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정말 이대로 가도 괜찮겠습니까.”
연진이 걱정을 내비쳤다.
“괜찮아. 촌장님은… 아저씨는 이미 알고 계시거든.”
이전부터 해월의 눈에는 또렷하게, 연진의 눈에는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바로 촌장의 얼굴에 그을음 같은 것이 보인다는 것. 그것은 서서히 드리워지는 죽음의 그림자였다.
가끔 죽음을 목전에 둔 이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살 만큼 사셨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니 미련은 없을 거야. 곁을 지켜 드리겠다 해도 오히려 꺼지라고 하실 거야.”
촌장은 어차피 그에게 다가온 죽음을 숨기거나 저항해 볼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아까 전 해월에게 건네줬던 탕약은 각혈을 다스리는 데 효험이 좋은 약재의 맛이 났다.
어젯밤에 연진이 부엌에서 핏자국 같은 것을 봤노라고 얘기했을 때 솔직히 뜨끔했지만, 촌장의 것이라고 설명했다. 따지고 보면 아주 거짓말은 아닌 셈이다.
“…….”
그저 이렇게, 하나둘씩 떠나가는 거다.
내가 떠나거나, 혹은 타인이 떠나거나.
순서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연진은 생각했다. 해월이 연을 맺었다고 부를 수 있는 대상은 그와 범상치 않은 기억을 공유했다는 특징이 있다고 말이다.
송 행수도, 금방 헤어진 촌장도. 모두 해월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지언정, 충분히 원망하고 증오할 수도 있는 관계였다. 실제로 송 행수는 해월을 원망했던 것을 사과하기까지 했다.
그런 관계가 겉으로나마 원만할 수 있던 것은 단지 그들의 아량이 넓어서가 아니라, 그들 역시 그저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해월이 악인이 아니라는 것을. 그 냉혹한 행동들은 전부 선의였음을.
하여 온전히 원망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기꺼워할 수도 없는 애매함이 오히려 그들을 괴롭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마음껏 원망할 수 있다면, 한 켠이라도 마음이 놓일 수 있으니까.
해월은 간만의 귀향에 조금은 들뜨기도 긴장되기도 했다.
그래서 이전과는 달리 말이 없어졌다. 표정도 굳은 것 같았다.
“…….”
나름대로 엄중한 선언을 하러 가는 것이니만큼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절연을 직접 입 밖으로 내뱉기로 한 건 처음이었다.
몇 없는 좋았던 시절로 그 모든 나쁜 순간을 상쇄할 수는 없었기에, 더 이상은 이 인연들을 이어가지 않으려 한다.
해월은 돌연 주위를 둘러보더니 연진을 붙잡아 세우고 말했다.
“이 근처가 내가 버려졌던 곳이야.”
친부모들은 참 매정하기도 했다. 이런 변방의 산에 내버려 두고 갔으니까. 심지어 그들은 산을 오르지도 않고 저더러 올라가라고만 했었다.
‘뭐 그 말을 따른 건 나였지만.’
가끔은 가정해 본다.
저도 번듯한 부모에게서 태어나서 평범한 형제를 갖고 안온한 삶을 살았더라면, 이 꼬여 버린 속이 풀어졌을까. 가정이란 것은 이토록 사람을 한없이 비참하게 만든다.
머릿속으로는 무엇인들 못 할까. 하늘의 신도 될 수 있겠지.
현실은 그저 땅을 딛고 서 있는 한낱 인간일 뿐이다.
“여기서 아버지를 처음 만났는데. 아버지 아니었으면 난 여기서 산짐승 먹이가 되거나 굶어 죽었을 거야.”
어쩌면 요괴에게 혼이 잡아먹혀 소멸되었을 지도 모르지.
“…….”
“근데 나 그때 아버지한테 구해 줘서 감사하단 소리도 안 했어. 왜 구해 주냐고 되묻기만 했지.”
아이의 직감은 어른보다 뛰어나다고들 하지 않나. 아마 그때의 저는 선학경이 저를 모질게 대하고, 이 빌어먹을 저주에 걸리는 데 일조하게 될 것임을 알았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우스워지고 속이 조금 풀렸다.
연진은 가만히 해월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걸었다.
“가요.”
“…….”
해월은 그 순간 연진이 마치 인도자 같다고 생각했다.
이곳 지리를 훤히 꿰뚫고 있는 것은 연진이 아니라 저일 텐데도. 그저 따라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렇게 해월은 멈춰 서지 않고 나아갔다.
마을의 초입에 다다라서 해월은 막대기를 허공에 휘두르고 있는 소년을 보았다.
소년은 누가 보는지도 모른 채 한참을 막대를 휘두르다가 이내 저를 보는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해월과 연진 쪽을 보고 고개를 잠시 갸웃거리더니, 멀리서도 훤히 보일 정도로 얼굴 만면에 꽃을 피웠다.
해월도 소년이 반가웠던지라 마찬가지로 밝은 미소를 지었다.
연진만 영문을 몰라 그저 어리둥절했다.
그때, 소년이 막대기도 패대기치고 달려오며 외쳤다.
“아버지!!”
“오랜만이다!”
해월은 달려오는 소년을 마주 안으며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이윽고 소년을 내려놓은 해월은 산발이 되어 있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지냈어?”
“왜 이리 늦게 왔어! 해 지나면 금방 온다더니!”
“미안, 미안. 내가 일을 좀 치러서.”
“아버지야 맨날 일 치르잖아.”
또다. 소년은 이제껏 두 번이나 해월을 아버지라 불렀다. 해월은 그게 익숙한 호칭인 듯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
연진의 시선이 전에 없이 크게 요동쳤다. 몸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버지…라고?’
아버지, 부모 중 부, 자식을 둔 사내를 이르는 말….
머릿속에서 상식적인 정의가 떠돌았다.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두 번씩이나 잘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녀석 키는 좀 컸냐.”
“나 많이 컸어.”
“역시 애들은 금방 크네.”
“나 애 아니야. 나중에 더 엄청나게 클 거야.”
“그래라 그래.”
그들의 사소한 대화가 연진의 귀에는 죄다 먹먹하게 들렸다.
‘그럴 리가 없어.’
해월은 분명히 여인과 가까이한 적이 없다는 듯이 말했고, 혼인할 생각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앞말이 거짓이라면?
거기다 혼인할 생각이 없다고 말한 것은 이미 한 번 이별의 아픔을 겪었기 때문이라면?
상상이 점점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갔다.
연진은 등줄기가 싸해지는 것을 느끼며 식은땀을 흘렸다.
“저기, 아버지라니요…?”
“아, 얘 내 아들이야.”
긴장했던 것이 민망할 정도로 단출한 답변이었다.
“…….”
철퇴로 머리를 얻어맞으면 이런 기분일까. 사고의 길이 어지럽게 꼬이는 것 같았다.
아이는 대충 열 살 내외 정도 되어 보였다. 해월은 이십 대 중반의 나이이니 늦지 않게 혼인했다면 저만한 아들이 있을 법도 했다.
연진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해월과 소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해월과 소년은 전혀 닮은 구석이 없었다. 그러나 이내 소년이 외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와중에 해월은 소년을 앞세우고 연진에게 인사를 시켰다.
“일단 인사부터 해.”
소년은 해월의 옷깃을 쥔 채 그의 등 뒤에서 빼꼼 고개만 내밀며 쭈뼛거렸다.
“……안녕.”
“쓰읍, 너보다 한참 형이니까 존댓말 써.”
해월이 타이르자 소년은 못마땅한 얼굴이 되었으나 이내 기어가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면을 틀 때는 이름도 같이 말하는 거야.”
재차 타이르자 이전보다는 조금 더 분명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여명, 선여명…이에요.”
여명은 공손한 어투가 매우 어색한 소년으로 보였다. 불퉁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해월은 이만하면 됐는지 설명을 이었다.
“내가 소개해 주겠다고 한 애가 얘야. 이 녀석이 예의를 잘 모르긴 해도 심성은 좋은 애니까 너무 나쁘게 보진 말아 줘.”
나름대로 애 앞에서 말을 가려 하려는 건지 해월이 연진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다 들리거든.”
여명이 발끈했다. 그러나 해월은 천연덕스러웠다.
“들으라고 한 얘기야. 너 아직도 공대(恭待)하는 데 미숙하잖아.”
“뭔 상관이야! 말만 통하면 됐지!”
“어쭈, 이게 간만에 만난 아버지한테 까불어.”
두 사람이 입씨름하는 동안 연진은 양측을 번갈아 보았다.
다시 찬찬히 뜯어보아도 여명과 해월은 너무나 다른 생김새를 가졌다.
우선 해월에게는 있는 가선(쌍꺼풀)이 여명에게는 없었고, 전체적인 얼굴선이나 피부색 등이 확연히 차이가 났다.
연진의 의아한 시선을 먼저 짚은 것은 해월이 아니라 여명이었다.
“뭘 봐요.”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어투였다. 이에 해월은 조용히 손을 뻗어 여명의 이마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딱,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아!”
“엄살 피우지 마. 얼른 형한테 사과해.”
여명은 붉어진 이마를 부여잡으며 해월에게 원망의 눈길을 보냈다.
“……송구합니다.”
정말 사과하기 싫어 죽겠다는 티가 팍팍 나는 태도였다. 해월은 대신 사과의 뜻을 전했다.
“타고난 성정인지 애가 손윗사람 공경할 줄을 모르는 편이야. 아무리 가르쳐도 안 되더라고. 미안하지만 네가 이해해 줘.”
“괜찮습니다.”
연진이 너그럽게 반응했다.
한편, 여명은 불만스러운 듯 씩씩거렸다.
“왜 나만 인사해? 저 사람은 뭔데.”
“쓰읍.”
해월이 재차 주의를 주자 여명은 말을 고쳤다.
“…저 형은 누구신데.”
“쟤는 내,”
찰나의 순간, 연진은 해월이 할 말을 가로챘다.
“제자야.”
“……?”
갑자기 적극적으로 변한 연진을 해월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이름은 강연진이다.”
말하는 음성에 전에 없던 힘이 실려 있었다.
“…제, 제자요…?”
연진의 말을 듣고 놀란 여명이 설명을 요구하듯이 해월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얼굴을 찌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토록 단호하게 말을 하는 연진을 본 적이 거의 없는 터라, 해월은 놀라 당황하고 말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아버지가 어떻게 제자가 있어?”
어떻게 제자가 있냐니. 말이 좀 심한 것 아닌가.
“…그렇게 됐다.”
해월은 그 밖에 달리해 줄 말이 없었다.
여명은 작지만, 엄연히 분노가 섞여 있는 걸음으로 대뜸 연진의 앞에 서더니 따박따박 따졌다.
“당신이 우리 아버지 꾀어 낸 거지!”
“……?”
무어라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여명이 이어서 말했다.
“아버지는 은근히 단순하고 어설퍼서 넘어갔을지는 몰라도 난 안 넘어가. 무슨 목적인지 말해.”
“…….”
“하, 아주 욕을 해라 욕을."
맹랑한 말을 뱉어 내는 여명을 보고 해월은 눈가를 짚었다.
“내가 꾀어 낸 거거든?”
“그래, 아버지가 꾀어 낸… 뭐?”
“귀한 도련님 꾀어서 사고치고 출가시킨 건 나라고.”
해월은 여명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일들을 최대한 축약해서 설명했다.
똑똑한 애니까 대충 알아듣긴 하겠지만 그것이 이해로 이어지긴 어렵겠지. 그래도 설명은 해 주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명의 표정은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였다.
“…이상한 줄은 알았는데 진짜 이상한 짓 하고 다녔네….”
“야 인마 이젠 대놓고 욕하기로 한 거냐.”
“진짜야?”
여명은 이제 해월이 아닌 연진에게 진실을 요구했다.
“반말하지 말라니까.”
연진이 답하기도 전에 해월이 한 소리 하자 여명은 말을 고쳤다.
“정말 당신, 아니 형이 한주 강씨 공자예요?”
연진은 답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에 여명의 얼굴은 더욱 경악으로 물들었다.
앞선 송 행수나 촌장과 일견 비슷한 반응이지만 정도가 더 심했다.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싶어 연진은 되레 의아해졌다.
“아버지 혹시 환술 그런 거 쓴 거야?”
“넌 내가 무법자인 줄 아냐.”
해월은 여명이 어디서 큰일 날 소리를 하나 싶었다.
그런데 여명은 ‘맞잖아’라고 얼굴에 써 붙이고 있었다.
해월은 그것이 언짢아서 여명의 머리를 콩 하고 때렸다.
여명이 입술을 삐쭉였다. 느닷없이 제자가 생겼다는 말에 놀라고 속상한 건 저인데 왜 맞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 계속 기다렸는데… 왜 오자마자 때리기만 해….”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는 것을 보자 해월이 뒤늦게 당황했다.
“야, 사내애가 뭘 울고 그러냐….”
예전에도, 지금도 아이가 울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몰랐다.
해월은 일단 여명을 안아 들고 작은 등을 토닥였다.
여명은 해월의 목을 끌어안고는 연진을 향해 혀를 메롱거렸다.
난데없는 행동에 연진은 황당했으나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 저 아이 역시 자신이 해월에게 유일한 줄 알았겠지.
와중에 여명은 그럴듯하게 물기 어린 목소리를 냈다.
“아버지 이제 다시 안 갈 거야?”
“음, 그건 생각해 봐야 해.”
해월은 빈말을 하지 않았다. 이번 귀향이 마지막 귀향임을 상기해서였다.
“그래도 며칠은 더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진짜?”
여명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응, 진짜.”
해월은 여명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며 웃었다.
그 화목한 모습에 연진은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