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연진은 해월을 찾으려 작은 마을의 곳곳을 돌아다녔다. 시간이 늦어 그런지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결국 어디서도 해월을 발견하지 못한 연진은 길이 엇갈렸겠거니, 애써 짐작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어, 왔어.”
방문을 여니 머리칼이 젖어 있는 해월이 눈에 들어왔다.
남의 속도 모르고 태연히 맞아주는 모습에 짧게 한숨 쉰 연진은 찬바람이 들까 얼른 문을 닫았다.
“대체 어디에 있다 오셨습니까.”
“몸도 풀 겸 좀 돌아다니다가 왔지. 나 먼저 씻었는데 너도 씻을래?”
“…….”
천연덕스러운 말에 연진이 잠시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여유로운 척하고 있지만, 해월은 등 뒤로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끼며 웃었다.
다행히 연진의 눈빛이 누그러졌다.
“그건 뭡니까.”
그가 해월의 앞에 있는 상을 쳐다보았다.
“밤암죽. 너도 먹을래?”
“암죽을요? 어디 안 좋으십니까?”
“그냥 소화가 좀 안 돼서 가볍게 먹으려고.”
그 말에 표정이 어두워진 연진이 해월의 앞에 앉아 진지한 어투로 말을 꺼냈다.
“…사부, 혹 소화가 안 되고 속이 답답하시면….”
후루룩.
“그러니까 울증이라든지….”
후루룩.
“화병일 수도 있으니까 주의를….”
후루룩.
“…….”
암죽을 대차게 먹으며 그릇을 비우는 소리 때문에 자꾸만 말이 끊겼다. 결국 연진은 말하기를 포기했다.
그릇에 얼굴을 박을 기세로 먹는 해월을 물끄러미 보던 연진은 제 걱정이 기우가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을 했다.
그릇을 내려놓으며 만족스레 입매를 늘린 해월은 황망한 얼굴로 저를 보는 연진에게 해맑게 물었다.
“왜? 뭔 일 있어?”
“…아뇨, 없습니다.”
연진이 고개를 저었다.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온 촌장은 곧바로 지청구를 주었다.
“먹었으면 얼른 그릇을 내놔야지 이놈아!”
“지금 하려고 했습니다.”
해월이 일어서려 하자 연진이 대신 상을 들었다.
“제가 치우겠습니다.”
“내가 해도 되는데.”
“쉬고 계세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촌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관일세. 아주 가관이야.”
“뭐가요.”
“그걸 정말 몰라 묻는 거냐?”
“모르니까 묻지, 아는데 왜 묻겠습니까.”
투덕대기 시작하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연진은 부엌으로 향했다.
그렇게 상을 내려놓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바닥에 무슨 자국 같은 것이 있다. 그게 무엇인지 확인하려 가까이 다가가던 그때.
“흠! 거기서 뭐 하쇼. 남의 집 부엌 털려 하는가?”
“…아닙니다."
연진은 떨떠름한 낯을 한 채 도로 방에 들어갔다.
그러나 연진이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휴….”
촌장이 꽤 다급하게 달려 나왔다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입씨름하다가 미처 치우지 못한 핏자국이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은 해월이 촌장의 등을 냅다 떠밀었기 때문이다.
“말년에 이게 웬 고생이냐.”
젊은 놈들이 염병 떠는 꼴을 봐야 하는 제 신세가 처량했다.
***
“피곤할 테니까 어서 자.”
해월은 여직 물기가 남아 있는 머리카락을 대충 수건으로 털고 자리에 누울 준비를 했다.
그러자 연진은 해월이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수건을 집어서 도로 머리 위에 얹었다.
“이제 완연한 겨울이니 제대로 말리셔야 고뿔에 안 걸립니다.”
“그러는 너는 나보다 머리도 길면서.”
어투에 소심한 반항기가 섞여 있었다.
“저는 잘 말렸으니까요.”
연진은 해월의 머리에 수건을 얹은 채로 물기를 털어 말려 주었다.
해월은 그 손길을 고분고분하게 받았다.
여전히 남이 무언가를 해 주는 것이 달갑지도, 익숙하지도 않았지만, 연진은 달랐다.
저보다 한참 어린 녀석인데도 불구하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몇 년을 더 산 어른의 체면에 맞지 않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연진의 옆에 있으면 일찍이 접었다고 생각한 희망이 되살아났다.
그래서 덧없고 헛헛한 마음이 들었다.
그 마음이 눈빛으로 드러난 건지 연진이 빤히 시선을 마주했다.
“왜 그러십니까.”
“…뭐가?”
“꼭… 그때 같은 표정이어서요.”
그때라면… 해월이 그를 속이고 몰래 한주를 빠져나가려 작정했던 무렵이었다.
“진아, 강연진.”
꼭 멀리 있는 사람을 부르는 것 같은 음성이었다. 그러나 연진은 의아해하지도 않고 받아 주었다.
“예, 저 여기 있습니다.”
여기에 있노라고.
그 한마디가 마음에 와서 기어이 닿고 말았다.
역시 이상했다.
자꾸만 저를 부끄럽게 만들고, 약해지게 하는 이것을 무어라 이름 지을 수 있나. 궁금해지려 했지만 묻기를 관두었다.
알게 되면, 살고 싶어질까 봐.
모든 비밀을 털어놓고 그저 멀리 도망가서 하고 싶은 것들만 잔뜩 하며 살자는… 이기적인 제안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해월은 입안의 살을 씹으며 충동을 참아 냈다.
앞으로 연진과 함께 하는 시간 내내 해월은 같은 충동에 시달릴 것이다. 그러나 참고 인내하는 데에는 도가 텄다.
삐져나온 욕심 한 자락을 미처 갈무리하지 못했다. 그래서 해월은 연진의 목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도 연진은 떨쳐 내거나 놀라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것 같았다는 듯 포근한 웃음을 지으며 해월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느릿한 박자로 전달되는 위로가 좋았다.
“사부의 아버님 때문에 고민되시는 겁니까.”
“…….”
잘못짚었다만 그것도 영 고민이 아니라 할 수는 없는지라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양새 자체는 해월이 연진을 안고 있는 형태였지만 이상하게도 연진이 해월을 안아 주는 것 같았다.
그 온기가 못 견디게 좋아서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실은 내가 아주 못된 결정을 했거든.”
품 안에 있는 연진의 몸이 굳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주제에 등을 토닥이는 손길은 멈추지 않는 점이 우스웠다.
“들으면 깜짝 놀랄걸?”
“…무슨 결정을 하셨길래 이리 겁을 주십니까.”
“그게 말이지….”
이 결정은 온전한 충동이 아니었다.
꽤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던 것이고 머릿속으로는 수백 번이나 수행한 일이었다.
해월은 지금껏 용기가 없어 하지 못했던 그 일을 행하려 한다.
“나 의절(義絕)하려고.”
그 말에 연진의 팔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해월도 그의 어깨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려 똑바로 얼굴을 마주했다.
“누구와…?”
“내게 의절할 사람이 누가 있겠냐. 아버지뿐인데.”
“…그렇군요.”
안도하는 모습이 다 보였다.
아, 귀여워. 이렇게 놀려 줄 생각은 아니었는데 저렇게 반응하니 몹시도 놀려 주고 싶어졌다.
“너랑 의절하려는 줄 알았어?”
“…아닙니다.”
“왜 아닐까? 방금 완전 겁먹은 얼굴이었는데?”
“아니라니까요.”
“예, 그러시겠죠. 도련님.”
크게 부정하지도 못하는 연진을 두고 큭큭대던 해월은 이내 연진의 이마를 검지로 눌렀다.
꽤 강한 힘이었던지라 무방비했던 연진은 쉽게 누운 자세가 되었다.
해월은 방 안을 밝히고 있던 촛불을 후- 하고 끄며 그 옆에 누웠다.
두껍고 무거운 이불이 그들의 위로 덮였다.
연진은 이 이불이 정녕 무겁긴 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괜히 아까 해월이 못 벗어난 게 아니었다.
그 뒤로 그 밤에 무슨 이야기를 나눴더라.
‘이제 와서 아버지와 의절하려는 이유, 안 궁금해?’라는 물음에 연진은 그저 여상한 투로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고 답했다.
해월은 자신도 명확히 짚어 낼 수 없는 그 이유를 연진이 어찌 알까 궁금해하다가 잠이 들었던 것 같다.
***
잠들기 직전까지 해월은 과거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혼인 안 하세요?’
당시의 선학경은 중년이었다. 혼례를 올리기에는 뭐한 시기였지만 굳이 혼례를 안 올려도 같이 살면서 혼례한 셈 치는 경우는 많다.
중년이긴 해도 선학경은 주술을 다룰 줄 아는 자였고 성격도 강인하였다. 비록 망국 출신이라 출세를 할 수 없고, 숨죽인 듯 살아야 하는 형편이지만 어차피 이 근방에는 다 그런 처지인 사람들뿐이었다.
선학경은 뜬금없는 혼인 소리가 어이없다는 듯 반문했다.
‘허, 만일 내가 혼인할 사람이 생겼는데 애 딸린 것이 싫다 하면 어쩌랴?’
‘싫다면 나가 살아야죠. 그게 자식 된 도리일진대.’
아버지의 부인은 곧 어머니다. 어머니가 싫어한다면 뭘 어쩔 수 있겠는가. 나가 살아야지. 달리 방법이 있을까.
‘꼬맹이 주제에 뭘 나가 산다고.’
‘저 이제 꼬맹이 아닙니다.’
‘그 나이면 아직 꼬맹이야.’
선학경은 기도 안 찬다는 반응이었다. 뜬금없이 혼인 얘기를 꺼낸 것도 모자라 웬일로 자식된 도리 운운하길래 훈련의 효과가 있나 싶었더니, 곧이어 하는 말은 여전히 심지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걸 태생이라고 불러야 할까. 날 때부터 타고나서 도무지 바꾸기 어려운 것을.
해월은 그저 궁금했던 것뿐이다.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러나 그 질문은 선학경의 안에 있는 무언가를 건드린 모양이다.
‘나는 혼인 따위는 하지 않는다.’
‘왜요. 혼인하면 좋다고들 하던데.’
‘누가 그러디?’
‘밀월(蜜月, 결혼 직후의 시기) 즐기던 내외가요. 마음껏 사랑할 수 있어서 좋대요.’
둘은 상냥한 성격으로 해월을 어려워하지 않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곤 했다.
혼인이 얼마나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지, 아이를 잉태한 기분이 어떤지, 이 마을 밖에는 어떤 세상이 있는지.
별로 즐거울 일도 아닌 것 같은데 두 사람은 늘 웃는 낯으로 말했다. 해서 더욱 궁금해졌다.
혼인이 그렇게 좋고, 사랑을 하는 게 그리도 즐겁다면 왜 제 아버지는 하지 않는 것인지.
‘허면 네가 혼인해보든지.’
‘어른들도 저를 안 좋아하는데 여동(女童)들이 절 좋아할까요.’
‘그건 네가 하기 나름이야. 가르쳐 준 대로 사람들을 대해라.’
‘그치만 아무리 웃으며 다가가도 다들 얼굴 붉히고 도망가던데요.’
‘뭐?’
‘얼굴을 붉히면 화가 난 거잖아요.’
타인의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배우고 있던 때였다.
차가운 어투와 표정은 감추고 늘 웃으며 따뜻하게 행동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또래 여동들에게 꽃으로 화관을 만들어 주거나, 활짝 웃으며 말을 걸고, 그네들이 하는 말을 경청해 주었다.
한동안은 가까워지나 싶더니 언젠가부터 제가 다가가면 다들 얼굴이 붉어져서 도망을 갔다. 아니면 곤란한 듯 삐질삐질 땀을 흘리거나.
덧붙여, 어째서인지 또래 사내애들은 저를 대놓고 싫어했다. 무슨 놀이를 할 때마다 번번이 제가 이겨서 심술이 났나 짐작하는 게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여하튼 결론은 하나였다.
‘그 애들은 다 저를 안 좋아해요.’
‘…….’
선학경은 한숨을 지었다.
이건 대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듯 곤란해 보이기도 했다.
해월은 그 한숨이 실망으로 느껴져 움찔했다.
그러나 선학경은 해월을 꾸짖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고 어쩐지 쓸쓸하게 느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혼인은 몰라도 사람을 사랑해 보는 건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
사람을 사랑하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와닿지 않아서 그저 눈을 끔뻑였다.
‘생을 돌아봤을 때 결코 잊지 못하게 되는 한 사람이 바로 네가 사랑한 사람이야.’
그때는 천천히 돌이켜볼 만큼 많은 세월을 살지 않아서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는데 다 커 버린 지금은 어쩐지 알 것도 같다.
일생을 되돌아보았을 때 기억에 남는, 특별히 아끼고 귀중히 여긴 사람.
제게 그런 사람이 누구인지 해월은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