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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116화 (116/124)
  • 116화

    그의 사내다운 턱선에 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머리가 멍해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뻑거리자 연진은 잇새를 짓씹더니 돌아서서 물을 버린 아낙에게 쏘아붙였다.

    “사람 뻔히 지나다니는 길에 물을 버리시면 어떡합니까.”

    “아, 아니 내가 무슨 오물을 버린 것도 아니고 그냥 물 좀 버리는데 사람이 튀어나올 줄 알았겠나!”

    “그래도 조심하셨어야죠.”

    기세가 강한 연진을 평범한 아낙이 당해 낼 수 있을까.

    “그, 그거 미안하게 됐네. 이제 되었소? 참 나 별꼴이야.”

    안 받으니만 못한 사과였다. 그 말만 하고 쏙 다시 들어가려는 아낙을 향해 연진이 한 발을 딛자마자 해월이 그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연진은 붙잡힌 제 소매를 보다가 해월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왜 가만히 계셨습니까. 날아오는 화살도 붙잡으시는 분이 물벼락 하나를 못 피하십니까.”

    그러고 곧장 타박이 날아들었다.

    “…나라고 사시사철 예민한 줄 알아. 방심할 수도 있지.”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변명부터 먼저 나갔다.

    “지금이 여름인 줄 아시는 겁니까. 옷이 이게 뭐예요.”

    연진은 해월의 얇은 차림새를 지적하고 있었다.

    “그… 겉옷 입는 걸 깜빡했어.”

    “이 추위에 그걸 깜빡하셨다고요.”

    낮게 읊조리며 잇새에서 흐른 희뿌연 것들이 공기 중으로 흐트러졌다.

    “사람이 좀 깜빡깜빡할 수도 있는 거 아니냐….”

    소심한 항변이었다.

    “겉옷도, 짐도 다 두고 홀로 나가시면 제가 무슨 생각을 할지 정녕 모르셨습니까.”

    “야 나는 그냥 머리도 식힐 겸 산책하려 했던 건데….”

    “누가 산책을 한 시진 동안 합니까!”

    “아이고야….”

    높아진 언성에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지나던 행인들도 그 소리에 놀라 다 그들을 보는 것 같았다.

    연진은 몇 번이나 참는 듯 인상을 찌푸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화를, 내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알아.”

    “정말… 그런 게 아니었어요.”

    괴롭게 들리는 음성에 마음이 무거워진 해월이 연진의 얼굴에 흐르는 물기를 소매로 닦아 주었다.

    “알아. 다 알고 있어.”

    그의 본의가 선의라는 건 처음 만난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너 이러다 고뿔 걸려. 얼른 들어가자.”

    가뜩이나 좀 멀리 나와서 객잔까지의 거리가 상당하다. 한 식경은 넘게 걸어야 한다. 하물며 그들이 가는 길에 찬 바람이 안 불 리가 없지 않은가.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제법 매서워서 해월은 조금이라도 바람을 막아 주려 연진에게 가까이 다가섰으나 연진이 오히려 한 발 떨어졌다.

    “물에 젖는 건 한 명이면 족합니다. 그리고 대답부터 해 주세요.”

    추위 때문에 입술이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마음에 박혔다.

    “앞으로는 제게 말없이 어디 가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연진은 간밤의 언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였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해월의 이부자리는 비어 있었고 겉옷도 다른 짐도 전부 그대로 남은 상태였다.

    가뜩이나 지난번에 꾼 악몽이 아직 생생한데. 어디론가 가 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불안한데.

    그 불안에 부채질을 하는 것처럼 펼쳐진 상황에 무작정 뛰쳐나와 거리를 헤맸다.

    지나는 사람마다 머리칼이 짧은 사내를 보지 못하였느냐고 물어물어 길을 잡아 나갔다. 연진은 제가 낯선 이에게 이렇게 말을 잘 붙일 수 있었는지 처음 알았다.

    그간 그럴 만한 일이 생기면 전부 해월이 대신해 주었기에 몰랐었다.

    그러다 물을 버리려 준비하는 아낙의 앞으로 해월이 지나가려는 것을 보았을 때는 앞뒤 따질 것도 없이 몸부터 나갔다.

    겨울이 되고 나서 해월이 자주 잔기침을 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물벼락까지 맞았다가는 분명 심한 고뿔에 걸릴 게 뻔했다.

    해월은 남들보다 쉬이 앓고 또 오래 아파하니만큼 걱정이 안 될 리가 없었다.

    그리고 물이 닿기 전에 끌어안을 수 있어서 안도했다.

    고개를 내리자 품에 안은 해월의 두 눈동자가 옅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맑은 겨울 하늘 아래에서 보았기 때문일까.

    어두운 청색이라 생각했던 그 눈동자가 영롱한 하늘빛으로 일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겨울에 찬물을 뒤집어써서 다행이었다. 몸속을 깊게 파고드는 추위만 아니었다면 순간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그 불씨를 잠재우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연진은 해월의 답을 바랐다.

    “대답해 주십시오.”

    “알았어. 말없이 어디 안 갈게. 얼른 들어가자 이 풍한에 이러고 계속 있으면 큰일나.”

    해월이 답을 서둘렀다. 얼른 객잔으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저보다 훨씬 건강한 체질인 연진이라 해도 이 추위에 물에 쫄딱 젖은 채로 밖에 있으면 당연히 열병을 얻을 거다.

    마음이 다급한 해월과 달리 연진의 표정은 비교적 평온했다. 얼굴만 보면 이 엄동설한에 물벼락을 맞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지경이다.

    ***

    물에 빠진 생쥐… 라기에는 다소 체격이 좋은 편이지만 어쨌든 물에 젖은 꼴인 연진을 데리고 객잔으로 들어와서 마른 옷으로 갈아입도록 했다.

    덮을 수 있는 건 죄다 꺼내서 마치 요새를 만드는 것처럼 덮어 주었다.

    산더미 같은 옷가지와 이불에 갇혀 버린 연진은 다소 황망하게 눈을 끔뻑였다.

    해월은 연진의 얼굴을 손으로 눌러보듯이 쓸어 주었다.

    “이거 봐. 피부가 너무 차.”

    그다지 높지 않은 저의 체온보다도 손에 닿는 연진의 체온이 훨씬 낮았다.

    “곧 있으면 열 오르겠다….”

    안타까운 예감이 들었다.

    “괜찮, 습니다.”

    중간에 잔기침하는 바람에 짧은 말 한마디조차 끊겨 나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해월이 결국 입을 열었다.

    “이 추운 날에 물벼락 맞았으면 얼른 들어가서 옷 갈아입을 생각을 해야지. 뭣 하러 길에 서서 시간을 빼. 조금이라도 찬 바람을 덜 쐬어야 할 거 아니야. 너 어리고 젊다고 아주 몸이 무쇠인 줄 아냐? 네가 몰라 그렇지 세상에는 고뿔 걸려 죽는 사람도 수두룩이야. 조심해야지. 왜 이리 미련하게 구냐고. 어?”

    씩씩대며 우다다 할 말을 토해 내는 해월을 보며 연진은 얼빠진 사람처럼 그저 멍해졌다. 정확히는 쉴 새 없이 꼬물거리는 입술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겨울에 물벼락 맞고 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건 길 가는 개도 알겠… 야 너 내 말 듣고 있어?”

    어느 순간, 연진이 제 말을 경청하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은 해월이 물었다.

    “…듣고 있습니다.”

    “그게 지금 듣는 사람의 태도야?”

    “송구합니다.”

    연진이 살풋 웃으며 조금 고개를 수그리자 해월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 됐어. 고뿔 걸린 애 두고 내가 뭐 하는 짓이람. 얼른 누워서 쉬기나 해.”

    “어디 가시게요.”

    “주인장한테 물이랑 수건이나 얻으러 가련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예상했던 대로 연진은 열이 올랐다. 그것도 절절 끓는 수준이었다.

    해월의 완강함에 못 이겨 꼼짝없이 자리에 눕게 된 연진은 두 눈을 말짱하게 뜨고 있었다.

    불만스러운 기색이 완연한 채로 연진을 노려보다가 이럴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고개를 내젓기를 반복하던 해월이 침묵을 깨고 운을 뗐다.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겠지만 혹시 만약 같은 일이 생기면 이번처럼 굴지 마. 네 손해니까.”

    “사부께서 화를 면하셨는데 그게 어찌 손해입으니까. 잘된 일이죠.”

    “넌 배알도 없냐.”

    타박하면서도, 해월은 물수건을 다시 시원하게 적셔 이마 위에 올려주었다.

    사실 겨울의 초입부터 연진은 종종 그의 옷을 벗어서 건네주고는 했다. 가뜩이나 추위에 계속 놓여 있었는데 이번에 물벼락을 맞은 게 결정적인 요인이 된 셈이다.

    ‘그러게. 옷 같은 거 안 줘도 된다니까.’

    “그보다…그건 생각해 보셨습니까.”

    “무얼.”

    “여명이 말입니다.”

    잠시 멈칫한 해월은 결국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새벽에는… 네 말이 틀리지 않아서 화가 났어.”

    해월은 여명을 아끼는 것이 맞았다. 데려오고 싶다는 생각도 있다.

    후일 같은 건 개의치 않고 멋대로 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럴 수는 없다.

    제가 없으면 연진이 고스란히 여명을 떠안게 될 텐데. 정직하디 정직한 연진이 요령껏 처신하며 잘 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가문으로 돌아간다면 또 모르는 일이다.

    “근데 넌 여명이랑 별로 친하지도 않으면서 왜 그렇게 챙기냐.”

    “사부가 아끼시니까요.”

    “…나 참….”

    맹목적인 것도 정도가 있어야 하는데. 시름이 더 깊어졌다.

    “설령 다시 돌아가서 여명이를 데려온다 해도, 그렇게 모진 말을 했는데 날 따라와 줄까.”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해서 무엇 하리.

    “…아버지도, 마음에 걸리고.”

    모진 말을 쏟아 내면 인연이 끊길지도 모른다고 여겼는데 이 또한 제 오만이라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한편, 연진은 긴 머뭇거림 끝에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사부.”

    “왜.”

    “실은… 아버님과 둘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뭐? 너랑 아버지랑 대화를 했다고?”

    듣는 쪽은 당연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연진은 특별한 접점이 없었고, 맞닥뜨리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붙어 다녔는데 대체 언제 만나 대화를 나누었단 말인가.

    “여명이가 떼를 써서 사부가 저를 두고 가셨을 때 말입니다."

    그때라면… 분명히 기억난다.

    “그때, 제게 와서 말을 붙였어요.”

    연진은 천천히 사실대로 숨김없이 말을 꺼냈다.

    “뭐라고… 하셨는데…?”

    “그때….”

    여명과 해월이 다른 곳으로 가고 홀로 덩그러니 남자마자 본능적인 위압감을 느껴 뒤를 돌아보니 선학경이 있었다.

    그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저 따라오라는 듯 턱짓을 했고, 연진은 긴장을 놓지 않으며 그를 따랐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선학경이 내놓은 한마디는 이랬다.

    ‘그 눈빛을 보아하니 나를 증오하는군.’

    ‘…….’

    선학경을 보고 난 뒤로 자꾸만 화가 나는 것을 참기 힘들었다. 해월의 양아버지다. 하지만 해월을 학대한 사람이다.

    ‘보고 들은 것이 있는데 사부의 아버님이라 하여 공대할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그 자리에서 그의 멱살을 쥐지 않은 것이 연진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였다.

    명색이 양아버지라면서 어떻게 그리 무도할 수가 있나. 연진은 제 인내력을 시험해야만 했다.

    ‘그럼 잘 알겠군. 내가 백난국 놈들. 특히 귀족을 아주 싫어한다는 걸.’

    ‘압니다.’

    날 서 있는 말이 자연스럽게 오갔다.

    ‘제게 용건이 있으신 것이 아니라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금방이라도 자리를 떠날 기세로 굴자 선학경이 곧장 본론을 꺼냈다.

    ‘저 녀석이 온전히 자의로 다른 사람이랑 있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자네가 처음이야.’

    ‘사부는 여명이란 아이와도, 마을 사람들과도 잘 지내는 듯 보이던데요.’

    연진이 반박하자 선학경은 코웃음을 쳤다.

    ‘그 녀석은 주변 사람한테 관심 없어. 그 모습은 습관에 불과해.”

    시름이 한가득한 목소리가 방안에 퍼졌다.

    ‘내가 그렇게 만든 게지.’

    꼭 해월을 소유물처럼 말하는 것 같아서 안 그래도 불쾌감으로 가라앉았던 기분이 더욱 바닥을 쳤다.

    ‘…들었습니다. 야산에 버려져 있던 사부를 데려와 키우셨다고.’

    요지는 그렇게 데려왔으면 잘 대해줬어야지 어찌 그리 혹독하게 굴었냐는 것이다.

    ‘내 아무리 악에 받쳐 살았다지만 그 꼬맹이를 거기 내버려 둘 정도로 인격을 버린 것도 아니었거든. 역시 난 부모 노릇을 할 인간이 아니었어. 난 항상 그 녀석을 다그치고 엄격하게만 대했지. 이 세상에서 잘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만 가르쳤고.’

    선학경은 백난국이 망하기 전부터 그는 어린 소년들을 훈련하고 훌륭한 주술사로 만드는 것에 총력을 기울이는 일을 했다.

    누군가를 성장시키는 것엔 익숙했지만, 길러내는 데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툴렀고, 서투른 사람이 만나 우연치않게 부자의 연을 맺은 것뿐이다.

    대강의 이야기를 들은 연진은 이전보다 매서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추한 변명이로군요.’

    학대를 합리화할 수 있는 이유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후에도 대화는 이어졌다. 길지도 짧지도 않았지만, 칼날 같은 대화였다.

    대체로 해월에게 백해무익한 내용인지라 부러 전하지 않았다.

    다만, 이대로 계속 숨기는 것은 해월을 속이는 기분이 들어서 더 이상은 함구할 수 없었다.

    괜한 혼란만 전할까 봐 우려했던 것이 기우가 아니었는지 해월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아버지가… 그러셨다고….”

    연진의 예상대로 해월의 머릿속은 온갖 생각이 뒤엉키고 있었다.

    왜 직접 말하지 않고 연진과 대화한 거지? 내가 알면 안 되는 얘기라도 한 건가? 혹 다른 뜻이라도 있나?

    답 없는 물음이 속에서 메아리를 울렸다.

    여전히 해월은 선학경을 전부 알지 못했다.

    피는 안 섞였어도 아버지이고 자식인데 말이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때, 연진이 해월의 손을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

    “마음에 걸리시면 하고픈 대로 하시면 될 일입니다.”

    늦었다. 저는 이미 떠나왔고 일을 저지른 상태였다.

    죄다 엉망이다.

    바란 대로 이루어진 것 하나 없는, 형편없는 작별이었다.

    차마 잇지 않은 뒷말을 아는지. 연진이 열로 아픈 상태이면서도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 읽었던 서책에서… 적절한 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 원하는 때에 대의를 행하라더군요.”

    “…….”

    “사부께서 하시는 선택이 틀릴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셔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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