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처음 때를 놓친 것은
순종이었으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서고 지금까지, 이시온의 흉근은 한참 동안 달싹 한 번 하지 못했다.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는 건 아가미가 달린 수중생물뿐이다.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인간에게는 같은 기능을 하는 기관이 없어 수중에서는 호흡을 잇지 못하는 것과는 달랐다. 정확하게 서술하자면 기껏 해봤자, 입수하기 전에 공기를 한껏 들이쉬고 폐에 가둔 뒤 상태를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모든 호흡을 멈춘 상태를 짧으면 몇 초, 길면 몇 분간 유지해야만 한다. 시온에게도 그 일련의 과정이 당연했던 시절이 있었다.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흔히들 말하듯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다. 그만큼이나 오랜 세월이 흘렀다. 이시온은 불현듯 떠오르는 옛 기억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는 부모를 몰랐다. 어떤 사람들이 자신을 낳았는지, 무슨 이유로 세 살 된 어린 아들을 보육원에 맡겨야만 했는지, 그에 대한 어떤 단서도 없었다. 궁금하진 않았다.
그러다 입양이 되어 살던 곳을 떠났다. 몇 년 동안 이방인처럼 지내던 낯선 곳을 벗어난 게, 바로 10년 전이었다. 시설을 떠나야 했던 건 제 의지가 아니었으나 저택은 달랐다. 자신이 선택한 바였기에 미련은 없었다. 단 한 명의 인물에 대한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래도 잊혀져 간다고 여겼다.
이시온은 항시 잔잔한 낯을 하고 있었다. 단정하면서도 고요한 이목구비는 아무도 없는 시간대에, 아무도 발을 들이지 않은 수영장 표면과 닮아 있었다. 풀은 바다와 달리 누군가 뛰어들지만 않으면 네모난 틀에 갇힌 채 흐르지 않는, 넓은 면적의 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시온의 얼굴이 꼭 그랬단 말이다. 밀물도 썰물도 없이 움직임이 적고 곧은 입매와 천장의 창을 통해 내려온 빛을 받고 일렁이듯 조용히 빛나는 눈동자, 직각으로 잘 짜 맞춰진 틀 같이 매끈하게 뻗은 콧대가 그런 인상을 더 도드라지게 해줬다.
그랬던 얼굴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잊기는 뭘 잊어. 누가 비웃기라도 하듯, 10년 전 이후로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던 물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잔뜩 머금은 숨을 토해내지도 못하고 들이마시지도 못한 채 끝없이 가라앉는 듯한 감각이 전신을 감쌌다. 눈꺼풀도 멈췄다. 수경 안으로 물이 밀려들어와 눈 한번 깜빡이지 못하는 상태가 돼버렸다. 하지만 그런 순간의 변화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원인이라고 말해도 좋았다. 아무도 찾지 않는 수영장은 침묵과 정적을 권리처럼 누릴 수 있었으나 누군가 발 하나만 담가도 흔들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한동안 아무런 미동조차 없었던, 이시온의 고요한 풀에 파동은 뜻밖의 손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내가 숨을 쉬고 있던가, 아니면 멈췄나. 모르겠다. 이렇게 숨이 가빠본 적은 10년 전 이후로 처음이었다. 열세 살 때 입양되어 열아홉까지 살던 곳에서도, 연습을 위해 살다시피 했던 학교 수영장에서는 수시로 숨이 막혔다. 다만 한 사람만이 저의 숨통을 틔워주었는데, 10년 만에 재회하자 반대로 호흡을 혼탁하게 만들었다.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파도에 의해 뒤엎어진, 난파선처럼.
문 위에 달아놓은 종이 요란하게 울리다가 간신히 잠잠해지고 있었다.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등지고 선 몸체는 커다랗고 단단했다. 여전히, 한결같았다. 그와 정면으로 마주한 청년이 전부 그림자로 뒤 덮일 정도였다. 시온은 그의 입수만으로도 이렇게 사정없이 물결치건만, 상대의 낯은 태연하다 못해 여유로웠다. 커다란 키만큼이나 크고 마디가 살아있으면서도 날렵한 느낌을 주는, 잘 깎은 조각상처럼 생긴 손가락이 시온의 뺨을 툭하고 두드렸다. 어렸을 때 그랬듯, 똑같은 행위였다.
“숨 쉬어야지, 권시온.”
불현듯 찾아왔으나 낯설지는 않은 침입자, 잔잔한 수면을 뒤흔들며 뛰어든 이는 한때 그의 유일한 구명 줄이었다. 과거형이다. 권태환은 웃었다. 인사말 대신 10년 전의 시온이 듣고 싶었던 한 마디를 이제 와 건네면서 말이다.
*
표면적인 발단은 부상이었다. 남들의 시선과 과도한 관심을 피하기 딱 알맞은 사유였다. 수영이라는 종목을 업으로 삼는 이들의 고질적인 은퇴 사유인 어깨를 다쳤다. 시온도 같은 케이스였다. 자세한 사연을 읊는 건 뒤로 미뤄두기로 하고, 덕분에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유지해온 유소년, 청소년 수영선수라는 타이틀을 쉽게 버릴 수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심한 부상과 함께 이어진 슬럼프로 고꾸라진 유망주로 알려졌으니까. 만인이 좋아할 만한 비극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여기엔 숨겨둔 진실이 하나 있다. 그의 부상이 심각했다는 건 정말이었다. 다만 재활치료가 불가능할 정도였느냐고 따진다면… 그렇지는 않았다. 수영을 그만 둘 구실이라도 얻은 양, 시온은 그저 모든 것을 놓으려고만 했다. 오랫동안 해온 운동도, 부유한 양부모도, 자신에게 유일하게 온기를 주던 존재마저도. 첫걸음은, 파양이 되길 원하는 것이었다.
‘정 기사에게 일러 뒀다. 가는 데 까진 타고 가거라.’
등을 돌리고 있는 중년의 남성은, 소년의 아버지였던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혈육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서류상으로는 그랬다. 이시온이라는 이름의 고아는 몇 년간 저 사람의 성을 받아 권시온으로서 살아왔다. 실제로 아버지라고 부른 날은 적었다. 공석에서만 가끔, 그렇게 부르라고 종용하긴 했지만 딱히 별다른 살가움을 내보이진 않았던 양 아버지였다. 그래도 마지막이라고 신경이 쓰인 건지, 괜찮다는 거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끝까지 눈을 맞대고 인사하지는 않으면서도 뜻을 물리지 않았다. 그래서 시온도 더 토를 달지 않았다. 보이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허리를 살짝 숙인 채 인사하곤 밖으로 나섰다.
섭섭하진 않았다. 오히려 조금은 민망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아 멋쩍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시온은 이곳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따듯한 관심이나 살가움을 바란 적이 없었고, 단 한 명을 제외한 주변인들도 그런 손길을 내준 적이 없었다. 익숙했고, 괜찮았다.
예외. 미처 덜 여문 심상에 걸리는 건 딱 하나, 단 한 사람의 존재뿐이었다. 열셋에서 막 열넷이 되어가던 무렵, 대기업 JL의 수양아들이라는 이름표가 붙여졌다. 그런 소년에게 꾸준히 관심을 준 단 한 명만이 그를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시온의 양아버지의 친자이자 현 회장의 손자인 권태환이 바로 그 원인이었다. 그는 소년보다 열두 살 위였고 본디 외아들이었기에 명실상부한 후계자였다. 그런 그가 있기에 뒤늦게 끼어든 시온의 존재는 한없이 어정쩡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남들 눈에는, 그랬다. 그들은 누가 봐도 이상한 형제 관계였다. 이미 성인이 된지 오래인 적자와 3살 때부터 보육원에 맡겨져 자라다 수영 천재라는 평판을 듣고 운 좋게 재계를 주름잡는 집안에 입양된 고아의 조합이 평범하지는 않은 탓이었다. 물론 그런 관계를 만든 건, 둘이 아니라 양부모들이었다.
시온은 그들을 만난 첫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갑자기 불려간 별실에서, 원장님이 제 어깨를 감싸 안고 말했다. 이제 이분들이 네 아버지, 어머니가 돼주실 거란다. 통보 아닌 통보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의 커다란 눈동자는 미동 한 번 없었다. 어른 셋, 아이 하나로 꽉 찬 상담실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나마 말소리가 들린다 싶으면 죄다 수영 이야기뿐이었다.
어느 대회에서 수상했다던데, 어디선 1등을 따냈다던데. 겨우 열넷이 되어가던 소년은 단박에 제 미래를 가늠했다. 아, 앞으로도 운동만 열심히 하면 되나 보다. 감상은 그것이 전부였다. 아니, 하나쯤은 더 있었다. 새 부모님들의 손을 잡고 걸어나가던 여타 다른 아이들처럼, 이제 나도 가족이 생겼다는 꿈같은 설렘 따위 품을 필요가 없겠구나.
양부모가 된 두 사람이 앞서 걸었다. 뒤를 따르는 아이와 그들의 거리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았다. 어머니 쪽은 입을 다물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소년에게는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그나마 아버지가 될 이는 좀 나았던 듯도 싶다. 굳이 변명을 해주고 싶은 건 아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노력을 하는 기색이 있었다는 건 사실이니까.
…형도 하나 생길 거다. 정면을 바라본 채로, 음성만 들렸다. 고개를 숙이고 걷던 아이의 동그란 정수리가 천장과 맞닿았다. 양아버지는 계속 발길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말을 이어나갔다. 너보다 나이도 많고 그리 다정한 놈도 아니지만, 웬일로 네게 꽤 관심을 보이더구나. 그걸 듣고도 시온의 가슴은 여전히 잔잔하기만 했다. 언뜻 들으니 형, 이라는 사람은 성인인 듯했다. 그렇다면 아무리 흥미가 있을지언정 한 철일 테다. 없는 것처럼 살아야겠다는 다짐은 유효했다. 그리고 몇 주일 후, 서류 몇 장이 이시온이었던 소년을 권시온으로 바꿔놓았다.
돌이켜보면 어린아이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봤자 결국 어린애에 불과했던 거다. 열세 살 이시온의 추측은 반만 맞았다. 옳았던 건 양부모에 대한 부분이었다. 소년은 그들에게 정말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고 부모 또한 그저 양육이란 껍데기를 뒤집어쓴 후원을 해주기만 했다. 둘은 이따금 아이답지 않은, 핏줄이 아닌 아들을 방임하긴 하였으나 적어도 금전적으론 훨씬 풍족하게 만들어줬다. 방임이긴 했으나, 도리어 소년의 입장에선 물 흐르듯 흘러갈 수 있어 좋기도 했다. 역으로 빗나간 면은, 그들 친아들의 태도였다.
‘어서 와, 권시온.’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들은 말은 몇 문장 되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들린 말은 예상치도 않게 온건한 인사였다. 어서 오라니. 소년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갑자기 생긴 양 동생이 거슬릴 만도 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는 계단 위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아무리 그가 저보다 훨씬 원숙한 스물다섯이라고 해도 지나치게 담백한 인정이었다.
불린 호칭은 이시온이 아니라 권시온이었다. 너무 당연하게 붙은 성을 듣자마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남들이 들으면 별일 아닌 듯 넘겨버릴지 모르겠으나, 시온은 어쩐지 그게 너무 이상하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부표처럼 떠다니던 와중에, 갑자기 바라지도 않던 울타리가 생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권태환이란 이름의 사내는 앞서 들은 대로 과연, 다정은 고사하고 위압적인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이목구비의 선이 굵고 어딘가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단단한 미남이기도 했다. 타인의 외모에 영 관심이 없는 시온의 눈으로 봐도 그랬다. 거기다 키는 또 어찌나 큰지,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큰 소년이 올려다보느라 목이 뻐근해질 기경이었다. 그 앞에 서니, 드디어 제 나이대의 아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인사를 건네고 난 뒤, 권태환은 소년이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깜빡이는 걸 유심히 관찰하는 듯 보였다. 시선은 형체가 없는데, 얼굴이 따끔거리는 것만 같았다. 덕분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시온이 고개만 아래 위로 끄덕거렸다. 저택에 발을 들이기 직전, 자신의 방이 2층에 있다는 설명을 들었기에 위로 도망칠 작정이었다. 이윽고 계단을 밟자마자 더욱더 놀라운 한마디가 들려왔다.
‘형이라고 불러, 꼭.’
그날로부터 대략 7년이 흘렀다. 놀랍게도 그는 별안간 생겨버린 어린 양 동생에게 제법 오래도록, 퍽 친절하고 다정하게 굴어줬다. 보편적이지는 않게, 나름의 방식이긴 했지만. 다른 이들은 그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찬물을 끼얹은 듯 움츠러들었으나, 시온에게는 한결같이, 꽤 부드러운 눈빛을 내줄 줄 알았다. 얼굴을 맞대던 1년 전까지는, 정말 그랬다. 권태환은 여전히 가문의 적자였고 후계였기에 유학을 가야만 했던 탓이다. 대학은 졸업한 지 오래고, 미루던 MBA 과정을 밟기 위한 절차였다. 메사추세스로 떠난 형은 늘 바빴다. 연락이 오긴 했으나 통화와 메일이 전부였다. 결론적으로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세월을 굳이 헤아리자면, 7년에서 1년 반 정도를 빼야 했다.
권시온으로서, 마지막으로 용기를 냈다. 대화를 나눠본 게 손에 꼽는 양어머니에게 운을 띄울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선택지는 적어도 마주치면 가뭄에 콩 나듯 끼니는 챙겼느냐고 물어주던 양아버지밖에 없었다. …형에겐 알리지 말고, 저를 파양해 주세요. 양부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덤덤한 부탁을 듣고 침음을 흘렸다. 끝내 말리진 않았다. 그래, 그게 좋겠구나. 뭐가 좋겠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받아들여졌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됐다. 한편으론 불안했다. 통보조차 없이 도망치는 자신을 보면 형은 뭐라고 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꿨다.
단출한 인사를 마치고 차를 타러 나갔다. 자연스럽게 들이마신 바깥공기는 가슴이 아릴만큼 차가웠다. 계절은 겨울이었고 때이른 함박눈이 오고 있었다. 내년에서야 막 성인이 되는 소년의 옷소매는 길이가 조금 모자랐다. 그가 막 빠져나온, 커다란 저택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여기 처음 왔을 때에 비하면 훨씬 값나가는 물건임엔 틀림없었으나 큰 의미는 없었다. 태환이 유학을 떠나기 전이야, 그가 철마나 손수 골라 입혀줬으니 이럴 일이 없었지만… 얇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고개를 가로젓느라 그랬다. 잡념을 멈추기 위해서였다.
입고 있는 옷을 제외한 짐은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일부러 그랬다. 자신이 떠나는 줄도 모르고 미국에 있을 태환이 주었던 물건들은 전부 두고 나왔다. 조금이라고 그를 털어내려는, 얄팍한 수였다. 캐리어 손잡이를 쥔 손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형은 종종 제게 선물을 보냈다. 가장 최근에 국제 우편으로 배달되어 온 물건은, 장갑이었다.
이제는 한 발만 디디면, 딱 한 걸음만 떼면 권시온은 사라지고 혼자인 이시온으로 돌아갈 참이었다. 걸음을 옮기는 발이 너무 무거웠다. 중력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을 텐데도. 바닥을 향해있던 두 눈이 깜빡거렸다. 만약 알면, 뭐 어쩔 건데. 화를 내던, 달래주던 다 무슨 소용인 건데. 삐죽한 독백이 흉부를 스쳤다.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권태환이 알아차린다고 해서 뭐가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맞이해야만 하는 이별이었다. 물론 형은 아니라고 말했을거다. …약속도 했었는데. 또다시 머리카락이 부서지듯 양옆으로 휘날렸다.
열아홉의 권시온, 아니 이시온은 현실을 알았다. 태환이 운명처럼 경영권에 뛰어들고 나면 허울뿐인 차남은 해가 되면 됐지 득이 되지는 못할 터였다. 아무리 애정과 다정이 쏟아진다 한들 종착지가 정해져있는 관계였다는 뜻이다. 차라리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해서 빠른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홀로 결론을 내리자마자, 야속하게도 눈가가 뜨거워졌다. 애써 무시하려던, 형이 뭐라고 할까에 대한 예측이 불현듯 머릿속에 스쳤다.
‘숨 쉬어, 권시온.’
막을 새도 없었다. 허상의 태환이 시린 겨울바람에 얼어버린 제 뺨을 매만져주며 어르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곤 캐리어를 앗아들고 제 등을 감싸 안아 줄 것이다. 뒤를 돌아 다시 돌아가자고, 낮은 음성으로 속삭이면서. 실제로도 숨이 가빠져 있었다. 폐에 물이 차기라도 한 것 같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발끝으로 괜히 얼어버린 흙을 파헤쳐 보았다. 그만하자.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현실은 분명했다. 아무리 상상한들, 형은 이 자리에 없었다.
실은 바라고 있었다. 권태환은 늘 빠르게 제 맘을 알아차려 주었다. 이번에도 내심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눈치채고 이곳으로 돌아와 제 앞을 막아주길 소망하고 말았다. 애써 부정해 봐도 소용이 없었다. 더더욱 다행이었다. 무슨 염치로 그런 걸 바라는 걸까. 알면서도 원망하고 말았다. 자책이 이어졌다. 살얼은 흙을 한참 파헤친 탓일까. 발꿈치가 차가웠다. 마치 호수의 살얼음을 깨고 발을 담그기라도 한 것처럼.
두 다리가 힘겹게 움직였다. 뒤에서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소년은 그렇게 경계선을 넘었다. 정리된 호적과 함께, 이시온이 되어 저택을 떠났다.
*
‘진짜 좋은 분이야, 시온아. 내가 너한테 아무나 막 소개하겠어? …아니, 그게 사실 우리 큰 누님이시거든. 보조가 필요하다셔. 응? 나 돕는 셈 치고.’
그를 붙잡는 건 단 한 사람뿐이었다. 한 번도 의지해 본 적은 없었으나 충실히 따르긴 했던 코치는 수영을 그만두는 제자가 퍽 안타까웠었나 보다. 굳이 참석하지도 않은 졸업식 날 따로 연락이 왔다. 전화를 무시할 수도 있었건만, 망설이다 받았더니 말이 줄줄 쏟아졌다. 거절할 수도 있었다. 저는 이제 당신이 담당하는 학생이 아니라며 밀어내면 되는 거였는데, 시온은 모질지 못했다. 3년이었다. 코치는 책임감과 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눈치챌 수 있었다. 부탁 뒤에 숨은 의도가 빤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명분이 그럴싸했다는 점도 한몫했다.
부탁 아닌 부탁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코치에서 손위 누이가 하나 있는데 마침 직원 겸 제자를 구하고 있다고 했다. 코치는 제 누나가 외국으로 나가서 공부를 한다는 개념이 흔하지 않던 시절에, 홀몸으로 프랑스에서 빵을 배운 경력이 있다며 은근슬쩍 자랑까지 덧붙였다.
그는 한참 동안 과시인지 뿌듯함인지 모를 이야기들을 이것저것 뱉기 바빴다. 워낙 실력이 출중해서 제자 중 대부분이 유명 호텔의 파티쉐들이며 결혼도 하지 않아 적적하실 법 할 텐데도 일을 손에 놓지 않는 성실한 분이라는 점, 연식이 오래되긴 했어도 매장이 있는 상가 주택건물 또한 제 누나의 것이라 거주도 문제없다는 부연 설명이 이어졌다.
다음은 푸념의 차례였다. 아무리 그만큼 잘난 누님일지라도 제법 연세가 많아졌고, 슬슬 일이 힘에 부쳐 젊은 손을 꼭 빌려야 한다는 구절이 나올 때는 꽤 구슬퍼 보이기까지 했다. 마지막엔 사족도 붙었다.
‘…너 수영 다시 하라고는 안 해, 인마. 너도 먹고살아야 할 거 아니냐. 그리고… 살살하기만 하면 반죽하는 게 재활에도 도움이 된대. 아니, 뭐… 그냥 그렇다고.’
현실적인 타협안이었다. 운동을 계속하라고 매달리지 않으면서도, 적절하게 앞날을 걱정해 주는 정도로 선을 지킨 것이다. 일부러 그랬는지 모르면서 얼결에 얻어걸린 건지는 몰라도 결론적으론 좋은 전략이었다. 침묵을 지키고 가만히 듣고 있던 권시온, 아니. 이시온의 눈동자가 잔잔하게 떨리고 있었다. 코치가 바로 쐐기를 박았다.
‘우리 누님이, 방금도 말했지만 나이가 있으셔. 나보다 스무 살은 많기도 하고. 내가 이래 봬도 늦둥이라. 그러니까 나 좀 돕는 셈 치고 들어주라, 응? 시온아.’
어떻게 되었느냐고? 시온은 코치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음성으로 내뱉진 못했으나 확실히 고개를 아래 위로 끄덕이고 말았다.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코치의 밝은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들어주는 거지? 어? 바로 말씀드릴게. 전화를 받을 때만 해도 완곡히 거절하려 했건만. 왜 그랬을까.
짐작 가는 부분이 아예 없진 않았다. 나이 터울이 지는 남매라는 관계 때문이었다. 형제가 아니라 몰입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청년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이시온은 목울대를 울리며 마른침을 넘겼다. 제 마음도, 답도 홀로 삼켜버리려고 들었다. 몇 주후 일러준 주소로 찾아갔다. 코치의 혈육은 굉장히 담백하고 우아한 인상을 가진 중년이었다. 초면인데도 어색하게 대하는 법이 없었다. 저를 보고 나긋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래, 어서 와요. 일단, 여기 있는 포대부터 옮겨줄래요?’
누나라는 사람에게라도 거절의 뜻을 비춰볼까 했으나 헛수고였다. 거절은 영영 없던 일이 되었다. 잘 된 걸지도 몰랐다. 어차피 시온에게 돌아갈 장소는 없었다. 얼버무리듯 적응하고 보니 제게 안성맞춤인 보금자리이기도 했다. 케이크와 빵을 판매하는 가게는 드나드는 손님은 많지 않았으나 해야 할 일은 은근히 많았다.
하루 종일 부지런히 움직인 뒤 2층으로 올라가 이부자리에 누우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딴 생각 할 겨를이 없이 숙면에 빠져서 좋았다. 권씨 저택을 떠나온 후로부터 약한 불면에 시달리던 시온으로선 얼결에 득을 본 셈이었다. 일주일, 이 주일, 한 달, 석 달. 청년은 마침내 중년의 여성을 스승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디저트를 만드는 일은 지레짐작하던 것보다 훨씬 손이 많이 갔다. 그래서였을까. 시온은 이 일과에 순종하게 되었다. 만족스럽다면 만족스러운 걸지도 모르고. 매일 아침마다 트럭에 실려오는 밀가루 포대를 종류별로 쌓아놓고 나면 곧바로 부재료가 배달되어 왔다. 그걸 또 냉장고면 냉장고, 냉동고면 냉동고에 열 맞춰 정리를 해야 했다. 과일류는 씻어 밑손질을 해놓고 박력분은 곱게 채에 걸러서 준비한다. 차가워서 바로 쓸 수 없는 버터는 미리 상온에 꺼내두고… 딴 길로 샐 틈이 없었다. 몇 달간은 의도하지 않고도 평탄할 수 있었다. ‘두고 온 이’를 곱씹을 짬이 나지 않아 좋았다. 코치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여기에 와 일을 배우게 된 것도 온전한 제 의지가 아니었건만. 기대하지도 않은 행운이었다.
코치와 스승님은 객관적으로 봐도 크게 닮은 구석이 없었다. 겉모습만 보자면 말이다. 그래도 둘 다 교육에 소질이 있다는 점만은 똑같았다. 그들은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가 어떤 성향이든 항시 공평하고 인내심 있게 가르칠 줄을 알았다. 이따금 단호하고 엄하긴 했으나 날카로운 언사를 사용하는 일도 없었다. 꾸준하게 알려주니까, 배우는 입장에선 그대로 따라 하기만 되는 거였다.
그에 더해, 스승은 재능 있는 자에겐 아낌없이 내줄 줄을 알았다. 어느 정도느냐고? 이시온이 한사코 손사래를 치든 말든, 예고도 없이 3년짜리 전문대 등록금이 들어있는 통장을 건네준 걸로도 모자라 끝내는 유학까지 가라고 명할 만큼이었다. 너는 어디로 갈지 고르기만 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있었다. 청년은 그때도 밀어내지 못했다. 그저 동그란 눈동자를 굴리며 입을 떼지 못하고 달싹거리는 상태로, 오래도록 서 있을 뿐이었다. 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선생님은 여상히 물었다. 괜히 머리 굴릴 생각 말고 냉큼 답하란 재촉이었다.
‘그래서, 어디로 갈 거니?’
‘고민… 해보겠습니다.’
제자는 말꼬리를 흘렸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으나 선뜻 받아들이지도 못하겠다는 표시는 내고야 말았다. 질문에 대한 답도 며칠 뒤에야 겨우 새어 나왔다. 예고를 해둔 덕분이었을까. 스승도 재촉하는 법이 없었다. 늘 짧고 간략한 말씨를 구사하던 입술이 오물거렸다. 매듭을 지을 수밖에 없단 걸 알기에 길게 뜸을 들이진 못했다.
‘…미국만 아니면 될 거 같아요.’
‘형’이 유학을 간 나라, 미국이었다. 연쇄 작용이란 건 참 무섭다. 유학, 하니까 막연히 생각난 나라가 미국이라니. 헛웃음도 나오질 않았다. 그런데 막상 듣는 입장에선 참 뜬금없었나 보다. 미국? 되묻는 음성엔 의아함이 역력했다. 제과제빵을 배우러 유학을 가는 국가엔 왕도가 있다. 가장 유명한 곳이 일본 아니면 호주였다. 별안간 미국이 왜 튀어나온 걸까. 도리어 스승이 궁금해했다. 마음에 드는 미국 출신 명장이라도 있니? 순간 시온의 하얀 귀가 빨개져버렸다.
시온은 스물셋이었고, 권 씨 저택을 떠나온 지는 4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JL에서 누가 찾아오거나 연락하는 일은 없었다. 형은… 모르겠다. 귀국을 했는지, 아니면 좀 더 남아있기로 했을지. 자신은 태환의 행적에 대해 알 필요도, 알아서도 안됐다. 그렇다면 태환은? 이미 알고도 남았을거다. 영원한 비밀이 될 거라 장담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권태환이 원한다면, 시온의 새로운 번호를 얻는 것쯤이야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거보다 쉬울 터였다. 부질없는 가정이다. 형, 그러니까 권태환으로부터 온 연락은 전화는 고사하고 문자 한 글자 없었다.
그런데 굳이 미국이 아니면 된다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시온은 예기치 않게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말았다. 괜한 두려움과 그보다 더 한심한 희망이, 아직도 남아있었나 보다. 괜한 설레발은 해프닝처럼 지나갔다. 유학지는 호주에 있는, 스승의 지인이 강사로 있다는 제과제빵 전문학교로 정해졌다. 그리곤 또 정신없이 쳇바퀴를 굴리며 살았다. 어학원에 다니고 비자를 준비한 뒤 비행기에 올랐다.
학교를 졸업하는 데 2년, 강사가 운영하는 교육원에서 또 2년을 보냈다. 낯선 땅에 적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늘 그렇듯이, 할 일만 열심히 하면서 남들의 눈에 들지 않게끔만 하면 됐으니까. 모든 과정을 마치고 돌아오자 공항이 썰렁했다. 마중 온 이는 없었다. 섭섭할 겨를은 없었다. 어서 돌아가 일을 도와야겠구나. 막연한 다짐을 하며 밖으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기사는 수더분한 중년 남성이었다. 시끄럽진 않았으나 입을 가만두지도 않았다. 그는 사소한 정보들을 궁금해했다.
‘여행 다녀왔어요? 아 공부하고 왔다고? 대단하네, 어려 보이는데. 그럼 나이가 어떻게 돼요? 이런 거 물어보면 실례라던데… 주책 부렸네.’
목청이 크진 않았다. 조근조근, 쉴 새 없이 말하긴 했다. 시온은 언제나 타인의 관심을 사는 걸 피하고 싶어 했으나 막상 누군가 물어보는 말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무심하지도 못했다. 정확히는 그러지 못하도록 학습된 바가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유순하게 만들어진 편이었다.
‘그쪽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나이요. 나이는…’
이 구절에서 잠시 여가 굳었다. 서양권에서는 만 나이로 세다 보니 헷갈린 탓이다. 면밀히 헤아려보았다. 마지막으로 남에게 소개했던 나이는 스물다섯이었다. 호주에 있을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당시 생일이 지나지 않았으니까. 고국의 셈은 또 달랐으니… 청년의 눈가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다리를 막 지나치며 생긴 그늘이었다.
‘…스물일곱입니다.’
고작 몇 글자 내뱉었을 뿐인데 목이 따끔거렸다. 시온은 문득 그 존재를 떠올리고 말았다. 처음 만났던 ‘그 사람’ 나이보다 한 살을 더 먹고 말았구나. 끈질겼다. 이제야 조금 덜 떠올리는 법을 배운 줄 알았는데. 추운 겨울날 혼자 걸어 나왔던 19세의 소년은 사라지고, 스물일곱의 시온이 남아있어야 했다. 그런 줄 알았다.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그래도 성과가 아예 없진 않았다. ‘이시온’은 그제야 권태환을 마음속으로나마 형이라고 부는 짓을 멈출 수 있었으니까.
*
선생님은 대부분 잠잠하다가 가끔씩 폭풍같이 굴었다. 2년 만에 돌아온 이시온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발을 멈췄다. 전봇대라도 된 양 멀뚱히 서서 눈을 깜빡거렸다.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마중 나오는 이 한 명 없이 게이트를 빠져나온 데에는 앙금이 없었다. 사실 귀띔 받은 바가 있기도 했다. 선생은 세심하게도, 귀국전에 미리 양해를 구했다. 미안하지만 그날 바쁜 일정이 있어 맞이하기가 힘들 것 같다면서. 시온도 아무렇지가 않았다. 그렇구나. 덤덤하게 납득이 전부였다.
…오자마자 이런 광경을 맞이할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스승은 오랜만에 보는 제자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해맑을 정도로 가뿐한 얼굴을 마주하자 손발이 삐그덕 거렸다. 해사한 모습 뒤편으로는 굉음과 함께 인부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게 내부가 한창 부서지는 중이었다. 폐업이 아니라 리모델링이라는 사유를 붙여서.
‘나는 다음 달에 바로 고향으로 내려갈 거니까, 네가 이 자리에서 가게를 하렴.’
시온은 통보 아닌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멍청하게 입술 사이를 떨어트렸다.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스승님, 저는 제 가게를 열기엔 아직 부족합니다. 뭐 이런 거절을 내뱉어야 했는데, 보기 좋은 입술이 찌그러지며 튀어나온 음절은 하나뿐이었다.
‘네.’
왜 거절하지 못하고 냉큼 답을 도출해냈느냐. 배운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 스승은 참 고아한 이었으나 그만큼이나 고집이 무척 강했으니 밀어내도 소용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그래봤자 받아들이는 시점만 느려지는 게 고작일 테다. 그렇게 번갯불에 콩이라도 굽듯, 이시온은 속절없이 제 업장을 가진 사장이자 메인 파티쉐가 되어버렸다. 현실이 마음처럼 흘러가주지 않는다는 건 이미 뼈저리게 깨달았는데, 전과는 영 다른 의미로 녹록하지가 않았다. 지독했다.
주변에 있는 건물이라곤 공영방송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옛날식 주택과 기본적으로 사장 한 명이 20년은 넘게 운영한 가게들이 전부인 동네였다. 스승의 가게도 다를 바가 없었으나 주인이 바뀐다면 사정이 달라졌다. 환갑을 막 넘은 연세의 선생님이야 고집스레 떠나지 않고 버텼기에 애매하게나마 섞여 있었건만, 아무리 스승의 보장이 있다고 해도 과묵하고 멀대 같은 청년을 반겨줄 이웃은 아무도 없었다. 좀처럼 살갑지도 않고, 살랑살랑한 맛도 없어 폐쇄적인 공동체 안에서 환영받기엔 모자람이 많았다.
단골들의 입장도 다를 바 없었다. 주차공간마저 협소한 동네까지 와, 굳이 스승의 케이크를 예약해가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전부 선생님을 믿는 거지 듣도 보도 못한 신출내기를 신뢰하는 게 아니었다. 케이크를 찾으러 와서 스승의 마지막 인사를 받은 손님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었다. 아, 아쉽게 되었네요. 계신 곳은 너무 멀어서… 돌려 말하긴 했지만, 결국엔 앞으로 이곳을 찾을 일이 없을 거란 선언이기도 했다. 겸허히 받아들였다. 많은 고난이 예견돼 있다고 한들, 청년은 이곳을 손에 놓을 형편이 되질 못했다. 한 달이 흐르고 선생님이 고향땅으로 돌아간 뒤, 시온은 홀로 차근차근 절차를 밟으며 어떻게든 새 간판을 올렸다.
「Maison dans l`eau(메종 단 루)」물속의 집이라는 뜻이었다. 남들이 의미를 알기 어려운 작명일지도 몰랐으나 나름대로 마음에 들었다. 어찌 되었든 아주 정착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서 일지도 몰랐다. 보육원이든 그 저택이든, 이제 다시 돌아갈 필요 없이 여기에 뿌리를 박겠다는 의지의 표명과도 같았다. 그런 것치고는, 수중이라는 제 원점에서 떠나진 못한 이름이긴 했지만 말이다.
*
숫자가 점점 깎여나가더니 겨우 6자리대에서 아슬아슬하게 오르락내리락 거리고 있었다. …지금 있는 재료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잔액을 바라보며 무던한 척, 떨리지 않는 눈동자는 현실을 가늠했다. 시온의 흉근이 조금 위로 솟았다가 금세 꺼졌다. 한숨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잔고가 동나고 있는 원인을 모르진 않았다. 팔리지도 않을 케이크를 만들고 또 만들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다고 아예 모든 작업을 멈출 수는 없었다. 디저트를 만드는 감이 떨어지면 큰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는 항시 그런 식이었다. 일정 이상 감정을 드러내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혼자 조용히 속을 삭이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지 않도록 해주던 상대가 있던 때도 있었으나 그 시절이 그립진 않았다. 감히 그리워할 수도 없는 처지였으니 안도해야 했을까?
오픈한지 막 반년이 되어가는 차였다. 막 시작한 시점으로부터 한두 달 정도는 빈자리가 아쉬운 기존 손님들이 의리를 베풀어주기도 했다. 그래봤자 이전보다 훨씬 적어진 매출은 점점 더 하강 곡선을 그릴 뿐, 재차 고개를 쳐드는 날이 없었다. 시온은 스승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당신이 뜻한 바가 있으시겠거니 온건히 받아들이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하지만 매장은 하루하루 온기를 잃어가기만 했다. 안타깝기도 했다.
누군가가 그에게 일에 애정이 있느냐고 물으면 쉽게 긍정하긴 어려웠으나 책임감이 있느냐고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해 줄 수 있었다. 팔리지 못해서 버려야 하는 케이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식품은 무생물이니, 정확하게는 하나의 디저트를 만들기 위한 재료를 길러내는 생산자들에게 죄책감이 들었다는 게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스승은 간간이 안부를 물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문자가 날아들었다. 내용은 늘 비슷했다. 할만하니? 답장은 단순했다. 노력하고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스승 또한 상황을 모르지 않을 터였다. 뻔히 알면서도 속마음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시온이 보낸 답변 이후로 다시 한번 답장이 되돌아오는 건 흔치 않았지만, 최근에는 한 통 있었다. 너도 참 고집스럽구나. 힘들면 힘들다고 하렴. 선생님은 저를 꿰뚫고 있었다. 생활비도 아슬아슬한 상황이니 한시바삐 접거나, 스승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좋을 텐데. 이시온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현실적인 해결 방법을 모르진 않았다. 다만 죄스러운 마음을 안은 채, 답답하리 만치 꾸준하게 시트를 굽고 크림을 바르고 가니쉬를 얹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이러다 돈이 전부 동이 날 거란 걸 알면서도.
*
본업에만 충실한 건 아니었다. 시온은 다른 방향으로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예를 들면 홍보를 하기 위해 SNS를 배워본다거나 유학하면서 알게 된 친구들에게 최근 유행하는 기법을 주워듣는 식이었다. 효과가 크진 않았다. 부지런한 허비가 이어지던 어느 날, 크리스마스가 며칠 남지 않은 때였다.
메종 단 루의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한동안 조용했었는데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날만큼은 시온의 눈도 놀란 듯 동그랗게 변하고 말았다. 열린 틈 사이로 들어오는 손님의 발걸음은 조용하면서도 거침이 없었다. 키가 훤칠하고 고급 진 차림새지만, 날카로움을 숨길 수 없는 인상의 여성이었다.
안쪽에서 진열장을 정리하던 가게 주인과 들어선 이의 눈이 딱, 맞아떨어지자마자 손님의 위로 솟은 눈매가 가볍게 휘었다. 끝이 뾰족한 송곳니를 호선으로 감추는 듯한 모양새가 누군가를 떠올리게 할 법 하였으나 시온은 누군가 방문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 그 점을 짚어내지 못했다. 그 찰나만큼은.
‘혹시 이브에 필요한 케이크도 예약이 가능할까요?’
낯선 이는 물어놓고 대답은 듣지 않았다. 바로 간결한 설명이 이어졌다. 대화에 도가 튼 태도였다. 그렇다고 아주 살갑지는 않고 적당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유려한 어조였다. 매번 성탄절마다 성과가 좋은 직원들을 선정해 케이크를 선물하곤 하는데, 원래는 사무실 인근 호텔에 맡기곤 했단다. 근처에 미팅을 온 김에 찾으러 갔건만, 그쪽의 실수로 누락이 되어 급하게 디저트 샵을 찾아봤으나 가는 곳마다 퇴짜였다. 이곳이 다섯 번째네요. 여성의 손끝 몇 개가 안으로 곱아들었다. 다섯 손가락 전부였다. 군더더기도 없고 막히는 구간도 없이 흘러나오던 사연이 멈췄다.
‘그래서, 해주실 거죠?’
답은 이미 정해놓은 것처럼 보였다. 뭐라 답변을 건넸더라. 행위는 기억이 난다. 접객이 서툴다는 걸 피력이라도 하듯 굳게 닫힌 입매가 몇 번 뻐끔거렸다. 이윽고 천천히 손가락을 말아 쥐곤 목을 가다듬었다. 불, 가. 둘 중에 가능하다는 선택지를 내놓은 건 확실했다. 손님은 한쪽 입꼬리를 더 깊이 올린 채 명함을 놓고 갔다. KA&Company, 대표 백경아. 크리스마스 이브에 케이크를 찾으러 온 건 본인이 아니라 직원이었다. 시온은 막연히, 인연은 거기서 끝이리라 여겼다. 그리고 예상은 늘 벗어나라고 존재하는 개념이었다.
*
갑작스레 찾아든 손님, 백경아는 그 뒤로도 종종 메종 단 루를 찾았다. 그것도 꽤나 여러 번, 자주 들렀다. 처음으로 다시 찾아온 건 신정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과하지 않고 좋았어요, 사장님의 케이크. 한 달여 만에 다시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한 말은 인사가 아니라, 어딘가 관대하게 느껴지는 칭찬 한마디였다.
그러고는 여전히 단도직입적으로 선언하듯 제안을 건넸다. 저는 직원과 직계가족의 생일마다 케이크를 보내요. 이브 때보단 조금, 작은 걸로. 사장님 솜씨가 웬만한 호텔 베이커리보다 낫더군요. 재정상태에 대해 아는 것도 아닐 텐데, 당연히 받아들여지리라는 전제로 주문을 넣었다. 다른 파티쉐가 들었다면 자칫 불쾌해질 질만도 한 요청이었다. 다만 시온은 그들과 달랐다. 보편적인 반응과는 다르게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살짝 턱을 아래위로 주억거렸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경아는 권유와 부탁보단 명령이 능숙해 보였고 시온은 따르는 게 편했다. 서로의 성향이 우연히 잘 맞아떨어진 모양이었다.
벌써 여러 번, 경아는 누군가를 시키지 않고 직접 시온의 가게를 찾아왔다. 그런 방문이 몇 주간 계속되자 주변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럴 만했다. 지나다니는 차량이 늘 거기서 거기인 협소한 골목에 딱 봐도 값나가 보이는 외제차가 드나드니 궁금할 만도 하지 않은가. 시온과 왕래가 없던 인근 가게 주민들이 정수리를 내보였다. 텅 비어있던 전면 창 너머로 인영이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방문객인 경아는 이곳 주민인 시온보다 자연스럽게, 고고한 태도를 굽히지는 않은 채 그들에게 섞여들었다.
뭐 하는 아가씨야? 사업? 경영 컨설턴팅이라. 어렵네. 아, 창업 도와주는 거라고? 아, 우리 아들도 그런 거에 관심 많던데. 경아는 이웃들의 격식 없는 태도를 불쾌해하지 않았다. 되려 익숙하게 묻는 말에 대답을 하고 중간중간 적당한 맞장구를 쳐주기까지 했다. 가끔 조언도 아끼지 않으면서. 이웃들은 그런 경아가 흘리는 정보를 놓치지 않았다.
대놓고 묻는 이도 생겼다. 조금, 싸게 컨설턴팅인가 뭔가 해줄 수는 없을까? 누군가 그렇게 말했을 때, 시온은 고민에 빠졌다. 경아는 어디까지나 손님이었다. 실례가 아닐까, 말려야 하나. 고뇌는 오래되지 못했다. …어디 소문 내지는 마세요. 사업가의 미소를 지은 여성이 흔쾌히 받아들였다. 한 건이 두건이 되고, 두건이 세건이 되었다. 경아는 시온이 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중장년이 대부분인 주민들의 호감을 손쉽게 얻어 나갔다. 그들은 점차 세련되고 말도 잘하고, 마음을 휘두를 줄도 아는 이방인에게 흠뻑 빠져들었다.
‘아유, 백사장 덕분에 잘 해결했어. 우리 딸애도 이제 안심이야. 사위라고 있는 게 변변치 않아가지고… 아이고. 그만해야지. 아무튼 고마워.’
‘어디 제 덕분인가요. 인연을 만들어준 건… 이 사장님이죠.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도 좁은 동네였다. 저기 아무개 아들이 창업할 때 전문가가 도와줬다더라. 케이크 가게 손님인데 종종 오니까 가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덕분에 메종 단 루가 사랑방 역할을 했다. 마땅한 카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경아를 만나러 온 이들은 오래도록 머무르며 눈치를 봤다. 젊은 사장과 친하지도 않으니 더욱더 신경이 쓰인 것이다. 이거 미안해서 어째. 멋쩍은 말이 몇 번 오갔다. 괜찮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실상은 달랐다. 잔고는 점점 바닥을 보여갔다. 백경아가 꾸준히 주문을 넣어줬기에 겨우 근근이 유지 중이었으니 진짜 괜찮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이웃의 탓이 아니었다. 시온의 낯은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러자 경아가 절충안을 내놓았다. 이 사장님께 미안하시면… 케이크 필요할 때 주문을 넣으시면 어때요? 실력도 좋거든요. 다들 염치는 있는 모양이었다. 먼지만 쌓이던 주문서가 한 장 두 장 줄어들어갔다.
‘그래, 그렇지. 맞아. 마침 우리 마누라 생일이 다음 주거든. 체인점 케이크 질린다고 난리야. 주문은 미리 넣어도 되는 거지?’
‘…네. 일자가 어떻게 되시나요?’
그럴 필요 없다는 입바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럴 처지가 못됐다. 청렴하게 굴고 싶어도 현실이 냉혹한 탓이었다. 백경아가 등을 떠밀어주기까지 했다. 거절하려고 입을 떼자마자, 저를 보고서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 왠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이 그러라고 했다면 끝까지 고집을 피웠을지도 모른다. 왜 저 사람이 하는 말만 순순히 듣게 되는 걸까. 실은 답이 뻔했다. 그는 이미 이런 태도가 굉장히 익숙했던 시절을 겪은 바가 있었다.
주문을 넣고도 한참 동안 경아와 대화를 하다 자리를 뜬 이웃이 모습을 감췄다. 가게 안에는 단둘만 남았다. 백경아가 데칼코마니처럼 어떤 존재를 연상하게 만드는 미소를 지으며 시온을 바라보았다.
‘이제 오붓하게 있을 수 있겠네요. 그렇죠?’
그쯤 되니, 슬쩍 신호가 왔다. 저 사람, 닮지 않았어? 공허한 물음이었다. 누구를? 애써 답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익숙한 회피였다.
*
문을 여는 건 매일 아침 6시에서 7시 사이, 문을 닫는 건 조금 이른 듯한 오후 8시에서 8시 반 사이였다. 거기에 일정이 하나 추가되었다. 이곳의 첫 번째 단곤 손님이라고 할 수 있는 백경아가 찾아오는 시간. 딱히 정해진 시간이 있지는 않았다. 점심시간이 막 지나고 있을 때쯤 동작구에 볼일이 있는 김에 들렸다는 날도 있고, 저녁 시간이 막 지난 오후 7시에 문을 열자마자 밥은 먹었느냐고 물어보는 날도 있고… 그래도 요새는 엇비슷한 시각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녁 8시 5분 전. 폐점 시간 근처였다.
‘이시온 씨는 내가 궁금하지 않아요?’
남들 앞에선 이 사장이라더니, 어느 새부터 이름을 불러댔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럼 언제부터였더라. 시온의 고개가 위로 솟아오르는 연기를 따라갔다. 경아는 최근 천연덕스럽게 변했다. 아니, 가지고 있던 기질을 숨기는 걸 멈춘 것이다. 호칭만이 아니었다. 그는 몇 주 전부터 시온의 앞에서 담배를 피우곤 했다. 대가 얇았다. 경아는 셔터를 내리는 시온을 등진 채 필터를 물었다. 청년은 담배 새를 선호하지 않았다. 기호의 여부를 묻지는 않았으나 코끝을 찡그리는 몸짓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도 딱히 양해를 구하진 않았다. 그러나 시온 또한 직접적으로 지적한 적은 없었다. 그것이 곧 허락이었다. 경아도 그걸 알기에 불을 붙인 것이었다.
이시온은 주변으로부터 자주, 전봇대 같다는 소리를 들어왔다. 언뜻 보면 호리호리해 보일지 몰라도 키가 껑충 큰 편이었고 어깨도 그만큼이나 잘 벌어져 있었다. 말간 인상과 대조되는 신체였다. 저보다 한 뼘은 큰 시온을 올려다보는 경아의 눈빛은 전혀 기죽지가 않았다. 우습게도 오히려, 이시온은 자신이 내려다봐지는 기분이 들었다. 싫지는 않았다. 이상하리만치 익숙하긴 했지만.
‘…알만큼은 아는 거 같은데요.’
빈말이 아니었다. 경아는 헨젤과 그레텔이 흘린 빵조각처럼, 은근슬쩍 제 정보를 군데군데 뿌려주었다. 나도 이제 마흔이니까. 오는데 40분 정도 걸려요. 만날 때마다 아닌 척, 한마디 한마디를 계산해서 던질 줄 알았다. 시온은 얼결에 그걸 잘 주워 안고 있었다. 다른 누군가가 그런 식으로 굴었다면 상투적으로 네, 그러십니까. 그렇군요. 같은 영혼 없는 대답이나 뱉었을 텐데… 원인도 모르고 수용해버렸다.
청년의 단언을 들은 상대가 웃었다. 명쾌하고 밝진 않았다. 눈썹 한쪽을 올리고 입매도 한 쪽으로 치우쳐 있는, 어딘가 모르게 고압적인 미소였다. 쉽게 익숙해질 만한 모양새가 아닌데도 낯설지가 않았다. 이시온의 무의식이 붉게 반짝거렸다. ‘그 사람’을 닮았잖아. 무시했다. 그저 이질적이진 않으니 무던하게 받아넘길 뿐이라고 자신을 속였다. 그게 무던한 게 맞나? 마음이 울렁거리는 건, 물이 출렁이는 것과 달리 눈에 바로 담기지 않는다. 그렇다 치면 되는 거였다. 매캐하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물 대신 일렁거려 주긴 했다.
‘정말 궁금한 게 하나도 없나요?’
질문이되 질문이 아니었다. 없을 리가 없다는 투가 역력했다. 청년의 둥근 손등뼈가 튀어 올랐다. 주인을 닮아 단아하지만, 꽤 불뚝 선명한 핏줄이 동시에 꿈틀였다. 괜스레 팔을 들어 흘러내린 앞머리를 걷어 올린 시온이 경아의 의도에 순종했다.
‘왜 잘 해주시는 건가요?’
경아는 제 정보만 나눠주진 않았다. 이시온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면 틈틈이, 늘 직설적으로 묻곤 했다. 그래서, 몇 살이에요? 내 나이를 밝혔으면 파티쉐님 나이도 응당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위층은 세를 안 준 것 같던데, 이시온 씨가 살아요? 영 무례해 보일 수도 있는 접근이었으나, 받아들이는 쪽은 아무렇지 않았다. 나쁘지 않았던가? 어쨌든 거슬리는 구석은 없었다. 낯선, 아니. 지금은 퍽 익숙해진 단골손님이 시온의 이웃들에게 친절한 건 목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구실을 들어 매장에 드나드는 건 포석이고, 주민들을 돕는 일은 청년과 관계를 넓히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아직 목표를 이루지 못했나 보다.
며칠 전 잠깐 찾아와 아내의 생일 케이크를 주문했던 사람 있지 않은가? 그는 인근 복덕방의 사장이었다. 스승님 덕에 제게 이득 하나 없이 동네에 발을 들인 젊은이를 못내 거슬려 하던 인물이기도 했다. 백경아가 시세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만 받고 도와주겠다고 나서자 금세 없던 일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좁은 동네에 거주하는 주민은 한정적이다. 도움을 요청하는 이도 한정적이라는 뜻이다. 복덕방 사장이 마지막이었다. 그런 식으로 주변인들의 마음을 다 사로잡고 나니, 다음은 제 의뢰인들을 손님으로 연결시켜 주었다. 몇 달 전만 해도, 메종 단 루에 오는 전화라곤 광고가 다였었다. 이제는 달라졌다. 백 사장이 뭐 맛있다 소리를 안 하는 사람인데, 백 사장님이 하도 칭찬을 하길래, 로 시작되는 주문 전화가 많아졌다.
이시온은 그런 흐름에 몸을 맡기는 듯하다가도, 결과적으로는 고뇌하고 말았다. 케이크가 마음에 들었다는 건 눈속임일 뿐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으니까. 백경아 같은 부류가 호의를 쉽게 퍼다 줄리 없다는 것도 알았다. 학습된 바로는 분명 그러했다. 그러면 도대체 뭘 위해서 이렇게 정성을 들이는 걸까? 실은 뻔히 알고 있는 답을 굳이 입으로 묻고 만 시온은 침묵을 견뎠다. 계속해서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이와 수입을 저울질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순수한 궁금증이 일었다. 제 옆을 지키던 그 사람이 항상 궁금했던 어린 시절처럼.
‘참 솔직하지 못하네, 알면서 뭘 물어요?’
반절밖에 태우지 못한 연초가 유명을 달리했다. 휴대용 재떨이에 남은 불씨를 비벼 끈 뒤, 살짝 오른쪽에 하중을 둔 채 비뚤어져 있던 몸이 균형을 찾았다. 경아가 시온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깔끔히 다듬은 손톱이 가까이 다가왔다. 멀리서 볼 땐 몰랐던 반투명한 다홍색 매니큐어가 아롱거리다 훅 사라졌다. 맨 끝마디가 닿았다 떨어지더니 두 번째와 세 번째 마디가, 마지막으로 볼록한 엄지 기부가 바싹 닿았다. 백경아가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순간 시온은 알아버렸다. ‘누군가’에게도 그랬듯이, 자신은 이 사람과 깊게 관계될 것만 같다는 느낌이 왔다.
‘작업 거는 거잖아. 다 알아챘으면서.’
*
띠동갑. 사회적 질타가 필연적으로 따라올만한 나이 차였다. 그게 그렇게 용납하지 못할 정도의 죄악이었느냐면,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수군거림은 따라올 수 있겠으나 법적인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통념을 조금만 비틀면 한숨 소리나 비아냥으로 끝낼만한 일이라고 하면 옳을까? 손가락질은 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구설수의 장본인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남들의 시선 따위는 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럴만한 배경이 있었다.
애매한 결론일 수 있으나, 둘은 사귀자는 상투적인 상의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들이 모호한 관계를 유지하는 동안에도 좋아한다, 사랑한다 따위의 밀어를 속삭여 본적 또한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적어도 둘은 똑같은 입장이었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둘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랑을 한 적 자체가 없었다. 경아는 작업이라는 노골적인 단어를 고르긴 했으나 그뿐이었고, 시온 또한 경아를 곁에 두긴 했으나 다른 인물을 빗대어 볼 뿐이었으니까.
두 사람의 합의점이 그랬으나 주변에서 보기엔 영 달랐나 보다. 사실 타인들은 제 입맛에 맞춰 바라보길 좋아했으니 놀라울 건 없었다. 나이차가 얼마나 나든, 옆자리가 빈 성인 남성과 여성이 저만치 붙어있으니 당연히 연인 관계일 거라 단정했다. 심지어 몇몇은 잘 어울린다, 오래가라는 둥의 오지랖을 부렸고 시온도 경아도 딱히 정정해 주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 그들은 남들에게만큼은 공식적인 연인이었다. 장장 18개월 동안이나 부정도 긍정도 없이. 경아의 행방이 묘연해 찾을 일이 생기면, 개중 누구라도 시온을 닦달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 갖춰져버린 것이다.
무슨 무서운 소리냐고 할지 몰라도 실제로 문제가 발생했고, 이시온은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상황과 맞닥뜨려야만 했다. 백경아가 이웃 몇몇의 의뢰를 진행하던 도중에 자취를 감춰버렸다. 아무리 본래 보다 낮게 측정된 비용이라고 한들, 그렇게 작지도 않은 금액이 오갔던 뒤였다. 마무리도 짓지 않고 사라져 버렸으니 이웃들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의뢰인들은 피해자가 됐고, 모든 화살은 연인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던 시온의 몫이 되었다. 열아홉의 소년이 저택을 떠났던 날처럼, 눈이 오던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지고 만 일이었다.
*
메종 단 루의 유리창 너머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시온에게 이 계절은 너무도 지독했다. 저하고 척이라도 진 걸까. 징크스라고 해도 좋겠다. 이시온은 함박눈이 내릴 때마다 곤경에 빠졌다. 파양을 자청한 때도 겨울이었고 경아가 사라진 것도 겨울이었고… 권태환이 10년 만에 저를 찾아온 지금도, 겨울이었다.
“너하고 나는 운명인가 보다, 권시온.”
건장한 사내가 다리를 꼬고 비스듬히 앉아있는 저 의자는 본래 백경아를 위해 마련해둔 것이었다. 그는 매우 바쁜 편이었고 시온은 매장을 떠날 줄 모르는 사람처럼 붙박혀 있었다. 두 사람의 약속 장소는 암묵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이 디저트 가게가 될 수밖에 없었다. 메종 단 루는 카페테리아가 없는, 그야말로 케이크를 주문해 찾아가기만 해야 하는 곳이었다. 덕분에 경아는 청년과 있을 때마다 매장 한구석에 기대어 서서 오도카니 있어야 했다. 시온은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는지 내부에 작은 테이블 하나, 의자 두 개를 들여놓았다. 입구에 가까운 곳에 자신이 앉고 비교적 웃풍이 돌지 않는 안쪽에는 경아를 앉혔다. 지금도 방문객이 안쪽 의자에 앉아 있긴 했으나 그 대상이 달랐다.
10년 만에 재회한 권태환은 굉장하리만치, 너무나 여전했다. 특히 어떤 점이 그랬느냐 하면… 열거하기엔 무척 많은 증거가 있었다. 일단 단단한 두 다리 중 오른 편을 꼬아 올린 자세와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의 각도와 눈빛이 그랬다. 제 주변의 어떤 인물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오직 ‘권시온’에게만 허락되던 은은한 온기인지 열기인지 모를 온도를 띄고 있었다. 공기가 건조한 걸까. 입술이 바싹 말랐다.
아니, 이건 습도 탓이 아니다. 시온의 눈동자가 최대한 감정의 흔적을 감추려는 듯, 애를 쓰며 태환의 주위를 배회했다. 세월을 완전히 이기는 생명은 존재할 수 없다고 본보기를 보이는 것만 같았다. 옛 ‘형’의 본질이 변하진 않아 보였으나 외형만큼은 변화가 없지도 않았다. 안와가 살짝 들어간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아도 위압감이 역력하던 인상은 더 깊어졌으면서도, 무르익어 있었다. 여전히 그 위로 떠오르는 표정은 특징이 명확했다.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려 웃음과 동시에 왼쪽 눈을 찡그린다. 시온이 제 앞에 있으면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 버릇도 똑같았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왜 연락하지 않았었느냐는 섭섭함을 내비친다거나 질타하기 위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자신이 무슨 염치로 그러겠는가. 알면서도 감정은 쉽사리 잔잔해지지 못했다. 매일 반복적으로 반죽을 해대느라 더 도드라진 양 손가락 마디가 점점 꽉 맞물리고 있었다. 얼마나 거세게 손깍지를 꼈던지, 두 손에 피가 잔뜩 몰려 불그죽죽 해졌다.
갑자기 찾아와서 웬 운명 타령인지 모르겠단 심정이긴 했다. 늘 무던하던 콧대가 구겨져 주름져 버렸다. 예전에도 시온의 감정을 가장 먼저 눈치채던 태환이었기에 그런 기색을 모를 리가 없었다. 묻고도 남았을 텐데 굳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왜일까. 수면을 닮은 시온의 얼굴이 금세 제자리를 찾았다. 더는 뒤틀리는 이목구비가 없었으나 자꾸, 자꾸만 손안이 축축해지고 말았다.
권태환이 유학을 떠난 건, 시온이 부상을 입은 시기와 엇비슷하게 맞물려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겨울 방학을 맞이하기 직전이었으니까. 굳이 시기를 언급하는 건, 그가 적어도 태환이 자신의 옆을 지켜줄 때만 하더라도, 이 위압적인 사내를 두고 긴장 같은 걸 해본 적이 없다는 점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차디찬 물웅덩이를 떠올리게 하는 저택에서, 시온은 유일하게 ‘형’ 앞에서만 편할 수 있었다. 권태환은 누군가의 살이 닿는 걸 즐기지 않는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 어린 양 동생의 손길만큼은 쉽게 허락했고 달가워해주었다.
외로움을 당연시 여기려 노력하던 어린 마음은 빠르게, 단 한 사람에게만 의지하는 법을 배워버렸다. 그마저도 사춘기라고 부를 만한 시기부턴 일부러 숨기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랬는데 왜 이제 와서 이다지도 초조해지고 마는 걸까. 모를 일이었다. 사방으로 튀는 회상이 시발점이었는지, 시온은 말을 뱉고 한참 지나고 나서야 제 어투에 날이 서있었음을 인지했다. 그러자마자 길고 촘촘한 속눈썹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태환은 맞은편에서 전해져오는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어리광 부리긴.”
조금 상황에 맞지 않는 말로 들렸지만, 시온은 그가 무슨 생각으로 저런 문장을 뱉었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청년은 올해 스물아홉으로 더는 어린애라고 볼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권태환은 그런 시온의 성장을 허락한 적 없었다는 듯, 이시온의 옛 행동 양상을 그대로 짚어내었다. 사내가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이 상가 매매가 보다 값비쌀 게 뻔한 정장을 두른 팔꿈치가 몇 십만 원도 되지 않는 테이블을 꾹, 내리눌렀다.
“닮았지?”
태환이 성큼 거리를 좁히며 건넨 말에는 앞뒤가 없었다. 변하지 않은 건 피차 마찬가지였다. 사내는 시온의 생애 중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갖은 특별 취급을 해줘놓고는, 정작 모습을 감추자 몇 자의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그랬으면서 왜 이제와서 이시온이 여전히 권시온인 양, 바로 어제 헤어진 존재처럼 취급하였다. 고작 어제 만났다 헤어진 사이처럼, 뻗어져오는 손길에 거리낌은 전혀 없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
뺨에 닿은 손끝이 움직이기 직전, 시온은 미약하게나마 반항을 시도했다. 그새 물에 젖은 것과 다름없이 축축해진 손바닥으로 권태환의 팔을 밀어냈다. 턱을 당겨 아래로 내리며 맞 부딪히는 눈빛이 어설프게나마 날카로워졌다. 당신의 손길이 닿으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뺨을 비비던 권시온은 없어진지 오래라고 선언하려는 작은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그런 청년이 가소롭고 귀엽게만 보였나 보다. 태환의 눈이 둥글게 휘는 동시에, 이시온의 말허리가 잘렸다.
“백경아.”
귀를 의심할 틈도 없었다. 몸이 덜그럭 멈추며 굳었다. 그의 입에서 나올 거라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 거론돼서? 아니었다. 태환이 제식대로, 빠르지는 않으나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문장을 이어 붙였다.
“나랑 닮았다 싶었잖아, 시온아.”
기껏 부정했던 사실을 확인받은 심장이 사정없이 요동쳤다. 수면에 일은 파문이 아주 길고 또 길었다. 안으로 말아 넣은 엄지가 저려왔다. 숨기려고만 했던 기시감이 물 위로 떠올라 버린 탓이었다. 관자놀이가 축축하게만 느껴졌다. 권태환과 백경아가 아는 사이다.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정보에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힘을 준 탓이었다. 자신이 아니라 경아를 찾으러, 10년 뒤에야 제 눈앞에 나타났다는 점도 시온을 뒤흔들기 충분했건만, 그는 또 인정을 유보했다. 지적할 정신이 없다는 게 더 옳은 말일지도 모르지만.
“당신이, 왜… 그 이름을…”
“거봐, 우린 운명이라니까.”
아, 이젠 형이라고 불러주지 않는 건가? 투정이라기엔 지나치게 능청스러운 혼잣말이 뒤따랐다. 고요하려고 안간힘을 써도 소용이 없다는 걸 정확히 짚어주는 바였다. 낮고 울림이 있던 음성이 어쩐지 한층 들뜨게 들렸다. 사소한 다른 점이 돌멩이처럼 시온의 수면에 날아들었다.
“넌 몰랐겠지만, 내가 몇 년 전에 결혼이란 걸 했거든. 아, ‘약속’을 어긴 너와는 달리… 철저하게 계약 결혼이었지만.”
입안에서 치아가 서로 부딪혔다. 갈렸다라고 해도 좋았다. 태환에게 붙들려버린 시선은 못처럼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눈동자가 어지럽게 무너지는 모양이 바로 보일 정도였다. 시온은 스스로의 상태를 더듬을 수 없었으나 속이 메스꺼워지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혼란스러움에 위장도 휩쓸려 버린 걸지도 몰랐다. 에둘러 포장하지 않은 설명이 몇 구절 덧붙여졌다. 나하고 닮은 점이 많아서 고른 상대긴 했지. 그래야 너도 그나마 덜 꺼릴 테고… 잘 고른 게 맞는 것 같네. 결과적으론. 상대가 듣든지 말든지, 혼자 문장을 읊는 사내는 눈썹을 위로 들썩이며 즐거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애써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네 취향이 여전한 덕분에, 이렇게 다시 만났네.”
마침내 권태환이 쐐기를 박았다. ‘물속의 집’이 유지하던 고요가 완전히 어그러지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내 ‘아내’가 나 대신 널 얼마나 귀여워해 줬나?”
*
‘형… 결혼해?’
‘약속’을 했던 건,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10년보다도 더.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작고 또 작았다. 소파에 앉아 서류를 읽고 있던 태환의 시선이 바로 그쪽으로 향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 부근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권시온이 보였다. 열여섯이 입기에는 살짝 유치해 보이는 하늘색 실내복의 소맷자락이 자꾸만 바스락거렸다. 손끝을 쉴 새 없이 꼼지락거리는 탓이었다. 자주는 아니고, 종종 ‘형’인 제 앞에서나 보이는 행동이었다. 할 말이 있는데 막상 꺼내자니 겁이 날 때 보이는 버릇이랄까. 들려있던 종이 뭉치가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내려앉았다. 자유로워진 두 팔을 벌린 태환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리 와. 시온은 성대를 열어 부르는 대신 행동으로 건네진 권유를 바로 알아 들었다. 슬리퍼에 덮인 발이 제법 분주하게 움직였다.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거실을 가로지른 소년이, 소년이라고 일컫기엔 커다란 키를 옹송그리며 사내의 옆자리에 앉았다. 태환의 가늘게 뻗은 매서운 눈초리가 둥글게 변하는 순간이었다.
딱 작년 이맘때쯤만 해도 다섯 번 권하면 한 번은 무릎에 앉아 줬건만. 시온은 사내의 무릎 위에 엉덩이를 대기엔 제가 너무 커버렸다는 듯이 슬쩍 옆에 앉아 버렸다. 권태환도 그런 변화를 딱히 지적하진 않았다. 대신 한쪽 팔로 자연스레 소년의 어깨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는 건 잊지 않았다.
‘결혼이라…’
왜 물어보느냐고 추궁할 만도 한데, 형은 대단히 조용했다. 어딘가 능글맞아 보이는, 권시온 앞에서나 보여주는 특유의 웃음이 도드라졌다. 시온이 볼 때나 미소지, 모르는 이가 봤다면 비웃는다며 무서워할 법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마냥 좋았다. 귓불이 조금씩 뜨거워졌다. 위로 솟은 입매가 자신을 향하는 게 너무, 굉장히… 상체를 가늘게 떨 정도로 뿌듯했다.
겨우 화제로 되돌아가자면, 시온이 열여섯이니까, 권태환은 올해로 스물여덟이 되었다. 그러니까 두 형제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20대 중반이었던 사내가 빼도 박도 못하게 20대 후반이 된 시점이라는 뜻이다. 결혼이라는 화제가 주변인들의 입에서 쓸데없이 나돌기에 최적의 시기였다. 다들 입을 가만두질 못하나. 태환이 작게 혀를 찼다. 다행히 옆자리까지 들리진 않았다.
안 봐도 비디오, 라고 하던가. 시온은 그 속어를 모를지도 몰랐다. 그런 데엔 영 관심이 없는 애였다. 딱딱한 날개뼈가 등받이를 더 깊게 눌러댔다. 굳이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대뜸 저 예쁜 입에서 결혼이라는 낯선 단어가 나온 이유가 쉽게 짐작 갔기 때문이었다. 또 사용인들이 입을 잘못 놀렸겠거니 싶었다. …다 모자기를 쳐버릴 수도 없고. 연초가 당겼지만, 지금은 ‘동생’이 옆에 붙어있었기에 손끝만 좀 달싹거렸다.
권태환은 제 속내를 표 내지 않은 채, 계속 양 동생의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심심해서는 아니고, 손바닥 오목한 부분에 닿아오는 어깨뼈 상태를 가늠해 보는 행위였다. 저번에도 아프면서 혼자 참다 울었지. 주치의 말로는 수영을 하면 꽤 자주 있는 증상이라고 했다. 커다란 눈망울이 그렁그렁한 게, 누군 속이 타 죽겠건만 참 별거 없는 진단에 인상을 구겼더랬다. 그때 진통제를 적당히 처방해 주겠다는 말을 꺼낸 의사의 목소리가 떨렸던가? 관심 없었다. 그래도 요즘은 괜찮은지, 동생의 얼굴은 익어있을 뿐, 아픔에 찌그러지진 않았다. 제가 냉큼 답변해 주지 않으니 못내 애가 타보이긴 했지만… 몸 상태는 멀쩡해 보였다. 그럼 된 거다.
태환은 왜 시온을 처음부터 마음에 들어 했는가. 모를 일이다. 본인도 가늠이 가진 않았다. 감정이 확실하지 않다는 게 아니었다. 계기와 원인 따위가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꼭 중요한가? 그냥 한눈에 보자마자 알았다. 타인과 자신의 관계 따위야, 제 발아래에 놓고 휘두를 때나 필요한 게 당연한 삶을 살았던 청년이 살면서 처음 느낀 간질거림. 그것이 ‘권시온’이었다.
‘형은 너밖에 없는데.’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
제 한마디에 얼굴이 훨씬 폈는데 아니긴 뭘 아니야, 라고 골려주고 싶었으나 기꺼이 뒷말을 버렸다. 사내는 확실히 제 옆의 소년에게 물렀다.
재벌가. 권태환은 드라마나 영화 같은 비현실에서도, 뉴스와 같은 현실에서도 늘 선망의 대상이자 가장 손쉬운 유흥거리가 될 만한 배경을 업고 태어났다. 국내에서 유명세를 탄 기업에서 태어난 이들은 운명처럼 군중의 입에 오르내렸다. 어느 그룹 아들은 허리 디스크를 핑계로 군 면제를 받았는데, 로비에 몇십억이 들었다더라. 어디 국회의원 아들은 일부러 국적을 바꿨다더라. 다만 태환은 달랐다. 독특한 축에 든다고도 할 수 있었다. 미루지도 않고 바로 입대 후 정상 제대했기 때문이었다. 이시온이 권시온으로 이름을 바꾸기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한국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다 휴학 후 군 복무를 하고 졸업을 한 뒤, 짜 맞춰놓은 퍼즐처럼 MBA 과정을 밟을 예정이었던 그가 제 손으로 일정을 틀어버린 이유가 바로 옆에 있었다. 후원하던 아이를 가문에 들여 이미지를 만들었다는 소문과 다르게, 가문의 적자는 갑자기 생긴 늦둥이 동생이 예뻐죽겠으니 출국을 조금 미루겠노라 고했다. 대단하신 회장님, 권태환의 조부는 걸출한 손주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변덕을 쉽게 받아들여주었다. 양친은 당연히 반대했건만, 우리 권 씨 장손이 뭘 허투루 하는 놈이더냐. 권회장이 쏘아붙이자 두 손 들고 백기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한편으론 태환이 시온에게 기대하지도 않던 애정을 보이니 언론에도 좋은 사례를 남길 수 있겠다는 판단도 있었다.
능력이 뛰어난 안하무인, 이 얼마나 소름 끼치는 조합인가. 그런데 권태환이 그런 존재였다. 부모는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띠동갑인 양 동생은 그만큼이나, 지루했던 태환의 삶 속에 드문 즐거움이 되어 주었다. 각별하다 못해 유일한 존재가 뒤늦게 다른 질문 하나를 더했다.
‘그럼 맞선은… 정말 봐?’
3일 전 일을 떠올렸다. 의도는 아니었지만, 이시온은 문득 귀로 흘러들어오는 대화에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도련님… 아, ‘원래’ 도련님 쪽. 선을 보실지도 모른다네. 누군가 말하자 다른 이가 급히 덧붙였다. 모르는 게 아니고 보신다던데? 안채 집사가 그러더라. 목소리를 들으니 식사를 준비하는 아주머니들이겠거니 싶었다.
곧 정원관리사로 추정되는 중년 남성의 음성이 화들짝 놀라듯 따라붙었다. 뭐어? 아직 서른도 안되셨는데? 그러자 앞서 들렸던 여성의 목소리가 받아쳤다. 에이, 여기가 어디 예사 집이야? 긍정은 놀라움을 잡아 눌렀다. 그렇기야… 하지. 하긴, 물려받을 자식이라곤 하나뿐이니. 그, 그… 걔는 열외니까.
워낙에 숨을 참는데 이골이 나있었기에, 시온은 자신이 숨을 쉬지 않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이번엔 정확히 누군지 모를, 또 다른 인물이 김씨, 물 다 마셨으면 이쪽으로 좀 와. 바빠. 하고 대화를 끊어냈다. 그렇게 은밀한 수다는 막을 내렸다. 조용히 호흡을 들이킨 소년이 발소리를 숨기고 방으로 향했다.
아마도 그들은 권시온이 집에 돌아온 줄도 몰랐을 테다. ‘원래’ 도련님이라고 표현한 태환이 첫째고, 이 저택에 들어온 지 3년쯤 된 시온이 둘째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론 말이다. 게다가 그 둘째가 항상 이 시간쯤, 수영 연습을 마치고 귀가한다는 것도 모를 리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딱히 속상하고 분하진 않았다. 저를 무시하는 건 괜찮았다. 시온에게 중요한 구절은 따로 있었으니까. 맞선. 성인 남녀가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자리. 형이, 맞선을 볼 거란 말이 귀 안을 가득 메꿨다.
부유한 집안에서 맞선은 굉장히 흔한 일이라는 걸 모르진 않았다. 딱히 알려달라 한 적은 없지만, 소년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사용인들이 속삭이는 정보들을 주워듣고만 결과였다. 더욱이 형은 명실상부한 후계자이니 하루라도 빨리 식을 올리라며 성화인 어른들이 많았나 보다. 나이가 어려도 눈과 귀가 있으면 모를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권시온은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고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몸을 돌리자 한편에 놓여있던 전신 거울이 보였다. 형과 처음 만났을 무렵, 자신이 훨씬 앳된 얼굴이었던 때는 간신히 태환의 어깨를 맴도는 키를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교복을 입게 되고, 빠듯한 일정으로 운동을 하다 보니 어른처럼 훌쩍 커진 몸을 마주하게 되어 버렸지만. 거울에 비친 커다란 몸을 볼 때마다 가슴 왼편이 아렸다. 마치 형과 떨어지게 될 운명이 성큼 다가온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태환은 권시온이 자라서 점점 성인에 가까워지는 걸 아쉬워하지 않았다. 섭섭함은 동생의 몫이었다. 많이 컸단 말이지. 이제 백팔십… 넘는 거 같은데? 제 속도 모르고 말할 때면 눈가가 따가웠다.
그래. 딱 그만큼 커버렸다. 자신의 신장이며 몸무게며 모두 보고받고 있는 태환이었기에 모를 리가 없었다. 뻔히 알면서도 작은 거짓말을 삼키지 못했다. …아직 179cm 야. 매번 1, 2cm를 낮춰 답했다. 형이 커서 정말 다행이었다. 덕분에 아직은 한참 작아 보였으니까.
계속 어린 채로 남아있는다면, 떨어질까 봐 겁내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현실이 된다 한들 장담할 수 없는 소망에 불과하단 건 알았다. 그래도 그런 비현실적인 소원이라도 비는 게, 시온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가만히 고개를 떨구었던 시온의 머리가 다시 위를 향했다. 천장과 또 한 뼘 가까워져 있었다. 사실 벌써 다 커버린 게 아닐까, 3년간 꿈도 꾸지 않던 다정에 복에 겨운 걸까. 어린 마음이 물결쳤다. 고뇌의 물결에 몸을 던져버린 소년이 고개를 털었다.
나중에, 나중에 물어보자. 당장 오늘 저녁에라도… 당장은 무슨. 3일이 지나서야 겨우 운을 띄웠다. 손끝이 차가웠다. 형이 뭐라고 답할지 모르겠기 때문이었다. 커다란 눈동자 위를 덮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던 와중, 권태환의 음성이 들렸다.
‘보면, 실망하려고?’
매서운 겉모습과는 딴판인 매끈한 엄지가 시온의 턱 아래를 문질렀다. 두 형제는 어느새 빈틈이 없다 못해 갈비뼈가 맞물리듯 꽉 붙어있었다. 태환의 주도하에 일어난 접촉이었다. 실망… 권시온이 중얼거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권태환은 연애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제 앞에서 대놓고 보여준 적 없다고 뭉뚱그려 추측하는 건 아니었다. 굳이 남들의 말을 주워 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자신은 모르는 형의 작은 조각이라도 모두 듣기 위해 곤두세웠을지 모른다. 아니, 확실히 그랬다. 그렇지 않은 척을 할 뿐이지.
잠자리만 가끔 하는 상대가 있다더라, 매번 다른 사람이라더라, 한 번 뒹굴면 두 번은 만나 주지 않는다더라… 허구인지 사실인지 모를, 뜬소문에 가까운 구절이었다. 그래도 시온은 그것들이 아예 신빙성 없는 소리는 아닐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이 부정확한 권태환을 더듬는 반면, 저는 좀 달랐다. 적어도 형이 용인하는 범위 내만큼은 그랬다. 미성년이 듣기엔 부적절한 소문이었지만, 막상 듣는 미성년이 어른의 사정을 모를 만큼 순진하단 뜻은 아니었다. 자신의 이런 면을 형이 몰라야 할 텐데. 다 꿰뚫어 보고도 남았지만… 서로 모르는 걸로 합의점이 유지되어야만 했다. 권시온은 조금이라도 더 오래도록, 태환의 어린 동생으로 남고 싶기 때문이었다.
소년이고만 싶은 시온의 얼굴이 태환의 어깨에 파묻혔다. 성숙하다기엔 아직 모자란, 그러나 완성된 것만 같이 잘 뻗은 콧대를 기꺼이 바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비볐다. 형의 어깨에 어리광을 부린 동생의 고개가 양옆으로 흔들렸다. 애교 아닌 애교에 꽤 흡족했는지, 태환의 상체가 작게 울렸다. 흉통에서부터 올라온 호흡과 웃음이 시온의 귀와 몸에도 전달되었다.
‘안 봐.’
기대하지도 않은 선물이 쥐여졌다. 동시에 소년이 얼굴을 번쩍 들었다. 동그랗게 뜬 눈을 본 태환이 뭐가 그렇게 웃긴지 다시 한번 가슴께를 들썩이며 웃었다. 덕분에 몸에 딱 맞춘 셔츠가 팽창했다. 단추 사이가 잠시 벌어졌다 다물기를 반복할 정도로.
‘이미 쳐냈거든. 그리고 결혼은… 필요해지면 하겠지. 그래도 시온아.’
사내는 커다란 손바닥을 뻗어 동생의 솜털로 덮인 얼굴을 감싸 쥐었다. 태환의 날카로운 코끝이 하얗고 여린 콧볼을 눌렀다. 다갈색 눈이 늦은 오후의 호수처럼 반짝이는 걸 바싹 들여다볼 만큼의 거리였다.
‘알잖아. 그건 ‘계약’에 지나지 않을 거란 거. 그런 날이 온다면,’
타인이 본다면 세상에 어떤 형이 동생에게 굳이 이런 말을 하냐며 꺼림직해 할 법 하건만, 시온에게만큼은 간절히 필요한 선언이었다. 빽빽한 속눈썹이 가리개처럼 드리우자, 권태환은 걷어올리라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시온은 형의 말을 잘 듣는 동생이었다.
태환이 이런 식으로 행동할 때마다, 시온은 예고치 않은 찬물을 맞았을 때와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 이걸 언어로 만들면 오싹하다, 등골이 시리다 같은 문장으로 완성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뿐만은 아니었다. 입에 아무것도 넣지 않았는데 혀끝이 달았다. 우습게도 분명히 단맛이 느껴졌다.
‘상대에겐 살 곳 하나 주고 필요할 때나 만나면 돼. 나는 ‘내’ 권시온하고 살 거고.’
헤엄을 치지도 않았는데, 오래 숨을 참은 것처럼 가슴이 뻐근했다. 서로의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태환의 기꺼움이 온도로 전해졌다. 뺨에 닿은 사내의 피부에 빠르게 도는 혈액으로 인해 점차 따듯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권시온이 불쑥, 하지만 조심스럽게 한쪽 팔을 올렸다. 이어서 꼼지락거리며 몇 번 망설이더니, 손가락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 새끼손가락이었다. 하. 웃음기를 숨길 수 없는 숨이 토해졌다. 태환에겐 이 정도면 폭소나 다름없었다. ‘어린 양 동생’의 드문 어린 짓이 그를 기쁘게 만든 게 분명했다. 그럼 또, 어울려줘야지. 시온의 미완성된 소지에 훨씬 굵고 만듦새가 도드라진 손가락이 화답하듯 걸렸다. 굳이 읊어주기까지 하면서.
‘약속.’
됐다. 소년은 이쯤에서 기꺼이 만족할 수 있었다. 적어도 앞으로 몇 년 동안은. 미지근한 물처럼 애매하게 펼쳐져 있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고야 말았다. 원치 않아도 점점 성숙해지는 게 기껍지 않은 입장으로선, 냉정하게 보자면 큰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었다. 권시온은 권태환에게 숨기고 있는 사실이 있다. ‘동생’이 아닌, 어디까지나 타인에게 감정을 품을 수 있는 하나의 존재로서 보이고 싶지 않은 점이었다. 알아서 고해바치기엔, 시온의 두려움이 너무도 컸기 때문에 태환의 약속만으로도 쉽게 물러나기로 했다.
태환이 시온의 귓바퀴 사이로 바람을 불어 넣었다. 좋으냐고 묻는 대신 장난을 치는 거였다. 자신에게만 해주는 특별 취급 중의 하나였다. 시온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맞닿은 손을 보자마자 왠지 울컥 눈시울이 붉어졌다. 새끼손가락을 거느라 덩달아 붙은 약지가 오래도록, 상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