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너 손으로 영력 좀 모아 봐.”
“이렇게요?”
연진은 해월의 느닷없는 요구에도 순순히 반응했다.
해월은 냅다 그 손에 깍지를 껴 제 손을 겹쳤다. 그리고 천천히 연진의 영력을 제게로 끌어들였다.
아무런 설명 없이 이어진 행위인지라 연진은 멈칫했다. 해월은 생각보다 들어오는 영력의 양이 많지 않아 마뜩잖은 얼굴이 되었다.
연진은 맞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한데… 뭐 하는 겁니까.”
“영력이 조금 모자란 것 같아서 네 영력 좀 받아 쓰려고.”
여상한 대꾸에 연진은 할 말을 잃었다.
뒤이어 해월은 더욱 구김살 없는 제안을 해 왔다.
“손만 잡아서는 안 되겠다. 이리 와 봐.”
해월은 두 팔을 한가득 벌렸다. 연진이 멀뚱히 있자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쓰읍. 이리 와 봐 빨리.”
“……..”
“어쭈? 안 와?”
기다리다 못한 해월이 덥석 연진을 끌어안으려 했는데 연진이 몸을 뒤로 빼는 바람에 헛손질을 하게 되었다.
밤공기를 한 아름 끌어안은 해월은 불퉁한 얼굴로 연진을 쏘아보았다.
“너는 먼저 덥석덥석 껴안아 놓고 왜 피하냐?”
“그래도 때와 장소라는 게….”
연진은 그 말을 내뱉고 후회했다. 때와 장소를 안 가리고 해월을 끌어안은 건 저였으니까.
사실 해월이 먼저 포옹을 요구하는 것이 무척 드문 일이라 어색하기도 하고, 영력을 필요로 해서 하는 행위라는 것이 거슬려서 영 내키지 않았다.
그 망설임을 잘못 파악한 해월이 걱정 말라는 투로 얘기했다.
“괜찮아. 너한테 무리 안 갈 정도로만 받을게. 그리고 너 기 세서 별로 악영향은 없을걸?”
타고난 영력의 그릇은 쉬이 바뀌지 않는다. 수련을 한다 한들 한계가 있다. 강의 물을 불려 바다로 만들 수는 없는 것처럼.
연진은 그 타고난 그릇이 처음부터 바다와 같은 수준이었다. 그래서 지난번에 재수 없다고 얘기한 것이기도 했다.
“어? 저기!”
해월이 연진의 등 너머에 무언가를 보고 반응하자 연진은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돌아본 곳에는 칠흑만 가득할 뿐이었다.
“…….”
속았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잡았다.”
해월은 연진의 등 뒤로 깍지를 껴 완전히 포박했다. 그러곤 뻔뻔히 말했다.
“뭐 해. 영력 좀 둘러 봐.”
“…맡겨 놓으신 줄 알았습니다.”
“네 것이 내 것이고, 내 것이 네 것이지 뭐. 다 살려고 하는 짓인데 협조해 줘.”
연진은 더 이상의 군말 없이 전신에 영력을 둘렀다.
해월과 하는 포옹은 좋았지만 이런 목적 있는 행동은 원치 않았다. 다른 목적이라면 모르겠다만.
그래도 어찌 거부할 수 있을까. 이리도 따뜻하고 또 청량한데.
연진은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는 심정으로 해월을 마주 안았다. 맞닿은 몸으로 영력이 전달되었다.
이런 식으로 하는 게 맞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해월이 영력을 다루는 데 익숙하다 보니 제 힘이 저절로 빨려 나가는 것 같았다.
가슴팍에 해월의 동그란 머리가 기대어지고 부드러운 뺨이 닿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만 제외하면 썩 좋은 기분이었다.
연진은 자연스레 팔을 두르고 해월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해월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진을 쳐다보았다.
연진은 태연히 대꾸했다.
“많이 닿을수록 전달이 잘 되잖아요.”
“그건 그렇지….”
애초에 그래서 포옹을 한 것이기도 했지만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왠지 속은 기분이 들어 묘하게 괘씸하면서도 뒷머리를 매만지는 손길이 좋아서 그저 가만히 있게 되었다.
영력은 기본적으로 청량한 기운이건만, 어쩐지 따뜻하게 느껴졌다.
아, 이것은 추위 때문일 것이다.
추위 속에서는 온기가 더 잘 느껴지니까. 이건 해월이 겨울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래도 더 이상한 기분이 들기 전에 얼른 몸을 뗐다. 어느샌가 맞잡았던 손도 거두었다.
연진에게서 떨어지는 것이 아쉬운 이유는 영력 때문일 것이다. 힘이 차오르는 감각이 끊겨서, 그래서 아쉬운 거다.
해월은 괜히 허공에 떠 있는 발을 대롱거렸다.
그때, 나무 기둥을 짚고 있는 손 위로 커다란 손이 덮였다.
답지 않게 화들짝 놀란 해월은 연진 쪽을 보았다.
“…….”
“손이 많이 찹니다.”
“아…그래…….”
왜 또 아쉬운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요즘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저 건너편에 묻어 둔, 불안함의 잔재일까. 혹은 다른 무언가일까.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모르는 것이 득이 되는 순간이 많은 이유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해월은 변화가 싫었고, 두려웠다.
마음을 헤집으려는 것으로부터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문득, 생각했다.
제가 벗어나고자 하는 것의 근원에는 아마도 그가 있으리라고.
***
산의 주인 앞에서 그들은 한낱 침입자에 불과하다.
당연히 산군의 입장에서 침입자를 곱게 죽여 줄 이유는 없다.
물론 이쪽도 곱게 죽어 줄 생각은 없다.
어차피 이 길목만 무사히 지나갈 요량이니까.
적당한 수준에서 갈무리할 것이다.
해월은 무감한 얼굴을 한 채 어둠 속을 응시했다.
범인의 눈에는 그저 칠흑으로만 보이겠지만 푸른 영기가 일렁이는 해월의 눈에는 그 형상이 전부 보였다.
“후.”
짧게 심호흡을 한 해월은 나무 기둥에 걸터앉아 있던 자세를 일으켰다.
가볍게 손을 한 번 털어 내고 허공으로 팔을 뻗었다.
아무것도 없던 손안에서 영기가 뻗어 나가더니 이내 활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 곧이어 화살까지 생겨났다.
그 모든 것들은 영기로 이루어져 있어 실체감이 없으면서도 동시에 엄청난 위력을 자아냈다.
연진은 그런 해월의 모습을 선망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해월이 고개를 돌려 연진을 보았다.
“진아 너 활 쏴 본 적 있어?”
“없습니다만…?”
“이제부터 잘 보라고. 명색이 무인 가문의 도련님인데 활 정도는 쏠 줄 알아야지.”
누가 들으면 태평하게 훈련장에 있는 줄 알 것 같은 발언이었다. 연진은 다소 황당했으나 그러려니 했다.
해월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딱 세 개만 기억하면 돼.”
밤의 바람이 음산하게 흩날렸다.
“먼저 바람을 잘 가늠하고, 활을 잡은 손은 태산을 밀듯이, 시위를 잡은 손은 범의 꼬리를 당기듯이.”
극도로 열린 영안이 푸른 빛으로 번뜩였다.
“그리고 시위를 놓으면.”
그 말과 동시에 해월은 깍지 손을 풀었다.
활을 벗어난 화살이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휘익-
쏜 살이 날아가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산군이 그들이 앉아 있던 나무 바로 아래에 있던 탓이다.
“크와앙!”
고통 섞인 포효 소리가 깊은 산중을 울렸다. 옅은 피비린내가 밤공기 중에 섞여 나왔다.
아래쪽을 바라본 해월은 조금 곤란하다는 듯 뒷머리를 매만졌다.
뒤늦게 밑을 본 연진도 당혹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우리 산군께서 원군을 부르셨었네.”
이빨이 날카로운, 포식의 본능이 살아 있는 산짐승들이 나무 아래에 그득했다.
침까지 뚝뚝 흘리고 있는 것이 꽤나 굶주린 모양이다.
“아무래도 조금 큰일 난 것 같지…?”
“많이 큰일 난 것 같습니다만.”
연진이 표현을 정정해 주었다.
“꽤 오래 묵은 영물인가 봐. 수하가 많으시네. 더 됐으면 사람으로 둔갑도 했겠어.”
“지금 농이 나오십니까.”
그들이 발을 딛고 있는 나무 기둥과 땅 사이에는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거리가 벌려져 있었다.
“괜찮아 우리 산군이라면 몰라도 잔챙이 정도는 거뜬해.”
힐끗, 옆쪽을 바라본 해월은 곧바로 전했다.
“저쪽으로 분이가 가는 걸 봤어. 내 화살 때문에 잠시 동안 분이에 대한 권능을 잃었을 테니 지금이 기회야.”
해월이 쏜 화살은 어차피 호랑이에게 큰 피해를 주진 못한다. 그러나 잠시간 창귀에 대한 권능을 잃게 하는 것은 가능하다.
“내가 엄호할게. 넌 분이를 쫓아가.”
연진은 아래쪽을 보고 곧이어 해월을 보며 말했다.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해요.”
해월의 능력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걱정스러울 뿐이다.
반면 해월은 단호했다.
“위험하고 말고는 내가 판단해. 지금껏 이보다 위험한 일을 수백 번은 겪고도 안 죽었는데, 고작 산짐승들 따위에게 죽을 리가 없잖아.”
“…….”
“괜찮으니까 어서 가. 만일 분이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최대한 서둘러서 산에서 내려가도록 해.”
“하지만….”
걱정스러운 말이 이어지려던 찰나, 해월은 연진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너도 알잖아. 난 안 죽어.”
안심하라는 뜻이 담긴, 부드러운 언동이었다.
결국 연진은 지고야 말았다.
“……다치지 마세요.”
“그래, 안 다칠게.”
해월이 싱긋 웃고는 다시 아래쪽을 보았다.
“내가 셋을 외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내려서 달려.”
연진은 얼핏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월은 잠시 눈을 감고 집중하며 손끝으로 영력을 모았다.
방금 전의 활처럼, 영력으로 물체를 만들려면 적지 않은 힘이 들어가기에 저절로 긴장감이 맴돌았다.
“하나, 둘….”
짐승이 으르렁대는 소리가 가장 귀를 어지럽히던 순간,
“셋.”
해월의 신호와 함께 연진은 곧장 나무 기둥 끝으로 달려가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해월 역시 아래로 발을 뻗었다.
***
연진은 해월의 말을 따라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달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진 모르겠으나 해월 덕에 아직까지 연진을 쫓아오는 짐승들은 없었다.
‘어디에 있지.’
그는 해월처럼 항시 민감하게 기운을 감지할 수 없는지라, 달리다 멈추고 몇 번이나 정신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이럴 때면 짙은 무력감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분이의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다면 어서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연진은 문득 발에 무언가 채이는 것을 느끼고 멈칫했다.
“…….”
그의 발치에 걸린 것은 다름 아닌 해월의 신이었다.
축일에 해월이 아이에게 주었다고 했던 바로 그 신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주위를 물들였던 어둠이 더욱 음험하게 느껴졌다.
‘제발.’
무사하기를.
해월도, 분이의 아버지도.
더 이상 누군가 다치거나 아픈 것을 보는 것은 싫었다. 홀로 살아가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이 보아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켜보고, 남겨지는 이의 슬픔은 그만큼 짙은 것이었다.
차라리 아픈 것은 모두 저의 몫이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가슴이 쥐어뜯기는 듯한 무력감 따위 느끼지 않아도 될 테니까.
적막한 산속을 헤매며 연진은 귀기를 찾아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
어느 동굴 앞에서 연진의 걸음이 멈추었다.
같은 시각, 미간을 찌푸린 해월은 팔뚝의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힘을 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