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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107화 (107/124)

107화

“읏챠.”

해월은 여명을 업고 집으로 걸음 했다. 연진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무겁지 않으십니까.”

조심스러운 물음에 해월은 그저 웃고 말았다.

“아무렴 내가 애 하나 못 업을까.”

솔직히 말하면 옛날처럼 온종일 업어 주기는 무리인 것 같다. 애들은 역시 하루가 다르게 크나 보다.

여명은 해월의 목에 두른 손을 꼼질거리기만 했다.

해월이 연진 쪽을 흘긋 보았다.

연진은 누가 보아도 편치 못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낯빛에 어려 있는 생각을 짐작한 해월이 싱긋 웃었다.

해월은 살짝 고개를 올려 하늘을 쳐다보았다. 날이 많이 차서 그런지 이제는 숨을 쉴 때마다 희뿌연 입김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이제 곧 눈도 내리겠다.”

“아버지 눈 좋아하잖아.”

“좋아하지.”

해월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이제야 정녕 귀향하였음이 피부로 느껴졌다.

동떨어진 곳에 살던 연진과 여명이 저로 인해 만난 것만으로도 기분이 색다른데,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은 더욱 제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목에 감겨 있는 작은 여명의 팔이 전보다 커진 것만 봐도 그랬다.

이 아이가 계속 크는 동안 저는 여직 멈춰 있다.

같은 시간을 보내도 저만 홀로 세월을 비껴간다.

생장을 멈춘 몸이라는 게 그런 거다.

가면 갈수록 남들과 다르다는 이질감을 느끼면서 괴로워하는 것. 그게 신이 내린 자저주이자 형벌이었다.

착잡한 마음을 뒤로한 해월은 초가삼간의 작은 마당으로 들어서며 여명을 내려놓았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선학경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디 가셨어?”

“몰라. 그 영감 어디 갔는지 내가 어떻게 알어.”

“어허. 말조심하랬지.”

말에는 힘이 깃드니까 웬만하면 조심하라고 주의를 줬는데도 불구하고 조금도 효과가 없는 모양이다.

“…맨날 나한테만 뭐라 그래.”

여명이 불만스레 볼을 부풀렸다.

“다 너 잘 크라고 하는 소리지.”

해월은 여명의 볼을 꼬집고 가볍게 흔들었다.

여명은 쫑쫑걸음으로 달려가 방문을 열었다.

“안 들어올 거야?”

“이따가. 방 데워 놓고 있어. 금방 들어갈 거니까.”

“싫어. 나만 두고 가지 마.”

“금방 다시 올 거거든. 집 잘 지켜라.”

해월은 여명이 붙잡기 전에 연진의 손목을 붙들고 쏜살같이 달렸다.

연진은 느닷없는 뜀박질에 당황하면서도 해월만큼이나 빠르게 달렸다.

“저 좀 빠른데.”

“…봐줘라. 좀.”

***

이윽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연진을 이끈 해월은 거칠어진 숨을 가까스로 골랐다.

“하, 콜록.”

“그러게 왜 갑자기 뛰는 겁니까.”

“빨리 갔다가, 하아, 빨리 돌아가려 그랬지.”

여명을 오래 혼자 두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보는 데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연진은 숨을 고르는 해월의 등을 묵묵히 두들겨 주었다.

어느 정도 진정된 해월은 다시금 사과의 말을 올렸다.

“아까는 미안했어. 여명이가 좀 별나서.”

“아닙니다.”

그러나 연진은 여명의 언동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가 신경 쓰이는 것은 다른 것이었으니까.

‘아들이라니.’

해월에게 자녀가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해월은 혼인에 대한 의사가 없었거니와 이성과의 교류도 전무해 보였다.

미인들이 넘쳐나는 하련방 기녀들에게도 호의 이상의 다른 사감은 없다는 듯 굴었고, 송 행수와 같은 걸출한 미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아들이라니.

연진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지금껏 해월에게 제가 유일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착각이라고 비웃는 것 같아서 기분이 가라앉았다.

여명과 함께 있는 모습이 정다워 보여서 더욱 속이 쓰렸다.

해월이 남에게 그리 진심으로 웃어 주고 다정스럽게 대하는 게 거슬렸다.

그런 스스로가 소인배 같다고 생각되었다.

“왜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뭐가?”

“아들이 있다는 것 말입니다.”

“아아.”

해월이 여명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에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냥.”

단출하다 못해 성의 없기까지 한 답변에 연진은 기가 찼다.

“야야 영력 닫아라.”

“하아…”

연진은 한숨을 쉬며 진정했다.

“그… 서운할 수도 있겠는데 어차피 만나면 알게 될 거니까 굳이 말 안 했어.”

“그래도 언질이라도 주실 수 있었잖아요.”

“음…그건 그러네.”

수긍은 빨랐다.

문제는 놀리는 것도 빨랐다는 것이다.

“우리 도련님 많이 섭섭했구나?”

해월이 야살스럽게 웃으며 연진의 옆구리를 찔렀다.

연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썩어 들어갔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은 해월은 연진의 양어깨를 토닥였다.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아니거든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왜 너도 여명이처럼 업어 주랴?”

“됐습니다.”

“그래 너 업었다가는 내 허리 부러져.”

시답지 않은 말을 하고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반면 연진은 한없이 진지했다.

“혼인은… 언제 하셨던 겁니까.”

“혼인?”

잠시 반문하던 해월은 침울하게 시선을 내리고 있는 연진을 보고 속으로 웃었다.

“글쎄… 언제 했었더라.”

순간 연진은 세상이 무너진 사람이 되었다.

꽤나 충격을 받은 모양새인 연진을 보고 해월은 웃음을 참기가 어려워서 허벅지를 꼬집어야 했다.

여기서 더 놀렸다가는 또 연진에게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랐다.

늦기 전에 해명을 할 때였다.

“사실 여명이는… 내가 데려온 아이야.”

방금 해월이 한 말에는 일말의 모순이 있었다. 정말 온전히 스스로 한 선택은 아니기 때문이다.

제가 원해서, 제 손으로 직접 데려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직도 가끔씩 그날 제 품 안에 들어왔던 작은 아이의 체구가 느껴지는데도 불구하고.

“데려온 아이요…?”

“아이 어머니로 보였던 분이 그 애를 안은 채로 죽어 있었어.”

해월은 아버지와 같이 이 일대를 살펴보던 도중에 여명과 여인을 발견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쫓기는 신세였던 모양이야.”

나중에 여명에게 네 모친은 너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했을 것이라고 전해 주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죽은 와중에도 아이를 절박하게 끌어안고 있을 수 없을 테니까.

‘그 애를 두고 갈지, 데리고 갈지는 네 선택이야. 네 마음 가는 대로 하거라.’

선학경은 그 말만을 남기고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해월은 그 자리에 남아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선택의 시간은 그리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아이는 누가 보아도 위태로운 상태였다.

그리하여 해월은 결단을 내렸다.

“난 그 아이에게서 나를 보았던 걸지도 몰라. 두고 갈 수가 없더라고.”

결국 해월은 아이를 데려왔다. 그리고 여명(黎明)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해서 양아들로 삼으신 겁니까?”

“아니. 원래는 난향댁에게 맡겨놓고 가끔 들여다보기만 했었어.”

난향댁은 지금은 사라진 난향국 출신의 아낙이라서 난향댁이라 불렸다.

성격도 푸근하고 인자하여 여러모로 아이를 맡길 만한 여인이었다. 실제로 여명도 난향댁을 제법 잘 따랐다.

“근데 난향댁보다 날 엄청 따르더라.”

어디를 갈 때나 졸졸 쫓아다니고, 안 떨어지려 애를 쓰는 여명을 보면서 곤란하기도 했지만, 아이가 본래 그런 것이지 않나 싶었다.

어쨌거나 자신의 선택으로 데려온 아이이니 책임을 져야겠다는 생각에 여명의 모든 언동을 수용해 주었다.

제멋대로 아버지라고 부르거나, 제 이름을 선여명이라고 말한다거나 하는 것들이 그에 포함되었다.

“얼마나 아버지가 갖고 싶었으면 그럴까… 뭐 그런 생각도 들었거든.”

그때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외로운 인간이어서. 허울뿐인 가족 놀이에 그 아이를 끌어들인 것이라고.

부전자전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선학경은 무슨 목적으로 저를 들였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그도 생판 연고 없는 해월을 양아들로 삼았다.

마찬가지로 해월도 여명을 거두었다.

운명이란 것은 이리 대물림되는 것일까.

“너도 언젠가 만날지도 몰라.”

“……?”

“그냥… 가족이 되어도 좋겠다 싶은 사람?”

꼭 혼인 같은 걸로 엮이는 가족이 아니더라도 의형제나 수양아들, 의붓자식처럼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말이다. 피로 맺어지지 않아도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해월이 가장 잘 알았다.

해월은 문득 연진에게 의로 맺은 가족이 생기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생긴 것만 보면 쌀쌀맞기 그지없는 연진이라 누군가와 가족으로 있는 모습이 제대로 상상이 안 되어서 푸흡 하는 웃음이 샜다.

갑자기 저를 빤히 보더니 웃는 해월을 향해 연진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월은 연진이 무어라 말을 붙이기도 전에 소매를 붙잡고 얼른 이끌었다.

“가자 가자. 여명이 기다리겠다.”

화제를 돌리려는 노력이 가상해서 연진은 말을 꺼내기를 관두었다.

***

집에 돌아온 해월은 연진과 여명에게 밥을 차려 주었다.

두 사람 다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여명은 오랜만에 보았고, 연진은 손님이니 대접해주고 싶은 마음에 거절했다.

“차려 주신 밥은 처음 먹습니다.”

“아버지 요리 엄청 잘하거든.”

여명이 옆에서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난 아는데 넌 모르지, 같은 느낌이 나는 말이었다.

연진은 여명이 제게 보이는 태도에 불만이 없었다. 어린아이니까 여러모로 제 존재가 불편하겠다 싶어서였다.

“많이 먹어.”

해월은 양손으로 연진과 여명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요리는 간만에 해 본 참이라 어쩐지 떨리기도 했다. 그저 맛있게 먹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연진이 국을 한 술 떠먹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맛있습니다.”

솔직한 본심에서 우러나온 한마디였다.

연진은 설령 음식이 맛이 없다 해도 산해진미를 맛본 것처럼 말할 생각이었다.

해월은 늘 달거나 짠, 혀에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하니까 당연히 요리도 그렇게 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한 예상을 뒤집듯이 해월이 차린 밥상은 꽤 입에 잘 맞았다.

간소한 차림이지만 확실히 많이 해 본 사람 특유의 손맛이 느껴졌다.

“맛있으면 다행이고.”

해월은 잘 먹는 연진과 여명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자식들이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작금의 이 편안함은 선학경이 없어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기도 했다.

그가 출타 중이라 집을 비운 것이다. 그 덕에 시간이 조금 뜨게 되었지만, 그동안 마음의 대비를 하면 된다. 어려울 것은 없다.

식사를 마친 해월은 그릇 정리하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연진을 한사코 말렸다.

“손님이면 손님답게 있어라.”

“그래도….”

해월은 연진의 한쪽 어깨를 잡고 부드럽게 밀었다.

“어허. 넌 여명이나 놀아 줘.”

“내가 왜 저 형이랑 놀아야 돼?!”

여명의 반발은 거셌다.

“그럼 놀지 말고 둘이 얘기라도 하든가.”

그렇게 해월은 둘을 두고 저만 쏙 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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