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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111화 (111/124)
  • 111화

    난향댁네에서 여명 그리고 연진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즐거웠다.

    한가로이 노닐기도 하고, 두 녀석을 놀리기도 했다가 주술을 보여 주기도 하고…. 제대로 된 가족이 있노라면 정녕 이러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연진도 여명도 사실상 동생이나 조카뻘에 가까웠으니까.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았다.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여명은 연진을 탐탁지 않게 보는 것 같으나, 연진이 개의치 않아 했기에 해월도 여명의 언행을 지적하는 것을 관뒀다.

    아무래도 여명은 연진을 굴러들어온 돌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제 마음에 박힌 돌이 연진이라는 걸까.

    돌처럼 우직한 성정인 연진을 떠올리니 그렇게 생각하지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눈은 안 오려나 모르겠네.”

    잠시 위쪽을 쳐다보던 해월이 중얼거렸다.

    쌀쌀하기만 하고, 아무것도 지상에 내려주지 않는 무심한 하늘이었다.

    해월은 일전에 받았던 목도리를 두른 채였다. 정확히 말하면 목도리에 뒤집어쓰고 있는 형태라는 게 적절했다. 연진의 완강한 고집에 순응한 결과였다.

    “사부는 눈을 좋아하시지요.”

    “응.”

    대답이 유난히 빠르고 목소리가 경쾌했다.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보통 사람의 모습이었다.

    해월은 눈이 좋았다.

    이 땅의 모든 허물을 새하얗게 덮어서, 순수히 지워 내고야 마는 눈을 경애한다.

    “눈은 참 공평하거든. 눈 오는 날 밖에 서 있으면 누구든 눈을 맞으니까.”

    햇빛이 그리는 환한 낮, 달이 그리는 어두운 밤, 먹구름이 자아내는 축축한 땅. 그런 것들도 공평하다 할 수 있겠으나 해월은 특히 눈이 가장 좋았다.

    “만지면 손이 얼 것처럼 차가운데 또 포근한 것을 보면 신기한 기분이 들어.”

    “조만간 눈 구경을 할 일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난 귀찮으니까 네가 대신해서 많이 빌어 줘라. 눈 많이 오게 해 주세요~ 하고.”

    “눈을 좋아하시는 건 사부인데 왜 제가 빌어야 합니까.”

    연진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해월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말에는 힘이 담기거든. 왜 말이 씨가 된다는 얘기도 있잖아.”

    언력(言力)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말과 그 안에 담긴 진심은 만물을 한데 모은 것보다도 무거울 수 있다.

    해월이 언력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던 것은, 선학경이 저를 처음 야산에서 데리고 와 선해월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을 때였다.

    그의 명명(命名)으로 인해 아무 의미도 없던 ‘무명’에서 ‘선해월’이 되었다.

    그때의 저는 어린 소년이었는데 꼭 세상에 처음 태어나 숨을 쉰 아기와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름 같지도 않은 이름을 지우고, 처음으로 제 이름을 부여받던 순간. 온몸이 흔들리는 듯 혼란스러웠고 심장이 제 위치를 또렷하게 알렸다.

    그 짤막한 말 한마디가 생(生)을 비로소 생(生)답게 만들었다.

    말에는 힘이 있다는 선학경의 가르침을 추후에 듣고 나서 제가 겪었던 생경한 감각을 모두 이해했다.

    “진심으로 말하면 이루어질지 모르니까 정성 들여 빌어.”

    해월이 뻔뻔스럽게 당부했다.

    “전 그런 것은 믿지 않습니다.”

    “믿든 말든 네 자유지만 나중에 소원 생겼을 때 울면서 빌지나 마라.”

    그 말을 한 뒤 해월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아니한 표정을 아주 짧게 지었다.

    연진은 그 낯꽃이 좋아서, 눈을 감고 몇 번이나 그 모습을 그려 보았다.

    ***

    선학경은 작은 방의 한 가운데서 정좌한 채로 눈을 감았다.

    양아들인 선해월이 단곡으로 돌아왔다. 그동안의 모든 귀향 중 가장 오랜만의 귀향이었다.

    오랜 시간을 사이에 두고 만난 아들은 어딘가 달라진 듯 보였다.

    야산에 버려져 있던 그 아이를 데려와 이름을 지어주고 제 아들로 삼아 키웠다. 살아 있는데 꼭 죽은 것 같은 눈을 하고 있던 그 꼬맹이를 거둔 이유는 시답지 않은 것들뿐이었다.

    그중 하나는 첫눈에 보기에도 알 수 있는 비범함 때문이었다.

    병사를 키워 내는 일을 했던 선학경은 자연히 사람을 보는 눈이 밝았다. 그래서 쉬이 알아챘다.

    그 아이는 범인이 아니었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옛 나라들에서 태어났더라면 칭송받는 주술사 중에 하나가 되었으리라. 선학경은 확신했다.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는 말은 그 아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훈련을 시키며 그것을 더욱 절감했다.

    타고난 체력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몸놀림이 가볍고 예리한 데다 영력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다. 통찰력과 그에 따른 행동력도 빼어난 수준이었다.

    단 한 가지. 그 아이의 단점이 있노라면 그건 바로 감정이 둔하다는 것이다.

    모진 세상을 살아가며 점차 닳아 사라진 것일까. 그 아이는 정녕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선학경도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만 그토록 어린 소년이 보이는 비정한 모습은 거의 본 적 없었다.

    희로애락에 모두 둔감한 녀석이 비교적 선명하게 느낄 줄 아는 건 외로움이었다.

    매일같이 무표정했으나 자신이 버려질까 봐 눈치를 살피고 있는 옅은 긴장감을, 선학경은 바로 알아보았다.

    해서 그것을 그 애가 더 강인한 퇴마사가 되도록 사용했다.

    외로움을 안다면 곧이어 슬픔을 알 것이고, 그와 반대되는 기쁨도 알게 된다. 느리고 흐릴지언정 해월은 점차 감정을 배워 나갔다.

    어느덧 그 녀석이 제법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게 되었을 때. 멈추었어야 했던가.

    사색이 길어질수록 시름도 깊어졌다.

    이제는 때가 왔다는 것을 의식하고야 말았다.

    ***

    단곡 사람들은 돌아온 해월을 보고 조금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거나, 아님 그마저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

    해월이 그들의 안전을 위해 주위에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터인데 어찌 그리 불경한 눈을 할 수가 있나. 연진은 화가 났다. 저는 외지인이라지만 해월은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살아오며 마을에 헌신한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나 해월은 그런 연진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젓기만 했다.

    ‘그런 걸 봤으니 꺼릴 법도 하지.’

    그런 것이라는 게 무엇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연진은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았다.

    해월은 뒷짐을 진 채 연진을 이끌고 마을 외곽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예전에 붙여 두었던 주구를 확인했다.

    사특한 기운이 닿았을 때 일정 수준 정도는 자정할 수 있도록 방비해 둔 것이라 주기적으로 힘을 넣어 주어야만 했다.

    간만에 영력을 연달아 썼더니 몸이 금방 지쳤다. 해월은 쭈그렸던 자세를 일으키려다 순간 발을 삐끗했다.

    옆에서 뻗어온 손이 해월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조심하셔야죠.”

    “미안. 면목 없다.”

    곧 떠날 거니까, 다시는 안 올 것이란 생각에 무리한 것 같다.

    “힘드시면 제가 도울까요.”

    해월은 나무 한가운데에 붙여 두었던 주구를 살짝 손으로 매만지더니 곧이어 사절했다.

    “괜찮아. 어차피 여기에는 내 힘이 이미 많이 들어 있어서 자칫하면 힘이 섞여 효력이 떨어질 수도 있거든. 지금은 그냥 구경만 해.”

    새로 붙이는 방법도 있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번거로워질 수 있으니 하지 않았다.

    “아버지!”

    멀리서 여명이 쪼르르 달려와 안겼다. 해월은 익숙하게 여명을 안아 들었다. 부쩍 응석이 늘었다고 생각되는 요즘이었다.

    옆에서 보던 연진이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살풋 웃은 해월은 어깨를 으쓱했다. 별수 없다는 뜻이었다.

    “나랑 놀자.”

    “그래. 뭐 하고 놀까. 진아 너는 뭐하고 싶,”

    “저 형 말고 나랑만 놀아.”

    말허리를 끊으며 강력하게 주장하는 여명 탓에 곤란해진 해월이 뒷머리를 매만졌다. 그러자 연진은 별다른 동요 없이 그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여명에게는 미안한 일을 했고, 앞으로도 할 것이기에 해월은 여명을 이겨 내지 못했다. 결국 눈빛으로 연진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연못! 연못 보러 가자!”

    “그래 그래.”

    연진을 빼놓고 여명과 둘만 있자니 신경이 쓰였다. 입술을 하도 깨물어서 피가 날 지경이었다. 고작 해 봐야 눈에 안 보이는 것뿐인데 어째서인지 초조했다.

    “아버지.”

    한참을 살얼음 낀 연못에 돌을 던지고 있던 여명이 해월을 불렀다.

    “응?”

    “아버지는… 그 형 좋아해?”

    “당연히 좋아하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이.

    “내 제자인데 안 좋아할 리가 있겠어?"

    “…그럼 어디가 좋은데?”

    “음, 일단 멀끔하니 잘생겨서?”

    여명이 얼굴을 찡그리자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린 해월이 답을 이었다.

    “난 그 애가 따뜻해서 좋아.”

    “……?”

    성격을 말하는 것인지, 체온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답이었다.

    해월은 더 설명하지 않고 그저 여명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무럭무럭 자라서 꼭 많은 사람을 도와.”

    그것이 여명을 데려온 이유다. 이 어리석은 아이는 그런 저의 검은 속내를 모르고 아버지라 부르며 항상 제가 귀향할 때를 기다렸다.

    여간 안타깝고 우스운 일이 아니었다. 그 기다림이 진절머리나게 싫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제게 금전적으로 의지하면서도 막상 얼굴을 맞대면 떨떠름한 기색을 보이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여명은 순수했으니까.

    여명은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싫어.”

    “왜 싫은데?”

    차근히 되묻자 사뭇 결의에 찬 답이 돌아왔다.

    “난 꼭 과거를 봐서 높은 사람이 될 거야.”

    “아직 글도 잘 모르는 녀석이 과거를 어떻게 보냐.”

    “다 배우면 돼.”

    “그러게, 나 없는 동안 내 아버지한테 글공부 좀 더 배우라니까. 겸사겸사 영력 수련도 해 보고.”

    그렇게 된다면 여명에게만큼은 손을 대지 말라 엄포를 놓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여명은 저처럼 잠자코 있을 만한 아이도 아니니까 그런 문제는 크게 걱정되지도 않았다.

    제게 남은 시간이 적은 줄 몰랐던 때에는 자신이 직접 여명을 가르치리라 결심했던 때도 자주 있었을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난 그 영감 싫어. 아버지한테 맨날 무섭게 굴잖아.”

    “…그래, 너라도 싫어하는 게 낫겠다.”

    해월에게는 아직 아버지를 온전히 미워할 용기가 없었다. 여명이 제 몫까지 대신해서 미워해 줬으면 좋겠다는, 철없는 어른 같은 생각이 들었다.

    ***

    “선가가 돌아왔다지?”

    “돌아온 지가 언젠데 그걸 이제 이야기하오. 그것도 웬 사내를 데리고 왔다더구먼.”

    “나도 그 사내를 봤소이다.”

    “이 마을에 그렇게 다 큰 사내를 데려오다니. 그놈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원… 어릴 때부터 애 같지 않게 굴더니만 별짓을 다 하는 군.”

    단곡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해월과 해월이 데려온 사내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작은 마을에서의 소문은 늘 빠른 법이다. 게다가 해월은 이 마을 내에서 유명인사였다.

    그들은 대부분 숨죽여 사는 처지라 외지인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 외지인이 이미 이곳과 동떨어진 세계에 오랫동안 속했던 자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마을 내에서의 불만의 목소리가 조금 돌았으나, 이 마을의 실질적인 지주 역할을 하는 주술사 선학경의 양아들이라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이다.

    해월이 제가 데려온 사내랑 항상 붙어 다니며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는 목격담은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하도 사이가 좋아 보여서 두 사람이 의형제를 맺은 사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여명이 그 꼬맹이도 별나서 난리였지만 선가는 더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소.”

    분류하자면 해월은 조용히 이상한 짓을 했고, 여명은 소란스럽게 이상한 짓을 했다.

    그래도 여명은 어린아이의 지나치게 쾌활한 성정쯤으로 칠 수도 있었겠으나, 해월의 어린 시절은 그렇지 못했다.

    아직도 몇몇 사람들은 해월이 마을에 들어왔던 도적 떼를 살육했던 그날을 기억한다. 마을 전체에 피비린내가 배어서 한동안은 악취에 시달렸어야 했다.

    그보다 그들이 더 질색했었던 것은 그 앳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였던 해월의 모습이었다.

    받은 도움이 아무리 크다 한들 그 기억을 도려낼 수는 없었다.

    “하여튼 간 언짢은 짓만 골라 하는 듯싶구먼.”

    “주술사님은 왜 그런 애를 거둬서는….”

    그렇게 푸념하는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 사이로 끼어드는 음성이 있었으니.

    “아버지가 번 돈으로 세금 치르고 먹고사는 주제에 말이 많아.”

    “뭐, 뭐?”

    여명이 짜증 어린 낯빛으로 그들을 쏘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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