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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95화 (95/124)
  • 95화

    그 아이가 처음 다가왔을 때부터, 해월은 알아챘다. 눈앞에 있는 아이가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며칠 전에 보았던 아이가 죽은 이가 되어 나타난 것에 대해 안타까움에 잠시 탄식해야 했다. 다만 그 침음은 길지 않았다.

    혹시 자신이 죽고도 죽은 줄 몰라 이승에 남은 귀신인가 하는 의문을 품었다.

    ‘길 잃어버렸니?’

    ‘아니요. 길 잃어버린 거 아니에요.’

    길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자신이 죽은 것에 대한 자각도 없는 건가. 그런 귀신이 이 야산에 모습을 드러낼 만한 이유는 많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가 자고 있는데 심심해서 돌아다니는 중이었어요.’

    아버지? 그러고 보니 이 아이의 아버지가 장사하는 데 따라나섰다고 했지.

    그렇다면, 아버지 쪽도 죽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단순히 산에서 발을 헛디뎌 죽은 것은 아닌 것 같고. 느껴지는 기운도 예사롭지 않았다.

    이 예감은 틀리길 바랐지만, 아무래도 창귀일 것이란 판단이 섰다.

    그 예상은 적중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찰나의 순간에 소녀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아마 저를 이끌고 호랑이의 제물로 바칠 생각이겠지.

    일단은 순순히 응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를 찾아줘야겠어.’

    이 과정에서 나름의 변수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연진 역시 아이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연진은 아이를 데려다주기 위해 일어서던 해월의 손을 붙잡고 눈을 맞춰 왔다.

    ‘…….’

    ‘…….’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건만 미세하게 흔들리는 연진의 두 눈동자는 온전히 그 의미를 전달했다.

    연진도 영력을 깨우친 인간이다. 그러니 소녀의 정체가 산 사람이 아니라는 건 어렴풋이 알았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제가 움직이려 하는 것도 눈치챘겠지.

    처음엔 연진을 떼어 놓고 가려 했는데 혹시 모르니 제 곁에 두는 것이 낫겠다 여겨졌다. 위험에 처한다고 한들 제가 지켜 주면 될 일이니까.

    오히려 혼자 두고 가는 게 더 위험할 것 같았다.

    아이를 등에 업었다. 소녀는 기이할 정도로 무게감이 없었다. 다만 귀신의 한기가 어깨를 짓눌렀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여상하게 산길을 걸으며 해월은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그중에서도 호랑이가 제일 자주 나오지. 게다가 호랑이는 영물이라서 사람을 죽여 그 사람을 자신의 귀신으로 부릴 수도 있단다.’

    그저 떠보는 말이었는데, 등위로 선명한 동요가 느껴졌다.

    자신이 창귀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자각은 있다는 뜻이다.

    이 아이는 아마 그들을 호랑이 소굴로 안내하려 했을 것이다. 장단은 맞춰 주겠다만 그렇다고 죽어 줄 생각은 없었다.

    이 산에서 사라지는 건, 그들의 목숨이 아니라 아이가 되어야만 했다.

    “어차피 넌 죽었는데 그깟 신이 무슨 상관이겠니.”

    “…….”

    해월의 말에 분이의 두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해월은 차분한 태도로 일관했다.

    “산군이 네게 무엇을 명했을지 알아. 하지만 나도 그렇고, 쟤도 그렇고 아직 젊은데 죽긴 싫거든.”

    “하, 하오나….”

    “알아. 죽은 네가 가장 억울하겠지.”

    이른 나이에 죽었는데 이승에 얽매여 편히 쉬지도 못하는 가련한 삶. 더 이상 혀를 차기에도 지쳤다. 이런 삶들이 천지에 널렸다는 걸 굳이 이렇게 실감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맞닥뜨린 것을 물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조속히 해결하고 이 산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니 네가 겪은 일을 소상히 말해.”

    “…….”

    분이는 두 손을 꼭 말아 쥔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해월은 몸을 일으켜 세우고 분이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이윽고 낮은 음성이 떨어졌다.

    “널 죽인 산군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면 어서 말해 줘. 죽은 네 아버지가 어딨는지 고한다면 더 좋고.”

    해월은 여차하면 두 사람 다 제령할 생각인 것이다.

    그런데 해월의 말에 분이는 욱한 듯이 반응했다.

    “아, 아직 안 죽었어요!”

    반박하는 아이의 말에 해월은 단호하게 답했다.

    “아니, 넌 이미 죽었어. 내가 널 만질 수 있던 건 내가 퇴마사여서 그런 거야.”

    일반적인 귀신은 인간에게 큰 해악을 끼치지 못한다. 어깨에 내려앉아 한기를 느끼게 하거나, 악몽을 꾸게 하는 수준이 한계였다.

    그러나 분이는 산군의 귀신인 창귀다. 그러니 접촉이 가능했던 것이고 해월이 소녀를 만질 수 있었던 것이다.

    “…….”

    냉담한 해월의 말에 연진은 당혹스러웠다.

    분이가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 창귀일 줄은 몰랐으며, 해월이 저리 아이를 밀어붙일 줄도 몰랐던 탓이다.

    “…사부, 일단 천천히 아이의 얘기를 들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해월은 잠시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얘기해 봐.”

    마지못해서 하는 말이라는 기색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럼에도 분이는 반색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아버지는 아직 안 죽었어요. 나랑 같이 있었는데 나만 죽고 아버지는 살아 있어요.”

    분이와 아버지는 장사를 마치고 산을 지나고 있었다. 분이는 곱게 생긴 오라버니가 고운 신을 주었다며 아버지에게 자랑했다. 아버지는 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장사가 잘되지 않아 아이에게 신 하나 사 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그런 부녀의 앞에 위협적인 짐승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산중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먼저 창귀가 된 저에게 산군은 다른 자를 데려오면 아비를 살려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산속을 떠돌던 차에 해월과 연진을 만났다.

    “그러니 저는 우리 아버지를 살려야 해요.”

    자초지종을 들은 해월은 즉시 판단을 내렸다.

    “너 말고 다른 창귀는 없었어?”

    “다른 이는 없었어요.”

    “허면 네가 굴각(屈閣, 첫 번째 창귀)이로구나.”

    호랑이가 다룰 수 있는 귀신은 셋뿐이다.

    셋 중 첫 번째는 분이였고 만일 저와 연진을 포함한다면 딱 셋이 된다. 하지만 이대로 산군의 제물이 되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때, 분이가 외마디 소리를 냈다.

    “어…!”

    분이의 몸이 발밑부터 서서히 투명해지더니 이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기이한 광경에 연진은 짐짓 놀란 눈이 되었다.

    해월은 침착하게 반응했다.

    “갔네.”

    “갔다면… 천도한 겁니까?”

    “아니. 산군이 그 애를 소환한 거야.”

    창귀를 소환했다는 건, 산군이 그들의 위치를 파악했다는 뜻이 된다.

    “이거 보통 묵은 호랑이가 아닌 모양인데?”

    ***

    해월은 호랑이를 잡고 가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연진도 쉬이 동의했다.

    분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아이의 부친은 아직 살아 있을지 모른다.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에 걸리는 지점도 있었다. 일전에 송 행수가 이 일대가 심상치 않다고 해서 살폈을 때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는데, 돌이켜 보니 산군의 짓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월과 연진은 발을 움직였다.

    불입호혈부득호자(不入虎穴不得虎子)

    본래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호랑이 새끼를 잡을 수 없는 법이다. 물론 그들이 잡으려는 것은 호랑이 새끼가 아닌 호랑이 자체이지만.

    연진은 해월과 함께 나무 위에 올라와 있는 상태였다. 산속에서 산군을 직접적으로 상대하기엔 벅차다는 해월의 의견 때문이었다.

    발밑도, 머리 위도 온통 깜깜한 밤이었다.

    “아까… 그래도 아이인데 너무 매정하게 말한 것은 아닙니까.”

    대충 들어보니 해월이 축일 날 버선발이 되었을 때, 그 원인이 된 아이가 분이인 것 같던데. 그런 것치고 해월이 그 아이를 지나치게 냉정히 대한 것 같아 조금 신경 쓰였다.

    해월은 무심한 어투로 답했다.

    “창귀한테 다정해서 어디다 쓰게. 그리하는 편이 그 애에게도 나았을 거야."

    귀신에게까지 친절을 베풀 만큼, 해월은 좋은 이가 아니었다. 특히나 창귀처럼 위험한 족속들은 더욱 봐줄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아이는 정신이 흐린 상태다. 조금 전 분이를 마주쳤을 때, 완벽한 창귀에 가까운 언동을 했다. 조금 밀어붙이자 판이한 태도를 보였고, 말도 어수선하게 했다. 그것은 비단 아이가 어려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억과 기분이 오락가락하여 정상적인 언동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심지가 곧지 않은 아이가 창귀가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귀신이란 건 보통의 미련으로 되는 게 아니거든. 작은 미련 하나로 죄다 귀신이 되면 이승은 온통 엉망일 거야.”

    연진처럼 제도 근처에 사는 사람이 귀신이나 요괴를 접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보통 제도 근처의 사람들은 썩 나쁘지 않은 삶을 살다 가니까. 간혹 예외가 있어도 신궁의 정화나 본래 땅의 좋은 기운 덕에 금세 사라질 것이다.

    아주 가끔씩 잔재가 남겠지만 그 역시 해악을 끼치기에는 미미한 수준이다.

    “귀신이 되려면 깊은 한이 있어야 하고, 요괴가 되려면 그 한이 깃들만한 형체가 있어야 하지.”

    “요괴가 되면… 일전의 그것처럼 되겠군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드물지만 지성이 있는 요괴도 존재해. 나름대로 사람 같은 놈들도 있고.”

    인간과 짐승의 영혼이 섞여 들고 무언가에 깃들어 육신을 얻으면 요괴가 된다. 이것이 대부분의 경우다.

    인간의 영혼만으로 요괴가 되는 경우, 인간성을 유지하려 발버둥 치는 경우가 흔하다. 그래 보았자 막을 수 없겠지만.

    연 씨처럼 제 육신으로 요괴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니 해월이 석연치 않아 하는 것이다. 부활하는 게 아니고서야 한 번 떠난 육신에 원주인이 다시 돌아갈 수는 없을 테니까.

    해월의 시름이 깊어지려 할 때, 연진은 다른 질문을 입에 올렸다.

    “한데 호랑이는 짐승인데 사람의 말이 통할까요.”

    “분이는 창귀라서 호랑이의 말을 알아듣겠지만 우린 사람이니 못 알아들어.”

    그러니 교섭도 불가하다. 애초에 호랑이를 대상으로 협상을 하는 것도 웃겼지만.

    어쨌거나 산의 왕은 호랑이고, 그들은 왕의 영역을 침범한 한낱 인간일 뿐이다.

    “걱정하지 마. 여기서 호랑이 밥이 될 생각은 없으니까.”

    “저도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어둑한 밤. 둘뿐인 것처럼 고요한 주위.

    두려움에 질식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데 조금도 걱정스럽지 않았다. 그게 기이해서 오히려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다만 티끌만큼의 심려가 있다면, 영력의 고갈이었다.

    호랑이를 상대로 육탄전에을 나섰다간 곧바로 먹이가 될 게 뻔하니 최대한 거리를 벌려야 했다. 그와 동시에 사냥까지 해야 한다.

    이럴 땐 영력으로 무기를 만드는 것이 적격이었고, 활이 가장 나은 무기가 될 터였다.

    그런데 활과 화살을 만들어 내기에 영력이 충분히 모이지 않았다.

    사술을 쓰는 건 가급적 지양하려 했기에 다른 방법은 없는데….

    잠시 고민에 빠진 해월은 연진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

    좋은 생각이 났다. 해월의 입매가 언뜻 사악하게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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