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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108화 (108/124)
  • 108화

    당연히 해월이 사라진 방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더불어 무척이나 어색한 공기도 만연했다.

    연진은 그저 해월이 빨리 다시 돌아오기를 바랐다.

    여명은 벽에 기대어 발을 꼼지락대더니 번뜩 고개를 들었다.

    “…형은 알아요?”

    그렇게 대뜸 물으니 당연히 물음을 받는 쪽은 당황스러웠다. 형이라는 호칭이 제게 향해진 것이 어색한 것도 있었다.

    “무어를…?”

    그 반문에 여명은 한숨을 쉬더니 불친절하게 덧붙였다.

    “아버지가 이번에는 얼마나 머물다 갈 건지요. 항상 며칠 안 머물고, 그마저도 일만 하다가 다시 가거든요.”

    여명으로서는 나름의 용기를 낸 것이었다. 해월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의 자리를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을 넣어 두고,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감수하며 묻는 것이니까.

    “그건 사부에게 묻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그런 여명에게 연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을 했다.

    그런데 여명은 입술을 댓 발 내밀고 애꿎은 손끝만 매만졌다.

    그 습관이 꼭 해월을 닮은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차에 여명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나 별로 안 좋아하는데….”

    안 좋아할 리가 있나. 조금 전에도 밥을 먹다가 여명이 입술에 뭘 묻힐 때마다 정성스레 닦아 주고 천천히 먹으라고 다정스럽게 얘기하던데.

    이게 애지중지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여명은 한참 어린아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연진은 별안간 기만당한 기분을 느꼈다.

    때마침 돌아온 해월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고는 포근하게 웃어 보였다.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별 얘기 하지 않았습니다.”

    연진은 대강 답하며 갈무리 지으려 했다. 슬쩍 여명의 반응을 보았는데 불만스러운 기색이 있긴 했지만 일단 함구하는 데는 동의한 모양새였다.

    여명은 해월의 옆에 딱 달라붙고는 연진을 쏘아보았다.

    해월은 도끼눈을 뜨는 여명의 미간을 꼬집었다.

    “이 녀석이 내 제자를 왜 자꾸 째려봐. 쟤 얼굴에 구멍 나면 네가 책임질 거야?”

    “뭐 어때서.”

    “볼 거 많은 얼굴인데 구멍 나면 아깝잖아.”

    “…….”

    여명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잡힌 미간을 더욱 구겼다.

    “나는 나중에 저 형보다 잘생겨질 거야…!”

    “오구 그러셨어요. 근데 그건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닌데?”

    여명이 금방이라도 삐질 것처럼 작은 두 손을 움켜쥐었다.

    해월은 여명을 토닥이며 달래 주었다.

    “우리 여명이 나중에 장가가려면 보기 좋게 잘 커야 할 텐데.”

    “장가 같은 거 안 가도 돼.”

    “장가 안 가면 뭐 하고 살게.”

    “나중에 커서 엄청 높은 사람이 될 거야. 그래서 꼭 아버지 호강 시켜 줄래.”

    말이라도 고맙다만 어린아이가 하기에는 약속이 거창한 바람에, 해월은 그만 피식 웃어 버렸다.

    그 탓에 여명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거, 거짓말 아니거든! 나 진짜 아버지 호강시켜 줄 거야!”

    “그래그래. 꽃가마도 태워 주고 대궐 같은 집도 구해 줘라.”

    “놀리지 마!”

    해월은 전혀 여명의 말을 믿지 않는 태도였다. 그걸 여명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분통을 터뜨리듯 빽빽거리며 말하는 여명을 여유롭게 놀린 해월은 진정 달래 주기 위해 비장의 수를 꺼냈다.

    “알았어. 그럼 내가 우리 여명이가 원하는 거 하나만 해 줄게.”

    “진짜…?”

    “진짜.”

    믿어도 된다는 신용이 깃든 음성이었다. 그런데도 여명은 속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닌지라 못 미더워했다.

    “정말 해 줄 거야?”

    “얘가 속고만 살았나. 믿어도 돼.”

    “맨날 알 필요 없다 그러고, 풍술 써서 머리 날리게 하잖아.”

    여명은 씩씩거리며 반박하던 것을 멈추고 슬쩍 눈치를 보다가 넌지시 말했다.

    “그럼 나 아버지 부적 만드는 거 보고 싶어.”

    “부적이야 어려울 것 없지. 진아 너도 같이 보자.”

    해월은 흔쾌히 말했다.

    부자 사이에 잠시 방치되어 있던 연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여명이 답을 가로챘다.

    “싫어! 나만 볼 건데 왜 저 형도 같이 봐야 하는데!”

    여명은 거의 평생을 기다려 온 순간이었다. 그 순간을 타인과 함께하고 싶지는 않았다.

    “너만 내 사람이냐? 쟤도 내 사람이거든?”

    “…….”

    “…….”

    연진과 여명은 각자의 이유로 할 말이 없어졌다.

    그에 조금도 개의치 않은 해월이 서랍에서 갖가지 도구를 꺼내고는 두 사람 앞에서 시범을 보였다.

    “괴황지(槐黃紙)에다가 경면주사로 술식을 적고 붙이면 음기를 쫓고 액을 막을 수 있어.”

    해월은 보다 뛰어난 효과를 위해 피를 내어 부적을 쓰지만, 지금은 그저 보여 주는 것이니 굳이 피를 내지는 않았다. 검지와 중지로 괴황지를 잡자 팔랑거리던 괴황지가 빳빳하게 섰다.

    “이걸 잘만 다루면 이것저것 많은 걸 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말이 잠시 끊어졌다. 그 짧은 순간에 해월은 여명의 다리에 부적을 붙였다. 그러자 여명은 순식간에 풀썩 쓰러졌다.

    해월은 여명을 받쳐 안고는 붙어 있던 부적에 손을 대 순식간에 사라지게 했다. 자신이 쓴 부적이라 파훼도 쉽게 할 수 있었다.

    여명은 순식간에 다리의 자유를 잃었다가 되찾아 어안이 벙벙했다.

    “이렇게 만들 수도 있지.”

    주박술의 일종이었다. 간단하고 그나마 흔히 쓰이는 종류였지만 술자가 얼마나 힘을 담았느냐에 따라 효력은 천차만별이다.

    “사람한테도 통하긴 하는데 음기가 강한 것들에게 더 잘 통해.”

    “나 나 다른 것도 알려줘!”

    여명이 멍해져 있던 건 찰나였는지 금방 호기심으로 눈이 불타올랐다.

    해월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놀아 주겠단 마음으로 여명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

    깊은 밤이 되었다.

    이 시간이 되도록 안 돌아오는 것을 보면 선학경은 아직 출타 중인 것 같았다.

    이에 해월은 안도했다. 여명에게 맞춰 주다 보면 피로가 빨리 몰려와서 지치기도 했다.

    여명이 곤히 자는 것을 확인한 해월은 조심스레 이불을 들고 나와서 마루에 걸터앉아 있는 연진에게 다가갔다.

    등 뒤로 덮이는 이불의 존재를 느낀 연진이 해월을 쳐다보았다.

    “추우니까 덮고 있어.”

    “아이는요?”

    “겨우 재웠어. 나이 들었는지 이제 놀아 주는 것도 힘드네.”

    실없는 소리를 하든 말든 연진은 제 옆에 따라 앉은 해월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이불인지라 가까이 붙어 앉지 않으니 흘러내릴 것 같았다.

    혹시라도 이불이 흘러내릴까 봐 해월은 연진의 옆에 바짝 붙었다.

    찬 겨울 공기 속에서 한 이불을 덮은 두 사람은 밤하늘을 수놓은 별을 바라보았다.

    몸을 꼭 붙이고 앉아 있자 온기가 여실히 느껴져서 기분까지 포근해졌다.

    몸은 따뜻하고 얼굴에 닿는 공기만 차가운 것이 괜히 더 좋았다.

    해월과 다르게 연진은 걱정부터 드는 모양이지만.

    “찬 공기 오래 쐬지 마시고 들어가서 주무세요.”

    “그러는 너는 왜 나와 있는데.”

    “방해될까 봐 나온 거죠.”

    “방해는 무슨. 쓸데없이 배려한 거잖아.”

    저와 여명의 시간을 위해 어느 순간부터 자리를 피했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 바보 같은 제자놈은 생각해 준답시고 그랬던 게 뻔하다. 해월은 여명의 서운함을 달래 줌과 동시에 나름대로 연진에게 주술에 관해 알려주려 한 것인데.

    그래도 귀동냥으로 얼추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잔소리를 멈추기는 어려웠다.

    “넌 수련하기 전에 네 밥그릇 챙기는 연습부터 해라.”

    “그런 연습은 필요 없습니다.”

    “무엇이든 네가 우선이고 네가 먼저라는 걸 명심해. 그다음에 적선하든 뭘 하든 하는 거야.”

    연진은 속기도 잘 속는데… 정말이지 걱정이었다. 남을 챙기다가 저는 뒷전인 삶을 살게 되면 어떡하나 싶었다.

    어쨌거나 연진은 당장 그를 받쳐 줄 든든한 가문도, 이렇다 할 뒷배도 없다.

    그런 몸으로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선을 넘지 않는 한에서 이기적인 자가 되는 수밖에 없다.

    “난 네가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해월은 보다 먼 곳을 보는 듯 시선을 멀리 두었다.

    저 먼 하늘의 수많은 별 중 어느 별을 보고 있는 것인지는 해월도, 그리고 연진도 몰랐다.

    “모두가 너를 공경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 말야.”

    “존경받을 만한 위인이 되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위인만 돼서는 안 되지. 진정으로 대단한 윗사람이 되려면 시기와 질투가 따라붙어야 돼. 잘나고 약은 사람이 되는 게 좋지.”

    얄팍한 존경보다는 불순한 것이 섞인 것이 좋다. 그것이 비대한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니까.

    해월은 권력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손에 쥐어 본 적이 없었지만 그런 것을 손에 쥔 삶이 얼마나 편리한지는 알았다.

    “이 근처 변방을 관리하는 귀족 나리는 늙고 병약한데 괴팍하기까지 하거든? 근데 그 노인네보다 훨씬 힘도 세고 젊은 사람들이 그놈 앞에서 쩔쩔매야 해. 그 이유가 뭐겠어. 바로 권세지. 그걸 손에 쥐고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

    “…세속적이십니다.”

    “뭐 어때서 그게 세상 순리인데.”

    해월은 하품을 한 번 하고선 눈을 끔뻑거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연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사부.”

    “오냐.”

    “일전에 혼인… 얘기는 그저 하신 말씀이었습니까.”

    “혼인?”

    해월은 전혀 모르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되묻다가 이내 기억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왜? 내가 혼인했었는지 궁금하냐?”

    “…그런 것은 아닙니다.”

    “뭐가 궁금해서 물어보신 걸까? 우리 도련님이.”

    해월이 음흉한 웃음을 짓고 연진의 옆구리를 찔렀다. 정색하는 연진의 표정을 본 해월은 이내 키득거리며 웃었다.

    “장난이다 이놈아. 내가 혼인을 해 봤겠냐?”

    연진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

    “만약에라도 있었으면 얘기했겠지. 뭣 하러 숨기겠어.”

    “사부는 얘기하는 것보다 안 하시는 게 더 많으시잖아요. 맨날 헛소리로 넘어가시고.”

    할 말이 없었다. 그보다 방금 헛소리한다고 하지 않았나? 뭔가 자연스럽게 넘기는 분위기라 지적하기에도 애매했다.

    “항상 나중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으면서 그 나중은 언제 오는 것입니까.”

    “넌 왜 이리 궁금해하는 게 많냐.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면 되는 거지.”

    “저는 사부가 궁금합니다. 알고 싶고요.”

    꾸밈이 없어서 더 진실한 말이었다.

    “스승된 이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제자된 자에겐 당연지사 아니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렇네.”

    잠시 고민하는 듯 굴던 해월이 나지막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바다를 보러 가면.”

    탁 트인 정경이 주는 기운을 받아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때는 분명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해월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 아버님과 의를 끊고 나면 여명이는 어쩌실 겁니까.”

    “여기 두고 가야지.”

    매정하리만큼 빠르게 답이 떨어졌다. 약간의 졸음이 묻은 해월의 눈동자는 여느 때처럼 무감했다.

    오히려 연진이 흠칫하며 놀랐다. 그의 눈에는 해월이 여명을 많이 아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판단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해월이 자조적으로 물었다.

    “내가 정말 한 아이의 아버지 노릇을 한 인간처럼 보였어?”

    “…….”

    “나도 내 아버지를 닮은 모양이야. 제대로 된 아버지 노릇을 해 줄 만한 인간이 안 되거든.”

    해월은 무릎을 세우고 턱을 괸 채로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입에 담는 내내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그려지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기분인지 알기 어려웠다.

    “…아이와 놀아주실 때 즐거워하셨잖아요.”

    “그 애가 나로 인해 웃으면 내가 가치 있는 사람처럼 느껴져. 내가 즐거워 보였다면 아마 그 때문일 거야.”

    그 모습에서는 조금 전 여명과 어울릴 때의 활기를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웃는 모습을 자주 보였기에 잊고 있었다. 해월은 태생적으로 밝은 자가 아니라는 것을.

    “내가 평생토록 갖고 싶은 게 있거든… 근데 그게 참 갖기가 힘들어. 남들은 다 조금씩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없는 것 같아.”

    안정에는 많은 것들이 포함된다. 누군가에게는 부와 권력이 안정의 밑거름이 될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소소한 일상과 작은 웃음이 안정의 바탕이 될 것이다.

    그 모든 타인의 안정에 제가 도움이 되었다면,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서 더 이상 버림받을 일이 없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그렇게 만족하며 살아왔는데 어느 순간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저의 것이 사라져도 좋다고 생각했었으나 진정으로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저를 잃으면서까지 남을 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아서일까.

    습관처럼 굳어져 버린 것들을 돌려놓기에는 지나온 시간이 너무나 길고 혹독했다.

    되돌아갈 수 없다.

    다만 앞으로의 길을 택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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