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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109화 (109/124)

109화

“…갖고픈 것이 무엇이길래 그러십니까.”

“있어. 넌 절대 못 구하는 거.”

“제가 구하면 어쩌실 건데요.”

연진은 괜히 울컥하며 반문했다.

“아서라. 나만 구할 수 있어.”

“……?”

남들에게는 조금씩 다 있는데, 해월은 갖지 못했으며 또 그만이 구할 수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연진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해월은 구태여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는 해월이 갖지 못한 그 안정을 가졌다.

그나마 위안 삼을 만한 것은, 손안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손끝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점이다.

곧 이 손을 펼쳐, 있는 힘껏 쥐고 죽을 때까지 놓지 않으려 한다.

“…내가 아버지한테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어쩌면 매일 했던 것 같아. 실행에 옮기려 했던 건 이번으로 두 번째밖에 안 됐지만.”

해월은 이름과 삶의 방향을 얻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바란 것은….’

그저 따뜻한 품이었다. 곧 죽어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은 수련을 견디는 것도, 엄한 규율을 지키는 것도,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도. 전부 바라지 않은 것들이다.

몸과 마음이 이곳을 떠나려면 혼자 힘으로는 안 되었다.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해월은 여명을 마을로 데려왔다. 이 아이가 장성하면 저를 대신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 끔찍하고 사특한 마음으로 시작된 인연이라는 것을, 여명은 알까.

아니, 언제부터 알게 될까.

처음 여명을 봤을 때부터 해월은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수 있는 독기를 가진 아이라는 걸. 제 어미의 시신과 함께 버텼던 아이다. 그런 아이라면 얼마든지 저를 대체할 수 있었다.

시일이 걸리더라도 상관없다. 큰 목표를 위해 잠시간의 고생을 견디는 것쯤은 괜찮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아버지를 떠나겠다는 생각은 늘 했었는데, 그때마다 여명이를 데리고 갈 거란 생각은 안 했어.”

“이유를 여쭤보고 싶습니다.”

“내가 예전에 얘기했었지. 난 정붙일 만한 놈이 아니라고. 그냥 나다운 짓거리 하는 거야.”

귀로 들은 말인데 연진은 입에서 쓴맛이 느껴졌다.

“그 아이는 여기 있어야 해.”

저는 단명할 운이다. 여명을 데리고 떠나 봤자 책임지지 못할 것이란 얘기다. 하물며 연진과 같이 떠나면 여명을 연진에게 떠넘기는 꼴이 된다. 연진에게 그런 부담은 지울 수 없다.

피부로 닿는 한기가 몸의 온기보다 짙어졌다. 자세를 움츠리자 조금은 온기를 지킬 수 있는 것 같았다.

해월은 제 허물에 대해 부끄럽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불쾌하게만 여겼을 뿐이었다.

누군가에게 선으로 보인다면, 누군가에게 악으로 보일 수 있다.

이 지방을 관할하는 늙은 관리가 비록 뇌물을 받고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망나니일지언정, 그 자식에게는 한없이 자상한 아버지일 수도 있는 것처럼.

그 양면이 이상하지도 떳떳지 못하지도 않았는데, 연진 앞에서 제 허물을 이야기할 때면 개화되는 기분이 되어 좋다가도 금세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그것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느 바다의 파도와 닮아 있을 것이다.

“고뿔 걸리겠습니다.”

연진은 다른 말 하나 보태지 않고, 그 말만을 하며 이불을 전부 해월에게 덮어 주었다. 얼굴까지 다 덮는 바람에 해월은 이불을 내리며 얼굴만 내밀었다.

“답답하게 이게 뭐야.”

“답답한 게 누군데요.”

“모르겠는데.”

뻔뻔스러운 응수였다.

해월은 일어서며 다시 이불을 연진의 머리 위로 던졌다. 똑같이 되갚아 준 셈이다.

“그거 갖고 들어와. 이제 자자.”

해월이 쏠랑 안으로 들어가자 연진은 허탈한 눈으로 쳐다보다 이내 안으로 들어갔다.

***

다음날, 해월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다디단 간식, 짠 반찬, 노란 꽃, 목적 없이 걷는 것….

사소한 것들이 머릿속을 메웠다. 그렇다면 싫어하는 것은?

신궁, 천신, 무명….

어찌 된 게 죄다 싫어해서는 안 되는 것들뿐이다.

신궁에 반하는 것은 반역이나 다름없는 중죄이고, 천신을 부정하는 것은 제가 부리는 힘의 근간을 부정하는 것이며, 무명을 꺼리는 것은 제 자신을 꺼리는 것과 진배없었다.

그러다 곁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어, 어…?”

“새.”

짤막한 말 한마디에 해월이 정신을 차리고 먼발치에 있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종이 새를 접어서 바람을 조종하여 여명과 놀아 주고 있던 참이었다. 집중하지 않으니 바람이 멎어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미안.”

해월은 멋쩍게 웃으며 여명의 볼을 한 번 쓸어 주었다. 그리고 종이 새를 줍기 위해 마루에서 일어섰다.

허리를 숙여 종이 새를 줍는 그 순간,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그늘의 주인이 누구인지, 고개를 올리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타인을 움츠러들게 하는 힘이 있는 사람.

“……아버지.”

“오랜만이구나.”

선학경이 돌아왔다.

‘여명아 형 데리고 난향댁한테 가 있어. 내가 먼저 찾을 때까지는 집에 오지 마.’

해월의 짤막한 말에 여명은 이미 익숙하다는 듯 연진을 끌고 난향댁네로 향했다.

난향댁은 생전 처음 보는 연진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연진이 자신을 해월의 제자라고 소개하자 난향댁도 여느 사람들처럼 놀라워하더니, 손님이 왔는데 뭐라도 내와야겠다며 어디론가 향했다.

채 말리기도 전에 나가 버린 터라 연진은 어색하게 여명과 둘만 방에 있어야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명도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다만 그것이 어색한 존재인 저와 함께 있어서만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한숨을 푹푹 쉬고, 뚱한 표정을 지었다가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벅벅 문지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연진을 째려보더니 운을 뗐다.

“형이랑 아버지… 곧 여길 떠날 거죠.”

“…….”

“나 다 들었어요. 둘이서 얘기하는 거.”

여명은 잠귀가 밝았다. 그리고 해월은 그걸 알고 있다.

굳이 여명이 자는 방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건 여명이 듣길 바라고 한 말일 것이다.

여명이 아는 해월은 충분히 그럴만한 사내였다. 이상한 데서 무르고, 이상한 데서 냉정해지는 사람이다.

“내가 얘기했죠. 아버지는 나 별로 안 좋아해요.”

“…아니, 사부는 널 무척 아끼셔.”

적어도 연진이 느끼는 바는 그랬다. 여명은 해월이 아끼는, 몇 없는 대상 중에 하나였다.

“거짓말. 나 그런 거 안 믿어요.”

하지만 여명은 그를 부정했다.

“아버지는 언제든 훌쩍 떠날 사람 같아요.”

여명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없었다.

해월의 집에 처음 들어갔을 때도, 그 안에는 해월의 흔적이 없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출타했다지만 그런 것을 고려하더라도 선해월이란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표가 조금도 나지 않았다.

“이 마을 사람들은 거의 다 못됐어요. 아버지가 세금을 대신 내주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아버지를 언짢게 보니까요.”

여명은 어리지만 그런 시선들을 모를 정도로 어리지 않았다.

“나도 이런 곳에 남기는 싫어요. 근데 아버지한테 짐이 되는 것도 싫어요.”

여명은 알았다. 해월이 오래전부터 ‘아주’ 떠나고 싶어 했다는 것을.

어린아이는 되레 어른보다도 기민한 법이었다.

“아버지도 없고, 난향댁도 없으면 난 아버지네 영감이랑 지내야 할 텐데 그건 더 싫고요. 그 영감은 너무 무서워서 같이 있으면 진짜 힘들거든요.”

영감은 선학경을 지칭하는 말이다. 할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 것을 보면 여명이 가족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해월까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게 다 형 때문이야.”

“…….”

연진도 여명이 그런 말을 하는 까닭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반박은 하지 않았다.

해월이 말하길, 그의 양부는 망국의 주술사 출신으로 백난국 귀족을 무척 싫어한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연진은 백난국의 귀족이다. 그것도 변두리에 사는 지방 귀족이 아니라 백난국의 팔대 세가의 일원이었다.

연진은 제 가문은 저와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해월의 말마따나 그건 그만의 생각일 것이다.

귀족인 저를 제자로 들였다는 이유로, 해월이 선학경에게 어떤 말을 들을지 두려워졌다.

곁에 있어 주고 싶었는데 등 떠미는 해월의 태도가 완고해서 그러지도 못했다.

“아버지는 항상 영감탱이한테 혼날 일 있을 때마다 여기 있으라고 한단 말이야.”

“혼난다면… 대체 어떻게 혼난다는 거지?”

제발 연진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길 바랐지만 돌아온 여명의 답은 잔인하리만치 깔끔했다.

“또 벌을 받을지도 몰라.”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벌이 체벌임을 알 수 있었다.

연진은 더 이상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그 바람에 문 앞에 있던 난향댁이 “에구머니!” 하며 자빠질 뻔했다.

“실례하겠습니다.”

마음이 급해져서 제대로 사과할 겨를이 없었다.

“나도 같이 갈래!”

여명이 연진의 뒤를 쫓아왔다.

그런데 몇 발자국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저 길 끝에서 해월의 모습이 보였다.

홀로 무슨 생각이라도 잠겼는지 눈빛이 흐렸다.

“사부.”

“아버지.”

저를 부르는 소리에 해월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너희 왜 벌써….”

해월은 연진과 여명의 모습을 보고 순간 놀란 듯 어깨를 들썩이다가 이내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야야 저리 가. 흉한 얼굴 볼라.”

연진의 눈에 해월이 감싸 쥐고 있는 뺨이 보였다.

작은 손으로는 전부 가려지지 않는 흰 뺨이 울긋불긋했다. 입술까지 터졌는지 입꼬리에 피가 맺혀 있었다.

해월은 손등으로 입가를 쓸며 입안에 고인 피를 퉤 하고 뱉어 냈다.

“…어찌 이리된 겁니까.”

연진은 뿌득 소리가 날 정도로 하관에 힘이 들어갔다.

여명도 화가 난 것은 매한가지였다.

“또 영감이 난리 쳤지.”

“…가까이 오지 말라니까 말 한번 더럽게 안 듣네 너희.”

이미 성큼 다가와 있는 연진과 여명을 보고 해월은 픽 웃다가 입안이 아파서 눈살을 구겼다.

“괜찮아. 매타작이라도 당할 줄 알았는데 뺨 한 대로 끝났으니 잘됐지 뭐.”

“어디 좀 보여 줘 봐요.”

연진은 해월의 고집을 억지로 꺾듯이 뺨을 감싸 쥔 손을 잡아 치웠다. 그러자 슬쩍 보았을 때보다 더 크게 생채기가 나 있는 뺨이 보였다.

“……”

저는 너무도 소중해서 감히 매만지기도 어려운 이 뺨에, 누군가는 쉬이 손찌검을 했다.

속으로 욕을 삼킨 연진이 해월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치유술을 쓰자 해월은 다급히 연진의 손목을 잡고 제게서 떼어 냈다.

“야 그거 함부로 쓰지 말라고 말했잖아.”

“이게 지금 함부로 쓰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넌 아직 미숙해서 힘 조절을 못 할 수도 있다고.”

고작 뺨 하나의 생채기에 지나치게 많은 힘을 들여 고단해질 수도 있다. 연진이 치유술을 쓸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것은 아니었다. 그 정도 경지에 이르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며, 그 바탕에는 재능이 있어야 했다.

“그래도 지금 할 것입니다.”

연진은 해월만큼이나 혹은 해월보다 더 고집 있었다.

작게 실랑이를 벌였으나 결국 연진은 해월의 뺨을 잡고 치료해 주었다.

그러나 생채기가 전부 사라지기도 전에 해월이 그를 만류했다.

“거기까지만 해.”

“왜요.”

“이거 보고 양심 찔려야 할 사람 있으니까.”

해월은 여전히 피가 맺혀 있는 제 입꼬리를 가리켰다.

“그런 것 가지고 양심에 찔릴 사람이면 때리지도 않았겠죠.”

“오기지 뭐.”

“그걸 어찌 오기라 합니까.”

“원래 오기는 다 손해인 거야. 그치 여명아?”

해월은 딴소리를 하며 대뜸 여명을 안아 올렸다.

여명은 침울한 얼굴로 꿍얼거렸다.

“아팠겠다….”

“음, 별로? 아버지도 나이 드셨는지 손이 덜 매워지셨어.”

해월은 여명을 안고 있지 않은 손으로 연진의 손을 잡았다.

“춥다. 들어가자.”

“…….”

연진은 해월의 언 손을 꽉 쥐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밖을 배회했는지는 손안에 닿는 찬기로도 알 수 있었기에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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