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돌아가는 시간이 억겁 같기도 찰나 같기도 했다.
가장 빠른 배를 탔음에도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 아무리 빨라도 하루 이상은 걸리는 길인 데다가 날도 춥고 바람도 매서워서 걷기조차 쉽지 않았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날씨가 궂어서일까.
배에서 내려 한참을 뛰어가다가 익숙한 집을 발견하고는 곧장 대문을 두들겼다.
단잠을 방해받아 한껏 인상을 구긴 촌장이 나왔다.
“이 밤에 대체 누구… 어? 뭐야 왜 또 왔어?”
“길게 설명할 시간 없어요, 아저씨. 당분간 이 마을 사람들 전부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일러두세요. 흉사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앞뒤 설명도 잘라먹고 밀어붙이듯 말했다.
촌장은 두 눈을 끔뻑이다가 무언가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아시겠죠.”
미약하게 목소리가 떨렸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불안감이었다.
한 사람이라도 주의를 시켜야만 했다.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몸이라도 숨기는 것이 좋았다.
“알겠다.”
“꼭 제 말대로 해 주십시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제 하고픈 말만 늘어놓은 해월은 금방 다시 뛰어갔다.
촌장은 어안이 벙벙하여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곧이어 발걸음을 옮겨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바깥출입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해월은 산을 빠르게 뛰어다니며 자신이 주구를 붙여 두었던 곳을 확인했다.
죄다 타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효력을 잃은 상태였다.
주구가 탔다는 건 강한 사기에 닿았다는 뜻. 그렇다면 강한 요괴의 짓이거나 사기를 다룰 줄 아는 자의 소행이다.
어느 쪽이든 달갑지 않았다.
잔존해 있는 기운에 손을 갖다 댄 것만 해도 손이 저릿할 정도였다.
“우욱.”
가뜩이나 호흡도 얕은데 한참을 뛰어다니는 바람에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해월은 나무를 짚고서 거칠게 숨을 토해 냈다.
벌써 해가 저물고 어둠이 드리워졌다.
저녁이면 요사스러운 힘은 더욱 활개를 치기 마련이다. 지치면 안 된다. 어서 가 봐야 한다.
사악한 기운의 흔적을 따라가니 예상했으면서도 그렇지 않길 바란 곳으로 향하게 되었다.
결국 단곡의 어귀까지 당도했다.
그러다 해월의 걸음이 끊겼다. 정확히는 진창에 빠진 듯이 발을 움직일 수 없었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 온몸을 찌르는 사특한 기운.
무엇 하나 좋은 징조라고 볼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없어.”
작금의 상황을 부정한 해월이 넋이 나간 채로 중얼거렸다. 진정됐던 호흡이 다시 가빠지고 몸이 굳었다.
힘이 빠지려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준 해월이 한 발 한 발걸음을 딛었다.
마을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피비린내가 더 짙어졌다.
그렇게 걷다가 발에 무언가에 걸려서 넘어지고 말았다.
자세를 다시 일으켜 바닥을 내려다본 해월은 눈꺼풀을 깜빡일 수 없었다.
멍한 눈으로 굳어 버렸다.
그를 넘어지게 한 것은 시신이었다.
그리고 그 시신은….
“난향댁….”
푸근한 인상의 난향댁은 비명을 지르다 죽었는지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한순간, 머릿속에서 난향댁이 제게 잘 대해 주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아버지에게 맞아서 거동이 어려워진 해월을 부축해 주고, 약을 발라 주고, 끼니를 챙겨 주고, 여명을 맡아 달라는 부탁까지 흔쾌히 수락했던 난향댁이… 죽었다.
해월은 공허한 시선으로 천천히 난향댁의 뜬 눈을 감겨 주었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본 해월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지옥을 마주했다.
피의 웅덩이가 바다를 만들었다. 그 위에는 사내, 여인, 노인 그리고 아직 어린아이의 시신이 즐비했다.
다행히도 여명의 시신은 없는 것 같다.
그때, 그 시체의 들판에서 작은 움직임을 발견한 해월이 황급히 다가섰다.
“선…가….”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엉망이 된 사내가 보였다.
해월은 치유술을 써 보려 했으나 이내 관두었다. 이미 손쓸 수 없이 절망적인 상태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대답해 주세요!”
“놈들… 그들이, 도, 도적… 소행으로…. 우리를… 아직 저, 기에….”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다. 답답함과 참담함에 해월의 표정은 이미 무너져 내렸다.
“아버지는요! 주술사님은 어디 계십니까!”
“…….”
“제길.”
틀렸다. 이미 숨이 끊어졌다.
아버지는 직접 찾는 수밖에 없다. 살아 계실 거다.
이대로, 이렇게 죽을 리가 없다.
평생을 그의 인정을 바라보고 미련하게 살았는데 그 세월을 이리도 우습게 만들 수는 없었다.
반드시 살아 있어야 했다.
차라리 살아서 이 지옥을 함께 견뎌야 한다.
해월은 실성한 사람처럼 시신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몹시도 익숙한 자의 시신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해월은 그의 시신 앞으로 다가가 털썩 주저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피범벅이 된 그의 손을 잡아 보았다. 차가웠다. 죽은 지 오래된 것일까. 한겨울 공기에 식어 버린 걸까.
“아버지….”
불러 보아도 대답이 없었다. 아, 원래 그는 곧잘 답하는 편이 아니었다. 말없이 쳐다보는 편이었지.
절대로 뜨지 않을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선학경의 모습이 생소했다.
심장이 뛰고 있지 않았다.
정녕 죽은 거다.
이토록 허망하게.
“…하….”
해월은 입술을 짓씹었다. 피가 터져 나왔다.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죽은 것도 모자라 한없이 강인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아버지마저 숨이 꺼져 있다.
이것이 무슨 일인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순식간에 심력이 다한 것 같았다.
“당신이 왜 죽어 있어….”
답을 바란 질문이던가. 모르겠다.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이러는 게 어딨어.”
그가 살아 있길 바라고 한 말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나는….”
당신이 죽길 바랐었다. 내게 고통을 준 만큼 비참하게 죽기를 소원했다.
그것도 모르고 그 세월 동안 방황했었다. 이제는 확실히 알았다.
“죽기를 바랐는데…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어요.”
죽더라도 사과를 받고, 가혹하게 대했던 이유를 묻고 싶었다. 그걸 듣고 나면, 어쩌면 은원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홀가분해진 상태에서 남들처럼 진실하게 웃고, 가슴 시리게 슬퍼하고. 그렇게 살고 싶었다.
…아끼는 제자와 함께.
뒤늦게 오는 깨달음이 해월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해월은 하늘 위를 쳐다보았다. 야속하리만큼 아름다운 밤하늘이었다.
땅 위는 지옥이 되어 있는데 밤하늘은 고고하기만 했다.
그것이 밤하늘의 역할이라면 저는 철저히 더러운 인간이 되어 주겠다.
***
복면을 쓴 자들은 죄다 칼을 차고 있었다. 차림새는 무인과 다를 바 없었다. 체격도 여느 무인과 다르지 않았다. 그중에서 눈에 띄게 귀해 보이는 보검을 찬 자에게 다른 자가 다가서서 소식을 전했다.
“살아 있는 자가 있다고?”
소식을 듣고 적지 않게 놀란 그는 부하에게 되물었다.
이 마을 사람들이라면 한 명도 빠짐없이 찾아 죽이고 있었다. 혹여 살아 있더라도 이 추운 겨울밤을 넘길 수는 없을 것이기에 안심하고 있었거늘.
“모르겠습니다. 놈이 갑자기 나타나서 남아 있던 놈들이 죄다 당했습니다.”
부하의 목소리에서 당황하였음이 짙게 묻어났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부하에게 명했다.
“…그분께는 내가 가 볼 테니 넌 그자를 막아라.”
“예!”
사내는 곧이어 ‘그분’을 찾아 방금 보고 받은 사실을 전해 주었다.
‘그분’은 흥미롭게 입매를 놀리더니 딱 한마디를 내뱉었다.
직접 보고 싶구나.
***
힘없이 잡은 칼이 바닥에 끌려 얇은 길을 만들었다. 그 끝에는 핏방울이 한가득 맺혀 있었다.
해월은 싸늘한 얼굴로 앞으로 나아갔다.
입고 있던 백의는 어느새 홍의가 되어 있었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걸음마다 핏자국이 찍혔다.
“귀, 귀, 귀신이다…!”
해월을 본 자객이 기함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 말에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입가에 건 해월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다들 참 좋은 무기를 쓰시는군요. 들기에는 가볍고 위력은 강하니 살이 아주 잘 발립니다. 근데 날이 금방 무뎌지네요. 그 부분은 아쉽습니다.”
칼날을 슬쩍 확인한 해월이 못내 아쉬움을 토로했다. 칼에 영력을 실었기에 강한 힘을 견디지 못한 칼날이 금세 예리함을 잃었다.
날이 좀 무뎌 있긴 했지만 금방 새것으로 바꾸면 될 일이다.
턱 끝에 흐르는 핏물을 닦았다. 방금 얼굴 쪽에 튀겼던 피는 제 피가 아닌지라 더욱 끈적하게 느껴졌다.
“당신들은 주술을 쓸 줄 모르는 범인이로군요. 그럼 제 주구를 없앤 사람은 누구일까요.”
불쾌감을 느끼고 있는 해월의 앞에 섰던 자객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죽어라!!!”
고함을 치면서 해월에게 달려드는 자객의 움직임이 뚝 하고 멈추었다.
주위에 있던 자들 모두 숨을 죽였다.
순식간에 둘로 나뉘어 버린 그 자객의 몸 중 한쪽에서 칼을 빼낸 해월이 달빛에 비추어 칼날을 확인해 보았다.
“역시 이쪽이 훨씬 상태가 좋네요.”
그 말을 한마디 내뱉은 후, 밤중에 비명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제게 생긴 자상을 확인한 해월이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많은 자객이 있었다.
이자들이 제 마을 사람들을 죽였다. 그러니 저 역시 편히 죽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수적 열세를 당해 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생각에 잠긴 미소를 짓던 해월이 살짝 턱을 수그렸다. 낙심한 태도로 한숨을 쉬었다.
그 뒤, 해월은 제게 생긴 자상의 틈새에 손톱을 욱여넣었다. 손끝에 붉은 선혈이 묻어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가락을 펼쳐 팔을 뻗으며 날리자 날카로운 바늘처럼 변한 핏물은 쓰러져 있던 시신들에 박혔다.
파바박. 목표물에 명중한 소리와 함께 시신들에게 해월의 피가 스며들었다.
해월은 두 손을 합장한 뒤 바닥에 술식을 적어 내리고 양손을 술식 위에 짚은 채 단조롭게 말했다.
“생자의 혈을 바치니, 사병은 부름에 응하라.”
그 말에 축 늘어져 있던 시신들이 비척거리며 기괴한 자세를 하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괴상한 광경을 목도한 자객들의 눈이 공포로 물들었다.
“가라.”
이내 명이 떨어졌다.
“으아아!”
악을 쓰며 달려오는 병사 하나를 가볍게 피한 해월은 병사의 이마에 피 묻은 손을 가볍게 찍었다.
피의 낙인이 찍힌 병사의 이마에 살(殺)이란 글자가 생겨났다. 해월이 허공을 움켜쥐듯 손을 비틀자 병사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이내 그 병사의 머리가 기이하게 꺾이더니 묵직한 것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아악!!”
이내 머리를 잃은 병사의 남은 목덜미에서 피가 폭포수처럼 솟아올랐다. 해월은 피의 비를 맞으며 싸늘한 눈으로 정면을 주시했다.
그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주위를 아까와 같은 자객들이 지키고 있었다.
눈앞이 핏물로 물들어 자세히 분별할 수가 없었다.
“재밌는 힘을 쓰는구나.”
그자가 먼저 한마디를 내뱉었다. 사내인지 여인인지, 귀신인지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다만 그가 들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 상황이 진정 재밌는 것 같았다.
해월은 차게 식어 버린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너로구나.”
저자가 이 일을 꾸민 자다. 그런 확신이 섰다.
“왜. 이런 일을 벌인 거지.”
묻는 말에 대답해 줄 거란 기대는 애초부터 갖고 있지 않았다.
예상한 대로 그는 답이 없었다.
“…그럼 죽어야지.”
나지막한 목소리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