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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121화 (에필로그) (121/124)

에필로그

1화

살면서 고뿔로 이렇게 아파 본 적은 처음이었다. 열이 머리끝까지 차올라서 생각을 하기 힘들었고 몸을 가누기는 더욱 힘들었다. 약에 수면초를 섞었다더니 졸음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뺨과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주는 손길이 이어졌다. 그 감각이 포근하고 좋았다.

‘금방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틀림없는 해월의 목소리였다.

가지 말라고, 내 곁에 있어 달라고 아이처럼 애원하고 싶은 욕구가 불쑥 치밀었다. 하지만 이내 의식이 완전히 끊기며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 아득한 몽계에서 연진은 바다의 모래사장 위에 서 있었다. 발바닥을 부드럽게 감싸는 모래와 파도치는 바다를 번갈아 보던 연진은 밀려오는 물살에 발을 담그고 있는 해월을 발견했다.

‘사부.’

문득 연진은 해월이 또다시 저곳으로 빠질 것 같다고 생각이 들어 겁이 났다.

쏴아아-

물살의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생생해서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우리는 봄의 바다에 온 것인가.

그렇구나, 이곳이 진정 바다로구나. 눈앞에 펼쳐진 광경도, 귓가에 들리는 소리도. 책에서 본 것과 무엇하나 다르지 않았다.

‘거기서 무얼 하십니까.’

‘그냥, 발 담가보고 싶어서. 시원하고 좋다.’

‘그리 좋습니까.’

자신도 발을 담가볼까 하여 발을 걷어붙이자 해월이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넌 들어오지 마.’

‘예?’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연진은 그렇게 말하는 해월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해월은 우뚝 서 있는 그를 뒤로 한 채 더 깊은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닷물의 수위가 순식간에 해월의 허리를 넘고 턱 아래까지 다다랐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 연진이 소리쳤다.

‘사부! 위험합니다. 그만 나오세요.’

그러나 해월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나아가기만 했다. 연진은 얼른 달려가서 해월을 붙잡으려 하였으나 어째서인지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바닥에 묶인 듯 옴짝달싹할 수 없어서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해월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소리치고 애원해도 해월은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연진은 번뜩 눈을 떴다.

“허억!”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반쯤 일으킨 연진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고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흉몽은 그저 흉몽에 불과할 텐데 어쩐지 온몸에 흐르는 불길한 감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연진은 이마를 짚은 채 한참 동안이나 숨을 골라야만 했다.

가까스레 진정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저는 홀로 방에 누워 있었다.

잠들기 직전에 들었던 해월의 음성은 흉몽의 일부가 아니라 사실이었던가. 설마 해월은 홀로 단곡에 간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잠자코 기다릴 수가 없었다.

해월 본인은 잘 알지 못하겠지만 그는 상태가 좋지 못했다. 밤마다 숨이 막히는 듯 목을 긁기도 했고 실제로 몇 번은 정말 숨을 쉬지 않아서 호흡을 나눠 줘야만 했다.

걱정이 되었지만 본인이 내색하고 싶어 하지 않은 것 같아서 모른 척해 주었다.

단곡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모르는 일인데 그런 몸 상태인 해월을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황급히 밖으로 나섰는데 연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거의 무릎까지 쌓여 있는 소복한 눈이었다. 오싹한 것은 눈은 지금도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한평생 이렇게 눈이 많이 쌓여 있는 것은 처음 보았다. 어쩐지 객주가 나가는 것을 말리더라니.

새삼 제가 살던 곳이 얼마나 온화한 땅이었는지 실감하게 되었다.

가끔 해월이 도련님이라고 놀릴 때는 싫었지만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 세상은 너무도 좁았고, 제가 모르는 세상은 이토록 다양했다.

“…….”

새하얗게 뒤덮인 세상을 잠시 멍하니 보고 있던 연진은 폐부를 찌르는 차가운 공기에 흠칫 놀랐다. 그야말로 살을 에는 듯한 추위였다.

맹렬한 추위는 한 사람에 대한 생각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추위에 약한 몸인데….’

이런 날에 해월이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니 어떻게든 그를 잡아다가 따뜻한 곳에 데려다주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연진은 어떻게든 눈밭을 헤쳐나가며 나루터까지 다다랐다. 하지만 힘들게 당도한 그곳에서 연진을 반기는 것은 온통 얼어 새하얀 눈옷을 입은 강물과 빈 나룻배들뿐이었다.

텅 비어 있다시피 한 그곳에서 뱃사공으로 보이는 사람을 발견한 연진은 다급히 물었다.

“지금 배를 띄울 수 없습니까.”

“뭐여?”

뱃사공은 간절하게 물어오는 연진과 얼어붙은 강물을 번갈아 보며 별 이상한 사람을 다 본다는 표정을 지었다.

“강물이 전부 얼어 배를 띄울 수 없소. 거 눈 달렸으면 보이지 않소. 나도 배에 있는 짐 나르러 온 거지 띄우려 온 게 아니라오.”

“허면 대체 언제부터 배를 띄울 수 있습니까.”

“강물이 언제 녹을지는 나도 모르지. 내가 무슨 천지신명도 아니고. 괜히 여기 나와 있다가 폐병 얻지 말고 얼른 안으로 들어가시오. 갑자기 난풍이 불지 않는 한 적어도 이레는 배를 못 띄울 테니.”

뱃사공의 말에 연진의 얼굴은 실망으로 무너졌다. 마음이 급해진 연진은 얼어붙은 강물을 횡단해서라도 단곡으로 갈 생각으로 발을 딛었다. 그러자 뱃사공이 다급히 연진을 붙잡았다.

“어어! 무슨 급한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죽고 싶지 않으면 멈추시오! 이 강물이 겉보기에는 꽝꽝 얼어 있어도 모든 곳이 그렇게 얼어 있는 건 아니라오. 잘못 디뎠다간 빙판이 깨질지 모르오. 이런 날씨에 강물에 빠지면 온몸이 수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한 격통 때문에 잠겨 죽기 전에 아파서 죽소.”

“상관없습니다.”

“아이! 이 사람이 진짜! 생긴 건 멀쩡한데 대체 왜 이리 막무가내요! 지금 가면 죽는다니까!”

한바탕 난리가 이어지자 급기야 조금 멀찍이서 짐을 옮기던 다른 뱃사공도 합심해서 연진을 말렸다.

결국 연진은 이성을 되찾고 강물을 건너기를 포기했다. 뱃사공은 무슨 사정인지 몰라도 다급해 보이는 연진이 딱하게 느껴져 강물이 녹으면 바로 배를 띄워줄 것을 약조했다.

연진은 피가 바짝 마르는 듯 하루하루를 지새며 강물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렇게 이레가 지났다.

기적적으로 날이 풀리고 강을 점령했던 얼음판이 살얼음으로 변했다. 여전히 날은 추웠고 이따금 눈도 내렸지만 어쨌든 전만큼 위력적인 추위는 아니었다.

뱃사공은 아직 얼음이 전부 녹지 않은 강물에 노를 젓는 것이 못내 탐탁지 않았지만 삯을 두둑이 얹어 주는 연진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

그렇게 강을 넘고, 산을 넘는 동안 연진은 꽤나 고역을 치렀다. 분명히 외웠다고 생각한 길인데도 혼자서 찾아가려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어딜 보아도 새하얗게 덮여 있는 세상은 그를 헤매게 만들었다.

해월이 같이 있었더라면 무언가 달랐을까. 그는 길눈이 밝았으니 이런 눈 따위에 굴하지 않았겠지. 아니다. 해월은 눈을 좋아한다 했으니 눈 장난을 치다가 오히려 헤맸을 수도 있겠다.

그런 허튼 생각을 하면서 겨우 단곡의 어귀를 찾아냈다. 연진의 눈동자에 미약한 이채가 감돌았다. 이곳에는 분명 해월이 있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기다리지는 못했으니 그것에 대해 해월에게 혼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잔소리는 얼마든지 들어도 좋았다. 애초에 같이 가기로 한 것을 해월이 저를 속이고 혼자 가 버린 것이 아닌가. 순서로 따지자면 그가 먼저 잘못한 셈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저 제 눈앞에 해월이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것 외에 다른 무엇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연진은 발이 푹푹 빠지는 눈밭에도 굴하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코끝에 이상한 탄내가 느껴졌다. 영 좋지 않은 낌새였다.

조금 더 길을 들어가자 터무니없는 광경이 연진의 앞에 펼쳐졌다.

관원들과 평민들로 보이는 이들이 들것으로 시신을 옮기고 그것들을 태우고 있었다. 코를 찌르던 탄내는 시신을 태우는 냄새였던 거다.

연진은 지나는 사람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이곳, 이곳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예? 아… 전 그냥 동원된 것뿐이라 잘은 모르지만 이 마을 사람들이 며칠 전에 도적 떼한테 당해 다 죽었답니다. 역병이 돌지 모르니 시신이랑 집채를 전부 태우라고….”

“…….”

도적 떼라니. 이 척박한 산골 마을까지 도적 떼가 쳐들어올 가능성도 낮았지만,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해월이 그걸 가만두었을 리 없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해월이 단곡에 왔을 때는 이미 일이 벌어진 뒤였겠지. 이곳에서 상황을 수습하느라 귀환이 늦었나 보다.

얼어붙은 강물을 보며 연진은 그렇게 생각해 왔다. 제가 가지 못하듯, 해월도 오지 못하는 것이라고. 그렇기에 엇갈리기 전에 제가 최대한 빨리 가서 해월을 만나야겠다고 여겼다.

연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무의미하게 중얼거렸다.

“어딘가에 있을 것이야… 분명히 있을 거야….”

숨이 턱 끝에 걸려 있는 것 같았고 기묘한 갈증이 일었다. 그것이 불안감이라는 것을 연진은 외면했다.

그리고 해월을 찾아 헤맸다.

“사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소리에 현장을 수습하던 다른 인부들의 시선이 연진에게로 꽂혔지만, 그 시선들 중 해월의 것은 없었다.

연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소리쳤다.

“나와 보십시오…!”

조금 전보다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진의 표정은 점점 더 일그러졌다.

“화, 안 낼 겁니다. 이제 아무것도 타이르지 않을게요.”

들어주는 이 하나 없는 혼잣말이 이어졌다.

“그러니 그만 나와 보세요.”

아무리 말해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제발….”

연진의 무릎이 꺾이고 이내 절망이 온몸을 잠식해 갔다.

‘죽었을 리가 없어.’

아직 어딘가에 있는데 미련한 자신이 못 찾는 것이겠지. 아니면 해월이 평소에 자주 하는 짓궂은 장난 중 하나일 거다.

어디선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나타나 또 저를 놀릴 것이 뻔했다.

‘나 죽은 줄 알고 놀랐구나! 어이구 우리 도련님 많이 놀라셨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정말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저를 이렇게 겁먹게 했으니 그 정도쯤은 감당해야 함이 옳다. 장난에도 정도가 있는 것이니까. 이런 끔찍한 장난은 두 번 다시 봐줄 수 없었다.

제가 무어라 쏘아붙이면 또 입술을 삐쭉이며 살살 제 눈치를 볼 해월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올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정녕 웃지는 못하였다.

‘그렇게 나는 결국 또 웃고….’

당신도 웃으며, 다시 즐겁게….

연진은 감정이 동요하여 영력을 제어하지 못했다. 극도로 발달한 기감이 멀리서 떠들어 대는 사내들의 목소리를 연진의 귓전으로 가져왔다.

“오? 저건 금장식 아니야? 아이 아까워라! 이런 게 있는 줄 알았으면 미리 챙겨 놓을 것을.”

“야! 그래서 내가 무턱대고 태우지 말자고 했잖냐. 찢어지게 가난한 놈들이라도 귀한 것 한두 개는 갖고 있다니까. 저건 다 그을려서 금장식 같지도 않네… 아까워 죽겠군.”

“근데 저건 귀걸이인가?”

“바보냐. 선초잖아 선초. 부채에 다는 거.”

그 소리에 이끌리듯 연진은 귀신처럼 인부들에게 다가섰다.

“뉘, 뉘시오…?”

저승사자 같은 기색으로 다가온 낯선 이를 경계했다. 연진은 그들을 말없이 밀치고 눈앞에 있는 잿더미를 바라보았다. 인부들은 연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압도당해 바닥에 쓰러지고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연진의 텅 빈 눈동자에 시신과 잡동사니를 뒤엉켜 태운 듯한 잿더미가 비춰졌다. 그의 시선은 마침내 잿더미 속에 있는 금장식 선초에 닿았다. 불길에 그을려 본연의 빛은 잃었지만 그럼에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금장식은 해월의 것이었다. 축일에 자신이 해월에게 건네주었던 선초였다.

“…….”

이것이 왜 여기에 있을까. 해월이 항상 품에서 떨어뜨리지 않았을 텐데.

애써 외면해 왔던 불안감이 전신을 찍어 눌렀다. 연진은 털썩 주저앉으며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선초를 손에 쥐었다. 뜨겁게 달구어져 열기가 남아 있는 선초는 손바닥의 살갗을 태웠다.

그럼에도 연진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 선초를 움켜쥔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날 이후, 연진의 손안에는 지워지지 않는 흉이 생겼다.

사별이라는 이름의 낙인이었다.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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