쪽이 이마 쪽으로 으쓱, 올라갔다가 금세 제자리를 찾았다. 몸을 모로 돌리고 책상 바로 옆벽에 어깨를 기댔다. 아예 자리를 잡은 것이다. XX년 OO월 XX일. 날씨와 요일은 적혀있지 않았다. 새끼손가락을 건 날로부터 일주일 뒤다. 그전이나 그날 적은 일기는 없었다. 오히려 그걸 제외하면 마지막 기록이 한 달 전이니까, 어떻게 보면 노골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러니 한없이 귀여워 보이지. 지탱하지 않고 있는, 남는 다리를 앞으로 꼬았다.
[형이 아주 늦게 결혼했으면 좋겠다.]
직설적이기 짝이 없었다. 이렇게 대뜸 본론부터 적어놓는다고. 그래도 이전에 봤던 일기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한 줄에서 두 줄 정돈 위장하듯, 간결하게 일상을 정리하려는 노력이라도 했었다. 허. 웃음이 짙게 깔렸다. 바로 아랫줄에 공백을 하나 만든 뒤에야 다음 내용이 적혀있었다. 글씨도 주인의 목소리를 닮았는지, 작고 또 작았다. 사내의 시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무의식중에 눈매가 가늘어지고 미간을 좁혔다.
[그래도 이혼은 내가 30살이 되기 전에 했으면.]
큽. 태환이 호흡을 먹은 것인지, 웃음소리를 뱉은 건지 모를 소리를 냈다. 제 앞에서 다른 이가 이랬다면 꼴사납다는 듯이 신경도 쓰지 않았을 거면서. 역시나 아랑곳하지 않는다. 사내는 상체를 앞으로 수그린 채 잠시간 비음이 섞여 낮춰진 웃음을 흘려대며 어깨를 떨었다. 이런 걸 바랬단 말이지? 앙큼하긴. 얼굴을 들어 올려도 웃음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못 했던 걸 지도. 다른 때보다 더 종종거리며 배회한다 했다. 어떡할까. 금일은 딱히 격식을 차릴만한 일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 그의 왼쪽 손목에는 한결 가벼운 가죽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바쉐론의 시침이 가리키는 숫자는, 벌써 오후 여덟 시에 가까웠다. 슬슬 오겠군. 수행하는 비서에게 간단히라도 저녁을 먹이도록 지시해놓긴 했으나 워낙 움직임이 많은 아이니 입이 심심해할지도 몰랐다. 그럼 나도 바로 부엌에 내려가야겠네. 사용인들에게 가벼운 간식거리를 준비해두라 일러둬야 했다. 하지만 그건 다음 순서다. 이 방에서도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긴 했다. 태환은 책상 위 연필꽂이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펜, 개중에서도 파란색을 하나 꺼내 들었다. 곧 휘갈겼으나, 악필이라기보단 필기체에 가까운 글씨를 몇 자 적어두었다. 뻔뻔한 답장은 짤막했다.
[그래. 이것도 약속.]
용건은 끝났다. 펼쳐져 있던 페이지와 페이지가 겹쳐졌다. 일기장을 책상 밑 서랍, 원래 있던 그 위치에 정확히 놓은 뒤 밀어 넣었다. 문으로 나서는 사내의 걸음걸이는 어딘지 묘하게, 가벼웠다.
*
나라고 이렇게 긴 세월을 예상했겠어? 네가 잠깐 숨 돌릴 시간이 필요한 줄로만 알았는데. 나는 기다려준 거야, 권시온. 네가 다시 연락할 때를. 거짓말은 할 거면 입에 침이나 바르고 하라고 했던가. 비위생적이어서 내키지 않기도 했지만, 그 속뜻에 내포된 의미를 파헤치더라도… 켕기는 구석이 없다. 적당히 속이지 않으면 또 달아날 텐데? 권태환으로서는 시온이 다시 달아나지 않게 하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사냥꾼처럼 덫을 놓으려는 게 아니었다. 숨통을 틔워주는 거라던가, 안심을 시켜 방심을 노리려는 게 아니란 뜻이었다. 최소한만 상처 입힌 채, 제 곁으로 돌아오게 하는 데에 꽤 많은 계산이 필요하긴 했다. 이렇게 제 머리를 굴려 손에 넣기 위해 아등바등하려던 적은 없었다. 이것 또한 오직, 유일하게 권시온을… 이시온을. 아무튼, 그를 향해서만 반응하는 제 욕심의 과정이었다. 하나의 재료로서 호적에 들인 ‘아내’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보기 드물게 놀란 낯짝이었다.
‘…그래봤자 모조품일 거라며?’
10년이 지났는데도 시온과 나누었던 대화나 행동, 닿았던 온기, 그 밖에 굉장히 사소하다 못해 찰나조차도 어제 일처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저런 발언을 내가 했던가? 턱 선에 힘줄이 잠깐 돋았다가 사라졌다. 자신이 할법한 생각인 건 확실했다. 그럼, 했었나 보지. 명쾌한 인정이었다.
‘그렇겠지.’
부부라는 대명사로 묶인 지, 몇 달 뒤면 벌써 5년째로 접어들 시점이었다. 백경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숨을 뱉었다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반, 그보다 약간 덜 채워진 잔이 출렁거렸다. 결혼생활이라고 해봤자, 처음부터 계약과 목적만이 존재하는 사이였다. 그에 대한 불만? 전혀 없었다. 둘 사이엔 질척이는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고, 감정은 거치적거리다 못해 생겨나지도 않았다. 철저한 비즈니스, 그것이 이 버석거리고 차갑기 그지없는 부부 사이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라면… 어딘가 비틀린 것처럼 보일까? 하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새벽에만 이뤄지는 각자의 술자리는 제법 오래 이어지고 있었다. 대화는 없었다. 한쪽은 여전히 어울리지도 않게 작은 액자를 바라보거나 종종 창밖을 내다보았다. 다른 한쪽은 그런 사내에게 시선을 던졌다가 금세 거둬버리고, 딱 한 잔의 온더락을 비운 채 제 침실로 향하면 그걸로 두 사람이 얼굴을 맞이하는 일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버리기 일쑤였다. 지긋지긋한 계약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징그럽네. 경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서로 오가는 말이 없어서 관계가 계속될 수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그랬는데, 무슨 바람인지 권태환이 먼저 말을 걸었다. 살가운 대화의 포문을 여는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정확히 말하자면 명령을 하나 받았다. 나 대신 권시온을 만나고 와. 빠른 시일 내에.
‘직접 가.’
‘권시온에겐 예고편이 필요해.’
‘…요새 JL, 메가폰도 잡니?’
엔터테인먼트 쪽은 영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보면 JL의 회장, 그러니까 서류상 시아버지를 무시하는 발언일 수 있었다. 영화산업에 흥미가 없는 이는 아비인 권재성이 아니라, 그의 아들이자 가족관계 증명서상 제 남편으로 올라와 있는 권태환이었으니까. 사업 전반에 사내의 입김이 들어간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암암리에 다 속삭이고 자신들끼리 떠들어댔으니, 경아 귀에도 들어온 거다. 뭐가 어쨌든. 원래도 의문스럽게, 꼭 의미를 고민해야만 하는 어휘를 사용하는 편이기는 했으나 오늘은 더 유난스러웠다. ‘예고편’이라니. 영상산업에서 어떤 작품을 피로하기 전, 관객의 궁금증을 유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가. …아, 그래서 대체품이 하기에도 알맞은 일이라는 건가. 인정하긴 싫었으나 이런 부분에선 확실히, 자신과 태환은 일정 부분 닮아 있었다.
‘그러니까 가서, 당신을 떠올리게 만들어라?’
긍정도 부정도 없다. 경아가 마시던 잔을 내려놓은 것처럼, 상대도 빈 잔을 놓았다. 그러고는 얌전히 잘 놓여있던 액자를 들었다. 이쪽으로 던져지는 시선은 없다. 사내의 시선은 오롯이 앳된 얼굴에 박혀있었다. 왜 알아들었으면서 굳이 되묻느냐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이미 할 일은 알려줬으니, 바로 움직이라는 거겠지. 경아가 살며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다시금 호박색 액체가 입안으로 흘러들어 간다. 코와 혀끝에 배와 바닐라, 무거운 오크 향이 닿았다.
‘…나에게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있지?’
우리가 왜 이런 퍽퍽한 생활을 견디고 있겠어, 피차 마찬가지잖아. 향긋하면서도 확실한 알코올이 톡, 날카로운 흔적을 남겼다. 그렇게 혀가 자극당한 탓인지, 뒷말이 길었다. 태환은 여전히 액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주제에, 토를 다는 건 봐주질 않는다. 상하관계가 이렇게나 선명했다.
‘빠른 시일 내로.’
아, 다 알아서 해줄 테니 입 다물고 시킨 일이나 하라는 거네. 잠시 입구에서 떨어졌던 입술이 연거푸 그 위를 머금고 있었다. 항의나 덧붙임은 목울대를 통해, 위스키와 함께 삼켜져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어쨌든 갑은 권태환이었기에 그가 하라면 해야 했다. 하하, 더럽네. 입안이 쓰다 못해 타들어 가는 건 단지 술 때문이었을까? 크리스탈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아일랜드 위에 안착했다. 둘의 각기, 또 같이 가지는 술자리는 여기서 파장이었다. 경아는 순응하는 대답을 내놓는 대신, 비슷한 의미로 손을 흔들어 보이며 방으로 향했다. 보지도 않을 테지만.
정답이었다. 권태환은 이제 아예 액자를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론 잔을 들었다. 곁들이는 안주는 아무것도 없었다. 입안에 들어가는, 식품에 한해서는 말이다. 겉보기엔 저렇게 수그리긴 해도, 나름대로 뒤통수를 치려 준비하겠지. 뻔했다. 그래봤자겠지만. 제 침실로 들어가 버린 ‘아내’에 대한 감상은 그걸로 끝이었다. 중요한 건, 이제 연말이었다. 과연 시온이 파란색 글씨로 남겨졌던 답장을 반추할 수 있을진, 모르겠다. 그러나 저는 기억하고 있으며 지키려 하고 있지 않은가? 그거면 충분했다. 다가오는 다음 해, 권시온은 스물아홉이 된다. 딱, 서른이 되기 직전이었다. 또 하나의 약속, 아니. 조건이 이뤄질 수 있는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
이시온은 오래도록, 많이 망설였다. 한참을 수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10분이 지났을 때였나, 20분이 지났을 때였던가. 아무튼, 꽤 시간이 지난 뒤에야 겨우 양말을 벗었던 건 맞다. 그 후로 바짓단을 걷는 데만 또 5분이었나, 10분이었나. 청년은 새삼스러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열아홉이었던 그가 어깨 부상을 핑계로 그 집을 빠져나왔을 때, 그 이후로는 수영장은커녕 그 흔한 여름 계곡물에 발 한 번 담근 적이 없었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방금 전처럼. 제가 몇 분이나 흘려보내고 허비했는지 가늠하기가 힘들었던 것과 비슷했다. 저택에서 홀로 나왔을 땐 의식적으로 피했었던 게 분명한데… 그 이후로는 파도와 같은 생애에 휘말려 자연스레 잊고 말았다. 물은 차가웠으나 얼음장 같진 않았다. 아무리 봄이 살랑살랑 온도를 바꾸고 있다고 한들, 그걸 산정했다고 쳐도 몸 사릴 정도는 아니었단 뜻이다. 아마도 처음 채워뒀을 때, 물 온도를 적절히 높여 틀어뒀겠구나 싶었다.
어릴 때부터, 열아홉까지면 거의 모든 유소년기 전부를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까맣게 잊어버릴 수가 있었을까. 이 감각을, 이 감촉을. 다들 말하듯 가슴이 찌르르했다던가, 감회에 젖어 그리움이 밀려든 건 아니었다. 참 신기하게도. 낯설지가 않았다. 햇수로만 대략 10년이다. 달로 환산하면 144개월. 이렇게 두고 보니 어마어마한 세월이다. 그렇겠지. 오죽하면 강산이 변한다고들 하겠나. 그런데도… 오히려 제가 지레 겁을 먹었다 싶을 정도였다. 아닌가. 무신경했다는 게 더 적절했다. 인정하는 바였다. 시작은 주변에서 그나마, 운동할 때나 돌아봐 주었기에 꾸준히 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입양이 되고 권시온이 되어 태환을 만났을 때, 소년에게 수영은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살아 숨 쉬는 생물 중에 친구라고 부를 존재가 하나 없는 건 여전하나, 어떻게 보면 수영이라는 이 일련의 활동 자체가 자신의 친구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발끝이 닿자 발목까지 들이미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발목이 살랑살랑 움직였다. 물은 점점이 방울져 튀고, 잠잠했던 수면이 흔들거렸다… 미안해. 무생물이 제 사과를 들을 수 있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시온은 수영장을 채운 물을 바라보며 그렇게 독백을 삼켰다. 답변은 들을 수도 없었고, 들을 일도 없었다. 그래도 마저 이어졌다.
다시 한번 헤엄치기에는 때가 일렀다. 보여줘야만 할 사람이, 현재 제 눈앞에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물이 차례를 기다려주길 바랐다. 어차피 그 수면은, 내도록 자신을 기다릴 거란 걸 알면서도. 시온은 해가 뜨기도 전에 홀로 펜트하우스를 빠져나온 뒤 곧장 집으로 향했다. 한적한 도로에서 택시를 잡느라 허비한 시간이 꽤 길긴 했다. 이럴 때 다들 휴대전화로 뭐 어떻게 해서 부르던데. 이시온은 그 흔한 어플도 사용할 줄 몰랐다. 나중에 배워두어야겠다 다짐했건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형이 그렇게 두지 않겠구나 싶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 와중에도 말이다. 작고 낡은, 분명히 얼마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건만 지금은 새삼스럽게도 어딘가 쌀쌀한 공기가 흐르는 듯한 제 보금자리로 돌아온 뒤였다. 청년은 지친 몸을 낡아빠진, 아직도 고치지 못한 침대에 눕힌 채 금세 잠이 들었다.
그날 기상은 유달리 일렀다. 귀가가 새벽 3시 넘어서였었나, 언뜻 봤던 시계의 시침이 그쯤을 가리켰던 건 확실했다. 일어나서 바라본 휴대전화에 액정이 표시한 시각은 06:00. 눈을 한번 깜빡이자 마지막 자리가 1로 변했다. 하얗고 마른, 하지만 단단한 손끝이 화면 위에 떠오른 자판을 눌렀다.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느리다기다고 치부하기엔 뭔가 아쉽다. 오히려 신중한 편에 가까웠다. 차곡차곡 자음과 모음으로 문장을 만들었다. 단 한 통의 문자를 보내기 위함이었다. 메시지가 전송되었습니다. 작고 희미한 알림 창이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감췄다.
[내가 먼저 다시 연락할 때까지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나는 기다려준 거야, 권시온. 네가 다시 연락할 때를.’ 권태환은, 좋게 말하면 그렇게 제 계획을 숨겼고 나쁘게 말하면 거짓말을 했다. 심지어 이렇게 뻔히 드러날 걸 알아서 한 거짓말이었다. 그 때문에 속이 상했나? 어떻게 나에게 사실을 숨길 수 있느냐고 화를 내고 싶었나? 원래대로라면 그래야 앞뒤가 맞았다. 이시온은 평생 선하게 살아오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았던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청년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부정적인 감정, 예를 들면 분노나 원망, 실망 따위는 전혀 비치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반대로 실재하는 건 여전한 이해와 미안함이 전부였다. 그럴 만도 했다.
그는, 형은 저를 너무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 기껏 혼자 벗어나 보겠다고 발버둥을 치면서도 실제로 너무 빨리 다가오면 다시 부정하고, 이유가 없으면 납득하지 못할 터였다. …이렇게나 답답한데, 왜 그렇게 예뻐해 주는지 모르겠다. 싫다는 말은 아니고.
이 와중에도 온통 이런 생각밖에 하지 않는 저 자신이 한심했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겼다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다. 답장은 아직 오지 않았다. 아직 문자는 제가 보낸 것밖에는 없었다. 문득 문장을 읽어보니, 잘못 보면 비꼬는 것처럼 보이겠다 싶은 게 아닌가. 맞받아치려던 건 아니었는데. 도톰한 윗입술이 들썩였다. 빨리 뭔가를 덧붙여 보낼까 고심하던 찰나였다.
[1]
무음으로 돌려둔 탓에, 알람은 없었다. 켜둔 그대로, 실시간으로 회색 말풍선이 생겨났다. 적혀있는 건 글자가 아니라 숫자였다. 1. 일? 시온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 읽어보았다. 아. 그러다 문득 단말마를 뱉었다. ‘카운트’구나. 디데이처럼 목표치를 설정하고 역순으로 세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 횟수나 일자를 세는 걸 말했다. 예를 들면 100m 평영을 한다 치자. 그럼 출발점과 턴 구간이 정해져 있기 마련이다. 선수는 시작 구간에서 뛰어들어, 보통 끝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면 완주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50m 길이의 수영장을 정방향으로 한번, 역방향으로 한번 헤엄치면 100m가 된다는 거다. 그렇게 한번. 태환이 보낸 메시지는 그런 뜻을 품은 1 이었다. 원래부터 아래로 살짝 처져 있던 눈썹이 더, 더 아래로 내려갔다. 주책맞게도, 또 눈가가 뜨겁다. 그런데도 서늘했던 공기가 어느새 따듯해진 기분이었다. 이시온은 몰랐다. 제가 미소 짓고 있단 사실을.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웃어버렸다는걸.
*
[5]
이시온은 다시 메종 단 루의 한편, 작업실에 서서 눈꺼풀을 닫았다 열었다. 5. 5일이 됐구나. 그 뒤로 숫자는 꾸준히, 하루 하나씩 도착했다. 오는 시간대는 들쭉날쭉하였다. 어느 날은 아침이었다가 또 어떤 날은 거의 자정에 가까운 때였다가. 그래도 하루도 빠지진 않았다. 5일이 됐구나 가 아니라, 5일이나 지났구나 일지도 몰랐다. 속눈썹이 가닥가닥 몸을 털어댔다. 일전보다 훨씬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마음이 편하다거나, 개운하진 않았다. 사내는, 형은 어떤 마음으로 아무런 글귀도 없이 숫자를 보내는 일을 매일매일 반복하고 있는 걸까.
그런데도 일전보단 훨씬, 숙면을 취했다. 또 왼쪽 흉근 주변이 아렸다. 가책이었다. 낮과 밤이 다섯 번이나 바뀌고, 권태환이 쉬지 않고 메시지를 보내는 동안 이시온은 뭘 했는가. 쥐고 있던 휴대전화는 다시 선반 위로 돌아갔다. 잠깐 벗어두었던 장갑이 손가락과 손등, 손바닥을 전부 촘촘히 휘어 감쌌다.
어느 정도 휴지시켰던 시트를 꺼낼 차례였다. 며칠 전 주문받은 초콜릿 시트 사이에 잔두야를 바른 케이크를 만들던 참이었다. 메종 단 루의 오너 파티쉐는 여전히 착실하게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따금 예고 없이 문자가 온다거나 이따금 아, 내가 형이 보고 싶구나. 하고 깨닫지 못하면 항시 일에 집중하는 편이었다. 그래도 앞서 서술한 두 순간만은, 최대한 짬을 내어 액정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몸짓은 여전히 성실했을지 몰라도, 심상은 그렇지가 못했다.
예전 같으면 이런 사소한 잡념을 잡아내지 못하는 자신을 외면하고 비난했을 텐데…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청년은 준비했던 재료를 마저 꺼냈다. 헤이즐넛을 최대한 곱게 갈고, 다크초콜릿과 섞어 만드는 잔두야는 사실 요새라면 시중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견과류에서 나온 기름이 액체가 된 초콜릿에 스며들어 훨씬 부드러워졌다. 마치 시온의 도덕적 결벽이 모습을 달리 바꾸고 있는 것과 비슷했다.
그게 쉬운 일이었던가. 아니. 틀렸다. 쉽지 않았다. 그는 5일 내도록 제 마음과 대화를 나눠야만 했다. 질문하는 이도 자신, 답변하는 이도 자신이었다. 이시온은 차혜은이라는 사람을 몰랐다. 존재의 문제가 아닌, 어떤 인물인가에 대한 부분을 말이다. 앞으로 알 일도, 기회도 없을 것이다. 다만 그의 직업이 변호사라는 건 알고 있었기에, 퍽 일을 잘하는 사람이겠구나 하는 감상이 들기는 했다. 혜은은 그만큼 말을 정리해 조리 있게 할 줄 알았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마침 케이크를 만들고 있으니 거기에 빗대어 보자면, 표면에 티 없이 발라진 크림 같은 화법을 구사했다. 고르고 평평하고 말끔한.
사실. 권태환은 정말 조부의 뜻대로 결혼해야만 지금 직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백경아와는 정말로 계약일 뿐인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이 기간은 약 5년이고 올해가 마무리할 때라는 곁다리 정보도 있었다. 아무튼 경아는 백주영을, 그리고 제 가족들을 경멸하기 때문에 태환을 이용하고자 했다. USB를 두고 나온 뒤, 급하게 몸을 숨긴 건 온전히 경아의 독단이었다, 고 했다. 음모.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태환은 당신, 그러니까 이시온이 서른이 되기 전 경아에게 일부러 접근하라 지시했다.
줄곧 공백기인 10년 동안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기도 하였으며 당연히 부상도 누가 한 짓인지 모조리 알고 있음에도 입을 다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억양이 있고, 끊고 맺을 때 거센 음성이 들리긴 했으나 어조 자체는 평온했다. 덤덤하게 사건 진술 혹은 브리핑을 받는 것만 같았다. 최대한 사적인 감정이 배제되어 있었다. 그렇구나. 귀는 더 이상 먹먹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혜은을 당황하게 한 건, 청년의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형이 3년은 기다리라고 했는데. 솔직히 그건 질문이 될 수 없었다. 혼잣말이라면 모를까. 그런데 혜은도 귀가 달렸으니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아, 아. 짧은 신음인지, 뭔지 모를 음성이 스쳤다. 무언가 짐작 가는 바가 있는 듯했으나 선뜻 해답을 건네주진 않고 지나갔다. 시온도 제가 소리를 내 말 했다는 걸 몰랐는지, 그대로 넘어갔다. 통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그 뒤로는 혼자 생각하는 나날이었다. 시트를 반 가르고 페이스트를 발랐다. 전달받은 사실과 음모를 하나하나 정리하고 소화하는데 벌써 5일. 사실 만나지 않은 날이 그만큼이라고 하면 한없이 길어 보이긴 했으나 청년은 저 자신을 잘 알았다. 아직 일자가 다 지나지도 않았건만, 제 마음은 변할 줄을 몰랐다. 태환이, 보고 싶었다. 어쩐지 동작이 더 빨라졌다. 그렇다고 일을 허투루 할 순 없기에, 그는 제 잠시간 호흡을 걸러내었다. 마침내 일을 마치고서야 또 신중하게 한 글자, 한 글자를 눌러 보냈다. 메종 단 루가 쉬는 날이 되려면 3일이 남아있었다.
[7까지만 세어줘요.]
*
“…이걸 야무지다고 해야 하나, 되바라지다 해야 하나.”
그러면서도 입꼬리를 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메시지를 비춘 액정은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7까지만 세 달라고 했으니, 결국 이틀 뒤에 보자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더 둘 중에 어떤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다는 거였다. 확실히 일자를 정하면서도… 당장이 아니라 2일 뒤라면, 이시온의 작은 디저트 매장의 정기 휴일과 맞아떨어졌다. 이 와중에도 일을 쉬진 않겠다는 거지. 태환은 쥐고 있던 휴대전화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런데도 기분은, 썩 유쾌했다. 그러지 않을 수가 있을까? 사내는 상상력이 없다. 필요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는 현실을 사는 존재였고, 뭔가를 공상하는 시간을 할애할 만큼 한가롭지도 못했다. 만에 하나 여유롭다고 한들, 그것에 무슨 생산성이 있겠는가.
누군가는 기업을 경영하는 이라면 당연히 번뜩이는 뭔가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뭣도 모르는 참견을 곁들일지도 모르겠으나 예측과 없는 일을 더듬는 건 매우 다른 분야이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런 태환에게 눈앞에 없는 환상을 상기하게 하는 건, 이시온이 유일했다. 늘 그렇듯이. 단단한 눈꺼풀이 부드럽게 덮였다. 늘 힘줄이 돋아있던 턱 선 또한 느슨히 풀려있었다. ‘7까지만 세어줘요.’ 그래 봤자 단 8글자였다. 눈이 감기자마자 떠오른 건 이미 봤던 작은 화상이었다. 그리고 화면은 더 멀게 넘어간다. 매끈하고 고운 엄지 끝으로 몇 번 화면을 더듬다가, 허상의 자판을 조심스레 두들기는 모양새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바닥에 깔린 조약돌 혹은 파랗게 칠한 바닥이 그대로 들여다보이는 맑은 수면을 닮은 이목구비가, 집중하느라 얕은 주름을 만드는 모습이 선했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아도 여전히 전자기기를 다루는데 서툴러 보였는데, 이번에는 이 몇 글자 적어 보내겠다고 얼마나 고심을 했을까. 그래놓고 한참 뒤에서야 키만 컸지 여전히 양순한 낯에 떠오른 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트린 채 어디서 보자고 하지도 못했는데 어떡하지, 뒤늦게라도 보낼까 말까 망설였겠지. 그마저도 눈에 선했다. 비음이 섞인 웃음이, 결국엔 소리를 타고 나오고야 말았다. 빳빳한 드레스 셔츠로도 가려지지 않는, 잘 나뉘어 탄탄한 등선이 소파에 파묻혔다.
태환이 있는 곳은 성북동이었다. 펜트하우스 말이다. 불은 켜지 않은 채로 두었다. 며칠 전 김 비서가 보고 한 내용에 따르면, 시온이 백경아의 조력자인 차혜은에게 전화했을 시간대에 위치가 바로 이곳이었다고 했다. 관리인의 전언도 있었다. 누가 수영장에 들어갔었는지, 데크에 물기가 잡힌 걸 보고 놀라서 확인차 비서팀에 연락을 넣었던 모양이었다. 그 말을 전하는 김 비서의 표정은 티끌 하나 비치지 않다가, 태환이 헛숨을 닮은 웃음을 짓자 잠깐 흔들리고야 말았다. 그의 상사는 그런 부하직원의 행태에 지적하지도, 신경을 기울이지도 않았지만. 그럴 겨를은 없었다. 아마 몸은 고사하고… 발이나 겨우 담가봤겠군. 그런 예상이 들었을 뿐이었다.
눈꺼풀이 거둬졌다. 짓누르는 무게를 견디는 게 꽤 쉬운 일이 아닐 텐데도, 리클라이너는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뒤로 한 번을 휘청이지 않는다. 덕분에 사내의 시선은 아래 깊은 곳까지 닿았다. 일단은 밑단이 젖는 걸 원치 않았을 테니 천천히 접어 올리고, 양말을 다소곳이 갈무리한 뒤 발끝을 넣었을 거다. 그러곤 한참을 가만히 멈춰있다가, 물 온도를 가늠하고 발목을 몇 번 휘두르다 허공을 바라봤겠지. 차라리 잘 되었는지도 몰랐다. 이시온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권태환에겐 잘된 일이었다. 처음부터 모든 진실을 제 입으로 말해줄 마음은 없었다. 그렇다고 끝까지 숨기려던 것도 아니었다. 백경아, 백주영… 계획에는 없었으나 김정훈까지. 어쨌든 알아서 제가 예측한 대로 움직이는 체스 말들은 그 경로를 벗어나지 않았고,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판을 두고 자신과 마주한 시온은 자연스레 흘러가는 수를 읽어내게 될 것이라고, 그 모든 게 제 의도 대로였다.
여기서도 변수는 있었다. 그래서 제 양 동생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대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청년은, 이 사실에 대해 아마도 순응하기로 마음먹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또 도망을 택했을 것이고 자신은 그에 대해 또 다른 계획을 세워야만 했겠지만. 번거롭다 한들 어쩌겠는가. 아무튼, 결론적으론 그럴 필요는 없어진 듯했다. 착하기도 하지. 다시금 미소가 짙어졌다. 테이블에 홀로 내버려져 있던 휴대전화가 갑자기 번뜩, 화면을 빛냈다. 발신자 표시 제한. 그러면 뭐 하나. 누군지는 빤했다. 남자는 고개를 살짝 모로 비틀었다가 상체를 숙였다.
“왜. 드디어 건네받았나?”
「…역시 다 알고 있었네. 그래서 가만둔 거였어.」
수화기 너머로 거친 마찰음이 들었다. 아까와 달리 전화를 건 상대, 그러니까 백경아가 어떤 몸짓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떠올리는 짓을 자처하진 않았다. ‘서류상 아내’는 멍청하진 않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때늦은 깨달음이 분노를 불러일으켰는지, 음성이 다른 때와 달리 훨씬 거칠었다. 그래 봤자 태환에게는 간지럽지도 않음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시작은 단순한 법적 문제였다. 출발은 당연히 그 CCTV였다. 가죽 키 링에 들어가 있던, 시온의 집에 버려진 유실물. 그리고 그걸 흘리도록 입을 맞춘 것까지는 둘의, 아니 권태환의 명령으로 이뤄진 결과였다. 백경아는 그때만 해도 자신의 법적 남편이 저가 홀로 움직이는 것까지는 계산해둘지언정 누가 이 약을 유통해 주었는지 알아보다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은 모를 것이라 자만했다. 이 정도면 역으로 거래를 제안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제가 어리석었다. 백주영의 브로커가 돼준 이는 초로의 의사였다. 현재는 드레스덴에 거주하고 있으나 본토에 남아있는, 의료 사고를 저질러 면허를 잃을 뻔한 아들을 구슬려 돕게 하고 있다고 했다.
당연히 직업윤리를 완전히 어그러뜨리는 행위였다. 굳이 그런 선택을 한 이유가 뭘까. 답은 간단했다. 그는 약점을 잡혔다. 정확하게는 그가 HW 안주인의 비밀을 알고 있었으나 그걸 이용하고자 하다 역으로 덜미를 잡힌 걸 테다. 원인은 또 하나 존재했다. 나이 든 의사는 교수까지 했다는 점을 상정해도 지나치게 결백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뭐, 결국 권태환 입장에선 경아 자신은 조연이고 그는 엑스트라조차도 못될 테니 자세한 사연은 필요 없었다.
결론은, 그렇게 정부인에게 휘둘리던 교수는 HW의 주치의로 있다가 또다시 자기 자식을 살리고자 자신의 목줄을 그 아들에게 건넸다.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했을까. 당신이 입 한 번 열면 다 정리될걸. 오래도록 품고 있던 비밀의 증거를, 세월이 40년이 흐르고서야 순순히 건네준다는 것도 이상했다. 거기서 이미 눈치를 챘어야 했을 텐데. 다 알고 나니 답은 간단했다. 아무리 그대로, HW보단 JL이 가진 저울이 더 무거울 테니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는 이제는 낡다 못해 바래버린 서류봉투를 건네며 작은 쪽지를 남겼다. ‘그분께는 꼭 약조를 지켜달라고 해주시오.’ 눈치가 없진 않았다. 그분. 그가 지칭하는 인물은,
「…웃겨서 죽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어땠어? 혼외 자식과 사생아의 안력 싸움을 지켜보는 기분은? 재밌었나 궁금하네.」
권태환이었다. 봉투를 채운 종이는 몇 장 되지 않았다. 산모의 몸 상태를 기록한 소견서 몇 장과 칸을 다 채우지 못한 출생신고서, 그 시절 국내엔 하기도 어려워 갖은 수를 써 요청했을 국외 기관의 유전자 감식서까지. 종합하자면… 그랬다. 백주영이, HW의 친자가 아니다. 그러니까 백경아는 제 아비가 낳아온 자식이고 그걸 대단한 부정이라도 되는 듯 비웃던 주영은 사모가 다른 이와 부정을 저질러서 얻은 자식이었던 것이다. 막장드라마가 따로 없네. 그때 자신은 헛웃음이 났던가, 아니면 기가 차 한숨만 쉬었던가. 한 가지는 기억난다. 너무나 늦어버린 성찰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 나는 최종적으로 권태환에게 완벽히 놀아났구나, 하고 말이다.
“글쎄. 그건 네가 알아서 할 문제지 않나?”
더 탈력감이 드는 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저와 백주영의 이 어이없는 촌극에 아무런 감상도 들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사내에게 이용 가치가 있는 건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이 모든 상황은 그저 수단에 지나지 않았을 테다. 입맛이 썼는지 혀 차는 소리가 적나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할 말은 해야 하지 않겠나. 한참 침묵을 지키던 경아가 입을 열었다.
「그래. 넌 처음부터 네 양 동생만 되찾으면 되는 거였겠지.」
하지만 그 힐난은 유효하지 못했다. 타격이 있어야 비난이지, 아예 거리낄 게 없었으니 소용도 없었을 것이 뻔한 탓이었다. 딱히 겨룬 건 아니었으나 완전히 패배했음이 분명해졌다. 게다가 시기적으로 딱 알맞았다.
「…HW를 삼킬 작정도 아니었을 테고. 정보는 기자에게 넘겼으니 터질 때 맞춰서 다음 주쯤 돌아갈 거야.」
“백 상무하고 상의해. 관심 없으니까.”
「어련하시겠어. 법원에서 봐.」
그러네. 재주를 구른 건 백경아, 몰락하는 건 백주영, 판을 깔았으나 그에 관한 결과는 안중에도 없을 권태환. 여기서 제일 이득인 자는 백 상무, 백주아라는 이름의 제 이복자매뿐이었다. 날카로운 음성 속에 숨어든 한숨은 덧없었다. 애초에 HW를 무너트리고자 했지 가지고자 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다. 스피커는 완전히 묵음으로 돌아섰다. 태환의 낯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심드렁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별달라질게 없었다. 그의 신경을 거스르는 건 다른 쪽이었다. …이것까지 알게 할 필요는 없겠지. 전제가 달랐다. 10년간 몸을 숨기던 자신을 되찾기 위해 거짓말 몇 가지를 한 것과 이건, 조금 스케일이 다르니 아직 일렀다. 다수의 기준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제 양 동생에 한해서. 다른 이들은 알게 뭐겠는가. 내 권시온이 단단해지려면 서른은 넘겨야 하려나. 팔꿈치가 팔걸이를 눌렀다. 턱을 괸 이의 시야는 여전히 공상 속에 있다. 아니, 이걸 허상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되돌아온 답장은 없었다. 어느새 밤 8시였다. 메종 단 루, 물속의 집의 셔터가 내려가기 직전이란 말과 동일했다. 이제라도 어디서 만날지, 몇 시면 좋을지 물어볼까 말까 종종거리다 때를 놓쳤겠지. 시온에 대해서는 이토록, 가늠이 쉬웠다. 예상은 더더욱 신빙성을 얻는다. 이틀 뒤, 마침내 제 앞에서 투명한 물살을 가르고 눈꼬리를 접는 이시온은 곧 현실이 될 것이다. 그러니 먼저 형이 일러줘야겠지. 사내의 휴대전화가 웬일로 바빴다.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여러 번 들린 날은 손에 꼽힐 것이다. 그러나 태환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디가 굵고 잘 뻗은, 짙은 피부로 덮인 엄지를 몇 번 놀렸다.
[6을 보내는 날엔 성북동에 있을 거니까, 편할 때 와.]
여전히 친절할 것 없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내 권시온… 아니. 이시온은 알아듣겠지. 사내는 다시금 기기를 내려놓았다.
*
[7]
휴대전화의 화면이 잠깐 반짝이며 스테인리스 선반에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낸 때는 오후 8시 15분이었다. 보지 않아도 어떤 메시지인지, 누가 보냈는지는 뻔했으나 시온은 또 기꺼이 팔을 뻗었다. 평소라면 문을 닫고도 남았을 시간이었건만, 금일은 드물게 늦게까지 작업실에 서 있던 참이었다. 놀라운 점은, 마치 짜고 치기라도 하듯 막 다음 주에 쓸 콩피 준비를 끝내자마자 문자가 날아들었다는 것이었다. 퇴근길에 보냈다기엔 너무 늦되지 않나, 그럼 펜트하우스에 도착해서 보낸 걸까? 속눈썹이 또 깜빡거리며 나부낀다. 그러다 다시금 그 작은 기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허리에 두르는 감색 앞치마를 풀어내렷다.
보통 정기 휴일 전날 저녁은 일찍 쉬어두려 다른 때보다 마감을 서두르는 편이다. 그리고 막상 또 쉬는 날이 되면 밀려있지도 않은 집안일을 굳이 찾아 해결한 뒤 느지막이 1층으로 내려와 또 그다음 영업을 준비했다. 즉, 이번엔 순서가 유달랐단 뜻이기도 했다. 모처럼의 휴일을 맞이했으니 여느 때처럼 바로 2층의 주거공간으로 올라가면 그만이었는데, 청년은 왜 굳이 더 늦게까지 일을 해야만 했는가. 해답은 명쾌하고 단순하다. 이번엔 다음 날, 따로 작업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문을 닫은 건 9시, 그 후로도 10분 가까이 더 흐른 뒤였다. 그의 두 손엔 케이크용 쇼핑백이 하나 들려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것은 디저트가 아니었다. 귀가는 그렇게 또 미뤄졌다. 영업을 마무리하고 발길을 돌린 쪽은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아니었다. 되려 바깥쪽인 도로변을 걷던 그가 멈춰 선 장소는, 바로 최 씨의 이발관 앞이었다. 미리 약속된 방문이었다. 일전에 받았던 반찬들을 담은 통을 돌려주러 들른 것이었다. 메종 단 루 주변은 거의 주택밖에 없었으므로, 가까운 이발소라곤 최 씨가 운영하는 가게뿐이었다. 그래선지 그는 제법 늦게까지 문을 열어두고는 했기에 딱히 실례는 되지 않았다.
“이 사장, 지금 끝난 거야? 그러다 몸 축나.”
“내일 쉬는 날이라 괜찮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최 사장은 방금 막 마지막 손님을 떠나보낸 참이었다. 오래도록 입었을 게 분명한데도 제법 빳빳하고 깨끗한 이발복의 소매가 살짝 젖어 있었다. 두 손을 몇 차례 탈탈 털다 멈춘 중년의 표정은 제법 탐탁지 못했다. 괜찮긴, 뭘. 혀 차는 소리는 덤이었다. 청년은 빈 그릇이 담긴 종이가방은 이발소 중앙에 있는 낡은 테이블에 놓았다. 그리고 익숙하다는 듯, 밖에 놓여있던 건조대를 안으로 들였다.
“어허, 내버려 둬. 어서 가서 쉬라니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최 씨가 난감해했다. 언뜻 보면 화라도 내는 듯 보였겠지만, 그가 미간을 좁히고 입가의 주름을 깊게 패일 땐 오히려 곤란한 기색을 비치는 거란 걸 아는 시온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꿋꿋이 빳빳한 수건을 반듯하게 접어두었다. 진짜, 저 쇠고집. 만약 이 자리에 그 아내가 있었다면 누가 누구를 나무라는지 모를 일이라고 편을 들어줬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지금 젊은 사장을 지지하는 이는 없었다. 최 씨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 어휴. 약간의 한숨만이 남았다. 말 없는 남성 두 명인 덕에 주변은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중년의, 나이 든 쪽이 종종 헛숨을 날리긴 했으나 그게 다였다. 오히려 쉴 새 없이 종알거리는 건, 습관처럼 틀어놓는 TV 방송의 몫이었다.
「…찰은 HW 백주영 상무이사를 필두로 관련 인물들에게 모두 압수수색을…」
모서리와 모서리를 잡고 있던 흰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다행히 가게의 주인은 바닥을 쓸며 혼잣말하듯 불평을 늘어놓느라 그런 낌새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튼, 이 늦은 시간까지 일하고 말이야. 한 박자를 쉬고 젊다고 몸을 막 써. 하고는 또 빗자루 질에 열심이었다. …이러려고 들른 건 아니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청년의 말간 얼굴에 그림자가 잔뜩 끼고 말았다. 낡은 백열등을 등진 탓이었다. 가벼운 호흡이 잠깐, 티도 안 나게 새어 나오다 멈췄다. 재차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찌나 각을 맞춰서 접던지, 쌓여가는 몇 장의 타월을 보던 최 씨가 대충 접으라며 성화였다. 그러면서도 귀 끝은 계속 세워져 있는 것도 모르고. 뉴스 또한 멈추는 일 없이 제 할 일을 진행 중이었다.
「물의를 빚은 데에 대해 공식 사과문을 게시했고, 그에 따라 계열사인 HW 리조트의 백주아 사장이 그 자리를 대신할 예정이며…」
또 한 번 낯선 이름이 들렸다. 다만 백씨 성을 가졌고 이름 중 한 자는 백주영과, 또 한자는 백경아와 비슷하니 그들의 핏줄이겠거니 싶었다. 그렇구나. 큰 관심이 기울여지지는 않았다. 성인 남성의 상체를 감쌀 만큼 큰 타월이 3장, 머리카락을 말리는 용도임이 틀림없는 범용적인 크기의 수건이 6장이었다. 그걸 다 정리한 걸로 모자랐는지, 시온은 제 매장처럼 능숙하게 창잔을 찾았다. 이쯤 되니 최 씨도 혀를 내둘렀을 정도가 아닐 수 없었고 말이다.
「한편 이 사건에 연루된 임원을 해직한 JL은, 앞으로 이와 같은 사고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임원 평가 제도를 개편하기로 했으며 이는 곧 경영권에 변화를 예고하는 게 아니냐는 일부 전문가들의 의견이…」
그러자 아나운서의 말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제 일에만 집중하던 최 씨가 고개를 돌렸다. 잠시간 말이 끝맺어질 때까지 화면을 바라보던 이가 잠시 입맛을 다시다가 슬쩍 눈치를 본다. 막 서랍장에 달린 조그마한 손잡이에서 떨어지던 손바닥이 멈칫, 그 시선을 감지해 냈다. 최 씨도 염치가 있었는지, 하고 싶은 말을 한차례 삼켜냈다. 그러나 이시온은 과묵하다고 한들, 아예 눈치가 없는 샌님도 아니었다. 말간 이목구비가 구김 없이 중년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럴 때 보면 은근히… 능구렁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너무 담백해서 할 말을 잃게 한다고 해야 할까. 괜히 팔을 들어 뒤통수를 벅벅 긁어보던 최 사장이 다물었던 입을 다시 열었다.
“그, 이 사장네 형이 높은 자리에 오르나 보지?”
말끔하게 생긴 여성이 했던 귀띔을 잊은 건 아니었다. 예전 일이라고 했다. 입양된 적은 있으나, 이제는 아니라는 게 무슨 뜻이겠는가. 파양되었다는 거 아니겠나. 그럼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가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격일 지도 몰랐다. 자신이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고 한들, 최 씨의 정신과 기억력은 멀쩡한 편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형수뻘 된다는 백경아와 시온의 사이를 지레짐작하여 한통속으로 몰아갔던 장본인이 아닌가. 아무리 늙으면 튼튼해지는 게 철면피밖에 없다고 할지라도 그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았다.
아니, 없는 채 살고 싶지가 않았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끝끝내 입을 열고 마는 건, 저 젊은이의 곱상한 낯이 제 마음을 알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 든 이발사는 바보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때 피하며 말을 삼켜버리면 어렵게 여기게 한 저를 탓할 것이다. 참, 세상을 쉽게 살 줄을 모른다. 그런 점을 기특하게 여기면서도 말이다.
“저도 아직은 잘 모릅니다.”
말쑥한 문장이었다. 방금까지 본 화면 속, 전문가 나부랭이나 아나운서 같은 이들처럼 정확하고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어조는 일렁임 하나 없이 일정했다. 여기까지는 다를 바 없었다. 아마도 경영권이 어찌 되는지까지는 모르는 모양이지, 하던 찰나였다. 곧이어 최 씨는 다른 연유로, 오래간만에 눈에 띄게 놀라고 말았다. 제가 봐온 이웃의 젊은이는 항시 같은 얼굴을 하고 다녔다. 표정에 큰 변화가 없고, 드문드문 곤란하거나 뭔가를 참아내는 듯한 낯빛만 비추곤 했다.
“…곧 물어보려고요.”
그런데 현재 그의 눈앞에서, 매번 덤덤한 채 서 있던 청년이 웃고 있었다. 눈 밑의 애교 살이 위로 살짝 올라가 붙고 큰 눈이 잘도 휘어 늘어졌다. 언뜻 보기에 항시 창백하리만치 하얗던 뺨에 홍조가 돈 것도 같다. 허. 이럴 때 알맞은 표현이 있다. 실제로는 그럴 리는 없으나. 최 사장은 턱이 빠지는 줄 알았다. 사이가 각별했다더니 정말이었나 보다. 반면 시온은 그런 최 씨의 생각마저 읽지는 못했다. 물음에 답하는 일이 생각보단 어렵지 않았다. …어떤 측면에선 후련한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정말 태환이 회장이 될 예정인지 묻는 걸 테지만, 청년은 사실 엉뚱한 부분의 동문서답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형인지, 아닌지. 아니면 둘 다 아닌 다른 뭔가가 될지 아직은 모르니까. 그에 대한 답변이었다. 어떻게 보면 자문자답일지도. 어쨌든 미소가 얼굴에 만연한 건 잠시뿐이었다. 천천히, 느린 듯 순식간에 다시 원래의 낯으로 돌아온 청년이 발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입구 쪽으로 걸어나갔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어서 가.”
여전히 깍듯한 인사가 이어졌다. 시온은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낡은 시트지가 붙여진 유리문 뒤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얼떨결에 보내버렸네. 최 씨의 깨달음은 뒤늦은 것이었다. 허, 참. 중년의 남성은 그렇게 감상에 젖어 등을 돌려버린 바람에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젊은 사장의 거처, 즉 그의 디저트 가게가 있는 건 이발소의 오른 편이다. 하지만 기다란 다리가 뻗은 방향은 왼쪽이었다.
가장 근접한 택시 정류장이 있는 방향과 같은 쪽이었다. 외투에 얌전히 잠들어 있던 전자 기기가 다시금 반짝, 빛을 냈다. 주인이 시킨 짓이니 얌전히 하는 수밖엔 없지 않은가. 재개발이 약속된 지역의 가로등이라서인지, 아니면 우연일 뿐인지는 몰라도 제법 큰길인데도 어두운 길목에 환하고 작은 빛이 강렬히 빛났다. 단출한 배경화면 사이로 큼지막한 글씨가 나타내는 시각은 밤 10시 5분이다. 여기서 택시를 타고 움직이면 한 3,40분 정도 걸릴까. 헤엄을 쳐서 가는 거라면 가늠하기가 쉬웠을 텐데, 운전해야만 하는 지상 거리에는 통 둔감한 시온이었다.
자정 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바람이고 예상이지만. 갑자기 발걸음이 조급해졌다. 그래 봤자 성정이 어디 가겠나. 보폭이 넓어졌을 뿐 뛰지는 못했다. 최 씨의 가게에 들렀을 때와 달리 미리 언질은 주지 못했다. 원래대로라면 당연히, 상대가 놀라지 않도록 곧 간다든가 출발하겠다 따위의 연락을 보내고도 남았을 텐데 도무지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아니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빨리 보고 싶었다. 카운트가 8이 되기 전에, 이시온은 그렇게 처음으로 부정 출발을 했다.
*
“…그럼 말씀하신 대로 준비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대꾸는 없었고, 김 비서도 그걸 바라고 말한 바는 아니었기에 조용히 물러나길 택했다. 현명한 선택이었고 나름의 경험치였다. 상사의 지시는 명료하고 명확했다. 실생활에 필요한 짐 대부분을 이쪽으로 옮길 것. 가구는 내버려 두고 동거인… 그러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젊은 사모님이라고 칭하던 백경아의 몫은 지시한 주소로 보내두라는 것이었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모르긴 몰라도, 이곳은 이시온에게 자율 출입이 허락된 장소다. 그리고 저가 모시는 이는 이곳에 제 물건을 옮겨두라고 했다. 더불어 동거인의 흔적은 돌려보낸 다라. …아파트는 이대로 몇 년간 유령 거주지가 되겠네. 이혼한 권 부사장이 ‘혼자 살고 있다’는 형태로.
이 모든 것은 속으로만 유추했다. 김 비서는 제가 들어가고 빠져야 할 타이밍을 모르지 않았다. 이제 입을 다물고 물러날 때였다. 태환은 비서가 제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든 말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지는 동안 아무런 움직임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이미 필요한 건 다 안에 갖춰져 있을 테니 두 손은 당연히 가벼웠다. 자유로운 두 팔 중 하나를 뻗어 비밀번호를 눌렀다. 10281131. 여덟 자리 숫자를 누르는 손끝은 답지 않게 느릿했다. 신중함과는 약간 결이 다르다고나 할까. 고작 전자 키패드 몇 번 두드리는 게 뭐 큰일이라고. 그러나 확실히 사내의 움직임은 나긋했다. 마치 뭔가를 음미하기라도 하는 듯이.
육중한 문이 열리자마자 권태환은 늘 그랬듯 거침없이, 그렇다고 아주 재빠르진 않은 걸음걸이를 유지한 채 내부를 가로질렀다. 그러다 문득 잠깐 움직임을 멈췄다. 수영장이 잘 보이는, 라운지 중앙에 서서 시선을 옮겼다. 발을 멈춘 건 잠시뿐이었다. 사내의 두텁고 탄탄한 허벅지가 잠깐 움찔거린 듯도 하나,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씻어야겠어. 웬일로 일을 늦게 끝마친 날이었다. 자의도 타의도 아닌, 애매한 사유가 있었다. 태환은 시온을 잘 알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니 이는 제 의지라고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휴일로 날을 정해 보자고 말했다면, 제 양 동생은 쉬는 날에도 몸을 가만둘 성정이 아니었기에 원래대로라면 내일 할 일을 밤에 다 끝마치겠다고 분주할 게 뻔했다. 그러니 저도 맞춰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다 보니 회사에서 나서려던 시간은 오후 8시경이었다. 그때쯤 문자를 보냈다. 7. 그 뒤로는 예기치 않게 부친이 전화를 걸어와서 뜻하지 않은 입씨름을 해야 했다. 자신의 입장에서야 입씨름이지, 아마 아비 입장에선 괜히 전화 한 번 걸었다가 날벼락 맞은 꼴이었겠지만.
펜트하우스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훌쩍 넘어버렸다. 두 시간이 조금 넘은 참이었으나 여전히 답신은 따로 없었다. 이미 귀띔을 한 바가 있었긴 했다. 그 숫자를 보내는 날은 미리 펜트하우스에 있겠다고 말이다. 그렇다고 한들, 태환은 시온이 금일은 오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할 일을 다 마치고, 약속한 때에 움직이는 게 보통 이시온의 루틴이었다. 정확히는, 권시온일 때부터의 습성이라고나 할까. 이따금 제 완벽한 예상을 뒤집어엎는 건, 이시온이 유일하다는 걸 알면서도 방심한 데에는 다 사정이 있는 법이었다. 태환이 욕실에 들어서려던 참이었다. 나름대로 예외적인 상황을 대비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수건과 가운이 들어간 서랍장 위에 휴대전화를 놓고 들어갈 마음을 먹은 탓이었다. 한결 가벼운 차림으로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그때, 휴대 전화가 일순 밝은 빛을 내며 깜빡거렸다. 저장해둔 이름은 단순했다. ‘공은혁’. 직급도 관계도 없이, 단순한 이름 석 자였다. 굳이 이렇게 기록을 남겨두지 않아도 번호 정돈 알고 있었으니 내키면 받겠지만… 은혁의 이름을 부러 저장해둔 특별한 사유가 있기는 했다. 태환은 잠시 미간을 찡그렸지만, 결국엔 손을 뻗어 통화를 수락했다.
「…낮에도 메시지 보냈었는데. 전화해달라고.」
“그래서.”
말 그대로였다. 맞다. 이것이 사내가 온전한 제 개인 시간을 방해받았음에도 드물게 굳이, 전화를 받아 준 이유였다. 잊어버린 게 아니었다. 급한 쪽은 은혁이니, 당연히 다시 연락하겠지 싶었다. 그렇다고 쳐도 재연락이 꽤 늦은 걸 보니 저도 현재 일어난 일을 수습하느라 바빴던 모양이다. 그래,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어. 공은혁은 권태환을 모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서로 사적인 부분까지 파고드는 걸 원하지 않았기에 대략적인 성격이나 태도에 대해서는 대해본 만큼 알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용건이나 이야기하란 뜻이 담긴 한 마디에 말꼬리를 잡고 늘어질 마음은 없었다. 그래 봤자 제 신경 줄만 갉아먹는 꼴일 테니까. 차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사고는 내 동생이 쳤는데, 손해는 내가 봤네.」
연일 HW 이사의 몰락을 떠들어대는 데 혈안이 돼서일까. JL은 문제가 있는 임원을 자진 고발한 뒤 해임까지 했으니 오히려 기대하지도 않던 결백한 이미지가 따라붙었다는 것 외에는 오르내릴 게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백주영과 같이 친밀하게 지내며 사건에 연루된 주요 인물은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은혁의 집안인 SH 회장의 셋째 손자이자 현 전무인 공찬혁이었다. 이 시점에서 이 일련의 사고는 다른 국면을 맞는다. 태환에게 이득이 되는 쪽으로. 대신 백경아는 하나를 포기해야 했지만… 신경을 쓸 바가 아니었다. 적어도 사내에게만큼은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그는 약속한 바를 이루게 해주었으니 경아로서도 그 정도 양보는 해야 했다. 그래서 주영의 출생의 비밀을 언론에 알리려던 시도는 중단되고 말았다. 태환은 공 씨 저택 내부에 일어나는, 가족사까지는 관심이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기에 간추려서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덕분에 회장님만 손 안 대고 코를 푸셨지. 안 그래도 찬혁이를 탐탁지 않아 하셨으니까. 제 분수도 모르고 계속 자리보존 하려고 해서 골치셨던 가본 데… 이걸 잘 됐다고 해야 하는진 나도 모르겠다.」
소문을 어디서 들었는지, 원래 공찬혁의 유일한 장점은 언론을 잘 이용하고 유명인들과 친분을 놓지 않는다는 점에 있었기에 그 힘을 빌렸던 것 같았다. 그래서 백주영에 대한 ‘추문’을 미리 주워듣고 드물게 제 둘째 형에게 매달린 것이다. 형은, 형은 권태환 부사장하고 잘 알잖아. 말 좀 해줘. 주영이 형, 그거 알려지면 정말 안 돼. 도무지 어디서 비롯한 유대감인지는 몰라도, 은혁은 뒤늦은 책임감을 느끼는 바가 있었는지 제 바로 손아래 동생의 부탁을 들어주고야 말았다. 그 김에 제 조부인 회장은 어렵지 않게 눈에 거슬리는 손자를 하나 치워둘 수 있었다.
그 대신 은혁도 살 한 덩이를 내줘야 했다. 제가 운영하는 호텔의 지분 중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몫에서 10% 가까이 떼어주는 것으로 말이다. 대상은 당연히, 태환이었다. 그는 제 동창이 원하는 바를 알았다. 적은 지분이 아니었으니 라운지에 대한 부분은 계속 태환의 뜻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을 테다. 그걸로 눈감아 줬으니 너그럽다고 해줘야 할까? 답은 그렇지 않다로 정해져 있었다. 단지 제 양 동생과 함께할 자리 하나를 확보하기 위해 이런 결단을 내리다니… 알고는 있었지만 비범하게 미친놈이려니 싶었다. 굳이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다만.
「그래서, 너나 나나 형 노릇 톡톡히 한 건가? 나는 슬픈데 너는 기쁘겠네. 지분 건은 이미 서류 넘겼으니 확인해. 어차피 네가 하소연을 받아줄 성격도 아니고. 나는 혼자 술이나 마셔야겠다.」
“마음대로.”
그래, 기대도 하지 않았어. 그런 투덜거림이 끝마쳐지기도 전에, 사내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시답잖긴. 괜한 시간 낭비만 한 기분이었다. 샤워를 한 뒤, 조용히 수영장을 바라보며 시온을 기다릴 여유를 방해받았달까. 가늘게 변한 눈매가 아래를 슥, 한번 흘겨봤다. 어영부영 30분이나 지나있었다. 더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휴대전화는 다시 서랍장 위에 놓였다. 반쯤 돌려진 채 멈춰 있던 문고리가 달칵, 소리를 내었다. 욕실 문이 열렸다.
*
수증기가 찬 공기와 만나 희뿌연 흔적을 만들었다. 수건에 감싸진 이목구비에 그늘이 졌다. 체력적으로 힘이 달려본 적이 없으나 오랜만에 무슨 심경이 들었는지, 평소보다 더 따듯한 온수를 온몸으로 맞다 보니 날이 서 있던 근육들이 한결 나긋해져 있었다. 얇은 가운이 점점이 물들었다. 머리카락 먼저 말리고 자리에 앉아야겠다 싶었다. 그때, 태환의 귓가에 어떤 낯선 소음이 들렸다. 자신은 분명 홀로 이곳에 들어왔다. 사용인은 그가 있는 시간대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방문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곳에는 자신 혼자만 있어야만 했는데 지금 들리는 저 소리는 인기척이 확실했다.
철저하게 관리되는 고층의 펜트하우스에 들어설 수 있는 침입자는 간 큰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이게 무슨 첩보 화도 아니고. 그다지 불안이나 걱정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남자의 발걸음이 홀린 듯이 소음이 들린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차라리 그 원인으로 유추되는 곳이 방이나 아일랜드였다면 또 모르겠다. 하지만 권태환은 청력마저 날이 서 있었다. 알 수가 있었다는 뜻이다. 현재 들려오는 인기척은, 바로… 이시온의 것이었다.
“…허.”
라운지에 자리한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접혀있는 건, 간절기용으로 보이는 얄팍한 니트와 그 안에 받쳐 입고 있었던 듯한 하늘색 셔츠 그리고 그에 맞춘 듯이 흐리고 밝은 색상으로 염색한 골덴 팬츠였다. 누구의 옷차림인지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지 않은가. 게다가 그 옆에는 방수 재질일 게 분명한, 조리개 방식으로 여닫는 보조가방이 하나 딸려있었다. 아마도 처음엔 새 수영복이 담겨 있었을 게 분명한. 헛숨은 금세 헛웃음으로 모습을 바꿨다. 언제 또 이런 걸 사뒀단 말인가. 바스락거리는 가방을 매만져보던 검지와 엄지가 멈췄다. 다시 허리를 세운 그가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제 앞머리카락에 달린 물방울보다 훨씬 더 미세한, 잘게 쪼개진 물의 흔적이 한 번에 튀어 오르다 멈췄다.
남자가 유리창 앞에 섰다. 한참을 물장구치던 흰 발이 갑자기 얌전해졌다. 저를 발견한 덕분일 테다. 그러더니 다시금 물이 튀고, 청년은 곧게 한쪽을 향해 가로질렀다. 그리곤 전면 창과 마주 볼 수 있는 부분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곤 슬그머니 저를 바라봤다. 판판한 슬리퍼가 대리석 바닥 위에 깔린 푹신한 카펫을 몇 번 두들긴다. 태환 또한 그에 응수하듯, 리클라이너보다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면서 눈썹을 한쪽 올렸더니 슬쩍, 눈동자를 굴린다. 우스웠다. 웃겼다는 건 아니고 어이도 없고 하는 꼴이 적잖이 귀여웠던 탓이다. 사내의 굵은 검지가 얇은 막을 툭, 툭 쳤다. 그렇게 거세 지도 미약하지도 않았다. 부딪히는 음색이 건너에도 확실히 들릴 정도는 되었다는 말이다. 그것마저 못 들은 척할 수는 없었던 건지, 살짝 수그러져 숨어있던 정수리가 다시금 슬그머니 위로 올라왔다.
아까전만 해도 눈을 맞추지 못하더니, 금세 기색을 바꿨다. 태환이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기대자 따라붙듯 고개를 움직였다. 그리곤 몇 번이고 눈꺼풀을 들었다 놨다. 언제 들어왔는지는 모르나 속눈썹은 진작 물이 잔뜩 엉겨있는 채였다. 턱 선에 힘줄이 돋았다 사라졌다. 내내 일자로 닫혀 있던 입꼬리가 위로 솟는다. 굳게 닫혀있던 샤시가 열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늘 앉아서 바라만 보던 수영장을, 유리창 사이가 아니라 직접 보는 건 자주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일이 가능했던 건, 저 풀을 가로지르다 끄트머리에 턱을 괴고 저를 쳐다보고 있는 인영 덕분이었다. 애초에 그 정도의 존재가 아니면 아예 불가능하다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지만. 단단하게 이어 붙은 데크는 수영장에 다가갈수록 물기가 서려 있었다. 늘 바싹 말라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르게. 저가 가까워지자, 젖어버린 귀가 점점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앞에 서서 허리를 수그리고 두 사람의 눈이 맞아떨어졌다.
“…저,”
도톰하고 촉촉한 입술이 몇 번 벙긋거렸다. 사내는 재촉하지 않았다. 단지 웃음을 지워내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나고 나서야, 조근조근 하고 느린 어투가 변명 아닌 변명을 하나 내어놓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형이… 저녁부터 있을 거라고, 그랬잖아요. 들어와서, 부르려고 했는데 곧 나오겠지 싶… 아, 흡…”
남자는 기꺼이 쭈그려 앉았다. 그가 평생 취할 일 없는 자세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제 양 동생의, 내 권시온의, 자신만의 이시온이자 유일의 첫 부정 출발을 축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물에 젖은 턱 끝을 들어 올려주었다. 입술이 닿았다. 이시온은 눈을 감는 걸 깜빡했다가, 태환의 머리카락에 맺힌 물방울이 제 동공을 급습하고서야 눈꺼풀을 덮었다. 귓가는 먹먹하지 않았다. 제 심장 소리가 선명해질 뿐이었다.
*
시온은 제 팔과 몸이 얼마만큼 젖어있는지 가늠하질 못했다. 닿아오는 입가가 너무도 달갑기에, 그저 탄탄한 두 팔로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켜 완전히 물에서 빠져나왔다. 팔에 힘을 주자 크고 단단한 손바닥이 제 다친 어깨를 감싸 쥐었다. 괜찮아요. 하지만 떨어지지 않았기에, 위로에 가까운 한마디는 결국 소리가 되지 못한 채 먹혀들어갔다. 그가 제 몸이 얼마나 젖었는지 가늠하지 못한 건, 굉장히 오래도록 물에 잠겨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차마 제 쪽으로 치우친 가운 앞섶을 잡지도 못해 하얀 손등 위로 뼈를 툭, 내보인 채 힘을 주고만 있었다.
한편으론 앙큼한 구석도 있었다. 그렇게 부여잡는 것조차 망설이는 태도와는 반대로 입술은 단 한 번을 떨어트리지 않았다. 입맞춤은 고사하고 타인과 입술 한 번 맞대보지 못했던 미숙한 혀는 저를 몰아붙이는 다른 살덩이를 고스란히 받아내려 애를 쓰고 있었다.
흉강이 전부 뜨거웠다. 당연히 실제로 온도가 느껴졌다는 건 아니다. 혈액이 끓을 리는 없으니까, 이건 단지 감정이 만들어낸 환상 통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불쾌하진 않았다. 되려 좋았으면 모를까. 호흡이 부족하자 오래도록 숨을 참는 법을 배운 갈비뼈가 알아서 길을 열었다. 코로 숨 쉬는 걸 잊은 주인을 위해서. 그렇게 12쌍의 뼈가 벌어지며 내도록 남은 공기를 담아 순환시켰다. 되려 곤욕을 치르는 건, 살갗이었다. 뜨거운 물이라도 부은 듯 얼룩덜룩했다. 권태환이 보기에야 알록달록 어여쁠지는 몰라도, 그야말로 하얀 피부가 붉게 물들어 각기 다른 농도를 띄고 있었다.
옮겨간 건 열뿐만이 아니었다. 방금까지도 언급했듯, 사내의 짙은 감색 가운은 완연한 검은빛을 띠고 있다. 촘촘한 실크가 물을 머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살에 달라붙었다. 넉넉하진 않았어도 제법 여유가 있던 형태는 점점 사라지고 없었다. 시온의 정신을 못 차리던, 촘촘한 속눈썹에 엉겨 붙은 물방울 때문에 시야가 흐른 것인지 제 정수리에 열이 나서 그 증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흐리던 시야가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사실 치열을 훑는 붉은 혀뿌리와 자신을 매만져오는 미적지근하지만 차디차지는 못한 체온에 의해 눈꺼풀을 깜빡이느라 맑아진 것뿐이긴 했지만, 거기까지 알지는 못해도 좋았다.
이시온의 시야는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완벽히 자유로울 틈이 없었다. 제 팔과 몸을 적셔 마르지 못했던 물기는 이미 다 자리를 옮기고 난 뒤였다. 태환의 가운, 상체 부분으로. 어떡해요, 다 젖었어요. 같은 어리숙한 걱정은 내뱉지도 못했다. 잠깐 떨어져서 살짝 찬 공기를 들이마실 새 따위도 없었다. 흡. 길고 흰 목덜미가 숨을 집어삼켰다.
사내는 아예 데크에 하체를 늘어트리고 허리는 뒤로 많이 기운 채였다. 어떻게 보면 무너졌다고 표현해도 손색이 없었는데, 몸짓은 여전히 여유롭게만 보였다. 저렇게나 선정적인데. 조금 부어버린 아랫입술이 안으로 말려들어 갔다. 가운은 엄연히 의복의 한 종류이긴 했으나 외출하기엔 적절치 못했다. 게다가 그 아래는 온전히 나체만이 존재했다. 그러니 수축한 옷감이 달라붙으면 그 선이 전부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는데. 청년은 잠시 의미 없는 자책을 이어갔다. 자신은 아직도 이다지도 미숙하다면서. 보기와는 다르게,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저 흉근은 손아귀에 지면 적당히 부드럽고 탄력 있다. 짙은 피부색이 제 흰 손가락을 빠듯하게 삐져나오기까지 하면, 코끝이 시큰했다. 너무 흥분한 탓에 피가 그곳으로 몰리기 때문이었다.
입가가 살짝 벌어지고 눈은 쉼 없이 깜빡거린다. 그러면서도 맞닿은 상체에 힘이 들어간다. 고의는 아닐 테다. 본능이라면 모를까. 그래서 남자는, 권태환은 군말 않고 제 등을 데크에 뉘었다. 그러자 기특하게도, 시온이 왼팔을 뻗어 뒷머리를 감싸주었다.
“…다 컸네, 여러모로.”
그러자 사내가 소리 내 웃었다. 청년은 별다른 행위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어찌할 줄 모른 채 저도 모르게 좁혀졌던 미간이 느슨해졌다. 그러다 이내 다 커버린 지 언젠데 저런 소리를 하나 싶었는지 쳐진 눈썹이 한데 모였다. 불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마와 이마가 맞닿았다. 맨살이 드러난 척추가 아치처럼 동그랗게 말렸다. 이제 완전히 뜨여진 눈동자는 부끄러워하면서도, 피하지 않겠다는 고집이 보였다. 그래서 태환도 어울려주기도 했다. 다시 또 몸짓이 달싹거린다. 시동이라도 거는 것처럼. 수면을 파고들 땐 이러지 않았으면서.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고 뛰어들었을까. 사내는 잠시 궁금했으나 부러 묻지 않았다. 어쨌든. 그렇게 몇 번이고 달음박질을 망설이던 입술도 영향을 받은 탓인지, 평소의 선홍색보다 더 짙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그 입매를 주시하고 있었더니, 이내 음성이 차분하려 안간힘을 쓰듯 천천히 기어 나왔다.
“…3년 기다리라고 한 건, 승계 때문이었어요? 이혼이 아니라?”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매번 답을 빙빙 돌려 말해주던 이는 어디 갔는지. 바로 맞받아치듯 답이 나와버렸다. 시온이 그에 당황한 듯 콧대를 찡그렸다. 그러자 상대의 검지가 그 위를 문지른다. …못생겼었나. 그 와중에도 짧은 걱정이 뇌리를 스쳤다. 평소의 곱상한 얼굴로 돌아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러니 웃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렇게 다시금 웃은 태환이 느릿하게 일렀다.
“그래야, 네게 날파리가 붙지 않을 테니까. 기껏 하나 치웠는데 또 붙게 둘 순 없지.”
엄지 밑 살덩이가 기어이, 오래된 상처를 살살 쓸어내렸다. 자세한 뒷이야기를 길게 설명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귀찮다거나 여전히 숨겨야 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아까울 뿐이었다. 태환의 아버지, 권재성은 애초에 기간이 정해진 권좌에 앉은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뭔가 이상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외동아들이라고 한들, 권력에 젖어 그것을 한껏 휘두르고 산 이가 혈육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 아들을 쉬이 용서해 줄 리가 없지 않은가. 너는 자질이 없으나, 너무 이른 나이에 정점에 올라도 힘든 법이지. 태환이 너는 식 올리고 하던 대로만 해라. 재성이 너는… 네 아들놈이 물려받기 전에 자리 보존하고. 그 물렁물렁한 양반이 어찌나 약이 바싹 올랐겠는가. 그렇다 한들 결론적으론 아무것도 못 한 채 짧은 권세를 누릴 뿐이었더라도 말이다.
덕분에 권태환도 못 이기는 척, 뒤로 수를 써가며 혼인을 올렸던 거다. 허울뿐이었더라도. 겸사겸사 그렇게 판을 만들어 짜냈다. JL 회장 자리를 물려받는 건, 어떻게 보면 너무 당연한 일이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걸 발판 삼아, 어떻게 유리하게 이용하면 좋을까 고민하는 데에 오랜 시간을 투자하지도 않았고. 얽히고 얽힌 사연들을 뒤로 한 채, 답을 들은 이시온의 표정은 예상보다 더 잔잔했다. 그렇구나. 그렇게 잠시 중얼거리더니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 경, 백경아 씨와는…”
이마에 머무르던 그의 매끄러운 표면이 슬쩍 자리를 옮겼다. 단단한 턱 선과 탄탄한 목선이 이어지는 부근에 콧대와 입술을 비볐다. 그러다 고른 치아가 살살, 튀어나온 목빗근을 긁었다. 간지러울 정도로 조심스럽게. 흡. 태환에게서 웃음에 가까운 비음이 잠깐 새어 나왔다.
“곧 법원에서 볼 참이지.”
그러더니, 태환이 별안간 팔을 들었다. 제게 바짝 붙어온 몸을 떨어트리기 위함은 아니었다. 맞은편에 있던 손목을 잡아끌더니,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주었다. 소지만 꼿꼿했다. 이시온의 멀건 낯짝이 또 그렇게 울렁인다. 새끼손가락이 서로 맞물렸다. 약속. 그랬다. 사내는, 제 형은… 거짓을 고할지언정 저에게 뱉은 약속을 하나도 저버리지 않은 것이었다. 흩어져있던 의심의 조각은 이미 이름표를 바꿔 붙인 지 오래였다. 살 곳 하나 주고 얼굴 비출 때나 만나면 돼, 라고 했었다. 그건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마저도 필요가 없게 돼버렸다. 아마 섬세한 계산이 따라붙은 결과일 테다. 남은 건 나는 ‘내’ 권시온하고 살겠다던 맹세뿐이다. 만연하게 주는, 예전에 그가 이따금 주말마다 먹여주던 케이크와 달리 허상일 것만 같던 달콤함이 곧 현실이 되는 셈이었다. 애매하게 말라버린 앞 머리카락은 살랑이지 못했다. 태환의 어깨에 달라붙어 일부분은 떨어지지 않고, 일부분은 반대로 제 얼굴에 붙어버리기 일쑤였다. 거슬리진 않았다. 눈치챌 수도 없었고.
“그래서, 궁금한 건 다 물었어?”
그게 그렇게 좋으냐고도 물을 법도 했건만, 그 부분은 반문할 필요가 없었다. 권태환은 한쪽 입꼬리를 내리지 않은 채, 슬쩍 무릎을 세웠다. 어린 권시온은 용케도 수납해냈을지는 몰라도, 성인이 된 이시온의 앞섶은 참담할 지경이었다. 제 딴에도 그게 마음에 걸렸는지 하체 전체를 감싸는 선수용 수영복을 용케 구한 것 같았으나 무용지물이었다. 판판한 무릎뼈가 왼편에 가지런히 쏠린 채 점점 부피를 키워오던 살덩이에 닿았다. 그러자 등허리가 휘청, 동그란 조약돌 같던 척추뼈가 튀고 굽혀져 있던 날개 뼈가 조여들었다. 못 이기겠다는 듯, 고개를 든 반듯한 낯이 칭얼거렸다.
“…아직 하지 마요. 하나 남았단, 응, 말이에요.”
“아직 하지 말라는 건, 아예 하지 말란 뜻은 아니네.”
…짓궂어 짓궃어. 중얼거리고만 입술이 안으로 말려든다. 나는, 진지하단 말이에요… 원래도 그리 크지 않던 목소리는 아예 쥐어짠 듯 작아져 버렸다. 다섯 손가락이 안으로 굽었다가 펴지길 몇 번, 꼼지락거림은 금세 멎었다. 그러곤 결심했는지, 사내의 허벅지를 아주 조심스레 밀어 내렸다.
“형, 큼… 있잖아요. 우리는,”
곧이어 한 행동은, 목을 가다듬는 것이었다. 늘 조근조근 하던 성대가 흥분에 잠겨버린 듯, 다른 때와 다르게 그을음이 생겨버렸기 때문이다. 묻어버리고 피하려고만 했던 물음은, 마침내 음절이 되어 밖으로 걸어 나왔다.
“…우린, 무슨 사이에요? 아니. 무슨 사이어야 할까요?”
그렇게도 떨리고 숨이 막히더니. 한번 물꼬를 트자 어렵지 않게 문장으로 완성할 수가 있었다. 권태환은 가만히 제 유일의 눈동자를 감상했다. 여전히 얼굴은 여기저기 얼룩덜룩한 기미를 다 빼지 못했고, 입이 말랐는지 목이 타는지 목울대가 쉴 새 없이 울렁거리고 있었다. 깊은 밤인 탓에 어둡기도 했거니와, 그나마 새어 나오는 빛 한 점 받지 못할 만큼 수그리고 있기에 더욱더 그림자가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러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이시온의 눈동자는 잔잔한 수면을 내비치고 있었다. 아니, 그의 눈동자가 파도치지 않고 그대로 고인 물 위, 그 자체였다.
시온의 눈동자가 저를 온전히 바라보고 있었다. 태환은 다시금 손을 올렸다. 그답지 않게, 매우 정중한 움직임이었다. 오로지 제 앞의 상대에게만 보여주고 내어주고 맞춰진, 그런 몸짓이었다. 이제 물기가 다 증발해버린 뺨은 아직도 촉촉하게만 다가왔다. 속눈썹을 아래로, 차양처럼 쏟은 채 제 얼굴을 온전히 내맡긴 청년이 뒤늦은 말을 잇지 못하기에, 그는 기꺼이 제가 먼저 선고해 주기로 했다.
“짐을 이쪽으로 옮겼어. 완전히 물려받기 전엔, 그쪽도 남겨두긴 하겠지만 말이야.”
커다란 몸체와 다르게, 길고 네모나게 잘 다듬은 손톱은 여린 피부에 흠집 하나 남기지 않았다. 그걸 바라기도 했거니와, 그렇게 두지도 않았다. 움푹 파인 손바닥 안에 딱 들어맞는 짝이 된 피부의 감촉은 한없이 감미롭기만 했다. 그에 걸맞게, 낮고 살짝 탁하던 목소리가 부들부들했다. 물론 나름대로이긴 했지만, 상대에겐 잘 전달된 모양이었다. 점점 더 그 안으로 파고드는 뺨이 퍽 달가웠다.
“그리고 아무도 간섭하지 못할 때가 오면… 나는 온전히 내 권시온, 아니. 이시온을 옆에 둘 수 있겠지. 시온아, 관계의 명칭이 뭐가 중요해.”
말 그대로였다. 그가 부득불 이시온을 권시온이라고 부른 것은, 알려주기 위함일 뿐이었다. 그가 권 씨이든 이 씨이든, 호적상 제 동생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치 않았다. …물론 한편으론 청년이 끝까지 제 양심과 도덕심이란 벽을 허물지 못하면, 그때에는 어렸을 때처럼 욕심을 부리라고 가르쳐 주는 것만으로 끝나진 않을 거였다. 번복으로 보일지도 몰랐으나, 10년의 공백기 동안 염두에 둔 것이 있었다. 시온이 끝내 거부를 한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를 다시 권 씨로 만들어 묶어두자고.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라거나, 안도감이 들지는 않았다. 다만 제 유일이 이렇게 온전히 저를 내보이는 건 좋았다. 그런 점은, 확실히 흡족했다.
“너는 나를 만날 때부터, 이미 내 거였어, 이시온.”
결과적으로든 결론적으로든, 사내는 청년이 제게 이런 걸 물을 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눈치챈 때와 지금의 입장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었는데, 시온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가 이내 다시 샐쭉한 아몬드 모양으로 변했다. 그러다가 점점 흰 자가 빨갛게 변해갔다. 눈물샘이 자극받은 탓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홍채는 덤덤하고 잔잔하게 보이기만 했다.
“무르기엔, 이미 때가 한참 지났다는 뜻이야, 알아들었어?”
수영장을 채운 물은 흐르지 못한다. 파도치지도, 물결치지도, 심지어는 흐르지도 못한다. 다만 그 안에 어떤 온도와 어떤 수질의 물을 부었는가는 소유주에 따라 달라진다. 겉보기엔 단지 평범하게 보일 뿐이더라도. 현재의 이시온의 눈이 꼭 그랬다. 그렇게 넘쳐흘렀다. 실은 알고 있었다. 이건 또 다른 회피일지도 몰랐다. 도망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게 불과 얼마 전이건만, 명확하지 못한 도피는 방향과 목적지만 틀었던 것이다. 사내가 일러준 3년이 지나면, 뭔가 달라질까? 명확하게 관계를 정의할 수 있을까? 그리고 여전히 여물지 못한 저 자신은 또 흔들리고 말 게 뻔했다.
그러나 태환은, 한때 제 형이자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으나 결국엔 욕망을 숨기지 못하게 만드는 장본인은 이를 다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꼭 그렇게 확답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 맞다. 그가 옳았다. 잠시 울음을 참아내느라 얕게 씨근덕거리던 흉부가 멈췄다. 긴 호흡이 내뱉어졌다. 아직도 태환의 허벅지 위에 머물러 있던 손바닥에 힘이 풀렸다.
“…네.”
열아홉이 피하고자 했던, 두려워했던 일은 끝내 현실이 돼버리고 말았다. 그러면 또 어떠한가. 스물아홉은 그렇게 또 다른 곳으로, 이번에는 제가 닿을 곳이자 머무를 곳을 명확히 안 채로 발걸음을 뗐다. 이시온은, 권태환에게로 도망쳤다. 그렇게 항시 믿던 어렸을 때의 조언은 녹아내려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이제는 순응만이 남았다.
“무르지 않을 거예요…”
두 입술이 확실한. 종착점을 찾았다. 종지부였다. [8]. 자정이 막 넘어가는 시점, 수영장은 여전히 잔잔했다. 굳이 무슨 사이인지 확답할 필요 없는 두 사람을 관망하듯이. 마침내, 각자가 다르면서도 같은 유일에 도달했다.
-End, but not fin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