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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99화 (99/124)

99화

동굴을 빠져나와 산을 내려간 그들은 개울가에서 간단히 씻고 목을 축였다.

해월은 얼굴에 몇 번이나 찬물을 끼얹고도 멍한 상태인 연진을 바라보다 이마를 검지로 툭 쳤다.

“아….”

“엄살은. 살살 쳤거든?”

“…….”

연진은 반박하고 싶은 것이 많은 듯 보였으나 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였다.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고개를 받아든 해월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냐.”

“아니요….”

연진은 바위에 걸터앉은 채였고 해월은 서 있었기에 연진을 내려다보았다.

체격으로만 따지면 연진이 훨씬 듬직한데 이럴 때만큼은 한없이 작아 보였다. 해월은 연진이 아직 어리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겉이 아니라 속에 있는 모습이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내면을 감추는 데 미숙하다는 것일 테니까.

해월은 무릎을 구부려 연진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아까 무슨 일 있었지.”

“…….”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털어놓고 싶으면 털어놔도 된다는 얘기야.”

해월은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선택하길 바랐다.

“……실은….”

연진은 조심스레 운을 뗐다.

“처음 그곳에 들어갔을 때… 소리를 들었습니다.”

“무슨 소리를?”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주위에서 했던 소리… 숙부님과 형님이 했던 말들…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연진은 괴로운 듯 눈을 감으며 그 순간의 기억을 떠올렸다.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선명해지는 음험한 기운과 악취, 그것들을 견디고 당도한 곳은 그야말로 지옥과 같은 모습이었다.

살면서 그토록 참혹한 광경은 처음 보았다.

그에 놀라 굳어 있자 귓가에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것은 연진의 기억에 있던, 떠올리기 싫은 것들이었다.

‘어린 것이 가진 힘도 없으니 가주 자리를 빼앗긴 게지.’

‘네가 가문을 통솔할 힘이 없기 때문에 내 친히 형님의 뒤를 이은 것이다. 그런 주제에 배은망덕하게 굴지 말아라.’

연진에겐 하나같이 역겨운 말들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처음 들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깊은 무력감이었다.

그렇게 굳어 있는데 어느 순간 등 뒤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기다렸던 사람의 온정이었다.

해월은 연진의 눈을 가리고,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자신이 왔으니 괜찮노라고.

지금도 그러했다. 해월은 연진의 눈을 바라보며 따뜻하게 뺨을 쓸어 주었다.

모든 것이 안정되어 있다는 감각을 한 사람으로부터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연진에게는 해월이 그런 사람이었다.

“…….”

“잡귀가 원래 그래. 내 치부와 같은 기억들을 억지로 떠올리게 하거든.”

해월이 건네는 위로의 말에도 연진은 좀처럼 얼굴을 펴지 못했다.

연진의 시름은 갈수록 깊어져만 갔다.

“…하면 어떡합니까.”

“뭐?”

연진이 내는 작은 음성에 온전히 듣지 못한 해월이 되물었다.

망설이던 연진은 다시 말을 했다.

“…제가 힘이 부족해서, 강하지 못해서 잃는 것이 생기면 어떡합니까.”

“어떡하긴, 약하면 잃는 거야. 그게 싫으면 강해져야 하는 거고.”

위로라기에는 다소 냉담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연진도 어쩌면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물은 걸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해월은 거짓을 꾸며 말하는 것을 달가워하는 편이 아니다. 그가 장담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약해도 돼. 넌 내가 지켜 줄 거니까.”

힘이 닿는 데까지 지켜 줄 것이다. 무엇으로부터 지켜 주고 싶은 건지는 여직 모르겠지만.

“…그래도….”

“조급해하지 마. 너 아직 어리고, 지금도 충분히 강해.”

“…….”

단언하는 해월의 말에 연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중요한 사실이 떠올라 다시 입을 열었다.

“분이는 어찌 되었습니까?”

“그 아이는 떠났어.”

“떠났다면….”

“영혼이 가야 할 자리로.”

딱히 친절한 설명도 아니었건만 연진은 안심한 듯 풀어진 미소를 지었다.

“…다행입니다.”

“분이도 그 애의 아버지도 서로가 서로의 미련이었어. 더는 미련이 남지 않는 순간에 떠난 거야.”

분이와 분이의 아버지는 서로가 무사하길 바랐다. 하지만 그 바람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고, 짧은 순간에 서로를 본 것으로 미련을 거두었다.

“부녀의 팔자가 박복하긴 해도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다음 생이라도 평안하길 기도해 주는 게 귀신을 제령 하는 퇴마사로서 해야 할 일이야.”

퇴마사의 일. 사실 해월은 제 업에 대해 투철한 사명감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다.

간절하게 이 일을 꿈꿔서 시작한 것이 아니니까.

그저 누군가의 안식을 돕는 일이라는 것에 일말의 만족감을 얻고 있을 뿐이다.

그마저 없었으면 음기 때문에 불운이 옴 붙을 수 있는 이 일을 달가워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한이 많은 영혼이라면 어찌 되는 겁니까.”

“아마 지박령이 되거나 어쩌면 요괴가 될 수도 있겠지. 근데 그런 건 보통의 한으로 되는 일이 아니야.”

“그렇게 못 떠나는 영혼은 어떤 영혼일까요.”

“여러모로 지독한 영혼이지.”

저승의 존재가 이승에 머무는 것은 어쩌면 물속에서 숨을 쉬는 것과 비슷한 행위일 것이다.

순리에 맞지 않고, 일어나기도 어려운 일. 그래서 그런 영혼을 함부로 제령하기 꺼려진다.

같잖은 동정심이라 불려도 좋을 감정이다.

“내 경험상 한을 품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원통하게 죽은 자들이 귀신이 되고, 악귀가 되고, 요괴가 되더라고.”

누군가에 의해 억울한 죽임을 당하거나, 아주 이른 나이에 명을 달리하거나…

사연은 가지각색이다.

“그니까 넌 나중에 사람 죽이지 마. 그게 다 네 업이 돼.”

“……?”

갑자기 업에 관해 얘기하니 연진은 조금 당황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해월은 픽 웃었다.

“넌 내가 지금까지 죽인 사람들은 왜 악귀가 안 됐을 것 같아? 내가 부적을 잘 써서?”

“…부적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달갑지 않은 화제에 연진의 인상이 대번에 구겨졌다. 차마 해월의 말을 끊을 수는 없다는 눈치였다.

그게 우스워서 해월은 부러 더 천연덕스럽게 굴었다.

“그것도 맞긴 한데 난 죽여도 될만한 놈들만 죽여. 그런 놈들은 어차피 이승에 머무르기 어려우니까.”

예전에 마을을 약탈하던 도둑 떼나 송 행수의 아버지, 작정하고 화살을 쏜 무뢰배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모두 ‘죽어 마땅한 자’였다.

“자업자득이란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거든. 죽을 만한 일을 저지른 것들은 억울해할 자격도 없다는 거지.”

그건 해월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앞으로 어떤 죽음을 맞게 되더라도 억울해할 자격 따윈 없다고 생각한다.

가능하면 덜 고통스럽고, 덜 비참한 죽음이길 바라 볼 뿐이다.

해월은 옅은 미소를 지었으나 연진은 어쩐지 씁쓸한 얼굴이 되었다.

“앞으로 그런 것은 가급적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왜 하면 안 되는데…?”

해월은 연진이 말하는 저의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선학경이 자주 했던 말들과 닮아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반문하게 되었다.

강연진과 선학경. 나이도 출신도 성격도 무엇 하나 같은 것이라고는 없는 두 사람이지만 해월은 단 하나의 공통점을 알고 있다.

둘은 모두 해월과 연이 있는, ‘보통의 사고를 하는 사람’이다.

언제나 비난받았던 해월과는 다르게 평범하게 생각하고 그것의 옳음을 알고 있는 자들.

선학경은 주술사로 악명을 떨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선을 따르는 이였다.

연진도 선의 옳음을 알고 그를 따르는 자다.

‘그래도 아버지처럼 나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겠지.’

연진이 그러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불쑥 불안이 내밀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부질없는 불안이었다.

‘아….’

이제야 알았다.

‘나는 네가 많이 좋은가 봐.’

그래서 연진이 하는 작은 말 한마디에 집중하고, 불안해한다. 때론 그의 웃음에 해월도 따라 웃는다.

연진은 그런 해월에게 답한다.

“당신이 상처받는 것 같아서요.”

“내가…?”

상처를 받는다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사부가 사람을 죽여야만 한다면 그건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일을 계속하면 속병이 쌓여 위험합니다. 예전에 의원도 기혈이 몇 개 막혀 있다고 했었고요.”

“…별걸 다 기억하네.”

괜히 숨이 조여드는 기분이다. 기혈이 막혀 있다는 것을 이렇게 체감하는 건가.

“그게 어떻게 별겁니까. 사부는 몸을 너무 함부로 쓰십니다.”

“…….”

해월은 뜨끔하며 제 어깨를 흘긋 보았다.

‘괜찮겠지. 아직은 티 안 났을 거야.’

물론 그 믿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

‘하아.’

해월은 속으로 헛숨을 삼켰다. 어깨 근처가 욱신거리다 못해 화끈거리는 까닭이었다.

걸을 때마다 발끝에서 오는 진동이 어깨까지 울려서 통증이 거세졌다.

어릴 때는 아무리 매를 맞아 아프다 해도 비명 한 번 안 질렀었는데, 나이를 먹은 지금은 이리 작은 상처에도 신음을 삼키게 되는 것이 우스웠다.

피식거리다가 문득 제 옆에 연진이 있다는 것을 인지한 해월은 괜히 시선을 돌렸다.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 하나 나오는데 거기 촌장이랑 내가 아는 사이라 사정을 얘기하면 하룻밤 재워 줄 거야.”

단백산 근처에 있는 마을이었고, 해월의 고향인 단곡과도 가까이에 있다.

“예.”

연진은 짧게 대답하는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해월의 어깨를 붙잡았다.

“……!”

해월은 순간 신음이 흐르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태연한 척 고개를 돌렸다.

“…왜?”

“아까부터 땀을 많이 흘리시는 것 같아서요. 혹시 힘들면 쉬었다 갈까요.”

“아니, 괜찮….”

“괜찮다고 하지 마시고요. 땀을 이렇게 흘리는데.”

해월은 식은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다. 게다가 걸음걸이도 묘하게 어색했다.

지나치게 반듯하게 걸어서 도리어 경직된 것처럼 보였다.

그걸 눈치챈 연진의 지적에 뜨끔한 해월의 입은 착실하게 변명했다.

“…많이 움직였더니 더워서 그래.”

“바람이 이리 찬데요?”

“겨울이라고 땀 흘리면 안 된다는 법 있냐.”

연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허면 벗어 보십시오.”

“…….”

해월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연진이 언제부터 이리 예리해졌나 하는 생각에 잠긴 것이다. 그래서 변명이 뒤늦게 나왔다.

“…추워 죽겠는데 뭘 벗으라는 거야.”

“지금은 더우시다면서요. 벗으면 될 것 아닙니까.”

본격적으로 실랑이가 이어지려나 싶었다가 해월이 길게 한숨을 쉬면서 상황이 멈추었다.

“하아, 너 눈치챘으면서 일부러 이러지.”

“일부러라도 말 안 하면 계속 내색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네가 내 부인이라도 되냐? 잔소리하기는.”

“…잔소리가 아니라 도움을 드리려는 겁니다.”

“그래 너 잘났다.”

해월은 입술을 삐쭉거리며 비아냥댔다.

그러면서도 손은 착실하게 옷고름을 풀어 어깨만 보일 정도로 상의를 조금 내렸다.

“확인했으니까 됐지?”

그 물음에 답이 오기도 전에 다시 옷을 갖추어 입었다. 잠깐이었지만 맨몸에 찬바람을 맞으니 온몸이 시린 느낌이었다.

“…….”

“이제 가자.”

발걸음을 떼려는데, 연진이 해월의 손을 붙잡았다.

“왜 또.”

“어쩌다 생긴 상처입니까.”

“……호랑이한테 밟혔어. 변수가 생겨서 잠깐 당했는데 뼈가 부러진 것은 아니니 괜찮아.”

대충 설명하며 슬쩍 손을 빼려다가 도로 붙잡혔다.

“그 상처 때문에 내열이 생긴 것 아닙니까. 그 몸으로 더 길을 나서는 것은 위험합니다.”

“야 멍 좀 들었다고 쉬었다 가면 어느 세월에 가게?”

“하루 정도 늦는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건 또 맞는 말이었다. 큰일은 나지 않겠지.

다만 작은 일은 일어날 수 있다.

그것까지 연진에게 설명하기는 조금 망설여지는 터라, 해월은 머뭇거리며 애꿎은 연진의 손만 문질렀다.

“그… 혹시 속상한 거야…?”

나로 인해 마음이 아프냐는 물음을 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해월은 생전 처음 입에 올려 본 말에 낯이 간지러웠다.

반면 연진은 철옹성처럼 견고한 자세를 갖추었다.

“제가 그렇다고 하면 앞으로는 전부 내색하시렵니까.”

“…노력할게.”

“무슨 노력을요.”

“어… 그러니까….”

변명할 말을 찾으려 해월이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는 사이 말꼬리는 점점 길어졌다.

문득, 제가 왜 이리 쩔쩔매고 있나 싶어서 해월은 억울해졌다.

다친 건 저인데 왜 혼나는 것도 저인지 모르겠다.

“…….”

억울한 마음에 무어라 쏘아붙이려던 해월은 서늘하게 굳어 있는 연진의 표정을 보고 기가 죽었다.

남 앞에서 이리 주눅 들게 된 것은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처음인지라 당혹스러웠다.

역시 애초에 그들은 싸움이 되지 않았다.

연진에게는 질 수밖에 없었다.

아끼는 마음이 더 큰 쪽이 지는 것일 테니까.

“…내가 잘못했다. 앞으로는 안 그럴게.”

“말로만 약조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겠습니다.”

“칫. 철저하기는.”

그 밤, 결국 열이 심해진 해월은 연진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어느 민가에 의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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