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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94화 (94/124)
  • 94화

    해월은 제 무릎을 베고 눈을 감고 있는 연진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실감이 잘 안 나곤 했지만 이렇게 가만히 보고 있자니 청수 같은 미가 있는 얼굴이었다.

    사내답게 굵직한 선이 단정하고 차분한 인상을 자아냈다. 얼핏 냉랭해 보이기도 하지만, 연진의 다정한 면을 알고 있는 해월은 그가 마냥 따뜻하게 보였다.

    좋은 면을 알아서, 모든 것이 좋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콩깍지가 씌인 것은 아니었다. 연진은 누가 보아도 미남자였으니까.

    하련방에서 지낼 때도 연진이 지나갈 때면 모든 기녀들이 전부 그를 쳐다보았을 정도이다.

    기녀들은 평소 신분과 재물을 제외하면 하등 볼 것도 없는 사내들만 보며 살았을 터. 연진과 같은 사내는 간만에 보았을 것이다. 시선이 집중되는 것도 이해하는 바였다.

    하지만 그럴 때면 조금 기분이 안 좋았었다.

    연진은 어리고 젊은 사내고, 기녀들 중에서도 그의 또래는 많았다. 그럴 리는 없지만 혹 눈이라도 맞으면…, 상상하기도 싫었다.

    왜 싫냐고 묻는다면, 서운하기 때문이다.

    서운함의 이유까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연진이 다른 누군가와 연을 맺는 것이 섭섭하게 느껴졌다.

    사실 연진이 혼인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을 때, 해월은 속으로 반겼다.

    혼인도 안 하고, 이렇다 할 가족도 없이 살아간다는 건 서글픈 일이건만 어째서인지 그 말이 달갑게 느껴졌다.

    해월은 시선으로만 어루만지던 연진의 뺨 위에 손을 얹었다.

    혹여나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손안에 닿는 뺨의 감촉은 부드러웠다.

    연진은 제가 지켜 줄 것이다. 언젠가 때가 되어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

    어떤 곳에서, 어떤 식으로, 어떻게 죽게 될지 해월은 모른다. 앞일이란 것은 예측할 수 있을 뿐 단언하기 어려우니까.

    해월은 그 순간이 지금 같기를 바랬다.

    이렇게 연진과 함께, 그의 온기를 느끼며, 조용한 곳에서 단둘이.

    연진에게는 잔인한 일이 되겠지만 그리될 수만 있다면 퍽 나쁘지 않은 인생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인생의 시작과 그 과정이 험난했을지언정 끝만 잘 맺는다면, 좋은 인생이었다고 덧씌울 수도 있지 않을까.

    ‘역시 조금은 후회되네.’

    그 일이 없었더라면 제 명이 짧아질 일도 없었을 텐데.

    물론 너를 만날 일도 없었겠지만.

    ‘그래도….’

    만일 우리가 필연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만났을 것이다.

    필연의 실은 강한 힘을 지니기에.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만났을 인연일지도 모른다.

    몸과 마음을 다해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마주칠 수 있는 그런 인연.

    하나, 작금의 우리는 많은 노력 끝에 닿은 인연이다.

    “내가….”

    숨결이 짙어 흐린 목소리였다. 하지만 마음만큼은 확실했다.

    “평생 귀애(貴愛)해 줄게.”

    그러니 너는 날 경애(敬愛)해 주기를 바란다. 따뜻한 감정 속에 묻혀 현실을 망각하기 위해, 부디 그리해다오.

    해월은 천천히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까만 밤하늘에 점점이 박혀 있는 별빛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공연히 마음이 술렁였다.

    해월의 시선이 하늘에 머무는 사이, 연진은 슬며시 눈을 뜨고 해월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

    얼결에 자는 척을 했던 것인데 뜻밖의 소리를 듣는 바람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물론 싫다는 것은 아니었다.

    평생 귀애해 준다니. 그런 말은 눈을 뜨고 있을 때 해 주면 좋으련만.

    귀애는 제가 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이었다.

    ‘…저 또한 귀하게 여겨 특별히 사랑할 겁니다.’

    입안에 고인 그 말은 그대로 입안에서 녹아 사라졌다.

    마음을 침묵했던, 고요한 밤이었다.

    ***

    뜬눈으로 지내는 밤은 유달리 길었다.

    해월은 어두운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 어둠 안에 있으면 꼭 혼자 있는 것 같아서, 그게 사무치게 외로워서.

    하지만 지금은 연진이 있다. 곁에 누군가 있는 것만으로도 이 밤을 지새우기에 충분했다.

    휘이이-

    가을 밤바람의 소리가 기이하게 들려왔다.

    부스럭, 풀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신경을 곤두세운 해월은 시선을 돌리며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위험을 감지하려 했다.

    “…….”

    부스럭.

    부스럭.

    부스럭.

    점점 더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뜬 해월의 눈가에 푸른 영기가 일렁였다.

    극도로 각성한 영안은 시야에 드리워진 어둠을 걷어 냈다.

    조금 거리가 있는 풀숲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해월은 연진의 귓가에 손을 갖다 댔다. 손바닥에 펼쳐진 영력은 잠시 동안 그가 소리를 들을 수 없게 할 것이다.

    “누구냐.”

    낮게 깔린 해월의 목소리가 산중에 울렸다.

    풀이 밟히는 소리가 더 커지더니 이윽고 인영이 드러났다. 이윽고 해월의 앞에 보인 사람은 체구가 작은 여자아이였다.

    “…….”

    팽팽했던 경계가 맥없이 풀어졌다.

    소녀는 끔뻑끔뻑 눈을 깜박이며 해월을 쳐다보고 있었다.

    할 말을 잃어버린 해월은 뒤늦게 반응했다.

    “꼬마야 이런 산중에는 왜….”

    해월은 말을 하려다 멈칫했다. 눈앞의 소녀가 묘하게 익숙했기 때문이다.

    “너는 그때 그….”

    뒷말이 아직 이어지기 전이건만,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월이 신을 내어줬던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아이는 다시 신이 없는 상태였다.

    그 사이에 팔아 버린 건가. 물론 그러라고 하긴 했다만 제값은 받아 냈을지 염려됐다.

    지금은 그것보다 우선 저 아이가 왜 이런 산에 있는 건지가 의문이다.

    ‘대충 알 것도 같다만.’

    미소를 입가에 올린 해월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길 잃어버렸니?”

    “아니요. 길 잃어버린 거 아니에요.”

    “그럼 왜 여기 있어?”

    “우리 아버지가 자고 있는데 심심해서 돌아다니는 중이었어요.”

    “그랬구나. 아버지께서 너 잃어버린 줄 알고 걱정하시겠다. 돌아갈 수는 있고?”

    “음… 그건 모르겠어요. 근데 아버지한테 얼른 가야 돼요.”

    아이는 어리숙한 말만을 늘어놓았다.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린 해월은 아이를 데려다주어야겠단 생각에 일어나려다 제 무릎에 누워 있는 연진에게 시선이 고정됐다.

    그 시선을 따라간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월이 무심코 연진에게서 손을 뗀 사이, 아이가 재잘거렸다.

    “그 오라버니는 누구예요? 엄청 잘생겼다!”

    “…….”

    명랑한 아이의 목소리에 맞춰 연진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중간에 해월이 귀를 막기까지 해서 상황 파악이 전혀 되지 않았다.

    “쉿. 애 깨겠다.”

    해월이 뒤늦게 아이에게 주의를 줬다.

    “저 오라버니 이미 깼는데요?”

    밑을 보자 연진이 두 눈을 깜빡이는 것이 보였다.

    “좋은 아침… 은 아니네.”

    “좋은 밤이죠.”

    연진은 해월의 표현을 정정해 주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아이 쪽을 눈짓하며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아이 아버지가 이 근처에 계신 모양인데 혼자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었나 봐.”

    해월의 대답에 연진의 눈이 미묘하게 가늘어졌다.

    “아버지를 찾아줘야겠어.”

    자리에서 일어나던 해월의 손을 연진이 붙잡았다.

    잠시간 말없이 눈을 맞추었다.

    연진이 보내는 눈빛의 저의를 알아챈 해월은 싱긋 웃고는 입을 열었다.

    “나 혼자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직 밤이 깊고 산세가 험해서 위험합니다. 같이 가요.”

    “흠… 그래, 그러자.”

    해월은 어렵지 않게 승낙했다. 그리고 능숙하게 아이를 업었다.

    “제가 업겠습니다.”

    “괜찮아. 내가 업는 게 나아.”

    “하나….”

    연진이 설득하려던 차에 아이는 해월에게 업힌 게 좋은 듯 방실거리며 말했다.

    “저기 저쪽에 우리 아버지 있을 거예요.”

    “어디? 저기?”

    “저기 맞아요.”

    해월은 아이에게 잘 맞춰 대화해 주었다.

    연진은 그 옆에서 묵묵히 횃불을 들고 이동했다.

    아이에게 아버지가 있는 곳을 안내받으며 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도록 해월이 운을 뗐다.

    “그거 알아? 산에는 무서운 짐승들이 많이 살고 있어.”

    차분한 목소리가 세 사람의 공백을 메웠다.

    이따금 풀벌레 우는 소리가 끼어들 뿐, 어둑한 산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중에서도 호랑이가 제일 자주 나오지. 게다가 호랑이는 영물이라서 사람을 죽여 그 사람을 자신의 귀신으로 부릴 수도 있단다.”

    “…….”

    해월의 목에 감겨 있는 소녀의 팔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그 힘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해월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게 호랑이의 귀신이 된 사람을 창귀라고 불러. 예전에 산에서 종종 창귀를 마주친 적 있는데 엄청 무서웠거든.”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건 해월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면 되니?”

    “…저 방향이요.”

    “…….”

    길을 가던 중간중간 멈춰서 아이에게 안내를 받고 또 걷길 반복했다.

    해월은 아이를 업고도 지친 기색 없이 발을 움직였다.

    호흡에 여유도 있는지 아이에게 곧잘 말도 붙였다.

    “그러고 보니 아직 네 이름을 안 물어봤네. 넌 이름이 뭐야?”

    “저는… 분이에요. 분이. 오라버니는요?”

    “내 이름은 선해월이야. 참고로 쟤는 강연진이고.”

    해월은 제 소개와 함께 연진의 소개까지 대신했다.

    “근데 분이야.”

    문득, 그가 걸음을 멈추자 말없이 걷던 연진도 덩달아 발걸음을 멈추었다.

    다음 말을 이어 가기까지의 짧은 공백이 유달리 길게 느껴졌다.

    “나도, 쟤도… 그리고 분이 너도 영 팔자가 다복하지는 않나 봐.”

    “예…?”

    “뭐 앞으로 벽촌 방향으로 갈 거라 험한 꼴을 많이 볼 거란 생각은 했는데… 이런 예감은 꼭 틀리지도 않네.”

    상황에 맞지 않는 갑작스러운 말들이었다.

    그러나 분이도, 연진도 누구 하나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리에 있는 모두의 얼굴은 기이할 정도로 표정이 없었다.

    어색하다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굳은 분위기 속에서 해월이 다시 입을 열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

    “…….”

    분이는 답도 하지 않았건만, 해월은 싸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내가 네게 줬던 신은 어떻게 했어?”

    “…그건….”

    분이는 우물쭈물하며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괜찮아. 대답 안 해도 돼.”

    너그러운 말과 함께 해월은 분이를 내려놓고 아이와 눈을 맞춰 주었다.

    그리고 차갑게 말했다.

    “어차피 넌 죽었는데 그깟 신이 무슨 상관이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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