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다음으로 굴종이 지나고 (2/5)

2.다음으로 굴종이 지나고

권태환이 찾아온 날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백경아가 자취를 감춘 데에 집중하느라 어린 시절 따위, 언젠가 했던 약속 따위 기억하지 못한 척하던 때와 별다를 게 없었단 뜻이다. 반죽기의 소음, 오븐의 열기가 내는 특유의 열감과 밀가루가 부풀며 내뿜는 향기, 크림을 짜고 난 뒤 정리해둔 고깔의 가지런한 모양새, 고질병처럼 남는 손목의 작열감과 통증, 뻐근하게 무거워진 승모근 그 외 등등. 한 달 사이 메종 단 루와 이시온이 박탈당한 것의 목록이었다. ‘왜 그 곱상하게 생긴 케이크 집 사장 총각’으로 불리는 큰 이유이던 큰 눈매, 그 아래 그늘이 진지 꽤 됐을 무렵이었다.

메종 단 루에 드나드는 손님은 없었다. 처음 막 물려받았을 적에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파고들자면 완전히 다른 국면이었다. 그때는 공급은 있었으나 수요가 없었던 게 아닌가. 지금은 휴업을 내건 지 한참이었으나 종종, 사정을 모르는 이들로부터 문의 전화가 오고 있었다. 케이크 예약되나요? 스피커 너머로 질문이 들리면, 시온은 참담함을 애써 감춘 채 완곡한 어조로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제 개인 사정으로 잠시 쉬고 있습니다. 아프지 않게 된 팔 대신, 입안이 소태같이 썼다.

케이크 가게 사장 애인이 돈을 꿀꺽 한 채 도망쳤다는 소식이 동네 곳곳에 퍼진 건 순식간이었다. 물론 진짜 연인은 아니었으나 부정도 하지 않아버린 이시온이 오명을 다 뒤집어쓴 건 당연지사였다. 그는 가까이에 친구라고 부를 만한 인맥이 없었다. 만약 있었더라면, 이 사건의 경위를 듣고 답답해서 가슴을 칠 판이었다. 까놓고 말하면, 그 여자하고 사귄 것도 아니라며. 근데 네가 뭐라고 그걸 책임지려 해? 네가 예수나 부처라도 돼? 그러나 있었다 한들, 이시온은 똑같이 굴었을 거다. 이 난장판에서도 오직 ‘피해자’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가게를 열고 여기저기 수소문하는 걸 멈추지 않았을 거란 이야기다.

‘한 일주일만 더 기다려 보려고요. …걱정 끼쳐 죄송합니다. 네. 또 연락드릴게요, 스승님.’

친구는 없지만 스승은 있었다. 발 없는 소문이 천 리를 간다더니 사실이었나 보다. 누가 전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이미 다 알고 계셨다. 드물게 전화를 하실 정도로 걱정을 하셨나 보다. 휴대 전화 너머로 들리는 잔잔한 음성에 안쓰러움이 끼어 있었다. 그러나 시온은 기대지 않았다. 그저 버틸만하다는 식으로 자신의 마음과 스승의 걱정을 추슬렀다. 이런 판이니 누가 말려도, 무슨 힐난을 던져도 흔들리지 않을 게 뻔하지 않은가.

그는 묵묵히 매장을 열었다. 경아에게서 연락이 왔는지 혹은 소식이 닿은 지인이라도 없는지를 묻기 위해 기웃거리는 이웃들을 한결같은 모습으로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시온은 백경아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돌아오거나, 뭔가 문제나 사정이 있었다고 설명하는 전화라도 한 통 주기를 기다렸다. 왜, 믿어서? 겨우 일 년 반 동안 제게 호감이 있어 잘해줬다는 이에게 기대가 남아서?

단호히 말하건대, 그렇지 않았다. 이시온은 경아를 만나는 동안 그를 통해 반쯤 어떤 허상을 보고 있었다. 백경아를 보기만 해도 신기루처럼 따라붙는, 닮아있던 누군가를 쫓고 있을 뿐이었다. 인정해야만 할 때가 턱밑까지 차올랐건만, 그 순간에도 승복하지 않았을 뿐. 다행히 그럴 틈도 없었다. 누군가 방문해 준 덕분이었다.

‘이 사장, 식사는 했어?’

문에 달린 종을 첫 번째로 울린 건, 피해자 중에서도 가장 큰 손해를 봤다는 이발소의 최 씨였다. 매대 뒤로 등을 숙였던 시온이 상체를 일으켰다. 아직 낮인데도 바깥이 흐렸다. 눈이 오려나. 중년의 남성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큼, 목을 가다듬었다. 안부 인사 같은 물음에도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점심때가 지난지 한참이었는데 대뜸 식사했냐니. 꽤 뜬금없이 들렸으나 찔리는 바가 있었는지, 청년의 눈썹이 잠깐 아래로 쳐졌다.

‘…먹었습니다.’

‘먹긴 뭘 먹어. 딱 봐도 굶었구먼.’

못마땅 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혀를 찼지만, 최 사장의 어투엔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직후 가장 분을 참지 못하고 들이닥친 인물이었던 장본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이었다. 이시온은 일이 벌어진 직후에도, 지금도 엇비슷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누그러지고 말았나. 최 씨는 독백을 삼킨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불쑥 한쪽 팔을 앞으로 뻗었다. 진열장 위에 검은 비닐봉지가 놓였다. 최 사장이 들고 있던 것이었다.

젊은 사람이 밥도 안 먹고 말이야… 잔소리를 하면서도 손수 매듭까지 풀어 주었다. 냄새가 사라졌던 공간에 훅, 더운 김이 끼쳤다. 일부러 사 온 거 아니야. 김밥 집 사장이 챙겨주길래 억지로 들고 온 거라고. 투덜거림에 가까운 설명도 잊지 않았다. 스티로폼 용기에 담긴 위생 봉투 안이 우동으로 가득했다. 은박지로 쌓인 김밥도 한 줄 있었다.

‘감사합니다…’

남자가 시온에게 기어이 젓가락을 쥐여주자, 그마저도 머뭇거리며 받아들었다. 공손하게 받아잡는 손가락에 시선이 스쳤다. 생긴 건 오목조목 곱게도 생겨선, 손마디는 제법 알이 굵었다. 겨우 이십 대의 손이라기엔 일에 치인 흔적이 적나라해 보였다. 인사도 말로만 하지 않고, 꾸벅 허리까지 숙이니 고지식하게 예의 바른 청년이 아닐 수 없다 싶었다. …이러니 더 미워하질 못하지. 답답해서 안쓰러울 지경까지 왔나 보다. 최 씨는 이렇듯 이시온의 식사를 종종 챙겨주었다. 잘못을 한 사람과 연루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끼니도 굶고 행방을 찾아 헤맨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인사는 무슨. 별말 없는걸 보니 오늘도 연락은 없었겠고. 아니야, 됐어. 나는 오늘 이거만 전해주러 온 거야. 끼니 제대로 챙기라니까 말도 더럽게 안 듣지.’

최 씨에게는 고시를 준비하다 법이 바뀐 바람에 앞날의 갈피를 잡지 못한 아들이 있었다. 자식을 위해 꽤 오랫동안 부어왔던 적금을 해약해 그 여자의 회사에 맡겼다. 하도 주변에서 좋다기에, 이대로 자식새끼 허송세월 보내게 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조금 저렴하게 맡아준다 하니 밑져야 본전이란 심정이기도 했다.

백경아가 사라졌을 때, 처음엔 화가 나고 억울했다. 그래서 다짜고짜 죄 없는 청년의 멱살까지 잡았다. 네 애인 어디 갔느냐, 너도 공범이냐 소리도 치고 말이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정말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잠깐 당황한 듯 낯빛이 새파래지더니, 금전거래가 오갔다는 말에 마른 세수를 멈추지 못했다. 꿈에도 몰랐던 듯했다. 시온은 휘말린, 또 다른 피해자일 뿐이었다. 심지어 아들보다 더 어린 핏덩이였고 말이다. 청년은 누명을 입은 것에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혹시 경아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며 가게 문만 열고, 행방을 찾으려는 이들이 찾아오면 나름대로 알아본 것들을 고해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최 씨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나니,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나이를 헛먹은게지. 자조하기 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그저 주변 이웃이 잘 맡겼다 자랑하는 말에 배가 아파 성급하게 군 자신이 문제였던 거다. 주변이 불어넣은 바람에 휩쓸려 쉽게 믿어버리다니. 먹은 밥이 아까웠다. 결론적으론 부끄러워진 것이다.

비단 최 씨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애꿎은 청년의 옷자락을 잡고, 심하게는 뺨까지 때렸던 무리들을 시간이 지나가면서 점차 이성을 되찾았다. 찾아갈 때마다, 매번 자신이 지은 죄를 고하는 것처럼 어두운 낯빛으로 소식을 전하는 시온을 보며 마음을 돌린 것이다. 요즘, 그들은 최 씨에게 음식을 들려보냈다. 차마 직접 주지는 못하겠다는 변명을 붙이면서.

‘우동 불어. 자리 비워줄 테니 어서 먹어.’

‘…살펴 가세요.’

‘됐어. 자네 안색이나 잘 살펴.’

남자는 팔을 위로 들어 내저은 뒤 밖으로 나섰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미안하단 말이 목구멍을 넘지 못해 더 창피해진 탓이었다. 그래서 더 얼른 모습을 감추는 거다. 언젠가는 해야지. 애써 다짐한 뒤 돌아가던 중이었다. 시온의 가게와 이발소의 중간지점쯤이었을까. 못 보던 인영이 옆을 스쳤다. 최 사장은 낯선 이의 존재감에 놀라 발걸음마저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찰나인데도 왠지 인상이 강해 시선을 뺏긴 탓이었다.

언뜻 봐도 키가 크고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어 눈에 띄지 않기도 힘들어 보였다. …이 사장보다도 큰 거 아니야? 중년의 남성은 한참 동안 그 인물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정면에서 똑바로 마주친 건 아니지만, 잘생기긴 했는데 어딘가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구석이 있는 외모임엔 확실했다.

거구의 사내는 거칠 것 없이, 메종 단 루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두 가게의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는 건 아니었기에, 딸랑하는 종소리가 이곳까지 들릴 정도였다. 확실히 케이크 가게로 들어갔는데… 누굴까. 최 씨는 섣부른 궁금증을 털어내기라도 하듯,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었다. 만약 사기꾼 때문에 찾아온 사람이라면, 시온이 어련히 알아서 전해줄 터였다. 그제야 발이 떨어졌다. 재회가 이루어진 순간이었건만, 최 씨는 자세한 사정을 알 길이 없었다. 잘된 일이었다. 해후는 온전히 두 ‘형제’만의 것임으로 최 사장으로서는 알 필요도, 알아서도 안됐다.

*

이시온은 간신히 제정신을 붙들고 자리를 옮기자 청했다. 그래봤자 선택지는 2층뿐이었다. 시온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권태환의 날선 턱 선이 비틀렸다. 뭔가 마음에 차지 않으면 으레 하던 행동이었다. 변함없는 표현 방식이기도 했다. 시온이 거주하며 ‘집’이라고 부르는 공간은, 태환이 보기엔 집이라기보단 닭장에 가까웠다. 매장도 썩 눈에 차지 않다 싶더니, 사는 것마저 이렇게 좁다란 건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시온은 그걸 뻔히 알면서도 굳이 반박하거나 설명하지 않았다. 아무리 낙후된 동네라고 해도 서울은 서울이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 작게나마 거실 하나, 이어진 부엌 하나, 욕조는 없어도 성인 남성 한 명이 몸을 씻어내기에 어렵지 않은 화장실 겸 욕실이 하나, 몸을 구기면 그런대로 누울만한 침대가 들어갈 방 한 칸이 있다는 건 제법 큰 자산이었다. 오래된 건물이긴 했으나 구실은 다하고 있으니 그걸로 됐다. 거기다 내부는 깔끔하고 청결했다. 모든 살림살이가 반듯하게 제 자리를 지켰다. 여기 사는 거주인이 얼마나 알뜰 살뜰한 사람인지 한눈에 보인다는 의미기도 했다. 예전처럼 ‘형’이 하나하나 챙겨줘야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반듯한 살림살이를 보면서도, 불만스럽기는 마찬가지였나 보다. 태환은 도통 앉지를 않았다. 벽에 등을 댄 채 단단하게 팔짱을 꾀고 서서 시온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왜 저러는 걸까. 이시온은 부러 그쪽으로 눈을 두지 않았다. 무슨 의중인지 떠본다 한들 소용없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입을 열지 않은 채, 마찰음이 들리지 않도록 식탁 의자를 빼고 앉았다.

이 식탁은 선생님이 두고 간 가구 중 하나였다. 몇 년이 되었는지 따로 물어본 적은 없었으나 원목으로 이루어진 다리의 색이 굉장히 진한 걸 보고 오래되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오래된 식탁 의자에 몸을 기대는 권태환. 너무 안 어울려서 쉬이 상상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서로가 마주 볼 수 있으려면 식탁 말고 다른 대안이 없었다. 시온이 물끄러미 시선을 던졌다. 똑바로 마주 보지도 못하면서 큰 용기를 낸 셈이었다.

태환이 양 어깨를 으쓱하고 움직였다. 곧이어 식탁을 향해 걸어왔다. 걸음걸이도 변하지 않았구나. 시온은 말릴 새도 없이, 그가 변하지 않았음을 재차 더듬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싶기도 했다. 그는 항시 넘치는 삶을 살았고, 자신이 있든 말든 그래왔을 터였다. 뭐, 아주 같을 수만은 없었다. 예전의 그라면 이 조악한 가구에 몸을 맡길 리가 없었을 텐데, 태환은 결국 이시온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왜 이런 비루한 곳에 살지?”

“백경아 씨의 행방은, 저도 모릅니다.”

동시에 꺼낸 말은 완벽한 동문서답이었다. 시온은 순간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저도 모르게 눈만 끔뻑이고 있으려니, 권태환이 다시 되물었다. 딱 한 음절로만. 왜. 오랜만에 저를 찾아온 이가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이유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그에겐 여기 있는 가재도구부터 집의 평수까지 전부 협소하기 짝이 없을 테니까. 다만 의구심이 들기는 했다. 10년 전이라면 억지로라도 저를 끌고 나갔으면 모를까, 저 자리에 알아서 앉아주진 않았을 거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시온은 의문을 뒤로 하면서도 결국, 먼저 대답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저는 불편하지 않으니까요. 이 정도면 충분하고요.”

두 사람을 가로지르고 있는 식탁 위는 아무것도 없이 서늘하기만 했다. 손님이 왔는데도 커피는 고사하고 물 한 잔도 놓이지 않았다. 대접할 게 마땅치 않다고 양해를 구하는 이도, 괜찮다고 하는 이도 없었다. 둘 다 처음부터 그런 걸 주고받을 생각이 없었기도 했다. 그보단 다른게 빈정을 상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태환의 턱 근육이, 아까와는 반대쪽으로 뒤틀렸다. 허. 숨소리가 정적 사이로 흩어졌다.

“고집스레 존대하긴.”

10년 전, ‘권시온’은 처음 만났을 때를 제외하면 단 한 번도 형에게 존댓말을 한 적이 없었다. 열두 살이나 터울이 지니 높임말을 쓸 법도 했지만, 태환이 반말을 더 기꺼워했기 때문에 늘 말을 짧게 유지해왔던 탓이다. 변했나 변하지 않았다 헷갈리던 참이었는데, 역시 한결같은 게 맞았다. 사라진 아내를 찾으러 왔으면서, 자신이 반말로 대꾸하던 존댓말로 대꾸하던…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권시온이 알고, 알고 싶고, 알기 위해 노력했던 권태환은 원래부터 그런 성격이었다. 모든 포커스가 자기 자신을 향해 있었다. 제가 궁금한 게 먼저고, 신경 쓰이는 부분을 짚어내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이시온’을 찾아오지 않은 세월이 10년이 흘렀던 말던 이렇게 불현듯 찾아와 아무렇지 않게 굴 수 있는 인물. 그것이 바로 권태환이었다.

거기까지는 알겠는데 다음 구절부터가 석연치 않았다. 저번에도 언급했듯이 그가 자신을 찾고자 하자면 진작 찾았을 게 분명하다는 부분 말이다. 그게 시온의 행방이든, 경아의 행방이든. 이시온은 그걸 굳이 말로 읊어주면서도, 권태환도 알고서 여기 찾아왔으리란 걸 알았다. 그럼, 어째서? 예쁘다 귀엽다 얼러줬더니, 작별 인사도 없이 사라진 양 동생이 대뜸 괘씸해지기라도 한 걸까?

“알아.”

뭘 알아요. 되물으려다 말았다. 뒤늦게 깨달은 덕분이다. 시온이 백경아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거다. 그래도 수수께끼는 여전히 미궁 속이었다. 그럼 왜 온 걸까. 속마음의 행방이 묘연한 채로, 태환은 말없이 팔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천장을 향해 있었다. 누가 봐도 무언가 얹어놓으라는 무언의 표현이었다. …이건 또 무슨 짓이고. 시온의 미간이 살짝 오므라들었다. 복잡한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속눈썹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빽빽하게 팔랑거리고 있었다. 상대가 여전하다는 감상을 가진 건, 이시온뿐만이 아니었다. 태환은 나부끼는 속눈썹을 보며 흡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흘리고 간 거, 있을 텐데.”

이시온의 눈동자가 물 위를 한 바퀴, 느리게 배회하듯이 굴러갔다. 뭘 말하는지 감을 잡지 못하는 심정을 감추지 못한 것이다. 권태환의 입매에서 다시 한번 웃음이 배어 나왔다. 안면이 풀어질 정도는 아니고, 새어 나오는 데에서 그쳤지만. 여전히 고압적인 낯은 지배자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평소와는 결이 달랐다. 그의 맞붙어있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아, 이 말부터 해야 했는데.”

눈꼬리가 솟은 눈매가 기분 좋게 휘었다. 권태환은 손은 여전히 위로 향해 내민 채로 활짝 웃었다. 그런다고 인상이 확 변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시원시원하게 치아를, 개중에서도 가장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으니 더욱더 포식자 같아 보일 뿐이었다.

“보고 싶었다.”

말이 끝맺어지자마자 맞은편에 있던 청년의 얼굴이 와락 구겨질 뻔했다.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건, 자의로 멈출 수 없는 부분이라 그대로 내보이고 말았지만 말이다. 이시온은 깨닫지 못했고 깨닫지 않으려 했던 진실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권태환이 변한 바 없이 여전한 쪽이라면, 자신은 변하려고 발악했으나 변화하지 못한 채 멈춰버린 쪽이었다. 외면된 사실이 수면에 떠올라 요동치고 있었다. 너는 저 한마디가 사무치게 듣고 싶었던 거잖아. 열아홉의 ‘권시온’의 허상이 속삭인다.

물살이 통째로 몸을 집어삼키는 것만큼이나, 상당히 비참하고 무력한 깨달음이었다. 하지만 이시온은 이번에도 달아나길 택했다. 하얗고 고른 치아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도피하듯, 묻어두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백경아가 자취를 완전히 감추기 이 주일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

사귀는 듯 사귀지 않는, 딱히 정의 내리기가 기꺼운 관계는 아니었다. 다만 둘의 관계는 암묵적 합의에 지나지 않았기에, 경아는 더 제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곤 했다. 그는 어느샌가부터 셔터가 내려진 뒤의 메종 단 루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 동네의 폐쇄성에 대해 이미 설명한 바가 있듯이, 일대 주변에는 그 흔한 체인 카페가 한곳도 없었다. 기껏 닫았는데 다시 문을 열수도 없는 노릇이니, 백경아가 늦게 찾아온 날엔 자연스레 상가 주택의 2층에 올라가게 되었다. 집주인인 이시온이 멀찍이 앞서 계단을 오르면, 한참 뒤에 경아가 뒤따르는 식으로.

상투적인 변명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들 사이엔 정말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뭔가 심적인 서사쯤이야 오갔을지 모르나 육체적인 부분에서만큼은, 둘 다 결단코 결백한 입장이었다. 29세의 남성과 41세의 성인 여성이 한쪽의 개인적인 공간을 공유하면서 한 거라곤 대화 몇 마디, 둘 중 하나가 사 왔거나 직접 조리한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 정도였다. 아, 한 가지 더 있었다. 담백하게 ‘잠자리’, 그러니까 수면을 취할 장소 자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먼저 물은 건 경아였다. 오늘은 자고 가도 될까? 어느새 반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익숙해져 버린 상태였다. 시온은 평온했다. 그러세요. 그러고는 그런 날이 계속되자 열쇠를 건네주었다. 집집마다 도어락이 필수인 21세기에 웬 수동식 열쇠인가 싶지만, 다 사정이 있었다. 이시온은 2층에 남겨진 스승의 흔적을 많이 지워내지 않았다. 금전적인 이유가 있었기도 했지만, 큰 필요성을 못 느낀 탓도 있었다. 그래서 현관문도 따로 손을 대지 않았다. 경아 또한 그에 대해 깊은 의문이 들진 않은 모양이었다. 받아서 잘 챙기고 다녔으니까.

밋밋했던 고리에, 브랜드 이름은 몰라도 꽤나 고급스러운 키링까지 달아놓은 모습이 시온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당연히 같은 공간에 몸을 눕히지도 않았다. 제가 거실에서 잘게요. 시온은 기꺼이 자신에 몸에 비하면 조금 자격 미달인 침대를 손님에게 내어주었다. 집주인이 소파나 거실 바닥이면 충분하다며 방을 양보하자, 경아도 거절하지 않았다. 매너 좋네. 농담인지 모를 한 마디만 꺼냈을 뿐이었다. 사실 별거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상대가 베푸는 호의를 갚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시온은 작게나마 은혜를 갚았다.

전날 밤도 그런 날 중 하루였다. 손님이 집주인과 함께 아침을 맞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들쭉날쭉, 마음 가는 대로 구는 듯 보였으나 상관은 없었다. 시온도 그가 바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딱히 마음 쓰지 않은 탓이다.

‘이건…’

백경아는 보통 메모 따위를 남겨두지 않았다. 침대가 비어있고, 굽이 뾰족한 구두가 사라졌다는 게 곧 작별 인사였다. 시온도 이르게 일어나는 편이니, 아마도 새벽같이 나갔겠거니 싶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현관문만큼이나 오래된 원목 마루 위에 어떤 물건 하나가 나동그라져 있었다. 청년이 무릎을 굽히고 상체를 숙였다. 열쇠가 그대로 달려있는 열쇠고리였다. 이시온이 경아에게 소유권을 넘겼던 것이니, 분실물이라고 칭해도 좋겠다.

‘…떨어트리셨나.’

처음이었다. 경아는 겉모습이나 업무에 있어서나, 어떻게 보면 편집증이 있나 의심이 될 만큼 깔끔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뭘 흘리고 갔다니, 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놀라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요 근래 평소에 비해 피곤해 보였기도 한 데다 그도 인간이니 응당 할 수 있는 실수이겠거니, 쉽게 받아들이는 편이 편했다. 실제로 이시온이 알게 된 경아의 특징과 행동, 성격은 예상대로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특히 완벽주의자이되 남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히 그랬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면. 당연히 별개의 인물이 완벽히 같을 순 없었다. 희미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서 백경아를 편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건 부정하면서도.

[열쇠 두고 갔어요. 다음에 오면 찾아 가세요.]

어쨌든 잊고 간 물건이 있음을 알리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둘은 전화보단 문자를 선호했다. 시온은 메시지 한 통을 보낸 뒤, 열쇠고리를 그대로 신발장 서랍에 넣었다. 답장은 바로 오지 않았다. 원래도 그랬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실은 조급해진 탓이었다. 마치 보이지도 않는 상어를 피해 열심히 헤엄치는 어느 공포영화의 주인공처럼, 이시온은 14일이 지나고 나서도 답장을 받지 못할 미래를 알지 못했다.

*

짧은 회상이 끝을 맺었다. 두고 간 것. 설마 열쇠고리를 말하는 걸까. 그렇다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분명히 백경아의 흔적이란 관점에서 보면 열쇠를 말하는 게 틀림없는데, 원래부턴 시온의 소유이지 않은가. 태환은 모든 행위에 오차가 없어야 하는 성미를 가졌으니 소유권 여부를 파악한 뒤일 테다. 그러다 어렵지 않게, 하지만 불현듯 깨달았다.

거기에 달린 열쇠고리. 그건 자신이 준 게 아니었다. 경아의 손으로 직접 달았다. 작달막한 금속이 부산스럽지 않게 달려있으며, 옆엔 네모나게 재단 된 가죽 패치가 쌍을 이루는 그것. 청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곧바로 시선이 마주 닿았다. 맞은편에 있는 이, 권태환의 손 위에 놓여야 될 것이 분명해졌다. 시온은 머릿속이 망설임과 혼란함으로 뒤섞였으나 결국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소란스럽지 않은 발걸음이 곧장 현관 쪽으로 향했다.

하얀 페인트칠이 된 신발장에 딸린 서랍이 열렸다. 키링이 짤랑, 하는 금속음을 내며 잡혀 나왔다. 줄곧 방치만 해뒀었다. 단순히 열쇠와 키링이어서가 아니라 아예 잊고 있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게 뭐라고, 저 사내를 10년 만에 제 앞으로 이끌었을까. 시온은 입술을 맞물린 채 건너편에 있는 태환을 바라보았다. 열쇠는 식탁 위에 놓였다. 손바닥이 아닌, 식탁 위. 그 와중에 살짝 앞으로 내밀어 두긴 했다. 정적 탓인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지만, 이 일련의 과정은 단 몇 초 만에 이루어 졌다. 이시온의 손이 열쇠에서 떨어지자마자, 그는 일방적으로 시선을 거둬들였다. 예전의 저였다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얌전히 가져다 바쳤으면 모를까. 되도 않는 반항심이 표출되고야 말았다.

당연하게도, 시온의 행위는 권태환에게 조금의 타격도 남기지 못했다. 그는 웃음이 헤픈 편이 아니었다. 사내의 주변 인물들이 모두 입을 모아 증언할 수 있을 정도였다. 웃어요? 그분이요? 다들 오뉴월에 눈이 온 단 소릴 들은 것처럼 굴어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시온’을 앞에 둔 권태환은 달랐다.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도, 늘 무덤덤하던 표정을 제 앞에서만 무너뜨리는 ‘내’ 권시온… 뭐, 성이 뭐가 되었든. 아무튼 오랜만에 ‘동생’이 제 눈앞에서 귀엽게 굴어주는 걸 보고 있자니 퍽 즐거운 덕분이기도 했다. 그는 배부른 맹수처럼 너그러워져 있었다. 반항은 무슨, 애교를 부른다 싶었다.

“보고 싶었다는 데에 대한 대답은, 끝까지 해주지 않으려고?”

굵고 긴 팔이 뒤로 뻗어졌다. 식탁 옆에 있는 다용도 테이블에 놓인 커터 칼을 잡기 위한 손길이었다. 태환은 눈썰미가 좋았고, 그새 이 집의 구조를 다 외운 모양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듯, 그는 바로 다음 할 일을 실행했다. 반대편 손으로 가죽 패치를 집어 올리더니, 칼로 사이를 갈랐다. 그러자 틈으로 작고 얇은 메모리 카드가 툭, 몸을 떨궜다. 시온의 도톰한 애교 살이 짧게 경련했다.

…의미 없이 달아둔 건 줄 알았는데. 대뜸 닮았느냐고 물었던 의미가 이런 건가 싶었다. 맞다. 참 닮은 부부기는 했다. 실수가 아니었던 거다. 백경아는 이런데 무심한 저를 알았기에 안심하고 물건을 숨겨둔 것이었다. 서류상으로 형제였던 이들의 눈동자가, 다시금 서로를 향했다. 태환의 팔꿈치 한쪽이 식탁 위에 내려앉았다. 그 손으로 뼈대가 선명한 턱 선의 자취를 감췄다. 남은 손이 메모리 카드를 집어 들었다. 이시온을 바라보는 걸 그만두지 않은 채로.

청년의 눈동자는 물결을 쏙 빼닮았다. 강이나 호수처럼 자연적인 경관과는 달랐다. 그렇다, 수영장을 닮아 있었다. 아무도 닿지 않았을 땐 인공적인 맑음을 유지하다가 누구 하나 뛰어들기만 하면 하염없이 흔들리고 마는, 하지만 거센 파도처럼 성을 내지 못하는 그런 물 말이다. 태환이 특히 좋아하는 시온의 특징이었다. 방금도 자신이 뛰어들어 흔들린 눈빛을 하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고집스레 입술을 물고 있었다. 그건 좀 변했나. 신기하게 그마저도 깜찍하게만 여겨졌다. 하긴, 권태환은 ‘시온’을 제외한 다른 생명체에게 이런 반응을 보여본 적이 없었다. 이런데 어찌 즐겁지 않을 수가 있을까.

“형에게 언질 정돈 주고 갔어야지.”

시온의 팔목을 감싸는 사내의 손끝은 차가웠다. 팔꿈치가 흠칫, 들렸다. 이시온은 어렸을 때부터 체온이 높은 편이었다.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한 계기가 보육원에서 하는 단체 활동 중 유일하게 선호하는 게 수영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는 왜 수영이 좋으냐는 원장의 물음에 몸이 시원해져서요, 라고 대답한 전적이 있을 정도였다. 태환이 슬쩍 잡은 청년의 손목이 따듯하다 못해 뜨거웠다. 시온과 대척점을 이루기라도 하듯, 태환의 살갗은 늘 서늘했다. 남들이 그를 일컬어 냉혈한이라고 하는 건 심정적 표현이었으나 우연찮게도, 의학적인 측면으로도 남들보다 낮은 체온을 가진 편이었다. 물론 그도 혈액이 돌고 폐를 움직이는 인간이었기에, 냉혈동물만큼은 아니더라도 평균에 비하자면 그렇다는 것이었다.

“나도 네가 이렇게 오래 숨을 줄은 몰랐지. 잠시 숨 돌리고 나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사내는 제 앞에 놓인 기회를 놓치지 않는 자였다. SD 카드를 재킷 안쪽에 넣어두곤, 바로 오른팔을 뻗어 청년의 살결에 손을 대고야 말았다. 10년 전만 해도, 항상 손 뻗으면 닿는 곳에 있으리라 확신했던 살결이 드디어 제 자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어디까지나 권태환에 입장에서만 서술하자면 말이다.

“찾는 거… 손에 넣었으니 이만 가세요.”

이시온의 눈동자는 검정색이 아니었다. 전등이든 햇빛이든, 근원이 중요하진 않았으나 빛이 가까이 감돌기만 한다면 누구든지 눈치챌 수 있도록 색소가 옅었다. 다갈색보다 조금 더 채도가 높은 빛깔이 흔들거렸다. 그가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사라져버린 색이 아쉬운지, 남자의 짙은 눈썹도 같이 들썩거렸다. 서로의 체온이 닿는 게 새삼스럽지 않던 때도 있었건만. 오래도록 떨어졌던 탓인지 감촉이 새삼 새로웠다. 그래도 닿았으니 되었다며 편안함을 느끼는 건, 오로지 태환만이 누리는 만족이었다. 손아귀에 잡힌 맥박이 떨리니 안쓰러운 척이라도 해줘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는 달래주지 않았다.

어느새 온기가 옮겨붙어 미지근해진 손바닥에 힘이 들어갔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돌려버린 고개를 다시금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권태환은 충분히 강압적으로 굴 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난폭하게 굴진 않았다. 반대로 모순적일 정도로 부드럽게, 그리고 정확하게 저를 향하게 할 뿐이었다.

“형이 기다려준 거잖아, 권시온. 네가 다시 연락할 때를.”

순간 큰소리를 낼 뻔했다. 그건 ‘그쪽’이할 말이 아니라는 원망을, 쉼 없이 뛰어대는 왼쪽 가슴께에서 끄집어내 뱉어내려던 걸 간신히 삼켰다는 뜻이다. 눈동자에 물기가 돌았다. 시온은 울지 않았다. 참아냈다. 볼썽사납게 굴고 싶지 않았다. 열아홉의 ‘권시온’이었다면 금세 서러움을 토로하며 저 좀 봐달라고 했을지 모르지만, 스물아홉의 이시온은 그러기가 싫었다. 아니, 그는 알았다. 몇 년만 더 일찍 찾아왔다면, 내가 더 보고 싶었노라, 끈질기게 회피해오던 고해를 바쳤을 거다. 그런 제 자신을 알기 때문에 겁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태환은 시온의 속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미소를 거둘 맘이 없었다. 아무렴 어떤가. 그는 엄지에 닿는 동그란 손목뼈를 문지르며 ‘시온’은 절대 모를, 동생의 공백기 동안 제 심경이 어떠했는가를 곱씹었다.

*

‘이럴 거면 아예 거실에 두는 게 낫지 않나?’

‘내려놔.’

작은 액자를 들고 있던 손끝이 흔들렸다. 가늘게 뜬 눈이 건너편에 있는 상대를 바라본다. 마주한 시선이 칼날과도 같았다. 자칫하면 목도 치겠네. 어투부터 어조까지 전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정말 목덜미가 서늘한 거 같기도 하고. 그것이 백경아의 감상이었다. 신혼집이라고 불리는 고가의 아파트도 늘 차가운 냄새가 났다. 심지어 ‘부부’가 공유하는 공간이라기엔… 두 사람은 방금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 참이었다. 이곳의 소유주인 신혼부부는 각자 방을 따로 소유하고 있었다. 둘 사이가 철저한 계약관계라는 걸 숨길 생각조차 없다는 듯이, 구실 삼아 만들어둔 안방도 없이 철저한 개인 공간을 확보한 셈이다. 하지만 권태환도, 백경아도 이런 생활에 대한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더 떨어지지 못해 안달이라면 모를까.

7일 만의 만남이 이뤄진 계기는 사소했다. 경아는 가벼운 불면증을 앓은지 오래되었고 마침 갈증이 일어 이 새벽에 방 밖을 나섰다. 그랬더니 태환이 홀로 거실에 나와있는 걸 맞닥뜨린 참이었다. 엄연히 말하면 두 사람의 공동공간인 이곳을, 사내는 온전한 자신의 소유처럼 사용했다. 명의 같은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저를 투명인간 취급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러시겠지. 그 꼴이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 심기를 거슬렀다가 더 귀찮은 일이 벌어질까 내버려 두는 것뿐이었다. 어쨌든, 이 계약에서 을은 자신이었으니.

바깥에서의 백경아는 독립적이며, 동시에 독선적인 사업가로 평가받았다. 남들이 자신에 대해 뭐라고 떠들든 상관없었으나 자신을 보고 차갑네, 정이 없네 등의 말을 뱉어내는 걸 듣고 있자면 퍽 우습기는 했다. 저 남자에게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텐데. 상대와 비교함으로써 도덕적인 안도감을 가지거나 자기 정당화를 염두에 둔 분석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사실에 기반한 것이지. 경아의 눈가가 위로 솟았다가 내려왔다. 새벽 3시 45분. 아무리 잠들지 않는 도시라는 별명을 가진 서울이라고 한들, 모두가 자리를 비워 야경이라고 할 만한 광경은 사라진지 오래인 시각이었다. 태환은 고층에서 바라볼 수 있는 풍경은 관심에도 없으면서, 드넓은 거실 한복판을 온전히 차지하고 있었다. 대신 두 손을 들어 어깨를 아래위로 으쓱 움직여 항복하는 시늉은 해주었다.

그들의 눈길이 동시에, 각각 액자에 닿았다. 태환은 다행히 넘어갈 줄 셈인지 곧장 잠잠해졌다. 사람 하나 찌를 듯한 눈을 할 때는 언제고, 그 안에 담긴 사진을 보는 그의 시선은 제법 진중하면서도 사색이 담겨있었다. 사색하는 권태환이라니. 지나가던 개도 떨 일이었다. 거기에 담긴 화상은 단순했다. 어쨌든 나이를 먹는다는 건, 젊고 어릴 때도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 안의 태환은 현재보다 앳되었다. 그 누구를 옆에 둔다 한들, 저런 얼굴을 보여주는 법이 없을 게 분명한 표정을 한 채 멈춰 있었다. 그 옆 바싹 붙어 있는 건 훨씬 어린 소년이었다. 키가 훌쩍 자라있긴 했으나 딱 봐도 아이로 보였다. 입고 있는 교복이 어색해 보였다. 그래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화려한 꽃다발을 든 채 수줍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곁눈질로 봐도 태환의 흡족함과 포만감이 여실히 태가 났다. 어린 소년을 옆에 둔 채 보일 감정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명백한 호감이긴 했다. 그를 아는 사람이 보면 누구나 놀랄만치, 확실한 애정이었다. 배경으로 어림잡아 유추를 해보자면, 뒤편으로 보이는 곳은 태환이 다닌 모교였다. 아마도 입학식을 기념하는 사진 같았다. 이럴 거면 아예 거실에 둬라. 괜한 지적이 아니었다. 태환은 이렇게 종종 새벽에 거실로 나와 술을 마시든, 입에 대지도 않든 이 작은 액자를 뚫어질 듯 주시하고 있곤 했다. 어울리지 않게 청승은. 목구멍을 넘지 못하는 문장이 여럿 생겼다. 경아가 오른팔을 든 뒤 자신의 뒷 머리카락을 거꾸로 쓸어올렸다.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분명 난방이 작동할 텐데도, 살짝 등에 닭살이 돋은 것만 같았다.

동갑내기인 그들이 혼인 신고서를 올린 건 서른일곱 때의 일이었다. 세간에 비해 아주 늦된 결혼이었다. 점점 결혼 적령기라고 부르는 나이가 늦춰지는, 현대의 기준으로 놓고 봐도 빠른 편이 아닌 건 확실했다. 특히나, 권태환은 비범한 배경을 가지고 있으니 더욱더 그랬다. 주변 노인네 들이야 다 아부에 도가 튼 사람들이었다. 요새 세상이 어디 예전과 같나요. 약간 늦는다고 해서 흠은 아니지요. 가식에 찬 담론이 오가긴 하나 어디까지나 겉으로 그런 척만 하는 거였다. 웬만한 재벌이라고 하면 그러거나 말거나 다 늦어도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안 가 큰일이라도 나는 듯 식을 올렸다.

JL 그룹의 장손은 오죽하겠는가. 권 씨 가문이 어떤 기업을 이루고 있는지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한 구절이면 되니까. 현대인 중 그곳에서 나온 물품을 소비하지 않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이 땅덩어리에 한해서만큼은.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범위를 점진적으로 넓혀가는 중이라 그런 정의조차 곧 옛말이 될 게 확실한 시점이니, 이 외의 수식은 입 아프기만 할 뿐이었다.

모든 선 자리를 강경하게 거절하던 그가 별안간 결혼을 결심한 건 거부할 수 없는, 인력 같은 사유가 있었다. 그의 조부가 내건 조건 때문이었다. 권시온이 이시온으로 되돌아간 뒤, 그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였다. 조부인 권 회장은 욕심이 많은 이었으나 건강 악화로 인해 필연적으로 왕좌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그 덕분에 이득을 본 건 당연히 태환의 부친, 권재성이었다. 부사장 직함을 달고 있던 그는 순조롭게 꼭대기에 제 몸을 붙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상무 이사, 그다음엔 전무. 일반 사원에 비하면 독보적으로 파격적이지 않을 수 없으나 나름의 절차를 밟은 외아들의 다음 직책은 부사장이었다. 그리고 너무 젊은 후계자라는 딱지가 떨어지고 나이가 차면 자연스럽게 부사장에 오를 것이었다. 재벌 집 외아들이라고 해서 다 기업을 물려받는 건 아니리라. 그런 추측이 아예 틀린 건 아니었다. 권태환이 예외일 뿐이지. 그는 저보다 늙고 원숙한 기업인들을 발아래에 둘 능력을 이미 여러 번 증명했다. 제 아비가 위협을 느낄 정도로.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명예 회장이라는 명패만큼은 포기하지 못한 조부는 그때까지도 권위를 손에 놓지 않았다. 이빨 빠진 호랑이도 결국은 맹수라는 듯, 그는 여전한 권세를 제 아들과 손자에게 휘두르기를 좋아했다. 곧 부사장 명패 놓아야지. 거기까지 오르기 전에, 너도 가정을 이뤄야 하지 않겠냐. 늙은 맹수가 개소리를 했다. 서른넷이던 태환은 그 말에 대놓고 비웃음을 띄우고 말았다.

뭐가 되었든,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건 죄다 눈앞에서 치우는 걸 겁내지 않는 그라도 패륜을 저지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제 할아비를 끌어내린 손자라니 남들에게 나를 물어뜯어달라 청하는 것밖에는 되질 않았으니까. 그게 다였다. 순순히 들어주진 않았다. 조건이 따라붙었다. 적당히 고를 테니, 제가 원하는 이와 하겠다는 통보에 가까운 선언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조부는 그런 태환의 행동을 배포라고 여긴 듯했다.

개중 태환의 비서진 모두가 달려든 끝에 선택된 게, 백경아였다. 그와 태환은 이전부터 안면이 있었다. 대학 시절, 과는 달랐으나 공통의 지인이 있었기에 마주친 일이 몇 차례 있었던 덕이다. 백경아가 유능한 심복들의 엄격한 심사에 저도 모르는 새 합격한 데에는 아래와 같은 사유가 있었다. 친정을 견제할 필요가 없다는 게 큰 점수를 딴 모양이었다. 백경아는 본래 어머니와 단둘이서 살았다. 어떤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아버지가 누군지도 몰랐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모친이 사망하지만 않았어도 평생 모르고 살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외가는 빈곤했고 혼자 남은 어린애를 맡아 키우고 싶지 않았다. 여기까진 흔한 통속 소설이었는데, 그다음부터는 삼류 드라마였다. 장례식장에 검은 세단이 섰고, 처음 보는 이가 부친의 존재를 말해줬다. 아버지가 호텔, 리조트 산업으로 유명한 HW의 첫째 아들이고, 적어도 제가 낳은 씨니 이제라도 책임을 지겠다고 했단다. 그걸 본인도 아니고 대리인을 보내어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어린 경아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당장 잘 곳과 입을 것, 먹을 것이 필요했다. 원망? 그런 건 살길이 막막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떠밀리듯 몸을 맡기게 된 저택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나중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너무도 어린 나이에 아무것도 몰랐던 친모는 친부의 결혼 사실을 모른 채 자신을 뱃속에 품었다고 했다. 그리고 친부에게는 법적인 부인뿐만 아니라, 호적에 버젓이 올라가 있는 자식들이 있었다. 아는 어릴 때에도 현실적이었으며 나름대로 가족이란 이름의 무리에 섞이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정처와 이복형제자매들, 어지간히 귀찮았는지 제게 신경 한 번 쓰지 않고 방치하는 친부로부터 능력적으로라도 인정받고 싶었다. HW의 계열사 호텔에서 밑바닥부터 경력을 쌓고 팀장까지 올랐다. 그뿐이었다. 모든 공을 한 살 어린 남동생에게 뺏긴 채 방황하고 좌절했다. 고꾸라지진 않았다. 꼭 되갚아 주겠다는 의지만은 굳건했다. 속된 말로, 그들 모두에게 엿을 먹일 참이었다. 어떻게든 말이다.

어쩜 이렇게 딱 들어맞는 환경의 상대가 있을까. 비서들은 입을 모았다. 여벌의 후보도 있었다. 정리된 서류를 본 태환은 다른 건 보지도 않은 채 백경아를 지목했다. 부하직원들은 그가 단칼에 결정하는 걸 보고 뒷사정이 궁금했으나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어쨌든 줄 게 있고, 받을 게 있으니 거래 상대로는 딱 맞춘 정장같이 알맞은 이라며, 상사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데 충실하기로 했다.

‘어디 사는지 안다며.’

다시 돌아와서, 경아는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앉으라고 권할 리가 없었으니 알아서 앉아줄 마음도 들지 않았다. 태환의 고개가 경아의 쪽으로 돌려지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이번엔 제법 웃기기라도 했다는 듯 낮은 숨소리와 함께 입꼬리 한쪽을 끌어올렸을 뿐이었다. 입이 깃털처럼 가벼운 놈이 있었나 보군. 속으로 가늠만 할 뿐이었다. 그렇다기보단 백경아가 잘 구슬려놓았겠지. 언변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였다. 태환은 밀고한 자가 누군지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곧 알게 될 일이고, 그가 누가 됐든 제 자리를 건사하지 못할 터였다. 면죄부를 내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정식으로 계약서를 작성하기 바로 직전, 그가 물었었다. 왜 전제가 이혼일까? 의문문이되 의문문은 아닌 어미로 끝맺고는 저를 똑바로 바라보기도 했다. 태환은 무심히 답을 던졌다. 섭섭해할 테니까. 거기서 끝이었다. 누가 서운해하느냐고 묻지 않은 경아나, 뒷말을 덧붙이지 않는 태환이나 쇼윈도 부부로서는 최적의 짝이었다. 찝찝하지 않은 건 또 아니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어울리지 않게 감상적인 해답이었으니까. 그러나 깊이 알고 싶진 않았다. 괜히 더 귀찮아질 것 같았으니까.

액자 속에 박제된 그대로임에도 불구하고, 권태환에게 버려지지 않는 소년. 아마 지금은 청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언론 안팎으로 꽤 떠들어대던 때가 있었지. 경아가 속으로 뇌까렸다. JL에서 유소년 수영선수들을 후원하다 그중에 하나를 입양까지 했다던, 그 누가 봐도 만들어진 미담을. 태환이 관심 없이, 선을 긋고 대했을 거라 속단했건만. 제 발을 딛고 있는 게 하늘인지, 땅인지 헷갈릴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천하의 권태환도 뭔가에 애정을 쏟긴 하는구나. 그게 온전한지 비정상적인지까지는 모를 일이었다.

‘소개라도 좀 시켜줘. 당신이 그때 그랬잖아. 우리가 서로 닮아서 날 택했다고.’

태환이 예비책을 보지도 않고 치운 데에는 적잖이 이해되지 않을 믿음이 있었다. 그리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으나 이따금 동족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면서도 겉으로 드러낸 바가 없는 둘이었기에, 경아는 걸고넘어지지 않았다.

‘형과 닮은 형수라니, 반가워할지도 모르잖아?’

잔과 대리석이 스쳐 지나가자, 이 큰 공간을 그 음색 하나로 메꿀 수 있었다. 내려놓았던 크리스털 세공품이 태환의 손아귀에 잡힌 채 끌려 올라갔다. 그새 내부를 채웠던 옅은 갈색의 액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단숨에 들이킨 탓이다. 바닥을 보인 잔은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테이블 위에 나동그라졌다. 장신의 사내가 일어나 경아의 옆을 스쳤다. 그 또한 결코 작은 키가 아니었다. 제 나이대 여성의 평균 신장을 훨씬 웃도는 데에도 태환의 턱 선은 살짝 올려다봐야 보이곤 했다. 입술 사이로 선고가 흘러나왔다.

‘그래봤자 모조품이야, 걔한테는.’

확신을 넘어 다른 상황은 없다고 단언하는 어투가 인상 깊어, 불쾌할 틈조차 없었다.

*

“백경아가 고의로 도망친 건 아니야.”

너와는 다르게 말이지. 태환이 실제로 문장을 뱉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시온은 환청인지, 현실인지 모를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애써 입술을 깨물고 모른 척했지만. 어쨌든, 태환의 발언은 굳이 경아의 변명을 해주거나 변호를 해주려는 의도는 아니어 보였다. 잘 정리된 보고서와도 같은 사정들이 열거되었다. 경아가 가진 집안 환경, 그런 것들이 뒷받침되었기에 협력 관계로서 결혼했다는 것과 시온의 주변 인물들의 일을 마무리하지 못한 건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중대한 사안 때문이었다는 것.

“…그 과정에서 나 몰래 너를 만나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크고 작게, 분탕질도 치고 갔고. 이 모든 게 열쇠고리 안에서 나온 메모리 카드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했다. 태환은 기밀에 붙여야 할 법한 상세사항을 이야기할 때, 교묘하게 뭉뚱그렸다. 검은 칠이 되어 이가 빠진 조사서처럼. 그래도 대략의 큰 줄기는 다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시온은 그 모든 걸 따질만한 정신머리가 없었다. 서서히 달아오르는 눈 주위를 시작으로 매끄럽던 턱 선이 호두 알을 만들고, 조약돌 같은 손등뼈는 굵은 핏줄과 함께 바깥으로 내달렸다. 이토록 사정없이 무너져 본 일은 처음이었다.

어린 권시온이 사랑했고, 성인이 되어버린 이시온이 지독하다고 여기는 부분은 다음과 같았다. 맞은편의 상대가 일어나 자리를 옮겼다. 제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권태환이 깊게 팬 볼우물을 감추지도 않은 채 몸을 붙였다. 있으나 마나 한 거리감을 또다시 시온에게 자각시키는 것만 같았다.

“그 여자는 돌아와. 이걸 찾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내게 저지른 잘못을 용서할지 말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랑하던 이마에 닿던 감촉과 달라진 바가 없었다. 태환의 것은 여전히 탄탄했고 인상을 쓰면 느껴지는, 돌출된 부분이 서로 잘 맞물렸다. 코끝도 마찬가지였다. 스리슬쩍 각도를 비틀면 닿을듯한 윗입술마저도, 다른 점이 없었다. 그의 음역은 낮다. 발음이 흐려지지 않을 정도로, 딱 알맞게 낮았다. 억양은 세련되고 차갑다가도 된 발음을 뱉을 때면 거세지는 면이 있고 울림통은 컸다. 말끝이 화자를 닮아 날카로웠다.

“아까도 말했듯이, 난 여전히 약속을 지킬 거라는 거, 잊지 마. 그리고….”

귓가에 바로 꽂힐 만큼 가까이서 타고 남은 연기가 반고리관을 채우는 듯한 음성이었다. 지금에라도 밀어내야만 했다. 짧게 깎은 손톱이 손바닥에 박히고 있는데도 아픈 줄을 몰랐다. 고개를 내려 숨겨봤자, 태환은 알고 있었다.

“네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나는 꽤 오래 고민해야만 했어.”

들켰다는 걸 알면서도 고집스레, 시온은 얼굴을 숨겼다. 떨어진 이마가 미적지근했다. 불쌍한 의자만이 중심을 잃은 채 반 바퀴를 돌았다. 뒤로 밀려난 가구는 동떨어진 섬처럼 식탁에서 멀어졌다. 이마와 이마가 떨어지자마자, 청년이 된 소년은 재빠르게 뒤로 물러나기를 택했다. 자신은 아직 다 자라지 않았다고, 아직도 품이 필요하다는 듯 제 키까지 속이려던 시절이 무상했다. 여전히 반 뼘 정도의 차이가 났으나 이전보단 훨씬 눈높이가 대등했으니. 그걸 계산하고 행동한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수월하게 도망칠 만한 힘이 생겼다. 그래봤자 육체적인 면만 그런 것이었지만. 권태환은 자연스레 떨어져 나간 시온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잠시뿐이었지만. 궤가 달라진 팔 안쪽 근육을 따라, 겉을 싸고 있던 원단도 과하게 비틀어졌다.

“처음엔 얼마 못 가고 다시 돌아오겠지 싶었다가, 그 뒤엔 지금이라도 잡으러 가야겠다 싶다가…. 괘씸하다 싶기도 했고.”

많은 예외와 다정을 안겨주었건만. 10년 전, ‘권시온’이 떠난 일은 태환으로서도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시온은 그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면 혹시라도 절 찾을지도 모를까 봐 부탁 아닌 부탁도 남긴 바 있었다. 형은, 형이 모르게 해주세요. 양부에게 했던 마지막 청이었다. 사라진 저를 보고 화를 내고, 안달을 내주기를 바라는 건지 아닌 건지 판단도 못 하던 소년치곤 야무진 뒤처리였다. 양아버지였던 권재성은 그러마, 라는 확정적 답변을 건네주진 않았다. 시온이 먼저 그렇게 끝맺어주니 내심 안도한 기색이긴 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그 뒤론, 알다시피 10년이 흐른다.

네 사연 따위는 다 알고 있으니 일단 내 말 먼저 들어보라는 듯, 손아귀가 흰 손목 위에 다소곳이 쏟아져 있는 뼈를 가뒀다. 팽창한 근육으로 인해 주름 하나 없이 펴진 허벅지가 제 앞의 하체를 뒤로 밀자, 시온의 둔부 바로 아래가 식탁 위에 어설프게 걸터앉게 되었다. 균형이 틀어지며 한쪽 몸이 위로 솟으니, 이젠 아예 똑같은 신장이 된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덜거덕. 나무로 된 네 다리가 흔들리며 낸 소리가 아니었다. 맞나? 어쨌든, 이시온의 심장에서는 저 비슷한 낙하의 소음이 들렸다. 이런 날을 꿈꾸던 저 자신을 부정하며 성장을 억누르던 여러 날이, 해일처럼 수영장 위로 쏟아졌다. 수영장의 이름은 시온이고, 파도의 이름은… 그랬다. 태환이었다. 사내는 비유나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팔을 들었다. 이시온의 하관, 턱 깊숙한 부위에 닿은 손끝은 꽤 힘이 빠진 채였다.

“그때도 이런 눈을 하고 있었지. 들키면 어쩌나 하고 어쩔 줄 모르며 흔들리고 있었어.”

도주하려던 시도가 보기 좋게 가로막혔다. 피한다고 다 되는 일이 아니라는 교훈을 내려주겠다는 듯, 태환의 어조는 신중했다. 낮은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단어 하나, 음절 하나가 정확했다. 누가 대본을 써주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시온은 알아버렸다. 그가 지금 뱉은 문장 중에 허울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보고 싶었다는 고백이 불러온 충격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새 발의 피, 물에 몸을 담그고 나오면 남는 조금의 물기에 지나지 않았다. 설마. 시온의 턱이 서서히 아래로 떨어졌다.

“모른 척해서 미안하다.”

사내의 더없이 환한 웃음이 눈 위를 짙게 덮쳤다. 잡아먹히는 쪽은, 이시온이었다. 오래된 식탁 위에 짚어진 두 팔이 떨리고, 곧이어 전체가 진동했다. 아래턱엔 힘이 들어가고, 눈구멍 주변 피부가 팽팽해졌다.

“내 시온이, 형한테 욕정도 품을 줄 알았었는데. 그때는 내가 너무 어린 애로만 봤었어.”

맹수가 먹이를 삼키기 위해 아가리를 벌리는 모습을 본 적 있는가? 너무 한껏 벌려 웃는 입이 되어버리는, 역설적인 상태. 지금 권태환의 얼굴이 꼭 그랬다. 포식자 입장으로선 너무나도 즐거운 시간이니, 틀린 비유는 아니었다. 피식자에게 입장에서 그런 얼굴을 마주하는 건 공포일 거라 쉽게 추측하지만, 실은 약간 다른 양상이다. 제게 벌어진 상황을 인지조차 못 하고 집어삼켜지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이시온은 생생하게 느꼈다.

이때까지 스스로를 속여온 건 저 자신인 주제에, 뒤늦게 치밀어 오르던 분노와 원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뒤따르는 건 모골이 송연해지는 감각과 축축하게 젖어오는 뒷 목덜미뿐. 이번에 찾아온 감정은 어떤 것일까? 그가 알고 있었다니 놀랐을까, 아니면 배신감에 떠는 걸까? 목구멍 밖으로 나오는 음성은, 한 구절도 없었다.

“순진한, 내 권시온. 내가 정말 모를 줄 알았어?”

턱뼈에 닿았던 손길이 어느새, 등허리를 감쌌다. 얇은 니트 위를 누른 손끝이 정확히 척추뼈를 매만지고 있었다.

*

다들 뭣도 모르고, 막연하게 특별히 여기는 나이가 있다. 일단 스물. 19살에서 20세가 되어 법적인 성인이 되는 순간. 다른 한때는 서른. 30세라는 때는 좀 달랐다. 앞으로는 성숙한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족쇄가, 보이지만 않았지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권태환은 예외였다. 그는 대체로 ‘일반적인 상황’에서 언제나 논외인 편이었으니, 마땅한 결과였다. 그에게 있어서 서른의 의미는 딱 띠동갑 차이가 나는 양 동생이 성인이 되기 2년 남았구나, 하는 척도일 뿐이었다. 불면증을 앓는 건 아니었으나 남들보다 수면시간이 짧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만큼 활용할 수 있는 여가가 늘어나는 거라, 그로서는 오히려 이득이었다. 오늘은 그 사용 방법이 좀 달랐지만.

이 저택의 사용인들에게는 불문율이 있다. 새벽에는 2층을 쳐다보지도 말아라. 그런 경고가 암암리에 서로의 입과 귀를 타고 다녔다. 그런 소문의 발원지 겸 원인은 이 가문의 유일한 후계이자, 안주인보다도 더 까탈스럽고 고압적이기로도 유명한 도련님이었다. 잘린 지 꽤 된 일꾼 하나를 내보낸 건 주인 내외가 아니라 그 아들이었다는 뒷받침도 따라다녔다.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정말이라니까요. 도련님이 ‘걔’ 방에 들어가시는 걸 봤다고요. 야심한 밤에. 밥줄이 끊긴 이는 당시 주방에서 일하는, 3개월 된 새내기였다. 식자재를 다듬는 보조였는데 그날따라 작업이 길어져 늦게 퇴근했던 참이었다. 그러다 인기척이 들려 올려다본 난간 사이로 새벽 1시가 넘은 시각에, 태환이 시온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으며 왜 다 큰 남자애 방에 들어가시냐는 꺼림직한 의문을 나불댔단 죄목이었다. 덕분에 그 뒤로는 사용인들이 하나같이 암묵적으로 눈치를 챙기기 시작했다.

태환이 고용인을 해고한 이유는 자신을 오해해서가 아니었다. 이 저택에서 입을 함부로 나불거리면 그 말이 언제 밖으로 돌지 몰랐고, 그 뒤에 생기는 문제는 겪지 않아도 귀찮은 일거리를 만들어줄 게 뻔해서 사전에 방지했다. JL 그룹, 권 씨 집안, 권태환을 물어뜯어 보려는 승냥이 무리야 널리고 널렸으니까. 같잖게도. 도덕적으로 찔리는 구석이 있었나? 그런 거 없었다. 다들 아무것도 모르니 저런 골이 빈 듯한 발언을 지껄이는 거였다. 굳이 해명할 필요도 없지만. 이건 오히려 시온이 청했던 일이었다. …형, 나 잘 자나 보러 와 주면 안 돼? 하고 말이다. 머리가 큰 지금이 아니고, 꽤 예전에 했던 부탁을 멋대로 이어오고 있는 거긴 했지만. 이렇든 저렇든, 태환은 시온에게 너그러웠다. 제식대로긴 했어도, 확실히 권시온에게로만 허락된 아량이었다.

곧 성인이 되는 소년이 더 어렸을 적이었다. 열네 살에서 열다섯을 넘어갈 때쯤이었나, 그때도 잠이 없던 태환이 거실을 향하던 중이었다. 제 양 동생이 홀로 복도를 돌아다니는 꼴과 마주친 그는 드물게 얼이 빠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듯싶었다. 몽유병은 아니었다. 잠이 안 와서. 라고 기어갈 듯 말하는 목소리는 조곤조곤했다. 분명 신으라고 비치해둔 슬리퍼가 있었건만, 맨발이었다. 차가운 석조 바닥에 대기엔 너무도 작은 발자취가 눈에 선했다. 말없이 내려다보자,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잔잔히 빛이 나는 게 눈에 띄었다. 혼자 자니까, 물속에 잠긴 거 같고…. 그게…. 나이보다는 큰 몸이라고 하나 애는 애였고, 권태환에 비하면 훨씬 작은 몸을 안아 들어 방으로 데려다주었다.

권태환은 그때, 시온이 한 말을 잊지 않고 이제까지 실천하고 있었다. 그런 날이면 날이 밝고 나서는 꼭 언질도 건넸다. 그러면 양 동생은 어색하게 웃었다. 나도 이제 곧 어른인데 따위의 투정 하나 없이. 이쯤에서 그만둬달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조금만 더 모른 척 이 따스함을 느껴도 되나 고뇌하는 눈빛이긴 했다. 그러다 결단을 본 모양이었다. 내년엔, 태환이 이곳에 없을 테니까. 미국으로 유학하러 가니까. 이렇게 보살핌 받을 날이 길지 않을 테니까. 나름대로 합리화를 한 것이다. 그게 눈에 다 보였다. 굉장히 귀여운 모양새여서 굳이 골려주진 않았다.

처음 만났을 적, 이시온으로 이 저택에 들어온 소년은 보풀이 돋은 오래된 목도리와 그만큼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더플코트를 입고 있었다. 흔히 아이들이 떡볶이를 닮았다 칭하는 토글이 닳다 못해 칠이 갈라져 있던 것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태환은 타인에게 그렇게 많은 관심을 가지는 인종이 아니었음에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입 밖에 낸 적이 있는지 없는지는 헤아려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으나 그의 가치관은 언제나 흔들림이 없었다. 타인에게 막역한 호감을 품을 수 있다니, 웃기지도 않았다.

그가 주변인을 분류하는 법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쓸만한 자, 그렇지 못한 자. 두 분류 면 충분했다. 하지만 시온을 처음 보았을 때, 그런 단단한 믿음이 처음으로 무너지게 만들었다. 특별한 거? 없었다. 적어도 눈에 보이는 한에서는 그랬다. 평균보다 조금 더 크고, 하얗고, 말갛게 생긴 이목구비가 특출하게 예쁘긴 했다. 그러나 태환의 시선을 붙잡은 건 외형이 아니었다.

저를 볼 듯 말 듯 한 눈동자는, 정말 지독하리만치 이목을 끌었다. 열셋 이랬나. ‘자료’로 봤던 것보다도 훨씬… 태환은 생각을 삼켰다. 곧 열넷을 먹는다고 한들, 그 나이대의 아이가 가질 수 없는 게 그 눈동자 안에 있었다. 흐르지도 못하는데 바다보다도 끝이 안 보이는, 그런 일렁임이 있었다. 보호본능, 부성애. 징그러운 작용이 끼어든 건 절대 아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저 흐를 줄 모르는 형태의 눈동자를 그대로 보존하고 싶었다. 이왕이면 제 옆에 가까이 두고. 바로 마음속 결정이 내려졌다. 방생도 하지 않으리라. 누가 그 속내를 들춰보았다면, 뒷말로 인해 시끄러울지도 모른다. 그래봤자 태환의 귀는 간지럽지도 않을 것이지만. 양친이 통보하듯 수영하는 애 하나를 집에 들이겠다고 했을 땐 별스러운 가식을 다 떤다고 여겼건만, 제 눈앞에 있는 시온을 보니 뭐가 됐던 붙들고 싶어졌다. 가슴이 간질거린다, 신난다, 뭔가를 기대한다는 게 이런 건가. 우습게도 설렜다.

태환은 시온과 한 약속을 잘, 매우, 철저히 지켰다. 18살짜리를 농락하는 꼴이 될지언정, 그는 작년 이맘때쯤에 건 새끼손가락을 풀 생각이 전혀 없었다. 혼인이 필요하면 할 거다. 그렇게 대중의 조건만 갖춘다면 그룹의 왕좌야 기꺼이 저를 위해 준비된 자리였다. 그럼 그 뒤엔, 이제는 아주 권시온이 되어버린 소년이 원하는 대로 살되 제 옆에 붙어있도록 최선을 다해주기만 하면 남는 거다. 아, 다시 즐거움이 그의 왼쪽 흉근을 문질렀다.

그러나 아무리 날고 기는 권태환이라고 한들, 신은 아니다. 그런 존재가 있는지 없는지를 차치하고서라도, 어쨌든 종교적 관점을 빌리자면 그는 다른 이들보다 더 뛰어날 뿐이지 창조물이 아닐 순 없었다. 만들어진 것에 오류와 빗나감이 없을 리가 없다. 그러니 시온도, 완벽하게 제 계획대로 움직여주진 않는다는 뜻이다. 그에겐 여전히 태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최근엔 약간 태도가 변했다. 거슬리지는 않을 정도이나 넘어가지도 못할 정도로.

문고리가 돌아갔다. 한 번 떠보기는 해야 하나. 앞서 말했듯, 그와 시온 사이엔 잠시간의 공백이 생길 터였다. 태환의 고개가 살짝 모로 기울었다. 일단은…. 약속부터 지키는 게 순서다. 그가 어두운 방 안으로 사라졌다.

‘권시온.’

자는 걸 뻔히 알면서도 괜스레 이름을 되짚어 보았다. 매일 켜놓는 무드 등이 내뿜는 빛은 안개처럼 희미했다. 색은 노랗고 조도는 낮았다. 시온이 어둠을 꺼린다거나, 무서워하는 건 아니었다. 혹시 잠결에 혼자 방황한답시고 침대에 내려오다 발이라도 헛디딜까, 제 손으로 직접 놓아준 조명이었다. 새로 사주마, 해도 지금 있는 걸로 충분하다 고집이었다. 전구야 그때그때 갈아 주면 그만이라지만, 전력을 받는 힘이 예전만 못하기는 했다. 그래도 저도 빛이라고, 어둠 속에서 자는 인영을 더듬는 눈길에 방해는 되지 않았다. 암모나이트, 새우, 달팽이. 태환은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자는 시온을 거기에 빗대곤 했다. 그렇게 친근하고 장난스러운 단어를 골라 놀리고 나면, 아랫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내심 좋은지 한쪽만 패인 보조개가 점으로 보일 만큼 웃어버리곤 했으니까. 그게 좋아서 부러 짓궂은 형의 모습을 내보여주기도 하였다. 권시온은 진실로, 바른 청소년이었다. 늘 자정을 넘겨서 잠자리에 드는 법이 없었다. 수영은 남들의 예상보다 훨씬 더 체력이 필요한 일이라 당연한 거 아니냐고 치부할 수도 있었지만, 태환은 그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

보육원에 산다는 건, 평생 단체 생활을 해야만 하는 환경이었을 테다. 막 조잘거리고 단어 몇 개 구사하며 뚝뚝 끊어지는 문장을 내뱉을 만한 시기. 그때 시온은 이미 규칙이 뭔지를 배웠을 터였다. 애정이라는 걸 가닥가닥 나눠 가져야만 하다 보니 얌전하고 잘 따르는 아이가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는 걸 알아버렸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선지 처음엔 틀에 갇히기라도 한 것처럼 반듯한 자세로 자곤 했다. 올바르기 짝이 없었던 소년의 자세가 이렇게 변하게 된 데에 대해선, 태환의 지분이 컸다. 자꾸만 혼자 고독을 감내하려는 작은 몸을 안기에 충분한 장신과 체격을 가진 그는, 가진 걸 활용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괜, 찮은데. 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품 안에 가둬다 제 침대에 한자리를 내주었다. 이례적인 일임을 굳이 상기시키는 건, 입만 아픈 일이었다. 못 이기는 척 들려온 시온은, 처음에만 머뭇거릴 뿐이었다. 잠결인지, 어째선지 어느새 보면 몸 전체를 웅크리곤 빠듯하게 붙어 있었다. 코를 곤다거나, 이갈이 한번 없이. 얕고 일정한 숨을 쉬며 제 소맷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그 손아귀의 힘이 보기보다 강해, 자꾸만 한쪽 입꼬리가 위로 솟았다.

제가 만들어낸 결과였고, 보상이었다. 거의 다 자랐으니 의식적으로라도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하나 싶어 머리를 굴렸건만. 기특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태환은 엄지손가락으로 제 턱을 매만졌다. 눈 아래가 바로 시온의 침대였다. 열여덟. 스무 살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였으나 아무리 봐도 소년이었다. 보통들 입에 올리곤 하는 아이고, 애기네. 아유, 어제 태어났네. 같이 어린아이 취급을 하는 게 아니었다. 불변. 스물다섯 이전, 더 확실히 말하자면 이시온을 만나기 이전에 자신이 들으면 콧방귀도 뀌지 않을 거다. 다들 도덕적인 척 입을 싹 닦다가도 위기의 순간만 찾아오면 인연이고 뭐고 없는 세상이다. 연인 간의 신뢰, 애정을 소중히 여긴다면서 욕구에 패배하는 이들이 있기도 하고, 사업 관계만 해도 선의와 의리를 논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큰 이득을 주겠다는 이만 나타나면 모르쇠였다.

하물며 천륜이라고 부르는 부모 자식 관계도 그렇다. 자녀가 노쇠한 양친을 부양하기 힘들어서 버리고, 사랑해서 낳았다는 아이를 키우기가 버거워 버린다. 그러니까 뭣도 모르는 세 살짜리가 그렇게 홀로 외로움에 잠기는 일이 생기는 것 아니겠는가. 변하지 않는 마음, 인연, 관계, 모습. 무엇하나 없건만. 그의 오만은 멋대로, 시온을 불변이라 이름 붙였다.

영원을 한쪽에게만 강요하는 것도 아니었다. 권태환은 시온의 눈동자를 본 순간 알았다. 소수. 1보다 큰 자연수 중 1과 자기 자신만을 약수로 가지는 수를 말한다. 둘은 그렇게 짝 지어진 관계였다. 누가 1이고 누가 소수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그렇다는 것만은 확언할 수 있었다. 권시온은 모른다. 키가 자라도, 나이를 먹어도, 무슨 성을 쓰든, 권태환은 ‘시온’을 놔줄 리가 없다는, ‘정해진 운명’을.

태환이 손끝으로 시온의 손등을 쓸었다. 이불은 또 왜 쥐고 자는지. 제 소매 대신이겠거니 했다. 육체와 함께 말린 요는 빈자리를 만들어냈다. 희멀건 맨발이 드러나 있었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이 작달막하고 예쁜 머리통으로 혼자 무슨 사색에 빠진 걸까. 태환은 들쭉날쭉할 미성숙함이 파악하기 어려운 걸 뻔히 알면서도 가늠해 보았다. 집중하느라 하관이 조금 비틀렸다. 성이 나서가 아니라, 고뇌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딱 맞게끔 재단된 셔츠가 힘겨워 보일 정도로 잘 만들어진 팔근육이 곧장 아래를 향했다. 무심하게 닫은 탓에 미처 다 여물리지 못한 문틈 사이로 누군가 봤다면 헛숨을 삼킬지도 몰랐다. 태환은 평소에 쓰지 않는 섬세함과 다정함을 다 붓는 듯이, 시온의 맨발을 이불 속에 숨겨줬다.

입장과 위치는 인간의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자기 자신이 아닌 이상, 아무리 혈연이고 지연이고 학연이어도 본인 자신만큼 그 인물을 잘 알 수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태환도 이런 고찰을 하고 마는 것이리라. 이시온은 권태환에게 있어서 변하지 않는 유일이고, 권태환은 이시온에게 있어서 변하지 않는 유일이 되어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변화가 필요치 않은 완성된 존재인 것과는 달리, 그의 양 동생은 매일 성장하고 있었다.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어른들도 하루에 열두 번 마음이 바뀐다며 투덜거리는데, 아이는 스물네 번쯤 바뀌지 않겠는가. 그에게 시온의 소중한 존재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게 유효할까? 어린아이는 세상을 너무 빨리 알았다. 그렇기에 실낱같은 기대 하나 없이 허울뿐인 구성원이 되는 걸 받아들였다. 그리고 단 하나의 기대도 품지 않았다. 그런 와중 갑자기 권태환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시온의 마음이 기울지 않을 리가 없었다. 듣도 보도 못한, 그 거대한 배경을 둘러업고 귀하게 자란, 저보다 열두 살이 많은. 그런 인물이 주는 달콤함을 거부하기에 소년은 너무도 물렀다.

제 눈에 든 이상, 태환은 시온을 철저하게 꾀어내기로 했다. 계산적이었다고도 볼 수 있었다. 저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때가 되면 가장 먼저 필요한 걸 챙겨주는 단 하나의 어른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나. 권태환이 필연이라면, 권시온에게는 조작이었다. 어느 정도의 부분은 그러리라. 그거나, 저거나. 쥐면 그만 아닌가? 과정은 중요치 않았다. 남는 건 결과뿐이었다. 걸리는 구석은 전혀 없었다. 양심, 그건 더더욱 그랬다.

그럼, 소년이 아닌 성인인 시온은 어떨까. 더는 자라지 말라고 할 수도 없다. 그건 바라는 바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따금 이런 당혹이 새롭다가도, 불쑥 치밀어 오르는 거슬림을 지울 수 없어 천하의 권태환이 이런 사색에 잠기고 말다니. 사내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려 웃음을 흘렸다. 제 곁에서 단단해져 가는 과정마저도 각별한 것을. 이걸 포기할 수도 없었다. 욕심은 끝을 몰랐다.

‘…혀엉.’

그때, 어물어물한 목소리가 그의 귀를 깨웠다. 시온의 몸이 약간씩 뒤척이고 있었다. 간신히 흔적만 남아있는 젖살만 빼면 누가 봐도 성년일 아이의 발음이 늘어지고 뭉개졌다. 태환은 생각하던 걸 멈추고 이미 비스듬히 올라가있던 입매를 한 번 더 활짝 올렸다. 시온은 무던한 척, 괜찮은 척이 몸에 뱄을 뿐이지 확실히 예민한 편이었다. 잠결에도 태환의 손길이 느껴졌던 탓일지 몰랐다. 깬 건가? 조각상처럼 잘 깎인 형태를 한 손바닥이 여린 등에 닿았다.

‘일어났….’

‘나, 거기, 이상….’

보듬어주려던 손바닥이 멈칫, 그대로 굳었다. 뒤따라오는 건 침묵이었다. 잠에서 깬 게 아니었다. 잠결에 뱉었으니 잠꼬대라는 소린데, 무슨 꿈 속이길래 이런 낯선 음절들을 뱉는단 말인가. 얇은 윗입술과 대비적으로 도톰한 아랫입술이 오물거렸다. 그제야 수명을 다한 무드 등의 음영 사이로 비친 표피가 눈에 들어왔다. 붉었다. 열이 나는 건 아니다. 태환의 손바닥 얇은 피부 아래의 잠옷에서 느껴지는 물기는 없었다. 따듯했으나 뜨겁진 않았다. 정상이었다. 그런데 귀 끝도, 코끝도, 잠옷 너머로 보이는 모든 살이 붉었다. 그러고 보니 왜 요를 한 손으로만 쥐고 있지? 그럼, 그 다른 쪽은 어디로 숨었을까. 보이지 않는 밑일 거다. 그리고 그쪽 어깨는, 묘하게 보통보다 아래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바로, 은밀한 부위로. 된 발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날카로운 관찰력을 자랑하는 주제에, 무른 태도가 눈치까지 잠식했었나 보다. 깊은 호흡이 폐 안을 가득 채웠다.

이것이었나. 시온의 음성은 늘 차분하고, 변성기를 막 지나서 보들보들했다. 늘 속삭이듯, 숨을 참듯 조심스러웠다. 방금처럼 쇠 긁는 소리가 뒤섞여 열띤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건, 처음 들었다. 시온의 변화, 거스름처럼 이따금 불거지는 이상행동의 원인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사내는 자신의 입매를 손안에 숨겼다. 막혔던 숨이 마디 사이의 미세한 틈으로 길게 빠져나갔다. 여전히 손수 등을 굽히고 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등에 손바닥을 댄 채였다. 굵은 마디 뼈가 자연스레 떨렸다.

희열이었다. 시온은 유일한 이해자 이자 의존 대상이었던 저를, 욕망하기 시작했다. 분명했다. 자신이 저를 절대 버릴 리 없다는 걸 믿고 싶으면서도 혹여 내쳐질까 두려워 숨기려고 눈치를 보느라 그렇게 머뭇거린 게 확실했다. 태환은 작은 소음 한 번 내지 않고 서서히 몸을 물렸다. 뒷면을 매만지는 팔의 근육이 당겨지고, 손아귀 밑으로 숨어버린 입꼬리가 자꾸만 위로 치솟았다.

아, 권시온은 정말 평생 내 곁에 있겠구나. 환희가 차올랐다. 거만한 권태환에게 어느 누가 이런 감정을 선사하겠는가. 그는 인간의 약점을 잡고, 휘두르고, 이용하는데 자질이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 그 영악함이 향하면 그저 소모의 의미밖에 없겠으나…. 권시온은 달랐다. 오직 시온만이 달랐다. 꼬여있던 거슬림이 단숨에 풀렸다. 같은 방향은 아니더라도, 더 쉬운 일이 되어 버렸다.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과실을 키우는 과정처럼. 서둘러 따봤자 덜 익은 걸 삼킬 뿐이다. 유학으로 인한 공백을 보장받은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데려가 볼까 했더니, 이렇게 되었다면 되려 잠시간 떨어져 있는 게 이득일듯싶었다. 더 애틋해질 좋은 구실이니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계속 좋은 꿈 꿔.’

매끈한 척추뼈 하나가 엄지에 문질러졌다. 한 번 더 비음이 부드럽게 흘러 들어왔다. 시온의 내면과는 달리 성적인 의미는 아니었으나 결론적으론 같은 감미로움이 자꾸 입안을 축축하게 적셨다.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겨우 떨어져 나간 발이 문으로 향했다. 방해하지 말고, 저 마음이 깊어지는 날을 감내해야 했으니, 이 정도 투자는 기꺼이 할 수 있었다.

방문이 닫힐 때까지, 권태환의 착오는 계속되었다. 그가 귀국했을 때, 권시온은 다시 이시온으로 돌아갔고 자취를 감췄다. 친자의 눈치를 보는 유약한 양친을 쉬이여긴 게 패배의 원인이었을까? 그의 불변, 그의 유일은 과일이 아니었다. 가둬져 있는 건 심상이며 움직일 수 있는 건 두 다리였다. 빌어먹게 깜찍한 권시온. 그럼, 다시 기다리면 됐다. 그러다가…. 빌어먹진 말고, 붙어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 태환은 기꺼이 그러기로 작정했다.

*

나도 피가 흐르고 숨을 쉬는구나. 열두 달이 열 번 오고 가는 동안 배운 교훈이었다. 배움, 가르침. 이전에는 얼마나 비웃었던가. 뭐, 한창 애송이였지. 불혹이란 딱지가 붙은 태환이 자조했다. 이시온은 정말 대단했다. 그는 아직도 제 것에 이름을 쓰듯, 청년을 권시온이라고 부르긴 했으나 이름이야 호적에 어떻게 적혔느냐의 여부일 뿐이었다. 그래도 저가 권 씨로 부르면,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출 줄 모르는 홍채를 보는 게 기꺼웠다. 아귀에 쥐어 휘두르고 굴복시키는 게 당연하던 삶을 바꾼 게 바로 저 제 마음 하나 건사 못하는 어린 청년이라니. 역설적인 만큼 즐거워졌다. 미친놈 취급을 받기에 딱 좋은 심상이었으나, 누가 감히 권태환에게 손가락질하겠나? 그러기 전에 그 마디가 으스러질 텐데.

“왜, 알고 있었다고…. 말을…. 아니, 알고 있었으면서….”

아닌 밤중의 술자리만이 아니었다. 백경아가 눈치채고 있었는지,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그도 아니면 아예 몰랐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경아 또한 신혼집이라 명명된 그곳에서 밤을 보내는 일이 적었다. 한 달에 한두 번. 그가 ‘신혼집’을 내버려 둔 채 외박하는 횟수의 평균이었다.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제 양동생의 흔적들을 더듬기 위함이었다. 개중 시온이 마지막으로 연습하던 센터는 몇 년 전 폐장이 되었다. 건물이라도 사두려고 했더니 허물어 체육관을 짓는다기에 꿩 대신 닭을 잡아야만 했다. 적당한 펜트하우스를 샀다. 가지고 있는 게 없는 것도 아니었건만, 굳이 그런 선택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매물에 딸린 수영장이 가장, 소년이 말하던 언젠가 둘이 같이 살면 그 집에 이런 수영장이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 사항에 부합하기 때문이었다. 주인이 실제로 거주하지 않다 보니 전문 관리인을 두고 관리했다. 고용인이 하는 일은 매일 정해져 있었다. 물을 빼내거나 채우고 적절한 수온을 유지하는 것. 그렇게 살뜰히 살핀 수면 위를 헤엄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 무엇을 했나. 바라봤다.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지점에 서서 바람에 흔들리는 물 위를 주시했다. 그게 다였느냐고 묻는다면, 야경이 내는 빛만을 의지한 채 잔잔히 빛을 부수는 표면을 보며 되뇌기도 했다. 저를 바라보는 시온의 눈을, 삼키고 굴렸다가…. 공허하게 빈 입안을 더듬듯 내뱉었다.

이번엔 웃지 않았다. 드디어 마주한 저 두 눈을 당장 삼키고 싶었지만, 뜸을 들일 필요가 있었다. 입술은 더 이상 호선을 긋고 있지 않았다. 슬쩍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한 번 들썩일 뿐이었다.

“아, 내 권시온이 다 커서 형하고 떡을 치고 싶었구나, 라는 말이라도 해야 했나? 그건 범죄지, 알잖아.”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걸 뻔히 아는데, 뻔뻔했다. 그러나 틀린 말도 아니다. 그리고 권태환은 적어도 그런 쪽으로는 매우 결백한 인간이었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르게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나이가 한참 위인 형, 에게 그는 솜털이 돋은 어린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테니. 여기서 의문이 솟구친다. 그럼, 왜 이제 와서 이렇게 저를 잡고 뒤흔든단 말인가. 지적할 정신머리는 없었다. 아니, 제가 지금 현실에 서 있는 거긴 할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어금니와 윗니가 붙었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겉으로 보긴 어쩔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만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제 몸이 떨렸다. 더불어 눈동자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뭐라도 해야 했는데, 뭘 해야 할지는 몰랐다. 판단이 저 멀리 희미해졌다가, 시온은 퍼뜩 찬물을 맞은 듯 문장을 꺼냈다.

“당신…. 의 ‘부인’ 때문에 와서는…. 왜 이런 이야길 하는 건가요?”

사이가 벌어졌다,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등허리를 더듬는 손길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반시계 방향으로, 느리게 돈 눈동자가 다시 똑바로 정면을 향했다. 둘은, 태환의 독단으로 인해 아직도 거리를 벌리지 못하고 있었다. 권태환은 비죽이듯 웃는다. 미소가 타인을 향하는지, 시온을 향하는지 구분하는 법은 눈빛이나 손짓, 음성에서 구분되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도 옛말이라는 듯, 그는 믿기지 않을 만큼 은은하게 웃었다. 누가 봐도 불안해하는 어린아이를 달래는, 미심쩍은 다정을 띄우는 얼굴이 새삼스레 시온을 휘청이게 했다. 이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낮게 깔리는 중얼거림은 어울리지 않게 진중한 편이었다. 태환의 얼굴이 비스듬히 기울었다. 시온의 눈이, 제 면상을 온전히 담기에 편한 각도였다.

“그렇게 부정해도, 실은 알잖아? 백경아는 그저 내게 한 잘못에 대한 값만 치르면 돼. 그리고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 결혼을 했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겠지.”

내가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는 거. 굳이 듣지 않아도, 정답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더더욱 특별히 여겨지는 기분이 들곤 했으니까. 아, 어린 저 자신은 얼마나 어리석었나. 되짚어봤자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시온이라고 복기해 본 적이 없었겠는가. 이상하리만치 유일하게, 저에게만 허락되는 애정의 정체는 도대체 뭐였을까. 도덕심을 휴지 조각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태환이었지만, 적어도 어린애에게 삿된 맘을 품는 걸 역겨워할 줄은 알았다. 남들 같은 측은지심이 아니라 그야말로 정신머리가 썩은 인간 말종에 대한 혐오감에 가까운 것이었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미성숙한 아이가 점점 자라며 품게 된 비틀린 애욕과는 다른, 뭔가가 있었을 테다. 지금까지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고 이름을 알 수가 없는 감정이. 그러니까 애초에, 자신과 사내는 동등할 수 없었다.

“이쯤 되니 걔한테는 고맙기까지 한걸. 널 다시 만나도 네가 피하지 못하기에 딱 좋은 구실이 아닐 수 없으니.”

쉽게 사과를 할 땐 언제고 태도를 바꾸느냐 싶겠지만, 나름대로는 이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네 눈치를 봐왔다고 생색을 내는 거였다. 이런 점은 여전했다. 그런데 어린 날의 자신인 파렴치한에 속하는 이가 늘 소중했다. 비웃음을 듣는다고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확답할 수 있나, 진심으로?

정신이 나간 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른 건 아니었을 터. 과연. 권태환은 손속이 빨랐다. 몸을 붙이고 허리보다 살짝 위에 있는 등을 매만지는 손끝이 어느새 날개뼈 위를 맴돌았다. 어정쩡한 채로 유지되던 발끝을 밀어내고, 시온의 다리 사이를 중량감 있는 허벅지 한쪽이 차지하고 있었다. 샅으로 튀어나온 무릎뼈의 생김새를 가늠하는 게 어렵지 않을 편이었다. 점점 뭉근해지는 움직임이 하체에서부터 상체로,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어느 쪽을 상상했을까 싶었는데, 쉽게 알겠더라고.”

빈틈없이 올린 머리카락이 바스락거렸다. 귓바퀴 위가 간지러웠다. 칼날을 닮은 콧대가 시온의 뺨에 우물을 만들었다. 윗입술이 살에 밀려 살짝 들리고, 호흡은 지나치게 가까웠다. 차마 아래로 머리를 숙인 채 뭘 응시하고 있는지 살필 수가 없었다. 청년이 쥔 주먹에 튀어 오른 핏줄이 붉어지고 있었다.

“내 귀한 권시온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대줄 수도 있는데 말이야.”

이시온에게 비속어란, 절대 입에 올릴 리 없는 단어일 뿐이었다. 왜 쓸데없이 상대의 기분만 상하게 하는 언어를 사용하는지, 그는 평생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순간 지금은 알 것도 같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꽤 단단해진 목 위로 튀어나온 선명한 사내의 증거가 꿀꺽, 뭔가를 삼켰다. 단정할 줄밖에 모르던 하얀 이목구비가 얼룩덜룩했다. 혈액이, 너무 빨리 도는 탓이었다.

시온의 이름은 성경에서 따왔다고 했다. 보육원을 설립한 이들의 종교가 그러했기에. 친부모는 아이를 보육원에 버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에야, 그들은 제 이름 석 자도 모르고 고아가 된 유아를 안으로 들였다. 규율을 모시던 시온산처럼, 규칙적인 어른이 되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성의가 있는 듯 없는 작명이었다. 산의 이름을 가진 소년은 이름과 달리 제 외로움을 물속에 숨겨두길 택했고, 그 뒤로도 거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인식표의 역할만 다하면 되는 거였으니.

그런 명명에 말도 안 되는 운명이 끼어들어 버렸다. 산이나 물가나, 어떤 상징이 서식하기 알맞은 장소가 아니던가. 그들이 설파하는 말씀 속에서 최초의 인간에게 수치심을 주고 선악을 구별하게 만든 어떤 짐승을. 발이 없고 매끈하며 기다란 몸체로 인간 하나쯤은 쉽게 감쌀 수 있는, 커다란 뱀. 신앙심이 있다는 건 절대 아니었다. 애초에 존재한다고 믿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시온은 생각하고 말았다. 태환이 저를 삼키러 온 뱀과도 같다고. 정신을 차려야 했다.

일순, 고정되어 있던 식탁이 삐걱거렸다. 거센 힘으로 뒤로 밀려버린 가재가 나무 바닥을 긁어놓았다. 이 사내가 뱀이든, 다른 어떤 맹수이든…. 아니. 권태환 그 자체에 이대로 휘말리지 않아야만 했다. 왜? 몰랐다. 모르겠다. 그래야만 한다는 마음이 지배적이었다. 강하게 힘을 준 덕에 벗어난 몸이 들썩였다. 왠지 호흡이 가빴다. 그래도 직전보단 차분한, 언뜻 들으면 평소와 비슷한 어조가 꼬집듯 뱉어졌다.

“…남의 손 탄 거 싫어하잖아요.”

짙은 눈썹 한쪽이 일그러졌다. 짧지만 강력한 반항이 아닐 수 없었다. 태환은 헛숨을 뱉지 않았다. 침묵만이 제 순서를 기다렸다는 듯 끼어들 뿐이었다. 이걸 어쩌나, 안타깝게도 고요의 치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태환의 오른쪽 입꼬리가 다시금 으쓱, 위로 솟았다.

“…아니, 너는 백경아와 뒹군 적이 없어.”

바싹 말라 있던 입술이 들썩였다. 덩달아 눈도 동그래졌다. 명백하게 공백을 만들며 뭔가 반박을 토해낼 것만 같던 입매에서 말이 뱉어지는 일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시온은 꽉 찬 의문이 자신을 짓누르는 듯, 왼쪽 갈비뼈 부근이 아파오는 걸 느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단정해, 당신이 뭘 알아, 당신이 왜 확신해… 말이 되지 못한 문장들을 삼키자, 정말로 위가 아팠다. 그렇다면 그는 왜 입을 다물고 말았나. 답은 간단했다. 정말 해야만 할 말이,

“시온아.”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였기 때문이다. 태환은 시온이 어떤 말을 삼켰는지 단박에 읽을 수 있었다. 그의 피가 이어지지 않은 동생이었던 시절의 시온은 덜 여문 존재였다. 호적에 잉크도 마르지 않았다…. 는 관용구를 쓰던가. 10년의 공백기를 거쳐 그 잉크가 말랐을진 모르겠으나, 다 자란 지금도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그렇게 새침하게 굴어봤자, 그는 저를 놓지 못한다. 여전히 잔잔한 수면처럼 얌전한 척을 하고 싶어 안달인 눈동자를 보자니 놀랍게도, 아랫배가 울려왔다. 놀라워? 다시 한번 피식 웃었다.

“여전하다, 권시온. 너 정말 여전히…”

웃기고 앉아있네. 권태환은 오직 이시온이 걸린 일에만 제가 자조라는 감정을 가질 수 있는 인간임을 알았고, 인정했다. 그의 불변이 만들어준 성장이 아니었던가.

“가엾을 만큼 순진해. 한입에 삼키고 싶어질 정도로.”

맞다, 이젠 이시온이 됐지. 그렇지만 그는 굳이 다시 정정해 주지 않았다. 뭐가 됐든 상관없으나, 적어도 그건 제대로 된 올가미가 되어 주었다. 제가 걸지도 당기지도 않았으나…. 이시온이 놓지 못하는 족쇄이기도 했다. 기회는 찾아왔다. 뒤집어보려던 시도는 불발로 마무리되었다. 도착점이 확실한 손아귀가, 시온의 허리춤을 낚아챘다. 그대로 바닥이었다. 누군가에게 빼앗기기라도 한 듯 힘이 빠진 상체가 마룻바닥에 부딪혔다.

아, 어 같은 단말마조차 나오지 않는 제 입을 원망해야 했을까. 태환이 제 위를 완전히 정복했다. 이시온은 그렇게 하의에 달린 지퍼가 뜯어지듯 내려가며 내는 비명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시온의 다리 사이에 그것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라니. 안 어울리게 무슨 내외란 말인가. 성기, 자지, 좆.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게 곧 고상하다는 의미는 아니었기에, 태환은 상스러운 표현을 하는 걸 거리끼지 않았다. 그런데 심상일 뿐인 감상을 속으로 삼키면서도 완곡한 대명사를 고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내 권시온이 그런 상스러운 말을 불편해하니까. 지금은 제 입으로 욕지기를 뱉을 뻔한 걸 단박에 눈치챘으나, 능글맞은 선처를 베푸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야살스러운 형태를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상상보다도 더 밋밋하기만 한 속옷이었다. 속절없이 무릎 사이에 걸려버린 의복에 감추어져 있던 희고 잘 잡힌 허벅지가 자극적이니, 그걸로도 충분하기는 했다. 눕혀져 버린 몸은 고장이 나버린 듯, 미동이 없었다. 은근히 매끈한 검지 끝이 골반에 걸쳐진 밴드와 살갗 사이를 벌리는데도…. 자칫하면 순종적으로 기다리는 거라 착각할 만할 정도였다. 퉁. 헛웃음이 터질 뻔했다. 호루라기 소리에 뛰쳐나오는 평영 선수도 아니고. 보기만 해도 묵직한 출발이었다.

어쨌거나. 일부러 추정해 본 적은 없다지만, 참 잘 컸다. 자신이 하는 말 하나에, 단어 한 음절에도 어쩔 줄 모르던 어린애는 여전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이렇게 다 자란 티를 꼭 피력하였다. 특히 껍데기가. 꼭 지 같은 걸 달았네. 길고, 곧고, 예쁘고. 적당히 젖은 혀가 살덩이를 적셨다. 최대한 꾸민다 해도 붉고 혈색이 좋다 따위의 미사여구는 붙여주지 못할 입술은 제 주인만큼이나 단단하고 분홍 빛보단 살짝 살결보다 진한 계열의, 어떻게 봐도 사내의 것이었다. 생김새에 성별을 나누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아무튼 태환의 혈육이란 족속들이 좋아하는 통념으로 치자면 그랬다. 그런데, 시온의 살덩이는 그걸 보고 좋다며 몸을 들었다. 모른 척하기 어려울 만큼, 제대로.

“날 보고 이렇게 세워놓고….”

퍽 잘도, 걔하고 떡을 쳤겠다. 뒷말은 삼켜주었다. 나름의 관용을 베풀어주고 싶었다. 내심, 아니. 대놓고 즐거워진 덕도 있고, 그는 시온을 위해서라면 알량하게나마 잠시간은 입도 다물어줄 수 있었으니까. 적어도 그의 ‘권시온’을 위해서라면 남들은 죽을 때까지 받지 못할 자신의 너그러움을, 기꺼이 쥐여줄 수 있었다. 분명, 그러려고 했는데.

“…둘 다 될 수도 있잖아요.”

…허. 숨소리가 터졌다. 꼭 가만있다가, 이럴 때는 한 마디를 안 지지. 태환의 콧등이 구겨졌다. 불쾌하진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마음에 찼으면 모를까. 아무튼, 예쁜 값을 한다니까. 이제 다 커버린 어린 동생의 되바라진 항변을 동생에게만은 친절한 척이라도 하는 형이 되받아쳤다.

“시온아, 네가 뭘 가려먹느냐는 상관없어.”

양순한 꼴은 다 보여놓고 꼭 이렇게 비뚤어져. 이것도 여전해. 그리고 또, 네가 변하지 못한 게 뭔 줄 알아? 바싹, 귓가에 숨결이 느껴질 만큼 거리가 좁혀졌다. 태환이 바싹, 곧고 예쁜 살덩이 바로 그 밑에 내려앉았다. 골반을 누르는 묵직한 무게가 몹시, 현실적이었다. 이제는 다 흐트러져 버린 앞 머리카락이 자꾸만 시온의 귓바퀴를 맴돌았다. 그 간지러움이 겨우 떨어지자마자, 이젠 질척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씹어 뭉갤듯한 단단한 치아가 내숭을 떠는 동안, 살짝 단단한 혀끝이 그 주위를 훑었다. 동시에, 낮은 음성이 시온을 흔들었다. 너만 몰라, 너만. 웃음이 짙어졌다.

“넌 예나 지금이나, 나한테 밖에 안 섰어.”

*

뜨겁네. 인체가 내는 열은 한정적이다. 하지만 체감 기온이라는 게 있듯이, 심정적 체온은 다를 수 있었다. 엄지 기부에 닿은 살덩이의 뿌리 끝이 자꾸만 움찔거렸다. 혼자 잘도 서네. 장하다고 손뼉을 쳐주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오랜만에 재회한 양 동생의 몸을 깔아 눕힌 채 떠올릴 감상은 아니지만, 뭐 어떤가. 단정한 아래턱이 비틀렸다. 눈물은 없었다. 부끄러운 탓인지 화가 난 건지, 얼굴이 불그죽죽해 보이긴 했다. 이렇게 다 자란 기둥을 붙들고 있는 끝은, 예상외로 매끈매끈했다. 그러니까 누가 분명 제모를 한 모양새였다. 그러고 보면 습관적으로 밀어 왔을지도 몰랐다. 수영복을 입을 때 걸리적거리니까. 제모를 하려고 용구를 들고 까치발로 걸어 다니던 어린애의 모습을 본 적 있는 태환이었다.

“…내려, 와요.”

“싫어.”

들어 올려졌던 골반이 다시금 힘을 준 허벅지로 인해 무력해졌다. 한숨인지, 헛숨인지 모를 소리가 입술 사이로 삐져나왔다. 시온의 떨리는 손이 제 얼굴을 연신 문질러댔다. 마른 세수였다. 태환의 관심사는 조금 다른 방향을 향해 있었다. 살짝 안으로 굽은 눈길이 몸이 위치한, 바로 그 위에 드러나 있는 시온의 다리 사이에 박혀있었다.

다 큰 성인이 털 한 올 없는 사타구니를 하고 있으니 이상하게 보여야 하는데, 묘하게 당겼다. 질량에 비해 분홍빛인 샅을 보니 제 예상보다 더 즐거울 수 있겠다 싶어졌다. 그의 동침 상대는 모두 여성이었다. 딱히 게이다, 바이다, 이성애자다. 같은 정체성을 정해 본 적은 없었다지만, 그게 당연하다 여겼다. 정신적 교감은 필요 없었다. 서로 즐거우면 그뿐이었다. 남자? 글쎄. 무정히 떠나버린 제 양 동생 말고는 상상해 본 적도 없다. 그런데도 이시온의 욕정을, 그것도 10여 년의 긴 시간이 흐른 지금 받아주겠다는 이유는 뭘까? 굵고 단단하지만, 세심한 관리를 받은 탓에 보기보다 거칠지 않은 엄지가 끝에 닿았다. 살짝 벌려진 출입구 사이를 파고들 듯 내리누르는 손길이 제법 부드러웠다.

“흡….”

귀두 바로 아래, 움푹 파인 틈을 쓰다듬어주자 황망하리만치 달큼한 비음이 들렸다. 여전히 한 손으로 가려진 채였다. 분명히 얼룩덜룩 물들인 채일 게 뻔했다. 태환은 이 순간이 무척 재밌었다. 평생 사내 몸은 몰랐고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던 것치곤 굉장히 가슴이 간질거렸다. 당연히, 상대가 상대이기에 그런 것이겠지만.

‘큰’ 시온이 울지 않으니 ‘작은’ 시온이 울고 있었다. 분명히 질량도 길이도 귀엽다고 하기엔 큰 무리가 있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색도 연하고 모양도 날씬하게 잘 빠졌고…. 거기에 핏줄마저 가지런히 솟았으니 예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했다. 손아귀에 잡고 몇 번 쓸어주니 몇 번 떨어대던 선단이 투명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봐, 권시온. 서기만 하는 게 아닌데…. 이래도 자꾸 앙탈 부릴래?”

입은 미운 말만 하는데, 과연 ‘작은’ 시온은 훨씬 솔직한 편이었다. 마흔 살을 비벼봤자 아프기만 하다. 특히나 통각이 몰려있는 취약하고 연약한 부분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자본이 들어간 영상물에서야 알아서 젖고, 만지자마자 느끼는 듯 연기하긴 하지만, 다 거짓말이다. 그저 판타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럼 모든 성교가 미지근하고 메말라 있기만 하느냐, 그렇지 않다. 모두가 말하지 않는가. 마음이 가면, 몸도 따라온다고. 그런 견해도 깊이 파고들자면 개소리긴 마찬가지긴 하나, 이시온이 좋아하는 평범하고 보편적인 무리를 기준으로 봤을 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기특했다. 제 손놀림이 어려울까 봐, 괜한 고집을 부리는 이시온 대신 잘 젖어 마음껏 만져달라고 애교를 부리는 이 기둥이.

“…그만, 읏.”

드디어 숨어있던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역시나 붉은 물이 든 얼굴은, 평소의 고요함이라곤 단 한 자락 찾을 수 없어 보였다. 지금이야말로 벗어나야 했다. 그렇게 시온이 등허리에 힘을 주려던 찰나였다. 권태환은 항시 의복을 갖춰 입었다. 지금 같은 계절, 초겨울에는 항시 몸에 딱 맞는 드레스 셔츠 위에 베스트와 재킷을 걸치고 코트를 입었다. 그러니까 겉옷을 두 겹 입은 셈이다. 제일 위에 걸쳐있던 외투는 여기 들어올 때 벗어 뒀었다.

그는 항시 위협적인 육체를 일부러 과시라도 하듯, 딱 맞는 치수를 선호했다. 그만큼 테일러가 손수 체촌하여 본을 뜨고 만들어낸 물건이었으나 이 순간엔 그저 한낱 방해물일 뿐이었다. 거칠게 아래로 낙하해버린 재킷이 바람 빠진 듯 납작해졌다. 이제야 자유로워진 팔을 한 바퀴 돌려보던 태환이 대뜸, 시온의 멱을 잡아챘다. 찌그러져 있던 눈매가 펴졌다. 바로 끌어올릴 듯하더니, 이내 멈췄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인 태환이 아래의 얼굴을 감상하다가 친히 상체를 숙였다.

타인이라면, 이런 짓을 할 리도 없으나 만일이라는 가정법이 있지 않은가. 타인이라면 이런 관용 따위 쥐여주지 않았다. 상대방이 움직여야지, 자신이 움직일 필요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태환은 시온에게만큼은, 기꺼이 제 몸을 낮춰주었다. 상의를 잡아챘던 손아귀에 힘이 빠진다. 재차 다정을 흉내 낸 손길이 턱을 잡았다.

점점 아래로 향하던 상체는, 입술이 닿고 나서야 멈췄다. 진득한 입맞춤은 아니었다. 시온의 상대적으로 더 도톰한 아랫입술이, 태환의 얇고 단단한 입술에 사정없이 찍어 내려졌다. 잔잔하게 부서지는 빛을 담은 홍채가 여전히 산란히 부서지고 있었다. 사내는 그 시선을 감상했다. 찡그리고 거부하던 것보다야 훨씬 낫지만, 한참 모자랐다. 이쯤 되면 이를 드러낼 법도 한데…. 여전히 방황뿐이었다.

한편으론 여전히, 주인과는 다르게 진실로 무장한 성기만이 제 복부를 사정없이 찌르고 있었다. 우연히 조끼와 셔츠 사이로 파고든 예쁘고 커다란 이시온의 분신이, 그의 셔츠에 흔적을 남겼다. 넘치지 않을 만큼, 묘하게 축축했다.

“왜,”

태환이 다시금, 상체를 세웠다. 거리가 벌어졌다. 턱을 고정했던 팔이 떨어져 나간다. 양손을 들어 보인 그가 짐짓 실망했다는 투로 말했다.

“막상 입안에 들이밀어 주니까 겁나….”

문장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역으로 멱을 잡혔다. 당황으로 물들어 있어서 그렇게 빛나나 보다 했더니…. 엉뚱한 추측이었나 보다. 눈이, 돈 거였다. 무슨 힘을 그렇게 잔뜩 줬는지, 셔츠 깃 너머로 떨림이 느껴졌다. 말을 하느라 자연스레 벌어진 틈 사이로, 긴장에 바싹 마른 혀가 파고들었다. 언제쯤 송곳니를 보여주려나 했더니…. 엉뚱한 부위가 밀려 들어왔으나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예전, `권시온`의 평가는 다음과 같았었다. 말수가 적고 착해빠진 소년. 뭘 모르고 하는 속 편한 평가였다. 그럼 권태환이 본 권시온은 어땠나. 아이는 무작정 착해 보이고 싶어 했다. 도덕심과 규율이라는 울타리에 억지로 저를 맞춰놓고, 남들에게 그렇게 비치길 원했다. 그러면 사랑은 몰라도, 비난은 받지 않을 거라고 자기 위로를 하고 있었다.

그런 성향은 여전할지 몰랐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을 해놓곤, 해가 없어 보이려고 안간힘을 쓴다. 혀끝은 소심하게 치열을 훑더니, 고장 난 듯 멈췄다. 곧이어 점점 진동하듯 흔들리던 손아귀의 힘도 풀렸다. 한동안 주변이 조용했다. 들리는 거라곤 바스락거리는 원단의 마찰음과 불안정한 숨소리, 그게 다였다. 태환이 비음을 흘렸다. 골몰하는 듯한 음성이었다. 가르칠게, 퍽 많았다. 어쩌겠는가, `형`이 가르쳐서…. 솔직하게 만들어야지.

“시온아, 아무리 흥분해서 머리가 돌았어도…. 이렇게 숫처녀처럼 굴면 어떡하나.”

움찔, 시온의 미간이 좁혀든다. 그러고 보면 알아서 규칙에 제 행동을 가둬버린 소년은, 그때도 도덕적으로 무균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중, 고등학생 정도 되어서 머리가 굵어지면 된소리쯤은 쉽게 뱉는 또래들과는 달리, 그의 언어생활은 깨끗하고 교과서적이었다. 가끔, 그렇게도 좋아하는 태환이 된소리를 뱉어도 얼굴을 찡그릴 정도였다. 여전히 그런가 보지. 태환은 복부에서부터 올라오는 짜릿함을 감지했다. 시온의 성기가 제 배 위를 찔러오고, 비벼와서 그런 게 아니었다. 심정적 즐거움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렇게 철저히 깔끔하게 굴고 싶어 했던 주제에 피는 이어지지 않았으나 호적은 이어진, 열두 살 위의 형에게 욕정은 품을 줄 알았던 권시온. 너무나 발칙하고, 앙큼하고, 깜찍했다. 시온의 목구멍이 한마디, 토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상스러운 말 하지 마세요. 되바라진 비난을 뱉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건, 당연….”

허. 웃음인지 뭔지 모를 단말마가 튀어나온 쪽은, 도리어 태환이었다. 아까부터 웬 단내가 난다 싶었다. 시온의 입안에서 옮겨온 잔재였나 보다. 뜬금없이 케이크를 만든다기에 의문이었는데…. 이제 보니 꼭 자기 닮은 짓을 택했다. 빨간 귀는 설탕에 절인 딸기처럼 도드라져 있었다. 확실히, 돈 거 맞네. 권태환이 웃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제정신도, 이성도 놓은 채 제가 무슨 말을 뱉는지 모르는 이시온이라니….

“내가 처음에 집착해 본 적은 없는데,”

권태환은 경험이 많았다. 넘쳤다. 아까 말했던 대로, 박는 쪽의 관점으로서 라면. 오히려 처음은 귀찮고 번거롭다는 의견에 동의까지 하는, 아주 못된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기왕이면 능숙하되 적당히 닳은 게 하기도 편하고 쉬웠다. 그러니까, 권시온은 여전히 제게 엄청난 예외다.

씨발. 욕지기가 나오고 말았다. 하의가 갑갑해졌다. 아마 여전히 꼿꼿한 시온의 성기 위로도 느껴질 테다. 분명히 대주겠다고 했으니 잔뜩 옹송그린 채 제 차례를 기다리는 살덩이는, 쓰일 리 없었다. 상관은 없었다.

“네가 그렇다니 꼴려, 그래서 돌겠어.”

입꼬리가 시원스레, 하지만 명백한 욕망을 담아 휘어졌다. 태환의 얇고 잘 뻗은 입술 위에 선명한 잇자국이 보였다. 시온은 거기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춘기 시절, 몇 번이나 상상하던 입맞춤보다 훨씬 더 난폭한 자국이었다. 그의 성기는 이게 거의 가버리기 직전이었다. 단지 이 일련의 행위만으로도. 그렇다. 애초에 거부란 쓸데없는 짓일뿐,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거다. 이시온은 권태환에게 무력했다. 예나 지금이나.

금속음이 크게 울렸다. 힘줄이 돋은 손등이 제법 다급하게 벨트를 풀었다. 쉭, 뱀의 혓소리와 유사한 음색을 낸 가죽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무릎을 세우고 짓눌리던 무게가 사라졌다. 하지만 시온은 움직이지 않았다. 더 높게 드리워진 태환의 얼굴을 따라 눈을 떼지 못하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하…. 권시온.”

고분 고분 해진 꼴이 제 마음에 쏙 들었는지, 시온의 위로 열에 젖어 더 낮아진 호흡이 느껴졌다. 작달막한 지퍼를 잡은 두꺼운 손끝이 애를 태웠다. 내릴 듯, 내리지 않았다. 이제까지 울음을 꾹 참아냈던 눈가가 젖어 있었다. 충혈되어 보이기까지 하면서. 지퍼보다 빠르게 제자리를 벗어난 건, 넥타이였다. 윈저 노트로 탄탄하게 잡혀있던 모양이 느슨해졌다. 타이는 다행히 재킷이나 벨트 꼴이 나지 않았다. 목덜미에 걸린 채로 아래로 늘어져, 청년의 하관을 간지럽히긴 했다. 감질날 정도로, 간질거렸다.

“흐, 아프….”

불쑥, 태환이 또다시 시온의 살 기둥을 제 손에 쥐었다. 순간 그의 손가락뼈마디가 느껴질 만한 압박이었다. 그것은 잠시뿐이었다는 듯, 곧 힘이 풀렸다. 놔주진 않았다.

“아프지 않게 해줄 테니까,”

드디어 앞섬이 풀어졌다. 남은 손으로 튕겨내듯 후크를 풀어헤쳤다. 사연을 모르고 보면 신경질적으로 보일 만큼 거친 손길이 제 바지춤을 끌어내렸다. 힘이 들어간 탓에, 허벅지 안쪽이 잘 갈라져 움푹 패어 있었다.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의? 굳이 말하지는 않겠다. 태환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하얗게 빛났다. 이를 드러낸 웃음을 참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불러봐.”

지금부터 명령을 내릴 테니, 원하는 걸 얻으려면 복종해. 내포된 의미는 노골적이었다. 주어는 없었다. 하지만 너는 알잖아. 확인이기도 했다. 첫 만남 때처럼. 자신을 꼭 ‘그’호칭으로 불러달라던 권태환과 그게 너무도 가슴 뛰어서, 평소와는 다르게 몇 번이고 그 한 음절을 되새기던 자신을 떠올리라는 선고였다. 견고하게 쌓여있던 도덕성이 무너졌다. 과연 수복될지, 된다면 이전과 같을지 모를 일이었다.

흰 손이 계속 떨었다. 떨면서도 밀어내지 못한 채, 태환의 허벅지에 다소곳이 닿았다. 그리고 끝내 오랜 세월 동안 잊혔던 호칭이, 욕정을 비집고 모습을 드러냈다.

“…형.”

*

한 번 무너진 제한선을 넘는 건 매우 쉬운 일이다. 어떤 장벽이 있든, 아무리 높고 험난한 벽이라도 쓰러지면 아무런 방해가 되지 못한다. 지금 이시온이 그렇다. 출발선에 설 때만 머뭇거렸을 뿐, 총소리를 듣자마자 뛰어드는 듯 굴었다. 다른 점은 그때는 승부욕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고 이와 같은 상황에선, 가만히 있어도 목덜미에 땀이 차고 눈앞이 돌아버리는 흥분이 원동력이라는 점만 달랐다.

“자세, 바꿔줘?”

플로트 라인을 따르기라도 하는 양, 시온은 태환의 하체가 그린 선 안에 완벽히 갇혀있었다. 이젠 빠져나올 마음도 없고, 반항도 하지 않았다. 무너진 제어가 가져온 순응이었다. 잔뜩 피가 몰린 목 위의 색은 여전히 얼룩덜룩했다. 도리질도 힘겨워하는 얼굴이라니 퍽 보는 맛이 있었다. 그 모습을 관람하던 태환의 입매는 여전히 호선을 그리고 있다.

“그래, 아직 배울 게 많겠지. 그럼 계속 착하게 있어.”

그림자가 더 가까워졌다. 태환의 몸은 역광에 비쳐 은근히 번들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그라도 서서히 배어 나오는 땀엔 못 이기는 법이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자극적이었다. 이시온과는 대조적으로 볕이 아니라 태생부터 짙은 피부색을 가진 사내였다. 어두운 표피는 젖으니, 액체가 아니라 오일을 바른 듯한 착각을 불렀다.

살짝 핏기가 없는 분홍빛이었던 입술은, 어느새 살짝 조린 팥과 유사한 색을 띠었다. 한 번 헤집어진 탓에 축축해지기까지 했다. 그 사이가 속절없이 벌어졌다. 태환의 무릎이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갔다. 잔뜩 힘이 들어간 허벅지 힘을 빌려 허리를 내렸다.

“…아.”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시온의 살기둥이 얇은 레이온 위에 미끄러졌다. 언더웨어마저 딱, 붙게 착용하는 게 태환의 취향인 탓이었다. 덕분에 귀두 위로도 갈라진 틈이 느껴졌다고 하면 너무 심한 과장일까? 하지만 시온에겐 확실히 전해지고 있었다. 예민한 성기 끝에 전부 그려질 듯이. 상투적인 표현일지도 모르나 그것이 진실이고 진심이었다.

언제 젖었냐는 듯이, 입안에 열기가 돌더니 텁텁해졌다. 사흘 밤낮 목을 축이지 못한 부랑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태환의 공들여 고정한 머리카락이 한 올, 두 올씩 흐트러졌다. 아래를 주시하느라 여념이 없는 고개를 따라 같은 방향으로 너울대고 있었다. 태환이 흉통을 울리며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안달이 난 주제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걸 보고 있자니, 제대로 가르쳐야겠단 마음이 들었다.

“손.”

딱 개를 훈련하는 행위였다. 눈앞에 손바닥을 내밀고 짧은 명령어를 뱉는 것 말이다. 흡. 숨을 삼킨 시온의 눈가 밑 애교 살이 적나라하게 떨렸다. 자연스럽게 내밀어져 나오는 팔목도 떨린다. 태환의 눈썹 한쪽이 위로 솟았다. 왜 이렇게 오들오들 떠는지 모를 일이지만, 아니. 알 법했다. 원래 갓 태어난 존재는 세상에 첫발을 내밀 때 그러곤 하지 않는가. 떨던지, 울던지. 권태환은 쉽게 납득했다.

손가락이 채 닿기도 전이었다. 시온의 눈에 들어차던 당황이 갑자기 태세를 바꿨다. 몇 번 눈꺼풀을 깜빡이더니 멋대로 뛰던 박동이 갑자기 진정된 것만 같았다. 실상은 진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눈이…. 제정신이 아니네. 태환은 단박에 눈치챘다. 달아오른 표피에 보기보다 단단한 손바닥이 닿았다. 골반 위를 덧그리는 엄지에는 굳은살이 느껴졌다.

손을 달랬더니, 발칙한 강아지는 그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러더니 소지로 브리프 밴드 사이로 파고들었다. 하필 새끼손가락이라니. 헛웃음을 지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종이 잡히지 않았다. 지배자는 제 아래에 깔린 이목구비에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잠깐 고개를 모로 숙였다가 바로 세웠다. 뭘 하려는지 봐주겠다는 의도가 담긴 눈길이 시온을 주시했다. 그의 육체는 무른 부분이 없었다. 오히려 질릴 정도로 탄탄한 둔부 위를 부드러운 원단이 매만졌다. 손가락 마디에 힘이 단단히 들어가 있었다.

“하….”

여유가 담긴 짧은 호흡이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달아나기 전에 금세 삼켜진 숨이 빗장뼈를 열었다. 서서히 내려간 속옷 위로 느껴지는 팽팽한 질량감이 존재를 드러냈다. 젖었다고 핀잔을 한 이가 누구였나. 태환의 앞섬은 미묘했지만, 확실히 체액으로 인해 도드라지게 진해진 부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더는 웅크리기 쉽지 않다고 피력하듯 잔뜩 당겨진 나일론이 애처로워 보였다. 애처로움과 권태환이라니 그만큼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없었더라도 말이다. 중요한 건…. 누가 봐도 흥분해 있다는 증거라는 점이었다.

시온의 어금니가 입 안쪽 여린 살을 깨물었다. 여린 점막이 무참히 짓 씹혔다. 홀쭉해진 뺨 위로 숨어있던 보조개가 하나가 보였다. 그는 활짝 웃는 일이 드물기에, 어렸을 때 태환이나 간간이 볼 수 있었던 짝 보조개였다. 태환은 망설이지 않고 그것을 더듬으려 했다. 반가운 감정이 들 정도로, 제법 그리웠었나 보다. 팔은 뻗어지고, 자연스레 하체가 들썩였다. 그러자 예상치 못하게, 브리프가 내려가는 속도가 빨라졌다. 시온의 물건보다 살짝 짧아질 뿐이지 굵기로는 훨씬…. 어쨌든 만만치 않은 양물이 직물의 짜임 사이에 긁혔다. 헉. 헛숨을 삼키던 등허리가 가늘게 떨렸다.

드러난 살기둥이 튕기듯 흔들리더니, 곧 잠잠해졌다. 잔상이 생기지 않으니 관찰은 더 수월해졌다. 이시온의 눈은 못으로 변했다. 박혀서, 떨어질 줄 몰랐다. 둔부의 골에 자리한 성기는 곧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이 정도면 오래 끌었지. 태환이 아까 전, 제 엉덩이를 차지한 성기를 쓸었던 손을 들었다. 땀 때문인지 옅어지긴 했으나 여전히 점성이 남아 있었다. 검지와 엄지가 맞닿았다 떨어진다. 가는 실이 조명을 받아 존재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이건 좀 그렇지.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반대쪽 팔을 들었다. 너는 내 말에 따라야 하고 내 말도 전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뜻이 역력히 드러나는 표정으로. 분명히 그의 하체는 훨씬 아래 있건만. 손가락이 성기를 대신하고 있었다. 시온의 입가가 아픔이 느껴질 정도로 당겨졌다. 끝에는 엄지가, 아랫니를 벌리는 건 약지였고 검지와 중지가 혀뿌리를 쓰다듬었다. 자극당한 침샘이 체액을 뚝, 뚝 흘렸다. 침입자는 액체가 목구멍 안으로 도주하는 걸 두고 볼 마음이 없었다.

“잘 적셔야지, 옳지.”

무의식적으로 벗어날 준비를 하던 혀가 멈췄다. 혀도 귀엽게 생겼네. 태환은 그런 시답잖은 감상에 빠졌으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욱. 그의 시온은 생긴 것과 다르게 비위가 강했다. 하지만 안쪽 억지로 파고드는 손길엔 어쩔 수 없는, 생리적인 반응이 따라왔다. 그런데도 물거나 뱉지 않았다. 기특했다.

혀, 그 붉은 세포 덩어리가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말간 물과 닮은 체액이 자꾸만 입 밖으로 빠져나왔다. 시온의 혀가 생기다 만 갈퀴 같은 부위부터, 역으로 마디를 쓸었다. 손목이 자연스레 비스듬히 꺾였다. 그새 엄지가 떨어졌다. 알아서 빨아주겠다는데 마다할 필요가 없었다.

침묵 속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태환이 삐져나온 엄지로 시온의 턱을 두드렸다. 그의 손가락은 충분히 젖었다. 어차피 콘돔이나 젤 따위가 있을 리가 없는 공간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걸 바르자니, 아무리 이시온을 삼키더라도 비위가 상할지 몰랐다. 그랬다. 그는 제법 섬세한 편이었다. 귀하게 자란 놈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래도 덕분에 보기 좋은 그림도 감상했지 않은가. 그가 허리를 바로 세우며 코로 긴 숨을 뱉었다. 잘 핥아진 손가락이 서서히 뒤를 향했다.

“…윽.”

치아가 빠듯하게 맞물려 갈렸다. 젠장, 과 같은 꼴사나운 음절을 뱉기는 싫었다. 다만, 그런 태환을 시온이 모를 리 없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흐르고 흥분에 눈이 흐린 상태라도 말이다. 그가 어떻게 스스로 입구를 덧그리는지, 얼마큼의 힘으로 그 위를 벌리는지. 전부 뭉뚱그려졌으나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더 모를 수가 없었다.

그때, 문뜩 시온의 뇌리에 어떤 기억이 스쳤다. 열아홉 먹은 어린애에게 너무도 완벽한 형이었던 권태환이었으나 되새겨보면 헐렁한 구석이 있었다. 빠듯할 게 확실한 비문과는 다르게. 귀찮아. 재미없어. 다 시시해. ‘형’이 곧잘 달고 다니는 말이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흥미나 관심이 없고 늘 갖춰지고 선택된 환경, 물품만 사용하는 이였다. 그런 성격의, 그런 권태환이…. 제 눈앞에서 절대 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일을, 새롭다 못해 경이롭다면 경이로울 만큼 꺼릴 일을 손수 하고 있었다.

“아…. 흔, 권, 시온.”

행동이 의식을 따랐다. 날개뼈와 어깨가 들리고, 팔이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경기가 아니라 혼자 자유롭게 물 위를 떠다닐 때처럼. 섬세한 동선은 목표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예상보다도 더 뻑뻑한 틈을 파고드는 손등뼈에 시온의 손바닥이 닿았다. 수영장 안을 채운 물처럼 미적지근하던 온도는 어디 갔는지, 이젠 절절 끓듯 뜨겁게 인식될 지경이었다. 시온의 두 눈은 여전히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은 그 구멍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아도 일단 한 번은 참겠다는 것처럼. 태환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허락을 구하는 걸까, 제 차례를 주장하는 걸까. 물기를 빼앗듯 비비적거리던 손가락이 태환의 것을 슬며시 밀어냈다. 그래봤자 말라 있었는데 그래도 뭔가가 다른 것만은 확실했다.

“으음….”

낯설어 하던 목소리가, 삽시간에 다른 색을 드러냈다. 그저 손가락의 주인이 바뀌었을 뿐인데. 조여있던 근육이 풀리며 복 부위에 수 놓인 근육이 짓씹던 셔츠를 뱉어냈다. 어느새 느슨해진 베스트의 단추가 헐거웠다. 이미 다 새어 나온 것 같던 체액이 그새 입을 메꿨는지 시온의 목젖이 요동쳤다. 손가락 끝이 자꾸만 안으로 말려들어 간다.

“읏.”

태환이 별안간, 시온의 뿌리를 잡아챘다. 왜 이렇게 꿈틀대나 몰라. 모르긴 뭘 모르겠는가. 그가 낮은 웃음을 던졌다.

“시,온아. 지금…. 허, 싸면 안 되지.”

다른 팔은 어느새 침범하던 쪽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으응, 비음이 섞인 신음이 길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아래를 향한 건 음성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조금이나마 힘이 풀린 둥그런 둘레가, 귀두를 눌렀다. 시온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한다. 잔잔했던 수면에 불꽃이 튄다. 구겨진 미간과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듯한 눈동자에는, 이전과 같은 차분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신이 못내 부끄러운지, 촘촘한 속눈썹이 몽땅 젖어있었다.

“읏, 이런, 낯도…. 허, 할 줄…. 알고.”

정말 다 컸다니까.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즐겁다 못해 뱃속이 이글거리는 게 단박에 태가 났다. 시온의 눈매가 슬쩍 뾰족해졌다. 그래봤자 큰 위압감은 없었다. 숨이 타고나기를 넓고 단단하게 구성된 어깨뼈를 흘러내려 흉근까지 씨근덕대고 있는데 무서울 리가. 애교처럼 보일 뿐이었다. 태환은 계속 목울대를 울리고 웃었다. 그 울림이 뱃가죽까지 닿았다. 이 짙은 미소가 무슨 뜻이냐 하면,

“뭐가, 그렇게…. 재밌는, 흐응….”

“재밌, 응, 재밌어.”

태환의 장골이 비틀렸다. 다분히 고의적이고 계산적인 행위였다. 빠듯하게 조여와 안달이 난 살 기둥을 부러 귀여워해 주겠다는.

“내, 시온이…. 형, 안에 얼마나 쏟아, 허…. 부으려나….”

기대가 돼서 재밌어 죽겠네. 아니, 죽으면 안 되지. 태환의 뒤가 완전히 벌어졌다. 곧고 예쁜데 굵은, 작은데 절대 작지 않은 권시온을 품은 채로.

*

열일곱의 ‘권시온’은 하루 대부분을 헤엄치는 데 소비했다. 그날도 별다른 일 없이, 그는 연습에 매진하다 잠시 빠져나와 있었다. 잠깐의 휴식 시간을 줬기 때문이었다. 홀로 한 무리의 인영들을 바라보던 중이었다. 불현듯 예기치 않은 공상이 떠올랐다. 인공적으로 끝과 끝이 규격 되어 만들어진 물이 아니라 바다에서 경기를 해야 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시온은 상상에 빠지는 것과는 거리가 먼 편이었다. 주로 실제로 일어날 법한 일을 가정하거나 추론하여 사색에 빠지는 일은 잦았어도 자신이 겪지도 않을, 겪을 리도 없는 일을 부러 떠올리진 않았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때 당시는 제법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었다. 시간대는 낮이겠지. 그럼 거리는? 그는 자유형 선수이니 선택지는 다양했다.

그래도 무대가 바다라면 50m나 100m는 너무 짧다 싶다. 그렇다고 1,500m는 너무 멀다. 수온이나 환경 따위가 전혀 다를 테니까. 가둬진 물이 움직이는 건, 사람이 들어갔을 때뿐이다. 바다는 그렇지 않다. 여러 가지 예측 불가능의 요소들이 거대한 표면을 이끌었다. 부력도 더 크니 더 큰 피로가 뒤따를 것이었다.

그리고 몽상은 유유히 흘러, 어느 한 지점에 도달했다. …굳이 경주를 필요는 없지. 그럼 아무런 의도 없이 드넓은 바다에 뛰어든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조금 다른 원점이었다. 소년은 한 번도 바다에 몸을 담가 본 적이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런데 어째서 이런 마음이 들게 된 것인지, 답을 알기가 어려웠다. 그때, 그의 귀에 습기에 차 크게 올리는 목소리가 꽂혔다.

‘얘가 어디… 아, 저기 있네. 권시온! 여기, 이리 와봐라.’

수영장 기둥에 등을 댄 채 서 있던 시온이 고개를 들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말간 얼굴에 달라붙은 채였다. 창문을 타고 넘어온, 이제 막 저무는 햇살이 여린 얼굴을 덮었다. 코치가 과장스레 팔을 흔들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는데 이곳에 멀쩡한 의복을 갖춰 입고 들어온 걸 보니 협회 인이거나 대학 관계자이지 싶었다.

‘형’이 다니던 모교에 입학 한지, 이제 막 반년이 된 시점이었다. 그가 이곳을 졸업한 지가 벌써 여러 해인데도 모두가 자신만 보면 권태환의 안부를 묻고, 친한 척을 하고, 입으로 옮겨진 그의 모습을 읊어댔다. 맞다. 오늘도 그렇게 그들이 말하는 태환에게 둘러싸이기를 피하려고 딴생각을 품었던 것이었다. 그럼 어째서 바다였던가. 물살을 가르는 감촉이 완전 다르겠지. 수영장은 푹 잠겨도 몇 분만 참으면 되지만, 심해에 잠기면 바닥을 딛고 발을 차는 건 꿈도 못 꿀 터였다. 닮았다. 누구를? 어찌 되었든, 자신이 바다를 가르는 건지, 자신이 바다에 빠지는 건지 모를 경험이 되겠구나. 애써 방향을 돌렸다. 현실로 돌아와야 할 때였다.

‘…네.’

시온이 불린 곳으로 향하였다. 더딘 속도였고, 발바닥에는 넘친 물이 달라붙었다.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체험을 더듬는 척, 끝까지 누구를 떠올렸는지를 숨긴 채, 소년의 작은 일탈은 허무하게 끝맺어졌다.

*

“으응, 너,무 조… 여서, 흐…”

시온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이 와중에 그때가 떠오르다니, 어지간히 중증이구나 싶었다. 달 뜬 신음이 입 밖을 뛰쳐나가고 싶다고 아우성이었다.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는 분명 평소보다 낮은데, 저가 뱉은 소리가 아닌 것처럼 음탕한 구석이 있었다. 자각은 있는지, 귓바퀴의 색이 엉망진창이었다.

분명히 물살을 가르고 부상하려 노력하는데도, 막상 끝없이 잠기는 듯한 감각을 상상했던 시절이었다. 누구를 빗댄 건지 애써 부정하던 때였다. 일어나지 않을 일이던 망상은 현실이 되고야 말았다. 결이 약간 다르긴 하더라도.

“누가 먹히는, 건지… 아, 모르겠, 다. 흣, 그렇지… 권시온?”

제 뇌를 헤집어본 것도 아닌데, 태환이 시온의 상념을 꽤 유사하게 잡아냈다. 날카로운 감이었다. 시온은 대답 한 번 하질 못하고 헐떡였다. 원목 조각으로 짜인 바닥이 비명을 내지른다. 혹사를 당하고 있음을 토로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위를 차지한 둘 중 누구 하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 벗어내지 못한 상의의 처지도 처량하긴 마찬가지였다. 주인의 몸 위에 내려앉은 채 앞뒤로 움직이는 무게를 받아내느라 자연스럽게 말아 올려지고 사정없이 구겨지고야 말았다. 얇은 니트에 등이 쓸렸을 게 분명했다.

그마저도 시온은 몸에 상처가 나든 말든, 안중에 없었다. 바다에 빠진 사람이 거기까지 신경이 닿을 리는 없지 않은가. 삐걱거리는 소음과 어지럽게 섞이는 숨소리, 점점 잦게 뱉어지거나 들리거나 하는 거친 호흡의 흔적. 이 모든 구성이 이다지도 시끄러운데, 시온의 이성은 흐려질지라도 감각은 되려 명쾌하기 짝이 없었다. 태환은 이럴 때마저 위에서 내려오질 않았다. 기회 겸 권유는 한 번 건넸으니 두 번은 필요 없다는 듯, 시온의 움직임을 최대한 제한했다.

“씹…”

탁하게 깔린 음성에 욕이 섞였다. 태환의 언사는 은근한 구석이 있었다. 대놓고 비속어를 뱉진 않으나 어투나 단어 선택이 상대를 긴장하게 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된 발음을 입에 올리는 건 딱 두 가지 경우였다. 무언가가 굉장히 거슬리거나, 뭔가가 지나치게 흡족할 때. 살기둥 주제에 소유주를 똑 닮아 예쁘게 생겼더라도, 그래 봤자 성기였다. 생김새가 아무리 매끈하고 주제넘게 곱더라도… 꽤 두껍고 길었다. 얼마나 피가 몰려있는지 딱딱하기까지 했다.

사내놈의 좆, 이 내뱉을 줄만 알았던 구멍을 받아들이는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자꾸만 분명 유쾌할 수가 없어야 맞을 텐데, 또 허리를 흔들어대는 건 제 쪽이다. 방금의 욕지기는 아주 명백히 후자에 치우쳐 있었다. 태환이 걸친 조끼가 이미 어깨에서 벗어나 버린 지 오래였다. 거세게 흔들어 대는 몸체를 붙들고 있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씨근덕대다, 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들이마시고 내뱉어지는 숨이 자꾸만 셔츠 사이를 벌려댔다. 과연 값어치만큼이나 튼튼하게 붙들려 있던 단추들의 신세가 참으로 처량했다.

그리고 시온의 눈은 의복의 몸부림 사이로 언뜻 보이는 살결에 박혀버렸다. 흐, 하. 자각하지 못한 채 짓씹은 입술 사이로 뭉개진 발음이 새어 나오는지도 모르는 채였다. 애무도 뭣도 없었다. 이시온은 예쁜 것을 예쁘게 세우고 힘줄이 돋은 손을 쥐었다가 피기만 했다. 가끔 저도 움직일 수 있다는 듯 비틀어지는 허릿짓은 번번이 방해를 받았다. 권태환은 아까부터 요동치는 시온의 가슴께를 제 팔로 누른 채 무게를 실었다. 깔린 이의 성대가 떨리고 있었다.

“읍, 흐응…”

움직이는 건 나야. 널 쥐고, 아니. 네 것을 품고, 씹고, 소유하는 건 내 몫이야. 오직 나만 이럴 수 있어. 의도가 빤했다. 그러나 순응하고 삼켜지는 일 말고, 시온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어떤 반항도 하고 싶지 않았다. 흐려진 머리가 솔직해졌다.

“…허, 이…것봐… 흐읏, 라.”

앙칼진 점도 닮았네. 마디가 선명한 손가락이 제 배 위를 쓸었다. 시온처럼 제모를 한 건 아니지만, 이마저도 깔끔하게 정리된 체모가 손끝에 걸렸다. 그리곤 점점 위로 올라가더니 움푹 파인 배꼽을 지나 잘 갈라진 뱃가죽에 닿았다. 푸욱, 허리를 끝까지 내리고 잠시 멈췄다. 그러고 보니 누가 봐도 철저한 통제 아래 가꾸어진 복근 위의 모습에 위화감이 있었다. 움푹 팬 흔적 바로 위, 그곳이 불뚝 튀어나와 있었다. 엄지가 그 위를 쓸자, 시온의 허벅지가 요동쳤다. 고개는 한껏 뒤로 젖혀져 목 밑이 까맣게 보일 정도로 빨개져 버렸다. 이젠 신음도 뱉지 못했다.

이쯤 박힐 때, 박을 때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기둥이 여기까지 파고들 때마다 귀두가 툭, 하고 튀어나온 어딘가를 건드렸다. 느낄 수 있을지 의문이었던 적이 있기는 했느냐는 듯 그때마다 점막이 죄여졌다. 꼭꼭 씹어 놓아주지 않을 것만 같이. 어느샌가 태환의 살기둥도 잔뜩 서서는, 끝에서 체액을 뚝뚝 흘려댔다. 배 위로 쓰다듬은 성기가 한계라는 듯, 자꾸만 치고 올라오지 못해 안달이었다.

슬슬 놔줄까. 그의 손이 제 앞섬을 쥐려고 하는, 그 찰나였다. 동맥을 누르는 힘이 거셌다. 얼마나 힘을 줬는지, 시온의 손끝이 하얗다 못해 푸른빛이 돌았다. 아까까지 그렁그렁할 줄 만 알았던 눈매가 가늘고 매서워진 건 덤이었다. 그래 봤자 귀여운 수준이었지만, 하고 싶은 주장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 이 와중에 박는 건 저라고 앞은 만지지 마라? 사내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고, 내벽이 떨렸다.

“큽, 그래… 보통 동, 생이… 윽, 머리, 굵어… 하으, 지면… 이겨, 먹으려… 아, 든다지.”

즐거워서 견디질 못하겠단 투였다. 시온의 입가가 씰룩였지만 그뿐이었다. 태환의 시선에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발가락 끝이 자꾸만 안으로 곱고 있었다. 잠시 멈춰있던 태환이 시온의 손을 털어내더니, 역으로 그의 손목을 잡아 가뒀다. 도착지는 샅이었다. 뿌리가 존재하는 곳. 그의 손길이 시온을 이끌어 어르듯, 가르치듯 끝을 잡게 했다.

“후, 잘… 잡고 있어.”

숨을 내뱉음과 동시에, 태환의 다리 힘이 느슨해졌다. 자연스럽게 웅크려있던 몸의 제한이 풀렸다. 시온은 묻지 않았다. 두 눈엔 의문이 가득했고, 상대는 제 뜻을 다 읽을 테니 딱히 필요 없었다. 지배자는 너그럽게 상체를 숙였다. 땀에 젖은 피부가 귀 뒤에 달라붙었다 떨어졌다. 입술이 귓불에 닿았다.

“허, 락할게. 혹시 모르지. 시온이가 허리, 흡, 잘 흔들면,”

상스럽게도, 믿기지 않지만, 그 권태환이 요분질을 하고 있었다. 시온의 성기로 잔뜩 벌려진 입구가 맨살 위로 똑똑히 느껴졌다. 골반만 비튼 게 아니었다. 움찔거리기는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다시금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어진 시온이었다.

“…형이 ‘뒤’로 가, 줄지.”

그러나 피지배자는 감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육체적으로는 물론이고, 정신적으로 너무 몰린 탓일까. 전신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만 같았다. 가늘고, 가련해 보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태환의 콧등이 구겨졌다. 지금, 뭐가 제 안을 채우고 있는 걸까. 분명 정액은 아니다. 훨씬 묽었다. 꽉 들어찬 성기를 비집고 흘러내리는 액체. 하. 놀랍다는 듯이 밑을 바라보니, 시온의 눈가에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이 삐져나오고 있었다.

적잖이 놀랐나 보다. 시온의 홍채가 울음을 참지 못한 채 이리저리 흔들렸다. 제 손길 하나에도 잔 떨림을 보이던 게,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야 안 하던 짓을 한다. 참을 수 없게 깜찍한 꼴이었다. 여전히 시들지도 못하고 가늘게 떨고 있는, 작진 않고 굵고 긴 ‘이시온 혹은 권시온’의 분신이 쏟아낸 액체가 제 뒤를 채우고 있음에도 태환은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권시온, 아무튼 물 좋아해… 후, 이렇게… 흘리고 다니, 으응… 다니면 쓰나.”

“…제발 입 좀, 허윽, 닫…아요.”

“닫긴…씁, 뭘 닫아, 시온아. 구멍… 여물고 있기도, 버거운걸.”

아. 이내 당황으로 물든 입술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내는 동요하는 척 한 번 해주지 않은 채, 그렇게 즐거운 티를 감추지 않았다. 몇 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세우기만 하는 게 아니라, ‘형아’ 안에… 큽, ‘분수’도… 싸고. 많이 발칙해졌네.”

얼마 안 되는 틈 사이로 물이 흘러나왔다. 삼킨 쪽과 삼켜진 쪽, 모두가 젖어들어 있었다. 권태환은 소리를 내 웃다가 서서히 무릎을 세웠다. 이제 그가 담고 있는 기둥은 겨우 반절이었다. 놓기 싫다는 듯 붙들어 댄다 한들, 괴로운 건 시온뿐인듯했다.

“으, 흐으….”

“그래, 그래. 나도 아쉽, 지만 뒤로 가는… 거 보여주는 건, 하, 다음에… 해야, 겠다.”

그가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자마자 또 눈동자가 바빠졌다. 이번 흔들림은 뜻이 좀 달랐지만. 딱 보기 좋을 만큼만 도톰한 입술이 빠끔거렸다. 그래놓고 한풀 죽어야 마땅한 살기둥은 다시 부피를 키우고 있었다. 성실하다 해야 할지, 되바라졌다 해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안에 점성이 없는 체액이 아직도 고여있으니 찝찝해야 하는데, 웃기게도 뱃골이 당기고, 입안에 침이 고였다. 하지만,

“너도 불혹, 인지 뭔지 돼보던, 가.”

둘 사이에 거리가 생겼다. 후두두, 하고 떨어지는 액체가 시온의 배 위로 쏟아졌다. 곧이어 태환이 그의 뺨을 툭툭 쳤다. 더 놀자는 어린 동생을 달래듯, 손길은 과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교훈을 일러주는 것도 잊지 않으며.

“…그러게 왜 몰래 달아났, 어. 후우, 내가 좀 더 젊었을 때 따먹었어야지.”

그래서, 이 닭장에 욕실은 있나? 권태환은 아무렇지도 않게 욕실을 찾았다. 어색한 구석, 하나 없이.

*

“그래서… 뭘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굶주려있는 걸 배불리 먹여놨더니, 위가 채워지니 마음이 달라졌나 보다. 이걸 보통은 화장실 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고 하나? 제 안을 가득 채웠던 체액도 배설이라면 배설이니, 그 문장이 더 적절할지도 몰랐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못마땅한 건 못마땅한 거다. 태환의 입매가 비뚜름해졌다. 솔직히 말하면 손바닥 뒤집듯 달라지려고 안달인, 앙큼한 꼴과 태도는 괜찮았다.

이 좁아터진 상가주택의 화장실 겸 욕실은 하나뿐이다. 그리고 약 30분 동안 차지하고 있었으니 시온이 몸을 씻을 공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베란다에 놓인 세탁기가 시끄러웠다. 거실에 놓은 앉은뱅이 탁자엔 여벌 수건이 놓여 있었다. 싱크대 수전은 막 잠긴 듯 여분의 물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권태환은 이시온의 행색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살폈다. 니트도, 안에 받쳐 입었던 얇은 긴소매 티셔츠도 없다. 회색 끼가 많이 들어간 연하늘색 맨투맨과 실내용 면바지는 딱 봐도, 이때껏 접어두었다가 막 펼쳐 입은 모양새였다.

대충 수건을 적셔서 몸을 닦고 마른 걸로는 머리를 털었을 테다. 군데군데 얼룩져버린 옷은 젖은 타월과 함께 넣어 돌리고 새 옷을 갈아입었겠지. 짧은 시간 안에 여벌이 없을 게 뻔한 제 옷가지도 최대한 다듬어 놓고 말이다. 혹여 구김이 더 심해질까 반듯이 걸어놓은 채였다. 못마땅한 지점이 바로 이거였다. 여전히 지나치게 부지런하다는 것.

“좀 기다렸다 제대로 씻지. 형이 청결은 중요하다고 했을 텐데.”

권태환은 권시온 앞에서 자주, 자신을 형이라고 칭했다. 그렇게 부르는 걸 흡족해하기도 했고. 재회 직후에는 그런 기색이 없더니 버릇이 또 도졌다. 이시온은 굳이 그걸 짚어내지 않았다.

“…몇 살 때 이야기를. 저 내일모레 서른입니다.”

“그걸 누가 몰라? 너야말로, 나는 작년에 마흔이 넘었어.”

언뜻 열락에 정신을 못 차릴 때, 그 비슷한 소리를 한 듯도 했다. 불혹이 어쩌고. 시온은 눈이 큰 편이다. 아몬드처럼 생겨선, 살짝 옅은 눈동자는 빛도 잘 반사해낸다. 그런 눈매가 커다랗게 떠져 있었다. 옆 한 번, 위를 한 번 돌더니 곧이어 입술이 몇 번 오물거린다. 맞다. 그렇다. 나이와 세월은 모두에게 공평했다. 어안이 벙벙한 낯짝에 어이가 없는 건 태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요, 압니다. 따위로 말대꾸를 할 줄 알았더니. 막상 결정적으론 어린 소년 때와 같은 모습을 보였다. 단단해진 것 같다가도 그 시절만큼이나 물러서 금세 기분이 풀린다. 비소를 닮았으나 뜻은 전혀 다른 웃음이 새어 나왔다.

권태환은 대형 타월 한 장을 허리에 둘렀을 뿐인 행태 그대로, 시온이 앉아있는 소파로 향했다. 선객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제 옆에 앉으려나 하는 불안 혹은 기대 탓이었다. 거실에 놓인 소파는 3인용이었다. 다른 가재와 동일하게 스승이 두고 간 걸 물려받은 듯 사용하고 있는, 낡은 다인용. 시온은 가장 안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태환은 가운데가 아닌 가장 반대편 팔걸이에 팔을 디뎠다.

밀착되는 일은 없었다. 중앙에 어색한 여백이 생겼다. 이시온의 눈꺼풀이 분주해졌다. 몇 번인가 연달아 깜빡이던 눈이 아래로 내려갔다. 괜한 걱정을 했구나. 그게 과연 걱정이었을까? 머리를 작게 털어도 민망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등받이 쿠션이 안쪽으로 깊이 들어갔다. 태환은 거리낌 없이 등을 묻고 다리를 꼬았다. 오른쪽 매듭이 들썩거렸다. 늘 노출된 부위의 피부색보다 덜 짙은 허벅지가 그 틈을 비집고 나왔다.

마른침을 삼킬 뻔하기 직전, 태환이 고개를 젖혔다. 그대로 눈동자만 안쪽을 향한 채였다. 이시온이 어딜 보고 있는지 정확히 가늠하기 어려운 각도였다. 대신 귀 뒤가 보였다. 미처 닦지 못한 물방울이 눈에 띄었다. 여전히 붉은 기가 역력했다. 제 말대로 스물아홉이라기엔 너무도 보드라운 귓불이었다. 태환의 검지와 엄지를 붙인 채 비볐다. 아쉽나? 그럴지도 몰랐다.

곧 그러다 말았다. 곧이어 약지가 무릎 위를 툭툭 쳐댔다. 딱히 리듬은 없었고 그저 느릿한 듯 날카로운, 보기보다 일정한 박자만이 존재했다. 시선은 계속 시온에게 가 닿았다. 기울인 반대쪽의 승모근이 가늘게 약동했다. 눈은 점점 곡선을 타고 흘렀다. 무른 감촉의 귓불을 가진 이는. 절대 가늘지는 않지만 제법 사슴처럼 긴 목을 가지고 있었다.

희여멀건한 뒷목으로 끝만 바싹 정리한 머리카락이 보였다. 보일 듯 말 듯 한 목등뼈 뼈 위가 복숭아색이었다. 이것도… 여전하고. 태환이 솔직하게 감상했다. 불사의 존재는 없다. 불멸하는 것도, 불변도 같았다. 그런데 왜 새삼스레 놀라웠을까. 시온은 뜬금없는 자기 고찰을 속으로 삭여내느라 태환이 제 목덜미를 감상하는 중인지 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대답을 재촉할 타이밍을 완전히 놓쳐버렸다. 시온은 괜히 잘 접어놓은, 애꿎은 수건만 다시 폈다 접었다 반복할 뿐이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태환은 실소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겨우 몇 분 전엔 야무지게 저도 성인이라며 가르치더니, 저 꼴은 열여덟 혹은 열아홉 때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꿀이라도 집어먹은 것처럼, 숨을 참고 잠수라도 하는 것처럼. 흐응. 남자는 낮은 비음을 뱉었다. 그때야 간신히 정신을 차린 시온이 얼굴을 들었다. 그러나 시선은 여전히 반쯤 내리깐 채였다.

“버터크림은 별로야. 입안에 겉돌아서.”

“…예?”

“기억하지, 나 단 건 안주로만 먹는 거.”

태환이 잠시 주방 쪽을 주시하다 콧방귀라도 뀌듯 빠르게 눈을 거뒀다. 한창때는 느려서 그렇지, 먹는 양이 제법 되던 시온이었다. 냉장고가 제 키보다도 작군. 들여다보지 않아도 뻔했다. 저 안에 뭐 얼마나 많은 식재료가 들어가겠는가. 그에 더해 주류가 있을 거라곤, 더더욱 기대할 수 없었다. 아래로 내려가면 제과에 쓰는 코냑, 럼 정도는 있을 테지만, 용도가 너무 달랐다.

“…그래. 스물아홉 먹은 권시온, 어른 된 기념으로 술부터 가르쳐주려고 했는데… 박는 법부터 알려준 셈이 돼버렸네.”

입안에 뭘 품고 있지도 않았는데, 당혹감이 크니 알아서 사레가 들렸다. 크지 않은 기침 소리가 몇 번 튀어나왔다. 제 성격과 다르게 딱딱하게 굴려고 하니 저런 사달이 났지. 태환의 눈썹 한쪽이 들렸다. 겨우 기침이 멈췄다. 쿨럭이며 들썩이던 몸이 잔잔해지자 시야각도 훨씬 넓어졌다. 사내는 여전히 제멋대로 엉뚱한 답변만 늘어놓는 와중, 시온은 다른 부분이 신경 쓰였다. 치켜들은 턱 선이 마지막 기억보다 훨씬 날렵했다. 현재의 권태환은 누가 봐도 위압적일 정도로 건장하지만, 10년 전에 비하면 확실히 살이 내려있었다. 눈 밑도 좀 더 깊어졌나.

그는 자기관리를 숨 쉬듯 하는 인종이었다. 그건 지금도 똑같을 텐데, 손등 위에 돋은 핏줄이 도드라진다거나 뼈마디가 선명한 걸 깨달았다. 실컷, 아니. 적당히 뒹군 후에야 말이다. 술이라. 의식이 말의 흐름을 한발 늦게 되새겼다. 권 씨 저택에 있던 소파는 이것보다 훨씬 더 컸다. 구성원은 셋 그리고 하나뿐인데도 4인용 소파가 두 채, 1인용 소파가 한 채였다.

권태환의 지정석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잘 보이는 쪽에 있는 다인용이었다. 늘 연습이 끝나고서야 귀가하는 시온을 확인하려는 의도가 잘 보이는 위치 선정이었다. 시온이 고등학생이 된 후, 개인교습이 길어지면 아홉 시를 넘겨 돌아오는 날이 하루 이틀 늘어난 뒤의 일이었다. 그는 제 양친이 있든 없든, 사용인들이 돌아다니고 분주하든 말든 지금과 같은 자세 그대로 앉아 위스키를 마시곤 했다. 얼음의 여부는 그날그날 달랐다.

새로 생긴 습관은 또 하나 있었다. 잔을 비워내는 동안 왼손 두 개의 손가락 끝을 붙여 비비적거리는 행위였다. 태환은 흡연을 했었다. 권시온이 열다섯 때쯤인가 저를 와락 안은 그에게 반사적으로 담배 냄새가 난다고 우물쭈물 말했던 때부터, ‘형’은 금연을 했다. 불가항력처럼, 그래도 음주 중엔 당기는 편인지 무의식적으로 연초 필터를 굴리는 손동작을 했던 것이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으면, 기둥 뒤의 저를 알아채고 움직이던 손가락을 들어 까닥였다. 이리 오라고.

회상이 멈췄다. 제 몸이 사정없이 기울어져 있는 탓이었다. 어느새. 인력이라도 작용한 듯싶었다. 그에 맞춰 태환의 얼굴도 점점 시온에게 맞춰져 있었다. 앉은키는 이제 거의 차이가 나질 않는데, 왠지 내려다봐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파티쉐라니. 꽤 의외였는데… 준비해 놔. 어느 정도 실력인지 좀 보자.”

철이 들었다, 원숙해졌다, 유순해졌다? 전부 타당치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던 서른하나의 그였다면, 사고 같은 고의로 비롯된 좀 전의 정사를 빌미로 틀어잡고도 남았을 텐데. 자신의 거주지 근처에 살 곳을 구해두겠으니 내일 들어오라는 식으로 말이다. 예측은 완전히 깨졌다. 태환은 손을 까닥이지 않았다. 우연일지는 모르겠으나 그때와 같은 쪽, 같은 손가락을 들어 시온의 목덜미부터 시작해 목젖을 지나 턱을 쓸어올렸을 뿐이었다. 시온의 수면이 또 조심스레 흔들린다.

“혹시라도 아내분이 오면 제가 따로 연락을 드릴 테니…”

사내의 입술 사이로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하. 이 정도면, 그에게 있어선 폭소였다. 발악은 순식간에 무산되었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태환의 척추가 둥그스름하게 굽었다. 뭐 얼마나 웃겼길래, 가늘게 떨기까지 했다.

“또 젖겠다. 그건 씻으면서 알아서 해 봐.”

천천히 고개를 든 사내의 답변은 엉뚱한 말이었다.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란 뜻이다. 시온의 시선이 제 다리 사이에 닿았다. 왜 저런 말을 하나 했더니, 앞섶이 감출 새도 없이 부풀어 있었다. …뭘 했다고. 어쩐지 자꾸만 하의가 갑갑하다 싶었다.

이시온이 어이가 없어서 눈을 깜빡이든 말든, 태환은 가구 귀에 둘러져 있던 옷을 집어 들었다. 잘 걸쳐있던 옷가지가 나신을 감쌌다. 군더더기가 많고 제한되는 것도 많은 게 정장이니 입는데도 시간이 오래 걸릴 만도 한데, 너무도 익숙한 덕분인지 물 흐르듯 빠르게 진행됐다. 아쉬워 입맛을 다실 뻔할 정도로. 시온의 코끝이 물들었다. 마지막으로 커프스를 채우는 손길은 여전히 무심한 듯 섬세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과정만은, 예전에도 익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새로웠다. 집중해서였는지, 웬일로 시온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던 태환이 대뜸 명령했다.

“권시온, 코트.”

권태환의 저 명령은, 계산된 걸까? 순간 의구심이 들었다. 제 발이 저렸다고 하는 게 더 옳을지도 몰랐다. 저도 모르게 티가 났던가. 십 대이던 권시온은 형의 코트를 들어주는 그의 비서를 부러워했었다. 손목 단추를 채운 뒤 아무 말 없이 팔을 한 번 휘두르면, 그의 향이 가득 밴 외투를 들어주던 수행 행위를 말이다.

스르륵. 몸이 절로 일어났다. 유영하듯. 코트를 걸어둔 쪽을 향했다. 핸드메이드 모직이 팔 바깥에 걸렸다. 왜, 왼쪽 가슴께가 뻐근한지 모를 일이다. 발을 딛자 스치듯 어떤 향이 코 안으로 들어왔다. 걸음이 멈췄다. 시온은 잠깐 옷을 내려다봤다.

힘을 들이지 않은 동선이 느리게 이어졌다. 위로 들린 팔, 안으로 굽힌 흰 목덜미가 어쩐지 한가한 오후의 성당을 떠올리게 했다. 상당히 신중하고, 엄숙했다. 흉근이 부풀었다가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았다. 그러다 불쑥, 어떤 문장이 이시온의 입에서 뛰쳐나왔다.

“…담배 냄새가, 나네요.”

아. 태환의 턱이 비틀렸다. 곧 입꼬리를 올리긴 했지만. 그가 성큼 다가왔다. 시온의 고개가 들리자마자, 사내의 손아귀가 코트를 잡아들었다. 팔을 꾀자 밑단이 무겁게 펄럭였다. 왼손이 주머니에 찔러 넣어졌다. 빠져나오는 손안에는 담뱃갑이 있었다. 시온이 열다섯 살 때 봤던 것과 같은 브랜드였다. 미처 다 살피기도 전에 네모난 틀이 순식간에 우그러들었다. 처량해진 기호품이 시온에게 넘어갔다. 알아서 버리라는 뜻이었다.

“번호 그대로야, 누구 때문에. 받아.”

심하게 깨끗한 가죽 구두가 타일에 부딪혔다. 문고리를 잡는 다부진 손등뼈가 눈에 들어왔다. 낡은 현관문이 열렸다. 어차피 다시 도망갈 생각은 일찌감치 접으라는 뜻이다. 그렇게 문이 닫히고 나서도, 시온은 발이 묶인 듯 한참을 서 있었다. 닫힌 입구를 바라보며.

*

“…권태환이, 뭘 해? 보상?”

작은 테라스 밖으로 비 내리는 풍경이 보였다. 겨울용이긴 하나 암막까진 아닌 짙은 회색 커튼이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프랑스 일부 지역은 한참 우기였다. 별 좀 달았다 싶은 호텔은 위험하고, 사택은 섭외가 어려웠다. 그래서 경아는 일단 유명하지 않고 관광객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오래된 숙박업소를 선택해야만 했다. 이도 임시방편일 뿐이다. 내일 체크아웃을 하여 잠깐 다른 숙소를 들렸다가 유로스타를 타고 영국으로 넘어갈 예정이었다.

짐은 굉장히 단출했다. 여권, 옷가지, 현금. 그런데 아직 캐리어를 닫지 못했다. 합법적이지 못한 경로로 구한 휴대 전화가 울렸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저장된 번호는 딱 3가지였다. 1이라고 쓰인 저장 명이 크게 떠올라 있었기에, 그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그래. 적어도 네가 제 ‘동생’ 주변에 약속했던 것들은 다 수습했더라고.」

차혜은은 대형 로펌에 소속된 파트너 변호사였다. 심지어 HW의 전담이었다. 백경아의 본가 말이다. 혜은은 전형적인 개천에서 용이 된 여자였다. 가난한 동네에서 홀아버지 밑에서 세 명의 동생을 건사하며 자라다 법대에 진학, 사법고시에 합격해 연수원에서도 ‘조용하게 독한 놈’으로 유명했다.

두 사람에게 무슨 인연이 있을까. 그 속 사정은 아무도 몰랐다. 혜은은 경아는 같은 동네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딱히 친하진 않아도 서로의 구질구질한 과거사를 익히 알고 있었으며, 항상 냉철하다는 평가를 들으면서도 그깟 연민을 놓지 못해 경아를 돕고 있다는 내막을 말이다.

“…일부러 접근한 건 맞는데, 예상한 거보다 더 끔찍이 여기나 보네.”

「넌 여전히 질려 보이고. 나도 의외긴 했어.」

일찌감치 말아먹고 싶은가 보지? 이 일을 벌이기 전, 경위를 알아챈 태환이 거리낌 없이 일침을 놓았다. 그날도 청승 질이었지. 꽤 꾸준히 권태환 혼자만의, 술자리라는 이름의 회상이 이어지던 어느 날, 경아 또한 괜히 음주가 하고 싶어졌었다. 물론 제 ‘남편’과 함께 마실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보편을 벗어난 신혼집에 기묘한 풍경이 하나 더 늘어났다. 남편인 태환이 거실의 소파와 탁자, 아내인 경아가 부엌의 아일랜드에 서서. 주종도 달랐다. 한 명은 늘 그렇듯이 싱글 몰트, 나머지 하나는 바디감이 묵직한 품종 위주의 레드 와인. 그렇게 한 공간에서 따로 떨어져 술을 입에 털어놓고는 개인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태환은 그날도 어김없이 그 작달막한 사진을 쳐다보던 중이었다. 그러다 셀러에서 병을 꺼내는 순간, 웬일로 사내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전혀 고운 어투도, 기분 좋은 내용도 아니었지만. 이제 슬슬 마무리해야지. 마무리. 경아는 그게 뭘 뜻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계약 기간과 ‘실행 일자’가 가까워지고 있다는걸, 굳이 한 번 더 명시하겠다 이거지. 경아가 잔을 내려두었다. 침묵이 곧 긍정이었기에, 따로 대꾸를 덧붙이진 않았다.

애초부터 기간이 정해진 결혼생활이었다. 5년. 성격차이로 헤어졌습니다, 라고 했을 때 그나마 제 잘난 손주에게만큼은 물러터진 권 회장이 용인할 만한 햇수였다. 경아에게 있어선 적절하게 제 아침 드라마 형 가족사에 종지부를 찍을 준비 기간을 효과적으로 계산한 햇수였고 말이다. 터놓고 말하자면, 처음에 경아는 그 기한이 모자라다 여겼다. 아무리 HW가 JL 발밑을 긴다고 하더라도, 그건 우위를 따졌을 때의 이야기였다.

백경아는 가족에게 잠깐의 타격을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수복하기 힘들게,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도산은 무리더라도 몇 년간은 구성원 모두가 허덕이게 하고 싶었다. 그러자 태환은 인심이라도 쓰듯, 이혼 후에도 약 12개월 동안은 협조를 해주겠다 제안했다. 어이가 없었으나 어쩌겠는가. 그 혼인 신고서의 갑은 권태환이고, 을은 백경아였던 것을.

「뭐, 사건에 연루된 ‘박 이사’는 알아서 손볼 거 같은데… 혹시 모르니 일단 네 서류상 남편도 계속 팔로업할게.」

그럴 땐 언제고, 갑작스레 칼을 들겠다니 꽤 어처구니가 없었을 테다. 계약기간도 아직 한참 남았는데 왜 혼자 설레발 치느냐 경고를 받은 셈이었다. 그러나 경아는 눈앞에 닥친 기회가 아쉬웠다. 백주영은 백씨가문 돌림자를 받고, 제 손위 누이보다 더 강력한 승계권을 잡고 있었다. 능력이 뛰어나서? 그랬으면 그렇게나 무시하고 깔보던 제 이복 남매가 만들어놓은 프로젝트를 가로채는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그 멍청이는… 제 그릇이 꽤 큰줄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못 오를 나무도 넘보고 그러지. 경아가 비죽 웃었다.

자신과 백주영이 다른 점은 딱 하나, 태어날 때 금줄을 쳤느냐 마느냐의 여부였다. 살덩이 하나 달렸느냐 아니냐는 많은 차이를 줬다. 시절이 어떤 시절이냐, 는 비판은 씨알도 먹히질 않았다. 그러니까 살면서 그렇게 많은 사고를 치는데도 족족 죄 사함을 받는 거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HW 일가로서, 내부적인 면죄부였다. 사법부는 몰라도 언론은 달랐다. 특히나 이번엔 죄질이 심각했다. 탈세, 횡령이야 애교다. 그래도 적어도, 매스컴 무서운 줄은 알아 몸을 사린다 싶었다. 마약이라니. 무슨 범죄 물도 아니고.

불법 약물이 동반된, 재벌 및 기업 간부들의 접대. 대서특필되기 참 좋았다. 예전처럼 신문이 출간되고 뉴스에 나와야만 화제가 되는 세상은 아니었으니까. 거기다 그 과정에서 사람 하나가 죽어 나갔다. 정의감. 경아는 자신에게 비웃음을 던졌다. 그딴 숭고한 정신은 제게 없었다. 부도덕과 비도덕의 차이를 아는가? 아주 유사하지만 달랐다. 개인의 도덕성이 없느냐, 도덕이라는 관념 차체를 대립하고 부정하느냐. 둘 중에 뭘 택해야 할진 모르겠으나, 백경아는 그 두 단어 사이에서 줄을 타고 있었다. 누가 죽었느냐보단, 그 사건을 어떻게 이용하느냐가 중요했으니까. 게다가 성과는 더 있었다. 이쪽이 더 강력한 폭탄이긴 하지. 경아가 머리를 굴리느라 지켜오던 침묵을 깬 건, 스피커 너머 목소리였다.

「그보단, 백씨들이 문제야. 비서팀 및 보안팀 대부분이 너 쫓는 데 혈안이야. 건너가서도 조심해. 그리고…」

박 이사는 JL의 평이사였다. 조금 전 혜은이 거론했던 그도 이 일에 연루되어 있었다. 어떤 은밀한 거래로 제 손에 넣어진 CCTV 영상에 선명히 기록된 그 면상이 뚜렷한 증거였다. 그러니 태환도 성급하게 굴지 말라는 듯 그 한마디를 뱉은 거였을 테다. 알지만, 알긴 하는데. 경아가 나지막이 웃었다.

“…걱정 마. ‘그건’ 믿을 만한 데다가 잘 숨겨놨으니까.”

완벽한 보험이었다. 오만불손하고 남이라곤 모르는, 저처럼 애매하게 비열한 도덕관이 아니라 무결한 무도덕을 손가락질 하나 없이 영유할 수 있는 권태환이 유일하게 아끼는 존재에게 맡겼으니 이보다 안전할 순 없었다. 태환은 경아의 잘못과 거취를 빌미로 제 유일한 양심을 찾아갔고, 그러니 어느 정도의 아량은 쉬이 베풀 터였다. 어느 정도는 계산된 바가 있었지만 말이다. 지독한 ‘형제애’라니까. 경아는 캐리어를 닫았다.

「그래,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할게.」

“알겠어.”

내일 해가 뜨자마자 체크아웃을 해야 했다. 통화는 거기까지였다.

*

최 씨는 몇 년 전에 환갑잔치를 했다. 즉, 시온에게는 큰 아버지뻘 정도의 연령대라는 뜻이다. 그런 그가 제 인생의 반도 살지 않은 청년에게 괜한 투정질을 했다.

“아니, 사귀는 사이가 아니면 아니라고 말을 했어야지!”

옛말에 목청이 큰 사람을 흔히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느냐고 하질 않았는가. 이발소의 최 씨가 딱 그랬다. 뭐가 그렇게 그를 답답하게 만들었는지, 오른손엔 이발 가위가 그대로 들려있었다. 상체에 맞춰 들썩거리느라 짤랑짤랑 소리를 내기까지 했다. 그만큼, 작은 매장에 크게 울리는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듣는 이의 귀가 아프다고 해도 엄살이 아닐 지경이었다. 그러나 예의 바른 청년은 그저 가만 서 있을 뿐이었다. 한결같이 말간 얼굴을 하고.

최 사장이 메종 단 루의 문을 열고 들어온 시각은 막 10시 40분이 지난 참이었다. 시온은 최 씨와 눈만 맞추고 있었다. 그가 평소 들리던 시간은 점심이 훨씬 지난 때이니, 그냥 들렀다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그럼 왜 최 씨가 오전부터 이러고 있는가.

오늘, 자식의 이름을 딴 정원 이발관의 첫 방문객은 손님이 아니었다. 시트지를 발라 반쯤 가린 전면 창 너머로, 갑자기 심히 어울리지 않는 고급 세단이 세워졌다. 아니, 왜 남의 영업장 앞에 주차야. 하고 뭐라고 하려던 순간이었다. 차에선 남자 하나, 여자 하나가 내렸다. 둘 다 정장을 걸치고 각각 서류 가방 하나와 큰 007가방을 들었다. 예사롭지 않았다. 그리곤 곧장 최 씨 가게의 문을 열고 실례하겠습니다, 최철웅 님 되십니까. 하고 깍듯하지만 거리감 있는 인사말이 들렸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한 올 없이, 깔끔하다 못해 인간미가 없는 올림머리를 한 여성이 작은 종잇조각을 건넸다. 최 씨는 그걸 엉겁결에 받아 들었다. 그리고 눈을 비볐다. 내가 노안이 더 심해졌나 하면서.

당신 시력은 멀쩡합니다. 진단이라도 해주듯 여성이 저와 제 일행의 신분을 밝혔다. 저희는 JL그룹 제2비서실에서 왔습니다. 얼마 전에 큰일 겪으셨지요. 많이 먹었다고 해봤자 서른 줄일 청년의 어투는 굉장히 정형화되고, 다듬은 바가 컸다. 설명은 물 흐르듯, 고저가 없이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KA&Company의 대표 백경아 씨가 자신들이 모시는 JL 그룹의 부사장, 권태환의 아내이며 그가 현재 갑작스럽게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 중에 있다고. 덧붙여 뒷마무리 중인 자신들의 실수로 최 씨를 비롯한 다른 이들의 피해를 뒤늦게 알게 되었다며 정중히 사과하였다.

거기서 최 씨가 당황해 얼빠진 소리를 했다. …아내? 아니, 아내? 하고 말이다. 자신들은 철석같이 그 백경아라는 사람이 이시온의 연인인 줄 알고 있었지 않았나. 그렇기에 처음 당혹과 배신감을 가져다 풀기도 했다. 못나게도. 그러자 여성이 잠시 멋쩍게 웃었다. 그리곤 마치 중요한 비밀을 알려주듯 허리를 숙였다. 준비라도 한 듯이, 매끄럽게. 이시온 님 때문이시라면, 오해하셨을 만도 합니다. 그분이 JL에 입양이 되셨다가 본인 의지로 가문을 떠나셨는데… 원래 저희 상사분과 돈독한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작은 사모님이 안타깝게 여기시고 자주 찾으셨죠. 이게 다 무슨 소리람, 싶긴 했으나 연륜은 무시할 게 아니었다. 최 사장은 그 말에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가 복기를 마쳤다.

그러니까, 뭐가 얽혔는진 몰라도 케이크 집 젊은 사장이 JL에 입양이 되었다가 나왔고, 형수라고 하면 형수인 백경아가 그를 챙기기 위해 왕래를 했다. 그거 아니겠는가. 아이고. 통탄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그럴 틈은 없다는 듯, 여자 옆에서 계속 조용히 서있기만 하던 남자가 탁자에 큰 상자 형태의 가방을 올려두었다. 입은 여전히 여성 쪽만 열었다. 지급하셨던 금액과 소정의 보상금입니다. 다시 한번 두 사람이 허리를 숙였다. 손님 아닌 손님들이 떠나고 난 뒤, 잠깐 얼이 나가 있던 최 씨가 한 일은 당장에 메종 단 루로 달려가는 거였다. 아까부터 들고 있던 가위를 내려놓지도 못하고.

최 사장은 숨도 쉬지 않고 이와 같은 사정 설명을 하는데 장장 30분을 투자했다. 시온은 그저 얌전히 듣고 있었다. 헐떡이기까지 하며 말을 잇던 최 씨가 청년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이었다. 이시온이 살짝 허리를 숙였다.

“어떻게 설명을 드려야 할지 어려웠어서… 죄송합니다.”

“어이구, 어려울 말이 따로 있지! 그렇다고 그 오만 욕을 다 듣고만 있었어!”

시온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하다. 다른 사람 같으면 제가 얼마나 억울했는지 늘어놓거나, 늦게라도 성을 내었을 텐데. 그저 오도카니 서서 사과를 건넸다.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말이다. 최 씨의 가슴께가 답답해졌다. 저도 그런 무리 중의 하나였으니, 어떻게 보면 제 과거를 돌아보지 못한 일침이 아닐 수 없었다. 숨을 몰아쉬던 최 씨의 입에서 긴 한숨이 터졌다. 남 말 할 때가 아니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자 그제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큼, 민망한 헛기침이 나왔다.

반면 이시온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았다. 그저 도리를 다하려고 했을 뿐이고, 비서들이 그렇게 설명한 건 ‘그 사람’이 지시한 바일뿐이었다. 화를, 내야 했나? 알기 힘들었다. 다만 이 시점에서 그래도 보상을 받아서 다행이라는 말을 건네야 하는지 마는지, 그쪽이 더 큰 고민이었을 뿐. 그리고 고심은 이어지지 못했다.

“아니, 이 사람이! 영업 안 해요! 손님 왔는데 주인이 뭐 한담!”

최 씨의 안사람이었다. 최 씨가 헛숨을 집어삼켰다. 바깥 한번, 진열장 뒤에 서 있는 시온을 한번 보길 반복했다. 시온은 말없이 인사를 건넸다. 최 씨도 한숨을 마지막으로 서둘러 제 이발소로 향했다. 문이 닫히고 남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청년은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한 참이었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이제 할 일을 하기 위해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두지 않겠다는 의지는, 다른 곳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드드득. 진동의 잔 떨림이 유리를 못살게 굴었다. 짧게 끝난 걸 보니 전화가 아니라 문자 메시지였다.

[010-XXXX-1131: 수요일.]

등록하지 않은 번호였으나 누구의 것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권태환이 보낸 게 틀림없었다. 전화번호, 정말 그대로구나. 이시온은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다시 한번 망부석이 되고 말았다.

*

벌써 날짜는 빠르게 흘러, 메시지가 온 날이 저번 주 목요일이었다. 수요일. 다른 문자 한 통 없이, 오로지 그 세 글자가 전부였다. 몇 시에 온다는 둥 따위의 덧붙이는 말조차 없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가 예고한 수요일, 당일이었다.

이런 걸 안절부절못하다,고 하는 거겠지. 시온은 사전의 예시문 같은 문장을 떠올리며 자조했다. 남들이 볼 땐 여전히 무섭지 않은 무표정을 유지하는 걸로 밖엔 안 보이겠지만, 확실히 동요하고 있었다. 사과를 샀다. 근처에 과일 가게에서 한참을 골라온 것이었다. 이 사장, 사과 사 가게? 겨울 사과가 참 맛있지. 청과물 집 사장도 ‘일련의 사태’로 인한 피해자 중 하나였다. 아마도 최 씨가 사정을 설명해 주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는 시온에게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더니, 기어이 돈을 받지 않고 가져가라기에 못 이겨 받아왔다.

이걸 어쩌지. 사실 구매를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자기 의지가 없는 과일과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어쨌든 잘 익은 다섯 알은 시온의 소유가 된 참이었다. 낮고 깊은 한숨을 쉰 뒤, 시온은 손을 들어 과도를 집었다. 추운 계절이라 유독 짙은 색의 껍질이 일정하게 깎여 나갔다.

메종 단 루는, 여전히 휴업 중이었다. 정리가 필요하다는 핑계를 덧붙여 손수 쓴 안내문을 붙여두었다. ‘다음 주 수요일(X월 X일)부터 영업 재개합니다.’ 또 수요일이었다. 납품업체 또한 다음 주 월요일부터 드나들 거다. 그래서 일부러 동네 과일가게를 들려야만 했다. 살지 말지 정하지 못했는데도, 발이 알아서 그 앞에 멈췄다. 준비해 놔, 궁금하니까. 그 두 마디 들었다고 이렇게 흔들리다니, 저 답지 않았으나 저항은 물 건너간 일인 듯도 했다. 예전처럼. 노란 속살이 세모나게 썰려갔다. 과육의 향이 코밑에 훅, 끼쳤다. 일정한 모양과 속도로 모든 사과를 다 자르고 난 뒤, 시온은 한숨 돌리듯 잠깐 어릴 적을 더듬고야 말았다.

*

시온도 처음부터 태환을 따른 건 아니었다. 열셋, 열넷 쯤의 이시온은 살갑고 애교 많은 아이가 아니었으므로. 시온이요? 음… 예쁘게 생기긴 했는데. 보육 봉사를 온 아주머니에게 원장님이 한 말이 있었다. 너무…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그러더라고요. 어린애 답지 않게. 그 말에 원장이 화를 냈던가, 동의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권 씨가 된 이후로도 똑같았다. 애써 얻은 호적에 대한 기쁨이나 미련은 없었다. 그나마 애 다운 부분을 꼽자면, 낯섦은 드러냈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를 사용인들도, 새로 생긴 양부모도. 꼭 형이라고 부르라던 이 집의 친아들도 그들과 같았다. 저를 보자마자 그런 소릴 하길래, 나름 친절한 어른이랍시고 막 가까이 다가오면 어쩌나 싶기까지 했다.

권태환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굉장히 키가 컸고 몸도 두꺼웠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인상은 아니었는데, 그건 되레 걸리지 않았다. 다행히 거리낌 없이 밀어붙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이곳에서의 한 달이 지나가던 때, 태환이 돌연 소년의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권시온.’

…관심을 꺼둔 줄 알았는데. 시온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저 사람도 꽤 바빠 보이던데, 왜 저택에 있을까. 그러고 보니 주말은 평일보다 오래 머물러 있긴 했었다. 이날도 토요일이었다. 권시온이라니. 처음엔 제 이름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의 성씨는 오래도록 ‘이’였다. 원장님의 성을 따른 거였다. 보육원의 모든 아이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태환은 방문 앞을 열어젖힌 채, 그 앞에 기대 서 있었다. 언제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고는 저를, 어색하기 짝이 없는 성씨를 붙여 불렀다. 일하는 이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새로 생긴 작은 도련님을 어려워했다. 그렇다고 쩔쩔맸다는 뜻은 아니다. 이 애매한 위치의 어린애를 작은 도련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재보는 것이었다. 그래선지 자연스레 먼저 말을 붙이지도 않았다.

양부모는 얼굴을 본 날이 드물었다. 그나마 봐도, 대화 한 번을 나눠보지 못했다. 이따금 양부가 형식적인 보호자의 의무는 취하긴 했다. …정 기사한테 애 잘 데리고 오가라고 해. 저를 멀뚱히 두었으면서도 소년의 뜻은 묻지 않은 채 사용인에게 지시하는 게 전부였다. 역시나 이 중에서도 태도가 확연히 다른 사람은, 오직 태환뿐이었다. 그는 시온이 지나다니면 턱짓을 하든, 눈짓이든, 손을 들던. 뭐가 되었든 인사는 건넸다. 시온은 그걸 본 채 어째야 하는지 답을 못 찾고 서 있다 이내 제 방으로 올라가 줄행랑칠 뿐이었다. 저보다 열두 살이나 어린애가 같잖게 군다고 혼낼 만도 한데, 태환은 그러지 않았다. 핀잔 대신 그가 들고 온 건 작은 쟁반이었다.

‘단 거 좋아해?’

정말 앞뒤가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살갑게 굴길 바라고, 버릇없어 보이기 쉬운 행동에도 조치를 하지 않더니 대뜸 단 걸 좋아하느냐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답변을 회피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흐트러졌다.

‘…잘, 모르겠어요.’

짙은 눈썹 한쪽이 위로 들렸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이는 나름의 속 사정이 있었다. 이 원장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으나, 그리 넉넉하지도 못했다. 지원으로 겨우겨우 근근이 애들을 키워냈다. 오히려 훌륭한 인물이라고 해야 옳았다. 하지만 그런 인품이 돈을 끌어다 주는 건 아니었다. 덕분에 아이들은 부족한 것이 많았다. 특히, 사치품이나 기호품은 더 심했다. 그러니 모를 수밖에. 시온이 경험했던 단 음식이라곤 배식에 나오는 과일 몇 알과 공평하게 나누어지는 과자 약간.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그달에 생일이 있는 아이들을 전부 모아 한 번에 치러주는 날이나 구경할 수 있는, 봉사자들이 사 온 2호 크기의 생크림 케이크가 전부였으니까.

남자는 모호한 대답의 연유를 묻지 않았다. 방 한쪽에 놓인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을 뿐이었다. 높아서 잘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지나치게 품이 많이 든 조각 케이크가 세 점이나 있었다. 더 동글동글해진 눈으로 쳐다보자, 태환이 제 용건만 담아 말했다.

‘나는 별로라. 너 먹어.’

소년의 앳된 손등 위에 커다란 성인이 손바닥 닿았다. 작게 펄떡 뛴 몸을 눈치챘을 텐데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곤 시온이 세 살짜리도 아닌데 손수 포크를 쥐여주는 거다. 긴장한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서, 금속으로 된 식기가 혹시 차가울까 반대편으로 쥐고 있다 여물지 못한 손바닥에 올렸다. 곧 다시 손가락을 또 하나하나 접어준다. 무심한 듯한 어투에 반하는, 너무나 생소한 다정함이었다. 시온은 왠지 귀가 뜨거웠다. 태어나 처음 겪는 일이었다.

여전히 머뭇거리긴 했으나 곧 포크가 케이크의 끝에 꽂혔다. 생크림이 아니니 당연히 감촉이 다르겠다 싶긴 했지만, 그런 거 치고도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아. 소년의 입에서 작은 감탄이 터져 나왔다. 입안에 넣자 복잡한 맛이 났다. 아직 턱없이 부족한 경험이라 이게 맛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그래도 왠지 모르게 한 번 더 먹고 싶었다. 시온이 무의식적으로 태환을 올려다봤다. 그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너그러운 어른이 어린애에게 짓는 종류는 아니었다. 입꼬리는 한쪽만 올라가 있고 눈매는 가늘게 좁혀졌다. 눈웃음이라고 하기엔 모호한 구석이 있었다. 단 한 가지 명확한 건, 기분이 나쁜 건 아닌 게 확실했다. 오히려 흡족해 보였달까. 떨어져 나간 손이 정수리에 닿았다. 간지러운 쓰다듬을 몇 번 당했다. 소년의 눈꺼풀이 바삐 움직였다. 귀가, 계속 점점 더 뜨겁기만 했다. 세 조각의 케이크는 온전히 시온의 소유였다. 시간을 들여 접시를 비웠다. 태환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음에도 내도록 제 옆을 지켰다.

‘다음 주엔 다른 걸 가져다주지.’

통보치고 상냥했다. 난제가 한 번 더 제시되었다. 뭐라고 대답하지? 이시온, 아니. 권시온은 양쪽 귀를 물들인 채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일어나기 직전에, 고개는 아래위로 끄덕였다. 태환이 소리 내 웃으며 방 밖으로 나갔다.

그날 저녁, 시온은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하나 했다. 제 것이지만 제 것이 아닌 것만 같은 가재도구와 생필품들을 최소한으로 쓰고 있었으면서, 달력을 들어 빨간펜으로 오늘 날짜 위에 동그라미를 쳤다. 설명할 수 없지만, 그러고 싶었다. 제 귀만큼 빨간색으로 이날을 표시해 두고 싶었다. 권태환은 약속을 지켰다. 그다음 주, 그 다다음 주에도 남자는 시온에게 케이크를 먹였다. 그리고 권시온이 된 소년은 한 네 번째 주말에서야 태환을 형이라고 불러주었다. 내도록, 귀와 얼굴이 빨개진 걸 감추지도 못한 채로.

*

「띵.」

화들짝. 기계음 소리가 정적을 깨며 두 눈을 열게 만들었다. 아예 정신을 빼놨었다 보다. 다행히 손이 알아서 움직이라도 했는지, 몸이 체득한 기술 덕분에 어찌저찌 흐린 정신 속에서도 뭔가를 완성해낸 참이었다. 오븐의 잔열 감이 느껴졌다. 다시 할 일로 돌아와야 했다. 시온이 작게 한숨을 뱉은 뒤 손잡이를 잡았다. 잠깐 기다린 뒤에 문을 열자 푹 익은 사과, 버터가 적당히 들어간 패스추리가 향을 뽐냈다.

만드는 사람은 혼을 빼놓았는데, 결과물은 그런 와중 잘도 익었다. 은근히 망쳐지길 바랐던가? 직업정신은 다 어디다 둔 걸까. 딱히 그런 부분을 걸려 하지 못한 시온이었다. 조금 어그러지길 바란 적은 있지만. 반죽으로 꼼꼼히 둘린 격자무늬가 겹겹이 부풀어 있었다. 위로 미리 꺼내놨던 통에 든 시나몬을 뿌렸다. 많은 이들이 계피와 시나몬을 헷갈리곤 하나, 사실은 약간 달랐다. 친동생과 양 동생만큼의 차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

…하필이면 왜 그런 비유를 떠올렸는지, 시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속이 시끄러우니 별생각이 다 든다. 아무튼, 그가 뿌리고 있는 건 확실히 시나몬이었다. 실론 시나몬을 가공한 파우더를 충분히 뿌린 뒤 병을 내려놓았다.

노력이 꼭 결과로 맺어지진 않는 것처럼, 이시온은 자신을 책망했으나 옛일을 회상하는 걸 멈추지 못했다. 열다섯 봄. 코치에게 주말마다 케이크를 먹는단 걸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가 혼이 났다. 성장기일수록 잘 관리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자주 당을 섭취하느냐고. 그걸 전해 들었는지, 태환은 그 주부터 케이크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 시온에게 역정을 냈던 코치도, 그다음 주부터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햇수로 거의 2년 동안 이어진 ‘일과’였다. 매번 저만 먹기에, 한 번은 겨우 물어봤었다. 형은 정말 먹지 않겠느냐고. 그러자 그 다음번엔 애플파이를 들고 왔다. 설탕을 최대한 줄여 필링을 만들고, 시나몬 파우더를 잔뜩 뿌려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소년은 당연하게도 그걸 거절하지 못한 채 입에 넣었고 말이다.

그때의 일화 때문에 굳이 애플파이를 구운 건 아니었다. 시온은 만들지 않을까 말까를 한참 고민하던 새벽 밤, 위스키와 어울릴 만한 디저트가 뭐가 있을지 찾아 헤매버렸다. 휴대전화의 사용법이라곤 전화를 걸고 받고 메시지 정도 쓰는 게 다였던 그가 말이다. 중증이었다.

나이프가 파이를 갈랐다. 한 판을 구웠으나 태환은 아주 작은 조각만 먹을 거다. 맛은 봐야 했다. 적어도 만든 이의 책임을 핑계 삼아서라도. 접시와 포크를 꺼냈다. 그래도 여전히 혼미한 정신 상태를, 확 깨트리는 음색이 들렸다.

「딸랑-」

한 번 더 그의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문에 달아놓은 종이 울렸다. 유리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바로 권태환이었다. 물론 오겠다 예고한 수요일인 건 알고 있었지만, 역시나 갑작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속절없이 놀라는 게 벌써 두 번째던가. 시온이 머리를 들었다. 가게의 문은, 거주공간과 다르게 도어락이 달려 있었다. 스승이 아무리 돈이 없어도 이게 훨씬 편하다며 값을 치러준 선물이라 그대로 따랐던 거다. 영업을 하는 건 아니라 일부러 잠가뒀는데, 어떻게 들어온 걸까. 자칫하면 멍청해 보일 정도로 벌어진 도톰한 입술을 감상하던 태환이 의문을 풀어주었다. 딱히 소리 내어 물어볼 마음은 없었지만,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설마 했더니, 그날이던데. 내가 너 케이크 처음 먹인 날.”

0108. 1월 8일. 그 말대로였다. 시온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의도한 바가 아니었던 탓이다. 그랬던가, 저가 설정한 숫자가 그날의 나열이었던가. 어리석은 깨달음이 알아서 들이닥쳐 주었다. 그러고 보면 예전부터 늘, 네 자리 암호를 만들어야 하면 주저 없이 0108을 골랐다. 더 길어야 하면 중간이나 끝, 처음에 0108을 넣는 식이었다.

느슨하게 쥔 포크가 휘청인다. 태환은 그런 시온을 주시한 채 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손목이 잡혀 앞쪽으로 끌어 당겨졌다. 그가 상체를 숙이자, 너른 어깨가 보였다. 저항하질 못하고 눈을 아래로 뒀더니 벌어지는 얇은 입술이 보였다. 포크에 잡혀있던 작은 파이 조각이 사라졌다. 느릿하게 입안에 넣더니 다시 허리를 곧추세운다. 살짝 남은 조각에 용납은 없었다. 적당히 메마른 혀끝이 입술을 훑었다.

“…내 입에 딱 맞췄네. 올라가자.”

정말로 술을 들고 왔다. 커다란 패키지를 한 손으로 잘도 들고 있었다. 태환은 망설임 없이 2층으로 향했다.

좁아터졌다고 할 땐 언제고. 시온이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 그렇다고 제가 지정한 장소에 나오지 않으리란 걸 모르지 않을 터였다. …여전히 이길 수 없었다. 애플파이 한 조각이 쟁반에 담겼다. 먹일 상대를 따라, 위로 올라가야만 했다.

*

이시온은 신앙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러나 종교는 있었다. 모태신앙처럼. 그의 친부모가 하나님을 믿었는지, 예수님을 믿었는지, 부처님을 믿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를 양육해 준 원장님의 다른 직책이, 목사님이었고 그래서 당연하게 예배를 드렸다. 보육원에 있는 모든 어른이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한몫했다. 아이는 잠들기 전 읽어주는 동화책 대신 어린이를 대상으로 풀어낸 성경을 낭독해 주는 선생님들이나 자장가 대신 찬송을 불러주는 봉사자들이 익숙했다. 보육원이 하나의 집이라는 가정하에 ‘집안’의 가장이자 목자인, 모든 아이에게 공평한 성을 물려준 이 원장은 아이들에게 기도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온도 불신자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터놓고 말하자면, 눈에 보이지 않는 걸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어쨌든 이 원장 혹은 이 목사는 그 또한 인정해 줬다.

그러나 한 가지에 대해서만큼은 엄격했다. 선과 악. 모든 인간이 선하게 태어날 순 없을지라도 선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변론을 하자면, 그런 태도 또한 교육자로선 바람직할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손을 올리거나 고함을 치진 않았으니까. 그 정도면 좋은 보호자였다.

세 살, 개월 수로 환산하면 36개월. 그 나이 대면 마냥 혀 짧은 말이나 할 줄 알고 자기 의사 따위 없을 듯싶으나 인간의 만듦새는 생각보다 정교했다. 자기중심적이지만 사회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아가 이 짧은 몇 개월 만에 형성되었으니까. 그래서였을까. 시온은 보육원 앞에 버려지는 날에도 울지 않았다. 이름이 뭐냐고 물으면 모르겠다고 말하진 못해도 고개를 가로저을 줄 알았다. 아이는 알고 있었다. 제 양친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걸. 원장이 그 작은 몸을 안아 올렸으나 작은 손이 매달리는 일은 없었다. 체념을 알고 있는 듯 혹은 관심이 없는 듯한 몸짓이었다. 보통 그맘때의 아이라면 불안해서라도 꽉 잡고 울음을 터트릴 텐데, 작은 손이 눈앞에 밀어졌다. 쪽지가 있었다. 19xx. 아마도 태어난 년도 같았다. 어른의 글씨였다. 단 몇 글자, 그것이 시온에 대한 정보 전부였다.

시간이 흐르고 아이는 성장했다. 이 원장이 나쁜 보육자는 아니었다는 데에는 또 한 가지 증거가 있었다. 보육원의 원아는 늘 넘쳐났으나 원장은 거의 모든 원생의 이름을 외우고, 생일을 외우며 특성을 알았다. 계명을 모신 산의 이름을 붙여준 아이는, 지나치게 덤덤했다. 감정 표현이 적고 원하는 바도 적었다.

이시온이 막 의무교육을 받게 된 무렵의 어떤 날, 이 원장은 작은 뜰 구석에 홀로 쪼그려 앉아있는 소년을 보았다. 마당에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즐거워서 목소리가 커진 일곱 살 난 아이, 그 옆에서 공을 신이 나게 차고 던지는 양 갈래머리, 짧은 머리, 단발머리. 한구석을 차지하고 모래 성을 쌓는 노란 바지, 파란 치마, 청 멜빵바지. 모두가 짝을 지었는데 시온 만이 홀로 섬을 만들어 냈다. 원장은 다리를 굽혀 아이와 눈을 맞췄다.

‘시온아, 혼자 뭐 하니?’

동그란 정수리가 뒤로 젖혀졌다. 하얗고 오밀조밀한, 그러나 감흥 없는 표정이 꽉 들어찬 어린 얼굴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냥… 보고 있어요.’

‘왜, 같이 놀지 않고?’

강요는 없었다. 나직하고 온기가 느껴지는 물음이 건네졌다. 시온은 투명하게 아무것도 담지 않은 눈동자로 이 원장을 바라봤다. 이내 흙바닥으로 떨궈졌지만. 어린아이들은, 특히 시온의 또래들은 제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잘 모른다. 누가 지적해 주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머리로 이해하는 정도였다. 그와 달리 시온의 목소리는 높낮이가 없고, 흥분해서 빨라지는 일도 없었다.

‘…어제 마리아하고 요셉이 싸웠어요.’

겨우 열린 입술 사이로, 뜻밖의 말이 나왔다. 마리아와 요셉이 싸웠다, 아이들의 이름은 전부 성경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런 농담 같은 문장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이 원장은 웃지 않았다. 진지하게, 하지만 무겁지 않게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이르려는 게 아니었다. 그는 시온을 잘 알았다. 사실을 말해 운을 띄운 것뿐이다. 정말, 두 아이는 늘 짝꿍처럼 붙어있었는데, 오늘은 아예 다른 무리로 갈라져 있었다.

‘그래, 그래서 저렇게 따로 노나보는구나.’

‘저는, 저렇게 되는 게 무서워요.’

어른의 입술이 벌어졌다. 가르마가 예쁘게 난 정수리를 주시하고 있자, 시온은 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좁고 작은 어깨는, 모든 현실을 아는 것처럼, 힘없이 축 처져 있었다. 어리다고 하여 고민이 없는 게 아니고 세상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모든 상황에 덤덤해 보이던 소년은, 무감한 이가 아니었다. 아, 이 애는 누군가와 멀어지는 게 두려웠구나. 이 원장은 작게 탄식했다. 아직 어리디 어린 세 살이었을 적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체념이 아니라, 그 어린 나이에도 쫓아간들 소용이 없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챘으리라. 원장이 조심스레 아이의 어깨를 쓸었다. 그리고 살짝 두들겨 주었다. 아이의 등이 움찔거렸다. 등을 쓸어주는 손길은 한없이 보드라웠다. 아, 어린 양은 어린 양이구나 하며 깨달은 자의 온정이었다.

‘…괜찮아, 시온아. 그건 서로 배려해 주면 돼.’

그래서 양육자는 작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제가 믿는 바를 그대로, 아이에게 투영한 위로를 던진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간과하고 말았다. 아이는 어른이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걸 아는 만큼, 어른이 짐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보호자를 맹신한다. 그가 눈에 보이지 않는 ‘창조주’를 무조건 적으로 믿어 왔듯이 말이다.

‘착하게 지내면, 누구든 너에게 떨어지고 싶지 않아 할 거란다.’

잔잔한 물결을 닮은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시온과 이 원장의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네, 하고 대답했다. 신뢰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목자가 하는 말을 새겨버린 것이다. 믿음은 어릴수록 순수하고 순진했다. 거기까지 헤아리지 못한 건 이 원장의 실책이라고 할 수 있었고 말이다. 그는 세월이 지나도 그걸 모를 터였다. 아마 그 말을 했는지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단지 제가 알고 믿고 있는 걸 전해주어 아이가 바르게 자라 외롭지 않길 바랄 뿐이었으니.

그 뒤로 시온은, 달라졌다. 미성숙한 존재답지 않게 말이 없고 얌전하다는 평은 여전했으나 또래에겐 조금씩 다른 평가를 받았다. 늘 양보를 먼저 하는 이시온, 저보다 어린 동생에게 형 노릇을 잘하는 이시온, 재미있진 않아도 착한 이시온. 이후에도, 입양되고서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상황이 되어도, 어떤 타인이 그에게 다가와도 대부분 그를 정의하는 말은 엇비슷했다. 착하다, 성실하다는 개념이 고리타분하다고 인식될 만한 사춘기에도 그랬다. 운동부라고 하면 몸에 좋지 못한 행위는 다 하지 않을 것 같아도 그거야 보이는 곳에서만 이었다.

적어도 시온의 주위에서는 알음알음 권력을 손에 쥐거나 선배를 통해 술을 입에 대는 일이 버젓이 일어났다. 권유도 있었지만, 시온은 그것이 옳지 못한 행위라는 이유로 거절해 왔다. 그토록 바르게 자랐다. 그토록 굳건히 지켜온 ‘착하고 바름’이 헤어짐의 이유가 될 수도 있다는걸, 이 원장은 당연하거니와 당사자인 이시온도 몰랐다. 모를 수밖에 없었다.

*

“그땐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죄송합니다.”

의자에 앉으려던 몸짓이 멈췄다. 시온은 눈을 돌리지 않았다. 책임을 진다, 감당하겠다. 따위의 비겁한 짓거리는 아니었다. 사실 따지자면 ‘그날 일’을 주도한 쪽은 태환이니 사과를 할 필요도 없었다. 모르진 않았으나 외면할 수도 없었다. 시온은 턱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 그래도 태환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대충 짐작은 갔다. 이건 또 무슨 개 짖는 소린가 싶은데, 제가 말해서 대신 아끼는 강아지의 반항을 마주한 심경으로 쟤는 또 왜 이럴까 하는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식탁 위에 둔탁한 물체가 놓였다. 자세히는 몰라도 보통 회사원 월급 몇 달 치는 될 법한, 비싼 술이 든 종이 패키지는 값어치만큼이나 무거웠다. 왼쪽으로 한번, 오른쪽으로 또 한 번. 차례로 고개가 기울었다. 우두둑, 하는 뼛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시온의 귀 끝이 예민하게 그 작은 소음을 잡아냈다. 여전히 응시하진 않았으나 태환의 턱이 비틀린 건 순간이었다. 다시 입매가 호선을 그린다.

“아다, 를 따먹은 쪽이 할 말은 아니다, 그치?”

아. 청년이 단말마를 뱉었다. 먼저 자리한 채로, 허벅지 위에 다소곳이 올려진 손등이 떨렸다. 발등이 안으로 구부러졌다. 열에 젖었던 어떤 날처럼. 간신히 휘말리지 않은, 아니다. 그렇지 않은 척하려는 주장이 입술 위를 새어 나왔다.

“…적어도, 한때는 형…제였고 지금은 아니지만,”

“아, 호적이 정리되었다고 이제 나는 네 형이 아니다.”

제 의문엔 죄다 의뭉스럽게 굴었으면서, 이럴 땐 거침없이 치고 들어온다. 뻔뻔했다. 하지만 낯짝이 두껍다를 세련되고 강력하게 다듬으면 권태환 자체가 되었다. 익히 아는 바가 아니었던가. 그러니 놀랍진 않았다. 시온이 입꼬리에 힘을 줬다. 턱에 작고 소담한 호두 알이 맺혔다. 하얗고 단단해 보였지만, 그 껍질은 곧 사라진다. 대신 흉근이 부풀어 올랐다. 뱉어지지 못한 숨이 폐를 타고 흐른다.

“형이라고 해도, 이상하잖아요. 형과 동생이,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으니까.”

음성은 떨렸다. 비집고 나오지 못한 호흡이 성대를 긁은 탓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네 개의 다리가 바닥에 끌렸다. 으드득. 마찰음이 마른 공간에 울렸다. 태환이 맞은편에 앉았다. 의식적으로 위를 향하지 않던 시선이 도망칠 거리가 줄어들었다. 자신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반대편의 시선이 따갑다거나, 긴장되진 않았다. 두 뺨에 열이 오르고, 어쩐지 눈앞이 조금 흐리긴 했다. 그래. 갈비뼈가 꺼진 듯 호흡이 가쁘긴 했다.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게 최선이었다.

저도 모르게 굽어 있던 등뼈에 의식적으로 힘을 주었다. 물살을 가르며, 오래 전부터 축적되어 형성된 너른 어깨가 뒤로 당겨졌다. 어딘지 모르게 앳돼 보이는 인상과는 어울리지 않았으나, 전체적인 걸 살피자면야 남에게 위압감을 주기에 모자라진 않았다. 물론, 권태환에게는 씨알도 먹히질 않는다. 시온은 알면서도 발버둥 쳤다.

“백경아 씨 때문이라면 협조할 겁니다. 다만, 다시는… 그날 같은 일은…”

냉정하게 말해, 이시온은 제 마음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알고 있었다. 이끌어졌다고 해도, 그걸 전적으로 상대방 과실로만 볼 순 없었다. 뭐가 어찌 됐든, 마지막 순간에만큼은 둘 모두가 공범자였다. 그건 변하지 않는 결론이었다. 말이 맞지 않는 구절은 또 하나 있었다. 하나가 아니다. 골몰해 보니 몇 가지 더 되었다. 그렇게 밀어내고 싶었다면 파이는 또 왜 구웠고, 왜 제멋대로 2층에 올라가는 행적을 뒤따랐을까.

게다가 현재는 끊어진 채로 내버려 두었다곤 하나, 한때는 형과 동생이라는 호칭으로 관계를 묶었던 과거가 있기에 육체적인 관계는 안된다.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이 문장의 모든 구절이 이상하게 삐걱거리고 있었다. 형이라고 부르지도 않으면서, 처음부터 혈연도 아니었으면서, 그런 주제에 당신과 내가 한때 형제였다는 이유로 선명했던 욕망을 부정하면서도. 이시온은 기시감을 삼켜내질 못했다. 제 마지막 말도 꼴사납긴 마찬가지였다. 협조하겠단다. 시온의 달싹이던 입술이 멈췄다. 분명히 존재하던 마룻바닥 밑이 물렁물렁하게 느껴졌다. 깊은 해수에 곧 닿을 듯이, 까맣게 보였다.

“뭐, 그래. 할 건 다 해놓고 미안하다니 내 가슴이 찢어진다만…”

입꼬리 한쪽을 그렇게나 올려놓고, 누가 상처받았다 토로하는 것인지. 태환이 의자를 상체의 힘을 이용해 뒤로 밀었다. 마룻바닥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작은 고통의 소리를 내뱉었다. 무생물의 비명 따위 신경도 쓰지 않으며, 사내는 시온의 등 뒤로 다가온다. 시온에게도 낮고, 그에게는 턱없이 낮은 선반에는 유리 컵이 몇 개 놓여 있었다. 개업기념, 돌잔치 기념, 비매품. 타월에 새겨진 자수를 본 태환이 콧등을 구겼다. 궁상맞았다. 그러나 지적하진 않았다. 잔을 챙겨올 걸 그랬지. 그래도 덕분에 이 구질구질한 살림살이를 더 들여다볼 수 있어 좋았다.

제가 ‘다시’ 줄 수 있을 게 얼마나 많은지 가늠하기 위함이었다. 갈피를 잃어버린 시온과 달리, 그의 입장은 굉장히 명백했다. 애초에 그와 자신이 무슨 관계였고 어떻게 정립되었으며 어떻게 불렸느냐 따위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를 고집스레 권시온이라고 부르지만, 그건 지속해서 표를 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법적으로 그의 성씨가 무엇이든, 권태환에겐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거리낄 것도, 없었다. 계속 아무것도 몰라요, 하고 이리저리 휘청이고 있는 시온만이 자꾸만 숨으려 몸을 사릴 뿐.

“네 성격에 오죽하겠어. 그런데 권시온.”

각자의 앞에 유리잔이 하나씩 놓였다. 잔 둘레는 건드리지 않고, 밑동을 손끝으로 슬쩍 밀었다. 상자엔 또 다른 상자가 있었다. 케이스를 둘러싼 벨벳은 태환의 피부만큼이나 짙은 색을 띠고 있었다. 그 앞에서 아무런 말을 잇지 못하는 이시온보다 딱, 일 년 더 숙성되었다는 표시의 라벨이 보였다. 마치 일부러 그걸 고르기라도 한 듯이. 마개가 열렸다. 압축되어 있던 공기와 함께 향이 올라왔다.

“기억나?”

태환의 화법은 불친절했다. 시온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무심결에 시선이 들려버렸다. 맞은편의 사내는 웃고 있다. 기억이 나느냐, 라고 한다면 그가 할 말은 뻔했다. 권태환이 드물게 과거를 꺼내 들었다. 제 건너에 있는 잔에, 과거에서부터 숙성되어 온 액체를 따라주면서.

*

태환이 화두로 잡은 때는 약 14년 전. 즉, 시온이 열여섯이던 순간이었다. 소년이 다니던 사립 중학교의 재학생은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애들이 대부분이었다. 반이 재벌, 그 반에 삼분에 이가 흔히 졸부라고 일컬어지는 준재벌. 그러면 나머지는? 그 작은 풀장 안엔 꽤 많은 부류가 뒤섞여 있었다. 부모가 중소기업을 운영하는데 그렇다고 뛰어나게 부유하지 않은, 애매한 이름표를 단 이들과 재벌과 같은 가문이긴 하나 엄밀히 따지면 방계라 비슷한 나이 또래의 친척 덕에 딸려 온 애들.

그중에서도 가장 소수는, 단언하건대 장학생이라는 꼬리표가 달린 학생들이다. 대상이 되는 인원은 해마다 이사장의 재량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래봤자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달라진다고 한들 매년 늘어나진 않았다. 대부분 학년마다 성적 장학 한두 명, 체육 특기생 두세 명. 그들에게 허락된 침범은 고작 그 정도가 전부였다.

‘권시온’은 첫 번째, 재벌의 부류에 섞이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언급된 장학생에 섞이기도 했다. 혹은 둘 중 어디에도 섞이지 않았다. 서류상으론 명실상부 JL 그룹의 둘째이긴 했으나 그거야 뭘 모르는 일반인들 눈에야 그런 것이었다. 날 때부터 제 부가 당연했던 이들은 각기 성향과 교육방식에 따라 다른 태도를 보이긴 하였으나 속내는 다 엇비슷했다. 아, 그 입양된 애. 특이 사례 취급 말이다. 이 작은 울타리 밖에서야 다수지만, 한정된 공간 안에선 위축되고야 마는 소수의 입장도 다를 바 없긴 했다. 어쨌든, 뭐가 됐든 나보다 부유한 환경에 있는 애. 그러나 운이 좋아서 과분한 걸 얻은 애. 결국엔 아니꼬운 시선이 대부분이긴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건 권시온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저 두 부류에 섞일 필요가 없었다. 그런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고. 더불어 무슨 속내를 가지고 있든, 적당하게 친한 척을 시도하는 또래들은 항상 있었으니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지내면 큰 문제는 없었다. 일단 학교생활에 대한 모든 보고는 양부모가 아닌, 형인 태환에게 연락이 가도록 되어 있어서 더욱 안심이 되었다. 댁네 ‘아드님’은 교우관계가 좁고 늘 홀로 다닙니다, 와 같이 신경 쓰일 만한 평가도 들릴 일 없을 테고 말이다.

‘권시온, 좋은 마음이었던 건 알겠다만…’

어제까지라면 그랬을 텐데. 지도자 실 중앙에 서서 뒷짐을 진 시온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제 앞의 지도 담당자의 곤란해 죽겠단 음성을 들으며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자리를 보존하고 있는 거였다. …아이고. 감독이 뱉은 한숨에 땅이 꺼질 지경이었다. 그가 상당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음은, 굳이 파고들지 않아도 한눈에 보였다. 뒷머리를 벅벅 긁던 그는 최대한 나긋하게 어르려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지금 제게 훈계 아닌 훈계를 해야 하는 대상인 시온이 수영부의 유망주여서? 그런 연유도 없진 않았다. 공평해야 할 교육자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팔이 안으로 굽고 예쁜 놈은 매가 아니라 떡을 주고 싶었을 테니.

‘…아무튼, 그건 스포츠 정신이 아니야.’

그래도 밑바닥을 드러내자면, 실은 제 모가지가 가장 걱정이었다. 그래서 고함 한 번 치지 못하고 심호흡을 해대며 되지도 않는 소리를 주워 뱉는 거였다.

사연은 다음과 같았다. 교감이 어정쩡하게 붙여놨던 코치가 하나 있었다. 아마도 그의 조카인가, 처남인가 그랬었다. 애매한 성적으로 선수 생활을 유지하다가 어정쩡하게 마무리하고 지도자 과정을 밟았다. 나이대가 다르니 잘 알진 못했으나, 체육계는 워낙 좁다. 후배에게 전해 듣기로는 그랬다. 그래서 그 코치가 뭐 어쨌느냐고 묻는다면, 결론만 말하면 잘렸다. 아주 처참하게 말이다. 그는 아마 한동안 이 학교는 고사하고 어떤 곳에도 취직되긴 힘들 터였다.

계기는 단순했다. 원래도 애들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정확하겐 날 때부터 금수저 물고 다닌 애들에겐 적당히 뒤를 봐주는 편이었고 그렇지 않은 부류는 막 대했다. 낙하산인 코치는 권시온을 후자의 그룹으로 배치했다. 배경이 대단하면 뭐 하느냐는 식이었다. 가끔 코칭을 핑계로 손가락으로 이마를 밀어내는 걸 보고 주의도 줘봤으나 소용은 없었다. 괜한 트집을 잡아 자세가 나쁘네, 힘이 너무 들어갔네 하고 지적질 하는 버릇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무게상으론 문제가 없었으나 지방이 좀 붙었단 핑계를 잡아 식단 관리도 못 하느냐고 시온의 뒤통수를 한 대 친 일이 화근이었다.

감독은 그 다음 날, 손을 올린 해당 코치가 해고 조치 되었음을 통보 당했다. 심 감독님도 조심하세요. 유도부 감독이 귀띔했다. 제가 이사장실 앞을 지나다가… 아, 엿들으려던 건 아니고 우연히 들었는데 말입니다, JL에서 어떻게 그걸 알고 난리가 났대요. 교감도 묶여서 잘릴 뻔했답디다. 아니나 다를까, 또 이틀 뒤엔 비서도 아니고, JL의 구성원이 손수 전화를 걸었다. 그 가문의 첫째 아들로부터였다. 어찌나 긴장되던지, 저보다 한참 어린놈의 위압감이 수화기 너머로도 상당히 강하게 느껴졌다. 낮게 내리깐 목소리로 통보해오는 말을 듣는데 왠지 오금이 저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가 뭘 말했느냐. 자세한 건 함축하고, 핵심을 말하자면 단순했다. 그리 에둘러 말하지도 않았다. 방관자도 다를 바가 없다. 기회는 한 번이면 족할 거다. 너무도 직설적인 경고 조치였다.

‘…김정훈이한테는, 나중에 사과라도 해라. 물론 걔도 너한테 사과해야 하겠지만.’

자신이 지도자로서 내릴 수 있는 결론, 그 최선이었다. 그는 시온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래도 제가 알던 권시온의 성격이 틀리지 않았다면, 소년은 아마도 풀이 죽었을 거다. 감독이 머리통을 살짝 흔들었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여기까지 하자.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연습은 일찍 접어. 마음 추스르고.’

운동하는 놈들은 유달리 혈기왕성해서 크고 작은 사고를 꼭 치기 마련인데, 쟤는 달랐다. 항상 유순하고 착하고 묵묵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고 붙박이가 된 어깨를 두들겨 주고 밖으로 나섰다. 감독으로서도 처음으로 훈련이 아닌 다른 이유를 들어 쓴소리를 한 날이었다. 그만큼 ‘착한 팀원’이었던 시온이 저지른 잘못은, 대체 뭐였는가.

하지 않던 짓을 하면 탈이 나는 법이었다. 김정훈은 체육 특기생, 그러니까 장학생이었다. 시온과 같은 3학년, 열여섯. 정훈의 대표 종목은 자유영이었다. 권시온과 같았다. 그는 중산층이라기엔 한참 모자란 가정환경에서 뛰어난 운동실력 하나로 지원을 받았다. 그 덕분인지 나름대로 막 입학한 시점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허나 자부심은 잠시였다. 한껏 올라가있던 기간이 너무도 짧았다. 경기 성적과 함께 곤두박질치기 시작한 자존심은 이미 해저 아래에 깔려 있었다. 팀원들과의 격차가 벌어진 건, 두 말하면 잔소리였다. 아무리 그래도 돈으로 만든 철저한 관리와 관심을 이기기엔 힘들었다.

재능이면 다 되는 거 아니냐고? 안타깝게도 이상론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기록은 학년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떨어졌다. 계속 헤엄을 치기 위해선, 고등학교도 장학금이 필요했다. 의무교육도 아니었고 금전적인 부분도 무시할 순 없다는 전제가 현실이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3학년이 알기엔 너무 비정했으나 모른 척 무시한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지도 않았다.

여기서 엉뚱한 사고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어쩌다 사정을 눈치챈 시온이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을 했다. 나는,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찰나의 배경이라도 있으니까. 왜 그런 생각을 해버린 걸까. 덧붙여 권시온은 제 의지로 물살을 가르는 게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수영이 삶의 의미라거나 희망은 아니었단 것이다. 그저 원장님이, 코치님이 좋아하니까. 그리고 그 덕분에 권 씨 일가의 구성원이 되었고… 제일 중요한 건, 이걸 계기로 형을 만났으니 놓아버리면 안 될 것 같다는 이유 하나만을 보고 꾸준히 해왔다는 거다.

열여섯의 여물지 못한 동정심은 화를 불러왔다. 되지도 않는, 어리석은 배려를 실행에 옮기고 말았다. 권시온은 주전 선발에서 일부러 평소보다 떨어진 기량을 보였다. 그래야 김정훈이 순위권에라도 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예민한 주변인들은 그걸 모른 척 넘어가지 않았다. 감독과 시온이 지도실로 자리를 옮기기 전, 정훈은 소년에게 큰 소리로 힐난을 던졌다. …고아 새끼가, 누굴 동정해! 습기가 가득한 연습용 수영장이 그 말을 여러 번 반복하듯 메아리쳐 들려주었다.

모욕적이었나? 그렇진 않았다. 시온은 그렇게 반 시간 넘게 바닥 타일과 눈 맞추다 겨우 제 짐을 챙기러 갈 수 있었다. 미닫이문이, 그날따라 너무도 무거웠다.

*

사용인들도 식사 때문에 자리를 비웠을 시간이었다. 그를 태우고 온 정 기사도 말없이 문만 열어주고 떠났다.

어둡기 전이었다. 붉은 노을이 짙어지는 때에 들어서는 일이 드문 시온이었기에, 새삼스럽게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에도 이곳이 제집으로 여겨진 건 아니었으나 오늘은 유독 더 그랬다. 조바심이 일은 탓도 있었다. ‘형’이 알게 되면 어쩌지. 왜 알면 안 되는지는 몰랐다. 막연하게 숨겨야 할 것만 같았다. 원래 어른들은 아이가 너무 짓궂어도 너무 시끄러워도 너무 조용해도, 심지어 너무 착해도 걱정하거나 거슬려 했으니까.

태환은 다를지도 몰랐다. 적어도 자신에게만큼은 늘 너그럽게 굴어 주지 않았는가. 한편으론 불안하기도 하였다. 같이 보낸 세월이라곤 겨우 2, 3년 남짓이었다. 언젠가는 흥미가 떨어져 달라질지도 모르고 말이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을 때였다.

‘축 처졌네.’

작지 않은 키를 지닌 시온의 신체가, 순식간에 종잇장과 같이 들어 올려졌다. 흡. 막힌 숨이 놀라서, 압박감을 느낀 덕에 자연스레 튀어나왔다. 제 허리를 붙잡은 손바닥의 감촉이 그새 익숙했다.

‘…형?’

신음과도 같은 확인이었다. 큰 눈이 거의 동전만큼 원을 그리고 있었다. 어깨에 걸쳐진 상체를 뒤틀었더니 익숙한 인영이 비쳤다. 권태환의 옆얼굴이었다. 순간 긴장했던 탓에 잔뜩 들어간 힘이 맥없이 풀렸다. 그는 평일 이 시간에 귀가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뭔가의 목적이 있어 서둘렀다는 말이 아닌가. 아, 덧없는 고민을 했구나. 어린 얼굴이 저도 모르게 일그러졌다. 형이, 태환이 알고 있는 거구나. 시온은 통감했다.

설명이나 대화는 없었다. 시온의 몸이 번쩍 들렸다. 열여섯치고 큰 키도 소용이 없었다. 태환은 시온을 들쳐멘 상태로 거실에 들어섰다. 그러고는 곧장 소파에 앉았다. 그러나 소년은 가구 위에 자리할 수 없었다. 웬만한 성인만큼 큰 신장이 무색하게도, 그는 시온을 제 무릎 위에 앉혔다. 내려오겠노라 주장하기가 꺼려졌다. 다른 걱정이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한 탓이었다. 입술이 오물거렸다. 어떻게 서두를 꺼내야 할지 갈피를 잡기가 힘이 들었다. 내가 하려는 말이 변명일까, 변론일까. 어떤 의도로 들릴지가 신경 쓰여 목구멍이 좁아지는 기분이 들 때였다. 그는 부러 입을 열 필요가 없었다. 태환이 선수를 쳤다.

‘잘했어. 아, 양보한 거 말고.’

‘…응?’

얇은 모발이 손가락 사이를 유영했다. 쓰다듬는 손길은 거친 구석 하나 없이, 지나치게 느리고 부드러웠다. 권태환에게 이런 식으로 쓰다듬어지는 건 소년이 유일했다. 할 거다,같은 가정형이 아니라 확정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이번 기회에 잘 기억해 둬, 권시온.’

아이의 상체가 잘게 떨렸다. 그의 손은 어느새 머리카락이 끝나는 부분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가 곧이어 목덜미를 지나 어깨에 닿았다. 거세지 않은 힘이 동그란 뼈를 당겼다. 시온은 속절없이, 태환에게 기대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형의 손길이 기쁘다니, 답도 없구나. 소년은 자책했다. 시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소파에 걸쳐져 있던 팔을 들었다. 한쪽은 어깨, 한쪽은 반대편 팔꿈치쯤에 있었다. 그의 허벅지 위에 놓여있던 몸을 완전히 둘러싼 형태였다.

‘아무리 미덕이라고 떠들어대도, 실제로 대부분의 인간은 선함을 가장 우선으로 여기지 않아.’

턱이 들렸다. 눈과 눈이 닿았다. 배워왔던 바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제가 가장 미움받고 싶지 않은 존재가 거론하는데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시온이 몇 번 눈꺼풀을 열었다 닫았다. 소년이 뭐에 그렇게 놀랐는지 다 아는 것과 같이, 태환은 태연하게 문장을 이어 붙였다.

‘그러니까 너도, 그럴 필요 없어.’

뭘 하든 예쁘긴 하지만. 태환이 웃었다. 사실 형은 제게 늘 너그러웠지만, 쉽게 풀어 설명을 건네주진 않았다. 그래서 그나마 그가 화나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시온에게 작은 위안이 될 뿐이었다.

‘특히 소중한 걸 눈앞에 둔 상황이라면 더. 이번 기회에 잘 배웠다 쳐.’

아, 네가 먼저 사과를 할 필요 없어. 시온은 눈치챘다. 누군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전했구나. 섬뜩해야 할 구절인데, 그렇지 않았다. 태환이 제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확인받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오히려 기꺼웠다 그보단 다른 게 신경이 쓰였다. 그가 읊어준 말은 배워온 것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이었다. 선하면, 착하면 분명히 사랑받을 거란다. 이 원장의 가르침이 절대적인 건 아니었다. 소년은 아직 16년밖에 살지 않았지만 모르지 않았다. 절대 변하지 않고 완벽한 진리는 없을지도 모른단 건 늘 몸소 배워온 바 있었으니.

그런데, 그렇다면. 권태환은 착한 아이가 아닌, 양껏 욕심을 부리는 권시온 혹은 이시온을 어떻게 여길까? 그가 제게 싫증이 나는 일이 영영 없을까, 진실로? 의문과 같은 두려움을 겉으로 드러내기엔, 제 몸을 감싼 미온이 지나치게 소중했다. 다만 소심한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미움을 받더라도?’

붙어있던 상체가 조금 간격을 벌렸다. 부스스하게 흐트러진 앞 머리카락이 커튼과 같이 나부꼈다. 저런. 태환이 혀를 찼다. 눈가가 불그스름했다. 슬금슬금 눈꼬리에 물 자국이 묻어났다. 사내는 다시 한번, 연약한 눈가를 쓰다듬으며 확실한 어조로 일러주었다. 곧이어 시온은 눈을 감았다. 눈앞이 암전 되자, 저를 안고 있는 체온이 온전히 전해졌다.

‘그래, 그보다 더 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

“궤변이었어요.”

이시온은 늘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오히려 늘 작은 목소리로 고저 없이 말을 꺼내는 편이었다. 반면 발음은 또박또박 잘도 끊어 뱉어서 말끝을 흐리는 일이 없었다. 탁한 음 없이, 말미를 끄는 바도 없이. 하지만 방금은 달랐다. 어디가 고장 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발음은 허물어져 있었다. 심각하다 싶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맨정신일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부정확했다. 양손으로 술잔을 잡은 탓인지 상체가 흔들릴 때마다 잔에 든 갈색 액체도 덩달아 출렁거렸다. 손 마디마디에 빨간 물도 들었다. 알코올은 자꾸만 하지 않던 짓을 하게 만들었다.

몇 잔을 마셨는지 분명히 헤아렸던 것 같은데, 막상 떠올려보니 기억이 나질 않았다. 석 잔까지는, 제대로 셌었건만. 시온의 눈꺼풀이 후들거렸다. 병이 제법 컸다. 시온은 음주를 하는 일이 없다시피 했으나, 용량에 대해서만큼은 알았다. 늘 계측하고 재는 게 그의 일거리 아니던가. 특히 유리병에 든 액체도 낯설지 않았다.

그가 매번 구매하는 제과용 럼주는, 보통 450mm로 정해져 있었다. 그보다 반 뼘 정도 긴 걸 보니 700mm쯤 될 거였다. 현재는, 안을 채우고 있던 내용물이 반 이상 사라졌다. 여전히 얼마큼의 술이 위에 흘러들어 간 건진 몰라도 상당한 양이긴 했다. 분명 저 혼자 마시진 않았다. 하지만 상대는 지나치게 멀쩡했다. 그의 몸은 계속 기우뚱, 이리저리 기우는데 사내의 위치는 변하는 바가 없었다. 시온이 무슨 소리를 하든 말이다.

“…궤변, 이 말이 맞나. 아무튼요.”

관자놀이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숙취는 아닌데, 마시면서도 두통이 오는 거 보니 여기까지였나 보다. 그럼 잔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시온은 왠지 모르게 잡은 걸 놔주질 못했다. 거의 처음 들이켜 본 증류주는, 복잡한 향을 지니고 있었다. 일단 가장 먼저 느껴지는 건 감귤 계열의 껍질 향과 그 사이로 잘 혼합된 정향. 조금 더 깊이 들이마시면 고소한 느낌도 들었다. 아마 견과류의 냄새일 테다. 미각으로 얻는 정보는 후각이 준 것과 유사하지만 조금은 다른 면도 있었다. 말린 과일에 좋은 나무를 써 훈연을 입힌 듯한 맛과 코로 느꼈던 거보다 거센 오렌지, 향신료의 끝 맛. 자극에 약한 혀끝은 예민하기 마련이었다. 이렇게 어지러운 와중에도 위에 거론한 향과 맛이 입안을 배회하고 다녔다.

스물아홉의 이시온은 취기를 빌렸다. 권유를 거절했었다면 이렇게 취기가 오를 일도 없었을 테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는 취했고 평소라면 하지 않을 일에 대한 용기를 얻었다. 제법 야무지게 따졌다 싶었다. 가슴께가 올라갔다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마법에 걸린 것처럼. 10년 전, 권시온이었더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위였다. 비난이라니. 물론, 어디까지나 이시온이란 인물을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그렇다는 거지 남들이 내뱉는 것에 비하면 그건 비난 축에도 끼지 못할 단어였지만.

‘권시온’과 ‘이시온’, 구와 신. 겨우 위스키 몇 잔으로 나뉘었다. 힘들여 바꾼 성이 아니라, 단 몇 잔이 술이 그를 구분 지었다. 조금 허탈해졌다. 시온이 드물게 비실, 웃어버렸다. …귀엽네. 그럼 이 꼴을 다 구경하고 있는 태환의 입장은 어떠했느냐. 저 세 글자가 결론이었다. 힘이 들어간 각진 손끝에 붙들린 빈 잔이 식탁 위에 놓였다. 사내의 상체가 앞으로 당겨졌다. 두꺼운 손바닥을, 날카로운 턱 선이 파고들었다. 대놓고 감상하는 자세였다.

태환이 굳이 과거를 회상시킨 이유가 뭘까. 모르겠다. 뭔가 하고 싶은, 전하고 싶은 게 있을 터였다. 답을 쉬이 주지 않긴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태환의 죄어오는 셔츠 사이로 풀릴락 말락, 간신히 견디고 있는 단추가 힘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속살은 감추진 못했다. 그걸 본 시온의 콧등이 와락 오그라들었다. 제 심경을 알지도 못하면서. 아니. 그는 알고 있을 테다. 저는 이렇게도 힘들게 달라지려고 하는데, 태환은 달라질 생각이 위스키 한 방울만큼도 없어 보였다. 아량을 베풀듯 혹은 심중을 헤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태환이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마음이 풀리진 않았다. 시온은 또 하지 않던 짓을 한다. 양 볼에 공기가 들어찬다.

“…말하기 싫어요.”

태환의 입가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어이가 없어서가 아니라 진짜 갖은 귀여운 짓은 다 한다 싶었다. 이제 그만 마셔야 하는데, 시온은 저도 모르게 입을 축이고 말았다. 읍. 몸이 거부하고 있었다.

“씁. 내려놔.”

그의 비서나 수행인은 듣자마자 어깨를 움츠렸을 법한 음성인데, 청년은 쉽게도 그저 어린애 취급을 하는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자신이 10년 전처럼 어린애의 편린을 보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였다. 이시온의 팔꿈치가 식탁에서 떨어졌다. 제 것이 뺏길까 봐 두려워하는 소년 같은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고 만 것이었다.

“권시온.”

원래도 적당히 처진 눈썹 끝이 더 아래로 끌어내려졌다. 뺨은 부풀어 오른 채였다. 녹아버린 혀뿌리가 뱉어내는, 어물거리는 억양과 들어찬 공기가 만든 축축함이 음성에도 배어 나왔다.

“…선함은 미덕이 맞아요. 다들, 결정적인 순간에는 착한 쪽을 선택하는 게 맞단 말이에요.”

설명을 길게 하기가 어려웠다. 이시온은 짧지만 조리 있게 말하는 법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므로, 맨정신이었더라면 간결한 핵심과 용건을 잘 다듬어 전달할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그러기가 어려웠다. 이 또한 알코올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시온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언제는 권태환에서 제 주장을 잘 펼친 적이 있었던가? 일방적이긴 해도 그만큼이나 오랫동안 제게 애정을 던져준 이는 없었다.

“그게, 그게 아니었다면…”

어른스러워서, 아이 같지 않아서 껄끄럽다는 평을 들었던 소년은, 실제론 누구보다 보살핌을 원했다. 그래서 더, 버려질까 무서웠고, 변해버릴까 떨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현실로 일어나기 전에 사라지려 애썼다. 그러면서도 만약 진실로 변하지 않는다면 저를 찾아주지 않을까. 애써 희미한 기대를 지우고 있었던 거다. 제 연약한 살을 잔잔한 수면 아래에 깔아두고 있으면서 괜찮은 척하는 게 최선이었다.

“…진작 날 찾아왔어야죠.”

무참히 깨달은, 부정하던 진실은 머리가 흐리멍덩해지고 나서야 드러났다. 태환은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어쩐지 흐르는 물기가 느껴졌다. 아, 내가 울고 있구나. 시온은 그걸 자각한 순간 잔을 내려놓았다. 거실은 여전히 불을 꺼놓은 채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볕의 흔적이 존재했었는, 이제는 해가 다 저물고 말았다. 식탁 위의 주백색 등만이 유일한 빛을 내뿜었다. 사내가 켰는지, 제가 술기운에 더듬거리며 켰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알 수 있는 건, 주홍색의 연약한 조명이 빛과 어둠을 두 쪽으로 나눴다는 것이었다. 시온의 고개가 떨궈졌다. 유리 위로 물방울이 맺혔다. 침묵이 고수되었다. 달아올라 있던 온도가 바뀌고 있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피를 흘린 것도 아니니, 아마 기분 탓이겠지만.

“흐읍…”

세월을 거슬러 오른 주정뱅이가 울음을 삼켰다. 그때였다. 열악한 조명 덕에 도리어 존재감을 손에 넣어버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청년은 무심결에, 자동으로 얼굴을 내보이고 말았다. 촘촘한 속눈썹 사이가 액체로 들어차 반짝거리고 있었다. 큰 눈은 많은 걸 담아내고, 보여주었다. 어느새, 태환의 몸이 제게 바싹 다가왔다. 권태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운데 자리한 식탁은 안중에 없다는 듯, 자신의 그림자로 시온의 상체 전부를 삼켰다. 여파는 컸다. 접시 위 파이가 퉁겨지듯 올라갔다가 간신히 제자리를 찾았다.

다른 물건의 처지도 마찬가지였다. 가해지는 힘을 이기지 못한 유리병이 나동그라졌다. 갈색 액체가 쏟아졌다. 그러자 위스키가 가진 향과 체취가 자연스럽게 섞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찝찔한 눈물이 입술에 묻었다. 유난히 깔끔한 체하기를 좋아하던, 여전히 선호하는 인간은 시온에게만큼은 제 몸을 사리지 않았다. 거리낄 게 없으니까.

애초에 태환에게 있어서 다른 부류와 이시온은 극명히 다른 존재였다. 누굴 어디다 가져다 대냐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면 이해가 가겠는가. 남자의 혀는 무르지 않았다. 굳이 타인과 비유하자면. 애초에 시온이 경험한 입안 속 살덩이라곤 자신의 것과 권태환의 것뿐이라는 점이 안타까울 정도로. 온도는 피부만큼이나 미지근하다. 우느라 눈구멍을 가득 채운 열기를 식히기엔 딱 좋을 정도였다. 붉고 얇은 표피가 눈물방울을 훔쳐 갔다.

다음은 입술의 차례였다. 눈꺼풀 위를 꾹 눌렀다가 떨어졌다. 떨어지는 건 잠깐이었으나 입술이 닿는 시간은 그보다 배는 길었다. 그렇게 멈추지 않은 채, 태환이 손바닥으로 시온의 턱 끝을 들었다. 이윽고 입매가 물 자국으로 만들어진 발자취를 따랐다. 도톰한 눈 밑 살을 지나 매끄러운 광대뼈, 언제 부풀어 올랐느냐는 듯이 수척해진 뺨. 턱 선에 맺힌 눈물은 엄지로 닦아냈다.

“착하지, 벌려 봐.”

명백히 아이 혹은 개를 어르는 듯한 표현이었으나 청각적으로 와닿는 의도는 달랐다. 권태환이 직접 어르고 달래주는 이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의 양친도, 주변인도… 심지어는 배우자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그 사람도 아닌, 이 세상에서 이시온 만 가지고 있는 특권이었다. 과거는 물론이거니와 지금까지도. 그럼 앞으로는? 감긴 눈은 떨어지지 않았다. 제 두려움은, 수영장이 아니라 바다였다. 끝을 모르는 심해였다.

“시온아.”

청년의 도톰한 입매가 달싹였다. 그렇다고 열리지도 않았다. 동기로는 망설임과 거부감이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대신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가늘게 뜬 눈동자 위로 밀착된 이목구비가 보였다. 태환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매번 짓는 뒤틀린 미소가 아니었다. 절대 은은하다거나 온화해 보인다고 할 순 없었지만,

“잘 들어. 버릴 거였으면…”

태환은 어떤 심중으로 이러는지 다 알아채고는, 아니. 모른 적이 없기에 금세 그 입술 사이를 벌리게 하였다.

따르지 않고는 못 배길, 지독하게 단 무언가를 물려주면서.

“괘씸해서라도 부숴버렸겠지. 10년이나 기다려줄 필요 없이.”

그랬다. 시온은 마침내 입을 벌렸다. 놀라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시온을 파악하고 있는 만큼, 저도 만만찮게 태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흐렸던 머릿속에 한차례 찬물이 부어진 것만 같았다. 백경아라는 존재가 있었긴 했다. 그러나 제가 안중에 없었더라면, 그는 손쉽게 아랫사람을 부렸을 테다. 굳이 저를 찾아올 필요 없이. 하지만 그건 이 말을 듣기 전에도 자각하고 있긴 했다. 중요한 건 그다음 구절이다. ‘부숴버렸을 것이다.’ 그랬다. 애초에 그는 아끼는 생물이 없었다. 무생물도 처지는 똑같았다. 그런데 저만 논외라는 건 무슨 뜻이었을까. 아끼는 척만 할 거였다면, 저를 따르지 않는 이를 두고 볼 사람이 아니었으니 무참히 망가트리거나 아예 찾지도 않았을 거다. 권태환은 그런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이리 와.”

그림자가 사라졌다. 대신 눈앞의 인영이 두 팔을 벌리는 게 똑똑히 보였다. 기껏 훔쳐주었건만, 굵은 물방울이 자꾸만 떨어지고 있었다.

“…아직 다, 풀린 건 아니에요.”

“내키는 대로 해.”

소년일 적에도 키가 고민이던 편이었지 않은가. 심지어 성인이 되어버린 지금은 지나치게 크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의 키였다. 그 말인즉슨 큰 것치고는 말랐다, 는 평가를 듣기 쉽긴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큰 거 치고 그렇단 거지 가볍지는 못하다는 말이었다. 제 무게를 뻔히 알면서도, 시온은 기어이 제 무릎 한쪽을 식탁에 올렸다. 절대 하지 않을, 버릇없는 짓이었다. 돌아서 가면 되지만, 괜히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다 자란 몸을 안아 들어 올리는 두 팔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저를 온전히 전부 품어주었다. 십여 년 만의 느끼는, 이 안온한 압박감이 반가울 지경이었다. 아, 나는 이 온도와 거리가 그리웠구나. 시온의 얼굴이 태환의 어깨에 파묻혔다.

*

매달리거나 들쳐 업히거나. 둘 중 하나라는 건 똑같았으나 분명히 다른 구석이 있었다. 훤칠한 키를 가진 청년은, 저보다 약간 더 큰 남자의 몸을 꽉 불 들고 있었다. 떨어질까 봐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단지 떨어지기가 싫었다. 분출하듯 터지고 만 욕심이 혈관을 꽉 채워 재촉했다. 귓바퀴를 타고, 노골적인 마찰음이 들렸다. 입안에서 울리기라도 하는 걸까. 치아가 핥아지고 혀는 휘감아졌다. 숨이 차올랐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쪽. 흡입하듯 빨아들인 살덩이는 상스럽게 울었다. 중간마다 건네지는 칭찬도 있었다. 다리에 힘 더 주고. 옳지. 소리가 말이 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거리를 벌려야 한다는 건 아깝고 안타까웠다. 그러던 와중 사내의 잘했어, 라는 한 마디가 자꾸만 심장 근처를 간지럽혔다. 그래서 어느 쪽도 놓을 수 없었다. 한 번도 과욕을 부린 적이 없었는데, 참아왔었는데. 사람이란 건,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제가 지켜온 인생관을 뒤바꿀 수 있는 생물이었구나. 시온이 신음했다. 투정을 가장해 선고한 바 있듯, 이시온은 태환이 자신을 찾지 않은 데에 대한 섭섭함을 전부 잊지 않았다. 어딘가 묻은 빵 부스러기처럼 툭, 털어버리긴 어려웠다 굳이 일러주고야 말았다는 게 그 증거였다. 배겨버린 가치관의 흔적이 역력한, 최소한의 양심이었으나 고작 이런 몇 마디만 해도 시온에겐 크나큰 일탈이었다.

마흔이 넘었으니 어쨌느니 하더니. 사내는 훌쩍 커버린 제 동생을 안고 잘도 다리를 움직였다. 이시온의 발이 달랑거렸다. 그러다 걸음이 멈췄다. 같은 방향에 있는 문이 두 짝이었다. 하나는 화장실, 하나는 방일 게 분명했다. 그런데 태환의 눈으로 본 오래된 원목으로 짜인 문은, 아무리 봐도 그게 그거였다. 허름하고 마모돼버린 걸로도 모자라 문고리에 손때가 가득했다. 잘 닦아두긴 했지만서도.

막혀있던 호흡이 터져 나왔다. 기왕이면 소파나 바닥보단 침구가 좋았다. 그리 좋은 건 아닐 게 뻔했으나 마침내 솔직해지기 시작한 시온의 몸을 또 배기게 할 순 없다는 것이 권태환의 입장이었다. 안방이 어디냐고 묻기 위해 거리를 벌렸더니, 득달같이 따라온다. …이것 봐라. 사내는 미간을 좁혔다. 그와 달리 하관은, 짙은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어리광 부리는 건, 좋은데. 침대가 어디 있는진 알려, 하. 권시온.”

결국 헛웃음을 뱉자니, 맞은편에서 가늘게 반박이 들려왔다. 싫어… 시온은 어질어질하게 만들던 술기운이 그새 다 달아났는지 입가가 젖을수록 이성이 되돌아온 걸 느끼고 있었다. 대신 다른 방향의 부정이 반복되고 있었다. 시온은 독백했다. 나는 아직도 취해있는 거야. 아직은 완전히 제 모든 걸 드러내기엔 어렵고 겁이 났다. 딱 알맞은 변명거리였다. 입술이 부딪혀온다. 벌리지 않겠다고 떼를 쓴 건 다 잊어버렸나 보다. 어떻게 참고 살았는지, 조르는 솜씨가 일품이다. 태환은 비집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 채로, 결국 져주고야 말았다.

남자가 시온의 아랫입술을 물고 늘어졌다. 최대한 날카로운 부분이 닿지 않도록, 고른 부분만 써서. 혼내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타이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청년은 아직도 불만이 남았는지, 토로하는 비음이 숨김없이 토해졌다. 그러면서도 결론적으론 팔을 뻗어 오른쪽 문을 가리키긴 했지만.

다부진 손이 문고리를 못살게 굴었다. 고의는 아니었다. 권태환이 혀를 차며, 낡았네. 하고 중얼거렸다. 다행히 손아귀의 힘이 부족하지 않은 덕에 간신히 방향이 틀렸다. 끼익. 녹이 슬었는지 금속음이 들림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청년이 실제로 사용하는 방이었다. 터무니없이 작은 옷장과 전신을 구겨 넣어야 할 것만 같은 책상에 짝을 맞춘 의자. 잘 보니 매트리스 한쪽이 꺼져버린, 그렇지 않아도 작은 침대. 거슬리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권시온. 성수에서 여기까지 출퇴근해 보는 건 어때.”

이제 와서 밝히는 바지만, 태환이 구비해둔 건 펜트하우스만이 아니었다. 거주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시온이 살 곳을 따로 마련해두었다. 그것도 무려 5년 전부터. 나름대로 이시온의 검소한 소비 수준에 고려해 고른 거처였으나 이곳에 비하면, 차라리 거기가 낫다 싶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권태환의 입장에서나 저렴하고 좁다랗지, 평수만 그럴 뿐 가격대는 몇 억을 훌쩍 호가하는 아파트라는 점은 언급할 일이 없었다. 사내에게 있어 그리 큰 금액이 아니었기도 하고, 고르는 기준은 넓이나 금액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뷰가 마음에 들었다. 시온이 내심 그렇지 않은 척 물을 좋아하는 것까지 염두에 둔 선택이었다.

“소박하긴 해도 여기보단 넓고, 창 너머로 한강도 보여.”

대상이 이시온이 아니었더라면, 통보하는 걸로 충분했을 과정이다. 그러니까 버릴 거면 진작 산산조각을 내서 버렸고, 몸만 필요했으면 어떻게든 잡아다 그 아파트에 가두면 될 일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아량을 베풀었는지도 모르고 칭얼거리긴. 태환은 기가 막힌 듯, 속으로 뇌까렸다. 그렇대도 어쩌겠는가. 그마저도 애교를 부리는구나 싶으니 말이다. 너른 어깨에 둥그런 이마가 비벼졌다. 차갑지 못한 거절이 전해졌다. 승모근이 으쓱 올라왔다.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였다.

“어차피 따로 살 거라면… 여기가 좋아요.”

감겨있던 두 다리가 천천히 바닥을 디뎠다. 그렇다고 완전히 간격이 벌어진 채도 아니었다. 마치 마주 안고 있는 형태가 되었다. 높이는 낮아졌지만, 여전히 얼굴을 비빌 순 있었다. 권태환의 입에서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숨이 터져 나왔다. 다 풀린 게 아니라더니 과연 그랬다. 같이 살지도 않는데 뭐 하러 네 뜻대로 옮겨주느냐는 앙탈이었다. 완곡했으나, 이시온 식 화법엔 익숙한 그였기에 뻔한 속내를 모를 수가 없었다. 이런데 어떻게 웃음을 머금지 않겠는가. 어떻게 놀리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세월이 지나더니 더 앙칼지게 굴 줄도 알게 된 모양이었다.

“그럼 바로 내 집으로 들어오던가.”

곧바로 아몬드를 닮은 눈매가 뾰족하게 변했다. 아직도 눈물의 흔적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는 주제에. 아, 그것도 싫다? 중얼거리듯 놀리는 말에 대꾸조차 없었다. 이시온은 늘, 한결같이 주변과의 관계를 어려워했고, 넓히려고 하질 않았으며 다가오는 이들을 적극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애정에 굶주려 있으면서도. 거센 방어기제 덕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딱 두 명만이 예외였다. 첫 번째로는 당연히 권태환이 그러했고 두 번째로는 백경아가 그런 존재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다. 간극이 크다고 봐도 과장이 아닐 만큼. 경아에게 연민을 품었다거나, 특정 이상의 애정을 품은 적은 없었다. 맹세코. 그 증명을 받을 존재가 조물주가 아니라 권태환일 게 뻔하니, 얼마나 확실한지 가늠하긴 쉬웠다.

시온이 배워온 바를 따르면, 인간은 각자의 존엄성과 개성이 있기 마련이었다. 예를 들면 나에겐 아무리 개새끼라도 남에겐 귀한 자식이고, 내게는 한정 없이 좋은 사람이더라도 남에겐 원수일 수 있지 않은가. 예시가 지나치게 극단적이긴 하지만, 그러니까 누군가를 대체하기 위한 존재는 없다. 하지만 시온은 인정해야 했다. ‘나랑 닮았잖아, 시온아.’ 정확했다. 도대체 어디까지 계산하고, 내다본 걸까. 애초에 이 만남이 우연이긴 했나. 잠깐 혼란이 치밀어 오르려고 할 때, 시온은 애써 그걸 밀어두었다.

아니야.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거야. 권태환은 저에 대해 지속해서 보고를 들어온 게 확실했다. 아무리 그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단 평가를 받는다 하더라도 제 앞에서만큼은 그런 본성을 누를 줄 알았다. 좋은 계기가 있었을 뿐. 뒤통수를 맞았다,고도 하지 않았던가. 시온이 머리를 양옆으로 털어냈다. 대신, 뒤늦게 터져버린 어리광에 박차를 가하는 건 멈추지 않았다.

“…약속 같은 거, 하지 말걸.”

한숨 섞인 속삭임이 흐르자, 권태환의 매서운 눈매가 누그러졌다. 사내가 손을 들어 시온의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반듯하게 매만져있던 가닥가닥이 갈라지듯 흐트러졌다. 결혼하지 마. 하고 싶었던 말은 그 다섯 음절이었다. 더 덧붙이면 나랑만 살아, 한 열 음절쯤 되었을 거다. 그러나 열여섯은 현실의 벽을 알았다. 참고 견뎌야 더 예뻐해 줄 거야.

그러고 보면, 이따금 비아냥거리던 무리도 있었다. 야, 쟤야. 몰라? JL 장남네 강아지잖아. 꼬리 달렸나 잘 봐라. 그런 말이 귀에 흘러들어왔던 때도 그맘때쯤이었다.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제 발로 그 저택에서 걸어 나올 때까지. 불쾌하거나 서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문득, 차라리 개면 좋겠다 싶은 적도 있었다. 그럼 이렇게 마음이 복잡하진 않을 텐데. 그래서 계약 결혼이란 말에 위안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이상 욕심을 내면 안 된다며 자신을 채근하기 바빴었다. 결국엔 전부 들통이 나고 말걸. 여러 의미로 허탈하기 그지없는 심경을, 턱에 호두를 만들어 표현한 시온이었다.

“권시온, 손.”

시온이 눈꺼풀을 내렸다 들었다. 갑자기 웬 손을 달라니. 그래도 말은 잘 들었다. 저보다 약간 위에 있는 눈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명령을 따르는 일도 잊지 않았다. 알아서 팔이 움직였다. 짙은 색의 손바닥 위로 하얀 손가락이 얽혔다. 태환은 그 손을 잡고 이끌었다. 슈트 재킷 안쪽 포켓까지 가져다 놓더니 검지와 중지를 한 번에 잡았다. 안쪽을 더듬어 보라고 재촉하는 것 같이. 맨들맨들한 손톱 위로 바스락거리는 물체가 느껴졌다. 얇은 플라스틱 포장 같았다. 홀린 듯이 끝을 잡아서 빼보자 뭔지는 몰라도 길이가 꽤 길었다. 그것의 정체를 알아챈 직후, 시온의 턱이 작게 벌어졌다.

“몸으로 꾀는 건 잘 먹히는 거 같아서 가져왔는데, 꼬시지는 건 이쯤하고…”

웬만한 승용차보다 더 값비쌀, 여러 전문가가 공들여 만들었을 정장 안쪽에 넣어둔 건 콘돔이었다. 이번엔 태환이 주머니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더니, 다른 걸 또 꺼냈다. 이번에도 자르는 선이 나누어져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확실히 ‘피임기구’는 아니라는 거였다. 소포장 된 샴푸나 바디워시처럼 생겼으나 콘돔과는 다르게 그 쓰임새를 쉽게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저 예삿물건은 아니겠구나 싶을 뿐이었다.

“상을 줘야겠네.”

만족. 단 두 글자로 이름 붙일 수 있는, 진한 만족감이 역력한 미소였다. 이를 드러내기까지 하며. 권태환은 이시온에게 길이가 긴 쪽의 포장지 끝을 이로 물게 했다. 놓치지 말고. 턱 선을 가볍게 두드려주더니 곧장 물고 있는 반대편을 잡고 뜯었다. 후두둑. 점성이 있는 액체가 쏟아졌다. 엉겨 붙어 있던 속눈썹이 바짝 솟았다.

추측으론 알 수 없던 정체가 밝혀졌다. …젤도 휴대용이 나오는구나. 놀란 바람에 절로 아래턱이 떨어졌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저번엔 윤활제로 쓸 게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용도가 다른 로션이나 오일은 있었지만. 아무리 이시온에게만큼은 과하게 관대한 태환이라고 한들, 그렇기에 다리를 벌려준 거지 그 이상으로 급이 떨어지는 뭔가를 제 몸에 대려고 했을 리가 없다. 암묵적인 합의였다. 그렇다고 직접 챙겨오기까지 할 줄이야. 시온은 젤이 제 목덜미와 옷을 더럽히는데도, 황망히 서 있기만 했다. 귀와 코끝부터 빨개지기 시작했다.

태환이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정신을 빼놓을 여유가 있느냐는 듯, 그가 청년의 팔목을 당겼다. 사내가 바깥쪽, 시온이 안쪽에 있었으나 당기는 힘으로 자리가 뒤바뀌었다. 스프링이 고통스러워했다. 조심성 없이 끝을 누르니, 무게가 몰려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사정을 봐줄 필요는 없었다. 끼익. 그는 앉은 채로 더욱더 힘을 실었다. 사내는 고개를 들어 말갛게 진동하는 눈동자를 끈질기게 주시하고 있었다. 잘 보고 있으라는 뜻이었다.

단추를 섬세하게 풀어내는 동작은 없었다. 반대로 거칠게 검지를 집어넣고, 뜯듯이 벗어냈다. 셔츠의 첫 번째, 두 번째 단추가 속절없이 뜯겨나갔다. 어디로 튀어 나갔는지 알기가 어려울 정도로. 심한 취급이었다. 여유가 넘쳐 보여도 이 순간이 짜릿하다는 걸 숨길 수 없었기에, 태환의 흉근의 움직임이 한 번에 보였다. 세월을 이기지 못한 건 난방시설도 똑같았다. 미세하게 조절되지 못하고 한껏 뜨거워져서인지, 의복 아래에 숨어있던 표피에 땀이 맺혔다. 수영장에서 막 나온 것 같은 물기가 아니라, 제과 용어를 굳이 가져오자면 글라사주한 듯한 표면이었다. ‘매끈하게 윤을 내다.’라는 이름의 단맛이 나는 광택제를 일컫는 단어인데, 그의 맨살을 보자 바로 떠오르고야 말았다. 색은 초콜릿에 비할 것까진 아니고, 오히려 잘 구운 번 정도가 적당한 비유일지도 말랐다. …미쳤구나, 권시온. 그가 마른 세수를 하려던 차였다. 맞물린 금속이 벌어졌다. 하의 지퍼가, 열렸다.

포장지가 뜯어졌다. 젤이 든 쪽은 여전히 시온의 입가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니까 태환이 뜯어낸 건 동그랗게 말려있는 얇은 고무의 겉옷이었다. 다리 사이에서 혼자 어찌할 줄 모르는 살기둥은 굳이 얇은 나일론 천 위로 덧그리지 않아도 될 만큼 꼿꼿하게 서있었다. 조금 있으면 뚫기라도 하겠네. 농담 같은 진담을 중얼거린 사내가 한쪽 다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어정쩡하게 벌려진 시온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더니, 발등이 종아리를 앞으로 밀었다. 그새 유순해진 스물아홉이 몸을 앞으로 당겼다. 침구는 지나치게 낮았다. 사이즈가 작으니, 높이도 낮을 수밖에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그 덕분에 높낮이가 얼추 맞았다.

권태환의 손가락이 브리프 밴드를 내렸다. 잔뜩 웅크리고 있던 ‘작은 시온’이 허겁지겁 모습을 드러냈다. 사고가 가능한 이시온 본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콘돔은 여전히 손가락 사이에 들려있었다. 분명 해보지 않았을 일이니 손수 가르쳐주겠다는 식이었다.

“아.”

태환이 시온을 올려다보는 동시에,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3년, 참을 수 있겠지. 난 10년을 기다렸는데.”

뭐라고요? 되물을 기회는 없었다. 입술 사이가 반투명한 원으로 채워졌다. 그는 아무도 받쳐주지 않았는데 잘도 서 있는 기둥뿌리를 아래로 잡아내렷다. 계약 결혼 이랬으니 기간도 따로 한정되어 있다는 걸까. 꼭 확언을 얻고 싶었건만, 시온은 기회를 잡지 못했다. 말이 길게 이어질 여유 따윈 없었다. 끝의 작은 틈으로도 액이 새어 나오고 있었으니까. 태환이 몸을 숙였다. 그가 허물어진 발음으로 굳이 당부를 남김과 동시에,

“…고맙다고 울지는 말고.”

고무막이 느린 속도로, 훌쩍이고 있는 귀두 끝을 뒤덮었다.

*

견과류가, 턱에도 열렸네. 민망하지는 않았다. 다른 사내의 물건을 자세히 볼 필요도, 그런 취향도 없는 인생을 살았던 태환이었다. 그런데도 거부감이 치밀어 오르지 않는다니. 꽤 편파적인 자신의 시선이 우스워졌다.

“…흐, 으응. 거기, 건들지…앗, 마요…”

사내는 시온의 바들거리는 기둥을 검지 끝으로 살살 찔러보았다. 올려다보니, 내려다보는 얼굴이 성기만큼이나 붉었다. 그의 입안은 꽤 크고 넓었는데도 이 예쁘장한 성기는 그 내부가 벅차할 정도로 생김새만 귀엽고 질량은 전혀 귀엽지 않았다. 조금 더 길었지. 태환은 무의식중에 제 성기와 입에 품은 것의 길이 차를 가늠해 보고 말았다. 제 샅에 달린 것의 길이, 둘레를 굳이 남들과 비교해 본 적은 없었으나 대략적으로는 알았다. 뭐, 큰 편이겠군. 그 정도의 자각이 존재하는 정도랄까. 근거는 단순했다. 기성복만 입으면 불편해서 견딜 수 없다는 이유로 맞춤정장을 택하는 편이었으니까. 그게 어렵다면 적어도 일부 치수라도 조정 가능한 반맞춤을 이용했다. 언제 한번, 옷을 맞춰줘야겠네. 목구멍을 흉악하다면 흉악할 무게의 살덩이로 찔리는 도중에 할 만한 생각은 아니었다.

“큽…우읍…”

올라올 듯 말 듯 한 헛구역질이 목젖을 괴롭혔다. 뿌리 끝 근처를 잡은 손끝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시온이 그때마다 어찌나 가련히 떨어대던지. 그래서 참아 넘길 수 있었다. 할 일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처음엔 귀두 끝부터 순서대로 움푹 파인 바로 밑을 지나 매끈한 기둥을 지나왔다. 사내가 작게 기침했다. 드디어, 마침내 전부 덮였다. 태환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다. 앞에 선 미숙한 손이 제 귓가를 만지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비음이 새어 나왔다. 겁쟁이. 입술이 성기의 가장 두꺼운 부분을 흡입했다. 손끝이 권태환의 귓가에 스친다. 머리 위에 포장지 다발이 달랑거렸다. 막 귀두 밑에 콘돔을 씌워줬을 때 잘 물고 있으라고 했더니 정말 떨어트리지 않았다. 만족스러웠다.

“하아… 여긴, 다 컸네… 정말로.”

유두처럼 튀어나온 부분을 잡아당겨 공기를 뺐다. 태환이 제 턱을 매만졌다. 얼얼했다. 양옆으로 몇 번 돌려지더니 멈춘다. 저번엔 별거하지도 않았는데 질질 흘렸었지. 엄지로 끝을 한번 문질렀다. 다시금 눈을 맞추니 눈빛이 변해있었다. 갖은 평온한 척, 잔잔한 체는 다 하더니. 남자는 슬슬 하의가 당겨 답답하다 느끼고 있었다. 목구멍 좀 찔렸다고 흥분한 게 아니었다. 정신적인 충족감이 육체적 발기로 이어진 것이지.

한편 이시온의 입장은 어땠나. 태환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숨이 차고, 배꼽 아래에 끓는 물을 담은 포트가 들어있는 줄 알았다. 아직 소년이었을 때 그를 대상으로 몽정한 적은 있지만… 아니. 사실 여러 번이었다. 횟수가 얼마나 되었던, 몽상에 빠지더라도 정확히 알고 있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 덕분에 제가 이런 욕망을 품는다는 걸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면서도, 성적 취향에 대해선 한결 가벼운 마음이었다.

형, 나 형을 사랑해. 라고 하면 저를 경멸할지 몰랐으나 형, 나 남자 좋아해. 라고 말하면 분명히 이해를 못 하는 와중에, 그 대상이 시온이기에 그래? 하고 넘어가 줄 터였으니까. 그는 같은 사내놈에게 욕정을 품을 수 있다는 명제를 염두에 두지 않고, 편견을 가지지도 않았다. 자기 자신은 절대적 논외로 둔 채로. 그랬던 권태환이, 기꺼이 시온의 성기를 입에 품어준 거다. 입안의 젖은 표피가 닿을 때마다 광대뼈가 도드라지고 볼우물이 생겼다. 그가 스스로 헝클었던 머리카락은 고삐가 풀리고 조금씩 양을 늘려가며 흘러내렸다. 시온은 태환이 머리칼 사이로 테두리가 선명한데 흰 자가 많은, 특유의 시선으로 저를 볼 때면 자꾸만 요의와 유사하나 좀 더 되직한 액체를 흘릴 것만 같았다. 이제 겨우 콘돔을 끼운 것뿐인데, 자꾸만 온몸이 뜨거웠다. 그나마 한숨 돌리나 싶었는데, 태환은 시온을 쉬게 두지 않았다.

“권시온, 놔.”

툭. 사내가 맨 끝에 있는 일회용 젤 봉투를 흔들었다. 힘을 줬던 어금니가 무력해진다. 기다란 포장은 아래에 있던 손바닥으로 착지했다.

“주세요, 도 하고.”

두 손으로 모서리를 잡고 찢더니 시온을 종용하는 태환이었다. 눈꺼풀을 깜빡이던 시온이, 빨개진 얼굴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로 온순히 두 손을 벌렸다. 주루룩. 희고 마른 듯하나, 절대 작지도 않은 손바닥 위로 젤이 쏟아졌다. 투명하고 끈적한 점도가 접합을 돕는 용도임을, 숨김없이 그대로 전하고 있었다. 하나론 모자랐다. 잊기가 쉬운 경험은 아니지 않나. 도대체 배출구에 왜 넣을 맘을 먹나 싶었는데. 심각할 정도로 고통이 뒤따른 건 아니었으나 이전엔 너무 조급했던 감이 있었다. 그래서 두 개를 뜯었다. 이시온의 손안에 젤이 가득 고였다. 손바닥이 맞닿은 사이로 방울이 맺혔다. 청년의 목덜미에 핏줄이 잔뜩 서 있었다.

껍질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린 뒤, 태환은 바로 버클을 풀었다. 오늘은 웬일로 벨트를 차지 않은 채였다. 왜? 그는 항시 모든 차림새를 완벽히 갖췄다. 그러나 분명히 벨트 홀을 차지하고 있어야 할 물건은 없었다. 하의를 내리는 손길이 꽤 빨랐다. 밴드까지 검은색인 브리프, 근육으로 잘 채워진 허벅지에 잠깐 걸렸다가 오금을 미끄러져 내려가, 허물처럼 구겨졌다. 뒤이어 권태환이 다리를 들자 감춰져 있던 발목이 보였다. 삭스 가터가 흔들리는 움직임에 맞춰 짤랑, 소리를 냈다. 검은 줄이, 둥글게 솟아오른 종아리 한가운데에 선을 긋고 있었다. 자극이 센 장면인 덕분에, 시온은 제 입을 틀어 막고 싶었다. 방금 멍청한 소리가 났을 테니까. 그러나 그의 손아귀엔 젤이 가득 고여있기에, 그는 어금니를 꽉 무는 게 고작이었다.

“익숙해져야지. 잘해봐.”

…그러고 보니 제가 가터를 한 날이면 이상하게 부끄러워하곤 했었지. 태환이 소리 내 웃으며 말했다. 매트리스가 고생이었다. 곧바로 장신에, 육중한 몸이 거침없이 뒤로 넘어갔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침대가 더 작아 보였다. 잘게 떨리는 손이 움직였다. 손가락 사이사이, 마디, 손가락이 끝나는 부분까지 전부 젖게 하기 위함이었다.

시온은 조심스레 사내의 손목을 잡았다. 주춤거리는 건 찰나였다. 시온의 다리 한쪽이 위에 닿더니, 기우뚱 움직이는 표면을 아랑곳하지 않고 무릎을 세워 올라갔다. 매트리스가 무게를 받치느라 출렁거렸으나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시온은 목이 바싹 타는 것만 같다고 느꼈다. 갈증이었다. 항상 어항에서 살다 튀어나와버린 관상어의 기분이 이런 걸까. 청년이 입을 벌렸다. 그러곤 곧장, 사내의 입술 목표로 잡고 다급하게 들이받았다. 정수리가 뜨거웠다. 열이 몰려서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자꾸 입을 가만두지 못하겠는 걸까. 알 수 없었다. 무작정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팔은 허둥지둥 하긴 해도… 착실하게 언더웨어를 잡아 내린다. 이시온의 배꼽에 상대편의 귀두가 문질러졌다. 필연적으로.

“흐읏…”

…섰구나. 시온은 왠지 모르게 기뻐하고 말았다. 붉은 살덩이가 애원한다. 받아줘, 핥게 해줘, 안까지 들어차게 해줘. 정중하진 못해도 애절한 소원이었다. 입천장을 길게 핥자, 태환이 고개를 비틀었다. 빌던 이의 홍채가 흔들렸다. 제가 뭘 잘못했나 싶어 꼬리를 말아버린, 작은 동물 같은 눈빛이었다.

“몰랐는데, 고무 맛 난다.”

콘돔을 입에 넣고 굴려본 적이 있었어야지. 그가 덧붙였다. 송곳니가 분홍빛을 띤 입술을 긁었다.

“…형한테 다시 ‘뽀뽀’ 해. 알아서 벗겨줄 테니까.”

관용 어린 허락이 떨어졌다. 뽀뽀라니. 얼마나 민망한 단어 선택인가. 그러나 시온의 이성은 진작부터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할래. 할 거야. 라고 읊조리는 말 대신, 제 손아귀만큼이나 축축해진 입가를 눈치채지 못하고 권태환의 혀를 쫓아 헤맸다. 남자의 서늘한 손끝이 상의를 파고들었다. 허리를 뭉근히 매만지다 점점 올라간다. 반대편 팔을 들어 시온의 팔뚝을 잡아 올렸다. 그러다 오른쪽 손바닥이 뭔갈 찾았다. 손톱이 흰 피부를 긁는다. 음. 태환이 코웃음을 쳤다. 시온의 콧등에 주름이 생겼다. 알아버린 거다. 그딴 거 차지 않았어요, 라는 지적은 건네지지 않았다. 대신 혀끝이 물렸다. 아프게는 아니고, 살짝 할퀴는 감각이 느껴질 정도였다.

“습관, 읍, 이야.”

누가 뭐랬나. 상의로 목도리가 만들어졌다. 토라진 얼굴이 꽤 볼만했다. 태환은 시온의 옷을 옆에 내려놓았다. 던지지 않고, 툭 소리가 날 정도로의 세기였다. 제 하의보다 훨씬 나은 취급이었다. 그때였다. 완전히 맨몸이 되자,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권태환은 대번에 안면을 구겼다.

“…씨발, 이게 남아있어?”

욕설에 민감하게 구는 시온 앞이기에 최대한 자제했건만, 소용없어져 버렸다. 그는 유학 중이던 때 생겼던, ‘권시온’이 수영을 그만둬야만 했던 이유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왼쪽 빗장뼈 끝부터 상완근을 파고든 수술 흔적이었다. 꿰맨 직후 사진을 본 적은 있었으나, 세월이 지난 것치곤 너무 도드라져 있었다. 태환의 손바닥이 그 위를 쓰다듬는다. 내 예쁜 거에, 이게 뭔지. 츳. 혀 차는 소리가 절로 나오나 보다.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았다. 가끔 상처의 존재조차 잊어버릴 정도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잊고 있었기도 했고. 그렇듯 큰 의미가 되지 못한 상처였으나, 속이 쓰린 티를 내는 태환을 보는 건 좋았다. 입꼬리가 위로 솟을 것 같았다. 간신히 멈췄다. 점액으로 젖은 손가락이 서서히 둔부, 그중에서도 갈라진 틈으로 내려갔다.

“주 박사가 직접 봤다고 들었는데, 제대로 안 하…허윽…”

“…됐어요. 나중에요, 응?”

입구는 단단히 닫혀있었다. 갑작스러웠기 때문이었을까. 잔뜩 질척이는 손가락 끝이 주변을 쓰다듬었다. 들어가게 해달라고 두드리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아주 잠깐이었으나, 그의 복부를 짜고 있는 근육이 팽팽해지면서 좁게 오므라들어 있던 구멍이 벌어졌다. 그리고 손가락 한 마디는 기회를 잡았다. 파고들, 기회를. 흐. 어깨에 붙어있던 태환의 손바닥이 떨어졌다. 그의 의도와는 달랐고, 시온의 의도와는 일치했다. 이시온의 음성은 위에서, 권태환의 안면 위에 쏟아졌다. 마디 마디가 흔들리고 있었는데, 평소와는 성질이 달랐다. 어느새 또 젖어버린 눈동자는 분명 어둠 속에 있건만, 볼 수 없던 안광이 돌았다. 그 빛은 섬뜩하거나 소름 끼치지 않고, 물가에서 저를 바라보던 시선과 비슷한데… 확실히 더 열이 몰려있었다.

“…좁아요.”

예전처럼 반말을 입에 올리진 않았으나 어투는 어렸을 때처럼 보드라웠다. 망설임과 수줍음이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뒤섞여있던, 그때와 가장 닮았다. 제 호적상 형이었던 사내의 뒷구멍을 손가락으로 쑤시며 말이지. 발칙한데, 깜찍했다. 하, 여우도 개과고 개도 여우 사촌이다 이건가. 그가 조소했다. 태환의 뱃가죽이 꿈틀거리며 요동쳤다. 그도 알고 있었다. 중, 고등학생이던 시온의 별칭이 무엇이었는지를. 자신이 시온에 대해서 모르는 점이 있다는 게 불쾌했기에 주변에서 뭐라고 지껄이는지 알아내야만 직성이 풀리곤 했다. 고생은 그의 비서들이 대신했지만 그러라고 돈을 주는 거니까 신경 쓸 거리도 못됐다.

“읏, 시온, 권…시온.”

손가락이 야금야금 범위를 늘려갔다. 어느새 중지도 한자리 차지했는지, 장벽이 오물거렸다. 심지어는 손끝으로 꾹, 꾹 눌러댈 줄도 알았다. 성실하다고 손뼉을 쳐 줘야 하나. 왜 자꾸만 헛웃음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디서 배웠을 리는 없었다. 이시온은 지금 처음으로, 막 제 본능을 따르는 법을 배우고 있는 참이었다. 기특해서 그랬나 보다. 제 동생에게만큼은, 제 방식대로라도 지독하게 다정한 자신이었으니. 시온이 얼굴을 보였다. 집중하느라 귀를 닫았는지 연달아 부르고 나서야, 간신히.

“그만하고, 넣어.”

“…벌써요? 하지만,”

하긴. 누가 누구를 탓하고 우스워할 처지는 아니었다. 시온은 의도를 읽지 못했다. 두 번째였다. 원래의 용도를 배반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횟수였다. 저번보다 조금, 부드러웠나? 확신이 서진 않았다. 그러나 태환은 단호했다. 끝내 웃음기를 지우진 못했지만, 물러서주지도 않았다.

“말, 들… 어.”

촘촘한 섬유를 감싼 그대로인 발바닥이, 시온의 샅에서 부들거리고 있는 살기둥을 눌렀다. 입술 밖을 나오지 못한 비음을 삼킨 탓인지, 청년의 목젖이 안달이었다.

“콘돔…흐, 하고 젤만 준비, 해온 건… 읏, 아니…거든.”

발이 동그랗게 말렸다. 뭉개듯 양옆으로 움직이며. 설명을 덧붙이려 했다. 혼자 하려니, 기분이 뭣 같았지. 그러나 좀 더 부드러운 표현이 필요했다. 그런 연유로 단어를 고르고 있었으나 고를 여유 따윈 없었다. 태환의 복부가 푹, 꺼졌다가 솟아올랐다. 흥분에 돌아버린 성기의 끝이 입구를 파고들었다.

“허윽…!”

하하. 아쉬웠다. 크게 웃을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괜찮았다. 그보다 더 짙은 즐거움이 저를 덮쳐올 테니. 잘 짜인 근섬유로 만들어진 허리가 위로 들어 올려졌다.

“…해, 줘요.”

배 위로 허벅지 뒷면의 질감이 전부 느껴졌다. 얼마나 눌려있는지도. 전신의 혈액이 다 복부에 몰려있었다. 몸속의 피가 끓을 리는 없으니 이건 어디까지나 기분상 문제일 뿐일지 몰랐다. 그치만, 그렇지만. 시온의 등허리가 간헐적으로 펄떡거렸다. 엉덩이 위에 보조개가 생겨서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움직임은 급하지도, 빠르지도 않다. 다만 집요했다. 두 다리가 벌어지거나 떨어질 수도 없게 만들고 싶었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손바닥 위에 땀이 잔뜩 맺혔다. 대부분이 탄탄한 근육으로 채워진 대퇴근이 미끄러질 때마다 예기치 않게 각도가 바뀌었다. 내벽에 꽉, 맞물리다 못해 조여있는 살기둥이 말이다.

“응? 하읏, 말… 해줘요…”

샅이 원을 그리듯 움직였다. 시온의 앞머리카락에 땀이, 물처럼 맺혀 떨어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애가 탔다. 작은 시온은 육안으로 봤을 땐 전체적으로 일정하게 뻗어 보였으나 실제로는 기둥 가운데가 아래나 위보단 근소한 차이로 부풀어 있었다.

“…좋다고, 해주, 응, 면… 안 돼요?”

그래선지 중간쯤 파고들 때마다 권태환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지나치게 섬세하게 주름져 있는 안이 버거워했다.

“흐…. 크읍…….”

길고 낮고 끊어지는 호흡이 흘렀다. 순진무구한 분위기를 풍기던 이목구비는 마주하지 않은 새 여전하지만, 다른 결이 섞여 들어갔다. 입으론 조르고 있으나 힘이 들어간 턱 선은 평소와 다르게 각이 잡혀있었다. 하지만 태환은 웃을 수 없었다. 살가죽이 파고든 성기로 뚫릴 리가 없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인데 이쯤 되니 실제로 일어날지도 모르겠단 마음이 든다. 우습다. 권태환의 허리는 시트 위에 떠있었다. 여기까지만 해, 너무 깊어. 권태환은 그렇게 울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신음을 삼키고 간헐적인 헐떡임을 뱉으며, 종종 손등에 힘줄이 돋을 만큼 힘을 줬다.

“…권, 헉, 시온.”

신음을 감출 맘은 없었다. 사내가 굳이 ‘아래’를 자처한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권시온, 그러니까 이시온의 욕망이 배출구보단 달린 양물에 쏠려있었고 그걸 이용하면서 살살 꼬시는 게 원만한 방법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당연, 히 좋으니까… 이딴 짓도 해, 허윽, 해주지.”

‘앞’과 ‘뒤’의 사용 여부나 ‘경험’ 따위가 제 쾌락이 결정권에 영향을 미친 바가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 뭔가를 손에 넣기 위해 이토록 공을 들인 일이 있었나? 단칼에 답할 수 있었다. 없었다. 역시 이시온은 권태환의 유일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의외인 점이 하나 불쑥, 머리를 들이밀었다. 육체적으로 보다 정신적으로 만족감이 크겠거니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제대로 스위치가 켜진 시온과 맞닥뜨리자니 제 예상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겠단 예감이 들고야 말았다.

“…그 ‘좋아’가, 아닌, 거… 알면서.”

바라던 바는 아니었으나 분명히 느껴지는, 뱃속이 들끓고 제 앞섬을 주무르지 않아도 관자놀이에 불꽃이 튀는 듯한 열감이 생겼다.

“큿, 권, 시온….!”

“…옛, 날부터, 은근히, 흡, 심술, 부리고… 으응…”

시온이 가볍게 태환을 노려봤다. 그래 봤자 삐쳐서 흰자를 보이고 눈을 데굴데굴 굴려대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표정은 소년이었을 때와 닮았는데, 몸이 그렇지 못했다. 밑에 있던 남자의 단단하고 거대한 육체가, 방심한 사이 하반신부터 허리가 이어지는 부분까지가 동그랗게 말렸다.

“하, 허윽, 깊……”

그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긴 성기가 닿아선 안 될 곳까지 들이찬 것처럼 치고 올라왔다.

“나, 많이… 서툴, 아, 서툴러요…?”

스프링이 울었다. 태환의 두꺼운 성기는 제 주인의 허벅지와, 이시온의 무게까지 받아내느라 과하게 짓눌리고 있었다. 질척하고 끈적한 흔적을 남기며.

“…가르쳐, 준다고… 했었잖아, 흐, 요… 그러니까… 흡…”

허리짓은 빨라지고 흰 자가 빨개질 정도로 흥분한 청년은 미처 그것마저 염두에 두진 못했다. 오직 제 결심을 전하는 데에만 집중할 뿐. 권태환은 대꾸가 없었다. 시온의 지적대로 심술궂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도통 문장을 뱉을 수 없는 상태였다. 움직임은 젤이 꽉 들어찬 입구를 새어 나올 정도로 거셌고, 아주 미세하게 느껴지는 고무 위가 자꾸만 부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음에, 다음엔 잘, 잘 할… 윽, 테니까, 또… 해요,”

끝이 솟아올랐다. 시온의 피부만큼이나 하얗고 윤활유보다 끈적할 체액이 그렇지 않아도 상당한 질량감에 힘을 실었다. 태환은 이제 거의 반쯤 앓았다. 그의 것은 끝내 뱉어내지 못했지만, 이토록 시야가 하얗다가 검게 여러 번 점멸하는 감각은 생애 처음이었다. 분야가 달랐을 뿐, 그것도 절정이라면 절정이었다.

사내는 순간 입꼬리를 위로 올리고 말았다. 그리고 거기에 양념이라도 치듯, 이시온이 알아서 재롱을 부렸다. 길게 정액을 분출해낸 살덩이가 달달 떨었다. 목소리만큼이나.

“네? 흣… 혀엉…”

*

일어나자마자 저를 반기는 건 두통이었다. 눈을 떠보니 해가 중천이다. 이미 아침은 지났고 오전이라기엔 아슬아슬했다. 이시온의 평균 기상 시간을 훌쩍 넘고도 남았다. 음주를 하면 숙취가 생긴다고 하더니. 경험해 본 적은 없으나 주변으로부터 익히 들은 바가 있었다. 다들 배나 머리를 부여잡고 죽는 소릴 해대기에 왜 마시는지, 그 정도로 심한지 의문이었었는데 막상 당사자가 되니 피부, 아니 두피에서부터 와닿았다. 한 발짝 디디면 속이 부대끼고 또 한 발짝 더 디디면 골이 울렸다. 멀쩡한 정신으로 따져보니 제가 마신 술의 양이면 제누와즈, 즉 케이크 시트를 스무 번은 적실 양이었다. 들이부었네.

시온은 숨을 길게 내뱉었다. 심호흡은 아니었다. 보통 필름이 끊긴다, 라고 말하는 음주 후 일부 기억이 사라지는 현상은 없었다. 차라리 그랬으면 더 좋았을 것을. 머리가 맑아질수록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이 비례하기 시작했다. 헛구역질이 나오려고 할 때 동시에 간밤, 자신이 무슨 되지도 않는 발음으로 칭얼거렸는지가 떠오르고 정수리가 바늘로 찔리는 것만 같은 통증이 일 때는 얌전히 하라는 대로 비닐을 물고 있던 저의 모습을 보던 태환의 표정이 선명했다. 흐릿한 기억을 더듬는 작업은 쉽게 끝나질 않는다. 걸리는 게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종 내엔 제가 태환을 뭐라고 불렀는지, 또 그 호칭을 내뱉으며 어떤 목소리를 냈는지가 서서히 선명해졌다.

“…하아.”

끝내 한숨이 길어졌다. 두 손이 마른 세수를 멈추지 않았다. 제일 창피한 것은 그러다가, 그 남자의 품에 매달린 채 정신을 잃었다는 거다. 이미 반쯤, 아니. 그보다 더 취해있었던 탓이었다. 어디서 비롯된 민망함일까. 웃기지도 않은 책임감? 그건 틀렸다. 변명할 수조차 없는 부끄러움? 비슷했으나 달랐다.

옆자리는 진작 비어 있었다. 온기조차 남지 않고, 있었던 주름의 흔적조차 없었다. 단지 자신의 의식이 까무러진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허벅지가 끈적하고 텁텁했다. 청년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작은 휴지통에 묶인 뭔가가 보였다. 귀가 뜨거워졌다. …빼면서 흘렀나 보다. 그것보다, 지금은 제 몸에 뭐가 묻었는지를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아무튼, 옆자리가 빈 걸 알게 된 뒤의 기분을 고백하자면… 조금, 아니 엄청나게 허망했다. 제가 고꾸라지고 난 뒤, 사내는 황당한 기색을 비쳤을까? 어이없어했을까? 아니면, 아니면… 그것마저 우습고 귀엽게 여겼을까. 딱히 어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시온은 일단 방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움직일 때마다 위장 안의 내용물이 출렁, 파도치고 있었다. 겨우 게워내지 않고 문을 열었다. 욕실로 향하니 시선은 당연한 절차처럼, 그 옆을 향했다.

식탁이 있는 자리였다. 지난밤 고초를 겪은 원목 탁자가 어딘지 더 낡아 보였다. 시온의 귓바퀴가 움찔, 혼자 떨렸다. 위스키는 다 증발해버렸다. 그런데 빈 병은 사라져있었다. 애플파이도. 빈 접시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어제와 다른 점은 그것 말고도 하나 더 존재했다. 보란 듯이, 일부러 치우지 않은 것 같은 유성펜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청년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식탁에 가까이 다가갔다.

[허벅지 잠깐 빌렸다. 다음엔 기대할게.]

글씨체가 참, 잘도 흘려 썼는데 내용은 알아보기 쉽구나. 여전하다. 그런 감상은 잠깐이었다. 남의 집 가구를 메모판으로 쓰다니, 권태환다운 일이라 뭐라 비난할 의지 차체가 생기질 않았다.

“허벅지? …아.”

가물가물하긴 했으나 잊히진 않았다. 눈앞이 빨개진 착각이 들 만큼, 목부터 안면까지 열이 몰렸다. 한 번이라도 ‘만족’에 다다른 건, 자신이었다. 그러니까, 태환이 남긴 메모의 뜻은 자신은 절정을 맞지 못했으니까 다른 곳에 뭘 비볐다는 내용이었다. …허벅지가, 축축해. 이시온은 다급히 알 수 없는, 아니. 지금 막 정체를 파악한 체액으로 젖어있는 제 봉공근, 그러니까 허벅지 안쪽을 쳐다보고 말았다. 흰 손끝이 얇은 모발을 헤쳐 파고들었다. …사람이 자는 새에 무슨 짓을 하고 간 건가 싶었으나 중간에 잠들어버린 제 잘못이 컸기에, 시온은 원망 한 번 뱉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말이다. 번호도 알고 있을 테니 메시지를 보내놨으면 될 텐데, 굳이 애꿎은 식탁 위 유리 판을 건드린 걸 보면 어지간히 저를 골리고 싶었던 거다. 다,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다.

술에 취한 이는 진심을 뱉는다고 하지 않나. 그랬다. 심술부린다는 말은 오래도록 품고 있던 진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성격은 여전했다. 두 손으로 한참 동안 모발을 괴롭혔더니, 낯선 냄새가 났다. 온몸이 불결하다 싶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런데 방금 머리카락에서 스치듯 느껴진 건 분명 냄새라기보단 향기였다. 진로를 바꾼 뒤로 훈련된 탓인지 후각이 더 예민해졌기에 놓치지 않고 잡아낸 것이었다. 향의 출처가 어딘지 알아 채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태환이 쓰는 향수의 잔향이었다. 이게 아직도 남아있다니. 시온은 저도 모르게 순진한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이쯤 되니 진솔해질 수 있었다. 맞다. 백경아를 사랑하진 않았다. 다만 그를 대체품으로 여기고 있었나 보다. 자각하지 못한 새에, 자기도 모르게 말이다. 그래 봤자 모조품이라고 칭하기엔, 경아는 인간이었다. 덕분에 그 고생을 해놓고도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그래서 뭐 어쩌려고, 다시 만나기라도 하면 사과라도 할 텐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온은 그 뒤를 생각할 만큼 멀쩡한 상태가 되질 못했다. 유리에 휘갈겨진 메모를 어찌해야 하는지 결정하지도 못하면서. 일단 씻는 거부터 해야 했다. 그편이, 훨씬 마음이 편할 테니까.

「띵-」

그러나 그렇게 두지 않겠다는, 뭔가의 인력이 작용하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의자에 놓여있던 휴대전화에서 알람이 들렸다. 문자가 와 있었다. 홀린 듯 손을 뻗어 확인해 보았다. 간단한 잠금 패턴을 풀고 화면을 몇 번 터치했다. 시온은 업무용 말곤 그 흔한 메신저 하나도 쓰질 않았다. 태환은 어떨까? 잡생각이 많았다. 청년이 눈을 깜빡였다. 이젠 코까지 빨개졌다. 입술을 자꾸만 안으로 말아 넣고 싶어졌다.

[네가 만드니까 단것도 먹을 만하던데.]

파이가 올려져 있던 접시가 비어 있었었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근처 어딘가에 저를 감시하는 사람을 심어둔 건 아닐까 싶을 정도의 타이밍이었다. 그래서 꺼림칙할 법도 했다. 그러나 이시온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만들었으니 그나마 먹을 만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정말 객관적으로 먹을 만했다는 말인가. 헷갈렸다. 워낙 입맛이 까다로운 인물이니 나쁘지 않았다, 정도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잡념은 점점 덩치를 불렸다.

의식적으로 사과에 신경을 돌리려 애썼다. 청과물 사장님이 주셔서 얼결에 가져오긴 했으나 너무 냉큼 받아왔나. 잘 익은 걸로만 골라주셨지. 물론 헛손질에 가까운, 의미 없는 행위였다. 귀뿌리마저 붉게 물들었다. 다음이 언제일지도 모르고, 해결해야만 하는 존재가 있는 건 여전했다. 청년은 제법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작고 허름한 욕실에 기꺼이 제 몸을 구겨 넣을 수 있었다. 한 줄의 메시지만으로도 속이 가라앉고, 두통이 가셨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채로.

*

태블릿 PC의 화면이 빠르게 넘어갔다. 곁에서 보면 과연 내용이 눈에 들어오긴 하나 싶을 만큼 빠른 속도였다. 그래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어떤 구간에서 짙은 눈썹 한쪽이 위로 올라간다든가 어떨 때에는 30초 정도 한 문단을 주시하고 또 희박한 확률로 전자 펜을 들어 표시하는 일이 있다는걸. 더불어 문서의 양이 엄청났다. 이 짓거리만 지금 1시간 50분째다. 물론 그 중간마다 내선전화로 밖에서 대기 중인 비서실 인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사내 메신저를 통해 간단한 서면 보고를 받는 일도 있었다.

TV나 영화 속 재벌들은, 죄다 전문가에게 경영을 맡긴 것처럼 한가해 보이곤 한다. 현실에선…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적어도 권태환은 그런 부류가 아니었고 그런데 취미도 없었다. 그게 그가 굉장히 성실하고 ‘좋은’ 경영자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증거는 되지 못했다. 어떤 면에서 긍정적인 수식어가 기업을 얼마나 잘 이끄는가에 초점이 맞춰진다면 그렇다고 답할 수 있지만, 인격적인 부분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인간적으로 사내는 결단코, 좋은 인물로 보긴 힘들었다.

권태환은 아랫사람에게 윽박지른다거나 흔히 가지는 편견처럼 유리잔을 던지는 패악을 부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기보단 숨을 막히게 했고 적에게는 가차가 없을 뿐이지. 애초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리더 따윈 개소리 아닌가. 사실 뭐, 친절해 보이고 싶은 마음부터가 없었다. 그가 자의적으로 다정해 보이고 싶어 하는 상대는, 하나면 충분했다. 납작하고 네모난 전자 기기를 데스크에 나동그라지게 둔 뒤, 의자를 약간 뒤로 젖혔다. 동시에 등허리가 자르르 떨렸다. 간지러울 정도긴 했지만, 확실히 통증을 동반했다.

“…허.”

뭐 얼마나 나이를 더 먹었다고 그새 곯았기라도 하나. 태환이 실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럴 리가. 그는 불혹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건장했고, 지나치게 관리했다. 그런데 뒤 몇 번 썼다고 후유증이라니. 재밌었다. 한편에 반듯하게 놓여있는 휴대전화에 눈이 갔다. 정오를 막 넘기고 있었다. 태환을 담당하는 제2비서실 소속 직원들은 대부분 교대로 식사를 다녀온다. 아침에 순서를 어떻게 정했는지 미리 보고를 받았다. 태환이 일하는 중에 방해를 받으면 신경이 거슬리니 그렇게 하라고 지시를 내려둔 탓이었다. 그 덕에 때를 놓치는 날도 많았다.

입이 짧으냐면, 그렇지도 않다. 체구에 비례하는 만큼 섭취했으나 입맛은 까다로운 덕에 아무거나 입에 넣지 않았을 뿐이다. 게다가 이렇듯 업무에 집중하는 날이면 번번이 점심을 거르거나 미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끼니를 챙기려고 전화기를 쥔 게 아니었다. 지금쯤이면 일어났겠지. 엄지가 몇 번 움직였다.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 낡아빠진 식탁에 뭐라고 쓰고 나왔더라. 기억해내려고 애쓸 필요는 없었다. 음주에 익숙하지 않으니 뒤늦게 정신이 들고, 그러니 제 허벅지가 어떤 꼴인지도 뒤늦게 확인했을 게 뻔했다. 그 광경이 눈에 선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칼 같은 성질의 권태환이라도 놀라지 않는 건 아니었다. 바늘에 찔려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거라는 거야 주변에서 치를 떨며 하는 말일뿐이지 않은가. 이시온이 제 안을 채운 채로 고꾸라지듯 잠이 들어버렸을 땐, 그로서도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때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자면, 난데없이 힘이 쭉 빠져버린 청년의 몸을 잡고 눈꺼풀을 몇 번 감았다 들어 올렸었다. 그리곤 그새 쉬어버린 음성으로 권시온?하고 불렀다. 옆얼굴을 툭 밀었더니 그대로 미끄러지는 걸 보고 헛숨을 뱉기도 했다. 이걸 어쩐다. 기가 차서 웃음도 나오질 않았으나 실제로는 퍽 웃겼다. 깰까 봐 그런 건 아니었지만, 끅끅 먹히는 듯한 음성으로 한참을 웃어 젖혔다.

어릴 땐 아무리 운동을 오래 했다지만, 성인이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이 보드랍고 연했었다. 하지만 이제 성인이 훌쩍 넘어버린 시온의 피부는 탄력이 생겨 제법 단단하게 느껴졌다. 한편으로 이목구비만큼은 옛 느낌을 버리지 못하고 오밀조밀했다. 잠결에 입술을 몇 번 오물거리는 것도 똑같았고.

깨우지 않고 슬쩍 빠져나오느라 애를 먹었다. 거칠게 밀어버리고 싶진 않았다. 온순하게 자는 모습을 더 감상하고 싶기도 했다. 호흡을 몇 번 삼키고 토하길 반복하길 여러 번, 간신히 내벽을 채웠던 살덩이에서 벗어났다. 뒤가 약간 벌어졌다 좁혀지는 게 느껴졌다. 나를 닮아 욕심도 많지. 태환이 중얼댔다.

‘으으응…’

흰 몸이 꿈질거렸다. 팔을 들어 휘적거리더니 제 팔꿈치에 닿았다. 힘없는 손아귀가 그걸 쥐려다 놓쳤다. 뱃속이 한 번 더 뻐근해졌다. 빼지 말고 움직여볼 걸 그랬나.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었다. 이번에도 샤워기마저 부실한 욕실을 들어가려니 골이 아프기도 하였으나, 어쩌겠는가. 그렇게 태환이 삐걱대는 매트리스를 벗어나려던 순간이었다. 선수였을 시절보단 몸을 덜 써서 그럴까. 허벅지는 살짝 더 가늘어진 듯싶었다. 그거야 어디까지나 동생에게 한없이 애틋한, 혹은 그런 척이라도 하려는 형으로서 볼 때나 그럴 테지만 말이다. 하얗고 결이 잘 나뉘어 있으며 푸른 핏줄이 비치는, 상기된 피부. 의식은 이미 꿈속이면서 아직도 다 누그러지지 못한 분홍빛 살덩이가 제법 애처로워 보였다. 권태환이 제 다리 사이를 바라봤다. 여전히 애매하게 서서 씨 물을 뱉지도 못했다. 그러더니 또 살살 몸을 일으킨다. 선정적이긴 하네. 그가 턱에 힘을 주고 고개를 돌렸다.

찝찝하기 짝이 없었다. 체액이고 땀이고 엉망으로 뒤엉킨, 분명히 공들여 관리하고 세탁했더라도 분명 산 지 일 년은 넘었을 시트에 다시 몸을 눕히는 거 말이다. 그의 몸이 살짝 더 아래로 내려갔다. 침대 끝에 발이 덜렁, 나올 정도로. 태환이 곧이어 사이를 파고들었다. 어디로? 다소곳하게 닫힌 이시온의 허벅지 사이로. 무엇으로? 생전 처음으로 초라함을 맛본 태환의 성기로. 아직 내가 구멍으로 가기엔, 애가 서툴지. 그마저도 이때 즐겨야 할 여흥이었다. 그렇다고 제 손으로 빼고 싶진 않았다. 이렇게 완벽한 포르노가 있는데 뭣 하러 그런 아까운 짓을 하겠는가. 미간이 구겨졌다. 권시온도 제 내부를 들쑤실 때 이런 기분이었다면 좋겠네. 골반이 뻐근했다. 그래도 멈출 순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열중했다. 썩 훌륭한 욕구풀이는 아니었으나 만족감이 있었다.

“흐읍…”

고른 숨소리가 몇 번 웅웅 댔다. 태환이 시온의 오금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금세 뒤척임을 멈추고, 제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얌전해졌다. 그렇게 몇 번 움직이자, 마침내 시온의 허벅지가 불투명한 액으로 젖었을 때, 태환은 욕실에 대해 불평하길 깔끔하게 포기했다. 얻은 게 더 컸으니, 그 정도 아량은 베풀 필요가 있었다.

태환이 어젯밤에서 빠져나와야만 했던 이유는, 화면이 메시지를 전송했음을 알리자마자 비서실과 연결된 전화기가 야단이었기 때문이었다. 태환의 턱에 핏줄이 존재감을 피력했다. …모처럼 좋은 회상에 빠진 참이었건만. 무심히 수신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로 연결되었다.

“뭐야.”

「죄송합니다, 부사장님. 회장님께서 올라오시랍니다.」

“…지겹지도 않나.”

거친 손끝이 넥타이의 매듭을 파고들었다. 그리 많이 느슨해지진 않았다. ‘회장님’이라면 권태환의 부친을 말하는 거였다. 제 아비이자 상사의 호출이라는데도, 그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되려 사납게 굴었으면 모를까.

“직접 오시라고 하지 그래. 그걸 위해 ‘개구멍’도 만들어 두신 양반이.”

「…다음 일정으로 바쁘시니 내려와 주십사 한다고 전하겠습니다.」

여기서 개구멍이란 무엇이냐. 감히 태환 말고는 아무도 입에 올리지 못하는 은어였다. 그 드높은 자리에 오른 이가 제 아들 하나 뜻대로 못해 몸소 부사장실을 들리기 위한, 비서용 엘리베이터란 이름의 개구멍. 사내의 아버지이자 JL 명예회장의 아들, 현 회장인 권재성은 꽤 파란만장한 인간이었다.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재성은 권태환이 그렇듯, 태어나길 재벌가에서 태어나 그것도 손이 귀한 외아들로 자랐다. 정확히 말하면 태환과는 다르게 딸자식뿐인 집에 고명 아들이었지만 말이다. 그때만 해도 사내놈이 아니면 가문을 잇기가 어려운 시절이기에 운이 좋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능력 좋은 누이 몇을 손 안 대고 코 풀 듯 떨굴 수 있었으니까. 심지어 그는 수려한 외모를 가졌고 훤칠하고 큰 키와, 회장을 닮아 다부진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능력만큼은 미처 닮지 못했는지 늘 작게는 제 누나들, 크게는 제 아비와 비교당하며 살아야 했으니 나름 공평한 인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주변에 반발심이 들어서였을까. 권재성의 2, 30대는 제법 화려했다. 제 핏줄에 비하면 대범한 성격도 되질 못하기에 큰 사고를 치고 다닌 건 아니었다. 단지 자꾸만 빌미가 생기면 제 아버지에게 반항하려 드는 게 문제였다. 저는 트인 사람인 척, ‘보통 사람’과도 잘 지내는 척.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고 하면 가랑이가 찢어진다 했던가. 그럼 반대의 경우엔 어떻게 될까. 권재성이 그랬다. 갑자기 난데없이 공무원 집안의 자제를 데려와 결혼하겠다 선언했다. 겁도 없고 앞날도 없이 그제껏 한 마디 말 한번 하지 않다가 가족 식사 자리에서 갑자기 선언한 것이었다. 당시 회장이던 재성의 부친은 관대하진 않았으나 나름 봐주는 게 많았다. 아들에게만 해당되는, 편애였다. 그래서 제 외아들에게 손찌검하진 않았다. 그저 소리 몇 번 지르고 혈압이 올라 주치의에게 간언을 들은 정도랄까. 회장이 물었다. 그 듣지도 보지도 못한 애랑 혼인한다면, 난 너에게 한자리도 주지 않겠다. 그래도 네놈 뜻대로 할 테냐? 심기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는 티가 역력한 질문이었다. 재성은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 그렇다고 해도 전형적인 가부장 주의를 가진 제 부친이 저를 버릴 리 없을 거라 쉽게 여겼으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판단은 완전히 오산이었다. 그 뒤로 권재성은 실제로 후계자 자리에서 내쳐졌다. 여성과는 헤어졌고, 지금 권태환의 모친인, 국회의원의 여식과 정략혼을 해야만 했다. 그뿐인가? 자그마치 5년 동안을, 강제로 분가한 뒤 아버지가 사는 본가에 들러 꼬박꼬박 문안 인사를 하고 나서야 다시 제자리를 되찾을 수 있었다. 세월이 또 흐른 후, 그는 슬하에 외아들을 두게 되었다. 뒤는 이어야 했으니까, 생산의 의무가 있었다. 그래서 태어난 인물이 바로 권태환이었다. 제 아비이자 그의 조부의 완벽한 부분만 빼닮은, 제 자식이지만 피를 말리는 아들이었다. 그래서 권재성은 아버지만이 아니라, 제 자식에게마저 기를 눌리게 되고 말았다.

「…회장님 들어가십니다.」

직위만 그렇지, 위치는 완전히 역전되어 있었다. 권 회장의 안면이 벌써 답답해 보였다.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못마땅했으나 당당한 투도 아니었다.

“…버릇없는 놈.”

“자식놈 약점 하나 잡았다고 냉큼 부른 쪽이 누군데 그러십니까.”

백경아로 인해 일어난 사건을 일컫는 말이었다. ‘약점’. 사내는 자리를 권하지도 않았다. 상대적으로 젊은 쪽이 먼저 소파에 자리 잡았다. 검은 무광 가죽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재성이 입매를 구기면서도 발걸음을 옮기고 말았다. 그래도 상석을 내주긴 했다. 최대한의 예우였다.

“그래서 어쩔…”

“어쩌긴요, 다 알아서 하고 있습니다.”

다리를 꼬고 팔짱을 꼈다. 예의가 아니었으나 눈곱만치도 마음 쓰지 않는 몸짓이었다. 사실은 재성도 알고 있었다. ‘서류상의 며느리’가 어떤 짓을 벌였고, 어떻게 해결되고 있는지 정도를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굳이 손수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치욕을 참고 이곳에 들어선 이유가 있었다. 재성은 비뚜름한 이목구비를 유지하다가, 내던지듯 한마디 건넸다.

“네 안사람이 드나드는 곳이 있었다던데… 그건 어떻게 된 거냐.”

재성의 어투에 슬그머니 비꼬는 투가 스며들었다. 권태환의 눈썹이 위로 들렸다. 네 안사람. 며느리에게 붙일 만한 호칭은 아니었다. 거슬리는 부분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부자의 관계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사내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몇 살을 먹었었던 항상 그래 왔었다. 화목한 가정, 서로에게 관심과 애정이 깃든 가족. 그런 건 다 환상이었다. 관심도 없었을뿐더러 바란 적도 없었지만 서도.

“…권회장님 정보원 바꾸셔야겠네.”

그래도 ‘어떤 일’이 생기기 전까진 이렇게 대놓고 이를 드러내진 않았었다. 또, 화두는 10년 전이다.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내가 보냈어요, 권시온 좀 살펴보라고. 설마 내가 애 어디 사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을 줄 아신 건 아니죠?”

중년이 된 뒤 한층 늘어난 눈주름이 깊어졌다. 입을 다물지 못하는 건 덤이었다. 재성의 음성이 떨렸다.

“…네 안사람이, ‘그 애’를 찾아갔던 거라고?”

권재성은 여기서 살아남은 게 기적인 인간이다. 혹은 운이 지나치게 좋았거나. 그것이 권태환이 판단하는 제 부친의 위치였다. 재성은 아직도 약 60여 개월간의 치욕을 잊지 못하고 있었지만, 제가 외아들이기에 그 정도로 그친 채 쉽게 용서받은 것인지도 모르고 억울해했다. 그랬다, 부친은 유약했다. 겉으론 저도 권씨랍시고 위압감을 조성하려고 했으나 다른 혈육들관 다르게 물렀고 게으른 천성을 가졌다. 껍데기로 겨우 가리고 있을 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덕분일지도 몰랐다. 그 애, 한때 권시온이었던 이시온을 지칭하는 거였다.

끄응.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재성이 제 이마를 짚었다. 중년의 사내는 자신이 조금이라도 젊었을 적을 상기했다. 말없이 아이를 내보낸 일로 제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진 않았다. 하지만 한때 제 양아들이었던 소년에 대해서라면 입장이 완연히 달랐다. 살가운 아이는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그도 좋은 양부는 아니었지만. 애초에 장학생 중 하나를 골라 제집에 들이는 일 자체가 내키질 않았다. 제 속내가 어땠든, 소년에게는 죄가 없었다. 또래보다 크다고 해도 약간 마른 데다, 눈은 얼마나 큰지 커다란 유리구슬 같았다. 그때의 권재성은 초반이긴 해도 50대였다. 어린아이를 접할 일이 거의 없었단 거다.

그나마 있는 자식이라곤 어느새 제 머리 통수를 내려다보게 자라선, 실제로도 저를 내려다보는 못돼먹은 놈뿐이었으니, 거의 처음 경험하는 ‘보통의’ 어린애가 얼마나 신기했겠는가. 그럼 왜 양아들, 시온에게 관심 한 번 가지지 않았을까? 그건 틀렸다. 무관심했던 척을 해야만 했으니까.

“너, 설마…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건 아니겠지?”

친아들처럼 여기고 아끼고 보살피겠다는, 대단한 결심은 없었다. 그래도 이왕 제 집안 식구가 되었으니 어느 정도의 역할은 해 줄 요량이었다. 그런데 무슨 조화인지, 태환이 시온을 싸고돌았다. 처음 만난 날부터 그랬다. 권재성은 제 피조물이 소년을 안아 들거나, 짐짓 다정하게 쓰다듬는 장면을 목격할 때마다 졸도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었다. 권태환은 자아라는 걸 비출 수 있을 때부터 특정한 것에 집착하는 법이 없었다. 뭐든 제 발아래 두곤 필요 가치에 의해 손에 넣을지 버릴지 정할 뿐,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똑같이 휘둘렀다.

가치와 무가치. 정이 섞여들 필요가 없는 분류법이었다. 감정적 교류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세상이 오직 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녀석이 단 한 존재에게만큼은 달랐다. 답지 않게 구는 아들을 지켜보던 권재성은 그 모든 것이 너무도 불안했고 불길하게만 느껴졌다. 시온에게 말 한마디라도 건네려고 하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멸시당했고, 뭐라도 챙겨주려고 준비를 시켰더니 알아서 무산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사정을 모르고 아랫사람에게 왜 멋대로 취소시켰느냐고 나무랐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그게…도련님께서 그분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시겠다고. 통제였다. 거기다 경고하듯, 저의 치부의 증거를 찍어 사무실로 보냈다. 제 숨겨둔 연인과의 밀회 현장이었다. 물론 협박당했다는 것 정도로 등골이 서리진 않았다. 위협을 하는 쪽이, 제 씨에서 탄생한 ‘창조물’이었기에 소름이 끼쳤을 뿐. 그러나 아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어깨를 들썩이기만 했다. 다음엔, 회장실로도 보내겠단 경고였다.

“…이제 그만하지 그러냐.”

“별 참견을 다 하십니다. 그리고,”

이게 10년 전 그 일에 대한 모든 경위였다. 두려웠다. 제 괴물 같은 피조물이 아무것도 모르는 양아들을 망칠까 봐. 적극적으로 저지하진 못하는 주제에 파양 신고서를 써달라는 요구에 응하는 게 최선이었다. 소년이 어떤 맹목을 앞에 둔 지도 모르고, ‘형’에게는 알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걸 보자 잠깐 속이 쓰리기까지 했었다.

“내가 아버지를 닮지 않아 질색하시던 거 아닌가. 이렇게 뭐 하나 잡고 놓지 못하는 건 닮으니 다행 아닙니까?”

권태환은 변화하지 않는 인물이다. 소년이 완전히 제게 의지할 수 있도록, 일부러 모든 걸 차단해놨다. 치부. 힘없는 조물주의 안면이 구겨졌다.

“정 여사부터 어떻게 하시죠. 그건 형이 동생 보러 가겠다는 거에 비할 일이 아닐 텐데.”

걔가 권씨가 아니게 된 지 언제인데. 하지만 중년의 사내는 입을 열지 못했다. ‘정 여사’. 사실 제 자식을 끊임없이 인간 외적 존재처럼 취급하는 그 또한 떳떳하진 못했다. 본인은 애수에 가까운 미련이라는 이름 아래, 자기 연민적인 외도를 지속하고 있었으니까. 젊은 쪽의 안색은 여전히 냉정하고 여유로웠다. 그따위 티끌 하나 신경 쓸 것 없다는 듯이. 재성은 그렇게 또다시 나약해지길 강요받았다.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는 절절한 이유로 불륜이 정당화될 리는 없으니까. 그 정도 양심은 있었다. 이번에도 먼저 백기를 들어야만 했다. 제 꺼림칙한 창조물이 진작에 평균적인 ‘도덕성’의 법칙을 송두리째 무시해왔다는 걸 익히 알면서도.

*

“김 비서.”

막 문을 닫고 돌아가려던 이가 마른침을 삼켰다. 권 회장이 막 배웅을 받고 떠난 참이었다. 김 비서라고 불린 여성은 벌써 태환의 비서로서 3년을 살았다. 자신이 모시는 이가 얼마나 비범한지는 익히 알만한 기간이었다 그래서 더 역설적이게도, 상사의 이런 면엔 도무지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그가 낮게 저를 부를 때마다 긴장되었다. 그래도 보내온 세월이 있기에 그렇지 않은 척 위장할 순 있었다.

“네, 부사장님.”

권재성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그때마다 제2비서실 직원들은 식은땀을 흘려야만 했다. 높으신 분이 몸소 찾아왔기 때문에? 아니었다. JL에 근무하는 경영진들을 제외하면, 내부 소식에 가장 예민한 귀를 가졌다고 할 수 있는 직책은 단연코 비서였다. 개중에도 가장 기민하고 섬세한 이들이 부사장실 근처에 모여있었다. 그들은 알았다. 진정한 실세가 누구인지. 감히 한 그룹의 수장을 바지사장 취급하는 건 아니었으나 실제로 회장보다도 더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건 본인들의 상사임을 되새기는 매일이었다. 권력을 등에 업었으니 처세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느냐고 할 간 큰 치가 있을진 모르겠다. 만약 존재한다면 쏘아붙여줄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웬만해야 말이지. 들이밀 상대도 봐가며 손을 비벼야 하는 거라고 말이다.

권 회장이 찾아오고 난 뒤에는, 어김없이 태환의 심기가 좋지 못했다. 파리 한 마리 왔다 간 거 마냥 굴면서도 어투나 그 뒤의 미팅 상대를 대하는 태도 등에서 불편함이 드러났다. 부사장실의 문은 무겁고 두껍기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몰라도, 매번 그랬으니 오늘도 그러리라 짐작됐다. 그래서 김 비서는 더욱더 촉각을 곤두세웠다.

“김 비서도 스물아홉이었지.”

“…예?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가 달랐다. 상사는 제게 사적인 걸 묻는 법이 없었다. 관심도 없고, 데이터로서 이력서와 직원 정보에 올라와 있는 내용을 전부 외우고 있긴 할 거다. 그런 분이었으니. 그러면서도 새삼스레 갑자기 나이를 묻는다니.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일이었다. 김비서‘도’? 그럼 또 누가 스물아홉일까. 비서실에는 저와 동갑이 없었다. 그러니 분명 외부인을 말하는 거였다. 정체가 번뜩 떠올랐다. 그는 얼마 전 상사의 지시에 따라 다른 동료와 함께 처리한 업무를 떠올렸다. 또래의 오 비서와 함께 옛 정취가 듬뿍 묻은 동네를 누비며 보상금을 지급했을 때였다. 작은 사모가 벌인 일에 대한 수습이라는 점은 알고 있었다. 그 뒤로 얽힌 사연이야 입에서 입으로 전해 들었긴 했으나 자세한 것 못 들은 척, 모른척해야 제가 살았다. 반대로 상사가 직접 알려준 정보도 있었다. 사모님, 그러니까 백경아가 간 곳이 10년 전 JL에 입양되었다가 스스로 파양을 원한 이시온이라는 인물과 연관이 있다는 바였다. 그리고 일부러 주변인에게 그 점을 잘 포장해 흘리는 것 또한, 상사의 계획이었다 ….그래, 그 사람도 스물아홉이었지. 김 비서가 깨달았다.

“그 나이대엔 뭘 줘야 좋아하나?”

비서는 몸가짐을 흐트러트려선 안됐다. 만약 지금 사적인 자리였냐면 귀를 파는 시늉이라도 했을거다. … 지금, 부사장님이 내게 뭘 물었어? 그것도 사적인걸? 경악의 연속이었다. 굳이 동갑임을 집어낸 것도 놀라웠는데. 누군가를 특정하다니, 부사장답지 않았다. 그는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권태환에게 있어 인적 사항이란 그 사람을 어떻게 이용하고 휘두를지 계획을 짜는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 편임을 잘 알고 있는 김 비서였다. 분명 그랬는데, 옛 양 동생에게는 예외인 모양이다. 이런 걸 물을 날이 올 줄, 내가 알았나? 관자놀이가 축축해진 기분이다. 김 비서가 입을 뻐끔거릴 뻔한 걸 참아냈다.

“…외람되게도 각자 다를 거로 생각합니다만, 선물하시는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권태환에게 역으로 질문을 던지다니, 보통 때라면 목숨이 두 개가 아니기에 절대 하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이 정답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오히려 모르겠다거나 적당한 걸 추천하는 게 더 위험했다. 그가 하지 않던 짓을 괜히 할 리는 없었다. 사내는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의문에 집중한 상사는 눈썹 한쪽을 들어 올렸다. 천천히 날카로운 턱 선을 매만지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토라졌다기에 좀 달래줘야 할 거 같아서.”

구두굽이 삐걱거렸다. 다행히 휘청거리진 않았다. 놀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절묘하게 우연히, 중심을 잃은 것뿐이었다. 아니, 그런 게 맞다고 자신을 추슬러야만 했다. 김 비서는 다시 몸을 반듯하게 세웠다. 조용히 상사의 심중을 읽으려 노력했다. 태환이 굳이 인사를 보내서 수습하라고 했던 건 이시온을 챙겼기 때문이었다. 특정 상대를 의식하는 권태환이라니, 믿고 싶지 않았으나 모든 증거의 결론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그는 부사장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다.

토라졌다. 이미 다 커버린 양 동생에게 쓰는 말로는 적절치 않았다. 저와 동갑 아닌가. 누가 자신에게 그렇게 묻는다면 닭살이 돋았을 거다. 게다가 세상에 어떤 형제가 달래겠답시고 선물을 하나 싶었다. 좀, 동생에게 하는 표현과 행위라기보단 숨겨둔 애인에 하는 것 같은데. 일순 머리가 멈췄다. 거기까지. 김 비서는 고의적으로 사고하기를 멈췄다. 목숨은 소중했다. 그게 사회적으로든, 실제 달린 목을 뜻하는 것이든. 김 비서는 스스로를 달랜 뒤 굳이 또박또박 간언했다.

“필요한 걸 해드리면 어떠실까요. 예를 들면,”

“예를 들자면?”

이젠 추임새까지. 어조는 특이할 바 없었다. 낮은 톤과 무관한 어투였다. 하지만 평소보다 어미가 들려있었다. 장난스럽게 들렸다. 김 비서는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매장 안에 오븐이 오래된 거라는 주변의 말을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전 주인이 사용하던 것이라고요.”

한참을 돌아다니다 들린 청과상에서 들은 쓸데없는 정보가 격상되었다. 들어두길 잘했다. 권태환의 미간이 펴졌다. 그 또한 직접 들린 적이 있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좁은 디저트 가게를 면밀히 살폈을 테니 파악하고 남았을 테다. 그러니 자신이 제안한 바를 모르진 않았을 것이나, 미처 거기까지 생각이 닿진 않은 듯했다. 그럴만했다. 워낙 인간에게 무심한 분이시니. 김 비서는 태환 또한 인간이라는 건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븐이라.”

툭툭. 마디가 도드라진 검지가 입가를 두드렸다. 나름, 나쁘지 않았다. 입꼬리 한쪽이 슬쩍 올라갔다. 하긴. 뭐 그 심심한 성향 탓에 딱히 취미가 있지도 않았다. 태환은 잠시 시온의 어릴 적을 떠올렸다. 수영장 만들어주겠다고 했더니 어쩔 줄을 모르고 한사코 거절했지. 그는 자신의 유일에 관해선 뒤끝이 약간 있었다. 여러모로 적절한 추천이었다. 질문을 던지면서도 별 기대 없었는데, 의외의 수확이었다.

“김 비서가 수고 좀 해줘야겠는데.”

“일정 말씀해 주시면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당장이 좋겠어.”

김 비서가 허리를 숙였다. 지금부터 바로 해내야 하니 이만 물러나 보겠다는 거다. 사내는 턱 끝으로 허락했다. 한 마디를 덧붙이기는 했다.

“금전적인 처리는 하던 대로 내 개인카드로. 그걸로 김 비서도 원하는 거 하나 구매해.”

사적인 일을 처리할 때 쓰는, 한도 없는 쪽을 일컫는 거였다. 제 ‘원하는 거’에 대한 금액을 제한하지도 않았다. 그는 섣불리 이런 아량을 베풀지 않는다. 명줄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신임도 손톱만큼은 얻었나 보다.

“…감사합니다, 부사장님.”

마음만 받겠다는 겉치레는 기껏 딴 점수를 깎는 지름길이다.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김 비서는 가까스로 부사장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재개점을 금일 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하나, 두울. 하나같이 목청이 컸다. 인부들은 구령을 맞춰가며 조리실 뒷문을 드나들었다. 모두가 너무도 바삐 움직였다. 안으로 옮겨지는 영업용 오븐만이 가지런했다. 그러는 동안 이시온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JL에서 왔다는 이와 나란히 서 있어야만 했다. 제 가게 안이 저렇게 소란스러운데, 주인은 멀거니 눈만 굴렸다.

김 비서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아마도 최 씨가 말했던 비서 중 한 사람인 것 같았다. 인상착의가 일치했다. 말총머리를 하고 깔끔한 정장을 입은 여성. 확정할 순 없었으나 오자마자 명함을 내미는 걸 보니 아마도 맞을 것이다. 인사의 다음 순서는 본론이었다. 부사장님이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곧이어 화물 트럭이 비좁은 골목에 들어섰다. 전부 급작스러웠다. 사전에 알리는 법 따윈 없었다. 언질을 줄 수도 있는 거였을 텐데. 왜 이런 결과가 도출되었는지 알 만하긴 했다. 알았더라면 오지 못하게 막았을 거다. 시온은 잠시 인부들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비서의 옆모습은 굉장히 정갈하고 똑 부러져 보였다. 그 상사에 그 부하직원일지도 모르나 운은 띄워봐야 했다.

“…저는 쓰던 게 더 편합니다만. 길을 들여놔서요.”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그래도 연식이 오래되었으니 바꿀 때가 되었죠.”

역시나. 청년은 눈꺼풀을 딱 한 번 내렸다 올렸다. 단순히 상사를 얼마만큼 닮았느냐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그 사람이라면, 제가 어떻게 나올지 다 내다보고 모든 거절을 차단하는 경로를 설정해 지시를 내렸을 테니까.

“제가 혀… 보낸 사람에게 직접 말해도 소용이 없을까요.”

의미 없는 반항이었다. 이시온은 멍청하지 않으나 미련은 넘쳤다. 그러자 앞만 바라보던 김 비서가 고개를 돌렸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게 아닌, 철저히 영업적인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머리카락 한 올 빠져나오지 않았으나 괜히 손을 들어 귀 뒤를 쓸어 넘겼다. 가느다란 금속으로 이뤄진 시곗줄이 햇볕을 반사해 눈이 부셨다.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겠습니다만,”

말간 남자의 눈에 동정심 한 번 가지지 않는다. 당연했다. 김 비서는 빈틈 한 번 없이 속내를 감춘 해 그가 이미 알고 있을 사실 하나를 상기시켜주었다.

“거절하신다면 이보다 더 큰 걸 받을 각오를 하시라는 말씀을, 부사장님이 남기셨습니다.”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답변이었다. 그렇겠죠. 대꾸가 나오질 않았다. 시온은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선물을 보내면서, 받지 않을 시 보복을 각오하라는 듯한 전언을 남기다니 과연 권태환 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인부들이 어깨를 잡고 팔을 돌리거나 피로를 토로하면서도, 일이 끝났다는 후련함을 표출하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 무리를 대표한 한 명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사장님, 설치 완료했으니 확인해 보십쇼!”

“…다행히 아예 무를 수도 없게 되었군요. 가서 보시죠.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어깨가 절로 처졌다. 그렇다고 시킨 대로 할 뿐인 이를 더 곤란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단념해야 할 때였다. 이시온은 예의 바르게도, 원하지 않는 상황이었음에도 일꾼들에게 수고하셨다는 의미의 인사를 잊지 않았다.

“…따로 연락하겠다고 전해주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태환이 보낸 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한쪽은 포기, 한쪽은 임무를 다 마쳤다는 뜻이었으나 어쨌든 가볍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나눴다. 김 비서는 약간 힘이 빠져 보이는, 더불어 느린 속도의 뒷모습을 한참 지켜보았다. 완전히 들어가고 나서 자리를 뜰 참이었다. 온순한 이였다. 아무리 몇 년뿐이더라도 제 상사의 동생으로서 지냈다기에 만반의 준비를 한 거 치곤, 가볍게 맡은 일을 다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아마도 끝까지 밀어내면 다른 이가 피해를 볼까 봐 받아준 거겠지. 김비서도 그 정도 눈치는 가지고 있었다.

메종 단 루의 뒷문이 완전히 닫혔다. 김 비서는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을 차량 쪽으로 향했다. 양심에 찔리지만 어쩔 수 없다. 해내고 말아야 하기에, 이미 포상도 계산해버린 마당이었으니. 볕이 또 한 번, 가볍게 흔들리는 손목의 시계를 반사판 삼아 산란하였다. 아무리 대기업에 근무하더라도 일개 비서가 사들이기엔, 꽤 버거운 제품이었다. 오븐도, 시계도. 결론적으로 시온이 가격대를 아는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오로지 제멋대로인 권태환의 호의뿐이었다.

*

[조만간 갈 거야. 새로 생긴 장비로 내 몫도 구워놓고.]

굳이 전해달라고 했던 부탁이 무색하게도, 시온은 며칠째 메시지 한 자 보내지 못했다. 통화는 왠지 꺼려졌다. 목소리를 들으면 또 제 이성이 달아날까 봐. 되려 태환이 먼저 문자를 보냈다. 새 오븐이 생긴 그날 저녁이었다. ‘조만간.’ 명확한 일자는 없었다. 이렇듯 특정하지 않은 약속은 듣는 사람이 계속 궁금하게 만드는 법이었다. 도대체 기준이 뭐란 말인가. 내일 바로 오겠다는 건지, 아니면 일주일 후 인지, 그도 아니면 한 달 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밥 한 번 먹자. 가 인사치레로 전락해버린 것과 똑같은 의미로. 엄밀히 말하면 다르긴 달랐다. 태환은 분명 저를 찾아올 것이니까. 난제였다. 왜냐하면…

“…안 왔네, 문자.”

메시지를 받은 날이 열흘 전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일주일은 지났다. 보름은 채우지 못했다. 잘 하지 않던 혼잣말이 자연스레 입술 밖으로 새어 나왔다. 미련한 짓임은 알았다. 정 신경이 쓰이면 그래서 언제 오느냐고 물으면 될 일이었다.

메종 단 루는 예정된 것보다 사흘 더 늦게 열렸다. 새로운 문물에 적응이 필요했으니까. 한편으론 다행이었다. 확실히 제가 사용해왔던 기기가 오래되긴 오래된 모델이었는지, 새것은 조작이 간편해진 만큼이나 낯설기 그지없었다. 덕분에 언제 연락이 오나 기다리는 일에 덜 집중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회성 도피였다. 매장을 열고, 주문을 받으면서 점점 휴대전화 화면을 응시하는 일이 잦아졌다. 증상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만 갔다. 자꾸만 혹시 연락이 왔는데 놓친 건 아닌가 살피는 것부터 시작해 어느 날은 불안증이 불쑥 솟았다.

아닌 척 고개를 흔드느라 뒷목이 당기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늘 익숙한 차량만 돌아다니는 동네에 혹여 못 보던 게 보이면 괜히 고개를 들이밀기도 해봤다. 급기야 잠이 오질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불면증까진 아니었다. 매일 그런 것이 아니라 이틀에 한 번씩 평소보다 서너 시간 정도 늦게 잠드는 날이 생겼을 뿐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거실에 있는 알람 시계의 시침이 막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이쯤 되니 의심이 들었다. 쉽게 풀지 않겠단 선언에 대한 벌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말이다. 진지하게 화가 났을 거 같지는 않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믿었다는 게 더 정확하긴 했지만. …그새 흥미가 떨어진 건 아닐까. 왼쪽 가슴께가 아릿해졌다. 이시온은 자꾸만 흔들리려는 심상의 수면을 붙잡으려 노력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몸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청소를 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워낙 해묵은 집이었기에 닦을 곳이 많았다. 물을 적신 면포와 마른 걸레를 든 채 분주하게 닦아내다 보면 졸음이 찾아오긴 했다. 왜 연락이 오지 않는지 고민하며 기다리고, 초조해 해지는 마음을 완전히 떨쳐낼 순 없었지만, 수마에 잠겨 잠깐이라도 잊을 순 있었다. 오래 잊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게 문제였다. 그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집주인은 잠들 수 없을 때마다 구역을 정해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몸이라도 혹사하면 좀 낫지 않을까 싶은, 가련하기까지 한 발버둥이었다. 이틀 전엔 보이지 않는, 방의 숨겨진 장소의 차례였다. 그러다 잊었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침대 밑에 처량히 누워있던, 쓰지 못한 콘돔 반줄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그걸 보고 제가 어떻게 반응했던가? 헛숨을 삼켰나 마른 세수를 참지 못했나? 적어도 오늘 같은 마음은 아니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금일은 부엌이었다. 하필이면. 시온은 한참 동안 식탁 위를 내려다보았다. 걸레를 쥔 손바닥에 힘이 빠져나갔다. 철퍼덕. 젖은 원단이 둔탁한 몸짓으로 낙하했다.

“…바보 같아.”

반대편 팔이 들렸다. 말갛던 눈 밑이 탁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엄지가 눈 앞머리를 짓눌렀다. 어지러웠다. 이젠 더 닦을 부분도 없었다. 아무리 손때 묻은 가재도구라고 한들, 워낙 깔끔한 주인 덕에 지울 수 있는 건 전부 지운 지 오래였다. 애써 아닌 척 부정하며 힘만 들인 꼴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식탁 위의 ‘메모’만은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방문자가 네임펜으로 휘갈겨 썼던, 그 몇 문장을 닦아내는 간단한 일을 하기가 힘들었다. 긴 심호흡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시온은 괜스레 손끝으로 글자를 더듬어보려다 멈췄다. 닳아 없어질까 봐. 청승이었다.

해결책은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나 마찬가지긴 했지만, 먼저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어디 아프냐, 무슨 일 생겼느냐, 하다못해 언제 오느냐. 그렇게 간단한 문장이었는데 도저히 손가락이 따라주질 않았다. 왜? 핑계와 사연이 없는 무덤은 없다. 이시온도 그랬다. 사연은 뒤로 밀어두기로 하자. 인내와 조바심, 두려움이 뒤엉켜 싸웠다. 그래서 누가 승리를 거뒀느냐.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승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래로 쳐져 버린 앞 머리카락이 처량하게 흔들렸다. 눈앞에서 물결처럼 일렁이는 검은 장막을 바라보던 시온이 눈을 감았다. 수 분 후에야 열린 눈꺼풀이 밑으로 박혔다. 걸레를 들어 세탁실에 가져다 두었다. 식탁의 글자는 모두 살아남았다. 생존하지 못한 건 휴대전화의 전원이었다. …자고 있겠지. 시온은 이런 와중에도 그를 믿고 싶은 저 자신을 눈치채 버렸다. 단호하지 못했다. 그러니 또 기대를 품고 만 것이리라. 뒤꿈치가 질질 끌렸다. 그에게 발끝을 끄는 버릇 따윈 없었다. 몸이 마음의 등을 억지로 떠미는 바람에 이러는가 보다.

바닥에 거울이라도 깔렸었다면, 이시온은 더 비참해졌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다행이었다. 대충 짐작은 할 수 없었다. 그에게 씹어뱉듯 말했던 게 무색하게도, 스물아홉이나 먹고도 눈시울이 홧홧했다. 진짜 별일 없을지도 모른다. 태환은 한가하지 않았다. 정말로 바쁜 걸 수도 있어. 머리론 뻔히 알고 있었다. 제게 오븐을 안겨다 준 비서가 부르던 호칭이 귓가에 맴돌았다. 부사장님. 그래. 직책이 있으니 어릴 적처럼, 쥐어짜서라도 제 옆을 지켜줄 시간이 있던 시절과는 다를 게 뻔했다.

그런데 왜 자신은 자꾸만 열아홉 일 적으로 돌아가고야 마는 걸까. 눈가뿐만 아니라 목구멍도 뜨거워졌다. 청년은 고개를 털어냈다. 방문이 열렸다. 침대가 전보다 더 엉망이었다. 그날, 하중을 견디지 못해서 균형이 비틀려 버렸다. 오븐보다 침대가 시급하네. 시온은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 이윽고 이불은 덮은 뒤 전신을 동그랗게 말았다. 그는 손아귀에 휴대전화를 쥔 채 잠을 청했다. 직접 전원을 껐으니 뻔히 작동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눈을 감고 버티자 의식이 멀어지긴 했다. …눈 뜨면 아침이 오겠지, 내일은 문자를 보내자. 흐트러질 결심을 마지막으로, 점점 몽롱해졌다.

그러나, 예측은 완전히 엇나갔다. 분명히 저 혼자 있었건만 갑자기 누군가 뺨을 두드렸다. 시온은 달지 못한 잠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흐린 의식 속에서 촉각 다음으로 기능한 건, 청각이었다. 낮고 위협적인 음성이 귓속을 가득 채웠다.

“…기껏 달려왔더니. 잠이 와, 권시온?”

마지막이, 가물가물한 시각이었다. 찬물로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권태환이 있었다. 매우 흐트러진 모습을 한 채로, 이때껏 소식 한 번 없던 ‘형’이 제 눈앞에 있었다.

*

시온의 미뤄둔 사연은 다음과 같았다. 이시온으로 돌아오기 몇 주 전, 사실 소년은 태환에게 속내를 털어놓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그렇지 못했지만, 그랬었다. 부상이란 원래 예고 없이 생기는 일이었다. 누구에게나 일어나고 예고도 없다. 그건 그 인물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어떤 상황인지, 어떤 성격인지를 가려서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의미론 굉장히 공평했다. 대외적 원인은 ‘사고’였다.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수군거림이 들렸으나, 시온은 애써 파고들지 않았다.

시온이 부상을 당하던 몇 주 전, 하필이면 교내 수영장이 공사하게 되었다. 온습도 조절장치에 큰 결함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 덕에 연습장소는 가까운 센터를 이용해야만 했고, 예기치 않게 환경이 변경되어 모두의 신경이 곤두서있는 시기였다. 왜 그날따라 모두가 연습을 서둘러 마쳤는지, 물은 또 왜 일찍 빠졌는지, 왜 수영장에서 바깥으로 올라오는 사다리가 멀쩡하다가 갑자기 떨어졌는지. 의심할 구석이 그렇게도 많았으나 소년은 침묵했다. 그에겐 친구라고 부를 이가 없었다. 수영부원들은 자기들끼리야 친목을 다졌으나, 시온은 배척했다. 시기하거나 어려워하거나 아니면 없는 사람 취급하거나. 셋 중 하나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딱히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오히려 편했다. 권시온에게 익숙한 온기는 딱 하나면 충분했으니까.

아무튼 그래서, 부원들의 말을 믿기로 했다. 저희끼리 약속이 있었어요. 개중 하나의 생일이라 그 집에 가서 여유롭게 놀았다고 했다. 사용인들도 봤고, 부모님도 모두의 얼굴을 봤다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담당 직원은 심각하게 당황스러워했다. 그날은 일이 있어 일찍 정리하겠다는 말을 분명히 전했다며 필사적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완강한 부인을 본 담당 코치 중 한 명은 난색을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런 전언을 들은 적이 있었지. 그가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시온은 아, 그렇구나. 하고 이해하기로 결심했다. 그럴 수 있었다. 정성 어린 사과를 받은 걸로 충분했다.

모두가 가장 의문을 품는 부분은 마지막 세 번째 사유였다… 사다리. 낮까지만 해도 멀쩡했었다. 흔들림을 느낀 사람은 없었다. 시온도 그랬다.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수리기사까지 불렀다. 그는 몇 번이고 신중하게 살폈다. 아마 계속 하중이 가다 보니 이음새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간 것 같다고 했다. 고정하기 위해 있는 고리가 살짝 들린 거 같긴 한데 누군가 일부러 흠을 냈다고 보기엔 어렵다는 점까지 상세히 말해주었다.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시온은 감독의 말을 들으며 또 한 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바로 전날 어깨 수술을 한 뒤 의사로부터 수영을 할 수는 있지만, 앞으로 선수 생활을 하기엔 어렵다는 말을 들은 열아홉의 반응으론 적절하지 못했다. 양부모는 의무감 때문인지 좋은 의료진과 양질의 간병인을 붙여주었다. 값비싼 과일 바구니가 곳곳에 널려있었다. 저택에서 보낸 것 반, 그들의 지인에게서 반이었다.

‘…전 괜찮아요. 아, 과일 좀 드시고 가세요.’

권시온이 한 말은 그게 다였다. 울지도 않았다. 어깨에 타인의 노력만 새겼을 뿐이다. 후유증은 크게 없을 것이나 흉은 남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렇구나, 싶었다. 며칠 뒤, 소년은 고가의 과일을 다 먹지 못한 채 퇴원했다. 썩었는지, 버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시온은 그렇게 영영 물을 잃었다. 불안하긴 했으나 속상하진 않았다. 애초에 헤엄에 미련을 가진 건 아니었으니 괜찮았다. 불안은, 다른 곳에 있었다.

돌아온 권 씨 저택의 분위기는 어떠했는가. 선수가 되는 길은 아예 막혔으니 버려질 차례다 싶었다. 그 예상에는 일리가 있었다. 저택은 한층 분주해졌다. 정말 재활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주치의를 두어 번 불려 다녔고, 만약 파양할 때는 어떻게 언론에 알려야 하나를 상의하기 위한 변호사들도 분주히 드나들었다. 그러나 결정은 계속 더뎌지고 있었다. 속 사정은 알 수가 없었다. 원래 어른들은 자신에게 중요한 결정을 아이에게 상의하지 않는 법이었으니까.

그래서 등교를 했다. 남들이 뭐라 하든 신경을 쓰지 않아 왔으나, 이번만큼은 그 관심이 과했다. 교실에 있어도, 급식실에 있어도, 그 어디를 가도 시선과 소곤거림이 따라붙었다. 발 없는 말이 멀리도 간 모양이었다. 전교생의 대부분이 권시온의 몰락을 관전하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운 느낌이었다. 이 학교에 입학한 처음부터, 열아홉 살의 권시온은 이름으로 불리는 일이 적었다. 수영부 걔, 입양된 애. 보통은 이 두 가지를 번갈아 가며 바꿔 지칭되곤 했다. 적어도 두 가지는 곧 사라질지도 몰랐다. 그래도 남는 게 있긴 했다. 가끔, 특정 부류에 의해 일컬어지는 멸칭도 있었으니까.

개새끼. 욕이되 욕이 아닌 이중적인 의미였다. 이게 웬 아리송한 정의인가 하면, JL의 후계자 권태환의 개새끼 혹은 애완동물이라는 뜻이었으니 단어 자체는 비속어였으나 속뜻은 조롱이 아니겠는가. 엄연히 차이가 있었다. 시온은 끈질긴, 원치 않는 관심을 피하고자 한 번 더 고립되길 택했다. 그래서 찾은 곳은 소각장 근처의 외진 구석이었다. 거기서 무얼 했는가 하면, 별 건 하지 않았다. 계속 휴대전화만 쳐다봤다. ‘형’은 아주 가끔만 문자를 보냈다.

자주는 힘들 거야. 이따금, 여유 되는대로 보낼 테니까 기다려. 확실한 명령조였어도 어투는 다감했다. 처음엔 그 이따금,이라는 게 얼마큼인지 궁금해서 애가 타기도 했다. 그러다 발견했다. 일단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열흘은 넘기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말이다. 오늘이 바로 마지막 연락으로부터 딱,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연습하느라 귀가하지 못했을 시간이었다. 수영에 대한 아쉬움은 없고 이른 귀갓길에 대한 어색함이 있었다. 시온은 그렇게 제 심상의 수면이 흔들리는 탓을 돌리고 있었다. 두 눈을 화면에서 떼지도 못하면서, 남들 눈에 숨을 수 있는 사각지대에서 그렇게 망연히 서 있기만 했다. 수영 다음으로 자신 있는 건, 흔히 말하는 ‘멍 때리는’ 행위였다. 잘 꾸며 말하면 사색에 빠진다, 명상 정도로 포장할 수 있겠으나 굳이 그러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허공 대신 반짝이지 않는, 네모난 검은색을 응시하고 있던 때였다.

‘거 봐, 아무도 모른다고 했지?’

‘야, 너는 진짜 머리도 잘 돌아간다. 어떻게 그 새끼를 이용할 생각을 다 했냐?’

말씨가 매우 거칠었다. 음성으로 누군지를 유추하기 어렵진 않았다. 같은 수영부, 같은 학년의 특정 무리였다. 개중에서도 소위 말하는 다이아 수저까진 아니어도 금 정도는 물고 태어난 애들이었다. 시온을 ‘권태환의 강아지’라고 부르는 인원과, 정확히 겹치기도 했다.

‘얘 대가리에서 나왔겠어, 너네 사촌 형이 알려줬다며. 이름이, 뭐더라. 김… 이름도 흔해 빠졌었는데.’

‘정은? 정훈?’

‘야, 근데 뭐 그 새낀 애비가 뭐, 철물점이라도 한대? 진짜 감쪽같이 빼놨더라.’

낄낄거리는 웃음이 한데 모였다가 터졌다.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아니, 실은 귀 기울이고 싶지 않았다. 형에게선… 오늘 저녁엔 연락이 오겠지. 권시온은 그들이 떠나면 바로 자리를 뜰 마음을 먹었었다. 괜히 귀찮아지기는 싫었다. 그렇지 않아도 괜스레 속이 시끄러웠다. 그러나 뒤이은 말소리에 그의 손끝이, 팔이, 발꿈치가 굳어버렸다.

‘김정훈. 진짜 쉬웠다니까. 자세한 건 몰라도 개새끼, 걔 때문에 운동도 못한다 그랬던가. 거기다 돈도 줬더니 바닥이라도 길 기세던데.’

권시온이 아무리 타인에게 무관심하다 한들, 기억력이 나쁘진 않았다. 간신히 가라앉았던 기억은 곧바로 표면을 박차고 나왔다. 열여섯. 뭣도 모르고 호의를 베푼답시고 오만을 부렸던 날의 제목과도 같은 석 자였다. 장학생이었으며 시온에게 고아 주제에 저를 동정하느냐며 고함을 치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랬다. 결국엔 경기 성적이 부진해 추천입학을 따지 못했다는 소식이 마지막이었던 동갑내기의 이름이었다.

‘너희도 다 나랑 주영이 형 덕 본 줄 알아. 재수 없는 새끼 치워줬잖아.’

제 손이 떨리나, 턱이 떨리나. 알 수는 없었다. 아니면 제 몸뚱어리는 얌전한데 골이 흔들리는 걸지도 몰랐다. 귀안이, 물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꽉 차서 윙윙거렸다. 머리로는 현실이라는 걸 알면서도 괜히 끝없이 물속에 잠겨있는 기분이었다. 들은 걸 그대로 정리를 하자면, 생일 파티는 완전한 알리바이였다. 사람을 시켰으니 그들이 자리를 비울 필요는 없었고 때마침 공사도 했겠다, 교내가 아닌 센터는 누구나 드나들 수 있었다. 일정 기간 전부 대절을 했다 한들 잠입이 어렵진 않았을 터였다. 그들은 개새끼에게 제자리를 빼앗기는 게 분했던 거다. 시기했고, 그러면서도 깔보며 알량한 자존심을 채웠다. 그럴 수 있다 싶었다. …그런 걸 신경 쓸 겨를도 없었고. 그런데 김정훈이, 그 애가 수영을 못 하게 되었구나. 나와 달리 그토록 원했는데도 못하게 돼버린 거구나. 손마디에 힘이 풀렸다.

‘근데… 형은 너 왜 도와준 거래? 너 그래 봤자 방계잖아.’

‘시발, 기분 잡치고 있어. …몰라, 그 JL 첫째가 꼴 보기 싫대. 근데 알잖냐, 못 당하니까 괜히 분풀이한 거겠지…’

이 와중에도 태환을 지칭하는 말에 귀 끝이 쫑긋 섰다. 저도 모르게 헛숨을 뱉을 뻔했다. 그가 거론한 사촌 형은 모르는 이였다. 알 수 있는 건, 어깨의 생긴 여문 상처가 저를 목표로 한 적의와 태환을 목적으로 한 적의가 뒤섞인 상처라는 사실이었다.

‘키우는 개한테라도. 원래 주인이 미우면 그 집 개새끼마저 미운 거 아니냐?’

비웃음을 괜스레 참는, 숨 먹힌 비소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점점 멀어졌다. 떠들건 다 떠든 모양이었다. 그렇게 다시 권시온만이 남았다. 소년은 차분해졌다. 웃기는 건 권태환이 거론된 순간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는 거였다. 비극에 대한 죄책감은 잠시였다. 열아홉은 그렇게 자괴감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하고, 배웠다. 하굣길부터 2층에 올라오기까지의 과정이 떠오르질 않았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거겠지. 시온은 자조했다. 굳이 입꼬리까지 올리진 않았다. 가방을 매번 두던 자리에 내려놓은 뒤에 교복을 벗어 가지런히 걸었다. 실내복을 꺼내 욕실에 들어갔다가 한참 미지근한 온수를 맞고는 물기를 닦은 뒤 갈아입었다. 걸음이 유독 느렸다.

푹신한 침구가 당연해진 건, 언제부터였을까. 사용인들은 계속 무심했으나 일은 놓치지 않았다.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더더욱 그랬는지도 몰랐다. 시온의 긴 속눈썹이 자꾸만 팔랑거렸다.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지 10분쯤 지난 참이었다. 밖은 아직도 훤했다. 해가 지고 저녁으로 넘어가는 도중이긴 했으나 몇 주 전처럼 까맣진 않았다. 그건 괜찮았다. 이른 귀가는 견딜 수 있었다. 소년이 감내하지 못하는 건 따로 있었다. 참아야 하는데, 자꾸만 속이 울컥하고 뜨거워졌다. 이상했다.

더듬더듬 전화기를 찾았다. 이마저도 형이 사준 거였다. 어느 날 불현듯, 잠깐 본 드라마에서 같은 기종을 색만 다르게 맞춘 연인이 나온 적이 있었다. 그걸 보고 입술 사이를 살짝 벌린 채 집중했는데, 다음날 그가 내민 물건이 바로 이것이었다. 소년의 눈동자가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다시 반복이다. 시온은 이길 수 없는 눈싸움을 했다. 애초에 겨룰 수도 없었고, 싸움이라기엔 눈동자에 맥도 없었다. 눈꺼풀을 감았다가 뜨는데, 점점 진득한 감각이 느껴졌다. 형이 몰라서 다행일지도 몰라. 다시 한번 혼잣말이 가슴을 스쳤다. 알고 있었다. 권태환은 누군가가 악의를 품는다고 해서 흔들릴 이가 아니었고, 한없이 연약하기만 한 소년을 지키면 지켰지 자신에게 지켜질 인종도 아니었다. 그걸 알면서도, 시온은 안도했다. 짧고 여운이 긴, 안도였다. 그러고 나니 불쑥, 입안에서 어떤 문장이 맴돌다 튀어나왔다. 막을 틈도 없이.

‘…차라리 개면 좋을 텐데.’

기껏 무시로 일관해온 주제에, 그래서 성은 나지 않았다. 차라리 그들이 비꼰 모든 표현이 사실이었으면 했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으나 진지했고, 진심으로 그걸 바라는 제가 우스웠다. 알람은 없었다. 메시지도 없었다. 화면은 여전히 까맸고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 엄지로 전원을 눌렀다. 화면이 켜졌다. 패턴을 그리자 메인이 나왔다. 기본 배경이었다. 파란, 물색이 가득 차 있었다. 이 상황에 분노하진 않았다. 자책은 했으나 몸을 떨게 하진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떨렸다. 네모난 화상이 자꾸만 흔들렸다. 형의 단축번호는 1번이었다. 숫자 하나 누르기가 힘겨웠다. 제게 닥친 어떠한 현실보다, 버거웠다. 간신히 꾹, 누르고 있는 데 성공했다. 전화가 걸렸다. 기계적인 안내 음성이 국제전화임을 알렸으나 걸림돌이 되진 않았다.

‘그렇지만… 형은 치대는 개도 싫어하고…’

무슨 말을 주워 뱉고 있는 걸까. 제 목소리마저 자꾸만 멀게 들렸다. 액체로 꽉 막혀버렸을 때와 같았다.

신호음은 일정한 박자로 울린다. 계속. 멈추지 않았다. 앉아있던 등이 안으로 굽었다. 키도 크고 몸도 거의 다 여물었는데, 자꾸만 작아지고 싶었다. 그럴 수 없는걸 알고는 있다.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초, 분이 흐를수록 권시온은 부피를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마지막엔 안내 음성이 들렸었나? 아니면 지레 겁먹어 먼저 끊어버렸나? 잘 모르겠다. 제가 중얼거린 건 선명히 떠올랐지만 말이다.

‘……보고, 싶어.’

잔뜩 울음을 먹었었다. 그리고 상대는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뒤에 전해 듣긴 했다. 급한 일이 생긴 탓에, 않은 게 아니고 하지 못한 거라고. 그다음 날 문자도 받았다. 하지만 뱉었던 말을 글자로 옮기진 않았다. 이것이 권시온이 제 발로 파양을 원한다고 말하러 가기, 딱 5일 전에 있었던 이야기의 전말이었다.

*

“왜… 여기…”

“전화는 왜 꺼놨어.”

앞 머리카락이 자유분방하다. 고정된 흔적이 전혀 없으니 씻어낸 지 오래되었나 보다. 거기다 정장 차림도 아니었다. 얇은 캐시미어 폴라 위에 코트를 걸쳤다. 잘 보니 요즘 날씨에는 추울 법한 조합이었다. 잠은 다 달아났으나 눈꺼풀은 무거웠다. 시온은 양손을 들어 또 눈가를 비볐다. 망막이 시큰거렸다. 그러다 손목이 잡혔다. 살갗에 닿는 온도는 너무나 차가웠다. 등이 움츠러들 정도로. 입술이 벌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체온이 낮은 편인데 왜 이렇게 얇게 입었느냐는 걱정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가려던 찰나, 팔이 그대로 살짝 끌어당겨지며 빨갛게 달아오른 눈가가 드러났다.

“권시온.”

무겁다. 평소에도 가라앉아 살짝 울리는 음색인데, 지금은 깊은 우물에 빠진 것처럼 들렸다. 붉어진 흰 자가 속눈썹에 덮였다 보이기를 반복했다. 세월이 흐르긴 흘렀다 싶다. 제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머리카락을 넘겨 올리지 않은 권태환의 모습과 다른 구석이 있었다. 그때는 좀 더 앳돼 보였었다. 제가 그때의 그만큼의 나이가 들었으니 할 수 있는 생각이었지만. 성인이 된 이시온은 그렇게 상대의 과거를 더듬다 정신을 차렸다. 전화를 왜 꺼놨느냐는 물음을 들을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 들어왔어요?”

매장은 그럴 수 있었다. 비밀번호만 알면 출입이 자유로웠으니까. 그럼 꼭 열쇠가 있어야만 하는 집은 어떨까? 마주 보고 있던 턱에 힘줄이 돋았다. 쯧. 혀를 찬 그가 당당하게 해답을 던졌다. 전혀 떳떳한 일이 아닐 텐데도 거리끼는 기색 하나 없었다.

“여벌 열쇠, 그날 가져갔지.”

아. 작은 단말마가 들렸다. 백경아가 가지고 있던, 태환에게 키링을 보여주고 난 뒤 그대로 서랍에 방치되었던 여벌을 이야기하는 거란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남자는 부족한 점이 하나 없으면서도, 욕심이 난 것이 있으면 무슨 수를 쓰든 가지는 인종이라는 걸 깜빡했다. 화가 난 건 아니었다. …그 와중에 그걸 챙겼구나. 오히려 감탄이 입안을 맴돌았다.

“그래서, 넌 왜 전화기를 꺼뒀느냐고 묻잖아.”

잔잔한 수면을 닮은 눈동자는 고요하다. 시온은 한참 동안 눈앞의 상대를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그럼 형은 왜 열흘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고, 연락도 받지 않았어요?”

한 번의 질문이 아니었다. 10년 치의 물음이었다. 불뚝, 입을 막을 새도 없이 튀어나온 본심이었다. 몸과 마음이 각기의 자아를 가지기라도 했나 보다. 홍채가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그 뒤론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태환이 눈썹 한쪽을 위로 올렸다. 구긴 미간이 천천히 매끄러워졌다.

“열흘? 무슨 열흘.”

“조만간이라고 하면, 보통 그 정도 기간이었으니까….”

의도한 바가 아니었나. 시온의 눈이 또 방황하기 시작했다. 사내는 비뚜름해진 하관을 매만지다가 하, 하고 숨을 뱉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딱히 그런 기준 따위 없었어.”

청년의 여전히 달아올라 뜨거운 눈가를 매만지는 손길은 어느새 친절해졌다. 단단한 엄지로 느리게 쓰다듬어졌다. 동시에, 권태환의 눈매가 휘었다.

“일 때문에 영국에 출장을 갔었고, 기한이 정확하지 않으니 그리 전한 거였는데…”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였다. 반대쪽 팔이 들리고, 곧이어 손바닥이 시온의 잔머리가 뻗친 둥근 정수리에 닿았다. 접촉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호흡이 잠깐 멈췄다. 길지 않게, 아주 잠시 동안만 이었다. 앞 머리카락이 청년의 조약돌 같은 이마를 간지럽혔다.

“그래서 또 토라졌어? 이번엔 뭘 사줘야 하나, 형이.”

“그러니까 호적은 이미 정리, 아.”

이시온은 깨달았다. 자신이 이미 그를 자연스레 옛 호칭 그대로 불러버렸다는 사실을. 뼈아픈 실책이었다. 이런 상황을 벨도 없다,고 하던가. 그는 양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리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럴 공간조차 없었으니까. 남자가 먼저 코끝을 비볐다. 이윽고 훨씬 안정된, 그러나 다른 의미로 가라앉은 음성이 귓가로 바로 흘러들어왔다.

“그래서 10년 전에도, 말도 없이 나갔나?”

수면을 취하느라 메말라버린 입술이 쩍, 붙었다 떨어졌다. 시온의 눈동자가 얼어버린 호수의 표면처럼 멈춰버렸다. 눈가에 있던 손가락은 눈치채지 못한 동안 아래로 내려가 어깨에 머물러 있었다. 아직도 흉이 남은, 그 부근이었다. 손아귀에 들어간 힘은 거세지 않았다. 오히려 위화감이 들 정도로 가벼웠다. 그리고 이시온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태환의 감정을 읽어냈다. 오래된 감정을 묵히고 있던 건, 자신뿐이 아니었나. 성대가 울렁거렸다. 입안은 아직 물기가 부족했다. 그래도 삼켜냈다. 왼쪽 가슴께도 같이 파도치듯 어지러웠다.

“…걱정돼서, 그러고 온 거예요?”

이기적이었구나. 착해야,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어야 버림받지 않을 거라고 한 주제에 저는 자기만 생각한 꼴이었다. 왠지 모르게 뒷목이 뜨거워졌다. 평소, 권태환은 어디를 가든 가볍게 입는 법이 없었다. 흐트러진 모습을 남에게 보여서 되지도 않는 것들이 제 무른 부분을 짐작하려 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사내의 그런 습성은 변하지 않았을 터였다. 오히려 더 벽이 높아졌으면 모를까. 그런데 현재, 자신의 시야 앞에선 달랐다. 누가 봐도, 아니. 그를 익히 아는 이라면 그가 얼마나 급하게 나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었다. 태환은 알고 있는 거다. 제 물음에 해묵은 감정이 숨어 있다는걸.

어깨 부상에 대한 걸 숨긴 건 태환의 부친이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때 당시 권시온의 양아버지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좀 더 나중에 알리자고 먼저 언질을 주었다. 그때 시온은 궁금증을 가지지 않았다. 다, 이유가 있으려니 했을 뿐. 사실 알리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알리고 싶지 않았다. 태환이 바로 달려오지 못하게 되면 저도 모르게 실망해 버릴까 무서웠다. 그래서 토를 달지 않고 순응했다. 그러면 자신이 그다지도 특별하고 유별하게 여기던 양 동생이 다친 일로 모자라 아예 저택을 떠나버렸단 걸 까맣게 모르던 태환은, 기분이 어땠을까. 낭패였다. 열아홉의 권시온은 너무나 어렸다. 스물아홉의 이시온은 다 컸으나 깊이 보진 못했다.

“…미안해요.”

음성이 떨렸다. 잔잔한 파동이 깜깜한 방안을 메꿨다. 이번에도 이성보다는 감성이 먼저였다. 늘 무덤덤해지려던 모습이 씻겨 내려가듯 허물어지고 있다. 태환은 사과에 대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내내 붙어있던 이마가 떨어졌다. 사내는 두 팔을 벌렸다. 어린 권시온이 불안해하거나 속이 상했으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으면 꼭, 이렇게 품을 내줬다. 저한테만. 머뭇거림도, 망설임도 잠시였다. 시트가 옆으로 밀렸다. 청년이 앉은 채로 제 앞의 어깨에 머리를 묻은 탓이었다. 울보라고 놀림당하여도 좋았다. 또, 울음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어리광만 부려서… 정말 미안해요,”

체온은 다시 미지근해져 있었다. 비단 며칠 느껴서가 아니라 정말로, 예전 그대로의 그 온도 그대로인 것만 같았다. 등허리를 쓸어오는 손바닥의 감촉이 간지러웠다.

“…형.”

“너는 그래도 괜찮아.”

너는, 권시온은, 내 동생은. 그 뒤에 붙는 문장은 ‘괜찮다,’로 정해져 있었다. 예전에도 그랬다. 소년 만이 권태환에게 뭘 해도, 무슨 말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었다. 그걸로 모자라 되려 보듬어지기까지 했다. 당장에라도 재난이 될 수 있는 사내는 제 양 동생에게만큼은 무작정 한결같았다. 애매하게 되찾았던 유일이, 끝내 완전히 제 유일에게로 돌아온 거다. 부정을 끝내고 기꺼이, 사내의 손 위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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