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영력으로 물건을 만드는 것은 해월이 선학경에게 배운 주술의 일종이다.
다시 말해, 지금은 아는 이가 거의 없어 소멸된 것이나 다름없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백난국에서 이 주술을 쓸 수 있는 자는 해월과 선학경뿐일 것이다.
물체의 형태가 복잡할수록 다루기는 더욱 까다롭다.
해월의 손끝에서 얇은 밧줄처럼 뻗어나간 푸른 영기는 그물이 되어 굶주린 짐승들을 옭아맸다.
가까스로 그들을 모두 잡아낸 해월은 양손에 불끈 힘을 주었다.
“……!”
생각보다 짐승들의 저항이 거세서 해월은 입술을 짓씹었다.
이대로 힘이 빠질 때까지 붙잡고 버틸 요량이었는데 먼저 힘이 빠지는 것은 제 쪽일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다들 배가 제법 고팠나. 근데 내가 살이 별로 없어서 너희 배는 못 채워 줄 듯싶은데.”
해월의 농에도 짐승들은 그저 침을 흘리며 그들을 옭아맨 것을 끊어 내려 발버둥 쳤다.
그냥 그물도 아니고 영력으로 만든 그물이다. 고작 이빨 따위로 끊길 리가 없다.
해월은 엉겨 붙어 있는 산짐승들 사이에서 우렁차게 포효하는 산군을 보며 조소를 지었다.
힘들 때 차라리 웃어 버리는 것은 해월의 습관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 산군께는 피 한 방울 내어드리고 싶지 않은데. 대단하신 영물이시면서 이런 잔챙이들을 끌고 인간 사냥이나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저를 조롱하는 말임을 아는지 호랑이는 “크르르.” 소리를 내며 해월을 노려보았다. 살벌해 보이는 이빨이 어둠 속에서도 형형히 빛났다.
저를 향한 명백한 살의에 해월은 영기를 다루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푸는 순간, 저는 그대로 산짐승들의 입가심이 될 터다.
“사람 말을 알아듣는 모양이네. 그래 나도 네가 엄청 화났다는 건 알겠다.”
그때, 원치 않는 손님이 나타났다. 천진난만하고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힘들어 보이네.”
“……!”
“그냥 너 혼자 도망가면 되잖아. 뭣 하러 이 고생을 해?”
“…정신 사나우니까 닥쳐.”
난데없이 무명이 튀어나왔다.
가뜩이나 힘든 상황인데 옆에서 저와 똑같이 생긴 이가 얼쩡거리니 집중이 흐트러졌다.
“넌 참 피곤하게도 산다. 왜 굳이 남의 일에 관여해서 고생을 하지?”
“닥치라고.”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해월과 달리 무명은 여유롭게 뒷짐을 지고 해월을 관망했다.
“그냥 놔 버려. 별일 안 생길 거야.”
“…….”
할 수만 있다면 저놈의 머리통을 한 대만 때려 주고 싶었다.
“헛소리 그만해. 잘은 몰라도 내가 죽으면 너도 사라지는 거 아니야?”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무명이 해월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 순간 손아귀의 힘이 전부 풀리며 영력의 흐름이 끊겼다.
“야 너 뭐 하는…!”
뒤늦게 역정을 막아 보려 했으나 이미 영력은 형태를 잃고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해월은 그것을 황망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다시 힘을 짜내는 것보다 짐승 먹이가 되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았다.
그러나 통제하던 그물이 사라진 짐승들은 곧바로 해월에게 달려들지 않고, 산군을 위해 길을 터 주듯 물러섰다.
어째 인간보다 금수들이 더 충직한 것 같다.
“씹.”
잇새를 짓씹은 해월은 빠르게 뒷발을 디뎠으나, 설상가상으로 돌부리를 밟아 발을 헛딛고 말았다.
“……!”
뒤로 고꾸라지려는 짧은 순간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은 해월은 그대로 공중에서 몸을 돌려 가까스로 일어섰다.
‘젠장.’
급박한 움직임 탓에 발목에 무리가 갔다.
이 상태로는 평소처럼 빠르게 달릴 수도, 오래 달릴 수도 없다. 어차피 폐가 아파서 달리기는 자신이 없었지만.
게다가 여긴 산이다.
산짐승들에게 유리하지 인간에게 유리할 리가 없다.
일단 발목의 통증을 무시한 해월은 무작정 달려 나무 위로 올라갔다.
호랑이 역시 나무 위를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나운 발톱을 세우고 흉흉한 짐승의 눈빛을 한 채로.
커다란 호랑이가 매달리자 결코 가늘지 않은 나무 기둥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그 바람에 해월도 중심을 잃고 잠시 휘청이다 이내 바로 섰다.
“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하긴 발목을 접질린 저 역시 빠르게 올라갈 정도로 타기 쉬운 나무면 호랑이가 올라가는 것도 쉬울 터였다.
해월은 나뭇가지 끝으로 달려가 호랑이로부터 최대한 먼 바닥으로 착지했다.
“윽.”
나름 가볍게 내려앉았음에도 발목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 모든 상황을 초래한 무명은 어느샌가 또 사라진 상태였다.
‘다음에 또 나타나면 두고 보자.’
그때야말로 정말 없애 버릴 것이라고 다짐한 해월은 달리고 또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가슴속을 창으로 헤집는 것처럼 엄청난 통증에 점차 발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제아무리 인간의 발이 빨라 봤자 호랑이만 할까.
그렇지만 호랑이는 천천히 사냥감을 압박하는 것처럼 느린 속도로 해월을 향하고 있었다.
해월은 또다시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일전에도 범을 마주친 적은 종종 있었으나 대부분 어리거나 늙은 범이었던지라 이렇게 고전하진 않았는데, 오늘 마주친 저놈은 대호 중 대호였다.
창귀와 산짐승을 마음대로 부릴 정도니까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
불현듯 다치지 말라고 했던 연진의 말이 떠올랐다.
제 발목을 힐끗 본 해월은 피를 본 것은 아니니 안 다친 것으로 쳐도 되지 않을까, 하는 궤변 겸 변명을 생각하게 되었다.
생사를 오가는 상황인데 그런 생각부터 드는 것을 보면 제가 어지간히도 제정신이 아닌 듯싶다.
“하아….”
한숨을 내뱉으며 발걸음을 멈춘 해월은 그대로 뒤돌아섰다.
가급적이면 사술은 안 쓰려고 지금껏 고생했지만, 짐승 먹이가 되기는 싫으니 써야 할 것 같았다.
“내가 곱게 살 운명은 아니지.”
하는 수 없이 손가락을 입가에 갖다 댄 해월은 이를 세워 피를 내려 했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에 의해 소매가 당겨졌다.
팽팽한 대치 상황 속에서 해월은 흠칫하며 왼편을 바라보았다.
다시 나타난 무명이 입매를 늘리며 해월의 옷소매를 당기고 있었다.
“그냥 있어도 된다니까.”
“너…!”
한발 늦게 반응하려 했으나, 무명은 순식간에 다시 사라지고 호랑이는 순식간에 해월의 코앞으로 달려들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짧은 찰나, 몸이 바닥으로 기울었다.
큼직한 호랑이의 앞발에 어깨를 밟힌 해월은 그대로 짓눌렸다.
“악!"
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통증에 저절로 신음이 흘렀다. 묵중한 범의 무게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아무리 영력을 체화해서 힘을 극대화해도 범을 이길 만큼의 무력은 낼 수 없으니 그야말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하는 감상도 안 들 정도로 단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그렇게 거대한 짐승의 송곳니가 목에 꿰뚫으려던 순간, 범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정확히는 굳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이어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
호랑이가 앞발을 거두고 물러선 것이다.
상황을 파악하느라 멍해진 것도 잠시, 해월은 급히 몸을 일으켜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호랑이는 물론이고 다른 산짐승들까지 멀찍이 다른 길로 가기 시작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황당할 정도였다.
“하….”
흩어져 있던 조각들을 한데 모은 것처럼 무언가 깨달은 해월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그래 봤자 금수인데 산의 주인이랍시고 입맛도 까다롭네.”
짐승 주제에 미식을 할 줄이야. 이걸 감사해야 하는 걸까.
“왜, 불로의 저주에 걸린 인간은 맛도 없나 보지?”
사뭇 도발적인 발언임에도 금수들은 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흥미가 식은 듯이 굴었다.
조금 전까진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으면서, 참으로 변덕스러운 금수였다.
뭐 그래 봤자 인간만 할까.
‘영물이라 저주 걸린 인간은 안 먹는다는 건가….’
해월은 과거를 회상하며 눈을 감았다.
열여덟 살 때쯤, 무리해서 천신제를 올리고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해월은 자신의 기이함을 눈치챘다.
처음에는 제물로 잘랐던 머리카락만 자라지 않는 줄로만 알았다.
오히려 그만한 힘을 쓰고 머리칼만 안 자라는 거라면 제법 괜찮은 거래라고 생각했었다.
다만, 이따금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이 말도 안 되는 의심을 하게 했다.
몇 년이 더 지나자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키도 더 이상 자라지 않았던 것이다. 그전까지는 못해도 매해 반 뼘씩은 자랐었는데 뚝 끊긴 듯이 성장의 기미가 사라졌다. 해월은 꼭 박제된 것처럼, 열여덟 소년의 모습에서 멈춰 버렸다.
아니라고 외면하고 진실을 밀어내 봐도 감추어지지 않았다.
해월을 본 사람들은 전부 나이보다 어리게 보았으니까.
그래서 저를 어리게 보는 시선과 말들이 더욱 싫어졌다. 어리게 생겼다고 하는 말에 유독 불퉁하게 반응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아직까지는 결코 많은 나이는 아니었기에 그저 앳된 생김새로 치부할 수 있지만, 십 년쯤 지나면 늙지 않는 소년이 있다는 괴이한 소문이 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걱정은 기우였다.
해월은 어느 샌가부터 제 몸이 약해지고 있음을 알았다. 코피가 터지는 것은 예삿일이고 각혈을 하는 일도 더러 있었다.
멈추어 있으면서도 죽음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모순적인 저주.
‘불로가 되었는데 불사는 아니라니.’
완전히 제 상태를 깨달았을 때는 저를 물들여 버린 모순이 우습지도 않았다.
하지만 결코 쉽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해월은 그저 저를 덜 불행하게 할 선택을 하며 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고작 무리한 힘에 손을 댔다는 이유로 죽는다는 걸 어느 누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의 시작에는 저를 단곡으로 데려온 양부, 선학경이 있었다.
해서 아버지를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무래도 이생에 봄이 올 일은 없겠구나. 그렇다면 그저 살자.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자.
그런 다짐을 하고 다시 떠돌며 살다 보니 결국 이곳에 와 있었다.
“…….”
짐승은 때론 인간보다 영민하다. 지금 포식을 하는 것이 좋을지 나쁠지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너무하네, 사람 차별하고.”
해월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흙이 묻은 옷을 툭툭 털어냈다.
“…이젠 금수도 나를 무시하는군.”
무시당한 것이 고마운 건 또 처음인지라 기분이 복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