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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115화 (115/124)
  • 115화

    아침에 일어났을 때, 연진은 돌아누워 있었다.

    같은 방에서 잠을 잘 때면 늘 저를 보는 자세로 누워 있던 그가 등을 보였다는 게 어딘지 야속했다.

    그냥 잠결에 돌아누웠을 수도 있는데도 그런 옹졸한 생각이 들었다.

    자고 있는 건지, 깨어 있는데 단지 누워 있는 건지. 확인하기 두려워서 해월은 그저 매무새를 추슬렀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데도 허기가 지지 않았다.

    입맛을 돋울 만한 단 음식들도 별로 당기지 않았다.

    조심스레 일어난 해월은 밖으로 향했다.

    어디로 훌쩍 떠나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속이 답답해서 찬바람이라도 좀 쐬어야 할 것 같았다.

    얼굴 위로 부서지는 시원하다 못해 시린 바람. 이곳은 몇 해 전에 왔었던 터라 기억은 흐릿하지만 어느 정도 지리는 알았다.

    겨울의 추위에 온기를 잃어 가는 몸을 이끌고 계속해서 걸었다.

    길을 따라 객잔이 즐비한 곳을 지나, 시전이 열리는 곳까지 발길이 닿았다.

    “자자! 여기 아름다운 노리개 한번 보고 가십시오!”

    “방금 갓 쪄낸 꿀떡이 있습니다!”

    상인들은 저마다의 물건을 팔기 위해 열심히 호객을 했다.

    해월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당연히 단 과자들이었다. 다만 이전과 달리 먹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또 다른 상념이 떠올라서였다.

    그날은 단 과자를 잔뜩 사 들고 귀향했던 날이었다.

    ‘아버지는 이런 걸 왜 먹어?’

    ‘왜 좋냐니 달고 맛있어서 먹지.’

    ‘금방 물리는데.’

    ‘그럼 먹지 말든가.’

    ‘먹, 먹으면 되잖아!’

    뺏으려고 시늉하자마자 여명은 제 것을 감추었다.

    해월은 그저 웃으며 제 몫의 과자를 입에 넣었다.

    ‘단것들만큼 기분을 쉬이 좋게 바꿔주는 게 없거든. 이 얼마나 이로운 음식이야.’

    마음 같아서는 꿀단지를 사고 싶었으나 그건 너무 비쌌다. 집에 갔다 둬 봤자 저는 출타하는 시간이 기니까 제대로 챙겨 먹을 수도 없을 테고.

    이렇게 돌이켜보니 짧았다고 생각한 시간에도 추억은 있었다.

    너무 빤히 쳐다봐서일까. 단 과자를 팔던 상인은 작은 조각을 하나 해월에게 내밀었다.

    “한입 맛보십시오. 사지 않으셔도 되니 부담은 갖지 마시고요.”

    그 말에 해월은 다소 힘없이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입에 넣었다.

    “맛이… 좋습니다.”

    “다행입니다. 하하.”

    상인은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다 해월을 가만히 보더니 조금 걱정스러운 투로 넌지시 말을 붙였다.

    “조금만 길을 더 들어가면 아주 입담이 좋은 이야기꾼이 있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막 이야기를 시작할 참인데 가서 한번 들어보시는 게 어떤지요.”

    처음 보는 자신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상인의 의중을 가늠해 보았다. 아마 작금의 제 꼴이 많이 처량해 보였나 보다.

    하긴 간밤에 아끼는 제자랑 말다툼을 했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있나. 거의 죽을상이겠지.

    해월은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숙이고 상인이 말해 준 길을 따라 들어갔다.

    그의 말대로 이야기꾼 하나를 가운데에 두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빙 둘러싼 채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북적이는 사람들을 보니 괜히 머릿속이 더 어지러웠지만, 기왕 왔으니 이야기는 듣고 가야겠다 싶었다.

    그 이야기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혹은 두 개가 섞인 건지는 모른다.

    단지 허상의 세계는 현실을 사는 자에게 매력적인 법이다.

    이 근방 정도면 음기로부터 안전한 곳도 아닐 테니 살아가기 각박할 법도 한데 사람들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불운하다 하여 희망이 없다는 건 아니라는 것을 몸소 알리는 걸까.

    해월은 냉소적인 시선으로 장내를 바라보았다.

    “자자 집중들 하시게. 날이면 날마다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오!”

    모인 객이 많으니 한껏 신이 난 이야기꾼은 청산유수로 이야기를 좔좔 내뱉었다.

    해월은 그 무리의 끝자락에서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의 나라! 성국 중의 성국! 이 나라 백난국은 오랜 세월 부국강병하였으나 그 켜켜이 쌓인 세월만큼이나 재미난 소문도 많지! 모두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주시오!”

    “허….”

    이야기의 첫머리를 듣자마자 해월은 재미없는 서책의 서두를 보는 것 같은 찬 눈이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백난국인과 다른 제 어두운 푸른 눈을 감추기 위해 시선을 내렸다.

    마땅히 할 일도 없었기에 일단 들어보기나 하자는 심정으로 잠자코 있었다.

    ‘그 잘난 백난국이 온갖 나라 침략해 가며 난세를 만든 것도 모르나.’

    머리가 멀쩡한 이상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백난국인은 자신들이 백난국의 백성이라는 데에 자부심이 있을 거다. 보고 싶지 않은 진실은 외면해 버리면 그만이다.

    해월은 그 자부심에 침을 뱉고 싶어졌다.

    군중들은 다들 호기심 어린 눈빛을 했다. 여기서 마뜩잖아하는 건 저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 해월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구중궁궐! 대륙을 호령하는 백난국의 궁궐은 신궁의 비호 아래, 어느 투명한 강호 못지않은 순결함을 지녔으니 어떠한 음기도 요괴도 귀신도 없는 성역이라 하였소.”

    몇몇 구경꾼들이 손뼉을 치며 추임새를 넣었다. 그 호응에 가볍게 기침하며 추임새를 넣은 이야기꾼은 부채를 촥, 펼쳤다.

    “그런데 이게 어인 일이야! 황제가 낳은 사내아이가 열을 넘고 스물을 넘어 서른에 못 미치니. 양기가 들끓어 음양의 조화를 중시하는 천신이 노하신 게 아닌가.”

    ‘음양의 조화는 개뿔. 그 정도면 황제가 아니라 색사에 미친 난봉꾼이지.’

    해월은 속으로 딴지를 걸었으나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은 그저 무표정이었다. 그냥 뭉뚱그려서 황자라 칭할 뿐이지 후실의 자식이라 별다른 존재감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결국엔!”이라고 소리친 이야기꾼이 펼친 부채로 허공을 한 번 가르자 미약한 바람이 불었다. 그것이 듣는 이의 긴장감을 높여 주었다.

    “황궁에 피바람이 불었소. 멀쩡하던 황자들이 하나둘 앓기 시작하더니 죄다 삼도천의 탈의파를 만나게 되어 버렸지.”

    탈의파는 저승으로 가는 삼도천에 있는 귀신으로 노파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망자의 옷을 벗겨 그 옷을 의령수라는 나무에 걸어 내려오는 모양새를 보고 죄의 경중을 따져 묻는다.

    흔히 죽는다는 말을 탈의파를 만난다는 것으로 바꾸어 말하고는 한다.

    ‘그러고 보니 황자들이 병사하였다는 이야기가 돌았었지.’

    별로 관심이 없어서 흘려들었었다. 그네들의 이야기가 저와는 어떤 관계도 없을 뿐더러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이 병으로 죽든 억울하게 죽든 요절을 하든. 황궁 밖에는 가지각색의 이유로 죽는 백성이 수천인데. 적어도 그들은 따뜻한 곳에서 따뜻한 음식을 먹고 살았을 것 아닌가.

    그런 자들에게 줄 동정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당장 제 갈 길 가기도 바쁜데 높으신 분들 염려를 어찌 하리.

    “하나! 난세에는 언제나 영웅이 등장하는 법이오. 잇따른 흉사로 황제의 시름이 깊어져만 갈 때 예언의 해 태어났다는 십 황자님이 계책을 내놓았지. 십 황자 유한을 모르는 이는 이 자리에 없을 거라 생각하오.”

    이야기꾼이 부채로 날을 세우듯 전방을 돌아가며 가리켰다. 모르는 이가 있는지 없는지 검문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있다 이놈아.’

    그렇게 반박하는 속내를 들킨 걸까. 이야기꾼이 귀신처럼 딱 맞춰 운을 뗐다.

    “내 친히 설명해 주자면, 우리의 유한 황자는 천하일색의 미모로 나라를 망하게 했다던 미인들이 꽁무니 빠지게 도망갈 정도로 고고한 자태를 가졌소. 그 미색에 외국의 사신단이 할 일을 멈추고 황자궁 담벼락에 달라붙었다 하오. 얼마나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는지 황자께서는 아예 쓰개를 뒤집어쓰고 다니실 정도일세.”

    몇몇이 황자의 미색을 머릿속에 그려 보는 것처럼 황홀한 표정이 되었다.

    “하여간 그 황자 마마께오서 내놓은 비책에 신궁이 들썩하고 나아가 황궁 전체가 들썩하여 흉사는 그치게 되었소.”

    대체 그 비책이 뭐란 말이오, 라고 구경꾼 중 하나가 물었다.

    이에 이야기꾼이 옳다구나 하며 부채를 탁, 접었다.

    “하늘에 닿은 일족이라 불리는 황족이 음양의 조화를 거슬렀으니 이는 마땅히 황족의 죄다. 하여 그 죄를 하늘에 고하여 용서를 빌어야 한다. 그렇게 황자가 간언하자 황제 역시 되물었소. 어찌하면 하늘에 죄를 고할 수 있겠느냐. 자식을 줄줄이 떠나보낸 아비의 속이 설령 황제라 하여 달랐겠는가! 슬픔에 지친 부황의 목소리에 황자가 울며 답하니.”

    장내에 있던 사람들이 죄다 숨을 죽였다. 흡사 반항하듯 해월은 홀로 편히 숨을 내쉬었다.

    “인신을 제물로 바치어 하늘의 자비를 청해야 하고, 만백성의 아비인 부황께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자식된 도리와 황자된 도리를 다하여 직접 제를 올리겠나이다…!”

    이야기꾼은 황자한테 빙의한 것처럼 무릎을 꿇으며 하늘을 향해 간청하듯 손을 올렸다.

    “그 마음에 감복하였는지 제를 올리자마자 하늘은 상서로운 빛을 황자에게 내려주시었고 그 결과! 황궁의 흉사가 멈추어 평화가 찾아왔다네.”

    한껏 뿌듯한 얼굴이 된 이야기꾼이 이야기를 마쳤다.

    해월은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강가에 가서 찬물로 귀를 씻고 싶었다. 그러나 이국의 피가 섞이지 않은 백난국인들은 감상이 달랐는지 제 나라의 황가가 자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속이 역해진 해월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어느덧 구경꾼들은 거의 다 흩어졌다.

    저도 얼른 객잔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해월이 발걸음을 돌리려던 차에 이야기꾼 사내가 그를 불러세웠다.

    “거기 단발한 색목인.”

    “…….”

    주위에 머리를 짧게 자른 색목인은 저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뒤돌아보았다.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으나 저를 불러 세운 이유가 궁금해서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내 이야기. 어찌 들었소?”

    “재미있었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긴. 세상 제일가도록 싸늘한 얼굴을 해 놓고서. 내 무서워서 말을 잇기가 어려웠소.”

    제가 그렇게 차가운 얼굴을 했나. 그런 생각이 들어 표정이 더 싸늘해졌다.

    “자네 뿌리가 어찌 되는가.”

    “모릅니다.”

    “모르면서 백난국 황가 이야기를 그렇게 싫어하는가.”

    이야기꾼은 해월이 비참한 패전의 기억을 안고 사는 망국의 백성을 부모로 두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어찌 보면 맞는 추측이었다.

    그는 바구니에 모인 은전을 세어 보며 말을 이었다.

    “내 자네에게만 특별히 더 재미난 이야기를 해 주겠네.”

    별로 안 듣고 싶다는 뜻을 온몸으로 드러내자 이야기꾼은 껄껄 웃더니 “그래도 들어 주게 값은 필요 없으니.” 하고 능청을 떨었다.

    “유한 황자께서 황태자에 등극하실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소. 유력한 가문의 후궁은 자식이 없고, 그나마 있는 것들도 반편이들밖에 안 남았다더군. 제도에 사는 지인이 전해 준 이야기야."

    “황족 모독은 반역에 준한다는 것, 아시지요?”

    “거 이런 얘기도 못 하게 막으면 그게 나라요? 감옥이지.”

    하지만 영 배짱이 두둑한 건 아닌지 이야기꾼은 좌우를 살폈다. 듣는 이는 해월밖에 없음을 확신한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본래 흉사가 잇따를 때는 그 흉사로 인해 가장 이득을 보는 인간이 누구인지 살펴야 하는 법.”

    그 말에는 해월도 뜻이 같았던 지라 가타부타하지 않았다.

    “내가 하고픈 얘기는 그게 다일세. 난 그저 이야기를 전하는 이야기꾼이지 그 이야기에 내 뜻은 없다오. 그러니 나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자를 만나도 죽일 듯이 노려보지 말라는 소리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영력이 새어 나간 모양이다. 얼결에 아까 구경꾼들이 느낀 긴장감을 증폭시켜 준 꼴이 된 셈이다.

    “그리고 내가 매일 사람 접하다 보니 촉이 좀 좋거든? 오늘 재수 없는 일을 겪게 될지 모르니 몸 사리는 게 좋을 게야.”

    “충고 감사합니다.”

    말은 그리했으나 당연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어차피 인생 전체가 대체로 재수 없는 편이라 그다지 도움 되는 조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해월은 이야기꾼의 앞선 충고에서 제게 드리워진 선학경의 그늘을 인지했다.

    백난국에 적대감이 있는 자의 밑에서 커서 그런지 저도 모르게 같은 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단지 객관적으로 동조한 것을 넘어 주관적으로 편을 들고 있었달까.

    해월은 어디 하나 모자란 사람처럼 피식거리며 길을 걸었다.

    어느새 찬기가 온몸에 스며들었다. 추웠다. 고뿔에 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얼른 객잔으로 돌아가야 앓는 신세를 면할 것 같다.

    문득 해월은 자신의 차림새가 퍽 얇다는 걸 알아챘다. 정신을 어디다 놓은 건지 두터운 옷 하나 걸치지 않고 나온 거다.

    미련하기 짝이 없었다. 아까 상인이 괜히 저를 처량한 사람 보듯 한 게 아니었다.

    이 날 선 추위 속에 백의 차림이니 당연히 처량해 보일 수밖에.

    “…가야지.”

    그렇게 중얼거린 후 해월은 발걸음을 옮겼다. 추워서 그런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더 몸이 둔해지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숨을 쉴 때마다 눈앞에서 흩어지는 입김을 구경하며 걷는 바람에 잠시 한눈을 팔았다.

    그래서 왼편에서 물을 버리는 아낙을 보지 못했고, 상념과 추위에 둔해진 몸은 전처럼 재빠르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저를 덮치려 드는 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찰나.

    시야가 가로막혔다.

    직후, 촤악 하는 시원한 소리와 함께 물이 흩뿌려졌다.

    제가 아닌 저를 끌어안은 자에게로.

    익숙한 체 향에 살며시 고개를 들어 올리니 아까의 상념들 속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정말…이러다 제 명에 못 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연진은 물을 흠뻑 뒤집어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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