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맹종이 지나려던 찰나 (3/5)

3.맹종이 지나려던 찰나

단호한 움직임이었다. 고개를 가로로 휘저었다. 빠르진 않았다. 아직도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맞은편도 사정은 같았다. 단단하게 팔짱을 끼고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들여놓을 곳도 없어요,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성수동으로 옮겨.”

태환이 지나가듯 언급했던 바를, 시온도 잊지는 않았다. 도톰한 입술이 앞으로 삐쭉 튀어나오다가 금세 본모습을 되찾았다. 고성이 오가진 않았다. 둘 다 보통의 어조로 대화하고 있었다. 다만 서로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이었다. 그럼 도대체 뭐 때문에 이 사달이 났는가. 원인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간단했다. 멀쩡한 걸 확인했겠다, 방문객은 돌아가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사내는 발을 떼지 않았다. 시온을 한참을 얼러주던 태환이 먼저 통보와 권유가 적절히 섞인 문장을 건넸다. 자고 갈까? 청년은 대답하지 못했다가, 어린애처럼 고개만 아래위로 주억거렸다 이때는 의견이 맞아떨어졌다. 권태환은 기꺼이 코트를 벗어 적당히 책상에 걸쳐두었다. 거의 던진 거나 다름없지만, 탁자의 주인도 그 거침없는 모양새에 대해 걸고넘어지지 않았다.

태환으로선 여전히 작고 낡은 침대에 제 몸을 눕히는 게 탐탁지는 않았으나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게 뒤로 무게가 쏠렸다. 둘은 같이 눕는데 동의했으나 침대가 반대할 수밖에 없었나 보다. 전체적으로 가늘다곤 해도 문짝만 한 청년 하나도 견디기가 힘든데, 그걸로도 모자라 거구의 사내가 함께라니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무기물도 반항하지 않곤 못 배길 정도였던 것이다. 그래서 꺼졌다. 무엇이? 침구의 스프링이 말이다.

허. 태환은 어이없음이 역력한 실소를 뱉었다. 시온은 얼이 빠졌다. 어쩐지 균형이 맞지 않는다 했더니 전부터 한계였었나 보다. 그럴 만도 했다. 갑자기 어느 날 밤이 떠오를 뻔했지만, 이내 지웠다. 지우려고 노력했다. 오븐이 아니라 침대를 사줬어야 했어. 그 발언이 시발점이었다. 그제야 잊고 있던, 별안간 설치된 선물의 존재가 물 위로 떠올랐다. 그래서 다시 처음의 대화로 돌아간다. 공간이 부족하다고 하니 기어이 성수동에 마련해두었다는 아파트에 들어오란다. 시온의 미간이 좁혀지고 눈썹이 쳐졌다.

“…싫다니까요.”

청년이 붙였던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더니 붙박이장을 열었다. 다행히 겨울 이불이 몇 벌 있었다. 뭘 하냐는 듯한, 찌르는 눈빛이 등에 꽂혔다. 극세사로 이루어진 침구가 세 벌. 침대 위에 덩그러니 어질러진 게 한 벌이니 총 네 벌이었다. 바닥에 깔 수 있는 건 얇긴 해도 두 벌. 열심히 생각을 굴리던 시온이 입을 열었다.

“거실에서 자요. …같이요.”

다시 돌아가란 말은 나오지 않았다. 승낙이든 거절이든 듣지 않겠다는 것처럼 그것들을 부지런히 옮길 뿐이었다. 짙고 선명한 눈썹이 위로 솟았다. 태환도 일어나 앞선 이의 뒤를 쫓았다. 이불을 들어 올리진 않은 채였다.

“나 저런 데서 자본적 없는데.”

“…이 기회에 해보세요.”

펄럭. 도톰하고 네모진 천 뭉치가 무겁게 허공을 갈랐다. 바닥에 까는 용을 전부 깔고 그 위에 겨울용 이불을 또 깔았다. 태환은 그의 말대로 평생 침대가 아닌 곳에서 자본 역사가 없는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다. 부족하지만, 임시방편으론 나쁘지 않았다. 대충 구색을 갖춰놓고 뒤를 돌아봤다. 상대는 입매를 길게 늘어트린 채, 입꼬리로는 못마땅함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말간 눈동자가 시계방향으로 굴러갔다.

“성수가 싫으면, 내 사택 근처도 있어. 거긴 수영장도 딸렸지.”

“세상에…”

청년의 입술에서 침음이 절로 나왔다. 논점이 완전히 엇나간 걸 지적할 수도 없었다. 하나가 아니었다니. 그러고도 남을 이이긴 하나 새삼 놀라웠다. 반박해도 소용은 없을 테지. 시온은 조용히 먼저 눕기를 택했다.

“…내가 말했죠. 같이 사는 거 아니면 싫다고.”

알고 있었다. 묵어버린 잔재를 털어냈다고 한들, 태환은 짝이 있었다. 그게 아무리 가문의 이득과 계약서에 서명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도 약속은 약속이었다. 하지만 상대도 알면서 혼인을 했고, 본인도 거리낄 게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괜찮지 않을까? 선해 야만 한다고 주장하던 이는 어디 갔을까. 이시온은 한숨을 여러 번 쉬고 싶었으나 답답한 티를 내고 싶지도 않았다. …이건, 백경아 씨가 돌아오면 그때 생각하자. 시온의 회피가 방향을 틀어버렸다. 이불은 깨끗하게 보관한 탓에 먼지가 많이 날리진 않았다. 태환의 몫을 걷어낸 청년의 음성은 차분하기만 했다. 그리고 귓불과 목덜미는 진작 불이 난 상태였다.

“봐줘요. …내가 부탁하는 거잖아요.”

오래된 마루 위를 짓누르듯 서있던 남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다가 가늘게 변하고, 발걸음이 떨어졌다. 바닥은 딱딱했다. 아무리 이불을 두 겹이나 깔았다고 한들, 늘 고급 진 토퍼에서 잠을 청하던 이가 쉽게 적응할 수 없을 만큼. 그러나 권태환은 너그러워지기로 마음먹었다. 이유는 바로, 제 눈앞에 있다. 가느다랗고 촘촘한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애교 부리는 거 봐서 좋네.”

“…….”

애교가 아니라는 대답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시온은 조용히 다시 품을 내달라는 듯 옆으로 몸을 웅크렸다. 정수리에 입술이 내려앉았다. 불면이 순식간에 흔적을 감췄다.

*

입안이 달았다. 습관적으로 나오는 하품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난방을 잊지 않고 잔 덕분인지 입김이 나오진 않았다. 등이 살짝 배기긴 했다. 아프지는 않으나 살짝 불편한 정도로. 왜 그랬을까. 당연한 결과였다. 아무리 이불을 여러 겹 깔았다 한들, 익숙하지 않은 마루가 편했을 리 없다. 시온은 천천히 굳어있던 어깨를 젖혔다. 뼈와 근육이 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의식 너머에 잠겨있던 판단력이 서서히, 차례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자신도 이 정도인데, 그럼… 시온은 바로 옆을 돌아보았다. 비어있었다.

“아…”

막 동이 터 오르려 하고 있었다. ‘형’은 먼저 나간 걸까. 하긴, 워낙 바쁜 이다. 청년은 조바심을 내지 않기로 했다. 제 조급함은 오해만 불러일으킬 테다. 그는 반성이란 걸 할 줄 알았다. 그렇다고 한들, 섭섭한 마음이 아예 들지 않을 순 없었다. 야속하게도. 왼쪽 가슴부터 아쉬움이 살짝 피어오르려고 하던 그때였다.

“아무리 봐주려고 해도 안 되겠어.”

방문이 열렸다. 문틀 위쪽을 지나기 위해, 내키진 않게 허리를 숙인 사내의 턱은 딱 봐도 불만이 서려 있었다. 머리카락이 덜 말라있었다. 자신이 자는 동안 씻고 나온 게 분명했다. 그는 욕실이 아니라 시온의 방에서 나왔다. 그건 또 무슨 조화일까. 시온의 보드랍고 얇은 모발이 정전기 때문에 잔뜩 일어난 채였다. 청년은 그런 제 모습을 모른 채 눈만 여러 번 깜빡이고 있었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시선이 이시온에게 닿자마자, 손등의 뼈가 불쑥 솟아올랐다. 손마디에 힘을 준 탓이었다. 꼭 온종일 자고 막 일어난 새끼 포유류 꼴을 사진으로 남겨놓고 싶은 충동이 일었기 때문이다. 내가 얼마나 봐주는지도 모르고. 태환은 웃음 사이로 뱉고 싶은 문장을 버려두었다. 남자가 헛웃음을 흘렸다.

“제대로 있는 게 없어. 다음엔 차 보내줄 테니까 인근 호텔로 와.”

“있는 건 많아요. 다… 형의 눈에 차질 않는 거겠죠.”

“말대꾸는.”

보폭이 큰 반면,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다. 사내는 느긋하고 느른한 발걸음으로 소파를 찾아 앉았다. 막 기상한 이의 옆, 이부자리는 치워지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그런 걸 손수 할 인물은 아니었다. 태환은 두터우면서도 잘 뻗은 다리가 꼬아 앉았다. 위에 올라간 무릎에 팔꿈치를 댄 그가 상체를 당겨 시온을 내려다보았다. 한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말갛고 흰 뺨이 은은하게 분홍빛이었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열을 띄는 게 아니었다. 버석하지만 말캉한 윗입술이 또 오물거렸다.

“…이번에도 먼저 돌아간 줄 알았어요.”

이시온은 모른다.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이목구비가 어떻게 생겼는 지야 거울만 봐도 알 수 있었지만… 그가 알 수 없는 점은 그 외모가 타인의 눈에 어떻게 비추는지에 대한 부분이었다. 권태환은 알았다. 아주, 매우, 굉장히, 잘. 제가 아무리 그를 예뻐한다고 한들 심미적인 요인이 전부는 아니었기에 나름 객관적이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뺨을 상기시킨 채, 눈꺼풀을 깜빡이며 촘촘한 속눈썹을 팔랑거리는 건 예삿일이다. 지금은 거기에 더해 눈동자는 잔잔한 설렘으로 반짝여, 어느 누가 봐도 뭐든 들어주고 얼러주고 싶어질 것이었다. 저런 표정은 제 앞에서만 하게 만들어야 할 텐데. 사내의 입매가 씰룩였다.

“너 일어나는 건 보고 가야겠다 싶어서.”

하지만 곧 평정을 가장했다. 매서워 보여 위압감을 주는 눈꼬리가 둥글게 휘었다. 입꼬리 한쪽도 딱, 비웃는다고 하긴 어려울 정도로만 올라갔다. 그러자 순진한 양 동생은 저가 어떤 속내를 가진 지도 모르고, 두 볼을 더 붉힌다. 딱, 골려주기 좋은 때였다.

“속상한 일은 적립해두잖아, 너.”

소파를 차지한 이가 낮은 음성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자 아직도 허리 아래에 이불을 걷어내지 못한 청년의 미간이 좁아지고, 턱에 호두가 생긴다. 가느다랗게 숨어버린 눈동자는 전혀 차갑질 못했다.

“…그런 적 없어요.”

없긴 뭐가 없어. 핀잔 아닌 핀잔이 들려왔다. 이시온은 왠지 부끄러워졌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애써 부정해 봤다. 통하지 않는 반항이고, 그걸 자각하고 있음에도 그렇지 않은 척이 하고 싶었다. 권태환은 재롱이라도 본 듯, 흉근을 울려가며 숨 먹은 웃음을 몇 번 뱉어냈다. 고개도 살짝 숙인 채로. 곧 음성이 멈추며 동시에 얼굴이 보였다.

“그렇다 쳐주는 걸로 하고, 그보다.”

급박히 온 탓인지, 그의 왼 손목이 허전했다. 그가 슬쩍 거실에 둔 벽 시계를 바라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현관문을 향한 채 살짝 비스듬한 각도로, 태환이 일어날 생각을 못 하고 있는 시온을 바라보며 턱 끝을 들어 올렸다.

“더 있고 싶지만, 나도 회사 나갈 준비는 해야지.”

“…아, 아. 네.”

청년이 삐그덕 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반쯤 고장이 나기라도 한 것 같았다. 뼈마디가 도드라졌으나 마르진 않은 팔다리는 유난히 길었다. 그만큼 당황한 태가 너무 났다. 사내는 그걸 보고 미소를 지우지 못한 채 현관으로 향했다. 몇 걸음 되질 않았다. 왜 아쉬울까. 시온은 고개를 털었다. 안타깝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는 권태환에게 만큼 완전히 솔직해지고 싶었다. 다시 그의 옆에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간절함이 생겨 버린 거다.

그러나 그 마음을 드러낼 틈은 없었다. 아. 집주인은 사내의 옷을 보고 작게 놀라고 말았다. 파자마 바지를 입고 왔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설마. 그의 ‘형’은 얼빠진 짓을 하는 인간을 혐오하는 편이었다.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실수에 대해서도 왜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랬던 그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이시온이 입술을 뻐끔거리며 물었다.

“슬리퍼를… 신고 왔어요…?”

태환의 낯빛에 변화는 전혀 없었다. 되려 뻔뻔하다면 모를까. 그렇다고 남들은 그러면 안 되고, 자신은 예외라는 심보는 아니었다. 이렇게 하게 만든 대상에게 차별성을 둔 것에 가까웠달까. 그런 연유로 그는 부끄러움이 없었다.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감동받았어?”

사내는 오히려 엉뚱한 되물음을 던졌다. 태환은 제 앞의 시온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그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놀란 탓인지, 청년이 중얼임을 늘어놓았다.

“…날씨도 추운데.”

“됐으니까 걱정은 그쯤하고, 권시온. 형 봐.”

그의 중지와 검지가 청년의 하관에 닿았다. 시온은 타의에 의해서 겨우, 실내화를 신은 발에 겨우 눈을 뗄 수 있었다. 들어 올리는 손길은 거세지 않았다. 단 한 사람의 인영으로, 물의 장막 같은 눈동자가 가득 찼다. 깜빡거림은 없었다. 경직이라기보단 사로잡힌 느낌이었다. 사내가 반대쪽 검지를 들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뺨을 톡, 두드렸다. 입가가 매우 즐거워 보였다.

“다녀오세요, 해줘야지.”

시온의 눈이 기어이 커지고 말았다가, 이내 확 좁아졌다. 원래보다 훨씬 가늘어진 눈매가 제법 맵싸했다. 잊고 있던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제 호적상 형이었던 권태환은 권시온이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 똑같은 걸 요구했다. 성적인 의도는 없이, 단지 골려서 귀여운 꼴을 구경하기 위함이었다. 정말 어떤 의미론 변화가 없는 사람임은 틀림이 없다. 하얀 볼이 부풀어 올랐다. 공기가 꽉 들어차진 않았으나 확실히 들어있는 형태였다. 태환이 낮고 나직하게, 하지만 웃음기를 감추지 못하고 재촉하였다.

“얼른.”

시온이 그 말에 흘깃 시계를 보았다. 아침 다섯 시 반이었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 하지만 그의 집으로 돌아가 준비를 마치고 나가기엔 빠듯할 만했다. 여유가 그리 없다는 뜻이다. 결국 굴복의 한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훌쩍 커서 더는 까치발을 할 필요는 없었다. 살짝 목을 길게 뻗었다. 상대의 뺨에 입술이 눌러졌나 싶은 찰나, 태환이 그의 턱을 잡아 돌렸다.

“흡…”

입을 다물 새도 없었다. 느슨하게 풀려있던 사이로 말랑한 듯 단단한, 물기를 머금은 살덩이가 존재감을 피력했다. 더 벌리라는 듯이 파고들었다가 윗니의 아랫부분을 훑었다. 가지런한 치열 뒤를 두드렸다가 속절없이 힘이 풀려버려 숨지 못한 혀를 스쳤다. 연거푸 비음이 울렸다. 그런데도 밀어내지 않았다. 너무 당황해서 그런 것이든, 못 이기는 척 받아내는 것이든 자신도 공범이 되어 버렸다. 시온은 미간을 좁히면서도 그 달큼함을 거절하지 못했다. 오늘은 알코올 냄새가 나지 않았다. 담배의 잔향은 흔적조차 없었다. 존재하는 것은 제가 쓰는 것과 똑같은, 치약의 박하 향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가진 특유의, 체취뿐. 도드라지진 않아도 확실한 자극이 점막을 찔렀다. 음미하는 걸 숨기지 못한 채 눈꺼풀을 덮어버리려고 했는데, 갑자기 몸이 살짝 울렸다.

“쯧.”

접촉은 길지 못했다. 진동의 원인은 주머니 속에 있던 휴대전화였다. 태환은 들뜬 호흡을 내보이는 시온을 바라보며 엄지를 놀렸다. 수신 거절이었다.

“…급한 걸지도 모르는데, 받지 않아도 돼요?”

그를 아는 이라면 이 이른 시각에, 간이 크지 않은 이상 별일이 없는데 연락을 취할 리가 없었다. 그게 이시온의 판단이었다. 태환은 여전히 태연했다. 맞은편에 있던 이는 액정 위에 떠오른 글자를 보지 못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짐작하는 것뿐이었다.

“너보다 급한 게 어딨어. 그런 거 고민할 시간에,”

짧은 입맞춤을 할 동안 다 젖어버린 입술을 훔치는 대신, 그는 자신보다 훨씬 무른 피부를 가진 이의 입가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도장이라도 찍는 것 같았다. 붉은 살덩이가 다시 안으로 깊게 파고드는 일은 없었다. 권태환이 웃었다.

“…다음번엔 먼저 잠들지 않을 궁리나 해보던가.”

헉. 이시온은 호흡을 크게 집어삼켰다. 무슨 뜻을 내포했는지가 명백한 문장이었다. 눈이 또 원을 그리며 돌아간다. 귀 끝이 새빨갛다 못해 농익은 꼴이 되었다. 콧등이 움츠러들고 아랫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깨 또한 바르르, 휴대 전화처럼 잘게 움직이는 건 덤이었다.

“이러다… 늦겠어요. 가세요.”

누가 봐도 굳어버린 목소리였으나 태환에게는 귀엽기 짝이 없는 칭얼거림에 지나지 않았다. 시온도 그걸 알았다. 분한 건 아니지만, 조금 억울할 정도는 됐다. 사내는 억눌린 듯해도 확실히 들리는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사흘 뒤쯤 연락할게. 그땐 정말 호텔에서 보고.”

기분 상하지 않을 정도의 수치심을 느낀 게 거짓말처럼, 시온의 낯빛이 다른 색을 비췄다. 사흘은 곧 3일이다.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냉정하게 제멋대로 굴던 위인이 지금 굳이 특정한 날짜를 지정한 거다.

“…네.”

저 사람이 날 너무 잘 아는 걸까, 아니면 나도 모르는 새 휘둘러 주세요, 라는 티를 내는 걸까. 그게 다 무슨 상관이겠는가. 청년의 눈이 잔잔하게 반짝였다.

“기다릴게요.”

대답은 양순하다 못해 순종적이었다. 새삼 놀라울 건 없었다. 태환의 눈썹 한쪽이 어김없이 위로 솟았다. 다 자란 이시온이 권시온처럼 보였다. 세월이 지난 건 지난 거지에 완전히 같을 순 없었다. 당사자 또한 그걸 알고 있었다. 확실히 말하자면, 그는 이제 스물아홉이었다. 성인이 아닌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그 많던 일이 어제 하룻밤으로 모두 없던 것이 될 수는 없다. 과거를 돌이킨다는 건 영화, 드라마, 각종 픽션에서만 일어나는 공상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태환 또한 그런 기색을 그대로 읽어냈는지, 다시 입꼬리를 올리곤 한동안 입에 올리지 않았던, 상투적인 인사말을 건넸다.

“그래, 다녀올게.”

그는 커다랗고 마디가 굵은 손으로 제 양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현관문이 열렸다. 재회 이후 다음이, 가장 확실하게 약속된 헤어짐이었다.

*

「살맛 나서 어쩔 줄 모르겠나 봐?」

스피커 너머로 들리는 음성에 선명한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 허리를 운전석 시트에 묻은 태환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걸 말이라고. 뭐, 틀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랬다. 실제로도, 평소보다 꽤 유쾌한 편이지. 굳이 대답하진 않았으나 동의하는 바이기도 했다. 그 외에 드는 감정은 약간의 지루함과 단란한 순간을 방해받은 점에 대한 불편뿐이었다. 사내는 업무 중이 아닌 이상, 그러니까 시온을 찾아올 땐 항시 기사를 대동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늘 목적지에서 적당히 떨어진 공터에 주차하고 골목까지 걸어가서 메종 단 루의 문을 열었다. 돌아갈 때도 사정은 같았다.

부재중 전화 목록에 남겨진 번호로 다시 연락을 건 것도, 차 안에 들어서고 난 후였다. 평소 같으면 이 동네에 발을, 아니. 바퀴를 들이지 않을 듯이 근사한 외제 차를 기웃거리는 인종들도 없을 이른 시간이었기에 굳이 시동은 걸지 않았다.

“용건.”

심드렁하면서도 칼같이 벼린 단어였다. 상대도 살가운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으나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한숨이 들리고야 말았다. 한 여성의 어투는 피곤이 묻어 있었으며 기가 질려 보였다.

「이번만큼은 주도권이, 나한테 있는 거 아니었어?」

백경아는 이때껏 행방이 묘연했다. 권태환의 비서진, 정보원들이 그의 흔적을 잡긴 했으나 번번이 한발 늦었다. 놀랍지도 않았다. 그 또한 예견했으니. ‘우리’라고 사이를 묶고 싶은 건 아닐지언정, 너와 나는 닮았다고 한 말은 거짓 없이 진실이었다 어디까지나 ‘겉핥기’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백경아 성격에 혼자 움직일 리가 없다. 저쪽에 심어둔 간자, 적어도 조력자가 있다는 거쯤이야 이미 알고 있었다.

“계약을 깬 건 너인데, 내가 왜.”

「백주영이 움직였는걸.」

운전대에 올려두었던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갔다. 눈썹 한쪽이 들린다. 신경이 거슬렸다고 표시 내는 행위였다. 그마저도 잠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질문이되 질문이 아니었다. 물음표가 없는 세 어절이 전부였다. 묵음에는 잡음이 섞여 있었다.

「내가 어찌 되든 상관없겠지. 하지만 네가 그토록 애닳아…」

“백경아.”

끝맺지 못한 문장은 그대로 되삼켜졌다. 태환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불쾌함은 없는, 나른한 낮이 되어 있었다. 이 새로울 거 하나 없는 상황에 싫증이 났다. 파악이 이미 끝나버린 거다. 그의 서류상 아내는 저보다 뒤떨어지긴 해도 멍청하진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뭘 하고 있는지, 누구와 함께하는지 같은 세세한 정보는 모르더라도 대충 짐작을 하고 판을 짤 두뇌 정돈 있었다. 프랑스, 영국에서 한 번 쉬고 스위스 각지를 떠돌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언뜻 보면 각국의 연관성은 전혀 없었다. 겉만 핥는 족속들에게는 충분히 그럴만했다.

“아직은 쓸모가 있으니 넘어가 주지. 그리고,”

경아는 왜 외국으로 몸을 숨겼는가. 사태를 납작하게 보고 있는 족속들은 백주영의 비자금 추적 혹은 백경아가 대학 졸업 후 벌여놓은 인맥들과 만나기 위함이 아닐까 추정할 테지만, 글쎄. 경아가 아는 사실은 태환도 전부 알고 있었다. 뭘 파헤치려 안간힘인지는 뻔했다. 경아도 제가 저를 내다보고 있음을 알 터였다. 그런데도 얼마나 조급하면, 이런 경솔한 짓을 했을까. 동정이 일었느냐고? 내가 왜? 태환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수화기 너머 인물에게도 잘 들렸을 테다.

“먼저 연락할 때까지 전화하지 마. 신경 쓸 테니까.”

누가 신경을 쓰느냐. 그 대상은 사내가 아니었다. 경아는 빠르게 눈치를 채고 말았다. 포식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청승을 가르쳐준 인물. 옷이 마찰하며 부스럭 소리를 냈다. 그러다가 곧 씹어뱉은 듯한 욕설이 섞여 나왔다.

「내 남편은 참, 개새끼라니까.」

이 혼인관계가 어떠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단번에 알려주는 욕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리라. 이런 점이 편하기도 했다. 이래서 경아를 계획에 끼워 넣었었다. 모터가 부드럽게 울렸다. 통화의 내용은 머릿속에 오래 머물지 못했으며 여운 따위 온데 간데도 없었다. 태환이 운전대를 잡고 막 떠나려고 할 때, 문득 시온의 말간 눈동자가 떠올랐다.

‘기다릴게요.’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눈빛은 간절히 붙잡고 있었다. 이내 아닌 척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긴 했지만. 사흘 뒤. 태환은 깊게 호흡을 들이마셨다. 신축성이 있는 니트가 괴로워할 정도로, 흉부가 잔뜩 팽팽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곁에 두고 싶었다. 그러나 인내도 여러 번 하다 보면 습관이 되는 건지, 그는 이시온에 대한 부분에서만큼은 참을성을 갖출 수 있었다.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게 이토록 즐거울 줄이야. 물론 단 한 명 만을 위한 너그러움이고 다정함이며 기다림이지만. 배기음이 들리고, 차가 골목을 떠났다. 왔었다는 흔적 하나 없이.

*

“…그래서, 결론은 못 찾았다는 말이네요?”

백주영의 외견엔 독기가 없었다. 누가 봐도 아, 모르긴 몰라도 귀한 집에서 곱게 자라겠구나. 할 정도라 할까. 눈꼬리는 쳐졌고, 나이보단 어려 보였다. 전체적으로 가늘진 않으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인 건 확실했다. 보통 한 기업의 후계자가 위와 같이 묘사할 수 있는 외모를 가졌다면 남들에게 얕 보이기 싫어서라도 강한 인상을 주려 노력하기 마련인데, 주영은 오히려 그런 특징이 돋보이도록 옅은 색의 정장을 갖추고 적당히 색이 들어간 타이를 맸다. 살짝 선천적인가 싶은 정도로 세팅된 곱슬 기와 튀지 않을 만큼 갈색인 모발은 단정하면서도 딱딱해 보이지 않도록 반만 올렸다. 참고로 그의 직계 혈통들은 전부 직모이다.

구사하는 어투도 다를 바 없었다. 목소리는 낮지 않고, 너무 높지는 않으나 성인 남성이라고 하기엔 미성이다. 거슬리는 억양이 없고 거세지 않았다. 하대할 때도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그래. 고성을 지르진 않지. 그래 봤자 또라이지만. 보조석에 앉은, 제 밥그릇을 건사할 줄 아는 비서는 홀로 생각했다. 등을 받친 시트가 자꾸만 흔들렸다. 제 상사는 발길질하는 것마저 어찌나 고상한지, 세게 차는 법이 없었다. 딱, 기분은 나쁜데 반항을 했다간 저만 미련해질 정도까지만 무례하게 굴었다. 툭, 툭 차대는 몸짓이 멈추질 않는다. 앞 좌석에 앉은 남자의 어깨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가, 돌아왔다가, 다시 콘솔 앞까지 기울었다. 제 옆의 운전기사는 묵묵히 할 일만 했다. 언뜻 곁눈질하자 관자놀이가 축축해 보였다. 비서는 주먹을 잠깐 쥐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하루 이틀도 아니었다.

“오 비서님을 괜히 다른 분들보다 더 비싼 월급 주고 쓰는 거 아닌데…”

“…죄송합니다.”

올해로 마흔이 된 백주영은 여러 의미로 양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큰 누이에게 본사 경영권을 맡겨도 아무런 미련과 욕심이 없다는 듯이 호텔과 그 계열사들을 지휘하는 데 만족한다고 말하고 다니지만, 실은 어차피 최종 후계는 자신이라는 확신이 있기에 건방지게 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저 온기 넘쳐 보이는 겉모습도 전부 연출이다. 상대를 방심하게 하고는 마음대로 주무르기 위한 초석으로 사용키 위한 술수라는 말이다. 그의 곁에서 수행한 지도 벌써 8년 차다. 오 비서라고 불린 사내는 쓴 입안을 애써 갈무리했다.

“…이상하단 말이지.”

늘어났다 줄기를 반복하던 안전벨트가 드디어 멈췄다. 그와 동시에 세단도 정지했다. 신호에 따라 대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을들의 눈이 마주쳤다. 짧은 안도였다.

“난 권태환도 한통속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보면 또, 아닌 것도 같고. 그쵸?”

대놓고 패악을 부릴 건 아닌가 보다. 주영은 쉬이 육두문자를 입에 올리진 않았다. 웃는 낯으로 손속이 거칠다는 게 문제긴 해도 말이다. 일전에 제 아래 후임 하나가 CCTV 영상의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가, 그 길로 이사실이 아닌 체육관으로 불려 가 링에 올라야만 했던 때가 떠올랐다. 복싱. 백주영의 취미였다. 복싱. 프로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아마추어로서는 훌륭했다. 그 말이 아부가 아니란 건 이미 목격한 바 있었다.

속 사정을 털어놓자면, 그가 즐거워하는 행위는 순수하게 권투 자체가 아니었다. 스파링이랍시고 거슬리는 놈 올려다가… 패는 거지, 일방적으로. 그는 그런 식으로, 숨은 폭력성을 링 안으로 한정해둔 채 멀쩡한 척을 하고 다녔다. 꾸며낸 모순이라고 하면, 적당한 표현일까. 그러나 그 정도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 건 아니었다. 객관적으로도. …권태환. 오 비서는 JL의 권 부사장의 이름이 들림과 동시에 침음을 삼켰다. 아무튼, 그 사람만 연관되면 저 난리다.

“그렇지 않아도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비서가 서두르는 티를 내지 않고, 무릎 위에 놓아두었던 물건을 들어 올렸다. 아차. 손아귀에 어찌나 힘을 줬던지, 태블릿 PC의 모서리가 젖어있었다. 간신히 재킷 안쪽에서 손수건을 꺼내 닦아 뒤로 건넸다.

“둘, 백경아 씨가 자취를 감추기 전 만나고 다녔던 상대가 있었다는군요. 게다가 알아보니…”

“…권시온?”

보조석에 사내는 뒤돌아 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룸미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콧등을 들어 올린 채였다. 그러다 이내 하, 하고 웃음을 뱉었다. 화면엔 몇 장의 사진이 떠올라 있었다. 검지가 그 위를 빠르게 스쳤다. 대략 다섯 장 정도 되는, 얼마 안 되는 화상뿐이었는데 계속 움직이는 걸 보니 몇 번이고 돌려보는 것이 틀림없었다. 누가 봐도 불법적인 촬영임을 알아볼 수 있는 장면들이었다. 각도는 어색했고 프레임에 쓸데없는 잔상이 많았다. 미행 대상이 워낙 철저한 탓이었다. 오 비서는 몇 가지 진실을 습득해두고 있었다. 심상의 보고서를 더듬어 보았다.

첫 번째. 별거 아니리라 넘길 뻔한, 경아의 옆에 있던 청년은 자세한 건 몰라도 권태환과 백경아의 계약 혼인에 영향을 끼친 바가 있다. 뒤이어 두 번째. 1의 근거는 확실했다. 백주영은 방금 그를 권시온이라고 불렀으나 그의 이름은 이시온이다. 그리고 그는 10년 전 JL의 양자로 지냈다. 고로 백경아는 사정을 알고 그에게 접근했을 것이다. 세 번째. ‘권시온’의 파양 신고를 한 뒤 얼마 되지 않은 시점, 귀국했던 권태환이 당시 부사장이던 권재성의 수족들을 하나하나 잘라낸 바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그를 향한 백주영의 열등감이 심각해진 때와도 겹쳤다. 오비서는 차례차례 되짚어 내리는 데 깊이 빠져있었다가, 파드득 현실로 끌어올려졌다. 주영이 저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얘 거처는, 파악해뒀어요?”

“동작구 쪽에서 작은 디저트 전문점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확한 주소도 파악해놨습니다.”

룸미러로 비친 주영은, 흰 치아를 드러낸 채 미소 지었다. 흐응. 콧노래인지 뭔지 모를 비음과 함께.

“아무튼, 권 형. 능구렁이가 따로 없어.”

모르는 이가 들으면 친한 친구를 탓하는, 간지러운 원망으로 들렸다. 누가 누굴 능글맞다 하는지 모를 일이나, 오 비서는 이견을 제시하길 멈췄다. 이럴 땐 얌전히 있는 게 상책이었으니까. 뒷좌석을 전부 차지한 이는 잠깐 위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턱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곤 이미 몇 번씩 본 사진들을 되새기기 시작했다. 영락없는 새끼 강아지 같더니, 많이 컸네. 혀로 입술을 축였다. 갑자기 뒷목이 뻐근해지는 것 같았다. 권태환이 제 뒷목을 잡아챘던 때가 벌써 몇 년 전인지, 남들이라면 일부러 헤아리지 않고선 기억 못 할 세월이 흘렀다. 그거야 다른 놈들이 그랬을 거라는 거고. 주영은 입맛을 다시듯 하관을 몇 번 움직이다 멈췄다. 마치 방금 떠올랐다는 듯이, 제 비서에게 질문 하나를 던지기 위해.

“아, 엄 비서님은 좀 회복하셨나요? 진작에 위로금이라도 보내야 했는데.”

오 비서가 마른침을 삼켰다. 빨리도 묻는다. 그러나 그는 프로답게, 수행인답게 해야 할 대답만 건넸다.

“네, 조치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백주영은 이제 자제하는 법 없이 콧노래를 불렀다. 십여 년 전, 그룹 간의 화합을 도모한다는 핑계로 마련된 파티에서 흘러나왔던, 그 곡이었다.

*

그날은 말이 기업 화합의 밤이지, 왕좌에 앉은 2, 3세대들은 얼굴만 비추거나 옛날과는 다르게 우리도 제법 가정적일 줄 안다는 척 직계 가족들을 대동하는 정도의 모임이었다. 실제로는 그들의 자식 대들이 모여 잔이나 좀 부딪히고 얼굴도장이나 찍는 자리라고 하는 게 정확해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다들 나온 학군이 엇비슷하니 분류도 큼지막하게 나뉘어서 어떻게 보면 동문회 혹은 동창회에 더 가까운 면도 있었고 말이다.

스물여덟의 백주영은 그곳에서도 한결같았다. 일단 이 회장 안에는 어떤 규칙이 있었다. 딱히 약속한 된 것도 아니지만, 이상하리만치 짜 맞춘 것처럼 가진 것이 많을수록 모습을 늦게 드러내는 경향들이 있었다. 주영은 알았다. 제가 가진 배경이 아예 ‘핫바리’는 아니지만, 그래 봤자 애매한 수준이라는 현실을.

그래서 더, 조용히 자존심을 세웠다. 그래서 이미 도착해있던 인물들이 건네는 한두 마디에 대답하긴 하나 능동적으로 굴진 않았다. 그저 의뭉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을 뿐이었다. 짧은 대답 한번, 아르망으로 목을 축이길 한번. 그 짓을 몇 번이고 반복했을 때였다.

‘어, 주영이 형. 와 있었어요?’

언제 오나 했다. 주영은 잔을 들지 않은 쪽의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아들이 넷이나 있는 집에 셋째라서 영향력이 크진 않아도 자신이 턱만 간질여줘도 제법 꼬리도 잘 치고, 무엇보다 집안이 좋았다.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제일 잘나가는 기업이 어디인 거 같으냐고 물으면 백이면 백, 다 두 그룹을 이야기했다. JL하고 SH 아니에요? 아, JL이 좀 더 자산 가치가 높나? 그리고 방금 연주자들의 왈츠곡을 뚫고 민망하리 만치 큰 목청을 뽐낸 게, 바로 SH 회장의 셋째 손자였다.

‘찬혁이 오랜만이네. 혼자 왔어?’

‘그러면 오죽 좋게요. 형이라는 놈들은 오자마자 알아서 찢어지고… 하나밖에 없는 동생 새끼야, 뭐. 이런 자리라면 치를 떠니까.’

언사가 참 저렴했다. 원래 출신 성분과 언행이 꼭 일치하라는 법은 없는 거다. 지나가던 서버를 정중히 불러 세웠다. 어느새 성큼 옆으로 다가온 상대에게 기다란 샴페인 잔을 건네기 위함이었다.

‘다들 그렇지 뭐.’

주영의 눈이 잘 깎은 손톱같이 휘었다. 그러자 그에 비해 머리 하나 정도 큰 상대가 힐끗 곁눈질하는 게 느껴졌다. 어울리지 않게 몇 번 입을 오물대더니, 곧 조심스레 물었다.

‘뜬금없긴 한데요, 형. 요새 놀 때 왜 나 안 불러…’

‘야, 이게 누구야. 백주영하고 공찬혁 아니야.’

…씹. 단박에 하관을 구긴 찬혁이 된소리를 뱉었다. 유순한 낯을 한 사내의 팔꿈치가 옆구리를 쿡, 아프지 않을 정도로 찔렀다. 그럼 그렇지, 저 하이에나들이 달려들지 않을 리 없지. 다 계산한 바였다. 그래도 아까 전 막 도착했을 때, 주제도 모르고 뻗대며 괜히 아는 척을 하는 치들보단 훨씬 나았다. 어디까지나 그들의 가문이 가진 권력이 말이다. 각기 개별적으로 보자면… 그냥 겉만 멀쩡한 쓰레기들 모임이었다.

‘무슨 이야기하고 있었어?’

저놈은 유통업계 쪽 둘째 아들인데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약쟁이에 알만한 폭행 합의만 다섯 번째고,

‘아, 혹시 주영이네 모임 이야기 중?’

또 이쪽은 조선업으로 유명한 기업의 방계이긴 하나, 종가 쪽 씨가 모자라 부친이 유력한 후계자이다. 그럼 뭐 하나, 그의 하나뿐인 외동아들은 저 어린 나이에 벌써 여기저기 스폰서 질하다가 더러운 새끼라고 소문이 파다하게 났는데. 찬혁이 대놓고 언짢은 티를 내며 꿍얼거렸다. 그래도 발길질은 하지 않아서 다행이네. 주영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황금색 액체가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에이 씨… 다들 무슨 관심이 이렇게 많아요. 주영이 형은 나하고 놀 거거든요.’

‘너도 참, 아무튼 백주영이를 지나치게 좋아해.’

너스레를 떨어대는 저쪽은… 백주영은 되짚어내기를 그만두었다. 어쨌든 결론은 다 알맹이만 그럴싸한 쭉정이들이라는 뜻이다. 저보다, 가진 것이 많은. 배알이 꼴릴수록 입꼬리를 위로 당겼다.

‘…관심 있으면 자리 빌 때 연락할게. 뭐 대단한 모임도 아니고.’

흐리멍덩하던 시선들에 총기가 들어찬다. 이야, 역시 백주영. 같은 칭찬이야 적당히 반응해 주면 그만이었다. 나름대로 다 쓸모들이 있었으니까. 재력도 충분하고, 시간도 많고, 배우라는 것도 많으나 적당히 회피할 수도 있는 이들이 뭉쳐서 뭘 하겠는가. 즐길 건 유흥뿐인데 그렇다고 평범하고 예사로운 것들에 쉽게 만족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 백주영은 그 점을 잘 이용할 줄 알았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클럽’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인 소모임을 만들었다.

온갖 더러운 짓을, 아주 말끔하고 뒤탈 없이 할 수 있는 루트를 뚫어서. HW의 주력사업이 리조트, 콘도, 호텔이기에 장소 제공은 어려울 일이 없었다. 입단속을 하기에도 쉬웠고, 어떤 재미를 선사하느냐만 잘 선택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그거야말로 제일 자신 있는 분야니까 두말할 것 없었다.

‘그런데 찬혁아. 아까 은혁이 형하고 스친 거 같은데… 너희 둘째 형 말이야. 그 형 후계엔 관심 없어서 이런 자리도 잘 안 오지 않아?’

‘아, 공은혁? 잠깐 권태환한테 인사하고 온…’

분위기가 잠시 얼었다. 큼. 헛기침 소리도 몇 번 들렸다. 내내 눈매를 동그랗게 말고 있던 주영의 낯빛에 찬 기운이 돌았다. 뭐 모르면 간첩이다, 이런 관용구가 있지 않은가. 그들에겐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백주영의 심기를 거스르기 싫다면, 그의 코앞에서 JL의 유일한 후계자의 이름 석 자를 입에 올리지 말 것. 찬혁이 덩칫값도 못하고, 어깨를 움츠리며 눈치를 봤다. 입까지 뻐금거리면서. 꼴사나웠다. 거슬리는 게 많았다. 지금 거론된 인물이나, 제 핏줄은 제 핏줄임에도 그를 떠올리게 하는… 골칫거리나. 안팎으로 난리네. 그러나 주영은 평정심을 찾았다. 적어도 입가만은 그랬다. 눈은 웃지 않았다.

‘그래. 은혁이 형하고 그 선배하고 나름 잘 지내는 거 같더라.’

‘어…어, 네, 네. 그쪽이 MBA 밟기 전에 얼굴이나 본다나… 왜 뭉개고 있지. 그거 진작 간다고 했던 거 같, 아니. 아니에요.’

남자는 나불거리는 제 입을 막았다. 코웃음이 나왔다. 어느새 잔이 바뀌었다. 대수롭지 않은 척, 목소리가 더 보드라워졌다. 소름이 살짝, 끼칠 만큼. 고깝더라도, 저 좋다고 잘 따라다니는 어린놈에게 잘 보일 가치가 꽤 있었으니까.

‘괜찮아. 나하고 좋지 못했던 거지… 그리고 그게 언제 적 일인데.’

모르는 이가 보면 해사하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는 찬혁의 입장에선 섬뜩했다. 아, 진짜. 이게 아닌데.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이려고 하던 차, 눈치를 보고 있던 주변인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대기 시작했다.

‘뭐… 그러게. 진작 가서 다 조지고 올 줄 알았더니. 왜 안 어울리게 미적거리지?’

‘그 성격에 진작 끝내고도 남긴 하지. 이상하긴 하네.’

자연스럽지 못한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야, 워낙 잘나신 분이시잖아. 뭐… 알아서 하겠지. 말을 돌리려는 시도가 몇 번 있었다. 주영은 무리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탄산 거품이 부드럽게 위로 차오르는 게 입가에 느껴졌다. 이번엔 마시는 속도가 제법 빨랐다. 비어버린 유리잔을 내려놓고 테이블 위에 팔 한쪽을 짚었다.? 슬쩍 뒤로 무게중심이 쏠렸다. 그가 옆에 있는 커다란 등을 몇 번 도닥여주었다. 그러고 나서야 공찬혁의 얼굴이 폈다. 그때, 누군가가 작게 속삭이며 운을 띄웠다.

‘…그, 나도 언뜻 들은 말이긴 한데.’

늘 끼고 싶어서 안달이지만, 실질적으로 집에서 대형 백화점 몇 개, 호텔 하나 굴리는 게 전부라 등도 펴질 못하는 ‘어중간한 놈’이였다. 물론 주영의 기준에서 그렇단 말이었다. 다른 이들도 다를 바 없이 여겼는데 웬일로 입을 열었다. 용감하게도. 들어나 보자는 듯, 혹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다는 듯 시선이 몰렸다. 그가 바르르 떨기까지 하더니 뒷말을 이었다.

‘왜… JL에서 갑자기 애 하나 입양했었잖아. 권태환이 유학 미룬 게 걔 때문이래.’

‘…뭐?’

되물은 이는 찬혁이었다. 제가 뭘 들은 거지 싶었나 보다. JL의 권태환은 늘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그게 능력적인 부분이건 피도 눈물도 없는 인성적인 부분이건 말이다. 그런데 누가 누구 때문에 뭘 어쨌다고? 백주영은 침묵을 고수했다. 그러나 그에게 밀착해있던 사내는 분명 보았다. 그가 평온한 척 유지하던 눈동자가 커지고 콧등이 구겨져 있다는걸. 아주 찰나였으나, 분명히 보고야 말았다. 공찬혁은 서둘러 무마하려고 일부러 목소리를 과장되게 높였다. 마음 가는 대로 되진 않았지만.

‘하하, 씨발.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그 인간이 주변 신경이나 쓸 위인이냐? 그렇지 않…’

‘어, 권태환이다.’

다른 한 명이 멍청한 음성으로 본 바를 알렸다. 어찌나 일사불란한지, 동시에 고개가 휙 꺾이는 모습이 군무에 가까웠다. 회장이 거대한 스탠딩 코미디 혹은 블랙 코미디 무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이윽고 모두가 알았다. 저 새끼가 들은 소문이라는 게 개소리, 헛소리는 아닌가 보다. 뒤를 돌아보기가 겁이 나기도 했다. 그런다고 큰일이 나진 않겠으나… 기분상은 그랬다.

부사장인 권재성 내외가 노인네들이 모인 곳으로 빠지고, 권태환은 제 옆구리에 어떤 걸 낀 채 안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곧고 위압적인 자태는 한결같아서 자신들 또래인데도 한참 앞서있는 느낌을 풍겼다. 항상 그래왔고 실제로도 그래왔다. 그는 어떤 곳에서 얼굴을 비치든 흐트러지질 않았다. 곧 내년이면 서른이긴 해도 아직 20대임엔 틀림이 없건만, 그 나이대가 하기엔 부담스러울 수 있는 올백이 잘도 어울렸다. 그는 하관의 선이 뚜렷하고 몸이 좋았다. 신장과 덩치로는 어디 가서 꿀린 적이 없던 공찬혁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정장은 전부 맞춰서 입는다지. 그럴 만도 했다. 핏을 고려한 셔츠가 팔만 들어도 팽팽하게 선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간미가 없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이다. 이에 얽힌 일화도 많으나… 풀어놓을 틈은 없었다.

‘…진짜였던 거야?’

누군가가 입을 벌린 채 비명처럼, 작게 뇌까렸다. 모두가 주목하는 건 태환이기도 했으나 아니기도 했다. 권태환 옆에 붙어있는, 아니. 사내가 친히 어깨에 팔을 두른 채 떨어트리지 않는 앳된 인영에 관심이 쏠렸다. 중간마다 제가 제대로 봤나 싶어 눈을 비비는 놈들도 여럿 보였다. 주영도 JL의 주 측들이 무슨 꿍꿍이인지, 별안간 고아 하나를 입양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벌써 4년 전에 보고를 듣고, 자료도 받아봤었다. 알면서도 신경을 쓰지 않았던 건, 별 의도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대동해 다니면서 사진을 찍거나 보도를 하지도 않았다. 홍보에 쓰이는 일도, 이미지메이킹을 하는 것도 없었다. 복지 재단 쪽에서 지원해 주던 보육원 출신이고 가끔 인터뷰랍시고 코치가 JL을 언급하긴 했다는 건 안다. 딱 거기까지. 특별할 것도, 건질 이득도 없어서 금세 신경을 껐었건만.

말갛고, 잔잔하고, 선한 이목구비였다. 신전 기둥만 한 권태환과 비교하면 작고 가늘긴 했으나 그다지 월등한 차이가 나질 않는 거 보니 키도 훤칠할 게 확실했다. 이 먼 거리에서도 알 수 있었다. 귓바퀴를 물들이고 저를 붙든 이를 올려다보며 몇 번이고 속눈썹을 팔랑거리고 있단걸. 권태환, 그 사내는 연약한 것과 물렁물렁한 것을 아낄 줄 몰랐다. 오히려 혐오했으면 모를까. 그런데 이게 다 무슨 조화란 말인가.

‘…형.’

곤두선 귀에 여린 음성이 꽂혔다. 저 어린 것이 무리의 주목을 느껴 긴장감이 들었나 보다.

올해로 아마도, 열일곱쯤인가. 마냥 어린애는 아니었다. 단순히 소심한 걸지도 모르나 백주영은 알았다. 남이 저에게 의지한다고 바로 받아줄 남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제 눈앞의 권태환은 기꺼이 허리를 굽혀 옆에 있는 소년과 눈을 맞췄다. 그리곤 이쪽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쳤다. 예의를 차리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적어도 불쾌해하며 혀라도 찼으면 했지만… 완벽한 무시였다. 저의 관심은 오로지, 제 품 안의 존재에게 가 있다는 걸 선포하는 것 같았다.

‘권시온, 뭐 좀 마실까.’

신경 쓰지 마, 무시해. 그런 언질도 없었다. 권태환은 제 양 동생을 한시도 떨어트리지 않은 채 등을 보였을 뿐이었다. 당신이… 네가. 남에게 그런 걸 베풀 줄 알았던가. 주영은 석상처럼 굳었다. 잔을 들고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니라면 그 가느다란 손잡이 부분이 두 동강이 났을 테니까. 공찬혁이 안절부절못하든 말든, 한동안 그의 두 눈은 권 씨 형제가 있던 자리, 거기에 붙박여 있었다.

*

오 비서는 종을 잡을 수 없었다. 도착하기까지 잠시 조용하나 싶더니, 제가 모시는 이는 이제 걸음을 재촉하며 중얼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설마 아직도 놓지를 못했을 줄이야… 하긴. 그럴 만하지.”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지만, 원래도 그랬으나 정말 미친놈 같았다. 혼자 논제를 꺼내는 걸로 모자라 혼자 결론까지 짓는다. 어떤 내용인지 알아들을 순 없었으나 알아도 문제일 게 뻔했다.

“애초에 쉽게 버릴 거였으면… 아. 오 비서님.”

주차장에 있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였다. 백주영이 과장된 몸짓을 취했다. 아래에 손바닥을 두고 다른 하나는 주먹을 쥔 채 툭, 쳤다.

“개업 화분도 하나 준비해 주세요. 디저트 전문점이라니, 의외네.”

화려하고 좋은 걸로요. 그가 덧붙였다. 8년 차 비서는 눈치가 빨랐다. 아, 그 인물에 대한 지시구나. 메모를 해두기 전에 승강기의 버튼을 누르려 상체를 앞으로 뻗었다. 그 바람에 주영과 눈이 딱 마주치고야 말았다. …백 이사님이 저렇게 즐거운 낯짝을 하고 있으면 꼭, 큰일이 생기는데. 두통이 일기 시작했다.

*

사무실 공기가 이상했다. 여기서 이상하다,는 뭔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걸 말한다. 낯섦이라고 명명해도 좋았다. 김 비서는 동료 비서들에게 눈짓했다. 적게는 3 샷, 많게는 5 샷까지 넣은 커피를 돌리면서. 아침 의례였다. 그의 일과는 일단 출근을 해서 간단해 보여도 상세한, 마치 따듯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일정표를 들고 부사장실에 들어서는 일에서부터 시작했다. 모든 출발에는 준비가 필요하듯, 매번 저보다 먼저 들어선 동료의 눈치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의 심기를 살핀다기보단, 정확히는 저희가 모시는 이가 들어설 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기분은 어때 보이는지 따위를 탐색하는 과정이 늘 필수적으로 이뤄져야만 했다.

상사, 즉 권태환 부사장이 자기 기분에 따라 아랫사람을 대하는 감정적인 인간이냐고 묻는다면… 그렇진 않았다. 단지 김 비서 스스로 더 조심하려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뿐이었다. 개중에서도 금일은 다들 안색이 오묘했다.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고. 애매하다기엔 또 최악은 아닌 것 같고. 비서 생활을 하는 동안 익힌 빠른 눈치로도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나 들어가 말아? 선임으로 치면 세 번째쯤이지만, 가장 대외적으로 보기 좋은 외형과 꼼꼼한 성미 덕에 가장 많은 일을 하는 그가 손짓해댔다. 부사장실의 문을 검지로 몇 번 찌르고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맞추지도 않았는데 자동으로 통용되고 있는 제스처 중 하나였다.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이가 눈알을 굴리는가 싶더니, 곧 비장하게 고개를 아래위로 움직였다. 들어가도 되긴 된다는 건데. 김 비서는 찝찝했으나 일단 문을 두드리고 봤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부사장님. 들어가겠습니다.”

태환은 딱히 들어오라 허락하지 않았다. 늘 그래 왔기에 익숙했다. 정해진 브리핑에 대해서는 굳이 대답을 건네주지 않는다. 여기까진 평소와 똑같았다. 다른 시설은 다 신식이면서 왜 임원들의 개인 사무실 문짝은 다 무겁고 두꺼운 원목인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김 비서는 이러기 위해서 바쁜 시간을 쪼개 PT를 다니는 프로였다. 팔뚝에 힘이 들어갔다. 내부가 서서히 한눈에 들어왔다. 사실 면적이 넓어 다 담기엔 시야각이 모자랐지만, 그래도 봐야 할 건 전부 보였다. 한 면을 가득 채운 전면 창과 입구에서 대각선으로 몸을 틀면 보이는 데스크 말이다. 권태환의 자리였다. 부사장실은 고층에 있는 탓에 블라인드를 치지 않는 한 햇빛을 가릴 게 없었다. 건물 대부분을 아래에 깔아둔 듯한 풍경이 보이고, 소리 없이 고개를 돌리자 의자에 앉아 반쯤 몸을 돌린 부사장이 보였다. 팔걸이에 걸친 손에 턱을 괴고 보기만 해도 단단한 허벅지와 돌출된 무릎을 꼰 자세는, 익숙했다. 언제나와 다를 것 없는 자세였다.

어. 하지만 김 비서는 알았다. 다른 이들이 느낀 위화감과 같은 걸 잡아낸 것이다. 일단 권태환은 창밖을 잘 바라보질 않는다. 적어도 아랫사람들 앞에선 그랬다. 우수에 잠긴, 회상하는, 골몰하는. 전부 그와 어울리지 않는 감정 표현들이었다. 보통 이른 아침부터 모습을 드러내 업무를 보며 미간을 구기거나 뭔가 마뜩잖다는 듯 손가락을 튕기고 턱을 구겼다. 아주 드물게 태블릿의 액정을 툭툭 치며 바로 진행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게 예삿일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한가롭게 뷰를 내려다보고 있다니.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김 비서는 벌어지려는 턱을 간신히 붙들었다. 상사가 저를 부른 덕분이기도 했다.

“김 비서.”

마른침이 삼켜졌다. 호명된 이가 겨우 동요를 지워낸 채, 평정을 가장한 낯빛을 들어 올렸다.

“네, 부사장님.”

“이틀 뒤에 프레지덴셜. 그날 시온이 픽업도 해주고.”

확실히 오늘의 권태환 부사장은 이상하다. 낯설다. 그 와중 뇌가 얼마나 일에 절여졌는지, 분부에 대한 의도는 빠르게 읽어낼 수 있었다. 그 밖에는… ‘시온이’? 누굴 저렇게 다정히 부를 수 있는 인종이었느냐는 경악을 삭여내는 게 최선이었다. JL 산하 호텔의 프레지덴셜 스위트는 보통 아닌 척 눈가림을 해 특정 인물이 선 예약을 할 수 있게 되어있기 마련이고 그곳의 같은 급 객실은 단 한 층뿐이다. 그리고 제 상사 역시 그 월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 중 하나였다.

왜 내 속이 울렁거릴까. 멀미가 나는 듯했다. 실은 그가 그 작디작은, 낙후되었다고 하면 실례긴 해도 실제로도 상당히 오래된 상가 건물을 들락날락 거리는 것도 매우 놀라웠건만. 목적이 뭔지는 모르긴 몰라도 확실히 제 양 동생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신경도 쓰지 않던 호텔을 선점해두려 한다. 뉴스에 나오진 않겠지만, 제 동료의 입에는 사시사철 오를 화두가 될 게 뻔했다.

“김 비서.”

채근과 함께 번쩍 목을 곧추세웠다. 잠시 정신이 나간 새, 분명 앉아있던 태환이 두 다리로 서 있었다. 한쪽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저를 주시하기까지 했다. 불쾌해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고 자괴감이 들지 않는 건 아니고. 김 비서는 속으로 통탄했다. 김지희, 네가 기어이 미쳤구나. 그의 눈앞에서 넋을 놓다니. 커다란 실책이었다. 왼쪽 손목이 절로 떨렸다. 상으로 받았던, 그러니까 정확히는 포상으로 아무거나 사라며 내민 카드로 긁은 피아제가 갑자기 족쇄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권태환의 낯은 큰 질책의 빛을 띠고 있지 않았다. 눈썹을 들어 올리고 입매를 비틀었는데 언짢을 때 보이는 각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제가 약간은, 상사에게 걸리는 구석을 보인 건 확실하기에, 김 비서는 마른 성대를 가다듬었다. 죄송합니다, 라고 뱉었어야 했는데 이놈의 입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이렇게 즐거워 보이시는 건 처음이라.”

몸이 머리를 배반한다는 건, 이런 건가. 아득해졌다. 정신이 아니라, 제 앞날이. 어. 아. 바보같이 소리 없는 단말마를 더듬고 있었는데, 낮게 가라앉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흔들리던 동공이 덩달아 멈췄다. 권태환은 그새 걸음을 움직여 온더락 잔 같이 생긴 크리스털 잔에 물을 따라 마시고 있었다. 절대 보여주지 않는 모습 중 하나였다. 정말 기기하다. 호흡을 먹는 듯한 웃음이 서서히 멎었다. 그는 되돌아가 앉았다. 살짝 다리 사이를 벌린 채 앉아있다가 느릿하게 다시금 다리를 꼬며 말했다.

“남들 눈에도 그리 보인다니. 재밌네.”

재미. 결론은 제 목이 무사하다는 거다. 어떤 점이 재미있느라고 묻지는 않았다. 더는 실수하고 싶지도 않았고. 김 비서는 본연의 업무를 하기로 했다. 큼. 이번엔 제대로 소리를 내 목을 가다듬었다. 구두 굽 소리가 대리석을 부딪치는 마찰음이 성마르게 울렸다. 가볍게 묵례를 한 뒤 최대한 평온하게 일정을 읊었다. 셔츠 깃 아래로 돋아나는 닭살은 무참히 무시당했다.

“말씀하신 부분은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오늘은 오전 열 시에…”

신경 쓰지 말자. 제 상사의 시선이 또 한 번 창밖으로 가 있든 말든. 나는 지금 AI다. 스케줄러 같은 거다. 김 비서는 의식적으로 화면 위에 박힌 시선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 덕분에 권태환은 아주 매끄럽게, 제가 떠올리고 싶은 기억의 단편을 더듬을 수 있었다. 제 옆의 인력이 무슨 수고를 하든 아랑곳하지 않는 거야 늘 있는 일이었으니.

*

‘들뜨다’. 사전에 따르면 동사로, 1. 마음이나 분위기가 가라앉지 아니하고 조금 흥분되다. 2. 단단한 데에 붙은 얇은 것이 떨어져 틈이 벌어지며 일어나다, 라는 의미가 있었다. 권태환의 심리상태는 첫 번째에 해당했다. 유사한 동사론 설레다가 있는데 그걸 명사로 바꾸면 설렘이다. 이쪽에 더 가깝나? 눈썹이 까닥였다. 권태환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개중에서도 아래쪽 벽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저택 내부는 어수선하지 않았다. 그저 사용인들이 몇 마디를 소곤거리고 서로 눈치를 볼 뿐이었다. 늘 숨죽이고 일만 하도록 학습된 이들 답지 않긴 했다. 거실 너머, 로비에서부터 어떤 음성이 들려왔다. 그의 모친이 흔하게 내는, 신경성 두통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어조였다. 뒤따라온 건,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는 부친의 곤란한 목소리였다.

‘아직도 몰라요? 단순해 빠져서는. 그런다고 걔가 나아지겠느냐고.’

‘…하. 일단 관심을 두긴 하잖아, 두고 보자고.’

걔. 아들을 가리키기에 적절한 지칭은 아니었다. 새삼스럽지도 않아 별반 상관은 없었다. 사족이지만, 그의 어머니는 분명 제 핏줄이 맞았다. 25년 전, 아홉 달 내내 저를 품느라 히스테릭이 생겼다나. 지나가며 들은 거 같기는 한데 기억할 가치는 없었다.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고 그럴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했으니까. 양친과 저는 요구하고 받아내는 것이 명확한 사이였다. 아버지란 이는 자신의 윗세대, 그에겐 아비이자 남자에겐 조부가 되는 인물에게 굴욕을 당했다며 늘 푸념을 늘어놓기 바빴다. 레퍼토리라면 레퍼토리였다. 그래서 피조물인 자신에게 공감을 바랐던가. 헛되기 그지없는 희망 사항이었다. 다행히 부친, 권재성도 그걸 모를 정도로 둔감한 인사가 아니어서 다행일 정도였다. 애정이 있는 건 아니기에 태어난 본성대로 내버려 두나 싶더니, 갑자기 또 뜬금없는 작당 모의를 했다. …우리 가문에 새 식구가 들어올 거다. 올해 초 언젠가 있던 저녁 식사 시간에 별로 모이지도 않는 세 명의 구성원을 굳이 집합시키곤 한다는 말이 그거였다.

제 아비와 지고지순한 첫사랑 사이에 뭐, 배다른 형제라도 생긴 건가. 기력은 넘치네. 그 정도 감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의 비서가 기다란 식탁에 서류 몇 장을 내려놓았다. 권태환의 접시가 놓인, 바로 그 옆에. 보라고 준 걸 테니 살펴보는 척이라도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귀찮아지니까. 제 부친이지만 지나치게 징징대는 편이었으니까 몇 장의 종이는 보육원에서 보낸 원생, 그러니까 보호하고 있는 아동에 대한 신상명세서였다. 작은 증명사진 하나가 붙어있었다. …뭐, 어쩌라는 거지. 눈을 가늘게 뜨고 주시했더니 고작 그 눈빛 하나로 헛기침을 뱉은 재성이 제 계획을 줄줄 늘어놓았었다.

…너도 뭔가 정 불일 것이 필요하다고 윤 박사가 그랬으니 적당히 골라 봤다. 잘 대해주라곤 하지 않으마. 살펴나 보고, 험하게만 대하지 말아라. 그 엉뚱한, 권유도 아닌 선포에 제가 뭐라고 반응했던가. 딱히 입을 열진 않았던 건 분명하다. 콧등이나 좀 구기고 턱에 힘줄이나 좀 돋았을 터다. 윤 박사는 이 저택에 드나드는 주치의 중 하나였다. 개중도 정신의학과를 담당했다. 아무튼, 체념을 모른다니까.

뜬금없는 통보의 내용이 썩 내킨 건 아니었으나 거부 의사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지겹기는 했다. 재성의 어쭙잖은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처음엔… 열 살 때쯤이었나. 그는 갑자기 종 모를 개 하나를 데려왔었다. 아이의 정서 발달에 반려동물이 도움 된다는 학술적 사실을 어디서 주워들은 탓이었다. 귀엽지 않으냐, 보듬고 싶지 않으냐 물어대는 통에 지루했던 기억만 있었다. 어린 권태환은 따분해 하는 와중에도 의구심이 들었다. 보편적, 즉 인류 다수가 어린 동물을 어여뻐하는 특성이 있다고 해서 그게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뉠 수 있는 부분인가? 입을 다문 채 날리는 털을 무감하게 보고 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라고요. 라고 물었다, 학술적으로 이제 막 자아의 판단력이 생길 시기의 어린아이의 눈빛이라고 믿기에는 서늘한 시선이었다. 부친은 그에 할 말을 잃은 듯 안색이 퍼레졌다. 그 뒤로 다신 개를 볼 수 없었다.

여기까지 들으면 포문을 열듯 언급했던 동사며 명사는 다 뭐느냐는 궁금증이 생길 테다. 핵심은, 저도 인간이고 사람인데. 제 부모와 정신과 전문의는 도드라지진 않아도 약간 문제가 있다고 에둘러 말하면서도 늘 저를 사회부적격인 인격장애 취급을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그가 감정이 없느냐면, 사실은 아니었다. 보편에 살짝 미치지 않는 정도랄까. 진단서 상으론 말이다. 권재성이 여러 차례 발악하듯 노력한 바는, 아예 헛수고는 아니게 됐을지도 모른다. 이번만큼은, 우습게도 이번 시도는 아예 실패는 아닐지도 몰랐다는 거다.

‘그러니까 다 쓸데 없… 있었니?’

드디어 제 존재를 감지해낸 모친이 문장을 집어삼켰다. 멋쩍었는지 앙상해 보일 정도로 마른 손등으로 힘껏 다듬은 머리카락을 넘기고 있었다. 그의 자식은 양쪽 어깨를 으쓱 올려 보이는 걸로 상황을 마무리했다.

‘…일찍 왔구나.’

‘저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바쁜 두 분은 일 보셔야 할 거고.’

아비의 얼굴이 볼만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으니까. 그랬다. 제 양 동생이 될 아이가 저택에 들어오는 날은 오늘이었다. 알고 있었다. 일부러 염두에 두고 일정을 조정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영상 자료는 경기를 분석하기 위한 것뿐이었다. 몇 달간 되새겼던 화상들을 선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조악한 화질로도 감춰지지 않는, 물살을 가르는 잔잔한 눈동자를 실제로 볼 수 있을 터인데 놓치기엔 아까웠다. 정말 생전 처음 느끼는, 거대한 기대감이었다. 권태환은 처음으로 사전이 아닌, 생경한 설렘을 매만질 수 있었다. 그런 걸 제 손에 쥐여준다는데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남자는 오늘, 제게 뭐가 됐든 최초가 될 가능성이 제일 큰 존재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날은 춥고, 밖은 살풍경했다. 그의 눈에는 더없이 반짝였지만 말이다. 볕에 부서지는 고요한 수면처럼. 아직 마주하지도 못한 그 아이의 눈빛같이. 진한 미소가 걸렸다.

*

“이상입니다.”

상사는 제 기나긴 일장연설, 아니. 일정 연설이 다 끝나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듣기는 했나 싶었으나 경솔히 되묻진 않았다. 저의 행위는 일과일 뿐이다. 진작에 제 일정은 알고 있을 거다. 변경되지 않는 한, 아마 한 달 치 정도는.

“30분 정도 걸리던가.”

“네. 차량 대기 중입니다. 바로 내려가시겠습니까?”

거 봐라. 다 알고 있지. 김 비서는 내면의 눈썹을 들었다 내렸다. 실제로 그렇게 하진 않았다. 경망스러워 보일 테니까. 이런 것도 다 모시는 자의 미덕 아니겠는가. 이번에도 수긍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항상 행동이 먼저인 편이다. 워낙 말이 길지 않은 이였기에 색다를 건 없었다. 오히려 이러는 편이 더 마음 편한 자신을 자조했다. 남의 돈 받고 산다는 게 다 이런 거지 싶었다. 권태환은 일어나서 밖으로 향했다. 김 비서는 당연한 순서처럼 그 뒤를 따랐다. 이후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이행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을 다독이면서.

*

진저브레드 케이크는 디저트로 분류함이 옳은가.

유학시절, 교수가 농담으로 꺼내놓은 의제였건만, 학생들은 모두 진지하게 탐구하기 시작했었다. 시온은 영문도 모르고 그들이 영어로 떠들어대는 걸 듣기만 했지만. 열정이 어찌나 가득한지, 유학생이 거의 태반이기에 마련된 기숙사에서까지 그 열기가 사그라질 줄 몰랐더랬다. 같은 조상을 가진 구겔후프를 비에누아즈리, 이스트로 부풀리는 제빵의 방식을 사용하지만, 단맛이 가미되어 있는 빵을 주류로 하는 가게에서 주로 판매하는 이유가 뭐겠느냐. 디저트가 아니다 파의 입장이 대체로 그렇게 정리되었다.

그건 구겔후프만 그런 거 아니냐. 그렇다고 모든 진저브레드를 묶을 순 없다. 그리고 실제론 블랑제리, 파티셰리에도 취급하기도 한다. 애초에 결이 다르다. 그럼 파네토네의 존재는 뭐라고 설명할 거냐. 이탈리아인들에게 물어봐라. 그게 식사용인지, 디저트용인지. 그리고 이것이 디저트이다 파의 주장이었다.

그러면 이시온은 개중 어느 쪽이었느냐? 잘 모르겠고 일단 다음 과제를 어떻게 해야 하나 홀로 고민에 빠지는 걸 택했다. 소란은 뒷전이었다. 논의는 무려 삼 박 사 일 동안 이어졌다. 믿을 수 없게도. 그리고 뜻밖에 싱거운 결말을 맞이했다. 너희 말대로 뼈대가 같을 뿐, 각국마다 각 파티셰마다 입장과 방식이 다를 테니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술자지만 창작자기도 하다. 원래 그런 직종에 명확히 정해진 바가 어디 있겠느냐. 그게 불을 붙였던 교수가 다음 강의 때 내놓은 해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그래도 이렇게 고심하는 건 꼭 필요한 과정이고 연습이 필요하다며, 다들 즐거웠으면 된 거라고 했다. 물론 듣는 제자들의 반응은 폐허와도 같았다. 심지어 언쟁을 계기로 헤어진 연인도 꽤 있었다나. 홀로 중립도 아닌, 자신의 할 일을 할 뿐이었던 시온은 그 소란을 그대로 잊어버렸다. 그런 일도 있었었지, 정도로 남겨두고. 그랬었는데. 방관자에게 내리는 벌이라도 되는 걸까. 청년의 눈 밑이 언뜻 거무죽죽했다. 그제 그렇게 잘 자놓고, 그다음 날에 바로 밤을 꼴딱 새워버린 탓이었다. 이제 와서 그 주제로 고심했느냐고? 그렇진 않았다. 그 과거의 일화가 떠오른 건 다른 사연 때문이었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걸까.”

잘 하지 않던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어젯밤, 종류는 정했다. 주제는 어느 대회보다도 명확한데 또 두리뭉실하기도 했기에 고민이 많았다. 술과 어울리되 달지 않고 물리지 않을만한 종류. 만만치 않은 난제임엔 틀림이 없었다. 일단 후보로는 여럿이 있었다. 그나마 추리고 추려 남은 게 럼에 적시고 크림을 곁들이는 바바 오 럼과 사바랭, 그리고 마지막이 진저브레드 케이크였다. 앞선 두 가지의 차이는 미세했다. 전자에는 럼레이즌이 들어가고 후자는 들어가지 않은 채 동그란 링의 형태를 하고 있다는 점이 달랐으니까. 여기서 문제가 바로 휘핑크림이었다. 설탕을 줄여도 보고 대체재를 사용해 보기도 했으나 몇 번을 먹어봐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태환의 입에는 달다 못해 역할 수도 있겠다 싶었던 거다. 그럼 차선책은 당연히 마지막 선택지였다. 그리고 고뇌는 심화된다. 그럼 ‘어떤’ 진저브레드 케이크를 만들어야 하는가. 갈림길이 수십 가지로, 삽시간에 늘어나 버렸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시온은 벌써 7번째로 시도 중인 결과물이 다 익었음을 통보받았다. 새 오븐은… 처음의 곤란함이 무색할 정도로 좋았다. 하얀 귀가 또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박력분과 베이킹파우더, 베이킹 소다 위에 시나몬을 메인으로 생강가루 약간, 거기에 넛맥과 정향 등을 섞은 믹스드 스파이스를 넣고 반죽기를 돌렸다. 직전에 시도했던 반죽은 사용했던 흑설탕의 입자 탓인지 조금 넘치게 달았다. 그래서 양을 줄이고 다른 꾀를 내기로 했다. 아침부터 만들어두었던 오렌지 필 콩피를 넣었다. 이 레시피에는 레몬 시럽으로 시트를 적시는 게 일반론이었지만… 그렇기엔 묵직한 향신료에 비해 시트러스의 향이 약하기만 했다. 잘게 다진 콩피가 제발 저를 구원하길 바랐다. 이때껏 디저트를 구우며 이런 간절함은 처음이었다.

이건 김을 빼기 위해 내버려 두기로 하고, 이번엔 주문받았던 케이크의 마무리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자신이 지나치게 비장하다는 걸 깨닫지 못한 시온은 아이싱을 준비했다. 손님이 찾으러 오겠다 일러둔 시간이 20분쯤 남았을 때, 그는 잠시 미뤄두었던 진저브레드 케이크에 칼을 댔다. 오렌지 껍질 특유의 쓰지만 청량한 향이 잠깐 올라오나 싶더니, 이내 그보다 더 존재감이 역력한 향신료가 비강을 가득 채웠다. 아주 작게 잘라낸 조각이 도톰한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갔다. 한참 치아로 씹고 혀로 분해하기를 수 분, 시온의 눈매가 동그랗게 변했다.

“…됐다.”

드디어 안도할 수 있었다. 사실 정답은 없다. 연륜이 있던 교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게 해답이라고 정해둘 순 없었으나 확신이 있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을 터였다. 한편으론, 실은 알고는 있다. 제가 뭘 만들든, 심지어 꿀과 설탕과 당밀로 세계에서 가장 단 물질을 생성해낸대도… 권태환은, 제 형은 먹어줄 터였다. 저가 그걸 용납하지 못하는 거지. 이어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허무함이 가슴께를 스쳤다. 내가 이 버릇을 아직도 못 고쳤구나. 별안간 자아 성찰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수영은 그냥 시켜서 한다면서, 그 ‘사내’가 경기를 보러 온다고 하면 갑자기 잘하고 싶어졌더랬다. 욕심은 딱히 없다면서도 좋은 기록을 내고 싶어서 종종 구르려던 제 발을 진정시키던 시절이 있었다. 이렇게 보면 그에게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뭐라 할 게 아니었다. 사돈이 남 말, 아니. 양 동생이 남 말을 한 격이었다. 그렇게 마른 세수를 멈추지 못하고 있었더니 밖에서 방울이 땡그랑, 울렸다. 퍼뜩 얼굴을 들어 올렸다. 예약 손님이 서두른 모양이었다.

*

“어, 이제 미리 만들어서도 판매하시는 거예요?”

경아가 입소문을 낸 뒤, 그 주변에서 SNS에 시온의 케이크를 올리곤 한다 들었다. 효과는 놀랍게도 상당했다. 특히 지금 눈앞의 손님은 시온의 열성 팬에 가까웠다.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고 두 아이를 키운다는 손님은 발이 넓었다. 메종 단 루를 알게 된 계기를 딱히 물어본 적은 없으나 지인이 올린 사진을 보고 예쁘다 싶어 맛도 괜찮으냐고 물어봤더니 호들갑을 떨며 추천을 했다는 말을 알아서 줄줄 늘어놔주었다. 그래서 굳이, 자가용을 타고 40분은 걸리는 메종 단 루에 찾아와 둘째 자녀의 생일 케이크를 맞췄다. 두 개씩이나. 큰 호수인데도 몇 개씩이나 주문을 넣기에 의문이었던 찰나, 그 또한 알아서 답변을 내놔주었다. 올 사람이 많아서요. 그가 같은 디자인의 케이크 두 상자를 들며 웃었다.

그다음 주문의 제목은 결혼기념일이었다. 왔다 간 지 한 달도 안 된 참이었다. 꽤 흥분한 어조로 이전에 찾아갔던 게 매우 좋았다며 팔을 크게 휘두르기까지 했다. 파티에 왔던 아이들과 그의 부모들 또한 모두가 호평이었다고. 자기는 모양새와 큰 틀만 고른 것뿐인데 아이들 몫의 주스에도, 어른들 몫의 샴페인에도 잘 어울렸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파티셰님 실력이 대단하시던데요! 높은 톤의 음성이 재잘거렸다. 참 활기찬 사람이었다. 그가 꽤 부촌에서 산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자랑해서가 아니라 지역을 듣고 알았다. 태환이 사는 곳과 비슷했다. 굳이 가늠하고 싶은 건 아니었으나 머리가 알아서 굴러갔다. 그래서 파티가 제 짐작보단 규모가 컸겠거니 했다. 그런 곳에 사는 이들은 뭐든 큰 모임을 좋아했으니까.

이후에도 꾸준히 찾아왔다가, 일전에 있던 일련의 사고 탓에 영업 중지를 했기에 큰 아쉬움을 표한 무리 중의 하나가 돼버린 이였다. 미안한 구석이 없지 않았다. 주문의 목적이었던 둘째의 생일은 그 사이에 지나버렸고, 기념일도 지났다. 이제 구실은 첫째였다. 큰 애가 좋은 사립에 입학했거든요. 별거 아닌 거 같아도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서. 너스레 섞인 웃음이 꽤 기분 좋아 보였다.

“…아니요. 마침 연습 삼아 구울 일이 생겨서.”

“어머, 그럼 저만 따로 챙겨주시는 거예요? 잘 먹을게요!”

빚은 아니었으나 부채감이 있었기에 덤을 들려 보내고 싶었다. 선택받지 못한 사바랭, 바바 오 럼과 바리에이션을 달리한 몇 조각의 진저브레드 케이크를 담은 상자를 내밀었더니 돌아온 반응이었다. 그는 턱 밑으로 두른, 패턴이 화려한 스카프를 내린 채 손에 들린 상자에서 나는 향기를 맡았다. 다양한 경험에서 비롯한, 디저트에 일가견이 있는 손님이라 잔향만으로도 뭔지 알아맞힌 듯했다.

“…이건 바깥사람하고 단둘이서 먹어야겠네요. 안주용인데요?”

그는 완전한 타인이다. 이 젊은 사장이 어떤 인간관계를 가졌는지, 무슨 속내로 얼마만큼 고민하고 있는지 알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뜨끔, 해버렸다. 시온은 제 목덜미가 불타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런가요. 하고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손님은 일방적인 수다를 마치고 돌아갔다. 곧 또 올 거예요. 하고 허언이 아닐 끝인사도 잊지 않은 채. 시온은 한동안 매대 앞에서 멀뚱히 서 있었다. 요새 들어 계속 이런 꼴인 듯했다. 안주용 케이크. 사실 술과 디저트를 페어링 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우스갯소리처럼 소주 안주로 생크림 케이크를 먹는 이들도 있다고 들었다. 그건 그런데… 시온이 등허리를 피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완고했던 과거의 자신이 부끄러워진 탓이었다.

*

‘시온아. 너는 왜 술이 싫니?’

‘…네?’

양주 궤짝을 든 채로 듣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지적이었다. 막 스물둘이 된 이시온은 스승의 질문에 동작을 멈췄다. 연세가 제법 되는 선생님과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청년은 성년이 된 지 얼마 안 되었으나, 워낙 성숙한 편인 덕분일지도 몰랐다. 저를 담당하던 코치의 손위 누이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 새삼 의심이 드는 때가 있었다. 정말, 코치님과 한배에서 태어난 분이 맞을까? 하는 의구심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코치님은 항상 직설적이고 직관적이었다. 목청이 큰 건 체육계에 흔히 있는 특성이라고 쳐도, 성격이 닮지 않는 건 확실했다. 아마도.

그와 큰 부딪힘이 있는 건 아니었다. 무뚝뚝하고 말수 없는 저가 고까웠을 수도 있었을 텐데, 코치는 저를 끝까지 챙기려 했다. 그 결과가 이 오래된 제과점이었고. 반대로 스승은 남의 속내를 쉬이 추측하는 분이 아니었다. 두려움이 아니라 신중함이 만들어낸 성격으로 보였다. 그런데 이번에 날아들어 온 문장은 좀 의외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게 밑에 있었으나 이런 종류의 질문은 처음이었다.

‘럼이나 위스키가 들어간 걸 만들 때나… 지금처럼 주류를 옮길 때마다, 네 입가가 자꾸 아래로 쳐지는데. 몰랐어?’

당황에 흔들리던 홍채가 퍼지듯 크기를 키웠다. 잘 말려 빻은 밀가루처럼 푸슬푸슬 한 음성에 웃음이 섞여들었다. 곤란하게 하려던 건 아닌데. 배려도 살짝 끼어들었다. 긴 다리가 바삐 움직였다. 원래 목표로 하던 지점에 상자를 내려놓고 난 뒤, 곧바로 스승의 앞에 돌아왔다. 시온은 잠시간 멈춰있다가 서서히 팔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으로 제 하관을 더듬기 위함이었다. 그런다고 변해버린 입매가 만져질 리는 없었지만 말이다. 멍청한 짓이었으나 그만큼 놀랍기도 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까. 실제로, 이시온은 술을 멀리하려 들었다. 가지런한 술병들이나 그 향을 맡을 때마다 계속 밀어내려던 추억, 혹은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자꾸만 왼쪽 가슴에 퍼지는 기분을 잠재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곤 했다. 코치는 이런 쪽으로 영 눈치가 없었건만. 자연스럽게 생긴 새치를 곱게 말아 올린 중년의 여성이 손짓했다. 이리 더 가까이 오라는 뜻이었다. 금세 알았다. 도무지 입을 열지 않는 제자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위함이라는걸. 시온이 작게 숨을 뱉었다. 이럴 때면 제 속내를 아예 숨길 수는 없었다.

‘…잊고 싶은 게 있는데, 자꾸 떠올라서요.’

다만 목적어는 불명이었다. 뭘 잊고 싶은지, 어떤 기억인지에 대한 부연 설명은 없었다. 그러나 온화한 스승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나름의 위로를 건네주는 게 최선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겨내는 법을 배우는 건 꼭 필요하지. 그렇다고 회피하진 말렴. 나중에 후회하니까.’

경험담일까, 아니면 세월을 지나며 얻은 지혜일까. 알 길은 없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건, 그의 시선이 제 어깨에 머문다는 것이었다. 아, 수영에 관련된 거라고 짐작하시는구나. 자신에 대해 짐작하는 행위가 불쾌하진 않았다. 그는 기술만 가르쳐주지 않았다. 어느 부분은 한참 보지 못한 유년 시절의 원장님을 떠오르게도 했기에, 시온은 고개만 아래위로 끄덕일 뿐이었다. 바른 말이고 옳은 말인 건 알았다. 굳이 토를 달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완전히 따르지 못할 자신이 쉽게 상상이 되었다. 어깨는 아프지 않았다. 다만 이 알코올의 향이, 자꾸만 저를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일은 벌어질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

역시 스승님이 현명하셨던 거구나. 손님이 떠나가고, 주인은 재차 제 얼굴을 쓸어넘겼다. 코가 살짝 빨개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괜찮았다. 창피함이 더 컸으니까. 그 질문을 받았던 게 벌써 7년 전이었다. 엄청나게 오래된 일은 아니었으나 그때의 저도 퍽 어렸구나 싶었다. 현재도 다를 바 없을지도 몰랐다. 안면이 화끈거렸다. 실제로도 열이 몰린 것 같았다. 뜨거웠다.

「띵」

휴대전화가 반짝 밝혀졌다가 사그라졌다. 겨우 손바닥을 떼어냈다. 아냐, 형은 아닐 거야. 저녁에 찾아올 또 다른 손님이 있었다. 권태환은 날짜를 명확히 했으니 재차 메시지를 보내지 않을 거였다. 그걸 알면서도 당장 팔을 뻗었다. 화면을 다시 켰다.

[사장님, 죄송해요. 차가 밀려서 10분 정도 늦을 것 같네요.]

역시나 문자를 보낸 이는 고객이었다. 실망하면 안 됐다. 아무튼, 제 심경이건만 종을 잡을 수 없었다. 시온의 엄지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고의는 아니었다. 이제 적응할 만도 한데, 전자기기는 늘 저와 먼 문물이었다. 그가 젊은 세대임에도 말이다. 툭, 툭 몇 번 화면을 터치하자 문장이 완성되었다.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괜찮습니다.]

조심히 오세요, 운전 유의하세요. 같이 살가운 문장을 치진 못했다. 특유의 감촉과 친해지지 못한 탓이기도 했고 그렇기엔 너무 넘치게 친절해 보인다 싶을까 봐 싶어서이기도 했다.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그는 다시 작업실로 들어갔다. 완벽히 단단해진 진저브레드 케이크를 포장해야 했다. 그래야 내일 들고나갈 수 있었다. 냉장 보관을 해서, 차갑게 가져가고 싶었다. 호텔로 오라 했으니 소용없는 짓이려나. 의식의 흐름이 거기까지 진행되었을 때,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정신 차려야지 싶으면서도 연이어 누군가를 떠올리는 자신을 발견한 참이었으니까. 이시온이 천천히 어깨를 잡고 한쪽 팔을 돌렸다. 뻐근하지 않을 정도의, 가벼운 근육통이 있었다. 태환에 대해 상념 하는 일을 아예, 모조리 그만둘 수는 없을 테다. 그래도 집중을 해야 했다.

“…어깨, 신경 쓰는 거 같았지.”

정말 마지막이었다. 두꺼운 니트 아래론 만져지지도 않는 상처를 더듬던 흰 손등이 파드득 튀어 올랐다. 심호흡을 했다. 내일이 오려면, 한참 남지 않았나.

*

그러나 24시간, 아니. 남은 열몇 시간은 금방도 지나갔다. 걸음이 둔했다. 고개를 좌우로 여러 번 털었다가 멈췄다. 그렇게 해도 여전히 시야가 어지러웠다. 엄지와 검지로 눈가를 문질러보기도 여러 번. 골목에서 멈춰 선 시온은 매장의 셔터를 내리기 전에 물이라도 한잔 마실 걸 그랬다며, 별거 아닌 일로 후회했다. 이제 곧 봄이 오기는 하나보다. 몇 주 전보다 공기가 덜 서늘했다. 그래도 잠을 자지 못한 탓에 은근한 오한이 들었다. 잠깐 어깨를 떨었다가 멈췄다. 하루는 술에 어울릴 만한 다른 디저트를 찾기 위해 밤을 허비했다 치고, 그럼 어제 새벽은 왜 또 뜬눈으로 지새워야 했던 걸까. 소풍을 앞둔 어린애도 아니고, 괜한 긴장감과 두근거림이 원인이었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건 아니었다. 아예 다른 원인에서 비롯된 불면이었다. 청년의 등허리가 뻗어졌다. 한쪽 어깨를 작게 한번 돌리더니 멈췄다. 체력이 없어 힘들여본 적이 드문데도, 오른쪽이 조금 뻐근했다.

오븐을 설치하느라 또 미뤄지고만 재개장일 이후, 이시온은 매장의 유선전화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받았다. 흔히 전화기에서 불이 난다는 표현처럼 자주는 아니었으나 잊을 만하면 한번, 또 작업하다 한 번, 잠시 재료를 손질하다 한 번씩 문의 전화가 왔다. 소문이 꼬리를 물듯, 그가 쉬는 동안 잠재 고객이 꽤 늘었던 것이다. 어안이 벙벙했다. 덕분에 바쁜 파티셰의 고충이 어떤 것인지 배운 참이었다.

실은 냉정히 돌아보자면, 아예 태환과 만나는 때와 연관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만큼 바빴으면, 진저브레드 케이크를 굽지 말았어야지. 시온은 속으로 스스로를 타박했다가 무심결에 턱을 아래로 내렸다. 희끄무레한 하늘색 상자가 들려있는 손이 보였다. 티 내지 말자. 끄트머리만 빨개진 손가락을 모아 힘을 줬다. 남은 쪽 팔을 들어 거세진 않을 정도로만 뺨을 쳐보았다. 이젠 오른쪽 볼이 더 선명한 분홍색으로 변해버렸다. 가파른 경사를 따라 내려갔다. 차량 진입 도로라곤 하나, 다들 운전이 어려워서 쉽사리 올라오지 못하는 곳이었다.

[편의점 딸린 빌라 근처. 김 비서가 나가 있을 거다.]

저녁 6시쯤 받은 문자의 내용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잡념을 품을 여유가 없음에도, 내심 종종거린 걸 들킨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언제 차를 보내겠다 연락이 올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불에 닿지도 않은 귀 끝이 뜨거웠던 것 같기도 하다. 메시지를 확인했을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피곤하진 않았었는데, 마지막 손님을 배웅하고 셔터를 내리자마자 졸음이 몰려왔다. 그래서 이렇게 혼자 이르게 켜진 가로등 아래서 원맨쇼를 하고 있는 거였다.

골목은 지나치게 고요했고 그를 보는 이는 아무도 없음에도 괜스레 부끄러워졌다. 스물아홉 먹고 어쩔 줄 모르겠는 심정을 모습을 다 들킨 것만 같아서. 패딩이 쉴 새 없이 바스락댔다. 호흡을 들이쉬자 흉부가 들썩인 탓이었다. 천근 같진 않으나 다른 때보단 무거운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지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도 고대하던 날 아니던가. 시온은 몰랐다. 제 걸음이 제법 빨라졌다는 사실을.

*

“…시온 님, 곧 도착합니다.”

앞 좌석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저번과 또 달랐다. 그럼 태환이 말한 ‘김 비서’말고 다른 이가 왔는가 하면, 그렇지 않았다. 자주 본 건 아니었으나 분명히 그는, 저번에 만났을 때만 해도 교과서에서 튀어나온 듯이 비서라는 직책에 맞는 분위기를 풍겼었다. 그런데 오늘은… 애매하게 달랐다. 틀린그림 찾기 정도로 차이가 있달까. 그건 운전기사도 마찬가지다. 소싯적에 운동을 했나 싶을 정도로 풍채가 좋은, 기사치곤 꽤 젊은 남성은 표정이 없고 말수도 적었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달랐다. 둘은 골목을 돌자마자 마주친 둘은 저를 보자마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었다. 크게 동요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으나 하는 행동들이 미세하게 어색해지긴 했다. 특히 태환의 비서는 정장과 블라우스에 주름 하나 지지 않게 하고 다니고 다녔건만, 지금은 사정없이 구겨져 있었다. 본인이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으나, 한껏 당겨 올린 머리카락에 잔머리도 조금 생겨버렸고.

이시온은 자신의 눈치를 둔감하다고 평가했고 대부분 옳았지만, 눈썰미는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운전기사의 까만 재킷 소매에 흙이 묻어 있다는 걸 알아채기는 어렵지 않았다. 김 비서는 저를 보자마자 일전의 완벽한 비즈니스 미소가 아닌, 어색하게 입꼬리 끝이 떨리는 웃음을 지었다. 차에 타서 시동이 걸릴 때까지 말이다. 그들도 시온이 동요함을 알아차렸는지 운전석에서는 헛기침이, 운전석에서는 권유가 들렸다. 그, 피곤해 보이시는데 가는 동안 잠시 눈을 붙이시면 어떠실까요. 하지만 청년은 입 밖으로, 두 사람이 왜 그리 흐트러져 보이는지 딱히 묻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상투적 대답만을 남긴 채 가는 내도록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마도… 태환이 보냈을 정도면 저와 그 사이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 대충 알고 있을 터였다. 뭔가 밀담을 나눴을 수도 있다. 아닐 수도 있으나, 그렇다고 한들 따지고 싶거나 불쾌한 마음이 들지도 않았다. 그럴 수도 있었다. 그가 정면을 바라보지 않는 동안, 비서와 기사의 사정은 전혀 안중에 없는 듯했다. 비서와 운전기사에겐 퍽 다행이지 않을 수 없었다. 눈짓이 몇 번 오갔다. 트렁크의 화분, 어떻게 하죠. 건장한 남성이 입을 뻐끔거렸다. 제 상사 덕분에 독순 술을 익힌 이 시대의 참 일꾼도 소리 없이 말했다. 부사장님께 따로 보고드릴 테니까 버려주세요. 기사는 경호를 겸하고 있는, 군인 출신이었기에 입모양을 읽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아주 손발이 척척 맞았다 볼 수 있겠다.

경사로를 올라가지 못해 곤란해하는 차량의 번호판이 HW 비서실의 소유라는 걸 단박에 알았다. 그런데 왜, 거기서 이시온에게 화분을 보내려 했던가. 일단 자세한 상황도 모르고 막아내기 바빴었다. 잘한 짓인 거 같긴 한데, 그 직후에 제 상사의 양 동생이 나타날 줄은 몰랐다. 십년 감수 했다. 내막은 몰라도, HW라니. 썩 좋은 일이 아님은 분명했다. 네 바퀴가 멈췄다. 평소의 제 페이스를 되찾은 김 비서가 또랑또랑하게 안내했다.

“부사장님은 30분 정도 뒤에 오실 겁니다, 먼저 내리시죠.”

*

막상 약속 상대인 권태환은, 갑작스럽게 중요한 일정이 생겨 먼저 오지는 못했다고 했다. 오래 걸리진 않을 예정이라는 점을 전달하라고 하달 받았다는 설명에 네. 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환의 비서는 작은 카드 키를 쥐여주며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면 된다고 했다. 34층으로 가면 된다고 하기에 살펴보니, 호수가 적혀있었다. 문이 열리고, 바로 복도가 보이리라 짐작했건만. 그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작은 1인용 소파 한 쌍, 그 중앙을 차지한 낮은 사이드 테이블 하나였다. 시온은 호텔을 이용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10년 전, JL에 있었을 때도 태환이 데려간 곳은 별장이나 본인 명의의 펜트하우스가 대부분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왜 여기를 응접실같이 꾸며놓은 걸까. 의문은 금세 풀렸다. 왼쪽으로 돌아보자마자 하얗고 큰 문이 보였다. 아… 설마.

옆을 보니 투명한 유리로 처리된 벽면에 호수가 적혀있고, 그 아래쪽에 전자식 키를 꽂는 곳이 보였다. 청년의 콧등이 구겨졌다가 펴졌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대한 카펫과 군더더기는 없으나 우아하게 세팅된 홀이 보였다. 굳이 이런 객실을 빌려둘 필요가 있었을까.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 자신을 부른 이가 누구던가. 체념은 빨랐다. 중앙의 큰 공간을 기점으로, 전 층을 전부 쓰는 이곳의 용도가 나뉘는 구조인 것 같았다. 이시온은 한참을, 편하게 있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공간을 배회했다. 손에 쥔 케이크 상자를 놓지도 못한 채로 말이다. 그러다가 제가 지나치게 정신 사납게 움직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겨우 침실로 보이는 공간을 찾았다. 자신의 낡은 침대에 비교하면, 세 배는 족히 커 보였다. 그 끝에 살며시 앉아보니 매우 폭신했다. 막 구운 케이크 시트처럼.

기억은 여기까지였다. 아니. 실은 이 뒤도 짧게 떠오르긴 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값비싼 침구의 감촉과 완전히 가시지 못한 피로, 그리고 고요한 청각에 자꾸만 눈꺼풀이 감겼었다. 안됐다. 절대 안 됐다. 단아한 인상이 와락 구겨질 만큼,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저번엔 ‘도중’에 잠들었지 않는가. 그런데 만나기도 전에 곯아떨어진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있을 수 없는 가정은 결국, 현실이 되었다.

“내가 아무리 네가 예쁘게 자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한다지만, 그래도 이러면 섭섭하지.”

낮게 깔린 웃음소리는 소리일 뿐, 촉감이 없었다.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귓바퀴가 간지러워졌다. 미인은 잠꾸러기, 라는 허상의 관용구를 비틀어 내뱉는 태환이라니. 까무러칠 정도로 놀라진 않았다. 적어도 ‘권시온’에겐 익숙한 놀림이었으니까. …놀림? 얕은 잠기운에 젖어있던 속눈썹이 위로 바싹 솟았다. 덕분에 깨어날 수 있었다. 이걸 기시감이라고 해도 좋을까. 며칠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자면 안 됐는데. 저를 깨운 이의 정체는 뻔했다. 끝에 걸터앉은 채 그대로 넘어갔던 상체를 들어 올리며 쉬어 버린 성대를 열었다.

“언제 왔어… 요…”

질문에 물음표가 붙지 못했다. 불가항력이었다. 제정신이 번쩍 들었다. 당혹스러워서? 달랐다. 턱이 슬슬 아래로 떨어졌다. 의지를 갖추고 벌린 게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고 말았다. 침대 앞에는 의자가 놓여 있었다. 사내가 부러 끌어와 앉아 있는 것일 터였다. 여기까진 그러려니 싶다. 팔걸이에 턱을 괸 채 다리를 꼬고 있는 모습이야 항상 그래 왔으니 놀라울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권시온을 놀라게 하고, 목덜미까지 붉어지도록 종용한 걸까. 답은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인물에게 있었다. 입꼬리 한쪽을 끌어올려 미소를 감추지 않는, 저 남자의 모습이 시온을 뒤흔든 것이다. 권태환이 걸치고 있는 의복은 현재… 셔츠와 베스트, 삭스 가터뿐이었다.

*

“왜… 뭐… 아니…”

문장은 제대로 맺어진 것 없이, 오롯이 모두가 엉망이었다. 이시온은 제 낯짝을 가늠하지 못했다. 누가 뺨에 칠이라도 한 듯 홍조는 여기저기 덩치를 불리고 있었다. 귀가 딸기처럼 보일 지경인 건 당연했고 밑으로는 목 전체가 얼룩덜룩 해졌다. 어디는 분홍빛, 또 어디는 붉다 못해 팥죽색. 워낙 흰 살갗 탓인지 더 도드라져 보였다. 그럼 손과 발은 멀쩡했느냐, 그럴 리가. 양말에 가려져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발끝이 곱고 꼬아지는 꼴을 다 보여야만 했을 테다. 손바닥은 물속에 담근 것처럼 흥건했다. 땀이었다. 인간의 손이 제 체액으로, 이만큼 젖어드는 원인은 보통 두 가지이다. 하나는 긴장했을 때, 또 하나는… 흥분했을 때. 음절이 모두 빠짐없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제대로 들리는지도 모르겠을 정도로.

“왜, 왜 그러고…. 있…”

저만 그랬나 보다. 시온은 황망한 시야에 담긴 태환을 보고 깨달았다. 그의 안색은 한 치도 변한 점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더, 평소보다 살짝 나른해 보일 뿐이었다. 사내는 턱을 괸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청년을 바라보다가, 이내 눈동자만 움직여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뒤늦게 발견했는데, 맞은편에 앉아있는 단단한 손아귀엔 휴대전화기가 들려있다. 액정에 불이 들어와 있는 채였다. 뭘 켜둔 걸까. 그 정체를 알게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언제 일어나나 두고 보는 김에, 룰을 하나 정했거든.”

태환이 화면의 방향을 틀었다. 휴대전화가 청년의 눈앞에 종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타임워치였다. 00:05. 5분씩 재주도록 설정이 된 것이었다. 이윽고 시온은 헤아리고 말았다. 일하다 왔으니 당연히 정장 차림이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의복의 가짓수를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으니까. 실은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만 봐도 헤아릴 수 있는 것이었으나, 사고가 거기까지 흘러가질 못했다. 쉬운 게 없다.

처음으로 벗은 건 코트였으리라. 소매에서 팔을 빼내기 위해 어깨를 뒤로 힘껏 뻗어서 셔츠가 벌어졌을 거다. 그렇다고 해도 겉옷은, 들어오자마자 아무 의도 없이 벗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일단 제외하는 편이 좋겠다. 그리고 분명 먼저 와있을 시온이 어디 있는지 찾으려 전부를 누볐거나, 그마저도 제 피로를 눈치챈 비서가 알려 곧장 침실로 향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곤 뻗어버린 자신을 보고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심중은 몰라도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확실했다. 의자를 끌어당기고 이런 음모를 꾸민 뒤, 타이머를 맞추고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겠지. 그다음은 당연히 슈트의 상의였을 텐데… 거기까지 다다르고 나니, 불현듯 의문이 솟았다.

“보통은 하의가… 하의가 마지막이어야 하는 거 아니, 아니에요?”

단어들이 헤엄을 쳤다. 자유영도, 배영도 뭣도 아닌, 거의 개헤엄이나 다름없이 형편없었다. 태환의 눈썹 한쪽이 위로 들썩였다. 목소리가 떨리는 게 아니라, 내용 탓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나 보다. 이내 그가 소리를 내 웃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시온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앉은 채로 벗었을까? 아니면 의자에 자리를 잡기 전에 미리 벗었나. 또 추측이 더듬더듬 기승을 부렸다. 선 채로 탈의했다면 분명 탄탄한 허벅지에서 한 번 걸렸다가, 무릎으로 내려오고 나선 천천히 밑으로 떨어졌을 것이고 만약 현재 눈에 보이는 자세, 그 상태였다면… 아니. 도대체 뭘 상상하고 앉아있는 거지. 이시온의 손바닥이 얼굴을 덮었다. 그런 제 기색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아직도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낮고 탁한 음성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시온아. 네가 신경 써야 할 건 그게 아닐 텐데.”

마찰음이 들렸다. 팔걸이와 거기에 놓여있던 팔뚝 소매에 달린 커프스 버튼이 부딪쳐 내는 소리였다. 알림이 울리는 일은 없었다. 대신 커다란 손에 붙잡혀 한참 작아 보이게 돼버린 전자기기의 몸체가 부르르 떨렸을 뿐. 5분이 다 지났나 보다. 한데 모인 손가락 사이에 들어차 있던 힘이 풀렸다. 마디와 마디가 점점 벌어졌다. 잠깐 깜깜해졌던 눈앞이 밝아지고야 말았다. 누가 봐도 훔쳐보는 꼴이었다. 이제 와 가릴 게 뭐 있다고. 풀썩. 휴대 전화가 던져졌다. 이끌리듯 포물선을 따라 고개를 따라 움직이다 보니, 종착점에서 바로 액정이 보였다. 그는 다시 5분을 재고 있었다. 아직도 팔이 내려지지 못했다. 그런데도 방향을 바꾸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애초에, 깜빡 잠이 들어버린 뒤 깨고 난 후 이성이 온전히 작용한 때가 없기도 했다.

“그렇게 무방비하게 자고 있으면 어떡해.”

툭, 툭 그리고 툭. 단추가 구멍에서 튕겨져나갈 때마다 시온의 귀 끝이 움찔거렸다. 베스트가 풀어헤쳐지고 있었다. 걸친 이의 손으로, 직접. 아. 신음 같은 단말마가 입술을 비집고 나와버렸다. 태환의 안개처럼, 혹은 수면 아래 가라앉은 빛처럼 낮은 음성에 그을음마저 더해졌다. 위협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어투 전부에 여전히 즐거움이 짙게 묻어 있었고…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야했다. 손끝이 서로 부딪혔다. 떨고 있는 탓이었다. 손톱이 단추보다 더 작은 소음을 냈다. 틱, 틱 그리고 틱. 그러다 겨우 멈췄다. 누가 억지로 끌어내리지도 않았는데, 팔이 침대 위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청년의 말간, 그러나 새빨갛기도 한 얼굴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막을 형성하고 있던 손바닥은 사라진 지 오래였으나 고개는 아래를 향하고 있어서 잘 보이질 않았었다. 결국, 시선과 시선이 맞부딪혔다. 사내는 상체를 등받이에 한껏 기대고, 검지를 여밈세 가장 아래에 걸어두었다. 곧이어 다른 한쪽 검지가 위로 올라오다 멈췄다. 안쪽으로 한번, 다시 제자리로 한번. 굽었다가 펴지길 반복했다. 딱, 세 번씩만.

“권시온.”

시온의 다리가 알아서 굽혀졌다. 땅에 발을 디디고 걸어가면 된다는 선택지를 아예 떠올리지도 못한 탓이다. 누군가의 허벅지만큼이나 탄탄한, 그러나 마냥 딱딱하지만은 않은 토퍼가 비명 한번 지르지 않고 청년의 무게를 받아내고 있었다. 무릎걸음으로 끄트머리까지 당도했다. 여전히 움츠러든 채긴 하였으나 어쨌든, 그와 거리를 좁히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무릎을 꿇고 있어야 했지만, 혼자 심각해진 건 잠시뿐이었다. 어설프게 걸터앉은 채, 하체를 다소곳이 모았다. 그걸 보고도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권태환은 연신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더니 대뜸, 위에 얹혀 있던 다리를 풀었다. 청년은 내내 휘둘리기만 했다. 얇고 신축성이 좋은 만큼 재질이 촘촘한 양말 위로 동그란 뼈의 흔적이 보였다. 슬쩍 모로 틀어진 발목은 체구보다 섬세한 조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시온의 목젖이 울렁거리던 순간이었다.

“…아, 흣.”

앞으로 뻗은 발끝이 살덩이를 지그시 눌렀다. 도대체 언제부터. 알아서 잘도 휩쓸려버린 덕인지 제 샅에 달린 ‘어떤 것’이 솟아오른 채였다. 어쩐지, 하의가 갑갑하다 싶었다. 안면이 화끈거렸다. 얼굴만 그런 건, 아니었다.

“시온아, 지금처럼 이렇게…”

짓눌리진 않았다. 애가 탈 만큼만, 적당히 호흡이 가빠질 정도의 힘이었다. 판판한 발바닥 앞부분이 미끄러지다가, 움푹 파인 중앙에 끝이 닿았다. 침대 위에 던져졌던 휴대전화가 몸을 떨어대고 있었다. 저와 다를 바가 없는 신세였다. 또 때가 된 거다. 어쩔 줄 모르는 눈동자가 힐끔, 태환에게로 향했다. 메말라가는 입술을 깨물고, 새하얀 시트에 자국을 남길 정도로 손안에 땀을 흐르고, 제 왼쪽 가슴에 있는 기관이 요동치는 소리가 반고리관까지 성큼 다가오게 하는 그 감각의 이름은 뭘까. 성기를 누르던 무게감이 사라졌다. 태환이 발을 떼고, 의자를 벗어났다.

“형한테만 세우는 거야. 헤프게 굴면 혼나.”

이건 또 무슨 꾸중이란 말인가. 따지려면 따질 수 있었다. 저번에 막 재회했을 땐, 저한테만 세운다고 놀려놓고 이제 와서 무슨 딴소리를 하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소리 내 지적하고 싶지 않았다. 말을 잘 듣는, 어여쁜 모습만 보이고 싶어져 버린 것이다. 치대는 개는 싫어하는데 어쩌나 하고 고민했던 게 무색하게도. 이 이상은 무리였다. 더는 감출 수 없어져 버린 감흥이 자꾸만 턱을 당겼다가 놓았다. 그건 곧 긍정의 뜻을 담은 행위와 동일한 형태를 취했다.

“네…”

옳지. 중얼거림 같은 칭찬이 따라붙었다. 권태환의 눈매가 휘었다. 눈웃음도 저에게만 보여주는 행위 중 하나였기에, 시온은 얌전히 입을 열었다. 자신보단 덜 젖은, 미온수 같은 온도를 가진 혀를 받아들이기 위함이었다. 몽롱해졌다. 일전처럼 술을 입에 댄 적도 없었건만. 기대감. 이시온은 지금 권태환이 주는 기대감에 한껏 취해있었다.

*

내숭.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퍼뜩 뇌리를 스친 단어가 그것뿐이었다. 시온은 모든 게 서툰 와중, 과거의 습관을 잊지 못한 덕인지 그나마 비강을 활용할 줄 알았다. 덕분에 적당히 물기가 돌고 은근한 열기가 느껴지는 입안을 여유롭게 탐할 수 있었다. 손을 움직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허리 부근을 감싸고 있는 하의의 중심부를 잡아 버클을 풀었다. 사내가 입었던 것은 이미 벗어 내린 지 오래였으니, 그 잠금장치의 주인은 당연히 제 앞에 있는 양 동생이었다. 완전히 벗겨 내기 위해 지퍼 끝을 잡은 그 순간, 저에 비하면 여전히 작달막하고 둥그런 뒤통수가 조급히 뒤로 물러났다.

태환이 미간을 구기고 왜 그러느냐는 의미를 담아 쳐다보자, 잔잔했던 평소가 거짓말처럼 파도치고 있는 홍채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러더니 더듬더듬, 양쪽 바지 주머니를 뒤지는 게 아닌가. 찾는 물건이 있는 모양새길래 너그러이 지켜봐 주었다. 바스락 바스락. 뭔지는 몰라도 비닐이 내는 소린 건 쉽게 알 수 있다. 태환은 눈썹을 씰룩, 들었다가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머니 속에서 어떤 것이 줄줄 딸려 나왔다. 그렇다. 낡은 상가 주택, 소파 아래에서 내버려져 있던 ‘그’ 콘돔이었다.

“흡, 그걸 그대로… 흐, 챙겨 올 줄은 몰랐지. 큭…”

웃음인지 신음인지, 그도 아니면 둘 다인지. 이시온의 살갗은 늘 희여멀건 했다. 그렇기에 한번 달아오르면 잘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여전히 빨간 안면이 콧등을 구기고 있었다.

“…그만 놀리면 안 돼요?”

“왜, 귀엽기만, 한… 흐읏…!”

보복하려는 건 아니었다. 정말 아닌가? 감히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기엔 이미, 아랫입술이 삐죽이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이마가 툭, 태환의 어깨에 닿았다. 큰 침대가 좋기는 했다. 있는 환경에 적응하는 데 도가 튼 시온은, 직접 겪고 나서야 차이를 깨닫는 편이었다. 확실히 유명을 달리해버린, 시온의 방에 있던 매트리스는 둘의 장신을 감당하기엔 비좁기 짝이 없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모로 누운 채 떨어지질 않았다. 최소한의 공간이 필요하긴 했다. 이런 고급 진 호텔에는 어울리지 않게도, 다행히 윤활제가 갖춰져 있었다. 그가 지시해둔 걸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인위적으로 질척해진 내부가, 마디만 도드라진 길고 유려한 손가락을 물어댔다. 주인의 몸을 닮기라도 한 것인지 길쭉하니 잘 빠졌다. 덕분에 깊숙이 숨어 있는, 톡 튀어나온 극점을 건드리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태환의 말이 끊기고, 척추가 튀어 오르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시온의 귀 끝이 또 움찔거렸다. 뭐가 이렇게 다, 자극적인지.

티 하나 없는 이마를, 사내의 넓게 뻗은 어깨에 비벼댔다. 조금 더 안으로 파고들기 위해 꺾인 손목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꾸만 깊이 파고드는 걸 멈추지 않은 채로 말이다. 날개뼈 중앙에 묻혀있느라 막혀버린 입이 웅얼거렸다. 탄탄한 뼈대와 피부의 감촉이 입술의 뒤편, 여린 점막 위로 고스란히 더듬어졌다.

“알아요. 여기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어요. 그래도, 챙겨둬야겠다… 싶어서…”

중지와 검지가 살짝 사이를 벌렸다가, 위쪽을 가볍게 눌렀다. 어린애처럼 중얼거리면서도 절대 멈추는 법이 없었다. 분명 멀건 낯으로 코를 구기고 입을 삐죽대고 있을 텐데.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보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그러나 오랜만에 부린, 이시온의 고집이 기꺼웠던 태환은 자신이 풀어주고 싶다는 시온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일러두곤 싶었기에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달아오른 탓에 더욱더 진해진 낯을 숨기지도 않은 채로.

“굳이, 으응, 안… 씌워도 되는, 데… 하, 말이지.”

“… …네?”

뭐 그리 대단하게 놀라운 말을 했다고. 작고 조근조근 하던 음성이 순간 확, 커졌다. 그러느라 손끝에 힘이 들어간 지도 몰랐나 보다. 내벽의 주름이 오므라들며 수축했다. 사내의 완고한 등허리가 굽은 건 말할 것도 없었다.

“허윽… 뭐, 여,긴… 큿, 제대로… 욕, 조도 있, 잖아.”

도대체 무슨 논리란 말인가. 팔이 완전히 멈춰버렸다. 힐끗 바라본, 분명히 단아했던 이목구비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굳어있었다. 왜 놀랐는지는 확실했다. 그래, 맞다. 씻으면 되긴 했다. 물리적으로 벌어진 일은 그렇게 수습하면 되긴 했다. 하지만 어디 이게 그런 문제였나? 시온은 이미 답을 내렸다. 아니다. 그래봤자 어디까지나 그의 입장이고, 태환은 달랐다. 아직도 딱딱한 도덕관을 버리지 못한 어린 것이 제법 귀엽긴 한데, 그대로 둘 수만도 없었다. 딱딱한 건, 제 주인을 똑 닮아 분홍빛을 한 채 바들바들 떨고 있을 성기 하나면 충분하기도 했고.

“권시온, 생각…허, 해 봐.”

뒤로 뻗어진 손아귀가 저보다 얇은 손목을 잡아끌었다. 안쪽에 있는 채 제 구멍을 채우고 있는 쪽이 아닌, 그 반대쪽이었다. 사내는 그의 손바닥을 그대로 앞으로 끌어와선 복부 위에 얹어 주었다. 이물감인지 성감인지 모를, 모호하고도 야릇한 감각에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복근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느샌가 배 위까진 아니긴 하나 슬슬 힘을 받아 올라오고 있는, 태환의 성기가 손등에 닿았다. 잘 다듬었다 한들 아예 없는 건 아닌 까슬한 음모가 끝을 간지럽혔다.

“네가…형 안을, 여기, 까지 채우…고 들어와서…”

엄지 기부가 배꼽 아래를 스쳤나 싶더니 곧 위, 그 윗부분에 안착했다. 태환이 짙게, 마치 시온을 희롱하듯 속삭였다.

“가득, 싸도 되는데, 정말 안된다고?”

뻐끔. 입안에 방울이 맺혔다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얼마나 놀랐으면. 태환은 그런 깜찍한 꼴을 지나치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그러나 그의 뒤에 물린 두 개의 손가락 탓인지, 자업자득처럼 아랫배가 울렸다. 그래도 즐거운 걸 어쩌겠는가. 순진한 이시온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침묵이 이어졌다. 길진 않았으나 육체가 더 빨랐다. 놀라웠다. 뭐가 그리 유달랐기에 놀라웠느냐면, 이제까지 얌전을 떨고 조심스럽던 손길의 방향이 전혀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늘 거느리는 입장이 되는 게 당연했기에 오만함이 흠이 될 수 없는 사람. 그것이 권태환이었다. 그렇기에 그 누구에게도 허락된 적 없는 입구 주변은 잘 조였고, 그만큼 좁았다. 그 압박감 탓이었을까. 소심하던 침입이 별안간 행색을 바꿨다. 소지가, 입구를 자꾸만 덧그리더니 잔뜩 젖은 채로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래도 쓸 거예요.”

“크, 읍…허윽, 권, 시온….!”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작고 또박또박한 어조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매번 평온했던 수면이 바싹 마르는 것만 같았다. 자세히 기울이면 들끓는 듯이 바뀌었다.

“콘돔… 더 어딨어요?

그뿐인가. 팔 안쪽과 이두에 힘이 들어갔다. 말릴 새도 없이, 태환의 신체가 시트와 맞닿고 말았다. 훨씬 단단해진 팔뚝이 사내의 허리에 둘렸다. 둔부를 위로 들어 올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가져온 건, 다 쓸 거예요. 형이 시작한 거니까…”

책임져줘요. 가지런한 치아가 목덜미에 스치기 직전, 태환이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 책임져,도 아니고 그렇게 해달라는 청유형이라. 기껏 본능대로 하려나 싶었는데. 바랐던 방향은 아니지만, 나름대로는 만족스러웠다. 태환의 비음이 길게 늘어졌다. 파고드는 손길 탓에, 시트를 잡고 있던 손등뼈가 솟아올랐다. 죄 없는 흰 침구가 형편없이 구겨지고 있었다.

*

얼마나, 몇 번을 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초반의 기억은, 그래도 제법 생생했다.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불과… 2시간 전이었던가, 3시간 전이었던가. 아무튼, 오랜 시간이 흐른 건 아니었다. 젤이 흘러 손목까지 젖어버린 시온이 태환의 몸을 다시 돌렸다. 허벅지가 점성 있는 액체로 흥건했다. 사내의 고개가 모로 기울인 채 청년을 올려다보았다. 오간 대화는 없었다. 넓은 침실을 가득 채울 만큼 밝지만, 희지 않고 노르스름한 빛을 뿜는 보조 등이 바깥의 어둠과 조화를 이뤘다.

전면이 유리로 이루어진 침실 창을 가로로 촘촘한 버티칼만이 가리고 있기에 명과 암이 더 확실히 구분 지어져 있었다. 그래서 소리에 더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숨이란 게, 이렇게 몰아쉴 수 있는 거였던가. 권태환으로선 영 적응이 되지 않았으나, 딱히 지적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 익숙해져야 하기에 불쾌하다거나, 거부감을 가지려 애쓸 필요가 없었던 탓이었다. 사내의 육중한 상체가 주르륵, 끌어 내려졌다. 반은 부러, 반은 안을 푸느라 잔뜩 뱃속을 간지럽혀진 덕분에 풀린 힘이 낳은 결과였다. 네모난 모서리에 걸려있던 시트 모퉁이가 팽팽해지다 못해 힘겨워 보였다. 그러나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청년의 흰 손이 남자의 골반을 잡아들어 올렸다. 얇은 고무 막이 어디까지 늘어나나 시험해 보기라도 하듯, 매끈하고 잘 뻗은 모양새에 반하여 잔뜩 곧추서서 떨어 대고 있는 성기가 훨씬 부드러워진 입구에 닿았다. 할 건 다 하면서, 손은 또 왜 그렇게 떨어대는지. 아무리 풀려있다 한들 늘어지진 않았기에 귀두 끝이 파고들어 오는 것만으로도 복근에 힘이 들어갔다. 후. 태환이 한숨 섞인 호흡을 뱉었다. 엉덩이와 회음부를 지나 허벅지 안쪽에 있는 그나마 여린 살까지 젖어들어 있었다. 양다리가 서서히 벌어지더니 양쪽 종아리가 제 앞을 차지한 침입자의 허리에 감겼다. 휘청. 단말마는 들리지 않았다. 밀어붙여진 몸뚱어리, 그 위에 달린 얼굴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을 뿐이었다.

‘…권시, 큽, 온.’

상대적으로 앙증맞은, 전지적 권태환 시점이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런 시온의 엉덩이를 채근하는 건 그의 발끝이었다. 지그시 눌러댔다. 이윽고 턱을 위로 당겼다가 올린 그가 명령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해. 당장.’

열에 흐려진 눈동자가 서너 번 끔뻑거렸다. 어느새 흘러내린 땀이, 촘촘한 속눈썹에 막혀 맺혀버렸다가 흔들리더니 이내 뚝 뚝 떨어져 내렸다. 떨림이 완전히 멎었다. 받아내는 남자의, 낮고 탁한 음성에 비음이 안개처럼 껴있었다. 마치 신호탄과도 같이. 그다음엔 어땠더라. 체위의 가짓수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온건하게 앞으로 두어 번, 앉아서 또 한 번. 아주 손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럴 만도 했다. 물론 아주 오래된 기록이었으나… 그는 저보다 훨씬 더 컸고, 체중도 더 무거웠으니까. 그랬으나, 시온은 그의 날개 뼈를 더듬다가 살살 밑으로 손바닥을 옮겼다. 마치 누가 인위적으로 나누기라도 한 듯 선이 선명한, 그러나 보기보다 굳어있지 않은 옆구리가 어쩐지 허전하게 느껴졌다. 재회하기 전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것보다 확실히 질량이 줄어든 게 분명했다. 왠지 자꾸만 눈썹이 쳐지는 기분이었다.

태환이 그런 저를 알아채고 뭐라고 했더라. 소리 내 재촉하진 않았다. 그저 잠시 제 내벽의 어중간한 부분에서 멈춰버린 살기둥을 타박하듯, 체중을 그대로 아래에 실었다. 그 덕에 칭얼거리지도 못했다. 은밀한 수확도 있었다. 자신의 말을 무를 생각은 없다는 듯, 이시온이 하자는 대로 하되 가끔 놀리는 듯한 첨언만 덧붙이던 사내는 처음으로 어떤 자세에서 거부감을 표했다.

‘…왜요?’

안색이 여전히 현란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도 두 눈이 초롱초롱했다. 잔잔하던 수면은 어디에 던져버렸는지, 완연한 여름 백사장같이 변해버렸다.

권태환의 턱이 잠깐 비틀렸었다. 순진하다는 점은 마찬가지 인지라 굳이 걸고넘어지진 않았다.

잘도 챙겨온 콘돔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 또한 명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정신이 들고 보니 태환이 언제 가져왔는지 모를 여분을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침대 위로 후두두 쏟아진 개별 포장을 하나 집어 들곤, 비닐 끝 어금니로 고정한 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고 보니, 태환이 드문드문 물어봤던 것 같기도 하다. 아직도, 끼고 할 셈인가? 이시온은 제가 했던 말을 무르지 않았다. 나보곤 심술부린다 하더니, 저도 만만찮은 고집을 부려댔다. 그것도 제법 어여쁘니 내버려 두었다. 아무리 어려도… 그쯤 되면 물렁물렁해질 만도 했는데. 처량하게 쪼그라들어버린 콘돔 안에 정액은 처음보다 묽어 보이지도 않았다. 벗겨주기 위해 고무링과 같이 생긴 끝부분을 들어 올리니, 살짝 쳐졌던 기둥이 다시 빳빳이 머리를 들었다. 허. 헛웃음이 흘렀다.

쓸모를 다한 콘돔의 끝을 묶어 침대 아래에 놓인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새 막이 씌워질 차례였다. 으응. 시온이 꽤 야살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열심히 휘둘러놓고, 모르는 이가 들으면 양물이 아니라 엉덩이라도 내준 것 같이 가냘픈 음성이었다. 권태환의 가정은 거기서 멈췄다. 별로 내키지 않았던 탓이다. 차라리 제가 뒤를 내주는 게 훨씬 나았다. 딴 놈하고 헛짓거리 하는,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상상해 보는 것보다야 말이다. 결과적으로는 어쩔 줄 모르고 영문도 모르겠다는 낯짝을 보고 있자니, 흘레붙는 것 같아서 싫다고 하기엔 석연치 않았다. 석연치 않다,라. 사내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오직 이시온 만이 자신을 범한 듯 보이게라도 만들어줄 수 있었다. 역시, 그 점만큼은 틀림없었다.

‘싫어. 뒤로하면 네 표정, 못 보니까.’

온건한 답변이었다. 과연, 옳은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문장이 끝맺어지자마자, 입술이 붙어왔다. 동그랗게 불뚝 나와 있는 지점에 귀두, 그중에서도 아랫부분이 치고 올라오기까지 했다. 먹힌 호흡이 둔근까지 전해졌다.

‘허, 크흐, 흐읏…’

쇳소리가 났다. 쉬어버린 음성이 귓가를 스친 탓일까. 청년이 살짝 놀랐다. 뒤늦게 뇌리에 어떤 사실 하나가 스쳤기 때문이었다.

‘…목, 읏… 목마르죠, 우리… 하, 조…여…응, 우리 계속 물을… 안 마셔서…’

코앞의 흉근이 일렁였다. 호흡이 밭은 탓이었다. 갈라진 곳일수록 어둡고, 양감이 있는 족일수록 촉촉이 젖어 씨근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 없는 위치였다. 봉긋, 이렇게 형용해도 될지 모르겠으나 다른 단어가 떠오르질 알았다. 두툼하게. 그거론 모자라지만 뭐가 됐든 솟아있는 가슴, 그중에서도 잘 갈라진 틈에 턱을 괴어 올려다보았더니, 짓궂은 말씨가 날아들었다.

‘밖으로, 허… 나가야 하, 는데… 큽, 어쩌려고. 빼기, 싫… 흐, 그러면서, 더 들어오…지…허윽…’

수분을 다 빼앗긴 입술을 몇 번 핥아댔다. 의지대로 행한 건 아니었다.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시온이 태환의 엉덩이 아래쪽을 받쳐 잡고 살살 무릎을 세웠다.

‘들, 들 수 있, 흐응, 있어요.’

‘…뭐?, 권, 시온. 무리하지…마, 흣, 하으으…!’

알고 있다. 제게 유일한 존재가, 기껍게는 아니더라도 생애 대부분을 물살을 가르는데 써왔음을. 상세히 알지도, 알 필요도 없었으나 파티셰라는게 마냥 반짝거리고 아름다워 보여도 실은 꽤 강도 높은 노동을 해야 하는 직업이라는 것쯤이야 상식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아무리 여리게 본들 성인 남성이었다. 사내와 비교하면 아무리 가늘고 하늘하늘해 보여도 웨이트가 생활이었던 근본이 어딜 가질 않기도 했고. 그래서 더욱더 정말 들려버릴 줄은 몰랐다. 시온의 어깨에 둘린 태환의 팔 안쪽에 힘이 들어갔다. 나쁠 건 없었다. 할 수 있는 체위가… 많이 늘어나겠는데. 오히려 그건 앞으로의 즐거움에 큰 도움이 되겠다 싶었다. 권태환 다운 판단이었다. 하지만 막상 성기가 파고들어오는 정도가, 깊어도 너무 깊었다. 그저 놀리려고 건넨 말이 씨가 되었다. …이러다 뚫리겠네. 사내는 저보다 가느다란, 그러나 확실히 장신인 양 동생에 몸을 붙잡고 매달린 채로 웃었다. 그의 한쪽 다리가 가볍게 달랑, 달랑거렸다. 흔히 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후에는 목적대로 물을 마셨다. 분명히 방금 마개를 땄는데, 이상하게 불순물이 느껴지는 맛이었다. 그러다 이시온은 유학시절을 떠올리고 라벨을 확인했다. 영어로 상표를 확인하자마자 잠깐 눈을 깜빡였다. 누가 이렇게 비싼 돈을 주고, 한국에서 경수를 사 마실까 싶었는데. 아.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태환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작은 이시온을 제 안에 품은 채로 웃느라 바빴다. 안이 계속 오물거렸다. 단아하게 뻗어있던 눈썹 사이가 좁아져 버렸다. 볼멘소리가 뒤를 잇겠다 싶었던 그때, 시온이 의외의 발언을 입에 올렸다.

‘…형. 여기, 서… 하면… 안, 안, 응, 안 되겠죠…?’

권태환이 코를 찡긋, 움직였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다. 그 뒤론 바로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음성이 따라붙었다. 섹스를 어디서 하냐고요? 그거야… 침실이죠. 라는 모범 답안만 내놓을 줄 알 때는 언제고. 그가 눈매의 모양을 가늘게 바꾼 채, 저를 바라보는 앳된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걸 보고 있자니 굉장히 만족스러운 심경이 감춰지지 않았다.

‘안 될, 이유… 읏, 가 있나?’

아일랜드에 올려져 있던 기본적인 가재도구들이 제각각 몸을 구르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태환이 팔을 뻗어 쓸어내렸기 때문이었다. 뒤로 눕기만 하면, 평평한 지지대가 존재하는 장소였다. 사내는 짙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그대로, 시온의 상체를 잡아 제 쪽으로 당겨오게 하였다.

‘욕심껏, 해… 흐, 봐.’

필름이 끊긴다는 관용구는 보통, 숙취에 시달릴 때 하는 말일 텐데. 이시온은 손바닥으로 제 안면을 뭉그러뜨리듯 움직였다. 오히려 포문을 어떻게 열었나 보다 마무리가, 어디서, 어떻게, 얼마만큼 이성을 잃었나 조차 떠오르질 않았다. 한 가지 눈에 보이는 사실과 결과가 있기는 했지만서도.

*

“정말로 다 쓸 줄이야…. 큽, 크흑….”

“차라리 크게 웃어요. 참으니까 더 얄미운 것 같아…”

커다란 욕실 안이 웅웅 울렸다. 그래서 더, 제가 우스워 어쩔 줄 모르는 음성이 잘만 들렸다. 이시온의 하의 주머니에 있던 게 대략 여섯 개쯤, 태환이 가져온 양은 오히려 그보다 모자란 네 개였다. 한 상자 정돈 있으리라고 생각했건만. 다른 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긴 했다. 더듬더듬 피임기구를 찾는 중에 들은 청천벽력이 또렷이 떠오른 바 있었다. 권시온. 이제 콘돔 없어. 왜 다들 편한 사이끼리, 그런 대화 한 번쯤 나누지 않는가? 세상이 무너졌다, 혹은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보인다. 그때 이시온이 보인 반응이 딱 그랬다. 눈과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두서없이 깜빡거리더니 어깨가 축 처지기까지 했다. 저를 위한 원맨쇼도 아니고. 태환은 그 행태를 빠짐없이 바라봤다. 어떻게 나오나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사실, 열 번이면… 대부분 안 나오지 않나. 젊긴 젊었다.

“이걸 다 어떻게 참았나 모르겠네.”

빙글빙글. 시온은 태환의 사나운 인상 덕에 그의 외형이 취향을 탈지는 몰라도, 미남인 데에는 반론을 꺼내지 못할 인종들이 많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능글맞아 보이는지. 그래서 싫었느냐고? 그럴 리가. 덕분에 투덜거리지도 못했다. 대신 두 뺨에 불퉁함을 가득 담은 채, 서서히 자쿠지 안쪽으로 가라앉았다. 그러고는 심지어, 정수리만 둥둥 떠있는 게 아닌가.

“뭐야. 또 삐쳤나? 다 크더니 더 잘 토라지는 거 같아, 권시온.”

금세 올라올 줄 알았더니. 폐활량은 건재해 보였다. 혹여 바깥 생활에 건강이라도 상했나, 반영구적인 이상은 없을까 살펴보려 했더니.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권태환이 욕조의 테두리에 걸쳐있던 팔 한쪽을 들어 올렸다. 곧장 물속에 잠긴 손바닥이 잠겨버린 뺨을 쓰다듬었다. 수중 중력이 다르게 작용하는지라, 뭔가 느껴진 듯 만지지 않은 기분이었다. 눈썹 한쪽이 까딱, 위로 올라갔다. 그래도 어르는 걸 멈추지 않은 보람이 있었나 보다. 공기 방울이 거품이 되어 올라오다가, 상체가 천천히 천장 쪽을 향했다. 푸하.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표독스럽진 못하더라도 제법 앙칼지게 쳐다보더니, 눈매가 그새 유순해졌다. 남자의 턱에 힘줄이 잠깐 돋아 올랐다. 뭔가 달랐다. 단아한 이목구비는 어떤 걸 떠올린 낯빛을 하고 있었다.

“…이런 말, 하지 않는 게 맞는 거 같긴 한데, 그… 백경,”

“또, 쓸데없는 걱정 하지.”

웃음기가 씻긴 것처럼 사라졌다.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확실히 굳어버렸다. 앞 머리카락에 맺힌 물기가 자꾸만 아래로 하강했다. 물방울이 내는 음색이 들리길 몇 초, 몇 분이었을까. 낮고 거슬리는 한숨이 들린다 싶더니, 권태환이 손을 뻗었다.

“읏, 아니, 어딜, 왜…”

뭘 하나 싶었다. 그는 미간을 구긴 채 아까는 겁먹을까 봐 일부러 손대지 않았던 하얀 상체에 달린, 입술과 같은 색을 띤 돌기를 꾹꾹 눌러대기 시작했다.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있어? 하긴, 힘이 넘치니 그럴 수밖에. 시온아, 너 또 섰어.”

유두를 자극당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단단하고 매끄러운 손끝이 닿은 것만으로도… 시온은 제게 어떤 단어를 붙일 수밖에 없었다. 발정. 다시 목덜미가 달아올랐다. 화제를 돌리려는 듯, 하관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그게, 아니라… 그보다, 진저브레드 케이크, 만들어 왔, 앗, 왔는데… 아. 그리고요…”

쿡, 하고 공격적으로 찔러댈 땐 언제고. 점점 노골적이었다. 그럴수록 겨우 쳐져 있던 살기둥이 자꾸만 고개를 들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러자 회피가 아닌, 정말 궁금했던 바가 잡을 새도 없이 뛰쳐나갔다. 시온의 양손이 태환의 손목을 잡았다. 튀어나온 뼈를 엄지로 살살 쓸어가며, 시선을 내리깐 채 홍채만이 그에게로 향했다.

“…우리 또 언제 만날 수 있어요?”

요망하네. 있는 그대로의 감상이었다. 매번 양순하다가, 고집스럽다가, 결정적일 때 꼭 이렇게 저를 놀랍게 만든다. 그 점이 기꺼운 것이니 어쩌겠는가. 태환이 흐응, 하고 콧소리를 냈다. 부력을 무시한 채, 태환이 성큼 앞으로 다가섰다. 막 씻어낸 참이었으나… 아직 해도 뜨지 않았다. 그의 손바닥이 곧바로 어떤 살덩이를 잡았는지는, 굳이 서술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테다.

“…아침에 알려주지. 일단은,”

다 쓰겠다고 한 말은 요구 사항에 가까웠고 남자는 기꺼이 받아들여 준 셈이었다. 그러니, 이번엔 마땅히 제 차례 아닌가. 제 구멍이 혹사당하긴 했으나,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처음의 정사에서, 뭣도 모르고 내뱉은 체액에 잔뜩 젖은 이시온이 매우, 아주… 구미가 당겼었는데. 이시온의 희여멀건한 피부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짙은 웃음과 함께. 끝은 멀었다는 걸 명확히 알려주는 선언이 들렸다.

“너 또 분수 싸는 거 본 뒤에.”

그리고 그 확언은 곧, 반드시 이루어질 일임엔 틀림이 없었다.

*

분수라니. 이 와중에 웬 분수이며 도대체 무슨 분수를 말하는 걸까. 궁금증이 부끄러움으로 탈바꿈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태환은 원하는 바를 기어코 얻어내는 사람이었으며 제 말을 그대로 실현하는 데 익숙했다, 시온은 기어코, 유럽 어딘가에 광장에 있을 법한 작은 큐피드 동상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그래도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게 있고,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창피함을 이기지 못해서, 다소곳한 자세로 뒤돌아 누워버린 이시온을 보며 웃던 사내의 손가락이 등 위에 느껴졌다. 손끝이 살짝 솟아 나온 척추뼈를 따라 더듬다 멈췄다. 다음 주 금요일. 고대하던 바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다시 어려지기라도 한 것처럼, 덜 여문 표정을 숨기지도 못한 채 한참을 바라봤더랬다.

“…5년.”

그렇지 않아도 작은 음성이 더 작았다. 혼잣말이라서 더 그럴지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입술의 움직임마저 섬세했다. 일상으로 돌아왔으나 돌아오지 못했다. 이곳의 주인인 자신인 분명 메종 단 루에 존재하고, 손은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마음이 뜬구름처럼 자꾸만 며칠 전, 그 호텔 객실에 머물러 있었다. 오후 5시 30분. 낮이라고 하기에도, 그렇다고 꼭 짚어 저녁이라기도 살짝 이른 때였다. 보통의 직장인들도 조금만 더 버티면 집에 갈 수 있다는 부푼 마음을 안을 만한 시각이기도 했다. 하지만 볕은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았고, 그들은 실제로 퇴근하지 못한다. 딱 그만큼 애매한 시간이었다. 그럼 자영업자에겐 어떠한 시간대인가.

업종별로 다르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디저트 매장의 파티셰 겸 사장의 입장을 토로하자면… 6, 7시쯤 픽업하러 오기로 한 손님만 두 명이었고, 마감인 8시까지로 헤아리자면 총 4팀이었다. 그렇다 한들 예약한 때에 딱 맞춰 완성하는 게 아니었기에, 어떻게 보면 마지막으로 숨돌릴 수 있는 건 지금뿐이었다. 때문에 더 딴생각에 빠져있게 되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고 믿고 싶었다. 약간의 자기 합리화가 필요했기도 하고. 5년은, 권태환이 백경아와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로 한 햇수였다. 말하자면 계약이 유효한 기간이 그만큼이란 뜻이었다.

“3년 정돈 참으라고, 했었으니까…”

뭔가 그 기간 동안 다른 협의라도 있었던 걸까? 커스타드 크림을 가득 채운 패스추리 위에 얹어진 딸기, 그 위에 시럽을 바르던 손길이 멈췄다. 멀리서 보면 몰라도 가까이서 보면 인위적으로 보일 정도로 덜그럭 멈춰버린 손이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았다. 안쪽으로 말려있던 척추가 서서히 곧게 펴졌다. 시온의 하얀 얼굴이 천장과 맞닿았다. 참았던 호흡을 뱉기 위해 수면으로 올라오기라도 한 것처럼, 공기가 폐 안에 가득 들어찼다가 살짝 급하게 전부 빠져나갔다. 최소한의 양심이었다. 케이크 위에 한숨을 내뿜는 파티셰라니. 볼썽사납기도 하고, 그래서도 안 됐다. 아마추어도 아니고 말이다. 한없이 유순한 인상을 가진 청년의 직업관은 아직도 딱딱하기만 했다. 이성은 간신히 붙잡았는데, 감성은 따로 놀았다. 그는 부유하고 있지 않았다. 뭍에 제대로 두 발을 붙이고 서 있었다. 그렇지만 왜 자꾸만 폐를 열면 물을 들이마실까 봐 무서운 초심자처럼 굴게 되는 걸까. 자신의 일인데, 자신의 마음은 알 수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알고 있지만 헤아리질 못했다.

그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메종 단 루의 공간은 크게 두 분류로 나뉜다. 사람과 트레이가 오갈 수 있을 만큼 뚫어놓은 아치 형태의 입구를 튼 벽이 기준점이었다. 그 앞으로는 매대가 있는 매장, 그 뒤로는 작업실이 있다. 바깥과 가게 안쪽을 왔다 갔다할 수 있는 출입구는 총 두 군데였다. 손님이 이용하는, 앞문과 이곳의 주인이자 유일한 일꾼이 자재를 들여놓기 위해 오가는, 작업 공간에 이어진 뒷문. 얼마 전 인부들이 커다란 오븐을 옮기기 위해 고생했던 그 통로였다. 문으로 이어진 바깥은 골목이었다. 주택가와 밀접해 있는, 동네의 거주민들이 지나다닌다는 뜻이었다. 거기서 아마도 아버지와 딸, 혹은 아들인 듯한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히잉, 빨리 가지고 싶은데…”

“아직 다섯 밤은 더 자야 해, 응? 아빠가 꼭 약속 지킬게.”

무슨 약속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아이가 뭔가 가지고 싶다고 요구했고, 다정한 투로 쩔쩔매는 아이의 아빠는 약속일을 지정한 모양이었다. 유추하기 어렵지 않은 내용이기도 했다. 기한이 생일일지, 아니면 단순히 부모의 월급날일지, 그도 아니면 뭔가 다른 특별한 날일지는 알 수가 없었다. 몰라도 됐다. 그렇게 둘의 음성이 멀어지더니 곧 사라졌다. 고아였으나, 이시온도 그 상투적인 문장이 부모들이 어린아이들을 달랠 때 꼭 한 번쯤은 하게 되는 말인 것 정도는 알았다. 짧게는 세 밤만 자면, 길게는 백 밤만 자면 네가 원하는 날이 올 거란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종류의 어르고 달램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보육원에서는 아무도 실물이 없는 미래를 약속하지 않았다. 괜한 기대와 헛된 희망은 좌절만 안겨주는 꼴이 된단걸, 그곳의 어른들 모두가 알았기 때문이었다.

…입양이 되고 나서도 없지, 아마. 약간 의미가 다르긴 했다. 몇 밤을 자네 마네 할 게 없었다. 언제든, 뭐가 됐든. 양 부모는 방치를 했을지 몰라도, 권태환은 요구하는 바를 앉은 자리에서 바로 이루어주는 편이었으니까. 바라는 게 그렇게 많지도 않았지만. 아무튼, 그 정도면 퇴색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항상 양 동생에게만 관대하고, 너그럽고, 다정하며, 즉흥적인 그 사람조차 이번만큼은 바로 요구를 들어주기 힘들 터였다. 덧없는 계산이 이어졌다. 아마도 앞으로 3년이라는 건 대략적인 햇수일 테니, 그럼 정확한 계약 만료일은 언제인 걸까. 그걸 일자로 환산하면 또 며칠이나 헤아려야 하나. 아, 그렇다면 계약일이… 결혼기념일인 건가.

송곳니가 입안의 표피를 씹었다. 아팠다. 그래도 덕분에 헛짓거리를 멈출 수 있지 않았나. 애초에 멍청한 짓이었다. 시온은 다시 붓을 들었다. 설탕물을 촘촘히 채우며 머리를 비우려 애썼다. 그러나 그마저도 금세 끝나버렸다. 주문품을 케이스에 넣고, 진열대에 넣어두었다. 고객이 오면 바로 건네주기 좋도록. 용무를 마치곤 곧장 다시 작업실로 향한다. 그래 봤자 몇 발자국 차이였을 뿐이다. 고작 다섯, 여섯 걸음인데도 다리가 무거웠다. 아니나 다를까. 작업대 앞에선 청년은 천천히 주저앉았다. 처음엔 어깨에 힘이 빠지고 척추가 안으로 말리더니 오금이 접히기까지 했다. 그러고는 무릎에 양팔을 댔다. 완전히 우는 어린애 꼴이다. 본인도 알았다. 알면 뭐 하나.

“…하아.”

머리로만 알지, 마음은 그렇지 못한걸. 애초에 모든 것이 덧없는지도 몰랐다. 태환의 결혼은 곧 계약이고, 애정은 없을 터다.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자신감이냐고? 저를 믿어서가 아니다. 권태환이 분명히 말하지 않았나. 그저, 철저하고 단순한 이해관계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제 앞에서 없는 말을 하지는 않았으니까, 그 점만큼은 신뢰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불과 한두 달 전보단 나을지도 몰랐다. 그땐 모든 게 불투명했다. 불순물이 가득한 물속처럼, 전부 흐리고 뿌옜다. 그리고 그 속에 잠긴 채 나오려고도 하지 않았었던 것에 비하면, 훨씬 나을지도 몰랐다. 아니, 정말 그럴까? 더는 형과 동생, 가족이라는 틀에 묶이지 않았다지만, 정말 저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그를… 그를… 사랑해도 되는 것이 맞을까. 애처로운 자문자답이 아닐 수 없다. 한편으론 그런 거 치곤, 욕정은 했다. 귓불이 자꾸만 뜨거워졌다. 이마가 원단에 쓸려 쓰라렸다. 너무 비벼댄 탓이다.

이제 더는 무르지만은 않지만, 그래도 그 나이대 남성치고는 보드라운 볼이 팔뚝 위에 녹아내렸다. 고개를 살짝 모로 돌리자 타일 바닥이 보였다. 위생적으로 관리하기 쉽도록 설계된 바였다. 실리콘이 채워진 눈 줄을 바라보며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일정하고 규칙적으로 붙여진 것만 같은 구성요소들은, 구석구석 자세히 살펴보면 허점이 없지도 않았다. 저긴 벽에 닿아서 인공적으로 깎아내렸고, 또 여기는 묘하게 비뚤게 놓여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자니 불쑥 의문이 하나 생겼다. 물러서서 보면 자연스럽지만, 밀착된 채로 보면 어색한 것. 무언가와 닮아 있었다. 권시온이 된 이시온이 태환에게 의지했던 건, 그다지 어색한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유일하게 제 옆을 지켜주고 살갑게 대해주는 이였으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 않은가. 아무리 그가 웃자라버린 소년이었더라도, 정에 굶주렸던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단순히 제 옆에 있는 어른에게 기대고 신뢰하는 걸 넘어 욕망을 품어버려 자책하게 된 건, 사실 이 과정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내놓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의 감각을 더듬어본다 한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고야 말았다는 것 외엔 내놓을 수 있는 답이 없었다. 이 대목에서 알지 못하겠는 것이다. 자신도 석연치 않은 부분은 많았으나 어떻게 짜 맞추자면 설명 자체가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상대는 달랐다. 권태환은 알지도 못하고 일면식도 없는 ‘권시온’에게 왜 그렇게 모든 걸 허락하면서까지 귀히 여겨준 걸까.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원론에 대한 의문이 막 고개를 들이밀려던 찰나였다.

「띵-」

무음으로 돌려놓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건만. 요새는 무슨 바람인지 늘 소리를 켜두었다. 적어도 문자와 전화에 한해서만큼은. 그 짧은 새 선홍빛으로 물들어버린 동그란 이마가 위로 솟아올랐다. 작업대, 그 위에 선반에 올려놓은 휴대전화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손님일까. 아무런 기대 없이 화면을 켰다가, 봉변을 당했다. 속눈썹이 또 하늘하늘 부유하며 멋대로 춤을 추었다.

[실력 있네.]

글자 수는 적었다. 딱 네 글자. 그건 일전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확실히 전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문자만이 아니었다. 시온의 시력은 아주 멀쩡하다 못해 뛰어난 편이었으나 괜히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액정에 코끝이 닿을락 말락 하는 수준이었다. 사진이 있었다. 그런 부가기능을 쓸 인물이 아닌데. 분홍색 입술이 몇 번 달싹였다. 너무 놀란 탓이다. 아마도, 방금 찍은 게 아닌 듯했다. 바깥은 이제야 막 해가 완연히 저물고 하늘이 검게 물드는 중이었는데, 화면 속은 겨우 외부에서 새어 나온 빛, 그리고 주광색 조명만이 물체와 풍경을 구분하고 있었다. 모자이크 무늬가 새겨진 접시에 진저브레드 케이크가 있다.

작게 세 덩이 정도를 가져다주었는데 개 중 한 덩이만 실존하고 있었다. 세라믹에 남은 부스러기가 이전에 다른 것도 있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먹었구나. 아마 빛이 옆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는지, 위스키가 빛을 굴절시켜 멋들어진 그림자를 남겼다. 이 자체로도 놀라웠던 건 맞다. 그가, 사진을 찍는 감상적인 짓을 즐기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 해도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았고 실제로 사내는 거의 그대로였다. 그렇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아…”

청년은 또 무너졌다. 직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아까처럼 쪼그려 앉지는 않았다. 시야 가까이 들여다보고 있던 자세 그대로, 다른 한쪽 손바닥으로 두 눈동자를 가렸다. 한편에 액자가 있었다. 매우 작은 사진 일부분이 보였다. 찍혀있는 장본인조차 존재를 잠시 잊어버렸던 물건이었다. 교복이 어색해 보이는 자신과 그 옆에서 드물게 미소를 머금은 채 기꺼이 화면에 담기길 선택한, 훨씬 어린 태환. 두 사람의 사진이었다.

“…가지고 있었…구나.”

시온의 심상은 이 문자 전, 후로 갈리고야 말았다. 어릴 적 저를 길러준 이 원장에게는 부끄럽고 죄송한 감상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잠시나마 의심했던 자신을 고해하고 싶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가 어째서 처음부터 저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는지, 알 수 없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시온이 알 수 있는 눈앞의 진실은, 그가 진심으로 저를 특별히 여긴다는 것이었다. 현재는, 그거면 충분하고… 넘쳤다. 눈시울이 화끈거렸다. 앞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자신은 이것만으로도 굉장히 기뻤다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제야 솔직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밖에 더, 필요한 건 없었다.

*

“하…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오시겠다.”

백주영은 홀로 제 사무실에 있었다. 오 비서마저 자리를 비우게 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는데, 특별한 상황이 생기면 이따금 일어나기도 했다. 늘 그럴듯한 인상, 직책에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낯을 일그러트리는 법이 없었건만. 금일은 달랐다. 그렇다. 이런 표정을 짓는 날이 바로 예외적인 경우였다. 일반 회사원의 평균 월급보다 비싼 의자의 등받이가 고통스러워 보일 정도로 한껏 뒤로 꺾여버린 채였다. 그 위를 차지한 이가 등에 강한 힘을 주고 괴롭히는 탓이었다.

“끔찍이, 아끼네. 여전히.”

짓씹어 뱉은 음성이 제법 사납기 그지없었다. 그의 데스크 위는 엉망이었다. 매번 정갈하게, 제 생김새에 맞춰 부드러운 색감과 소품들로 이루어졌던 모양새는 온데 간데 없어진 지 오래였다. 파괴만이 남아있다. 바닥을 나뒹굴며 부서져 버린 탁상시계와 처량해진 명패, 지금도 위에서 아래로 추락하고 있는 만년필의 꼴이 처량했다. 그 한가운데,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건 부피도 넓이도 커다란 상자 하나였다. 주영이 제 성질을 참지 못한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겨우 이런 무생물 따위를 보고 성이 난 건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그가 배알이 꼴리는 건, 이것을 보낸 이의 의도가 원인이었다.

좋은 걸로 들여보내라던 화분이 이렇게 장례라도 치르듯, 네모난 틀 안에 담겨서 반송됐다. 잔뜩 어질러진 배양토와 곱던 잎사귀가 다 망가져 버린 식물, 그리고 그 위에 흩뿌려진 몇 장의 사진. 세월은 흘렀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나, 그의 ‘소소한 취미생활’을 위한 모임은 유지되는 중이었다. 건재하다 못해, 점점 더 손을 뻗어 덩치를 불렸기도 했다. 그 작은 인화지들에는 그 모습들이 전부 새겨져 있었다. 완전히 막아버리지 못한, CCTV의 영상이 장면 장면 찍혀있었다는 거다. 발길질이 책장을 향했다. 거칠진 않고, 깔끔하게 딱 한 번이었으나 가해지는 세기가 남달랐다. 죄 없는 책이 몸을 날려댔다.

“…백경아를 빨리 찾아야겠지.”

아무리 나온 배가 다르다고 한들, 제 누나를 칭한다기엔 날카로운 어투였다. 백주영은 그렇게 분노를 지워내려 애썼다. 빌어먹게도, 그건 이미 20여 년 전부터 실패한 시도였지만.

*

다시 만난 김 비서는 첫인상 그대로 돌아와 있었다. 모시는 상사의 분위기를 닮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며 자신의 호불호를 드러내지 않는 모습 말이다. 운전기사도 저번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의복엔 티끌 하나도 묻어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여전히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오직 필요한 몇 마디가 오갈 뿐이었다. …저번과 길이 다르네요. 차창 너머로 바뀌는 풍경에서 틀린 그림을 찾아낸 시온이 말했다. 그러자 비서가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네, 다른 곳으로 지시하셨습니다. 라고 답해주었다. 기사는 여전히 과묵했다. 그리곤 완벽한 침묵이 흘렀다. 엔진음과 작게 틀어놓은 클래식만 흘렀다.

도착한 곳은 호텔이었다. 저번과 다른 곳이었다. 심지어는 JL이 운영하는 호텔도 아니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소리 내 중얼거리진 않았다. 김 비서는 하얀 낯빛에 떠오른 난감한 기색을 읽기라도 한 듯, VIP 전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라고 일러 주었다. 또 다른 안내사항도 있었다. 손에 쥐어지는 카드 키는 없었다. 청년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말 수가 없기로는 이쪽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프로는 당황하지 않았다. 능숙히 만들어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객실이 아니라 라운지 바로 가실 겁니다. 오늘은 부사장님께서 먼저 와 계시고요.”

김 비서는 굉장히 그림 같은 동작으로 승강기 버튼을 눌러주었다. 그 뒤로 뭘 더 묻는 일은 없었다. 그의 손엔 이번에도 디저트 상자가 하나 들려있다. 그게 뭔지, 혹은 디저트라는 걸 안다면 뭘 만들었는지 궁금할 만도 한데. 혹은 반대로 초대된 입장에서도 왜 이번엔 라운지 바인지, 상대가 얼마나 기다렸는지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편해서, 고마웠다. 형이라면 그런 일을 하기 위해 고용하는 인력이라며 가볍게 나무라듯 웃을지 모르겠네. 그런 시시콜콜한 생각을 할 때쯤, 엘리베이터가 부드럽게 멈췄다. 라운지까지 이어지는 통로가 꽤 넓었다. 말간 얼굴이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그저 눈동자만 움직였는데, 과연 프로는 달랐다. 안내인 역할을 자처한 이가 속삭이듯 오른쪽입니다. 라고 말해주었다.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럼.”

지나치게 공손한 인사를 마치자마자 사라졌다. 고맙다는 한마디를 할 새도 없이. 머쓱하진 않았다. 동그란 단화의 앞 코가 천천히 융단을 밟았다. 전층이 라운지 겸 바인 듯, 반대편은 식사에 목적을 둔 손님을 위한 입구로 보였다. 그러니까 편의성을 위해 끝과 끝을 나눠놓은 것이지, 결론적으로는 하나의 공간이다. 시온이 향 한쪽은 당연히, 이쪽이 바와 더 가까움을 알려주는 듯했다. 자동문이 열리자 직원으로 보이는 남성이 저를 보고 싱긋 웃었다. 별 뜻 없이, 김 비서와 비슷한 논지를 가진 미소였다.

…평일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분명 투숙객이 있을 텐데. 키에 비해 작은 두상을 가진 청년이었기에, 상대적으로 작달막한 머릿속이 금세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누가 있든 없든, 권태환에겐 전혀 상관없었을 거다. 애초에 저를 제외한 다른 이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니까. 그래도, 그래도. 석연치 않은 마음이 뒷말을 이어붙였다.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가 걱정된 건 아니었다. 물론 잘 알고 있다. 사내는 누구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든, 비난을 받든 귓등으로 넘길 테고, 사실 애초에 함부로 그에게 반하는 행위를 하려는 자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와 같은 부류가 존재한다고 해도, 치졸하게 뒤에서 저들끼리 큰소리치며 애먼 허세를 부리는 게 고작일 것이었다. 누가 감히 권태환에게 밉보이고 싶겠는가?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내부가 어색하리만치 조용했다. 마치 그가 방금 타고 온 승용차를 메운 소음이 배기음과 카오디오에서 비롯된, 작고 거슬리지 않는 음색으로만 이루어졌듯이. 이런저런 잡념이 왼쪽 가슴께를 살살 문지르는데 집중한 탓에 저도 모르게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나 보다. 이시온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직원이 앞서서 걷고, 자신은 뒤따르는 형태의 짧은 행렬이었다. 그들이 지나온 길, 혹은 지나갈 통로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얀 테이블보를 쓴, 아무도 손대지 않은 티가 역력한 빈 테이블과 의자들이 거기에 존재하는 전부였다. 문자 그대로 말이다. 저녁 9시 반. 이시온은 알코올과 거리가 먼 편이라 잘은 몰라도, 보통 주류를 판매하는 곳은 특성상 늦게 문을 열고, 새벽에 문을 닫는다는 상식 정돈 있었다. 이곳이 호텔 안에 있기에 좀 다른 것일 뿐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직원도 얼마 없다.

“저기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앞서고 있던 이가 발을 멈췄다. 그는 시온보다 작았기에, 정면을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직은 바와 거리가 좀 있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앉아있는 실루엣의 정체를 모르기는 힘들었다. 청년의 시력이 뛰어난 덕이 아니다.

어두운 조도에 묻혀 빛이 맺히지 않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각도가 달라져서 만이 아니다. 밖은 저녁이고, 통유리를 통해 보이는 탁 트인 고층의 전경 또한 어둠과 저 아래에 있는 빌딩에서 번져 나오는 작은 빛 무리밖에 없었다. 안의 조명도 사정은 같았다. 부러 명도를 낮춘, 은은함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도, 지금 시온의 눈은 마치 이른 아침의 햇살을 온전히 받아내는 수면과 닮아 있었다.

이런 계열에 일하면 다들, 역할만 마치고 사라지는 능력을 습득하게 되기라도 하는 것일까. 자리를 안내해 주던 남성이 눈 깜빡할 새에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끌려온 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럴 겨를도 없었고. 그다지도 눈치를 봤던, 어떤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볼지 모르는 인기척이 있었는데다 몇 종이나 되는지 모를 술병이 저렇게나 즐비해서 주위가 흐트러질 만한데도, 단정한 이목구비는 오로지 제 눈에 들어온 존재만 인식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누가 연출 장치를 마련해 둔 것처럼, 스포트라이트가 사내의 머리 위에 존재하는 듯했다. 그러자 등을 보이고 있던 남자의 옆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권시온.”

태환은 두껍게 다듬은 원목 바에 한쪽 팔꿈치를 대고 있었다. 턱을 괴기 위해서였다. 자유로운 반대편 팔이 저를 가리키고 있었다. 손바닥이 천장을 보인다. 마치 잡으라는 듯이.

“이리 와.”

그의 말이 들리는 것과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발소리 한번 내지 않고, 부산스러움 따위는 모른다는 듯 움직였던 다리가 한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그렇게 가깝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순식간에 그의 곁에 닿을 수 있었다. 시온은 자신이 뛰지는 않았으나 거의 뛰듯이 걸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상대도 그걸 일러주지 않았다. 검지가 살짝 파드득, 튀었다. 타인의 눈을 신경 써서가 아니다. 재회 후, 바깥에서 그의 손을 잡는 건 처음이었다. 시범적인 관점에서 그렇다는 거지, 10년 전이라면 낯선 일도 아니었다. 그때도 부끄럽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너무 좋아서 애써 무시하려고 했던 풋내기인 소년이 있었다. 이제 사탕발림으로라도 어리다고 할 수 없는데, 왜 이거 하나로도 온몸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드는 걸까. 희고 긴 손바닥이 사내의 손바닥과 맞닿았다.

“…형.”

이시온은 여전히 모르고 있다. 제가 얼마나 수줍게, 속눈썹을 떨어대면서 입매에 부드러운 호선을 띄고 있는지. 그건 오로지 권태환만의 즐거움이었고, 그렇게 만들 터이니 알릴 필요도 없다는 것마저, 청년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환희에 젖은 무지였다.

*

“체리라. 너하고 잘 어울리는데.”

“…나하고요? 술이 아니라?”

‘저’가 어느 새부터 ‘나’로 돌아왔다. 변한 건 아니었다. 그들이 호적이란 서류로 묶여있었을 땐 항시 그렇게 자신을 지칭했던 시온이었다. 태환은 계속 아무것도 지적하지 않는 태도를 고수했다. 그편이 훨씬 좋았으니까. 낮은 웃음이 들렸다. 완전히 둘 만 존재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풍기고 있지만, 현실은 그와 달랐다. 자리에 앉기 전, 이시온이 눈치채지 못했던 타인은 바로 바텐더였다. 그것도 무려 세 명. 한 명은 조금 떨어져서 잔을 닦느라 바빴다. 이쪽엔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였다. 인간이란 남의 말을 궁금해하도록 설계된 생물이나 다름없다. 반드시 그렇다는 건 아니었으나 보편적으로, 평균적으로는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두 손님이 어떤 대화를 나누던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게 아닌가.

그들 앞에 놓인 잔을 채워준 바텐더도 똑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태환의 지시로 준비해뒀을 보틀 들을 살피고 옆에 보조인 듯한 인물에게 지시를 내릴 뿐이었다. 그나마 개중 가장 인간적, 이라고 할 수 있는 구성원이 바로 그 보조였다. 그는 레몬의 껍질을 깎아 두거나, 술이나 칵테일을 따르고 저을 때 쓰는 도구들을 닦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뭔가 귀에 들어온다 싶으면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래도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이시온이 가져온 상자는 태환에게 넘겨져, 또다시 한번 바텐더에게 넘어갔다. 그걸 받아든 건 지금 잔을 닦는 데 집중하고 있는 이였는데, 그는 잠시 사라지더니 안에 있던 파이를 접시 위에 세팅해 가져다주었다. 체리 클라푸티였다. 어떻게 보면 머쓱할 정도로 간단한 레시피를 가진 디저트였기도 했다. 그래도 직원은 제가 왜 굳이 그걸 가져왔는지 유추하기라도 했는지, 식어있던 표면을 적당한 온도로 데워주었다. 그가 몸을 숨겼던 곳은 주방이겠지. 그럼 거기에 또 모습만 보이지 않는 다른 이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이건 바텐더의 의도가 맞을 거라고, 시온은 짐작했다.

클라푸티를 만드는 법은 단순하다. 넣을 과일을 씻고 우유와 설탕, 생크림을 섞은 다음 체에 거른 박력분을 넣어 한 번 더 섞어준다. 그다음엔 오븐용 접시에 씻은 열매들을 넣고 반죽 물을 붓는다. 그리고 예열해둔 오븐에 굽는다. 슈가 파우더로 마무리하면 끝이다. 이것이 본토 가정에서 흔히 사용하는 조리법이었다. 하지만 시온은 그걸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다. 명색이 프로니까? 그런 과시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원래라면 생과일을 쓰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미리 체리를 절이기까지 한 건 아녀도, 미리 브랜디를 약간 부어 재웠다 싶을 정도로 담가두었다. 반죽 물에 들어갈 설탕량을 줄인 대신 같은 술로 시럽을 졸여두었다. 마찬가지로 단맛은 최소화해서. 파우더는 뿌리지 않았다. 구워서 한 김 식힌 뒤 만들어둔 시럽으로 대체하기 위함이었다.

셰프와 파티셰, 바텐더 그리고 소믈리에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후각이 예민해지도록 훈련을 받았거나 혹은 선천적으로 그런 기질을 타고났다는 점이다. 온도가 낮아져 버려서 많이 날아갔을 텐데. 고맙게도 브랜디의 잔향을 알아채 준 모양이었다. 감사의 인사는 건네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한눈팔 정신이 없었으므로. 아무튼 그래서, 갑자기 체리가 저를 닮았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시온의 고개가 살짝 모로 기울어졌다.

“유학 갔던 거 맞나? 정말 몰라서 물어?”

권시온에게라면 이렇게 묻지 않았을 거다. 대놓고 놀렸지. 태환 또한 고개를 기울였다. 눈 맞춤을 위해서였다. 길고 촘촘한 속눈썹이 아래위로 나부끼는 걸 놓치지 않고 감상할 수 있어 흡족했다. 그러다 이내, 드디어 눈치를 챘는지 도톰한 입술이 작게 공백을 만들었다. 서양에서는, ‘경험’이 없는 사내를 어떻게 부르냐면은… ‘체리’였다. 동그랗게 부풀었던 시야가 감쪽같이 가려졌다. 시온이 팔을 들어 제 얼굴을 숨겨버린 탓이었다. 그럼 뭐 하나. 보지 않아도, 감정이 다 보이는데. 제 주인만큼이나 길고 잘 뻗은 손가락의 마디, 그러면서도 섬세하게 힘줄과 핏줄이 선명한 손등이 불그죽죽했다.

“…그, 그보다. 오늘은, 오늘은 객실이 아니네요.”

칭얼거릴 줄 알았더니. 이젠 시치미떼는 방법도 배우긴 했나 보다. 어디까지나 배웠다는 거지, 능숙하단 건 아니었다. 제법, 아니. 아주 깜찍한 꼴이었다. 남자의 넓고 단단한 어깨가 몇 번 들썩였다. 웃음에 숨이 섞여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더니 팔이 스르륵, 잠깐씩 걸리듯 멈칫거리긴 했으나 다른 때보단 자연스럽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역시나. 태환이 낮고 억누른 듯한 웃음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누가 투명한 물에 색소라도 부어둔 듯이 달아올라 있었다.

“왜, 아쉬워?”

“…우리, 말곤 아무도 없기도 하고요.”

말 돌리긴. 아예 불변하지 않는 건 없다. 그 대상이 생물이라면 더더욱이. 알고 있는바였고, 딱히 섭섭하지도 않았다. 그 방향성이 재회 직후처럼 날카로웠다면 말이 달라졌을 테지만 말이다. 다행이었다. 권태환이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시온은 괜히 제 등 뒤를 힐끔 살펴보았다. 여전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가는 손님이 없는 거야 당연한 일이었는데, 들어오는 무리도 하나 없는 건 조금 이상했다. 얼결에 궁금했던 바를 물어버렸다. 태환의 날카로운 눈매 속, 다른 이들보다 작고 더 검은빛을 가진 홍채가 잠깐 위로 솟았다. 그리곤 다시 한쪽 입매를 끌어올렸다.

“그거야 당연히, 대절했으니까 그런 거고. 여기로 부른 건…”

입술 위에 서늘한 체온이 닿았다. 이윽고 뜻밖의 말이 들렸다.

“여긴 네 첫 음주를 위해 만들어둔 바거든, 10년 전에 말이지.”

*

‘…음, 내가 제정신이 맞는 건가 싶네. 정말 그게 거래 조건이야?’

잘나가는 대기업, 하면 생각나는 그룹의 이름을 두 곳만 불러보세요. 지나가는 시민을 붙잡고 물어본다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뭘 이 나라 사람들 다 알고 있는 걸 묻나. 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대답할 것이다. 그거야 당연히, JL하고 SH 아니에요? 딱 저들끼리 다 해 먹잖아요. 그래도 JL이 좀 더… 보유 자산이 많다고 들은 거 같긴 하고. 라는 논지를 어떻게 풀어내는가만 다를 뿐이랄까. 그런 JL에서 확정된 후계자 취급받는 권태환이 지금 눈앞에 두고 있는 상대는 벌써 경영권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뜻을 분명히 표명한, 현 SH 회장의 둘째 손자 공은혁이었다.

벌써 누가 뒤를 잇네 마네 하긴 한들 실제로는 실무에 깊이 관여하지 않은 이 두 사람이 무슨 접점이 있길래 초저녁부터 얼굴을 맞대고 있을까. 이유는 단순했다. 둘 다 모두 같은 학군, 같은 학교, 같은 반, 같은 대학에 진학했었다는… 그야말로 학연으로 이루어진 관계였다. 주변에 친구라고 칭할 존재를 둘 필요가 없는 태환으로서는, 그나마 교우관계라고 해도 좋겠지, 하고 인정할 만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가 은혁이기도 했다.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다. 이따금 가문 간, 기업 간의 행사가 있을 때 인사를 나눠도 불쾌하지 않을 정도일 뿐. 그런 둘이 굳이, 그것도 매사추세츠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예삿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은혁은 태환을 친밀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저 적정 거리를 유지하고 서로 마음 쓰지 않을 만큼만 교류하였다. 모두가 JL의 직계 후손인 그를 모두가 두려워하고 지레 겁을 집어먹는데도 불구하고, 유달리 그를 무서워하지 않은 편이기까지 했다. 경계와 공포는, 결이 약간 다르니까. 그게 그의 지론이며 판단이었다. 사실 갑작스럽긴 했다. SH가 대중적인 평가에서 JL보다 다소 못난 모습을 보이는 데에는 몇 가지 사유가 있었는데, 개중 가장 심각한 요소가 내부의 적이었다. 제 아래 동생인 공찬혁이 특히 그러했다. 보안팀이나 홍보팀의 골머리가 썩지 않을 날이 없구나. 심지어 이번엔 약이란다. 그래서 한동안 시끄럽겠구나 했다. 지나치게 평온해 보인다고? 그럴 만도 했다.

초록은 동색이고, 무리는 끼리끼리 논다. 권태환과 공은혁이 그나마 얕게라도 친목을 유지할 수 있는 건, 그들의 결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이는 점이나 표현 방식이 달라서 그렇지. 제 앞의 동창에게 권력이란 당연하고 필수적인 것과 동시에 제가 양껏 휘두를 수 있는, 태어날 때부터 가진 권리였다. 반대로 자신에겐 귀찮은 족쇄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대신 그런 만큼 제 안위가 보장된다면 가족이든, 제 가문이든 무슨 일이 일어나도 별 상관이 없었다. 대비를 해오고 있기도 했고. 여기서 의외인 점은 제 집안일에 관심이 없다 못해 혀나 차지 않으면 다행일 권태환이, 손수, 직접 움직여 언론 노출을 막아줬다는 거다. 비범하긴 했다. 아까도 말했듯 그는 후계이지, 실 경영진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은혁이야 잠시 여행 온 거라고 쳐도… 사내는 조금 늦은 유학 중이었다. 타국에서. 그런데도 감쪽같이 손을 써놓은 것이다. 사람이 하지 않던 짓을 하면 죽는대. 제가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농담이었다. 무언가 목적이 있겠거니 짐작은 했다. 눈앞에서, 1인용 카우치에 등을 묻은 채 다리를 꼬고 있는 남자는 눈썹을 한번 들썩였다. 귀가 먹었느냐는 의미다.

‘그래.’

분명히 요구가 있을 테고, 회사 내부에 그걸 전달하는 건 자신이 될 거란 점도 예감한 바였다. 그런데 대뜸, 뭘 하라고? 은혁이 재차 물었다.

‘…그러니까, 이번에 새로 여는 호텔 라운지 바에 설계를 네 맘대로 하게 해달라?’

이번엔 대답이 아예 없었다. 사내의 단단하고 날카로운 턱 선에 힘줄이 돋았다. 그래. 내 귀가 고장 난 것도, 내 정신이 나간 것도 아니구나. 은혁은 어이가 없는 바람에 웃고 말았다.

‘아니, 이해가 가지 않아서 이러지. 갑자기 그런 건 왜 요구하는 거야?’

‘첫술을 아무 데서나 먹일 순 없으니까.’

칼 같고 빠른 대답이었다. 이 이상은 물어도 답변할 생각이 없다는 뜻, 잘 알겠다 싶다. 태환과의 대화는 항시 이런 식이었고, 자신 말고도 다른 이들은 더 했을 테니 불만을 품진 않았다. 계산이 대충 돌아가긴 했다. 첫 술. 분명 몇 년 전에 JL로 입적된, 그의 양 동생과 관련된 게 틀림없었다. 정말 매번 새롭고 신기한 일이다. 권태환이 온 정성을 쏟는, 모든 것을 용인하고 떨어트려 놓지 않는 생물이 생기다니. 무슨 꿍꿍이인지, 속내가 따로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궁금할 필요가 없었기도 했고. 아니, 와중에 묻고 싶은 게 한 가지 있긴 했다. 그 애가, 올해 아마 열아홉이지. 그런데 호텔의 개장은 내후년이고 사내의 졸업 일정도 내후년이었다. 계획과 계산이라면 치가 떨릴 정도로 완벽한 그였는데, 여기에 얽힌 진상에는 호기심이 생겼다.

‘스무 살도 아니고, 스물하나에 첫술이라… 요새 애들 타종 울리자마자 뛰쳐나갈 텐데 괜찮겠어? 그리고… 너 강북 강남에 건물 꽤 있잖아. 그런데 왜 우리 쪽 호텔인지 모르겠네.’

아, 받아들이지 않겠단 말은 아니고. 은혁이 살짝 고개를 젖혔다가 다시 정면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JL은 앞으로 몇 년간 리조트 혹은 호텔을 늘릴 계획이 없었지. 그건 알겠다. 그런데 왜 SH 호텔일까? 라운지 바를 통째로 준비시켜줄 거면, 불편하게 다른 가문이 점령할 곳에 마련해둘 필요는 없지 않은가. 네가 알게 뭐냐며 무시할 줄 알았더니. 은혁은 태환으로부터 의외로 불친절하지만 명쾌한 해답을 들을 수 있었다.

‘애가 물을 좋아해. 한강이 보이는 위치에 준비시킬 곳이 거기뿐이었으니까.’

…내 청력에 이상이 없는 게 맞을 텐데. 은혁의 기분 좋은 호선을 그리고 있던 옅은 눈썹이 이마 위로 당겨 올려졌다. 정리하자면, 단순히 자리 때문에 이 모든 걸 실행하고 원하는 바를 손에 넣었단 거다. 아주 까무러칠 일은 아니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말이다.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금세 빠졌다.

‘그리고… 권시온은 술 같은 거, 내가 알려주기 전엔 절대 입에도 안 댈걸.’

눈앞에 있는 인물의 입꼬리가 둥글게 휘었다. 이 장면을 단어로 표현하자면, 명백한 만족과 흡족함이 가장 어울린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이윽고 공은혁은 제 동창을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내면의 두 손을 들어 올려 백기를 드는 걸 선택한 거다. 붙이지 않아도 되는 사족을 중얼거리긴 했다. 그런다고 큰일이 나진 않았으니까. 아마도 말이다. 다른 이들 같으면 몸을 사렸을지 몰라도, 그는 어떤 특이점 하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권태환이 요새 들어, 제 양 동생을 입에 올릴 때만큼은… 매우 미세하게 너그럽단 사실을.

‘…동생이 둘이나 있는 나보다 훨씬 더 잘하네, 형 노릇.’

익숙한 상황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답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알고 있었다. 저건 형 노릇이 아니다. 어느 형제 사이가 저렇단 말인가. 그만. 멈출 때였다. 은혁이 마지막으로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나중을 기약했다. …라운지 바 관련은 따로 연락할게. 그렇게 두 동창은 자리를 파했다.

*

사내는 위의 시시콜콜한, 비하인드를 시온에게 곧이곧대로 전달하진 않았다. 그가 알려준 건 단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 첫째로 이 호텔의 소유주 가문의 누군가와 아는 사이라고 했다. 둘째로 때마침 제가 귀국할 때쯤 연다기에 제게 설계권을 넘겨달라 했으며 셋째로는 눈앞에 진열장 중 한 세션은 전부 그가 직접 고른 위스키만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마시기 위해서가 아닌… 단 한 존재가 어떤 걸 좋아할까 고르고 고른 목록의 결과물이었다고.

“또, 질질 흘리지.”

거스러미 하나 없이 다듬어진 손톱에 빛이 맺혔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보드라운 살결을 문지르느라 생기는 현상이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사내의 손이 청년의 뺨에 머물렀나. 물 때문이다. 식수나 표면에 맺힌, 그런 게 아니라 체내의 수분. 즉, 눈물 말이다. 흐르거나 펑펑 울진 않았다. 대신 눈꼬리나 눈 앞머리에 맺힌 방울이 꽤 컸다. 뭐라 타박하는 듯하면서도, 태환의 손길은 퍽 다정했다. 오로지 권시온 혹은 이시온, 아무튼 시온 만이 누릴 수 있는 매만짐이었다. 한편으론 미소를 감추지 않기도 했다. 입가에 깊은 우물이 생길 정도였다.

“그렇지만… 미안해서…”

“됐어.”

말단, 보조 바텐더는 눈 둘 곳을 몰랐다. 태연하다 못해 뻔뻔한 선배들이 부러워졌다. 그는 아무런 정보가 없다. 오늘 이곳을 온전히 차지한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를 알지 못했고 알아서도 안 됐다. 상체가 더 두껍고, 더 큰 쪽이 ‘정체’를 모를 순 없었다. 호텔 업계에 일해서만은 아니었다. …솔직히 이 땅에 살면서 권태환 얼굴을 기사로라도 접하지 않은 인간이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는 저의 머릿속을 통제하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느라 팔에 힘이 너무 들어가 뽀드득, 용구 닦는 소음이 너무 크긴 했다. 그래도 안도할 수 있었다. 두 손님은 제가 무슨 소리를 내는지, 어떻게든 눈알을 굴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미간에 힘을 줬는지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유명인의 옆자리를 차지한 이는 아마도 20일 테다. 또래로 보이는 청년은 유달리 흰 얼굴에 오밀조밀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무례한 일임엔 틀림없지만, 혹시 스폰을 받는 무명배우라도 되나 싶은 의심이 들어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미인이기도 했다. 키는, 좀 크지만 말이다. 결국 끊어내지 못한 잡념이 멈춘 건, 선배의 눈총 덕분이었다. 입 모양으로 집중해야지. 하고 단호하게 일러주니 더는 티를 내선 안 냈다. 그러건 말건, 태환과 시온은 서로에게 집중할 뿐이었다. 사실 권태환은 그런 기색이 보이자마자 잡아냈으나, 굳이 방해받고 싶지 않아 내버려 둔 것이지만. 시온이 두 손으로 잔을 잡은 채 고개를 숙였다. 태환의 손바닥은 여전히 그의 얼굴 위에 머물러 있는 채였다.

“…혹시, 있잖아요.”

운을 떼기가 힘들었다. 조심스러운 탓도 있었다. 잔 안에는 미처 비우지 못한 다갈색 액체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 작은 네모 안에 비친 자신의 얼굴과 함께. 입술을 들썩여보지만, 자꾸 멈췄다. 옆에 앉은 이는 채근하지 않았다. 방향을 틀어버린 살결을 천천히 쓰다듬을 뿐. 거친 부분은 전혀 없었다. 엄지 끝에서 누르는 감각이 느껴지긴 했어도 거세지가 않았다. 양옆으로 문지르다가, 잠시 멈추기도 했다가, 젖어서 빳빳해져 버린 아래 속눈썹을 훔치기도 했다.

몇 음절 되지 않는 문장인데, 왜 그렇게 꺼내기가 힘들까. 당연했다. 시온은 이제까지 제 상처만 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으나 자꾸만 왼쪽 흉근이 아파져 오는 기분이었다. 이시온으로서 자신이 회피하며 눌러온 시간과 세월은 저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음을, 권태환 또한 마찬가지였음을 마주하기가 어찌 간단한 일이겠는가. 그래도 물어야만 했다. 끝내 얼굴을 들어 올리지도 못하고, 그렇지 않아도 작은 목소리는 더 나직하고 물기에 젖어 먹먹하기만 했으나 그래도 확인해야만 했다. 꼴사납게도 음절 하나, 문장 하나, 단어 하나. 모든 게 모조리 흠뻑 젖어 있었다.

“형도, 나… 많이 찾고 싶었어요? 보고 싶었어요?”

잊지 않았다. 아무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들, 자신들 말고는 아무도 없다고 한들 직원의 눈이 있었다. 일부러 빌렸다고 하니 어딘가 노출되거나 장면을 남길 만한 여지가 없다 해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시온은 지배되었다. 무엇에? 저와 완벽히 같을 순 없겠으나 유사하게라도, 제 앞의 사내가, 자신의 호적상 형이었던 사람이 비슷한 감정을 품은 게 맞는지 그 입으로 직접 듣고 싶다는 염원에 정복당했다. 다음 차례론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을까. 알게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이 턱을 감싸 쥐었다. 위로 당기는 각도가 그리 경사지지 않더니 이내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너른 어깨의 위치가, 못 본 새 많이 밑으로 내려와 있었다. 부러 눈을 맞추기 위함이 틀림없었다. 예쁘긴 한데. 낮고 묵직한 음성이 중얼거렸다. 놀리는 기색 따윈 찾을 수 없었다.

“권시온.”

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온은 눈꺼풀을 덮을 수 없었다. 사내의 눈동자 색은 검고 짙다. 어두울수록 빛이 더 잘 맺힐 것 같지만, 그의 눈동자는 그렇지 않았다. 원래라면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약간 달랐다.

실제로 조명이 반사되었다거나 맺힌 건 아니었다. 그러나 착각을 일으킬 만큼 깊고 선명한, 형체 없는 무언가의 존재감이 또렷이 드러나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시온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건,

“저번에도 말했듯, 나는 참고 있었을 뿐이야.”

진심이었다. 어떤 뒷사정이 있든, 어떤 계약이 오고 갔든, 저와 마주하지 않은 세월 동안 무슨 일이 있고 무엇이 없어졌든, 그는 진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매번,”

조금은 탁한 음성이 한 글자, 한 글자도 흐리지 않은 고해를 건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음색이 들릴 때마다 척추 끝이 아릿하고, 안면이 뜨거워졌다. 눈가가 아팠다.

“…아주 간신히.”

바텐더들은 그새 등을 돌렸다. 잔뜩 젖어버린 태환의 손가락 마디가 시온의 턱을 끌어올렸다. 입술이 눌렸다.

이기적이었던 마음에 죄책감이 들어야만 했는데, 왜 이렇게 모든 걸 가진 듯이… 기뻐지고야 마는 것인가. 열아홉이었던 권시온은, 스물아홉의 이시온이 되어 마지막 도주를 감행하였다. 금세 끝날, 약 5분간의 도망이었다. 눈꺼풀이 완전한 어둠을 선사했다. 살결에, 입술에. 감촉이 더 선명히 느껴지도록.

*

“…창피해.”

들을 이도, 대답할 이도 없는 혼잣말이었다. 조금 차가운 물에 얼굴을 적신 시온이 참지 못하고 중얼거리고 만 것이다. 길게 울지는 않았다. 그나마 간신히 반 정도는 삼켜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상대는 그걸 부끄러워하지도, 그만 울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지켜봐 주다가 몇 번인가 짧은 입맞춤을 더 해주었다. 그래서 더 엉망인가. 이시온은 정면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가 서 있는 곳은 화장실, 세면대 앞이었다. 울음이 겨우 멈췄을 때, 시온은 제 몰골이 말이 아닐 것을 예상했다. 감정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잠시만 자리를 비우겠다며 걸어들어온 곳이 여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맑았던 안색은 온데간데없었다. 눈가와 코끝, 광대 살짝 아래, 귀, 목덜미. 차례대로 얼룩덜룩 난리가 났다.

가벼운 세수를 한 탓에 앞 머리카락마저 젖어버렸다. 작은 물방울이 대리석 위에 자국을 남겼다. 괜히 애먼 얼굴만 적셨다 싶었다. 남은 물기는 페이퍼 타월로 훔쳐냈다. 그래도 색이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았다. 볼이든… 입술이든. 키스라고 부르기엔 모호하고, 뽀뽀라고 하기엔 의미가 다른 짧은 입맞춤이 연달아 닿은 탓이었다. 자신과 정 반대쪽으로 행동하는, 거울 속 제 분신이 팔을 들었다. 곧이어 길고 잘 뻗은 검지로 아랫입술을 살살 문지르다가 떨어진다. 그 뒤엔 바로 엄지로, 괜히 갈려진 틈새를 눌러본다. 머리카락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후두두 떨어진다. 고개를 양옆으로 휘저어서 생긴 결과였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시온은 속으로 자조했다. 그 와중에 제 부은 입술에 남은 흔적이 기꺼워지다니.

“후우…”

깊게 들이쉬었던 들숨이 길고 긴 날숨으로 뒤바뀐다. 아직은 진정되지 않았다. 창피했다가, 자책했다가, 설렜다가. 안정은커녕 오히려 아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럼 더 있다가, 호흡이라도 더 고르고 나가야 하는 걸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바깥에서 기다리는 이가 있기 때문에? 원론적인 부분만 언급하자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거기에 또 부가적인 사유들이 줄지어 붙는다. 일단, ‘형’은 매우 바쁜 편이다. 사흘, 나흘 혹은 다음 주. 바로 다음날에 보지 못하는 걸 섭섭해할 수 없는 이유는 태환의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대충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만날 날을 기다리게 되며 생긴 버릇이 있었다. 인터넷과는 거리가 멀던 자신이 괜스레 검색창에 사내의 이름 석 자를 쳐보고, 관련 기사를 찾아봤다. 찾아보는 글마다 JL의 권태환 부사장이 어디와 제휴를 맺는데 어떤 카드를 꺼냈고, 또 어느 날은 뭘 했으며, 또 어느 날은 무얼 했는지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사업에 관한 일거수일투족이 나열된 글자들을 살펴보면 과연 저를 만나기 위해 스케줄을 얼마나 밀고 당겼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이와 연관되어, 또 다른 연유가 고개를 든다. 그러니까, 그렇게 바쁜 만큼 함께할 수 있는 지금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더 솔직해지자면, 무엇보다… 저를 기다리는 태환이 어서 보고 싶었다. 고작 화장실 한 번 온 걸로. 주책맞구나. 시온은 양손으로 이미 다 말라버린 얼굴을 비볐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많았다. 끝내 묻지 못했던, 태환으로부터 저지당하기도 하고 제 입으로 꺼내기가 힘들어 삼켜버리기도 한, 문제들이 있었다. 이시온은 현재 자신이 평소와 얼마나 다르게 굴고 있는지, 새삼스럽게 깨닫고 있었다. 언제나 느리다고 해도 좋을 만큼 차근차근 일정을 밟아오고 계획을 세우던 삶이, 점점 형태를 바꾸고 있었다.

그랬다. 이걸 무시하고 넘어간 다는 건, 이제까지의 제 삶의 방식을 부정하는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눈꺼풀이 닫혔다 열리기를 반복했다. 이제야 부슬부슬하게 돌아온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잠깐은, 이번만큼은, 충동적이어도 되지 않을까. 티끌 한 점 없는 바닥으로부터 마찰음이 들렸다. 신발의 밑창이 말라버린 타일과 붙었다 떨어지느라 낸 소음이었다. 들어올 때는 적막하게 발을 디뎌놓고, 이제 와서 이런다는 건 그만큼 마음이 조급하단 뜻이기도 했다. 시온이 돌아가기 위해 막 몸을 비튼 순간이었다. 어. 크지 않은, 놀란듯한 음성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상체가 기울었다거나 무릎에 힘이 풀리지는 않았다. 정말 정신머리가 없긴 했나 보다. 입구는 사람이 세면대 앞에 섰을 때, 필연적으로 등을 보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청소용구를 담은 카트가 덜그럭, 휘청였다. 밖으로 나가려고 방향을 튼 시온과, 안으로 들어오려고 막 문을 연 직원이 부딪힌 것이었다. 두 사람과 하나의 물체가 동시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죄, 죄송합니다. 아, 옷이…”

“괜찮습니다. 저야말로 살피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작은 이동용 캐리어에는 방향제가 나란히 나열되어 있었다. 충격 탓이었는지, 마개가 약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개중 하나의 뚜껑이 튕겨 나간 바람에 안에 있던 액체 일부가 쏟아져 버렸다. 시온의 베이지색 니트에 얼룩을 남기면서 말이다. 크게 티가 나진 않았다. 밑단의 둘레를 잡고 자세히 살펴보니 곤란할 정도로 심각한 오염은 아니었다. 두통을 유발할 만큼 조악한 향이 아닌 것도 다행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물로 간단히 지우긴 힘들어 보였다. …오늘 멋있어 보이긴 그른 날이구나. 입안이 썼다. 직원을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저가 더 사과해야 할 판이었다. 어쨌든 정신을 파느라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으니까. 어서, 빨리 다시 한번 괜찮다고 말하고 돌아서려 했다. 밑을 향했던 고개가 서서히 위로 향했다. 상체의 각도가 직원과 눈이 마주칠 만큼의 높이로 돌아갔다.

“제가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

위화감이 들었다. 시온은 잠깐 눈을 깜빡여보았다. 여러 번 말했듯이, 청년은 주변에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이 적었다. 심지어는 그보다 덜 친밀한, 지인이라고 부를 상대도 딱히 없을 정도였다. 그나마 몇몇 단골손님들과 동네 주민 정도라면 모를까. 그런데 분명히 초면이어야 할 호텔 직원이 낯익게 느껴진다니. 이상했다. 게다가 더 석연치 않은 점은, 상대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매끄럽지는 못해도 진심으로 미안해하던 음성이 멈춰버렸다. 그러더니 동공이 커지고 눈매가 동그래진다. 그러더니 얕게 턱까지 떤다. 침을 한번 삼킨 그의 입이 도로 열렸다.

“…권시온?”

옛 성을 붙여 제 이름을 부르는 이는, 태환 말고는 남아있지 않았는데. 시온은 자기도 모르게 제 또래로 보이는 남성의 생김새를 유심히 살피고 말았다. 분명, 안면이 있었다. 누군지 알아채는 데 오래 걸리진 않았다. 뜻밖의 단서 덕분이었다. 보통 이런 직종들은 왼쪽 가슴께에 명찰을 달고 다니기 마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차분한 은색을 띤 금속 명찰에 글자가 적혀 있었다.

“아.”

‘…고아 새끼가, 누굴 동정해!’

반고리관 깊숙이, 아주 깊은 곳이 잊고 있었던 고함으로 메워진 느낌이 났다. 당연히 실제론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악에 받친 비난이 저에게 상처였던가? 그렇진 않았다. 어쭙잖았던, 어린 저의 실수에 대한 반성이 스칠 뿐이었다. 한편으론 이렇게 다시 마주할 리는 없을 거라고, 막연히 단정 짓고 있었던 모양이다. 도톰한 입술이 들썩이다가 결국, 이름표에 새겨진 글씨를 읽고 말았다.

“…김정훈.”

*

4년 전에 결혼을 했고, 4살 된 딸아이가 있단다. 시온과 정훈은 동갑이었다. 그러니까 즉, 스물다섯에 벌써 아빠가 되었다는 말이다. 아내는 다섯 살 연상의, 검정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학원에 다니다가 거기서 시간 강사와 학생으로 만난 사이라고 했다. 원래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아내 지인의 소개로 호텔리어는 아니지만, 라운지 보조로 일하게 된 지 막 1년 차가 되었다고 했다. 그렇구나. 시온은 정훈이 횡설수설 꺼내놓는 세월을 가만히 경청하고 있었다.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이렇게 듣고 있어줄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선하고 도덕적이어야만 한다는 이 원장의 조언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인지, 시온은 의무감을 가졌다. 한편으로 바깥에 있는 이를 너무 기다리게 하나 싶어 어쩔 줄 모르는 주제에 말이다. 김정훈이 늘어놓은 제 신변잡기는 꽤 장황한 편이었다. 아마도 정말 전해야 할 말이 있는데, 쉽지 않았나 보다.

“그, 너… 수영 그만 뒀…다며.”

“아… 그래. 그렇게 됐어…”

그러다 여전히 고요하고 평온한 낯을 하고 저를 바라보는 시온을 보고 용기를 얻었는지,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아이 아빠가 되었다며, 내심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했던 표정은 어디 갔을까. 그는 입술 안쪽을 말아 물고 미간을 구겼다. 오랜만에 재회한, 하얀 낯을 한 동창의 안색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살짝 놀랍긴 했다. 알고 있었구나. 도대체 어디서 전해 들었을까 싶어진 탓이었다. 그와는 다른 고등학교에 다녔었긴 했다. 제가 그에 대해 들은 소식은 결국 운동을 포기했다는 것 정도였다. 자신에게 정훈의 소식이 흘러들었던 것과 비슷하게, 어디선가 전해 들었겠지. 납득은 빨랐다. 체육계는 원래부터 좁고, 소문이 빠른 곳이었다. 의구심이 쉽게 가시나 싶었다.

시온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갑자기 정훈이 과하게 허리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년의 두 팔이 당황으로 덜그럭, 팔이 뻣뻣이 굳어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무슨 소린가 쉽겠지만, 나… 꼭 널 만나면, 만나면… 사과하고 싶었어. 아니, 받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의외의 장소, 의외의 만남에 이어 이번엔 뜻밖의 사과였다. 이시온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정훈은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과하게 흥분한 듯 호흡이 고르지 못한 채로 중얼거림을 늘어놓았다. 정말 면목이 없다던가, 너무 오래 지나버렸다던가, 자신이 나쁜 새끼라던가. 도대체 뭐가 말인가? 영 알 수가 없다. 저야말로 그때 미안했다고 전하려고 했는데 말이다. 그러다 답은, 준비되지 않은 채 밖으로 뛰쳐나와 시온의 수면 위로 뛰어들었다.

“…네 어깨, 그 사고, 내가… 내가 저질렀어…”

김정훈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청년의 낯빛도 여전히 희여멀건할 뿐이었다. 다만 청각이 멀어졌다. 귓속에 물이라도 들어간 듯, 그렇게 잠시간 먹먹한 상태를 유지했다.

*

이후로 한참, 입을 놀리는 건 김정훈이고 입을 다문 채 듣고만 있는 건 이시온이었다. 양쪽 모두 알고는 있었다. 이 대화이자 고백이 너무도 일방적이고 두서가 없으며 배려마저 부족한 것을. 그래선지 정훈은 자꾸만 말을 더듬었다. 자음과 모음이 흐려지기도 하고 속도가 빨라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알아듣기 어렵지도 않으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선발에서 떨어지고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엔 경제적 사정이 더욱더 나빠졌었다고 했다. 그가 포기한 것이 수영뿐만이 아니게 될 정도였는데, 경기 성적은 날로 떨어지고 장학금 또한 지원받을 수가 없었단다. 원래 나쁜 일은 한없이 겹쳐서 온다고, 홀로 자식을 양육하던 어머니마저 사고로 생계를 이을 수 없게 되셨고 말이다. 어쩔 수 없이 자퇴를 한 뒤 동네 형이 소개해 준 일자리에서 생고생하고 있을 때, 누군가 홀연히 나타났다고 했다. 정훈은 이 구절에서야 최대한 침착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듯 보였다. 용서받기 위함은 아니라고 재차 강조하며. 마치 몽타주를 작성하기 위한 진술을 하듯, 문장 하나하나를 정리하려고 애쓰는 느낌을 주었다.

소개받은 일은 막 열아홉이 된, 소년이라고 하기엔 넘치고 성인이라고 하기엔 모자란 어린애가 할 만한 직종은 아니었다. 클럽의 허드렛일이었으니까. 그래도 그 동네 형이라는 사람도 양심과 인맥이 있었는지, 회원제로 잘 관리되고 있는 곳이니 별일 없을 거라고 다독여줬다는 사담이 끼어들었다. 지인의 장담이 아예 공수표도 아니었다. 실제로 밤부터 꼭두새벽까지 일해야 했으나 하는 업무는 주로 주방의 보조나 허드렛일이었고 적어도 고된 만큼 돈도 두둑했다. 계약서를 쓰진 않았지만, 그것까지 챙길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넘치진 못했다.

어쨌든 그래서, 화근이 된 남자가 김정훈의 앞에 나타난 날이었다. 사내는 누가 봐도 곱상한 인상이었고 너무 밝지 않은 갈색 머리를 하고 있었다. 보통의 클럽이 그렇듯, 그곳도 어두운 편이었으나 그나마 밝은 복도에서 마주쳤기에 구분할 수 있었다. 어떤 복장이었는지는 선명히 떠오른다고도 덧붙였다. 흰 라운드 니트와 베이지색 재킷, 옅은 회색 하의. 유흥을 즐기러 왔다기엔 지나치게 얌전한 차림새여서 더 잊히지 않았는데, 차고 있는 시계는 확실히 고가의 제품이었다. 한참 일을 하던 중 길목을 가로막혀버린 정훈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안, 남자는 대뜸 불공평하지 않으냐고 운을 띄웠다. 무슨 뜻인지 모르고 어리둥절해 있는 그를 보며 웃었다. 이어서 너나 ‘걔’나, 불우한 건 똑같았는데 말이야. 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벌써 저에 관해 다 알아본 뒤에 찾아온 거라 싶었다는 첨언이 들어갔다. 그러니까 제 열등감을 잘 짚어낸 거라고. 입꼬리만 올라갔을 뿐, 눈은 웃고 있지 않았음을 너무 늦게 깨달은 정훈이었다. 몇 년 후에야 그 사내가 시온의 고등학교 동창생, 개중에도 같은 수영부 중에서 그를 가장 아니꼬워했던 인물의 사촌 형이었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시온은 10년이 지난 뒤에야,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청년은 정훈의 고백을 들으며 이때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초조해지고 민망해진 탓이었을까. 김정훈의 안색은 점점 흙빛이 되었다. 하지만 원망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는 제 죄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은 사고가 있은 지 4년이 지나서야 뒤늦게 양심을 되찾은 정훈이 권 씨 가문의 저택을 서성인 적이 있다는 구절까지 왔을 때, 이시온의 입술이 한번 달싹였다.

“…그러다가 만났었어. 그, 네 형이었던… 권태환 부사장.”

김정훈의 본론은 아마도, 이 대목이었을 것이다. 잔잔하던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멈췄다.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된, 재회의 대화가 클라이맥스를 맞는 순간이었다.

“혹시 아직도 연락하는 거라면…”

같은 운동부였고 같은 반이었던 적도 있었는데 그의 성격이 어땠는지, 서로 어떤 접점이 있었는지 따위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뇌리에 남는 장면이 없는 탓이기도, 그전까지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6살 때 그 일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래서 시온은 모른다. 김정훈이 똑똑한지, 멍청한지. 적어도 눈치가 있는 편이긴 했던가. 그랬다. 그는 알면서도 이 말을 굳이 꺼내고 있는 것이구나 싶었다.

“알아, 주제넘은 말인 건 아는데, 그래도 너도 알아야 해. 왜냐하면…”

그가 누구와 함께 왔는지, 바깥에 누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정훈의 어조와 미간은 여전히 조심스럽고, 움츠러들어 있었다. 만약에 저게 연기라면 그는 지금 호텔 직원이 아니라 당장 배우를 해야 할 정도였다. 머리로는 의심할 필요가 없는걸, 빠르게 수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디 이성과 감정이 늘 같은 선상에 서 있기만 하던가. 마침내, 맺혀있던 경고가 힘없이 흘러나오고야 말았다.

“너, 그 사람한테 속고 있는 걸지도 몰라.”

*

벌써 두 잔째다. 자리를 비우기 전까지는 입술 한 번 대지를 않더니, 돌아와서는 갑자기 마시는 속도가 빨라져 버렸다. 권태환은 두 가지를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그저 턱을 괴고 상체를 모로 돌린 채 시온이 하는 양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럼 그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건 무엇이었을까.

일단 첫째로는 잠시 세수만 하고 온다더니, 어째서 30분 넘게 저를 홀로 두었는가에 대한 부분이 있을 테다. 이에 대해선 시온이 먼저 변명 아닌 변명, 그러니까 애써 둘러대려고 시도하긴 했었다. …얼굴을 씻다가, 디퓨저를 엎었어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청년의 낯은 한없이 덤덤했으나 석연치 않은 구석 또한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시선을 뗄 줄 모르더니, 정작 눈을 마주치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한쪽 손이 상의 밑단을 매만지고 있었다. 이시온은 거짓말을 할 때면, 꼭 저렇게 손가락을 비비거나 원단을 만지곤 했다. 속일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은 알고 있을 텐데, 굳이 저러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태환은 낮고 깊은 비음을 한번 흘리고 한쪽 눈썹을 들썩였을 뿐, 추궁하진 않았다. 두 번째로는 그러더니, 시온이 갑자기 제법 빠른 속도로 술을 마시는 게 아닌가. 이건 저가 알지 못하는 반응이었다. 결국 끝내 묻지 않았다. 대화와 언질은 없이, 사내의 팔이 정확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였다. 빠르지 않게, 느른한 맹수를 닮은 동작이었다.

“권시온, 천천히.”

검지가 매끄러운 입구를 내리눌렀다. 담겨있던 호박색 액체마저 덩달아 튀어 올랐다. 완벽하게 다듬어진 손톱에 흔적을 남길 만큼. 손가락 끝에 맺힌 액체는 물방울이 되었다. 찬물을 들이킨 덕에 잠시간은 낮아졌던 체온이, 다시금 달아오르고 있었다. 딸꾹. 두 잔이라고 해도 그렇게 많은 양은 아니긴 했다. 잔을 다 채우지 않고, 4분에 1 정도만 따라뒀으니 엄청난 음주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보통의 사람들이야 그렇겠지만, 알다시피 이시온은 스물아홉이라는 나이에 비해서도, 경험적으로도 알코올과 가깝지 못했던 청년에게는 큰 일탈이 아닐 수 없었다. 청년이 한참만에야 고개를 위로 들었다. 남자는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맞은편의 흰 이목구비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반짝거리던 홍채가 금세 흐려져 버렸다. 뺨이며 귀가 빨개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태환이 질문하지 않는 것과는 반대로, 시온의 심상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저지당한 그대로 멈춰 있던 손아귀의 힘이 빠졌다. 자연스레 술잔이 바 표면에 놓인 것이다. 분명히 눈물은 다 닦아냈고, 만약 남았다고 한들 다 휘발되고 사라 질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살짝 젖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도 다 취기가 올라왔기 때문인 걸까. 실은 이시온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자신은 그래도, 적어도 남들보단 감정을 숨기는데 능숙한 편이라고 믿었건만. 한참을 꾹 다물고만 있을 것 같던, 도톰한 입술 사이가 벌어졌다.

“형.”

당신. 재회 직후 거리감을 두기 위해 굳이 고수했던 호칭을 버렸다. 얌전하던 흉곽이 얼룩진 니트를 부풀렸다. 잠시 위로 솟았다가 금세 꺼졌긴 했지만. 그만큼 긴 호흡이 둘의 사이를 메꿨다. 사내의 기울어져 있던 몸체가 서서히 균형을 되찾고 있었다. 시온은 눈꺼풀을 덮지 않았다. 그는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평소처럼 굴다가도 하지 않던 짓을 하고, 뒤죽박죽으로 굴고 있었다. 청년은 자신이 왜 갑작스레 이런 양상을 보이는지 고백해낼 수가 없었다. 도망치려는 건 아니었다. 입이 도무지 떨어질 줄 모를 뿐. 형, 날 왜 좋아해요? 일전에 묻어뒀던 의구심은 불안이 되어, 덩치를 키워 돌아왔다. 정훈이 했던 이야기를 전부 믿지는 않았다.

“있잖아요…오늘 밤은,”

그런데도 확인받고 싶었다. 시온은 자신이 이런 욕구를 가질 수 있는 부류라는 걸 몰랐다.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제 마음마저 그럴 줄이야. 등이 서서히 앞으로 기울여간다. 태환은 상체를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의도적인 행위였다. 곧 저 몸이 저에게 기대어 오겠구나, 하는 예측이기도 했다. 알고 있었다. 그는 저를 항시 유심히 살피고, 저도 모르는 이시온을, 적어도 권시온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평소보다 달아오른 이마가 너른 어깨에 비벼졌다. 귓가가 아직도 윙윙거리는 것만 같았다. 이명을 덮어버리려는 듯, 시온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한쪽 귀를 눌렀다. 이윽고 눈만 움직여 위를 바라봤다. 두 쌍의 눈이 마주 닿았다. 주인을 닮아선지, 빽빽하진 않아도 섬세한 눈썹이 축 처져 있었다.

“…같이 자면 안 돼요?”

뱉었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음성이 더 작고 가느다랬다. 간절한 요청이 끝맺어지자마자, 권태환의 엄지가 시온의 턱을 매만졌다. 목이 길게 뻗어졌다. 남자는 직접 답변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눈가에 닿은 짧은 입맞춤은, 네가 원하는 대로 다 이뤄주겠노라는 관용에 가까웠다.

*

3년 동안 접점이 거의 없다가 10년 만에 재회한 동창과 6여 년을 함께 해오다가 10년 만에 다시 만난 양형제. 둘 중 누가 더 신뢰감을 주는가, 그런 단순한 관점에서 판단하기엔 무리가 있다. 또한, 이미 해답이 나와있기도 했다. 권태환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믿고 싶었다. 그럼 김정훈은 어떠냐고 묻는다면, 신뢰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시온은 평생을 이타적이게 살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지 않는가. 그래서 아예 부정하지도 못했다. 정훈의 갑작스러운 사과가 옳다거나, 그렇다고 무조건 받아들여 줘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정훈의 음성이나 눈빛, 태도가 딱히 없는 말을 꾸며내는 것 같지도 않았기에,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끝까지 들어주고야 말았다.

저택에 기웃거린 때는 밤이었다고 한다. 실은 오후 4시쯤 찾아갔으나 거대한 입구에 설 수 있었던 건 이미 해가 다 지고 난 저녁 7시쯤이었다. 사과를 건네자고 결심한 데에만 몇 년, 기껏 찾아가서 얼굴을 마주할 용기를 얻는 데는 몇 시간이 걸린 셈이었다. 차가 드나드는 넓은 출입구를 지키는 경비가 있는 건 아니었다. 정훈은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아 그때마저도 서성거리고만 있다가, 저 멀리서 다가오는 밝은 빛 하나를 발견했다. 헤드라이트였다. 김정훈은 조급하고 긴장하면 꺼내는 말마다 두서없고 장황해지는 게 버릇인가 보다. 그때도 누군가 그 저택에 들어간다는 것만으로도, 누군지도 잘 모르는 주제에 무작정 붙잡았단다. 어떻게?

갓 스물이 넘은 어린애의 치기가 빛을 발했다. 잠시만요! 사색이 된 얼굴로 고함을 치며 잘 빠진 외제 차 앞을 막아섰다. 막 좌회전을 하려던 승용차가 덜컥 멈췄다. 운전석에서 나온 건 중년의 남성이었다. 살짝 놀란 듯이 학생, 여기서 무슨 짓을 하는 거야.라고 꾸짖음을 당했으나 소용은 없었다. 들리지도 않았다. 정훈은 누군가 만났다는 것 하나만으로 뒷감당은 밀어둬 버리곤, 더듬더듬 권시온을 찾아왔다며 사과하고 싶다고 설명하는 제 앞에서, 운전기사로 보이는 사용인이 곤란한 듯 뒤를 힐끔거렸다.

기사가 작게 일러주었다. 시온, 도련님은 이미 이곳을 나갔어. 그러니까 입을 조심해야 하네. …몰랐다. 정훈의 턱이 벌어졌다. 예상치 못한 사실을 듣고 충격에 빠져버린 저를 두고 몇 분이 흐르고 나서야, 뒷좌석의 문이 열렸다. 날카롭고 이지적으로 보이는, 그만큼 차가운 인상을 주는 사내였다. 시온에게 직접 들은 거 아니지만, 익히 알고 있었다. 권시온의 훈련부터 학교생활까지 모두 챙긴대. 누가? 왜, 그… JL 장남 말이야. 그랬다. 시온의 ‘형’이구나. 그는 알아차렸다.

‘권태환 부사장이었어. 길게 대화를 나눈 건 아니야. 딱 몇 마디만 하고는 바로 들어가 버리더라고.’

저를 응시하던 얼굴은, 무감각했다. 그런데도 어떻게 보면 또, 시선이 매우 냉철하고도 노기에 차있었다. 정훈은 실제로, 잠시 호흡이 멈추는 줄 알았었다. 낮고 탁한 목소리가 제 청각에 들리지 않을 때까지. 낮고 탁하고, 멀었다. 그러나 선명히 들리는 단어와 어절이 있었다. 고작 저런 거, 계획이 틀어져, 조금 더 시간을 줘볼까 같은 것들이었다. 말소리는 흐렸으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 독백의 대상은 저가 아니라 권시온이었다. 그런데 모든 어휘가 그렇게 달갑게 들리진 않았다. 무슨 사업 하나 어그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나는 건 아냐. 그렇지만 대충, 중요한 계획에 네가 필요한 것 같았는데, 알아보니까 애초에 나한테 사주를 한 그 남자도 네가 아니라 권 부사장이 목적이었대. 네가 없어지면…’

‘그만해.’

한참만이었다. 드디어 이시온이 입을 열었다. 그의 두 눈동자와 낯빛은 여전히 고요했다.

‘…사과는 받아들일게. 옛날 일이라 아무렇지 않기도 하고.’

여전히 결론은 지어지지 않았다. 육체는 바로 서 있었으나 영혼의 중심은 사라진 기분이었다. 우연하게 김정훈을 마주했을 땐, 반갑지는 않았으나 거북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꾸만 위장이 울렁거렸다. 마신 것도 없는데. 아, 돌아가면 술을 마셔야겠다. 이성이 자꾸만 논점을 흐렸다.

‘그런데.’

티가 나지 않아 다행인 걸까. 시온은 마지막 한 마디를 건네고 손잡이를 잡았다. 뭔가 할 말이 남은듯한 옛날의 동창생을 완전히 뒤로하기로 한 것이었다.

‘…형에 대해선, 당연히 내가 더 잘아. 못 들은 걸로 할게.’

확신이 없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인 주제에. 청년은 자조했다. 웃기진 않았다.

*

너른 펜트하우스를 가로지르는 건 분명 두 사람이다. 다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면, 바닥을 딛는 발이 한 쌍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업혔으면 나았을지, 아니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이것보단 수치심이 덜 했을 거란 건 확실했다. 이렇게, 열넷 혹은 열다섯 살 때처럼 안겨 가는 것보다야 말이다.

뭔가에 막힌 듯 웅얼거리는 말소리가 힘없이 주장했다.

“…이제 알아서 걸을 수 있어요.”

같이 자 달라고 했고, 그렇게 하겠다 받아들여진 직후였다. 사내는 청년을 주차장으로 데리고 내려갔다. 바로 객실로 올라갈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JL 소유의 호텔이 아니어서였을까. 태환은 시온을 차에 태웠다. 보조석에 자리 잡아 눈치만 살살 보고 있자니, 어느새 안전벨트마저 채워져 버렸다. 주행시간이 그리 긴 것도 아니었건만 술 때문인지, 보조석에 탄 이는 꾸벅꾸벅 졸고 말았다. 도착지에서 모터가 멈추고 문이 열릴 때까지 잠기운을 다 쫓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권태환은 그걸 보며 뭐라고 했던가.

무거운 눈꺼풀 탓에 어떤 낯을 하고 있는지는 보질 못했다. 확실한 건, 음성에는 잔잔한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는 거다. 같이 자 달라더니 또 이렇게 졸았느냐고 놀렸지만, 어깨를 감싸고 부축하는 팔은 견고했다. 이제야 좀 정신이 돌아왔나 싶은 찰나, 청년은 눈 깜짝할 새 기동 중인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었다. 다른 호텔로 옮긴 건 아닌 것 같았다. 스물아홉이나 되었으면서, 옆에 서 있는 이에게 온전히 기댄 자세를 거두지도 못한 시온이 눈꺼풀을 끔뻑거리며 물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서늘한 체온이 뺨 아래쪽에 닿았다. 입술이 알아서 모이도록 몇 번 주물러진 뒤, 태환이 알려주었다. 수영장 딸린 집.

듣자마자는 이건 무슨 소린가, 한참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때 승강기가 멈췄다. 문이 열리자마자 허리에 둘려있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아직도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탓에 휘청이는 하체를 붙잡기 위함이었다. 새끼 사슴이야? 그렇게 놀리는 걸 듣고 너무 창피해서 였을까, 매번 졸고 자고 칭얼거리기만 하는 저 자신이 원망스러워 그랬을까. 취기는 가셨건만 귀는 시뻘게져 버렸다. …잘 걸을게요. 시온이 몸을 비틀었다. 저를 부축한 팔에서 벗어나려 한 것이다. 곱씹어 보면 참 신기한 한 마디였다. 제대로도 아니고 잘 걷는 건 뭐 어떻게 움직이는 것이란 말인가.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한 벌이었나 보다, 딱 세 발짝쯤 걸었을 때, 이시온은 홧홧해진 낯을 감추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바람에 온전히 중심을 잡지 못한, 수마에 잠긴 발이 꼬여버렸다.

“안돼. 소독부터 해.”

그러고는 제대로 넘어졌다. 걸림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높낮이 차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낭패였다.

“좋으면서 튕기지도 말고, 권시온.”

얼굴도 들지 못하겠는지, 이번에도 어깨에 묻혀버린 채였다. 차마 틀렸다 하지도 못한 탓에 입매만 몇 번 들썩이고 말았다. 그래도 미약하게나마 투정을 부리듯, 한쪽 발을 달랑 흔들어보기는 했다. 지금이야 저를 놀리고 있긴 하지만, 제가 넘어진 직후 태환의 행동은 전체적으로 진중하고 심각했다. 사내가 가장 먼저 챙긴 것은 시온의 몸이 멀쩡한지의 여부였다. 다쳤나? 그러더니 제 양 동생을 제외한 남 앞에서 절대 굽힌 적 없는 무릎을 땅에 댄 뒤 무릎을 살폈다. 거세게 고꾸라지진 않은 것 같았는데. 하의의 원단이 얇아서인지 복도의 바닥재가 석조였기 때문인지, 찢어진 틈으로 상처가 보였다. 그 순간 태환의 표정은 제법 심각했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오자면, 사내는 그걸 발견하자마자 하관을 비틀더니 대뜸 넘어진 이를 일으키듯 안아 들었다. 그리곤 능숙하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저 보고는 비밀번호를 너무 쉽게 해뒀다고 뭐라 해놓고선. 그가 설정해둔 암호도 그리 어렵진 않았다. 10281131. 딱 여덟 자리의 숫자였는데 그중 뒤의 네 자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태환의 개인 휴대전화 번호의 뒷자리였다. 그럼 나머지는, 뭐지? 일단 1131은 아무리 정신이 흐려도 잊을 수가, 알지 못할 수가 없었다. 혼자 지레 겁을 먹고 등을 돌려버린 날을, 권시온으로 지냈던 마지막 날을 어떻게 쉽게 잊겠느냐는 말이다. 훌쩍. 시온은 괜히 콧등을 찡그렸다. 이미 파고들 만큼 파고든 너른 어깨를 뚫고 들어갈 기세였다. 코트 특유의 모직 냄새와 뿌린 지 오래되어 잔향만 남은 향수가 비강 가득히 들어왔다.

“그렇게 비비면 다쳐.”

더는 파고들지 못해 아쉬우면서도, 온순한 양 동생이라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고개를 드는 시온이었다. 그리곤 괜스레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부는 대단히 크고 넓었다. 독특한 구조에, 계단이 있는 걸 보아하니 복층구조일 테다. 거실이 복도와 이어져 있었다. 평수가 꽤 넓다. 너른 거실을 반쯤 지났을 때였다. 넓게 포진한 창틀이 보였다. 바깥의 공간과 이어진 출입구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창 너머에, 권태환이 언급했던 수영장이 있었다. 안겨있기에, 덩달아 시야가 높아졌다. 덕분에 잘 보이지 않을 법한 거리에서도 내부가 살짝 보였다. 안에 물이 채워져 있었다.

시온의 목이 아래로 기울여졌다. 일전에 그가 이곳을 언급한 적이 있지 않았나. 분명 자신이 사는 곳은 따로 있다고, 그 근처에 수영장이 딸린 거처를 마련해 뒀다고 했었다. 여기에 실제로 거주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물도 당연히 비어져 있어야 맞을 텐데… 계속 한쪽으로 고정돼버린 두 눈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일까. 사내가 턱을 한 번 비틀며 설명해 주었다.

“채워둬야, 네가 헤엄치는 모습을 상상하기 쉽던데.”

연한 무릎, 그것도 딱 연골이 위치한 자리에 난 찰과상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이시온의 눈가는 또 짓무르고 말았다.

*

권태환은 바보가 아니었다. 눈치가 없지도 않았다. 반대로 감이 너무 곤두서있어 문제라면 모를까. 일행분이 저희 직원과 안면이 있으신가 봅니다. 잠시면 된다던 시온이 자리를 비운 지 딱 10분이 되었을 때였다. 그의 손가락질 한 번이 뭘 뜻하는지 알아들었던 컨시어지는 곧바로 저에게 보고를 올렸다. ‘양 동생’의 교류 관계는 좁았고, 친구를 만드는 편도 아니었다. 동네에 인연이 닿는 인물이 여기에서 일할 리도 없었다. 잠시 한쪽 눈썹을 위로 들썩이자, 직원이 상체를 낮춰 속삭였다. 김정훈이라는 직원인데 혹시 아는 이름이실까요?

바로 떠오르진 않았다. 그는 기억력이 비상했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이득이 되거나 반대로 불편 요소일 때나 염두에 뒀을 뿐이었다. 근 5년간은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묘하게 아주 들어보지 못한 건 아니다 싶었다. 그의 기억 한편을 기꺼이 내줄 수 있는 분야가 하나 더 있었다. 관심이 있는 것과 연관이 있을 때였다. 그 관심을 기울이는 존재란, 결국엔 권시온 혹은 이시온 하나뿐이다. 거길 되짚어 보았다. 그랬더니 이번엔 쉽게 떠올랐다. 아, ‘그’ 김정훈.

그때를 돌아보자면, 당시의 자신은 지나치게 말랑했다. 아마 양 동생의 영향일지도 몰랐다. 늘 연약하고 무구해야만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했던, 어리석고 사랑스러운 제 ‘시온’에게 감화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해야, 상처를 덜 받고 온전히 저만을 바라볼 테니까. 나름 계획적으로 유하게 굴었던 것이다. 시온과 정훈이 부딪힌 뒤, 직접적으로 김정훈의 후원을 끊어내진 않았다. 그저 이사장에게 경고 한 번 했을 뿐이다. 다시 한번 이런 일이 제 귀에 들어오면 참, 재밌을 거라고. 그랬더니 지레 겁을 먹은 재단이 알아서 놈을 포기했다. 진작 밟아뒀어야 했는데. 태환은 후회라는 걸 하지 않았다. 제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해서? 자신이 옳지 않았다는 증거일까 봐 두려워서? 아니다. 그리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자신이 틀릴 일도 없다. 그저 일이 틀어진 데에서 오는 가벼운 짜증일 뿐이었다. …뭐, 얼마 전 이시온의 어깨에 남은 상처를 보고서야 후회가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긴 했다만 말이다.

각설하고, 귀국 후에 경위를 알고 나선 어이가 없었다. 일단 제 아비가 자신을 눈앞에 뒀다면 그런 간 큰 짓을 하지는 못했을 텐데.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태환의 일과는 제법 일률적이었다. 시온이 도대체 어디에 몸을 의탁했는지 알아보게 하고, 보고를 받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사를 해보고, 하게 시키고… 그러다 알게 되었다. 백주영이 김정훈에게 무슨 짓을 시켰는지. 그리고 권시온이 그 작은 머리통으로 뭘 고민하다가 집을 나갔는지, 이 전부를 알아 채는데 딱 일주일이 걸렸다. 정훈이 울타리를 기웃거린 걸 발견한 것은, 때마침 태환이 이 모든 내막을 알고 나서 기분이 한껏 더러워진 채 귀가하는 도중이었다.

웃기지도 않았다. ‘고작 저런 거’를 이용했단 말이지. 그것도 나름 성공하기까지… 권시온은 내 옆에 있어야만 하는데 내 ‘계획이 다 틀어져’버렸군. 그렇게 중얼거렸던 듯도 하다. 자신이 뱉었던 마지막 문장은 선명히 기억난다. 백주영에게 되갚아 주는 건 주는 거고 제가 없는 틈을 타서 지능적으로 도망친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상처를 받아 시간이 필요할 거라 짐작이 갔다. 어디 사는지, 어떤 이의 도움을 받았는지 정도는 이미 다 파악해 둔 참이었다. 내일이라도 당장 데려오자 싶었으나, 살짝 생각이 틀어졌다.

…일단 ‘조금 더 시간을 줘볼까’. 제가 무섭거나 싫어서 몸을 숨긴 건 아니었으니 되었다. 그럼 분명 시온은 돌아올 테니까, 여유를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일지 몰랐다. 그래서 10년이나 흘려보냈지. 권태환이 자조했다. 남자가 직원을 향해 손을 딱 두 번, 휘저어 보였다. 바 위에 대충 올려두었던 휴대전화를 들었다. 권태환은 여전히, 물렁할 수 있었다. 휘어질 수도, 굽어질 수도 있다. 타인에게라면 그런 행운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유일하게 시온에게만큼은 그래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또 한 번 실수를 할 수는 없지. 이 대목에선 조금 웃음이 나왔다. 실수라니. 정말 제 양 동생은 제게 많은 새로움을 주곤 했다. 그것마저 기꺼우니 중증이라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물론 그마저도 시온이 그렇게 비난한다면,에 한정을 두었지만. 신호음은 그렇게 길게 흐르지 않았다. 전화를 받은 상대의 목소리엔 당황스러움이 역력했다.

‘네가 이 시간에 나한테 전화하다니. 태환아, 병원 다녀? 사람이 하지 않던 짓을 하면 죽는데.’

‘너희 호텔에 김정훈이라는 직원이 있을 거야. 잘라.’

연락을 받은 주인공은 공은혁이었다. 이 라운지를, 속절없이 사내에게 뺏기고만 장본인 말이다. 그가 아는 제 동창이자 애매하게나마 친구라고 칭할 수 있는 존재인 JL의 젊은 부사장은 매번 뜬금이 없었고 앞뒤도 없었다. 이건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갑자기 라운지 바를 하루 비우라기에 드디어 양 동생과 만났나 보다 하긴 했는데, 이번엔 또 누구를 자르라니. 은혁이 길게 앓는 소리를 냈다.

‘…우리 쪽에서 넘긴 건 라운지 바지, 호텔 경영권이 아니지 않아?’

능숙한 바텐더는 고객이 무슨 대화를 나누던, 귀에 뭘 채운 것처럼 침묵한 채 제 할 일만 했다. 비워진 잔이 다시 채워진다. 단단하고 딱딱한 손이 잔을 쥐고 돌렸다. 그러자 위스키는 돌려지는 대로 휘둘리며 일그러졌다. 은혁에게서 대답이 바로 나오진 않았다. 검지가 멋들어지게 색이 깊어진 원목 바를 두어 번 두드렸다. 그리곤 한숨이 들린다. 태환이 뱉은 게 아니라, 스피커 너머로 들린 것이다.

‘그래, 알았어. 그렇게 하자, 그래. 그러니까 이번에 그 백,’

멀찍이 떨어져 있던 컨시어지가 눈빛을 보냈다. 자동문이 개폐했는지, 바람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사내의 엄지가 바로 전화를 끊어내 버린다. 상대의 말이 끝났는지 아닌지 따윈 중요치 않다는 듯. 태환의 시선은 이미 걸어오는 인영에 박힌다. 울었네. 위스키의 잔향이 혀끝을 자극했다. 사실은 해고만으론 모자랄지도 몰랐다. 김정훈을 해고하게 만들 거긴 했으나, 아예 망가트리지도 않을 작정이었다. 혹여라도 ‘동생’이 알게 되면 큰일 아니겠는가. 그놈이 권시온, 아니 이시온 덕분인 걸 알아야 할 텐데. 아니, 꼭 그럴 필요는 없다. 그들의 재회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눌렀다. 시온이 점점 가까워진다. 곧 제 옆에 앉아 무슨 변명을 할까 기대가 되었다. 시온이 저런 표정을 하는 날은, 꼭 저에게 어리광을 부리니까.

*

수영장이 비워져 있지 않은 것에서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던 걸까? 이제야,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오래 비워두면 날 법한 먼지 냄새가 흔적도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온은 느리게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아무도 살지 않는다기엔 지나치게 깨끗했다. 고가의 가구들을 들여놨으니 위에 천을 덮어둘 만도 한데, 그런 흔적조차 없었다. 그가 처음부터 저를 이곳으로 데려오려 일부러 준비했다 하기에는 너무 그럴듯한, 자잘한 생활감이 묻어나 보였다. …평소에도 여길 자주 찾나? 복잡하고 비참한 기분은 그새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시온은 괜히 마른 세수를 여러 번 이어갔다.

태환이 시온을 내려놓은 방은 침실로 추정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손님용은 아닌듯했다. 중앙에 자리한 침대는 저번의 호텔 객실에 있던 것만큼이나 컸고, 벽면에는 붙박이장 형태의 옷장이 있고 반대편인 창가에는 2인용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어디선가 본듯한 가구 배치였다. 색감도, 뭔가가 익숙했다. 잠시 기다리라며 자리를 비운 이가 돌아올 때까지 한가해져 버린 방문자는 저도 모르게 탐색에 열중하다 깨달았다. 아. 커다랗게 늘려놓은 ‘권시온의 방’이구나. 입술이 절로 벌어지고 말았다. 뭐라고 형용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 찰나였다.

“뭘 그렇게 봐. 마음에 안 들어?”

방문이 열렸다. 권태환이 돌아왔다. 그는 나갈 때는 들고 있지 않은 걸 가지고 있었다. 한 손에 쏙 들려있는 건, 제법 크기가 큰 구급상자였다. …비상용 약품이 있었구나. 시온은 속으로 감탄인지 놀라움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들리진 않겠지만. 역시, 자신의 희망찬 예상이 맞을지도 몰랐다. 매번 물을 갈아 넣는 수영장, 어릴 적 방을 재현해놓은 듯한 침실, 몇 번 열었다 닫았다 한 탓인지 살짝 반들반들해진 옷장의 손잡이, 구급상자. 형은 이곳에 수시로 들락날락했던 게 틀림없다. 이 펜트하우스를 언제 사들였는지는 몰라도 전의 대화에 비춰볼 때, 저와 재회하기 전 샀다는 것 정돈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태환은 저를 그리워하며, 이곳에 저를 떠올릴 수 있는 여러 가지를 마련해 놓고 있었던 거다.

허벅지 위에 얌전히 올라가 있던 흰 손등에 핏줄이 돋았다. 그러다가 문득 질문이 던져졌던 걸 깜빡하고 말았단 걸 깨달았다. 소리를 내 대답하진 않았다. 얇은 앞머리카락이 좌우로 흔들렸다. 상대는 다가오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웃은 것이다. 그리곤 침대에 걸터앉은 시온 앞,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꿇어앉았다. 상자는 3단으로 나뉜 것이었다. 안쪽엔 여러 몇 가지 상비약과 붕대, 소독약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소화제와 근육통에 잘 듣는 소염제였다. 시온이 그걸 발견하곤 천천히 눈꺼풀을 내렸다가 올리길 반복했다.

“…나 이제 배탈 잘 안 나요.”

혼잣말인지 뭔지 모를 말이 무심결에 새어 나왔다. 권시온이 되고 나서 한 3년 정도는 사소한 배탈이 잦아 고생했었다. 그때마다 약을 챙겨준 건… 당연히, 제 형이었다. 서류상이었지만. 소독약과 밴드를 꺼내던 커다란 손이 멈칫했다. 잠깐 숙이고 있던 고개가 서서히 들렸다. 아주 잠시간이지만, 그 날카로운 눈매가 동그래졌던 것 같기도 하다. 이윽고 휘었다. 그의 눈은 잘 웃지 않는다. 입꼬리야 늘, 비웃거나 깔보기라도 하듯 한쪽으로만 잘도 솟아났지만 말이다. 그건 어디까지나 하관이었다. 이렇게 눈매마저 둥글게 휘어가며 웃게 하는 건 오직 한 사람뿐이었기도 했다.

“그래? 다행이네. 대신 무릎이 까졌긴 하다만.”

읏. 검지가 짧게 문지르고 지나간 곳은 상처가 난 부위에서 조금 측면으로 빗겨난 쪽이었다. 작디작은 신음이 절로 나왔다. 생각보다 쓰렸나 보다. 제 살인데도, 단단한 손끝이 건드리기 전까진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다. 상대편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장난스레 놀린 것뿐이었을 텐데, 사내의 미간이 순식간에 좁혀졌다. 송골송골 맺혀있던 핏방울이 그새 굳어있었다. 여유 부릴 때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태환의 턱이 비틀렸다. 작은 한숨이 들리기도 했다.

“벗어.”

밑단을 걷어 올리면 되지 않느냐고 투정을 하겠다 싶으면서도, 그는 구태여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말아 올렸다가 옷감에 스쳐 더 덧날 수도 있어 보였다. 사심을 전혀 더하지 않고서, 그편이 더 합리적이라고 판단했을 뿐이었다. 흰 살결 위가 엉망진창이었다. 남들이 보면 겨우 그거 가지고 야단이냐고 할지는 몰라도, 그거야 타인의 경솔한 속단일 뿐 아니겠는가. 솔직히 어떤 흉터가 남아도, 어떤 흠집이 남아도 이시온은 이시온 일 테지만, 기왕 예쁘고 온전하게 두고 싶었다. 상처를 보고 있자니 속이 시끄럽기도 했다. 하얀 피부가 불그죽죽해서 예쁠 때는, 수줍거나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다가 달아오를 때면 충분했다. 시온은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역시 싫다고 하려나 싶어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잠, 잠깐 뒤로 물러나 있어 주면, 벗…을게요.”

허. 숨이 섞인 감탄이 터져 나왔다. 기가 찬다? 의외다? 놀랍다에 가까울지 몰랐다. 권시온이었을 적으로 돌아간 듯한 제 양 동생은 그 후 대체로 양순하긴 했다. 그래도 이런 걸 시키면 부쩍 창피해했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런데 벗겠다니. 솔직히 놀랄만한 반응이지 않은가. 그래서일까? 놀림은 없었다. 깔끔하게 뒤로 몸을 물려주었다. 거기에 요구가 하나 더 딸려 나오긴 했다.

“뒤로 돌아도… 주면 안 될까요?”

“…아, 스트립쇼는 하기 싫으시다?”

“…정말.”

낮은 웃음소리의 농도가 짙었다. 의외의 상황에 잠깐 얼어있던 공기가 금세 도로 돌아오고 말았다. 주도권도 그렇고. 양쪽 어깨를 으쓱 올린 사내가 두 팔을 들었다. 알았어. 짧은 허락이 떨어졌다. 꼼지락거리기라도 하듯, 바스락바스락 원단 소리만 요란했다. 망설이는 티가 적나라하게 나더니 결심이라도 한 듯 금속음이 들렸다. 버클을 풀어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다… 됐어요.”

청년은 곧바로 돌아서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다. 일단 멈춘 채로 천천히 목 근육을 옆으로 늘렸다가 다시 세웠다. 그리곤 한쪽 발로 중심을 잡고 매끄럽게 돌았다. 태환의 정면에는 하의를 벗어 내린 시온이 앉아 있었다. 그 와중 여전히 수줍음을 내려놓지 못한 탓인지, 약간 넉넉한 상의를 아래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깜찍하지 않은가. 그래 봤자 가려질 만한 물건도 아닌데.

보드라운 카펫에 자국이 생긴다. 살짝 눌린 채 느리게 원상태로 복구되는 흔적이 한 쌍, 두 쌍, 세 쌍… 점점 늘어갔다. 그렇게 멀리 있지도 않았다. 딱 다섯 발자국 반이면 충분했다. 다시 무릎을 굽힌 남자가 시온의 다친 쪽 종아리를 잡았다. 소독약을 뿌리니 하얀 거품이 일었다. 따끔한 탓인지 멀쩡한 쪽 허벅지에 올라가 있던 손이 손톱을 세웠다. 쯧. 태환이 혀를 차더니 그 팔목을 잡아 제 어깨에 올렸다. 긁지 말고. 제법 단호한 어투였다. 그렇다고 한들, 어떻게 그 어깨 위에 날을 세우겠는가. 그래서 남은 반대쪽 손이 애꿎은 시트를 잡아챘다. 구겨진 흰 시트가 꽤 처량해 보였다. 연고를 바르고 밴드까지 붙이는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제법 큰 손아귀가 섬세하게 움직이는 걸 구경하느라 더 빠르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마무리가 되었으니 바로 일어설 줄 알았는데. 그의 시선이 한참 시온의 무릎에 꽂혀있었다. 그러다가, 얇은 입술이 살짝 들렸다.

“호, 도 해줄까?”

“…계속 그럴 거예요?”

짓궂기 짝이 없다. 그래선지 항상 평정심을 갖추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아래로 살짝 쳐진 눈매가 위로 들렸다. 가자미눈을 하고자 열심인 듯했는데, 그래 봤자 간신히 일자가 되는 게 최선이었다. 사내는 소리를 내 웃었다. 나름대로 앙탈을 부려봤으나 씨알도 안 먹혔다는 뜻이다. 오히려 돋우면 돋았지. 태환은 빙글빙글, 한쪽으로 약간 더 올라간 입꼬리를 내리지 않았다. 그러더니 시온의 오금을 잡아 앞으로 당겼다. 정말로, 호.하고 어린아이에게 하듯 입김을 불었다. 발끝이 파드득 떨렸다. 그러고자 한 게 아니라, 살결에 느껴지는 호흡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곤두선 건 살갗만이 아니었나 보다. 태환의 시선이 다시 한번 어딘가에 박힌다. 물끄러미 바라보느라 가늘어진 눈매가 또 둥글게 휘고야 말았다. 아차. 그때야 시온도 알아채고 말았다. 이미 늦어버렸긴 했지만 말이다. 가릴 틈은 없었다. 실은 이제 와 고백하는 거긴 하지만… 청년은 얼마 전에 오래간만에 몇 가지 새 의복을 마련했다. 겉옷이나 상의, 하의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의류는 아니었다. 속옷. 그러니까 언더웨어를 새로 샀다. 그저 편하고 깨끗하면 그만이라고 여길 땐 언제고. 아마 태환도 진작 그런 제 꼴을 알고 있을 테다. 트렁크면 충분했는데. 이게 뭐라고 나름대로 크게 마음을 먹어야만 했다. 그가 준 것은 하의 위로도 라인이 드러나지 않도록, 세심하게 만들어진 브리프였다.

청년이 매번 사각만을 고집했느냐면 그렇지 않았지만… 이처럼 붙는 건 또 처음이었다. 그것도 제가 직접 고르고, 제 돈 주고 사보는 건 생애를 통틀어 최초로 일어난 일이었다. 하필. 밑단을 끌어내리지 못한 두 손바닥이 향한 곳은 결국, 또 홧홧하게 열이 몰려버린 얼굴 위였다. 가려봤자 귀까지 감싸진 못하니 그마저도 무용지물이었다.

“형이 호, 해준 건 무릎인데… 다른 게 기운을 차렸네.”

꼭 저렇게 호, 에 강조를 넣어야겠느냐고 불평할 새는 없었다. 아까 상처 주위를 찔렀던 검지가 다시 표면에 닿았다. 당연하게도, 무릎을 건드린 건 아니었다. 제게는 너무도 큰 결심이었던 얇은 브리프는 보통 입던 것과는 달리 얇고, 조였다. 그래서 양감과 윤곽이 노골적이었다. ‘작은 이시온’이 힘없이 얌전할 땐 별로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건만. 지금은 이전과 매우 다른 모양새였다. 갑갑하고 답답했다. 조였다. 검지의 지문마저 하나하나 짚을 수 있을 정도로. 무방비 해져버린 하체 또한 얼룩덜룩, 투명한 물에 붉은 물감을 한 방울씩 떨어트린 것처럼 물들었다. 탄력이라도 받은 걸까. 손끝에 점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가만히 꾹 눌렀다가, 차츰 단단해지는 덩어리 위를 쓸었다가… 제 맘대로였다.

문득, 여전히 안면을 가린 손바닥을 내리지 못한 시온의 왼쪽 가슴께가 따끔했다. 머릿속과 심경이 뒤죽박죽일 땐 언제고. 자신이 이렇게 욕망에 나풀거리는 편이었던가.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사실 처음부터 권시온, 혹은 이시온의 욕망은 자각부터 발현과 실현까지 전부 권태환의 소유였으니 어떻게 알 길이 있겠는가. 이래도 되는 것일까에 대한 고찰을 지속하지는 못했다. 슬그머니 아래로 내려온 한쪽 손이 느릿느릿 태환의 손목으로 향했다. 검지와 엄지가 소맷자락을 잡아당긴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음에도, 사내는 그걸 바로 알아채 주었다.

“…잠만 자달라며?”

여전히 웃음기가, 지독하리만치 진하게 묻어 있는 음성이었다. 반만 가려진 시야는 초점을 잡지 못했다. 그래도 알 수 있었다. 흐릿해진 시야를 내버려 둔 채, 시온이 웅얼거렸다.

“…같이 자 달라고 했지,”

소심히 조르던 손목이 한 번 더 소매를 당겼다. 일부러 힘을 풀어둔 상대의 팔이 알아서 딸려올 정도로.

“잠만 잔다고는 안 했어요…”

청년은 그렇게 흐린 시야만큼이나 흐린 판단력을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정체되어 있던, 흐르지 않던 물이 흐른다. 또 웃음이 들린다. 상체가 뒤로 넘어가는 건, 금방이었다.

*

기껏 눕혀놓고선. 태환의 탄탄한 한쪽 팔이 거뜬히 시온의 무게를 감당해냈다. 보통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남자 둘이 한쪽은 드러눕고, 나머지 한쪽은 아래에 깔린 상대방의 멱살을 잡곤 하던데… 그림이 퍽 달랐다.

크고 잘 뻗었으며 두꺼운 듯 매끈한. 어울리지 않는 형용사들이 동시에 잔뜩 붙어있는 손바닥은 상대적으로 제 것보다 가는 목덜미를 감싸 쥔 채 들어 올렸다. 끌어올려진 시온은 어찌나 순순한지, 팔꿈치가 침대 시트에 뿌리 깊게 박혀있었다. 혹시나 제 무게가 부담이 갈까 봐, 같은 이타적인 마음이 없진 않았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찬 진실한 속내는 또 달랐다. 이시온은 권 씨 저택을 나온 뒤로, 자신의 몸무게와 신장을 제대로 측정해 본 적이 없었다. 어째서 그랬을까?

키가 슬그머니 태환의 어깨를 넘보기 시작할 때부턴 항시 신경 쓰던 두 가지였다. 하지만 스물이 넘어서는 그렇게 하질 않았다. 필요할 때가 아니면 꺼릴 정도였으니. 별다를 게 있겠는가. 그리움을 묻으려던 발악이었던 것이지. 그럴 거라면 차라리 철저하게 얼마나 컸는지, 이제 더는 그에게 어린아이인 척 안기지 못함을 깨달을 만큼 무거워졌는지 눈으로 보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이렇게 다시 태환이 자신의 무게를 지탱할 때 안절부절못할 일은 없었을 텐데. 결론이 약간 이상했으나 일단 현재 시온의 큰 고민거리는 그것이었다.

알고 있다. 김정훈의 말을 다 믿을 순 없다. 그는 그래 봤자 3년을 본 듯 만 듯, 있는 듯 없는 듯 스쳐 지나가는 동창일 뿐이지 않았나. 단 한 번의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타인, 게다가 그가 말한 의심의 증거라는 건 겨우 드문드문 들은 몇 마디가 다였으니 더욱더 신빙성이 떨어졌다.

반대로, 그럼 권태환은 얼마나 믿을 만한가? 열세 살에서 열넷이 되어갈 무렵부터 열아홉까지라고 해봤자 스물아홉 인생 중 겨우 6년에서 7년. 잠깐이라면 잠깐이었다. 당연히 무게가 다르긴 했다. 엄지가 깔끔하게 정리하려 짧게 친, 머리카락 중에서도 가장 짧은 부근을 쓰다듬었다. 미약한 간지러움이 잡념에서 빠져나오도록 부추겼다. 무슨 딴생각에 빠져있느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눈이 마주쳤다. 저에게 한 번도 눈을 안 떼고 있었던 걸까. 살짝 가늘어진 눈매는 시온을 주시하고 있었다. 모르겠다. 자꾸만 왔다 갔다 하며 방향을 정하질 못했다. 그래 봤자, 이끌면 주춤주춤 따라가고야 말게 될 걸 알면서도.

하얀 눈꺼풀이 프레임을 쪼개기라도 하듯 천천히 움직였다. 끝에 달린 빽빽한, 그렇다고 위로 솟지도 못하고 쳐지긴 했으나 덕분에 인상을 처연하게 만드는 속눈썹이 덩달아 떨렸다. 그 모양새조차 모두 보일 정도로, 매우 느린 동작이었다. 태환은 그 꼴을 보고 웃었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늘 그랬듯이. 그는 청년의 앞에서 한정적으로, 다른 때보단 말수가 많은 편이었으나 어디까지나 ‘다른 때’보다 였을 뿐이었다. 그는 언제나 행동이 먼저다. 입맞춤이 이어졌다. 입술 위는 아니고 나 혼란에 잠겨 버렸어요, 라는 티를 감추지 못한 눈가가 시작이었다. 그다음엔 깜짝 놀라기라도 했는지 움찔 구겨지는 콧등, 씰룩이는 뺨… 의외로 봉긋하게 솟아있는 매끈한 이마는 나중이었다.

체온만큼이나 서늘한 입술은 온기를 남기진 못했다. 그렇다고 차갑거나,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뭔들 아니겠느냐만. 시온의 귓가가 바빴다. 또 붉어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굉장히 늦은 변명일지도 모르지만, 이시온은 원래 얼굴에 큰 변화가 있는 편이 아니지 않은가. 표정이든, 낯빛이든, 감정을 드러내는 거라면 전부 다 그랬다. 그런데 단 한 사람 앞에서만큼은 달랐다. 태환의 미지근한 체온이 제 피부를 누르기만 해도 맥박이 불규칙해졌다. 저를 보고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 걸 마주 보고 있자면 뜨거운 물이라도 삼킨 것처럼 목울대가 뜨거웠다.

그뿐이던가. 꼴사납게도 손끝이 떨린다. 묘하게 기분 좋은 긴장감이 자꾸만 부추기는 탓이었다. 그래도 10년 전에는 그런 일이 자주 있었고, 항상 겪었으니 이 정도로 과하게 반응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아닌가, 그저 숨기는 데 능숙했을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태환의 입술이 달싹거리다 떨어졌다. 드디어 입가까지 왔다. 말을 하려던 걸까, 아니면 그저 습관적으로 그랬던 것일까. 그렇게 추측할 수 있는 건 잠깐뿐이었다. 이시온은 정말 몰랐다. 계속 제 눈앞에 존재에만 집중해서 그런 거겠지. 언뜻 보이는 풍경이 달라졌다. 그도 모르는 새 상체를 세워 앉아버린 거다. 하지만 그의 맞은편을 차지한 이는 어땠느냐면, 당연히 알고 내버려 두었다.

시온은 입맞춤을 할 때마다 놀란 듯 어깨를 움츠리거나 손을 꼼지락거리고 살갗이 물들이며 어찌할 줄을 모르는 주제에, 또 막상 입술이 떨어지면 아쉬워서 허리를 점점 앞으로 세웠다. 하는 양을 내버려 두고 알아서 자세를 고쳐주었다. 과연, 연장자 다운 태도가 아닌가. 완성된 모양이 꽤 마음에 든 덕도 있다. 이시온의 어정쩡하게 앉아 뻗은 것도, 올린 것도 아닌 다리가 저보다 훨씬 두껍고 단단한 허벅지 사이에 갇혔다.

남자의 무릎은 온전히 세워져 침대 위에 박혔다. 베이지색 니트에 감춰진 두 팔은 등 뒤를 지탱하고 있었다. …부끄러워. 그 덕분에 얻은 건 또 하나 있었다. 시온은 양손으로 제 얼굴을 덮을 수 없었다. 사내 앞에서 항상 하듯 마른 세수를 할 수도, 감추기도 힘들었다. 민망해서 였을까. 주름졌던 콧대가 펴지며 코끝이 씰룩, 짧게 움직였다. 눈동자를 굴리고 있자니 저를 보고 웃다가 한 번 더 입가에 짧게 입 맞춘 입술에서 어떤 잔향을 잡아낼 수 있었다. 체리 브랜디. 그때야 까맣게 잊고 있던 디저트가 떠올랐다. 청년이 아주 작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어딘가 맥이 빠진 듯한 투였다.

“아… 클라푸티. 많이 남지 않았었어요?”

“이 상황에?”

흉통이 잔잔히 울렸다. 대놓고 웃는 거다. 민망함을 털어내려다 더 크게 창피를 당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속이 상하진 않았다. 스스로도 우습기는 했으니까. 시온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고 말았다. 큰 소음은 없었다. 어이없다는 듯, 숨을 크게 한 번 뱉은 미소가 튀어나왔다. 참 오랜만에 입가에 웃음을 걸어봤다. 눈이 가늘게 접혔다. 그래서 또, 시온은 제가 뭘 했는지 알지 못했다. 태환의 웃음은 천천히 멎었다. 저 흰 이목구비가 웃는 게 얼마 만이던가. 아니, 그걸 제 눈으로 다시 볼 수 있게 되는데 도대체 얼마큼의 시간이 지났던가. 고개가 오른쪽으로 기울여졌다. 입매는 다시 아래로 내려졌다. 냉정한 기색은 없었다. 차라리 회상에 잠긴 것에 가까웠다면 모를까. 정말, 참으로… 깊은 호흡이 한 번, 스치듯 내뱉어졌다.

“잘 보관해 두고 있을 테니, 나중에 마저 먹든가 하고…”

사내가 몸을 뒤로 물렸다. 어. 짧게 아쉬운 듯한 침음이 흐르긴 했으나 이번엔 뒤따르지 못했다. 태환의 검지와 중지가 시온의 가슴을 눌러 앞으로 오지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반항은 없었다. 없었다기보다 하지 못했다. 오히려 덜컥 멈춰버렸다. 권태환은 진작부터 셔츠 차림이었다. 구급상자를 가지러 갔을 때, 밖에다 벗어놓고 왔으리라. 코트와 재킷, 베스트까지. 오늘 걸친 상의는 짙은 감색이었다.

“…다른 체리나 먹어야겠네. 아, ‘체리’가 아니었지?”

똑같이 잘 익었긴 한데. 중얼거림이 덧붙었다. 시온은 할 말을 잃었다. 되바라진 척, 누가 그렇게 만들었느냐고 따질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태환이 평가한 대로 빨갛게 물드는 것뿐이었다. 눈에 띄도록 짙은 색으로 골라 달아놓았을 게 분명한 단추의 크기는 작다 못해 장난감 같았다. 아닌가. 그걸 풀어내는 손이 너무 커서 더 그래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저렇게 큰데, 어떻게 이토록 섬세하게 움직일까. 빗겨나가는 일 없이, 모든 동작이 정확했다. 다만 무심해 보이기도 했다. 구멍을 벗어난 뒤 툭, 하며 풀어헤쳐지는 게 썩 정성스럽진 않았으니까. 청년은 조각상처럼 굳어버렸다. 다행히 숨이 붙어있긴 했지만. 튀어나와있는 목젖이 자꾸만 솟아올랐다가 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으니까. 마른침을 삼켜서 그랬다. 입안은 마르는데, 자꾸만 삼. 흉근 아래, 복부가 반쯤 보이기 시작했다. 잘 짜인 상체에 딱 맞춘 의복이 힘을 잃고 미끄러져 내려갔다.

카라가 목뒤로 넘어가 버리고, 무릎과 종아리에 깔린 시트가 우그러졌다. 자꾸만 위로 딸려 올라가고 싶어 안달이었다. 원인은 분명했다. 맨살을 드러낸 자신과 달리, 시온의 양 어깨는 포근한 니트에 덮인 채 계속 달달 떨고 있었다. 정확히는 손의 진동이 저기까지 전해진 것일 테다. 무게를 견디지 못한 탓이 아니다. 앞섶이 전부 풀어진 참이었다. 태환이 다시금 미소 지었다.

“…뭐야. 너는 스트립쇼가 싫고, 나는 해야 하고?”

만지고 싶으면 만지란 말을 꼭, 이렇게 한다. 청년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렇다고 하지 않겠다고 거절하는 일은 없었다. 어색하게 머물러 있던 자세가 고쳐진다. 고개가 양옆으로 흔들린다. 음성으로 들려주진 않았으나 착하게도 대답은 잊지 않은 것이었다. 이제 두 팔이 상체를 지탱하지 않아도 됐다. 그러자 조심스레, 하지만 약간은 다급한 손길이 제 앞에 있는 골반을 잡았다. 태환은 여전히 무릎을 세운 채였는데, 이젠 완전히 이시온의 허벅지에 내려앉은 꼴이 되었다.

“…나도 형, 들 수 있, 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있자는, 함축된 의미가 있었다. 이걸 앙탈이라고 봐줄까, 애교라고 해줘야 하나. 그는 이것 봐라 라고 말하는 대신 한쪽 눈썹만 위로 올렸다. 태환은 부러 시온의 손을 저지하지 않았다. 천천히 종아리와 허벅지의 뒷면이 맞닿았다. 어쨌든 위를 차지한 이의 시선이 높은 건 여전했다.

“자꾸 아닌 척 손길을, 그래서 싫었나?”

“그건… 아니지만요.”

시온은 이 형태가 훨씬 마음에 든 모양이다. 흰 살결과 대조적으로, 체온은 뜨거웠다. 원하던 걸 취해서일까. 손바닥이 슬금슬금 위치를 바꿨다. 등허리를 쓸어보다가 용기를 내기라도 했는지, 서서히 위로 향하며 툭 튀어나온 날개 뼈를 잡았다. 그 너머로, 정면을 기준으로 한 비슷한 위치에 뺨이 닿았다. 선명한 빗장뼈가 거슬릴 만도 한데도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른다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던 고개를 돌리고, 움푹 파인 우물 위에 입술이 눌렸다. 제 얼굴 위로 여러 번 쏟아졌던 입맞춤에 대한 복수 혹은 앙갚음일까? 보답일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그랬다. 그러나 과감함만은 닮지 못했다. 적극적이지 못해서?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버리지 못한 거다.

“…권시온.”

제 의문에 대한 미련을. 시온은 우유부단한 제 머릿속이 원망스러웠다. 그때, 낮고 탁한 음성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단단한 턱 선이 청년의 정수리에 닿아 있었다.

“형이 왜 속상했는지, 물어봐 줬으면 좋겠어?”

권태환은 자신이 그렇게 갈피를 잡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미 다 알고 있었나 보다. 애초에 모를 리가 없었긴 하다. 그는, 정말 저를 잘 알았으니까. 10년 전에도, 지금도. 저가 변하지 못해서 그랬을까. 쉽게 정의를 내릴 수 없었다. 사내는 의미 없이 행동하지 않고,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다. 그것은 체면치레 때문도 아니고, 정중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남들이 태환을 평가할 때 마치 군림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 같다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듯 그의 천성이 그랬다. 아, 모를 리가 없었다. 다 알고서 물어보는 거구나. 잠깐이지만, 두 눈이 확실히 흔들렸다. 머물러있던 뺨이 떨어져 나갔다. 빠르진 않았다. 조금씩 멀어졌다. 그리곤 눈이 위를 향했다.

“…일부러 만나게 한 거 아니야.”

엄지가 턱 선을 감쌌다. 엄지는 굽혀져 광대 아래의 꺼진 살을 쓰다듬었다. 안타깝다거나 미안하다거나. 그런 말은 일언반구 없었다. 어투에 묻어나지도 않았다. 계속 언급했듯, 남이 보고 들으면 그렇게 속단할 것이 빤했다. 하지만 자신은, 이시온은 그럴 수 없다. 그러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그러나 분명히 그의 시선은 타인과 달랐다. 일단은 눈빛이 달랐다. 너무 추상적인가? 하지만 색이 짙은 반면 오히려 빛이 잘 맺히지 않는 눈동자에 서린 감정은 확연히 평소와 다른 것이었다. 미간을 구기긴 했지만, 껄끄러운 기색은 없었다. 끝 꼬리가 살짝 위로 뻗은 눈썹이 근소하게 내려가 있는 것도, 시온은 알아볼 수 있었다.

“알았어요.”

제가 어렸을 때 이따금, 혹여라도 예기치 못한 일로 마음을 상하게 한 걸 알 때만 지어주던 표정이었다.

학습된 거라도 상관없었다. 권시온에게 그랬듯, 여전히 그에게도 진실이었으니까. 그는 그런 제 인식을 돌아보지 못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지금은, 지금은 그런 것보다…”

드디어 저울이 멈췄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게 많았으나 일단은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그래 봤자였다. 일부러 김정훈과 만나게 한 것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사실일 테니. 이시온은 과감해지기로 했다. 고른 치아가 입 안쪽 여린 살을 꼬집다가 놓았다. 허락을 구함과 동시에, 불손한 몸짓이 먼저 탐을 냈다. 물은 이미 엎질러졌고, 엎질러진 물은 담지 못한다. 두 호흡이 가까이 닿았다. 겹쳐진 입술 사이로 뭉개진 발음이 애원했다.

“키스해 줘요, 형.”

*

“…콘돔이, 없어요?”

방금 전의 비장함은 어디로 갔을까.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알 길은 없다. 그리 중요하지도 않았고. 황당함과 어이없음은 엇비슷하다. 그럼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허탈하다는 좀 멀었다. 그래도 귀엽기 짝이 없기는 마찬가지라, 태환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호기롭게 입술을 맞붙인다 했더니 그 뒤엔 더 과감했다. 여전히 거칠거나 강압적이진 못했다. 그래서 더 권시온, 아니 이시온 답긴 했지만. 입술보다는 좀 더 진하긴 해도, 엇비슷한 선홍빛을 띤 혀끝이 자꾸만 벌려달라 노크를 해댔다. 마치 강아지가 잠결에도 주인을 보고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 미약하지만 확실한 의사가 담겨 있었다. 기꺼이 사이를 열어주자 조심스레 윗니의 뒷면을 조르듯 훑더니, 지켜보기만 하던 제 혀를 들어 올렸다. 각도가 조금씩 비틀리며 속눈썹이 광대뼈 위를 스쳤다. 살 위가 간질거렸다.

제법 오래 참았다 싶을 때마다 떨어져 나가긴 했는데, 두 눈에 어찌나 아쉬움이 들어차 있던지. 분명 코로 숨을 쉬긴 해도 아직은 완전히 완숙해지지 못한 탓이리라. 발칙한 구석도 있었다. 안으로 굽혔다가 폈다가, 오므라지길 반복하던 손마디가 태환의 벨트를 풀어내리는 게 아닌가. 재도전하듯 파고들던 살덩이가 가늘고 투명한 흔적을 남기고 떨어졌다. 그… 운을 띄우는데 제법 오래 걸린 한마디가 들렸다. 그거, 어딨어요? 그게 무엇인지는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답변은 몇 초 뒤에 들렸다. 없는데. 그렇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오늘은 정말 술만 마실 작정이었으니까?”

“그건, 그건 저도 알지만, 그렇다 해도 여기 웬만한 가재는 다 있, 아.”

시온은 단말마를 토해내고야 말았다. 멍청했다. 애초에 구급상자, 가벼운 옷가지, 깨끗한 시트는 생필품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피임기구가 꼭 집안마다 갖춰야 하는 필수품이 되었단 말인가. 탄식이 길어졌다. 그러면 젤도 없겠지. 귀 뒤부터 목덜미가 전부 홧홧했다. 여기서 걸고넘어져야 할 부분이 있다. 자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형은, 태환은 그걸 알고 있었을거다. 그의 말대로 10년 전쯤 보살펴주지 못한 제 첫 음주를 위한 자리라 그럴 맘이 없었다고 한들, 이 펜트하우스에 콘돔과 윤활유가 없음을 몰랐을 리가 없지 않은가. 굳이 태환에게 책임을 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젤? 없어도 돼. 콘돔? 꼭 껴야 하나? 항상 같은 태도를 유지해온 바가 있으니까. 이건 전적으로 제 실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마음이 바뀌었나?”

이럴 줄 알았다. 시온의 이마가 아래를 바라봤다. 고개를 떨군 바람에 가지런한 가마가 한눈에 들어왔다. 보통 가르마란, 사람마다 치우친 방향이 있지 않은가.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하지만 청년은 억지로 왼쪽으로 쏠리게 했을 뿐, 실은 정가운데로 고르게 난 가르마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부분마저 올바르고 곧았다. 그런 것도 좋긴 한데. 사내가 상대의 정수리에 눈을 떼지 않은 채, 눈썹을 들어 올렸다. 침묵이 제법 길었다. 슬슬 억지로라도 얼굴을 보이게 해야 하나 싶었을 때였다.

느릿느릿, 얼굴이 다시 위로 올라왔다. 잔잔하게 일렁일 줄만 안다는 듯 평온했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파도가 쳤다. 눈의 방향이 맞은편 시선에 닿았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간다. 침대 위는 아니었다. 태환의 얇고 큰 입가에 닿았다. 그러더니 남자의 입안을 파고들며 졸랐던 혀끝이 연신 제 입술을 적셨다. 모로 돌아간 고개가 천천히, 어깨에 기대왔다. 고른 치아가 어깨에 닿았다. 아기 새의 부리처럼, 딱딱할 것이 분명한 치아가 작디작은 움직임을 보였다. 살갗에 상처가 남지 않을 만큼만 긁으면서 말이다. 그러더니 또 속눈썹을 팔랑거린다. 뭐라고 하려고 저러나. 가만 지켜보던 찰나였다.

“밖,에다가 하면…”

“뭐?”

사내의 입에서 얼결에 되물음이 나온다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만큼 의외이다 못해 전혀 예상치 못한 해결안이 나온 덕분이었다. 그게, 그게 아니고. 늘 속살거리듯, 조근조근 말하던 어투가 쪼그라들었다. 순식간에 웬만한 체리보다 빨개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더니 은근슬쩍 품에 파고든다. 허리까지 끌어안으면서. 목덜미로 파고든 얼굴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적나라하게 되짚을 수 있었다. 곧은 콧대가 눌리고 입가는 뭉개졌다. 그런데 달싹이는 걸 멈추진 않았다. 목소리가 너무나 가늘고 작은 바람에 잘 들리진 않지만, 읽을 순 있을 정도였다.

“…안되긴, 왜 안 되겠어.”

그게 과연 될는지 장담할 수 없지만. 뒷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하. 숨소리가 섞인 웃음이 터진 건 두말하면 입 아픈 이야기였다. 기뻤다. 무엇이 무려, 권태환이라는 사내를 기쁘게 만들었나. 이시온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긴 했다. 그건 불변하는 명제다. 하지만 특히, 이 순간은 더욱더 그를 환희하게 했다. 이시온은 모른다. 알았다면 이러지 않았을 테다. 제 가르마처럼 곧바르길 원하는 애인 건 열몇 살 때나, 스물아홉인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그는 떨어지고 있다. 낙하하고 있다. 어디로? 어디가 되었든 종착지는 자신이 될 것이다. 차디찬 바닥은 아닐 테니, 그거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일단은 기꺼운 추락의 여부는 제쳐놓고, 상을 주지 않고는 못 배길 대답을 했으니 기꺼이 보상을 주어야 했다. 깜찍하며 발칙하고 수줍은 답변이 퍽 기꺼웠다.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빨개져 버린 낯을 감추기 위함만은 아니겠지만, 태환의 양손이 시온의 뺨을 감싸 쥐었다. 천천히 떨어트렸건만. 으응. 벌써 투정 어린 비음이 울린다. 이럴 땐 오히려 어렸을 때보다 솔직했다. 이마와 이마가 닿았다. 이걸로 참으라는 듯, 달래는 듯, 어르는 듯 말이다. 날카로움은 온데간데없이, 지나치게 즐거워하는 눈매에 웃음기가 역력했다.

“권시온, 계속 닿는다.”

정말 그랬다. 서기만 했으면 다행이었을 텐데. 일부러 새로 장만하기까지 한 정성이 속절없게도, 불뚝 선명해진 부위가 젖어있었다.

여벌도 없는데 어쩌려고. 애정이 어린 핀잔은 덤이었다. 가볍게 뺨을 두어 번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당연히 붉은 자국도 남지 않을 만큼, 깃털 같은 재촉일 뿐이었지만.

커다란 손아귀가 상대적으로 가는 손목을 잡았다. 막 볼에서 떨어진 쪽, 그러니까 잡은 쪽의 반대편 손이 가늘고 잘 뻗은 손가락의 마디를 잡아 모양을 만들고 소지와 약지를 접게 하더니 그대로 앞으로 이끌었다.

자연스레 세워진 채로 남은 검지와 중지가 도착한 곳은 태환의 입매 위였다. 적셔둔 게 아까울 정도로 금세 물기가 사라졌으나 버석하진 않은, 그렇지만 또 한편으론 메마른 표면이 벌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누가 벼려준 것도 아닐 텐데, 날이 선 송곳니가 손톱 안쪽에 닿았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의도는 아닌듯했다. 입술만큼이나 마른 혀의 가장 넓은 부분이 두 손가락을 감쌌다. 흠칫, 진동하듯 떠는 게 느껴졌지만 물러서진 않았다. 고작 두 개일 뿐인데, 그 한마디씩을 적시기 위해 뺨에 우물이 생겼다. 그렇지 않아도 선명한 직선으로 이뤄진 사내의 인상이 더 선명해질 정도였다. 그러자 어디서 솟았는지, 뼈마디를 덮은 살갗이 젖는 게 느껴졌다.

아무런 동작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얌전하기만 한 손가락 사이를 벌리는 역할은 따로 있었다. 끝이 단단하고 도톰한 붉은 살덩이의 몫이었다. 사내가 목구멍을 더 깊이 열었다. 욱. 아무리 권태환이라도 생리적인 구토감이 들긴 했는지 잠시 뭔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찡그려지는 미간을 보는 것만으로도 흥분한다면, 저는 미친 사람일까. 권시온은 또 다른 혼란에 갈림길에 서버렸다.

“괜찮…”

됐어. 다 묻기도 전이었다. 분명 말하지 않았건만, 목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어느새 두 번째 마디까지 삼켜졌다. 그리고 그 마디를 잇기 위해 존재하는 뼈가 물렸다. 아프진 않았다. 형이 누군가의 손가락을 삼킨다니. 아무리 그 앞에서 앳되고 어린 모습을 보인다 한들, 이시온은 성인이었다. 더는 부족한 경험과 상상력으로, 몽정을 해봤자 더듬고 비비는 행위를 떠올리는 게 다던 어린애가 아니란 말이다. 제 형은 분명 경험이 있었다. 적나라한 표현이 기껍진 않았으나, 일전에 그가 쓴 표현을 빌리는 수밖엔 없었다. 정사에 대한 어휘는 여전히 부족하기에 나온 결과였다. 박고, 박힌다. 원초적이라 민망할 지경이었다. 어쨌든, 사내는 분명히 박기는 입장에만 있었을 것이다. 상대도 당연히… 여성뿐이었겠지. 시온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왜 자신은 계속 스스로 번뇌로 걸어 들어간단 말인가. 그런데 그 깨달음이 뜻밖의 결과를 초래했다.

“큽…”

어금니가 검지를 잠깐 짓씹었다. 동그란 어깨가 위로 튀어 올랐다. 고통이 따르진 않았으나 깜짝 놀라긴 했다. 아마 그새를 참지 못하고 상념에 빠져버린 제 손끝이 태환의 혀, 깊숙한 부근을 눌렀나 보다. 그러자 가늘고 날카로운 눈매가 저를 노려보았다. 입꼬리는, 여지없이 한쪽이 위로 올라갔지만. 사내의 입안은 한 쌍의 중앙을 갈라 꼼꼼히 적시면서도, 어금니로 잘근잘근 씹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읏… 이번엔 좀 아팠다. 상 다음엔 벌이었다. 한눈을 팔았으니 마땅한 조치였다.

권태환의 과거사는 과거사일 뿐이다. 그리고 시온도 머리론 알고 있지 않은가. 이건 되려 기뻐해야 할 일에 가까웠다.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기꺼이 제 ‘뒤’를 내주기 위해 손가락을 빨아주기까지 한 상대가 자신 말고 또 어디 있겠나 이 말이다. 또 한 번 볼우물이 생겼다. 손가락이 조여진 채로, 바깥에선 손목이 끌어내려지고 말았다. 입가에 체액이 맺히며, 다 빠져나간 뒤였다. 드디어 자유로워진 태환의 성대가 소리를 내었다. 후. 짧게 숨이 터지는 게 먼저긴 했지만.

“젤도 없으니, 대신 이걸로.”

손가락을 물려서 일까, 온몸이 구석구석 다 달아오른 탓일까. 둘 다일지도 몰랐다. 붉어진 검지와 중지가 알맞게 적셔졌다. 다음 차례까지 일러줄 필요는 없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이 일련의 행위들의 목적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아. 흥분이 과하면, 소름도 돋는구나. 시온은 약간 멍청해 보일 정도로, 순수하게 감탄했다. 허리둘레를 감싸고 있던 방해물은 이미 치운 뒤였다. 상대가 친절하게 다시 무릎을 세워주었다. 그래야, 하의가 아래로 내려갈 수 있었으니까. 미세한 진동을 멈출 수가 없었다. 탈의마저 미려한 누군가와는 다르게, 청년은 여전히 서툴기 짝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도 다행히, 최종적인 목적을 이뤘다. 잘 맞물려있던 버클이 풀렸다. 하의마저 상의와 같은 결말을 맞았다.

브리프의 밴드는 아직 완전히 내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들린 쪽은, 착 붙어서 떨어질 기미가 없던 아랫부분이었다. 기껏 축여놓은 손가락이 마르기 전에 할 일을 해야만 하는데. 어질어질한 머릿속은 거기까지 닿지도 못했다. 상관은 없었다. 턱 선이 흉근에 닿았다. 가빠진 호흡이 자꾸만 안달이었다. 마지막 확인인 듯, 위에서 태환의 음성이 들렸다. 저를 보라는 듯, 턱과 귀 사이를 잡고 올리기까지 했다.

“읏… 떨지 말고.”

웃음기가 선명한 목소리가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있었다. 어렸을 적, 경기 때마다 그리 긴장하지도 않았는데 부러 저를 다독이던 그때와 비슷한 문장이었다. 이때쯤이면 또 양심이 고개를 들이밀어야 하건만, 이번에는 모른 척 저 너머로 흘러가 버렸다. 잘 갈라진 틈으로 손끝이 파고들었다. 입구의 주름이, 미끈해 보여도 실은 촘촘하게 이루어진 피부에 닿았다. 저를 받아들여 주고자 한 듯, 살짝 벌어졌다가 다 물렸다. 그런데 어떻게 제정신을 차린단 말인가. 알고 있었다. 이시온의 이성은 결국엔, 권태환의 모든 것 앞에선 무용지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네, 네. 잘… 잘할게요.”

뻔했다. 운명과 숙명은 언뜻 보면 같아 보여도 극명한 차이가 있다. 전자는 설명할 수 없는, 여러 사람의 믿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고 숙명이란 이미 상황과 무대가 모두 만들어져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시온에게 있어, 태환은 어느 쪽에 속할까? 알아볼 틈 따위는 없었다. 아직은 젖어있는 손끝이 입구를 덧그리다, 파고들었다.

*

배운 걸 실제로 해낸다는 건 생각보다 별것 아니면서도, 한편으로는 생각보다도 긴장되는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이시온의 그 누구의 가족도 아니던 시절, 그러니까 처음 보육원 단체 활동의 일환으로 갔던 수영장에서 그의 재능이 발견되었을 때부터 그랬다. 딱히 헤엄이라는 행위가 즐겁지도 흥미롭지도 않았으나 이걸 해야 도움이 된단 말에 순순히 따랐던 어린 시온조차, 정식 첫 경기 때는 떨었다. 겉으로 드러날 만큼은 아니더라도.

제과는 또 어땠겠는가. 자아라는 게 생긴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부터, 막 성인이 되기 직전까지. 삶 대부분을 운동만 해온 청년이 머리가 다 굵어지고 나서야 다른 일을 시도한다는 건, 당연히 어려운 일이었다. 시온의 태도는 엇비슷했을지 모른다. 하라니까 하고, 할 수 있는 게 그 정도뿐이니 하고. 상황과 환경에 맞췄을 뿐, 여전히 정말 하고 싶은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타고난 손재주가 있어서 다행이었달까.

처음 완성품을 만들어 냈을 땐 제법 손바닥에 땀도 좀 차고,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스승이 이번엔 이 정도면 됐다, 라고 말했을 땐 살짝 아쉽기도 했던가. 그래 봤자, 거기까지 일뿐이었다. 그렇다고 분하거나 잘하고 싶어 안달이 난 적은 없었으니까. 하다 보면 언젠가는 잘하게 되겠지. 실제로 구실은 할 수 있게 되었다.

“…나, 잘하고 있어요?”

그런데 엉뚱하게도, 그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열망을 가진 존재에게는 늘 항상 그렇긴 했지만…. 이제 와서 ‘은밀한 짓’을 하면서 이런 감상에 빠지는 건 너무 이상한 일이 아닐까? 뭘 하든 자신이 잘하고 있는지 물어본 역사가 없었다. 그건 코치나 감독에게도, 스승에게도 똑같았다. 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그럴 의욕도 없었기에. 마치 설치류가 쳇바퀴를 굴리는데 아무런 이유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혹은 강은 흐르고 수영장에 물은 멈춰있다는 명제에 대해 그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듯이 말이다.

지금만큼은 달랐다. 태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안긴 어깨가 조여왔다. 눈앞이 온통 깜깜했다. 정확히는 꽉 들어찬 흉근이 제 눈을 가린 탓에 희미한 빛이 느껴지는 게 전부였다. 궁금했다. 보통 다른 사람들은, 현재의 자신처럼 스스로의 행동이, 행위가, 노력이 잘 되지 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없어서 미치겠기도 하는 걸까. 사내의 피부는 본래부터 탄 듯이 짙은 편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 사진을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시온이 알고 있는 세월 내에선 그랬다. 신기하게도, 옷으로 가려진 부분은 약간씩 다른 색을 띠고 있었다. 그도 인간이니, 볕에 살갗을 그을리기도 할 것 아닌가. 어떻게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서 어떤 것도 걸치지 않고 있는 맨살은 하얗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노출된 쪽보단 옅었다. 보고 싶은데. 아예 갇혀버린 두 눈동자 탓일 테다. 시각이 차단되자 남은 감각이 까탈을 부렸다. 촉각과 청각이 알아서 날을 세웠다.

“읏…”

정수리 부근에 닿은 턱 선은 딱딱하고 아팠다. 참을 만했다. 굳이 떨어트려 두고 싶지 않기도 했다. 머리 위에서 들리는 음성은 비음이 꽤 뒤섞였고, 공기가 많이 들어차 있었다. 신음은 마치 안쪽으로 말리다 만 이관을 툭, 건드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일까. 귀의 윗부분이 알아서 바르르 떨렸다. 두 손바닥 위로 단단한 둔근이 느껴진다. 겉으로 보면 판판하게만 보이는데, 실제로 만지면 적당한 근육이 손금을 간지럽힌다. 보기에는 고체였는데, 적당한 감촉이 갈라진 틈에 들어차는 느낌이랄까. 선명하게 갈라진 골을 비집고 들어간 건, 시온의 흰 손가락이다. 왼쪽의 검지와 소지가 오른쪽의 중지와 소지를 도왔다. 파고들기 좋도록, 살을 벌렸다. 도와줄 젤이 없어서, 성급하게 말라버린 손가락이 꽉 다물어진 안을 파고드는 게 제법 버거웠다. 일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가슴께에 뭉개져 버린 입술이 달싹였다.

“오늘, 너무 좁은데… 아.”

그러다 알아서 알아차려 버렸다. ‘오늘은 술만 마실 작정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저번처럼 풀어오진 않았다는 거였다. 엄청나게 함축된 의미를 뒤늦게 깨달아버렸다. 또 목덜미가 따가웠다. 너무 뜨거워진 탓이다. 공허해질 뻔한 입술이, 오물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할 말을 잃었으니 더듬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이걸 꿩 대신 닭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차디차다 못해 버석해 보이는 촉감은 성정이 낳은 착각일 뿐, 실제로 육체가 느끼는 건 그와는 전혀 반대였다. 부들부들한 입술, 그 안쪽 표피에 닿는 살결은 탄력이 있고 그만큼이나 부드러웠다.

어떻게 보면 희롱하는 건 자신일 텐데도, 그런 제가 다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손에 감기지 않는 부위가 없었다. 코가 시큰했다. 그렇지 않아도 물이 많다고 타박을 받지 않았던가. 울기도 많이 울었다. 눈물, 트레비 분수… 그러다 붉은 액체라도 흘려대면 얼마나 꼴사나울까. 시온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걸 알아챈 태환은 가쁜 호흡을 뱉어내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자 마디에 툭 튀어나온 뼈에 주름의 모양이 읽혔다. 조였다가, 풀렸다가 하던 내벽이 제 손가락을 얼러댔다.

이시온은 제 외모에 큰 관심이 없다. 그렇기에 어떻게 보이던지, 사내가 예뻐해 주면 기쁘긴 했으나 객관적 평가까진 신경이 미치지 못했다. 그렇다고 제가 희여멀건 하다는 사실까지 모르진 않았다. 좁디좁은 구멍, 그 입구로 삼켜진 제 흰 손가락과 대비되는 피부는, 얼마나 짙고 감미로울까. 얼마나… 제 눈앞을 어지럽힐까. 앞섶이 아팠다. 젖어야 편할 내부는 아직도 말라있건만, 제 브리프는 질척하기만 했다. 염원하기만 했는데, 몸은 솔직하기 짝이 없다. 원초적일 정도로. 고개가 들썩였다. 남자는 그걸 숨이 막힌다는 표시로 이해했는지, 비교적 맑은 공기가 폐부에 스며들었다.

“아프진… 않아요?”

드디어, 마침내 다시 두 쌍의 눈이 서로의 존재를 더듬었다. 권태환이 턱을 틀었다. 얘는, 자기가 어떤 낯을 하고 있는지는 알까. 목소리엔 걱정이 반, 흥분이 태반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목구비가 온통 저를 향하고 있었다. 불그죽죽한, 정확히는 선홍빛을 내는 영역이 제일 넓었다. 눈은 어느새 촉촉이 젖어있다. 서다 못해 끄덕이는, 딱 저처럼 예쁘게 곧은 성기는 안중에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살갗에 비벼지느라, 그 짧은 새 조금 부었나 싶은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속눈썹과 같이. 여러 의미로 아픈 건, 너 같은데. 태환은 굳이 그렇게 일러주는 걸 그만두었다. 웃음기를 머금는 건 멈추지 못했지만 말이다. 별로. 숨이 많이 들어간 비음이 낮게 깔렸다. 기울인 방향의 반대편 입꼬리가 위로 당겨졌다.

“…내가 못해서, 나만 좋은 거 같아요.”

어이가 없었다. 고작 손가락 몇 개를 구멍에 넣은 게 다면서. 뭐가 그렇게 좋다는 걸까. 매번 신기했다. 이시온의 존재 자체가, 태환에겐 늘 새로웠다.

“전립선, 읏, 이 너무 깊은 곳에 있…나 보지. 아, 크면, 깊…하, 깊이 있다곤 하던데.”

“전립, 뭐, 예?”

좆, 자지. 뭐 그런 노골적인 단어를 쓴 것도 아닌데. 고작 전립선 가지고도 얼굴색이 진해지고 만다. 그런 주제에 자신의 아래에 닿아서 떨어대는 살덩이는 당장에라도 파고들지 못해 울고 있었다. 이걸로 적셔도 될 뻔했네. 속으로 뇌까렸다. 이시온이 눈알을 굴린다. 잔잔함은 어디다가 치웠는지, 당황한 되물음이 끝나자마자 바삐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제 배에 가슴 아래, 흉부라고 하기엔 살짝 올라와 있는 부위에 닿은 사내의 성기가 느껴졌다. 남성성을 굳이, 크기로 따질 필요는 없다. 남의 것을 유심히 본 적은 없어서 잘은 몰라도… 분명히 크고 굵었다. 평균은 훨씬 웃돌겠지. 갑자기 목이 바싹 말랐다. 또, 또 둔하고 느린 제 머리가 어느 결론에 닿은 탓이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맞다. 그것이 낭설인지, 확실한 의학적 지식인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당장 알아볼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청년이 떠올린 건 다른 측면에서 본, 전혀 다른 구석에 대한 의심이었긴 했지만. 이어지진 못했다. 태환이 별안간 큰 웃음을 터트렸던 탓이다. 미치겠네. 그렇게 중얼거린 것 같다. 당연히 그런 반응이 나올 만했다. 또 뭘 그럴지도 모르겠어, 야. 호흡이 끊긴, 탁한 음성이 귓가 주변을 배회했다. 압박감이 심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주인과 다르게 너무 착실하고 욕구에 솔직한 손마디는 그새 더 안쪽을 파고들었다. 손목이 부르르 진동했다.

“뭐, 그래 봤자.”

권태환은 제 품에 닿은 흰 얼굴을 다시 가리지는 않았다. 그저 좀 더 끌어당겼을 뿐이었다. 아까처럼 가둬두기 위함이 아니었다. 정수리에서 살짝 뒤편에 입을 맞추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열이 몰려 빠져나가지 못해서인지, 가늘고 나풀나풀 한 머리카락을 헤치고 닿은 입술이 뜨거웠다. 가마가 시작되는 부위만 동그랗게, 뜨거웠다. 피부가 델 정도는 아니고, 미지근한 물과 닮은 온도였다.

“앞으로… 으읏, 쓰지도 않을 건데. 아, 네가, 흐, 대주면, 또 모르겠다만.”

잠깐 뒤로 밀어두었던 의심 혹은 의구심이 다시 제 차례를 노렸다. 눈꺼풀이 호들갑이었다. 뒤따른 농담은 들리지도 않았다. 섬세하게 빚어진 낯이 뒤죽박죽이다. 추하다거나 망가졌다는 게 아니다. 복잡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요동쳤다는 말이다. 더불어 샅에 달린 길고 단단한 것도. 입안의 살을 어찌나 깨물어 대는지 도톰한 입술이 자꾸만 오그라들었다. 쓰지도 않을 건데, 라니. 태환은 보기보다도 더 말 수가 없는 편이었다. 굳이 하찮은 것에 가타부타 말을 얹기 싫어하는 성격 덕분이었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일러줬다는 건…. 아. 앓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헉. 뒤를 따른 건 급하게 숨을 집어먹은 소리였다. 중지와 검지가 급하게, 잔뜩 조여든 내벽을 빠져나온 탓이다. 아직 여물만큼 풀리지 못한 주름이 붙들었으나 완전히 뿌리쳐지고야 말았다. 이런 걸 번들거린다고 하던가. 잔잔하게 고인 물 같던 눈동자가 기색을 바꿨다. 욕망이란 물감이 투명함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빛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어쨌든, 반짝거리는 건 똑같았다. 물기가 남지 못한 손가락 사이로, 탄탄하고도 말랑한 근육이 가득 차다 못해 삐져나왔다. 손가락 사이사이가 충만했다. 곧이어 아귀힘이 세지더니, 당기지는 않고 들어 올렸다. 저에 비해 가늘게만 보이는 팔이 저도 연약하진 않다는 걸 자랑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청년이 제 몸을 바싹 붙였다. 붙어있던 하체가 그렇게 요동쳤으니, 시트는 이미 단정함을 잃은 지 오래였다. 꼭, 이시온처럼 말이다.

“흐…큿…”

다시금 오므라든 입구는 비좁기만 했다. 그러나 보람이 없지만도 않았다. 제 안을 채우던 질량감이 어디 갔는지 찾듯, 더 뜨거운 살갗을 돌려달라고 주장이라도 하듯이 열었다가 닫히기를 반복했다. 뒤를 벌름댄다, 라고 하면 좀 그럴까. 태환에게 어울리지 않다 못해 이질적인 서술이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시온의 매끈한 귀두 끝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아까의 손가락 따위는 맛보기일 뿐이었다고, 진짜 이 내부를 차지할 건 자신이었다는 걸 확실히 하듯이. 뭐가 돋아 있긴 하구나. 저가 무슨 말을 던질 때, 특히 놀릴 때면 시간을 들여 달아오르는 귀를 닮은 색의 성기는 이제 혈액이 몰려 색도 짙고, 밍숭하리만치 미끈하기만 할 것 같던 기둥엔 제법 굵게 핏줄이 곤두서 있었다.

오히려 민둥한 쪽은 뿌리 끝이 달린 저 샅이었지만. 아직도 매번 정리하는 모양이었다. 저번부터 눈에 들어오긴 했지. 신음 사이로, 사내는 입술을 축였다. 만지고 싶은데. 아프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버거울 순 있어도. 눈치채지 못한 동안, 어느새 옆구리를 잡은 흰 손이 느껴졌다. 천천히 아래로 내려지고 있다는 사실도. 내부는 너무나 빠듯했다. 으응, 으응. 어린애가 훌쩍이는 것과 비슷했다. 10년 전에도, 시온은 변성기를 겪었다. 그래도 확실히 열몇 살과 스물아홉은 다른 걸까. 연한 음절과는 다르게 완연히 무르익은, 남성의 음성이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이다지도 귀여우니 어쩌면 좋을까. 어쩌긴. 사내는 제 중증을 받아들인 지 오래였다.

“…옳지, 거, 큿, 허윽, 권, 권시, 윽…!”

그때,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상체가 흐트러졌다. 뒤로 한껏 젖혀진 복근 위로 뭔가의 흔적이 선명히 드러났다. 꽉 짜여 흠 하나 없는 근섬유가 부풀었다. 뭉툭한 그건 분명, 확실히 정복의 흔적이었다. 이성이 흐려지면 사람이 달라지는 법이다. 권시온은 인간이고, 사람이다. 절대 못할 것 같은 일도 제정신이 아니면 해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한쪽은 둔근에, 한쪽은 허벅지에. 말뚝이라도 박은 양 강하게 붙들면서도 멋대로 굴진 않는다 싶었다. 아직은 미숙하고 어리숙하게 굴려나 했더니… 잘 배워버렸다. 제 몸을 움직인 거다.

엉덩이가 조여들며 보조개가 생겼다. 얼마나 잔뜩 힘을 줬는지, 살기둥이 순식간에 안을 차지했다. 그러면서 천천히 맴돌아 닿을 듯 말 듯 하던, 둥글게 튀어나온 극점이 급작스러운 환희를 맞이했다. 딱 들어맞았다. 손금을 채웠던 살덩어리처럼. 귀두와 기둥을 가르는, 움푹 파인 부분에 제대로 걸려버렸다. 그러다 쭉, 미끄러져 올라가며 올려붙여졌다. 뚝, 뚝. 시온의 분홍빛 유두 위가 혼탁한 액체로 인해 반쯤 불투명해졌다. 바로 아래 복근의 처지도 같았다. 하. 하아. 흥분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들썩이는 상체가 그 흔적을 더 돋보이게 하였다. 쌌네. 웃음인지, 곤란함인지 모를 독백이 들렸다. 하지만 이미 뒤죽박죽 어지러운 심정 사이에 우위를 차지한 본능과 욕구는 멈추지 않았다.

“하, 시온, 흐, 으… 큽, 권시,온…”

천천히, 그만 같은 명령은 없었다. 오히려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는 듯, 중간마다 부추기기만 했다. 좋아, 더해봐. 거칠지 않은, 되려 너무 부드러워 느낌이 이상한 시트가 날개 뼈에 쓸리고 비벼졌다. 등이 침대 위에 떨어진 탓이었다. 서로 마주 본 채 앉아있던 형태가 바뀌어버렸다. 남자는 누여지고 청년은 그 위를 차지했다. 허공에 발이 달랑거렸다. 여전히 낯선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흔들리고 후벼지는 내벽에 닿는 살기둥은, 참 알맞은 곳만 찔러댔다. 누가 저를 위해 맞춰두기라도 한 것 같다 하면 너무 큰 비약일까. 뭐, 남의 의견이 중요하진 않았다. 발가락이 자꾸만 안으로 곱아들었다.

“형, 응, 혀엉…”

목덜미에 닿는 입이 뜨끈뜨끈했다. 그 와중에도 차마 이를 드러내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따금 어금니가 표피를 긁었다. 태환은 시온의 힘을 뺀 입질마저 흡족하게 느꼈다. 기다란 살덩이로, 다른 목적을 가진 내부를 전부 내어준 채 몸을 맡기는 게 이렇게 기껍다니. 태환은 자꾸만 헤퍼졌다. 웃음이 그랬다. 그래도 그가 그렇게 느슨해질 수 있는 건 이시온밖에 없다. 그러면 된 거 아닐까. 들려있던 종아리가 등허리에 감겼다. 고개, 고개 들어봐. 자신이 직접 더럽힌 복부를 더듬는 손이 아직도 서늘했다. 확실히 다른 때와의 차이는 있었다. 찬물이 미온수로 변한 정도 만큼이었지만. 곧이어 손끝이 살을 파고들었다.

“이, 상황에, 하긴… 허, 웃긴, 흣, 웃긴 말인…데.”

눈꺼풀이 깜빡거렸다. 그렇다고 멈추진 않았다. 그렇게 비비고 비벼지는 도중, 용케도 귀가 쫑긋였다. 짙은 피부색과 대비되는 흰 치아가 보였다. 얇고 잘생긴, 그러나 어딘가 냉철해 보이는 입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 흐으, 권시온… 좆이, 크읏, 크나, 싶네.”

훈련이 된 걸까. 또 지나치게 함축된 문장이었는데도, 이번엔 단박에 알아들었다. 굳이 풀어서 설명하자면… 그러니까. 자신의 깊은 곳에 극점이 있듯, 거길 파고들기 위해 시온의 것이 알맞게 크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보면 제정신인가 싶기도 하고, 실없다 싶을 수 있는 발언이었다. 그런데 이시온에겐 다르게 와닿았다.

“왜, 울어. 또, 읏, 흘리지.”

“…좋아, 좋아서요.”

낭만적인 고백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단정한 낯을 잔뜩 일그러트린 채 울었다. 태환의 입술 위가 덮였다. 당연하지만, 하체가 멈추는 일도 없었다 이시온은 그렇게 적당한 온도의 물에 빠졌을 때의 열감과 닮은 감각에 흠뻑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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