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설귀-118화 (118/124)

118화

송 행수에게 영력을 담아 힘을 넘겨주었던 것과 비슷하게, 힘을 담은 주구를 마을에서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진 곳에 붙여 놓았다.

그것들은 사특한 기운을 감지하면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는 정화가 가능하다. 혹은 힘을 불어넣은 주술의 시전자에게 일종의 신호가 전달된다.

아까 전에 느낀, 머리가 얇고 긴 바늘에 관통당하는 것만 같았던 짧은 두통. 그 때문에 순간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웬만큼 사악한 존재들은 접근도 할 수 없을 거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감각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지금, 단곡은 위험하다.

한데 위험하다고 해서 무어가 달라지나.

저는 이미 떠났다. 아마 지금쯤이면 마을 사람들도 제가 떠난 것을 알 것이다. 이전처럼 그저 출타한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느껴지는 불안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는 예삿일이 아니다.

무언가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본능적인 두려움이 일었다.

불안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것이 해월을 더욱 불안하게 했다.

유년을 보냈던 고향이 어찌 된다고 하여 더는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아버지도… 계시니까. 문제 될 것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안심하고 싶었지만 선학경은 다리를 저는 데다가 이제는 나이가 들었다.

세월 앞에 장사는 없다. 여전히 그 나이와 비슷한 사내들보다는 당연히 더 풍채 좋고 기개가 좋지만, 과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니 같은 위험이더라도 예전과는 다르게 막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해월은 가끔씩 제자로 받아 달라고 하는 사람들을 모두 거절했다. 그리고 그건 선학경도 마찬가지였다.

고로 그곳에서 영력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은 저와 선학경뿐이다.

‘내가 신경 쓸 이유 없어.’

해월은 살을 파고들 기세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가 이내 힘을 풀었다.

‘이래서야 떠난 것도 아닌 것 같잖아.’

자조적인 생각이 들었다. 몸은 떠나 있어도 그쪽으로 신경을 기울이고 있으니 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걱정이 되고, 마음에 걸린다.

특히 여명을 머릿속에서 지워 낼 수가 없다.

그간 출타를 하면서 여명에 대해 걱정하거나 기대한 적 없다. 건강하게 지내려나 혹은 많이 자랐으려나 같은 아이에게 흔히 하는 생각들 말이다.

제가 지켜야 하는 다른 마을 사람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많이 달랐던 걸까.

“하아….”

상념에 빠져 있던 탓에 무슨 정신으로 약재를 사 왔는지 모르겠다.

확인해 보니 다행히도 알맞게 사 오긴 했다.

속내가 혼란스럽게 되자 겉 표정은 오히려 싸늘하게 변모했다.

젠장.

‘고민하지 마. 생각하지 말자.’

그렇게 되뇌면서도 한편으로는 소리가 들렸다. 마물이 나타나서 마을 사람들… 그리고 여명이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해월은 괴롭게 눈살을 찌푸리며 귀를 막았다.

넋을 놓은 채로 객잔에 돌아가니, 연진은 저를 보자마자 우려를 내비쳤다.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약은 저보다 사부께서 드셔야겠는데요.”

“…찬바람 쐐서 그래.”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귀신같은 놈. 한 번을 그냥 안 넘어간다.

결국 해월은 연진에게 실토했다. 단곡에 무슨 일이 생겼거나 혹은 생길지도 모른다고.

“허면… 어찌하고 싶으십니까.”

“몰라, 모르겠어."

학습된 죄책감인지 진정으로 걱정하는 마음인지. 어느 쪽이든 작금의 상황에서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될까.”

진정 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었지.

무언가 택해야 하는 순간에는 항상 덜 불행할 것 같은 선택지를 골랐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 쪽이 더 불행하고, 어느 쪽이 덜 불행한지 파악되지 않았다.

만일 이대로 무시했다가 정말 큰일이라도 생기면 그것대로 마음이 불편할 것이고, 돌아갔다가는 여전히 얽매여 있는 제 모습에 실망하게 될 거다.

여명 하나만을 데려올까 고민했던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자존심, 오기… 그런 것들의 영향이었다. 그건 해월을 움직이게 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아무리 매를 맞고 힘에 부쳐도 괜찮다고. 독하게 견뎌서 불행하지 않다고 겉으로나마 선언하고 싶었다.

그래, 그랬었다.

새삼 떠나온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이 모양이라는 것이 씁쓸했다.

연진은 해월만큼이나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더니 이내 운을 뗐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최악이었던 적이 많았거든요.”

연진에게는 그런 경험이 있었다. 가장 나은 선택이라 여겼던 것이 최악의 결과를 가져온 적이.

아버지의 죽음이 그러했다.

“제 아버지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병이 나셨다는 걸 알면서도 차마 잊으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아버지를 모욕하는 일이라 생각했으니까요."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미련함으로 치부하고 싶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중에서야 그때 아버지를 있는 힘껏 만류하지 않았다는 걸 후회했습니다.”

숨이 꺼진 아버지를 보고 나서야 자신이 잘못했음을 알았다. 차라리 아이처럼 매달려 울고 불며 제발 건강을 지켜 달라고 할 것을. 그리하지 않은 자신을 원망할 뿐이었다.

“해서 감히 어느 하나를 권해 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

“하오나 사부가 선택하신다면 그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와도 그 선택이 옳았노라고 얘기할 겁니다.”

결과에 상관없이 그 선택을 하기까지의 모든 순간을 존중한다. 해월의 귀에는 연진의 말이 그렇게 들렸다.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시큰해졌다. 어젯밤보다 더 속이 아픈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었다.

그 감각이 등을 떠미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해월은 결정을 마쳤다.

어느 선택이든 옳았다고 얘기해 줄 사람이 곁에 있으므로. 이상 두려워할 것도 없었다.

***

“콜록,콜록.”

“약 안 사 왔으면 큰일 날 뻔했네. 괜찮아?”

열이 끓다 못해 이제는 기침까지 하는 연진의 등을 천천히 토닥여주었다.

“저는… 콜록! 괜찮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단곡으로 가야 하지 않습니까.”

“기침부터 멈추고 말해라.”

해월은 미안한 마음에 괜히 핀잔을 주었다.

연진에게 제 결정을 들려주고 난 다음에 연진은 곧바로 답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로 그런 말을 들으니 제 마음까지 차분해졌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가볍게 생각하자. 확인만 하고 오면 되는 거다. 기시감의 근원만 확인하고 나면 저도 오히려 마음을 놓아 편안해질 것이다.

‘괜찮을 거야.’

각종 약재를 갈아 만든 것을 따뜻한 물에 탄 뒤 해월은 연진을 부축하여 반쯤 일으켰다.

“이거 마셔. 맛은 없겠지만 효과는 보증할게. 뭣하면 객주한테 부탁해서 단 거라도 갖고 올까?”

“쓴 거 잘 먹습니다.”

“그럼 잘됐네. 어서 마셔.”

연진은 해월이 내민 잔을 입가에 갖다 댔다.

아무리 쓴 것을 잘 마셔도 견디기 힘든 맛인지 연진의 미간이 조금 좁혀졌다.

해월은 자신이 마시는 것처럼 오만상을 쓰며 지켜보았다.

“으으….”

“누가 보면 사부가 마신 줄 알겠습니다.”

그릇을 내려놓은 연진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치만… 저거 진짜 맛없는 약들인데 용케도 마시네.”

“몸에 좋은 건 입에 쓴 법이니까요.”

연진이 어른스레 말했다.

따지고 보면 어른은 제 쪽인데 면이 서지 않아 민망해진 해월은 그를 도로 눕혔다.

“수면초도 섞었으니 금세 잠이 올 거야. 한숨 자고 일어나면 다 나았을 테니 걱정 말고.”

“제가 잠들면 사부는요…?”

해월의 손등 위로 큰 손이 덮어졌다. 해월은 그 손을 다른 손으로 매만지며 그를 안심시키려 했다.

작금의 연진의 모습은 꼭 아플 때 부모를 찾는 아이 같아서 괜스레 마음이 울렁였다.

“나는 너 지켜봐야지.”

“그렇게 앉아 있다간 몸 상합니다. 이리 와요.”

연진은 순식간에 해월을 끌어당겨 제 품 안에 가두었다.

얼떨결에 그의 품에 안겨 눕게 된 해월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야 이거 안 놔?”

그의 단단한 가슴팍을 손으로 밀어 보았지만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온도가 꽤나 뜨거운지라 괜히 더워지는 기분만 들었다.

“제가 원래 잘 때 뭘 안고 자야 합니다.”

“거짓말 마. 넌 시신처럼 정자세로 자잖아.”

해월의 지적에 연진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나 참.”

연진이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해서 피식 웃고는 그의 등허리를 토닥여 주었다.

“푹 자.”

연진은 저를 토닥이는 손길이 좋은지 입가에 호선을 띄우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 실은, 내일….”

“내일 뭐?”

“…내일… 제….”

무어라 중얼거리다가 졸리웠는지 입술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잠시 뒤, 규칙적인 숨결이 해월의 머리 위로 내려왔다. 슬쩍 눈알을 굴려 자고 있는 연진을 확인한 해월은 낑낑대며 저를 감싸고 있는 그의 팔을 떼어 내려 애썼다.

한참이 지나서야 해월은 연진의 품을 겨우 벗어났다.

‘무거워.’

혹시라도 추울까 봐 이불을 목덜미까지 끌어올려 둔 해월은 고개만 빼꼼 나와 있는 연진을 보고 작게 웃었다.

“귀엽네.”

평소의 연진은 차가운 얼굴에 딱딱한 표정만 지어서 다가가기 어려운 느낌이었지만 자는 모습은 인상이 꽤 순해 보여서 귀여웠다.

연진이 들었다면 역정을 낼 소리였다. 해월은 황당한 표정을 지을 연진이 상상되어 살풋 웃었다.

그때, 해월의 얼굴에 띄워진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얼른 가 봐야겠어.’

아까 전을 첫 시작으로 기시감이 줄곧 느껴졌다.

무언가가 아니면 누군가가 주구를 건드렸다는 감각이 계속해서 전해졌다.

필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해월은 곤히 잠든 연진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연진이 회복되길 기다릴 수는 없었다.

‘같이 갈 것입니다.’

‘너 아프잖아. 나 혼자 다녀와도 돼.’

‘억지라는 것을 알아요. 그렇대도 혼자 보내드리기가 불안합니다.’

‘…그래, 알았어. 대신 약 먹고 푹 자고 일어나면 그때 가자.’

‘정말이죠…?’

‘속고만 살았냐. 약조할게.’

‘예. 믿겠습니다.’

같이 가기로 약조해 놓고 딴마음을 품은 것 같아 미안하긴 하지만 나중에 혼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미안함을 담아 연진의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손끝에 닿는 피부 결이 감촉이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금방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귓가에 속삭이듯 짧게 작별 인사를 전한 해월은 곧장 나룻터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