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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110화 (110/124)

110화

겨울 길을 배회하기 조금 전.

해월과 선학경은 안으로 들어가지도, 어딘가에 앉지도 않은 채 서로를 선 채로 마주했다.

절게 된 다리의 불편함은 편안한 자세를 취할 이유가 되지 않았다. 그건 해월도 마찬가지였다. 찬 공기에 취약한 제 자신의 몸을, 당장의 이야기를 미룰 빌미로 만들지 않았다.

선학경은 특유의 준열함이 담긴 시선으로 해월을 쳐다보았다. 어릴 적에, 그리고 지금도 저 시선을 받으면 온몸의 맥이 빠지고 식은땀이 났다.

반면 선학경은 숨 쉬듯 자연스럽게 노려보고, 다그치고, 매질했다.

“꼬마와 함께 보낸 녀석은 외지인 같던데. 기운도 범인의 것이 아니었다.”

누구냐고 묻는 뒷말은 없었다. 그럼에도 해월은 손을 말아 쥐고선 답했다.

“제가 데려온 아이입니다.”

“그걸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엄한 목소리가 귀를 찌르는 것 같았다.

“제가 데려온… 제자입니다.”

“뭐?”

“한주에서 만나 인연을 맺어 데려왔습니다.”

“하, 말세로군. 네가 제자를 들이는 꼴을 다 보고.”

선학경은 어이없어하며 헛숨을 뱉었다.

해월은 잊고 지냈던 나쁜 버릇을 자행했다. 손끝을 뜯고 입술을 깨물었다.

“넌 내가 우습더냐? 내가 네게 일러준 것은 전부 비기다. 그것을 잘 알지도 못하는 놈에게 함부로 전수해?”

“아버지를 우습게 여긴 적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애는 제가 잘 압니다. 사특한 주술을 썼다 하여 저를 신궁에 밀고하거나 할 아이가 아닙니다.”

“무지가 악이 될 수 있음을 정녕 모르는구나. 네 방자함이 화를 부를 수 있음이야.”

쏘아보는 시선에 몸이 꿰뚫리는 것 같았다. 선학경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몸을 두들기는 것처럼 아팠다.

선학경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다들 무언가로부터 도망쳐 온 사람들이 모여 살아온 이 마을에서, 또 다른 이방인의 등장이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여러모로 제가 연진을 고향으로 데리고 온 것은 백해무익한 일이다.

처음부터 모르지 않았다.

허면 어째서 연진을 데려왔을까, 질문의 뿌리로 거슬러 올라갔을 때 답은 하나였다.

‘이기심.’

혼자서는 두려웠던 거다. 홀로 보내야 했던 그 수많은 밤처럼.

누군가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 사람은 용기를 얻을 수 있다. 해월에게는 연진이 바로 그 누군가였다.

이곳에서 벗어나서 제 삶을 찾기 위해서는 곁에서 말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내가 옳았다고 얘기해 줄 사람.’

이 이기심을 당연한 것이라 얘기해 줄, 나의 사람을 원했다.

“…….”

선학경은 변함없이 냉혈한 눈으로 해월을 쳐다보았다. 예전처럼 매질하는 것도 아닌데, 과거의 기억이 몸을 범람했다.

그 기억 속에서 해월은 첫 번째로 떠나려 했던 날, 선학경이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딜 가든 네 걸음은 네 자유다.’

‘한 가지만 약조해다오.’

‘언제라도 좋으니 돌아와. 그거면 된다.’

그때, 전에 없이 엄하지 않은 어투에 감화되었다. 평소의 엄격함을 제할 정도로 아버지에게 제가 필요하고, 또 소중한… 그런 사람인 것 같았다.

그것은 한낱 착각에 불과했나.

이런 모습의 아버지가 제게는 더 익숙한데 그 순간은 꼭 평범한 부자가 된 것처럼 느껴져서 잘못된 판단을 내린 모양이다.

어리석은 것에 답은 없는데 말이다. 타고나길 이러한 것을 어찌할 수 있을까.

해월은 더 이상은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제 걸음은 제 자유입니다.”

그러니 사람을 택하는 일도 그의 자유였다.

해월은 이제야 조금 자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러니 저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제 선택을 후회하지도 않아요.”

해월은 선학경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에게 입은 은혜와 그에게 품은 증오는 모두 씻은 채로.

“그 애는… 한주 강씨 가문의 공자였습니다. 그 가문에 의뢰를 받으러 갔다가 만나게 되었어요.”

“네가 정녕 미쳤구나!”

짝!

분노한 음성, 강한 마찰음과 함께 해월의 얼굴이 반쯤 돌아갔다. 손이 날아오는 것을 뻔히 보았음에도 해월은 피하지 않았다.

그저 무감한 얼굴로 터진 입술을 닦고 입안에 고인 피를 바닥에 뱉었을 뿐이다.

“너는 내 말을 귓등으로 듣는구나. 그 시절과 다름이 없음이야.”

격양된 목소리가 그의 분노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럴 리가요. 저는 늘 아버지의 말씀을 귀담아들었습니다.”

말을 할 때마다 입안에 비리고 끈적한 피가 고였다. 불쾌감이 일었지만, 말을 멈출 수는 없었다.

해월은 아버지에게서 많은 말을 듣고, 배우고, 익혔다. 한때는 그것에 즐거워했던 것 같다.

배움이라는 것이 주는 성장, 성장이 주는 뿌듯함. 그것이 좋았다.

“감히…!”

선학경은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의 영력이 흘러나와 공기가 온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연진의 영력은 그저 맑고 시원했던 것 같은데 선학경의 영력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팔대 세가의 자제와 사제의 연을 맺은 네놈 짓거리가 옳았다는 거냐! 네놈은 팔대 세가 놈들이 얼마나 무도한지 모르느냔 말이다!”

이전에도 본 적이 드물었던 분노였다. 치솟은 언성이 귀를 타고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그것이 묻어 뒀던 어린 날의 해월을 불러냈다. 더는 어리다고 할 수 없는 청년의 나이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하고픈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애는… 그 애는 다릅니다. 아버지가 아는 귀족들처럼 무례하지도, 비열하지도 않아요. 선하고 강한 녀석입니다.”

“오만이다 선해월. 네가 안다고 하는 것이 정작 모르는 것임을 아직도 모르느냐.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

해월도 알고 있었다. 귀족들이 얼마나 무도한 자들인지, 피부로 느낄 정도로 잘 알았다.

그렇지만 연진은 아니다. 그 애는 허물이 없었고 올곧았다.

천하디 천한 핏줄인 자신보다 훨씬 더 강직하고 타인의 규범이 될 만한 재목이다.

그런 연진을 욕보이는 짓은 하기 싫었다.

“네 괴이한 언동이 결국 해악을 부르겠구나.”

“괴이한 것이 아닙니다.”

연진은 저를 다정하다고 했다. 그러니 괴이하지 않았다.

“사람 사이 연이라는 게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더이다. 아버지와 저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가족이란 이름하에 지냈다는 것이 새삼 가소로웠다.

“이러실 거면 그때 왜 붙잡으셨어요. 그냥 가게 내버려 두시지. 그랬으면 지금 이리 성을 낼 일도 없을 텐데요.”

차라리 오지 않을 것을. 후회가 일기도 했으나 이내 갈무리했다.

제대로 맺지 못한 끝은 또 다른 무언가의 시작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귀향한 것이다.

“애초에 아버지는 그 야산에서 날 만나면 안 됐습니다. 난 그날 거기에서 산짐승에게 잡아먹히거나 굶어 죽었어야 했어요.”

유감스럽게도 선학경에게서 되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해월은 손을 말아 쥐었다가 이내 폈다. 긴장으로 팔과 어깨가 굳었다. 입술은 누군가 꿰매 놓은 것처럼 제대로 벌릴 수 없었다.

심장에 추를 달아 놓은 것처럼 무겁다. 앞서 한 말은 도대체 어찌했나 벌써 의문이 들 정도로 다시 운을 떼기가 어려웠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해월은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자 다시 선학경을 마주했다.

“실은… 아버지께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

“아버지는 다 알고 계셨죠?”

질문에 대한 선학경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타인의 표정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던 어린 날처럼, 그 감정을 읽기가 힘들었다.

괜히 목이 매여 왔다.

속에 담아 두기만 했던 것을 입 밖으로 뱉는 것은 이리도 힘겹구나.

“…저 그때부터 계속 멈춰 있는 거.”

마침내 그 말 한마디를 밖으로 꺼내 놓았다.

해월은 줄곧 궁금했다. 어쩌면 이미 알면서도 알고 싶어 했다.

이야기책의 뒤 내용을 먼저 보고, 첫 장부터 읽어 내려가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늙지도 않고 죽게 되어 버린 이 저주를 선학경이 과연 몰랐을까.

“…….”

“…….”

잔인한 침묵이 이어졌다. 헛웃음조차 해월의 입을 비집고 나올 수 없었다.

“그러실 줄 알았어요.”

선학경은, 이미 저주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제게 언질 한 번 해 주지 않았던 것을 이제야 확인받았다. 애초에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제게 하고픈 말씀 없으십니까.”

“…그런 거 없다.”

내뱉는 음성은 늘 그러했듯 매몰찼다.

“사실은 떠나려고, 그 말씀 드리러 왔어요.”

“…….”

“이번에도 붙잡으실 건가요.”

찬 바람이 부자 사이의 공백을 메웠다. 손끝이 시려웠다.

그러나 해월은 차라리 그것을 반겼다.

이 매서운 겨울바람이 제 심장까지 얼어붙게 하기를 빌었다.

그렇게 해월은 한참이나 겨울 길을 서성였다.

***

난향댁은 푸근한 인상에 인품도 넉넉한 여인이었다.

해월을 경계하지 않고, 여명을 자식처럼 돌봐 주었으며 지금은 생판 처음 본 연진에게까지 친절하게 대하는, 그런 여인이다.

단곡 사람들이 대부분 외지인을 경계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녀는 예외적인 사람이었다.

사실은 경계하는 쪽이 당연했다. 자세한 사유는 제각각이지만 거의 다 쫓기는 신세거나 숨어 살아야 하는 처지니까.

“자네 괜찮은가.”

“그럼요. 맛있는데요.”

해월은 수저를 내려놓으며 답했다. 난향댁의 상차림은 맛이 좋았다.

“내가 그런 걸 물은 듯싶어? 뺨 말이야 뺨.”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기다려 봐. 뭣 좀 있나 보고 올 테니.”

“안 그러셔도 되는데….”

멋쩍게 웃은 해월은 말과 달리 자꾸만 입안에 핏물이 고여 여전히 불편한 상태였다. 비릿한 것이 목 안으로 계속 넘어가니 속이 안 좋아졌다.

그런 해월에게 연진과 여명은 걱정이 한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두 쌍의 눈을 마주친 해월은 둘 모두에게 손을 뻗어 앞머리를 헝클어뜨려 놓았다.

“아이고 귀여운 것들.”

“아 하지 마!”

여명은 해월의 팔을 잡고 버둥댔다.

그사이 돌아온 난향댁이 여명의 등짝을 찰지게 때렸다.

“느이 아버지한테 귀찮게 굴지 말라고 했잖아!”

참고로 난향댁도 여명의 아버지 타령에 장단을 맞춰 주고 있었다. 이유는 해월과 같았다. 얼마나 아버지란 것이 갖고 싶으면 저럴까 하는 마음이었다.

“내가 먼저 안 그랬어! 아버지가 먼저…!”

“이게 어딜 어른을 속이려 들어. 그럴 거면 이리 나와서 줄이나 꽈.”

“나 그런 거 안 한다니까!”

“에휴, 사내놈이 손 곱게 쓰려 하고 말야.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난향댁은 대충 가지고 온 꾸러미를 내려놓은 뒤 여명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해월은 킥킥거리며 여명의 원망 어린 눈빛을 모른 척했다.

내부가 조용해지자 해월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여명이 귀엽지 않냐? 무예 빼고는 어찌나 험한 일을 안 하려고 하는지 몰라. 어른한테도 따박따박 반말하고. 쟤는 전생에 고관대작 고명딸이었을 거야.”

따라붙는 맞장구가 없자 해월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셨다.

“…야 너 뭐해?”

“입안의 상처에 바를만한 연고를 찾고 있습니다.”

연진은 여명이 끌려나간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굴었다.

난향댁이 들고 온 꾸러미에 제법 다양한 약재가 있는 게 반가우면서도 반갑지 않았다. 이 약재들이 지금껏 쓰였던 곳이 짐작되어서였다.

적절한 것을 찾은 연진이 단호한 태도로 해월에게 다가섰다.

“아 해 보세요.”

“…뭐?”

순간 해월은 제 귀를 의심했다.

“야 됐어 입안에 바르면 어차피 죄다 먹어 버릴 텐데.”

“어떤 치료든 안 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싫어 엄청 쓸 것 같단 말야.”

그 말에 연진은 곧장 연고를 손에 찍어 제 혀에 묻혀 보았다.

“야 뭐 해!”

해월이 뒤늦게 연진의 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연진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별로 안 씁니다.”

“그걸 먹어 보고 확인하냐….”

“쓴 지 안 쓴지 알려면 이 수밖에 없죠.”

해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더러 뭐라 할 것이 아니라 연진도 만만치 않게 막무가내라는 것을 알았으면 했다.

입을 꾹 닫고 완강하게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연진은 해월이 약한 지점을 알고 있었다. 옆구리에 손을 가져다 대자 곧이어 해월은 숨넘어갈 듯 웃으며 자지러졌다.

“으하하! 야 간지러!”

“사부는 예민하시군요.”

“야 이렇게, 하면 누구라도…! 으핫!”

연진은 웃음으로 입이 벌어진 틈을 놓치지 않았다.

“으브르…, 야…!”

해월이 짐승과 같은 소리를 내며 버둥거렸다. 무슨 말을 하려 해도 입안에 들어온 손가락 때문에 전부 가로막혔다.

“가만히 좀 계십시오.”

기어이 입안의 터진 곳을 찾아 약을 다 바른 연진은 그제야 몸을 뗐다.

“안 쓰기는 개뿔이 안 써… 엄청 쓰거든?”

어느샌가 바닥에 밀착했던 몸을 일으키며 해월이 볼멘소리를 했다. 입안에서 아주 쓴맛이 났다.

“…쉬세요.”

연진은 갑자기 그 말만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

방금 표정이 좀 무서웠던 거 같은데. 단순한 착각일까.

“야, 추운데 들어오지?”

그리 묻자 문밖에서 묘하게 경직된 목소리가 돌아왔다.

“바람을 쐬어야겠습니다.”

“음, 뭐 그래라.”

이상하게 여겨지긴 하지만 바람을 쐬고 싶다는데 어찌 말릴까. 그저 별난 놈이구나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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