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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92화 (92/124)

92화

선학경은 언제나 마을 사람들에게 헌신했다. 가족처럼 살갑게 굴지는 않았지만 대신 도움을 주는, 모순적인 자였다.

‘너는 어찌하고 싶으냐.’

‘저는….’

선인이 되고 싶다는 욕망과 필요 없는 행위라 판단하는 이성이 맞부딪쳤다.

‘우선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봐야죠.’

노인과 아이만 넘쳐나는 이 마을에 제대로 된 인력은 거의 없으니까. 이대로라면 마을 사람들 중 대부분은 분명히 죽을 것이다.

‘진심으로 그리 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예, 진심입니다.’

사실은 헷갈렸다. 뭐가 진심인지.

내가 바라는 것은 당신의 인정일까 아니면 타인의 인정일까.

항상 냉혹하기 짝이 없는 양부이지만 예외가 있다면 해월이 ‘선량한 행동’을 했을 때였다.

그때만큼은 선학경이 “잘했다.”라고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하아… 나도 이제는 모르겠구나.’

‘…….’

그 순간, 해월은 난생처음으로 시름에 빠진 얼굴을 한 선학경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해월은 의문을 품었다.

당신이 어째서 그런 얼굴을 할 수 있는 거지?

어쩌면 그건 의문이 아닌 분노였을 지도 모른다.

후에 천신제를 올리겠다고 마음먹은 건 그런 이유가 컸다.

제게 엄혹하게 굴었던 선학경의 나약한 모습이 보기 싫어서.

당신은 늘 냉정하고 엄해야 한다. 철을 깎아 만든 것처럼 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에게 버림받고 싶지 않아서 불안해했던 모든 과거가 희석되어 버리니까.

그래서 무리하게 땅을 정화하는 천신제를 올렸다.

‘천신에게 제를 올려 음기를 없애는 의식’이었지만 사실은 ‘술자의 영력을 극도로 끌어올려 행하는 정화 의식’에 가까웠다.

이 의식에는 술자의 신체 일부를 잘라 바쳐야 했다. 강한 힘에는 그만한 대가를 치르는 법이다.

해월은 망설임 없이 머리칼을 잘라 타오르는 불꽃에 던져 넣었다. 짧게 잘린 머리칼 따위 아쉬운 것도 아니었다.

적요한 두 눈에 비친 붉은 빛의 일렁임.

그 불꽃이 잘린 머리칼을 삼키는 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렇게 해월은 천신제를 마쳤다. 황폐화된 땅은 다시금 비옥해졌고 굶주리는 이들은 사라졌다. 그저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나, 보다 먼 곳을 내다볼 줄 아는 혜안이 있었더라면 조금은 달랐을까.

그날, 그때, 그 야산에 있지 않았다면.

선학경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죽음으로서 편해졌을까.

그 어떤 물음도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

모든 것에 무감각했다.

저는 그저 안정적인 삶을 원했을 뿐이다.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절히 이타적인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특별히 좋은 일도, 이렇다 할 나쁜 일도 겪지 않고 오래도록 잘 살 수 있기를 바랬다.

그리 무리한 소원도 아닌 것 같은데. 남들은 쉽게 얻는 것 같은 안정을 어째서 나만 얻지 못하는 걸까.

대상을 수없이 바꿔가며 원망해 보아도 결국 해월은 그 자신을 원망하게 되었다.

‘그냥 내가 이렇게 태어난 탓이야.’

다른 삶을 살고 싶다면 새로이 태어나는 게 더 빠를 것 같다.

어차피 이제 그럴 날이 머지않았다.

정신이 몽롱했다. 그 흐릿한 의식 속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울렸다.

‘정말 그걸로 괜찮겠어?’

괜찮겠냐고? 안 괜찮을 건 뭔데?

그저 받아들이면 그만인 일을.

“…….”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생각하다가 문득 눈앞이 환해졌다.

슬며시 눈을 뜬 해월은 코앞에 있는 연진의 너른 품을 보고 슬쩍 고개를 올렸다.

연진은 그를 꼭 품에 안은 채로 잠이 들어 있었다.

살짝 몸을 틀어보려 했는데 감싸고 있는 팔과 몸에 말려 있는 이불이 너무 견고해서 도무지 풀어지지 않았다.

사락. 옷자락이 이불에 스치는 소리가 났다.

옷은 또 언제 구해서 입혀 놓은 건가. 해월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잠결에 춥다는 말을 반복했던 것 같은데 그 때문에 이리 이불에 돌돌 말린 채로 안겨져 있는 모양이다.

해월은 조심스레 손을 빼서 잠든 연진의 코를 톡톡 건드렸다.

고놈 콧날 한번 시원하게 뻗어 있구나 싶었다.

몇 번을 그렇게 건드리자 그게 거슬렸는지 연진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해월은 피식 웃었다. 연진이 말없이 눈을 끔뻑거리고만 있어서였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자는 사람 건드렸는데.”

“…그냥요.”

‘그냥’이라는 가벼운 말에 담긴 무거운 무게가 느껴졌다.

너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그냥’ 감내할 수 있는 거구나. 가만 보면 무심해 보이는 말이지만, 해월은 그 말에 담긴 깊은 다정함을 알았다.

무언가 재고 따지지 않고 그저 할 수 있는, 그런 선량한 마음씨.

그게 너무 고와서 가슴속 한구석이 저릿했다.

“…일어났으면 이것부터 풀어 봐. 이제 더워 죽겠다.”

이마에 열감도 없고 한기도 안 느껴졌다. 이만하면 회복한 듯싶었다.

연진은 못마땅한 기색이 짙었지만 이내 팔을 풀어 주었다.

이불을 걷고 일어나 기지개를 한 번 킨 해월은 가볍게 목을 돌렸다. 몸도 가볍고 결린 곳도 없었다.

“내가 불편할까 봐 여기로 온 거구나.”

“…예.”

연진은 요괴를 해치운 해월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을 기억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지켜준 해월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기보다 두려움을 먼저 느꼈다.

해월은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솔직히 누가 봐도 두려워할 만한 모습이었다. 그 자리에서 기절한 사람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그래도 그곳 사람들과 나름 친밀하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씁쓸한 것은 사실이다. 결국에 자신은 이방인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말았으니.

“눈은 좀 어떠십니까.”

“이제 괜찮아.”

“정말요?”

“못 믿겠으면 확인해보든지.”

해월은 연진의 코앞에서 부러 눈을 치켜떴다.

훅 다가온 얼굴과 부드러운 숨결에 연진이 흠칫한 사이 해월은 도로 자세를 뒤로했다.

“괜찮지?”

“…그러네요.”

그래도 걱정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해월의 눈에서 피가 흘렀을 때 연진은 그가 눈을 잃은 줄로만 알았다. 그 정도로 많은 양의 피가 나왔었다.

그런 눈으로 사람들을 응시하던 해월의 모습이 아직까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연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해월이 지금껏 겪어 왔을 일들이 짐작되어서, 그것이 안타까워서.

아픔과 고통에 무딘 사람.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견뎌왔을까.

열이 그렇게 오르는 데도 해월은 간혹 어지럽다거나 춥다는 말을 할 뿐 ‘아프다’라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부적을 쓰느라 상처를 낸 손은 피만 멎은 수준이지 여전히 아파 보였다.

연진은 해월이 자는 사이에 그 손에 입술을 묻고 한참을 있었다. 부디 이 사람의 열병이 악몽으로 이어지지 않길 바라며. 혹여 그런 꿈을 꾸더라도 금방 깨어나 안정을 찾기를 기원했다.

***

해월과 연진은 하련방으로 돌아왔다. 연진은 저만 가서 짐을 챙겨 오겠다고 했지만, 해월은 이를 거절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피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리고 하련방에 남아 있을 음기도 정화해야 했다.

다시 하련방에 돌아온 그들을 쳐다보는 시선은 떨떠름하기만 했다. 해월이 자신들에게 이로운 일을 했다는 것을 알지만, 그 충격적인 광경을 되새김질하고 있는 거다.

해월은 그런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저런 반응이 당연하니까.

해서, 묵묵히 새로 부적을 붙여 주고 짐을 챙겼다.

“송 행수에게 인사는 안 합니까.”

“뭐 보고 싶은 얼굴이라고 인사를 하냐. 어차피 송 행수가 부탁한 건 해결한 셈이니 괜찮아.”

“하오나….”

“여기서 끝내는 게 나아.”

그녀와의 연은 여기서 마치는 것이 맞았다.

그렇게 대문의 문턱을 넘으려던 그때.

“선해월!”

“…송 행수?”

저를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자 이전과 다른, 단정한 차림새의 송 행수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 생소한 모습에 놀란 것도 잠시. 어깨를 들썩이며 씩씩거리던 송 행수는 냅다 해월의 발을 밟았다.

“아야. 갑자기 왜 이래?”

느닷없이 발등이 밟힌 해월이 볼멘소리를 했다.

“엄살 부리지 마. 세게 밟지도 않았으니까.”

“분명 세게 밟았는데….”

발이 밟힌 건 저인데 왜 꾸중까지 듣는 기분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그 사달을 내 놓고 이렇게 가 버리면 어떡해.”

“뭐… 이젠 끝났으니까.”

은명이 죽음에 대한 오해나 여러 소문. 그런 것들은 부차적 문제였다. 해월은 그 부분은 자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평정을 되찾은 송 행수라면 충분히 그녀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 테니.

“너 나한테 말도 안 하고 갈 작정이었니?”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고.”

“하, 참.”

다른 사람을 많이 꾸짖어 본 적 있어서 그런지 그녀의 태도는 자연스러웠다. 그 때문에 해월은 물론 연진까지 덩달아 그녀에게 혼나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여길 떠나면 어딜 갈 건데.”

“…고향으로 가야지.”

해월의 대답이 돌아오자 송 행수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언성을 높였다.

“넌 거기에 금은보화라도 숨겨 놨니? 거길 왜 또 가, 가기를! 능력 없는 나도 도망쳤는데 넌 왜 아직도 얽매여 있는 건데!”

“그… 아버지랑 약조했으니까…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고.”

송 행수는 기가 차서 헛숨을 내뱉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됐어. 누가 널 탓하겠니.”

그러다 고개를 치켜들고 연진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혹여 쓸데없는 곡해는 하지 마세요. 저도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니까.”

“……?”

상황의 맥락에 전혀 안 맞는 말인지라 연진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송 행수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곧이어 알 수 있었다.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해월을 껴안았다.

“……!”

갑작스러운 송 행수와의 포옹에 해월은 흠칫 놀라며 그대로 굳어 버렸다.

당황스러워 굳은 것은 연진도 마찬가지였다.

태연한 것은 먼저 껴안은 송 행수뿐이었다.

“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입 다물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그리고 그녀는 평생 꺼낼 수 없을 것 같았던 말을 입에 올렸다.

“이제 그만……널 용서해도 돼. 선해월.”

“…….”

그녀를 밀어내려던 해월의 손이 축 내려갔다.

송 행수는 한마디 한마디를 꾹꾹 누르듯이 말을 이어 갔다.

“…어린 날의 난 내 원망을 모두 아버지에게만 쏟고 있었어. 그 원망의 그릇을 네가 깨 버려서… 내 원망은 본래 갈 길을 잃고 애꿎은 너에게 가 버렸던 거야.”

그릇된 원망이었다.

해월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것을, 사실은 제 잘못이 더 컸던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해월의 부채감을 이용했다. 제 마음 하나 편해지고자 부러 가볍게 행동했다.

“변명이란 것 알아… 하지만 말 안 하면 네가 모를까 봐.”

“…이미 알고 있었어.”

해월의 말에 송 행수는 사뭇 놀란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해월을 놓아주었다.

반면 해월은 차분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했다.

“누구든 쉽게 날 원망하니까, 너 하나 더 보탠다고 달라질 것도 없어. 그러니 그저 두었던 거야. 너야말로 더 이상은 스스로를 책망하지 마.”

해월이라고 그녀의 원망을 모르지 않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해월이 그녀의 아버지를 죽인 것은 사실이었으니. 그 원망을 부정할 길도 없었다.

미안함. 그건 어쩌면 서로가 일찍부터 느꼈던 감정이다.

늦었지만 묵은 감정을 마주할 때가 되었다.

“미안하게 됐어.”

“…대체 네가 왜, 사과를 해….”

송 행수는 고개를 떨군 채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해월도 지금껏 보지 못했던 그녀의 약한 면모였다.

하지만 섣불리 위로를 건네진 않았다.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테니. 이쯤에서 끝내는 게 옳았다.

마지막으로 의(義)를 나누는 친우의 고별이었다.

“건강히 지내. 되도록이면 장수해서 행수 노릇 오래 해 먹고.”

“…그리 말 안 해도 난 너보다 장수할 거야. 이 바보천치 같은 놈아.”

송 행수는 눈시울을 붉힌 채 헛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해월은 안심했다.

이것으로 송 행수와의 연은 끝났다. 지독했지만, 나쁘지 않은 인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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