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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117화 (117/124)

117화

저녁노을이 지는 것을 바라보며 해월은 많은 생각을 했다.

문득, 저 타오르는 적색 빛의 하늘만큼이나 데일 듯이 뜨거웠던 연진의 이마를 떠올리고 시름이 배가 되었다.

치유술로는 열병을 낫게 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주로 외상을 치료할 때 효력이 도드라지는 술법이니까.

게다가 연진이 곧 죽어도 하지 말라는 듯이 으름장을 늘어놓는 바람에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최선을 다해 간병하고 있으니 금방 나을 것 같다가도 여전히 열이 높아서 걱정이 덜어지지 않았다.

객주에게 부탁하여 미음을 가져온 해월이 조심스레 연진의 어깨를 건드렸다.

그러자 짙은 눈매가 스르륵 올라갔다. 열 때문에 항상 올곧고 선명했던 두 눈동자가 조금 흐릿해 보였다.

“미음을 내왔어. 좀 먹고 자.”

“…….”

연진은 정확히 ‘가져온 성의를 봐서 먹기는 해야겠는데 입맛이 없다.’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가 이토록 또렷하게 제 감정을 겉으로 드러낸 적은 거의 처음이었다.

감정에 따라 표정이 쉬이 바뀌는 딱 그 나이 때처럼 보였다. 이전까지는 청년에 가깝게 느껴졌는데 이제 보니 소년에 더 가까워 보였다.

“먹기 힘들어도 딱 세 숟갈만 먹어.”

“…예….”

연진이 힘없이 동의했다. 해월은 연진이 몸을 일으키는 것을 도와주었다.

“자, 아 해 봐.”

미음 한 숟갈을 떠서 건네자 연진이 흠칫했다.

“…제가 먹겠습니다.”

“어허. 이럴 때 아니면 네가 언제 응석 부릴 수 있겠냐. 받아 주는 사람 있을 때 응석도 부려 보는 거야.”

해월도 응석다운 응석을 부려 본 적이 없었다. 아마 연진도 그렇겠지.

그러니 연진에게는 제가 응석받이 노릇을 해 주어도 될 것 같다.

응석을 부리지 못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앞으로도 그럴 사람은 없으니 받아 주는 역할이라도 해 보려는 요량이랄까.

연진은 한참을 머뭇거렸다.

“나 팔 떨어져. 얼른 먹어.”

해월이 재촉하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옳지. 잘 먹는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하나 주는 대로 잘 먹는 연진을 보며 해월은 묘한 뿌듯함을 느꼈다. 남을 직접 먹이는 일이 이토록 즐거운 감정을 주는 일인 줄 알았더라면 예전에 더 해 볼 걸 그랬다.

‘여명이가 한참 어릴 때라든가 … 아.’

저도 모르게 생각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해월이 멈칫거렸다.

“…사부…?”

“아무것도 아니야. 왜? 더 줄까?”

“아닙니다.”

“그래 그럼. 그만 먹어.”

선선히 대답한 해월은 곧장 남은 미음을 수저로 떠서 제 입으로 가져갔다.

그에 연진은 조금 놀란 듯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그걸… 왜 사부가 드십니까.”

“너만 입이냐? 나도 먹어야 살지.”

“아니….”

무언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머리가 아픈지 연진은 이마를 짚고 잠시간 신음을 삼켰다.

해월은 걸쭉한 미음을 꿀떡 삼키며 연진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연진은 전혀 괜찮지 않은 표정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묘하게 아쉬운 듯한 기분도 읽혔다.

“무슨 문제 있어?”

“……그게 …문득 …오늘이 지나면 해가 바뀔 텐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아 난 또 뭐라고.”

해가 바뀌는 건 해월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그저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것뿐이지. 솔직히 이제 해가 바뀐다는 사실도 방금 연진이 말한 덕에 인식했다.

연진은 새해를 맞이하는 특별한 것을 하지 못한 게 아쉬운 걸까.

안 그렇게 생겨 가지고는 의외로 그런 것을 챙기나 보다.

인식하고 나니 바깥에서 새해를 맞이한다며 분주한 소리가 들려왔다. 정녕 해가 바뀌긴 하는구나 싶었다.

“근데 얘가 계속 열이 안 떨어지더라니 되레 오른 거 아니야?”

사뭇 심각해진 해월은 그릇을 내려놓고 이리저리 연진의 뺨을 매만져 보며 온도를 가늠해 보았다.

“진짜 뜨거운데. 어떡하지.”

“별것 아닙니다. 그저…… 따뜻한 음식을 먹어서 그런 겁니다.”

얄팍한 변명이었지만 해월은 손쉽게 넘어갔다.

“그런가.”

잠시 갸웃거리다가 이내 먹는 일에 집중했다.

연진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혹 고뿔이 옮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연진이 나직이 타박하듯 물었다. 해월이 줄곧 제 곁을 지키는 것은 당연히 좋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주의해질 수는 없었다.

사실 그간 이미 실컷 부주의를 가장하여 제 욕심을 채웠다. 뒤늦게 양심에 찔리는 까닭으로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괜찮아. 영력을 깨친 자들은 그런 거 잘 안 옮거든.”

“하오나….”

그걸 알고는 있었으나 그럼에도 걱정되는 게 연진의 마음이었다.

복잡해진 연진과 달리 해월은 명료하게 말했다.

“근데 이거 진짜 싱겁다. 아무 맛도 안 나. 너 이거 어떻게 먹었냐?”

“원래 미음은 싱거워야 정상입니다.”

해월은 숟가락을 놀리며 미음을 이리저리 휘젓고 떠 보다가 이내 후루룩 한 번에 그릇을 비웠다. 맛없는 것은 한 번에 해치우자는 전략이었다.

쓰고 건강한 음식을 먹었을 때와 비슷하게 표정이 뚱해진 해월이 탁, 그릇을 내려놓았다.

“자, 그럼 우리 도련님은 도로 주무십시오.”

도련님 호칭에 반박할 기운이 없는 연진은 잠시 해월을 째려보다가 순순히 자리에 누웠다.

이불을 턱 밑까지 덮어 준 해월이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너 이러고 있으니까 애기 같은데? 아니다. 애기 치고는 너무 큰 것 같아.”

“…….”

“…그렇게 노려보지 마라. 열 더 오를라.”

해월은 괜히 이불 주름을 펴 주며 말을 돌렸다. 그 손을 연진이 슬며시 붙잡았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결정은… 하셨습니까.”

연진은 해월에게 돌아가서 여명이를 데리고 오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 사리사욕의 목적 없이. 그저 해월의 본심을 꿰뚫고 있어서 할 수 있는 설득이었다.

“아니… 아직.”

애석하게도 해월은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왜. 좀 미련한가?”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열로 의식이 흐릴 텐데도 그 말만큼은 똑바로 했다.

‘진짜… 자기 할 말은 기어이 하고 말지.’

연진은 아마 전생에 바른말을 해 대다가 아깝게 목숨을 잃은 망국의 충신이 아니었을까. 이 정도면 진지하게 그리 생각된다.

나중에 저 성정 때문에 피해 보는 일만 없길 바란다.

잠깐, 바란다라….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난 해월이 손뼉을 쳤다.

“너 글 읽을 힘은 있지?”

“있습니다만…?”

의아함을 품은 긍정의 대답에 씨익 미소 지은 해월이 어디론가 쏜살같이 가더니 돌아올 때도 쏜살같이 종이와 먹 그리고 붓을 들고 왔다.

그리고 일필휘지로 글자를 써 내려갔다.

“자, 읽어 봐.”

연진은 제 앞으로 들이 밀어진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흰 종이 위에 퍼진 검은 먹은 이러한 글자를 나타내고 있었다.

[福生於無爲患生於多慾]

“많은 욕심을 가지는 것이 곧 재화의 근본이 된다….”

“어때.”

의기양양한 투로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그저 평범했다.

“이게 뭡니까.”

“뭐냐니. 새해에 뭐 특별한 거 안 하는 게 마음에 걸린다며. 어른한테 좋은 글귀를 받는 것도 나름 새해 의례 중에 하나잖아.”

“…….”

욕심을 채우고 재화를 좇아야 한다는 내용의 글귀가 대체 어느 부분에서 새해의 정취에 걸맞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연진은 그대로 해월이 들고 있던 붓을 빼앗아 그 밑에 글을 적었다.

[經師易求人師難得]

“…….”

해월은 그 글을 읽어 내렸다.

‘글을 읽는 스승을 구하기는 쉬우나 인격이 뛰어나고 어진 스승은 얻는 것은 어렵다….’

“제가 전해 드리고 싶은 문장입니다.”

“난 글을 읽는 스승이냐. 인격 좋고 어진 스승이냐.”

속이 일렁여서 괜스레 장난기를 섞어서 묻자 대답이 바로 떨어졌다.

“둘 다요.”

“싱겁기는. 하나만 해라 하나만.”

“욕심을 많이 가지라면서요.”

“…….”

말려들었다. 하는 수 없이 해월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만 자. 나도 잘 거니까.”

반쯤 강제로 연진을 드러눕혔다.

실은 해월이 연진의 미음을 먹은 이유가 있었다.

속이 아파서 그나마 먹을 만한 게 무른 음식이었다. 마침 연진이 미음을 남겼으니 겸사겸사 먹은 거다.

연진의 앞에서는 태연하게 굴었지만 평소보다 속이 더 아팠다. 얼른 잠으로 도피하고 싶었다.

잘 정돈되어 있는 이부자리 위로 아무렇게나 몸을 뉘인 해월은 두 눈을 꾹 감았다.

서둘러 잠이 저의 의식을 빼앗길 바라며.

***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 모르겠다.

꿈인가. 현실인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숨이 갑갑했다.

눈을 떴다가는 아예 잠이 깨 버려 더 괴로워질 것 같아서 해월은 고집스럽게 눈을 감았다.

“으으….”

볼썽사나운 신음이 새는 것도 느끼지 못할 만큼 아팠다. 아무래도 귓속이 부은 것 같다. 몸이 안 좋을 때 종종 그랬다.

가슴속이 천 개의 바늘에 꿰뚫리는 것처럼 따갑고 고통스러웠다.

고통에 지쳐서 수마가 밀려오면, 그 고통 때문에 다시 수마가 물러간다.

끔찍한 반복이었다.

벌을 받는 건가. 그동안의 모든 과오의 대가를 치르는 모양이다. 그런 것치고는 싼값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컥, 헉….”

숨을 쉬기가 답답해서 호흡을 고르게 해 보려 했으나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간헐적으로 목소리가 들렸다. 물속에 빠진 사람이 바깥소리를 듣는 것처럼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젠장, 열은 없는데….’

누구야.

‘숨을 편히.’

누군데 나한테 그래.

아니. 사람이긴 한 건가.

…아파. 숨을 못 쉬겠어. 어떻게든 해 줘.

해월은 두 손을 허공에 내저었다. 이윽고 단단한 손이 제 손을 맞잡았다.

입술 위로 포근한 숨결이 느껴졌다. 이내 그 숨결이 제 안으로 들어왔다.

이전보다 숨을 쉬는 것이 한결 나아졌다. 안도하는 동시에 제게 숨을 주던 무언가가 멀어졌다. 못내 아쉬워서 아무렇게나 손을 뻗었다가 무언가를 긁고 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눈앞이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저것이 사람인가. 아니면 못난 제 분신인가.

생각하기도 지쳐서 곧바로 눈을 다시 감았다.

수마가 의식을 점령했다.

다음 날, 해월은 아침 내내 자못 심각한 얼굴이 되어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뜯거나 한 것은 아니고 정말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흐음….”

“…왜 그러십니까.”

여전히 상태가 별로인 연진이 도리어 해월을 걱정할 정도였다.

“진아 혹시 말야… 아니, 아니다.”

짚이는 구석을 말해 보려다가 문장을 말하기도 전에 관두었다.

“몸은 좀 어때.”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그래, 나쁘구나.”

가볍게 무시당한 연진은 해야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해월은 제 이마에 손을 얹고, 다른 손은 연진의 이마를 짚어 보며 대충 체온을 확인했다.

연진의 열은 떨어질 기미가 안 보였다. 오한도 있는지 제법 따뜻한 방인데도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워낙에 건강했던 연진이라 고뿔도 금방 털어 낼 줄 알았는데 확실히 물벼락과 한겨울의 위력이 강하긴 한 모양이다.

보통 건강했던 사람이 이리 크게 앓는 데는 이유가 있는데….

“너 혹시 뭐 걱정거리라도 있어?”

마음이 안 좋아지면 몸도 쉽게 약해진다. 평소라면 가볍게 지나갈 열병도 무겁게 앓을 수 있다.

“걱정 없는 사람이 어딨겠습니까.”

“하긴 그렇네.”

여상한 대화가 오고 갔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약을 지어 먹는 게 낫겠어.”

생각보다 더 회복이 더딘 바람에 서둘러 약을 먹이는 것이 좋을 듯했다.

“약이요?”

“네 체질에 딱 맞게 약 구해 올 테니까 쉬고 있어라.”

해월은 부러 강조하듯이 연진의 앞에서 겉옷을 두어 번 팔랑거린 후 입었다.

“그럼 갔다 올….”

갑자기 해월이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눈가를 손으로 짚고 벽에 몸을 기댔다.

“사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연진이 다가가려던 찰나, 해월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깐 어지럼증이 일어서.”

민망한 웃음을 덧붙이자 연진도 안도한 듯 표정이 풀렸다.

“그럼, 진짜 다녀올게.”

“예, 다녀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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