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네가 뭐라고 하든 나는 선해월이고, 너야.’
무명이 했던 그 말이 무슨 의미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저 저를 놀리기 위한 거짓말에 불과한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일지.
귀신이라기엔 모호한 부분이 많았고 아예 환각이라기엔 실체감이 있었다.
결정적으로 제 자신과 의식을 완전히 공유하고 있었다. 심지어 능력마저도.
마음속으로 짐작만 하고 있던 것을 대신 증명해 주기도 했다.
일전에 호랑이를 맞닥뜨렸을 때, 영험한 동물은 불로의 저주에 걸린 자신을 먹지 않을 것이라고 스치듯 생각했었다.
다만 확신할 수 없어 시험해 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 나타난 무명은 피를 내어 주술을 쓰려는 저를 막아섰다.
그 때문에 호랑이한테 밟혀 제법 고역을 치렀지만, 무명이 제 분신이 아닐까 하는 의심의 빌미를 제공해 주었으니, 확실히 남는 장사라 할 수도 있겠다.
분신. 그것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다.
“대답해.”
“…뭐, 어쩌라고.”
까칠한 태도였다.
그 말이 맞긴 맞다는 얘기다.
“나는 분신을 만드는 주술을 쓴 적이 없어. 그 주술은 잘 알지도 못하고.”
“그래서?”
“그래서라니.”
“세상은 범상한 일만 있지 않다는 거 네가 가장 잘 알잖아.”
“…….”
안다. 세상에는 예삿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더불어 좋은 일만 있지 않다. 대부분의 삶은 불운의 연속이다.
이 땅에서 가진 것 없는 핏줄로 태어난 것부터가 불운이요, 그러면서도 살고자 발버둥 친 게 제 실책이다.
“넌 아직도 어려.”
“…….”
지금 열댓 살 언저리로밖에 안 보이는 외양을 한 채로 저게 할 말인가 싶었지만 반박할 기운이 없었다.
누운 자세를 일으키기도 귀찮고 힘들어서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 상황이다. 조금 전 단도를 꺼낸 것도 겨우 한 것이다.
그런 해월을 두고 무명은 제집처럼 벌러덩 드러눕더니 듣기 싫은 말을 꺼내 놓았다.
“너는 네게 걸린 저주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잖아.”
“입 다물어. 그건 다 지난 일이야.”
해월은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로 선을 그었다. 이에 무명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을 뿐이었다.
과거의 모습이라고는 하나 제 얼굴, 제 목소리였던 지라 불쾌감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무명은 턱을 괴고 해월을 보며 비웃었다.
“신의 힘을 빌리는 것을 가벼이 여기고, 신의 분노를 사고, 심지어 주제도 모르고 신을 증오하기까지 했는데… 좋은 일이 생길 거라 기대했나?”
‘저 새끼는 누굴 닮아서 저리 예의가 없게 말하는 거지.’
해월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이래도 저 녀석은 다 들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무명의 표정이 짜증으로 일그러졌다.
“너 닮은 거겠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라!”
“난 너처럼 예의 밥 말아 먹은 분신 둔 적 없다.”
“하, 어이가 없어서 진짜….”
순간 해월에게 말려들던 무명은 씩씩거리며 엄포를 늘어놓았다.
“두고 봐. 후회할 거야 너.”
“어이구 무서워라.”
“아오. 저걸 그냥….”
쯧쯧거리던 무명은 이내 엷은 미소를 지었다.
곁눈으로 그 미소를 본 해월은 "뭐야." 하고 작게 반응했다. 무명은 답했다.
“지금의 네가 가장 싫어할 만한 일이 생길 거야.”라고.
그 직후 시야가 암전되었다.
***
“헉.”
숨을 들이켜며 눈을 떴다.
대체 언제부터 잠이 들었지. 방금의 일은 꿈속의 일이었던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합쳐져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머리가 몽롱해서 사고가 돌아가질 않았다.
그 와중에 이놈의 옥돌 넣은 이불은 어찌나 무거운지 상체를 일으켜 세우는 데도 하세월이 걸렸다.
‘아….’
일어나자마자 느낌이 싸한 것이 예감이 좋지 않다.
“쿨럭.”
입 밖으로 튀어나온 축축한 것이 피가 아니길 바랐지만….
‘씹…그럴 리가 없지.’
원래 이런 불길한 예감은 적중하는 것이 도리였다.
피를 보고 나니 뒤늦게 속이 아렸다. 굳이 안 알려줘도 죽어가는 몸이라는 건 잘 알고 있는데 참으로 얄궂다.
누가 얄궂냐면, 바로 신이었다.
뭐? 신의 분노를 사?
어쭙잖은 능력으로 천신의 힘을 빌리려 한 것 가지고? 아니면 신을 부정해서?
어느 쪽이든 신은 불공평했다. 딱히 진지하게 공평한 존재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지만.
“…이런 씨….”
욕을 짓씹은 해월은 그대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부엌 쪽에 물이 있을 것이다. 거기서 대충 씻은 다음에….
해야 할 일의 순서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겨우 부엌에 당도한 해월은 물이 담겨 있는 장독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어딨는 거야.’
자신이 정확히 얼마나 누워 있었는지는 몰라도 해가 저무는 모양이니 꽤 시간이 지난 것 같다. 고로 연진과 촌장이 돌아올 것이란 얘기다.
지금과 같은 이상증세를 또 한 번 연진에게 들켰다가는 또 의원을 찾아가니 뭐니 하면서 귀찮게 굴 것이 뻔하다.
그 꼴을 보기 전에 얼른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
쿨럭, 의지와 달리 핏물은 계속해서 쏟아졌고 더 이상 손으로는 막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연진이 아니라 촌장이었다.
촌장은 해월을 발견하고 잠시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
“사부가 방에 없습니다.”
촌장의 등 뒤로 연진이 저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어떡하지. 크게 당황한 해월은 우왕좌왕했다.
그 사이 연진의 발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숨을 곳을 찾던 해월은 일단 부엌 구석에 쪼그리고 입을 틀어막은 채 숨을 참았다.
제발. 누구한테 무엇을 비는지는 몰라도 일단 빌었다.
그 간절한 기도가 통했을까.
“혹 사부가 어디 가신 건지 아십니까?”
“나도 모르오. 속을 알 수가 없는 놈이지 않소. 또 물방개처럼 돌아다니는 모양이오.”
촌장이 모르쇠했다.
촌장의 말에 부엌문 앞에서 멈춰 선 연진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물었다.
“허면 갈만한 곳이 있습니까. 찾으러 다녀오겠습니다.”
“흠, 나도 잘 모르겠소. 내친김에 동네 한 바퀴 돌아보쇼.”
무책임한 말이었지만 그 수밖에 없다는 걸 아는 연진은 더는 묻지 않고 발을 뗐다.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해월은 참았던 숨과 다른 것을 함께 뱉어냈다.
커헉, 쿨럭.
꼴사나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통을 참고 소리를 죽임과 동시에 기척까지 최대한 지워 낸 터라 몹시 힘이 들었다. 이 정도로 기척을 완전히 지워 내려 용쓴 것도 처음이었다.
가까이서 해월의 상태를 살펴본 촌장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야 이놈아! 이게 다 무슨 일이냐?!”
“조용히 좀 해 주세요… 머리 울립니다. 그보다 저 욕간을 써야 할 것 같은데 물 좀 받아 주십시오.”
“하, 말하는 꼬락서니 보니 멀쩡하구먼.”
촌장은 이후 군말 없이 욕간에 물을 데워주었다.
그쯤 기침이 멈춘 해월은 입가가 빨개지도록 핏자국을 닦았다. 그나마 핏물이 내의까지 더럽히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옆에서 바가지로 물을 부어 주던 촌장이 가만히 물었다.
“아까 그 공자한테는 왜 숨기려 한 거냐.”
“걔는 걱정이 너무 지나치거든요. 들켜서 피곤해질 바에는 처음부터 안 들키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뭐, 어쨌든 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해월은 고마움을 표했다. 솔직히 아까는 꽤 위기라고 생각했었는데 촌장이 연진을 되돌려 보내준 덕분에 살았다.
“…그때랑 비슷한 거냐?”
촌장이 넌지시 묻자 해월이 되물었다.
“비슷하다뇨?”
“예전에 다 죽어가는 송장들 살리겠다고 네놈 집 문지방 닳았던 거 생각 안 나냐? 그놈들 생명 부지해 주겠다고 맨날 힘쓰다가 코피 쏟았잖아.”
“아….”
그랬던가. 잘 기억나지 않아 할 말이 없었다.
“되돌아보면 참 쓸모없는 짓거리였어. 어차피 죄다 뒈졌는데.”
원색적인 표현에 해월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고인을 함부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아저씨.”
해월의 충고에도 촌장의 말에는 막힘이 없었다.
“지 가족 못 살렸다고 징징대던 놈들도 결국 병 걸려서 뒈지거나 고통을 못 이겨 죽여 달라고 애원했잖냐. 가만 보면 지금까지 산 놈은 나뿐이지 않으냐?”
촌장의 말에 잠시 상념에 잠긴 해월이 운을 뗐다.
“아저씨, 예전에 했던 말 기억나십니까.”
“무슨 말.”
“제 수의를 짓겠다고 하셨잖아요. 다 지어 놓으셨습니까?”
아까 눈을 뜨자마자 생각났었다. 죽을 날을 받아 놓으면 꼭 그에게 얘기하겠다고 했던 대화를.
“그거 지어 놓은 지가 언젠데 이제 와서 얘길 꺼내.”
예상한 답변이 돌아오자 해월은 씨익 웃었다.
“역시 아저씨는 손이 빠르십니다.”
“지가 입을 수의 지어 놨다는 소리가 좋냐? 하여간 속 없는 놈.”
촌장은 어이가 없는 듯 바람 빠진 웃음을 지었다.
해월은 그저 싱긋 웃기만 했다.
“실은 제가 그날을 받아놓은 것 같아서요.”
“지금 네놈 꼴을 보면 그래 보인다. 뭐 죽을병이라도 걸렸냐?”
“비슷합니다.”
앞에서 죽는다는 소리를 하는데도 촌장은 특별한 반응이 없었다.
어쩌면 그건 선을 지키는 행위이다.
그들은 그저 동향 사람이고, 좋지 않은 기억을 공유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도 그건 아쉽군요. 아저씨 죽을 때 제가 편히 보내 드려야 되는데.”
“염병할 놈. 나는 하루를 더 살아도 네놈보다는 오래 살 거여.”
“하하. 송수련도 저보다 오래 살 거라 말하던데. 다들 저보다 장수할 자신이 있나 봅니다.”
“당연하지. 하는 짓 보면 네놈은 딱 단명할 상이야. 어때 내기라도 할 테냐?”
“어느 쪽에 거시게요?”
그렇게 묻자 촌장은 즉답했다.
“내가 더 오래 사는 쪽.”
“그럼 저도 그쪽에 걸겠습니다.”
“네놈이 그쪽에 걸면 내기가 안 되잖냐!”
“허면 없던 것으로 하죠. 뭐.”
촌장은 해월이 여러모로 아픈 사람만 아니었어도 한 대 때려 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 대신 물을 한 바가지 퍼서 머리 위에 부어줬다.
“아, 눈에 물 들어갑니다.”
“들어가라고 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